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린 1 - 사도세자 이선, 교룡으로 지다
최성현 지음 / 황금가지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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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 ‘혜경궁 홍씨’가 썼다는 ‘한중록’이 거짓된 이야기란 이야기를 들었다. 아마도 역사적 비극 속에서 자신을 변명하기 위해 썼다는 것이 그 이유였던 것 같다. 그래서 나온 책이 소설  ‘역린’ 시리즈인 것 같다. 무엇보다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여야 하는 궁중 암투 앞에서 부부란 관계는 허울뿐이란 사실을, 그리고 소설이 정말 사실 같고, 사실이 소설 같은 것이 세상이란 생각이 들었다.
  영조, 분명 개인적으로 슬픈 왕이다. 위로는 형, 경종을 죽였다는 의심을 받고 있고, 그리고 자신의 자식을 뒤주 속에 가둔 이로 역사에 기록된 왕으로 말이다. 그는 또한 죽음의 위기로 자신의 손자를 내몬 임금이기도 했다. 어쩌면 태종이나 세조보다 더 극악한 가족관계를 갖고 있다. 평생 동안 불운한 가족사로 인해 좌불안석일 수밖에 없는 그런 인간이었다. 자신의 혈육을 죽였다는 왕이란 오명을 씻기 위해 정치를 잘하려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명군이란 이름을 탐했을 것이다. 탕평잭을 통해 신하들을 묶으려 했고, 다양한 애민정책을 통해 백성들의 경제적 삶을 안정시키려 했다. 그래서 그는 조선 후기의 중흥기 대다수의 시기를 맞이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정당성은 흔들릴 수밖에 없었고, 그는 언제나 번민 속에서 힘들어 해야만 했을 것이다.
  소설의 시작은 사도세자의 죽음이지만 지금까지의 뻔한 사실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노론이란 당에 이끌리는 조선으로 시작한다. 노론에 저항하는 자는 세자도 무사하지 못했고, 어쩌면 왕도 그랬을 것이다. 소론의 후광을 뒤에 업었던 경종이 왜 그렇게 죽어야 했던가는 역사적 사실을 되짚어 보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왕이 존재했지만 왕의 힘이 약한 나라가 된 조선은 그렇게 약해지고 있었다.
  권력투쟁이란 것이 다 그러려니 하겠지만 사실 조선의 권력투쟁, 아니 왕을 중심으로 짜인 계급사회에서의 권력투쟁은 결국 목숨을 두고 싸우는 로마 검투사 경기와 하등 다를 바 없다. 상대를 죽여야 상대가 차지했던 관리 자리를 뺏을 수 있을 것이며, 돈과 명예도 다 뺏을 수 있는 것이다. 여느 집안에서의 결혼과 달리 왕과 그 가족과의 혼담은 집안을 순식간에 상승시킬 수도 있으며, 동시에 위험한 곡예를 하는 카드놀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관리가 되어야만 돈도 벌고 허영심도 부릴 수 있는 조선의 관료사회는 사실 피할 수 없는 길들로 넘쳤다. 사색당파 뒤에 감춰진 관료 이외의 대안이 없던 시절의 불운이 사대부란 허울 속에 각종 특혜를 누린 양반들을 짓누르고 있을 뿐이다. 관료가 되지 못하면 자신을 키워준 부모는 물론 가문 전체에 의해 매도되는 것은 당연한 시대였다. 그런데 무슨 대안이 있었겠는가?
  이를 위해 그들은 못할 짓이 없었으며 심지어 그렇게도 좋다고 금슬이 좋네 뭐네 하면서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금칠을 하던 부부 관계도 권력이란 이름 앞엔 계약 관계를 넘어 스파이짓도 불사하는 아내를 만들고 있다. 하긴 오늘날의 부부 관계도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관계와 그리 달라 보이진 않는다. 이혼이 많은 시절을 생각하면 말이다. 부부가 그냥 계약관계인 세상은 현대는 물론 조선이라고 다를 것도 없다. 허울뿐인 인간관계 속에서 아슬아슬한 곡예를 타야만 인간들의 비루한 몸짓들이 소설 ‘역린’에서 치열하게 보인다.
