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헤밍웨이를 찾아서
다이앤 길버트 매드슨 지음, 김창규 옮김 / 이덴슬리벨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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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를 대표하는 작가 헤밍웨이의 사라진 소설 원고를 둘러싼 암투를 그리고 있는 독특한 소재의 추리물이다. 1922년 12월 파리에서 벌어진 실제 사건을 모티프로 하고 있다. 첫째 부인 해들리가 가방째 분실한 초기작품 원고가 헤밍웨이 전공자인 대학 영문학과 교수 앞으로 우송되어 오면서 일련의 소동이 벌어진다. 주인공인 보험조사원 디디 맥길은 예기치 않은 사건에 연루되며 본의 아니게 폭풍의 눈으로 부상한다. 사건을 쉬 마무리 하려는 경찰은 디디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코너로 몰아붙인다. 불리한 점 일색인 와중에도 맥길은 특유의 지적 능력을 발휘하고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그예 사건의 본질에 다가가고 만다.

 

이 작품은 스피디한 전개로 한 순간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데 스토리 라인 못지 않게 매력적인 요소가 정말 많이 녹아 있다. 숨은 진가가 따로 있달 정도로 다른 추리물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미덕을 여럿 지니고 있는 것이다. 정형화된 추리물 문법에서 벗어난 새로운 형식과 스타일로 독자들을 흡인하고 있다.

 

먼저 소재부터 실존했던 작가의 작품 진위 여부를 판별하기 위한 과학적 검증 기법과 관련 학계 전문가들의 견해를 다룬 것이어서 신선하게 다가왔다. 독자층 범주가 추리물 매니아를 넘어 헤밍웨이, 더 나아가 소설문학 애호가 전반으로 확장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 본다.

 

추리물의 스테레오 타입은 주인공이 형사나 탐정이기 십상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예외적으로 가녀린 여성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보험조사원, 그것도 섹시미까지 겸비한 디디가 시종일관 스토리 라인을 주도하고 있다. 그녀는 사건 해결 과정에서 갖은 위험에 노출되곤 하여 시종 아슬아슬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 주인공의 여성성이 도드라지게 부각되고 성적 매력이 어필된다는 점도 여느 작품과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 작품에 등장하는 그녀의 연인만 해도 데이비드 반즈, 프랭크, 매트, 스카티 스튜어트에다 밋치 싱클레어 등 한 손에 다 꼽지 못할 정도이다. 보호본능을 자극하고 한편으론 섹시미를 물씬 풍기는 그녀의 매력 앞에 뭇 남성들은 맥을 못 춘다. 진한 추파를 던지며 작업을 걸어오곤 했다. 그녀도 요조숙녀는 아니어서 마음이 끌리는 대로 그들과 사적인 관계를 맺기도 한다. 탐정물이 으레 그렇듯 주변인물 중에 범인이 있게 마련인데 주인공이 이성과 사적인 접촉을 서슴지 않는 대목에선 좀 뜨악했다 할까? 그래도 로맨틱한 무드가 이야기를 풍성하게 이끌어 읽는 맛이 여간 쏠쏠하지 않다. 더러는 야하달 정도로 많이 나가기도 한다.

 

그녀의 조력자 네트워크도 기존 추리물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면을 지니고 있다. 대개는 주변의 도움없이 고군분투하는 주인공이 그려지는데 여기선 인복이 두텁다 할까. 컴퓨터 전문가, 차량 수리 전문가 등 사건 전개가 미궁에 빠질 때마다 어김없이 그녀를 도와주는 선한 흑기사가 곳곳에 포진해 있는 것이다. 추리물에서 주변 인물들은 대개 범인이거나 주인공의 활약에 찬물을 끼얹는 캐릭터이기 십상인데 그런 측면에서도 코드가 달랐다. 합기도 사범의 훈계나 고모의 예지력 같은 요소도 작품의 결을 신비롭고 풍요롭게 만든다. 그녀가 위급한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집중할 수 있는 담력과 헤쳐 나갈 수 있는 호신술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합기도 사범의 지도에 힘입은 바 크다. 내가 꼽는 이 책 최고의 캐릭터는 고모, 그녀는 현자의 모습으로 등장하여 디디에게 위험을 경고하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준다. 추리물은 논리정연하게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며 한 단계씩 나아가는 것이 일반적인데 고모는 마치 고대 그리스 신전에서 신탁을 전하는 여사제처럼 디디의 수호천사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 기존 추리물에서 쉽게 보기 어려운 캐릭터 설정과 사건 전개 방식이라 하겠다.

