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쓸모 (개정증보판) - 자유롭고 떳떳한 삶을 위한 23가지 통찰
최태성 지음 / 프런트페이지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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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침서나 설명서 느낌의 책을 잘 읽지 않았다. 자기계발서는 가장 싫어하는 종류의 책이고, 작가의 생각이 일방적으로 술술 들어오는 책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책을 읽는 건 어쩌면 그걸 빌미로 상상과 생각을 하기 위함인 듯하다. 하지만, 그래도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는 건 좀 그런가 싶은 생각도 들어서 요즘은 예전 같으면 절대 읽지 않았을 책들도 읽어보려고 한다. 알라딘에서 사는 책은 내가 읽고 싶은 책들로, 밀리의 서재에선 추천되는 책들로, 간혹 선물 받을 일이 생기면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역사의 쓸모>는 추석 때 선물 받았던 책이다. 교보문고에 갔다가 책을 사준다길래 1위부터 10위까지 쭈욱 진열된 인문 서적 코너에서 그냥 덥석 집어 들었다. 읽어보니 재미있더라. 그냥 받아들이니 편하기도 하고.

 

누구의 주장이 옳고 그른가를 판단하는 일보다 선행되어야 할 일은 상대가 왜 그런 생각과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를 헤아려보는 일 아닐까요? 역사를 공부함으로써 서로의 시대를, 상황을, 입장을 알게 된다면 우리의 관점도 달라질 겁니다. 타인에 대한 공감은 바로 그곳에서 시작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왜 할머니, 할아버지는 태극기를 들고 광장으로 나왔을까, p156)

 

우리 사회의 세대 갈등에 대한 화두는 꽤 오래전부터 나왔다. 이 책에선 2017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전후로 등장한 태극기 부대를 한 예로 든다. 난 이제야 알게 된 단어지만 틀딱충이란 단어로 그들을 혐오, 비하했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저자는 그들이 살아온 시대의 얘기를 한다. 전쟁과 폐허, 가난, 박정희 대통령, 한강의 기적. 이 중 일부는 내 어린 시절을 관통했던 사실들이지만 50대인 나에게조차 이젠 희미해진 기억들이다. 그러니 내 아랫세대들에겐 말해 무엇할까.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인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은 단순히 대통령의 퇴진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60대 이상 세대들의 과거 자체를 부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거란다. 박근혜를 통해 공유되었던 과거의 기억들(유물들)이 자연스러운 순서가 아닌 강제적인 절차를 통해 끄집어 내려졌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을 우리가 이해한다고 상황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분들은 여전히 태극기를 들고 박근혜를 외칠 것이고 정치인들은 이를 이용한다. 하지만 적어도 틀딱충이란 단어는 탄생하지 않았을 거란 게 저자의 이야기다. 공감하려 한다면, 이 시대가 혐오와 비하의 시대에서 한 발짝이라도 더 멀어질 수 있다는 거다.

 

시선을 2024년으로 돌려본다. 요즘 부쩍 실감하는 점은 단체의 리더들이 눈치를 보지 않는다는 거다. 뭐 대통령이야 직진 이외엔 모르는 분이니 말할 필요도 없겠고. 아시안컵 축구 이후로 대한축구협회에서 슬슬 불이 나기 시작하더니 아시안 게임 직후엔 배드민턴 협회 문제가 불거졌고, 곧이어 대한체육회 쪽으로 불이 옮겨붙었다. 하지만 해당 단체장들은 안하무인이다. 노조가 들고 일어나고 국회에서 문제를 지적받아도 ‘My Way’를 고집할 뿐이다. 이 현실을 완벽한 세대 갈등이라고 볼 순 없겠으나 권위주의의 끝자락을 붙잡은 세대가 시대의 변화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함으로써 벌어지는 일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진다. 여기서 나는 무엇을 공감해야 하는가? 그럴... 필요가 있나... 싶은데. 모르겠다. , 이래서 작가의 가르침이 명확한 책을 읽는 거구나. 그러니까 이게 결론이다. 지침서나 자기계발서를 읽는 이유.

 

어차피 두서없이 하고 싶은 말을 휘갈기는 거 같으니 하나만 더. 트럼프, 푸틴, 네타냐후, 김정은. 이 조합은 예전에도 한 번 있었다. 내년쯤엔 트럼프 2기가 시작되니 여기에 윤석열 대통령이 추가된다. 역사가 말해주듯 출중한 리더일수록 다양한 사람들을 적재적소에 잘 씀으로써 많은 난관을 헤쳐 나간다. 이번에도 부디 그랬으면 싶다. 트럼프란 돌발 변수를 상수처럼 안고 가야 하는 세상이다. 게다가, ‘많은 사람이 하늘이 나를 살려준 이유가 있다고들 말해준다.’ 트럼프가 한 말이다. 이 말이 자신이 내리는 결정에 아주 조금이라도 기반이 되지 않았으면 한다. 리더와 운명론은 때론 지극히 위험한 조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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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트로피컬 나이트
조예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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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로우 키즈>

아이들이라고 다를까요. , 늘 집에 가고 싶다고 울잖아요. 그게 그 말이죠. 지금 이곳이 아닌 다른 곳, 나를 상처 주지 않는 곳에 가고 싶다는 거잖아요. (본문 중에서)

 

부모가 없어서, 바빠서, 부유하지 못해서, 이유야 어떻든 관심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 또는 그릇된 관심을 받는 아이들의 이야기. 투명 인간을 만들어내는 우리들의 이야기.

