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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 작가의 소설 <채식주의자>가 드디어 영국의 맨부커상을 수상했다. 한국인 최초로 세계3대 문학상인 맨부커상을 수상해 화제가 되고 있다. 연일 우리문학의 힘을 세계가 알아줬다고 언론에서 호들갑을 떤다.

 

 

 

 

급기야 아버지 한승원 작가의 인터뷰도 실렸다. 소설가로서 딸의 수상을 어떻게 평가하냐는 질문에 한승원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 문학동네, 민음사 등 큰 출판사들이 지원했기 때문에 한국문학이 자랄 수 있었다. .... 우리 세대 때는 좋은 번역가를 만나지 못했지만 ... 이제 한국문학번역원이나 정부에서도 힘을 기울여 번역자를 양성하고 이번에 좋은 번역자를 만나서 햇빛을 보게 된 듯하다.”

 

 

 

나는 창비, 문지, 문동, 민음사 등 큰 출판사들이 작가를 지원해서 이번에 부커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이번 수상이 한국문학번역원이나 정부의 지원으로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영어로 번역해서 수상작을 낸 사례가 아니지 않는가?

 

 

뉘앙스를 보면, 한국에서 좋은 번역을 지원받아 작품이 햇빛을 보게 된 것처럼 읽혀진다. 이런 걸 아마도 ‘호도한다’고 표현한다지?

 

 

지금까지 우리나라 주요 작품들이 꾸준히 불어나 영어 또는 독일어로 번역되어 해당 국가에 소개되고 있는 줄 안다. 그 최초가 내가 기억하기론 이승우의 <생의 이면>이었던 걸로 안다. 프랑스에 최초로 번역된 우리나라 현대 작가의 작품이라고.

 

 

 

 

아쉽게도 <생의 이면>은 프랑스 콩쿠르상 아니, 매디치상이나 르노도상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다. 내가 꼽는 우리나라 최고의 작품 중 하나가 말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작품은 세계에서 경쟁력이 없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번 맨부커상 수상작으로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가 선정된 걸로 봐서는 우리 문학의 경쟁력이 아예 없기 때문이 아니었다는 걸 간접적으로 확인했다. 결국은 번역이었다.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그 나라 토박이가 우리말을 배워 영어로 제대로 옮겨야 우리문학이 갖는 힘이 제대로 전달된다는 사실 말이다. 이를 이번 부커상 수상 사례로 확실히 인지하게 되었다.

 

 

나는 순전히 이번 맨부커상 수상의 공로를 데보라 스미스에게 돌리고 싶다. 아무리 우리나라 작품이 좋다고 한들, 번역이 그 작품에 베인 감정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면 밋밋할 수밖에 없다. 줄거리가 아무리 재밌더라도 문학성은 떨어질 수밖에.

 

 

시나 소설이나 문학작품은 작품 속에 내재된 그 강렬하고 독창적인 느낌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느냐가 그 작품의 성공의 시금석이기에 그렇다. (역시 개인적인 생각이다.)

 

 

이는 맨부커상 심사위원장인 턴킨의 심사평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그는 <채식주의자>를 가리켜 "잊을 수 없을만큼 강렬하고 독창적이다. .... 이 치밀하고 정교하며 충격적인 책은 독자들의 머릿속에 오래도록 남을 것이며 꿈에까지 나올 수 있다"고까지 했다.

 

 

그리고 덧붙이길 "완벽하다는 평가를 받은 스미스의 번역은 매 순간 아름다움과 공포가 묘하게 섞인 이 작품과 잘 어울린다"고 했다.

 

 

턴킨 심사위원장이 말하는 ‘강렬’, ‘독창’, ‘치밀’, ‘정교’, ‘충격’, ‘아름다움과 공포가 매 순간 묘하게 섞인’ 등의 표현 속에는 번역이 제2의 창작이라는 말이 허언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래서 공동 수상을 정례화 했는지도..)

 

 

한강 작가가 쓰고자 했던 느낌을 스미스 씨가 영어로 얼마나 잘 구현했는지 대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녀는 ‘완벽하다’는 찬사를 받았다. 그리고 한강 작가와 동등하게 공동 수상하며 상금을 반씩 나눠가졌다.

 

 

번역가의 위상을 단번에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사례라 생각한다. 번역을 창작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나라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풍경이다. 만일 한국문학번역원이 이 <채식주의자>를 번역했으면 아마도 부커상 후보에도 오르지 못하지 않았을까.

 

 

더 놀라운 것은 번역자인 스미스 씨가 한국어를 배운지 6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이다. 스미스 씨는 지난 3월 우리나라 한 언론 매체와 이메일 인터뷰에서 "번역은 시를 쓰는 일과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작가가 되고 싶어 번역가가 됐다고.

 

 

당시 그는 "번역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문학적 감수성"이라며 문맥에 맞는 두 음절 형용사를 찾으려 며칠간 머리를 쥐어짠 적도 있다고 소개했다.

 

 

과연 우리나라 번역가들은 스미스 씨처럼 “문맥에 맞는 두 음절의 형용사를 위해 며칠간 머리를 쥐어짠‘ 경험을 얼마나 경험하고 번역을 했는지 묻고 싶다.

 

 

왜냐하면 서양의 명저들이 한국어 번역본으로 재단장하고 나올 때마다 ‘값비싼 쓰레기’로 둔갑해 버리는 기이한 경험을 매번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던 베르그손의 <창조적 진화>, 덴마크 최대 문필가 중 한 사람이라고 평가받는 키에르케고의 <죽음에 이르는 병> 그리고 유럽 제1의 작가라고 평가받는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없는 남자> 등은 모조리 한국어로 읽을 수 없는 수준으로 전락한 명저 번역본들이다.

 

 

 

 

 

 

 

 

 

 

내가 최근 들어 읽은 알베르토 바스케스 피게로아의 대표작 중 하나인 <우리 모두 잘못이다>(책세상, 2005). 이 책은 정말 가독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번역이면서, 작가가 의도했던 신랄한 풍자와 유머가 거세되어 버린 채 한국어 판본이 됐다. (물론 이 작품은 위에 열거한 작품과는 격이 조금 떨어지기는 하지만 나름 읽을 만한 세계문학 작품 중 하나이다.)

 

 

역자는 정구석 씨인데, 번역이 얼마나 유치하고 조잡한지 한 대목만 소개해 보겠다. 내가 읽어왔던 다른 세계문학 작품 역시 여기서 오십보백보다.

 

 

“오사마 빈 라덴 같은 사람이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의 비참함을 줄이는 데 자신의 어마어마한 재산을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하는 데 사용하길 원한다면, 부유층이 테러 행위를 척결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지금의 부당함을 추방하는 것이라는 걸 이해하지 못할 때, 모든 것은 조화를 잃게 되는 것이요.” p422

 

 

완전 번역투의 한국어 문장이다. 우리말의 결을 살리고 작가가 의도한 느낌을 제대로 살리는 번역은 저따위 식의 문장으로 나열되지 않는다는 것 쯤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냥 우리나라 작가 소설책 아무 페이지나 펼쳐도 저런 문장을 만날 확률은 거의 없으니까.

