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와 책 미래의 힘 - 내일의 교사를 위한 오늘의 독서백편
박인기.우한용 지음 / 솔출판사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책에 관한 책을 줄창 읽던 시절이 있었다. 그 종지부는 아마도 다치바나 다카시의 저작들 이었을 거다. 책 읽고 글 쓰는 사람의 끝판왕을 만나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책에 관한 책을 소개한 책들은 더 이상 읽지 않았다. 대부분의 책들이 다카시의 책에 비해 지루하고, 어느 순간 저자들이 소개해 주는 책들이 익숙한 책이 되었기에 그렇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책에 관한 책들’은 거의가 저자의 ‘독서에세이’나 리뷰집 또는 해제집의 수준을 넘는 게 별로 없어 보이기에. 다 거기서 거긴 것처럼 보인다. 대개가 고전류의 해제집 아니면 리뷰집 성격이 짙은 책들이다. 저자의 쌈박하고 진솔한 독후감을 만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

 

 

내가 갖고 있는 책만 해도 30여 권이 넘는데, 대개가 비슷비슷하다. <동양의 고전을 읽는다>(휴머니스트, 2006), <서양의 고전을 읽는다>, <고전의 향연>(한겨레, 2007) 등은 해제집 성격이 강한 책들이다. 그나마 <책탐>(나무수, 2009), <탐독>(아고라, 2016), <책을 읽을 자유>(현암사, 2010) 등이 그나마 심도 있는 독서편력기 쯤 된다. <한 권으로 읽는 철학의 고전 27>(지와사랑, 2011) 정도면 아주 밀도 있는 리뷰집이랄 수 있다.

 

 

 

 

 

 

헌데 이런 책들의 한 가지 공통점은 아주 유명한 책들 소개나 리뷰가 대다수라는 점이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도스토옙스키의 <까라마조프의 형제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톨스토이의 <안나 까레리나> 등. 고전류가 대부분이다. 물론 <각주와 이크의 책읽기>(한국출판마케팅, 2011)와 같은 책에는 우리나라 작가들과 지명도가 조금 떨어지는 책들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기는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스무살을 울린 책>(작가정신, 2002)과 같은 유명인의 진솔한 글은 만나 볼 수 없다. 개인적으로 나이젤 워버턴의 <한 권으로 읽는 철학의 고전 27>과 같은 책을 좋아하지만, 좋은 감상문을 모은 책은 나름의 읽는 가치가 있다. 내가 별로라고 생각하는 책들을 어떤 이는 아주 감명 깊게 읽었고, 그 책이 그의 삶 속에 어떤 작용을 했는지 보는 것은 기대 이상의 뭔가를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책을 다시 꺼내어 읽어 보게 한다.

 

 

 

며칠 전, 책을 소개하는 책을 한 권 읽었다. 사실 이 책은 찾아서 읽은 책이 아니다. 도서관 신간 코너에 하도 자주 눈에 밟혀 빌려 읽게 된 책이다. <교사와 책>(솔, 2009)은 ‘내일의 교사를 위한 오늘의 독서백편’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책 배판도 대학 교재마냥 크고 멋대가리 없는 표지에 읽고 싶은 마음이 그리 드는 책은 아니었다.

 

 

하지만 몇 권(특히나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자게서)에 대한 교수들의 진지한 리뷰를 보면서 읽을 가치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빌린 다음날 다 해치워버렸다. 이 책은 교사들을 위해 쓴 책 안내서인데, 집필자들이 모두 현직의 교육계에 몸담고 있는 교수들이다. 모두 익히 아는 책들이지만 교육학적 관점에 초점을 맞춰 새롭게 해석해 내는 리뷰들은 소개된 책들을 다시 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사실 여기 소개되어 있는 책 가운데 <딥스>, <만행>,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습관의 심리학>, <설득의 심리학> 등은 명저 산책이나 명저 해제집에 좀처럼 보기 드문 책들이다. <딥스>를 제외하고는 전부 자계서 부류에 속하는 책들이기도 하기에. 더군다나 알라딘 회원 중고책 가격으로는 거의 최하가격에 책정된 책들이다. 그냥 눈에 밟히는, 인기는 좀 있었지만 지금은 그저 그런 책들로 전락한 부류.

 

 

 

 

헌데, 교수들의 글을 통해 소개되는 이 밋밋한(?) 책들은 교육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런 책을 이렇게도 읽을 수 있군!’하는 놀라움을 안겨줬다고나 할까. 꿈보다 해몽이 좋다는 말이 있는데, 이 책들에 대한 리뷰를 읽으면서 드는 단 하나의 생각이었다. 특히 <만행>이 백미였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정작 손님인 나는 이 땅을 너무 사랑하고 있는데, 그들은 이 땅에 너무 익숙해져서 싫증을 내고 폄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걸핏하면 그들은 ‘한국은 더 이상 안 돼’, ‘한국은 가능성이 없어’ 하는 자기 비하로 이어졌다. 아니 이 한국이란 나라가 얼마나 위대한 나라인데, 그리고 지금껏 그들이 흘려온 피와 땀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데, 그것을 그렇게 한꺼번에 헐값에 도매금으로 평가절하 할 수 있을까.(p58)”

 

 

현각의 <만행>(열림원, 1999)에서 이 책의 리뷰자 박찬구 교수(서울대 윤리교육)가 인용한 부분이다. 그리고 박 교수는 “교육은 진리 추구의 보편성에 헌신하는 일이다. 진리추구 자체가 교육적 속성을 지닌다. 교육을 모색하는 우리는 진리 추구의 역정에 서 있는 것이다. 다만 깨닫지 못할 뿐이다. (p59)"라고 마무리한다.

 

 

사실 <만행>은 출간된 1-2년간 에세이 베스트 목록 10위 안에 드는 인기 있는 책이었다. 하지만 출간된 지 오래 지나자 베스트셀러들의 최후처럼 헌책방에서도 헐값에 거래되고 있다. 이미 수명이 다 했다고 여겨지는 책이다. 읽은 사람들은 다 읽었으니. 하지만 박찬구 교수에 의해 새롭게 소개되는 <만행>은 교육학적으로 읽어 봄직한 책이었다. 고교 <윤리와 사상> 교과서에도 ‘세계 윤리’단원에 현각의 이 책이 인용되어 있다지 않는가. 리뷰어의 역할을 다시금 생각나게 하는 리뷰라 아니할 수 없다.

 

 

<현대의 과학철학>(서광사, 1990) 역시 이 책의 리뷰를 통해서 가치를 새롭게 되새겨 볼 수 있었다. 사실 노석구 교수(경인교육대 과학교육)가 쓴 이 책의 리뷰는 내가 쓰고 싶었던 리뷰였다. 오래 전부터 차머스의 이 책에 대한 리뷰를 쌈박하게 쓰고 싶었다. 왜냐하면 과학철학 분야를 이 책처럼 알기 쉽게, 그것도 전문가가 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내용으로 정리하기에는 보통 힘든 게 아니기에.

 

 

노 교수는 이 책의 핵심을 아주 간결하게 잘 정리하면서, 책의 핵심을 아주 정확하게 짚어 주고 있다.

 

 “여기까지만 읽더라도(귀납주의에 대한 설명과 비판) 독자는 아마 현대사회가 맹목적으로 또는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것으로 확정짓는 ‘과학적’이란 도대체 어떤 지식이고 어떤 방법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호기심이 밀려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이 책의 특징은 바로 여기에 있다. 앨런 차머스는 ‘과학적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적극적인 탐구를 장려하는 방식으로 이 책을 서술하고 있다. (p152)"

 

 

우리가 인문서나 과학서 또는 칼럼이나 여타 잡다한 글을 읽을 때 ‘과학적’ 또는 ‘과학적 지식’이라는 말을 수없이 접해 왔을 거다. 그런데 이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별로 없을 듯하다. 주의 깊은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고민해 봐야 할 개념이다. 차머스의 이 책은 이 고민에 대한 답을 나름대로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책을 읽고 나면 다른 사람들이 쓰고 있는 ‘과학적’이라는 말의 오용 여부를 가릴 수 있는 식견이 생긴다.