 

<고기와 석류> ‘고독사란 말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혼자 살다가 언제 죽었는지도 모르게 오래 방치되어 썩는 냄새가 난 후에야 발견되는 사람들. 정신과 육체가 동시에 무기력해지는 죽음을 맞는 경우는 드물다. 내 몸 같지 않은 육체 속에 덩그러니 정신만 남아 있을 때 그들은 어떤 감정에 빠져들까? 외로움을 넘어서 버려지듯이 죽음을 맞이한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슬프고 막막하고 억울하고 두렵고... 모르겠다. 혼자 남은 옥주는,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옥주는 홀로 맞이할 죽음이 두려워 자신을 먹어 치워줄 어떤 존재를 돌본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존재로 인해 자신이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게 된다. 삶이란.

 

<릴리의 손> ‘이방인이란 단어가 나온다. 따지고 보면 우린 모두 서로에 대해 이방인이지 않던가. 만나서 알아가고 함께 기뻐하며 슬퍼하고,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좁혀가는 존재들. 동시에 뜻대로 되지 않아 이별하고 미워하고 때론 그리워하는, 그런 존재들. 사랑 이야기다. 읽다 보면 , 그렇구나라고, 반전까지는 아니고 소소한 놀라움을 선사하는 단편.

 

<새해엔 쿠스쿠스> 요즈음도 그런 부모가 있겠지만 과거엔 자기가 원하는 삶을 자식이 살아줬으면 하는 부모들이 많았다. 풍요롭지 못하고 배우지 못하며 살아온 세월이 어떻다는 걸 너무나 잘 알기에 자식들은 그런 삶을 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부모들은 아이들을 멱살 잡고 끌고 가다시피 했다. 나 역시 그런 시기를 겪었기에 그때의 감정들, 상황들이 지금도 또렷하게 남아 있다. 이 단편은 그런 상황들을 바탕으로 한 소설이다. 공포나 SF나 판타지가 아닌 일반적인 소설이다. 하지만 공포란 꼭 귀신이 나와야 성립되는 건 아니다. 숨이 막힐 정도의 일방적인 관심과 사랑. 그 또한 누군가에겐 공포일 수 있다. 글을 읽으면서 끊임없이 잉그마르 베르히만 감독의 <가을소나타>가 떠올랐다. 너무 오래전에 봐서 이젠 줄거리도 기억나지 않지만, 모녀가 나와서 감정의 대립을 보이는 이 영화를 난 지금도 공포영화로 인식하고 있다.

 

<나쁜 꿈과 함께> ‘몽마는 사람에게 악몽을 꾸게 해 그 두려움과 공포를 먹고 사는 초자연적인 존재다. 악몽에 따라 모습이 변하기에 실제 모습을 자신조차 본 적이 없다. 항상 배가 고파 여기저기 사람을 찾아다니지만, 악몽을 꾸는 자의 손에 닿으면 타는 듯한 뜨거움 때문에 그 자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어떤 존재랑 비슷하지 않나?

 

<유니버셜 캣숍의 비밀> 그러니까... 고양이별이 진짜 있는 거였어! 우리집에 있는 고양이 녀석이 아무것도 안 하고 눈빛만으로 나를 부려 먹을 때 이 녀석이 외계인이라는 걸 진작에 알아차렸거든. 개눔의 자슥.

 

<푸른 머리칼의 살인마> 일종의 타임 트랩에 걸려버린 사람들을 다룬다.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 <릴리의 손>도 그랬지만 인과관계를 떠나서 여운을 남기는 이야기다. 이런 식의 이야기를 잘 풀어내는 작가인 걸까? 세 편 모두 적절한 복선과 삶에 대한 희망과 절망을 잘 버무려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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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민음 한국사 : 16세기, 성리학 유토피아 - 조선 2 민음 한국사 2
한명기 외 지음, 문사철 엮음 / 민음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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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생각하는 성리학의 나라, 족보와 가문을 따지는 문화, 장자 우선의 질서, 여성의 사회적 차별 등은 엄밀하게 말하면 중후기 조선 사회에 집중된 현상이다. (‘()의 시대중에서)

 

요즘 대한민국을 가리키는 말 중 헬조선이란 표현이 있다. 이때 조선은 전근대 사회의 부정적 이미지가 덧씌워진 의미일 테고 그 이미지에 가장 큰 영향을 준 현상들이 아마 맨 처음 인용한 문장에 나온 내용들일 거다. 16세기의 조선을 다룬 이 책은 어째서 저런 현상들이 나타나게 되었는지를 살핀다.

