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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아름다울 때 내 곁엔 사랑하는 이가 없었다
김경주 지음 / 열림원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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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시극[詩劇]”이다. 마치 연극 무대를 감상하는 것과 분위기이지만, 산문보다는 대체로 운문으로 대화를 하게 되는 그런 시극. 처음 접하는 장르의 책이기에 약간 어색했다. 하지만, 읽어가는 가운데, 그 안에 빠져들게 된다. 금세 읽을 분량이기에 한번 읽은 후에는 다시 한 번 훑어보며 그 여운을 즐겨본다.

 

무대는 폐기된 해수욕장의 작은 파출소. 한 사내가 파출소 직원에 의해 업혀 들어온다. 업혀온 사내는 김씨다. 김씨는 고무인간이다. 반은 인간, 반은 고무인 고무인간. 그의 다리는 기껏 15센티미터 가량. 그 다리를 기다란 고무 튜브로 감싸고, 길바닥을 기어 다니며 구걸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바다를 향해 기어가다, 파출소 직원에 의해 업혀 온 거다. 이렇게 파출소에서 둘은 대화를 나눈다. 주로 이 둘의 대화가 시극의 주를 이루고 있다.

 

김씨는 땅바닥을 기다가 사람들에게 손을 밟히면 하늘을 올려본다 말한다. 그렇게 올려다본 하늘엔 물고기들이 날아다닌다고. 김씨는 물고기가 되길 꿈꾼다. 왜냐하면, 물고기는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항 안의 물고기 지느러미 냄새를 맡아본 적이 있단다. 그곳 물고기의 지느러미에서는 무슨 냄새가 날까? 김씨는 꿈 냄새가 난다고 한다.

 

그렇다. 그에게는 물고기가 되어 자유롭게 물속을 헤엄치는 꿈이 있다. 언제나 바닥이 익숙한 그는 다시 태어나면 물고기가 되고 싶어 한다.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인생보다는 물고기가 되어 물속을 자유롭게 헤엄침이 더 낫다 여겼을 터. 어쩌면, 그 꿈을 찾아 바다로 기어갔던 건 아닐까? 어쩌면, 김씨는 자신의 몸 절반을 뒤덮고 있는 고무 튜브가 마치 물고기의 지느러미가 되길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김씨는 땅을 기어 다닐 때, 선글라스를 낀다고 말한다. 그런데, 선글라스를 끼는 이유는 자신의 창피함을 감추기 위해서가 아니다. 사람들의 눈을 보지 않기 위함이 아니라는 말이다. 도리어 사람들이 김씨의 눈을 보면 불편해할까 봐 선글라스는 낀단다. 사람들은 김씨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한다. 왜? 작은 동정을 지불하기도 부담스러워서일까? 부끄럽고 안타까운 마음이 내 안에 자리한다.

 

그는 또한 나비의 연한 발목을 바라보곤 했다고 말한다. 실처럼 가늘고 긴 나비의 발목, 하지만, 그에게는 그나마 가는 발목조차 없다. 나에게 없는 것이기에 어쩜 더욱 아름답게 여겨졌을지도.

 

이런 김씨와 대화를 나누는 파출소 직원은 이제 은퇴가 몇 날 남지 않은 늙은 경찰이다. 이제 곧 폐쇄될 해수욕장, 그리고 그 안의 파출소와 운명을 같이하게 될. 그런 그에게도 상처가 있다. 자폐를 앓던 아들이 집을 나가고, 그 아들의 죽음과 함께 아내 역시 죽음을 선택했던 것. 그는 다리가 있지만, 그 역시 파출소와 그 관할 구역을 제외하곤 어느 곳도 향할 수 없는 다리 없는 인생이다. 그리고 가슴 속에 견딜 수 없는 슬픔을 품고 있으면서도 술로 위장하며 살아가는 인생이다.

 

어쩜, 우리네 인생은 이처럼 아픔이 가득할까? 우린 누군가의 다리가 되어주기보다는 왜 누군가의 남은 다리나마 밟고 살아가는가? 왜 우리는 남에게 밝힐 수 없는 아픔 하나씩 감추고 살아가야만 하는가? 안타깝다.

