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타르인의 사막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3
디노 부차티 지음, 한리나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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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막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말할 수 없는 생의 비루함과 무력함을 통감했다. 낮의 회색 페이지와 밤의 검은 페이지가 한장 한장 넘어가는 동안 나는 변한게 없는데, 나를 둘러싼 환경은 너무도 많이 변했다는 사실을 다시금 반추했다. 


그리고 이를 생생히 구현해 낸 부차티에게 경의를 표했다. 인생의 거대한 요새 앞에서 아무것도 남은 게 없이 홀로 고독하게 죽음을 마주하고 있는 드로고는 아마도 미래의 내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부차티가 작품 속 드로고에게 해 주는 말은 결국 내게 하는 말이었으며, 드로고의 이름을 내 이름으로 대체해도 여전히  유효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드로고는 또 한번 요새의 골짜기를 오른다. 그는 에누리 없이 십오 년을 더 살아야 한다. 불행히도 그는 자신이 크게 변했다고 느끼지 않는다. 시간은 정신이 나이들기도 전에 너무나 빨리 흘러버렸다. 지나가는 시간에 대한 어렴풋한 불안감은 날마다 더 커져간다. 드로고는 삶의 중요한 일이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는 환상을 놓지 않는다. 그는 결코 오지 않은 자기의 때를 인내심 있게 기다린다. 미래가 끔찍할 정도로 짧다는 생각, 다가올 시간이 무한하며 아무 거리낌 없이 낭비해도 되는 무궁무진한 부유함처럼 여겨졌던 옛 시절이 더는 아니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p240-241)



시간의 장이 넘어가고, 여러 달과 여러 해가 지난다. 진력이 나도록 일해온 드로고의 학창 시절 친구들은 네모꼴로 정돈된 회색 수염을 기르고서 점잖게 도시를 거닐며 정중하게 인사를 받는다. 그들의 자녀들은 다 자란 성인이고, 어떤 친구는 벌써 할아버지다. 드로고의 옛 친구들은 이제 직접 지은 집의 문간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며 인생의 강물을 바라보듯 각자 밟아온 길에 만족하며 지난 삶을 살피길 즐긴다. 그들은 군중의 소용돌이에서 자기 자식들을 발견해내며 기뻐한다. 자식들에게 어서 서두르라고, 다른 이들을 앞질러 먼저 도착하라고 부추긴다. 반면에 조반니 드로고는 매 순간마다 약해져가는 희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 (p252)



작품을 두어 번 더 읽고 난 후, "문득 마음의 무거운 짐이 눈물로 부서지려하고 있었고", 바로 그 순간 내 내면 깊은 곳에서 어떤 생각이 떠올랐는데, 그건 죽음이 아닌 그 무언가 였다. 죽음과 희망 사이의 그 무엇. 찌질함과 용기 사이의 그 간극.


이 소설은 내게 '실존적 아픔'이란게 무엇인지 제대로 느끼게 해 준 명작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덧]

1. 소설을 읽으면서 너무도 멋진 문장들이 산재해 있어, 마치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를 읽는 것처럼 문장에 줄을 수도 없이 쳤다.

2. 신해철의 '나에게 쓰는 편지'를 다시 들을 수밖에 없었다.

3. 번역이 너무도 잘 돼 있어 한국 소설 읽듯이 읽어내려갔다. 번역자 한리나 님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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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10-22 19: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너무 고독합니다 ㅋ 저는 이 책 읽으면서 저랑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ㅎㅎ 저도 명작이라 생각합니다~!!

yamoo 2022-10-24 14:39   좋아요 2 | URL
아주 고독하고 실존적 아픔이 무엇인지 너무 잘 형상화한 작품이라서, 비슷한 정서를 느끼믄 독자에게 정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 듯합니다. 부차티란 작가를 처음 알았는데, 정말 다음 작품을 찾게 만드는 작가인거 같아요. 이 작품 별 5개도 모자라요!!

scott 2022-10-22 19: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야무님 그림 세계에 타타르인 사막의 고독이 반영 될것 같습니다 🤗

yamoo 2022-10-24 14:40   좋아요 2 | URL
흠....타타르인의 사막을 시간과 고독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겠습니다. 컨셉을 어케 잡아야할지 고민에 고민을 더할 거 같습니다. 이 작품 정말 강력합니다! ㅎㅎ

stella.K 2022-10-23 20: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정말요...?
신해철의 노래를 들을 수 밖에 없었다니.
게다가 번역꺼정! 이거 읽어보긴 해야겠네요.
리뷰 잘 안 쓰시기로 유명한 야무님에서 리뷰를 이리 쓰실 정도라면
정말 안 읽을 수가 없겠는데요?
근데 좀 읽다가 우울에 빠질까 봐 겁나는데요? 흐흐

yamoo 2022-10-24 14:43   좋아요 2 | URL
네, 읽은 후에 신해철의 나에게 쓰는 편지를 들으면 신해철의 작사 능력이 넘사벽이라는 걸 느낌니다. 이 작품과 궁합이 정말 좋아요.

이 작품은 지금껏 읽었던 세계문학 작품 중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명작 중 명작이에요!

우울한 거 보다는 약간 황량하다는 느낌이 강하고, 우울 이후의 감정이라고 생각하는 게 더 적절할 듯한데...이건 읽어봐야해요.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의 느낌이 모든 걸 말해줄 듯합니다!!
 
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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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은 노래한다>, <마사퀘스트등으로 널리 알려진 도리스 레싱명성만 익히 들은 작가의 작품들 중 한 권인 <다섯째 아이>. 언젠가는 꼭 읽어야할 목록에 포함된 작가였지만이러저러한 일들로 인해 미루고 미루다 드디어 읽게 됐다읽어 가면서 좀 지루한 면이 없지 않았다하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자 많은 생각들이 쓰나미처럼 덮쳐왔다. 179페이지밖에 안 되는 심플한 가족의 얘기지만 그 속에 담겨있는 주제는 넓고 깊었다


이 소설은 여러 가지 시각으로 읽을 수 있겠지만나는 데이비드의 아내이자 다섯째 아이 엄마인 해리엇의 선택이 과연 최선이었는지에 대해서 묻고 또 묻는 되새김질을 계속했다도대체 그녀는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작품의 이야기를 풀어보면 이렇다아주 건전하고 정상적인 두 남녀가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한다이들 부부는 문란한 혼전 성관계이혼혼외정사마약딩커 등과 같은 사안들을 거부하며 행복한 가정 만들기를 실천한다그 행복의 핵심이 바로 매우 많은 아이들을 가지기를 원하는 거데이비드와 헤리엇 부부는 지인들의 이상한(?) 시선 속에서도 굿굿이 자신들의 바람을 실천한다그리고 부부는 다섯째 아이가 태어나기까지 지극히 화목한 가정생활을 누린다.

 

그리고 다섯째 아이 벤이 태어난다다운증후군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아이인지 능력이 모자라고 힘만 쌘 폭력적인 아이는 엄마 해리엇의 돌봄의 범위를 벗어나 버린다크리스마스 때마다 친척들이 모두 모여 북적북적한 때를 보내던 시절도 벤이 태어난 이후에는 점점 소원해져가고아이들은 벤 때문에 집에서 생활하는 걸 불편해 한다.

 

보다 못한 남편 데이비드는 친척들과 상의하여 벤을 어느 기관에 보내는 결정을 한다어느 날 벤은 검은 승용차에 실려 기관에 감금된다해리엇은 자신과 진지한 상의 없이 벤을 기관에 보내는 결정을 내린 것에 서운해 하지만벤 때문에 가족이 겪는 사태를 감안하여 그 결정을 감내하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로서 자식에 대한 본능적 애착에 벤을 보러 시설을 방문한다거기서 벤이 약물에 취해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광경을 목격하고 해리엇은 시설의 규정에 어긋나지만 엄마로서의 윤리적 정당성을 강조하며 벤을 집으로 데려오는 결정을 내려버린다.