 

책에 따르면 그 씨앗은 15세기 세조 때 뿌려졌다. 조카인 단종을 끌어내리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는 정통성 문제로 적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자기편을 많이 만드는 수단으로 공신 책봉을 이용한다. 벼슬을 높여주고 경제적 이득을 줌으로써 정치적으로 세조 편에 설 수 있게끔 유인책을 남발한 셈이다. 당연히 자격이 없는 자들이 어울리지 않는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관직을 사고판다든지 부정한 수단으로 이익을 꾀하면서 조선 사회 전체의 기강이 무너지게 된다. 하지만 어떤 사회든 부정부패가 심해지면 그것을 개혁하려는 시도가 있기 마련이다.

 

과거 제도를 통해 관리로 들어서는 게 보편화된 상황에서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학자층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그들(사림) 중심으로 사회 개혁의 의지가 피어나고 있었다. 그들은 성리학을 다시 들여다보기 시작했고 그렇게 재해석된 성리학을 현실에 엄격하게 적용하려 했다. 15세기 말, 이들의 의견에 동조하는 성종 시대에 이르러 언로를 담당하는 삼사(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에 적극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했고 드디어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된다(전하, 아니 되옵니다~!). 지금은 어떻게 배우는지 모르겠지만, 8, 90년대 역사 교과서에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으로 알려진 시대가 개막하게 된다.

 

16세기, 연산군, 중종, 인종, 명종에 이르기까지 사림은 꼬장꼬장한 깐깐함과 도덕성을 앞세워 줄기차게 개혁을 시도하지만, 번번이 좌절하고 만다.

 

신하의 도는 의를 따르는 것이지 군주를 따르지 않는다.

(왕과 사()의 충돌중에서)

 

사림의 통치 이념 또는 정치 이념을 간략하게 표현한 문장이랄까. 이러니 때론 왕마저도 등을 돌려버려 힘든 싸움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결국 공신 세력은 세월과 함께 사라지고 선조가 왕이었을 시절엔 사림이 정계를 장악하게 된다. 개혁이 완성된 것일까?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 건 확실하다. 왕권이 견제되면서 신료들의 공론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요즘을 사는 우리는 정치에서 중요한 요소엔 도덕성과 강직함 뿐 아니라 협상과 타협, 중재의 기술이 있다는 것도 안다. 아마 저 시대에도 어느 순간부터 이런 점들이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한 가지만 더. 한 나라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는 결코 따로 놀지 않는다. 세조 시대 정치가 흔들리면서 성리학 근본주의에 가까운 사림이 등장했고, 그들이 정치의 주요 세력으로 떠오르면서 조선의 사회 양상과 문화, 경제도 변화를 겪게 된다. 이 책의 제목처럼 성리학 유토피아가 열리고 만 것이다. 과거 역사를 되돌아보며 현재를 살핀다면 우리가 투표를 통해 올바른 지도자를 선택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 수 있게 된다.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엔 협상이나 타협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곧 미국 대선이 있지만 결과에 따라서 그곳도 허울좋은 포장일 뿐이지 사실 협박이나 다름없는 기술을 쓰는 대통령이 등장할 수도 있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나를 포함한 현재를 사는 누구도 확언하지 못한다. 분명한 건 선택엔 대가가 뒤따른다는 점이다. 먼 미래의 역사는 이 시대의 선택을 어떻게 평가할까?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선조 시대가 포함되어 있으니 당연히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관한 얘기가 나온다. 국란이 나오면 사람들은 보통 그것을 투쟁의 역사로만 생각한다. 이순신 장군과 의병장들과 많은 대첩들. 그에 대비되는 무능력한 몇몇 존재들. 그들은 양의 방향으로든 음의 방향으로든 특출난 인물들이다. 그렇지 못한 보통 사람들은 혼란에 이리저리 휩쓸려 삶에 대한 주체성을 송두리째 잃어버리고 만다. 역사에서 중요하지 않지만, 그런 것이 대다수 사람의 역사다. 고난과 치욕의 역사. 첫 번째 침략과 두 번째 침략인 정유재란 사이 명과 일본이 강화회담을 하면서 전쟁 소강상태가 있었다. 전쟁 당사자이자 가장 큰 피해자였던 조선 정부는 이 회담에서 고의로 철저히 배제된다. 치욕의 역사. 우린 이런 역사를 외면하면 안 된다. 보고 싶은 것만 본다면 우린 실수로부터 아무것도 배울 수가 없다.

