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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사람 - 42년간의 한결같은 마음, 한결같은 글쓰기
정호승 지음 / 열림원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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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 시대의 대표 서정시인이라는 정호승 시인의 시선집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책장을 덮으며 한동안 그의 시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온갖 여러 가지 감정이 내 안에 뒤죽박죽 엉켜 붙어 정리하기가 쉽지 않다. 삶의 다양한 양태들을 해석하는 시인의 노래로 인한 감정들, 고달픔, 외로움, 절망, 분노, 죽음, 소멸, 연민, 반성, 사랑, 서글픔, 애잔함, 소망, 희망 등등 무수한 감정의 테러에 시달린다. 그저 한 동안 그 모든 감정 앞에 영혼을 맡겨본다.

 

그전부터 익히 알던 시도 있고, 새롭게 읽은 시, 새롭게 읽혀진 시들도 있다. 이 모든 시들이 준 감정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건 먹먹함이다. 여러 시편들에서 그 먹먹함을 느끼게 되지만, 유독 <못>이란 시가 뇌리에 남는다.

 

벽에 박아두었던 못을 뺀다 / 벽을 빠져나오면서 못이 구부러진다 / 구부러진 못을 그대로 둔다 / 구부러진 못을 망치로 억지로 펴서 / 다시 쾅쾅 벽에 못질하던 때가 있었으나 / 구부러진 못의 병들고 녹슨 가슴을 / 애써 헝겊으로 닦아놓는다 / 뇌경색으로 쓰러진 늙은 아버지 / 공중목욕탕으로 모시고 가서 / 때밀이용 침상 위에 눕혀놓는다 / 구부러진 못이다 아버지도 / 때밀이 청년이 벌거벗은 아버지를 펴려고 해도 / 더이상 펴지지 않는다 / 아버지도 한때 벽에 박혀 녹이 슬도록 / 모든 무게를 견뎌냈으나 / 벽을 빠져나오면서 그만 / 구부러진 못이 되었다

< 못 > 전문

 

문득, 연로하신 아버지가 떠오른다. 일평생 가정을 위해 애쓰신 아버지. 하지만, 가정을 위해 가정보다는 일을 우선하셨던 아버지. 그렇기에 자녀들과 살가운 대화조차 나누지 못한 아버지. 하지만 생각해보면, 우릴 무척이나 사랑하시고 아껴 주셨는데. 문득 어린 시절 아버지가 내게 볼을 비빌 때, 그 꺼칠꺼칠하던 느낌이 떠오른다. 이젠 내 아이들이 그 느낌을 받을 텐데 하는 생각과 함께. 이젠 시인의 노래처럼 구부러진 못이 되어버려 제대로 걷지 못하면서도, 힘들어 하는 아들을 보면 더 괴로울 것 같아 아들네 집에 찾아오지도 못하시는 아버지. 우리 모두 우리의 아버지들이 “한때 벽에 박혀 녹이 슬도록 모든 무게를 견뎌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음을 생각해본다.

 

그렇기에 나 역시 벽에 박혀 녹이 슬도록 모든 무게를 견뎌내 보자 다짐한다. 언젠가 나 역시 그러한 구부러진 못이 될 것이지만.

 

 

너무 무거운 감정을 털어보려, 시를 읽으며, 시인의 재치와 해학, 철학 그리고 시인은 넓은 마음까지 느꼈던 시, 와~~ 하며 이마를 치게 했던 시 한편도 함께 소개해 본다.

 

경주박물관 앞마당 / 봉숭아도 맨드라미도 피어 있는 화단가 / 목 잘린 돌부처들 나란히 앉아 / 햇살에 눈부시다 // 여름방학을 맞은 초등학생들 / 조르르 관광버스에서 내려 / 머리 없는 돌부처들한테 다가가 / 자기 머리를 얹어본다 // 소년부처다 / 누구나 일생에 한 번씩은 / 부처가 되어보라고 / 부처님들 일찍이 자기 목을 잘랐구나

< 소년부처 > 전문

 

비록 다른 종교를 갖고 있지만, 경주박물관에 갈 때마다 그 목 잘린 돌부처들의 모습에 마음이 좋진 않았다. 그런데, 시인의 눈은 역시 다르다. 그 돌부처들에 장난하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소년부처를 보는 눈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처럼 아름다운 눈을 갖고 싶다.

