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9월 2주

  정부가 사악해지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 공동체를 대표하는 정부 혹은 정부기관들이 영화 속에서 악당과 다르지 않은 불신 받는 존재로 나온다.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기관들이 공공기관들이 시민들의 세금으로 운영되면서도 도리어 자신들의 이권을 위해 시민들을 희생시키는 내용은 이제 영화에선 자주 볼 수 있는 테마다. 정부는 행태는 여느 불법집단과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이고, 그 속에서 시민은 위태롭게만 보인다. 거대한 집단이라 할 정부 혹은 정부기관들과 싸우는 시민은 허약하고 나약해 보이기만 하고, 위험해 보인다.
  정부와 싸우는 시민들의 사투는 스릴러가 될 수도 있고, 범죄영화가 될 수도 있고, 소외된 자들의 고백을 보여줄 수도 있다. 하지만 뭐가 되든 불행한 모습들이다. 다행히 영화가 긍정적인 시선으로 정부의 부당함을 폭로하며 생존할 수 있지만 그 과정은 위험하고 슬프기조차 하다. 강한 자에 의해 희생을 강요당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슬프다. 이런 구성은 아마도 냉혹해진 현실을 반영하기도 하고, 정부 역시 공복이 아닌 이기적인 집단일 뿐이란 현실인식이 강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정권이 만든 세상 속에서 자신을 지킬 것은 자신뿐이란 엄연한 사실을 관객들에게 일깨우고 있다. [Enemy of the State], [센츄리온], 그리고 [골든 슬럼버]가 그런 것들을 보여줄 것이다  

Enemy of the State 



  잘 나가는 시민이 정부의 적이 됐을 경우 벌어지는 상황을 실감나게 형상화한 작품이다. 정의를 밝히고 정의를 지키고자 하는 시민들을 향해 정부의 어느 특수기관이 어떤 만행을 할 수 있는지를 확실하게 보여준 작품이다. 인공위성을 통해, 그리고 신용카드와 핸드폰 등을 통해 어느 시민을 마치 사냥하듯 몰아가는 장면은 이 영화의 상징성을 드높인다. 이 영화는 가상의 세계를 보여주는 문학과 영화 작품이지만 그 사실성은 보는 이들의 가슴을 작게 만든다. 어쩌면 귀신이 나오는 공포물보다 더 무서운 영화일지 모르겠다. 진 해크만과 존 보이트의 출연이 무척 반갑고 윌 스미스의 흥미진진한 열연 역시 인상적이다.  

센츄리온 



  정부기관이 시민이나 자신의 국민들을 희생시키려는 행태는 현대에만 국한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야만적 사회인 피트 족을 공격하면서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국의 국민들을 희생시키는데 주저하지 않는 로마의 관료들의 모습은 공동체의식을 통해 국가를 운영해야 한다는 당위론이 관료의 이익 때문에 얼마나 허무하게 무너지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시민 혹은 군인의 충성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자문하게도 된다. 그리고 야만과 문명의 차이 역시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결국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을 얼마나 우아하게 하는가가 가장 중요한 것이리라.  

골든 슬러버 



  정치적 이익을 위해 허약해만 보이는 시민 하나를 정부기관이 희생시키는 것이 얼마나 쉬운 것인지를 보여준다. 멋모르고 사귀었던 친구가 사실은 음모를 꾸미기 위해 그랬다는 것을 알면서 주인공은 충격에 빠지고, 택배회사 직원 하나를 희생시킴으로써 중요한 정치현안을 해결하려는 특수경찰들의 만행은 공포를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주인공을 살리는 것은 그의 과거의 인연이며, 결국 곁에 있던 그들이라는 점에서 인간관계의 소중함도 엿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마지막에 결코 정의는 승리한다는 공식은 결코 나오지 않았다. 이것은 영화가 관객에게 현실을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는 강력한 경고를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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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8월 4주

