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낮은 언덕들
배수아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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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낯설었다. 언젠가 작가 배수아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었지만 정작 그녀의 소설을 읽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다. 그 때 읽었던 내용을 기억하면 좀 편해지리라 생각했지만 그런 것은 허황된 꿈이었다. 그녀는 너무 낯선 인물이었다. 경희처럼.
  신작 ‘서울의 낮은 언덕들’에서 서울은 그리 많이 나오지도 않았고 또한 주요 무대도 아니었다. 또한 이 책 속의 주제는 어쩌면 많이 봤던, 아니면 익숙한 그런 것이라 느껴졌다. 도시 속에서의 소외감이나 고독감, 그리고 도시에 대한 부정적 인식들은 배수아 작가만의 보관물도 아니기 때문이다. 심지어 작가 한강처럼 세상으로부터 스스로 격리하기 위해 식물이 되는 소설도 있고 보면 작가 배수아가 담고 있는 이야기는 매우 일상적이고 소소한 그런 것들로 채워졌다. 다만 그녀는 다른 매력을 통해 작가의 독특함을 자아낸다.
  이해 불가능? 아니 이해하기 조금 어렵다. 작가의 독특한 관형절이나 관형어는 지금까지 접해보지 못한 脫평범한 것들이었으며, 세상 역시 평범한 일상이 비일관적으로 뒤틀려 있었다. 특히 현대의 지독한 병의 원인 중 가장 큰 위력을 보이는 자기만의 일방적 표현, 그에 따른 소통의 단절, 그리고 그로 인해 벌어지는 인간적 Cool함 등은 소설 곳곳에 활약하면서 소설 속에 담겨 있는 세상은 복잡하고 뒤엉켰고 이해가 매우 힘든 세상으로 변했다.
  어쩌면 우린 그런 사회에 살고 있는 듯 하다. 특히 무수히 반복되는 도시와 도시인이란 어휘 속엔 그런 세상을 필연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리라. 이런 내용 역시 사실 흔하지만 배 작가가 풀어내는 형상화는 기이하면서도 무척 섬뜩하고 기괴한 세상이다. 죽음이 자연스레 나오고 무관심은 도처에 흔하다. 그 속의 인간들과 그들의 관계를 표현하는 어구들은 매우 기계적이고 화학적이고 단절되고, 파괴적이며, 또한 다시 듣고 싶지 않을 만큼 냉정하다. 내가 만약 그런 어휘들을 내 옆에 있는 사람들과 사용한다면 그 이후의 결과는 얼마나 참혹할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다. 더구나 우리가 알고 있다는 확신이 사실은 얼마나 허약한 기반 위에 나열되고 있는지를 보여줄 때, 마치 공포영화를 보는 서늘함도 느낀다.
  주인공은 ‘경희’란 여자다. 시작부터 기이한 직업인 무대 낭송 배우란다. 어차피 도시의 기이한 경험을 시켜주려는 작가의 의도인 듯한 이 장치는 결국 마지막까지 독자를 괴롭히는 장치들을 계속 보여주는 맛보기다. 경희란 여성의 과거는 서사가 진행되면서 한 커플씩 벗겨진다. 결국 평탄하지 못한 그녀의 과거와 그로 인한 것인지 정확한 판별은 할 수 없지만 거칠고 메마른 그녀의 어조와 태도는 세상과의 불협화음을 일으킨다. 더구나 그녀는 자신이 속해있는 도시를 벗어나기 위해 기이한 단체라고 할 여행단체인 카라코럼은 과연 현실에 존재는 하는 것인지 모를 만큼 괴이한 성격을 지닌 여행단체로 보인다.
  하지만 그녀의 과거 이력이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녀의 여행 목적은 도시를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다. 하지만 비행기를 타고 다른 곳으로 가봤자 공항을 지닌 그곳 역시 도시다. 그런 것을 벗어나기 위해 도보로 국경을 넘으려 하지만 그것 역시 좌절된다. 현대란 시대에 그런 몸부림은 결코 현명할 수 없고 또한 도시인은 도시에서 밖엔 살 수 없는 태생적 비극을 안고 있는 존재다. 그래서 도시 속의 부정적 요소를 벗어날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만 경희는 그것들을 독자들에게 괴이하게 확인시킨다.