 

데이비드 가족의 불행은 바로 여기서 시작됐다해리엇이 벤을 집으로 데려오자 나머지 네 아이들은 엄마가 없어져버렸다엄마가 오직 벤에게만 신경을 집중하기에 자기들은 소외받는 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벤의 위협적 행동과 엄마를 잃어버린 아이들은 뿔뿔이 흩어진다할아버지 집으로외할머니 집으로그리고 기숙학교로 떠나고 집에서는 벤의 바로 윗 형인 폴만 남게 된다폴도 역시 벤 때문에 학교에서 늦게 귀가한다아버지 데이비드는 일을 더 만들어 집에 들어오는 시간을 줄여버리고집에서는 잠만 잔다.

 

이 부부의 바람들, 즉 (벤이 태어나기 전에) 일가친척들과 가족들이 큰 집에 모두 모여 웃고 떠들던 행복한 상황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그 큰 집에는 오직 벤과 헤리엇 둘 뿐이다


이 상황을 명확히 인지한 헤리엇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무렵 벤을 돌볼 청소년 하나를 섭외한다이름은 존아이를 돌보아주는 보모를 구한 것인데헤리엇의 이 결정은 결국 벤을 악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결정적인 선택이 된다왜냐하면 존은 부랑아이자 학교문제아들의 리더였기 때문이다단지 벤이 존을 잘 따른다는그래서 엄마의 근심과 걱정을 덜어줄 수 있다는 알량한 근거가 벤을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빌미를 제공한다존의 무리는 점점 일탈 횟수를 늘려가다결국 범죄자의 길을 걷게 된다벤도 커가면서 이들을 따르게 될 거라는 암시는 책의 마지막 헤리엇의 자조 섞인 생각 속에 암시되어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단연 해리엇이다이야기의 구조는 데이비드의 아내이자 벤의 엄마인 헤리엇의 행동과 생각으로 일관된다그래서 헤리엇의 두 가지 결정이 더 도드라진다그 하나는 벤을 기관으로 보냈다가 다시 집으로 데려온 결정이고이로 인해 데이비드 가족은 모두 해체된다그리고 후자즉 헤리엇이 그 모든 것을 희생하고 선택한 벤그에 대한 양육의 책임과 한계를 절실히 느낀 해리엇은 벤을 부랑아 청소년 존에게 맡겨버린다이후 벤에 대한 헤리엇의 통제권은 완벽히 상실되고 벤은 청소년 무리에서 성장하게 된다.

 

해리엇은 왜 그런 결정을 내린걸까가족 모두의 행복을 위해 벤을 희생시켰으면 안됐을까자신이 엄마로서 윤리적 양심을 접었으면 안 됐을까아니아이에 대한 양육 책임이 발동하여 벤을 집으로 데려왔다면 왜 끝까지 벤을 가정에서 책임지지 못했을까왜 벤을 껄렁한 부랑아에게 맡겨 버리는 우를 범한 걸까이 책을 읽고 끊임없이 밀려드는 의문부호들이었고급기야 해리엇의 결정에 화가 나기도 했다그래서 헤리엇이 행한 모든 순간의 결정들이 아쉽다결국 그녀의 결정으로 인해 가족은 해체되었고벤은 범죄자의 소굴에서 성장하게 되었으며자신은 혼자 집에 남아 벤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다해리엇은 결코 행복하지 않다.

 

사실 이 불행의 심연은 보다 근원적이다벤이 태어난 이후 시종일관 헤리엇을 괴롭힌 건 윤리적 상황의 딜레마였다아이를 없애버리는 것에 대한 윤리적 두려움과 벤을 자식으로 양육하고자 했을 때의 어려움이 바로 그것이다이 두 가지의 근본 원인은 벤이 기형아(다운증후군)라는 사실을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데 있다엄마가 볼 때 벤은 정상의 범주에서 한 참 벗어난 아이지만의사와 정신분석가 그리고 학교의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벤이 정상의 범주에 있다는 걸 강조한다바꿔 말하면 엄마인 해리엇이 이상하다는 결론이다헤리엇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기에 히스테리 증상마저 일으킨다참다못한 헤리엇은 아이를 부랑아에게 돌봄을 맡겨버린다.

 

그런데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든다기형아로 태어난 벤을 엄마가 인정하고 싶지 않아 그 마음이 아이에게 투사되어 고착된 게 아닌가 하는 정황 말이다학교 선생님과 의사가 해리엇의 감정적인 토로를 듣고 그 정도아이라면 정상의 범주라고 판단한 것은 매우 중요한 지표라고도 볼 수 있다그만큼 해리엇이 벤을 어떤 편견과 시선으로 양육하고 있는지 암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엄마의 걱정과는 달리 벤은 학교에서 정상적으로 어울리고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었다벤이 아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는 정황은 책 어디에도 없었다결국 엄마의 벤에 대한 편견이 아이를 더욱 나쁜 방향으로 내모는 결과가 되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헤리엇의 딜레마를 이해한다헤리엇이 벤을 양육함에 있어 많은 노력을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게 아니다하지만 너무 쉽게 포기한 것도 사실이다어떻게 벤이 존의 무리를 잘 따른다고(그 아이들 배경을 알면서), 돈까지 줘가며 벤을 그 아이들 손에 맡겨버렸을까개인적으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지지해 줄 수 없는 결정이다아이는 엄마의 손을 떠나면 정상적으로 성장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은 명확하다이를 뒷받침하는 심리학과 교육학 보고서는 넘치고도 남는다


여성으로 태어나면 누구나 헤리엇과 같은 처지에 놓일 수 있다소설 속 데이비드가 말할 것처럼 우연하게 장애를 가진 아이가 태어날 수 있다그게 엄마의 잘못은 아니며 더욱이 가족의 잘못도 아니다엄마가 그 아이를 책임지겠다고 하면 끝까지 책임지는 게 맞다희생은 불가피하다하지만 개인이 행복하기 위해 한 결혼 이후의 결과들은 한 여자로서의 행복을 전혀 담보하지 못한다이 딜레마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이런 생각을 멈출 수 없게 하는 글의 힘이 새삼 놀라울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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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10-01 12: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그렇지 않았음을 알게 되는 순간이 있죠.ㅠ
수용시설에 관한 이야기 하다 왔는데... 여기서 이 글을 읽네요^^
읽어봐야겠어요

yamoo 2022-10-05 07:23   좋아요 1 | URL
최선이라고 했던 것들이 그렇지 않음을 알게 되는 순간들이 있지요. 인생에는 그런 순간들이 많은 거 같습니다. 결과론적이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쓰린 상처를 남깁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해 나가는 것이 삶이라는 생각을 던져줍니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읽을 가치가 충분한 듯합니다.^^

프레이야 2022-10-01 16: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래전 읽은 레싱의 작품. 해리엇의 고뇌와 열린 결말이 많은 생각이 들게 해요. 톨스토이의 유명한 문장을 빌리지 않아도 한 가정의 불행은 각양각색, 그 그림자가 짙어요. 어머니에게 그 책임을 다 물어선 안 되지만 장애인 아이를 키워야 하는 예상치 못한 경우에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의 심적 육체적 노동이 가중되는 걸 보았어요. 책임을 어머니에게 더 많이 묻고요. 양육방식이란 걸 어머니쪽에 더 추궁합니다. 잘못이죠. 그렇지 않은 분들도 있지만. 불량한 아이인 줄 알면서도 그 친구가 아니면 내 아이에게 친구 될 사람이 없으니 그렇게라도 사람을 만나게 보내주더군요. 오래는 못 가고 아이는 또 상처를 받더군요. 행복한 가정이라는 모래성.

