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경제학자의 유쾌한 에세이
폴 크루그먼 지음, 김이수 옮김 / 부키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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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은 6부으로 이루어져 있다.
1. 일자리, 일자리, 일자리,
2. 우파의 문제
3. 세계화의 뜬구름
4. 성장이란 환상
5. 투기꾼의 무도회
6. 시장을 넘어서

1부는 일자리 주제에 대한 온갖 혼란스러운 생각에 대한 것이다. 어설픈 이론가에서는 최근들어 다시 인기를 얻고 있는 아주 오래된 한 가지 오해를 논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행해지는 노동의 양은 제한되어 있고, 따라서 생산성이 향상되면 구할 수 있는 일자리 수는 감소된다고 하는 생각을 논파한다. <다운사이징 다운사이징>에서는 일자리에 대한 인식과 현실의 간격을 논하면서 로버트 라이시를 조소하고 있다.<속류케인즈 주의자들>에서는 자본주의가 과도한 생산성으로 인해 위기에 처할 것이라는 생각에 동조하는 어설픈 케인즈주의 논객들을 비판하고 있다. 1부 마지막 에세이는 실업에 대한 프랑스의 슬픈 사례에 관한 것을 다루고 있다.

2부에서는 공급중시경제학이라는 괴상한 이론을 맹렬히 비난하고 있다. 공급중시 경제학을 지지하는 밥돌을 비롯한 정치가와 우파경제학이 왜 잘못됐는지를 주요 저서와 정치가들의 입장을 분석하면서 그 잘못의 급소를 찌르고 있다.

3부는 세계화에 대한 잘못된 환상을 지적하고 있다. 국제무역과 투자는 세계경제 전체보다 빠르게 꾸준히 성장하고 있고, 그 결과 국가단위의 경제는 갈수록 상호의존적이 되고 있다.(101) 이 상호의존성과 영향이 둘 다 과장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며 지식인들 사이에서 그에 따른 모든 현상을 사악한 것으로 몰아붙이는 경향이 강하데, 크루그만은 바로 그 사악한 현상이 사악한게 아니라고 강변한다. <세계가 하나가 아니다>는 그런 경향을 바로잡기 위해 쓴 글인데, 이 글이 비판의 십자포화를 맞자(세계화의 결과로 제3세계의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혜택을 보게 될거라고 말한 대목) 그에 대한 보론으로 쓴게 <값싼 노동력을 찬미하며>이다. <적자에 시달리는 동아시아>는 일부 석학들과 정치가들이 신흥공업국의 등장(특히 중국)으로 세계적인 공급과잉이 초래될 것인데, 중국같은 나라는 생산만 하지 소비는 하지 않으며 수출만 하지 수입은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견해를 비판한 글이다. 여기서 쉬운 무역수지 경제학을 맛볼 수 있다.

4부에서는 경기순환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대대적인 논전을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도 공급중시 경제학은 크루그만의 비판의 주 대상이 되고 있다. 언론을 통해 득세하는 새로운 패러다임론의 잘못된 점을 비판하하면서 그 새 패러다임이 통화정책을 통해 가능한 일과 불가능한 일을 혼동하여 경기순환과 장기성장 간의 차이에 과한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인플레이션을 옹호한다>에서는 유럽의 가격안정 정책 입장을 반작한다. 그리고 <일본은 무엇이 문제인가>에서는 일본경제가 침체한 원인이 소극적인 통화정책 때문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끝으로 <물결의 규칙을 찾아서>에서는 경제학과 역사학에 대해 그리고 경기순환이 결코 종식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말하고 있다.

5부에서는 금융과 환율투기에 대한 의미를 밝히고 힜다. 세계구리사장에서 스미토모 사의 초창기 성공적인 매점에 관한 놀랄만한 이야기를 다룬 <카퍼씨는 어덯게 파멸하게 되었는가>. <테킬라 효과>는 94년말 멕시코 및 다른 라틴아케리카 국가들의 통화위기를 <바트화 현상>에서는 97년 아시아 통화위기에 대한 내용. 끝으로 <조지 소로스로부터 안전한 세계 만들기>라는 에세이는 97년 3월 런던에서 열린 G30 회담 발표문으로서 유럽의 통화위기에 초점을 맞추어 좀더 폭넓은 조망을 하고 있는데, 이 책에서 가장 어려운 내용을 담고 있다.

