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 - 전경린 공명 산문집
전경린 글, 이보름 그림 / 늘푸른소나무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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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린이 누구인가? 나로 하여금 ‘여성과 성’에 대한 생각을 일거에 뒤집어 놓은, 그리고 여성작가의 인식을 불식시킨 바로 그 강력한 포스의 화신이 아니던가.

그런데 <나비>는 정말 그 전경린의 맞나 싶을 정도로 빈약하기 짝이 없는 글이다.

<나비>는 단 한 마디로, 전경린이 본 ‘성애론’쯤 된다. 전경린은 ‘여자의 나이, 여자의 사랑에 관한 감미로운 해석’이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지만 실망스럽기는 매한가지다.

혹시나 해서 끝까지 읽어봤지만 역시나 그렇다. 이전 작품들 속에서 보여주었던 암울하고 그 강력한 파괴적 에너지는 어디로 간 것인지...누구나 아는 얘기를 전경린이 보는 방식으로 약간 수정을 가한 것에 불과하다. 

새로운 건 하나도 없다. 전경린 만의 생각의 아포리즘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뭐, 내가 여자가 아니라서 절실함이 없다고 한다면야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다.

어디서나, 어느 작가의 책에서나 접할 수 있는 그런 내용.

90여 페이지면 될 것을 200여 페이지 가량 불려 놓은 것도 거슬린다. 책을 비싸게 팔아먹으려는 속셈으로밖에 안 비친다. 물론  출판사 탓도 있지만 서도.

전경린은 여자의 일생을 나비에 비유하고 있다. 참신한 비유(?)일지는 몰라도 결론이 “…여전히 모른다”는 무책임한 말로 마무리하고 있다. (이런! 이건 아니잖아~~~)

이 책을 읽느니 차라리 마광수의 <성애론>을 읽는 게 훨~씬 낫겠다는 생각이 끊이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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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가 돌아왔다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이우일 그림 / 창비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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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하의 소설집은 처음이다. 단편은 몇 번 만나보아 소설집을 벼르고 있었다.

역시나 이 작가는 글을 개성 있게 잘도 쓴다. 극과 극을 오가는 8개의 단편들은 개성 강한 글들로 확연히 구분되고 있다.

하지만 뭔가가 빠진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해설이 필요한 그런 소설집이다.

그런 걸 우려해서일까 친절하게도 8편의 단편들을 평한 평론가 김태환의 해설이 부록으로 딸려 있다. 평론가의 글을 읽는 게 별로 내키지 않지만 김영하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듯싶다.

“김영하의 소설집은 가치파괴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냉소와 열정 사이의 폭넓은 스펙트럼 속에서 보여주고 있다.” (p266)

‘그림자를 판 사나이’, ‘오빠가 돌아왔다’, ‘크리스마스 캐럴’, ‘너를 사랑하고도’, ‘이사’, ‘너의 의미’, ‘마지막 손님’, ‘보물선’ 등 8편의 단편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해서 김영하는 가치의 상실 앞에서 절망하는 사람, 실망을 감추고 냉소의 포즈를 취하는 사람, 철저히 적응하는 사람, 광기에 빠진 사람, 그 광기를 이용해 주판알을 튀기는 사람, 철저히 적응하는 사람들의 군상을 보여준다.

“김영하의 소설에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허무적 인식이 깔려 있다.” (p267)

부인하고 싶지만 김태환의 지적처럼 김영하의 소설집은 ‘허무’가 지배하고 있는 것 같다. 평론가는 ‘냉소와 열정의 변증법’이라 명명했지만 나는 ‘허망한 삶의 부조리’라 표현하고 싶다.

결론을 독자에게 유보해서인지 확실한 결론이 없는 8편의 단편들을 읽으면서 허망한 삶의 부조리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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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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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 정상과 미침을 가르는 기준은 무얼까? 그리고 그 의미는 어떤 것일까?

이런 물음들을 던지게 하는 무거우면서도 산뜻한 코엘료식 삶의 방식.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와 같이 읽으면 좋겠다는 느낌이 든다.

자살 미수에 그친 베로니카. 그래서 류블랴나의 정신병원에 수감된 그녀. 그곳에서 그녀와 같이 미쳐있는 마리아, 에두아르, 제드카를 통해 코엘료는 생의 의미를 말한다.

미쳐있음을 통해 미치지 않았던 정상 생활의 권태로움을 반성케하고, 죽음의 선고로써 의미 있는 현재를 발견케한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리고 또한 누구나 죽을 수 있다. 후자가 더 인간적이다. 인간은 죽을 수 있어 행복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각기 이유는 다르겠지만 생의 한 복판에서 우리는 죽음을 꿈꾼다. 하지만 공신력을 갖는 기관(예컨대 병원)에서 ‘죽는다’고 언도하면 죽고 싶다고 불쑥불쑥 느끼던 사람도 살려고 아등바등 한다.

