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량소녀, 너를 응원해!
도이 노부히로 감독, 이토 아츠시 외 출연 / 아이브엔터테인먼트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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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어김없이 수능이 치러졌다. 불수능이라고 아우성이지만 등급컷은 작년보다 더 오른단다. 언론에서도 고교 과정에 배우지 않은 이론들이 국어영역 비문학에 대거 출제됐다고 호들갑이다. 경제학에서 ‘오버슈팅 이론’이 출제되어 7년차 한국은행원도 6문제 중 2문제를 틀렸다고.

 

 

사실 수능에서 고교 과정을 벗어나는 수준의 지문들이 출제되어 온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학평이나 평가원에서 연중 몇 차례 실시하는 모의고사 비문학 지문 역시 대개가 대학 학부 교양서나 교과서에서 출제되고 있다고 한다.

 

 

학원을 운영하는 한 친구의 전언에 의하면 역대 수능에서 수험생들을 소위 멘붕에 빠뜨리게 했던 지문들은 모두가 대학 학부 수준에서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이론들이라고. 그레고리력을 다룬 지문과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에서 출제된 지문 그리고 채권과 이자율의 관계를 다룬 지문들이 소위 역대급 난도를 자랑했다나 뭐라나.

 

 

어느 정도 어렵길래 ‘역대급’운운 하나해서 살펴보니, 말문이 막힐 정도였다. 이걸 정말 시간 내에 풀라는 문제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마도 고교생 대부분은 고교 수업 과정 중에 들어보지도 못한 이론일 거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무리 대학수학 능력을 측정하는 적성시험일지라도 이건 해도 너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수능 만점자들이 복수로 나온다는 사실에 이르면 저절로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올해도 여전히 만점자가 여럿 나오겠지. 신문에 보니, 가채점 결과 만점자가 9명에 이른다니, 열심히 공부한 일반 고교생들이 자괴감이 들만도 하겠다는 생각이다.

 

 

아울러 올해 수능에서도 어김없이 수험 무용담의 신화는 반복되겠지. ‘만년 꼴지가 1년 만에 명문대에 입성하다’, ‘학원과 과외 수업도 듣지 않고 만점을 받은 아무개’, ‘지체부자유로 당당히 일류대에 합격한 아무개’ 등등. 수능 성적표가 배부되는 날 이런 기사는 우리 모두가 심심찮게 보아온 언론의 헤드라인 뉴스다.

 

 

일본에서도 이런 수험 무용담이 회자되나 보다. 포항 지진 여파로 수능이 일주일로 연기된 바로 그 시점에서 영화 한 편을 감상했다. 수능 시즌을 맞아 수험생을 응원한다는 취지로 케이블 TV 영화 채널에서 방영해 준 영화였다. 타이틀은 <불량소녀, 너를 응원해>. 전교 꼴찌의 문제 소녀가 약 1년 반 만에 명문 게이오대 정책학부에 합격한다는 내용의 영화다.

 

 

이게 실화라는 게 꽤 놀랍지만 개인적으로는 이것보다 더한 무용담을 접해 봤기에 내겐 좀 약했다. 하지만 이 영화의 감상평을 찾아보면 본 사람들의 인생영화라는 내용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도 그럴것이 수험생들에게 ‘나도 할 수 있다’는 최면을 걸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재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자. 학교 담임 선생에게 ‘쓰레기’라고 불려지고, 저 쓰레기가 게이오대에 붙으면 내가 발가벗고 물구나무 서 있겠다는 약속을 반 학생들에게 공공연하게 할 정도면 소위 ‘구제불능’의 문제아란 소리다.

 

 

하지만 그거 아시는가? 문제아 중 일부는 천재라는 사실을. 문제아 중에 과학자나 불세출의 배우 또는 스포츠 스타가 탄생하는 걸 우리가 숱하게 목도했었다. 태도가 불량하고 공부를 하지 않는다고 모두가 쓰레기는 아닌 거다.

 

 

그래도 우리는 어느 정도 95%의 확률로 확신할 수 있다. 반 꼴등의 저 아이가 연대에 갈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는 것을. 이건 우리가 체험적으로 그리고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사실이다. 왜? 중학교 수준의 영어나 수학도 안 되는 저 아이가 나보다 좋은 대학에 간다는 건 있을 수도 없으니까.

 

 

다시 영화 얘길 해 보자. <불량소녀>의 주인공 사야카(아리무라 카스미 역)는 놀기 좋아하는 4차원 고교 2년생. 초등학교 때 친구를 못 사귀어 왕따를 당한 경험으로 인해 중학교 이후 친구가 인생의 제1의 목표가 됐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자기를 친구로 대해 준 3명의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노는 게 인생의 낙. 성적은 꼴찌라도 매일이 행복한 소녀.

 

 

고교 2학년 여름방학. 이제 슬슬 대학을 정해야 하는 시기. 사야카는 어머니의 권유로 문제아들을 대학에 보내주는 학원에 등록한다. 거기서 사야카의 실력이 드러난다. 초등학교 4학년 수준의 테스트를 모두 0점으로 돌파한다. 놀라운 건 모든 문제의 답을 채웠다는 거. 물론 오답으로.

 

 

근데 그 오답을 쓴 이유가 기발하다. strong의 뜻을 ‘이야기가 길다’로 알고, story가 long하다고 설명한다. 성덕태자를 불쌍하다고 하면서 뚱뚱한 여자라서 이런 이름을 지었다는 게 불쌍하다고(‘쇼토쿠’를 '세이토쿠타코'로 읽음. 일본어 한자 태(太)는 의미가 뚱뚱하다).

 

 

학원 선생 츠보타(이토 아츠시 역)는 이런 기상천외한 답을 말하는 사야카에게 ‘발상이 천재급’이라고 칭찬한다. 일본이 4개의 큰 섬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모르고, 4방위 표시 기호도 모르는 이 ‘비리갸루’ 사야카에게 학원 선생은 가능성을 본다. 발상 자체가 기발하다는 것으로 그 가능성을 가늠하고 사야카에게 장난반 진심반으로 게이오대를 추천한다.

 

멋진 남자가 많을 것 같다는 단순한 인상으로 게이오를 선택한 사야카는 이후 누구나 예상가능한 시나리오로 명문 게이오에 합격한다. 중간 중간 가족사에 대한 짠한 얘기가 나오긴 하는데, 이는 모두 아는 것처럼 성공 신화에 곧잘 등장하는 약방의 감초같은 야그다.

 

 

어쨌거나 비루갸루 사야카는 명문대생이 된다. 이 뻔한 무용담이 재밌냐고? 물론 난 기대를 하나도 하지 않고 우연히 봤다. 근데, 감독이 진짜 영화를 기막히게 연출했다. 뻔하디 뻔한 야그를 아주 재미있게 본 것이다. 그것도 2번씩이나 봤다. 이런 영화를 흡입력 있게 만들기는 좀처럼 쉽지 않은데, 도이 노부히로 감독은 매우 수완이 좋은 감독인 듯하다.

 

 

소재는 B급이지만 영화 자체는 무척 몰입해서 볼 수 있다. 근데, 이런 무용담이 끊임없이 생산되는 사회가 좋은 사회인가? 난 영화를 보고 낄낄거린 후에 이런 생각을 떨칠 수가 없는 거다. 왜 우린 이런 무용담을 미덕으로 삼아 노오력을 강요받아야 하는 걸까? 과연 노력한다고 사야카 같은 학생이 탄생하기는 하는 걸까?

 

 

물론 앞에서 살짝 얘기했다시피 난 이 실화가 별루였다. 왜냐하면 고3시절 <아! 서울대학>이라는 대학합격 수기 책에 안호상이라는 인물의 무용담을 이미 봤기에 그렇다. 이 사람은 내가 여태껏 본 수험 무용담에 있어서 최고봉에 있는 두 명 중 한명이다. (다른 한 사람은 사법시험을 최단기간에 합격한 김선수; 300명 미만 뽑을 당시 김선수 씨는 18개월만에 합격했다)

 

 

이 사람은 학창 시절 내내 불량배였다.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성적은 전교 뒤에서 3등. 학력 수준은 초등수준. 고교 중퇴자가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알파벳부터 시작해서 검정고시를 통과해 학력고사에 이르기까지 안호상 씨가 보여준 무용담은 인간승리 그 자체였다.

 

 

갸루 사야카보다 안호상이 훨씬 대단한 것은 그가 모든 걸 혼자 해냈다는 데 있다. 어느 누구도 조언해주거나 공부를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다. 사야카의 성공은 그녀의 성공을 응원해주는 가족과 츠보타 선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누구보다 사야카의 가능성을 알아본 츠보타 선생이 없었다면 단연코 사야카의 성공은 있을 수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성공한 것도 대단한 것이지만, 그런 도움 없이 스스로 모든 역경을 이긴 게 무용담으로써는 훨씬 가치가 높지 않을까. 그래서 사야카의 입시 성공을 담은 영화가 약간 별루였다. 츠보타가 없었다면 게이오 합격은 없었기에.

 

 

이를 뒤집어 말하면 이렇다. 학생 개개인의 가능성을 알고 응원해주면, 낙오자가 되는 학생들을 현저히 줄일 수 있다는 거. 이 영화의 방점은 아마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한다. 가능성만을 가지고서도 그 학생을 믿고 응원을 보내줄 수 있는 학교 문화가 절실하다는 말이다. 이게 공교육이 목표로 해야 하는 제1의 원칙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런 무용담이 회자되고 권할만한 덕목으로 통용되는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니다. 난 적어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회 구조 하에서는 끊임없이 경쟁을 이어 나가야 하는 삶을 강요받기 때문이다. 대학 입시는 채용 시험(공무원 공채 시험 포함)으로 승진 시험으로 그리고 자격증 시험으로 끊임없이 이어진다.

 

 

이 시험들의 본질은 선발 인원 안에 내가 들어가야 성공이다. 남을 제칠 수 없다면 내가 실패하는 구조다. 모든 수험생을 단일한 시험으로 선발하는 방식은 응시자들을 등수로 줄을 세울 수밖에 없는 구조다. 수능과 고시로 대변되는 지필시험이 공정할 수 있는 시험이긴 하지만 사회의 건전성 면에서 보면 권할만한 선발 제도는 아니다.