  꿈은 한국에선 미래에 대한 어떤 암시로 보는 경향이 있다. 미신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런 분석은 한국인들의 미래에 대한 염려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돼지꿈이나 용꿈 등의 해몽은 그래서 생겼는지 모른다. 돼지꿈 꾸고 산 복권에 대한 것은 한국인의 미래에 대한 열망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서구에서의 꿈은 조금 다른 것 같다. 그들이 새롭게 개척한 심리학이란 과학을 통해 보인 꿈에 대한 그들의 이해는 바로 인간의 근저에 있는 심리적인 요소들이며, 대개는 현실적 욕망에 대한 투영이거나, 죄의식 등의, 겉으론 드러나지 않은 무의식적 영역에서의 내용들이 태반이다. 그래서인지 서구 영화에서의 꿈은 언제나 욕망이나 무의식의 내용을 다룬다.
  서구의 이런 내용들을 영화가 놓칠 리가 없다. 그래서 그들의 영화엔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인간의 심리와 갈망, 혹은 감추고 싶은 죄의식 등을 담고 있다. 즉, 무의식의 반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영화를 보는 관객의 입장에선 마치, 훔친 물건을 들킨 아이들처럼 당황스럽고 자신을 되돌아보게도 된다. 그런 내용들은 다음의 영화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바로 ‘바닐라 스타이,’ ‘매트릭스 (The Matrix),’ 그리고 ‘인셉션’ 이 그런 맥락에서 만들어진 영화들이다. 
 

바닐라 스카이 (2001) 

 


  잘 나가던 남자에게 불행이 찾아온다. 멋진 외모를 무기로 많은 여심을 흔들었는데, 그만 자신이 사귀었지만 버린 여자의 가혹한 보복으로 얼굴이 망가지는 부상을 당하고, 그는 더 이상 매력적인 외모로 상대의 관심을 끌지 못하게 되고, 이것으로 인해 방황하게 된다. 그러는 와중에 현실과 같은 꿈을 통해 자신의 갈망을 이루지만 동시에 허상 속에서의 방황일 뿐, 이룰 수 없는 갈망을 마지막에서 확인할 때, 가히 공포물을 보는 것만 같았다. 외면에 대한 집착이 부른 무서운 결과, 아마 영화는 외면으로만 살려는 인간의 허망한 즐거움을 비난하는 것만 같다.  


더 셀 (the Cell) (2000) 


 


  가히 충격적인 영화다. 인간의 무의식 세계에서의 심리를 영상화한 이 영화의 장면들은 환상적인 매력과 전혀 예상 못한 구성을 지니고 있다. 살인자의 무의식 속으로 진입하면서 위험에 처한 소녀를 구하는 기본 구도는 전혀 예상 못할 상상의 세계를 만들어주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꿈과 같은 영상을 제공한다. 제니퍼 로페즈는 아마도 자신의 출연작 중 최고라고 할 것만 같다. 그리고 현실 속에선 만들 수 없는 아이디어를, 꿈을 통해 얻은 장면들은 서사의 힘은 물론, 영상에 압도될 만큼 대단한 작품이다. 
 

인셉션 (the Inception) (2010) 


 


  꿈에 관한 혁명적인 인상을 준 영화로, 영화 역사에 있어 대단한 평가를 받을 것임을 보는 내내 확신할 수 있다. 꿈 속에서 현실의 자아들이 의식 속에서 움직인다는 가정은 기존의 꿈의 영화가 무의식만을 다루었다는 것과는 차이를 내면서 매우 이색적인 재미를 제공해준다. 그리고 사람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의도적으로 타인의 무의식 속에 새로운 자극제, 즉 이미지를 심는다는 내용 역시 매우 독특했다. 또한 영화 속에서 볼 수 있었던 무의식 속에서의 갈망과 죄의식 등을 볼 때,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까지 할 수 있는 작품이다. 후속편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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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8월 2주

  사회적 약자이면서 사회의 어두운 면을 상징하기에 감추어야 할 대상이 된 미혼모는 슬픈 인간의 한 군상일 것이다. 사회의 따뜻한 마음으로 감싸줘야 할 것 같지만 그들의 섣부른 판단에 대한 냉정한 심판 역시 그녀들에게 내려지고 있다. 과연 자신들의 즐거움만을 위할 뿐, 결코 책임지지 못한 그녀들이란 인식은 사회의 냉대를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도움을 주기 보단 시시비비를 앞서 가리자는 측도 결코 이 사회에선 적지 않다. 누군가에 의해 폭력이라면 모르지만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빚어진 미혼모와 그 아기와의 불편한 관계와 시선은 그래서 이 사회 내에서의 엄청난 담론과 격론을 일으켰고 그 논쟁은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진행 중이다.
  이런 그들에 대해 영화의 시선은 결코 빗나가지 않았다. 묘한 환상과 상상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영화는 그녀들의 인생은 물론 그녀들의 자식인 아기들에 역시 카메라 앵글의 초점을 맞췄다. 시작이 어떤 것이든 그녀들과 아기들의 미래는 불안하기만 했고 그들 주변은 언제나 보호받지 못한 것들의 전형을 이루었다. 그 속에선 결코 보호받을 수 없는 감옥 같은 세상은 영화를 보는 내내 안타깝기만 했다. 철없는 행동에 대한 결과는 너무 가혹한 것이다.
  그래서 감독들은 종종 따뜻하게, 혹은 냉혹하게 그들의 모습을 영상에 담는다. 사회적 정의를 의해서, 혹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위해, 영화는 인문주의적 관점과 복지적 관점에서 그들의 문제를 해석한다. 그리고 현재의 세상이 그들에게 갖고 있는 가혹한 인식을 제고해주길 빌고 있다. 그녀들의 잘못된 행위에 대한 용서와 배려가 없다면 그녀들로부터 세상에 나온 아기들 역시 똑 같은 위험에 처하게 되고, 또한 그런 실수를 반복할 수 있기에, 영화가 보여주는 따뜻한 세상을 위한 제고는 무척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아마도 그런 모습을 프랑스 영화인 ‘리키,’ 그리고 한국으로부터 해외로 입양되어 시작된 비극을 담은 ‘귀향,’ 그리고 폭력이 풍부한 어느 곳에서 새로운 행복을 찾기 위해 몸부림치는 미혼모를 담은 ‘영도다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들을 통해 영화 각각의 감독의 따뜻한 제언과 미래에 대한 경고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리키