 

그렇다. 인생이란 누구나 아픔 하나쯤 감추고 살아가는 게다. 그렇기에 극 중에서 김씨는 말한다. 자신은 언제나 땅바닥에 있기 때문에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고. 그것은 바로 ‘몰래 떨어진 눈물’이라고. 이처럼 누구나 남이 알까 두려워 남 몰래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는 인생이다. 그런데, 그 눈물은 언제나 따뜻하다고 김씨는 말한다. 그래, 오늘 우리가 남 몰래 흘리는 눈물, 아픔의 눈물, 고통의 눈물도 따뜻하다는 것. 우린 이것을 잊지 말자.

 

슬픔이 있고, 눈물이 있지만, 그럼에도 살아 있음은 따뜻한 것이다. 우리 안에 아픔 하나씩 감추고 있다 하지라도 이 세상은 여전히 살만한 곳이다. 작가는 김씨를 통해 말한다. 사랑은 이불 속에서 지느러미를 부비며 노는 것이라고. 그렇다. 우리에 삶 속에 다리가 찢기고 그저 지느러미 하나 불쑥 튀어나와 있다 할지라도, 그 상처 난 지느러미를 서로 부비며 노는 행복이 우리에겐 여전히 존재한다. 오늘도 삶의 지느러미를 내 곁의 사랑하는 이들에게 맞대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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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詩 - 돈에 울고 시에 웃다
정끝별 엮음 / 마음의숲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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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돈 詩』는 돈과 연관이 있는 시들을 모아 놓은 시집이다. 엮은이는 돈에 관한 시들을 엮은 것만이 아니라, 그 시들 하나하나에 대한 해설을 덧붙이고 있다. 이러한 해설이 시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물론, 그 해설이 절대적이지 않음도 당연하지만 말이다. 아울러, 이처럼 한 가지 주제로 여러 시들을 묶어 우리로 하여금 그 주제에 대한 풍성한 시들을 감상할 수 있게 해줌이 참 감사하다.

 

돈은 우리가 살아감에 있어 이제는 수단에 머물지 않고, 우리의 삶을 간섭하는 절대자의 자리에 앉게 되지 않았나 싶다. 그런 돈의 절대성에 대해 시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나는 어느덧 세상을 믿지 않는 나이가 되었고 //

이익 없이는 아무도 오지 않는 사람이 되었고 /

이익 없이는 아무도 가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

부모형제도 계산 따라 움직이고 /

마누라도 친구도 계산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 되었다 //

나는 그게 싫었지만 내색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고 //

너 없이는 하루가 움직이지 않고 /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박용하, < 돈 > 전문

 

그렇다. 우린 이제 돈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들이 된 것은 아닐까?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우린 자본주의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옳은지 그른지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가 바로 이러한 돈의 힘에 의해 좌우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생산수단을 가진 자본가 계급이 노동자 계급으로부터 노동력을 사서 생산 활동을 함으로써 이익을 추구해 나가는 경제 구조 또는 그 바탕 위에 이루어진 사회제도”

 

이러한 사전적 정의로 보더라도 우리 사회는 가진 자들이 갖지 못한 자들의 노동력을 돈으로 사서 이루어지는 활동 위에 세워진 사회이다. 그렇기에 우리 모두는 노동력을 팔게 된다. 물론, 어떤 이에게 그 노동력은 남들보다 더 가치 있다 하여 노동에 비해 더 많은 것을 받는 반면, 또 어떤 이들의 노동력은 상대적으로 가치 없다 하여 적은 것을 받게 된다. 과연 그 가치는 누가 정하는 걸까? 물론, 가진 자들, 노동력을 사는 사람들이 정하는 거겠지. 그리고 그들이 정한 노동력 가치대로 대가를 받기 위해 자신들의 삶을 팔고, 또한 버텨낸다.