yamoo 2022-10-05 07:29   좋아요 1 | URL
맞아요. 행복한 가정이란 모래성과 같다는 걸 소설을 통해서 알 수 있어요. 우리는 왜 그렇게 행복한 가정에 목을 매는지 모르겠습니다. 장애가 있는 아이를 키우는 가정이나 치매가 있는 노부모가 있는 가정에 과연 이 책에서 말하는 행복한 가정이 있는지 의문입니다.
제가 아는 한 가족은 자녀가 장성했는데, 급성 신부전증이 와서 투석을 하지 않으면 사망한다는 진단이 내려져 하루 수십만원의 병원비로 생명을 연장하고 있습니다. 이 가정은 전에는 행복한 가정의 표준이었지만 지금은 가족이 파탄이 났습니다. 행복한 가정은 의도하지 않는 사건으로 한순간에 무너지는 모래성과 같습니다. 이 소설이 보여주는 하나의 단면...공감을 안할 수 없는 읽을 가치가 충분한 작품인 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stella.K 2022-10-01 18: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얼마만의 리뷰입니까? ㅋ
근데 웬지 야무님 글을 읽는데 전 좀 화가 나는데요?
해리엇의 마음은 일견 이해는 가는데 적어도 보모 선택만 잘 했어도
본인도 한시름 놓고 가족이 다시 뭉칠 수도 있었을 텐데
누가 봐도 존은 문제아구만 그런 아이한테 벤을 맡기다니.
정확한 정황은 알 수 없지만 화나고 안타깝고 그러네요.
저는 왠지 이 책 안 읽을 것 같아요. ㅋ

yamoo 2022-10-05 07:34   좋아요 2 | URL
아마도 1년? 그 정도로 리뷰를 쓴지 모래됐네요. 이 작품은 재미면에서는 그리 높은 평가를 내릴 수 없는 거 같아요. 일상의 가족사는 지루하죠. 하지만 작가는 그 속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생의 단면들을 잘라 생생히 보여줍니다. 이런 작품을 만나기는 그리 쉽지 않지요. 더군다나 인물의 선택에 대해서 그 성격에 대해서 독자로 하여금 화가나게 한다면 그만큼 작가의 역량이 뛰어나다는 방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스텔라 님에게도 일독을 추천드립니다!ㅎ

희선 2022-10-03 02: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자기 아이한테 장애가 있으면 바로 받아들이기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걸 받아들인 다음에 아이와 제대로 마주해야 할 텐데... 자기 일이 아니면 모르는 마음일지도 모르겠네요 엄마 혼자 아이를 돌보려 했나 봅니다 아버지나 다른 아이하고도 함께 생각했다면 좋았을 텐데... 아이들이 흩어졌다고 했는데, 벤이 있어서 식구가 하나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싶기도 하네요 그렇게 되지 못해서 안타깝군요


희선

yamoo 2022-10-05 07:37   좋아요 1 | URL
그쵸. 자신의 아이에게 장애가 있다는 걸 바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부모가 얼마나 있을까요. 참으로 힘든 상황입니다. 그래도 그걸 잘 버티고 훌륭히 키워낸 부모님들이 우리나라에는 많은 거 같아요. 그런 걸 보면, 헤리엇은 좀 무책임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좀더 들여다보면 그만큼 우리 윗세대의 부모님들이 그만큼 희생을 아주 많이 한 것이겠지요. 물론 안타까운 상황인것만은 틀림 없겠습니다~~

scott 2022-11-09 15: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야무님 이달상 추카 합니다
지금쯤 다섯번째 작품 준비중이신가봐여 !^^

yamoo 2022-11-21 10:0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요즘은 이달상 받으면 추카 댓글을 받나봅니다.
적응이 안되는군요..ㅎㅎ
스코트 님두 축하드립니다. 매달 당선되시는 듯합니다!ㅎㅎ

그런 건 아닙니다^^;;

바람돌이 2022-11-09 20: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야무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다섯째 아이는 제가 참 좋아하는 책인데 이 리뷰를 왜 놓쳣나 싶네요. 어떤 존재를 배제한다는 것의 이해할 수 없음을 굉장히 설득력있게 보여주는 책이었어요. 야무님 리뷰를 보니 읽을 때 느꼈던 것들이 다시 떠오르네요. ^^

yamoo 2022-11-21 10:06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좋아하는 책이시군요~
근데 재미는 그리 없더군요. 생각할 거리만 많이 남겨주는 작품인듯해요. 뭐 그래서 문학성이 장르소설보다 높은 거겠지요. 충분히 일독할만한 작품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바람돌이 님두 거의 매달 이달상 당첨되시는 거 같은데, 저두 역시 축하의 인사들 전해드립니다!ㅎㅎ

하나의책장 2022-11-09 23: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yamoo 2022-11-21 10:07   좋아요 1 | URL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얄라알라 2023-01-07 16: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제 막.다 소설 읽은후 야무님.리뷰 행간을.이해하게됩니다^^

yamoo 2023-01-11 17:47   좋아요 0 | URL
행간을 이해하신다니, 반갑습니다!
얄라님의 리뷰가 기대됩니다~~^^

추가적으로 읽은 후 덧글까지 남겨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취업의 추월차선 - 하마터면 지나칠 뻔했다 연봉 1억 일자리
이승재 지음 / 좋은땅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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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이후 실업률은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더군다나 청년 취업은 그야말로 빙하기. 2년 전인가, 청년 실업을 다룬 '청년 빙하기'라는 다큐를 방영한 적이 있는데, 지금은 그보다 더 취업문이 좁아진 상황이다.

 

 

정규직은 거의 없고 월 50만원도 줄까말까한 인턴직에 수 십대 일의 경쟁률은 이제 통상적인 말이 되었다. 서울 소재 명문대, 특히 인문 사회계 졸업생들에게 취업은 그야말로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보다 더 어려운 현실이 된지 오래. 문송해서 죄송하다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청년 취업난은 심각하다.

 

 

 

민간 기업 공채의 시대가 작년에 막을 내리고 이제 수시 전형의 시대가 됐다나. 남아 있는 공채는 공기업 내지 공무원 시험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모 공기업 40명 모집에 수 백대 일의 경쟁률은 기본. 서울 소재 명문대 졸업생도 인터 자리 하나 차지하기 위해 수 백통의 이력서를 쓰는 상황. 인문사회 계열 전공자의 현실이다.

 

 

더군다나 지방대 인문사회 계열 전공자들은 말해서 뭘할까. 그래서 그들은 물류센터 알바나 편의점 알바를 전전한다. 이마저도 4:1의 경쟁률을 훌쩍 넘어버린다. 청년빙하기가 훨씬 더 단단해진 느낌. 암울하다 못해 절망적이기까지 하다.

 

 

그런데 이런 현실에서 벗어나 새로운 곳에 눈을 돌려 취업에 성공한 지방대 출신들이 있다. 바로 중동에 있는 두바이다. 왜 중동 두바이일까? 두바이 취업문이 열린 건 전적으로 박근헤 대통령이 한 마디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 시절 대통령은 중동 지역에 우리 청년들을 취업시키면 좋겠다는 발언을 한다.

 

 

이에 정부는 부랴부랴 시책을 내고 한국산업인력공단으로 하여금 두바이에 인력을 파견하라고 시달한다. 이에 공단은 그 책임자로 한 명을 두바이에 파견하는데, 그 사람이 바로 이 책 <취업의 추월차선>(좋은땅, 2021)의 저자이다. 저자는 20156, 두바이에 첫발을 내디딘 후 1년도 되지 않아 60여 명의 한국 청년들을 두바이 현지 기업에 취업시켰다.

 

 

참고로 이전부터 KOTRA는 두바이 지역에서 한국 청년들의 취업을 담당해 왔었다. 이곳에서는 연평균 10여 명의 한국 청년들을 두바이 한국기업에 취업을 시켜 왔는데, 저자는 두바이에 도착한 지 1년여 만에 코트라 실적의 5배를 달성해버린 것이다. 그래서 1년 임기로 부임했는데, 2년을 더 연장했고, 3년 동안 약 200여명 이상의 한국 청년들을 두바이에 취업시켰다.

 

 

놀라운 점은 취업에 성공한 이들이 거의 모두 지방대 출신들이라는 사실이고, 이들의 초봉이 무려 4천 만원이 넘는다는 점이다. 체류지도 모두 제공된다니, 혹해서 나도 가볼까 생각했다. 하지만 지원 나이가 30대 중반까지라니, 입맛만 다셨다. 진짜 한국에서 인턴 자리 하나에 목을 매는 것보다 두바이에 취업하는 것이 훨씬 좋아 보인다. 아니 비교 자체가 안 된다.

 

 

두바이에서는 호텔, 디자인, 병원 간호사, 항공사 직원, 두바이 현지 한국기업 사무직 등을 선발하는데, 모두 책의 저자가 발로 뛰어 개척한 일자리들이다. 쉽게 말해서 저자는 두바이 현지 산업계와 한국 청년들을 매칭시켜주는 일종의 헤드헌터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맨땅에서 저자가 고군분투로 일궈낸 소중한 일자리들이다.