 

 

마지막으로 힘겨운 삶의 자리에서도 치열하게 살길 결단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시인의 또 다른 시를 소개한다.

 

개가 밥을 다 먹고 / 빈 밥그릇의 밑바닥을 핥고 또 핥는다 /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 몇 번 핥다가 그만둘까 싶었으나 / 혓바닥으로 씩씩하게 조금도 지치지 않고 / 수백 번은 더 핥는다 / 나는 언제 저토록 열심히 / 내 밥그릇을 핥아보았나 / 밥그릇의 밑바닥까지 먹어보았나 / 개는 내가 먹다 남긴 밥을 / 언제나 싫어하는 기색 없이 다 먹었으나 / 나는 언제 개가 먹다 남긴 밥을 / 맛있게 먹어보았나 / 개가 핥던 밥그릇을 나도 핥는다 / 그릇에도 맛이 있다 / 햇살과 바람이 깊게 스민 / 그릇의 밑바닥이 가장 맛있다

< 밥그릇 > 전문

 

나에게 주어진 삶의 밥그릇을 이제 나 역시 치열하게 핥고 핥아 그릇의 밑바닥까지 맛있게 먹게 되길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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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의 시간
도종환 지음, 공광규 외 엮음 / 실천문학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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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노래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노래할까? 물론 많은 노래의 소재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가운데 시인이라면 의당 노래해야 할 소재는 바로 시대적 아픔이 아닐까? 특히, 말의 통로가 닫혀 있던 시대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시인의 붓끝은 부패한 권력을 향해야 함이 마땅하다. 그럼으로 붓이 칼보다 강함을 보여줌이 시인의 역할이 아닐까?

 

도종환 시인의 시선집, 『밀물의 시간』을 읽고 묵상하며, 오랜만에 시대적 아픔을 노래하던 시인 고뇌를 느낄 수 있어 시간 여행을 하는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어쩌면 지금 이 시대 역시 이러한 시인의 역할이 강조되어질 시대는 아닌지 반문하게 된다.

 

『밀물의 시간』은 도종환 시인의 지나온 족적들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시선집이 아닌가 여겨진다. 첫 시집부터 최근의 시집까지 그 안의 주옥같은 시들이 담겨 있다.

 

도종환 시인의 시는 유명한 시들이 참 많다. 그리고 많은 시들에 시대적 아픔과 시인의 고뇌와 저항, 아이들을 향한 시인의 진실한 마음, 시인이 해쳐나간 삶의 무게가 담겨 있다. 특히, 사랑하는 아내로 인한 아픔들 역시 아름다운 시로 되살아나고 있다. 이러한 삶의 진정성이 그의 시에 힘을 싣고 있지 않나 여겨진다.

 

물론, 시인은 본인의 구체적 삶의 정황 가운데 시를 잉태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국 독자들이 시를 느끼고 해석해 나가는 것 역시 시인의 정황이 아닌 독자들의 정황의 지배를 받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렇기에 참 오랜만에 읽은 시대적 불의를 향한 저항의 내용들이 감회가 새로우면서도 유독 담쟁이란 시가 오늘 나에게는 가장 마음에 와 닿는다.

 

저것은 벽 /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 그때 /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

담쟁이잎 하나는 담쟁이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 담쟁이 > 전문

 