 

나는 소금 병정 / 한 달 동안 몸 안의 소금기를 내주고 / 월급을 받는다 /

소금 방패를 들고 / 거친 소금밭에서 / 넘어지지 않으려 버틴다 /

소금기를 더 잘 씻어 내기 위해 / 한 달을 절어 있었다

 

윤성학, < 소금 시 > 일부

 

이렇게 삶을 버텨내는 생활인들, 오늘도 삶을 위해 삶이 절어 있는 샐러리맨들에게 격려를 보낸다.

 

그렇다면 시인의 노동력은 얼마나 평가 받을까? 아마도 많은 평가를 받지 못하나 보다. 그렇기에 이 시집 가운데 많은 시들은 시인의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노래가 참 많다. 하지만, 이처럼 힘겨운 삶이 시인들의 삶뿐이겠는가? 오늘 대다수의 소시민들의 삶이 힘겨운 삶이다. 딱 먹고 살만큼 얻기 위해 다른 것에는 눈 돌릴 여력도 없이 살아가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가?(어쩌면 딴짓 하지 못하도록 먹고 살만큼만 노동력을 평가받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고) 그러니, 돈이 원수 아닌 원수가 되었다. 바라기는 돈 때문에 울지 않고, 돈 때문에 서러운 인생들이 적어질 수 있다면 좋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돈을 초월한 노래가 마음을 따스하게 한다.

 

내게 땅이 있다면 / 거기에 나팔꽃을 심으리 /

때가 오면 / 아침부터 저녁까지 보랏빛 나팔 소리가 / 내 귀를 즐겁게 하리 /

하늘 속으로 덩굴이 애쓰며 손을 내미는 것도 / 날마다 눈물 젖은 눈으로 바라보리 /

내게 땅이 있다면 / 내 아들에게는 한 평도 물려주지 않으리 /

다만 나팔꽃이 다 피었다 진 자리에 / 동그랗게 맺힌 꽃씨를 모아 /

아직 터지지 않은 세계를 주리

안도현, < 땅 > 전문

 

나에게는 땅도 없다. 아이들에게 물려줄 변변한 재산도 없다. 하지만, 시인의 노래처럼 “아직 터지지 않은 세계”, 그것을 물려주고 싶다. 그래서 오늘도 아이들에게 사랑의 꽃씨, 희망의 꽃씨, 꿈의 꽃씨를 모아준다. 결국엔 아이들의 삶 속에서는 그것들이 활짝 피어 아름다운 노래로 그네들의 삶을 즐겁게 하는 축복이 있길 소망한다.

 

『돈 詩』, 철저한 세속적인 주제이지만, 결코 세속적이지 않고, 도리어 먹먹함 가득한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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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잔의 시놉시스
이석규 지음 / 해드림출판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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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규 시인의 첫 시집, 『빈 잔의 시놉시스』에는 이런 수식이 붙어 있다. “타고난 노스탤지어, 낙타의 시인”이라고 말이다.

 

“타고난 노스탤지어”란 말은 그의 많은 시가 그리움에 대해 노래하기에 이런 수식어가 쉽게 이해된다. 특히, 시집의 제2부의 제목 자체가 “그리움”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시인의 이러한 그리움은 어머니를 향한 것으로 포문을 연다.

 

쓸쓸쓸 / 울 어머니 길쌈하는 소리가 들린다 / 허리를 펴는 소리도 들린다 /

그 소리 뒤에 주름진 이마도 보인다 / 그러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

쓸쓸쓸 / 매미가 울면 나의 불효가 쏟아진다 /

맨날 투정해도 그저 조용히 날 감싸는 어머니 / 치마 끄는 소리만 크다 //

더위가 한창인 여름에 / 매미는 어머니 속에 있고 / 매미는 내 속에도 있어 //

쓸쓸쓸 / 매미가 울면 울 어머니 / 막 보고 싶다

< 매미 > 전문

 

