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장미의 이름은 장미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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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얼마 동안 어디에

 

민영이 생각하기엔 승아는 대책 없이 긍정적이고 눈치도 없는 스타일이다. 승아는 민영이 자기중심적이면서 모두를 이기려 드는 경향이 강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민영은 모른다. 승아가 힘든 현실에 부딪힌 상태에서 무언가 할 수 있다는 걸 스스로에게 증명하고 싶을 정도로 낙담해있다는 사실을. 승아 역시 모른다. 먼 타국 땅에서 수없이 좌절하면서 자신의 이질성과 왜소함을 날것 그대로 마주한 채 민영이 살아왔다는 것을.

 

그런 민영이 말한다. 맨해튼은 너무 거대해서 여기서 봐야 제대로 볼 수 있다고. 그런 승아가 말한다. ', 얼마 동안, 어디서'란 질문에 잘 대답하면 어떤 문이든 잘 통과할 수 있을 거라고. '''관계'에 대한 통찰. ''에 대한 통찰.

 

장미의 이름은 장미

 

나는 누구일까? 구구절절이, 또는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겠다. 하지만 나를 아는 주변 사람들도 나에 대해 그와 똑같은 설명을 할까? 아닐 거다. 내 삶을 얼마나 깊이 들여다봤는지, 들여다볼 의지나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 ''란 사람은 다양하게 표현될 가능성이 크다. 관계를 통해서 정의되는 수많은 ''란 존재. 장미의 이름은 장미, 마마두의 이름은 마마두. 하지만 똑같을 리 없는 장미, 똑같을 수 없는 마마두.

 

양과 시계가 없는 궁전

 

어느 장소건, 어떤 시간이건 이상하게 나에게만 나 자신이 도드라지게 느껴질 때가 있다. 어떤 이유로든지 내가 주변에 화합하거나 섞여 들 수 없을 때, 그런 느낌을 받곤 한다. 특정 장소나 특정 시간에 그랬다면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겠지만 내 삶의 반경 안에서 그렇다면 심각한 문제다.

 

이야기를 찾아 떠났지만 모든 문이 닫힌 채 자신의 독백만 남아버린 초보 이야기꾼의 이야기. 관계 속에 가라앉아 내면의 소리만 뻐끔대며 외쳐대는 삶의 이야기.

 

아가씨 유정도 하지

 

자식은 부모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내가 태어나기 전의 부모님은? 두 분이 결혼하기 전의 삶은? 어린 시절 그분들의 생활은?

 

얼마 전 부모님들의 과거 흑백 사진을 정리하다 마주하게 된 모습들은 분명 내가 아는 그분들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다. 공원 같은 곳에서 장구나 북장단에 맞춰 전통춤을 추고 있는 어머니. 커다란 알이 인상적인 선글라스를 낀 채 온갖 무게를 잡고 사진에 찍혀있는 아버지. 예상외의 사진들을 쭉 보면서 갑자기 떠오르는, 우리 결혼 못하면 저 물에 빠져 같이 죽자고 했다던 아버지 어머니의 전설 같은 이야기. 분명 어렸을 때 봤던 사진이고 들었던 이야기인데 왜 인제야 그것들이 그분들의 삶으로 느껴지는 것일까?

 

사람들은 누군가를 바라볼 때 자기만의, 또는 그 대상 한정의 인식 틀을 가진다. 그 틀의 모양과 크기는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 수만큼 있다. 우린 그렇게 정의되며 세상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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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세상의 마지막 기차역
무라세 다케시 지음, 김지연 옮김 / 모모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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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은 특히나 그 자리에 남겨진 자들에게 많은 어려움을 선사한다. 슬픔, 후회, 그리움, 아쉬움. 예기치 못했던 이별이라면 그 감정의 소용돌이는 훨씬 더 격렬할 테고.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떠나간 존재를 한 번만이라도 더 볼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 못했던, 또는 하고 싶었던 말을 하고, 다신 보지 못할 모습과 소리를 마주하며 함께 하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누려보고 싶어 한다. 그러면 휘몰아치는 감정들을 누그러뜨린 채 남겨진 그 자리에서 한 걸음이라도 내디딜 수 있으니 말이다.