 

임진왜란 직전 정부가 파악한 수치 : 조선 인구 1,000

임진왜란 직후 정부가 파악한 수치 : 조선 인구 150

(본문 중)

 

이순신 장군이 마지막 전투에서 왜군을 하나라도 더 죽이려 했던 심정이 이해가 간다. 아니 근데, 어떻게 망하지 않고 다시 일어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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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칵테일, 러브, 좀비 안전가옥 쇼-트 2
조예은 지음 / 안전가옥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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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좋아해서 각종 영화를 찾아다니며 보던 시절, 시대나 장르를 가리진 않았지만, 스릴러, 공포, B 무비를 특히나 좋아했더랬다. 특히 공포 영화나 B 무비는 한계, 격식 따윈 나 몰라라 하는 상상력 덕에 의외로 즐거움을 선사 받는 경우가 꽤 있었다. 남다른(또는 병맛) 유머 코드가 그랬고, 불합리나 부조리가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간 설정들이 그랬다. 하지만 이때 우리나라 공포 소설은 그렇지 못했다. 말 그대로 공포가 핵심인 소설이었다(물론 영화도 이런 영화들이 많았지만 다는 아니었다). TV에 나오는 무서운 이야기 같은, 소름 끼치고 오싹한 분위기가 지배적인 줄거리들. 그러다 보니 뒷맛이 개운치 않았고 어느 시기부터 공포 장르를 의도적으로 피하기 시작했다(독서뿐만 아니라 영화도). 아마도 러브크래프트 전집이 마지막이었을 거다(이 작가 작품들도 여러 의미로 정말 만만치 않다). 그리고 10년이 훨씬 넘는 세월이 지나버린 지금, 오랜만에 공포 소설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조예은 작가의 단편집이다. 단편 소설 4편이 실려있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살짝 공포가 가미된 채 다양한 장르가 혼합된 소설이라 보면 될 듯하다.

 

<초대> 4편 중 공포 소설이란 명칭에 가장 걸맞은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 억압, 강요를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다. 부모가 자식에게, 연인 사이에서, 서열이나 권위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관계에서 폭력과 다름없다는 걸 의식도 하지 못한 채 행해지는 많은 행동과 말들이 한 개인을 어떻게 옭아매는지를 생각해 보게끔 한다. 물론 한 개인의 외면과 내면을 완전히 분리해 별개의 존재처럼 서술하기에 논리를 뛰어넘는 전개 방식이다.

 

<습지의 사랑> 귀신들의 사랑 이야기. 물에 빠져 죽은 지 너무 오래돼서 원래의 자신이 누구였는지도 모르는 물귀신과, 비교적 최근에 죽어서 숲속에 사체가 유기된 여학생 귀신의 썸타는 과정이 그려진다. 우리와 다른 존재의 이야기다. 하지만, 인정하려 하지 않겠지만, 사람들은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을 아예 다른 존재로 치부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이 두 귀신의 이야기는 곧 우리들의 이야기나 다를 바 없다.

 

<칵테일, 러브, 좀비> 영화로 치자면 B 무비와 가장 가깝다. 어느 날 갑자기 한 집안의 가장이 좀비가 되는데 그 원인이 뱀술 때문이란다. 아내와 딸은 그래도 사랑하는 아버지라고 어떻게든 관계를 유지해 보려 하지만 배가 고파진 좀비 아빠는 딸을 한입 덥석 물고야 만다. 딸을 구하기 위해 골프채를 휘두르는 엄마와 상황 정리를 위해 아빠를 골로 보내며 내뱉는 엄마의 말들. “빌어먹을 양반, 끝까지 자식 새끼한테 민폐나 끼치고.” 많은 사람이 잘 알고 있는 가부장에 대한 풍자쯤 되겠다. 킥킥거리며 읽기 딱 좋은 단편이다.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 남편이 아내를 칼로 찔러 죽이고 아들이 그 칼을 뺏어 아버지를 찔러 죽인 후 자기 목을 찌른다. 숨이 넘어가는 그 순간, 어떤 목소리가 속삭인다. 시간을 세 번 되돌릴 수 있다. 그렇게 하겠는가? 달콤한 유혹이다. 그런데 그 유혹을 받아들인 아들의 선택은 자신이 아버지를 먼저 죽이는 거다. 불행의 원인을 찾아 모두가 행복해지는 게 아닌,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만을 살리는 것. 아버지는 괴물이고 나 역시 괴물이라는 인식. 어쩌다 인식 밑바탕에 긍정이 아닌 부정이 도사리게 된 걸까? 하나의 이야기가 더 있다. 이 둘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이 비극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비극으로 남는다.