누구나 그렇겠지만, 우리의 근원적 그리움은 어머니가 아닐까 싶다. 어머니야말로 생존여부를 떠나 내 영혼의 영원한 고향이기에 그렇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 어머니를 떠올리면, 언제나 불효만 했음을 깨닫게 되어 먹먹해진다. 대학시절, 등록금을 내야할 때가 되면, 언제나 어머니는 친지에게 돈을 꾸곤 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할지라도 돈을 꾼다는 것은 자존심을 버리는 행위다. 그 옛날 4년제 대학을 나오시고, 처녀 시절 미니스커트를 입으시던 신여성인 어머니(올해로 77세가 되셨다)는 자녀의 미래를 생각하며, 자존심도 버리고 돈을 꾸러 다니시곤 했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학업에 최선을 다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시절의 불효가 떠올라 어머니를 떠올리면 언제나 죄송하며, 마음이 먹먹해지곤 한다.

 

시인 역시 그랬나 보다. 매미가 한참 울던 무더위 속 여름에도 길쌈하던 어머니, 허리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하던 어머니의 허리 펴는 소리는 유달리 크게 들렸을 것이다. 우리네 어머니들의 허리 펴는 소리는 모두 ‘아이구 아이구’라는 소리와 함께이니 말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매미가 ‘쓸쓸쓸’ 울 때마다 그 어머니의 사랑과 헌신, 그 수고로움을 떠올리며 그리움에 몸부림친다.

 

 

그렇다면 또 하나의 수식어, ‘낙타의 시인’은 무엇일까? 물론 시인의 의도가 어떨지 모르지만, 이미 시는 시를 잉태한 시인의 손을 떠났다. 그리고 이젠 그 시를 읽고 감상하는 독자의 것이 되었다. 그렇기에 시인의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독자의 시선으로 시를 바라보며 해석해 본다.

 

시인이 유독 많이 노래하는 것은 파도(바다를 포함), 시, 그리고 낙타다. 왜 이토록 시인은 낙타에 집착할까? 낙타는 시인에게 무엇이기에? 아마도 낙타는 시인에게 있어 욕망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어쩌지요 길이 트여 덜컥 우리 만나면 / 낙타의 등에 솟은 혹처럼 /

나의 오욕들이 들통날까봐 가슴 조이고 있으니

< 봄길 > 일부

 

만약에 당신이 내게 오신다면 / 이런 새벽시장으로 오실 것 같아서 /

당신이 그리운 날엔 언제나 눈깔을 부리부리 굴리며 /

등에 큰 혹 단 채로 / 동대문 새벽시장에 가 있을 것입니다.

< 서울 낙타 > 일부

 

두 개의 시 모두에서 시인은 그리움을 노래한다. 그 그리움이 사랑하는 이를 향한 그리움일 수도 있고, 오지 않는 봄을 향한 그리움일수도 있다. 무엇이든 만남을 향한 그리움을 품는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그 만남의 그리움은 인간적 욕망으로도 표현된다. 그렇기에 낙타의 혹을 말한다. 그리움으로 인해 너무나도 만나고 싶지만, 정작 만났을 때, 자신의 실체, 그 욕망이 드러날까 가슴 조인다. 그 욕망이 바로 낙타로 상징된다. <서울 낙타>에서도 그리움과 미망이 바로 이런 등의 큰 혹으로 연결된다.

 

그렇다. 누구나 이러한 혹 하나쯤 달고 살고 있지 않을까? 아니, 수많은 욕망의 혹들이 달린 것도 모르고 살고 있는 모습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아울러 이러한 욕망은 시를 향한 욕망으로도 노래되고 있지 않나 여겨진다. 시인에게 시는 그리움이며, 또 한편으로는 욕망의 혹이기도 하다.

 

하지만, 시인은 낙타를 이처럼 욕망으로만 보지 않는다. 아니 궁극적으로 시인에게 있어 낙타는 치열한 삶을 향한 투쟁의 수단, 급하지는 않지만 삶의 모든 역경을 이겨내는 모습이 바로 낙타의 모습이 아닐까 여겨진다.