 

추리물은 갈등구조의 바탕이 되는 내면의 심리적 분열 양상이 흔히 등장하곤 하는데 이 작품도 그런 문법을 따르고 있다. 그런데 그 심리적 경향이 독특하다. 학계에서만 볼 수 있는 거장에 대한 시기심과 지적 우월성 과시 같은 관념적인 점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현학적인 측면에 관심이 많은 독자의 구미를 당긴다 하겠다.

 

하여 이 작품은 색다른 재미를 두루 맛볼 수 있게 이끄는 실험적 추리물이라 하겠다. 알싸한 로맨틱 무드를 조성하여 간질간질하게 만들기도 하고 학계의 미묘한 경쟁 구도를 그려 특정 분야 종사자들의 심리구조도 엿볼 수 있으며 현자들의 지혜로운 조언과 예지력까지 접할 수 있는 등 여러 모로 흥미진진한 요소를 듬뿍 지니고 있다. 하여 지루할 틈이 없게 만든다. 마지막 대목에 이르기까지 범인의 실체를 짐작할 수 있는 힌트가 전혀 없어서 막막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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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느닷없이 절필 선언을 하여 못내 아쉬웠는데 이번에 멋진 에세이를 출간했다 하여 내용을 살펴보다 아~ 하고 탄성을 내질렀답니다. 짧지만 절절한 글들에서 충만한 필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일상에서 건져올린 지혜로운 잠언들, 그것도 젠체하는 것이 아닌 소박하고 겸허한 문장에 깊이 있는 사념들이 듬뿍 담겨 있었습니다. 이 가을 한 편씩 꺼내 읽으며 우리네 삶을, 세상을 성찰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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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창비시선 344
김선우 지음 / 창비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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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선종의 2대조 혜가가 구도행을 청하는데도 무덤덤한 스승 앞에 자기 팔뚝을 잘라 바치며 간절하고 굳은 뜻을 펴보였다는 입설단비 고사. 이를 젊은 시인이 노래한 것을 보고 섬뜩하게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아직도 선연하다. 청년의 기개, 서릿발 같은 결기가 느껴졌던 것이다. 그 김선우 시인이 어느새 불혹을 훌쩍 지나버렸다. 하지만 그의 시는 여전히 펄펄 끓고 있다. 시인이 언제나 청춘인 까닭은 어디 있을까?

 

리하여 어쩌면 나도 꼭 저 나무처럼

 

파묻힐 듯 어느 흰 눈 오시는 날

마다 않고 흰 눈을 맞이하여 그득그득 견디어주다가

드디어는 팔뚝 하나를 잘라 들고

다만 고요히 서 있어 보고 싶은 것이다 (입설단비 중에서)

 

불혹이라면 이제 번잡한 세상사에서 물러나 초연해질 때라고 다들 말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해묵은 이 말이 여전히 유효할까? 시인은 아니라고 단호하게 발언하고 있다. 연륜을 깊어갈수록 오히려 떨림과 혼돈과 안타까움이 더해가야 한다고 전언한다.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는 그런 시인의 대사회 발언인 셈이다. 시절이 엄혹하고 삶이 팍팍한데 어찌 뒷전으로 물러나 나이 든 태를 낼 수 있겠냐고 항변하는 선언문 같다. 시인의 감성으로는 구조적 모순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자신의 안락을 위해 외면하고 방관할 수 없다고 말이다. 눈밭에 서 있는 자가 따뜻한 방을 찾기보단 오히려 자신의 팔뚝이라도 잘라 세상을 녹여야하지 않겠냐고. 시대가 이러니 계속 청춘의 흔들림으로 머물 밖에 없다고 단호하게 결기를 세운다.

