보통 20세기 중반, ‘잊힌 철학자’라고 하면 베르그손(1859~1941)을 꼽는다. 들뢰즈에 의해 새롭게 조명되기 전까지 베르그손은 유럽에서 거의 논의되지 못했다. 베르그손의 낙관적 철학관이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그 효용성을 잃었다고 간주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20세기 후반 ~ 21세기 초반에 출간된 철학사 책들은 대부분 베르그손을 중요 철학자로 다루고 있다. 물론 미국 학자들이 출간한 철학사 책 일부에는 베르그손이 빠져 있지만, 유럽 철학자들이 쓴 철학사에는 거의가 베르그손을 포함하고 있다.

 

더군다나, 들뢰즈로 인해 베르그손의 철학은 다시금 힘을 얻고 있다. 문화를 다루는 영역에서 베르그손에 대한 연구는 꽤 꾸준히 진행되고 있는 듯하다. 현재 베르그손은 더 이상 잊혀진 철학자가 아니다. 이건 확실하다. 베르그손의 주저들이 속속 번역되고 있고, 알라딘 마을에서도 베르그손의 주저를 읽은 분들이 꽤 되니까.

 

 

그럼 현재, 한국 지식계에서 (최고의 철학자로 회자되다가) 완벽히 ‘잊힌 철학자’는 누가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조지 산타야나(1863~1952) 이외에는 생각나는 철학자가 없다. 스페인을 제외하고 유럽 철학자들에게도 산타야나는 거의 무시된 존재였다.

 

 

 

 

20세기 후반기 이후, 유럽에서 출간된 <서양철학사>책들 중 산타야나를 다룬 철학사 책은 거의 없다. 우리나라에 번역된 지명도 높은 철학사 스테디셀러 몇 권에도 산타야나는 빠져있다. 휠스베르그의 <서양철학사>, 렘브레히트의 <서양철학사>, 슈퇴르니히의 <세계철학사>, 러셀의 <서양철학사>, 프리틀라인의 <서양철학사> 등 철학사 책을 펼쳐 산타야나를 찾아보라. 찾을 수가 없다!

 

 

 

 

 

 

 

 

그도 그럴것이 산타야나는 미국철학자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그는 1863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태어났지만, 10세에 미국으로 이주하여 미국에서 모든 교육을 받았다. 하버드에서 학위를 받고, 하버드에서 50세까지 가르쳤다. 생의 후반기에 스페인으로 돌아왔지만, 그의 학문적 활동은 모두 미국에서 이루어졌기에, 그는 미국 철학자로 평가된다.

 

그가 하버드대에서 철학 강의를 할 때만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 산타야나 저서가 간간히 번역되었던 걸로 안다(헌책방에서 두어 번인가 봤다). 그러다가 아마도 1990년대 초반을 기점으로 우리나라 지식계에서 산타야나는 자취를 감추게 된다. 현대철학자를 소개하는 개론서들에서도 산타야나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 이유를 들여다보니,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 보통 ‘현대철학’이라고 하면, 구조주의, 현상학, 실존주의, 논리실증주의와 분석철학, 해석학, 생의 철학 등을 들 수 있는데, 산타야나는 이런 현대 철학 사조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사상을 전개했다. 더군다나 그는 시로 그의 사상을 즐겨 표현했다.

 

한 마디로 그는 꽤 독특한 철학자였다. 철학사가인 윌리엄 사하키안은 그의 책 <서양철학사>에서 산타야나를 비판적 실재론자*로 분류했다. 하지만 곧 그 사상의 독특함 때문에 다음과 같이 부가하기도 했다.

 

 

 

 

그는 형이상학적 유물론, 플라톤적 실재론 및 무신론과 손잡고 자연주의**를 받아들였다. (중략) 그는 인식론적 이원론에 관해서는 비판적 실재론자들에 전적으로 동의했지만, 형이상학에 있어서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의 저술들에 크게 의존하여 자기 자신의 독특한 관점을 전개했다. (사하키안, p375 ~ 376)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타야나가 하버드에서 활동하던 시기인 1890년 ~ 1912년 사이에 그는 미국 최고의 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았다. 주저인 <이성의 생활>은(무려 5권의 대작이다) 그를 퍼스-제임스-듀이(프래그머티즘을 정초한 3인의 철학자)에 버금가는 철학자로 올려놓았다.

 

리엄 바렛(프린스턴대)과 헨리 에이킨(하버드대)에 의해 편집된 <Philosophy in the 20th century>(Random House, 1962)만 봐도 산타야나는 퍼스, 제임스, 듀이 바로 다음에 다루어지고, 그 분량도 이들 3명의 철학자보다 많이 할애돼 있다. 물론 편집자 중 한 사람(헨리 에이킨)이 하버드대 교수이긴 했지만, 1960년대까지 산타야나는 하버드를 대표하는 철학자 중 한 사람인 것만은 분명했다.

 

 

(<Philosophy in the 20th century>는 총4권인데, 산타야나는 제1권에 수록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1980년을 전후한 시기에 한국에 조지 산타야나의 책들(또는 그와 관련된 책들)이 간간히 번역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산타야나가 쓴 책으로는 <이성의 탄생>이 1974년 대한기독교서회에서 출간되었고, 1980년대 월 듀란트의 <철학이야기>에 산타야나 철학이 소개 되었다. (현재는 인터넷에서 산타야나의 저작을 검색하기 쉽지 않다.)

 

(1974년 현대신서에서 내놓은 <Berth of reason & other essay>의 한국어 번역본 <이성의 탄생>)

 

 

개인적으로는 산타야나 철학을 몰턴 화이트가 집필한 <20세기의 철학자들>(1991, 서광사)에서 처음 접했다. 당시 하버드에서 공부했던 일부 우리나라 학자들이 미국 최고의 철학자로 산타야나를 언급하여 관심이 동했기 때문. 1990년대 후반, 도올 김용옥이 KBS에서 노자 강의를 할 때, 도올은 산타야나를 미국 최고의 철학자로 소개하기도 했다.

 

 

이후 듀란트의 <철학 이야기>를 감명 깊게 읽으면서 철학자 산타야나를 조금은 더 잘 알 수 있었다. 듀란트의 책을 읽을 무렵에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빠져 지냈기 때문에, 단순히 미국에 산타야나라는 철학자가 있다는 정도만 아는 수준에 그쳤다. 주저인 <이성의 생활>이나 <미의 감각>은 찾아봤지만 번역본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도 여전히 없다!)

 

 

 

 

 

 

 

 

 

 

 

 

 

 

그리고는 산타야나를 완전히 잊었다. 그러다가 영미 현대철학에 관심이 생기면서, 잊었던 철학자 산타야나가 다시 내 앞에 출현한 것이다. 현대 미국 철학자들이 쓴 철학사 책에서 간간히 눈에 띄었고, 결정적으로는 1974년에 번역된 <이성의 탄생>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산타야나의 에세이들 중에서 대중적이고 자전적인 작품만을 골라 편집한 것이기에 좀 아쉬운 감이 없지 않다.

 

 

 

 

 

 

 

 

그래도 어디인가?! 산타야나가 직접 쓴 그의 사상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위에 언급했듯이 <이성의 탄생>은 자전적인 에세이가 주를 이룬다. 그래서 그가 어디에 주로 관심을 쏟았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데, 자기 철학을 자기가 평가한 부분이 재밌다. 제3부 철학적 에세이에 1953년에 쓴 ‘3인의 미국철학자’가 수록돼 있는데, 여기서 산타야나는 자신을 존 듀이와 윌리엄 제임스 다음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윌리엄 제임스를 최고의 철학자로 간주했다.)

 

어쨌거나 이 책을 읽은 후, 분명한 사실 하나는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현재 한국 지식인 사회에서 산타야나가 완전히 ‘잊힌 철학자’가 됐다는 거다. 아무도 산타야나 철학을 재조명하지 않는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현재, 주요 인터넷 서점에서 산타야나로 검색해서 찾을 수 있는 책은 단 한 권도 없다. 도서관에서 산타야나 자료를 찾기 위해 검색해도 마찬가지 결과를 얻는다. 