6부에서 묶인 글은 대체로 가격과 가치의 차이 그리고 그 차이를 분명히 밝혀주는 경제학적 분석에 관한 것. <지구의 대차대조표>에서는 환경보호정책에 빗대어 중요한 희소장원에 제값이 매겨지지 않으면 시장이 왜골될수도 있다는 생각에 대해 새로운 분석을 시도하고 있으며 같은 주제로 교통혼잡 문제를 다루고 있다. 두 경우 모두 시장실패는 정부개입의 강력한 근거가 된다. 그런데 민주주의 정치 자체가 정치과정을 통해 고쳐져야 하는 시장실패에 의해 똑같이 시달림을 받고 있는 실정을 <합리적 민주주의>에서 논하고 있다. <의학적 딜레마>는 의료기술 향상으로인해 야기되는 심각한 도덕적 정치적 쟁점을 논한 글이고 <소비자물가지수와 과당 경쟁>은 인플레이션과 삶의 의미에 대해 논한 글이다. <과거를 돌아보며>에서는 뉴욕타임스 매거진 100주년 특집호에 기고한 것으로 서기 2026년의 시점에서 되돌아 본 필자들의 전문 분야에 대한 기고 요청에 응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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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여, 나뉘어라 - 2006년 제30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정미경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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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연휴가 시작되던 날 반디문고에 가서 책구경을 하다가 이상문학상수상집 코너가  있길래 그자리에 주저 앉아 읽었던게 이 2006년 이상문학상 소설집이었습니다. 수상작들은 구광본의 <긴하루>, 함정임의 <자두>, 김경욱의 <위험한 독서>, 김영하의 <아이스크림>, 전경린의 <야상록>, 윤성희의 <무릎>이었습니다.  

시간상 최종 대상후보에 올랐던 3작품 전경린과 정미경 김경욱의 작품만 읽었습니다. 그리고 정미경의 이 작품과 치열한 경합을 벌였던 전경린의 작품은 솔직히 이 전작인 <환과 멸>과 별반 차이가 없어 좀 실망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이게 최종까지 심사위원들에게 고심하게 만들었다는데 의아했습니다.  

하여간 전경린의 모든 작품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실망스러웠는데 말입니다. 평론가들의 취향이 수상작을 결정하는데 한몫한다는 걸 알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이 대상수상작에 내 나름의 시선이 삐딱해집니다.  

이 글은 서점에서 읽은 즉시 떠오른 생각들을 매모해두었다가 다시 정리한 글입니다. 좀 삐딱하게 읽는거.. 이런 수상작들을 보는 즐거움중 하나입니다. 나는 평론가들과는 생각이 다르다..라는...나만의 읽기...하여간 관심있는 분들도 읽어보시고 나름의 평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2등은 없다는 광고 카피가 생각난다. 난 2등이 좋은데...세상은 1등만을 기억한다는 그 카피는 지금도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언명이다. 2등의 위치. 2등의 가치를 모르는 거 같다. 우리선수가 은메달을 따면 실망하면서도 수영에서 2등인 은메달을 따면 난리다. 경중의 차이인가..세상은 1등만을 기억하는 건 아니다. 그러면서도 대학순위나 기업순위는 뻔질나게 매긴다. 학생 석차매기듯이.. 국가순위도! 우리나라 서울대 세계대학 순위는 63위. 글로벌기업에 삼성은 10위에 들지 못한다.  우리가 그렇게도 호들갑떨었던 세계축구 4위. 2등은 저~ 위에 있는 도달할 수 없는 가치일 수도 있는 것이다.

  누구나 학창시절 성적표를 받았을 것이다. 우리는 그 석차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노력하면 내가 어느 등수에 들어 장학금을 탈수 있을지에서부터 저녀석한테만은 뒤질수  없다는 치기어린 결심에 이르기까지..