소설은 바로 이 사실을 재미있는 플롯 구조를 통해서, 삶의 의미를 반성적으로 되짚어 보게 한다.

코엘료는 이고르 박사를 대리해서 말한다. 베로니카의 ‘죽음의 자각’실험처럼 “생을 살아라!” “생은 살 가치가 있다!” “오늘 이 시각의 의미가 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 될 수 있다”고~

그래서 이 소설의 주제를 “인간은 죽음의 자각을 통해 더욱 치열한 삶을 살수있다”정도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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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의 절차 1
스탠리 포틴저 지음, 정경호 옮김 / 서적포 / 199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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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계속 읽으려구 벼르던 책중의 하나가 <제4의 절차>라는 책이었습니다. 3권으로 이루어져 있어 손이 안가다가 마침내 읽었는데, 정말 횡재한 느낌이랄까요..  

겉표지의 타이틀 광고를 보니, 주제가 무거워서 미뤄뒀던 건데, 상상외로 재미있어서 3권을 이틀에 해치워버렸습니다.

내용은 낙태에 관한 것입니다. 특히 미국의 '로 vs 웨이드 판결'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법정, 의학 스릴러 라고 불릴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건 그 이상입니다. 

무엇보다 스릴러 영화를 보는 것보다 흥미진진 합니다. 재미에다가 법률지식 그리고 낙태를 둘러싼 치열한 논리정연한 논쟁을 볼 수 있어 1석 3조의 효과를 본다고 할까요..  

'인간을 어디서부터 정의해야하는가?' '생명의 소중함이 우선인가 여자의 행복이 우선인가?'라는 물음들에 대한 찬반 논쟁들...

낙태반대론자인 미대법원장 티투스, 낙태반대 이익단체장을 이끄는 <붉은 장미회>의 엘리 그레이브스, 낙태 찬성론자인 세계적인 여성생체이식권위자 레이첼박사, 차기 하원의장이 유력한 하원의장 잭 맥클라우드 의원과 그의 아내 빅토리아 등 개성 강한 중요 인물들이 얽히고 설히면서, 정치적 법적 의학적 음모들이 펼쳐집니다.  

낙태를 둘러싸고 치열한 정치적, 법적 싸움을 벌이는 티투스와 낙태찬성론자들...마침내 대법원장의 주치의인 레이첼 박사는 대법원장의 복강에 잭 맥클라우드 의원의 아들을 착상시키는 수술을 하고 사건은 걷잡을수 없는 소용돌이에 휩싸이면서 낙태반대론자들은 낙태찬성을, 낙태찬성론자들은 낙태 반대를 주장하게 됩니다. 

수 많은 음모와 권모술수. 보이지 않는 손이 사람들을 조종하여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다가 결국에는 그것이 부메랑이 되어 자기를 죽이는 절묘한 반전이 돋보입니다.

너무도 흥미진진하여, 매우무거운 주제가 한편의 영화처럼 스크린에 뿌려지는 듯한 착각이 들정도로 재미가 있습니다.  

낙태주제를 적어도 한번이라도 생각했던 분이나 페미니즘이론에 관심이 있는분, 또는 의학스릴러나 법정소설을 좋아하시는 분이 읽으시면 금상첨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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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내가 돌아오면
전경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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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번째 만나는 전경린의 작품. 역시 우울했지만 이전 작품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지금까지 읽었던 그녀의 작품들은 '환과 멸'로 집약될 수 있었기에.(순전히 개인적인 생각) 그래서 읽는 내내 우울하고 책을 덥으면 허무하기 까지 했다. 그것은 그녀 작품속의 각 주인공들이 내면의 상처를 감싸안으면서, 이 땅에서 '독립된 여자'로 살아간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심각하게 되묻기 때문이다. 실존의 문제이기에..그래서 우울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초기 작품과는 달리 근래들어 그녀가 보여주는 삶의 방식에 변화를 감지하게 된다. <황진이>에서 황진이가 사랑을 위해 자신의 길을 찾아 훌쩍 떠나버리더니 <언젠가 내가 돌아오면>에서는 생의 끝까지 갔다가 삶의 건강한 의지를 갖고 다시 돌아오는 혜규의 모습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때문에 절망하다가(내 생애 하루뿐이 특별한 날), 사랑때문에 자살하고(유리로 만든 배)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의 길을 간 <황진이>도 있었기에 이 소설의 주인공 혜규는 어떻게 할 지 정말 궁금했다. 결론은 생의 끝까지 갔다가(자살 시도) 다시 돌아와 새인생을 사는 것으로 되어있다. 일종의 사랑의 거듭남 이랄까..

