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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체홉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열린책들, 2005)을 매우 인상깊게 읽었다. 지하철 안에서 멍하니 그냥 가는 것보단 나은 것 같아 읽기 시작한 소설집. 작년과 올해 통틀어서 유일하게 읽은 소설집이다. 단언컨대 내가 올 해 다시 소설책을 찾아 읽을 수 있도록 해 준 원동력은 바로 체홉의 이 소설집이다.

 

 

지하철에서 단 1편의 작품, 그것도 5페이지에 불과한 소설을 읽었지만 정신적 감흥은 꽤 오래갔다. 그가 단편소설의 천재 작가임을 단박에 알 수 있는 그런 작품들이었다. 소설에서 나에게 이런 정도의 포스를 느끼게 한 건 키냐르의 <은밀한 생> 이후 처음이었다.

 

체홉의 소설들을 얼마나 재밌게 읽었던지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읽은 후 감동은 더 말해서 뭣하랴. 체홉의 유머 단편집도 있어 찾아 봤는데, 그건 또 얼마나 웃기던지. 작품들을 읽으며 찬탄해마지 않았다.

 

그의 작품들을 읽고 있으면 "체홉은 반드시 읽어야 할 작가이다. 그는 우리를 정신적으로 성숙하게 만들어 주는 예술가이다."라는 수전 손택의 말이 계속 머리를 멤돌게 한다. 정말 고개가 끄덕여지며, '암, 그의 작품을 읽으면 정신적으로 성숙해지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도 그럴것이, 간결한 문체 속에 녹아 있는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유머와 위트 이면에 '인간의 가치'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를 주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단순하고 짧은 이야기 속에서 체홉이 잡아 내는 인간에 대한 통찰은 놀라울 정도이다. 그래서 그의 단편들을 읽으면 내가 정신적으로 성숙해 지는 느낌이 마구 들게 된다.

 

그런데, 어제부터 '정신이 성숙한다'는 말이 계속 생각나는 거다. 그러면서 의문점이 계속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정신이 성숙한다는 게 도채체 어떤 의미일까?'라는 물음. 그리고 여기에 완전히 사로잡혀 버렸다. 걸을 때에도, 밥을 먹을 때에도, 사우나에서도, 도무지 생각을 멈출수가 없다. 조금만 짬이 나면 이 생각이 튀어나온다.

 

계속 생각을 하다 보니, '정신이 성숙해진다'는 게 아주 이상한 표현이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당연한 것도 자꾸 생각하면 이상하게 보이는 것처럼, 내가 미쳐가고 있는 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긴했다.

 

하지만 분명해 보였던 건 '정신은 성숙할 수 없다'는 명제였다. 헤겔이 말위에 탄 나폴레옹을 처음 보고 '저기 절대정신이 있다'고 외친 것처럼 정신은 있는 것이지 성숙하는 건 아니다. 마찬가지 실례로 '시대 정신'이 있는 것이지, '시대 정신'이 성숙하는 건 아니지 않는가.

 

내친김에 더 나아가 보기로 하자. '정신은 성숙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인간이 정신적인 존재라는 건 확실해 보인다. 어떤 이상을 추구하고, 소설을 즐기는 면을 보면 말이다. 더군다나 먼 옛날부터 형이상학이라는 이론을 정초해 낸 것을 보면, 인간이라면 누구나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나는 '어떤 고귀한 능력'이 있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을 듯하다.

 

비슷한 맥락으로 '천부인권 사상'이라는 것도 있지 않나.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불가침(남에게 침해받지 않을)의 기본적인 권리를 갖고 태어난다는 사상 말이다. 생명권, 자유권, 평등권과 같은 기본권 등등.

 

그러니까 인간의 '정신'은 '천부인권 사상'처럼 인간이면 누구나 갖고 태어나는 고귀한 능력이다. 그렇다면 분명해 진다. 천부인권이 성숙한다? 이건 너무 이상하고 말이 되지 않는다. 뭐가 성숙하는가? 천부인권은 성숙하는 게 아니라 완전히 드러나는 정도에 있다. 사회의 발전 상황에 따라 완전히 드러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 정신은 성숙하는 게 아니다. 단지 각 개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 잘 발현되지 못한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기쁘게도, 나의 이런 생각은 약 200년 전 혜강(1783~1877) 최한기 선생의 철학에 닿아있다. 혜강은 자신의 기(氣)철학을 펼치면서 아주 명쾌하고도 설득력 있는 설(說)을 내 놓았다. 그게 바로 기일분수(氣一分殊)론이다. (사실 기일분수론은 거슬러 올라가면 서경덕 임성주 등의 기철학자에게서도 볼 수 있는 이론이다)

 

이 이론은 복잡하니, 뼈대만 보도록 하자. 상황을 현대적으로 설정해 보면 이렇다. 다섯 개의 물이 든 비커에 각각 투명한 구슬을 넣는다. (순서대로 1번부터 5번까지) 그리고 1번을 제외하고 2번 비이커부터 먹물을 단계적으로 떨어뜨린다. 마지막 5번 비커의 구슬이 안보일때까지.

 

그러면 다섯 개의 비커는 처음 맑고 투명한 비커에 담긴 비커부터 마지막 5번 비커까지 먹물의 농도에 따라 배열된다. 1번 비커는 아주 투명하여  구슬이 선명하게 보인다. 2번 비커부터 4번 비커까지는 먹물의 탁함 때문에 구슬이 선명히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보인다. 4번 비커는 잘 안보이지만 5번 비커와 비교하면 그래도 비커에 구슬이 담겨져 있는 형태는 볼 수 있다. 5번 비커는 물이 너무 시커멓게 되서 구슬조차 볼 수 없다.

 

혜강 선생의 설명에 따라 해석해 보면, 여기서 구슬은 인간 정신이고 먹물의 탁함 정도는 개인의 기질 차이다. 1번 비커는 기질에 나쁜 것이 전혀 섞이지 않아 본연의 인간 정신이 모두 발현되는 예이다. 그에 비해 5번 비커의 상황은 기질이 너무도 탁하여 인간 본연의 정신이 하나도 드러나지 못하는 예이다. 2번부터 4번 비커의 상황은 기질의 탁함 정도에 따라 인간 정신이 발현되는 정도가 다른 예들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인간의 정신은 성숙하는 게 아니다. 단지 개인의 기질에 따라 단계별로 드러나는 정도가 다를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인간의 정신이 성숙한다'는 생각을 문제의식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서양 사상에 기반한 지성의 산물 때문인 듯하다. 베르그손이 말한대로(<창조적 진화> pp305-306) 지성은 항상 지성과 맞아 떨어지는 '어떤 느낌'을 찾는다.

 

그 '어떤 느낌'이 정신이 될 때 우리의 지성은 정신에게 명백한 공간 표상을 암시해 준다. '성숙'은 당연히 '미성숙'을 전제한다. 미성숙과 성숙의 이 간극, 다시 말해 정신은 단번에 공간을 획득하고 그 속에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게 된다. 

 

일단 공간의 형식을 소유한 정신은 우리의 필요에 따라 개념을 재단한다. 그러하기에 '정신이 성숙한다'는 이 비유는 지성에게 너무도 자연스럽게 수용될 수밖에 없게 된다.