 

 

수험 무용담 뒤에 숨어 있는 주입식 교육의 획일화는 현대 사회가 탈피해야 하는 근대의 마지막 부산물이기에. 수많은 시간을 암기와 문제 풀이에 투여하지 않고도 자신의 적성과 흥미를 살릴 수 있는 시험이 진정한 교육제도일 거다. 배우는 게 재미있고 내가 성장하는 기쁨을 맛볼 수 있는 시험, 개인에게 특화된 시험이 건전한 사회로 가는 교육의 시발점이자 목표일 것이다.

 

 

수험 무용담이 회자되는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니지만, 가능성만을 보고 학생을 응원하는 사회는 이보다 나은 사회인 것만은 분명하다. <불량소녀>가 현 입시 시스템 자체에서 그나마 희망을 보여줄 수 있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츠보타와 같은 선생이 불량한 사야카와 같은 학생에게서도 가능성을 읽어 낼 수 있는 능력 말이다.

 

 

그래서 이 영화 <불량소녀, 너를 응원해>는 획일화 된 시험 점수로 서열화하는 입시 제도의 한계와 희망을 동시에 놓고 생각해 볼 수 있는 영화라 할 수 있다. 우리 누구도 현행 수능 제도가 우리 개인의 행복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교육과 입시는 바뀌어야 한다.

 

 

하지만 단 번에 바꿀 수도 또 바뀌어 질 수도 없을 거다. 그 과도기적 모델이 필요한데, 이 영화가 그 지점을 충분히 잘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획일화된 교육제도에서는 누구나 경쟁에 밀려 실패자로 전락할 수 있으니까. 실패자로 낙인찍지 말고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여 그 학생을 응원해 주는 문화가 정착하면 좋을 듯하다.

 

 

수능이 끝났다. 시험을 잘 본 학생보다 망친 학생들이 더 많을 것이다. 이들 수험생과 부모님들에게 이 영화를 함께 보길 추천드린다. 좋지 않은 교육 제도 속에서 작은 희망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한다. 일선 학교 선생님들은 말할 것도 없고! 츠보타 선생이 될지 니시무라 선생(사야카의 학교 담임)이 될지 자신은 알 테니까~^^

 

 

수험 성공 무용담이 회자되는 사회보다는 학생 개개인의 가능성을 열열히 응원해 주는 사회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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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11-27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amoo님 그간 격조했어요^^ 반갑습니다

yamoo 2017-11-29 18:08   좋아요 0 | URL
쇼 님 반갑습니다. 제가 넘 게을러서욤..ㅎ 17년을 욜심히 마무리해야 겠습니다. 알라딘 서재에도 밀린 것들도 좀 쓰고..^^;;

stella.K 2017-11-28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이제 개천에서 용 안 난다고 하지만
그래도 아주 없지는 않나 보네요.
근데 야무님 글 읽으니 수능은 좀 미친 것 같습니다.
그런 문제가 나오면 3년 동안 죽어라 공부할 필요가 뭐가 있는 건지?
그래놓고 해마다 수능날 거의 비슷한 뉴스 멘트하잖아요. ㅉ

영화 개봉 때 못 본 것 같은데 저런 영화가 있었군요.

yamoo 2017-11-29 18:11   좋아요 0 | URL
이 영화 못 보셨다면, 한 번 보셔도 무방할 거에요..뻔한 소재를 참 흡입력 있게 연출했더라구요.

수능은 미친 시험이 맞아요. 적성시험을 표방했으면 적성시험으로 밀고 나가야 하는데, 그냥 학력고사와 적성시험의 어중간한 포지션으로 전락한거 같아요. 뭐, 자격고사 시험으로 바뀌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만..^^;;

cyrus 2017-11-28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경험에 따르면 학업 성적이 좋지 않은 사람들은 학업 성적이 좋은 사람들보다 사회 생활을 잘하고, 자기 적성에 맞는 직업을 선택하는 편이에요.

yamoo 2017-11-29 18:13   좋아요 0 | URL
그래요. 그런 경향이 많은 거 같아요. 거기다가 즐겁게들 일하는 듯해요. 학업 성적이 좋다는 건, 암기를 잘한다는 건데, 암기를 요하지 않는 분야는 많거든요. 적성에 맞는 직업을 택하는 게 갑인 건 분명해 보입니다. 문제는 자기 적성이 뭔지 고교 졸업까지 잘 모른다는 것이죠..ㅎ
근데 정부는 고교학점 선택제를 실행한다니, 참으로 웃기는 노릇입니다.ㅎ

카스피 2017-11-30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량소녀가 실화이긴 한데 사야카가 합격한 게이오대가 우리가 익히아는 그 명문 게이오대가 아니라고 하더군요^^

yamoo 2017-12-07 20:46   좋아요 0 | URL
오랜만입니다, 카스피 님!^^

헐~ 그런가요? 우리가 익히 아는 그 명문 게이오가 아니라구요?! 영화에서는 명문 게이오라고 나와서요. 실화로 바탕으로 한 거라고...헐~ 아니라면 반전인데요!
 
파리대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
윌리엄 골딩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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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에 나타난 인간관의 재검토 :

인간의 본성은 과연 악한가

 

 

 

들어가며

 

 

2000년 무렵, 나는 당시 일본 아니메에 빠져있었다. <신세기 에반겔리온>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 ‘저주받은 걸작’이라고 회자되는 작품을 추천받았다. 추천작은 <무한의 리바이어스>. 26부작을 단 이틀에 다 해치워버렸다. 그리고 애니 리뷰 사이트에 ‘15소년 표류기의 우주버전’이라는 타이틀로 리뷰를 썼다. 얼마 안가 누군가의 댓글이 달렸는데, 이랬다.

 

 

“<15소년 표류기> 보다는 <파리대왕>에 가깝고, 타니구치 고로우 감독이 아마도 <파리대왕>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기획한 거 같다.”

 

 

그 즉시 <파리대왕>을 구해 읽어 보았다. 당시에는 청목사 본으로 읽었는데, 정말 <무한의 리바이어스>와 상당히 흡사해서 놀랐더랬다. 주로 애니와 소설의 인물 분석에 초점을 맞춰 본 기억이 있다. 애니가 소설과 다른 점이라면 소녀들이 약간 등장한다는 정도.

 

 

지난 주 월요일. 간만에 독서모임 카페를 방문했는데, 7월 2일 주제도서가 <파리대왕>(민음사, 2007)이었다. 이미 읽은 작품이었기에, 갈까 말까 망설였다. 세세한 내용이 기억이 나지 않아, 다시 읽을 겸 민음사 본을 펴들었다.

 

 

그때가 저녁 7시 무렵쯤이었는데, 다음날 잠들기 전까지 모두 읽을 수 있었다. 번역이 안 좋아 투덜거리면서도, 몰입할 수밖에 없는 마력이 있었다. 세계문학을 이리도 재미있게 읽은 건, 페데리코 안다시의 <해부학자>이후 첨이었고, 민음사 시리즈로도 첨이었다.

 

 

그리고는 소담출판사 본과 문예출판사 본을 모두 구입하여 다시 비교해 보면서 읽었다. 역시 소문대로 문예본의 번역이 가장 좋았고, 소담본이 그냥 읽을 만한 수준. 민음사 본이 완전 최악이었다. <파리대왕>에 대한 번역 불만은 다음 기회에 페이퍼를 통해 들여다 볼 생각이다.

 

 

어쨌거나 도합 3번을 읽으니, 다른 분들의 생각이 궁금하여 알라딘 리뷰를 싹 훑어보았다. 논문도 몇 편 읽어 보았다. 헌데 그 내용이 대부분 비슷비슷했다. ‘이성 vs 본능’, ‘소라, 안경, 짐승 등에 대한 상징성’, ‘랠프와 잭의 갈등’ 등의 주제가 ‘인간의 야만적 본성’으로 수렴되고 있었다. 내가 리뷰를 쓴다고 해서 앞서 논의된 글들과 다를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리뷰쓰기를 포기했다. 헌데 토론에 참석하려고 보니,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이 와중에 리뷰의 윤곽을 잡을 수 있었다. 그 단초는 작가 골딩이 제시해 주었다. ‘악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라는 질문에 골딩은 “악은 환경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숨어있다”고 봤다. 이 리뷰는 이에 대한 반론이다.

 

 

 

작품의 줄거리는 매우 간단하다. 핵전쟁이 발발한 시기에 한 무리의 아이를 태운 비행기가 바다 한 가운데의 무인도에 불시착한다. 살아남은 아이들은 만 4세에서 12세 사이의 소년들로, 랠프라는 아이가 대장이 되어 무리를 이끌지만, 잭이라는 아이는 이에 반발하여 랠프의 무리를 이탈한다. 이후 다수의 아이들을 자기편으로 모은 잭은 자기와는 생각이 다른 랠프의 무리를 하나씩 굴복시키고, 급기야 혼자만 남은 랠프를 죽이기 위해 섬의 숲을 태운다. 랠프가 잭의 무리에 의해 거의 죽게 되기 직전, 거대한 연기를 본 해군에 의해 아이들 모두가 구조된다. (더 자세한 줄거리는 ‘파리대왕’으로 검색만하면 쉽게 찾을 수 있기에, 궁금하신 분들은 찾아보시길!)

 

 

 

 

괴물(짐승)과 파리대왕의 실체

 

 

이 작품에서 괴물(짐승)은 끊임없이 회자된다. 급기야 죽은 낙하산 병사를 괴물의 실체로 오인하기도 한다. 그 와중에 잭은 랠프의 무리로부터 떨어져나가게 된다. 랠프보다 더 어린 꼬마들은 유령 꿈을 꾸고, 괴물이 바다에서 올라온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린다. 침묵하는 자연의 괴괴함에 이 괴물에 대한 소문은 아이들의 불안 심리를 가중시킨다.

 

 

이때마다 사이먼은 '괴물은 우리(사람) 자체가 아닐까' 라는 내적 독백에 가까운 말을 우물거린다. 그러다가 사이먼은 잭 일행이 멧돼지를 잡아 그 머리를 베어 꼬챙이에 꼽아 놓은 곳에 이른다. 돼지머리에 달라붙은 수많은 파리떼가 곧 파리대왕이었다. 파리대왕은 이를 응시하고 있는 사이먼에게 말을 건다.