  어느 정도 역사적 사실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 속에 담긴 인간사의 비극 모두를 알 수 없을 것이며, 또한 그 속에서 보이는 인간들의 불편한 진실을 다 짐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역사소설의 매력이 존재하는 것 같다. 다 알지만 결코 알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하며, 역사책에 담긴 것들이 사실은 승자들이 만든 거짓이란 것을 나이를 먹으면서 알게 된다. 승자가 마냥 옳을 수 없는 이 현실 앞에 부당한 권력으로 인한 희생은 지금의 우리들에게도 만연된 것이며, 이런 희생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역사의 맥을 짚어가면서 픽션을 가미한 역사소설책들을 읽어야만 할 이유는 충분하다. 어쩌면 이 세상에서 죽지 않기 위해 봐야 할 처세술인 것이다.
  사도세자는 죽으면서 어쩌면 인생의 마지막 도박을 건다. 그것도 자신을 죽이려 한 인생 최대의 적인 자기 아내와의 공조를 통해서 말이다. 인생의 아이러니라 할까? 사실 하늘 아래 최악의 원수가 같은 목적을 향해 달리게 된다는 것이 말이다. 남편을 죽여도 되지만 자식은 안 된다는 이 묘한 역설은 어쩌면 그나마 부부란 관계가 붙어 있을 수 있는 마지막 마지노 노선일 것이다. 하지만 아들은 아들이며, 그런 비극을 통해 성장해야 할 아들은 결코 마음 편한 인생을 살 수도 없을 것이며, 비극을 넘어서 뭔가를 해야 할 슬픈 운명을 타고 났다. 인간이라면 결코 선택하고 싶지 않은 그런 인생을 억지로 살게 된 정조의 운명은 사실 가련하기 그지 없다. 그래도 살 수 밖에 없다는 DNA의 명령 앞에 복종하면서, 그리고 아버지의 원한을 갚아야 할 복수심에 복종해야 할 정조의 운명은 그래서 소설가들의 마음을 울리나 보다. 이보다 더욱 극적인 사실이 어디 있을까?
  다음 편이 기대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인간 관계의 허망함 속에서도 뭔가를 이뤄내야 할 운명을 타고난 이의 고단한 인생과 그의 성공담, 그리고 결코 쉽지 않고 행복하지 않은 인생을 사는 방법에 목마른 자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줘야 하니까 말이다. 소설을 쓰는 것도 서비스라면 그런 서비스를 해줄 사람들이 나오기 마련이며, 이를 통해 우리들의 삶은 이어지며, 또한 생존하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언제나 조심스레 인생을 살아야 할 이유를 알려주기도 한다. 인생은 쉬운 것이 아니고 누군가를 믿기엔 많은 가시밭길이 너무 많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성공하는 자들이 있어 힘이 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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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에 한번은 논어를 써라 내 마음과 삶이 변화하는 고전 쓰기의 힘
신창호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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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순간부터 논어를 읽고 싶었다.
  공자는 공동체를 고민했다. 공동체를 통해 많은 것들을 해결하려는 철학자로서 어쩌면 그는 어려운 길을 선택했는지 모른다. 비록 가상의 공간에서의 만남이었겠지만 공동체를 통해 인위적인 가치관을 만들면서 세상사의 문제를 바로 잡으려는 공자의 노력을 폄하했다는 노자의 비판은 어쩌면 현대인의 입장과도 같을지 모른다. 특히 정부의 폭력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고통 받는 이 시점에서 노자의 편에 서는 이들이 많고, 서구 유럽에서 들어온 개인주의 역시 정부의 폭력성을 고발하면서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자는 취지 역시 노자와 비슷하다. 그래서 공동체의 가치관을 대변하는 정부의 폭력성으로 인해 공동체의 가치가 제고되는 상황을 자주 목도하는 현실이 지금의 우리 모습이다. 하지만 폭력이 존재한다고 질서유지와 인위적 가치관 구축이 마냥 문젯거리만 양산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은 계속 남게 되며, 이 지점에서 공자의 이야기는 개인적으로 관심을 끌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공자의 견해가 갖고 있는 현대성이다.