 

좋아한다고 빨리 가면 발병 난다 / 낙타로 가라 /

고비를 넘어 / 어깨에 손을 얹고 같이 걸을 때까지는 //

모래바람이 끝없이 불면 / 길 위에 그 이름을 펼치며 가라 //

좋아하는 마음의 길은 / 본디 사막이니까 /

사막에선 선인장으로 굴러가라 / 굴러서 사랑 그대에게로 가라 //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 내가 바로 사막인 까닥이다 //

어서 빨리 가야 하는데 / 황사까지 끼어 앞을 가릴 때는 /

말없이 흩어지는 구름으로 흩어져서 가라 / 흘러서 외롭게 가라.

< 사랑 > 전문

 

아까부터 당신을 기다리고 있지요 / 아무리 날씨가 변덕스러워도 우리는 /

마음의 울타리를 높여 절망을 막아야 해요 / 낙타가 되어야 해야

< 봄길 > 일부

 

그렇다. 우리 삶 앞에 어떤 어려움이 놓여 있다 할지라도, 비록 그 어려움이 모든 생명을 앗아가는 사막과 같은 환경이라 할지라도, 그 사막을 뚫고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낙타와 같이 나아가야 한다. 그렇기에 시인에게 있어 낙타는 삶의 투쟁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시집의 서시로 돌아가면 낙타의 의미가 더욱 선명해지지 않을까 여겨진다.

 

어디에 있든지 / 어떤 환경에 처해 있든지 /

그대는 불꽃들이 들어찬 가슴 열고 / 나와야 한다 //

짙푸른 바다를 사모하는 강물처럼 / 머뭇거리지 말아야 한다 //

어서 / 묶여있는 배의 돛을 세워야 한다 //

< 서시 > 일부

 

우리 시인의 외침처럼, 사막과 같은 삶 속에서 한 마리 낙타가 되어 나아가자. 망망한 인생의 바다 속에서도 돛을 올리고 나아가자. 머뭇거리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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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느끼던 밤을 기억하네 - 엄마 한국대표시인 49인의 테마시집
고은.강은교 외 지음 / 나무옆의자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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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표시인 49인의 엄마에 관한 시를 모아 놓은 시집이 있다. 『흐느끼던 밤을 기억하네』(이 책 제목은 이 책에 실려 있는 박주택시인의 <메모리얼 파크>의 싯구에서 따왔다)가 바로 그것이다.

 

먼저, ‘엄마’라고 불러야 할까? ‘어머니’라고 불러야 할까? 어린 시절 언제나 ‘엄마’라 부르던 호칭이 어느 순간부터 ‘어머니’로 바뀌게 되었음을 문득 생각해 본다. 아마도 철부지 아들에서, 아직 턱없이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약간 철들기 시작하며, ‘어머니’라 부르기 시작한 건 아닐까 여겨진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하기도 한다.

 

누구나 세 분의 당신을 모시고 있다 / 세상을 처음 열어주신 엄마 /

세상을 업어주고 입혀주신 어머니 / 세상을 깨닫게 하고 가르침 주신 어머님

 

김종철, <엄마, 어머니, 어머님> 중에서

 

‘엄마’라 부를 때, 우린 마냥 따스함과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마치 ‘엄마’ 품에 안긴 아기가 된 양. 이것이 ‘엄마’란 단어가 갖는 힘이다. 힘들고 외로울 때, 우린 ‘엄마’를 부르며, 알 수 없는 위로와 힘을 얻기도 한다. 왜냐하면, 시인의 고백처럼 그분은 바로 날 향해 세상을 열어주신 분이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엄마’앞에서 우린 영원히 아이에 머무르게 된다. 이것이 ‘엄마’라는 단어가 갖는 힘이다.

 

하지만 ‘엄마’는 또한 ‘어머니’로 고백되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엄마’가 내게 쏟은 그 희생과 사랑을 알게 될 때, 자연스레 ‘어머니’로 고백되기 때문이다(물론 그럼에도 여전히 ‘엄마’의 측면도 강하지만 말이다). 이 ‘어머니’를 읊조릴 때, 나도 모르는 사이 눈에 습기가 차오른다. 이게 ‘엄마’란 단어의 또 다른 힘이다.