 

하지만 위에서 지적했다시피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정신을 공간적으로 구획할 수도 없거니와 이로부터 확장(또는 연장)되는 인격화는 더욱 문제점을 심화시키기 때문. 다시 강조하지만 정신은 성숙할 수 없다. 오로지 발현될 뿐이다.

 

그런 고로 우리가 문학 작품들을 읽고 감동을 느끼는 행위는 우리의 정신이 성숙해 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외물에 휘둘려 드러나지 않았던 고귀한 정신이 비로소 문학을 만나 그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는 과정인 것이다.

 

 

 

덧.

1. 그럴듯한 말일수록 의심해 보는 깜냥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되는... 설날의 깊어가는 밤이다.

2. 하반부에서 베르그손의 <창조적 진화>(아카넷, 2005) pp305-306 부분을 나름 이해하여 논의 전개 과정에 적용시켜 봤는데, 내가 제대로 이해하고 쓴 것인지 심히 우려된다. 번역본이 너무 좋지 않아 '지성성과 물질성'부분을 10번 이상 읽었는데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정말 이해 할 수 없을 정도의 비문이 넘쳐났다. 본문에 해석된 베르그손의 이론이 오독이라면, 이는 순전히 번역자(번역의 질이 현저히 떨어졌음)때문이다. 나는 나름대로 이해하기 위해 10번 이상 읽고 고 박홍규 교수의 <창조적 진화>강독도 참고 했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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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4-02-01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amoo 님 덕분에 저 책 ..장바구니에 바로 넣었습니다..~~

"정신은 성숙할 수 없다..오로지 발현될 뿐이다.."

자주 꺼내보게 될 것 같은 문장입니다

yamoo 2014-02-03 17:11   좋아요 0 | URL
새벽숲길님 반갑습니다!

혹시 체홉의 소설을 아직 만나지 못하셨다면 이 기회에 읽어보심 좋을 듯싶습니다. 저는 재작년에 읽을 기회가 있었습니다만, 일 때문에 읽지 못하다가 몇일 전에야 읽게 되었습니다. 늦게 만났지만 그래도 지금쯤이라 안도됩니다^^

페이퍼를 좋게 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페크(pek0501) 2014-02-02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홉의 작품에 반하셨군요? 행복한 일입니다.
저도 어떤 작품에 매료될 때마다 저의 행복지수가 올라가는 것만 같아요.

"인간의 정신은 성숙하는 게 아니다."
- 아, 어려워라...
생각해 보겠습니다. ^^

yamoo 2014-02-03 17:13   좋아요 0 | URL
네^^ 반했어요.ㅎ 그쵸, 즐거운 일입니다. 앞으로 체홉의 작품이 번역되면 낼름 사 볼 예정입니다..ㅎ

흠...생각해 보시고, 나름 답을 내시면 알려주세요.^^
 

개인적으로 중국 제자백가 사상 중에서 <장자>를 제일 좋아합니다. 그 이유는 우화 형식으로 돼 있지만 내재해 있는 철학적 사유가 매우 심오하기 때문입니다. 우화의 내용은 대부분 모순적인 상황을 발생시킵니다. 그리고 우화의 끝에 이르면 언제나 지혜에 대한 깨달음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역설의 미학이라고 할까요. 뭐, 노자 <도덕경>이나 자사의 <중용>을 읽어보면 비슷한 사유의 흔적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화 속의 특유한 '논리' 구조*는 제자백가 사상 중 <장자>에서 가장 두드러집니다. <장자>를 읽는 재미와 묘미는 바로 여기에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어쨌든, 이 ‘역설’의 논리는 서구의 변증법적인 방법과 비슷해 보이지만 음미해 보면 선불교에서 말하는 ‘공안’의 논리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런지 직접 <장자>가 하는 말 몇 대목을 들여다 보는 게 좋을 듯합니다. (제가 소장하고 있는 <장자> 판본은 여러 개인데, 아래 글은 윤재근 씨가 편저한 <장자> 중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1990년 판이라 2013년 판본과 페이지 수가 달라 페이지는 생략 했습니다.)

 

 

 

 

 

 

 

 

 

 


“사물은 이건 아닌 것이 없고 저것 아닌 것이 없다. ~ (중략) ~ 이것이 저것이고 저것이 또한 이것이다. 저것도 하나의 시비이며 이것도 하나의 시비이다. 과연 저것과 이것이 있다는 말인가 없다는 말인가. 저것과 이것이 서로 대립을 없애는 경지를 도의 중심이라고 한다."


“손가락을 가지고 손가락이 손가락 아니라고 하는 것은, 손가락 아닌 것을 가지고 손가락이 손가락이 아니라고 하는 것만 못하다.”


“한쪽에서 보면 분열이고 다른 쪽에서 보면 합침이다. 한쪽에서의 합침은 다른 쪽에서의 파괴이다. 모든 사물은 합침이든 파괴이든 다 같이 하나이다.”


“저 텅 빈 것을 잘 보라. 텅 빈 방에 햇빛이 비쳐 밝지 않은가. 행복은 텅 빈 곳에 머문다.”


“삶을 죽이는 자에게 죽음이란 없다. 삶을 살려고 하는 자에게 삶이란 없다. 이것이 도이다. 도란 모든 것을 보내고 모든 것을 맞아들이며 모든 것을 파괴하고 모든 것을 이룩한다.”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 근심과 한탄, 변덕과 고집, 아첨과 거만, 개방과 꾸밈 이것들이 없으면 내가 있을 수 없고 내가 없으면 그것들이 나타날 데가 없다.”


<장자> '내편'에서는 위와 같은 어록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말장난처럼 보이는 대목도 있고 아포리즘과 같은 대목도 있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모든 어록이 평면적인 말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제자백가 사상 중, 가장 논리적이고 역설적인 서술이 많은 텍스트가 <장자>인 듯합니다.


<장자> '내편'에서는 주로 장주가 직접적으로 말하지만, '외편'에서는 논리를 중시하는 명가의 공손룡과 혜시(장주의 친구)가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외편을 읽는 재미가 내편을 읽는 재미보다 낫습니다.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대화가 많습니다. 대구로 되어 있어 주거니 받거니 합니다.  '외편'도 좀 들여다 보겠습니다. 


혜시 : 하늘은 땅만큼 낮고, 산은 못만큼 낮다.

[이것은 사물과 그 속성을 포괄하는 논리적 문제이다. 우리는 ‘하늘’과 ‘산’이 높은 것을 가리킨다고 생각하지만, 혜시는 산의 저상 아래로 보이는 구름의 경우와 산의 정상에 높이 있는 못의 경우를 예로 든다.]

장자 : 이 세상에서 털 끝보다 더 큰 것은 없으며, 태산은 작다.

[이 역설은 예상되는 표준에서 벗어나는 특이한 예외를 인용함으로써 위의 혜시의 경우가 아닌, 만물의 ‘동일성과 나눌 수 없음’의 차원인 형이상학적인 해결을 보여주고 있다.]


혜시 : 정오의 해는 지는 해이고, 태어난 생명체는 죽어가는 생명체이다.

장자 : 생명이 있는 곳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다.