  정미경의 <밤이여 나뉘어라>는 바로 학창시절 치기어린 경쟁심과 열등의식이 우리사회의 엘리트들의  의식속에 어떻게 각인되는지 형상화한 소설이다.(적어도 나에겐 그렇게 보였다!)학창시절의 그 의식이 계속 사회속에서 성공의 단계라는 변화하는 옷을 입고 어떻게 진화하고 파멸하는지 이 소설은 보여준다. 우리사회의 엘리트라는 평론가들로부터 "주제의 진정성"이라는 찬사를 받은 이 작품은(대상 수상작으로선정된 이유가 주제의 진정성이었다) 오로지 그런 의식을 공유할 수 있는..아니 적어도 한번 쯤은 경험한 엘리트들의 열등의식의 심연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영화감독인 나는 함부르크에서 자신의 영화시사회가 열리는 것을 맞아 노르웨이 오슬로에 있는 친구이자 평생의 우상이던 P를 만나기로 한다. P는 학창시절부터 1등만을 해온 독선적이고 천재성이 번뜩이는 그런 친구다. 뷰티풀마인드의 주인공 존 네쉬처럼 인격에 장애가 있는. 나와 P는 의대에 진학하지만 천재성에 도취된 P의 독선적인 태도로 P는 졸업과 동시에 미국행길에 오른다. 미국 유명병원에서도 그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P는 돌연 노르웨이로 거쳐를 옮겨 신약개발에 참여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집에서 머무르는 단 3일동안 P의 아내이자 한때 내가 사랑했던 M으로 부터 P가 알콜중독자가 됐다는 절규어린 소리를 듣게 된다.
 


  <밤이여 나뉘어라>는 바로 학창시절부터 계속된 치기어린 경쟁심과 열등의식이 이후의 생활에도 나와 P의 관계에 끊임없이 계속되는 그 관계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천재성을 가진 P를 노력파인 내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내면의 열등의식을 표출시키면서 한 천재의 인간적 파멸을 그리고 있다. 천재이고 모든것을 갖춘 P가 알콜중독자로 밝혀지는 과정을 통해 내가 나의 생을 살지 못하고 타인을 의식하면서 사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소설은 얘기해 주고 있었다.
 
  주인공 나는 2등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P로 인해 열등감에 사로잡힌 삶을 살고있다. (그가 유명 영화감독이 된 지금도!) 2등은 1등 뒤로 숨을 수도 있고 따라가야 할 분명한 목표 1등이 있기에 공허하지 않다. 계속 앞에 있는 목표가 있으니 그 목표가 도달할 수 없을 만큼의 천재라면 2등의 성장은 웬만한 1등 부럽지 않게 성장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사회에서는 주인공처럼 좌절하는 엘리트들이 훨씬 더 많은 거 같다. 그래서 평론가 이어령은 "이루지 못할 꿈을 쫓는 인간 존재의 허무" "인간의식의 파멸과정"이라 평한지도 모르겠다. 이런 문제의식은 엘리트일수록 더 깊게 느끼고 그것이 이 작품을 대상수상작으로 선정한 이유일 듯 하다.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든다.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는 평범한 주제인데도 불구하고 평론가들이 뜻을 공유했다라는 건 적어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내면적으론 비록 엘리트는 아니라하더라도 자기나름의 그런 열등의식을 갖고 있다는 의식의 보편화를 염두해 두었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이 작품을 삐딱하게 읽는 나로서는 왜 이작품이 이상문학상 대상에 선정되었는지도저히 동의할 수 없다. 이 작품이 그토록 높게 평가받으려면 다음과 같은 보편적인 전제가 뒷받침되야 한다.

 "우리는 모두 우리를 뛰어넘을 수 없는 어떤것에 우리의 생을 투사하며 그것으로부터 끊임없이 인정받으려하고 그것으로인해 끊임없이 열등한 실체임을 자각해야하는 비극을 지닌 존재라고"

  2등에 아파하는 자 이 소설의 대상 이유인 주제의 진정성에 동의할 것이다. 2등에 만족하고 자기 앞의 생에 만족하는 사람에게 이 소설은 그리 큰 무거움으로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학교에서의 성적과 사회의 성공이라는 것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어찌 이런 것에 문제의식을 느낄 수 있겠는가?