 

 

한국에서 도저히 취업이 안 돼 두바이로 시선을 돌린 지방대 문송인들은 현재 안정적인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다. 두바이는 우리나라와 다르게 항공사 승무원으로만 근무하는 게 아니라 호텔, 디자인, 두바이 한국기업 등에 두루 이직이 가능하다. 더군다나 두바이를 발판으로 영미 쪽이나 유럽의 다국적 회사로 이직할 기회도 충분히 열려 있기도 하다.

 

 

학벌이나 어학 점수도 별로 중요치 않다. 두바이에서는 한국의 이미지가 좋아 한국 청년들이면 어느 나라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다. 영어 구사 능력만 되면 면접 인터뷰만으로 취업에 성공할 수 있다. 참고로 두바이는 아랍지역에 속해있지만 오랜 영국의 식민지배 하에 있었기에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생활 수준이나 인프라도 우리나라보다 잘 돼 있다.

 

 

취업의 빙하기’, ‘취업대란’, ‘이태백’, 꿈포세대등은 어제 오늘의 말이 아니다. 한국은 이미 좋은 일자리가 거의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아주 적은 일자리를 갖고 수 백대 일의 경쟁은 하지 말자. 수 백통의 이력서와 자소서만으로도 자존감이 바닥을 친지 오래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지 말고 눈을 조금만 돌려 보자. 그러면 취업의 추월차선이 보일 것이다.

 

 

아직까지는 몰라서 취업을 못했다면, 이제는 한 번 문을 두드려보자. 인턴의 반복보다야 훨씬 좋지 않을까 한다. 저자의 도움으로 두바이 취업에 성공한 성공담을 들어보면, 이게 헛된 꿈을 잡는 허황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부다비에서부터 두바이, 라스 알카이마까지 다양한 직종의 회사를 방문하고 청년들의 취업 및 이직 고민을 시원하게 해결해 준 작가님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이 책을 통해 뛰어난 실력을 갖췄지만 그만큼 인정받기 힘든 한국 사회에 지친 구직자들이 다양한 기회가 있는 두바이에서 멋진 꿈을 펼치고 큰 꿈을 꿀 수 있는 도약의 발판이 되길 바랍니다. <유은O, 미국 뉴욕 Monteflore Medical Center>

 

 

해외취업이 험난해 보이겠지만 막상 도전해 보면 재미있고 가슴 뛰는 일입니다. 작가님에게 낯선 땅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듯이 해외에서의 커리어를 고민하시는 분들에게 이 책이 큰 힘이 될 거라 확신합니다. <김태O, 삼성전자 두바이>

 

 

해외취업 및 이직을 고민하며 누군가의 조언을 덛고 싶다면 더없이 추천해 주고 싶은 책입니다. 기회는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 책이 넓은 세상에서 여러분의 꿈에 한 걸음 더 다가가는 용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진O, 국내복귀자/핀란드 외국계 기업>

 

 

두바이 6년 차 취업자로서 이 책보다 더 두바이에 대해 잘 알려준 책은 없을 것입니다. 또한 취업의 추월차선은 두바이를 가장 잘 표현한 단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두바이로 와서 취업의 추월차선을 타시기 바랍니다. <양영O, Emirates Airline>

 

 

이 책에는 저자를 통해 취업에 성공한 많은 청년들의 생생한 후기가 담겨 있다. 조금만 눈을 돌리면 초봉 4천의 정규직 일자리가 있는 곳이 있다. 경력을 쌓아 3년을 넘기면 거의 7천대 이상을 보장받는 곳. 그곳이 두바이다. 이런 생생한 정보와 가이드가 한 권에 담겨 있다. 자신이 해외 취업에 관심이 없는 취준생이라도 거들떠 볼 만한 책임은 분명하다.

 

 

왜냐구? 자명하지. 국내 인턴 일자리에 쏟는 노력만으로도 취업 기회가 훨씬 넓어지니까. 그 기회를 잡는 건 이 책을 읽는 사람의 특권이지 않을까. 내가 봐도 막 가고 싶은 곳인데, 취업 준비생은 더 가고 싶겠단 생각이 들어 리뷰로 남겨 놓는다. 그제 막 나온 신간이란다.

 

 


[]

1. 이 글은 원래 아직도 인턴직에 목을 매고 있는 안타까운 한 후배 때문에 쓴 리뷰다. 헌데 후배와 같은 청년들이 너무 많은 거 같아 많이 안타깝다. 모쪼록 여러 가지 알아보고 준비를 잘 해 좋은 소식을 바라마지 않는다.

2. 이 책의 저자가 아직도 두바이 취업 상담을 하고 있는 듯하다. 리뷰를 읽고 궁금증이 든 취준생들은 seouldubai@naver.com 또는 andy@hrdkorea.or.kr로 문의하면 좀 더 생생하고 전문적인 가이드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산업인력공단 홈페이지에도 두바이 취업자들 브이로그가 올라와 있다니 방문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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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1-04-12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에서 취업이 인되면 외국이라도 나가야 겠지요.우리나라 대학생들의 경우 지방대학을 막론하고 취업 스펙을 잘 쌓었다고 하는데 일본의 경우 대기업에서도 일본 대학생들에 비해 외국어 능력,성실,도전정신들이 월등해서 인사팀에서도 70%가까이 한국 대학생들의 입사를 선호한다고 합니다.
 
순교자
김은국 지음 / 을유문화사 / 2004년 12월
평점 :
절판


내 부모님은 광신도인가?’ 이 책을 덮고 처음 들었던 생각이다. 소위 부모님은 장로교의 장로와 권사였기에. 나는 어렸을 때 부모님의 강력한 영향 하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교회에 다녔고 학부 2학년 때까지 기독교 동아리에 참여하기도 했다. 고교 시절부터 교회에 다니기 싫었지만 부모님과 싸우기 싫어서 어쩔 수 없이 다녔다. 언제나 내 이력의 종교 공란에 항상 기독교라고 써 넣었다. 그러나 항상 떠나지 않는 물음이 있었다. ‘도대체 믿음이 뭐지?’라는 거. 여기에 그럴듯한 대답을 성경에서 찾은 듯한데, 그 의미가 알쏭달쏭 하기만 했다. 성경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



세월이 가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나는 교회와 멀어져 갔다. 부모님 때문에 교회에 참석하긴 했지만, 찬송도 부르지 않고 기도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간간히 대형 교회 목사들이 뉴스 기사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사건을 접하면서 나는 확신했기 때문이다. 신은 없다고. 여신도를 성희롱하고 교회 재산을 아들에게 물려주는 세습 사건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설파하는 그네들의 설교는 가증스러웠다. 목사들은 아마도 알았을 것이다. 신이 없다는 것을. 그래서 성도들에게 내세의 희망을 주면서 자신은 그 대가로 성도의 돈을 착복하는, 뭐 그런 구조라 확신했다.



하지만 내면에는 이런 확신에 반하는 다른 생각이 고개를 쳐들곤 한다. 그것은 몇몇 신비주의적 체험이다. 초중고 시절 부모님은 기독교적 체험을 했다. 환상을 보고 방언을 했다. 지금도 어머니는 혼자 기도하실 때면 늘 방언으로 기도하신다. 정말 영어도 아니고 독일어도 아닌 생판 처음 들어보는 언어. 그리고 무당의 칼춤과 악령이 들린 사람들의 체험을 보면서 신이 정말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작가 김승옥이 절필을 한 이유가 그의 책 <내가 만난 하나님>에 수록되어 있다. 읽어 보면,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을 만나 절필하는 상황과 너무 유사한 것을 보면서 신의 존재에 대해 거듭 생각을 수정하곤 한다.



