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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하!
마치다 준 지음, 김은진 옮김 / 삼인 / 2007년 6월
평점 :
품절
1
고양이 독재국의 두더지 각하와 족제비 잭 장관, 그리고 다수의 고양이들이 그려가는 코믹 풍자극~
책은 지극히 얇고 우습게 보인다. 한 시간도 채 안돼서 읽을 수 있는 만만한 책 같다. 겉으로는 진짜 우습게 보인다. 읽으면 진짜 우습기도 하다. 빙그레 웃으면서 그림과 글 속에 담겨있는 것을 보노라면 여러 편의 정치 칼럼을 보는 느낌이다. 간결하고도 함축적인 그림들은 정말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순전히 책의 표지 그림에 반해서 이 책을 갖고 있는 지인을 졸라서 빌려 본 책이다. 두더지 각하와 고양이 그리고 족제비 잭 장관의 그림이 너무도 귀엽고도 재미나게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책에는 ‘실없는 날들의 기록’이라고 돼 있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만큼은 전혀 실없지 않다.
짧은 그림 긴 생각. 잊혀질 수 없는 에피소드가 너무 많다.
2
국가 경제가 결딴났다고 호들갑떠는 잭 장관이 내놓는 새 화폐 발행 안. 인쇄한 돈의 1/3은 국고로, 1/3은 시장에 그리고 나머지는 두더지 각하의 소유로 하자는 안은 결국 10냐옹이 100,000각하로 교환되는 결과를 빚는다. 여러 독재국가에서 해 왔던 악습의 폐혜를 너무도 간결히 표현해 주고 있다. 화폐개혁이라는 명목 하에 한밑천 챙기는 독재자들, 그리고 심한 인플레를 너무도 해학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불안>이라는 에피소드를 보면 ‘각하의 목숨을 노리는 암살단’은 다름 아닌 도처에 있는 고양이 주민들. 갑자기 날아오는 총알에 혼비백산하는 각하의 모습이 너무도 재밌게 그려져 있다. 식탁 밑에 숨어서 잭 장관은 능청을 떤다. “괜찮습니다. 각하. 저건 우리 첩보요원입니다. 적을 교란시키기 위해 위장공작을 펼치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는 잭에게 “멍청한 놈”이라고 핀잔주는 두더지 각하. 잭 장관을 멍청하다고 하는 각하는 그 자신이 멍청한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 에피소드에 그려진 그림이 아주 귀엽다~
<쿠데타>에서 잭 장관은 어물어물 하면서 두더지 각하에게, ·····사실은···어젯밤····쿠데타가···· “뭐야!” 놀라는 각하 앞에서 “쿠데타가 일어나는 꿈을 꾸었는데, 수면 부족인가 봅니다”로 각하를 놀리는 잭 장관. 매를 벌지만 항상 그러한 잭이 있어 재밌다.
<명화>를 보다 보면 다음과 같은 장면도 대하게 된다. “정말 감동적인 그림이군!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받친 영웅의 죽음인가. 이봐 가까이 가서 이 그림의 제목을 읽어보게.” 그림은 무수히 날아오는 총탄을 맞고 죽어가는 두더지 각하를 그리고 있다. “저····독재자에게 죽음을! 이라고 써 있는 데요.”
잭의 촌철살인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호심탐탐 각하의 동상을 없애고 자신의 동상을 멋있게 보호하거나 새로 건립하려는 잭 장관. 그런 동상이 각하의 눈에 띄지 않을 리가 없건만 잭의 그럴듯한 동상을 보고 “어이, 저건 뭐지”라고 묻는 추궁에 “네? 각하, 전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요. 몸이 허하신가 봅니다. 헛것을 다 보시고.”라고 능청을 떤다.
무엇보다 이 책의 압권은 <시선>과 <형무소>를 표현한 두 에피소드이다. <시선>은 잭 장관과 고양이 주민들이 짜고 두더지 장관을 암살하려는 시도를 재미있게 묘사한 곳이다. 테러리스트의 대책에 대해서 연설하던 두더지 각하는 앉아 있는 고양이 시민들이 시선을 따라 그곳을 바라보지만 테러리스트로 변장한 한 고양이 시민은 그 반대쪽 무대 커튼에서 각하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다. 다시 반대편 쪽을 예정된 연기로 연기하는 두더지 시민들. 반대편에 뭐가 있는지 각하의 고개가 돌아가는 순간 반대편으로 가 있던 고양이 테러리스트는 각하를 향해 총탄을 발사하고 그제야 속은 것을 알고 두려움에 떠는 각하와 잭 장관. 그 장면을 앉아서 즐기는 우리의 고양이 시민들.
<형무소>를 시찰하는 각하. 어딜 가나 형무소는 만원인 것을 본 각하는, 죄수들이 묘하게 즐거워 보인다고 한다. 길거리에는 아무도 없다. 그 이유가 모두 체포되어 형무소에 있다는 것을 은연히 말하는 잭 장관. 사람들이 없어 쓸쓸하니 형무소에 들어가서 지내자고 제안하는 각하.
3
귀여운 캐릭터를 등장시켜 재미있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이 책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있는 그런 우스운 책이 아니다. 모든 에피소드들은 독재국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기가막히게 풍자하고 있다. 각하가 멍청할수록, 잭이 각하를 골탕먹일수록, 잭과 각하가 계획한 것이 항상 어긋날수록 풍자의 강도는 높아진다.
어느 독재국가도 여기있는 애피소드들의 내용을 피해가지 못할 것이다. 더군다나 독재자를 경험했던 사람들은 여기서 묘사된 각하와 장관 그리고 고양이 시민들의 모습에서 여러 나라가 경험한 독재의 악습을 의미 있게 반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이 바로 우리들에게 어필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두더지 각하와 같은 지도자를 지겹게도 가져왔기 때문일 것이다. 현실 정치를 유쾌하게 풍자하는 작가의 역량이 담긴 놀라운 책이다~ 본래 이런 종류의 책은 돈을 주고 사기가 무척 아깝지만(너무 빨리 봐서) 이 책만큼은 절대 아깝지 않을 것이라 사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