  가족, 현대의 도시인들이 꿈꾸는 궁전이다. 그러나 그곳 역시 도시인들에겐 잃어버린 세계인지 모른다. 소설 속 주인공 경희의 가족은 결코 따뜻한 곳이 아니었다. 함께 살면서도 서로의 진정한 모습을 확인하지 못함은 물론 함께 살면서도 서로가 비밀이란 장막으로 드리워진, 결코 상상할 수 없는 가족이란 집단으로 이뤄졌다. 더구나 언니가 사라진 과정과 이후의 변화 역시 비일반적이다. 있을 것만 같지만 결코 존재하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가족만은 아니다. 피상적인 부분들로만 존재하는 기억 속의 존재들 역시 부정확하고 그래서 기댈 수도 없다. 부유하며 긴장하면서 억지로 사는 도시인들의 가련한 인간 군상이 더없이 소설에서 형상화되고 있는 것이다.
  경희의 과거가 불확실하고 또한 우울함의 연속이어서인지 그로 인해 경희 역시 떠도는 구름과도 같다. ‘서울의 낮은 언덕들’은 그래서 비현실적이다. 그러나 현실적이기도 하다.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모든 것들은 불확실하고 파열되고 분절된 단어들을 통해 기록되고 보존된 그런 것들이 사실은 불확실하고 아련할 뿐, 매우 불안한 국면에 처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과 비현실 모두를 담고 있는 이 소설을 통해 독자는 자신의 주변이 과연 정상적이었는지를 돌아보게 될 것이다. 마치 나처럼 말이다. 존재의 나약함 속을 느끼며 말이다. 이 소설, 참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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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절반쯤 왔을 때 깨닫게 되는 것들
리처드 J. 라이더 & 데이비드 A. 샤피로 지음, 김정홍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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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의 절반쯤 왔을 때, 많이 힘들어진다. 어른이 되어서인지 지나온 세월만큼 책임의 무게를 느끼면서도 앞으로 짊어져야 할 짐 역시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짐의 하중은 결코 줄어들 것 같지 않아 보이는 그 시간, 사람은 그래서 지치기도 하면서 낙담하게 된다. 성공의 가치를 부나 명성의 크기로 잰다면 성공이란 표현이 결코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그럭저럭 사는 정도의 수준을 의미할 뿐이다. 언제나 목표는 사람을 이렇게 지치게 만든다. 어느 순간 목표가 끝났다고 하는 순간 또 다른 목표가 연이어 이어지는 것, 그것이 인생이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타성이든 선입견이든 다들 그렇게 생각하면서 사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은 피곤하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건강을 걱정하면서도 미래의 일정 소득이 없을 때의 상황을 걱정하기에 피곤한 것들을 다 이끌고 미래라는 시간으로 다가간다. 과거의 모든 부담을 짊어진 채로 미래로 달려가는 모습은 마치 무거운 짐을 지고 여행을 떠나는 여행객과 같다. 여행은 어떻든 즐기는 것이 목적인 행위다. 그러나 여행의 목적에 반하게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것은 그 목적에 반하는 것이 된다. 무거운 것은 부담이고 고생이다. 그 고생을 위해 설마 여행을 가려는 자는 없을 것이다. 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자위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면 계획을 제대로 하거나 아니면 짐을 덜어야 한다. 지혜롭지 못한 여행은 고생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깨우침이 없기에 그렇게 하는 우를 범한다. 이 책은 이런 어리석은 인생을 여행에 비유한다.
  첫 글부터 인상적이었다. 잔뜩 짊어진 짐의 강점을 자랑하려 했던 딕을 깨우치게 했던 마사이족의 코에이의 질문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목적만을 지상 과제로 삼고 끊임없이 내달리고 있는 현대인들의 약점을 송곳처럼 찌른 ‘이 모든 것이 당신을 행복하게 해줍니까?’라는 질문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크나큰 자성을 이끄는 말일 것이다.
  세상살이가 재미없어진 것인 것은 경제적 풍요가 붕괴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 때문에 그럴 수 있다. 그리고 무척 큰 상관관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경제 호황기에도 인생의 절반을 지닌 이들은 언제나 고민이 많았다. 어쩌면 나이를 불문하고 자신의 나이나 상황에 따른 책임과 임무를 부여 받기에 편한 날들이 그다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인생이 고행이란 것은 경제 호황기나 불황기를 가리지 않았던 것 같다. 인생을 목적을 이루는 과정이라고 생각한 것 때문이다. 성적표에서 원하는 점수나 등급을 받느냐 못 받느냐에 따라 행불행이 결정된다. 대다수는 그런 결과치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성적표엔 경쟁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경쟁에서 설사 이겼더라도 다음 단계의 승부가 기다리고, 그래서 과거의 짐을 잔뜩 안고 나서 다음 경기를 준비한다. 그래서 점점 무거워지는 짐들 때문에 힘겨워하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못한다.