이 대화에서 보듯이 혜시는 장주에게 먼저 논리적인 공격을 가하지만 번번이 장주의 논리에 결정타를 먹고 사라집니다. '외편'을 읽어 나가다보면 혜시와 공손룡은 예외 없이 위의 대화처럼 장주에게 논리적으로 무릎을 꿇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매우 못마땅한 부분이 있습니다. 본 페이퍼를 쓰는 이유도 바로 이 부분에 어떻게든 딴지를 걸어보고 싶어서 입니다. (하아~ 서설이 너무 길었습니다.) <장자>를 읽다보면 '외편'의 '추수편'에서 다음의 유명한 대화를 만나볼 수 있습니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제가 시나리오 형식으로 편집해 봤습니다.)


장주(장자)와 혜시(혜자)가 호수의 다리위에서 한가하게 거닐고 있었다.

장주 : (물고기를 보면서) 하, 참 그놈들 한가롭게도 헤엄치고 있네. 이게 물고기의 즐거움이렸다.

(이 말을 들은 혜시)

혜시 : 자네는 물고기가 아닌데 어떻게 물고기가 즐겁다는 것을 안다는 말인가?

장주 : 자네는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내가 물고기가 즐겁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는 말인가?

혜시 : 나는 장주, 그대가 아니니까 물론 자네를 알지 못하네. 마찬가지로 자네는 물고기가 아니니까 물고기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은 확실한 거라네.


이 대목은 <장자>라는 타이틀을 달고 출간된 거의 모든 책에서 다음의 내용과 동일하게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장주가 말하기를 “자, 이야기를 처음으로 되돌려 살펴보세. 자네는 나에게 ‘자네가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에 대해서 아는가?’ 라고 물었는데, 그것은 그대가 이미 나의 앎에 대해서 알고 있기 때문에 나에게 그렇게 물은 것이라네. 나 역시 호수 다리 위에서 물고기의 즐거워함에 대해서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이것이 물고기의 즐거움’이라고) 말한 것이네” 라고 하였다.」


이에 대한 주석 또한 천편일률적으로 비슷합니다. <장자> 해설서 중에서 가장 빼어난 책 중 하나라고 하는 박이문 교수의 <노장사상>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박이문 교수는 책에서 "장주가 혜시의 논변에 자가당착(自家撞着)의 요소가 있다는 것을 이미 간파했다"라고 몰아갑니다. 계속된 논의를 따라가 보면, 혜시의 “사람은 자기가 아닌 타자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나는 장주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장주에 대해서 알 수가 없다. 따라서 ‘장주도 자기가 아닌 물고기에 대해서 알 수 없다’는 것을 나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부분이 모순을 범했다는 겁니다.

 

모순을 범했기에 장주는 혜시의 모순을 딛고 서서 자기주장의 논리적 타당성을 변증 설파한 것이라고 하면서 박이문 교수는 장주의 변증 설파 부분(장주의 마지막 대화)으로 글을 맺고 있습니다.

“자네가 처음에 나에게 ‘자네가... 어떻게 물고기가 즐겁다는 것을 안다는 말인가?’ 라고 물은 것은, 자기가 아닌 나, 즉 타자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나 역시 호수 다리 위에서 혜자, 자네의 전제대로 타자인 물고기가 한가롭게 노닐고 있는 것을 보고 물고기의 즐거움을 안 것이다.” 



아, 그런데 이 대화의 이러한 결론에 저는 도저히 동의 할 수 없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혜시는 장주에게 논리적으로 완승을 거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혜시는 논리학파로서 순수하게 장자의 말에 논리적인 모순점을 지적하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위에서 장주의 마지막 말은 혜시의 날카로운 반격에 관계없는 제3의 요소를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자네가 어떻게 물고기가 즐겁다는 것을 안다는 말인가?'라고 했지만 그것은 이미 내가 안다는 것을 알고서 그렇게 물은 것이라네.”라는 장주의 말은 논리를 넘은 말입니다.

 

장주가 처음 “하, 참 그놈들 한가롭게도 헤엄치고 있네. 이게 물고기의 즐거움이렸다.”라고 말한 것은 이미 물고기의 즐거움을 안다는 전제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논리를 중시한 혜시는 이를 재빨리 캐치해서 이 숨어 있는 전제를 공격한 것입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다시 돌아가 이 문제를 혜시에게 환기 시키는 것은 (논리적으로 볼 때) 정말 가당치 않습니다. 물고기의 즐거움을 안 것처럼 말한 사람은 장주 자신입니다. 혜시가 문제 삼은 것은 이미 ‘네가 물고기가 아닌데,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느냐’이지,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 장주를 알고서  혜시가 그렇게 물은 것이 아닙니다. (혜시는 논리학파이기에 너무도 당연한 문제제기 였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자> '추수편'의 이 대화는 형식논리학적 관점에서 다시 조명해 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이상, 허접한 야무의 딴지 걸기였습니다.

 

[덧]

* <장자> 텍스트의 특유한 논리 구조는 이미 여러 편의 논문들에서 다루어져 온 내용입니다. 동양 철학 텍스트에서 서구 논리학에 가장 근접한 사유 구조를 보이는 것은 공손룡을 위시한 '명가'학파였습니다. 하지만 <장자>텍스트 속의 논리 구조는 텍스트가 구성될 시 불교 철학의 사유 구조가 상당부분 흡수되어 편집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자백가 중 독특한 논리구조를 보여주는 텍스트가 됐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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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3-11-13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용해주신 문장만으로도 읽기에 좋습니다. 행복은 텅 빈 곳에 머무른다는 말, 이것과 저것에 대한 사유 등 덧붙여주셨듯 불교철학과 통하네요. 또 한가지 즐거운 자극 받고 그냥 가려다 오늘은 몇 자 남겨요. ㅎㅎ 어제 근교 유명한 절 입구 단풍길을 걸었는데 이것이 있어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어 이것이 있다,라는 글이 새겨진 돌이 세워져있더군요. 장자 사상과 통하나요? 그곳은 내원사 들목이었습니다. 바람에 팔랑대는 나뭇잎이 어찌 황홀한지 한참 올려다보았어요. 막바지 가을 즐거이 보내시길요.^^

yamoo 2013-11-17 16:23   좋아요 0 | URL
장자에는 불교철학과 통하는 논리과 꽤 되는 것 같아요. 칸트를 읽으신 다음 <장자>를 읽어보세요. 우화형식으로 돼 있어서 쉽게 읽으실 수 있습니다. 특히 유재근 씨의 장자 편역이 아주 쉽습니다. (물론 번역에 대한 비판은 있지만 제일 쉬운 거 같다는^^;;)

프레이야님두 막바지 가을 만끽하시길!^^

곰곰생각하는발 2013-11-14 0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항상 동양철학 고전 읽기에 실패했는데 장자'로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ㅏ.
전 서양철학서보다 동양고전이 정말 어렵더라고요. < 벽암록 > 읽다가 뭔 소리인지도 잘 모르겠고. 자괴감만 들고... ㅎㅎㅎ. 장자 읽어봐야겠군요...

yamoo 2013-11-17 16:27   좋아요 0 | URL
헛! 의외네요~ 곰발님께서 동양 고전 읽기에 실패하셨다니..
흠...<벽암록>은 좀 어렵지요. <근사록>은 어떠신지...