 

'아우 참, 이제 엄마랑 어디 같이 못 다니겠네요.' 그 말이 나도 모르게 내 입 밖으로 튀어나온 순간, 바로 알았다. 이 순간. 내가 죽기 전까지 절대 잊지 못할 거라는 걸.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나오다 어머니 손가락 하나가 문틈에 끼었다 빠진 일이 생겼고, 그때 생긴 상처를 보면서 화도 나고 안타깝기도 해서 툭 하니 내뱉은 말이었다. 나이 들어 움직임이 둔해지고 덩달아 자신감도 떨어진 건 정작 어머니였는데 나는 왜 그토록 모진 말을 했던 걸까? 집에 와서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바르는데 어머니가 머뭇거리며 질문하셨다. '이제 나랑 어디 안 갈래?' 그날 밤, 달이 떴었다. 잠을 잘 수가 없어 달을 보며 슬픔을, 눈물을 가슴에 되새겼다.

 

엄마를 다시 보게 되면, 사랑한단 말은 지금도 하지 못할 거 같다. 참 무뚝뚝한 아들내미다. 그래도 손을 잡고 공원을 같이 산책해야겠다. 두런두런 얘기도 나누면서 꽃구경도 하면서. 꼭 손을 잡고서.

 

남겨진 그 자리에서 한 걸음 내딛기. 떠난 존재들도 남은 자들이 그러길 바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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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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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 그 시절 핸드폰이 있었던가? 그것까진 기억나진 않지만, 문득 버스 안 승객들을 쭉 둘러봤던 건 기억 난다. 나이도 성별도 다른 다양한 승객들이 있었고 유일하게 공통적인 건 대부분 무표정한 모습이었다는 점. 그때 이런 생각을 했었다. 이 사람들도 미쳐버릴 만큼 떨쳐내지 못할 고민거리를 안고 살아가는 걸까? 그리고 그 순간이 마치 스냅사진처럼 내 기억에 남았다. 아마도 자기연민과 좌절감이 뒤엉키며 강렬한 감정 상태에 휘말렸고, 동시에 나만 고립된 듯한 외로움과 이질감이 주변과 나를 격리함으로써 그게 가능했을 것이다. 주요 사건은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내 20대를 대표하는 하나의 기억이다. 50이 넘은 지금도 결코 돌아가고 싶지 않은 내 삶의 일부.

 

내 삶은 실패한 걸까? 되돌리고 싶지 않은 삶의 영역이 있다는 건 실패란 이름을 붙일 확률이 높은 걸까? 난 지금 편안하다. 내가 원치 않는 만남을 해야 할 필요도 없고, 하루가 멀다 하게 남을 신경 쓸 이유도 없다. 넉넉하진 않지만 부족함 없는 삶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성공한 삶일까? 그런데 질문이 있다면 꼭 답이 있어야 하나? 성공이든 실패든 그에 관한 판단이나 답은, 특히나 삶에 있어서는 더욱더 얽매일 필요가 없지 싶기도 하다.

 

윌리엄 스토너는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아버지의 결정으로 농과대학에 입학하지만 그곳에서 뜻하지 않게 자신이 좋아하는 걸 찾게 된다. 일생을 같이할 친구들을 알게 되고, 일생을 함께할 여인을 만나서 결혼한다. 때론 이른 죽음이 인연 사이에 끼어들고, 뒤늦은 사랑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향한 적개심과 맞닥뜨릴 때도, 아내와 딸이 행복해 보이지 않을 때도, 심지어 사랑에 빠졌을 때도 그는 무기력했다. 그는 인내하며 버틸 줄 알았고, 때론 뜻하지 않게 꿈틀했으며, 심지어 사랑에 빠져들기도 했다. 그렇게 살다가 늙고 죽음을 맞이한다. 그렇게 삶을 살다가 세상을 통과한다. 나처럼, 우리처럼, 그 모든 사람처럼.

 

삶을 성공이나 실패, 행복이나 불행이 아닌 그 자체로 바라봤으면 한다. 삶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스토너가 그랬듯이 나 역시, 이 글을 읽는 사람 역시 자신의 시간을 살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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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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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어린 시절, 과학자인 아버지로부터 우리는, 너는 중요한 존재가 아니란 얘기를 듣는다. 이 방대한 공간과 시간 속에서 인간이란 그저 한낱 먼지 같은 존재일 뿐이란 얘기. 그리고 성인이 된 후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행복을 꿈꾸지만 예기치 않았던 일로 이별을 겪는다. 자신의 정체성과 삶이 흔들리며 스스로 똑바로 서있기 힘든 시기, 그녀는 우연히 과거의 인물인 한 남자의 삶과 마주친다. 분류학자이자 미국 스탠퍼드 대학의 초대 학장이면서 평화주의자였던 인물. 물고기의 매력에 빠져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물고기를 수집해 그 대상에 이름(학명)을 부여했고, 지진으로 인해 모든 표본이 파괴되면서 자신의 모든 업적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됐지만 굴하지 않고 일어서 삶을 회복시킨 남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 작가는 그 남자가 지녔던 불굴의 의지에 주목하고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었는지 그의 삶을 뒤쫓기 시작한다. 자기 삶도 그처럼 다시 설 수 있기를 바라면서.