 

 

물론 과학철학이라는 학문 분과가 쉬운 분야는 아니다. 그래서 이런 분야의 책은 읽는 사람만 읽는다. 하지만 “저자는 풍부하고 다양한 사례를 통해 독자가 과학철학의 핵심 개념을 하나씩 정복해 나가도록 이끌어 주며 흥미를 잃지 않도록 격려해 준다. 귀납주의부터 반증주의, 쿤의 패러다임을 거쳐 합리주의와 상대주의, 객관주의, 파이어벤트의 아나키즘적 인식론 그리고 마지막 비대표적 실재론까지를 물 흐르듯이 이어지는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다. 충분히 도전해 볼만한 책이다(p153)"

 

 

노 교수의 리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 책이 교사들을 위한 책이기에 차머스의 서문에서 교육학적 가치를 이끌어 낸다.

 

“차머스는 이 책의 목적이 ‘교육적인 것에 있다’고 서문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중략) 그렇다면 이 책을 읽는 교사들은 이 책을 통해 어떤 교육적 전망을 가질 수 있을까. 특정 과학지식을 전달하거나 무비판적으로 확산시키는 대열에 편승하기 보다는 끊임없는 의심과 탐구의 자세를 심어주는 교육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미래의 교육 리더들이 학생들이 과학탐구를 지도함에 있어 학생들로 하여금 ‘혼란에서 출발하여 고양된 혼란’에 이르는 길을 안내하고 격려하는 데에 소중한 지침이 될 것이다. (p153)"

 

 

물론 노 교수의 결론 부분이 원론적인 느낌이 들게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을 교육학적 가치를 지닌 책으로 소개하는 글은 노 교수의 이 리뷰에서 처음 본다. 나는 이 시도가 참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책의 독자는 넓어질수록 좋으니까. 과학철학 입문서를 교육학도가 읽고 거기서 교육적 가치를 이끌어 내는 것은 후학들이 몫일 것이다. 그 단초를 잘 제공해 주는 것이 책 읽는 기성세대들의 일이 아닐까.

 

 

이 책에 수록된 <파인만씨 농담도 잘 하시네>(사이언스북스, 2000), <습관의 심리학>(갤리온, 2007), <설득의 심리학>(21세기북스, 2005), <창의성의 즐거움>(북로드, 2003) 등은 명저의 반열에 드는 책이 아니다. 베스트셀러류에 가깝다. 하지만 교수들이 여기서 건져 올리는 교육학적 가치는 경청할만하다. 리뷰로써 교육학도에게까지 가치 있는 책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은 순전히 리뷰어의 역량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물론 이 책에는 명저라고 회자되는 유명 책들도 많이 소개돼 있다.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 박은식의 <한국통사>, 스티븐 핑커의 <언어본능>,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 한스 요아킴 슈퇴르니히의 <세계철학사> 등. 이 책을 읽는 가치는 이들 명저 리뷰에서도 잘 드러난다. 전혀 교육학과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 책에서도 리뷰어들은 교육적 가치를 훌륭하게 잘 건져 올리고 있으니까.

 

 

여러 교수들이 전공별로 자신만의 책을 추천해서인지 리뷰가 간결하면서도 밀도 있는 편이다. 한 책의 리뷰 당 분량이 4쪽에서 5쪽 정도이지만 책의 핵심을 잘 짚고, 이로부터 교육학적 가치를 잘 도출해 내고 있다. 쉽고 명료한 진술도 빼놓을 수 없다. 내가 읽은 리뷰집 중 리뷰어의 가치가 가장 잘 드러난 책이다. 천편일률적인 책 소개나 리뷰집에 싫증이 났던 분이라면 일독할 것을 추천드린다. 물론 ‘책에 관한 책’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금상첨화랄 수 있겠다.

 

 

 

 

[덧]

1. 경청할만한 교육학적 가치가 다루는 모든 책에서 훌륭하게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리뷰자에 따라서 다소 억지스러운 논리도 보이고 원론적인 내용도 보인다. 여러 필진들이 모여 집필된 책이기에 개인차가 많이 나는 것이 이런 류의 책들이 가진 맹점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상당히 괜찮은 편이고, 교육학적 목적에서 책의 가치를 재평가하는 시도 자체가 참신하여, 좋은 리뷰를 쓰고 싶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일독했으면 하는 책이다.

2. 교수들의 내공을 느껴볼 수 있는 리뷰가 꽤 많다. 주례사 리뷰가 거의 없어 리뷰 읽는 맛이 그만이다~ (몇 편이 있긴 한데, 뭐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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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7-06-11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를 오늘의 당선작으로 적극 밀겠습니다..

yamoo 2017-06-11 22:46   좋아요 0 | URL
곰발 님이 밀면 안된다믄서요~~~ㅋㅋ

어쨌거나 감사합니다요~~~ㅎ

cyrus 2017-06-12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저 그런 책을 색다른 관점으로 소개한 리뷰를 좋아합니다. 저도 그런 리뷰를 쓰고 싶습니다. ^^

yamoo 2017-06-13 20:14   좋아요 0 | URL
저도 그렇습니다~!^^
 
낭비 사회를 넘어서 - 계획적 진부화라는 광기에 관한 보고서
세르주 라투슈 지음, 정기헌 옮김 / 민음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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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노트북이 3대다. 데스크 탑을 치우고 장만한 노트북. 10년 사이에 컴퓨터를 4대나 장만한 셈이다. 이상하게도 컴퓨터는 쓰면서 계속 고장이 났다. 고장의 원인은 웹상에서 유포되는 악성 파일 때문이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부품 결함 때문이었다. 노트북을 산 후 약 2년 안에 보드나 램 또는 다른 장치에 이상이 생겨 수리를 반복 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단종된 모델은 수리비가 매우 비쌌다. 저가 새 노트북을 구입하는 가격에 육박했다. 프린터도 마찬가지였다. 비싼 카트리지를 사 가며 써 봤지만, 이상하게도 1년에 2-3번은 수리 기사를 불러야 했다. 1달 동안 기사를 무려 3번이나 부른 적도 있다. 그러다가 결국 2년도 되지 않아 다른 기종으로 교체하게 된다.

 

잠을 잘 때 요긴하게 쓰는 담요의 경우 요즘 1만 원 정도면 구매할 수 있다. 문제는 세탁비다. 담요를 세탁하는 요금이 1만원이다. 새 담요가 1만원이니, 세탁할 바에는 차라리 새 상품을 구입하게 된다. 그렇게 내다 버린 담요만도 서너 장은 된다. 휴대폰의 경우 2년 이상 쓰면 모델이 단종 된다. 그러면 액정 하나만 수리해도 10만 원을 가뿐히 넘는다.

 

옷은 말할 것도 없다. 멀쩡한 티셔츠나 면바지 또는 청바지를 수도 없이 헌 옷 상자에 담아 버렸다. 유니클로 같은 저가 브랜드에 가면 티셔츠 한 장에 5천 원 뿐이 안한다. 바지 역시 마찬가지. 유행에 맞게 이것저것 사다보면 옷이 사정없이 늘어나고, 한 번도 입지 않은 옷들을 정리해서 버리게 된다.

 

정말 낭비도 이런 낭비가 없다. 30여 년 전만해도 가전제품은 완전 고장이 나지 않는 한 버리지 않았고, 옷 또한 헤질 정도로 입었다. 하지만 지금은 고쳐 쓰거나 입지 않는다. 수리하는 곳도 없거니와, 수리비가 새 상품 가격을 넘은 경우도 많다. 대개 버리고 새 상품을 사는 순환을 반복한다.