어찌되었든 곰발님께서 동양고전 철학을 다시 읽으신다면 <제자백가>부터 읽으시길 강력히 추천드립니다~ 아님, <채근담>도 좋구요...

<장자>는 뭐, 원전이 아닌 윤재근 씨 편역을 읽으면 아주 쉽게 읽으실 수 있을 겁니다~ 곰곰님의 서재에서 동양철학 고전에 대한 페이퍼도 볼 수 있기를 고대합니다!ㅎ

페크(pek0501) 2013-11-15 0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예전에 장자의 글을 인용한 적이 있어요. 복사 붙이기 하면 이렇게...

물고기가 정말 즐거운 것인지 장자가 모르는 것처럼 혜자 역시 타인인 장자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게 없다. 사실 우리는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이 즐겁게 노는 것인지, 좋아하던 짝과 헤어져 슬퍼서 이리 저리 방황하는 것인지, 먹이를 먹고 난 뒤에 소화가 잘 되지 않아 운동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저 우리 맘대로 해석할 뿐이다. 어디 물고기뿐이랴, 참새가 짹짹거리는 것도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 새들의 소리인지, 짐작은 할 수 있어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이에 비해 서로 언어로써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사람’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물고기’나 ‘참새’에 비해 훨씬 쉬워 보인다. 그런데 사실은 연인의 관계에서 서로의 진실을 알기란 헤엄치는 물고기나 짹짹거리는 참새의 기분을 헤아리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

오랜만에 <장자>를 보니 반갑네요. 님의 글을 읽으니 헷갈립니다. ㅋ

yamoo 2013-11-17 16:35   좋아요 0 | URL
인용하신 글은 아마도 장자의 해설서 내용과 비슷합니다. 네~ 대부분 비슷해요.
제가 문제제기 한 것은 형식논리학적인 시각에서 혜시의 비판은 무척 타당해 보인다는 거에요.
물론 장주의 마지막 말로 인해 논리적 딜레마를 벗어나는 철학의 묘미를 맛볼 수도 있지만 혜시의 문제제기는 자가당착이 아닌 장주 말의 모순점을 정확히 짚었다는 데 그 가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인용해 주신 글과 덧붙이신 글 감사합니다. 제가 인용한 추수편 글과 같이 보니, 아주 의미심장하군요!^^

oren 2013-11-15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amoo님의 글을 읽으니 철학자다운 고민 한 대목이 느껴지는 듯합니다. 저 또한 이 글을 읽고 yamoo님의 '딴지 걸기'에 대해 공감은 할 수 있으나 거기에 제 자신의 '의견'을 적을 엄두는 차마 내지 못하겠군요. 결국 어떤 사물을 어떻게 인식하느냐 하는 '인식이유'가 참 어려운 철학적 문제이긴 하다는 생각을 다시금 해보게 되고, (뜬금없이) 쇼펜하우어가 '데카르트의 혼동'과 '스피노자의 기교'를 비판한 대목을 떠올려 보게도 됩니다.

* * *

데카르트의 혼동

데카르트는 《제일 철학에 관한 성찰》의 ' 두 번째 반박에 대한 답변', 공리 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원인에 의해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이 허용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신에게조차 이 물음이 허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이 존재하기 위해 어떤 원인을 요구하기 때문이 아니라 신의 본성인 무한성이 곧 원인 혹은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은 존재하기 위해 아무런 원인도 요구하지 않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신의 무한성을 신이 아무런 원인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도출하는 인식이유라고 말했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이 둘을 섞었고, 그래서 우리는 그가 원인과 인식이유 사이에 놓여 있는 큰 차이를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챈다. 그러나 데카르트가 이 둘을 혼동한 것은 원래 그 자신이 의도한 바이다. 말하자면 그는 인과법칙이 원인을 요구하는 여기서 원인 대신에 인식이유를 슬쩍 써넣는다. 왜냐하면 인식이유는 원인이 그렇듯이 또다시 계속 찾아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데카르트는 바로 이 공리를 통해 신의 현존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의 길을 개척한다. (25쪽∼26쪽)

* * *

스피노자의 기교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는 그 사물을 존재하게 하는 특정한 원인이 있다는 사실이 주목되어야 한다. 그리고 어떤 사물을 존재하게 하는 원인은 존재하는 사물의 고유한 본성과 정의 안에 포함되어 있거나, (그 원인은 그 사물이 존재하려는 본질 자체에 속하므로) 사물의 외부에 주어져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주목되어야 한다."(《에티카》1부 정리8 주석2). 후자의 경우에서 스피노자는 다음에 밝혀지듯이 하나의 작용하는 원인을 의미한다. 반면 전자의 경우에서 그는 단지 하나의 인식이유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는 이 둘을 동일시하고 이를 통해 신을 세계와 동일시하려는 자신의 의도를 위한 사전작업을 한다. 하나의 주어진 개념의 내부에 놓여 있는 하나의 인식이유를 외부에서 작용하는 원인과 혼동하고 이 원인과 동등하게 만드는 것은 언제나 스피노자의 기교이다. 그리고 그는 이 기교를 데카르트에게서 배웠다. (29쪽∼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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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말

말하자면 데카르트가 오직 관념적으로, 오직 주관적으로, 즉 오직 우리를 위해, 오직 인식을 목적으로, 즉 신의 현존에 대한 증명을 목적으로 제시한 것을 스피노자는 실재적이고 객관적으로 신과 세계의 현실적인 관계로서 받아들였다. 데카르트에 있어서는 신의 개념 안에 존재가 놓여 있고, 따라서 이것이 신의 현실적인 현존을 위한 논증이 된다. 스피노자에 있어서 신은 그 자체로 세계 안에 숨어 있다. 그에 따라 데카르트에 있어서 단순한 인식이유였던 것을 스피노자는 실재이유로 만든다. 데카르트는 존재론적 증명에서 신의 본질로부터 신의 존재가 도출된다고 가르쳤고, 스피노자는 그것으로부터 자기원인을 만들고 그와 함께 대담하게 자신의 윤리학을 시작한다. "'자기원인'으로서 나는 그것의 본질이 현존을 자신 안에 포함하는 것을 이해한다." 그는 "존재는 사물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고 소리쳐 경고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인식이유와 원인에 대한 가장 명백한 혼동을 본다. 그리고 신스피노자주의자들(셸링주의자, 헤겔주의자 등등)이 언어를 사유로 보는 것에 익숙하여 이 자기원인에 대한 경건한 경탄에 자주 몰입한다면, 나로서는 '자기원인'에서 단지 형용모순을, 이후의 것인 이전의 것을, 무한한 인과 고리를 절단하는 거만한 권력의 명령을 볼 뿐이다. 자기원인은 끈으로 고정시킨 자기 머리 위의 모자에 브로치를 달기에는 손이 충분히 높이 닿지 않아서 의자 위로 올라간 그 오스트리아인과 유사하다. 자기원인의 적절한 상징은 바로 뮌히하우젠이다. 그는 물에 가라앉는 자신의 말을 다리로 꼭 껴안고 머리 위에서 앞으로 향한 자신의 땋은 머리로 자신의 말과 함께 공중으로 끌어 당기면서 그 밑에 "자기원인 Causa sui"이라고 서명했다. (31쪽∼32쪽)

- 쇼펜하우어,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中에서

yamoo 2013-11-17 16:40   좋아요 0 | URL
철학자 다운 고민이라니요..@_@ 그냥 객기지요. 객기..^^;; 천편일률적인 내용에 딴지를 걸어보고 싶어 페이퍼를 썼고, 또 형식논리학적으로 생각해볼 꺼리가 충분한데 이상하게 논의가 없는게 아쉬워 그냥 문제제기를 해 본 거에요.