이 시가 발표된 해가 1993년이니까, 어쩌면 이 시는 시인이 몸담았던 전교조의 당시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잉태된 작품이 아닐까 여겨진다. 그렇기에 시인의 저항의식이 담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결국 연대함을 통해, 절망의 벽을 넘고야 말겠다는 희망의 투영일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이 시가 독자인 나에게 유독 가슴을 울리는 이유는 인생의 후반부를 준비하는 나의 지금 상황에 대입되기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내가 꿈꾸는 일들이 마치 절망의 벽처럼, 힘겨운 장애물이라 할지라도 결국엔 말없이 그 벽을 오르게 될 꿈을 이 시를 묵상하며 다시 한 번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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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면
이채현 지음 / 작가와비평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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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사랑한다면』을 펼치면 시인의 영성을 느낄 수 있다. 물론, 제목처럼 사랑을 이야기한다. 해설가의 말처럼, 그 ‘사랑’이 영성으로 가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그런데 문득 이런 질문을 던져본다. 여기서 말하는 이 ‘사랑’은 누구의 사랑이며, 누구를 향한 사랑인가? 시인의 사랑으로서 구체적 대상을 향한 사랑인가? 아니면 익명의 세상 모두를 향해 품는 사랑인가? 아니면, 인간이 아닌 신을 향한 사랑인가? 모두 맞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첫걸음은 날 향한 신의 사랑이 아닐까? 바로 그 사랑을 향한 시인의 영성을 느낄 수 있는 시를 뽑아본다.

 

겨울 밤 / 검은 산, / 삐죽이 머리카락 세워 / 쿡쿡 찌르는 어둠 //

하얀 소금, / 푹 / 푹 / 꿈틀꿈틀 / 단장(斷腸) / 꿰찔리는 / 영혼(靈魂) //

하얀 별, / 나폴 / 나폴 / 날아 앉는 / 숨 //

겨울 밤 / 산 너머 / 민땅에 오시는 / 붉은 아가

< 성탄(聖誕) > 전문

 

사랑의 첫걸음은 우릴 찾아오시는 그분에게 있다. 그분이 우릴 사랑하셨다. 그래서 신이 낮은 곳으로 친히 내려오셨다. 그분이 내려오셨던 그 때는 온통 얼어붙은 겨울밤이었다. 환한 빛보다는 온통 검은 산, 어둠이 짓누르고 있는 세상이다. 행복한 영혼보다는 단장의 아픔으로 상한 영혼들이 가득한 민땅에 찾아오셨다. 곱고 예쁜 모습이 아닌, 붉은 모습으로. 이것이야말로 시인의 영성을 보여주는 ‘사랑’의 첫걸음이 아닐까?

 

그리고 시인은 이러한 신의 사랑을 관념이 아닌, 삶을 통해 고백한다.

 

어둠의 성(城) 안 / 컴컴합니다. / 아버지 손잡고 들길을 걸어갑니다. / 달빛 따라 하염없이 걸었습니다. / 발등에 풀잎이 비벼댑니다. / 발끝에 돌들이 구릅니다. / 긴 머리카락 헤친 나무들이 출렁입니다. / 강물이 재잘대며 흐릅니다. / 별들이 잠들 대 아버지 팔 베고 나도 잠들었습니다. / 눈 뜨니 / 성문(城門) 밖 빛 속에 뉘어져 있습니다. / 나는 혼자가 아닙니다. / 어두운 밤 함께 아름답게 걸어주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 눈물 나도록 혼자인 날에 > 전문

 

시인이 걸어가는 삶의 길은 결국 홀로 걸을 수밖에 없는 길이다. 온통 어둠이 짓누르고, 돌멩이 가득하고 잡초로 뒤덮인 인생길이다. 그래서 눈물 나도록 혼자인 날이다. 하지만, 그 길을 함께 걸어주는 아버지가 계시다. 분명 눈물 나도록 혼자인 날이라 고백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렇기에 이 아버지는 신적 존재다. 그분이 함께 걷고 있다. 이것이 시인의 영성이 담긴 고백이다.

 

마치 나 홀로 걸어야만 하는 고달픈 인생길이지만, 영성의 눈으로 보면 붉은 아가로 오신 그분이 내 곁에 함께 함을 느끼게 된다. 비록 장래 일을 알 수 없는 컴컴하고 어두운 인생길이라 할지라도 결코 혼자가 아님을 시인은 안다. 신이 우릴 향해 사랑의 첫 걸음을 내딛으셨고, 지금껏 함께 걷고 계신다. 그렇기에 이제 시인 역시 그 ‘사랑’을 향해 첫걸음을 딛게 된다.