 

도대체 요즘 가전제품의 수명은 왜 이리 짧은 것이며, 고장은 왜 이리 잘 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도서관에서 <낭비사회를 넘어서>(민음사, 2014)라는 얇은 책을 만났다. 사실 ‘낭비사회’의 원인이 궁금해서 책을 찾던 중 우연히 눈에 띈 책이다. 다소 생소한 프랑스 학자였는데, 주제 또한 매우 생소했다.

 

페이지를 넘겨 몇 줄 읽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계획적 진부화’라는 학술 용어가 튀어 나왔다. 헌데 저자인 세르주 라투슈가 겪은 경험이 나와 거의 비슷하여 책에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저자가 알려주는 ‘계획적 진부화’의 실체를 알아갈수록 경악을 금치 못했다. 프린터나 만년필이 2년을 넘을 수 없게 제조회사가 계획적으로 그리 만든다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다.

 

 "이 책의 중심 주제인 ‘계획적 진부화’는 인위적으로 수명을 단축하거나 결함을 삽입하는 방식을 말한다. 제작자가 상품을 설계하는 단계에서부터 특수한 장치 등을 이용해 미리 수명을 제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프린터를 제작할 때 인쇄 매수가 1만 8000장이 넘으면 자동으로 작동을 멈추게 하는 마이크로 칩을 삽입한다든지, 제품 보증 기간이 끝나자마자 고장이 나도록 기계를 설계하는 식이다." (p 34)

 

사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눈을 비비고 두세 번 거듭 읽어야 했다. 거짓말 같았기 때문이다. 설마 했는데, 뒤로 갈수록 그 놀라운 실체를 보니, ‘설마가 사람을 잡는’ 꼴이었다. 곰곰 생각해보니,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 싶다. 자본주의의 본질을 조금만 생각했더라면, 예견된 일이었는데, 물고기가 물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자본주의 사회에 살며 이를 간파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았다.

 

자본주의 사회는 소비를 지속하지 않으면 문제를 일으키는 체제다.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생산된 상품의 소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장’을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이 전제 때문이었다. 자본주의가 성장하지 못하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까? 바로 인플레이션과 실업이 발생한다. 우리가 목도했던 ‘그리스 사태’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이런 패닉 상태를 막기 위해 자본주의는 광고라는 매개를 사용하여 끊임없이 사람들을 소비하게 한다. 쓰레기가 산더미같이 쌓여도 자본주의가 정상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그래야 자본주의가 굴러간다. 그래서 저자의 다음과 같은 주장이이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 왔다.

 

 “소비 사회는 성장 사회의 종착점이다. 성장 사회는 성장하기 위해 성장하는 사회다. (……) 생산을 무제한적으로 확대하기 위해서는 소비를 무제한적으로 부추겨야 하며, 새로운 욕망을 무제한적으로 불러일으켜야 한다. 종국에는 오염과 쓰레기가 늘어나 지구 생태계가 파괴된다." (pp 16~17)

 

‘계획적 진부화’로 인한 쓰레기 문제는 지구환경을 엄청나게 파괴하고 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계획적 진부화’와 ‘지구환경 파괴’는 인과관계로 확고하게 연결되고 있다. 문제는 우리가 이를 전혀 눈치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평균 18개월 정도 사용되고 버려지는 휴대 전화는 비소, 안티몬, 베릴륨, 카드뮴, 납, 니켈, 아연 등 생물체에 유해한 다량의 독소를 포함한 쓰레기 더미들을 만들어 낸다. 이것들을 소각한다는 것은 다이옥신과 푸란, 그 밖의 오염물질을 대기 중으로 뿜어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미국에서는 2002년 여전히 작동 가능한 휴대전화 1억 3000만 대가 폐기 처분됐다. 이런 추세는 앞으로 더욱 심해질 것으로 보인다.” (p 99)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다. 이런 추세가 더욱 심해진다니. 그런데 ‘계획적 진부화’의 문제가 진행되면서, 인류는 또 하나의 엄청난 재앙에 직면해 있다. 이 현상은 ‘사회적 문제’라기 보다는 재앙에 가깝다. 학문적으로 아직 활발히 연구되고 있는 분야는 아닌 듯하다. 바로 ‘인간의 존엄과 가치’에 대한 문제다. 소위 인권의 본질(인간의 존엄과 가치)에 대한 가치하락. 인간의 가치가 땅에 떨어진 근원적 이유가 바로 ‘계획적 진부화’라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저자는 아직 ‘인권에 대한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하고 있지 않다. 이에 대한 탐구는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행한바 있다. 그는 (‘계획적 진부화’로 인한) 낭비 사회를 ‘쓰레기가 되는 삶’이라고 명명했다. 바우만의 논의를 따라가면 결국 비정규직의 삶이 곧 쓰레기가 되는 삶의 시초다. 세르주 라투슈는 이에 대해 “결국 계획적 진부화가 진행되면서 윤리 자체도 진부화하고 있다.”고 설파한다. 인간 역시 진부화되지 않을 수 없다는 귀결이다.

 

 “이른바 ‘발전된’ 사회는 쇠퇴를 대량 생산한다. 다시 말해 가치의 상실, 상품을 넘어 인간까지 포함하는 일반화된 퇴락을 양산한다. ‘일회용’ 제품이 갈수록 빠른 속도로 확산되면서 상품은 쓰레기로 버려지고, 인간은 소외되거나 사용 후 해고된다. 실업자, 노숙자, 부랑자, 그 외 각종 ‘인간쓰레기’에서부터 최고 경영자와 관리자들까지 예외는 없다.” (p 86)

 

현재 전 세계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을 사람답게 대접하지 않고 유통기한이 정해진 부품처럼 취급하는 근원적 실체가 밝혀지는 순간이다. 바우만이 지적한 ‘쓰레기가 되는 삶’의 근원적 주범이 바로 ‘계획적 진부화’였던 것이다. ‘계획적 진부화’가 가속화되면, 인간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전락될 수밖에 없다. 이건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우리가 장님, 귀머거리, 병신, 기형아 등을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것처럼, '윤리적 진부화‘는 부지불식간에 우리 삶에 들어와 ‘인권 의식’ 자체를 마비시킬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직면한 새로운 재앙이다.

 

작금에 대두하고 있는 문제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 위협적이다. 비정규직 차별은 정말 빙산에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대한 예방 법규가 구비되지 않으면, 국민의 인권은 지금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 헌법과 세계인권선언은 ‘차별 금지’와 ‘노예제 금지’를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 규정들은 현실을 반영하는데 매우 미흡하다. 규정과 현실의 갭이 너무도 크다. ‘노예’에 대한 새로운 표현이 요구된다. ‘계획적 진부화’에 의해 쓰레기로 전락하는 층을 산업사회의 새로운 ‘노예 층’으로 포섭하는 규정이 요구된다. 그렇지 않으면, 인권의 가장 근간을 이루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가 심각한 위협에 직면할 지도 모를 일이다.

 

이 책은 매우 얇다. 144쪽 분량 밖에 안 된다. 하지만 이 책에 담겨 있는 내용은 가히 치명적이다. ‘계획적 진부화’와 ‘환경 파괴’ 그리고 ‘인간의 진부화’로 이어지는 인과의 고리는 너무도 확고하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이 문제에 대해 거의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책이 아니면, 이 무시무시한 상황을 파악할 수도 없다니 모골이 송연해진다.