  사실로부터 가치를 입증하려는 노력은 오랜 시기부터 시도되어 온 도전이었다. 자연의 질서 속에서 인간이 살아가야 할 윤리와 도덕을 찾는 노력은 어쩌면 윤리학자들에겐 가장 중요한 과제였고 특히 공동체적 가치관을 중요시하는 이들에겐 운명을 좌우할 만큼의 중요하면서도 거친 주제였다. 공자 역시 그런 노력을 한 대표적인 학자였다. 하지만 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윤리를 연결시키려는 시도 속에서 다양한 모순이 발견되면서 공자와 같은 이들의 노력이 점차 의문시돼가고 있다. 앞으로도 그런 노력은 계속 위협받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바야흐로 상대주의 시대다. 세계화 속에서 다양한 공동체와 무리들을 만들면서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가치관이 언제나 옳은 것도 아니며 꼭 고집할 필요도 없다는 인식이 계속 번지고 있는 시점이다. 이런 상황은 공동체 우위의 절대적 가치관이 스스로의 기반을 상실하는 상황을 만들고 있다. 어쩌면 공자에 대한 노자의 비판이 더욱 강렬해지는 시점이다. 그런데 매우 중요한 것이 있다. 자연의 질서 속에서 인간 역시 다른 생물들처럼 삶을 보장하고 더 나아가 행복한 삶을 살려 한다면 혼자 힘으로 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그리고 최소한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공동체 이외의 다른 좋은 방법이 있을까 하는 점이다. 이 지점에서 공자의 고민은 현대에 다시 빛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동체 가치관의 인위성을 갖고 있으면서 그 편협성에 대해 비판을 하지만 결국 공동체 이외에 인간의 삶을 가장 잘 보장하고 잘 영위시킬 수 있는 것도 없다. 인간은 호랑이도 아니고 사자도 아니다. 그런 맹수들과 비교해서 인간의 육체는 한없이 약할 뿐이다. 동시에 인간 간의 대결에서도 집단을 이룬 인간들에 대한 보호막이 개인의 입장에선 한없이 약하다. 따라서 결국 집단, 더 나아가서 공동체의 힘이 필요하다. 이 지점에서 공동체 내의 인간들 사이를 나름 타당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공통된 인식이 필요한 것이며, 서로 오래 갈 수 있는 정당한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이 지점에서 공동체적 가치관이 비록 주관적이고 편협할 수 있지만 그런 것들은 공동체가 구성됐다면 매우 자연스런 것이며, 동시에 반드시 해야 할 자연적 사실과 다르지 않다.
  여기에 동양의 공자의 이야기는 무척 의미심장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위계적 질서일 수 있지만 군자나 성인들은 사회적 가치를 독차지하는 인간들이 아닌, 과도한 책임을 지면서도 묵묵히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는 이들이며, 이런 이들이 많은 사회일수록 그 사회의 건전성은 강해지는 법이다. 공자 입장에서 이런 사람들이 많이 나오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교육에 대한 강조를 뒀을 것이며, 교육의 내용을 고전에서 찾았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현재 교육받고 있는 것들 역시 과거의 뛰어난 지혜였던 것을 기억한다면 공자 역시 현대적 혜안과 다르지 않다. 공자는 과거에 집착하는 이가 아니라 미래를 위해 과거를 탐구하는 근대적 과학정신을 갖춘 철학자다.
  공자가 생각한 사회는 강점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착한 인간이 과연 교육만으로 끊임없이 재생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점은 모든 이들이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을 포기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 중요하다. 현대적 의미에서 시민의식의 실종이 부른 참사는 많은 이들을 고통 받게 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공동체 붕괴라는 불운을 가져오고 있다. 공동체 내의 사인의 욕망과 횡포는 사실 정부의 폭력 못지 않게 문젯거리다. 특히 위정자들의 개인적 탐욕으로 인한 고통은 몇 명의 고통으로만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뭔가 해야 할 필요성이 점증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공자의 이야기는 음미해 봐야 한다. 오늘날 실종돼가고 있는 시민의식과 공자 시대의 성인이나 군자의 도덕관이 과연 얼마나 다를까? 공동체를 지키고 공동체 내의 사람들의 관계를 잘 조정하며, 공동체의 행복 수준을 높이는 시민과 과연 그리 큰 차이가 날까?