 

 

"나 같은 짐승을 너희들이 사냥을 해서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참 가소로운 일이야!"하고 그 돼지머리는 말하였다. 그러자 순간 숲과 흐릿하게 식별할 수 있는 장소들이 웃음소리를 흉내 내듯 하면서 메아리쳤다. "넌 그것을 알고 있었지? 내가 너희들의 일부분이란 것을. 아주 가깝고 가까운 일부분이란 말이야. 왜 모든 것이 틀려먹었는가, 왜 모든 것이 지금처럼 돼버렸는가 하면 모두 내 탓인거야." 웃음소리가 다시 떨리며 메아리쳤다. (p214)

 

 

이처럼 작가는 파리대왕을 대신에 이 소설의 주제의식을 전달한다. '나 같은 짐승'이란 인간 본성에 내재하고 있는 악이자 광기이다. 알려진 것처럼 이 소설의 모티프는 1858년에 발표된 밸런타인의 소설 <산호섬>이다. 이는 본문 p49에도 등장한다. <산호섬>은 밸런타인 당대의 낙천적인 시대상을 대변하여,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소설이다. 인간은 섬의 원주민들까지도 교화할 수 있는 선천적인 능력이 있다는 것으로 그려진다. 한마디로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라는 거다.

 

 

헌데 <파리대왕>은 <산호섬>과 거기에 나타나 있는 낙천적 인간관을 완전히 뒤집는다. 이 완벽한 원초적 상태에서 사회에 때 묻지 않은 어린아이들이 보여주는 파괴적 행위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악하다는 성악설을 뒷받침한다. 골딩에 따르면 <파리대왕>의 주제를 "인간 본성의 결함에서 사회의 결함의 근원을 찾아내려는 것이 이 작품의 주제다."라고 했는데, 파리대왕을 대신해 사이먼에게 속삭이고 있는 위의 인용구가 이를 집약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다 하겠다.

 

 

 

 

과연 인간은 악한 존재인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전통적으로 이 작품은 인간 본성에 대한 주제로 많이 읽혀 왔다. 랠프는 이성을 기반으로 한 인간 본성의 선한 쪽, 잭은 본능을 기반으로 한 인간의 악한 본성 쪽으로 정리하여, 야만적인 본능이 선한 본성을 누른다는 도식으로 많이 논평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몇 편의 논문 제목만 검색해도 이를 알 수 있을 정도.

 

골딩 자신도 위에서 살펴봤다시피 이 작품을 '인간 본성의 결함에서 사회 결함의 근원을 찾나내려는' 의도에서 작품을 구상했다. 골딩은 자신이 살았던 시대에 2차 세계대전을 겪었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골딩은 인간 개개인이 악하다고 본 듯하다. 그래서 밸런타인의 <산호섬>을 패러디하여(<산호섬>의 주인공도 랠프와 잭이다) 그와 완벽히 대척점에 있는 소설을 세상에 내놓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작품을 매우 감명 깊게 읽은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 책의 주제가 '성악설에 기반한 작품'이라는 거(악은 인간의 내면에 있다)에 반론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주지하다시피 인간 본성에 대한 논쟁은 성선설과 성악설로 양분된다. 전자는 맹자로, 후자는 순자로 대변된다. 문제는 이 도식이 칼로 무베듯 양분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건 가능성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간으로 태어난 아기는 선악을 알지 못한다. 이 아기는 자라면서 선해질 수도 있고 악해질 수도 있다. 결정된 것은 없고, 환경에 따른 이 아이의 반응으로 선한 인간이 될 수도 있고 악한 인간이 될 수도 있다. 이도 반반씩 섞여 있는 존재로 성장하게 되지, 완벽히 악한 인간이란 없고, 완벽히 선한 인간도 없다.

 

 

대다수의 논문과 리뷰들의 작품 분석에 따르면, 랠프는 이성에 기반한 선한 쪽으로, 잭은 본능에 기반한 악한 쪽으로 양분한다. 순진무구한 아이들이 무인도에서 생활하면서 자연스럽게 폭력과 광기에 휩싸여 악한 인간으로 타락한다. 선한 본성은 약해지거나 악에 종속된다. 그리하여 인간의 본성은 악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과연 이런 단순한 이분법적 도식으로 이 소설의 상황을 정리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나는 랠프가 이성을 대변한다고 보지도 않고, 잭이 본능을 대변한다고 파악되지도 않는다. 랠프와 잭 모두 본능적으로 살기 위해 이성과 본능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는 인물로 파악된다. 단지 랠프가 규칙과 질서를 우선시한 반면 잭은 직관을 우선시했다는 차이밖에 없다. 악한 것은 없다. 극한 상황적 두려움에 대한 인간의 대응 방식의 차이이지, 악이나 선이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다가 그대로 발현된다는 논리는 상황 자체를 너무 안이하게 생각한 귀결이다.

 

 

물론 이 섬에서는 두 차례의 살인이 발생했다. 결과적으로만 보면 멧돼지 사냥이 인간 사냥으로 확대된 모습처럼 보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광기와 본능을 구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광기는 본능이 아니다(물론 이에 대한 논증도 필요하지만). 본능을 넘어선 도착에 가깝다. 그러면 광기는 악인가? 악은 도대체 무엇인가? 여기에 이르면, 처음의 단순한 도식이었던 ‘잭은 악, 랠프는 선’을 다시 생각해 볼 수밖에 없다.

 

 

 

 

나오며

 

 

<파리대왕>을 다시 읽으면서, 한 가지 새로운 변화(전에는 랠프가 무척 불쌍하다고 생각)는 내가 잭에게 무척 감정이입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잭은 매우 직관적 사고를 하는 타입이다. 거기에 권력욕도 있다. 자신의 주도로 멧돼지를 사냥하여 그 고기를 모두에게 제공하고 싶다는 열망을 간직하고 있다. 위기의 상황에서는 잭의 리더십이 절차를 중시하는 랠프의 리더십보다 훨씬 더 강력할 수 있다. 무인도와 같은 극한 상황에서는 언제 어떤 위험이 닥칠지 알 수 없어, 순간순간 위기에 맞게 임기응변을 잘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에너지가 너무 강하여 살상과 광기에 휩싸이게 된 것은 안타깝지만. 위에서도 말했다시피 상황에 대응하는 잭의 방식은 동물적 감각을 중시하는 현대 기업인들과 매우 비슷한 면이 많다. 작금의 시대는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를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시대이기에, 직관에 기반한 삶의 방식이 무척 요구되는 시대이기도 하다. 광기로 흐르지만 않는다면, 랠프의 방식보다 훨씬 더 나은 방식일 수 있다. 무엇보다 잭은 현재를 즐기는 재미의 본질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기까지 하니까! (잭이 지향하는 삶의 방식은 광기어린 행위에 가려져서 그렇지 무척 긍정적인 요소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잭이 광기에 휩쓸려 돼지를 죽이고 랠프까지 죽이려고 한 것은 외부의 두려운 환경을 극복하려고 했기 때문이지 본래부터 갖고 있는 악한 본성 때문인 것은 아니다. (인간은 상황의 산물이지 본성적 존재가 결코 아님을 상개해 보라!) 그런고로 이 소설의 인물 잭은 재평가 되어야만 하고, 인간의 악한 본성이 인간 내면에서 발현한다는 식의 성악설적 입장 역시 재고되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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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인생 2017-07-06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생각할 거리가 많은 책인 것 같습니다. 획일적인 사고는 위험한듯 보이네요.

yamoo 2017-07-07 22:26   좋아요 0 | URL
네, 생각할 거리를 아주 많이 던져주는 작품인 것은 분명합니다. 정치학 서적으로도 읽을 수 있고, 모험 소설로도 읽을 수 있으며, 인간 본성에 관한 철학적 우화로도 읽을 수 있으니까요. 다각도로 볼 수 있는 열린 작품 같아 좋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07-06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리대왕 진짜 기똥차게 재미있었습니다. 엄두 두 척 !

yamoo 2017-07-07 22:29   좋아요 0 | URL
진짜 기똥차게 재밌더라구요. 생각할 거리두 많고...많이 알려진 문학 작품 치고는 번역된 판이 별로 없어 놀랐습니다. 무엇보다 서울대 동서고전 200권에 빠져 있는지라, 각종 고전을 소개하는 해제집에 상당수 책이 파리대왕을 언급조차 안하더라구요. 고전해제집 10에 8은 파리대왕이 없었습니다~ 개츠비, 호밀밭 등은 무자게 맘이 소개되고 번역판들이 넘치는데 말이죠...좀 요상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ㅎ

곰곰생각하는발 2017-07-06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오늘 읽은 글 가운데 반팔 와이셔츠 패션은 똥이다, 복식 문화에 반팔 와이셔츠가 없으며, 최악의 패션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패션 칼럼리스트 글을 읽었는데 재미있더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원래 양복을 입으려면 한여름에도 긴팔 와이셔츠를 입는다고 하네요. 그게 비즈니스 예의라고 말이죠..

yamoo 2017-07-07 22:42   좋아요 0 | URL
음....그니깐 유럽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그런 경향이 강한 듯합니다. 남성 패션이 발달한 유럽은 대체로 해양성 기후거나 지중해성 기후가 강해 우리나라처럼 덥고 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네들은 긴팔 셔츠를 여름에 접어서 입죠. 그런게 관행으로 굳어서 반팔 셔츠는 에티켓에 어긋나는 것으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헌데 우리나라는 사정이 다르죠. 우리나라 더위는 동남아의 여름만큼 덥고 습합니다.35도를 넘는데, 습도가 높으면 긴팔 셔츠를 입는 게 완전 곤욕이죠. 거기에 재킷을 걸친다? 더위에 약산 사람들은 거이 미쳐버릴 거에요. 더위에 강한 사람도 땀으로 범벅이가 될테고...그러니 우리나라에서 반팔셔츠를 입지 않고 여름을 나긴 매우 힘들겁니다. 패션은 그 나라의 문화적 환경을 도외시할 수 없습니다. 상황에 맞게 입어야죠. 이런 직장인들의 애환을 덜고자 오래 전에 엑스팀에서 ‘패션정글‘이라는 가이드 프로도 만든 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한 여름에 반팔 셔츠, 입을 수 있습니다! 단, 타이는 매지 않는 게 좋아요. 타이를 매고 입으려면 반드시 안감이 없는 얇은 여름용 재킷을 입는 게 좋습니다. 소위 남방이라고 부르는 얇은 소재로 나온 재킷이 있는데, 그런 걸 입으면 되죠.
말씀하신 그 패션 칼럼리스트가 말하는 최악의 패션이라는 건 타이를 맨 상태에서 반팔 셔츠만 입고 돌아다닌 케이스인거 같습니다. 타이를 매지 않으면야 그리 꼴풀견은 아니고, 봐줄 만한 정도입니다.