 

사실 환경문제는 인식하지 않으면 좀처럼 실천으로 이루어지기 어렵다. 눈에 보이는 부분은 상대적으로 쉽다. 공정무역 상품 구입하기, 1회용품 쓰지 않기, 친환경 물품 구입하기 등은 실천하기 그리 어렵지 않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이런 캠페인을 벌이는 단체들도 많다. 하지만 환경 파괴의 근본적 원인이 ‘계획적 진부화’라는 사실과 이로 인해 인권이 위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책을 통해 이러한 보이지 않는 근원적 문제점을 확인하는 것만큼 의미 있는 독서는 없을 것이다. 뭐든지 알아야 실천이건 뭐건 할 수 있으니까. 그런 면에서 이 책의 가치는 실로 크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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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7-01-04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무 님 이게 얼마 만입니까. 왜 그동안 이리 뜸하셨슴꽈...
하여튼.. 반갑습니다. 새해 복 마니 받으십시요..

yamoo 2017-01-13 19:40   좋아요 0 | URL
주로 다른 데에서 놀아서뤼...^^;;
요즘 책을 많이 읽지 못하는 관계로 알라딘 서재는 뜸했습니다.
여튼 저도 반갑습니다..ㅎㅎ 곰발 님 서재 간만에 방문해 보니, 닥그네를 끊임없이 씹는 그 엄청난 페이퍼들을 봤습니다.ㅎ 정말 대단하신 거 같다는!! 그 정도로 지속적으로 집요하게 까기도 쉽지 않은데 말이죠. 필력이 더해 더 신랄한 거 같습니다!!!

곰발 님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amor fati~

cyrus 2017-01-04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잘 지내셨죠?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문제의식에 공감했지만, 저자가 제시한 일상적으로 실천 가능한 대안을 따르기가 망설였어요. 공감보다는 실천이 중요한데, 저는 실천을 시작하기 전에 소극적인 태도를 드러내고 맙니다. ^^;;

yamoo 2017-01-13 19:41   좋아요 0 | URL
저두 오랜 말이 뵈어요~~ㅎ
그쵸, 공감보다 실천이 훨씬 중요합니다. 하지만 공감하지 않으면 실천도 없지요. 실천은 언제나 어렵습니다~ ^^;;

사이러스 님두 새해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세요~~

stella.K 2017-01-04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이어요. 잘 지내시죠?
새해 복도 많이 받고 계시고 있죠?
올해도 변함없이 빕게되길 바랍니다.^^

yamoo 2017-01-13 19:48   좋아요 0 | URL
스텔라 님, 반갑습니다!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다른 곳에서 재밌게 놀다보니, 알라딘 서재에는 뜸했네요.ㅎ

스텔라 님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올 해에는 알라딘 서재 활동을 최소한으로만 할 거 같아요. 다른 곳이 워낙 재밌어서 말이쥐요..^^;;

감은빛 2017-01-05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뭐든 오래 쓰는 편이예요.

지금도 가끔 쓰는 데스크톱은 거의 20년이 다 된 놈인데,
좀 느리긴 해도 아직 쓸만합니다.
노트북은 3년쯤 되었는데,
열었다 폈다 하는 이음새 한 쪽이 벌어진 걸 빼면,
아무 문제 없이 잘 돌아가요.
아마도 앞으로 5~6년은 문제없이 쓸 것 같아요.

이불은 대부분 10년 이상 된 놈들이고,
옷도 한 번 사면 어딘가 튿어지거나 구멍날 때까지 입어요.
지금 입는 옷 중에는 15년 이상 된 옷들도 좀 있어요.

그런데 휴대폰은 정말 3년 이상 못 쓰겠더라구요.
2년만 넘으면 꼭 어딘가 이상이 생기더군요.

yamoo 2017-01-13 19:50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감은빛 님!

감은빛 님은 요즘 사람 같이 않게 느리게 사는 기술을 잘 터득하신 거 같습니다. 저도 최소한의 물건들로, 그 물건들을 오래오래 사용하고 싶습니다요~ㅎ

휴대폰은 약정 넘으면 바꿔야 하는 게 맞는 거 같아요. 약정 넘어 고장나면 수리비가 정말 장난 아니거든요~

새해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보슬비 2017-01-05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읽고 경악했던 기억이 납니다. 최대한 오래 사용할수 없으니 불편하더라도 많이 소유하지않려 노력하고 있어요. 오랜만에 오셔서 반가웠습니다.

새해에 안보이는 분들이 보이기 시작하니 더 반갑네요.^^

yamoo 2017-01-13 19:51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보슬비 님! 오랜만입니다~

이 책 읽으셨군요~ 저도 많이 경악했더랬습니다. ㅎ 적게 소유하고 최소한의 사물로, 그 사물들을 오래오래 사용하고 싶습니다.ㅎ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시길!
 
읽기이론 이론읽기 - 라깡, 데리다, 크리스떼바
마이클 페인 지음, 장경렬 외 옮김 / H.S MEDIA(한신문화사) / 1999년 7월
평점 :
품절


정말 아주 웃긴 일이긴 합니다만, 책을 처분하기 위해 선별하는(책 읽는) 작업에서 의외로 대어를 낚는 경험을 하곤 합니다. 처분할 책 더미(물론 이 책들은 전에 읽을 만하다고 생각해서 사들인 책이지만)에서 책을 빠르게 훑고, 발췌독을 하면서 진짜 처분할 책인지 그렇지 않으면 읽고 소장할 책인지 마지막 점검을 합니다.

 

 

대개는 그냥 처분해야 할 더미에서 처분할 박스로 담기지요. 하지만 개중에는 간간히 처분하면 큰 일 날 뻔한 책들을 발견하곤 합니다. 조세희 작가의 <침묵의 뿌리>(열화당, 1985)가 그랬고, <곰에서 왕으로>(동아시아, 2005)가 그랬습니다.

 

 

 

 

모두 헌책방에서 너무도 저렴하게 구입한 책(2000원 씩)이라, 그리고 평소 즐겨 읽던 분야가 아니라 처분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알아보고, 넘겨보고, 발췌독 해 보니 이건 소장해야 될 책이라는 걸 직감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살아남은 책들입니다.

 

 

어제와 그제 다시 한 번 솎아낼 책을 정리하다가 정말 대어를 낚았습니다. (인문학의) 좋은 책들이지만 번역이 좋지 않거나 앞으로 읽을 가능성이 희박한 분야(평론 분야)를 정리하는 와중에 만난 책입니다. 모리슈 블랑슈의 <미래의 책>, 만프레드 파랑크의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그리고 롤랑바르트의 <텍스트의 즐거움>을 과감히 처분할 박스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뒤따라 오는 마이클 페인의 <읽기이론/이론읽기>(한신문화사, 1999)이란 책을 감별하려고 손에 들었지요. 겉 표지도 없어 보이고(디자인이 매우 구립니다), 개인적으로 읽을 일이 없겠다 생각하고 있는 라깡, 데리다, 크리스테바와 관계된 책이었습니다. 이들 세 학자의 텍스트를 심도 있게 해설하고 비평하는 책이라 시큰둥하게 넘겨보았지요.

 

 

아, 근데 이 책은 책장을 넘겨 읽어 갈수록 처분해 버리면 안 될 거 같은 예감을 받았습니다. 라깡의 <에끄리>, 데리다의 <기록학에 관하여>, 크리스테바의 <시적 언어의 혁명> 등 각 텍스트를 아주 심도 있게 해설해 주고 있는데, 문외한인 제가 봐도 바로바로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번역이 탁월했습니다.

 

 

라깡과 데리다의 책들을 읽어 본 결과 번역 때문에 관심이 확 줄었는데, 번역만 좋다면 그 사상에 빠져들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매력적인 이론들이었습니다. 왜 황당한 번역으로 명작들을 망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바르트의 <텍스트의 즐거움>(동문선, 1997)이 그런 사례지요.

 

 

어쨌든, 라깡 추종자들과 데리다 추종자들이 괜히 많았던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 줬습니다. 문외한인 저로서는 각 텍스트를 살짝만 맛본 상태였지만 이 책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고, 이 텍스트들이 왜 중요한지 단번에 알 수 있었을 정도였으니까요.

 

 

제가 지금까지 읽어 본 프랑스 철학 번역서 중에서 <들뢰즈-존재의 함성>과 함께 최고의 가독률을 자랑한 책이었습니다. 읽으면서 바로바로 이해되긴 처음~

 

 

물론 단일 역자가 번역한 게 아니라 3인(장경렬, 이소영, 고갑히 공역)이 책의 3부분을 나눠 번역했기에, 아쉬운 역자도 있었습니다. 라깡 <에끄리>를 번역한 이소영 씨 번역이 가장 떨어졌지만, 그래도 읽을 만 했습니다. 데리다와 크리스테바 부분에서 이상한(?) 문장이나 단락으로 인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없었으니까요.