인용해 주신 글은 나남출판사의 김미영 역자본으로 읽어봤어요~ 다시 오렌님에 의해 갈무리된 내용을 보니 새롭게 다가옵니다. 멋진 인용 감사합니다.

아, 근데, 오렌님께서는 책을 읽고 인상깊었던 부분을 타이핑해서 갈무리 해 놓는 가 봅니다. 전 너무 갤러서 엄두를 못내는데....존경스럽다는^^
 

하이텔 시절까지만해도 돈을 주고 신문을 사야 좋아하는 신문사 주필의 글을 볼 수 있었다. 중앙일보 강위석님의 글 때문에 중앙일보를 열독할 정도였다. 

 

그런데 인터넷 시대가 가속화되다 보니 이제는 각 신문사의 대표적인 칼럼들도 공짜로 보는 시대가 됐다.(인터텟시대라고 하던 99년만 하더라도 신문사 칼럼을 무료로 볼 수는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칼럼자 별로 폴더화하여 차곡차곡 파일로 스크랩할 수 있기까지 하다.

 

더군다나 각 신문사 사이트에 접속하면 외부 칼럼 기고자까지 이름순으로 파일링화 돼있어 언제든지 놓친 글들을 찾아 읽을 수가 있다. 와~ 감탄사가 나올만 하다. 이렇게 편리할 수가!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신문사 사이트를 서핑하다 보면 참으로 놀라운 걸 발견한다. 우리시대 내로라하는 논객들의 글과 정성들인 기획기사를 무료로 검색해서 읽을 수 있다는 사실(앞으로는 어떻게 될 지 모르겠지만 현재까지는 서핑자에게 공짜다).

 

그런 글들은 돈을 주고 살 정도로 아깝지 않은데 말이다(사실 오프라인 신문이나 잡지는 돈을 주고 구독해야 한다. 하지만 동일한 기사라 하더라도 온라인 기사는 무료다). 한 신문사의 주간지는 명품 기사로 소문이 자자해 논술 교재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 모든 기사가 온라인 상에서 무료다!

 

<블로그가 세상을 바꾼다>라는 책에 보면, 이제는 글로써 돈을 버는 시대는 지나갔다고 한다. 1인 매체 시대를 맞아 전문가 뺨치는 아마추어 글들이 쏟아져 나와 글로써 돈 버는 시대가 갔다는 것이다. 아주 수긍할 만한 말이다. 이 곳 알라딘에서도 이런 현상을 쉽게 목도할 수 있으니.

 

특히 알라딘 서재는 책을 내는 전문 작가들이 꽤 된다. 본래 직업이 교수인 분들과 작가인 분들이 이곳에 블로그를 개설해 글을 올리는 분들도 있고, 이곳에서 좋은 글들을 올려 나중에 책으로 출간하는 분들도 있다. 뭐든, 알라딘 서재에 올라오는 글들은 모두 무료로 볼 수 있다는 것.

 

돈을 주고서라도 꼭 보고 싶은 글들이 이곳 알라딘 서재에는 꽤 넘쳐난다. 그런데 무료이니 정말 아직까지는 횡재라 할만하다. (타 포털처럼 복사방지 기능도 없다!) 이 좋은 시절이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아주 좋은 글을 무료로 읽는 즐거움은 이전에 칼럼을 읽는 재미와는 비교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스마트 폰으로 언제 어디서든지 알라딘에 접속하여 이웃 서재 글을 읽으면서 미친듯이 웃으면서 글을 읽을 수 있으니 말이다. 이 뿐인가. 어떤 광고문구도 나에게 책을 사라고 유혹하지 못한다. 하지만 알라디너의 리뷰들은 한 순간에 책 구매를 종용하고, 사야할 리스트까지 구성해야 할 정도이다.

 

뭐, 지금까지 많이도 주절거렸지만, 요점은 하나다. 값어치 있는 글들이 온라인 상의 도처에 있다는 것~


얼마전(그치만 좀 됐다) 스티븐 킹이 인터넷으로 소설을 발표하여 공전의 히트를 쳤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소설은 유료였다. 무료인터넷시대에 킹은 인터넷으로 소설을 발표해 일종의 도박을 벌였지만, 상당한 손실을 보았다고 전해진다. 왜냐하면 책을 다운받은 사람들이 비용을 끝내 지불하지 않았다고. (역시 인터넷을 사용자들은 무료에 길들여 있다!)

 

그런데, 한 신문사에서 주관하는 어느 문학상 1등 당첨금은 1억원 이었다. 그 1억원 당선작들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수상작가들은 일순간에 유명해 졌다. 무명작가일수록 이 상의 위력은 상당했다. 인세 수입도 상당할 정로라니. 흠, 인터넷 시대에도 여전히 글을 써서 막대한 돈을 버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부인할 수가 없는 듯하다.

 

그래서 <블로그가 세상을 바꾼다>는 전망은 아직까지는 완전 유효하지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로그를 돌아다니다 보면 정말 글 잘 쓰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실감한다. 무료로 공개되는 전문가 뺨치는 글들을 볼 때면(아니 어떤 글들은 전문 작가 글을 넘어서는 것도 있다!) 책에서 주장하는 내용에 수긍이 가는 것 또한 사실이다. 어쨋거나 좋은 글을 마음껏 무료로 볼 수 있는 특권이 생긴 건 사실이니까.


그런데 이상한 건 여전히 책 값은 점점 높아만 간다. 물론 그만한 가치가 있는 기획 출판물들(지금까지 번역되지 않은 유명 원저)은 이해가 간다. 어떤 번역 책은 번역을 한 분의 노고에 경외감마저 느끼게 한다. (특히 슘페터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나 움베르토 에코의 저작들) 책 뒤의 가격표에 표시된 금액을 제시할 가치가 충분하다.

 

 

 

 

 

 

 

하지만 이른바 소설책들이 그리 높은 가격에 서점에 진열되어 있는 걸 보면 참을 수가 없다(소설을 격하시킬 의도는 전혀 없다). 이름도 듣도 보도 못한 작가의 소설들이 예쁜 책 표지에 싸여 진열대에 꽂혀있다. 가격은 1만원을 가볍게 넘는다.

 

대충 서서 읽어보아도 싸구려 사랑타령 아니면 개인적 얘기 인 걸 알게 된다. 이런 걸 1만원주고 살 사람이 있을까 하고 서점에 물어보면 꽤 잘나간다는 답변이 들려온다. 정말 지루하고 재미없으며 진부한데도 말이다!