 

처음 책장을 넘기면서 뒷맛이 개운치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런 종류의 공포 소설은 아니었다. 아주 무난한, 공포(비논리)가 살짝 가미된 장르 소설 정도로 생각하면 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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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레 미제라블 5 (한글) 더클래식 세계문학 85
빅토르 위고 지음, 베스트트랜스 옮김 / 더클래식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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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5권 내용만 본다면, 6월 혁명의 마무리와 그 이후 이야기다. 혁명의 한복판에서 많은 등장인물의 삶과 죽음이 엇갈린다. 속도감 있는 전개를 보여주던 이야기는 장발장이 탈출구로 하수도를 선택하면서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샛길로 빠져나간다. 한참을 파리의 하수구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서야 그 진창길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4권까지 읽어서 단련된 상태라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 탓인지 5권 내용에 대한 집중력이 가장 좋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주요 인물들이 걸어왔던 삶에 나름 책임을 지는 순간이기도 해서다. 마리우스와 코제트에겐 죄책감과 상실감이 들러붙겠지만 함께 행복한 미래를 만들어갈 여력이 충분해 보인다. 자비에의 선택은 나름 충격적이지만 고지식하게 앞만 바라보고 살았던 그의 성향을 생각하면 당연히 그럴 수 있지 싶다. 테나르디에는... 내 처지에서 보면 가장 뜻밖의 운명을 받아 든 인물이었다. ‘레미제라블(Les Misérables)’이란 의미를 작중 딱 한 번 설명한 곳이 있는데 그게 바로 테나르디에가 나오는 장면에서였다. 불우한 사람들, 불행한 사람들. 그런 상황에 빠진 사회 계층. 작가는 정치 사회 개혁과 교육을 통해서 이들을 교화시켜야만 그 사회가 근본적으로 바뀔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테나르디에는 경멸과 멸시를 얻을지언정 마리우스로부터 돈을 얻어 미국으로 건너가 노예 상인이 된다. ‘민중이란 존재에 많은 의미를 부여한 작가지만 6월 혁명의 실패와 함께 테나르디에의 운명을 통해서도 뜻대로 할 수 없는 존재임을 명확하게 얘기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 애석하게도 여기까진 <레미제라블>의 주변 인물(?)에 관한 내용이었다. 이 소설의 핵심은 개인적인 생각에 두 가지다. 하나는 1790년대부터 1830년대 중반 정도까지 프랑스의 정치 사회 상황의 격변. 다른 하나는 그 시기를 관통하는 장발장의 삶. 프랑스의 몇몇 혁명과 그에 대한 작가의 생각은 여력이 되면 따로 써볼까, 생각 중이다. 대신 이 글에선 장발장의 삶, 그의 고뇌에 집중해 보려 한다.

 

(1권 절망의 구렁텅이) 그는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물었다. 이 숙명적인 사건에서 과연 그 혼자서 잘못을 저질렀던가? 첫째로 그는 좋은 일꾼이었지만 추운 겨울, 일자리를 찾지 못했다. 열심히 살아간 그가 빵을 갖지 못한 것을 그의 잘못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다음으로 잘못된 선택이 벌어지고 그가 자백했음에도 형벌이 너무 무거웠던 것은 아닌가? 그에게 내려진 형벌은 죄의 정도와 맞았던가? 형벌은 뉘우침에 너무 치우쳐 있던 것은 아닌가? 형벌이 아무리 무거운들 이미 벌어진 범죄를 무화할 수 있던가? 무거운 형벌은 사태를 악화시키고, 죄인을 희생자로 만들고, 채무자를 채권자로 만들고, 범죄를 저지른 인간을 결국 법으로 용서해 준다고 든다. 탈옥으로 형기가 늘어난 것은 어땠는가? 강자 앞에서 약자는 얼마나 무력했는가? 사회는 개인에 대해 무죄였는가? 19년마다 매일매일 죄는 늘어나지 않았는가?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사회는 그 안의 부조리와 무자비함을 구성원에게 떠넘길 권리가 있는가? 한낱 불쌍한 영혼을 고통과 결핍 속에 몰아넣을 권리가 있는가? 우연히 이루어진 재산 분배에서 탈락한 불쌍한 사람들, 가장 동정받아 마땅한 그들을 사회가 매몰차게 대한다면 그것이 과연 정당한가? 그는 묻고 또 물었다. 그는 스스로 사회를 재판하고 유죄를 선고했다.”

 

미리엘 주교를 만나 교화되기 전 장발장의 관점이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고 그 후 몇 년 동안 혼란했던 시절, 그는 빵을 훔치고 감옥에 들어간다. 법은 가혹했으나 형량이 19년까지 늘어난 건 끊임없이 탈옥을 시도했던 그의 잘못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모든 책임을 사회로 돌린다.

 

(1권 프티 제르베) ', 나는 얼마나 불쌍한 인간인가!" 하고 소리친 순간, 그는 자신을 되찾았다. 그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처음으로 마주 대했다. 지팡이를 들고, 작업복을 입고, 훔친 물건으로 꽉 찬 배낭을 지고, 음울하고 일그러진 표정으로, 사악한 생각을 품고 서 있는 죄수 장발장의 모습 말이다. 과거의 불행들은 그를 괴이한 몽상에 빠지게 했다. 그러므로 지금 말한 모든 것도 환상처럼 여겨졌다. 그는 진실로 그 앞에 일그러진 얼굴로 서 있는 장발장을 만났다. 그는 그가 누구인지 몰라 혐오감을 느꼈다.”