 

 

헌데, 이건 매우 귀여운 수준(?)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 한 번씩은 들어본 베르그손의 <창조적 진화>번역은 눈뜨고 볼 수 없는 수준이다. 이게 어떻게 좋은 번역의 모범이라고 상찬 받고 있는지 도저히 수긍할 수 없다. (나도 3-4번 읽고 나서야 번역이 개판 5분 전이라는 걸 알았다.)

 

 

베르그손 전문가라고 공히 회자되는 송수영 씨가 베르그손의 주저에 무슨 만행을 저질렀는지 한 대목만 소개해 본다. <창조적 진화>(아카넷, 2009)

 

 

 

 

 

모든 일이 진행되는 양상은 마치 생명적 형태들을 통해 진화하는 힘은 제한된 힘이어서 자연적이거나 선천적인 인식의 영역에서 하나는 인식의 외연과 관련되고 또 하나는 내포와 관련되는 두 종류의 한정 사이에서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 전자의 경우 인식은 풍부하고 충만할 수 있지만 그것은 특정한 대상으로 한정될 것이다. 후자의 경우 인식은 대상을 제한하지 않지만 그것은 질료 없는 형식일 뿐이어서 아무것도 더 이상 포함하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상호 함축하고 있던 두 경향들은 성장하기 위해 분리되어야 했다. 그것들은, 각각 자신의 쪽에서, 행운을 찾으러 세계로 나갔다. 그리하여 그것들은 본능과 지석에 도달했다. (p229)

 

 

 

줄친 부분은 모두 비문들이다. 나머지 문장들도 매우 어색하다. 이후 연결되는 단락들을 보면 대명사 ‘그것’을 수없이 남발하고 있다.

 

 

이 책이 노벨상을 수상한 이유 중 하나가 ‘문장이 너무 아름답기 때문’이라는 거였다. 정말 베르그손이 저런 식으로 프랑스 문장을 섰을까. 송수영 씨가 쓴 단행본들을 봐도, 저런 식의 문장 전개는 거의 볼 수 없다.

 

 

번역을 창작이 아닌 단순한 ‘해석 작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나 발견되는 문장들이다. <창조적 진화>에는 저거 보다 심한 문장들이 넘쳐난다. 대학원생에게 초벌 번역을 시키고 이를 제대로 검토도 하지 않은 듯한 문장들이 도처에 지뢰처럼 흩어져 있다.

 

 

번역서를 읽고 참담하여 영어 원서를 구입해서 해당 페이지를 읽어 보았다. 한국어보다 훨씬 이해하기 쉬웠고 명확했다.

 

 

한 나라의 지식을 재는 척도 중 하나가 ‘번역’이다. 그 중요한 번역을 우리나라는 전문가에게 맡기지 않고 전공자에게만 맡기는 우를 범하고 있다.

 

 

전공자가 전문가라는 이상한 논리로 석사 학위만 받으면 번역에 뛰어든다. 이런 미친 짓이 쌓여 돌이킬 수 없는 처지에 이른건 아닌지. 뭐, 우리나라는 전문가를 인정하지 않는 나라니까.

 

 

특히나 문학이나 인문서 번역에서 전문가를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니, 저질 번역서가 판을 치고, ‘고전은 읽기 어려운 책’이라는 낙인이 찍혔는지 모르겠다.

 

 

이번 한강 작가의 맨부커상 수상을 계기로 ‘번역은 새로운 창작’이라는 확고한 생각이 우리 문화에 뿌리내렸으면 좋겠다. 우리문학이 스미스 씨를 만난 건 그래서 행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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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5-18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형출판사가 문인을 돕는다는 지적은 금시초문이군요.
한국 소설의 금자탑이라고 하는 김승옥은 생활에 곤란을 겪고있다는 소릴 들었고,
제가 생각하는 최고의 소설 손창섭은 일본에서 쓸쓸히 죽어갔고
80년대 최고의 시인인 최승자는 굶어죽어가고 있는 마당에 무슨 대형출판사의 지원이라고 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3대 출판사는 돈이 될 만한 작가에게 투자할 뿐..

yamoo 2016-05-18 22:01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금시초문 이었어요..ㅎㅎ
김승옥 씨는 절필하고 선교활동을 하고 있어서 그럴거에요~
손창섭과 최승자 씨는 그런 생활 고를 겪고 있군요!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돈 될만한 곳에만 투자하지, 지원같은 거 잘 안하는 업체라는 거...ㅎ

cyrus 2016-05-18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승원 씨 인터뷰 내용이 저는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꼭 ‘큰 출판사’들 덕분에 한국문학이 자란 건 아니잖아요. 국내 번역가 양성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의문이 들어요.

yamoo 2016-05-18 22:03   좋아요 0 | URL
제가 생각하기에는 저 인터뷰가 좀 와전된 거 같기도 합니다. 아니면 자기 딸 책을 많이 읽히고 문단에 좋은 평가를 받으려고 선심성 멘트일 수도 있구요. 좀 거시기한 발언 이었습니다.

저는 국낸 번역가가 제대로 양성되고 있는지 당최 모르겠다는 거. 거기서 나온 외국번역서에 대한 기사도 못봤다눈..--;;

transient-guest 2016-05-19 0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은 참 중요합니다. 저도 좋은 외국작품들이 한국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종이쓰레기가 되는 걸 많이 봤거든요. 저도 이번 수상은 작품성 외에도 번역자의 역할이 매우 컸다고 보고, 여기에 금세기 들어 많이 늘어난 한국에 대한 외국의 관심이랄까, 이런 부분도 무시할 수 없다고 봐요. 한승원 작가의 말씀은 좀 이상하네요...특히 대형출판사가 작가를 지원한다는 얘긴 금시초문입니다..번역가도 문학인으로 대접을 받아야하고, 업체의 공동번역이 아닌 전문가가 많이 나왔으면 합니다. 이름난 분들도 꽤 있는데, 요즘의 신간들은 종종 업체번역이 많아서 그런지 일관성도 떨어지고, 번역자 특유의 캐릭터도 없어지는 것 같아요...

yamoo 2016-05-19 13:33   좋아요 0 | URL
저는 그런 종이 쓰레기가 어떻게 비싼 문화상품으로 팔리고 있는지 분노하고 있는 한 사람입니다^^;;

빠른 시일 내에 번역가도 작가로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학 작품 뿐만 아니라 명저 번역도 반드시 번역 전문가의 감수를 받아 이상한 문장들을 치유받은 다음에 출간하는 문화가 정립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업체 번역...정말 짜증나는 일이죠. 업체가 성횡할수록 번역이 창작이라는 말은 허울 뿐이 안되겠죠. 하루 빨리 번역가를 전문가로 대접해 줘야 하겠습니다!

stella.K 2016-05-19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야무님 서슬 시퍼런 글은 정말...!
제가 번역하시는 분을 알고 있는데 그분도 만나면 나름 고충을 털어놓곤 하더군요.
작가 보다 못한 대접에 별로 돈도 안 되는 일을 왜 그만두지 못하고 매번 하게 되는지
모르겠다고.
이 나라는 작가도 대접 못 받는데나란데 번역가는 더 더욱 택도 없죠.
알고 보면 번역가도 불쌍한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좀 양성하고 키워줘야 하는데 뭐하는지 모르겠슴다.