 

삶의 열정, 삶의 원동력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은 걸까?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살았던 삶의 굴곡을 추적하는 작가의 행적과 의견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굳어질 때쯤, 이야기가 갑자기 방향을 튼다. 조던의 삶을 살핀다는 큰 줄기는 그대로지만 그 내용이 예상치 않았던 방향으로 이어진다. ? 아니, 정말? 이 정도쯤의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준의 전환. 건조한 기삿거리에서 흥미로운 가십난으로 넘어갔다고나 할까?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읽다 보면 이야기는 또 한 번 튀어 오른다. 이거 뭐야! 이게 이렇게 된다고? 이번엔 가십난에서 폭로 기사로 넘어가는 전개다. 내용은 얘기하지 않겠다. 그 내용 자체가 독자들의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핵심일 테니까. 직접 읽어보시길.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책의 제목이 의미하는 바는 어류는 잘못된 분류체계란 거다. 포유류, 양서류, 파충류 등은 계통학적으로, 또는 발생학적으로 그들 고유의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그 공통점을 기반으로 하나의 범주로 묶일 수 있다. 그런데 어류는 그렇지가 않다. 그들은 물에 산다는 이유로 하나의 범주로 묶였지만 파고 들어가 보면 어떤 것은 포유류에 가깝고 어떤 것은 양서류나 파충류에 가깝다. 그러니까 어류는 당시 사람들의 지식수준에서 편의상 하나로 뭉쳐진, 잘못된 분류였던 셈이다. 사람들은 대상에 질서와 가치를 부여하려 한다. 그래야 삶이, 사회가 굳건해진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들이 부여한 질서나 가치가 언제나 옳은 것이냐 하면 분명 그렇지 않다. 사회적, 역사적 가치야 말할 것도 없고 과학적 가치조차 어류의 예에서 보듯 옳음을 확신할 수 없다. 그렇다면 물고기에서 시작된 조던의 확신, 인간을 최상위로 놓은 분류학에 대한 그의 신념, 거기에서 이어지는 조던의 삶의 경로를 어떻게 봐야 할까? 대다수 사람이, 또는 뛰어난 사람들이 부여한 질서와 가치를 무조건 받아들이고 그에 맞지 않는 것은 돌아보지 않는 게 적합한 일일까? 질서와 가치만이 의미 있는 것일까?

 

인간은 신이 아니다. 그러니 우린 잘못된 토대를 바탕으로 적절치 못한 판단을 내릴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질서나 가치, 기준은 세상에 꼭 필요한 것들이다. 하지만 그것들이 완벽하다고 맹신해서도, 그것들이 모든 것이라 고집해서도 안 될 일이다. 아무것도 부여받지 못한 혼돈 또한 우리 삶의 일부이며 어쩌면 그것이 우리 삶에 대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한낱 티끌 같은 생명체에 무한한 가능성을 선사한다. 그래서 삶은 더욱 경이롭고 다양해져서 뭐라 정의할 수가 없다. 사람들은 그런 삶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그 다름을, 그 독특함을, 때론 그 가벼움까지도.

 

긍정적 착각은 견제하지 않고 내버려둘 경우 그 착각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이든 공격할 수 있는 사악한 힘으로 변질될 수 있다. (본문 17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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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해가 지는 곳으로 오늘의 젊은 작가 16
최진영 지음 / 민음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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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지마저 보낼 수는 없었다. 그러면 나는 거울을 잃어버리게 되고, 말벌 틈에 살아남은 꿀벌처럼 내가 말벌인 줄 알다가 결국 말벌이 될 것이다. 말벌로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꽃과 꿀과 나비를 우습게 여기게 될 것이다. (본문 중에서)

 