 

사회를 악으로 돌리고 자신을 방어하던 그가 미리엘 주교를 만나 일련의 사건을 겪은 후 드디어 자신의 현재 모습을 제대로 마주하게 된다. 단순 인식으로 끝났다면 테나르디에처럼 그의 인생은 바뀔 일이 없었겠지만, 다행히 그는 현재의 자신을 혐오함으로써 변화를 선택하게 된다. 미리엘 주교의 용서가, 다짐이 그에게 갈등의 씨앗을 뿌렸고, 그 씨앗이 변화를 싹틔운 후 무럭무럭 자라 엄격한 양심, 보편적 인류애로 성장한 셈이다. 그 탓인지 장발장은 작품 내내 특정 정치 성향을 띄지 않는다. 그는 약자를 돕고, 악인을 설득하고, 악연으로 얽힌 자를 용서한다. 미리엘 주교의 하위 버전이랄까.

 

(1권 머릿속의 폭풍) 드디어 진리를 찾았다. 나는 결론을 찾았다. 더 생각하려면 끝이 없는 일이다. , 이제는 그 결론에 따르자. 더는 갈등하지 말자. 이 모든 것은 타인을 위해서일 뿐 나 때문이 아니다. 나는 마들렌이다. 마들렌으로 살자. 장발장은 불행해질 것이다. 장발장은 나 아닌 다른 사람이다. 나는 그를 모른다. 절대 그를 모른다. 누군가 장발장이 되었다면 그건 그가 알아서 해결할 일이다. 나와는 상관없다. 장발장은 암흑 속에서 불행한 인생을 사는 자의 이름이다. 누군가 그 이름을 머리에 쓴들 그것은 그의 불행이다.”

 

신분을 감추고 마들렌이란 이름으로 한 도시의 시장까지 된 장발장은 자비에로부터 곧 벌어질 어떤 재판에 대해 듣게 된다. 도난 혐의로 잡힌 한 사람이 과거 죄수였던 장발장으로 의심(거의 확신)을 받아 곧 재판받게 될 거라고. 그러자 그는 갈등한다. 자신이 직접 가서 자백하고 그 무고한 자를 구해낼 것이냐, 아니면 이대로 그냥 살아갈 것이냐. 하지만 결론을 내지 못한다. 가야지 했다가도 또 아니야, 가만있어야지. 그러기를 여러 번.

 

(1권 머릿속의 폭풍) 장발장! 언제고 네 주변의 목소리가 네게 말을 걸 거다. 너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는 소리. 그 소리가 너를 영원히 저주할 거다. 이 야비한 놈아! 너를 향한 모든 감사는 하늘에 닿기 전 모두 떨어져 내리고 하느님께 올라갈 때는 저주만이 함께할 것이다.”

 

그의 일생에 걸쳐 그를 가혹할 정도로 옥죄이는 게 바로 저 양심의 소리다. 미리엘 주교의 하위 버전이라 했던 건 바로 이 때문이다. 미리엘 주교는 거의 성인에 가까운 인물이고, 장발장은 끊임없이 갈등한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지울 수 없는 원죄를 무시하고 그로부터 파생될 많은 것들에 고개를 돌릴 것인지 말 것인지.

 

(1권 특별 입장) 그는 밤새도록 생각했다. 하루 종일 생각했다. 그는 그의 마음속에서 '!'라는 소리만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15분쯤이 지났다. 이윽고 그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괴로운 한숨을 지으며, 두 팔을 늘어뜨린 채 다시 발길을 돌렸다. 기진맥진한 듯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마치 누군가 도망치는 그를 따라와 그를 끌고 가는 것 같았다.”

 

법정 앞에까지 갔다 돌아선 그의 발걸음을 결국 양심이 돌려세운다. 장발장의 양심은 미리엘 주교의 다른 모습일 수도 있겠다. 자신의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지켜보는 눈. 그래서 그렇게 끝까지 그에게 가혹했는지도 모른다.

 

(2권 불행한 두 사람이 함께해 행복을 만들어내다) 싱싱하게 되살아난 가없은 늙은 마음이여! 다만 그는 쉰다섯 살이고 코제트는 여덟 살이었으므로 자신이 앞으로 평생 품게 될 모든 사랑은 이제 뭐라 표현할 수 없는 하나의 빛 속으로 슬그머니 녹아들었다. 흰빛이 두 번째로 나타난 것이다. 미리엘 주교는 그의 마음의 지평선에 미덕의 새벽빛을 가져다주었으며, 코제트는 사랑의 새벽빛을 가져다주었다.”