 

어떻게 산타야나는 우리 지식계에서 완전히 ‘잊힌 철학자’가 됐을까? 정말 신기하다. 산타야나를 소개한 이전의 책들을 보니, 산타야나는 우리나라 철학자 박이문과 아주 비슷한 스타일의 철학자였던 거 같다. 산타야나의 저작은 거의가 시와 에세이다. 그것도 자연주의 계열이니 한국에서 인기가 있을 턱이 없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근래 들어 한국 학자에 의해 퍼스-제임스-듀이에 대한 연구서가 나온 걸 보니, 언젠가는 산타야나의 연구서도 나오지 않을까하는, 근거 없는 기대감이 고개를 든다. (세창 명저 산책에서 나오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가능성을 갖고 있는 중..) 

 

[조지 산타야나의 저작들]

<미의 감각>(1896)

<시와 종교의 해석>(1901)

<이성의 생활>(상식, 사회, 종교, 예술, 과학에 있어서의 이성. 전5권)

<세 명의 철학적 시인>(1910)

<이론의 선풍>(1913)

<독일철학에 있어서의 이기주의>(1916)

<미국의 성격과 견해>(1921)

<영국에서의 독백>(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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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판적 실재론 :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은 각각 물질적 대상과 심적 상태(또는 관념)라는 표상 이론

**자연주의 : 자연을 실재의 전체로 인정하는 이론. 이 견해는 우주가 초자연적 원인이나 통제 없이 자기 충족적이며, 과학에 의해 주어지는 세계 해석은 실재에 대한 유일하고 충분한 설명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비판적 자연주의는 엄격한 유물론을 ‘삶과 사상’과 같은 실재를 지나치게 제한적으로 강조하는 입장이다. (S.오너&T.헌트, p322)

 

 

 

 

[덧]

이 페이퍼는 거의 주관적인 인상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객관적인 자료를 세세히 검토하지 못했기에 그렇습니다. 산타야나 저서가 번역된 사실을 일일이 확인하지 못했기에,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알고 계신 분은 오류를 바로 잡아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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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8-11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타냐나... 처음 듣는 철학자 이름이군요. 어깨 너머 그래도 이름은 들어봄직도 한데, 서당개 3년동안 한번도 못들어봤습니다.

yamoo 2016-08-11 18:22   좋아요 0 | URL
철학전공자들 상당수도 잘 모르더라구요~ 제가 아는 설대 철학 전공 석사 출신만 5명이 넘는데, 이들 모두 제가 산타야나에 대해 물으니 `산타야나가 누구??`라는 반응을 보였습니다..ㅎㅎ

월 듀란트의 <철학이야기> 맨 끝 부분에 소략적으로 나와 있으니 혹시 궁금하시면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슥 보셔도 될 듯합니다^^

분명히 미국에서 현대철학자로 한 획을 그은 철학자인데, 우리나라에 너무 안 알려진게 희한합니다..ㅎ

cyrus 2016-08-11 1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 아주 좋습니다. 잊힌 저자가 쓴 책들의 존재를 알려주는 글이 많아야 합니다. 알라딘이나 네이버 책 데이터베이스에 검색되지 않는 책이 너무 많아요.

yamoo 2016-08-11 18:2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ㅎ 잊힌 저자가 쓴 책들의 존재를 꾸준히 알리는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겠습니당~~ㅎ 진짜 알라딘만 검색이 되지 않은 책이 넘 많습니다. 정말 동감합니다~^^

cyrus 2016-08-11 20:40   좋아요 0 | URL
요즘 곰발님이 밀고 있는(?) 멘트를 따라하겠습니다.

이달의 마이페이퍼로 선정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8-18 12:09   좋아요 0 | URL
문제는 제가 임의대로 선정한 것은 단 한번도 당선이 된 적이 없다는 사실 ^^

곰곰생각하는발 2016-08-11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이러스 님 말씀에 동의 페이퍼에서 정말 알고싶은 것은 숨겨진 책을 소개하는 페이퍼.. 제일 짜증나는 것은 책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고 날마다 점심에 뭐 먹었다고 날마다 보고하는 글... 짜증 존나 남..


yamoo 2016-08-11 20:33   좋아요 0 | URL
곰발 님이 `짜증 존나 난다`는 그런 페이퍼가 있지요...곰발 님 덧글 읽으면서 웃음이 멈추지 않네요...ㅋㅋㅋㅋ
 

알라딘 검색 무력화 도서 (6)

 

EBS 다큐프라임에서 방송한 <강대국의 비밀>이 책으로 묶였는데, 타이틀이 <강자의 조건>(MID, 2014)이다. 이 책은 분류하자면 역사서(세계사)다. 헌데, 내가 소개하고자 하는 동명 타이틀의 책 <강자의 조건>은 위 책과는 성격이 아주 판이하다. 알라딘에서 검색조차 되지 않아 [알라딘 검색 무력화 도서]에서 소개해 보고자 한다.

 

 

<강자의 조건>, 고노 모리히로 저, 동국출판사, 1981

 

 

 

[책소개]

 

항우와 유방, 토요토미와 도쿠가와를 비롯한 중국과 일본의 기라성같은 강자들. 그들이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보여주는 ‘강자의 조건’

 

 

아무리 용병(用兵)에 뛰어나도, 감정에 흐르기 쉬운 인간은 병력을 통솔할 자격이 없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도 발휘되지 못하면, 좋은 상품을 창고 속에 쳐 박아 놓은 것과 같다.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마당’을 찾아야 한다.

 

 

재능과 인격은 별개의 것. 재능만 보고 부하를 발탁하는 것은 위험천만하다. 재능만 있고 인격을 못 갖춘 자는 자기를 키워준 상관의 발등을 언제 찍을지 모르는 일.

 

 

중국 고사와 우화 그리고 일본의 역사 기록에서 발췌한 인간 관리와 자기계발의 보고(寶庫)! 평생토록 약자로 빌빌거리고 싶은 사람은 이 책을 볼 필요가 없다!

 

 

무한경쟁시대, 기업과 사회에서 낙오하지 않도록 불멸의 고전에서 배우는 강자의 조건! 손에 들면 단숨에 독파하는 경탄할 만한 저서이다.

 

 

 

차례

강자의 기본적 심성 ……………………………… 9

진정한 강자 ……………………………………… 29

역경일수록 과감하라 …………………………… 60

싸움을 멀리하라 …………………………………68

출세하는 자의 논리 ………………………………74

바람을 피하는 지혜 ………………………………93

상급자의 조건 ……………………………………107

상급자와의 인간관계 ……………………………119

역량있는 인간 ……………………………………131

조직을 뭄직이는 강자의 조건 …………………145

신념에 산다 …………………………………… 177

기회를 포착하는 눈 …………………………… 189

역경을 견디는 인간 …………………………… 199

위기를 극복하는 결단 ………………………… 211

최후의 카드 …………………………………… 239

 

 

 

 

[야무의 간단 리뷰]

 

이 책은 일종의 자기계발서다. 직장인들을 위한 리더십을 함양할 목적으로 저술된 책. 헌데 일반적인 자계서와는 격이 다르다. 고전을 왜 읽어야 하는지, 현실적이고 처세적인 지점이 아주 명확하여 일독할 가치가 충분한 책이다.

 

 

대부분의 리더십 사례들이 중국의 고사와 우화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단숨에 읽을 수 있는 동양 고전 산책 쯤 된다. 제자백가 철학에서부터 시작해 항우와 유방 그리고 손자와 사마천에 이르기까지 주요 동양 고전 속 영웅들의 ‘리더십의 조건’을 배울 수 있다.

 

 

첫 페이지를 펼치면 이 책이 얼마나 재미있을지 기대감을 갖게 한다.

 

 

한 젊은이가 벼슬자리를 얻어 임지를 향해 떠나려 할 때 전송나온 친구가 말했다.