  바로 여기다. 공자의 주장이 결코 고리타분한 사자성어의 나열이 아닌, 책임 있는 지식인의 필요성을 역설해서 오늘날의 현대인들도 경청해야 할 주장이란 사실을 말이다. 공자의 생각을 오염시켜 사리를 취한 권력자들에 대해 동양의 근대는 도전하면서 성장했기에 공자 역시 동시에 비판 대상이 됐다. 하지만 공자의 주장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위계질서를 통해 사회적 가치를 독차지하라고 주장한 부분은 공자의 주장을 담은 논어에서 찾기 힘들었고, 도리어 희생하라는 이야기가 도처에 깔렸다. 이런 사회가 과연 공동체의 만족도를 낮출 리가 있을까?
  자연의 질서를 개인의 윤리와 연결시키고 그것을 통해 사회적 윤리로 확대시키는 것은 어쩌면 어리석어 보이는 도전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 통치제도의 건강함을 만들려는 도전은 오늘날에도 많이 있다. 왜 그럴까? 그건 지금 당장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즉 시대적 요청이다. 그런 도전이 무수히 많은 도전에 직면할 것이며, 야박한 비판은 그런 도전에 기인한 이론의 약점들을 여지없이 공격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런 노력이 무가치한 것일까? 도리어 그런 야박한 비판을 가능하게 만들어준 것이 바로 그런 노력 아니었을까? 아마도 내가 고민했던 것을 공자 역시 고민했을 것이며, 논어 속에 담긴 공자의 확신과 겸손함 속에 그에 대한 답이 있었다. 비판을 하되, 가치를 폄하하지 말아야 한다는 중요한 사실을 개인적으로 자주 잊고 살았던 것 같다. 그런 점에서 공자의 책, 논어는 그런 나를 뒤흔들고 채찍질해준 의미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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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류행 - 건축과 풍경의 내밀한 대화
백진 지음 / 효형출판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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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경이란 말이 마음에 든다. 환경이란 말보다.
  어딘지 모르게 무미건조한 환경을 지킨다는 것은 확실히 과학적이면서 객관적이고, 그래서 어딘지 가슴에 다가오지 않는다. 반면 풍경이란 단어엔 어딘지 모를 낭만이 있고 내 감각으로 바로 다가오는 기억들이 존재한다. 비록 미지근하지만 말이다. 저자 백진이 환경이란 말보다 풍경이란 말을 사용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의 이야기를 따라 가면서 느꼈던 내 감각을 통해 얻었던 매력이 참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유려하면서도 풍요로운 저자 백진의 글을 따라가보면 도시생활에 찌든 사람들에게 색다른 세상을 전해준다. 전혀 다른 곳과의 접촉을 통해 자신의 특색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는 기본적인 전제는 이 책의 매력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다르기 때문에 색다르며, 그를 통해 자신의 것을 다시 볼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어느 순간 당연한 것이라 여겨서 그 가치를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타인과, 그리고 다른 문화와의 접촉을 통해 자신의 가치와 진미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생활의 매력을 다시 찾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문화의 매력 역시 느낄 수 있기도 하다. 이 책은 그래서 창 풍부하다.
  사람이 풍경에 큰 영향을 받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수준인지는 사실 감각적으로 느끼지 못했다. 이 책을 읽는다 하더라도 간접적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저자의 생생한 경험을 통해 보게 되는 풍경을 통해 사는 인간의 삶은 여러 가지로 재미있었고 의미도 있었다. 다른 풍경 속에 각자의 삶의 방식과 터전을 닦고 있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동시에 자신이 처한 환경 속에서 나름의 철학과 종교를 만들며, 그 속에서 나름의 주관과 세계관을 만든다는 것 역시 알면서도 사실 감각적으로 느끼지 못한 사실이다. 철학에서부터 종교까지 다루고 있는 이 책의 풍부한 경험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가장 마음에 들었고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어울려 사는 풍경’이었다. 더불어 사는 가치와 함께 그것을 구현하려는 예술가들과 건축가들의 열정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을 위한 기반이란 생각이 들었다. 관계를 통해 모든 것이 결정된다고 할 때, 광장의 매력을 모든 이들이 느꼈으면 한다. 또한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인간들의 열정이 녹색이란 것으로 획일화되는 시점에서 자연의 색이 다채색이란 것을 이야기하는 부분 역시 인상 깊었다.