  인생을 즐기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과거의 포기 못한 책임들까지 힘겹게 짊어지면서 다음 인생의 일정을 준비하는 상황에서 자유로운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는 것들에 억지로 매달려 사는 인간들이 자신의 삶 절반에 다다를 때조차도 그 이유도 모르면서 힘겹게 사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이 책은 그런 어리석음을 지적한다. 무엇보다 인생의 진미는 목표에 있는 것이 아닌 그 여정 속에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목표를 이루는 도전이 아니라 그 도전을 하면서 만나게 되는 새로운 것들이야말로 인생을 행복하게 만드는 힘들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작가는 자유를 주장한다. 그리고 기존의 인생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을 위한 새로운 도전을 언제나 준비하고 떠날 것을 권고한다. 지금까지 쌓아올린 것을 포기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여정 속에서 새로운 활력과 여유를 얻을 수 있고, 역시나 과거의 책임을 떨쳐 보내고 새로운 삶을 살면서 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미래라는 여정을 즐길 것을 권하는 것이다.
  참으로 어려운 선택이 될 것이다. 지금의 인생이 편안한 것을 아닐 수 있어도 미래의 새로운 선택이 마냥 즐겁거나 편안할 리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선택 속에서 과거의 짊을 덜어 내고 좀 더 여유로움 속에서 미래로의 여정 과정을 즐기면서 간다면 보다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란 이야기는 분명 귀담아 들어야 할 내용이다. 그것은 꼭 현재의 자신과 전혀 다른 삶을 살라는 것은 아니다. 지금의 마음가짐을 새롭게 정의하고 과정을 즐기는 여유를 갖게 된다면 새로운 길의 개척만큼의 새로운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렵겠지만 인생의 어느 쯤에 한 번 해봄직하고, 과거의 구속으로부터 탈피, 자신의 인생의 참맛을 느끼고 새로운 인생을 사는 지혜를 얻을 것이다. 쉽지 않지만 매우 매력적으로 들리는 제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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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림이다 - 동서양 미술의 완전한 만남
손철주.이주은 지음 / 이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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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은 소금인 것 같다. 좋은 글엔 언제나 인생이란 소금이 있어야 제멋이다. 괜히 아는 척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뭔가 아는 그런 것이 있어야 글을 읽는 재미가 있는 것이다. 어쩌면 대충 넘어가는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뭔가 경험했던 그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과거의 어떤 경험을 되새기게 하는 이미지를 은근 슬쩍 집어넣는다면, 그리고 어떤 수긍을 이끄는 것이라면, 그것은 막연을 넘어 그때의 뭔가를 다시금 느끼게 하는 즐거움이 있기 마련이다. 이 책, 어른이 다 되고만 두 글쓴이들의 재미있고, 유쾌하면서도 깊이 있고, 그러면서도 해학과 친밀감이 듬뿍 들어있다.
  최근 들어 가장 사람들의 입에 오르는 단어가 바로 ‘소통’이다. 자신의 주관적인 이야기만을 퍼붓듯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둘 이상의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는 물론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뭔가 좋은 긍정의 시너지 효과를 내고자 하는 의식이자 행위다. 이것은 갈등을 드러내면서 그에 대한 치료를 통해 보다 긍정적인 관계로 나아가기 위한 첫 단추이며, 어쩌면 마지막 단계이기도 하다. 손철주 기자와 이주은 교수는 이런 수고를 통해 서로의 교감을 확인함은 물론 그것을 읽어 내려가는 독자 역시 그들의 관계에 끼어들게 유혹함으로써 보다 많은 관계를 양산하는 시도를 한다. 아마도 편지를 주고 받는 내용으로 책을 읽는 경험이 거의 없던 나에게 이런 도전은 색달랐고 재미있었다.

 


  서로 다른 세계에 살았던 이들이 책에서 만난다. 저자 둘은 길은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가 미술을 업으로 사는 이들이다. 손철주 기자는 자신을 ‘미술 담당 기자’로 소개하면서 주로 동양화에 대한 소개와 그에 대한 나름의 해석을 통해 글을 시작한다. 반면 언어학과를 학부로 삼았으면서도 동시에 이미지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서양미술사를 연구했고, 이화여대 박물관에서 연구생활을 하더니 나중에 성신여대 미술교육학과 교수로 활동하고 있는 다양한 경력을 소유한 이주은 교수는 손 기자의 동양화에 서양화 소개로 자신의 역할을 결정한다.