 

  아기가 천사처럼 날개를 갖고 태어난다. 아주 기발한 착상으로부터 시작된 이 영화는, 그러나 천사의 탄생이 매우 부적절한 곳에서 벌어진다는 것이 문제다. 무엇보다 정말 그 아기가 천사인지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설사 천사라 해도 도시라는 꽉 막힌 공간에선 단순한 볼거리 정도로만 치우칠 뿐, 인간애의 생성이라든지, 인간이 갖고 있었던 그 아름다운 애정을 소생시키기엔 역부족이다. 무엇보다 만남과 헤어짐이 너무나 Cool하게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도시 속의 고독한 인간이 보이기도 하다. 시작이 다음 내용들과 맞지 않다는 비판이 있었지만, 미혼모의 문제와 더불어 더욱 근본적으로 인간의 불신이 만연된 사회의 한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 자존심이란 가치를 지키기 위해 과연 인간관계를 쉽게 깨는 것이 좋은가 하는 문제 역시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문제다. 영화는 천사와 같은 아기 앞에서의 고해성사를 통해 인간의 약함과 그를 위한 극복의 방향을 엿볼 수 있다.  
 

귀향 

 

  영화는 공포스런 시작에서 공포스런 결말을 맞는다. 아마도 미혼모가 겪을 고행의 모든 것을 보여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두 개의 서사를 진행시킨다. 그러나 두 개의 이야기는 사실 시간의 앞과 뒤를 바꿨을 뿐, 결말은 대동소이한 것일 뿐이다. 자신이 낳은 아들을 결국 세상으로 떠나 보낸 미혼모의 고통의 모습은 잔인한 모습, 그것이다. 언제나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그녀의 모습은 어처구니 없는 실수라고 볼 수 있지만 어느 면에선 필연적인 결과일 수도 있는 아들의 살해로까지 이어진다. 사실 그녀에겐 그런 선택의 여지 밖엔 없을 것이다. 문제된 시작은 결국 아름다운 결말을 이끌 수 없다는 내용은 아름다운 시작을 만들기 위해 사회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잔인하게 묻는다. 
 

영도다리 

 

 

  영도다리라는 공간이 담고 있는 비극의 씨앗이 한 소녀에게 얼마큼의 가혹한 결과를 초래할지를 보여준 작품이다.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행복할 권리는 있지만, 사회의 외면 앞에선 무의미한 존재이자, 그녀의 행복엔 아무도 관심을 갖고 있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가 낳은 아기를 함께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기보단 쉽사리 그 아기를 해외입양시키는 장면에서 미혼모에 대한, 그리고 사회적 소외자에 대한 사회의 기본적 자세를 보는 것 같아 씁쓸했다. 그리고 그녀가 살아가고 있는, 영도다리로 대표되는 공간의 참혹성과 무관심은 영화 내내, 불운한 기운을 감지하게 했다. 아무도 돌 볼 자가 없기에 서로 간의 연대는커녕 외면하는 모습 속에서 영화는 우리들의 뒷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주면서 질타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의 새로운 행복찾기는 왠지 모르게 위태로워 보이고, 불편했다. 비극으로 시작되는 것은 결과 역시 비극적일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아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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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4월 5주