한승원은 제가 좋아하는 작간데 처음엔 그저 겸손 떠느라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진짜 들으면 들을수록 기분이 안 좋으네요.
우리나라는 참 그게 안 변해요. 잘 나가는 사람이나 회사 들먹이는 거.
우등생 박수 쳐주기 뭐 이런 거 말입니다.
외국 사람이 우리나라 이러는 거 보면 깜짝 놀란다고 합니다.
그런 식으로 위화감 조장한다고.
알라딘 당선작 뽑는 것도 그렇고...
갑자기 열 받네요. 흐~ㅋ

yamoo 2016-05-19 13:38   좋아요 0 | URL
번역 정말 힘들더군요. 저도 학부 과제로 1권하고, 군에서 3권 정도 번역을 했는데, 진짜 인내심을 시험하는 고된 일이더군요. 더군다나 우리말 실력이 턱없이 모자란다는 좌절감만 안겨준 경험이었습니다.

이런 중요한 번역 작업을 단순한 해석 작업으로 인식하는 한국 사회가 정말 짜증납니다. 그러니 쓰레기 번역이 도처에 널린 거겠지요. 이 사회의 지적 풍토가 부박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겁니다. 번역에 대한 인식이 바뀌지 않는한 우리는 계속 지식의 식민 국가로 살아가야 할 듯합니다.

일본이 메이지시대 때 번역한 토마스의 <신학대전>이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번역조차 안 돼 있는 현실...

정말 열 받는 상황이죠~ㅎ

북인더갭 2021-02-09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위에 언급하신 <특성 없는 남자>를 출간한 북인더갭입니다.
뒤늦게 이 글을 보았는데 저희 번역서에 관해 <한국어로 읽을 수 없는 수준으로 전락한>이라는 표현을 쓰셔서 매우 놀랐습니다. 이 번역본이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한국어로 읽을 수 없는 수준>은 아닌 것 같고, 만약 그랬다면 독자들이 먼저 알았을 텐데, 책이 나온 지 7년 가까이 됐지만 여전히 독자들이 찾아주고 계십니다. 혹시 이전 판본을 두고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은 아닌지 싶어서 조심스레 출판사의 의견을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한 2주 전부터 재미있는 책을 찾아 읽고 있다. 역시 재미하면, 내겐 스파이 소설이나 추리 소설밖에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내게 강렬한 재미를 선사한 프레드릭 포사이드와 잭 히긴스의 책들은 이제 이 분야의 고전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하지만 곰곰 생각해 볼 때, 재미하면 단연코 아시모프와 김용의 소설들이었다. 스파이 소설도 재밌었지만, 아시모프의 <로봇>시리즈와 김용의 대하역사소설 시리즈를 읽을 때의 재미와는 비교할 수 없을 듯싶다.

 

 

 

 

 

 

 

 

 

 

아시모프의 소설 시리즈와 김용의 소설 시리즈가 서점가를 점령하고 있던 1990년대, 나는 한 권의 책을 빌려 읽고 뒤 편의 내용이 궁금하여 그길로 곧장 도서관이나 서점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도서관에서 누가 그 다음편을 빌려가면, 서점에서 구입하지 않고는 못배겼다. 정말 마약같은 재미를 느끼며 한권 한권 독파한 것 같다.

 

(당시 김용의 <천룡팔부>는 <아! 만리성>이라는 타이틀로 나왔다. 정말 재밌었는데, 같은 출판사에서 표지도 비슷하게 나온 <아! 북극성>이란 작품도 있었다. 작가는 소슬이었는데, 김용의 작품들보다 훨씬 더 치명적인 재미를 선사했던 시리즈다.)

 

요즘 재밌다는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오랜 전 마약과 같은 재미를 선사하는 책들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다음 편 내용이 궁금해서 상기된 표정으로 서점으로 책을 사러 가던 그런 마력을 선사하는 정도의 책이 없다는 사실.

 

물론 당시에는 책 읽는 재미에 서서히 눈을 떠 가던 시절이라 책이 주는 재미가 좀더 특별했던 것 같다. 이후에 본격적으로 세계문학 작품들을 읽으면서 나는 또다른 재미의 세계를 맛볼 수 있었다. 내가 세계문학 작품으로 첫번째 손에 든 책이 바로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었다.

 

 

 

 

 

 

 

 

 

 

 

 

 

이후,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들에 빠져들면서, 첨에 지루한 내용이 어떻게 기상천외한 재미로 바뀌는지 체험했다. 인내 후에 오는 거대한 재미는 이전에 느꼈던 재미와는 차원이 달랐다. 정말 거대한 재미였다. 에코의 소설 속에는 거의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는 듯했다. 방대한 지식, 웃음, 전복, 플롯의 절묘함 등등.

 

 

 

 

 

 

 

 

 

그러다가 지인의 추천으로 밀란 쿤데라의 <농담>을 읽게 되었다. 이건 내가 이전에 재미있게 읽었던 책들과는 사뭇 달랐다. 지루한 내용과 속도감 있는 내용이 혼재했지만, 그래도 꾸준히 읽을 수 있었다. 문제는 다 읽고 난 후였다. 뭔가가, 뭔가가 있었다.

 

이전에 재미있게 읽고 느꼈던 감정과는 뭔가 다른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다시 읽을 수밖에 없었고, 이후 몇 시간 동안 넋을 놓고 있었던 것 같다. 인간에 내재되어 있는 모순성과 부조리함을 아주 깊게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쿤데라의 소설들이 김용의 소설들만큼 재밌지는 않았다. 바람처럼 책장이 넘어가지는 않았지만, 천천히 읽은 후의 감동은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아마도 내가 소설을 읽는 목적이 여기서 갈린 듯싶다. 이를 기점으로 재미 보다는 감동을 주는 책을 찾아 읽었던 거 같다. 보통 소설을 읽는 목적은 재미를 느끼기 위해서다. 언젠가 미디어 설문 조사에서도 재미를 위해 소설을 본다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런데 쿤데라의 소설들을 읽으면 그렇지가 않다. 페이지 넘어가는 것은 더디지만 읽고 나면 '인간'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이런 감정을 느끼기 위해 일부러 이런 책만 찾아 읽는 사람들이 있다. 나 역시 찾아 읽는다.

 

이렇게 보면 소설을 읽는 부류는 간단히 정리 된다. 재미 또는 감동을 위해 소설을 찾아 읽는다. 재미와 감동을 모두 충족한다?! 두말해서 뭘할까. 한데, 재미와 감동을 모두 충족하는 책이란 어떤 책을 말하는 것일까?

 

정말 심각한 문제는 여기에서 생겨나는 듯하다. '재미'와 '감동'이 모두 주관적 성향의 척도라는 점. 그래도 신기한게, 책읽는 사람들이 '재미있다', '감동적이다'라고 평가하는 책들은 얼추 그런 경향이 있다는 거. 그런 책 중 상당수가 내가 읽고 재미와 감동을 느낄 수 있어서다.

 

물론 내가 재밌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 역시 재미를 느낀다는 보장은 없다. 나의 경우를 보더라도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나 <보트 위의 세 남자>는 하나도 재미를 느끼지 못했으니까. 특히 후자의 경우는 무쟈게 웃기다고 해서 봤는데, 웃기기는 커녕 매우 지루해서 죽는 줄 알았다.