 

나는 작은 아이였습니다. / 산 너머 석양이 질 때 / 당신 품속으로 뛰어가 빨갛게 물듭니다.

< 작은 아이 > 일부

 

비록 시인은 작은 아이에 불과하다. 하지만, 우릴 위해 ‘붉은 아가’로 오신 그분 품속으로 뛰어가 안기게 된다. 그리곤 그 붉음에 물들게 된다. 이 ‘빨갛게 물듭니다’ 이것이야말로 시인의 위대한 발걸음이 아닐까?

 

여기 빨갛게 물들게 되었음은 이제 붉은 아가로 오신 예수의 정신에 함께 물들게 되었음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 이것이 또 하나의 사랑의 발걸음이다. 이제 주님의 정신으로 무장하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단순히 그분 품속에 안기기 위한 걸음만이 아니다. 그 정신에 붉게 물들어 그것 가지고 세상을 향해 또 하나의 발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이것이 참 사랑의 영성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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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 시산맥 서정시선 8
권순자 지음 / 시산맥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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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자 시인의 시집은 처음 접하게 되었지만, 벌써 시집을 5집까지 낸 중견(?) 시인이다. 금번 시집 『순례자』를 묵상하며, 먼저 느낀 느낌은 무거움이다.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무겁고 어둡다. 때론 고통스럽고, 때론 공허하다. 아픔과 눈물이 가득하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 가운데 밝은 빛이 존재한다. 이것을 시인이 노래하는 희망이라 말하고 싶다. 왠지, 시인이 전하고자 하는 바는 허무, 공허, 고통, 눈물, 아픔, 한숨에 있지 않고, 그것들을 지나 희망에로 나아감에 있지 않을까 여겨진다.

 

따라서 권순자 시인의 시세계에서의 무거움은 부정적 무거움이라기보다는 긍정적 무거움이라 말하고 싶다. 삶의 무게가 결코 가벼울 수 없기에 삶을 통찰하는 시인의 시세계는 무거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무거움의 끝은 희망, 밝음을 일구어낸다. 아픔이 아름다움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시인의 의도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시라는 것이 시인의 손끝을 떠나면 이미 시인의 것이 아닌, 독자의 것이기에 독자로서 시인의 시를 이렇게 해석해보고 싶다. 어두움을 뚫고 희망의 빛을 일구어내는 시로 읽고 싶다. 그런 구절들을 찾아본다.

 

지독한 겨울을 견뎌냈다네 / 바람에 폭행당하고도 눈물 흘리지 않았다네 / (중략) /

먹먹한 아픈 자리에 / 괴로움이 몸을 말고 기다리다가 / 어느 날 문득/ 하나씩 꺼내어 햇살에 내어놓네 / 울긋불긋 / 쟁여놓은 아픈 자리를 / 꿈길처럼 열어보이네

<상처에 피어나는 것들> 일부

 

삶은 지독한 겨울과 같다. 하지만, 겨울이 끝은 아니다. 겨울 뒤엔 반드시 봄이 온다. 지독하리만치 힘겨운 인생의 겨울이지만, 그 겨울을 견뎌낸 후에는 그 삶의 무게 하나하나가 햇살에 비춰지고, 결국 상처에서는 울긋불긋 피어나는 꿈길이 있다.

 

어둠이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시간이면 / 어제의 기억들이 하얗게 쏟아졌다 // (중략)

핏빛 울음도 붉어지던 눈자위도 / 기다림의 시간을 달이고 달이면 / 꽃보다 환한 빛으로 태어나는가

<어두워지면> 일부

 

어둠과 상처를 지나 하얗게 소금이 쏟아져 내린다. 꽃보다 환한 빛으로 태어나기 위해선 핏빛 울음도 붉어지던 눈자위도 거쳐야 한다. 그렇다. 인고의 시간 없이 밝음의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비록 지금은 상처뿐인 시간일지라도, 견뎌낼 때, 꽃보다 환한 빛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세상의 텅 빈 모퉁이에서 / 꽃을 피워 올리는 손들이 있다 / 삶은 늘 소용돌이라서 / 자주 허리가 휘고 손마디가 꺾이곤 하지만 / 곡괭이로 쇠스랑으로 긁어댄 자리마다 / 뽀지직뽀지직 땅이 열리고 / 독백처럼 낮은 소리로 흔들리며 / 아픈 열탕 같은 세상 속으로 오는 발길이 있다 // 어둑한 걸음으로 / 어두운 기슭으로 오는 것들의 / 궁금한 발길들 / 구부러진 길에는 푸른 꽃들이 피고 / 파닥거리는 작은 잎들이 환한 잠을 깨우고 있다