아, 근데....와이셔츠라는 단어 대신 그냥 셔츠 또는 드레스 셔츠를 애용해 주세요. 패션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와이셔츠라는 단어에 경기를 일으키는 듯합니다..ㅎㅎ

oren 2017-07-06 22: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을 읽고 제가 독후감을 쓴 날이 1984.9.21.(금)이었네요. 지금 다시 그걸 읽어 봐도 도대체 무슨 소린지 분명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데, 어쨌든 장황하게 소설 내용을 잔뜩 분석해 놓은 걸 보면(무려 11쪽!) 꽤나 감명깊게 읽은 책이었음은 분명한 듯합니다. 제 독후감의 마지막 구절이 자못 거창해서 조금 우습기도 하구요. 언제 기회가 되면 yamoo 님의 독후감을 염두에 두고 다시 한번 찬찬히 읽어봐야겠습니다.
* * *
…… 언젠가는 닥쳐올 우주 시대가 벌써 1954년에 한 예리한 작가에 의해 파헤쳐져 있다. 인간의 예지는 놀랄 만하다. 한 위대한 작품을 대할 때 보통의 사람들은 작가가 의도하고 추구하는 목적을 포착하지 못하고 그냥 주마간산격으로 보고 만다. 그러나 예지의 스펙트럼을 통해 보면 무수한 언어의 이합집산들의 자태가 얼마나 조화롭고 질서정연하고 창조적인 현란한 파노라마인지 알게 될 것이다.(섬 전체가 타버리는 걸 ‘지구의 몰락‘으로, 사이먼의 죽음을 ‘예수의 죽음‘으로, 해군장교의 등장을 ‘우주인의 출현‘으로 보고 이런 글을 썼던 듯해요...)

yamoo 2017-07-07 22:47   좋아요 1 | URL
우와! 오렌 님은 아주 젊은 시절부터 세계문학을 탐독하셨었군요! 책을 아주 좋아하셨고 많이 읽으신 듯합니다. 좋은 책으로만요~ㅎ

그 시절 파리대왕을 읽고 쓰신 내용....엄청나네요! 젊은 시절 책을 읽고 그런 정도로 생각을 펼칠 수 있다는 거....아무나 하지 못하는 거라 생각합니다. 감수성과 독서이력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절대 저런 생각은 나올 수가 없는 것이지요. 오렌 님의 과겅 얘기가 참으로 놀랍고 흥미롭네요. 지금 다시 이 작품을 읽으면 어떤 생각을 하실지 무척 궁금합니다.다시 읽을시면 굉장한 독후감이 나올 듯합니다!

transient-guest 2017-07-07 00: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전까지 이 작품은 15소년 표류기의 어른 버전정도로 생각했어요. 근데 SF가이드 총서를 보고서 SF소설로 분류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요. 읽은지 너무 오래됐기 때문에 다시 봐야할 것 같네요. 근데 갖고 있는건 민음사 본...-_-:

yamoo 2017-07-07 22:50   좋아요 1 | URL
충분히 sf소설로도 분류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저도 15소년표류기 정도로 생각했다가 오지게 뒤통수 맞았습니다.ㅎㅎ 특히 결말 부분이 후두부를 강타했습니다. 여러 시각으로 볼 수 있는 게 이 책의 장점인 듯해요. 사람마다 주안점을 두는 곳이 달라 토론을 하면 매우 재밌습니다. 다시 읽으시면 다른 많은 것을 덤으로 얻으실 수 있을 거랴 사료됩니다!ㅎ

stella.K 2017-07-07 13: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왓, 좋은 리븁니다.
청소년 시절 도전했다 포기했는데, 보려면 문예출판사 걸로 봐야겠군요.
전 지금까지 영화만 두 번 봤는데 영화도 좋더라구요.
마지막 엔딩 장면이 되게 인상 깊었는데...
랠픈가? 막 쫓기다 숲을 벗어났는데 어떤 어떤 아저씨가 그러잖아요,
너희들 여기서 뭐하냐고. 그때 이야기의 마법에서 깨어나기도 하죠.

저도 잭과 랠프를 보면서 인간의 야만성과 문화성 또는
권력욕과 이타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골딩이 뛰어난 건, 그걸 성인으로 상정하지 않고 아이들에게서 보여줬다는 거죠.
놀이라는 형태로. 사실 아이는 무조건 착할 거란 생각을 하잖아요. 크면서 악해지고.이걸 여지없이 깨줬다는 것에서 충격적이기까지 하더라구요.
그런데 이런 훌륭한 이야기도 출판을 못해 애를 먹었다고 하더군요.

인간은 본성이 아닌 상황의 산물이라!
정말 그럴 수도 있겠군요.^^

yamoo 2017-07-07 22:55   좋아요 1 | URL
저는 책을 보고나서, 무인도의 정경이 너무 궁금해서 영화를 찾아봤습니다. 근데 저는 영화가 책보다 무지 재미없더라구요. 설정 자체가 많이 다르고 플롯이 뚝뚝 끊이는 느낌이라 겨우겨우 봤네요.

인간은 상황의 산물이라 생각해서 그래요. 인간이 처한 상황을 제거하고 인간의 본성을 논한다는 건 어불성설인거 같아요. 외부 상황과 단절된 인간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 지 의문입니다.

혹시 이 책을 아직 읽지 않으셨다면, 문예본으로 꼭 읽독해보시길 강추드립니다. 하루 이틀이면 충분히 다 읽지 않을까 합니다. 무지 재밌거든요~ㅎ

cyrus 2017-07-07 15: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한의 리바이어스>, 한 번 봐야겠군요. 책도 그렇고 만화 역시 오래된 것일수록 좋아요. ^^

yamoo 2017-07-07 22:57   좋아요 1 | URL
꼭 한 번 보시길 강추드립니다. 네, 이번 여름에 이 작품을 떼는 것으로...^^;;

수다맨 2017-07-10 15: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민음사본 번역은 다시 들여다보아도 한숨만 나오더군요. 윌리엄 골딩의 문체가 설혹 의고체擬古體에 가까울지라도 한국인의 눈높이에 어느 정도는 맞게끔 번역을 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파리대왕˝보다는 훨씬 낫기는 하지만 유종호의 또 다른 번역본인 ˝제인 에어˝도 한자투나 예스러운 말이 많아서 보기가 좀 그렇더군요.

yamoo 2017-07-10 20:04   좋아요 2 | URL
처음에 책을 펼처서 읽어 가는데, 정말 환상적인 줄거리가 아니면 읽기 힙들었을 거예요. 앞부분 읽을 때 그냥 책을 집어 던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습니다. 그 <제인에어> 번역본도 악명이 높더라구요~
이제 유종호가 번역한 작품들은 기피해야 겠습니다~ㅎ

한국인의 눈높이에 맞게끔 번역하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는 참으로 드분 거 같습니다. 명작들이 한국어 번역본으로 태어나면 망작이 되는 듯합니다.

성석 2017-07-22 0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만 번역이 이상하다고 느낀 건 아니군요ㅎㅎ
바위를 굴려 떨어뜨려서 돼지를 죽인건 로저니까..만약 그러한 일이 없었더라면 혹은 로저라는 인물이 없었더라면, 잭이 랠프를 죽이려고 하지는 않았을까 싶네요..실지로 돼지가 죽기 전에, 잭과 랠프가 창으로 싸울 때는 칼싸움을 하는 것처럼 위해를 가하지는 않았으니까요..
정말 무서운건 로저가 아닐까 싶네요

yamoo 2017-09-16 14:47   좋아요 2 | URL
네, 아마 민음사판을 읽으시는 모든 분드이 직간접적으로 느기는 불만이 아닐가 합니다만^^

로저...그쵸 뇌가 없는 행동대장...가장 무서운 존재라 아니랄 수 없어요^^
 
교사와 책 미래의 힘 - 내일의 교사를 위한 오늘의 독서백편
박인기.우한용 지음 / 솔출판사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책에 관한 책을 줄창 읽던 시절이 있었다. 그 종지부는 아마도 다치바나 다카시의 저작들 이었을 거다. 책 읽고 글 쓰는 사람의 끝판왕을 만나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책에 관한 책을 소개한 책들은 더 이상 읽지 않았다. 대부분의 책들이 다카시의 책에 비해 지루하고, 어느 순간 저자들이 소개해 주는 책들이 익숙한 책이 되었기에 그렇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책에 관한 책들’은 거의가 저자의 ‘독서에세이’나 리뷰집 또는 해제집의 수준을 넘는 게 별로 없어 보이기에. 다 거기서 거긴 것처럼 보인다. 대개가 고전류의 해제집 아니면 리뷰집 성격이 짙은 책들이다. 저자의 쌈박하고 진솔한 독후감을 만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

 

 

내가 갖고 있는 책만 해도 30여 권이 넘는데, 대개가 비슷비슷하다. <동양의 고전을 읽는다>(휴머니스트, 2006), <서양의 고전을 읽는다>, <고전의 향연>(한겨레, 2007) 등은 해제집 성격이 강한 책들이다. 그나마 <책탐>(나무수, 2009), <탐독>(아고라, 2016), <책을 읽을 자유>(현암사, 2010) 등이 그나마 심도 있는 독서편력기 쯤 된다. <한 권으로 읽는 철학의 고전 27>(지와사랑, 2011) 정도면 아주 밀도 있는 리뷰집이랄 수 있다.