 

우릴 위해 끊임없이 희생하시는 분. 아낌없이 주길 원하시며, 정작 당신은 누릴 줄도 모르시는 분. 그렇기에 그분을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맺힘이 어쩌면 당연하다. 특히, 나처럼 어머니에게 많은 눈물을 흘리게 한 불효자에게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세상의 온갖 즐거움에 빠져 방황하던 시절, 어머니가 남몰래 밤마다 흘렸을 눈물의 기도가 있음을 안다. 그리고 그 눈물의 기도 덕에 지금 내가 있게 되었음도 말이다. 마치 성경에서 아브라함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던 것처럼,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 덕에 내가 하늘의 은총을 누리고 있음을 고백한다. 사랑하는 아들이 사람구실 하길 바라며 간절함을 담아 흘렸을 어머니의 기도가 있기에 오늘의 내가 있다. 물론, 자식은 여전히 부모의 걱정이자 기도제목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토록 날 위해 희생하는 엄마를 잘 보여주는 시가 있다. 박지웅 시인의 <찬밥>이란 시 가운데 이런 글귀가 있다.

 

자식 오는 길 그 눈 내린 밤길을 비로 쓸어놓았는데 /

당신 머리에 내린 눈은 녹지도 않고 쓸어내릴 수도 없네

박지웅, <찬밥> 중에서

 

언제나 자식들을 생각하며, 당신이 힘든 것은 생각지 않는 어머니. 요즘도 어머니를 찾아뵈면, 가장 많이 하는 말씀 가운데 하나는 “좀, 누워 자라!”다. 어머니에게는 언제나 아들이 힘든 것이 걱정인 게다. 당신은 더 힘겨운 삶을 사시며 말이다. 이 시처럼, 자식 오는 길을 위해 밤새 눈을 쓰시며, 정작 당신 머리에 내린 눈은 쓸어내리지 않으시는 어머니의 사랑이 있기에 오늘 내가 있음을 고백해 본다. 자식을 향한 그 어머니의 눈물을 언제나 잊지 않고 사는 자식이 되길 다짐해 본다. 물론, 아무리 그럼에도 어머니의 사랑에 비할 것이 아니겠지만 말이다.

 

차가운 날씨, 긴 밤에 이 시집을 통해, ‘엄마’의 사랑을 다시 한 번 느껴보며, 그 어머니께로 우리의 마음이 향해보는 건 어떨까? 그리고 그 엄마의 품에 안겨보자. 내가 어떤 모습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받아주시는 그 어머니의 품으로.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 목숨이 끊어진다 해도 /

최후의 순간까지 변하지 않을 사랑 / 들린다, 들린다 / 어머니다 //

어머니는 육신의 근원 / 내 몸 받은 날로부터 / 발 헛디뎌 밖에서 /

안으로 되돌아가는 길은 / 어머니에게로 가는 길이라는 생각 //

어머니에게로 가는 길은 / 내가 가는 것이 아니라 /

어머니가 나를 받아주는 것이라는 생각, / 또한 문득.

이흔복, <어느 봄날의 생각, 문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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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의 손바닥
가네꼬 미수주 지음, 고오노 에이지 옮김 / 책마루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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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국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가 윤동주시인의 서시라는 기사를 어디에선가 본 기억이 있다. 가히 윤동주시인은 요즘 말로 국민시인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감히(?) 그런 윤동주시인에 비교되는 시인이 여기 있다. 바로 여류 동요시인인 가네꼬 미수주가 그 주인공이다. 일본의 윤동주 시인이란다.

 

그 시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감상해본다. 역시 그런 찬사를 들을만한 아름다운 동시들이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너무나도 예쁘고, 아름다운 시인의 마음을 물씬 느낄 수 있는 시가 가득하다. 이렇게 예쁜 시를 읊조렸던 시인이 26세의 젊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음이 안타깝다. 더 많은 시를 우리에게 남겨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을 만큼 그 시가 예쁘다. 특히, 어른이 동심의 세상을 엿보며 어설프게 아이의 입장에서 노래하는 느낌이 아닌, 진짜 아이가 때 묻지 않은 순수하고 아름다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노래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예쁜 시들이 참 많지만, 그 가운데에서 시인의 마음, 시인의 영성을 느낄 수 있는 시 몇을 소개해본다.