“벼슬자리에서 일하려면 무엇이건 참아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게나.”

젊은이가 명심하겠다는 눈짓을 보내자 전송 나온 친구는 다시 한 번 말했다.

“무엇이건 참아야 하네.”

“그래 알고 있어.”

한참 있다가 친구는

“몇 번이라도 참아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네.”

또 한번 다그치다시피 했을 때도 젊은이는 잘 알고 있다고 대답했비만, 네 번째에도 같은 말을 되풀이 하자 화가 치밀었다.

“도대체 자네는 날 놀리고 있는겐가!” 참으라, 참으라, 몇 번째인가!“

이렇게 되자 친구는 어두운 얼굴이 되어 말했다.

“보게나, 인내라는 게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았을 거네. 기껏 네 번 말했을 뿐인데 자네는 못참고 만게 아닌가?”

 

 

이것은 중국의 우화로, 참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생생하게 말해주고 있다. 요즘도 인내의 필요성이 절실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사람들은 걸핏하면 화를 내고 비탄에 빠지는 등 순간의 감정에 눌려 ‘인내’라는 두 글자를 까맣게 잊어버린다. (p11)

 

 

책은 이렇게 고사나 우화를 보여주고 저자가 짤막하게 그에 대한 코멘트를 부가하는 식으로 돼 있다. 제일 처음 나오는 ‘인내가 얼마나 어려운가’의 사례로부터 이 책이 얼마나 재미있고 유익한지 확인할 수 있고, 이는 책이 끝날 때까지 지속된다.

 

 

마지막 사례는 그 유명한 ‘읍참마속’의 사례다. ‘최우의 카드-비정의 논리’속에 들어있다. 마속의 사례를 소개한 다음 이어지는 송나라 명신 왕단 사례로 대미를 장식한다.

 

 

왕단의 사례는 마속의 사례보다 덜 알려진 고사인데, 두 사례 모두 진정한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비정한 덕목을 갖추어야 함을 알려준다.

 

송나라 왕단이 비방의 벼슬을 하고 있을 때 강도살인죄로 젊은이가 체포되어 왔다. 이 젊은이는 전에 왕단의 집에서 일한 적이 있는 하인의 아들로 왕단과는 격의 없이 어울리면서 자란적도 있는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다. 하인이 죽은 뒤 젊은이는 여기저기 유랑하다가 배가 고파 범죄를 저지르게 된 것이다.

왕단은 고민한다. 범인이 어릴 적의 친구요, 생명의 은인이다. 개인적인 심정으로 처형할 수가 없고 도망쳐버렸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지도적 위치에 있는 몸으로 법을 짓밟고 질서를 파괴해서는 선량한 백성들에게 얼굴을 들 면목을 잃는다. 법질서를 지켜달라고 외칠 자격을 상실한다. 왕단은 결심한 다음 감옥으로 범인을 찾아 최고의 식사를 제공하고 함께 운다. 범인은 처형되었다.

 

 

왕단은 사사로운 정을 배제한 명재상으로 유명하게 되었고 오랫동안 벼슬을 지냈다. 뛰어난 리더로서의 면모가 여실하다. 비정할 때는 비정해야 한다. 이러한 사람을 통솔하는 입장에 있는 자는 대의를 위해, 사회를 위해 법과 질서를 위해 피도 눈물도 없는 비정함을 지켜야 한다. (pp245-246)

 

 

 절판이라 아쉬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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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6-08-08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자기개발서는 그닥 좋아하지 않는데
이런 책은 좀 좋아라 하죠.
절판이라니 아쉽네요.
복간이 되면 좋을텐데...

yamoo 2016-08-10 21:36   좋아요 0 | URL
자계서 중 이런 류의 책이 종종 있어요. 처세술을 다룬 책들 중 고사성어 인용이 아니라 중국 고전에서 조직인에 유용할 부분을 편집하여 직장인의 경쟁력 제고를 목적으로 하는 책들이 있죠. 이런 책들 중 <강자의 조건>은 갑인 듯합니다. 저도 복간되기를 바라는 책 중 하나에요^^

2016-08-08 19: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10 2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transient-guest 2016-08-09 0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가 가네요. 리더로서 많은 자질을 갖출 수는 있지만, 비정함은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단순히 개인의 문제인 부분도 있고, 나아가서 자신도 언제나 그 `비정`의 대상이 될 수 있음에서 오는 자기관리와 미래에 대한 스트레스도 상당할 듯 합니다. 다시 나오면 좋겠네요.

yamoo 2016-08-10 21:41   좋아요 0 | URL
이런 류의 책들이 처세를 다룬 책들이 많이 보이는데, 잘 찾아보면 비슷한 책이 있을 것도 같습니다. 제가 파악한 바로는 아직 없었습니다. 저도 이런 류의책들이 좀 많이 간행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렇죠...자신에게 은혜를 준 사람들을 내쳐야 하는 그런 비정한 상황이 도래할 때...그것이 정의를 구현하는 길이고, 자신의 위치가 그 비정함을 요구할 때..인간으로서 가장 힘든거 같습니다. 그래서 정치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닌 거 같습니다..^^;;
 

하나!

 

시이소님 페이퍼를 보면, 정말 한 달에 30권을 넘어 40권을 넘게 읽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정말 신기하다. 리뷰를 쓰면서도 그렇게 읽을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시이소님 자신은 누구나 백수면 그리 읽는다고 하시지만, 그런 가열찬 독서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다시 한 번 더 실감할 뿐이다.

 

하, 난 지난 달에 몇 권이나 읽었나? 이것 저것 여러 권 집적거려 봤지만, 완독한 책은 6권을 갓 넘겼을 뿐이다. 근데, 이건 순전히 명저 번역을 엉터리로 한 역자들 때문이다. 이들 불량 역자들 때문에 가독률이 현저히 떨어져, 책을 집어 던지고 다른 판본을 집어드는 지럴을 지속했에. 썅 소리가 절로 난다! 

 

특히 지만지고 출판사의 책들은 비싸기는 우질나게 비싼데, 번역은 별루다. 개중에 최악의 책을 만나면, 진짜 뚜껑이 열려버린다. 보드리야르의 <사물의 체계>는 몇 페이지를 읽다 말았다. 번역본이 지만지고 본밖에 없는데, 가격 대비 번역의 불량이 매우 심하다. 대형 서점에서 서서 봤기에 망정이지 일단 구매했다면 화가 정말 많이 났을 거 같다.

 

이런 경험이 많이 쌓이다 보니, 책 시장의 유통 구조가 참으로 요상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대표적으로 책 값 비싸며 번역이 매우 안 좋은 출판사가 한길사다. 한길 그레이트 북스의 책들은 나름 진짜 그레이트한 책들인데, 번역은 정말 형편없다. 2만원 이상 나가는 책들은 그야말로 고급 장정에 책을 소장하고 싶게 한다.

 

하지만 페이지를 열면 번역기 돌린 듯한 문장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이런 불량 번역 제품은 교환도 환불도 안 된다. 번역이 안 좋아 서점에 환불하러 가면, 읽은 흔적 때문에 안 된다다. 자세히 읽지 않으면 번역이 불량인지 아닌지 알아 내기 힘든데, 이 모든 책임을 소비자에게 떠넘기고 불량품을 양산한 출판사와 저자는 항상 면제부를 받고 있는 모양새. 진짜 천불나는 상황이다.

 

내가 읽어본 한길사 그레이트 북스 번역본들은 불량 번역이 대부분이다.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 제임스의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 키에르케고의 <죽음에 이르는 병>, 화이트헤드의 <관념의 모험> 등은 읽다가 집어던지다가를 반복했던 책들이다. 특히나 <의미의 논리>와 <관념의 모험>은 진짜 심했다. 이런 번역본이 버젓이 돌아다니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 창피한 일이다. 그 나라의 지식 수준을 알려주는 척도이기에.