 

 

 

 

 

 

헌데 이런 책들의 한 가지 공통점은 아주 유명한 책들 소개나 리뷰가 대다수라는 점이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도스토옙스키의 <까라마조프의 형제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톨스토이의 <안나 까레리나> 등. 고전류가 대부분이다. 물론 <각주와 이크의 책읽기>(한국출판마케팅, 2011)와 같은 책에는 우리나라 작가들과 지명도가 조금 떨어지는 책들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기는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스무살을 울린 책>(작가정신, 2002)과 같은 유명인의 진솔한 글은 만나 볼 수 없다. 개인적으로 나이젤 워버턴의 <한 권으로 읽는 철학의 고전 27>과 같은 책을 좋아하지만, 좋은 감상문을 모은 책은 나름의 읽는 가치가 있다. 내가 별로라고 생각하는 책들을 어떤 이는 아주 감명 깊게 읽었고, 그 책이 그의 삶 속에 어떤 작용을 했는지 보는 것은 기대 이상의 뭔가를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책을 다시 꺼내어 읽어 보게 한다.

 

 

 

며칠 전, 책을 소개하는 책을 한 권 읽었다. 사실 이 책은 찾아서 읽은 책이 아니다. 도서관 신간 코너에 하도 자주 눈에 밟혀 빌려 읽게 된 책이다. <교사와 책>(솔, 2009)은 ‘내일의 교사를 위한 오늘의 독서백편’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책 배판도 대학 교재마냥 크고 멋대가리 없는 표지에 읽고 싶은 마음이 그리 드는 책은 아니었다.

 

 

하지만 몇 권(특히나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자게서)에 대한 교수들의 진지한 리뷰를 보면서 읽을 가치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빌린 다음날 다 해치워버렸다. 이 책은 교사들을 위해 쓴 책 안내서인데, 집필자들이 모두 현직의 교육계에 몸담고 있는 교수들이다. 모두 익히 아는 책들이지만 교육학적 관점에 초점을 맞춰 새롭게 해석해 내는 리뷰들은 소개된 책들을 다시 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사실 여기 소개되어 있는 책 가운데 <딥스>, <만행>,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습관의 심리학>, <설득의 심리학> 등은 명저 산책이나 명저 해제집에 좀처럼 보기 드문 책들이다. <딥스>를 제외하고는 전부 자계서 부류에 속하는 책들이기도 하기에. 더군다나 알라딘 회원 중고책 가격으로는 거의 최하가격에 책정된 책들이다. 그냥 눈에 밟히는, 인기는 좀 있었지만 지금은 그저 그런 책들로 전락한 부류.

 

 

 

 

헌데, 교수들의 글을 통해 소개되는 이 밋밋한(?) 책들은 교육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런 책을 이렇게도 읽을 수 있군!’하는 놀라움을 안겨줬다고나 할까. 꿈보다 해몽이 좋다는 말이 있는데, 이 책들에 대한 리뷰를 읽으면서 드는 단 하나의 생각이었다. 특히 <만행>이 백미였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정작 손님인 나는 이 땅을 너무 사랑하고 있는데, 그들은 이 땅에 너무 익숙해져서 싫증을 내고 폄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걸핏하면 그들은 ‘한국은 더 이상 안 돼’, ‘한국은 가능성이 없어’ 하는 자기 비하로 이어졌다. 아니 이 한국이란 나라가 얼마나 위대한 나라인데, 그리고 지금껏 그들이 흘려온 피와 땀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데, 그것을 그렇게 한꺼번에 헐값에 도매금으로 평가절하 할 수 있을까.(p58)”

 

 

현각의 <만행>(열림원, 1999)에서 이 책의 리뷰자 박찬구 교수(서울대 윤리교육)가 인용한 부분이다. 그리고 박 교수는 “교육은 진리 추구의 보편성에 헌신하는 일이다. 진리추구 자체가 교육적 속성을 지닌다. 교육을 모색하는 우리는 진리 추구의 역정에 서 있는 것이다. 다만 깨닫지 못할 뿐이다. (p59)"라고 마무리한다.

 

 

사실 <만행>은 출간된 1-2년간 에세이 베스트 목록 10위 안에 드는 인기 있는 책이었다. 하지만 출간된 지 오래 지나자 베스트셀러들의 최후처럼 헌책방에서도 헐값에 거래되고 있다. 이미 수명이 다 했다고 여겨지는 책이다. 읽은 사람들은 다 읽었으니. 하지만 박찬구 교수에 의해 새롭게 소개되는 <만행>은 교육학적으로 읽어 봄직한 책이었다. 고교 <윤리와 사상> 교과서에도 ‘세계 윤리’단원에 현각의 이 책이 인용되어 있다지 않는가. 리뷰어의 역할을 다시금 생각나게 하는 리뷰라 아니할 수 없다.

 

 

<현대의 과학철학>(서광사, 1990) 역시 이 책의 리뷰를 통해서 가치를 새롭게 되새겨 볼 수 있었다. 사실 노석구 교수(경인교육대 과학교육)가 쓴 이 책의 리뷰는 내가 쓰고 싶었던 리뷰였다. 오래 전부터 차머스의 이 책에 대한 리뷰를 쌈박하게 쓰고 싶었다. 왜냐하면 과학철학 분야를 이 책처럼 알기 쉽게, 그것도 전문가가 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내용으로 정리하기에는 보통 힘든 게 아니기에.

 

 

노 교수는 이 책의 핵심을 아주 간결하게 잘 정리하면서, 책의 핵심을 아주 정확하게 짚어 주고 있다.

 

 “여기까지만 읽더라도(귀납주의에 대한 설명과 비판) 독자는 아마 현대사회가 맹목적으로 또는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것으로 확정짓는 ‘과학적’이란 도대체 어떤 지식이고 어떤 방법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호기심이 밀려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이 책의 특징은 바로 여기에 있다. 앨런 차머스는 ‘과학적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적극적인 탐구를 장려하는 방식으로 이 책을 서술하고 있다. (p152)"

 

 

우리가 인문서나 과학서 또는 칼럼이나 여타 잡다한 글을 읽을 때 ‘과학적’ 또는 ‘과학적 지식’이라는 말을 수없이 접해 왔을 거다. 그런데 이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별로 없을 듯하다. 주의 깊은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고민해 봐야 할 개념이다. 차머스의 이 책은 이 고민에 대한 답을 나름대로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책을 읽고 나면 다른 사람들이 쓰고 있는 ‘과학적’이라는 말의 오용 여부를 가릴 수 있는 식견이 생긴다.

 

 

물론 과학철학이라는 학문 분과가 쉬운 분야는 아니다. 그래서 이런 분야의 책은 읽는 사람만 읽는다. 하지만 “저자는 풍부하고 다양한 사례를 통해 독자가 과학철학의 핵심 개념을 하나씩 정복해 나가도록 이끌어 주며 흥미를 잃지 않도록 격려해 준다. 귀납주의부터 반증주의, 쿤의 패러다임을 거쳐 합리주의와 상대주의, 객관주의, 파이어벤트의 아나키즘적 인식론 그리고 마지막 비대표적 실재론까지를 물 흐르듯이 이어지는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다. 충분히 도전해 볼만한 책이다(p153)"

 

 

노 교수의 리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 책이 교사들을 위한 책이기에 차머스의 서문에서 교육학적 가치를 이끌어 낸다.

 

“차머스는 이 책의 목적이 ‘교육적인 것에 있다’고 서문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중략) 그렇다면 이 책을 읽는 교사들은 이 책을 통해 어떤 교육적 전망을 가질 수 있을까. 특정 과학지식을 전달하거나 무비판적으로 확산시키는 대열에 편승하기 보다는 끊임없는 의심과 탐구의 자세를 심어주는 교육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미래의 교육 리더들이 학생들이 과학탐구를 지도함에 있어 학생들로 하여금 ‘혼란에서 출발하여 고양된 혼란’에 이르는 길을 안내하고 격려하는 데에 소중한 지침이 될 것이다. (p153)"

 

 

물론 노 교수의 결론 부분이 원론적인 느낌이 들게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을 교육학적 가치를 지닌 책으로 소개하는 글은 노 교수의 이 리뷰에서 처음 본다. 나는 이 시도가 참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책의 독자는 넓어질수록 좋으니까. 과학철학 입문서를 교육학도가 읽고 거기서 교육적 가치를 이끌어 내는 것은 후학들이 몫일 것이다. 그 단초를 잘 제공해 주는 것이 책 읽는 기성세대들의 일이 아닐까.

 

 

이 책에 수록된 <파인만씨 농담도 잘 하시네>(사이언스북스, 2000), <습관의 심리학>(갤리온, 2007), <설득의 심리학>(21세기북스, 2005), <창의성의 즐거움>(북로드, 2003) 등은 명저의 반열에 드는 책이 아니다. 베스트셀러류에 가깝다. 하지만 교수들이 여기서 건져 올리는 교육학적 가치는 경청할만하다. 리뷰로써 교육학도에게까지 가치 있는 책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은 순전히 리뷰어의 역량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물론 이 책에는 명저라고 회자되는 유명 책들도 많이 소개돼 있다.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 박은식의 <한국통사>, 스티븐 핑커의 <언어본능>,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 한스 요아킴 슈퇴르니히의 <세계철학사> 등. 이 책을 읽는 가치는 이들 명저 리뷰에서도 잘 드러난다. 전혀 교육학과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 책에서도 리뷰어들은 교육적 가치를 훌륭하게 잘 건져 올리고 있으니까.

 

 

여러 교수들이 전공별로 자신만의 책을 추천해서인지 리뷰가 간결하면서도 밀도 있는 편이다. 한 책의 리뷰 당 분량이 4쪽에서 5쪽 정도이지만 책의 핵심을 잘 짚고, 이로부터 교육학적 가치를 잘 도출해 내고 있다. 쉽고 명료한 진술도 빼놓을 수 없다. 내가 읽은 리뷰집 중 리뷰어의 가치가 가장 잘 드러난 책이다. 천편일률적인 책 소개나 리뷰집에 싫증이 났던 분이라면 일독할 것을 추천드린다. 물론 ‘책에 관한 책’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금상첨화랄 수 있겠다.