 

시인은 때론 자신의 무기력을 자책하기도 한다. 질곡의 세상에서 달리 뾰족한 수도 없이 드립만 날리고 있는 자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곧 결기를 다잡고 시대의 방향을 질타한다. 우선 소유욕으로 점철된 자본주의 체제에 딴지를 건다. 모든 것을 사적 소유 개념으로만 바라보는 천민자본주의 행태를 꼬집는다. 그러면서도 대안 제시를 잊지 않고 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소유하지 않고 사랑하고 공유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얘기하고 있다.

 

말이야 천만번 못하겠는가 내 마음이 당신을 이리 사랑하는데

그런데도 나는 [당신꺼]라고 말하지 않는다

햇살을 곰곰 빗기면서 매일 다시 생각해도

당신이 어떻게 내 것인가 햇살이 공기가 대지가 어떻게,

내 것이 아닌 당신을 나는 오 늘 도 다 만 사 랑 한 다... ([내꺼] 중에서)

 

시인의 시선은 또 낮은 자,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로 향한다. 그들의 세밀한 음성에도 귀 기울이고 있다. 아직 얼어 죽고 굶어죽은 자들이 존재하는 이 시대의 비정한 현실을 얘기할 땐 담백하고 냉소적인 것 같지만 실은 축축하게 젖어 있음이 읽힌다.

 

그지 같아! / 응? / 거지 같다구 사는 게 / 거지가 뭐 어때서? / ......가자 / ......그래 가자 (중략)

 

약수터에서 물 한 통 받은 두 사람 벤치 앞을 다시 지난다 눈많은그늘 겹겹이 쌓인 벤치 밑, 나비가 호호 발을 분다 이 벤치엔 비밀이 많다 가장 가까운 비밀은 일주일 전 눈많은그늘할아버지, 사흘째 잠에서 깨지 않은 채 딱딱해진 그를 나흘째 경찰이 와 마대자루에 담아갔다 지겨운 거지들! 벤치 밑의 눈많은그늘나비가 사람에게서 배운 그늘의 말이었다 (눈많은그늘나비 중에서)

 

아픔을 노래하면서도 시인은 생태적 감성을 잊지 않는다. 나비가 사람의 말을 배우며 발을 호호 불고 인간은 나비의 이름으로 불린다. 새로운 세대의 감성은 자연과 인간이 별개의 존재가 아닌 공존하고 소통하며 더불어 어우러지는 것을 자연스레 받아들인다. 시인의 감성과 의식의 지향이 이러하니 또 청춘의 모습 아니겠는가? 이런 세상에 시인은 달리 줄 게 없어 헌혈이라도 하겠다고 나선다. 그런데 대상을 인간으로만 국한하지 않는다. 돌고래, 펭귄, 자벌레, 심지어 외계 얼음 종족까지도 혈액형을 알려주면 기꺼이 자신의 피를 내어 주겠다고 나선다. 이 피는 물론 생물학적 혈액일수도 있겠지만 심정적 공감과 공유, 모든 살아있는 것들과의 연대를 말하고 있는 것일 테다.