 

 

 

 

 

 

 

헌데 독서계에서는 이런 문제점을 별로 제기하지 않는 듯하다. 난 이게 정말 이상하고 궁금하다. 불량 번역본이 두루 돌아다니고 있는데, 리콜하는 출판사는 없고, 그 불량에 대한 책임을 지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앞으로 이 문제에 대해서 활발한 논의가 있었으면 한다.

 

 

둘!

 

시이소오 님 페이퍼를 보다가 사이토 다카시의 <독서는 절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에 나오는 한 대목을 보고 쾌재를 불렀다. 다름이 아니라 사이토 다카시가 조언하는 바를 이전부터 행하고 있었기 때문.

 

이 책에서 새로운 가르침을 얻었다면 내가 좋아하는 책들을 꽂은 작은 책장을 만들어라    

 

흐흐흐, 나는 내가 좋아하는 책들을 꽂은 책장을 여기저기에다가 만들어 놓고 있다. 그 중에서도 내 마지막 궁극의 리스트는 베르그손과 비트겐슈타인이다. 이들 책들을 제외하고는 점점 솎아 내어 처분할 계획이다.

 

  [내 궁극의 리스트]

 (이 사진의 책들 이외에 비트겐슈타인의 책들은 10여 권이 더 있다. 다른 책꽂이의 아래 칸에 있어 현재로서는 손이 닿지 않늗다. 여튼, 이 베르그손과 비트겐슈타인 원저들은 죽을 때까지 계속 읽을 예정임)

 

 

셋!

 

오늘로서 사데크 헤다야트의 <눈먼 부엉이>(문학과 지성사, 2013)를 완독했다. 책이 얇고 작아서 주로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읽곤했다. 구입하기는 지난 3월엔가 한 듯한데, 오늘에서야 다 읽었다.

 

내가 전혀 모르는 작가라 그냥 출판사의 네임 밸류만 믿고 구입한 경우인데, 다 읽고 나니, 괜히 읽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물론 읽는 중간 중간 책을 던지고 싶은 충동이 일곤했다.

 

하지만 '염세주의 미학의 절정을 보여주는 이란의 카프카'란 책 뒤의 사탕발림에 넘어가 끝까지 책을 잡고 있었던 거다. 염병할, '염세주의 미학의 절정'은 무슨 얼어죽을 찬사란 말인가.

 

그냥 찌질이가 아주 괴기하게 헛소리만하다가, 40페이지 정도에 끝나버려도 하등 이상하지 않을 내용을, 174페이지까지 끌고 가는 그 기이한 힘이라니! 뭐, 중간 중간 끝내주게 아름다운 시적인 문장들 때문에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배수아 씨가 번역을 하여 우리 작품 읽는 것처럼 술술 읽을 수 있는 것 또한 무시못할 장점)

 

하지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전체적인 소설의 느낌이 카를로스 푸엔테스의 <아우라>와 좀 유사한 면이 있어, 계속 읽어갈 동력은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작가가 너무도 심하게 의식의 흐름(망상) 쪽으로 경도된 듯하여 실망이 컸다.

 

 

 

 

물론 작가가 어떤 성향인지 모르고 덥석 책을 잡은 내 잘못이 크겠지. 자칭 실재론자인 내가 이런 소설을 좋아할 리가 없잖은가.

 

그나마 위안인 것이, 이 책과 함께 읽고 있었던 베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책>이 너무도 사랑스러워 한 동안 버닝할 태세를 마쳤기 때문이다. 아, 어찌 모든 문장들이 그리도 줄을 치고 음미하게 하는지, 참으로 읽는 맛이 난다는 말이지. 빌어먹을 부엉이, 것두 <눈먼 부엉이> 따위가 시간을 갉아 먹게 하다니.

 

아, 물론 작가 지망생에게는 <눈먼 부엉이>가 매력적일 수 있다. 환상문학과 유미주의 문학을 좋아하는 분들에게도 절대적인 추앙을 받을 만한 작품이 아닌지 조심스럽게 예상해 본다.

 

뭐, 난 '부엉이'보단 '불안'같은 작품이 100배 좋다. 그나저나, 다음부턴 절대로 책 표지의 사탕발림에 넘어가지 말아야겠다~~~~

 

 

넷!

 

처분할 책들이 쌓이고 있다. 예전같으면 악착같이 소장할 책들인데, 이제는 미련없이 처분을 하려고 한다. 공간, 내겐 더 중요한 책들을 들여놓을 공간이 필요하다!!! 발품 팔아가며 모은 책들인데... 아쉽긴 하다. 그치만 내겐, 현재...공간이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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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6-01 17: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상대방이 몇 권을 읽든 적게 읽든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예전에 저도 권수에 집착한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책 읽을 마음도, 글 쓸 마음이 생기지 않더라고요. ^^

지만지 출판사 쪽에 일하는 분이 제가 독서모임을 통해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진짜 그 분 때문에 지만지 출판사를 믿었습니다. 그런데 고리키 단편선집 보고 크게 실망했습니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은 출판사 책에도 불량 책이 많이 있을 거예요. ㅠㅠ

yamoo 2016-06-03 10:56   좋아요 0 | URL
상대방의 몇 권을 읽는지 신경쓰지 않으려고 해도, 정말 기이할 정도로 많이 읽고 리뷰 쓰는 분들을 보면 자괴감이 밀려오곤 합니다. 이건 현재로선 어쩔 수 없다는...감내하는 수밖에요..

뭐, 책 값 비싸도 비싼 만큼 퀄러티를 보여준다면 불평을 좀 덜하겠습니다만...책 값은 일반 책의 2배 이상을 받고도 불량품을 양산하고 있다면, 이는 정말 심각하다 하겠습니다..ㅎ

시이소오 2016-06-01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진의 탐구가 가장 탐나네요^^

yamoo 2016-06-03 10:58   좋아요 0 | URL
흠, 고진을 좋아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네요! 시이소오 님두 고진을 좋아하시는군요! 뭐, 고진은 우리나라에서 인문학계의 하루키랄까....전 그런 느낌이 들곤 합니다만..ㅎ

stella.K 2016-06-01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저기 이석원의 책이 보이는군요.
그때 제가 읽지 마시라고 적극 뜯어 말렸어야 했는데...
베르그손이나 비트겐슈타인을 좋아하시는 분은 절대 못 읽을 책이죠. 암요...ㅠ
이제 절대로 야무님 앞에서 무슨 책 괜찮다고 절대 말 안할 꼬예요.

근데 이 페이퍼를 보니 야무님 때문에 우리나라 번역 수준이 언젠간 좋아질 거란 믿음이
마구마구 생깁니다.
자꾸 여기저기서 말들이 많아야 그 분야가 좋아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말을 안하면 지네들이 잘하는 줄 안다니까요.^^

yamoo 2016-06-03 11:01   좋아요 0 | URL
네...저 책을 처분하려고욤..ㅋ 읽기 다 읽었습니다만...강위석이나 고종석 작가의 에세이들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읽기 힘들더군요. 말리셨어도 책이 엄청 인기 있어 한 번쯤 봤었을 겁니다요..ㅋㅋ

그래두 극찬하는 책들 중에서 그런 평가가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책들이 있기 땜시, 그런 판단은 자제하심이 좋을 듯합니다^^

걍 줄기차게 계속 까댈라구욤...ㅋㅋ 그럼 언젠가는 좋아지겠죵~ㅎ

수이 2016-06-01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랑스 비평사_ 바흐찐_ 탐나는걸요. :)

yamoo 2016-06-03 11:04   좋아요 0 | URL
헐~ 야나 님 은근 문학 비평집 좋아하시는 것 같다는!

첨엔 이들 프랑스 비평에 관한 책들과 철학서들을 마구 사들였지만, 거의 읽을 수 없는 수준의 번역들이라 전부 처분하고 마지막 남은 것이 저기 있는 책들과 아직 손이 미치지 않은 곳에 있는 20여 권의 책들....