 

 

 

 

[덧]

1. 경청할만한 교육학적 가치가 다루는 모든 책에서 훌륭하게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리뷰자에 따라서 다소 억지스러운 논리도 보이고 원론적인 내용도 보인다. 여러 필진들이 모여 집필된 책이기에 개인차가 많이 나는 것이 이런 류의 책들이 가진 맹점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상당히 괜찮은 편이고, 교육학적 목적에서 책의 가치를 재평가하는 시도 자체가 참신하여, 좋은 리뷰를 쓰고 싶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일독했으면 하는 책이다.

2. 교수들의 내공을 느껴볼 수 있는 리뷰가 꽤 많다. 주례사 리뷰가 거의 없어 리뷰 읽는 맛이 그만이다~ (몇 편이 있긴 한데, 뭐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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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7-06-11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를 오늘의 당선작으로 적극 밀겠습니다..

yamoo 2017-06-11 22:46   좋아요 0 | URL
곰발 님이 밀면 안된다믄서요~~~ㅋㅋ

어쨌거나 감사합니다요~~~ㅎ

cyrus 2017-06-12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저 그런 책을 색다른 관점으로 소개한 리뷰를 좋아합니다. 저도 그런 리뷰를 쓰고 싶습니다. ^^

yamoo 2017-06-13 20:14   좋아요 0 | URL
저도 그렇습니다~!^^
 
제국 이학문선 1
안토니오 네그리 & 마이클 하트 지음, 윤수종 옮김 / 이학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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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그리와 하트의 <제국>을 한 달 내내 잡고 있었다. 토론 주제 도서라서 팽개쳐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기에 매우 곤혼스러웠다. 읽어도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잘 안 됐기 때문이다. 처음 일독했을 때, ‘헛소리의 성찬으로 가득 찬 정치이론서’란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각 장을 3번씩 읽으니 어느 정도 논점이 잡혔는데, 대략적으로 이해하고 봐도 역시나였다. 책의 결점이 매우 도드라졌다. 마지막에 대항제국을 말하면서, 운동의 바람직한 모델로 세계산업노동자조합(IWW)을 말하는 대목에서는 허탈하기까지 했다. 용두사미의 백미랄까.

 

 

헌데 이 책이 좋다고 하고, 심지어 ‘재밌다’고까지 하는 분들을 여럿 보았다. 알라딘 리뷰도 좋다는 평가가 대부분이다. 개인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번역도 좋지 않은데(비문이 넘친다) 말이다. 아래는 이 책이 왜 별루인지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비판이다. 엉성한 비판일 수 있지만, <제국>에 대한 심도 있는 비판적 리뷰가 별로 없는 것 같아 리뷰로 남겨놓기로 한다.

 

 

1. 내재성(주체성 및 자발성)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 결여

 

 

네그리와 하트는 현재의 정치적 구성을 ‘제국’이라 명명하면서, 제국주의에서 제국으로의 이행을 주권의 이행과 생산의 이행으로 나눠서 고찰하고 있다. 이 이행에서 두 사람이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이 ‘대중’이다. 이들이 말하는 ‘대중’은 19세기 제국주의를 거쳐 자본주의 시대에서 말하는 대중이 아니다. 제국을 흔들 수 있는 존재로 설정된다. 제국주의가 아닌 제국의 지형으로 바꾸어 놓는 동인이 바로 대중의 존재이다.

 

 

현재 미국의 대중은 이전 시대의 대중과 구분되는 가장 특별한 지점이 있다. 네그리는 이를 내재성으로 보고 있다. 네그리와 하트는 푸코와 들뢰즈의 개념을 전유하면서 내재성을 생체 정치와 연결하여 논의를 심화시킨다. 훈육 통치, 전 지구적 통제, 제국 주권, 세계 공간, 가상성 등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내면서 제국에 대항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존재로 설정하고 있다.

 

 

문제는 이 내재성(스피노자의 개념으로부터 도출)에 대한 개념에 있다. 책의 후반부에 실려 있는 내재성에 대한 개념 풀이를 보면, 이렇게 돼 있다. “어떠한 것도 외부에서 부과된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들 속에서 구성된다는 의미에서 내재성이란 개념을 사용한다. 내재성은 초월성과 대립한다.”

 

 

이 개념을 좀 더 쉽게 바꾸어 보면 이럴 것이다. 기준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내부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헌데 이것의 핵심은 주체의 자유에 있다. 내재성은 자율적이고 자유로운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자유’에 대한 심도 있는 고찰이 요구될 수밖에 없다. (내재성에 기초한 자발적 행위는 자유로운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특성이기 때문이다.)

 

 

헌데 네그리는 개체를 특징짓는 이 내재성의 개념을 집단으로 확대하고 있으면서도 ‘자유’와 ‘자율’에 대한 철학적 논증을 거의 하고 있지 않다. 유럽의 근대성으로부터 제국 주권을 도출해 내고, ‘대중의 역능에 기초한 저항운동’을 논의하면서도 ‘집단의 내재성’의 근간이 되는 자유로운 인간에 대한 고찰은 찾아 볼 수 없다. 이는 이 책의 맹점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더욱이 네그리는 제1부 3장 [업적의 존재론적 드라마(p83)]와 [두 개의 머리를 가진 독수리(p100)]에서 정치적 담론을 존재론적 근거로 분석하는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 논의는 이후 ‘내재성’으로 연결되지 못한다. 존재와 실존을 논하면서도 이를 내재성의 개념으로 포섭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심각한 결함이다.

 

 

헌데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란 생각이다. 책을 재독 삼독 하다 보니, (아마도 이는 매우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네그리가 ‘초월성’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내재성’을 아주 소박하게 상정하면서 초래된 문제인듯하다.

 

 

2. 지나친 이분법적 도식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이 책의 저자들은 ‘제국주의에서 제국’으로의 이행을 주권의 이행과 생산의 이행으로 나눈다. 이런 도식은 이 책의 기획의도에서도 알 수 있다. 저자들이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이 책의 근간으로 사용한다고 말해 놓았기 때문. 마르크스가 사회를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를 나눠 분석했던 것처럼 이 책에서도 사회의 상부구조인 정치(주권)와 하부구조인 생산의 영역을 분리해서 고찰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마르크스가 기획했던 정치(상부구조)와 경제(하부구조)가 탈현대라고 부르는 현재에는 이들이 서로 밀접하게 섞여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하부구조라는 것이 노동의 생산 양식을 말하는 것이지만, 이는 현재 현대 경제학과 경제정책의 중추적 쟁점으로 ‘경제’ 분야에 포섭된지 오래다.] 정치와 경제는 한 나라의 국가경쟁력을 좌우할 정도로 상호 침투하고 있다.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기 보다는, 상하부 구조가 뒤섞여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고 보는 게 적절할 듯싶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의 분석 방법이 문제가 있다고 본 것이다. 제2부 ‘주권의 이행’과 제3부 ‘생산의 이행’이 각기 따로 놀고 있다는 인상이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누구나 느꼈을 것이다. 근대 국민국가의 주권의 논의를 읽고 3부로 넘어가면 제국주의의 한계와 훈육 통치의 논의가 이어진다. 주의 깊은 독자라면, 당연히 근대 국민국가의 주권의 이행이 생산의 이행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아니면 어떤 관계가 있는지 염두에 두고 읽어 갈 것이다. 헌데 아무리 읽어도 그 관계나 영향에 대한 언급이 없다. 참으로 불친절하다 못해 논리적 치밀함이 떨어지는 엉성한 책이 아닐 수 없다.

 

 

3. 국민국가는 죽었는가?

 

 

네그리와 하트는 제국적 상황에서 국민국가는 종말을 고했다고 단언한다. 하지만 이는 미국 중심의 세계관에 따른 결론이다. 세계는 결코 미국을 중심으로 외부화가 없어지는 ‘제국’이 아니다. 브랙시트 사태만 보더라도 각 국가는 아직까지 국민국가의 형태를 유지하고 추구하는 경향이 암암리에 내재해 있다. 세계경제가 빠르게 통합되고 블록화가 되어가지만, 여전히 국민국가적 정체성을 지향하는 나라들이 많다. 중국과 대만의 양안 사태나 남북이 대치된 우리나라의 상황만 떠올려 봐도 충분할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는 <제국>에서 말하는 거의 대부분의 이론이 들어맞지 않은 나라다. 우선 포스트 모던한 시대에 우리나라는 여전히 민족주의가 회자되는 나라다. 우리나라의 시간은 일제대의 망령에서 아직도 벗어나고 있지 못한 상황이다. 위안부 문제가 여전히 화두가 되는 나라, 탈이데올로기 시대에 여전히 이념적 대립이 심각한 나라, 1953년의 상흔이 여전히 가시지 않는 나라, 이런 국가가 한국이다. 이 나라는 아직도 강력한 국민국가의 나라이다.

 

 

이런 국민국가의 강력한 지표중 하나가 북한의 핵을 둘러싼 6자회담이다. 6자 회담은 북한의 핵 억제를 위해 미국을 위시한 6개 국가가 참여한 국제 회담이다. 회담에 참여한 국가마다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다자 회담은 국가의 이익이 전면에 드러나는 국제외교의 장이기 때문이다. 제국적 상황의 갈등이라고 보기엔 ‘국민국가’의 존재감이 너무도 뚜렷하다. 책의 저자들은 한국어판 서문에서 “제국은 외부를 가지지 않는다”는 주장을 확신에 찬 목소리로 제시하는데, 이는 자본주의의 세계화를 강조하기 위한 흐름일 뿐 실제의 세계를 전혀 반영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매우 반갑게도 나의 이런 비판을 조금 더 세련되게 잘 지적한 책이 있어 그 부분을 첨부한다. 이 글을 보고 구미가 당기시는 분들은 찾아보면 좋을 것이다. 가라티니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에서 일부를 인용한다. 같은 지점을 비판하고 있다는 사실에 고무적이다.