 
 나와 P의 관계에서 만족과 행복은 없다. 오직 보여주기와 인정받기 위한 애씀만 있다. 다름 사람의 평가는 다 무시하고(이 작품의 주인공은 영화감독이다. 대중의 평가와 지지가 가치있을!) 오로지 내 우상의 평가만을 맹목적으로 갈구하는 "나"에게 자유와 행복이 어찌 공존할 수 있을까. 성공한 영화감독인 나를 있게한 것도 P에 대한 열등감이며 P를 만나러 오슬로에 가는 것도 결국은 P에 대한 열등감의 발로다.

  M의 절규와 P의 파멸과정으로 인해 나를 괴롭히던(적어도 지금의 "나"를 있게한) 그 열등감은 어떻게 되었는가? 없어졌는가? 상대에 대한 열등감은 없어지지 않는다. 2등으로 괴로워한자 1등이 없어졌다고 1등이 돼지 않는다. 적어도 그 자신의 자아는 안다. 그는 1등이 아니라고. 1등이 없어져버리길 간절히 소망하지만 1등이 없어져도 쾌재를 부르지도 않는다. 

 그래서 소설가 서영은은 대상수상작 평에서 이 사실을 "내가 P에게 씌운 자기욕망의 신기루가 걷힌 뒤에도 깨달음으로 바뀌지 않는다. 존재의 자기증명이 가장 극명해지는 것은 무엇을 이루었느냐하는 결과로서보다 긴장감을 사는 바로 그때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비범함은 이 메시지에 있다"라고 썼다.

 
 나도 평론가들이 흔히 평하는 걸 흉내내서 이 소설을 평해 보겠다. 이 소설은 엘리트만이 느낄 수 있는  치기어린 열등감이 인간의식의 파멸과정에서 어떤 작용을 하고 있는지 평론가인 엘리트의식속에 성공적으로 각인시켜 주제의 진정성을 획득한 작가의 비범한 선취의식에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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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수 애장판 1~8(완결) 세트
이와아키 히토시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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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충격적인 글로 시작하는 이 작품은 그것만큼이나 독특하고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이 작품을 굳이 분류한다면 이토 준치의 공포만화 계열로 분류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렇게 분류하기에는 이 작품의 무거움이 상당히 걸립니다. 예~ 바로 기생수는 인간의 존재론적 문제라는 철학적 주제를 건드리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작품이 발표되고 나서 일본에서는 철학적 논쟁이 가열됐었다고 합니다. 그 덕분에 작가 이와와키 히토치는 그해의 만화상을 수상했다고 하더군요. 그 만큼 깊이가 있다는 얘깁니다.  


머리를 점령하지 못한 오른쪽이를 통해 보는 인간의 모습 그 자체는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을 무색케 할 정도로 형편없는 존재로 그려집니다. 그도 그럴것이 오직 인간만이 생태계를 황폐화시킨 유일한 존재이니까요. 충격적인 첫 장에 쓰인 글을 보아도 작가가 무엇을 의도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인간 존재의 모습을 인간보다 더 뛰어난 생물체에 의탁하여 비판하고 그 문제의식을 드러낸 수작입니다. 특히 오른쪽이와 한 몸이 되어 살아가야하는 주인공의 고뇌의식과 오른쪽이를 통해 인간이라는 존재를 새롭게 보아 가는 오른쪽이의 의식이 이 작품을 더욱더 돋보이게 하고 있습니다.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과 더불어 큰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기생수. 만화는 애들이나 보는 것이라고 만화를 폄하하는 분들에게 강추하고 싶은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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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떼미오의 최후 - 오늘의 세계문학 19
카를로스 푸엔떼스 지음, 김창환 옮김 / 지학사(참고서) / 198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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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도서출판 벽호에서 김창환 울산대 서반아어 교수에 의해 번역된 카를로스 푸엔티스의 대표작이다. (아쉽게도 지금은 절판된 작품으로, 아직 재출간 되지 않고 있다.)