<순교자>는 내가 항상 생각하고 있던 지점을 정확히 건드렸다. 이 책의 주제라 할 수 있는 내용이 책의 후반부에 제시되어 있다. 정확히 279쪽부터 283쪽까지 주인공 이 대위와 신 목사의 대화 내용은 한마디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한 마르크스의 말로 요약할 수 있다. 북한 빨갱이들에 의해 목사 12명이 총살당했고, 이 가운데 2명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부지했지만 그 현장에 있었던 신 목사의 신은 없다는 자기 고백은 사실 꽤 충격적이었다. 절망에 빠진 백성에게 줄 수 있는 건 내세의 희망뿐이라는 그의 사명은 신은 없다는 절망감에서 출발한 일종의 자기 사명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믿음은 무엇이고, ‘신은 존재하는 가라는 형이상학적 물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기독교는 오직 체험에 의해서만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종교인 듯해서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인 이 대위, 박 대위, 장 대령 그리고 신 목사를 비롯한 12명의 순교자들은 내가 볼 때 전부 기독교적 체험을 하지 못한 신자들처럼 보인다. 인간으로서 극한의 절망감을 보인 사람들은 이 대위나 신 목사처럼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것이 인간이 가진 지극히 보편적인 논리적 귀결이다. 체험이 없으면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이 작품에서 이 대위는 신 목사에게 묻는다.당신과 이 땅의 백성들이 고통을 당할 때 당신의 하느님은 어디 계십니까?” 신 목사는 바로 답하지 못한다. 그리고 끝내 내 고통을 구원해 줄 신을 만나지 못한다. 전쟁에서 무의미하게 죽어가는 저 사람들에 대해 하느님은 그 어떤 징표도 보여주지 않았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이라면 그럴 것이다. 정금보다 더 단단한 믿음의 사람을 만들기 위해 하느님이 예비하신 절망의 고난이라고. 욥의 고난은 그래서 소설 속에 자주 인용되나 보다. 하지만 무고한 수십 만 명의 전쟁 희생자들에 대해 하느님의 예비한 길은 도대체 무엇일까. 여기에 이르면 진짜 신 목사의 신은 없다는 자기 고백이 묵과할 수 없는 절망감으로 다가온다.



키에르케고르는 오래 전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절망은 죄이고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설파했다. 그러나 그는 신 앞에 선 단독자였다. (욥도 단독자였다!) 체험 없이 신 앞에 설 수 없다면 나는 모든 신자가 절망을 겪을 때 신 목사가 한 고백과 같은 고백을 할 것이라 확신한다. 신은 없다고. 이 고백은 암암리에 대형 교회 목사들의 행태에 여실히 반영되고 있는 듯하여 씁쓸하다. 적어도 지금 우리 사회의 목사들은 신 목사처럼 절망에 싸인 신도들에게 욥의 희망을 제시하지 않는다. 먹고 살 만해져서 그럴까. 교회의 목사들은 돈을 받고 교회를 사교의 장으로 내어 주고, 신도들은 자신들의 바라는 거래를 위해 교회를 이용할 뿐이다.



신이 부재하는 곳에 믿음이란 것이 있기나 한 것일까? 있다면 그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이 소설이 내게 큰 울림으로 다가온 것은 작가가 이에 대해 답을 신 목사의 목소리로 들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평생토록 신을 찾아 헤매었소. 그러나 내가 찾아낸 것은 괴로움과 죽음, 냉혹한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뿐이었소. (중략) 날 좀 도와주시오. 내가 내 백성을, 불쌍하고 고통 받는 내 교인들을, 전쟁과 굶주림과 추위와 질병 그리고 삶의 피곤 앞에 고통 받는 사람들을 사랑하게 할 수 있게 도와주시오. 고통이 그들의 희망과 믿음을 움켜쥐고는 그들을 절망의 바다로 떠내려 보내고 있소. 우린 그들에게 빛을 보여 주고 그들을 기다리는 영광과 환영이 있다는 것, 그리고 하느님의 영원한 왕국에서 마침내 승리를 거둘 것이라는 확신을 줘야 합니다.”(283)



신은 없지만 신이 있다고 믿는 신자들을 위해 천국의 확신을 주는 것. 그것이 비록 고통 받는 인간이 내린 확신에 찬 믿음이었지만, 이것이 바로 신이 부재한 때에 목사들이 가져야할 믿음이 아닐지.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부터 나온 이 신에 대한 거짓 확신. 나는 이걸 인간에 대한 실존적 믿음이라고 명명해 본다. 신이 부재한 곳에서 싹튼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의 평안을 위한 믿음 말이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당신의 신 - 우리의 고통을 이해하지도 않을 뿐더러 우리의 비참, 살육, 굶주린 백성들, 그리고 그 많은 전쟁이며 끔찍한 일들과는 애당초 아무 상관도 하려 하지 않습니다(280).”라는 이 대위의 말 때문이다. 죽음 너머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야 믿음은 비로소 인간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인 실존적 옷을 입을 수 있다.



신 앞에 선 단독자가 아닌 이성적 인간이라면 누구나 신 목사와 같은 고백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박 대위, 이 대위, 장 대령과 같은 이성적 인간은 애초에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신에 대한 믿음을 찾을 수 있다는 기대는 부질없다. 하지만 신 목사는 인간이 처한 끊임없는 고통으로 인해 신을 부정한다. 그래서 신 목사는 이성적인 인간이다. ‘이성적 인간은 인간을 사랑할 수 있을지언정 신을 사랑할 수는 없다. 신 목사가 그의 이상(신자들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처럼 보인다. 어찌 보면 신 목사는 스피노자가 지향했던 믿음에 근접한 것 같다.



스피노자는 지독한 이성주의자였다. 스피노자가 개진한 모든 주장의 기반은 이성이었다. 스피노자의 사상이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이유는 그 자신이 추구하던 이성에 기반한 사상이 그의 삶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스피노자는 기독교적인 신으로부터 위안을 얻거나 윤리적인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방법만 달랐지 신 목사는 스피노자에 근접한 믿음을 가졌다. 나는 적어도 그렇게 느꼈다. 스피노자는 신을 사랑했지만, 신 목사는 신을 사랑하지 않고서도 그 자신의 이성을 실현하는 집념과 믿음을 보였다.



신 목사의 이 스피노자에 근접한 믿음, 신념 그리고 집념. 신이 없다고 선언한 이 가련한 목사가 보여주는 이 확고한 믿음. 나는 이 땅의 모든 신자와 목사들이 반드시 이 작품을 읽고 깊이 생각해 볼 가치가 충분한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신이 없다는 확신 속에서도 불구하고 신 목사가 택한 삶의 태도는 순교자의 삶이었다. 이 대위의 서울행을 거부하면서 평양에 남아 지친 영혼들과 부상자들을 돌봤던 그의 인간적 삶은 순교자의 표상과 일치한다. 그렇기에 나는 이 책의 타이틀 순교자는 빨갱이에 의해 총살당한 12명의 목사가 아니라 바로 신 목사를 향한 작가의 헌사로 읽혔다.



순교자적 삶. 모든 사명감을 가진 종교인들의 지향점이지 않을까. 비록 고통적인 삶이 지속된다고 하더라도 그 자신의 믿음을 극한까지 밀어붙여 끝내 죽음에 이르는 삶. 하지만 이 작품은 단순한 기독교 소설이 아니다. 종교에서 말하는 순교는 더더욱 아니다. 작가는 신이 부재함을 깨닫고 목사 자신의 신념을 위해 외형적인 순교자적 삶을 택한 목사의 삶이 과연 순교자로 판단할 수 있는지 독자에게 묻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강력하고도 매력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는 작가의 이 물음에 위에서처럼 스피노자적 믿음에 근접한 순교자의 삶이라고 이미 화답했다.)



이는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심대하다. 1950년의 소설 속 전쟁 상황과 현재는 아이러니하게도 신의 부재를 공유하고 있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1950년 평양의 열정적 신앙이 자취를 감춘 지 오래되었다. 아프고 낮은 자들을 위로하는 교회는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교회는 대형화 되었고 목사는 돈줄을 쥐고 성도들에게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신이 되었다. 교회는 법 위에 있으려고 하고 목사들은 성도들 위해 군림하며 세속의 정치에 빌붙어 더 많은 권력을 축적하려고 노력한다. 목사 세계에서는 성폭력과 성희롱이 일상화 된지 오래고, 대형 교회의 세습은 점점 규정화 되고 있다. 죽음 너머 신이 없다는 것을 멋지게 서로 증명하고 있는 목사들. 그들이 세상 속에서 외치는 믿음은 공허하며 그들의 설교는 우리들 삶의 실존적 피폐함을 전혀 위로할 수 없다.