  동양화와 서양화, 저자들은 각자 다른 시작점으로부터 하나의 공통점으로 천천히 나아간다. 다루고 있는 그림의 소재는 물론, 글 쓰는 문체조차 확연히 다른 이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것을 통해 점차 가까워지려는 노력을 한다. 시작은 좀 가벼운 듯 하다. 손 기자가 미인도로 자신의 첫이야기를 풀어 나가기 시작했다면 이 교수는 바쿠스의 포도주로 시작한다. 즐거움의 향연들이라 할 이 주제들은 서로간의 긍정적인 만남을 위한 시작이리라. 그러나 이야기 주제들은 점차 인생의 다채로움을 경험한 이들만이 이야기할 수 있는 것들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그리움, 성공과 좌절, 내가 누구인가, 나이, 행복, 일탈 등 살아온 이들이 어느 순간 만났던 중요한 갈등들을 그들은 각기 다른 방식의 글재주를 통해 풀어나간다. 손 기자가 구름 속을 거니는 듯한 유연한 필력으로 환상 속의 구름을 거닐 듯 이야기한다면, 이 교수는 현실의 한 가운데 있는 듯, 결코 외면하지 못한 현실을 자신의 글 속에 담는 듯 진중하면서도 심도 있는 글을 쓰고 있다. 하지만 각기 다른 방식의 글 구성과 문체일 뿐, 어쩌면 그들은 같은 현실에 대해 같은 내용을 달리 풀어나가는 듯 하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동양과 서양, 남자와 여자, 과거의 한자 시구를 통한 표현에 대한 매우 현대적인 진지함을 지닌 문장 등은 표현 방식에서의 둘의 차이점을 드러내는 것이지만 자동차와 기차를 선택했을 뿐, 목적지가 같은 곳으로 지향하며, 서로의 느낌이나 지향점이 무척 비슷하다는 것을 소통하고 있는 듯 하다.
  매우 재미있는 시도였다. 동서양에 대한 차이를 피상적으로 이해했던 것이 일상이었던 독자들에게 이 책은 어떤 점에서 다른지 그리고 그 차이를 넘은 공통점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찾아간 작품인 것이다. 시작은 분명 차이점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그 시작점은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심한 몸부림을 하며, 각 주제에 대한 자신의 이야기들을 담은 그림과 그에 대한 해석을 통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며, 상대의 작품과 그에 대한 해석이나 인생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우선 그들이 선택한 주제는 어떤 점에선 가볍지만 어떤 면에선 매우 무겁게 다가오는 것들이다.  그것을 통해 삶을 관통하고 있는 현실과 의미, 그리고 그에 대한 진지한 성찰 등이 책 곳곳에 넘쳐 흘렀으며,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그에 대한 현명한 해결방법이 어떤 것이 있을까 하는 심도 있는 고민을 담고 있다. 그러면서 보다 의미 있는 삶을 동서양의 그림은 어떻게 제시하는지를 살피기도 했다. 아마도 즐거운 그림 여행에서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진미이다. 그들의 쉽지 않은 동서양 그림을 통한 대화의 가치가 아마도 여기에 있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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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당신들의 나라 - 1%를 위한 1%에 의한 1%의 세상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전미영 옮김 / 부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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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자본주의가 비판 받고 있다. 특히 소련의 붕괴 이후 유일한 대안이 되어서 ‘역사의 종언’이란 칭송까지 얻었던 그 자본주의가 이제 그 한계를 다하고 있는지 모른다. 자본주의에 대해 꼭 사회주의 이론만 공격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자본주의를 비판하면 무조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로 매도하는 악습이 존재하고 그것을 획책하면서 구멍투성이의 자본주의를 옹호하려는 구습이 존재하는 이 때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책 [오! 당신들의 나라]는 매우 강한 비판을 제시한다.