 

 

엘렌 M. 위드는 네그리와 하트를 비판하며 정당하게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글로벌한 자본주의에 있어서 국민국가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하고 싶다. 글로벌리제이션의 정치적 형태는 글로벌한 국가가 아니라 복수 국가의 글로벌한 시스템이다. 지구 규모로까지 팽창한 자본주의의 경제적 권력과 국가의 영토 내에서 이런 권력을 뒷받침하는 경제 외적인 힘 사이에는 복잡하고 모순된 관계가 구축되어 있다. 그리고 이 관계로부터 새로운 제국주의의 고유한 모습이 탄생했던 것이다.” (P400)

 

 

4. 휘황찬란한 개념의 향연

 

 

저자들은 제국의 개념을 분명하게 제시한다. 일차적으로 이론적 접근을 요구하는 개념으로 사용한다고 천명한다. 그래서 형이상학과 존재론을 비롯해 푸코와 들뢰즈의 개념을 상당히 전유하고 있다. 제국주의와 전혀 다른 새로운 현상을 ‘제국’으로 재설정하기 위해 책 전체에 걸쳐 ‘정치 이론화’에 매진하는 듯한 인상이 짙다. 이론화를 위해 상징과 비유를 과도하게 사용하여 논증을 필요로 하는 지점이 넘친다. 하지만 저자들은 이에 대한 논증이 전혀 없다. 독자층이 안다는 전제하에 철학적 이론을 비유와 상징을 통해 끊임없이 문학적 개념화를 시도한다. 그래서 무소불휘한 개념의 잔치 속을 헤매다 보면 논점이 흐려져 선언의 정당성이 떨어져 보인다.

 

 

네그리와 하트가 이 책에서 보무도 당당하게 도식화하고 있는 개념들을 거들떠보자. 정말이지 휘황찬란하다. ‘생체성’, ‘가상성’, ‘생체 권력 및 생체 정치’, ‘매끄러운 세계’, ‘전지구적인 홈패임’, ‘산노동’, 선험적 장치, ‘주권 기계’, ‘잡종적 구성’, ‘배열 장치’, ‘착취의 무-장소’, ‘훈육 사회’, ‘비물질적 노동’, ‘구성의 스펙터클’, ‘자본의 공리계’, ‘업적/기계’, ‘재전유권’ 등은 모두 이론을 위한 이론일 뿐이다. 이들은 전혀 ‘현실의 시간’을 담아내고 있지 않기에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지 감을 잡기가 어렵다. (이를 보면 네그리와 하트는 베르그손이 비판했던 관념연합론자들의 사고와 비슷한 면이 많은 듯하다.) 아래 인용문들은 이에 대한 구체적인 지점들이다. (도처에 산재해 있지만 분량 상 아주 일부만 인용한다.)

 

 

“부패는 언어적 소통 감각의 도착 속에서 나타난다.” (p495)

→ 언어적 소통 감각의 도착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얼까? 부패가 그런 속에서 나타난다니, 현실적 상황을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가 없다. (물론 앞부분에 약간 부연되긴 하지만 여전히 모호하다.)

 

 

“사건 추이들이 자신들의 시간성을 가속화할 때, 제국은 예측할 수 없는 시간적 사건 추이들에 개입하는 것이 한층 더 어려워진다.” (p101)

→ ‘사건 추이들의 시간성을 가속화한다’는 말이 도대체 뭔지 감을 잡을 수 없다. 더군다나 ‘예측할 수 없는 시간적 사건 추이들’에 개입하는 것이 더 어려워진다니. 예측할 수 없으니 당연히 개입하기가 더 어려워지는 거다.

 

 

"인본주의적인 주체성 원리에 의해 개방되었던 잠재성의 영역은 초월적인 규칙 및 질서의 부과에 의해 선척적으로 제한된다." (p124)

→ 아무리 읽어도 도대체 뭘 말하는지 모르겠다. 번역의 문제인지 원문의 상징성과 비유의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이해가 불가능한 진술이라는 거.

 

 

“오늘날 역사란 존재하지 않고 오직 역사성만이 존재한다.” (p471)

→ 도대체 ‘역사성’이 역사와 어떻게 다른 개념인지 전혀 설명이 없다.

 

 

책 461 쪽에는 “소통적 에테르”란 표현이 나온다. 이 표현을 보면 소통이 에테르가 아닌 것은 분명해 보인다. 헌데, 이후 내용을 보면 저자들은 에테르를 소통으로 통용하고 있다. ‘에테르’가 무얼 의미하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는 매우 모호한 개념이다.

 

 

물론 저자들이 서문에서 밝혔다시피 이 책은 ‘이론화’를 위한 도구상자이다. “이 책에서 우리가 기여하고 싶은 것은 제국을 이론화하기 위한 그리고 제국 안에서 제국에 대항하여 활동하기 위한 일반적인 틀과 개념들의 도구상자이다.(p21)” 그래서 현실의 시간을 담아내는 데에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현실의 정치와 사회를 학제적으로 분석하려는 야심찬 의도를 담고 있다. 그래서 이론을 위한 이론에 그친 점이 매우 아쉬운 지점이다.

 

 

[덧]

1. 사실, 알 수 없는 개념적 표현이 너무 많아 아주 일부분만 언급해 봤다. 이런 상징과 비유들이 엄청난 비문들과 섞이니 읽기 여간 괴로운 게 아니었다. (번역가가 사용하는 개념의 조어나 문장이 한국어의 문법을 완전히 초월해 있다. 그러다 보니 환상적인 보그-병신체의 괴작이 탄생한 듯하다.

2. 개인적인 생각인데, 이 책의 타겟은 월러스타인의 세계체제론이 아닌지. 세계체제론은 낡았고, 이를 대체할 이론적 구상으로 ‘제국’을 설정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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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5-31 0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무님이 인용한 책의 문장만 봐도 내용이 어려워 보입니다. 개정판이 나와야겠어요. ^^;;

yamoo 2017-06-08 20:22   좋아요 0 | URL
개정판이 나오기 매우 힘들거 같아요. 이 책은 딱 읽을만한 수준의 데드라인을 충족시켜주는 책이라 개정되어도 별반 차이점이 없을 거 같아요. 단지, 각주만 자세히 달아줬으면 좋겠습니다~

oren 2017-05-31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과 저자의 이름을 들어본 적은 있지만 yamoo 님 말씀마따나 ‘극도로 이해하기 어려운‘ 책임엔 틀림없는 듯합니다. 이런 책을 볼 때마다 저는 ‘극도의 철학‘을 언급한 몽테뉴의 말이 떠오릅니다. 물론 ‘뉘앙스‘가 약간 다르긴 하지만요.

* * *

극도의 철학

과녁 너머로 활을 쏘는 자는 화살이 과녁에 못 미치는 자와 똑같이 실패한다. 눈은 캄캄한 속으로 내려가는 때나 너무 밝은 빛 속에 나가는 때나 똑같이 혼란을 느낀다. 플라톤에 나오는 칼리클레스는 극도의 철학은 해롭다고 하며, 이익이 있는 정도를 넘어서 거기 빠지지 말라고 충고한다. 철학을 절도 있게 대하면 유쾌하고 유익하지만, 마침내는 사람을 황당하고 악덕스럽게 만들고, 일반의 종교와 법률을 경멸하고, 사람들과의 교섭을 회피하며, 인간적인 해학을 적대시하고, 모든 정치적 사건의 처리나 남을 도와주는 일이나, 자기를 지키는 일도 불가능하게 되며, 빰을 얻어맞아도 대항 못하는 인간이 되게 한다고 말한다. 그의 말이 옳다. 왜냐하면 철학이 과도하고 지나치게 풍부하면 우리의 타고난 자유를 속박하며, 배운 꾀가 탈이 되어서 오히려 자연이 우리에게 그어 준 좋고 탄탄한 길에서 벗어나게 한다.

yamoo 2017-06-08 20:26   좋아요 1 | URL
한국어 문법을 아주 우습게 초월하고 있어, 문맥을 이해하기 매우 힘듭니다. 물론 저자의 글 자체도 애매하고 이해하기 힘든데, 그걸 아주 이상한 문장으로 바꾸어 번역했으니 읽기 힘들지요. 인용해주신 극도의 철학과 뉘앙스가 좀 다르긴 하지만 비슷한 맥락으로 읽힙니다. <제국>은 읽지 않는 게 상책이라 생각합니다.^^;;

stella.K 2017-05-31 14: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야무님 보면 느끼는 거지만 참 존경스러워요. 저는 이런 책 리뷰 못하거든요. 그래도 이렇게 쓰면 남는 게 있잖아요. 지금 제가 읽고 있는 책 어쩔 수 없이 리뷰를 해야 하는데 이벤트 도서라. 그림 많고 글 별로 없는 책이라 편하게 읽긴 했지만 이상하게도 남는 게 없어요. 뭘 갖고 리뷰를 해야할지 대략난감 입니다.ㅠ

yamoo 2017-06-08 20:29   좋아요 0 | URL
만약 리뷰도서로 이 책을 받았으면 참으로 난감해 했을 거라 사료됩니다. 1번 읽고는 이해하기 매우 힘들거든요~ 이런 책은 읽지 않고 리뷰를 쓰지 않는 게 상책입니다.

저같은 경우는 <더 로드>가 매우 리뷰쓰기 힘들었습니다. 만약 리뷰써야 하는 도서로 받았다면 대략 난감해 했을 겁니다. 읽기는 편하게 읽고 매우 의미싱장하게 읽었습니다만...스텔라 님께서 느끼시는 그 지점을 저는 <더 로드>를 읽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읽었어도 리뷰를 못셨지요.ㅎ
 
해변빌라
전경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0월
평점 :
절판


1

 

 

지난 주 토요일, 도서관에 갔다가 우연히 눈에 띄어 집어 든 책이 <해변빌라>. 독특한 제목에 끌린 것이 사실이다. 분량 작은 책을 찾고 있었기에 걸려들었을 수도 있다. 점심을 먹고 저녁을 먹기 전에 다 읽을 수 있었으니. 읽은 후에 참으로 이상한 책이라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흥미진진한 사건이나 그 흔한 갈등도 없는 밋밋한 내용에 많은 실망을 하고 말았다. 10여 년 전 읽었던 <엄마의 집>에 실망하여 더 이상 한국 문학 작품을 읽지 않게 된 기억이 새록새록 났기에.

 

 

더 이상 전경린 작가 작품을 읽지 않았던 이유는, 작가가 그리는 작품들 속 인물들이 하나 같이 똑같았기 때문이다. 작가의 소설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결핍을 안고 있는 여성들로 그려지고, 그녀들이 사랑하는 방식은 언제나 위험하다. 처음에는 무도덕한 사랑도 사랑이라고 당당히 주장하는 작가에 매력을 느꼈지만, 언제나 결핍을 매우려는 사랑 타령에 피로감이 몰려왔다. 전경린 작가와 더불어 나의 한국 문학 읽기는 끝나버렸다.