 

 

 

 

 

 

 

요즘 내가 고민하고 있는 지점이 바로 이런 것이다. '재미와 감동'은 인간의 주관적인 감정인데, 어떻게 그 감정이 어느 정도의 보편성을 띠느냐다. (책 추천은 확실히 보편성을 전제로 하니까.) 이런 이중의 체험이 칸트가 말하는 '유희적 동일시 이론'인가.

 

몇 주 전 지인들로부터 재밌다는 책들을 추천받아 조금 읽어보고, 재미를 못 느껴 던지게 된 책들 때문에 깊어지는 생각이다. 급기야 대중문학과 순수문학을 구분하는 잣대의 무의미함에 까지 이르니 머리가 터질것만 같다.

 

대실 해밋의 <몰타의 매>는 대중문학인가, 아니면 순수문학인가? 이 소설이 정말  셜록 홈즈보다 재미있는 탐정 소설인가, 아닌가? 그럼, 브람스토커의 <드라큘라>는?? 꼬리를 무는 이런 의문들은 한이 없다.

 

 

 

 

 

 

 

이런 모든 질문들은 무의미할지 모른다. 개인의 취향에 따라 얼마든지 달리 답할 수 있는 물음이기에. 나에게는 쉽게 답할 수 없는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 이 시점에서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게 있다. 90년대 읽었던 아시모프의 SF소설과 김용의 대학역사소설이 재미 면에서는 으뜸이었다는 거. 근데, 왜 이런 확신이 든지는 모르겠다. 역시 취향의 문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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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15-03-11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수리는 정말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은하수는 저도 별 재미를 못봐서 읽다가 포기했어요
농담은 꼭 한번 읽어봐야겠어요^^

yamoo 2015-03-12 10:47   좋아요 0 | URL
독수리..정말 재밌었죠. 히긴스의 작품은 다 재밌었습니다. 포사이드와는 다른 재미를 줬고 더 재밌었던 거 같습니다. 근데, 포사이드보다 작품이 적어서 3-4권 이후로는 읽을 게 없었던게 가장 큰 아쉬움 이었지요^^
붉은돼지님도 저하고 같은 부류 같아요. 은하수 정말 재미없어 읽다 관뒀어요. <보트 위의 세 남자>도 읽어 보세요. 이거 웃기다고 많이들 그러는데...
농담은 일독을 권합니다. 정말 좋아요~

[그장소] 2015-03-11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신걸 보면 권한다는게 무의미할 거란 생각이 들만하네요.
초보여서..든가
저처럼 일본문학은 진입초 라든가..
환상문학은 이제 입문 이라든가..해야
거들죠..^^
이건..깡패한테..네가 깡이 세지는 법을 알려줄께..도 아니고...ㅎㅎㅎ

yamoo 2015-03-12 10:47   좋아요 0 | URL
그래도 한 권 정도 추천해 주심이...그장소님께서 추천해 주신건 잽싸게 찾아서 읽어 보고 싶습니다!ㅎ

[그장소] 2015-03-11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웅문은 읽었는데..ㅎㅎㅎ무협극도 한때라...ㅠ

yamoo 2015-03-12 10:52   좋아요 0 | URL
영웅문은 어떠셨는지요...ㅋㅋ 무협은 한때이지만 그래도 요즘 나오는 환타지 소설보다야 김용 소설이 한 3배쯤 나은 것 같습니다. 김용의 소설에 흐르는 도가적 사상은 꽤 멋진거 같으니까요.ㅎ 특히 캐릭터를 창조하는 데 있어서 김용은 재평가를 받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아마도 지금 다시 읽으면 다른 시각으로 볼 듯합니다~^^

cyrus 2015-03-11 22: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파운데이션 시리즈도 재출간되었는데 욕심이라면 로봇 시리즈도 다시 나왔으면 좋겠어요. 중고샵 가격이 비싸고, 일부 낱권을 구할 수가 없더라고요. 지금은 절판되어 구할 수 없게 된 90년대 책들을 읽었고, 책의 재미를 충분히 만끽했던 세대가 부러울 때가 있습니다. ^^

yamoo 2015-03-12 10:53   좋아요 0 | URL
나와도 그림의 떡인거 같아요. 로봇 시리즈 다시 나오면 얼마나 비쌀까요? 아무 것도 모를 때 읽어서 재미만 있었던 거 같아요. 지금 다시 읽으면 좀더 색다른 즐거움을느끼며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transient-guest 2015-03-12 01: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중학교 때 갑자기 무협지에 눈을 뜨고서는 점심값을 아껴가면서 한 권씩 김용의 소설을 사들였던 기억이 나네요. 고려원에서 나온 녀석들이랑 이런 저런 작은 출판사에서 나온 것들을 먼 서점까지 일부러 가서 구하고 보관한 덕분에 지금도 벽혈검을 제외한 김용의 모든 작품을 갖고 있을 수 있네요. 물론 나중에 다시 정식으로 출판되었지만, 그 시절의 기억이 고스란이 담긴 책이라니 너무 소중하지요.ㅎ

yamoo 2015-03-12 10:57   좋아요 0 | URL
트랜지언트님 어쩜 저하구 그리 비슷하신지.. 고려원에서 나온 녹정기는 그렇게 한 권씩 모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두 김용의 작품은 거의 다 읽었다고 자부하는데, 벽혈검이란 작품도 있었군요! 하도 아류작이 많아서...전 설산객과 장맥산맥을 마지막으로 김용의 작품과는 빠이빠이 했습니다. 아마도 94년 정도에서 헤어지고...2000년대 중반에 대륙의 별이 몇 권 나와 봤습니다만..(무척 재밌게) 이후 권수가 없어 읽기가 중단됐고 지금까지 그게 이어지네요.. 헌책방에서도 현재는 매우 비싸서 사기도 그렇고..
여튼 방치상태 입니다..ㅋㅋ 언젠가 다시 재단장해서 나오겠지요. 그때 구입할 요량입니다~ㅎ

[그장소] 2015-03-12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무협극은.신문 연제물로 거의 접한것같아요. 말도안된다면서..킥킥대며 보곤했는데.

yamoo 2015-03-12 10:59   좋아요 1 | URL
신문 연재 무협 소설은 질이 많이 떨어지지요. 무협 대학역사 장편소설은 김용과 와룡생의 작품을 으뜸으로 칩니다. 신문 연재는 정말 이에 대면 재미도 그렇고 문학성도 좀 거시기 하지요..ㅋㅋ

돌궐 2015-03-12 0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푸코 소설 읽어보고 싶어요. 예전에 읽다 포기했었는데... 분명히 뭔가 있다는 느낌은 들었습니다.
쿤데라도 읽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어디 혼자 휴양지라도 가서 해먹에 누워 말이죠...