  영화에서의 침묵, 너무 낯설다. 아니 영화는 침묵을 받아들이는데 익숙지 않다. 오감의 사용을 통해 관객의 이해를 이끄는 영화는 문학과는 다르다. 침묵을 유지하는 문자로 구성된 문학에서조차도 침묵은 전제로서 기능하지 못한다. 상상을 전제한다면 문자로 구성된 문학에서도 다양한 소리가 넘치기 때문이다.
  반갑지 않은 침묵이 과연 존재하는 영화들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런데 존재한다. 소리를 포기하는 것은 영화엔 대단한 모험이다. 낯선 방식에 동요될 관객을 생각하면 침묵을 담고 있는 영화는 상품성의 하락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소리를 통해 관객들의 오감을 자극하고 또한 영화의 서사구조를 이해시키는 것이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이상, 소리 없는 영화는 기존의 이미지 재현방식엔 역행한다. 오직 화면에서의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영화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는 것, 어쩌면 발전된 현대에서 구석기시대로 돌아가는 것으로 평가될지 모른다.
  하지만 침묵으로 이루어진 영화는 예술적 깊이를 지니고 여백의 미를 전달해준다. 그리고 소리가 없는 것을 통해 더욱 큰 울림을 주기도 한다. 아름다운 영상미와 함께 전달되는 강렬한 메시지는 대화를 통해 의미를 전달하는 영화와 비교해서, 결코 관객의 호응을 이끌지 못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영화들이 우리 주변에 존재한다. 이런 모험적인 영화들은 무척 색다르면서도 즐겁다. 그 대표적인 것이 '모던 타임즈,' ‘달마가 서쪽으로 간 까닭은,’ ‘위대한 침묵’이란 영화가 그들이다.  

모던 타임즈 [Modern Times]

  시대적 대세였던 토키영화에 저항한 무성영화의 마지막 시기를 대표하는 걸작이자, 현재에 이르러서도 이 작품에 대한 평가는 졸작이거나 평범하다는 것을 찾을 수 없을 만큼 가치가 대단한 영화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더라도 영화 한 장면 한 장면은 다시 한 번 음미할 만 하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상황이지만 음악만은 경쾌하고 즐겁고 흥겹다. 그러나 장면 하나하나는 결코 웃고 넘길 수 없는 진지함과 인간의 가치가 쉽게 무너지는 것을 보고 영화는 현대인의 애환과 풍자를 거의 80년 전에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아쉬움을 느낄 것이다. 1936년의 작품이라서 2차 대전 이전의 대공황 상황을 볼 수 있는데 오늘날의 경제 위기로 힘들어하는 현대인들과 묘하게 중첩된다. 또한 아마도 100년이 넘더라도 이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기막힌 서정성은 뛰어난 코미디 영화이면서도 계속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 것이다. 또한 인간의 행복은 그렇게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기술의 발전이 꼭 인간의 환상적인 미래를 담보할 것도 아니라는 점을 역시 분명하게 알 것이다.
  실수투성이의 모습으로 즐거운 장면들을 보여주는 찰리 채플린은 그러나 매우 늙어 보이고 초췌해 보인다. 아마도 그의 후반기 작품이면서도 동시에 토키영화에 대항하는 무모한 도전에 힘들어 하는 그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리라. 그가 자신의 애인과 즐거운 사랑을 하는 장면은 유치할 수는 있지만 무척 감동적이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신뢰와 믿음이 있어 보이고 상대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들이 아련하게 담겨 있다. 과연 그런 장면들이 오늘의 영화에서 재현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만큼 말이다. 또한 무성영화이면서도 노래하는 장면에서의 채플린은 역시나 최고의 영화배우이자 코미디언임을 과시한다.
  영화에서의 자본주의가 추진한 자동화에 의한 인간의 소외의 형상화는 현대 시점에선 매우 Old 하게 느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과거의 기술과 작업에서도 결코 다른 시대의 것이라고 보기엔 내용은 너무 현대적이다. 벨트 컨베이어에서 똑 같은 작업만을 하는 장면과 그런 반복 작업을 일상생활에서도 계속 이어가고 마는 주인공의 모습은 자동화에 의해 파멸되는 인간의 모습을 가장 뛰어나게 형상화했다. 여기에 데모 군중에 우연하게 참가하게 되면서 그가 맞이하게 되는 불운한 운명은 당시의 미국의 비인간적인 노사문제와 편파적인 시대적 아픔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아마도 아무리 노력해도 할 수 없다고 자책하는 애인의 아쉬움이 마지막 장면에서 나오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채플린은 결코 인간에 대한 포기를 하지 않았다. 그는 힘들어하는 애인에게 결코 포기하지 말자면서 둘이 걷는 마지막 장면은 인간의 기대를 결코 포기하지 않은 감독이자 배우이자 작가였던 찰리 채플린의 마지막 의지이자 소망이고, 인류 모두가 결코 저버리고 싶지 않은 열망일 것이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제목부터 예사롭지 않다. 불교와 관련된 것임을 달마란 소재를 통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선문답 같은 이 영화의 제목은 어떤 깊이 있는 질문과 철학적 주제를 담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거의 들을 수 없는 침묵의 바다 속에서의 영화장면들은 다양한 이미지와 아름다운 화면으로 관객들에게 쉽지 않은 고민을 던져줬고, 무엇보다 禪을 영화로 형상화한 환상적이면서도 고요한 이미지는 불교의 진미를 느낄 수 있도록 했다. 회화적인 아름다운 장면과 상징성이 두드러지는 모습들은 고요한 속에서 들리는 강한 외침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과연 지금 작업을 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익숙지 않은 배용균 감독의 1989년의 작품이다. 그는 자신의 프로덕션인 배용균(裵鏞均)프로덕션에서 제작, 감독, 촬영, 조명, 편집 등 거의 모든 작업을 혼자 진행했다. 이런 그의 노력이어서인지 영화의 통일성과 감각성은 매우 두드러졌다. 또한 그의 노고는, 흥행은 부진했지만, 제42회 칸영화제에서 ‘주목할 만한 영화(Uncertain Regard)’ 부문에 선정된 소식을 전해줬고, 무엇보다 스위스 로카르노 국제영화제 그랑프리인 황금표범상을 받아 한국 영화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줬다.
  중국 선불교의 창시자인 달마를 제목에 담은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은 강한 선불교의 화두를 주요 테마로 삼은 드문 영화다. 영화는 아름답고 서정적인 장면을 배경으로 깊고 깊은 산중에서 세속의 인간과 연을 맺지 않고 살아가는 노스님, 젊은 수도승, 그리고 어린 동자스님의 세 명으로 이루어진 어느 퇴락한 절을 터전으로 그들의 번뇌와 갈등, 그리고 그에 대한 종교적 승화를 보여준다. 거의 없는 대사를 통해 선불교에서 말하는 침묵의 가치를 들려준다. 비록 서사적 구성이 이 영화에서 강한 힘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노스님의 건강에 대한 그들의 고민, 그리고 인생에서 맞이하게 될 최후의 장면에서의 어느 순간 느껴지는 인간적 성찰과 승화는 이 영화에선 최고의 압권이다.  