속이 쓰립니다..ㅎ

곰곰생각하는발 2016-06-01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책의 70% 정도는 베란다에 박스로 저장해서 쌓아놓고 있습니다. 이게 시바... 뭔짓인지.. 지금까지 책 절반 넘게 버린 것 같은데.. 결론은 집이 넓어야 한다는 점. 뼈저리게 느낌닙니다. 저도 시이소이님 보면서 독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1독 1페이퍼라... 쉬운 열정이아님..
저보십시오. 리뷰는 쓰지 않고엄한 소리만 하고... 또 읽은 책의 90%는 리뷰를 안쓰고 있습니다.
읽고 쓰고 읽고 쓰고를 반복한다는 것은 굳은 결심이 아니면 실천하기 힘듬.. 일단 술을 안 마셔야 함.. 전 틀렸어요. 알콜중독자가 아닌가 의심을 슬슬 할 때가 되었씁니다.

yamoo 2016-06-03 11:08   좋아요 0 | URL
책은 버리기 보단 처분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게 낫더이다~ 버리면 그냥 쓰레기가 되지만, 이걸 누구에게 주면, 또는 기부를 하면 나름 어떤 가치있는 일을 했다는 뿌듯함이 있습니다. 버리는 것 보다야 훨씬 낫습니다..ㅎㅎ

시이소오 님은 정말 특화된 분입니다. 그런 분 따라가려다가는 그냥 한 방에 휙~ 갈거 같더군요..ㅎ

뭐, 곰발 님이야 리뷰보다야 그 엄한 소리가 더 쫄깃하니깐요..ㅎ 그거 기다리는 분들 알라딘에서 많지 않습니까..

흠, 근데, 일단 저도 금주 하시는 거에 한 표!ㅎ

감은빛 2016-06-01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나!
번역 문제는 출판계에서 아주 고질적이고, 만연한 문제입니다.

두 가지 이슈가 있는데,
하나는 번역자가 원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직역위주로 번역을 했고,
편집자 역시 이해하지 못했으면서
(혹은 대략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만 하다고 판단하고)
여러가지 이유(주로 출간 일정에 쫓겨)로 제대로 고치지 못하고 출간하는 거죠.

두번째는 번역자와 편집자가 번역투의 문장,
우리말 어순이 아닌 원문의 어순으로 나열한 문장 등 난해한 글을 두고
문제를 느끼지 못하거나 오히려 그게 올바른 번역이라고 느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그 출판사에 일하는 편집자와 주로 계약하는 번역자가 그대로이기 때문에,
그 출판사의 책은 계속 엉망일 확률이 높습니다.

번역과 관련해서 기억나는 재미있는 사례가 둘 있습니다.
하나는 스티브잡스 전기 번역 오류 지적에서부터 파생한 번역배틀입니다.
이덕하라는 분과 노승영 번역가의 배틀이었는데,
진행과정만 지켜보고 정작 결과를 알지 못해 궁금하네요.
두번째는 한참 출판계에서 이슈가 되었던
새움 출판사에서 낸 까뮈의 [이방인] 번역본 논란입니다.
출판사 대표가 번역자로 밝혀지고, 수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그 사건이요.

개인적으로 저도 출판사에 있을 때,
번역본 교정교열 작업을 세 번 했습니다.
세 번 모두 번역 경험이 거의 없는 분
(이건 비용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이었죠.
정말 말도 못할 정도로 어이없는 단어나 문장이 많았습니다.
평소 다른 원고 작업에 비해 서너배 이상 많은 시간과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어떤 챕터는 아예 글 자체를 제가 다시 쓴 경우도 있었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번역투에 비문이었으니까요.)
이런 경우 글은 제가 다시 썼지만, 번역자는 그래도 그 사람이니까,
책 정보에 번역자 이름이 실리지만, 제 이름은 판권 페이지에 작게 들어가지요. ㅠㅠ

한번은 도저히 글에 손을 댈 수 없을만큼 엉망이어서,
번역료가 조금 아깝긴 했지만 아예 그 원고를 버리고,
새로 다른 번역자에게 번역을 의뢰한 적도 있습니다.

번역 문제가 그만큼 쉽지 않다는 점을 알려드리고 싶네요.
(뭐 이미 잘 알고 계시겠지만요.)


yamoo 2016-06-03 11:11   좋아요 0 | URL
와우, 이런 비사가 있었다뉘!! 얼추 예상은 했지만 실상을 들으니 참으로 참담하군요. 말씀하신대로라면, 좋은 번역본이 나올 가능성은 당분간은 요원하다는 건데...아, 이거 이슈화해야 되는 거 아닌지...

어쨌거나, 알고 싶은 점을 정확히 알려주셔서 넘 감사합니다~ 다음번 페이퍼 쓸 때 참고하도록 하겠슴다!

감은빛 2016-06-01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둘!
좋아하는 책들을 꽂은 책장 만들기라 좋네요!
저는 지금 책장 정리를 하지 않은지 몇 년이 지나서,
이사를 하지 않는 이상 도무지 손을 댈 수 없는 상황입니다.

셋!
저는 읽히지 않는 책은 과감하게 포기하는 편입니다.
재밌는 다른 책도 많은데,
재미도 없는 책을 붙들고 있는 시간이 아까워서요.
그래도 배수아 작가의 번역이라니 어떤 책인지 궁금하네요.

넷!
가라타니 고진의 탐구가 눈에 띄네요! ^^

yamoo 2016-06-03 11:13   좋아요 0 | URL
저도 원래는 읽히지 않는 책은 던져버리는 건데....거참, 맛깔난 문장이란게 거, 무시못하는 듯해요. 꾸역꾸역 읽게 된다는...

역시 고진은 알라딘 통네에서 인문학계의 하루키인거 같습니다. 많이들 좋아하시는 거 같다눈^^

루쉰P 2016-06-02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지내고 계시죠? ㅋ 책을 쌓아놓고 있는 걸 보니 너무 잘 지내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번역이고 출판이고 전 우리나라 출판계에 별로 좋은 감정을 품고 있지는 않아요. ㅋ 정말 읽고 싶은 작가들의 번역이 너무나 안 되어 있다는 게 좀 속상하거든요. 일본은 번역이라는 것이 무지갛게 잘 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거기에 비하면 우리는 너무 체계가 없어요...

베르그송이라 ㅋ 저도 정말 열심히 읽었던 사람인데 ㅋ 서재에 꼽힌 그 책이 눈에 띄네요 ㅋ <불안의 책>이 그렇게 좋나요?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지금 항상 불안해서 말이죠 ㅋ

yamoo 2016-06-03 11:14   좋아요 0 | URL
어이구! 이게 뉘 십니까! 루쉰님 아니십니까! 도체 어디계시다가 나타나셨는지..

무쟈게 반갑습니다. 이제 서재활동 하시는 건지요~

루쉰 님 리뷰 읽었던 게 엊그제 같습니다그려~^^

oren 2016-06-02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르그송이 쓴 책들뿐만 아니라, 베르그송에 관한 책들도 많은 게 흥미롭네요. 오래전에 저도 눈으로 구경만 했던 삼성출판사의 책등에 박힌『시간과 자유의지』라는 제목도 여기서 다시 보니 정말 반갑네요. 저는 그 책이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의 영어번역판 제목인줄 훨씬 나중에서야 알았답니다.

그나저나 번역에 관한 yamoo 님의 거듭된 문제 제기를 접하고 보니, 우리나라의 열악한 사정은 도대체 언제쯤이면 좀 더 나아지려나 싶은 암담한 생각도 좀 드네요. 원저자의 뛰어난 걸작품을 졸지에 졸작으로 만드는 건 `일종의 배신`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구요...

* * *

젠장맞을, 대체 왜 그런단 말인가? 저자가 gehen이라고 했으면 왜 `가다`라고 하지 않는가? 역자 선생들이여, 제발 우리를 함부로 주물러 대지 마시오!
- 밀란 쿤데라, 『배신당한 유언들』

yamoo 2016-06-03 11:21   좋아요 0 | URL
네, 베르그손에 관한 책들도 눈에 띄는 대로 데려오고 있습니다.ㅎ 요즘 보니 비트겐슈타인에 관한 책들도 대거 출판되고 있는데...10년 전에는 거의 없던 일이 불과 몇년 사이에 전공자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상황인가 봅니다.