 항상 노벨문학상 후보로 회자되는 푸엔티스는 이 작품 외에도 <양심>(1959), <산들바람>(1962), <장님들의 노래>1964>, <성역>(1967> 등 굵직굵직한 소설들을 많이 발표했다. 

그는 특히 역사와 이야기의 전개를 통해 독자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개방소설'형식의 작품 뿐만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전체를 작품의 무대로 활용하는 신화적 소설 형식의 작품을 출간하기도 했다. 

한편 푸엔테스는 자신의 주제들이 소설 작품들 속에서 고갈되어감을 느껴, 점차 수필과 희곡에도 손을 대었다. 

이런 시도에서 나온 것이 수필집 <이스빠노 아메리카 신소설>(1969), <두 개의 문이 달린 집>(1970) 등인데, 후자는 나중에 연극화 되었으며, TV 비디오 예술로도 발표된 작품이다. 

뿐만아니라 작가는 영화제작에도 참여하여 많은 희곡을 썼는데, <모든 고양이들은 암회색이다>와 <애꾸눈이 왕이다>가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다. 

푸엔테스의 사상 면에서는 레오뽈도 세아와 옥따비오 빠스 같은 멕시코의 대 지성들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보이며, 소설기법면에서는 윌리엄 포크너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의 대표작이자 중남미문학 간이도서상 수상작인 <아프떼미오의 최후>는 멕시코 혁명시대를 소설화한 것으로서, 주인공 아르떼미오 끄루스의 공격적이고도 모순적인 개성을 통해서 마치 프리즘의 분광을 보듯이 혁명의 결과들이 투시되고 있다. 

이 소설에는 멕시코의 19세기 중반의 군웅이 할거하던 내란기와 외세의 침략, 외국자본가들의 횡포와 독립투사들의 의거, 산따아나 등 보수주의자들에 대한 후아레스 자유파들의 투쟁드이 점철되어 있다.  

그리고 특히 1910년 시작된 멕시코 혁명시대에서 1920년대 후반의 께레따로 헌법 제정 시기, 그 다음 1930년대와 40년대의 조부모 시대로부터 부모의 시대, 그리고 자기와 아들 시대에 이르는 4대의 역사를 회고하고 있다. 

이렇듯 본 작품은 희대의 풍운아 아르떼미오가 자신의 임종에 즈음하여 4대에 걸친 자신의 가족사를 회고하고 반성하면서, 멕시코의 민족형성과 문화, 경제발전과 그리고 근대화에 따른 사회변화상을 멕시코의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마치 만화경을 보는듯이 전개시키고 있다. 

프랑스의 자크 죠세는 <아르떼미오의 <최후>를 평하여, "이 작품의 기본적인 테마는 결코 영웅이 될 수 없는 혁명가, 비열한 출세주의자, 악랄한 기회주의자인 아르떼미오 끄루소로 대표되는 멕시코인에 의해 '배반당한 멕시코' 그 자체"라고 강조하면서 "이 소설을 읽는 독자는 주인공 아르떼미오의 길고 긴 임종의 고뇌의 입회자가 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작품을 읽으면 현대 멕시코인의 '뿌리'를 알 수 있으며, 작가 카를로스 푸엔티스가 왜 라틴아메리카 문학권을 대표하는 작가의 한 사람인지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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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둥치는 밤 읽기책 단행본 9
미셸 르미유 글 그림, 고영아 옮김 / 비룡소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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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의 끝은 어딜까?
다른 별에도 생명체가 살고 있을까?
우리는 어디에서 왔지?
도대체 누가 맨 처음 인간의 생김새를 생각해 냈을까?
우리가 만일 채소처럼 땅에서 솟아 자란다면..
나는 누굴까?
이 세상에 나는 오직 나 하나밖에 없을까?
만약에 우리가 몸을 서로 바꿀수 있다면...
아니면 우리 몸 가운데 우리가 싫어하는 부분이라도 감출 수 잇다면!
우리가 자기 마음에 드는 몸을 고를 수 있다면, 누군가가 내몸을 가지고 싶어할까?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게 될지는 처음부터 미리 정해져 있는 걸까?
아니면 정말 내 앞날을 나 혼자서 헤쳐 나가야 하는 걸까?
내가 언제나 옳은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그런데 내가 결정한 것이 옳은지 아닌지 어떻게 알지?
나는 불행한 일을 겪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운명- 그게 도대체 정확하게 뭘까?
그리고 우연은 뭐지? 누가 그걸 정하지?
내 머릿속에 있는 이 많은 생각들은 다 어디서 왔을까?
그리고 그것들이 내 머리를 떠날 때에는 어디로 가는 거지?
우리가 지금 사는 게 사실은 꿈이라면?
그리고 우리가 꾸는 꿈이 진짜라면?
이 세상의 끝이란게 있을까?
내가 언제 죽을지 미리 알 수 있을까?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영혼을 볼 수 있을까?
도대체 무한은 어디에서 끝나지?
혹시 내가 죽은 다음에 모든 것이 내가 태어나기 전과 똑같지 않을까?
어쩌면 죽음이 우리 기억을 싹 지워 버리는지도 몰라, 우리가 다른 곳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게!
우리는 아마도 사람이 아닌 완전히 다른 존재로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될지도몰라!
죽은 다음에 아무것도 없다면 어떡하지?