줄거리는 이렇다.  이 작품의 주인공 혜규는 1남3녀의 세째. 혜진 혜도 혜규 혜미로 이어지는 혜규 가족의 애증과 갈등이 한 축이고  혜도의 친구 인채 혜규의 사촌언니 예경 그리고 혜규의 남자 형주의 관계가 또 다른 축이다. 어렸을때부터 자기보다 연상인 미모의 예경을 좋아했던 인채, 박식하고 따뜻한 인채를 마음에 둔 혜규. 장성해서 고향인 작은 읍에 국어 선생으로 발령받은 인채와 문화원에서 근무하던 혜규는 학회에서 오랜만에 재회하여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 결혼을 약속하는 사이로 발전하지만 결혼식 바로 전날 인채가 사랑했던 예경을 우연히 택시 안에서 만나 예경의 유혹에 넘어간 인채는 결혼을 무기한 연기하고 그 충격에 혜규는 손목의 동맥을 끊는다. 간신히 살아난 혜규는 오빠 혜도의 도움으로 도시의 모 출판사에 근무하게 되고 거기서 운명적인 사랑 형주를 만나게 된다. 둘은 격정적으로 사랑하지만 그것은 불륜. 서로를 사랑하지만 혜규는 그것이 잘못된 사랑이라는 걸로 괴로워하다가 그와의 사랑을 가슴에 묻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온다. 고향에 온 혜규는 병든 어머니를 간호하면서 오빠가 운영했던 카페 '세상끝의 입맞춤'을 인수면서 점점 생의 의지를 갖게된다. 

전경린은 작가의 말에서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삶의 궁극인 영원이란 지금 이곳에, 모든 나가 동시에 모여든 일치의 순간을 말하는 것인지 모른다. 우리는 누구나 그런 절정을 향해 살아간다. 그것은 내가 내게로 온전히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일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이렇게 자기로부터 떠나가고 돌아오는 사람들의 이야기 이다"

그녀 말처럼 이 소설속의 각 인물들은 모두 사랑으로 인해 자기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과정으로 그려지고 있다. 혜도-순이 커플은 그들대로 각자 자신의 것을 찾아 떠났고(떠남과 동시에 그들의 시작이었다), 혜진은 자신의 마지막 보루인 사랑으로, 혜미는 그녀 남편의 외도를 용서로(용서는 사랑이라고 그녀 엄마는 말한다), 인채는 죽음으로, 예경은 그녀의 아픔의 완결인 아들 선우로 인해 모든 갈등과 증오와 번민들을 털어낸다.  

사랑으로 인해 아파하고 자기를 부정하고 좌절하면서 각자 생의 끝까지 갔다가 그들 나름의 출발점으로 돌아간다. 각 인물들의 사랑의 회귀..이것이 이 소설의 내용이자 주제라고 할 수 있겠다.

책을 덮으니 다시 의문이 꼬리를 문다. 애정은 없지만 가족이라는 제도를 지키기 위해서, 순전히 개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사회로 부터 손가락질을 받지 않기위해서 '가족의 존속'을 원하는 혜진의 태도는 사랑인가? 남편과 남편의 내연여가 당당히 혜진으로부터 이혼을 요구하는 그 상황속에서 가족을 지키기위해 이혼을 거부하는 혜진의 태도가 과연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혜미의 남편과 놀아난 21살의 그 여자. 혜진에게 이혼을 요구했던 그여자. 그러니까 '부인도 아니고 창녀도 아닌 독립된 여성으로서 사랑입네 하는 여자'로 대표되는 혜규의 사랑은 과연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가? 세컨드로서 정부에게 당당히 이혼을 요구할 수 있는 걸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따위 물음을 던져본다.  

하지만 이 소설의 관점에서보면 역시 이런 것들도 사랑 일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부부로 같이 산다하더라도 '사랑을 찾는 저마다 혼자인 이교도들'이기 때문이며 아무도 '그들이 사랑한 것을 모욕할 수 없기'때문이다.

읽으면서 이번 작품은 어떤 우울로 사랑을 그릴지 내심 기대했지만 전경린은 더 이상 우울한 사랑을 그리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거 같다. 기대가 약간 벗어나 당황스러웠지만(결말이 전혀 전경린 답지 않아서) 그의 스타일이 아직도 소설 곳곳에 건재함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이 작품에 후회는 없다.  

책에서 전경린이 도발적으로 던지는 "사랑하는 두 사람이 헤어지면, 사랑은 어디로 사라지나..."라는 물음을 되씹어보면서, 나도 사랑에 대해 새로운 물음을 던져 본다. 사랑은 열정의 습관인가 아니면 인간실존 문제에 대한 해답인가..

 

덧붙임>>
"사랑하는 두 사람이 헤어지면, 사랑은 어디로 사라지나..." 내가 생각하기에 결코 사라지지 않는거 같다. 각 개인 내면에 깊게 새겨져 무의식속으로 가라 앉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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