 

대형 서점 문학 코너에 가 보면, 문단에 이름을 건 중견 작가와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신인작가 그리고 기라성 같은 작가들의 소설들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다. 그리고 같은 가격대에 팔리고 있다. 문단에서 검증된 분들의 작품들은 어느 정도 그 가격을 달고 있는 게 이해가 간다.

 

하지만 신인작가들의 문단 등단을 위한 수상작이 고가에 책정된다는 게 영~ 께름칙하다. 어떻게 그들의 글이 기라성 같은 분들의 글과 동등한 가격에 책정되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김애란의 작과 윤흥길의 작이 똑같은 가격을 달고 있다!) 잘 모르는 신인 작가들의 소설을 도서관에서 대여하여 몇 번 읽어봤는데, 영~ 신통치 않다. 젊은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참신성하고는 거리가 멀다.

 

 

 

 

 

 

 

그런 작가들이 쓴 300여 페이지 안쪽의 글이 과연 1만원의 가치가 있는 것인지 검증해 보고 싶어진다.(그런데 누가 검증하지?) 우리시대 기라성 같은 논객들과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게 하는 글, 그리고 통념을 깨뜨리는 촌철살인 같은 글은 무료인데, 왜 그저그런(?) 작가의 글은 무료가 아닐까? 분량 차이인가? 문학성 차이인가? 모르겠다.

 

분명한건 이' 글의 세계'에서 만큼은 경제학 법칙인 ‘가격의 법칙’과 ‘수요의 법칙’이 전혀 통용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어떻게 동일하지 않은 품질의 ‘소설 상품’이 동일한 가격에 팔리며, 세상을 비판하고 진단하는 뛰어난 글이 무료로 통용될 수 있단 말인가.


이 시대에 글의 값은 과연 정당하게 책정되는 것일까? 가격은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다고 수많은 경제 교과서에 서술되어 있던데, 왜 글의 시장만은 예외일까. 문학이라서? 인간의 영혼을 다루는 소설이라서?

 

그렇다면 가격을 달고 다른 상품과 똑같이 바코드가 달려 팔려나가는 이유는 뭐지? 이 시대에 문학도 분명한 상품이다. 그런데, 바로 그 상품 가격이 시장의 법칙을 따르지 않고 있다. 수요가 몰리는 책은 가격이 오르지도 않고 수요가 없는 책이 가격이 떨어지지도 않는다. (경쟁력 없는 책은 일찍 절판되는 정도??) 가치의 경중도 없이 동일한 가격에 팔리고 있다. 그리고 온라인이라는 한쪽에서는 좋은 글들이 무료로 퍼져가고 있다. 이 어찌 기막힌 역설이 아닐까.


내가 지금 끄적거리고 있는 이 글도 얼마나 하찮은지 모르겠다. '단상들'이라 글에 철판을 깔고 쓸 수 있어 다행이다.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을 읽으면서 문득 든 생각이, 신인 작가 소설들이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보다 더 비싼 값에 책정 돼 있다는 사실에 갑자기 울화가 치밀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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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09-24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슘페터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는 최근에 '빛나는 여러 훈장들까지 모조리 반납한' 어느 전직 대톨령이 '서슬 퍼렇게' 굴던 시절에 (삼성출판사 판으로) 읽었었는데, 그 때 정말 '이런 책도 다 있구나' 싶은 '호된 충격'을 주체하지 못했던 기억이 새삼 떠오르네요.

그 당시만 하더라도 슘페터의 책들을 모조리 읽어봐야 겠다는 결심으로 '불끈' 했었는데, 그 뒤로 그를 오랫동안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yamoo님 덕분에 가까스로 알게 되는군요.

yamoo 2013-09-25 13:51   좋아요 0 | URL
아마도 고전을 즐겨 읽으시던 오렌님께서는 이미 이 명저를 읽어보셨겠지요. 다만 세월이 흘러 기억에서 잊혀졌을 뿐. 근데, 그 생각을 끄집어 내게 핸 준게 제 글이 됐다는, 다행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저는 슘페터의 주저인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를 학부 2학년때 친구와 같이 원서로 읽어나간적이 있습니다. 헌데, 문장들이 너무 난삽하고 어려워서 중간까지 읽다가 포기했습니다. 문장 하나가 막 10줄 이상....저도 삼성출판사본으로 읽었는데, 역자였던 이상구 박사님이 그렇게도 존경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분이 번역해서 새로운 번역본이 나왔는데, 전 엔날판에 더 애정이 있습니다.
그의 주저가 좀 늦게 번역되어 나온 지라 <경제발전의 이론>은 2011년에야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근데, 번역이 그리 좋지 않더군요. 어쨋든, 제글에서 슘페터의 옛 흔적을 찾으셨다니, 정말 다행이어요^^

2013-09-25 0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9-25 13: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3-09-25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격은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다고 수많은 경제 교과서에 서술되어 있던데, 왜 글의 시장만은 예외일까."
- 정말 그러네요. 그런데 이 생각을 해 보지 못했어요.ㅋ

그런데 만약 이런 식으로 책값이 매겨진다면 책을 내는 사람이 많이 떨리겠네요.
그래서 자신 있는 사람들만이 책을 내게 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게 좋은 현상이 될지, 나쁜 현상이 될지 모르겠네요.
자신감과 역량은 꼭 비례하는 것은 아니어서 말이죠.

yamoo 2013-09-25 13:57   좋아요 0 | URL
저두 잘 몰라요~ㅎㅎ 그게 좋은 현상이 될지 나쁜 현상이 될지..
베르그손은 항상 자신있는 책만 출판했다해요.

단지, 저는 요즘 젊은 한국 작가들의 소설에 실망하여 이런 투덜거림을 해봅니다.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보다 더 비싼 한국 소설들의 가격은 확실히 뭔가 문제가 있는 듯한데, 그 문제가 뭔지 확실하게 말할 수가 없어요. 책가격과 글 가격에 대한 어떤교통정리가 필요할듯 하다는 생각이 나서요. 근데, 정리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지 감히 예측을 할 수가 없네요. ^^;;

페크(pek0501) 2013-09-25 14:05   좋아요 0 | URL
비싼 한국 소설들의 가격은 확실히 뭔가 문제가 있는 듯한데, - 에 동의합니다.
저도 그런 생각이 든 적 있는지라... ㅋ
 

1. 오늘 지하철 무인 검색대에서 우연히 뉴스를 넘기다가 내년도 대학입시 뉴스를 접하게 되었다. 수능에서 A/B형이 없어지고, 한국사가 필수과목이 된다고..

아, 도대체 이 나라 교육부는 뭘하는 집단인지 모르겠다. 교육은 인륜지대사라는데...그 일은 너무도 쉽게 해마다 전 뒤집 홀랑홀랑 뒤집어진다.

수능 문제를 A/B형으로 출제한다는 방침은 어떤 놈 머리에서 나왔는지 정말 궁금하다. 1년만에 없어지는 것이니, 실패한 정책인데...이를 입안한 넘과 결정한 넘은 실패한 입시정책을 내놓고도 버젖히 고위 교육공무원이라고 목에 힘주고 다니겠지. 정말 파렴치한 놈이다. 자기의 실수로 수십만명의 입시생들이 안할 고생을 사서 하고 있으니~

정책실명제가 실시 됐다고 하는데, 허울 좋은 명분인듯..