언제부터일까? 혐오의 시대를 살던 우리가 본격적인 분열의 시대로 접어든 때가. 밑바닥에 광범위하게 자리 잡았던 혐오가 그늘과 어둠을 벗어나 자랑스럽게 빛 아래로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낸 때가. 정말 몰랐던 걸까? 이미 진즉에 유럽 정치권에서 극우가 득세하고, 미국에서 트럼프가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만 해도 우리나라는 아니겠지 싶었다. 아니, 애써 외면했던 거 같다. 영화 <서울의 봄>이 천만이 넘는 관객 수를 기록했던 곳이 이 땅이었으니까. 하지만 한 가지 깜빡했던 게 있었다. 역사를 통해 사람들은 반성하고 배우기보단 끊임없이 반복하고 후회만 한다는 사실을. 젠장, 언제부터였을까? 나와, 우리만 존재하고 너를 지운 세상이 전부가 되어버린 건.

 

괜찮아. 이것도 삶이야. (본문 중에서)

 

그래. 그래야지 어쩌겠나. 생각을 바꾸면 많은 게 가능해진다. 살아야지. 그런데 생각을 바꾸면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진다는 건 꼭 긍정적인 부분에서만 그런 건 아니다. 뭔가를 벗어던지면 사람은 자유로워질 수 있다. 예를 들면, 대한민국 권력의 최정점에 있었던 누군가처럼. 옳다고 생각하는 목적을 위해 적절치 못한 수단을 휘둘렀다. 역사에 남을 하나의 생채기 정도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앞으로 펼쳐질 우리 사회를 향한 하나의 선언일 수도 있지 싶다. 정치는 더 이상 타협과 협상이 우선이 아니다. 이젠 분열과 대립이다. 나와 다른 너를, 우리와 다른 너희들을 짓밟고 지나가면 그만이다. 강자의 사고방식이다.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짐승의 행동 방식이다. 안타깝게도 과거의 혐오가 그랬듯이 이들도 사회 밑바닥에 자리를 잡은 상태다. 기성세대뿐 아니라 젊은 세대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남녀 구분 없이. 괜찮을까?

 

언니, 일단 살아야지. 살아야 만나지.

...... 저절로 만날 수는 없어.

도리가 말했다.

만나기도 전에 죽을지도 몰라.

지나는 내 손을 놓지 않았다.

알면서도 가겠다는 거죠. 죽고 사는 것보다 중요한 게 있으니까.

도리가 나를 보며 말했다. 우리 중 가장 작고도 단단한 도리의 음성. 그렇다. 더 중요한 게 있다.

제발 언니, 우리랑 가.

우리와 함께 간다고 목숨이 보장되는 건 아니야, 지나. 이들에겐 이들의 기적이 있어.

(본문 중에서)

 

세상이 바뀌면 동일한 대상이라 하더라도 그 의미가 바뀌는 경우가 있다. ‘우리란 단어는 늘상 쓰는 말이면서도 참 아름답고 좋은 단어다. 마치 사람이 숨 쉬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앞으로도 그럴지는 모르겠다. 무섭고 끔찍한 의미로 돌변한 우리란 단어를 직면하는 일상이 올까? 정말이지 그런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누구든, 뭐가 됐든 딱 한 번씩만 더 생각하고 행동했으면 싶다. 우리의 삶도 중요하지만 딱 그만큼의 비중으로 그들의 삶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겐 그들의 삶을 억누를 어떤 권리도, 정당한 수단도 없다는 것을. 그렇게 상대방에 대한 생각들이 밑에서부터 모여 빛 속으로, 위로 드러났으면 좋겠다.

 

<해가 지는 곳으로>는 지구에 정체 모를 바이러스가 퍼져 대륙의 서쪽으로 이동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다. 질서가 사라진 세상은 힘이 지배한다. 그 와중에 조금의 인간성이라도 간직하려 하는 자들은 아주 힘겹게 버텨낼 수밖에 없다. 일종의 재난 소설의 형태를 띄지만, 작가는 정작 바이러스에 관한 관심은 크지 않다. 질서와 약속이 깨진 시공간에서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취하는지, 특히 상처 입은 약자들이 자신들의 삶을 어떻게 회복시켜 나가는지를 보여주는 데 중점을 둔다. 큰 기대를 하지 않고 펼친 책인데, 읽은 시기 때문인지 의외로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줬다. 어쩌면 최진영이란 작가의 글이 나랑 잘 맞는 것일 수도 있겠다. 글을 읽다 보면 많은 울림이 있다. 잔잔한 물 위에 퍼지는 파문처럼 그 울림은 내 생각에 끊임없는 진동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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