위대한 침묵 


  언어, 그 편리함에도 불구하고 단점 역시 존재하는, 인간이 만든 최고의 수단이자 제한요소이기도 한 매체이다. 영화 [위대한 침묵]은 세상의 편견과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세상과 격리된 알프스 산맥 깊은 곳에서, 침묵이란 방식을 채택한, 이색적인 어느 수도원의 일상을 담은 영화다. 인간의 언어가 신으로 향한 구도를 방해할 수 있다는 특이한 믿음을 갖고 그들은 알프스 산맥에 있는 카르투지오 수도회의 그랑드 샤르트뢰즈 수도원(Le Grande Chartreuse)에서 자신들의 독특한 수도방식을 시험한다. 즉 편견과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불필요한 언어를 극도로 자제하면서, 침묵을 통해 신의 구원으로 다가서는 것이다. 그런 모습을 통해 관객들은 고요함과 진지함을 느낄 수 있고, 인간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그들의 감동적인 노력을 확인할 수 있다.
  침묵은 언어와 반대다. 편견과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에 언어를 포기한다는 것은 표현은 쉽지만 인간의 가장 발전된 기능을 포기하는 것이기에 고통과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영화에서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극도의 침묵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자연의 신비한 변화를 채득하고, 그 신비로움 속에서 신의 은혜를 확인한다. 생명의 탄생과 복됨은 영화에서 진정으로 보여주고 싶은 내용이리라. 이런 장면을 감독 필립 그로닝은 162분간 색다른 구성과 방식으로 보여주며, 관객들에게 심오한 깊이를 제공해준다.
  영화에선 두 가지의 상반된 세계를 느끼게 한다. 우선 변함 없는 수도사들의 생활이 그것이다. 그들은 동료와 함께 있든, 혼자만의 시간을 갖든 철저하게 침묵을 통해 수도한다. 비록 성경을 읽는 장면이나, 일년 중 몇 시간이나 일종의 휴가를 얻는 기간 동안 말을 할 수 있는 특혜(?)를 누리긴 하지만 그들의 삶 태반은 침묵이다. 이런 항구적인 생활의 모습은 그들의 변화 없는 세계를 보여준다. 이에 반해 변화하는 것은 바로 시간에 따른 계절의 변화다.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이란 계절의 변화는 생명의 새로운 탄생과 변화를 보여주면서 변화 없는 수도사의 생활과 대조를 이룬다. 역시나 수도사의 생활과 반대되는 세속의 장면들이 간간이 보일 때면 변화하는 속세의 모습과도 대조가 될 것이다. 이런 대조 속에서도 수도사들의 생활의 지속성은 확실히 특이한 모습이다.
  이런 그들의 생활 속에서 잠시나마 얻은 그랑드 샤르트뢰즈 수도원(Le Grande Chartreuse)의 수도사들이 겨울철의 즐거운 휴식과 여유, 그리고 놀이는 어쩌면 침묵에 의한 수도가 너무 비인간적이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수도는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이자 행동이기에 그에 따른 고통은 당연히 따라올 수 있으며, 그런 고통을 이겨내는 것이야말로 종교인의 숙명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영화는 영화의 내용만큼 기이한 제작 과정이 숨어 있다. 그로닝 감독이 수도원에서 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기회를 부탁한지 무려 19년간 기다렸다거나 여타 영화제에서 결코 경쟁부문에 출전해선 안 된다는 규정을 달았다는 것은 매우 색다른 뒷이야기를 제공해줬다. 그래서 이 다큐멘터리 영화는 62회 베니스영화제, 30회 토론토영화제, 22회 선댄스 영화제 등에 초청됐지만 수상은 의외로 많지 않았다. 겸손의 미덕을 지킨 결과다. 그래도 선댄스 영화제 월드시네마 다큐멘터리 부문 심사위원 특별상, 바바리안 필름 어워드, 저먼 필름 크리틱스 어워드, 저먼 카메라 어워드 등을 수상했다. 아마도 그냥 넘어가긴 힘든 작품성을 결국 인정한 결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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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4월 2주