 

 

물론 전경린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하는 가독성은 있다. 작가만이 구사할 수 있는 문체는 꽤 치명적이니까. 그래서 꽤 많은 작가의 소설을 찾아 읽었더랬다. 이 소설 역시 그랬다. 하지만 이 작품의 경우 이상하게도 별 내용이 없기에, 작가는 왜 이런 소설을 썼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좀처럼 읽지 않는 ‘작가의 말’ 부분을 읽어야 했다. 작가는 다음과 같이 썼다.

 

 

“오해와 착각과 환상과 거짓과 허구와 진실의 충돌 사이에서, 타인의 이야기든 나의 이야기든 싫증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 이야기의 허무 위에서 문장을 쓰기 시작했다. 그래서 가급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223p)

 

 

하! 정황만 있을 뿐, 갈등도 없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니! 하지만 “허무 위에서 문장을 쓰기 시작했다.”는 작가의 저 말로부터 나는 이 책을 다시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소설을 처음 읽고 든 생각이 ‘부유(浮游)하는 인물들의 허무’였기에. 재독, 삼독 하면서 밑줄들은 늘어갔다. 하지만 이에 더해 작가의 생각에 동의할 수 없는 내 생각의 편린도 같이 늘어가기만 했다.

 

 

2

 

 

“세포는 수생식물처럼 물 위에 떠 있단다. 생명은 유동적인 상태이기 때문에 멈추어 있을 수 없어. 우리는 죽음에 너무나 익숙하고 동시에 재생을 꿈꾸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렇게도 불안정한 것이다.” (p 25)

 

 

생물교사인 이사경이 즐겨 쓴 말인데, 어린 유지의 몸은 이 말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몸이 반응했을 정도로 이 말은 유지의 무의식 속에 각인됐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린 시절 윤유지였다가 하루아침에 손유지가 된 그녀는, 이 충격으로 학창시절 줄곧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성장한 유지는 연인 오휘와 결혼하지 못하고 오휘 어머니의 훼방으로 헤어지게 된다. 이후 그녀는 이사경의 집에서 백주희의 손자인 아기를 돌보며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생활한다.

 

 

이사경과 친분이 있는 편 사장. 바닷가 폐해수욕장에서 ‘해변의 가능성’이라는 카페를 운영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젊고 매력적인 해영을 연인으로 두고 있지만, 관계가 아슬아슬하다. 편 사장은 산 위의 알코올중독치료센터에서 내려온 진수를 거두어 카페에서 함께 생활한다. 그러던 어느 날, 진수와 해영은 눈이 맞아 편 사장의 돈을 갖고 도망간다. 편 사장은 마음이 아프지만, 돈으로 해영을 붙들어 둔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인다.

 

 

이렇듯 바닷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부유하고 있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더 가까워지지도 않았고 더 멀어지지도 않은 채 한결같은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유지와 고모부, 이사경과 유지, 유지와 이린, 이사경과 백주희 등은 ‘한결같은 거리’를 유지하는 관계다. 소설의 커플들은 이 관계보다 못하다. 유지와 오휘, 편 사장과 해영, 진수와 상희(알코올중독치료 센터 커플) 모두는 사랑에 실패한다. 패잔병처럼 바닷가 주위를 떠돌 뿐이다.

 

 

소설 속 인물들의 부유하는 관계를 보면서 현대 사회의 인간관계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많이 우울했다. 요즘 우리들은 수많은 모임과 일적으로 엮인 인간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럼에도 자신의 흉금을 털어놓을 단 한 사람이 없어 정신과를 찾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고 있다니, 참으로 아이러니 하다. 우리 각자는 부유하는 삶으로 더욱 고독하게 된 듯하다.

 

 

결국 쓸쓸히 홀로 죽는 고독사가 우리들 삶의 종착역일까. 그래서 소설 속 유지가 떠올리는 노부인(이사경 어머니)의 말이 의미 있게 다가온다.

“노부인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제 상대를 못 만나면 남자는 바람처럼 들판을 떠돌다가 덧없이 세상 밖으로 사라지는 거다. 여자도 마찬가지야.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흩어지는 거지……” (p 90)

 

 

3

 

 

작가 전경린은 단언하는 것 같다. 제 남자를 알아보고, 제 여자를 알아볼 줄 아는 능력이 없다면, 우리들은 모두 부유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고. 소설 속에서 말하듯이 ‘삶이란 부재의 사과를 깎는 일’이라면, 결국 우리는 “어디에도 뿌리를 내리지 않고 삶의 수면 위를 빙빙 돌며 (……) 자신마저 자기의 것이 아니라는 듯 초월적으로 떠 있(p 205)”게 된다고.

 

 

참으로 진부한 결론이 아닐 수 없다. 후기 산업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삶의 종착역은 일부 예견되어 있다. 각자 부유하는 삶을 살다가 쓸쓸히 고독사 하는 것. 이를 막는 유일한 한 가지가 남녀의 사랑이라니, 어찌 진부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노부인의 말을 도저히 반박할 수 없는 것 또한 진실이다. 그래, 늙고 실연을 당해도 서로를 알아 볼 수 있는 능력만 있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작가는 슬쩍 마지막에 복사가게 노인과 신상희 그리고 유지와 연조의 관계를 설정해 놓은 듯하다. 늙었다고, 실연당했었다고 사랑할 능력을 잃은 건 아니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실망스럽다. 참신하지 않아서다. ‘전경린식 사랑타령’의 새로운 버전처럼 느껴지기 때문. 그래서 그런지 마지막으로 해영에 실연당한 편 사장의 입을 빌어 전경린이 전하는 말이 계속 귓가에 멤돈다.

 

 

“그러면서 왜 사랑을 (계속) 하느냐고요? 말도 안 되는 사랑을 왜 하고 또 하느냐고요? 허영일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 외에 무엇이 있지요? 먹는 것, 입는 것, 꿈도 없는 수면, 걷기, 살랑이는 바람, 햇살, 온갖 향기, 미소, 하지만 타인의 살갖을 파고드는 사랑보다 더 강렬한 행복감은 없어요. 없지요. 그런 의미에서 난 중독자이지요. 하지만 그 동작이야말로 삶에서 최고가 아닌가요? 그 외엔 아무리 미화해도 일과 온갖 관계와 생활이란, 그저 인생의 노동일 뿐이니까요.” (p 187)

 

 

그녀의 작가 의식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전혀 변하지 않은 듯하다. 사랑이외의 모든 것은 ‘인생의 노동일 뿐’이라고 여전히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헬조선의) 현실을 도외시한 감상적 사랑타령으로 인생의 가치를 말한다는 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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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7-05-07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무 님, 그동안 너무 격조하셨습니다. 그간 무탈하셨는지요 ?

yamoo 2017-05-08 14:34   좋아요 0 | URL
네..좀 격조했습니다.^^; 탁구를 열나게 치느라 서재질을 거의 못했네요.ㅎ 덕분에 건강은 좋아졌습니다만 점차 바보가 되어가는 느낌이 들어 탁구를 그만 두기로 했슴돠~ㅎㅎ 무탈했다 봐야죠^^ 맞아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oren 2017-05-07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을 수 없는 기쁨과 놀라움이 앞서네요, yamoo 님이 이렇게 나타나시다니~

yamoo 2017-05-08 14:35   좋아요 0 | URL
저도 반갑고 기쁘군요! 격하게 맞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탁구도 그만뒀으니 종종 출몰하겠습니다.ㅎㅎ

cyrus 2017-05-07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죠? ^^

yamoo 2017-05-08 14:37   좋아요 0 | URL
저두 오랜만이어요. 탁구치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네욤.ㅎㅎ
사이러스 님은 여전히 잘 지내시는 것 같아요. 종종 출몰하겠슴다~^^

stella.K 2017-05-07 1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이런 리뷰를 쓰시다니...!
저완 아직 인연이 없는 작가이긴 하지만 전경린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더라구요.
문체의 독특함, 치명적인 뭐 그런 걸 제일로 치긴 하던데
어떤 작가든 전작을 하다보면 비슷한 구조나 패턴을 보이긴 하죠.
저는 읽지 않은 고전이 너무 많아 앞으로 전경린을 읽을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암튼 오랜만입니다. 뭐하며 지내십니까?^^

yamoo 2017-05-08 14:43   좋아요 1 | URL
오랜만입니다, 스텔라님^^
탁구치며 지냈어요. 탁구만치니시간가는줄 모르고 바보가 되어가는 느낌..
그래서 다시 컴백했어욤^^

전경린 작가를 읽지 않으셨다면 ‘검은설탕이 녹는 동안‘ 한 권 읽어보세요. 읽어볼 가치가 있습니다. 스텔라 님에게 강추드려요~^^

수다맨 2017-06-10 05: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90년대를 풍미했던 몇몇 여성 작가들(전경린, 신경숙 등)을 보고 있노라면 이들이 자의식만 충만한,‘문장 세공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중독성 강한 문장을 짓는 솜씨는 우수한데 그 이상의 역량과 재능은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 어쩌면 저만한 작가들에게 상을 안겨주고 문학적 거목으로 만들어준 그 당시(그리고 오늘)의 비평계도 문제가 얼마큼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yamoo 2017-06-11 21:25   좋아요 0 | URL
‘문장 세공사‘라는 멋진 표현을 배웁니다!^^ 신경숙 은희경 전경린 등의 저자들 작품들을 보면 ˝중독성 강한 문장을 짓는 솜씨는 우수한데 그 이상의 역량과 재능은 잘 보이지 않는다˝라고 지적하신 부분에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 문학은 비평계가 문제의 7할 이상은 제공했다고 여겨집니다. 어제와 오늘 바사니의 <금테안경>을 읽었는데...제가 우리나라 문학작품을 읽을 수 없는 이유가 자명하더라구요. 필립 로스의 <에프리맨> 같은 책을 읽다가 김애란 작가의 책을 잡으면 그냥 던져버리게 됩니다. 시간은 짧고 좋은 책을 읽은 시간은 더더욱 짧으니까요.

좋은 댓글로 나눔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