 
이 동화책에 나오는 물음들이다. 책을 한 시간 만에 볼 수 있지만 다시 그림과 글을 매치시
켜서 보니 거의 매장을 멈춰있게 된다. 하나 하나의 물음들이 심오한 철학적 물음들이기 때
문이다. 돌아버리겠는건...천둥치는 하룻밤 사이에 한 아이가 자기의 개와 함께 침대에서 이
런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도무지 잘 것 같지 않은 아이는 이런 심각한 물음들을 던져놓고는...
 

우리가 영원히 산다면?
그러면 모든 신비를 이해할 수 있을 텐데
지구의 신비와
우주의 신비를
그리고 난 어디에서나 친구를 사귈 수 있을 텐데!
그려면 정말 신날거야!

 

 "그러면 정말 신날거야!"라는 말로 마무리 하면서 침대속 속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나에게는 머리를 쥐어 뜯으며 도리도리 머리를 좌우로 흔들면서 잠을 설치게 하는 난제를 던져주고는 정말 무책임하게도 잠이 든다.  

그리고 해가 뜨는 그림과 함께 더 넘길 책장이 없어진다. 이런이런이런~~ 아이다운 무책임한 마무리에 어안이 벙벙해진다.

책 읽는 내내...얘야, 잠 좀 자라...넌 잠도 없니? 애가 왜 이리도 어려운 것만 무책임하게 묻고 나서...어른이 심각하게 고민하게 해 놓고 그제서야 자는 거니...니가 던져 놓은 물음들을 생각하느라 나는 밤잠을 설쳤는데..개하고 먹을 것을 먹으면서 하나도 심각하지 않게 어떻게 그런 물음들을 던질 수 있는 거니?  

아~ 넌 정말 무책임한 애구나. 어쩌자구 나는 천둥치는 밤을 나기 위해 아이가 하는 이런 말에 넋을 놓고 읽게 되었을까. 

아이가 던지는 철학적 질문들을 형상화하는 그림들은 세상을 새롭게 보는 아이의 세계였다. 하지만 이 그림들은 어른들의 머리가 얼마나 굳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상상력의 빈곤을 들어내는지 단박에 알 수 있게 해 주는 바로미터 역할도 해 주고 있다.   

천진하지만 난해한 질문들을 표현하는 그림들은 우리세계의 희로애락과 애오욕을 상상력있게 펼쳐보이는 삶 자체였고, 색다른 차원의 재미를 선사해 주고 있다.  

지금까지 배워왔던 진리라는 체계, 당위, 상식 그리고 통념을 뛰어넘어 어렸을 때 막연히 생각했던 '진리의 원형'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간 느낌이다.  

어른이 아이의 눈으로서 사물을 보고 이해한다는 것은 투박하지만 삶에 직관적인 통찰을 주는 것 같다. 성경에도 있지 않은가. 너희가 어린아이가 되지 않는한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때묻지 않은 삶의 순수함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고 느낄 수 있는 진귀한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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