  공교로운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샘 워싱턴이 출연한 액션 영화는 단순한 볼거리로만 치장된 그런 영화들이 아니다. 화려한 액션 영화들이란 공통점은 있지만 그런 공통점은 액션배우들이라면 다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샘 워싱턴의 작품은 다르다. 감독이 같지도 않았지만 샘 워싱턴이 출연한 영화엔 언제나 두 세계를 공유하는 하나의 존재감을 지닌 캐릭터로 출연한다. 그래서일 것이다. 그가 출연한 캐릭터들은 항상 정체성의 문제를 겪는다. 정체성의 문제는 언제나 삶의 방황과 고민을 겪게 되며 그리고 선택하게 된다.
  영화 속에서의 샘 워싱턴이 선택한 것은 언제나 더불어 사는 인간의 매력이었다. 어쩌면 가장 인간다움이라 할 타인에 대한 배려와 타인과의 공존을 통한 더불어 살기라는 삶의 방정식은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현명한 방식일 것이다. 그의 선택은 오늘날의 정의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증오, 경쟁, 그리고 전쟁 등 타인과의 부담스런 삶의 방식은 언제나 인간의 삶을 황폐화시켰고 또한 인간을 소외시켰다. 그런 삶의 방식 속에서 파멸하는 인간들의 모습은 그것이 기계로 인하든, 탐욕을 가진 자본주의적 인간이든, 신에 의해서든 언제나 희생되는 대상이었다. 인간의 파멸이 당연시되는 그런 집단에 대해 샘 워싱턴의 선택은 언제나 저항이었고, 그것은 정의로운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면서 나타나는 주제의식인,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지 말아야 한다는 소신이 더욱 빛을 발한다. 인간이기를 포기해선 안 된다는 그의 강한 주제의식이 다른 영화에서 같은 내용으로 반복되고 있다.
  그의 선택은 어쩌면 희생을 담보로 한 선택이며, 또한 비현실적일 수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그가 지키려 한 세상은 이상향의 사회로 보인다. 더불어 살기 힘들어진, 각박한 사회현실에 압도된 관객들이 보고 싶어하고, 또한 도피하고 싶고, 그리고 살고 싶은 곳이다. 그것이 원시적인 것이든, 아니면 고대 희랍의 왕국의 모습을 보여주든 말이다. 그런 세상은 이제 아마존의 열대림에서나 볼 수 있는 곳들이며,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과거가 되어 버린 세상으로의 도피, 그것은 현대인이 현재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는 의미일 것이며, 인간미가 사라진 현대의 도시를 벗어나길 원하며, 그것이 있었다고 여겨지는 고대의 왕국이나 야성미를 지닌 원시부족의 공동체로의 갈망을 의미한다. 어쩌면 정말로 버림받은 곳은 인간미 넘치고, 야성미가 넘치고, 공동체적 가치관이 사회를 지배하는 이상향이 아니라 현대의 도시기계문명인지 모른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은 곳이기에, 행복도 미리 포기된 세상, 그리고 새롭게 만들어졌으면 하는 기대조차 사라져버린 그런 곳, 도시문명은 샘 워싱턴이 출연한 영화에서 가차없이 비난되고, 그리고 저항 받으며, 그리고 부정된다.
  그래서 샘 워싱턴이 출연한 영화는 단순한 액션 영화를 넘어 인간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득 담고 있으며, 성찰과 현대문명이 지향해야 할 미래의 공동체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무엇보다 그가 저항한 마음은 지금의 시대정신이 되고 있으며, 각박해져만 가는 현대인들에 대한 새로운 길을 과감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때문에 그의 영화는 추천할 만 것들이다. {터미네이터: 미래전쟁의 시작 (2009)}, [아바타], 그리고 [타이탄]이 그것들이다. 
 