 

엄마 / 집 뒤 나무 밑에 / 매미 옷이 / 있었어요 //

매미도 더워 / 벗었어요 / 벗고 잊고 / 가버렸어요 //

밤이 되면 추울 텐데 / 어디로 갖다 / 줄까요

< 매미의 옷 > 전문

 

매미가 변태하며 벗어놓은 허물을 시인은 매미가 벗어 놓은 옷으로 바라본다. 너무 더운 날씨에 매미가 벗어 놓은 옷으로. 그리고 그런 매미가 이제 밤이 되면 추워할까 걱정하는 그 마음.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인가!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지며 흐뭇해지는 시가 아닌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맙시다 / 아침 뜰 한 구석에서 / 꽃이 살며시 우는 일 //

만약 소문이 퍼져 / 벌의 귀에 들어가면 /

나쁜 짓이라도 하듯이 / 꿀을 돌려 드리려 갈 것이니

< 이슬 > 전문

 

아침 이슬을 꽃이 흘리는 눈물로 바라볼 수 있는 그 마음이 부럽다. 그런 눈을 나 역시 가졌으면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렇다면 꽃이 왜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나? 그건 벌이 꽃의 꿀을 가져갔기 때문이다. 그러면 벌이 나쁜 녀석일까? 아니다. 시인은 벌이 나쁘다 말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맙시다’ 말한다. 만약 꽃이 울고 있음을 벌이 듣게 된다면, 벌이 마치 나쁜 짓이라도 한양 꿀을 돌려주려 할 테니 그래서는 안 된단다. 꿀을 빼앗고 울고 있는 꽃, 그리고 벌 역시 나쁘지 않은 착한 마음의 소유자로 묘사하며 노래하고 있음이야말로 시인의 아름다운 영성을 알게 한다.

 

위에 눈 춥겠다 / 차가운 달빛 내려 있고 //

아래의 눈 / 무겁겠다 / 몇 백명을 등에 업고 //

가운데 눈 / 외롭겠다 / 하늘도 땅도 못보고

< 쌓인 눈 > 전문

 

시인의 마음 씀씀이가 너무 예쁘지 않은가! 쌓인 눈을 보며, 위에 있는 눈은 차가운 달빛 때문에 추울까 염려하며, 아래의 눈은 무거울까 걱정한다. 그렇다면 가운데 눈이 제일 좋을까? 아니다. 가운데 눈은 위의 하늘도, 아래의 땅도 볼 수 없기에 외롭겠다며 안타까워한다. 얼마나 예쁜 마음인가? 우리에게 이런 마음이 있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더 아름다워질 것이다.

 

이처럼 아름다운 영성과 마음을 소유한 시인이 불행한 환경 속에서 결국엔 자신의 목숨을 다하게 됨이 가슴 아프다. 반면 이율배반적으로 이처럼 예쁜 시를 알게 되어 행복하다.

 

너무나도 예쁘고 좋은 시집이다. 단지 아쉬운 점은 출판사의 출판준비가 너무 미흡했음이다. 시 본문들에도 오타가 곳곳에 보인다. 시집의 오타는 처음이다. 뿐 아니라, 책날개의 저자 소개에도 오타가 있다. 나는 시집 뒤편에 수록된 해설은 거의 읽지 않는다. 하지만, 너무나도 예쁜 시의 여운을 즐기기 위해 뒤에 수록된 해설을 읽다가 다 읽지 못하고 책장을 덮고 말았다. 그곳에는 더 많은 오타가 마치 지뢰밭처럼 날 공격하기에. 이런 아쉬운 점을 고쳐서 다시 책을 출판한다면 너무나도 좋은 시집, 요즘 말로 강추 할 만한 동시집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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