  신랄한 비판이었다. 그리고 열심히 비판했다. 자본주의의 본질에 대한 분석도 좋았고, 책상 앞에서 이야기하지 않고 항상 현장을 통해 얻은 경험으로 비판한 만큼 매우 구체적이고 생동감이 있다. 모든 면에서 공감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자본주의의 폐해를 직접 경험하면서 그 과정과 속 내용을 끊임없이 파헤치고 있는 저자의 모습은 단순한 자본주의 불평 블러거와는 다른 모습이다. 분노가 그녀의 글을 이끌었겠지만 그것을 단순한 분풀이로만 사용하려 하지 않았다. 미국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미국의 문제점을 강한 어조로 풀어내고 있다.
  빈부격차의 심화가 빚어낸 사회적 위기를 풀어낸 부분들 중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1장의 ‘불평등의 깊은 골’다. 앞서 이야기된 구도이긴 하지만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면 부자는 자신의 과잉자본을 이용, 빈자들의 부를 더욱 갈취하는 방식을 취하기 마련이다. 이 점이 바로 상대적 빈곤의 최고의 문제점이다. 이런 것을 단순한 감정 정도로만 처리하면서 부자들에 대한 부러운 시기 정도로만 매도한 극우 학자들에게 제대로 한방 먹인 부분이다. 대자본의 CEO들이 엄청난 돈을 챙기면서도 그 돈이 부당한 현실 앞에 허덕이는 빈자들, 혹은 노동자들로부터 온다는 것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많은 학자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불쌍한 구도는 공교롭게도 이민자들에 대한 분노로 표출되고 있다. 이 책에서 밝힌 부분은 아니지만 사실 강한 자본가들에겐 감히 대적하지 못하고 불쌍한 이민자들을 타박만 하고 있는 정부와 노동자 자체의 문제점도 있을 것이다. 제대로 분출되지 못한 분노일 것이다. 이런 제대로 되지 못한 분노로 인해 효과적인 분노는 일어나지 않고 그 결과 이 책에서 담고 있는 4장 ‘지옥 같은 일터’나 5장 ‘암보다 무서운 의료 제도’와 같은 현실이 벌어지는 것이다. 결과는 그리 좋은 편도 아니고 앞으로도 그럴 상황이다.
  저자는 행동을 요구한다. 반항이 아닌 긍정적 저항일 것이다. 과거 클린턴 정부와 부시 정부에서의 신자유주의정책으로 인해 벌어진 미국의 위기는 사실 그들만의 위기로 끝나지 않고 전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자신들의 문제를 해외에서 갖고 온 차관으로 메운 것도 다 아는 사실이다. 그들의 약점을 이런저런 이유로 외부에 떠넘긴 이런 사연으로 인해 현재 미국의 위기는 다른 나라들도 같이 경험하고 있다. 그들만의 문제가 이젠 아닌 것이다.
  뭘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를 이 시점에서 이 책이 주장하는 행동은 매우 중요한 문제제기다. 뭔가를 바꾸기 위해선 뭔가를 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아직도 퇴행적인 방식으로 기존의 재벌구조의 경제틀을 유지하려고 하는 한국경제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한다. 경제는 언제나 계급관계를 규정하며, 화합이냐 갈등이냐를 결정한다. 거의 갈등만을 유발한 것이 자본주의 경제이고 보면 자본주의 역사는 갈등의 역사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살기가 그럭저럭하니 그냥 안주한 삶이 지금까지였다면 앞으로 그것이 허락은 되지 않을 듯 하다. 중산층 붕괴에서 거의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붕괴를 피할 도리가 과연 있을까?
  1%, 정말 이젠 듣기 싫은 소리며 표현이다. 이들이 자행한 폭력에 속수무책인 미국은 물론 한국 역시 이들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모든 것을 빼앗는다. 애런라이크는 그것을 이야기하고 많은 이들이 공감한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다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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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시대 - 춘추전국시대와 제자백가 제자백가의 귀환 1
강신주 지음 / 사계절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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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나키스트, 혹은 양주와 견해를 같이 하는 철학가의 해체와 선별, 그리고 분류작업이 어떤 것인지를 기대하게 한다. 그것도 개인적으로 무척 관심이 많은 시대인 춘추전국시대의 철학자들을 다뤘다니 더욱 그렇다. 책의 저자는 춘추전국시대의 수많은 사상가들을 분류했던 역사가들 뒤에 존재하는 정치적 힘에 주목하며, 그것들을 분류한 관점을 해석하고 해체한다. 그것을 통해 뒤에 존재하는 정치적 관점이나 개인적 관점을 드러내며, 그 다음부터 작가는 자신의 관점을 기반으로 비판하고 재구성한다. 그런 과정에서 그의 비판과 재구성 기반은 바로 양주, 혹은 아나키스트다. 즉 국가의 폭력성의 단점을 부각하고 그것을 통해 국가의 불필요성과 해체에까지 이른 철학가들의 관점을 수용한 것이다.