  환경파괴로 인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른 인간에게 결국 자연은 생명을 건지는 유일한 수단이란 것을 느끼는 시점이다. 하지만 과연 자연복원을 제대로 할지는 불확실하다. 인간이 그렇게 현명한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좀 더 감각적이고 마음으로 다가오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저자가 제안한 풍경은 뭔지 모를 느낌으로 다가온다. 진정으로 복원해야 할 것은 목숨을 건지는 수단이 아니라 좀 더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풍경이어야만 공간도 목적으로서 인간과 함께 잘 어울릴 것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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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지배하는 힘 -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연금술
제임스 앨런 지음, 이원 옮김 / 문예출판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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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종의 서양의 처세술 정도로만 소개를 들었을 때, 책 읽기가 좀 편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주제 뻔하고 주지 뻔하고, 또한 그 내용도 뻔할 것이기 때문이다. 읽는 중은 물론 읽은 후 삶의 의지를 활활 타오를 수 있도록 마음을 준비시키는 정도? 그러나 책의 소개를 잘못 받았다는 것을 책을 읽는 중에 느끼기 시작했다. 처세술 내용이 깊이가 얕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 책은 심오한 철학서를 보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책을 읽는 시간은 빨라지지 않고 느려지기 시작했으며, 책을 잠깐 놓은 순간 많은 생각들을 갖게 했다. 이 책은 처세술책이 아니었다.
  책 속의 풍부한 철학적 내용과 깊이 있는 고민들은 읽는 내내 나를 압도했다. 특히 뛰어난 논리력과 함께 빼어난 문장은 좋은 시집을 읽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게 했다. 어쩌면 뻔한 내용이란 생각도 들었고 이런 류의 주장을 하는 것도 어디선가 이전에 봤을 것이란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주지가 같다고 과정이 같은 것은 아니며 매력적인 과정을 담은 것이야말로 독서의 묘미를 느끼게 하는 것이며 좋은 설득력을 지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참 빼어난 책이다.
  근대화 시기에 어쩌면 불교 교리를 보는 것도 같았다. 아니 그럴 것이란 생각을 확신한다. 그렇다고 다른 철학자들에 대한 고민이나 성찰이 부족하다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다양한 철학들의 종합 철학서이며, 동시에 그것을 근대 이성을 통해 풀어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근 100년이 지난 시점의 이 책은 근대화를 이끈 이성의 가치가 의문시되는 최초의 시점일 것 같다. 그런 과정 속에서 인간의 이성을 통해 다시 한 번 인간의 삶을 다시 재정립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 그렇다고 이 책이 마냥 인간의 장점을 부각시키는 이성주의자들의 입장에 선 것 같지는 않다. 무엇보다 인간의 본질을 탁월한 시각에서 분석하고 인간의 약점을 철저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완벽한 게 아니라 개선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동물로 파악한 것이다.
  특히 인상 깊은 내용들은 인간적 본성을 지닌 유동적인 자아를 파악하고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부분이다. 아마도 책의 핵심이자 저자가 가장 공들여 고민한 부분이기도 한 것 같다. 인간의 한계인 자아의 극복,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인간사에서의 고통을 벗어날 수 있는 최적의 길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며, 개인적으로 무척 공감하고 인상적인 부분이다. 자아를 벗어난 무아로의 진입, 이것은 어쩌면 인류 모두가 바라는 단계일 것 같다.