 

 

무엇보다 이 책으로 인해 포우의 <도둑맞은 편지>를 다시 펴 볼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책의 1장에 소개된 ‘라깡의 <도둑맞은 편지>에 관한 세미나’는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왜 문학자들이 텍스트 비평에 매달리는지 보여주는 시금석과 같았다 랄까요.

 

 

1956년 당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문학 해석에 관한 가정을 수정하도록 요구한 그 시도가 바로 이 세미나였다는 군요. 현재는 이미 문학 비평의 대세로 자리 잡은 모양새라 이 땅에서 라깡의 위세를 실감하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깡의 주저인 <에끄리>는 번역되어 있지 않은 현실이지요. 그래서 간접적으로나마 이런 라깡의 텍스트를 다룬 비평서나 해설서에서 라깡의 이론을 접해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책에서는 몰라도 이 책에서는 아주 쉽고 명확하게 라깡의 가치를 알 수 있지요. (물론 저는 라깡이 수학식으로 도배하기 시작하는 그 시점부터 사기꾼이라고 생각하는 편견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이 책은 라깡만 다룬게 아닙니다. 번역 때문에 골치를 앓는 데리다의 텍스트도 쉬운 번역으로 만나볼 수 있습니다. <기록학에 관하여>는 아직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있지 않은데, 마이클 페인은 상당한 분량으로 <기록학에 관하여>를 분석/비평 해 주고 있습니다. 데리다가 루소, 워버튼, 비코, 콩디악 등의 텍스트를 어떻게 읽고 차용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페인이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라깡과 데리다를 쉽게 이해하여 쉬운 영어로 써서인지, 아니면 역자들이 우리말 구사 능력이 뛰어나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정말 쉽게 이해됩니다. 사실 라깡과 데리다에 관계된 논문이나 해설서를 이렇게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매우 이례적인 듯합니다.

 

 

크리스테바의 <시적 언어의 혁명>도 라깡과 데리다의 텍스트 연장선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크리스테바가 여러 저서들을 내 왔지만, 이 책이 가장 중요하고 빼어나답니다. 크리스테바의 국가박사 학위 논문이기도 하다는 군요. 반갑게도<시적 언어의 혁명>은 번역본이 나와 있습니다. 페인의 이 책과 크리스테바의 <시적 언어의 혁명>을 같이 읽으면 긍삼첨화 일듯합니다.

 

 

 

 

<읽기 이론 / 이론 읽기>를 소장하기로 하고, 알라딘에서 검색을 해 보니 이 책에 대한 리뷰가 한 건도 없군요. 우리나라에 라깡과 데리다의 추종자들이 그리도 많은 거 같은데, 이 책을 읽고 리뷰를 쓴 사람이 없다는 게 많은 의구심을 자아내게 합니다. 도서관에서 라깡과 데리다 관련 코너의 입문 책들은 전부 많이 빌려본 흔적이 뚜렷하여, 그만큼 인기를 실감하게 하는 데 말입니다.

 

 

라깡, 데리다, 기호학, 프랑스 철학, 문학 비평 이론서나 입문서 등을 보면 하나같이 번역 때문에 내용을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태반이라 그냥 책을 손에 들었다가 던지게 됩니다. 그만큼 이 분야에서 읽을 수 있는 책이 매우 한정돼 있다는 거겠지요.

 

 

제가 본 바로는 내용이 어려운 게 아니라 비문을 쏟아내어 원문을 암호화한 역자들 때문입니다. 제대로 번역되어 만나는 프랑스 철학자들의 주저들은 읽어 이해 안 될 내용이 없습니다. 이미 <들뢰즈-존재의 함성>을 보고 경험 해 봤습니다.

 

 

마이클 페인의 <읽기 이론 / 이론 읽기>는 좋지 않은 프랑스 사상 역서계(譯書系)에 단비와도 같은 책입니다. 이런 좋은 책이 왜 널리 읽히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유명한 라깡, 데리다, 크리스테바를 다룹니다! 그럼에도 술술 읽을 수 있습니다. 입문자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구요!

 

 

적어도 라깡, 데리다, 크리스테바가 어떤 주저를 썼고, 그 책이 다루는 핵심 내용이 뭔지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입문서로 제 역할을 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적어도 읽어서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는 암호문은 없으니까요.

 

 

라깡, 데리다, 크리스테바의 주요 핵심 사상이 뭔지 알고 싶으신 분은 이 책을 읽으세요.

라깡, 데리다, 크리스테바의 관심사가 뭐였는지 알고 싶으신 분 역시 이 책을 선택하세요.

라깡, 데리다, 크리스테바가 어떤 이론적 관련을 맺고 있는지 알고자 하는 분 역시 이 책을 잡으세요.

 

 

후회하지 않고, 알고 싶은 것을 성취할 수 있을 거라 확신합니다. 더군다나 기호학으로 그림을 분석하는 ‘그림 읽기’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문학 비평을 위한 이론적 도구로 그림을 읽을 수 있는 방식을 보여 줍니다. 그림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도 유익할 것입니다.

 

 

여기에 <라깡이 이용한 프로이트의 독일어 용어들>과 <크리스테바의 용어들>이 부록으로 첨부되어 있습니다. 이들 학자에게 관심 있는 분들에게는 분명히 도움이 되는 자료들이겠지요.

 

 

근래에 보기 드문 좋은 번역서인데, 리뷰도 없고, 100자 평도 없기에, 저라도 리뷰를 부가 해 봅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리 소문 없이 절판될 듯해서요.

 

 

덧.

다음이나 네이버 책 검색 사이트, 그리고 교보에도 뜨는 책 이미지가 왜 알라딘에는 없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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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5-30 20: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팔기 전에 신중하게 정리하면서 분류해야합니다. 팔았던 책이 중고가가 높게 나오는 희귀본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면 땅을 치게 됩니다. ㅎㅎㅎ

yamoo 2016-05-30 21:40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정말 신중하게 잘 분류해야지요..ㅎ 그래서 팔기 전에 희귀본을 잘 골라 내어 후회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ㅋㅋ 사이러스 님 몬가 좀 아시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05-31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곰에서 왕으로.. 시리즈 가지고 있습니다. 총 4권으로 된...
이 책 재미있습니다..ㅎㅎ 반갑네요. 여기서 보다니.. 후후..

yamoo 2016-06-01 15:40   좋아요 0 | URL
호~ 이 시리즈를 갖고 계시군요! 2권 있었는데, 한 권은 처분하고 이 한권을 마저 처분하려다가 관뒀지요. 재밌다니, 4권을 모두 기대하면서 소장해야 겠습니다..ㅎㅎ

2016-05-31 15: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01 15: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6-01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바주 시리즈라고 해서 책장 보니 5권이 한 세트네요.. 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의외로 재미있었어요. 생각하지 안ㄶ았는데 말입니다..

yamoo 2016-06-01 17:31   좋아요 0 | URL
헐~ 5권이나 된단 말입니까!! 흐미~~ 5권을 언제 모은다냐..--;;

열매 2017-01-03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리다의 《기록학에 대하여》는 그 유명한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라는 책을 말하는 것입니다.한국어판으로는 김웅권(동무선), 김성도(민음사) 2개의 번역본이 있구요.몰라서 그렇게 번역한 건 아니고 gramme이라는 문자/기록의 의미를 최대한 살리려는 고민이 것 같습니다. 그라마톨로지라는 조어가 더 낯서니까요..
 
그림자를 판 사나이 열림원 이삭줍기 3
아델베르트 샤미소 지음, 최문규 옮김 / 열림원 / 200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1

 

 

인간에게 있어 그림자는 무얼까? 샤미소의 <그림자를 판 사나이>(열림원, 2002)를 읽고 ‘그림자’에 대한 생각을 이렇게나 오래 붙잡고 있는 내가 좀 우스워 보이긴 한다. 인간에게 그림자는 그림자일 뿐, 아무것도 아니기에.