  철학자든 역사가든 과거를 자신의 논거로 활용할 때, 언제나 선택하는 근거는 바로 자신의 관점이다. 언제나 자신의 관점을 주장하게 되면 이전, 혹은 동시대의 철학자나 역사가들을 비판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점에서 관점은 독선으로 불릴 수도 있고, 흐를 수도 있다. 자신의 관점이 옳다라는 유혹은 언제나 존재하며, 그것을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한다. 비판이 어느 정도 타당성은 있지만 비난은 어느 각도에서도 가능할 수 있으며 비판적 관점이나 이론이 대중성은 확보할 수 있지만 얼마큼 효율적인지는 두고 볼 일이다. 그런 점에서 아나키스트의 비판은 어느 정도 타당성과 대중성이 있어 보이지만 사실 역사적으로 어느 정도의 타당성과 가치가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정부가 없던 시대를 살지 못했기에 언제나 아름답게 윤색될 수 있는 위험성이 있고, 설사 아름다운 무정부상태가 있었다 하더라도, 과연 오늘날, 많은 이들이 정부가 없는 시대를 살 수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인문학과 사회과학이 나누는 기준이 어떤 것인지 잘 확인은 안 된다. 다만 나와 너란 공동체 범위와 우리란 범위 정도로 구분된다는 인상은 받게 된다. 이 둘은 다루는 분야가 서로 너무 달라 비판이 금지되어 있는 분야인 것도 같다. 그래서 사회과학자들이 인문학자들을 비판하는 것은 마치 축구를 좋아하는 이가 야구 매니아에게 왜 축구를 좋아하지 않느냐고 타박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역으로 인문학자들이 사회과학자들을 비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사회과학은 그 ‘우리’란 범주로 인해 책임을 져야 하는 불운을 갖고 있다. 정치학, 경제학 등의 사회과학자에게 있어 자신의 아이디어에 대한 책임이 채택될 경우 그 책임의 범위는 공동체 크기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과학자들이 자신의 관점이나 대안을 내놓을 때, 자신의 모든 것을 걸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 사회과학자들은 인문학자가 부러울지 모르겠고, 어쩌면 양자(양주)가 국가를 비판하는 태도가 부러울 뿐이다. 사회과학자들은 결국 정부를 다루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양자는 아마도 사회과학자들을 어리석은 자들로 평가할지 모르겠다. 괜한 고통을 사서 하는 이들이라고. 하지만 그런 고민을 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민주주의도, 복지정부도, 그리고 개인의 책임을 지켜주는 정부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양주의 견해를 더 이상 처벌하지 않은 사회도 오지 않았을 것이다. 한비자는 불필요한 학자들을 삭제시키라고 했고, 진시황은 분서갱유를 일으켰다. 오늘날의 사회과학자들은 그런 독단적인 정권을 비판하며, 그에 항거했고, 그리고 마침내 여기까지 왔다. 최소한 많은 철학자들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할 만큼의 사회를 이루는데 나름 공헌했다.
  양자는 물론 저자는 국가, 혹은 정부에 대한 도구론을 기반으로 정부의 절대성을 부정한다.  그리고 춘추전국시대에 아나키스트로서 정부의 역할을 축소하거나 부정하는 철학자들을 발굴한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이 의도하는 목표이기도 하다. 하지만 춘추전국시대의 철학가들은 도가라는 묶인 철학자들을 빼곤 어떤 면에선 정치학자로서의 측면이 강하고 그래서 인문학자가 다루는 분야보다 사회과학자들의 관심이 더욱 적절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되는 분야기도 하다. 그런데도 양자의 관점을 따르고 있는 저자는 춘추전국시대의 철학가들을 분류한 이들 이면의 정치적 상황과 정치적 권력관계를 파헤치면서 권력관계를 따르는 사가들을 비판하는 측에 선다. 일리는 있지만 당시의 사가들 역시 자신의 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랬을 것이고, 그것은 마치 양자의 견해의 타당성을 만들기 위해 선 저자의 의도와도 다르지 않다. 다만 향하는 방향과 목적이 다를 뿐이다. 또한 양자의 비판은 국가에 관한 것이며, 이 점에서 국가의 절대성을 부정한 도가들 역시 이미 사회과학자들이다. 이 점에서 양자는 물론 도가의 모든 사상가들 역시 사회과학자들이다.