  아마도 부처의 사상을 계승한 것 같은 이 부분에서 그가 제시하는 명상의 가치는 더욱 돋보인다. 특히 물질적 탐욕이 정점이 된 이 시점에서 말이다. 저자의 시각에서 보면 자본주의가 극성이 이 시점이 바로 지옥일 것이며, 어서 벗어나야 할 세상일 것이다. 근대 혁명이 거의 완성된 시점에서 저자의 시각은 무척 독특하며, 자연에서 자신의 생을 산 그의 마음가짐은 무척 색달라 보인다. 동시에 근대 이성으로 풀어낸 불교의 교리를 보는 것은 참된 진리를 현대적 방식으로 풀어낸 것만 같아 색달랐다. 그래도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현재의 고통을 벗어날 수 있는지를 현대적 감각과 방식으로 제시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정독해야 할 대상이며, 동시에 가슴 깊은 곳에 담고 있어야 할 책이다. 그리고 참 고마운 착한 책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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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랑드르 미술여행 - 루벤스에서 마그리트까지 유럽 미술의 정수를 품은 벨기에를 거닐다
최상운 지음 / 샘터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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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플랑드르라는 지역은 역사적으로 이 지역을 얻기 위해 수많은 갈등이 있던 지역이란 정도는 알고 있었다. 마치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서 이쪽저쪽으로 넘어간 루우르 지역 정도로 알고 있었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을 통해 망국의 한을 되새겼던 기분을 키웠는데 플랑드르란 지역 역시 비슷한 역사적 맥락이 있다고 생각했고, 좋은 땅이 갖고 있는 불운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이 나라가 벨기에란 나라의 땅이란 것은 몰랐다. 몰라도 사는데 불편하지야 않겠지만 그래도 좀 알았다면 유럽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것은 물론 혹시 모를 벨기에 여행을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사항 덕분에 더욱 즐거운 여행일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정도는 느끼지 않을까 생각됐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들이 내 앞에 펼쳐졌다. 최상운 저 ‘플랑드르 미술여행’란 책은 경상도 크기의 이 작은 나라의 예술적 매력을 촘촘히 이야기하고 있다.
  예술적 자원이 많고 깊다는 것은 그 지역 사람들의 삶의 질과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드러내는 척도다. 이런 점에서 벨기에의 수준은 이전에 생각했던 것 상상 이상이었다. 뛰어난 미술가들의 업적들은 다양한 과거의 매력들을 담고 있었고, 벨기에의 위대한 화가인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들을 많이도 갖고 있는 ‘브뤼셀 마그리트 미술관’은 마그리트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특별한 장소라는 점에 이의를 달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하다. 이러기에 벨기에는 반드시 가봐야 할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두 가지 속성을 갖고 있다. 우선 여행기다. 특별할 것은 없는 여행기란 생각이 들 수 있지만 저자의 예리한 감각으로 드러난 벨기에의 브뤼헤, 겐트, 안트베르펜, 브뤼셀 도시들의 뛰어난 예술적 매력들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예술 작품들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유지하고 가꾸는지가 더욱 중요한 것이다. 한국처럼 버림받은 그 무수한 예술작품들을 갖고 있는 나라들의 문제가 뭔지를 벨기에는 역으로 보여준다. 결국 어떻게 소장하고 가꾸는지, 그리고 그 저변에 있는 예술적 감각과 마인드를 갖고 있는 국민들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반면교사, 정말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한국 같은 나라 때문에 벨기에 국민들이 각성한지 모르겠다.
  또 다른 특성은 바로 예술작품들에 대한 촘촘한 분석이다. 예술적 안목을 지닌 저자 덕분에 그간 몰랐거나 혹은 잘 알지 못했던 작품들 이면의 매력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작품 하나하나를 일일이 이야기하는 저자의 수고 덕분에 작품의 매력을 한층 높아졌고, 왜 이런 작품들을 봐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확인할 수 있었다. 작품 관람 시간이 자칫 무의미한 시간이 되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냥 예쁘니까 보거나 괴이해서 볼 뿐, 더 이상의 의미와 가치를 파악할 수 없을 때, 그 작품들을 위한 시간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건 도시 한 가운데를 의미 없이 걷는 그런 류의 과소비일 뿐이다. 작품을 보는 시간이 의미 있는 시간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작품 이면을 확인하는 시간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 조금 더 알고 작품을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 것이 관람이라면 이 작품은 플랑드르 지역 작품들의 이면을 촘촘히 보여주고 있고, 후일 그 작품들을 상대하는 사람들은 저자에게 감사함을 느낄 것이다.
  큰 축복, 플랑드르는 그것이 있다. 과거의 비극이 무엇이든, 현재의 이곳은 참 부러운 것들 것 많다. 그리고 그 속에 있는 이 지역 사람들의 착한 모습들은 참 부럽기만 하다. 문화라는 공통의 속성을 지녔기에 예술 작품이 착하니 사람도 착한 것 같다. 모든 것이 그런 것 같다. 착한 것들은 전염성이 있나 보다. 미술, 그리고 예술의 좋은 점이 확산되고 모든 이들이 다 갖게 될 때, 모두가 행복해질 것 같다. 어서 가고 싶어진다. 플랑드르. 그리고 그 지역 사람들도 보고 싶다. 그럼 좀 나도 착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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