우리는 위로 받고 싶어 한다. 경쟁이 갈수록 심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인다. 사실 우리에게 신이 존재 하느냐는 부차적인 문제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종교에 귀의하고 싶은 게 아니라 종교로부터 만이라도 위로 받고 싶어 신도가 되는 게 아닐까. 그러면 적어도 교회에는 신 목사와 같은 존재가 필요하다. 신이 없는 사회에서, 스피노자적 믿음을 소유한 목사가 우리를 위로할 때 그 위로는 실존적 옷을 입고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성에 기반한 그의 인간에 대한 진정성이 어찌 보면 우리가 종교에서 바라는 진정한 치유의 힘이지 않을까. 이 책은 신 없는이후의 사회에 믿음의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는 멋진 책이었다. 사명감을 갖고 자신의 부()의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신 목사와 같은 목사를 우리 사회가 갖게 되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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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20-01-20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무님, 너무 오랜만입니다!!^-^

겨울호랑이 2020-01-20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amoo님 오랫만에 오셔서 반갑습니다.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cyrus 2020-01-21 0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어요? ^^

hnine 2020-01-21 0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yamoo님.

수이 2020-01-27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무님 돌아오신 건가요?!!!
 
파리대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
윌리엄 골딩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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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에 나타난 인간관의 재검토 :

인간의 본성은 과연 악한가

 

 

 

들어가며

 

 

2000년 무렵, 나는 당시 일본 아니메에 빠져있었다. <신세기 에반겔리온>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 ‘저주받은 걸작’이라고 회자되는 작품을 추천받았다. 추천작은 <무한의 리바이어스>. 26부작을 단 이틀에 다 해치워버렸다. 그리고 애니 리뷰 사이트에 ‘15소년 표류기의 우주버전’이라는 타이틀로 리뷰를 썼다. 얼마 안가 누군가의 댓글이 달렸는데, 이랬다.

 

 

“<15소년 표류기> 보다는 <파리대왕>에 가깝고, 타니구치 고로우 감독이 아마도 <파리대왕>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기획한 거 같다.”

 

 

그 즉시 <파리대왕>을 구해 읽어 보았다. 당시에는 청목사 본으로 읽었는데, 정말 <무한의 리바이어스>와 상당히 흡사해서 놀랐더랬다. 주로 애니와 소설의 인물 분석에 초점을 맞춰 본 기억이 있다. 애니가 소설과 다른 점이라면 소녀들이 약간 등장한다는 정도.

 

 

지난 주 월요일. 간만에 독서모임 카페를 방문했는데, 7월 2일 주제도서가 <파리대왕>(민음사, 2007)이었다. 이미 읽은 작품이었기에, 갈까 말까 망설였다. 세세한 내용이 기억이 나지 않아, 다시 읽을 겸 민음사 본을 펴들었다.

 

 

그때가 저녁 7시 무렵쯤이었는데, 다음날 잠들기 전까지 모두 읽을 수 있었다. 번역이 안 좋아 투덜거리면서도, 몰입할 수밖에 없는 마력이 있었다. 세계문학을 이리도 재미있게 읽은 건, 페데리코 안다시의 <해부학자>이후 첨이었고, 민음사 시리즈로도 첨이었다.

 

 

그리고는 소담출판사 본과 문예출판사 본을 모두 구입하여 다시 비교해 보면서 읽었다. 역시 소문대로 문예본의 번역이 가장 좋았고, 소담본이 그냥 읽을 만한 수준. 민음사 본이 완전 최악이었다. <파리대왕>에 대한 번역 불만은 다음 기회에 페이퍼를 통해 들여다 볼 생각이다.

 

 

어쨌거나 도합 3번을 읽으니, 다른 분들의 생각이 궁금하여 알라딘 리뷰를 싹 훑어보았다. 논문도 몇 편 읽어 보았다. 헌데 그 내용이 대부분 비슷비슷했다. ‘이성 vs 본능’, ‘소라, 안경, 짐승 등에 대한 상징성’, ‘랠프와 잭의 갈등’ 등의 주제가 ‘인간의 야만적 본성’으로 수렴되고 있었다. 내가 리뷰를 쓴다고 해서 앞서 논의된 글들과 다를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리뷰쓰기를 포기했다. 헌데 토론에 참석하려고 보니,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이 와중에 리뷰의 윤곽을 잡을 수 있었다. 그 단초는 작가 골딩이 제시해 주었다. ‘악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라는 질문에 골딩은 “악은 환경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숨어있다”고 봤다. 이 리뷰는 이에 대한 반론이다.

 

 

 

작품의 줄거리는 매우 간단하다. 핵전쟁이 발발한 시기에 한 무리의 아이를 태운 비행기가 바다 한 가운데의 무인도에 불시착한다. 살아남은 아이들은 만 4세에서 12세 사이의 소년들로, 랠프라는 아이가 대장이 되어 무리를 이끌지만, 잭이라는 아이는 이에 반발하여 랠프의 무리를 이탈한다. 이후 다수의 아이들을 자기편으로 모은 잭은 자기와는 생각이 다른 랠프의 무리를 하나씩 굴복시키고, 급기야 혼자만 남은 랠프를 죽이기 위해 섬의 숲을 태운다. 랠프가 잭의 무리에 의해 거의 죽게 되기 직전, 거대한 연기를 본 해군에 의해 아이들 모두가 구조된다. (더 자세한 줄거리는 ‘파리대왕’으로 검색만하면 쉽게 찾을 수 있기에, 궁금하신 분들은 찾아보시길!)

 

 

 

 

괴물(짐승)과 파리대왕의 실체

 

 

이 작품에서 괴물(짐승)은 끊임없이 회자된다. 급기야 죽은 낙하산 병사를 괴물의 실체로 오인하기도 한다. 그 와중에 잭은 랠프의 무리로부터 떨어져나가게 된다. 랠프보다 더 어린 꼬마들은 유령 꿈을 꾸고, 괴물이 바다에서 올라온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린다. 침묵하는 자연의 괴괴함에 이 괴물에 대한 소문은 아이들의 불안 심리를 가중시킨다.

 

 

이때마다 사이먼은 '괴물은 우리(사람) 자체가 아닐까' 라는 내적 독백에 가까운 말을 우물거린다. 그러다가 사이먼은 잭 일행이 멧돼지를 잡아 그 머리를 베어 꼬챙이에 꼽아 놓은 곳에 이른다. 돼지머리에 달라붙은 수많은 파리떼가 곧 파리대왕이었다. 파리대왕은 이를 응시하고 있는 사이먼에게 말을 건다.

 

 

"나 같은 짐승을 너희들이 사냥을 해서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참 가소로운 일이야!"하고 그 돼지머리는 말하였다. 그러자 순간 숲과 흐릿하게 식별할 수 있는 장소들이 웃음소리를 흉내 내듯 하면서 메아리쳤다. "넌 그것을 알고 있었지? 내가 너희들의 일부분이란 것을. 아주 가깝고 가까운 일부분이란 말이야. 왜 모든 것이 틀려먹었는가, 왜 모든 것이 지금처럼 돼버렸는가 하면 모두 내 탓인거야." 웃음소리가 다시 떨리며 메아리쳤다. (p214)

 

 

이처럼 작가는 파리대왕을 대신에 이 소설의 주제의식을 전달한다. '나 같은 짐승'이란 인간 본성에 내재하고 있는 악이자 광기이다. 알려진 것처럼 이 소설의 모티프는 1858년에 발표된 밸런타인의 소설 <산호섬>이다. 이는 본문 p49에도 등장한다. <산호섬>은 밸런타인 당대의 낙천적인 시대상을 대변하여,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소설이다. 인간은 섬의 원주민들까지도 교화할 수 있는 선천적인 능력이 있다는 것으로 그려진다. 한마디로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라는 거다.

 

 

헌데 <파리대왕>은 <산호섬>과 거기에 나타나 있는 낙천적 인간관을 완전히 뒤집는다. 이 완벽한 원초적 상태에서 사회에 때 묻지 않은 어린아이들이 보여주는 파괴적 행위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악하다는 성악설을 뒷받침한다. 골딩에 따르면 <파리대왕>의 주제를 "인간 본성의 결함에서 사회의 결함의 근원을 찾아내려는 것이 이 작품의 주제다."라고 했는데, 파리대왕을 대신해 사이먼에게 속삭이고 있는 위의 인용구가 이를 집약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다 하겠다.