 터미네이터: 미래전쟁의 시작

 

  인간의 편리를 위해 만든 기계가 반란을 일으킨다는 점은 매우 역설적인 상황이다. 창조자인 인간이 기계로부터 공격을 당한다는 설정은 인간의 어리석은 자기파멸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자 진지한 고민을 통해 미래를 기획하지 못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잔인한 방법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런 영화의 서사 속에서 자신이 기계인간이 된 줄 모르고 인간의 편에 서서 싸운 어느 기계인간으로 출연한 샘 워싱턴은 과거의 인간이었던 그 감정으로 살고자 한 기계인간이다. 터미네이터 영화 시리즈가 인간과 기계와의 대결을 보여주는 영화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작품에서 샘 워싱턴이 분한 ‘마커스 라이트’는 인간의 반대편에서 인간에게 자신의 무력을 겨눠야 했다. 그러나 기계인간이면서도 인간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기에, 그는 인간처럼 사랑했고, 인간의 가치관을 존중했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기계인간으로서 갖고 있을 인간에 대한 적개심이나 인간을 파괴해야만 하는 기본 임무를 포기하고 도리어 적군에 가담하는 상황이다. 자신의 동료에게 어쩌면 총을 겨눠야 하는 역설은 그러나 인간의 가치가 무엇보다 중요함을 역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자신의 육체적이고 물리적인 정체성을 부정하고 자신이 선택한 진정한 사회적 가치관을 지키기 위해 반대의 편에 서게 된다. 이런 주제의식은 다른 영화에서도 반복되고 있으며, 그것을 어쩌면 가장 먼저 보여준, 샘 워싱턴 식의 영화가 시작되는 영화다. 무엇보다 그가 선택한 인간미에 대한 매력과 공동체주의는 화려한 액션장면을 넘어 강한 인상을 남긴다.  