헌데, 베르그손은 아직까지 좀 감감합니다. 앞으로 비트겐슈타인에 관찬 책만큼 베르그손에 관한 책들도 쏟아졌음 좋겠습니다~ 더군다나 주저 번억본이 타출판사에서 제대로 나와줬음 하는 바람입니다.

저는 시론을 보고서 알았어요. 시론이 시간과 자유의지라는 걸...근데, 미국 원서도 시간과 자유의지라고 타이틀을 단 책드이 대부분인거같아요~

감은빛 님이 댓글을 보니 더 암담합니다. 이런 불량품 번역 관행이 아주 굳어진 거 같아서요. 단기간에 고쳐지긴 매우 힘든 구조인 듯합니다.

배신을 하도 당하다 보니, 분노를 넘어 그냥 포기하게 됩니다. 출판사들이 좀더 각성을 했으면하고, 소비자들의 어떤 운동 비슷한 걸 해서 이 나쁜 관행을 타파해야 할 거 같습니다. 그나라의 지식 척도가 아주 밑바닥이니, 이건 정부차원에서 어떤 대책을 마련해야 할 듯한데....아무도 이 문제에 대해 그리 심각한 문제의식을 느끼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듯해서 좀 거시기 합니다.

밀란 쿤데라의 배신당한 유언들에 인용된 말이 참 재미나네요^^

transient-guest 2016-06-03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보기엔 읽는 건 그래도 쉬운데, 리뷰를 잘 쓰는 것이 어렵네요.ㅎㅎ 전 쉬운 책을 위주로 보면 좀 빨리 많이 읽고, 고전은 아무래도 더딘 편입니다. 번역문제는 심각한데요, 한길그레이트도 그랬다니 놀랍니다. 책값도 비싸고 제본도 훌륭해서 소장하고픈 시리즈인데 말이죠...

yamoo 2016-06-08 14:51   좋아요 0 | URL
제겐 읽는 게 너무 힘듭니다. 특히 소설의 경우 처음 십여 페이지에서 완독 여부가 결정되는 거 같아요..ㅜㅜ

인문 및 고전 번역서는 개같은 번역 때문에 가독률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얇은 책도 몇 일이 걸리니..--;;

리뷰 잘 쓰기 힘들죠..^^;; 누구나 이건 어쩔 수 없는 거 같다는..ㅎ

한길 그레이트 북스...이거 좋은 번역, 아주 손으로 꼽습니다. 100권도 넘게 발간됐는데, 거의 쓰레기 번역이 대부분인거 같아요. 골라서 읽는 책마다 그러니....시리즈 전체를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만..^^;;

고양이라디오 2016-06-03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시이소오님이 부럽습니다ㅠㅠ 직장생활을 하다보니 책읽을 시간이 많이 부족하네요ㅠ

yamoo 2016-06-08 14:51   좋아요 0 | URL
직장생활은 독서 생활을 방해하는 쥐약 쯤 되지욤..ㅎㅎ
그래두 출퇴근 시간을 활용해 읽는 분들 보면, 대단합니다~

보슬비 2016-07-06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5월에 60권 읽었어요. 하지만 반은 만화예요. ㅎㅎㅎㅎㅎㅎ
그리고 리뷰도 잘 안쓰고, 독서일기는 밀리고.......... ^^;;

yamoo 2016-06-08 14:52   좋아요 0 | URL
헉! 만화책이라두 그렇지....오우~ 능력자 이십니다. 영어 원서도 달마다 꼬박꼬박 읽어주시는 거 같은데...

뭐, 리뷰 쓰는 거야 누구나 다 밀리고 있는 상황이니 .. ^^;;

보빠 2016-06-18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amoo씨는 직업이 책에 관련된 일을 하십니까??
뭐 이렇게 책이 많아요?

yamoo 2016-06-21 13:20   좋아요 0 | URL
아닙니다..ㅎ 책에 관련된 일을 하고 싶었는데, 못하니 계속 책을 사재기 하나 봅니다..ㅎㅎ

이 알라딘 동네에서 저는 아주 미미한 존재입니다만..^^;; 책이 많은 분들에 대하면 암것두 아니지요~ㅎ

보빠 2016-06-21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amoo씨는 출판업이나 도서관쪽 일도 아닌데 이렇게 책을 많이 가진 것 보면 결론은 딱하나입니다. 부자이십입니다...전 집이 좁아서 놔둘때가 없어서 못사는데.ㅎㅎ 즐독하세요.

yamoo 2016-06-22 10:11   좋아요 0 | URL
ㅎㅎ 재밌는 추론을 하셨네욤^^ 물론 그런 생각이 일반적이겠지요. 하지만 저는 월급을 타면 거의 책을 사기 때문에 책이 많은 거고, 전혀 부자가 아니라서 공간 때문에 책을 처분하고 있습니다..ㅎ 임제어록님이 저보다 부자일 확률이 높을 것이라고 감히 추정해 봅니다~^^

보빠 2016-06-22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에...독서를 사랑하는 진짜 애독인이네요.좋네요. 특히 비트겐슈타인과 베르그송 책이 눈에 띄네요. 저도 중관불교와 비트겐슈타인, 유식불교와 베르그송을 연관지어서 책읽는 것을 좋아하는데 두 서양 철학자를 좋아하시니 반갑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06-22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트겐 어렵던데.. 전 포기.... 비트겐 책 이렇게 많은 분은 처음 봅니다. 사람들 대부분 비트겐 한 권 읽다 포기하는 바람에 다들 한 권만 가지고 있던데..ㅋㅋㅋㅋ

보빠 2016-06-22 13:19   좋아요 2 | URL
힌트드릴께요..무조건 비트겐슈타인 저서를 한방에 다 사세요.그럼 그 돈이 아까워서 입문서 해설서 몇권사고 ....그러다보면 비트겐슈타인 책이 많아져요.ㅎㅎ

양철나무꾼 2016-07-28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머~, 이게 얼마만이래여?(버선발로 호들갑 중~^^)
잘 지내신 겝니까?

너무 오래 적조하셨다고 하려고 보니,
저와 비껴 가셨을뿐 뜨문뜨문 글은 올리셨네요.

책에 대해서 뭐라고 코멘트 하고 싶지만,
여전히...제겐 범접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우연히 들렀다가,
언제던가 더운 여름 날 드셨다던 복숭아맛 아이스 티가 생각나 몇 자 끄적여 봅니다.

참, 책은 나왔나요?
광고 하시면, 사 읽겠습니다~ㅅ!

yamoo 2016-07-31 11:33   좋아요 0 | URL
양철 님 정말 오랜만입니다!
저는 그럭저럭 지냅니다. 잘 지내면 오죽 좋겠습니까?!ㅎ

뭐, 적조했다고 하면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양철 님의 리뷰는 올리시는 글 마다 보는 편입니다만, 이상하게도 제가 뭐라 드릴 말씀이 없는 책만 읽으시는 거 같아 댓글달기가 좀 거시기 했습니다. 몇 번 쌓이니, `적조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도래한 거 같습니다.ㅎ

책은 나왔지만, 별로 만족스럽지가 않아 광고하지 않았슴다~ 좀더 좋은 책을 쓴 다음 광고하겠어요!ㅎ

그나저나 정말 오랜만이고 반갑네요~ 더위에 건강 유의하시길!^^
 

보드리야르의 마지막 유작 <사라짐에 대하여>를 보고, 참으로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이 책은 정확히 지금으로부터 4년 전 교보에서 보고 책값이 너무 비싸 사지 않고 구경만 한 책이다. 물론 넘겨보지도 않았다. 예쁘게 만들어 책값만 터무니없이 올린다고 생각했었다.