<들판에 봄이> 일부

 

모든 것이 풍성하며 가득 찬 여름에서 봄이 시작되진 않는다. 되려 텅 빈 모퉁이의 삶 속에서 봄이 시작된다. 지금 텅 빈 모퉁이를 돌고 있는가? 실망하지 말자. 그 모퉁이를 돌면 날 위해 꽃을 피워 올리는 손들이 있을 것이기에...

 

아픔 사이로 빛이 걸어온다 / 환하고 눈부신 상처 사이로 온다

<봄날> 일부

 

그렇다. 아픔 사이로 빛이 걸어온다. 우릴 향해... 가슴이 뛴다. 그 빛을 소망하기에...

 

오직 한 길만 아는 이 / 그저 하편향할 뿐이다 / 추락이 아니라 더 낮아지기 위하여 / 몸부림칠 뿐이다 / 더 낮고 더 외진 곳을 향하여 / 때론 깊은 계곡에서 무지개를 피우기 위하여 / 더 깊고 더 음습한 그늘을 향한다 / 부서지는 것은 통증만 유발하는 건 아니다 / 산산이 부서짐으로써 / 더 새로워지고 더 맑아지고 / 더 생생해지는 것이다

<폭포> 일부

 

폭포는 더 낮고 외진 곳을 향해 떨어진다. 더 깊고 음습한 그늘을 향한다. 하지만, 그것은 통증만 유발하는 것이 아닌, 무지개를 피워 올리기 위한 몸부림, 더 새로워지고 더 맑아지고 더 생생해지기 위한 몸부림임을 발견하는 시인의 눈이 아름답다. 그렇다. 어두움 후에 빛이 옴이 삶의 진리다. 이 진리를 붙드는 인생은 더 새로워지고, 더 맑아지고, 더 생생해지게 될 것이다.

 

삶은 자작나무 사이로 부는 바람이다 차가운 날이 있었지 지금은 훈훈한 입김이 다정하다

<초원의 노래2> 일부

 

어지럽다. 잊어버려. 인생은 그런 거야. 상처도 아물 거야. 내 봄바람 같은 풀잎으로 네 얼굴 닦아줄게.

<초원의 노래4> 일부

 

인생은 다 그런 것이지만, 상처는 곧 아물 것이라는 시인의 외침. 차가운 날이 있었지만, 지금은 훈훈한 입김이 다정하다는 시인의 고백. 이것들이 우리의 것이 되길...

 

부서지고 부서져, / 부글대는 물거품이 되더라도 / 땀내 나는 생은 / 축제의 시간! //

파란 불꽃은 비와 구름을 부르고 / 황홀한 광기는 / 가슴 속을 비집고 들어가는 화살이네 // 이 기쁜 소용돌이에서 / 기꺼이 겨루는 생의 질주 // 들끓다 고요히 돌아오면 / 거품들이 안개로 피어 하늘로 올라가는 / 꿈을 꾸네

<축제> 일부

 

인생은 결국 축제의 시간. 부서지고 부서지지만, 부글대는 물거품으로 사라지는 듯 보이지만, 결국에는 안개로 피어 하늘로 올라가는 축제의 시간이다. 우리 그 축제의 시간을 즐거워하자. 아픔, 고통, 눈물, 한숨, 상처가 있다 하지라도, 그것을 지나 희망의 공을 띄워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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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그리는 방법 - 2015 화이트 레이븐즈 선정도서 문학동네 동시집 31
송진권 지음, 송지연 그림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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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권 시인의 첫 동시집, 『새 그리는 방법』은 첫 시집 『자라는 돌』(창비)에 이은 두 번째 시집이다.