 

그녀의 떨림과 흔들림은 언제쯤 잦아들까. 아마 영원히 그러지 못할 것이다. 또 어떤 이가, 무슨 가녀린 것들이 시인을 아프게 할지 모르니 말이다. 그런 여린 시인, 세상 모든 것들의 감각에 감정을 싣는 시인이니 언제나 청춘의 감성이랄 밖에. 그런 시인의 숨결이 배어 있는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는 영원한 청춘의 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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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가 아니면 다 실패한 삶일까 - 철학자와 심리학자의 인생질문 20 Art of Lving_인생의 기술 4
줄리언 바지니.안토니아 마카로 지음, 박근재 옮김 / 아날로그(글담)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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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최고가 아니면 다 실패한 삶일까? 처음 이 제목을 보고선 그건 물어보나마나 당연한 것 아닐까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어수룩한 골목에서 아무나 잡고 물어봐도 “그건 아녀~ 살아보니 그렇지가 않아!”라고 대답할 겁니다. 이런 뻔한 테마를 잡다니 의외다 싶었습니다. 그러나 곰곰 살펴보다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성급하게 지레짐작했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습니다. 요즘 범람하고 있는 자기계발서 부류에서 얘기하는 방식과는 많이 달랐던 것입니다. 스피디하게 생활지침을 내뱉다가 뜬금없는 잠언으로 마무리 짓곤 하는 자기계발서의 문법에 어느새 길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책에서는 평소 당연하게 여기고 있던 원리들의 근원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연유도 모르고 으레 그런 줄 알던 것들에 철학적 가치와 심리학적 논리로 옷을 입혀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철학과 심리학의 콜라보레이션인 셈이지요.

 

철학은 본디 의미와 가치를 성찰하는 인문학 중의 인문학입니다. 학문이란 원래 철학밖에 없었지요. 모든 사물과 현상의 본질과 근원, 행동과 판단의 근거를 파악할 수 있는 토대가 바로 철학이니까요. 심리학은 비교적 근대에 독립 학문으로 발전했는데 철학적 근거를 실험이나 형식논리로 정당화해주는 사회과학의 한 갈레입니다. 주로 일상에서 부딪히는 개별적 사건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죠. 철학에 비해 깊이는 얕은 반면 정확성과 객관성 면에서는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두 학문은 상호보완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하겠습니다. 철학만으론 근거 없는 공리공론으로 빠지기 쉽고 심리학은 인간 내면의 심층을 헤아리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철학과 심리학의 협업, 콜라보레이션을 통해 인간 행동의 의미를 헤아리고 우리들 사고의 경향과 행동방식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주제, 이를테면 ‘목표가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를 두고 심리학자와 철학자가 각각의 입장에서 접근하여 목표의 노예가 되지 말라고 권고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다 가끔씩 학문의 경계를 넘기도 합니다. 앞서 제시했던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한 쪽에서는 ‘목표 설정 전에 가치에 대해 재고할 것을 권한다.’고 하고 다른 이는 ‘훌륭한 목표는 해냄이 아닌 하고 있음에 초점을 둔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쪽이 철학자, 또 심리학자의 견해 같습니까? 당연히 전자가 철학자의 발언 같지요. 하지만 반대로 심리학자의 견해입니다. 단순 협업이 아닌 크로스오버까지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루고 있는 주제도 흥미롭습니다. 꼭 알고 싶었던 얘기들로 빼곡하지요. 가면 뒤에 숨은 자신의 실체를 발견하고 싶다거나, 자기기만에 빠져 있는 스스로가 밉다거나, 또 자부심과 자만심의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뻔뻔하게 살고 싶지 않다거나, 이성이 아닌 직관적 결정에 의존하는 경우 등 우리가 흔히 범하기 쉬운 오류나 스스로를 성찰할 때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있던 문제들입니다. 하나 같이 그간 우리를 멈칫거리게 했던 주제들이지요.