 

 

도서관에서 이 책이 눈에 띤 김에 빌려봤다. 도대체 민음사는 무슨 생각으로 책을 이따위로 편집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냥 짧은 소논문 한 편 정도의 분량을 100페이지 넘게 편집해 놨다. 정말 놀라운 것은 왼 편을 아예 비워 버리고 줄 간격을 아주 시원스럽게 떨어뜨려 100페이지 단행본을 만드는 편집 기술! 정말 경탄할만하다. 그리고 편집의 승리를 자축하듯, 하드커버 장정에 가격을 1만 원으로 찍는다~

 

 

 

 

 

 

사실 가격에 비해 번역이 좋은 것도 아니다. 역자는 프루스트를 번역한 하태환 씨 인데 번역 문장들이 디지게 난삽하다(좋게 말해서! 나쁘게 말하면 개 X같다). ‘~적’을 매우 많이 남발한다. 물론 비문도 간간이 섞여 있다. 번역된 본문을 잠깐 옮겨 본다.

 

 

나는 유일 세상의 자동 기록일 수 있는 어떤 이미지를 꿈꿔 본다. 그 유명한 비잔틴의 논쟁 속에서 성상 파괴주의자들이 꿈꿨던 바로 그런 이미지 말이다. 그들은 예수의 얼굴이 새겨졌다는 베로니카 베일처럼, 신성이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이미지만 진정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것은 사진 필름의 음화와 유사한 일종의 데칼코마니로서, 인간의 손이 전혀 개입되지 않은 신성한 얼굴의 자동기록이었다. 반대로 그들은 인간의 손으로 제작한 모든 아이콘을 격렬하게 거부했다. 그들에게는 그것들이 신성의 시뮬라크르에 불과했다.

반대로 사진적 행위는 어떤 면에서는 ‘인간의 손이 게임되지 않은’ 것이다. 현실과 현실의 생각을 거치지 않은, 빛의 자동 기록인 사진은, 따라서 이런 자동성에 의해 인간의 손으로부터 해방된 세상 그대로의 원형일 것이다. 극단적 환상으로서, 순수한 흔적으로서, 그 어떤 시뮬레이션도 없이, 인간의 개입도 없이, 세상은 스스로를 생산하고 있는데, 그것은 특히 진실로 귀착해 버리지 않는다. 인간 정신에 의해 만들어진 최고의 인위적 생산물, 그것은 바로 진실이고, 객관적 현실이기 때문이다. pp66~67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저런 문장들이 나열된다. 해당 소 챕터(이 책은 5개의 소 챕터로 돼 있다)를 3번 정도 읽으면 대충 이해할 수 있지만, 처음 책을 펼쳐 쭉쭉 읽어 나가면 도대체 뭔 소린지 맥락을 잡을 수 없다. 물론 내가 지하철에서 주로 읽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집에서 정독 해 본 결과 이건 매끄럽지 못한 번역 문장 탓이 크다는 걸 어느 정도 확신하게 됐다.

 

 

줄친 부분을 위주로 봐 보면, 역자는 우리말 통사구조를 아주 우습게 초월(?)하고 있다. ‘유일 세상의 자동 기록’ 이라니. ‘자동 기록’이 ‘사진’을 가리킨다 하더라도 이를 형용하는 구로 ‘유일 세상의’라니, 이건 뭐 영어 문장 해석 시간인가..

 

 

밑에 ‘사진적 행위’는 어떻고. 짜증의 파고가 오를 찰나 ‘인간의 손이 게임되지 않은’이 연결 된다. ‘썅~’ 소리가 절로 나며, 첨 읽을 때 책을 던져버릴 뻔했다. 이걸 문학을 전공한 사람이 번역했다? 하하, 그러고도 민음사는 1만원의 책값을 쳐 받는단 말인가?

 

 

마지막 두 문장은 매우 난해하다. 줄친 문장의 주어는 ‘세상은’이다. ‘세상은 특히 진실로 귀착해 버리지 않는다.’ 당췌 어색하다. 물론 반복해서 읽으면 어떤 의미인지 대략 알겠다. 아마도 이런 의미이겠지. 사진 렌즈에 비친 세상은 인간의 개입 없이(사진가의 의도가 있는 ‘찰칵’ 찍는 행위 없이) 존재하지만 진실이 아니라는 거. 진실은 인간에 의해 구현된 ‘사진(인위적 생산물)’이기에. 이 내용을 위처럼 번역해 놓은 거다.

 

 

처음 읽으면 맥락을 놓치기 일쑤다. 쉽게 표현할 수 있는 문장을 매우 난해하게 번역하는 게 이 번역자의 특기인가 보다. 물론 보드리야르의 문장 자체가 난해하고 수사적 기교가 현란해서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렇지만 그건 번역자의 몫이다. 보드리야르가 자국의 고등교육을 받는 프랑스인들이 한 번 읽어 무슨 소린지 모를 문장으로 책을 쓰지는 않았을 거다. 내가 기억하기론, 보드리야르는 글을 어렵게 쓰는 사상가가 절대 아니었다. 아무래도 이건 역자가 우리말 표현 능력이 딸려 읽기 힘들게 번역한 탓이 크다.

 

 

사실 이 책의 내용은 매우 간단하다. ‘시뮬라르크가 구현하는 세계의 극단은 어떨까’라는 것. 세상이 과학적으로 발달할수록, 세상이 객관화될수록 인간이라는 주체는 점점 제거되어가다가 마침내 소멸된다는 게 이 책의 핵심 요지이다. 읽고 나니, 이 책을 다 읽을 필요도 없었다. 첫 소 챕터인 ‘아르키메데스의 점’에서 아주 명확하게 정리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명명되고 나면, 필히 기울기 시작한다. 하나의 사물이 명명되고, 재현과 개념이 그 사물을 포박하는 순간은 바로 사물이 그 에너지를 상실하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그러다 결국엔 하나의 진실이 되거나 이데올로기로서 강제되고 만다. 프로이트에 의한 무의식의 발견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하나의 사물은 그 개념이 나타나면 사라지기 시작한다. (중략) 그러니까 실재는 개념 속에서 사그라진다. 그러나 그 반대의 움직임은 더욱 역설적이어서, 개념과 생각도(물론 환상, 유토피아, 꿈과 욕망도) 그 실현 속에서 사그라진다. 모든 것이 현실성 과도로 인해 사라지면, 그리고 인간이 무제한의 기술 전개 덕분에,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자기 가능성의 극단에 이를 수 있게 되면, 그러면 인간은 자신을 추방하는 인위적 세상에 자리를 넘기면서 사라진다. 어떤 의미에서는 최고단계의 유물론적 성과에 자리를 넘긴다. 그 세상은 완벽하게 객관적이다. 왜냐하면 더 이상 세상을 바라볼 사람이 아무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pp18-19

 

 

내가 좀 수고를 들여 본문을 인용한 것은 바로 위 부분이 이 책에 담겨 있는 핵심 사상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소챕터들, 즉 [사라짐의 예술], [헤게모니와 디지털에 대하여], [이미지에 가해진 폭력], [이중성] 등은 이 총론적 주장의 각론 쯤 된다. 이를 요약하면 이렇다.

 

 

예술 자체도 사라짐의 기초 위에서만 존재하고, 모든 현실의 갈등은 디지털화된 이미지의 세계 속에서 사라진다. 이미지에 가해진 컴퓨터 합성의 폭력으로 인해 인간 고유의 이중성은 인간을 버린다. 그러면 인간 고유의 이중성은 사물들 속으로 옮겨 가고, 모든 비평적 사유가 사라진다. 모든 것의 소실점이 완성되고, 모든 것은 침묵한다.

 

 

 

원래 이렇게 친절하고 자세한(?) 리뷰를 작성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 번역도 그리 좋지 않으면서, 가공할(?) 편집 능력을 발휘해 책을 비싸게 내놓는 민음사를 성토할 생각으로 글을 시작했다. 하지만 능력도 안 되면서 이 책의 핵심을 요약한 것은 독자들을 위해서다. 보드리야르의 마지막 유고라는 유혹으로 이 책을 구입하지 말라는 거다. (아, 품절인가. 불행 중 다행이다!) 읽지 않으면 더욱 좋고!