 

이 동시집을 읽고 묵상하며, 느끼게 되는 가장 큰 감정은 그리움이다. 자연에 대한 그리움, 옛 시간에 대한 그리움, 곁을 떠난 사랑하던 이들을 향한 그리움, 심지어 옛 시절의 궁색한 삶에 대해서도 그리워하며 시인은 노래한다. 어쩌면 한 마디로 이미 흘러가버린 옛 추억에 대한 그리움이 아닐까?

 

옛 시간들은 사실 궁색함이 가득한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 추억이 담겨져 있고, 그리움이 담겨져 있다. 시인은 당시의 궁색한 시절을 그리워하며, 유머로 승화시키기도 한다. <비료의 3요소>가 이것을 잘 보여준다.

 

비 오는 아침, 우산이 없어 아버지 비료 푸대를 우산 대신 쓰고 가라고 잘라 주셨다 비료 푸대 쓰고 학교 가는 길, 비료 냄새 나는 비가 오는 길에 기석이도 영애도 비료 푸대 쓰고 학교 간다 나는 질소비료, 기석인 인산비료, 영애는 가리비료, 학교에서 배운 비료의 3요소 모두 나왔다 우린 튼튼하게 쑥쑥 잘 클 거다 비료의 3요소가 다 모였으니

< 비료의 3요소 > 전문

 

시인이 그리워하는 그 시절은 마땅한 우산 하나 없던 시절이다. 그렇기에 비가 오는 날이면, 아버지가 비료 푸대 한 쪽을 잘라 주신다. 머리 위로 뒤집어 쓴 비료 푸대에서는 비료 냄새가 진동한다. 하지만, 부끄럽지 않다. 왜냐하면, 모두 다 비료 푸대 쓰고 등교하는 시절이기 때문이다. 비료 푸대의 종류도 가지가지다. 질소비료, 인산비료, 가리비료. 그래서 비료의 3요소가 다 모였다. 그 비료 푸대를 쓰고 등교하는 궁색한 시절이지만, 그 어린이들은 쑥쑥 잘만 크게 될 것이다. 식물을 쑥쑥 자라게 할 비료 푸대를 뒤집어썼으니 말이다. 궁색하지만, 그 시절을 그리워하며 유머로 승화하는 시인의 마음이 잘 느껴진다.

 

또한 시인의 그리움은 당시 구수한 사투리로 드러나기도 한다. 시인의 시 곳곳에는 구수한 사투리가 풍겨난다. 그 중 하나.

 

오빠랑 언니들도 아까부터 지달리구 있는디 / 뭘 그르케 자꾸 꾸물대는 겨 /

그르케 자꾸 꾸무럭거리믄 떼 놓구 갈 텡께 알아서 햐 /

어여어여 날 새기 전에 가야 하니께 / 싸기싸기 내려오니라 /

< 이소 > 중에서

 

옛 시골 어른들의 흔하디 흔한 말투다. 서두르지 않으면 떼어놓고 가겠다고 으르는 옛 부모들의 말투가 정겹게 들린다. 그런데, 이 말은 원앙네 어린 새끼 새들이 둥지를 떠나며 하는 말이다. 옛 고향의 원앙 가족의 풍경과 어르신들의 정감이 하나 된다.

 

또한 시인의 상상력이 유독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은 하얗게 핀 아카시아 꽃잎을 보며, 빨래터에서 어머니가 힘겹게 빨래를 두드릴 때, 방울방울 생겨나던 비눗방울을 연상하기도 한다. 아마도 시인은 고향 뒷 언덕과 엄마의 힘겨운 삶을 함께 묶어 그리워하나보다.

 

버글버글 거품 일군 아카시아 나무들이 / 산 하나를 다 치대고 헹궈 가며 빨래를 빨고 있어요 / 팡팡 방망이질도 하면서 / 깨끗하게 꼭 짜서 탈탈 털어 널어놓았어요

< 아카시아 빨래터 > 전문

 

시인으로 말미암아 옛 고향 풍경과 함께 추억여행을 떠나보게 됨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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