 

그래서 자기계발서류의 스피디한 이야기 전개와 범주화된 행동지침 정리 등 깔끔하게 포장된 세련된 제품과는 거리가 있는, 심각하고 후속 논쟁거리를 담고 있는 책이어서 쉬 읽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왜 생각의 방향을 그렇게 잡았는지, 행동의 지침은 또 어떤 근거로 설정해야 하는지 등 근원적인 의문에 빠져 해답을 찾지 못하던 이들에게 이 책은 의미 있는 출구를 제공해줄 듯합니다. 경박한 시대에 무거운 주제를 심층적으로 파고들어 약간 고답스런 감이 들지만 뿌리 없이 잎과 꽃만 화려해서는 나무가 크게 자라지 않는 법이듯 의미 없는 얘기를 현란하게 늘어놓기만 해서는 공허함뿐일 것입니다. 가치와 논리가 뒷받침되지 않는 행동과 판단은 그릇되기 쉽고요. 그런 측면에서 이 책은 우리 생각과 판단과 행동의 뿌리와 뼈대를 세워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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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않는다는 말
김연수 지음 / 마음의숲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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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페루를 다녀 온 세 명의 싱겁한 꽃청춘(?)들의 노래를 즐겨 듣고 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왠지 윤상의 노래 [달리기]가 유난히 귀에 꽂힌다 할까. 특히 이 대목, "단 한가지 약속은 틀림없이 끝이 있다는 것, 끝난 뒤엔 지겨울 만큼 오랫동안 쉴 수 있다는 것" 에선 한동안 사고가 멈추는 것 같다. 삶의 비의를 더 이상은 설명할 수 없을 듯하니 말이다. 핵심을 직관적으로 건드리고 있다.

 

김연수의 에세이 [지지 않는다는 말]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한다. 어쩜 시시껄렁한 얘기들을 설렁설렁 풀어나가다 짧게 한 마디 촌철살인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얘기를 끌고 가는데 마지막엔 거개가 달리기에 빗대 삶의 지혜를 들려주고 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끈기가 없는, 참으로 쿨한 귀' 편에서 자신의 음악 취향이 늘 짧게 표변하곤 하여 진득하게 한 노래에 매달리지 않는 팔랑귀라고 자책한다. 그러면서 이를 달리 생각하면 새로운 장르, 신보를 거리감을 두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니 늘 좋은 것만을 취하는 셈이라고 스스로 위무한다. 평생 최고의 노래만을 듣는 방법이라고 말이다. 그런 얘기 끝에 최고의 삶이란 달리기와 같이 잊을 수 없는 일들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발언한다.

 

"결국 최고의 삶이란 잊을 수 없는 일들을 경험하는 삶이라는 뜻이다. 겨울의 달리기는 정말 대단하다. 그건 달리기가 아니라 고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여름의 달리기도 마찬가지다. 폭염 속을 달리고 있으면 뜨거운 바람 때문에 숨이 막힌다. 하지만 여름에 할 수 있는 최고의 달리가란 뜨거운 햇살과 서늘한 그늘을 번갈아 가며 지나가는 달리기다. 30도가 넘는 낮에 달린 일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두 달만 지나도 이제 그런 달리기를 하긴 어려워질 텐데. 최고의 달리기를 하는 건 정말이지 너무 쉬운 일이다. 그렇다면 최고의 삶도 마찬가지다."

 

음악 취향과 삶과 달리기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잔잔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전언을 듣고 있노라면 최선의 삶을 영위하는 것도 별로 어렵지 않을 듯하다.

 

이 책엔 그 외에도 작가의 유년 시절부터 청년기, 등단 이후 그리고 불혹의 나이가 된 이후 겪은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들어 있다. 맥주를 마시며 혹은 도서관에 다녀오다가 문득 스친 생각의 편린들을 담고 있다. 그의 내면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는 느낌이다. 물론 그의 최고의 관심사인 달리기에 대한 성찰도 듬뿍 담겨 있다. 그에게서 짧은 얘기 여러 편을 들어 어쩜 가볍다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곰곰 들여다보면 내심 웅숭깊은 고백으로 빼곡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 한 편 김연수의 대표작을 읽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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