 

 

번역이 매우 x같이 돼 있어, 읽으면 혈압이 오르고 신경질이 도진다. 이것도 이해하지 못하다니, 내가 바보가 아닌가, 하는 심한 자괴감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걱정 마시라. 당신이 이해 못해서가 아니라 번역이 거지같아서 그런 거다. 번역에 대한 짜증은 위에서 이미 언급했다. 헌데 번역 문제는 민음사의 ‘편집 장난’에 비하면 애교 수준이다.

 

 

정말 심한 빡침을 감내해야 했다. 물론 내가 책을 구입해서 읽지는 않았지만, 출판사의 이런 관행은 정말 없어져야 하는 악폐 중 하나다. 독자들이 나서 박멸할 의지를 천명하지 않으면 출판사는 이런 만행을 서슴지 않고 지속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줄곧 이를 경험해 오고 있으니..

 

 

사실 2007년에 갤브레이스의 마지막 유고 <갤브레이스에게 듣는 경제의 진실>을 읽고 매우 빡쳤었다. 왜냐, 이 책이 A4 30장을 채울 수 없는 분량이었기에. (열 받아 내가 그냥 본문을 타이핑 해 봤다.) 그리고 책값은 1만원이나 쳐 받았다. 물론 나는 서평 도서로 받았다. 하지만 빡침을 억누를 수 없었다.

 

 

아, 근데 <사라짐에 대하여>는 정말 쌍 욕이 절로 나온다. 글자 수를 헤아려 보니, 이 책의 총 자수는 약14,154자 정도 된다. 오차 100자 범위 내. 얍삽한 편집이라, 일반 인문서와 비교를 해 봐야 민음사의 만행이 드러난다. 내가 요즘 읽고 있는 삼성출판사의 <죽음에 이르는 병>(오래 전 출간된 책이다. 1990년판)과 비교해 보면 정말 경악할 수준이다.

 

 

삼성출판사의 ‘세계의 사상’ 시리즈는 빡빡하게 편집돼 있는 걸로 정평이 나 있는 책이다. 한 페이지에 33줄. 한 줄당 약 30자. 자수를 비교해 보면 <사라짐에 대하여>는 <죽음에 이르는 병>의 14페이지(단7장) 분량밖에 안 된다. 이를 1만원에 판다? 출판사가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편집으로 책을 판단말인가. 적절한 비유일지 모르겠지만 새우깡을 1만원에 파는 격이랄까.

 

 

(저 분량을 1만원에 팔고 있는 민음사의 <사라짐에 대하여>)

 

 

그냥 제대로 편집해서, 하드커버 말고 페이퍼백으로 40페이지 분량으로 편집해서 5천원만 책정했어도 이런 성토는 하지 않겠다. 이건 출판사 양심의 문제다. 더 이상 이런 페이지 늘리기 식 편집은 독자를 우롱하는 짓이라는 걸, 출판사가 꼭 좀 알아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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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맥(漂麥) 2016-05-27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 또 공감!!!

yamoo 2016-05-30 13:53   좋아요 0 | URL
공감하신다니, 저와 같은 출판사의 만행을 겪으신 거군요~^^
출판사의 저런 편집 만행은 없어져야 합니다!

cyrus 2016-05-28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량이 많지 않은 책에 터무니없이 가격을 높게 책정하면, 불 보듯 뻔합니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1만 원이라면 독자들이 지갑을 열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현실을 그렇지 않죠. ^^;;

yamoo 2016-05-30 13:54   좋아요 0 | URL
도서관에서 1차적으로 사 주니, 저런 만행을 저지르는 거 같아요. 도서관용으로만 적은 부수 인쇄해서요. 일반 독자가 사려면 진짜 열받지요. 제발 저런 편집 만행은 없어졌으면 합니다~

oren 2016-05-28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0쪽이 넘고 가격도 1만원이나 하는 책이지만, 여느 다른 책들처럼 빽빽한 편집으로 바꿀 경우 고작 14쪽 분량에 불과하다니 정말 `편집 기술`이 놀랍네요.

그나저나 삼성출판사에서 나온 ‘세계의 사상’ 시리즈를 정말 오랫만에 실물로 다시 보니 너무 반갑네요. 제가 20대 초반에 주로 읽었던 책들이 바로 삼성출판사에서 나온 저 시리즈였거든요. 지금은 실물로는 단 한 권도 가지고 있질 않으니, 그 책의 모습만 봐도 감개무량입니다. 그 당시에 저 책들에 코를 박고 책을 읽던 시절에 맡았던 `향기로운 책냄새`가 제 코끝을 다시 스치는 듯한 착각마저 생길 정도로요.. 그 사라진 책들과 냄새들이 너무 그립네요...

yamoo 2016-05-30 13:56   좋아요 0 | URL
저는 이 시리즈를 차근차근 한 권씩 모아서 이제 시리즈 전집을 다 구비했습니다. 그러니 이 책 판본의 역사가 들어오더군요. 세로쓰기에서부터 시작해서 하얀 바탕에 파란 색 표지, 하드 커버에 이르기까지 4종류 이상이나 되는 거 같습니다.

읽어보니 지금도 당시 번역이 상당히 괜찮았던 걸로 생각하고, 지금도 찾아 읽고 있는 와중에 있습니다^^

노너 2016-10-17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한 편집과 디자인에 대해서는 백번 동감합니다. 다만 분량과 가격에 대한 의견은 동의하기 어렵네요. 중세시대처럼 책을 근수 달아서 파는 것이 아니고, 저로서는 이론서나 문학서 중에서도 고도로 짜인 책과 짜깁기 책이 있다면 전자가 몇배 비싼 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책 가격에 대한 저항이 너무 높아요. 무엇보다 이 책의 원서는 물론 한국어판처럼 `코드`로 한쪽을 채우는 짓은 안했고 `브로셔` 시리즈로 나왔지만 9.6유로입니다.

yamoo 2016-10-19 20:56   좋아요 0 | URL
책을 근수달아서 파는 곳도 있습니다~ --;; 신개념 헌책방으로 제가 많이 구매하고 있습니다. ㅎㅎ 중세가 아니라도 책을 근수로 파는 곳도 있음을 알려드립니다..ㅎ

9.6유로 정도에 맞게 제대로 만들면 좀 비싼 책이구나 하겠지만 편집이 저러니, 욕을 할 수밖에요..--;;
 

비도 오고 기분도 꿀꿀한데, 사진 한 장 때문에 너무 웃어 우울한 기분이 날라갔네요..ㅎㅎㅎ

 

뒷북일 수 있지만, 혹시 모르니, 재 서재에 들르신 분 중 이 사진으로 시원하게 웃고 가셨으면 합니다~ㅎ

 

전 너무 재밌게 봐서, 배가 막 아팠다는..

 

동물, 특히 개 기르시는 분들이 보시면 훨씬 재밌을 듯..ㅎ

 

 

 

발 좀 씻지....개가 죽을라고 하네요...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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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6-05-24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
애완견 키우는 한 사람으로서 정말 보는 순간 빵 터지네요.
고맙습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

yamoo 2016-05-27 14:05   좋아요 0 | URL
저 이거 보고 첨에 웃겨 밥도 못 먹었슴다~ㅎㅎ
근데, 이 거 본 분들 꽤 많은 듯..ㅎ

아, 스텔라 님두 애완견 키우시는 군요~ 요즘 반려 동물 학대로 뉴스에 연일 이슈화 되고 있습니다. 싫증 나면 보린다는 군요. 헐~

cyrus 2016-05-24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개의 후각은 알아줘야 합니다. ㅎㅎㅎㅎ

yamoo 2016-05-27 14:06   좋아요 0 | URL
얼마나 냄새가 심했으면 저랬을까요? 아님, 순전히 편집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만...어쨌든 재밌는 사진임에는 틀림 없어요..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