아, 정말 한국에서 대학가는 학생들이 불쌍하다.

 

2. 알라딘에 숨은 고수들이 많은 지 진작에 알았지만 또 한명의 고수를 발견하여 즐거움 반 놀라움 반인 상태다. 글이 많이 없어 알라딘에 둥지를 튼지 얼마 안된 분 같은데, 이 분은 정말 모르는 책이 업는 듯하다. 책도 엄청 많아 옥탑방에 까지 책을 보관해 놓는 듯..

얼마나 박식하신 지 포스팅 해 놓는 글은 거의 찜을 하게 된다. 이분 서재에 가면 듣도 보도 못한 책들이 주르륵 나열이 되어있는데, 페이퍼를 읽고 있노라면 책을 좋아하고 모은다는 내가 그렇게도 하찮게 여겨진다. 정말 알라딘에는 작가, 교수, 장서가들이 곳곳에 있다. 뭘 함부로 말하고 내뱉기가 너무도 조심스러워지는 공간이다.

 

3. 집에서 나는 '지랄'로 통한다. 무슨 말을 못하겠다. 말만하면 부모님으로부터 '지랄하고 자빠졌네!'라는 말을 듣는다. 헐~ 맨날 들어서 내 아호가 된 듯하다. 천안함 사건이 조작됐다고 하는데...하면 지랄!, 국정원이 정치에 개입한 정황이 너무도 명백하니 이 나라의 정치가 후퇴하는 거 같다는 말을 해도 지랄! 교회에 가기 싫다고 해도 지랄! 박근혜의 실정을 지적해도 지랄! 난 뭘 말해도 '지랄맞은 녀석'이라는 비아냥을 듣고 산다. 음...난 지랄하다 죽을 팔자인가 부다..

 

4. 요즘 컬렉션화하는 책들이 늘고 있다. 정말 이 병을 어이 할 지..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르네상스>를 보니, 욕심이 생기는 거다. <30초 철학읽기>를 보니, 30초 시리즈를 또 찾게 되고, <클레시커 신화>를 손에 넣고 보니 또 컬렉션하고 싶다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이럼 안되는데...ㅜㅜ

 

 

 

 

 

 

 

 

 

5. 요즘 도서관엘 자주 간다. 보니, 김병완이라는 작가가 저자 직강을 하나보다. 궁금해서 검색해 보니, 삼성전자를 다니다가 나와 전업작가가 된 모양인데 도서관에서 기적을 만났단다. 도서관에서 1만권인가를 읽었다는데....어떤 책을 읽고 어떤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이라도 해 봐야 겠다. 검색해 보니, 10권도 넘는 책을 썼다. 흠...난 도서관하고 친해서 자주 도서관을 이용하는데, 난 왜 도서관에서 기적을 만나지 못했는지 참으로 의문이 들었다. 저자의 책을 읽고 심한 자괴감이나 들지 않으면 좋겠다.

 

 

 

 

 

 

 

 

 

 

6. 갑자기 드는 생각이....내가 참 오래도 산다는 느낌이다. 나는 빨리 생을 마감하고 싶은데, 신의 뜻은 그런 게 아닌가보다. 하루하루 사는 건 그래도 나름 재밌는데, 내일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많이 무섭다. 아마도 이상의 작품을 본게 부작용으로 작용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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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싸리 2013-08-27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누구인지 알려주시면 감사!
그래도 오래 사셔야죠. 세상엔 수집해야할 책이 무궁무진 하잖아요. 읽을 책도 그렇고요. ㅎㅎ

yamoo 2013-08-28 08:41   좋아요 0 | URL
그렇겠지요..ㅎ 수집해야 할 책과 읽어야 할 책 때문에~^^
감사합니당~~~

곰곰생각하는발 2013-08-27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생각해도 알라딘은 고수가 많습니다. 전 철새라서 각종 인터넷 서점을 다 돌아다녔으나
그나마 리뷰가 가장 알찬 곳은 여기더라고요. 워낙 유명하신 분들도 많고..
대부분 그분들 평가 보고 책을 고르고 있습니다.

yamoo 2013-08-28 08:43   좋아요 0 | URL
음...전 겔러서 각종 인터넷 서점을 돌아다녀 리뷰를 읽지 않습니다. 오~곰발님으로부터 좋은 정보를 얻네요. 이곳의 리뷰가 가장 알차다니...우왕~~~ 저두 여기 리뷰만 보고 책을 골라요...다른 덴 어떤 리뷰가 있는지 몰룬다는...
흠...리뷰 전문 인터넷 서점 알라딘 정도 되겠는데요~ㅎ

야클 2013-08-27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초절정 고수가 누구신지 저도 참 궁금하네요.
무협지에서는 무림대회가 열리면 끝물 쯤에 나타나 천 년 전에 실전된 무공을 펼치며 고수의 실체를 드러내는데요... 그 고수가 은거해있는 서재동굴은 어딜까요? ㅋㅋ

yamoo 2013-08-28 08:49   좋아요 0 | URL
그쵸....무림대회에서 끝에 쯤에 홀로 나타나 실전 비급 무공을 실현하고 유유히 사라지는..ㅎㅎ 천룡팔부의 단예 육맥신검..영웅문 사조영웅전 장무기 건곤대나이신법, 소오강호 영호충의 독고구검 등이 야클님께서 예를 든 초절정 무림고수가 아닐까 합니다~ㅎㅎ

2013-08-29 15: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9-02 1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3-09-01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2번 동감.
4번도 동감.
6번은 반대. 저는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어요. 가늘고 길게... 킥킥~~

yamoo 2013-09-02 12:00   좋아요 0 | URL
아....그러시군요. 페크님은 건강하게 오래오래~~~

얼릉 문제를 해결하고 맘을 정리하셔서 조속히 서재에 복귀를 해 주시길!

사마천 2013-09-18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amoo님께 선물을 하나 드리려고 합니다. http://www.ustream.tv/recorded/35294179
김병완 저자가 북포럼에서 이야기한 토크입니다. ^^ 날 목소리, 생얼굴을 보시면서 즐거운 시간 되시기를..
 

지난 주 카페에서 있었던 일이다. 신림역 모 카페에서 빙수를 먹고 있었는데, 나와 같은 교회를 다니는 한 무리의 고등학생들이 와서 앉았다.

 

교회 티셔츠를 입은 학생 중 하나가 아는 척을 한다. 낯이 익은 학생이라 반갑게 인사를 받아줬다.

 

그 학생 보고 방학이 끝나 아쉽겠다고 하니, 그렇다고. 그러면서 그래도 오늘(8월 15일) 노는 날이라 좋다고. 그래서 오늘 왜 노는 날인지 물어보니, 모른단다~ 옆에 있는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역시 모르는 표정. 그냥 쳐다만본다.

 

내가 정말 모르냐고 묻자, 한 아이만 빼고 모두 모른다는 대답. 광복절이라고 대답한 학생에게 그 날의 의미를 물으니 해방된 날이라는 건 아는데, 그게 몇 년도 인지는 전혀 모른다.