 

법은 또 한 번 그에게 가혹했다. 아니, 밑바닥으로 내팽개쳐진 많은 이들에게 가혹했다. 장발장은 다시 장발장이 되어 투옥되었으나 탈옥한다. 그리고 팡틴의 딸인 코제트를 테나르디에 부부의 손아귀에서 빼낸다. 소설은 따로 설명하지 않았지만(내가 제대로 기억 못하고 있는 걸 수도 있지만), 장발장의 이번 탈옥은 사회 밑바닥 계층을 돌볼 줄 모르는 가혹한 법에 대한 반대급부 정도로 그 정당함과 불가피함을 부여하는 듯하다.

 

(2권 수도원 생활) 그는 자주 한밤중에 일어나 결백하면서도 엄혹함 아래 짓눌린 수녀들이 부르는 감사의 찬양 소리를 감동하며 들을 때가 있었다. 그리고 정당하게 벌을 받는 사람들이 하늘을 향해 고함을 지르는 것은 오직 저주하기 위해서였음을 생각하고 지난날 자신 또한 하느님을 향해 삿대질을 했던 일을 생각하면서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자비에의 추격을 피해 수도원으로 숨어 들어간 장발장과 코제트. 그는 그곳에서 또다시 자신의 과거를 뉘우치고 미리엘 주교의 숨결을 의식하게 된다. 동시에 모든 것으로부터 차단된 수도원 안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그리고 코제트를 보며 느끼는 한없는 기쁨까지.

 

(4권 비밀의 집) 이 행복은 오롯이 나의 것일까? 사실은 남의 행복, 이 아이의 행복을 나 같은 늙은이가 빼앗아 내 것으로 만들려는 욕심이 아닐까?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것은 도둑질과 같은 것 아닐까? 사실 이 애는 인생이 뭐라는 것을 알 권리를 갖고 있지 않은가! 처음부터 본인의 생각은 듣지도 않고 고통에서 구한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삶이 주는 모든 기쁨을 이 애에게서 강제로 뺏는 것, 이 애가 세상물정을 모르고 의지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이용해 순수성만을 강요하는 것은 오히려 한 인간의 본성을 해치는 것이고 신을 모독하는 것이 아닐까. 언젠가 뒤늦게 그 모든 것을 깨닫고 수녀가 된 것을 후회하는 날, 코제트가 나를 원망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 이 마지막 생각은 매우 이기적이고 다른 무엇보다 남자답지 못한 생각이었지만, 코제트가 자신을 원망할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그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수도원에서 나오기로 결심했다.”

 

마리우스 중심으로 서술되는 3권에서 분명 장발장과 코제트로 보이는 인물이 공원에 등장해 마리우스의 시선과 마음을 빼앗는다. 수도원에 있어야 할 그들이 어째서 속세에 나와 있을까? 그 이유를 4권에서 알게 된다. 장발장은 이제 철저히 코제트를 위한 삶을 산다. 물론 여전히 어려운 자들을 돕지만 코제트가 그의 삶의 목표이자 행복이자 모든 것이다.

 

(4권 다시 그것을 넘어선 슬픔) 그래 맞아. 그럼 놈은 대체 뭘 찾으러 오는가? 사랑의 모험을 하려 하는가! 무엇을 탐내고 있는가? 사랑의 유희를 탐내는 것인가. 그럼 나는 어떻게 되는가? 나는 더없이 비참하고 불행한 인간이고, 인생 60년을 남에게 복종만 하며 보내왔고 참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참아 왔고 젊은 시절도 가 버렸고 가족도 친구도 아내도 자식도 없이 살아왔으며, 온갖 돌 위에 들판 위에 벽 위에 피 흘리며 살아왔다. 갖은 수모를 받고도 참았고 어떤 심술궂은 일을 당해도 착하게 살아왔다. 모든 것을 극복하고 정직한 사람으로 살아왔는데, 저지른 죄를 참회하고 남이 나에게 한 나쁜 짓을 용서하고 이제야 겨우 그 보답을 받고 행복해하고 있는 이때, 바라던 것을 손에 넣은 지금, 대가를 치르고 내 것으로 만든 지금. 그 모든 것이 사라지려 하는가? 나는 결국 코제트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건가? 생명을, 기쁨을, 영혼을 잃어버리는 건가? 그것도 저 바보 같은 녀석 하나가 뤽상부르 공원에 와서 얼쩡거리는 것 때문에!"