[그장소] 2015-03-12 08:11   좋아요 0 | URL
장미의 이름이..그나마 가장 쉬운..대중적인 이해도가 편한..소설에 가깝고요..영화도..있어요.^^
있죠..분명..많은 주석과 많은 미로와..수사학 이라는..것이 잡힐듯 말듯..있어요.^^ 나온 순으로 본 셈인데..저는..푸코의진자.전날의 섬.바우돌리노.식으로...ㅎ

돌궐 2015-03-12 08:12   좋아요 1 | URL
아 제가 바로 장미의 이름을 읽다가 무슨 이유에선지 때려치웠어요. 아마 어렸을 때라 지적인 즐거움보다는 말초적이고 끈적한 이야기를 추구했던 거 같아요. 본가 창고에 가면 어딘가 책이 있을 텐데 언제 한 번 뒤져봐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장소] 2015-03-12 08: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ㅎ같이머리를 싸메고 까지 볼 건 아니라고..첨엔 넘 신기해서 주석중에 옮겨쓰기도하고 그랬는데..연금술(이게 연금술이란 뜻이 아님)을 알아봐야..써먹을것도 아니고 하나의 기호처럼..다빈치코드마냥 지금은 그런식으로 기억해요.어렵다 생각하면 복잡하니 쭉..읽어나가다 보면 뭘 뜻하는지 되짚어보고 싶어지니..스스로 찾게됩니다.그게 시작인듯..해요.꼭 에코만 해당하는 건 아니고요..^^

돌궐 2015-03-12 09:02   좋아요 1 | URL
제가 위에다 에코를 푸코라고 썼네요. ㅋㅋㅋ
돌이켜보니 제가 기호나 도상 같은 거 좀 싫어했어요. 아 골치야 이러면서요. ㅋㅋ
뭘 그리 감추고 빗대는지 짜증이 나더라구요. 근데 이제는 그게 재미있을 거 같아요.^^

[그장소] 2015-03-12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움베르토 에코가 푸코의진자를 써서..헷갈리신듯..푸코도..있지만..^^
어떤 심정인지..저도 알아요.
죽어라 안읽히는 책도 있는거 거든요..때가 아녀서 그런거라고..봐요.^^

돌궐 2015-03-12 08:44   좋아요 1 | URL
에코나 푸코나 난해하기론 도찐개찐이죠. 하하

[그장소] 2015-03-12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둘 다 머릿 속에 미로가 엄청나게 꼬여 들어앉은 양반들이란 것엔..동감!!

페크pek0501 2015-03-13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깨달음을 주는 소설이 좋습니다. 특히 제가 몰랐던 사실을 알게 해 주는 거요.
특히 인간에 대해서요.
경험하지 않으면 모르는 그런 것들이 주는 매력이 있어요.
영화 <밀양>- 이청준의 소설을 영화화했다고 하죠 - 에서도
인간에 대한 깨달음을 얻고 감동했어요. 시나리오에 대한 감동...
인간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었던 영화로 꼽습니다.
소설도 이런 류가 좋습니다.

흥미로운 글, 잘 보고 갑니다. ^^

yamoo 2015-03-13 17:48   좋아요 0 | URL
아, 페크님은 깨달음을 주는 소설을 좋아하시는 군요~^^
<밀양>..그 영화 저도 매우 인상깊게 봤습니다. 문학도 그렇고 영화도 그렇고 좋은 작품은 `인간에 대한 가치`를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듯합니다.
페크님도 크게 보면 감동을 주는 작품을 좋아하시는 가 봅니다~
저도 역시 그런데, 읽기가 좀 지루한 감이 없지 않습니다..ㅎㅎ

고양이라디오 2016-09-14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고민했던 내용을 다른 분의 글로 만나니까 좋네요^^ 저는 <파운데이션> 1권을 보고 큰 재미를 못느껴서 2권은 읽지 않고 있습니다. 정말 재미와 감동은 주관적인 것 같아요. 주관적이면서도 가끔은 보편적이여서 헷갈립니다ㅎㅎㅎ

yamoo 2016-09-17 16:21   좋아요 0 | URL
책을 많이 읽다보면 이런 딜레마에 빠지죠..ㅎㅎ 고양이라디오 님두 느끼셨나보네욤^^ 고양이라디오 님만이 가졌던 그 생각 페이퍼로 써주시면 아주 반가울 거 같습니다..ㅎㅎ
 

결혼하고 나서 4년 뒤부터 모 교육기관에서 소설과 드라마 강의를 들었다. 나중엔 교육기관을 옮겨서 시 강의도 들었다. 이런 배움의 시간들이 내 인생에서 가장 반짝반짝 빛나는 시간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사람이 아닌 것 - 책 - 에 대해 설렘을 가져 본 최초의 경험이었다. 책에 대한 설렘은 ‘문학’, ‘독서’, ‘작가’ 등의 낱말만 들어도 설렘을 느끼는 것으로 이어졌다.  

페크님 서재 페이퍼 중에서..

 

 

올만에 페크님 서재에 가서 글을 읽는 와중에 발견한 부분이다. 페크님은 글쓰기를 매우 좋아하시는가 보다. 책읽고 글쓰고, 그리고 또 읽고 쓰고... 알라딘 서재를 운영하시는 많은 분들이 페크님처럼 글에 대한 욕심이 많고, 그래서 저런 글쓰기 수업을 듣는 분들이 꽤 되는 것 같다.

 

나는 글에 대한 욕심이 지금은 거의 없다. 한 때는 매우 날카롭고 논리 정연한 글을 쓰는 것이 그렇게도 부러웠다. 특히나 엔날 중앙일보 강위석 님의 칼럼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저런 정도의 글을 쓰나 하고, 매우 부러워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글쓰기 수업을 들어 본 적은 없다.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학교 교육을 제외한 '가외' 공부를 받아본 적이 없다. 특히나 돈을 내고 어떤 수업을 듣는 사치는 한 번도 누려본 적이 없다. 30대 중반까지! 그냥 난 모든 걸 독학으로 학습했다. 그래서 이전에는 스승의 중요성을 전혀 알지 못했다.

 

배울 생각도 별로 하지 않았다. 어떤 걸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거의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옷에 관심을 갖고 옷을 배워보고자 처음으로 돈을 내고 수업이란 걸 들어보았다. 그때 어떤 것을 배운 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건지를

깨닫게 되었다.

 

어떤 걸 간절히 원해서 배워보기는 처음이었다.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가르쳐 주는 사람이 정말 대단해 보였고, 좋은 스승을 많이 둔 사람이 훌륭한 지식과 기예를 갖춘다는 게 당연해 보였다. 내가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많은 시간을 들여 끙끙거릴 때 스승은 아주 간단하게도 나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 그때의 희열이란 경험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겠다. 이전에 내가 몰랐듯이.

 

글쓰기도 그렇고 책읽기도 그렇고 어떤 지식을 체계적으로 배울 때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학문이라는 분야는 제대로 된 스승을 만나기가 그 어느 분야보다 어려운 거 같다.

 

내가 대학 때 디자인 학원에서 가르쳤던 분과 같은 사람을 만났다면, 난 만사를 제쳐놓고 학자의 길을 갔었을 거다. 이상하게도 학부 때 수업을 듣고 시험을 치는 것이 지겨움의 연속이었다. 이는 대학 교육의 부실함을 내가 막연하게나마 느끼고 있었던 반증이었을 거다. 내 동기들도 하나같이 다 지겨워 했으니. 지금이라고 달라지지는 않은 것 같다.

 

위에 페크님의 글처럼 나는 아직 글쓰기에 대한 설렘은 없다. 절판된 책에 대한 흥미는 있지만 설렘까지는 아니다. 나의 눈이 뒤집히는 것은 오직 좋은 소재로 잘 재단된 옷을 볼 때 뿐이다. 아직까지는 그렇다.

 

그림, 건축, 디자인 전반에 대한 관심은 계속 진행중이다. 이런 분야에 대해서 좋은 스승을 가질 수 있다면 아마도 이들에 대한 관심이 설렘으로 바뀔수도 있으리라. 그러면 지금 패션에 대한 설렘과도 같은 설렘을 저들 분야에서 느낄 수 있을 거다.