아바타 


  인간이지만 인간미를 잃어 버렸고, 반대로 인간이 아니면서도 원초적인 매력을 지닌 외계 행성의 원주민 간의 갈등은 역설적인 구도에 생명력을 부여한다. 고도의 기계문명을 이룩한 인간은 그 기계문명으로 인해 도리어 인간적인 것들을 잃고 탐욕만을 추구하는 생명체가 되고 말았다. 자신의 탐욕을 위해 다른 생명들을 무가치하게 여기고, 오직 물질적이고 이기적인 이익을 위해 맹종하는 탐욕스런 인간형이 이젠 지구를 피폐시킨 것을 넘어 다른 외계 생명체가 살고 있는 행성, ‘판도라’까지 이익을 위한 파괴를 위해 진출한다. 이런 구도는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을 바탕에 두고 있다.
  인간이 이룬 현대문명이 부정된 영화 [아바타]는 인간미가 사라진 인간이 인간미가 풍부한 다른 세계를 파괴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자기의 이익에 반대가 된다면 무조건 사라져야만 한다는 자본주의의 속성은 이 영화에서 인간이 갖고 있는 문제이며, 이것은 오늘날 신자유주의로 대표되는 경쟁 위주의 사회를 투영하고 있다. 인간이 그렇게 타락한 것이다.
  낭만적인 사회로서 인간의 이상향을 담고 있는 외계 생명체가 이 영화에선 가치 있는 존재로 나오며, 역시나 그런 존재들을 지켜야 하는 것이 이 영화의 주제다. 인간의 원초적인 야성과 공동체적 삶을 유지하고 있는 가치 있는 생명체를 ‘판도라’ 행성에서의 주류인 ‘Navi’ 족이 갖고 있다. 인간보다 더욱 인간적인 매력을 지닌 Navi족들은 지구인들과 오랜 동안 공존하는 지혜를 선택하지만 결국 인간의 탐욕에 의해 위협을 느끼고 그들과 대적하게 된다. 그런데 그들이 지키려 한 것은 단순히 그들의 생명만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삶의 방식과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 매력이었다.
  이런 갈등 구조 속에서 인간이면서도, 나비(Na’vi)’의 외형에 인간의 의식을 주입, 원격 조종이 가능한 새로운 생명체 ‘아바타’를 통해 Navi 족이 되는 전직 해병대원 ‘제이크 설리을 샘 워싱톤이 연기한다. 두 세계를 경험하면서 인간들 속에 사라진 원초적 인간미와 공동체 문화에 동화된 그는 인간의 이익보다 Navi 족을 지키는 전사가 된다. 어쩌면 생명체의 속성보다 생명체로서 누릴 수 있는 인간미 넘치는 사회적 매력을 더욱 동경했을 것이며, 그것은 현대사회에서 없어져가고 있는 인간미에 대한 아쉬운 동경이자, 이상향에 대한 갈망을 상징하는 것이다. 영화는 먼 외계에서 벌어지는 슬픈 우화를 3D라는 진보된 기술을 통해 형상화한 역시나 역설적인 영화다. 어쩌면 우리가 원하는 삶의 모습이 영화나 기술로만 가능한 현실을 보여줬는지 모르겠다. 
 

타이탄 

 

  고대 희랍에서의 신과 인간이 공존했던 신화를 배경으로 신과 인간의 대결을 보여준다. 이런 구도는 인간이 꿈꾸는 이상향을 기반으로 한 작품이다. 하지만 그 이상향, 인간이 꿈꾸는 이상향인 그곳에서 현실과 유사한 힘겨운 갈등이 존재한다. 신화나 현실이나 결코 편하지 않은 세계관, 이 영화엔 그런 것이 존재한다. 현대인들이 꿈꾸는 그곳에서조차 불편한 인간관계와 힘든 여정이 존재한다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불행이 모든 영역으로 전염된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그래도 사실주의 작품에서처럼 괴로운 현실은 곧 괴로운 결과를 초래한다는 구성은 결코 보여주지 않았다. 좀 더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이라고 할까? 속편을 염두에 둔 마지막을 보면 미국 영화의 상업주의가 느껴지기도 하겠지만 그런 것은 어떤 영화나 갖고 있을 것이며, 또한 그런 면으로 폄하할 수 있는 그런 영화는 아닌 것 같았다.
  타이탄이란 영화의 갈등은 인간을 창조한 신과 스스로의 능력을 자각하고 독립하고자 한 인간과의 갈등이다. 창조했기에 존경을 받아야 한다는 신, 제우스와 스스로의 자립을 추구하는 인간, 마치 중세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신학에 대한 근대 이성의 도전처럼 보였다. 어쩌면 창조했기에 모든 것을 소유한다는 것은 진부한 소유관념을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결코 아버지가 요구하는 바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영화 속의 신은 그것을 요구했으며, 여기에 갈등의 씨앗이 등장하는 것이다.
  ‘Demi God,’ 사실 낯선 호칭은 아니다. 어떤 영화에서 이미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반신반인의 존재인데 이 영화에서도 등장한다. 인간이기에 느낀 가족애와 사랑, 그리고 공동체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인간의 고유한 권리를 지키기 위해 샘 워싱턴이 분한 ‘페르세우스’는 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위한 자리를 포기하고 인간을 지키기 위한 전사가 된다. 탄생시킨 아버지보다 키워준 어부의 아들이기를 자처한 ‘페르세우스’는 공포의 대명사인 지옥의 신 ‘하데스’와 대적한다. 그 충돌 속에 다양한 희랍 신화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변조되어 등장하는데 인간을 위해 싸우는 액션은 전작인 3D 작품인 [아바타]의 액션을 다시 한 번 즐기는 재미를 선사한다. 그리고 이 영화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면서 자신이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가는 어느 고독한 인간의 치열한 여정을 볼 수 있어 3D 영화로서만 평가해선 안될 또 다른 매력을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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