 

마리우스와 코제트의 사랑이 무르익어가자, 그것을 알아챈 장발장은 심하게 갈등을 겪는다. 애지중지 키운 딸을 빼앗기는 듯한 아버지의 심정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코제트는 장발장의 삶 그 자체다. 코제트를 위해 탈옥을 한 순간부터 그의 인생은 두 가지가 지배했다. 미리엘 주교로 대변되는 양심과 코제트. 양심이 삶의 방향을 정해준다면 코제트는 행복의 척도다. 행복이 없다면 그의 삶은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5권 가방 속에 든 물건) 코제트와 둘이서 그 숲을 지났었다. 그때의 날씨, 낙엽진 나무들, 새들이 떠나 버린 나무들, 햇빛이 비치지 않는 하늘을 그는 기억해 냈다. 그래도 즐거웠던 한때였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장발장은 침대 위에 늘어놓은 작은 옷가지들을 하나씩 눈여겨보았다. 코제트는 이 옷들과 똑같이 조그마했었다. 커다란 인형을 팔에 안고 루이 금화를 앞치마 주머니에 넣은 채 웃고 있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손을 잡고 걸었다. 그녀에게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장발장밖에는. 그렇게 생각했을 때 그의 숭엄한 백발이 맥없이 침대 위로 떨어졌다. 그 강인한 늙은 가슴은 날카롭게 찢어졌다. 그의 얼굴은 코제트의 옷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만약 그때 계단을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다면 무섭게 흐느껴 우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장발장은 보편적인 잣대로 개인적인 삶을 살려 했지만, 주변 상황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런 게 정치고 혁명이다. 많은 걸 휩쓸 듯 쓸어가 버리는 것. 그것이 목숨이라 할지라도. 6월 혁명의 한복판에서 장발장은 마리우스의 목숨을 구해내고 그렇게 함으로써 마리우스와 코제트는 결혼할 수 있었다. 그게 코제트의 행복을 위한 길이라 여겼음에 분명하다. 결혼식을 마치고 피로연에서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온 장발장은 흐느낀다. 모든 것을 잃었으니까. 왜냐하면...

 

(5권 지옥과 천국) 잠자코 있는 게 아무것도 아닌 일일까. 침묵을 지키는 게 간단한 일이겠소? 아니오, 간단하지 않소. 침묵이 거짓말이 되는 수도 있소. 그리고 나의 거짓말을, 허위를, 비열함을, 비겁함을, 배신을, 죄를, 나는 한 방울 한 방울 마시고 토해 냈다가, 다시 삼키고, 한밤중에 끝냈다가는 한낮에 다시 시작할 것이고, 또 나의 아침 인사도 거짓말이 되고, 밤 인사도 거짓말이 되어, 나는 그 거짓말 위에서 자고 그 거짓말을 빵에 발라 먹고, 그리고 코제트와 얼굴을 맞대고, 천사의 미소에 지옥에 떨어진 자의 미소로 대답하는, 가증스러운 사기꾼이 되는거요!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소?”

 

장발장의 양심은 가혹하게도 자신의 과거를 숨기도록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과거가 마리우스와 코제트의 발목을 잡을 것으로 생각한다. 한 번 죄인은 영원한 죄인이라는, 낙인에 가까운 그런 인식은 발각되었을 경우 코제트에게 큰 짐이 될 것이고, 발각되지 않는다 해도 코제트와 그의 남편인 마리우스와 매일 집에서 마주치며 살 의도가, 용기가 그에겐 없다. 코제트가 마리우스와 결혼을 하면서 양지로 나서자 더 이상 감출 수가 없게 된 셈이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이런 생각이 든다. 책에 대한 평가 중에 장발장의 구원이란 단어가 여기저기 등장하곤 한다. 정말 장발장은 구원받은 걸까? 사회와 법률은 끝내 그에게 가혹했고(그를 제대로 알기 전까진 마리우스조차 장발장을 멀리하려 했다), 그 자신마저도 스스로에게 가혹했다. 지극히 인간적인 인물이 숱한 고뇌와 갈등을 이겨내고 종교적 성인의 느낌을 줄 정도의 삶을 살았다. 마지막에 다가온 좌절은 그의 삶을 거의 망가뜨렸지만 최후의 순간 선물같이 도착한 코제트와 마리우스로 인해 그 좌절을 극복할 수 있었다. 해피엔딩. 그래도 구원이란 단어가 여기에 맞는 건가? 한참을 생각하다 구원이란 단어에 사회성이 포함되지 않는다면 그 말이 맞겠구나 싶더라. 그리고 그제야, 그러니까 구원이란 단어의 속박에서 벗어나서야 <레미제라블>이 사회개혁 소설이란 말도 명확하게 이해가 됐다. 한 개인이 변화를 통해 구원을 얻는 이야기는 물론 감동적이지만 그 과정에서 드러난 각종 불합리한 것들을 지적하고 상기시키면서 독자들에게 알리고 변화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려 4개월이 넘게 붙잡고 있던 소설이었다. 번역이 얼마나 정확하게, 작가의 문체를 얼마나 살려서 이루어졌는지 알 수 없어서 단정지을 순 없겠지만 앞으로 책을 고를 때 작가 이름에 빅토르 위고란 글자를 본 순간, 멈칫할 거라 본다. 그렇다고 아예 손절할 거 같진 않다. 뮤지컬 쪽에 이 작가 소설을 원작으로 한 유명한 작품들이 꽤 있어서 궁금한 거 또한 사실이라. 하지만, 그래도. 당분간은 빅토르 위고 이 양반은 안 볼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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