 

 

해가 바뀌면서 어떤 계획을 하거나 어떤 바람을 구체화시킨 적이 별로 없다. 매년 그랬다. 하지만 페크님 글을 보니 올해에는 배우고 싶은 분야에 대한 좋은 스승을 만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도 아주 우연히 말이다. 그러면 사는 게 훨씬 더 재미있어 질 것만 같다. 돈이 없어도 재미있는 삶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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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1-04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글에 대한 욕심은 없어요. 대신 책 욕심은 많아요. 한때 페크님처럼 글 한 번 잘 써보고 싶은 도전정신과 패기가 불과 5년 전만 해도 있었는데 이제는 거기에만 신경 쓰다보니 정신적으로 피로감이 느껴져요. 아마도 열정이 확 식어버린 것 같아요. ㅎㅎㅎ

yamoo 2015-01-07 11:36   좋아요 0 | URL
책 욕심은 아주 많은 거 같아요..ㅋㅋ 헌책방 순례하는 사이러스님을 보면 저의 분신같은 느낌을 받곤 합니다..ㅋㅋ

헌책방 순례기와 절판된 책 비교하는 글 잘 보고 있습니다. 서지에 대한 포스팅 많이 기대하겠습니다!

페크pek0501 2015-01-05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잘 읽었습니다. 좋은 제목을 뽑으셨군요.

어느 한 분야에서 인정 받는 위치에 올라가려면 두 가지가 꼭 필요하다고 합니다.
하나는 좋은 스승을 만나는 일이고 또 하나는 라이벌입니다.
이 두 가지가 있어야 발전가능성이 높다는 거죠.
그 나머지는 재능과 노력이겠지요?
이 네 가지를 갖추어야 높은 경지에 올라갈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몇 가지를 갖추고 있는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하나도 없는 건 아닌지... ㅋㅋ )

yamoo 2015-01-07 11:39   좋아요 0 | URL
흠....저는 라이벌을 생각지도 못했네요. 살면서 라이벌같은 걸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지라...--;;

재능과 노력..공감합니다. 저는 뭘 해도 재능이 없는 거 같아요. 열심히 합니다만...근데, 열심의 강도와 그걸 얼마만큼 지속할 수 있는 끈기가 있느냐...이게 인정받는 위치로 올라가는 핵심 요소 같은데, 전 끈기 마저도 없으니...OTL

저는 그냥 관심만 많은 거 같습니다...관심과 깔작거림..--;;
 

어떤 교수가 그랬다. 한국에는 근대가 없다고. 그래서 우리 철학은 서양의 존재론(개인의 탄생)과 같은 철학이 없다고. 그 위대한 다산의 사상조차도 민본이 왕도정치를 구현하기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역설한다.

우리는 서양과같은 철학(일명 서구의 근대철학)을 발전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근대를 맞이하여 우리는 서양의 근대를 배울수밖에 없다고.

개인적으로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학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여러번 곱씹어 봤다.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다. 일제가 우리에게 식민사관을 세뇌시킬 때 그렇게도 마르고 닳도록 말해왔던 거와 대동소이하다.

 

그런데 과연 우리 철학에서 근대는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나? 그 교수는 매우 확신에 찬 목소리로 그렇게 잘라 말했다. 그렇기에 자기는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고. (독일이나 프랑스 영미 등 서구로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박사를 받고 돌아온 학자들이 이 교수와 비슷한 논조의 말을 하곤 했다.)

 

일제에 의해 단절된 우리의 자생적 근대가 없었다고 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조선 후기 이앙법과 광산업의 발달로 인해 축적된 자본은 근대자본주의의 맹아였다.

 

이에 발맞춰 사상면에서도 우리는 주체적으로 서양의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세계 기독교 포교사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만 선교사에 의해 교구가 확립되지 않은 나라였다.

 

뿐만 아니라 빅지원이나 박제가 그리고 최한기 같은 철학자들은 당시 실학(후대에 붙여졌지만)이라는 학풍 속에서 우리 나름대로 근대의 맹아적 사유를 하고 있었다.

 

물론 체제(왕정)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 근본적 사유는 프랑스 혁명 이후의 민본 사상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프랑스혁명 이후 나폴레옹 시대는 전제시대 였다. 그 시대에 전개된 근대적 사상이 제정 시대라서 한계가 있다는 논리는 거의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유독 다산 사상을 말하면서는 전제 시대의 한계 운운한다. 물론 다산이 주장하는 왕도정치가 유학의 범주 내에 있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모든 사상은 시대의 산물이다. 어찌 됐건 한 개인은 그 시대의 개념으로 사고해야 하는 숙명을 타고났다. 그렇기에 그 한계 내에서 한계를 넘어서려고 하는 시도는 그래서 중요하다.

 

다산은 왕도정치 내에서 서구 근대 자유민주사상에 가장 근접한 사유를 한 사상가였다. 방점이 어디에 놓이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 있겠지만 나는 다산이 왕도정치 내에서 개혁정치를 구상한 한계보다는, 그 한계 내에서 백성에 근본을 두는 정치 체계를 설계한 것 자체의 의의가 크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다산의 <원목>과 <탕론>에 다산 정치철학의 핵심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사상의 핵심이 왕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민(民; 백성)에 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서구로 유학갔다온 학자들은 다산의 한계로써 항상 그 사상의 한계를 왕도정치에만 둘까.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항상 근대의 부재를 들먹이는 것일까.

 

우리나라의 근대 부재를 논하는 책들과 논문을 보면 대체로 위 교수와 비슷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듯하다. 개인이 부재하니 항상 대동과 집단을 논한다고.

 

그래 맞는 거 같다. 그런데 우리는 정작 우리의 앞선 시대에서 근대의 맹아를 찾는 시도를 얼마나 했는지 묻고 싶다. 우리가 부지불식 간에 쓰고 있는 각종 기본적인 개념들은 유학, 도학 그리고 불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다음과 같은 개념어 들이 그 예이다. '찰나(刹那; ksana)'는 인도어가 불교 용어로 굳어지고 우리의 일상어에 그대로 흡수된 단어다.  

 

'수유(須臾)',  '신독(愼獨)', '중화(中和)'는 <중용>에 나오는 매우 중요한 개념어 들이다. '귀신(鬼神)'은 <논어>, 여음(餘音)’은 <예기·악기>, '자연(自然)'은 <도덕경>에 있다.

 

도올 김용옥의 동양 고전 역서들을 보면 이런 중요 개념어를 현대에 맞게 잘 풀어 설명해 주고 있다. 이정우의 저서 <개념-뿌리들>은 동양 원전에서 이들 개념어들을 뽑아 사전식으로 편집한 책이다.

 

 

 

 

 

 

 

 

 

 

 

 

 

 

 

    

도올의 동양 고전 역해서들을 읽어보면 우리가 부지불식 간에 쓰는 이들 용어들이 과거로부터 우리의 삶 속에 면면히 이어져 온 것들임을 알 수 있다. 매우 현재적이고 얼마든지 현재의 철학적 성찰을 끌어낼 수 있다.