 

어익쿠야~! 그래서 노파심에 4대 국경일은 아냐고 하니, 아는 학생이 아무도 없었다. 5명 모두 몰랐다. 그러면서 자기네들은 국사 공부를 하지 않아 그런 거는 전혀 모른다고.

 

일본에서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 우기는 이유도 몰랐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언제 일어났는지 전혀 몰랐으며(심지어 삼국시대라는 대답도 나옴), 6,25가 언제인지, 왜 남북한이 나뉘어졌는지 모르고 있었다.

 

무인시대가 언제인지, 조선이 몇 년간 지속 됐는지 몰랐고, 심지어 어떤 학생은 학원에서 조선 왕의 계보를 7명만 알려줘서 태종태세문단세 까지만 암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은 7대왕에서 끝났냐고 물었다.

 

이 어처구니 없는 물음에 참 난감했다. 학생들은 모두 고2~고3 학생들이다. 고3 학생 두명은 내신 2등급에 서울에 있는 대학을 목표로 공부한단다. 고2들도 모두 범생이들 같다. 그런데도 한국사 지식은 초등학교 수준도 안 된다.

 

정말 기가 찼다. 대통령도 노무현 이후만 알고 있었다. 4,19혁명이 1960년도라고 하니 그렇게 오래된 이야기냐고 놀라는 표정들.

 

난, 지금 그들의 처음 듣는 다는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학교 교과서 이외에 아무도 가르쳐 주는 사람들이 없고, 학교에서도 수업 듣기 싫으면 안들어서 모른다고. 천진난만하게 말하는 그 학생들에게 따끔한 충고 한 마디도 해 줄 수 없었다.

 

뭐, 내년부터 한국사 수업을 강화하겠다고 하는 소리를 뉴스에서 듣기는 했지만, 학생들의 기본 역사 상식이 이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설대를 준비하는 애들 빼고는 자기 학교 학생들이 자기들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라는 말은 결국 역사 교육이 잘못됐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자기 나라 역사가 단지 암기할 게 많고 지루하다는 이유만으로 교육에서 외면 받는 실상은 우리 기성세대들이 후세를 잘못 가르친 탓이다.

 

교육개혁이라고 해마다 뜯어 고치는 교육정책이 결국은 역사의식도 없는 학생들을 마구 양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30대가 되고 40대가 되는 때를 생각하니 참으로 암담하다.

 

국영수만 잘하는 기능인이 돼서 돈 잘 벌고 편안하게 사는 것만 암암리에 가르치고 있는 현실이니 더 말해서 뭘할까. 연예인, 판검사, 의사 등이 되는 걸 인생목표로 하는 학생들에게 역사는 안중에 없는 과목일 것이다.

 

타치바다 타카시는 오래 전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라는 책에서 교양과 기본지식이 없는 도쿄생들을 '바보'라고 질타했다.

 

하지만 우리나라 학생들은 일본의 학생들보다 더 바보일 거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적어도 일본의 고등학생들은 독도가 타케시마라고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전부 배워 알고 있으니 말이다. (사실 독도의 실상을 아는 건 한국 근대사를 아는 하나의 큰 축이다)

 

4대 국경일도, 그리고 4,19 혁명도 모르는 고등학생들을 키운 건 누구의 책임인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기본적인 개념도 모르고 온통 모든 시간을 영어와 수학 공부에 열을 올리는 입시생들에게 어느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을까.

 

그들을 그렇게 키운 건 바로 부모세대다.  반성하고 또 반성해야 한다고 본다. 사태는 말할 수 없이 심각하다. 진보와 보수 진영의 책임론을 떠나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정말로 머리를 맞대고 대안을 세울 때인 듯하다.

 

정말 우리 나라 교육 정책에 대해서 개탄을 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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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ra 2013-08-20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사를 모르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는데 정말 고등학생들이 이정도일줄이야 너무 놀랍고 안타깝고 슬프네요

yamoo 2013-08-21 09:05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미라다님^^
저두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한국사 교육이 강화되야 될듯합니다~
사회과목 전부는 아니더라도 몇 과목은 확실하게 가르쳐야 할듯..
이 나라 교육은 계속 이상한 방향으로 가는 거 같아요~

세실 2013-08-21 0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정도로 심각하군요.
고2 딸내미는 한국사 시험본다고 열공해서 그래도 낫네요.

yamoo 2013-08-21 09:07   좋아요 0 | URL
정말 심각합니다. 한국사를 준비하는 학생들과 서울대를 준비하는 학생들만 공부하는 과목이 한국사가 됐지요. 한문도 마찬가지더군요. 한자능력시험 준비하는 학생들과 아주 일부 학생만 공부를 하고 나머지 학생들은 역시나 대한민국도 못쓰는...

근데, 세실님 딸내미는 정말 기특하군요! 와우~

saint236 2013-08-21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고등학생들에게 종교개혁에 관한 설명을 하는데 아무도...그녀석들 왈 "저희는 세계사 안배워요...." 그저 웃지요

yamoo 2013-08-22 11:27   좋아요 0 | URL
요즘 고교생들하고 대화해 보면 그렇더군요. 툭하면 안 배워서 모른다고. ㅎ 선택과목 아니라서 모른다고..저두 그냥 웃고 넘어가는데...뭔가 잘못돼간다는 느낌입니다..에휴~

지나다 2013-08-21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교육 정책도, 현실도 개탄스럽지만 그 정도 나이를 먹었으면 어린 것도 아닌데, 그래도 생각이라는 게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렇게나 아무 것도 모르면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게 더 심각한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TV는 누가 시켜서 보고, 게임은 누가 가르쳐서 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어른들이 부족하고 많이 잘못하고 있는 건 맞는데 아이들 스스로 바보가 되지 않으려는 자발적인 노력이 없으면 별 소용 없지 않을까 싶군요. 어떤 것이든 본인이 필요성을 깨닫고 할 생각이 있어야 수박 겉핥기 식의 공부라도 머리에 남는 게 있을 테니까요.
어른들의 잘못으로 인해 빚어진 현상인 것은 분명하지만 죽어라 공부하라고 닥달하고 시킨다고 다 공부하는 것도 아니건만 요즘 아이들이 그 수준이라니, 정말 기가 막힐 뿐이군요.

yamoo 2013-08-22 11:31   좋아요 0 | URL
그렇지요. 생각있는 학생들은 스스로 공부하시요.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이나 한자능력검정시험도 척척 공부하지요. 요는 생각있는 학생들이 그리 많지 않고 학교에서 잡아주지 않으면 거의 공치는 녀석들이 아주 많다는 겁니다. 이런 학생들은 학교에서 놔두면 하나도 공부를 하지 않지요. 타율적으로라도 공부를 하게 해야 기본적으로 끄적거리는 녀석들입니다. 예전 학창시절만 돌이켜봐도 스스로 공부하는 학생들은 별로 많이 없습니다.
모르는 것을 학생 자신에게만 돌리는 건 뭔가 좀 잘못된 거 같습니다. 입시에서 한국사가 빠진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불능이거든요~ 그러니 많은 학생들이 입시 부담이 큰 한국사 공부를 하지 않는 거지요. 교육정책이 학생들을 많이 좌우하는 거 같습니다. 어쨌든 관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