 

플라톤의 철학을 들먹이지 않아도 그림자는 실체가 아닌 허상이라는 걸 초등학생도 안다. 그냥 빛을 받는 유기체가 드리우는 실체의 흐릿한 모사일 뿐이다.

 

그런데 소설 한 권이 잊고 있던 인간의 ‘그림자’에 대해 성찰을 촉구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재미있고 멋진 우화를 통해서, 자본주의 시대에 인간의 가치를 돌아보게 한다.

 

사실, 이 소설은 자본주의 비판서로 평가받아 온 듯하다. 물론 플롯 구조상 인간의 가치와 돈을 대비시키고 있기에 이런 평가는 당연하다.

 

하지만 나는 소설 속 ‘그림자’로부터 인간의 가치를 생각하면서 노자 사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노자가 말한 ‘무위(無爲)’의 사상 말이다.

 

<도덕경>에서 노자가 말하는 무위(無爲)는 ‘유무상생(有無相生)’과 상통한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우주 만물은 유와 무의 대립과 긴장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단다.

 

있음은 없음을 전제로 하고, 없음은 있음을 전제로 한다. 침묵이 없으면 말(언어)이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말은 침묵을 전제로 가치를 갖는다. ‘쓸모 있음’도 매한가지다. ‘쓸모 없음’이 있어야 비로소 그 ‘쓸모 있음’의 가치가 생긴다.

 

 

 

2

 

 

인간의 그림자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그림자로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림자가 고뇌를 덜어주지도 않는다.

 

바쁜 일상생활에서 인간이 그림자의 존재를 생각할 겨를은 거의 없다. 도시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소설의 주인공 슐레밀은 무가치한 자신의 그림자를 악마에게 쉽게 내 준다. 그 대가로 슐레밀이 얻은 것은 금화가 무한하게 나오는 행운의 가죽 주머니. 슐레밀은 이 주머니로 갑부가 된다.

 

하지만 그는 태양이 뜨는 밝은 날을 피하게 된다. 그림자가 없기 때문에, 그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으며,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게 된다. 이 나라에서는 그림자가 없을 경우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림자 없는 슐레밀을 보고 수다스런 청년들은 빈정거린다. “성실한 사람은 태양 아래서 걸어갈 경우 자신의 그림자를 잘 간직하는 법이지.” (p32)

 

슐레밀은 금화를 사용해 명성을 누리지만, 그 자신은 그가 지은 성 안에 꼭꼭 숨어서 지내다 태양이 사라진 밤에만 돌아다닌다.

 

급기야 그림자가 없다는 단 하나의 사실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자신의 하인에게 빼앗기고 그는 절망한다. 그제서야 그는 절실히 깨닫는다. 쓸모 없던 그림자의 가치를.

 

그림자는 그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명예를 얻게 되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였다. 선한 일에 돈을 쓰고, 그로 인해 명성을 얻었지만, 그림자가 없다는 사실로 그 모든 가치가 하루아침에 신기루처럼 없어지는 경험은 슐레겔을 절망으로 몰아넣었다.

 

사랑하는 여자의 아버지가 그림자만 보여주면 혼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고, 하인이 태양아래 주인님의 그림자만 보여주면 충실한 하인으로 남겠다고 단언한다. 그럼에도 슐레겔은 그럴 수 없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가슴이 타 들어가는 순간만을 경험해야 했다.

 

슐레겔은 이전에 자신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모든 재산을 바쳤지만, 지금은 오로지 그림자만 없기 때문에 가치 있는 모든 것을 눈앞에서 잃고 있다. 그는 스스로 묻는다. “이제 나는 이 지상에서 어떤 사람이 될 수 있고, 어떤 사람이 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p33)

 

 

 

3

 

 

이 소설은 단순한 이야기를 갖고 있지만, 곱씹어 볼수록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림자’가 갖는 상징적 위상을 계속 돌아보게 한다.

 

천민자본주의 국가 대한민국에서 직장인들은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이 가진 ‘그림자’를 모두 저당 잡히고 있다. 회사 밖에서는 일말의 가치도 없는, 그리고 눈에 잡히지 않는 업무를 위해 나의 시간과 정열을 모두 소진시키고 있다.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

 

아침에 일어나기 싫고, 회사에 가기 싫지만 돈을 벌기 위해 나는 가야한다. 상사의 갑질과 거래처의 갑질을 견디지 않고는 하루가 지나가지 않는다. 마른 걸레에서 구정물을 뽑아내고 나면, 나는 점점 닳아 없어진다.

 

그러면서도 놀라운 건 우리 스스로가 슐레겔이 자기 스스로에게 던지는 물음을 좀처럼 던지지 않는다는 거다. “이제 나는 이 지상에서 어떤 사람이 될 수 있고, 어떤 사람이 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오후 3시의 햇살을 받으며 여의도 공원을 걸어보는 자유.’ 샐러리맨들은 누려볼 수 없다. 이 산책은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치 있는 일도 아니다. 태양 빛에 드리우는 그림자와 같은 거다.

 

10년 간 대기업 산하 연구소 연구원 생활을 하고 직장에 사표를 던진 한 여자가 그날 오후 3시 여의도 공원을 산책하면서 느낀 지점이다. 그녀는 감격에 눈물을 흘리며 자기가 뭘 위해 살았는지 모르겠노라고 했다.

 

그렇다. 이 기본적인 인간의 자유를 샐러리맨들은 누릴 수 없다. 인간의 기본적인 가치를 누릴 수 없는 사람을 우리는 노예라고 한다. 그런 면에서 ‘현대 자본주의 국가의 샐러리맨들은 모두 노예다.’라고 한다면 너무 지나친 비약일까.

 

<그림자를 판 사나이>에서 수없이 회자되는 ‘그림자’는 현대 사회에서 돈과 바꾼 ‘인간의 가치’와 정확히 유비될 수 있다. 돈을 벌기 위해, 무가치한 듯 보이는 ‘자신의 그림자’를 얼마나 희생하고 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4

 

 

인간은 쓸모 있는 부분과 쓸모 없는 부분이 서로 섞여 있는 존재다. 자신을 이루는 쓸모 없는 부분이 무용하다고 해서 돈과 바꿔버리는 순간(여가를 일로 바꾸는 순간) 자신의 가치는 없어져 버린다.

 

잊지 말자. 소설의 주인공이 마지막으로 전하는 귀중한 메시지를.

 

“벗이여, 만약 사람들과 함께 살고 싶어 하는 이들이라면 부디 무엇보다도 그림자를 중시하고, 그 다음에 돈을 중시하라고 가르쳐 주게나. 자신을 위해, 그리고 더 나은 자네 자신을 위해 살고 싶다면 말이지.”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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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6-05-04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낯설지가 않네요. 저도 읽은 것 같기도한데 말입니다.
제목만큼 아주 재미었던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확실히 기억을 못하는 걸 보면...ㅠ
그런데 야무님 글을 읽으니 정말 그렇게도 이해될 수 있었던 책이군요.
탁월하십니다.^^

yamoo 2016-05-10 16:02   좋아요 0 | URL
전 이 소설을 처음 읽었는데, 본래 아동용 동화로 많이 편집돼서 출간되었던 모양입니다~ 전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근래 들어서 그냥 휘리릭~ 읽었던 소설은 이 작품밖에 없었던 거 같아요.