  인간은 착한데 국가와 지배자의 속성을 담은 국가기제의 타고난 문제점으로 인해 세상사람들의 불운이 강해졌다는 인식은 상당히 오랜 기간 지속됐다. 특히 그 중심엔 도가라고 할 수 있는 철학자들이 존재하며, 그 중 양자의 견해가 가장 주목되는 것 같다. 매우 강력한 이기주의자로 평가되곤 한 양자의 개인주의는 유별나기는 한 것 같다. 그다지 많지 않은 자료로 그의 많은 이야기들을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그는 정부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은 확실하다. 많은 이론가들도 국가 혹은 정부의 문제점을 언제나 인식하고 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런 정부와 국가를 어떻게 좋은 기관으로 만들 것인가 하고 고민을 했다면 양주, 노자, 장자와 같은 이들은 차라리 무시했다. 그래서 이들 도가 철학자들에게 있어 정부는 죄악이 되거나 삶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삭제해야 할 기관일 뿐이다.
  이것이 옳은지 아닌지를 확인할 방법은 없다. 또한 과연 작은 규모의 공동체의 사람들이 지금의 시대에 가능한지, 잘 모르겠다. 그런 시도를 하고 있는 미국 Arizona의 Argosanti와 같은 특별한 공동체가 주목 받고 있지만 아직도 그들의 성과를 확인하는 것은 요원할 따름이다. 차라리 욕심을 촉발시키는 세상의 모든 광고나 광고판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 더 빠르고 확실한지 모르겠다. 그러나 어떤 방법을 사용해도 힘들긴 마찬가지이리라. 도리어 어떤 시도도 바보와 같은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세상 살아가는 것은 뭘 해도 어려운 법이니까 말이다.
  저자는 오늘의 관점에서 사마천이나 반고 등의 역사서를 비판한다. 하지만 각자의 시대에 맞게 역사서는 제작되는 법이고, 오늘날 유행하는 관점에서 역사를 다루는 법이다. 이제 사마천이나 반고 등의 역사서는 열심히 분해되고 해체되면서, 그 속의 권력적 요소들은 물론 당시 시대의 정치권력기관을 정당화했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 그런 비난은 하지만 냉정할 수도, 냉정할 리도 없다. 관점은 싫든 좋든 주관적이다. 그것도 정확하게 역사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아나키스트라면, 그리고 많은 이들이 아직 동의하기에 주저하는 아나키스트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럼 무정부상태를 시험하고 보자라고 이야기하기에도 너무 위험부담이 크고, 그것은 많은 이들의 동의를 구해야 할 사안이다. 다만 색다른 시각을 전해주고 새로운 생각을 일깨운다는 점에선 매우 긍정적이다. ‘만약 A가 없다면’이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도리어 A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비판이 비난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결국 비판이 비난이 되는 현실은 피할 수 없다. 역사책의 교본이란 ‘사기’와 ‘한서’는 당시 정치권력의 의도를 보여주는 작품이란 평가를 받고서 해체되는 과정을 보면 더욱 그렇다. 다만 가혹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시대적 흐름을 외면하고 사는 철학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 당시의 시대적 흐름을 기본 전제로 삼고 사는 철학자가 과연 적을까? 설사 안티테제에 선 자들 역시 어떤 전제에 따라 자기 이론을 펴기 마련이고, 그것이 옳고 그른지를 정확하게 판별하지 못한 채 자행되기 마련이다. 정부가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모르고 정부에 관해 이야기하는 철학자들은 사실 없다. 알면서도 어떻게 하면 바꿀 수 있나를 고민하는 법이고 역사가들 역시 같은 고민을 할 뿐이다. 그들도 용기는 있을 것이니까 말이다.