 

서구 사상의 근본적 개념어들이 헬라어나 라틴어에 있듯이 우리 사상의 근본이 저 유, 불, 도의 경전들에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이들 과거 개념으로부터 근대의 사고를 끌어내려하지 않았다. 한국적 사고로 망국의 설움을 맛보아서 그런지 없애버려야 할 구시대의 사유로 치부했다. 대신 새 시대에 어울리는 사상으로 서구의 근대사상을 여과 없이 수입해다 우리 것인 양 사용했다.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이 한국적으로 체화되면 한국의 칸트가 되는가? 서구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그렇다고 한다. 들어보면 얼추 타당한 것도 같다. 칸트를 얼마든지 한국적으로 수용할 수 있고, 이때의 칸트는 독일이 아닌 한국이 체화한 칸트란다.

 

뭐, 듣고 보면 그럴들하다. 하지만 나는 이런 논리에 동의할 수 없다. 적어도 칸트가 한국의 칸트가 되려면 기층민들 대다수가 이해하는데 부침이 없어야 한다. 생활속 사고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 칸트의 연구 업적이 과연 우리 일반인들에게 부침없이, 거부감없이 수용되될 수 있는 수준인가? 일단 '비판'이라는 단어를 이해하는 데도 매우 불편하고 어렵다. 칸트가 자기 이론을 전개하면서 자기가 붙인 명칭에 대한 번역어도 우리말의 개념에서 찾지 못하고 있다.

 

나는 바로 이것이 되야, 다시 말해 서구 중요 개념에 대응하는 우리 개념어(번역된 말) 찾을 수 있을 때에야 그 서양의 철학이 바로 우리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적절한 번역어를 찾을 수 없다면 외래 사상일 뿐 '한국적으로 수용된' 우리 것일 수 없는 것이다.

 

좀더 쉬운 예로 데리다의 '차연'이라는 번역어를 보자. 이 단어는 불어 디페랑을 번역한 것인데, 데리다 전문가들 왈, 데리다가 창안한 이 개념에 완벽히 부응하는 우리말은 없다면서 '차연'이라 번역했다. 어떤 사람은 불어 그대로를 쓰고 있다.

 

데리다 연구가 아무리 쌓여도 이런 상태에서는 데리다의 한국화는 요원하다. 쉽게 말해서 우리에게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은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다시 강조하자. 서구 개념에 대응하는 우리 번역어를 찾을 수 없다면 차라리 번역하지 말자.

 

 

 

 

 

 

 

 

 

요즘 프랑스 철학에 빠져든 사람들을 보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 주는 프랑스 사상가들의 독창적인 사상의 전개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 사상가들이 해 놓은 틀로 문학과 영화를 분석하니, 이전에 말할 수 없는 부분을 건드릴 수 있어 자위에 빠진 듯하다.

 

 

 

 

 

 

 

 

그리고는 이의 연장선으로 사회를 분석하고 진단하는 것까지 나아간다. 한국과 동양 사상은 말할 수 없는 것에는 말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대표적인 예가 <논어>의 '귀신'에 대한 논의일 것이다.

 

우리에게 근대가 없다고 하고, 그런 자괴감에 서구로 눈을 돌려 서구 철학을 연구한 우리 학자들. 광복 이후 70여 년이 흐른 현재 우리 학문은 주체적으로 서구를 수용하지도 못하고 전통 사상으로부터 현대를 이루는 근대의 기본 사상을 끌어내지도 못했다.

 

원효 이후 우리의 전통 사상 속에 근대의 맹아가 담긴 개념들이 분명히 있었음에도불구하고 우리의 노력 부재로 현대화 하지 못했다. 서구 철학을 연구하는 목적이 전통과 단절된 근대를 잇는 노력이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런 시도를 하지 않았다.

 

계속 우리에게는 서구의 근대 개념에 부응하는 '개인'이 없기에 서구의 근대가 없다는 타령만 한 것이다. 물론 전통 사상에서 '개인주인'에 기반한 서구의 근대적 사상은 없었다. 하지만 그네 들이 간과한 좋은 것을 우리는 갖고 있었다.

 

서구 개인주의에 근간한 발전의 결과로 환경 오염과 비인간화 문제가 대두된 건 어제 오늘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 발전시켰다면 우리는 현 문제를 최소화시켰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에게 근대가 없었다는 것은 오리엔탈리즘의 산물이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서구의 근대에 대응하는 우리만의 근본 사상을 갖고 있었다. 단지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그 연구의 맥이 끊어졌을 뿐이다.

 

요즘 도올의 저서들을 다시 보면서 전통 사상이 얼마나 현대적일 수 있는지 새삼 깨닫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서구철학을 연구하는 방향성에 있었다. 서구의 눈으로 우리 것을 재단하려고 하면 절대 우리 사상에서 현대적인(근대적인) 면을 끌어 낼 수 없다. 

 

<논어 한글역주1>이나 <중용 인간의 맛>을 보면, 서구 철학을 어떻게 공부해야할 지 그 방향성이 보인다. 우리 전통 사상에서 단절되고 계승되지 못하거나 간과했던 부분을 서구 철학을 통해 보충하고 그 의미를 새롭게 다지는 작업. 바로 그것이다. 우리에게 근대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간과하고 있었던 거다.

 

 

 

 

 

 

 

그래서 우리의 전통 사상이 현재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서구철학을 통해 입증해 가야한다. 우리에게 근대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의 노력이 부족했음을 직시하고 공부 방향을 제대로 정해야 한다. 그래야 학문의 식민지화(우리에게 근대가 없다는 담론)를 멈출 수 있다.

 

 

 

[덧]

참 두서없이도 썼다. 하지만 김덕영 교수(위의 어떤 교수가 바로 김 교수다)의 말을 다시 상기하는 과정에 이르니 다시 욱하는 감정이 고개를 들어 이성을 조금 잃었다. 그냥 우리에게도 근대가 없었던 게 아니라 있었다..라는 정도만 어필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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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12-04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대가 없었다기보다는 서구 사회에 비해 근대가 짧았다고 생각합니다. 이걸 근대가 없다고 하는 것과 근대가 서구 사회에 비해 기간이 짧다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인데 말이죠. 근대가 없이 진행되었다는 말은 진중권도 말했던 것 같은데.. ( 확실한 건 아닙니다만.. 그냥 들은 것 같은... )

yamoo 2014-12-05 12:59   좋아요 0 | URL
근대가 매우매우 짧았지요. 근대라고 명명할 시기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분명히 우리에게도 서구에서 말하는 근대라는 개념을 논한다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지식인들이(서구 학문을 전공한 지식인들) 암묵적으로 전제하는 면이 강하여 문제제기를 해 본 것이에요. 곰발님의 생각도 저와 다르지 않은 거 같습니다. 이건 분명히 잘못된 사실을 매우 정설로 지식인들이 생각하는 거 같아...곰발님 정도의 필력을 가진 분들이 제대로 문제제기를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쉽싸리 2014-12-04 2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국에서 설혹 근대가 없었으면 그게 어떠냐는 거죠. 서구의 개념으로만 볼 문제는 아니지 않느냐는 겁니다. 작금의 세계에서 서구 민주주주의 등 그 잘난 서구사상이 이루어 놓은게 뭐가 있느냐 하는 질문도 해야 되고요. 서로 인정하고 가능하다면 통합해서 가자는게 도올 선생의 한결같은 주장이지 않나 싶습니다. 독창적이고 뛰어난 한반도의 사상은 분명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yamoo 2014-12-05 13:01   좋아요 0 | URL
어이구야, 이게 누구십니까, 쉽싸리님 아니십니까! 이렇게 서재에서 쉽싸리님의 댓글을 보니 무쟈게 반갑습니다.