 

 

 

 

과연 인간은 악한 존재인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전통적으로 이 작품은 인간 본성에 대한 주제로 많이 읽혀 왔다. 랠프는 이성을 기반으로 한 인간 본성의 선한 쪽, 잭은 본능을 기반으로 한 인간의 악한 본성 쪽으로 정리하여, 야만적인 본능이 선한 본성을 누른다는 도식으로 많이 논평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몇 편의 논문 제목만 검색해도 이를 알 수 있을 정도.

 

골딩 자신도 위에서 살펴봤다시피 이 작품을 '인간 본성의 결함에서 사회 결함의 근원을 찾나내려는' 의도에서 작품을 구상했다. 골딩은 자신이 살았던 시대에 2차 세계대전을 겪었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골딩은 인간 개개인이 악하다고 본 듯하다. 그래서 밸런타인의 <산호섬>을 패러디하여(<산호섬>의 주인공도 랠프와 잭이다) 그와 완벽히 대척점에 있는 소설을 세상에 내놓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작품을 매우 감명 깊게 읽은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 책의 주제가 '성악설에 기반한 작품'이라는 거(악은 인간의 내면에 있다)에 반론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주지하다시피 인간 본성에 대한 논쟁은 성선설과 성악설로 양분된다. 전자는 맹자로, 후자는 순자로 대변된다. 문제는 이 도식이 칼로 무베듯 양분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건 가능성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간으로 태어난 아기는 선악을 알지 못한다. 이 아기는 자라면서 선해질 수도 있고 악해질 수도 있다. 결정된 것은 없고, 환경에 따른 이 아이의 반응으로 선한 인간이 될 수도 있고 악한 인간이 될 수도 있다. 이도 반반씩 섞여 있는 존재로 성장하게 되지, 완벽히 악한 인간이란 없고, 완벽히 선한 인간도 없다.

 

 

대다수의 논문과 리뷰들의 작품 분석에 따르면, 랠프는 이성에 기반한 선한 쪽으로, 잭은 본능에 기반한 악한 쪽으로 양분한다. 순진무구한 아이들이 무인도에서 생활하면서 자연스럽게 폭력과 광기에 휩싸여 악한 인간으로 타락한다. 선한 본성은 약해지거나 악에 종속된다. 그리하여 인간의 본성은 악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과연 이런 단순한 이분법적 도식으로 이 소설의 상황을 정리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나는 랠프가 이성을 대변한다고 보지도 않고, 잭이 본능을 대변한다고 파악되지도 않는다. 랠프와 잭 모두 본능적으로 살기 위해 이성과 본능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는 인물로 파악된다. 단지 랠프가 규칙과 질서를 우선시한 반면 잭은 직관을 우선시했다는 차이밖에 없다. 악한 것은 없다. 극한 상황적 두려움에 대한 인간의 대응 방식의 차이이지, 악이나 선이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다가 그대로 발현된다는 논리는 상황 자체를 너무 안이하게 생각한 귀결이다.

 

 

물론 이 섬에서는 두 차례의 살인이 발생했다. 결과적으로만 보면 멧돼지 사냥이 인간 사냥으로 확대된 모습처럼 보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광기와 본능을 구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광기는 본능이 아니다(물론 이에 대한 논증도 필요하지만). 본능을 넘어선 도착에 가깝다. 그러면 광기는 악인가? 악은 도대체 무엇인가? 여기에 이르면, 처음의 단순한 도식이었던 ‘잭은 악, 랠프는 선’을 다시 생각해 볼 수밖에 없다.

 

 

 

 

나오며

 

 

<파리대왕>을 다시 읽으면서, 한 가지 새로운 변화(전에는 랠프가 무척 불쌍하다고 생각)는 내가 잭에게 무척 감정이입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잭은 매우 직관적 사고를 하는 타입이다. 거기에 권력욕도 있다. 자신의 주도로 멧돼지를 사냥하여 그 고기를 모두에게 제공하고 싶다는 열망을 간직하고 있다. 위기의 상황에서는 잭의 리더십이 절차를 중시하는 랠프의 리더십보다 훨씬 더 강력할 수 있다. 무인도와 같은 극한 상황에서는 언제 어떤 위험이 닥칠지 알 수 없어, 순간순간 위기에 맞게 임기응변을 잘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에너지가 너무 강하여 살상과 광기에 휩싸이게 된 것은 안타깝지만. 위에서도 말했다시피 상황에 대응하는 잭의 방식은 동물적 감각을 중시하는 현대 기업인들과 매우 비슷한 면이 많다. 작금의 시대는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를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시대이기에, 직관에 기반한 삶의 방식이 무척 요구되는 시대이기도 하다. 광기로 흐르지만 않는다면, 랠프의 방식보다 훨씬 더 나은 방식일 수 있다. 무엇보다 잭은 현재를 즐기는 재미의 본질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기까지 하니까! (잭이 지향하는 삶의 방식은 광기어린 행위에 가려져서 그렇지 무척 긍정적인 요소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잭이 광기에 휩쓸려 돼지를 죽이고 랠프까지 죽이려고 한 것은 외부의 두려운 환경을 극복하려고 했기 때문이지 본래부터 갖고 있는 악한 본성 때문인 것은 아니다. (인간은 상황의 산물이지 본성적 존재가 결코 아님을 상개해 보라!) 그런고로 이 소설의 인물 잭은 재평가 되어야만 하고, 인간의 악한 본성이 인간 내면에서 발현한다는 식의 성악설적 입장 역시 재고되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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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인생 2017-07-06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생각할 거리가 많은 책인 것 같습니다. 획일적인 사고는 위험한듯 보이네요.

yamoo 2017-07-07 22:26   좋아요 0 | URL
네, 생각할 거리를 아주 많이 던져주는 작품인 것은 분명합니다. 정치학 서적으로도 읽을 수 있고, 모험 소설로도 읽을 수 있으며, 인간 본성에 관한 철학적 우화로도 읽을 수 있으니까요. 다각도로 볼 수 있는 열린 작품 같아 좋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07-06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리대왕 진짜 기똥차게 재미있었습니다. 엄두 두 척 !

yamoo 2017-07-07 22:29   좋아요 0 | URL
진짜 기똥차게 재밌더라구요. 생각할 거리두 많고...많이 알려진 문학 작품 치고는 번역된 판이 별로 없어 놀랐습니다. 무엇보다 서울대 동서고전 200권에 빠져 있는지라, 각종 고전을 소개하는 해제집에 상당수 책이 파리대왕을 언급조차 안하더라구요. 고전해제집 10에 8은 파리대왕이 없었습니다~ 개츠비, 호밀밭 등은 무자게 맘이 소개되고 번역판들이 넘치는데 말이죠...좀 요상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ㅎ

곰곰생각하는발 2017-07-06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오늘 읽은 글 가운데 반팔 와이셔츠 패션은 똥이다, 복식 문화에 반팔 와이셔츠가 없으며, 최악의 패션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패션 칼럼리스트 글을 읽었는데 재미있더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원래 양복을 입으려면 한여름에도 긴팔 와이셔츠를 입는다고 하네요. 그게 비즈니스 예의라고 말이죠..

yamoo 2017-07-07 22:42   좋아요 0 | URL
음....그니깐 유럽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그런 경향이 강한 듯합니다. 남성 패션이 발달한 유럽은 대체로 해양성 기후거나 지중해성 기후가 강해 우리나라처럼 덥고 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네들은 긴팔 셔츠를 여름에 접어서 입죠. 그런게 관행으로 굳어서 반팔 셔츠는 에티켓에 어긋나는 것으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헌데 우리나라는 사정이 다르죠. 우리나라 더위는 동남아의 여름만큼 덥고 습합니다.35도를 넘는데, 습도가 높으면 긴팔 셔츠를 입는 게 완전 곤욕이죠. 거기에 재킷을 걸친다? 더위에 약산 사람들은 거이 미쳐버릴 거에요. 더위에 강한 사람도 땀으로 범벅이가 될테고...그러니 우리나라에서 반팔셔츠를 입지 않고 여름을 나긴 매우 힘들겁니다. 패션은 그 나라의 문화적 환경을 도외시할 수 없습니다. 상황에 맞게 입어야죠. 이런 직장인들의 애환을 덜고자 오래 전에 엑스팀에서 ‘패션정글‘이라는 가이드 프로도 만든 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한 여름에 반팔 셔츠, 입을 수 있습니다! 단, 타이는 매지 않는 게 좋아요. 타이를 매고 입으려면 반드시 안감이 없는 얇은 여름용 재킷을 입는 게 좋습니다. 소위 남방이라고 부르는 얇은 소재로 나온 재킷이 있는데, 그런 걸 입으면 되죠.
말씀하신 그 패션 칼럼리스트가 말하는 최악의 패션이라는 건 타이를 맨 상태에서 반팔 셔츠만 입고 돌아다닌 케이스인거 같습니다. 타이를 매지 않으면야 그리 꼴풀견은 아니고, 봐줄 만한 정도입니다.