  사실도 불분명한 1000년 이상도 더 된 과거의 이야기를 오늘에 재구성하면서 작가는 자신이 이상으로 삼는 사회를 기준으로 재편집한다. 특히 에필로그에서 시경 속의 이야기를 갖고 당시 여성들의 적극성을 이야기하면서 오늘의 애정관과 비교해서 그 진솔성을 이야기하지만 사랑에 적극적인 것은 어쩌면 근대 이후에 들어와서 보다 적극적이었는지 모른다. 과거의 이야기가 있다 해서 그것을 사회의 일반적 풍속도로 몰아간다면 현재의 작품이나 드라마는 숫자로도 훨씬 풍부하고, 결국 과거보다 지금 더욱 진솔할 것이다. 정말 진솔함을 따진다면 현재 제작되고 있는 아이돌 그룹의 가사나 그들이 찍고 있는 영상작품들의 수위는 결코 과거에 비해 손색없이 진솔하다. 차라리 더할 것이다. 차라리 그때나 이때나 인간은 다 비슷하다라는 결론이 훨씬 현명하다. 과거의 신화적인 세상을 기준으로 현대를 비판하는 것은 매우 중국 철학가적인 사고다. 하지만 과거를 살지 못한 이들에겐 너무 가혹한 기준일지 모른다.
  유가, 묵가, 도가 법가 등의 구분은 한 제국의 정치권력을 위해 일하는 관료들이 사후적으로 만든 범주에 지나지 않는다고 저자는 보는 것 같다. 하지만 저자 역시 1000년도 넘은 시간이 지난 후에 시도되는 범주일 뿐이다. 다만 방향과 목적, 그리고 그 방식이 다를 뿐이며 정치권력이 후원하지 않을 뿐이다. 정치권력이 지방분권이냐, 아니면 중앙세력이냐에 따라 책의 방향이 달라지듯 모든 이들은 자신의 입장에 따라 해석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짧든 적든 자신의 의도에 따라 역사를 해체, 편집, 그리고 재수정을 가하기는 마찬가지며, 당시 시대의 관점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이런 상황에서 과거 철학자들이나 역사학자들을 비판하는 것은 자칫 과도한 욕구 과잉으로 나아갈 수 있다. 또한 저자의 방식이 제자백가 사상가들을 가능하면 고유명사로 처리해 일일이 다루려는 의욕은 무척 인상 깊지만 구체적인 것을 추상적인 범주로 이해하는 것이 인간의 이해를 더욱 높일 수 있는 수단이었으며, 많은 이들이 시도해 나름대로 성공을 거뒀다. 최소한 이해의 폭은 넓힐 수 있는 방법일 수 있다.
  아나키스트들의 주장을 귀담아 들을 수 있는 세상이 도래한 것은 사실이고 그것을 현재 누가 지켜주고 있는가도 논의의 대상이 될 것이다. 현재가 행복한 것은 아니지만 과거보다 자율성은 많이 보장된 사회다. 태어나면서 결정되는 계급은 어느 정도 사라졌고, 자립이 중요시되는 자유 역시 점차 보장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자신의 생각을 피력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을 보장하는 것은 공교롭게도 정부의 힘이다. 정부가 도구인 것도 수긍할 수 있고, 정부의 폭력성 역시 인정해야 할 문제다. 하지만 정부는 태어나자마자 사악하다는 것은 극단일 수 있다. 언제나 양극단의 중간에 정부는 위치하며 어느 쪽으로 끌어당기느냐가 정부가 좀 더 국민과 개인을 위해 좋은 판단의 문제가 될 것이다.
  난 무엇이다 라고 주장하는 것보다 소통을 위해 자신이 갖고 있는 전제의 보편성을 더욱 크게 확대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특정 사상의 완고함이 사라지고 보다 타당하고 보편적인 사고와 이해가 나오는 법이다. 정부의 폭력성을 주목한 학자들은 단지 도가에만 있지 않다. 서양 근대 철학자들은 물론 고대 희랍의 철학자들도 그랬고, 지금의 사회과학자들 역시 고민하긴 마찬가지다. 과연 그들 중 국가권력의 폭력성으로 인해 국가를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권력 통제를 위해 삼권분립이나 인권의 강조를 통해 권력의 폭력성을 제어하자고 주장하는 이들도 많다. 결국 국가만이 모든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 것은 받아들였지만 모두 해줄 수가 없다고 아예 삭제하자고 주장하는 이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어차피 도구라면 잘 다뤄야 하는 법이다. 파워포인트로 고생하는 많은 이들이 있다고 파워포인트의 장점을 무시한 채 없애 버릴 수는 없는 법이다. 다루는 것은 결국 인간이니까 말이다. 차라리 인간 본연의 탐욕과 본능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빠를 수도 있다. 그 방법이 옳은지 그른지는 불분명하지만 유가, 묵가, 법가 등이 다들 고민한 내용들이다. 그들도 다 나름대로 고민해서 그런 결론을 얻은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춘추전국시대의 철학가들에 주목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그 때의 고민이 지금의 고민과 비슷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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