독창적이고 뛰어난 한반도의 사상....이것을 우리 후학들이 좀 밝혀 주었으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cephas 2019-08-01 13:44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작금의 세계에서 서구 민주주주의 등 그 잘난 서구사상이 이루어 놓은게 뭐가 있느냐 하는 질문도 해야 되고요˝ -> 네가 누리는 대부분의 것.
 

하나!

 

고전파 경제학 이론 중에 '세이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프랑스 경제학자 장 폴 세이가 주장한 이론으로 '공급이 스스로 수요를 창출한다'는 거다. 경제학의 다른 이론들에 비해서 아주 간단하고 심플한 이론이랄 수 있다.

 

그런데 이 이론은 대영제국이 번창하던 시대에 적합했던 이론으로, 이후 마르크스와 케인즈에 의해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 그리고 주류 경제학에서 케인즈 시대가 도래한 이후 세이의 법칙은 거의 사장되다시피했다. 교과서의 한 귀퉁이에서나 볼 수 있는 정도였다.

 

그도그럴 것이 이 이론은 제국주의 경제로부터 나온 것이에 그렇다. 영국이 해가지지 않는 나라로 불리던 시절 영국이 생산한 모든 생산물은 해외 식민지에서 모조리 팔렸다. 공급은 해외 식민지에 대한 수요를 끊임없이 충족시켰으며(개쳑했으며), 경제 전반에 과잉 생산은 있을 수 없었다. (일제시대 일본의 생산물이 조선에서 죄다 팔린 걸 상기하면 쉽다)

 

그런데, 경제학에서 화석화 됐다고 여겨졌던 이 이론이 21세기들어 다시금 힘을 얻고 있다. 확실히 요즘 디자인되고 있는 제품들은 공급이 스스로 수요를 창출하고 있다는 세이의 법칙을 입증해 주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아이폰일 것이다. 기존의 전화기를 단숨에 손 안의 컴퓨터로 버꿔놓았다. 애플이 공급하는 소프트웨어는 전 세계의 수요를 창출하고 있다.

 

세이의 법칙은 사장된 게 아니었다! 아마도 기존 경제학 교과서는 세이를 새롭게 조명해 봐야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둘!

 

송나라에 저공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원숭이를 좋아하여 키웠는데, 원숭이 수가 늘에남에 따라 원숭이 양식을 구하기 쉽지 않았다. 당시 원숭이 주식은 도토리였다. 그래서 저공은 키우는 원숭이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도토리 가격이 올라 구하기 쉽지 않으니) 이제부터는 도토리를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를 주겠다"

 

그러자 원숭이들은 개지랄을 떨기 시작했다. 마구 가슴을 치고 소리를 꿱꿱 질러댔다.

이런 지랄에 저공은 할 수 없이 이렇게 말했다.

 

"아, 알겠다. 그럼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를 주겠다!"

 

그러자 원숭이들은 좋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지 출처 ; <고사성어랑 일촌 맺기>(2010. 서해문집)

 

 

위 이야기는 朝三暮四(조삼모사)로 널리 알려진 고사다. 보통 이 고사에 대한 해설을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눈앞에 보이는 차이만 알고 결과가 같은 것을 모르는 어리석음을 비유하거나 남을 농락하여 자기의 사기나 협잡술 속에 빠뜨리는 행위를 비유하는 고사성어 (두산백과)

 

고사의 핵심은 원숭이들이 어리석다는 거다. 근데, 정말로 원숭이들은 어리석은가? 현대경제학, 특히 행동경제학 이론에서는 오히려 원숭이들이 매우 합리적인 판단을 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현재를 미래보다 더 좋아하는 성향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나. 뭐, 현시선호이론이란 것도 그래서 나왔나보다. 그래서 현재 1000원이 미래의 1만원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거.

그렇기에 우리는 미래를 위해 현재의 이익을 포기하는 대가로 이자라는 걸 받는다. 거금을 빌리면 시간단위로 이자를 내야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시간할인율로 중간 거래를 하는 사람도 있다고하니, 앞으로의 몇 시간은 경제학적인 면에서 상당한 가치를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말 그대로 시간은 금인것이다.

따라서 과거에 멍청하다고 생각했던 원숭이들의 행위는 절대 멍청한 행위가 아니었던 것이다. 단지 시대가 단순해서 원숭이들의 경제학적 사고(경제학적 시간 개념)를 간과하고 있었던 거다. 

케인즈가 그랬다지.. 미래에 사람들은 모두가 죽는다고. 그래서 그는 미래를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쨌든 조삼모사 고사에서 원숭이들은 재평가를 받아야하지 않을까?!

 

 

셋!

여름 한철에 베짱이는 나무 그늘에서 놀며 노래부른다. 그 아래 개미들은 열심히 일하여 먹이를 저축한다. 드디어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온다. 날씨가 추워지자 여름에 땀흘려 일한 개미들은 모아 둔 먹이를 먹으면서 겨울을 잘 지낸다. 하지만 베짱이는 거지가 되어 동냥을 다니다가 쓸쓸하게 죽는다.

 

이게 개미와 베짱이 우화의 주된 줄거리이다. 이 우화의 교훈은 분명하다. 현재의 재미를 포기하고 미래를 위해 열심히 노동하라는 거. 너무 교조적인 색깔이 강하다. 현재 자기 삶을 희생하고 미래의 안락을 위해 일하라는 이 메시지는 누가 언제 무엇을 위해 고안해 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 소박한 이야기 속에 노동을 착취하기 위한 자본가의 고단수가 숨어 있다는 거다. 도대체 베짱이와 개미를 왜 비교하는가? 개미는 곰과 뱀처럼 동면을 하며 겨울을 나는 곤충이다. 그에 반해 베짱이는 한 해살이 곤충이다. 봄에 태어나서 겨울에 죽는 운명을 타고난 곤충이다.

 

그런데 각 곤충의 생애주기를 무시하고 저 따위 우화를 만들어낸 건, 달리 생각할 수가 없다. '딴 생각하지 말아라. 미래를 위해 현재 열심히 일을 해야 네 노후가 평안하단다. 네가 좋아하는 걸 추구한다고? 재밌게 지낸다고? 베짱이를 봐, 겨울에 굶어 죽자나!'

이걸 무의식중에 주입시키려 '개미와 베짱이' 우화는 탄생한 거 같다.

 

남을 위해, 미래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삶이 과연 올바른 삶인가?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자기 재능이 뭔지도 모르고 계속 야근을 지속하고 있는 샐러리맨들. 거대한 착취구조 속에서 알량한 복지와 월급으로 하루하루를 사는 게 사람들이 일해야 하는 숙명인가? 그렇다면 메트릭스 속에 안정적으로 생활하고 있는 네오와 별반 다를게 없어 보인다.

 

'개미와 베짱이' 우화는 아이들에게 읽혀서는 안 될 우화가 아닐까?!

 

 

 

덧.

이런 생각이 발칙한 생각일까? 흠, 그럼 새로나온 <군주론>이나 다시 읽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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