흠...제 독후감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cyrus 2016-05-04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림원 이삭줍기 시리즈를 모으는 중인데, 유독 샤미소의 작품은 찾기 힘드네요. 어린이용 번역본은 사기 싫어요. ^^

yamoo 2016-05-10 16:03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저 이삭줍기 시리즈 거의 다 모았는데, 3번 샤미소의 이 책은 구할 수가 없네요..ㅜㅜ

어린이용 번역본이 많나 봅니다..ㅎㅎ

transient-guest 2016-05-10 0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비슷한 이야기를 만화로 본 기억이 있네요. 83-84년 무렵의 `보물섬`이란 어린이만화잡지였어요. `그림자를 판 사나이`라고...세부적인 디테일은 다르지만요...

yamoo 2016-05-10 16:05   좋아요 0 | URL
저도 보물섬 구독했었는데요...거기서 저는 그림자를 판 사나이라는 작품을 본 기억이 전혀~~~없습니다. 몇 작품은 생각나는게 있지만 제목은 전혀 생각나지 않네요..ㅎ

그나저나 보물섬이라...추억의 만화잡지죠. 어깨동무, 아이큐 점프와 함께 구독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만...^^;; 트랜스님 때문에 엔날 생각이 나래르..ㅋ
 
사토리얼리스트 사토리얼리스트
스콧 슈만 지음, 박상미 옮김 / 윌북 / 201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도대체 '멋진 룩'이란 무얼까? 2008년~9년 <보그 걸> 잡지 부록인 <The Vogue Girl Book Of World Street Style>시리즈와  <The Sartorialist>시리즈를 보면서 든 생각이다. 특히 <보그 걸> 부록인 스트릿 사진집 시리즈는 정말 평소 내가 좋아하지 않는 룩만 잔뜩 들어있었다. 정말 '이게 멋진 룩이란 말인가?'란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는 사실.

 

그러면서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내가 한 sns에 올리는 데일리룩 사진도 '별루에요', '이상해요'라고 하는 사람들의 댓글들. 이들 역시 내가 저 사진 화보집을 보고 든 생각과 동일한 느낌을 댓글로 표시했다는 걸 말이다. '멋지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개인의 취향을 반영하기 때문에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걸 다시 한 번 일깨우게 된다.


그런데 '패션'에서는(스타일이 아니라 패션이다) 어떤 권력을 가진 자의 평가가 대중의 판단을 마비시키는 것 같다. 아니 '패션 권력'(광고주라든가 브랜드 매니저 또는 패션 기자 등 패션 관련 전문가)을 가진 자가 대중에게 이미지를 강요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거. (뭐, 어렵게 말하면 브르디외가 말한 아비투스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보다 사진을 보는 게 훨씬 이해가 빠르겠다. 한 동안 인터넷에서 회자됐던 박지성 수트 사진(2장)부터 봐 보자.

 

 

 

 먼저 스포츠 조선 사진은 2012년 현대오일뱅크 K리그를 관람하기 위해 수원월드컵경기장을 찾은  박지성의 수트 패션이다. 간만에 수트를 입은 박지성의 저 사진에 대해 기자는 '빅버드에 온 박지성, 블랙수트가 깔끔해'라는 타이틀을 붙였다.


다음 사진은  2015년 서울 모터쇼에 수트를 입고 참석한 박지성의  모습이다. 이게 데일리안에 실렸는데, 이상우 객원기자는 '콜린퍼스 못지 않네'라는 타이틀을 달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두 사진 속 박지성의 수트 핏은 정말 아니었다. 아무리 비싼 수트라고 해도, 박지성이 수트를 입은 게 아니라, 수트가 박지성에게 입혀져 있는 듯 보였다. 근데, 깔끔하다니느니, 콜린 퍼스 못지 않다는 평가는 우습기 짝이 없다.


더 웃긴 건 이 사진들을 보고 네티즌들이 한 마디 씩 하는 거였다. '남자는 역시 수트빨', '수트도 잘 어울리는 박지성', '정말 멋진 수트룩' 등등 상찬이 이어졌다.


영화 킹스맨을 본 사람은 알겠지만, 콜린 퍼스의 수트 입은 모습은 그냥 엘러강스 그 자체였다. 더블 브레스트 수트를 킹스맨의 콜린 퍼스만큼 멋지게 입을 수 있는 배우는 정말 드물다고 생각한다. 아니 영국과 이탈리아 전체를 뒤져도 그리 많지 않을 거 같다. 그런데 박지성의 수트 룩이 콜린 퍼스 못지 않다니,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다. (영화 본 사람 중 나만 그리 생각하는 건가~--;;)

 

 

 

정말 미심쩍은 사람들은 위 박지성의 수트 룩과 콜린 퍼스의 수트 룩을 비교해 보면 그냥 답이 나오지 않을까. 박지성의 수트는 보면 볼수록 어색하다. 그 이유는 아마도 박지성이 수트를 그리 많이 입을 일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축구선수로 그라운드를 누비는 것이 삶의 가장 중요한 것이었으니. 그에게는 맨유 유니폼이 곧 박지성의 아우라를 발산하는 룩 자체였을 것이다.


그런데 위 사진에 나온 박지성을, 기자들은 박지성이 맨유에서 플레이하던 아우라의 후광으로 덧입힌다. 전혀 멋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콜린 퍼스 못지 않다고 한다. 당시 나온 남성 잡지에서도 수트 입은 박지성을 등장시켜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멋진 수트를 강조했다. 물론 박지성이 입은 수트는 일류 브랜드다. 하지만 단언컨대 박지성의 수트 룩은 어색했다.(요즘 박지성의 수트 룩은 정말 많이 나아졌다)


이런 현상을 곰곰 생각해 봤다. 우리나라는 한 가지 분야에 유명하면(전문가이면) 두루 그 영향이 파급되는 것 같다. 영문학을 전공한 사람이 사회비평 전문가로 행새할 수 있는 나라가 우리나라니까. 변호사가 TV에 몇 번 나오면 수입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나라니까. 그러니 유명인이 입은 유명 브랜드 수트는 당연히 멋있겠지. 아니, 그렇게 보이도록 포장해야 겠지. 그게 광고의 목적이니까.


하지만 이 주제에 대해 내 시름을 더 깊게 한 건 스콧 슈만의 그 유명한 <사토리얼리스트> 스트릿 화보집을 보면서이다. 스콧 슈만은 스트릿 사진의 유명세로 미국에서 권위 있는 사진상을 수상하고, 여러 광고 매체뿐 아니라 여러 곳에서 강의하는 유명 인물이 됐다. 내가 본 그의 첫 사진집은 그를 유명하게 만들어준 아주 중요한 사진들이 대거 들어가 있는 스트릿 사진의 보물창고였다.


단 2장의 사진때문에 나는 위의 문제를 좀 더 깊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취향은 아비투스인가?',  '멋지다는 경계는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아주 근본적인 물음을 던져야 했다.

 

 

문제의 사진들이다.  <사토리얼리스트>(월북, 2014)를 펼쳐 넘기다 보면 400페이지와 358페이지에서 이 사진들을 만나볼 수 있다. 이 카드를 보고 있는 알라디너들은 위 두 장의 사진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 모르겠다. 난 처음 볼 때, '이사람들의 사진이 왜 이 화보에 실려있는 거지?'라는 생각을 했다. (이 외에도 이런 생각이 들게 하는 사진은 꽤 있었다. 멋있다고 보이지 않아서)

 

 

나는 저 사람들이 누군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저 룩을 보고 내리는 평가가  가장 정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다. (이게 대중의 평가다. --;;) 물론 옷이 그 사람이 누구인지 말해준다고 하지만, 이건 그와 몇 마디 나눠보고 난 후에야 알 수 있다. (난 적어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야 룩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이 두 사진을 갖고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줬다. 패션에 대해 잘 모르는 40~50대 이상의 장년층에게. 10이면 10 그냥 평범한 일반인의 룩으로 보았다. 이중 일부는 첫 번째 사진을 보고 공산당원 같다는 생각을 표했고, 두 번째 사진은 모두 왠 거지 사진이냐고 했다. 패션을 전공했던 한 여성분은 후자를 그런지룩을 구현한 것 같다고 했다.


사진을 처음 펼쳤을 때, 나 역시 이들 생각과 대동소이했다. 슈만의 글을 보기 전까지 말이다.