아, 근데....와이셔츠라는 단어 대신 그냥 셔츠 또는 드레스 셔츠를 애용해 주세요. 패션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와이셔츠라는 단어에 경기를 일으키는 듯합니다..ㅎㅎ

oren 2017-07-06 22: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을 읽고 제가 독후감을 쓴 날이 1984.9.21.(금)이었네요. 지금 다시 그걸 읽어 봐도 도대체 무슨 소린지 분명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데, 어쨌든 장황하게 소설 내용을 잔뜩 분석해 놓은 걸 보면(무려 11쪽!) 꽤나 감명깊게 읽은 책이었음은 분명한 듯합니다. 제 독후감의 마지막 구절이 자못 거창해서 조금 우습기도 하구요. 언제 기회가 되면 yamoo 님의 독후감을 염두에 두고 다시 한번 찬찬히 읽어봐야겠습니다.
* * *
…… 언젠가는 닥쳐올 우주 시대가 벌써 1954년에 한 예리한 작가에 의해 파헤쳐져 있다. 인간의 예지는 놀랄 만하다. 한 위대한 작품을 대할 때 보통의 사람들은 작가가 의도하고 추구하는 목적을 포착하지 못하고 그냥 주마간산격으로 보고 만다. 그러나 예지의 스펙트럼을 통해 보면 무수한 언어의 이합집산들의 자태가 얼마나 조화롭고 질서정연하고 창조적인 현란한 파노라마인지 알게 될 것이다.(섬 전체가 타버리는 걸 ‘지구의 몰락‘으로, 사이먼의 죽음을 ‘예수의 죽음‘으로, 해군장교의 등장을 ‘우주인의 출현‘으로 보고 이런 글을 썼던 듯해요...)

yamoo 2017-07-07 22:47   좋아요 1 | URL
우와! 오렌 님은 아주 젊은 시절부터 세계문학을 탐독하셨었군요! 책을 아주 좋아하셨고 많이 읽으신 듯합니다. 좋은 책으로만요~ㅎ

그 시절 파리대왕을 읽고 쓰신 내용....엄청나네요! 젊은 시절 책을 읽고 그런 정도로 생각을 펼칠 수 있다는 거....아무나 하지 못하는 거라 생각합니다. 감수성과 독서이력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절대 저런 생각은 나올 수가 없는 것이지요. 오렌 님의 과겅 얘기가 참으로 놀랍고 흥미롭네요. 지금 다시 이 작품을 읽으면 어떤 생각을 하실지 무척 궁금합니다.다시 읽을시면 굉장한 독후감이 나올 듯합니다!

transient-guest 2017-07-07 00: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전까지 이 작품은 15소년 표류기의 어른 버전정도로 생각했어요. 근데 SF가이드 총서를 보고서 SF소설로 분류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요. 읽은지 너무 오래됐기 때문에 다시 봐야할 것 같네요. 근데 갖고 있는건 민음사 본...-_-:

yamoo 2017-07-07 22:50   좋아요 1 | URL
충분히 sf소설로도 분류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저도 15소년표류기 정도로 생각했다가 오지게 뒤통수 맞았습니다.ㅎㅎ 특히 결말 부분이 후두부를 강타했습니다. 여러 시각으로 볼 수 있는 게 이 책의 장점인 듯해요. 사람마다 주안점을 두는 곳이 달라 토론을 하면 매우 재밌습니다. 다시 읽으시면 다른 많은 것을 덤으로 얻으실 수 있을 거랴 사료됩니다!ㅎ

stella.K 2017-07-07 13: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왓, 좋은 리븁니다.
청소년 시절 도전했다 포기했는데, 보려면 문예출판사 걸로 봐야겠군요.
전 지금까지 영화만 두 번 봤는데 영화도 좋더라구요.
마지막 엔딩 장면이 되게 인상 깊었는데...
랠픈가? 막 쫓기다 숲을 벗어났는데 어떤 어떤 아저씨가 그러잖아요,
너희들 여기서 뭐하냐고. 그때 이야기의 마법에서 깨어나기도 하죠.

저도 잭과 랠프를 보면서 인간의 야만성과 문화성 또는
권력욕과 이타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골딩이 뛰어난 건, 그걸 성인으로 상정하지 않고 아이들에게서 보여줬다는 거죠.
놀이라는 형태로. 사실 아이는 무조건 착할 거란 생각을 하잖아요. 크면서 악해지고.이걸 여지없이 깨줬다는 것에서 충격적이기까지 하더라구요.
그런데 이런 훌륭한 이야기도 출판을 못해 애를 먹었다고 하더군요.

인간은 본성이 아닌 상황의 산물이라!
정말 그럴 수도 있겠군요.^^

yamoo 2017-07-07 22:55   좋아요 1 | URL
저는 책을 보고나서, 무인도의 정경이 너무 궁금해서 영화를 찾아봤습니다. 근데 저는 영화가 책보다 무지 재미없더라구요. 설정 자체가 많이 다르고 플롯이 뚝뚝 끊이는 느낌이라 겨우겨우 봤네요.

인간은 상황의 산물이라 생각해서 그래요. 인간이 처한 상황을 제거하고 인간의 본성을 논한다는 건 어불성설인거 같아요. 외부 상황과 단절된 인간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 지 의문입니다.

혹시 이 책을 아직 읽지 않으셨다면, 문예본으로 꼭 읽독해보시길 강추드립니다. 하루 이틀이면 충분히 다 읽지 않을까 합니다. 무지 재밌거든요~ㅎ

cyrus 2017-07-07 15: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한의 리바이어스>, 한 번 봐야겠군요. 책도 그렇고 만화 역시 오래된 것일수록 좋아요. ^^

yamoo 2017-07-07 22:57   좋아요 1 | URL
꼭 한 번 보시길 강추드립니다. 네, 이번 여름에 이 작품을 떼는 것으로...^^;;

수다맨 2017-07-10 15: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민음사본 번역은 다시 들여다보아도 한숨만 나오더군요. 윌리엄 골딩의 문체가 설혹 의고체擬古體에 가까울지라도 한국인의 눈높이에 어느 정도는 맞게끔 번역을 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파리대왕˝보다는 훨씬 낫기는 하지만 유종호의 또 다른 번역본인 ˝제인 에어˝도 한자투나 예스러운 말이 많아서 보기가 좀 그렇더군요.

yamoo 2017-07-10 20:04   좋아요 2 | URL
처음에 책을 펼처서 읽어 가는데, 정말 환상적인 줄거리가 아니면 읽기 힙들었을 거예요. 앞부분 읽을 때 그냥 책을 집어 던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습니다. 그 <제인에어> 번역본도 악명이 높더라구요~
이제 유종호가 번역한 작품들은 기피해야 겠습니다~ㅎ

한국인의 눈높이에 맞게끔 번역하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는 참으로 드분 거 같습니다. 명작들이 한국어 번역본으로 태어나면 망작이 되는 듯합니다.

성석 2017-07-22 0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만 번역이 이상하다고 느낀 건 아니군요ㅎㅎ
바위를 굴려 떨어뜨려서 돼지를 죽인건 로저니까..만약 그러한 일이 없었더라면 혹은 로저라는 인물이 없었더라면, 잭이 랠프를 죽이려고 하지는 않았을까 싶네요..실지로 돼지가 죽기 전에, 잭과 랠프가 창으로 싸울 때는 칼싸움을 하는 것처럼 위해를 가하지는 않았으니까요..
정말 무서운건 로저가 아닐까 싶네요

yamoo 2017-09-16 14:47   좋아요 2 | URL
네, 아마 민음사판을 읽으시는 모든 분드이 직간접적으로 느기는 불만이 아닐가 합니다만^^

로저...그쵸 뇌가 없는 행동대장...가장 무서운 존재라 아니랄 수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