"로버트는 패션 편집자들 중에서 다음 시즌의 모습이 가장 기대되는 사람이다. 그의 스타일은 결코 고급스럽지 않으며 꼼꼼하게 신경 쓴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는 진정으로 옷을 입고 있고(옷이 사람을 입은 것이 아니라) 옷 자체가 멋있다기보단 그 자신이 옷을 멋있게 만든다. 흔히 이렇게들 말한다. 여자들은 가장 최근에 산 옷을 좋아하고 남자는 제일 오래된 옷을 좋아한다고. 로버트가 바로 그런 남자가 아닐까. 이번 시즌 패션쇼에 올라가는 옷을 입기 보단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질감과 색을 조화시키는 데 관심이 있는 그런 남자이다." (p400)


첫 번 째 사진에 대한 슈만의 글이다. 사진 속 인물이 로버트다. 원래 옷을 잘 입고 옷에 대한 전문가적 인식이 있는 사람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질감과 색을 조화시켜 입은 룩이 바로 저 사진이다. 옷 자체가 멋있다기 보단 그 자신이 옷을 멋있게 만든다는 해석도 부가하면서 말이다. (정말 그런지 10번을 봐야 했고, 그냥 그렇다고 설득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첨 느낌은 어디로 간거지??)


한 마디로, 옷에 대한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 전략적으로 입은 거라는 게 슈만의 설명이다. 두 번째 사진의 설명은 더 혼란스럽다. (사실 두 번 째 사진이 첫 번 째 사진 앞에 있었던 거다.)


"거리에서 사진을 찍을 때 나는 최대한 멀찍이 떨어져서 대상을 살피는 편이다. 그래야 눈에 포착된 사람을 찍을지 말지 결정할 수 있는 시간이 확보되기 때문이다. 멀리서 걸어오던 이 신사를 발견한 순간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 남자가 점점 내 쪽으로 다가와 시야에 명확히 들어왔을 때 내 머릿속은 '저 사람이 거지일까 아니면 좀 특이한 사람일까?'하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에겐 사람들이 흔히 호보 쉬크(hobo shic; 호보는 집 없는 부랑자라는 뜻으로, 호보 쉬크는 의도적으로 그런 사람들처럼 입는 스타일. 찢어진 스타킹이나 바지, 언뜻 보기에 마구 겹쳐입은 스타일 등이 그 예)라 부르는 요소가 상당수 있었다. 수염, 눌러쓴 모자, 그리고 기워 입은 카키 바지까지. 그가 바로 내 눈앞까지 왔을 때에야 비로소 그의 수염이 완벽하게 손질된 것이고, 카키 바지도 너무 멋들어지게 기워졌으며, 전체적으로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빈틈없이 '허름'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알고 보니 그는 랄프 로렌의 통합 서비스국에서 일하는 사람이었다. 이 사진을 찍고 1년 후 단지거 프로젝트 갤러리에서 열렸던 내 첫 개인전에 이 사진을 넣었는데, 이 전시를 본 한 신문 비평가는 '옷을 잘 입는 사람들과 함께 집 없는 거지 사진도 넣어 보기 좋았다'라고 평했다. 그 비평가에게 아마 그 '거지'가 당신보다 두 배는 더 벌 거라고 말할 자신은 없었다." (p358)


'멋진 룩'을 판단하는 아주 중요한 단서가 슈만의 설명 속에 들어있다. " 그 남자가 점점 내 쪽으로 다가와 시야에 명확히 들어왔을 때 내 머릿속은 '저 사람이 거지일까 아니면 좀 특이한 사람일까?'하는 생각으로 가득했다."는 부분이다. 패션 전문가인 슈만의 눈에도 룩만 보았을 때 그가 거지처럼 보였다는 고백이다.


바로 이어진 설명 "그가 바로 내 눈앞까지 왔을 때에야 비로소 그의 수염이 완벽하게 손질된 것이고, 카키 바지도 너무 멋들어지게 기워졌으며, 전체적으로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빈틈없이 '허름'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알고 보니 그는 랄프 로렌의 통합 서비스국에서 일하는 사람이었다." 알고 보니, 그가 의도적인 거지 차림을 했다는 거고, 결정적인 정보가 뒤따라 온다. 그가 랄프 로렌의 통합 서비스국에서 일하는 사람이었다는 거.


그러니까 '쉬크함', '엘레강스' 등의 표현은 룩(기표)가 아닌 그 이면의 기의(시니피에)로부터 나옴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타자는 '주체의 전략'을 좀처럼 알 수 없다. 나는 네가 아니기에, 네 생각이 뭔지 거의 알 수 없다는 거다. 이게 '개인주의가' 태동된 근대의 기반이다. 개인주의가 깊어질수록(사실 패션은 이 개인주의의 극단화 중 하나다) 타자를 헤아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전문가인 슈만조차도 그의 직업을 알기 전까지 '거지가 아닐까'생각할 정도였으니까. 그가 비평가에게 말해주고 싶어했던 확신에찬 그 결정적 근거도 사진 속 인물의 직업이었다. 랄프 로렌 통합 서비스국에서 일하는 사람이다! 그 정도의 사람이니까 의도적인 호보시크 룩을 선보일 수 있었다는 거!


결국 슈만에 따르면, '패션 권력'이 그 룩을 멋지게 만드는 것이다. 이건 느낌이 아니라 해석이다. 우리는 겉만 보고 주체의 의도를 전혀 감지할 수 없기 때문에(물어 보지 않는 이상 나는 모를 거라고 확신한다), "옷을 잘 입는 사람들과 함께 집 없는 거지 사진도 넣어 보기 좋았다"라고 평론가처럼 말할 수밖에 없다. 이게 정상이다.


결론적으로 스트릿 룩에서도 '멋진 룩'과 그렇지 않은 룩의 경계는 권력의 귀속 여부다. 슈만의 눈과 해석이 '멋진 룩'을 만드는 거다. 대중의 생각과 느낌?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패션 권력의 눈과 해석 그리고 전략이 '멋진 룩'을 결정한다. 슬프게도 이걸 부인할 수 없을 거 같다.


젠장, 패션에 있어, 취향도 결국은 아비투스였구나...취향의 해체는 언제나 등장할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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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3-18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위의 모든 사진을 통틀어서 거지룩이 가장 멋있어보입니다.. 제 스타일이기도 하고요..

cyrus 2016-03-18 12:17   좋아요 0 | URL
거지룩에서 파생되어 나온 빈티지 패션 스타일이 벼룩입니다.

yamoo 2016-04-05 20:34   좋아요 0 | URL
아, 곰발 님 취향이실 거 같네요..^^;;

근데, 벼룩 스타일은...ㅋㅋㅋㅋㅋ

순오기 2016-03-18 0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지성 수트발을 콜린 퍼스와 견주다니...수트에 대한 모독으로 생각됩니다요.ㅠㅠ

yamoo 2016-04-05 20:34   좋아요 0 | URL
그렇죠~?^^ 저도 순오기 님 생각에 동감 합니다요~!ㅎ

stella.K 2016-03-18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 평점이 놓더라구요. 역시 야무님도 높은 점수를 주셨네요.
옷에도 그 사람의 성격이나 취향이 베어있긴 하죠?
대충 입은 것 같은데 뭔가가 묻어나는 그런 연출이 정말 좋은 건데 말입니다.
저는 옷 가지고 이렇게는 못 쓸 것 같습니다. 대단하셔요!

그런데 저 왼쪽의 박지성 사진은 어깨 같습니다.ㅋㅋ

yamoo 2016-04-05 20:36   좋아요 0 | URL
슈만의 이 책은 사진 집으로서 최고의 경지를 보여주는 거 같습니다. 슈만의 사진 가운데 좋은 것만 엄선해서 첫 책으로 묶인 것인데...슈만의 사진들 중 최고중의 최고만 모여있는 것 같습니다..ㅎ

이 책 살 가치는 충분합니다...스텔라 님도 한 권 비치해 두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