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속의 지리 이야기 - 20가지 문학작품으로 지리 읽기
조지욱 지음 / 사계절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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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는 쉬 다가갈 수 있는 만만한 과목이 아니다. 진입장벽이 녹록하지 않다. 교과 분류 상 사회탐구영역에 해당하는 과목인데도 오히려 자연과학적 소양을 더 많이 필요로 한다. 지형과 기압 등에 대한 배경지식을 갖추지 않고는 내용을 제대로 소화할 수 없다. 그래서 학생들의 관심권에서 좀 벗어나 있다 할까?

 

그래서 필자는 이런 시도를 한 것 같다. 우선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시선을 확 끌어당긴 다음 지리의 세계를 슬며시 꺼내 보이고 있다. 요즘 유행하는 퓨전 방식 혹은 몇 년 전 출간 붐을 일으켰던 소프트류 저작물에 해당한다 하겠다. 그런데 이런 유의 책은 대개 두 분야를 연결하는 선이 너무 가느다랗게 이어져 물리적 결합에 그치기 일쑤다. 그러니 아이들은 이마저도 외면하고 만다.

 

하지만 이 책은 예외라 하겠다. 달라도 많이 달랐다. 저자는 문학과 지리를 가르는 경계선 윤곽을 완벽하게 지우고 있다. 문학 작품에 지리 개념이 자연스레 스며들어있고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회 진보에 대한 열망도 어색하지 않게 잘 버무려져 있다. 완벽한 화학적 결합을 이뤄내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먼저 텍스트로 문학 작품을 소개한 다음 작품 속 배경이 되는 지리 개념을 정리하고, 이와 관련된 주변 이야기를 곁들이고 있는데 하나 같이 인간적 감성이 듬뿍 배어 있고 사회구조적 모순도 드러내고 있어 감정이입을 유발한다. 흐름이 정연한 논리 수순을 밟고 있으면서도 문학적이고 사회과학적인 것이다.

 

이를테면 이솝 우화에 나오는 [양치기 소년과 늑대] 얘기를 들려주고 동화에 등장하는 목축지를 옮겨 양을 치는 이목 행위와 그 배경이 되는 알프스 히말라야 조산대 산자락의 지형을 설명한다. 여기에 에티오피아 목동들이 커피를 먹고 정신 번쩍 차렸다는 얘기 끝에 그들이 왜 나른하고 졸리고 외로웠는지를 떠올리며 늑대보다 더 무서운 게 외로움이라고 환기한다.

 

처음엔 단순한 동화에 어떻게 지리가 숨어있을까 반신반의했는데 의문은 자연스레 풀렸다. 이야기 맥락 속에 깃들어있는 지리 개념이 새록새록 돋아났다. 왜 하필 그때 소나기가 내려 소녀의 죽음을 앞당겼는지, 아기돼지 삼형제가 지은 집은 어떤 지역에서 나는 재료를 사용한 가옥인지 저절로 이해하게 만든다.

 

책을 읽으며 문득문득 놀란 게 저자의 남다른 문학적 감수성이다. [메밀꽃 필 무렵]에서 ‘바닷가의 어부들은 파도가 일 때 하얗게 부서지는 포말을 가리켜 메밀꽃이 폈다고 한다. 가을 봉평은 고원에 파도가 이는 곳이다.’ (26쪽)라고 하거나 [소나기]에서 이야기의 배경이 되었던 양수리(두물머리)를 첫사랑의 랜드마크라고 명명한 대목에선 무릎을 치고 말았다. 예민하고 정교한 감성의 촉수가 느껴졌던 것이다.

 

인간에 대한 따스한 시선도 읽혀진다. 그는 양치기소년을 탓하지 않았다. 그가 장난칠 수밖에 없는 이유를 파고들며 그에 대한 배려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양치기 소년을 이제 거짓말쟁이로 기억하지 말고 외로운 소년으로 바꿔 생각하자고 제안하고 있으니.

 

사회구조적 모순에 대한 안목도 예사롭지 않다. [시골쥐와 서울쥐]에서 이촌향도와 농업시장 개방에 따른 농촌의 변화 등 사회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메밀 꽃 필 무렵]에서는 봉평장이 몰락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전통시장 활성화 방안에 대해 생각한다. 비분강개에만 그치지 않고 일본 이시카와현 오미초 시장의 거듭나는 모습을 통해 희망의 실마리를 보여주기도 한다. 허생전에서는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제안하고 있다. 하나 같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슈들이다.

 

압권은 마지막에 든 난쏘공. 분위기 싸할 정도로 우리 사회의 어두운 구석,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처참한 실상을 드러내고 있다. 고급 아파트를 배경으로 남루하게 펼쳐진 판자촌 사진의 리얼한 앵글은 더 많은 전태일, 더 많은 용산 참사를 예고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처럼 [문학 속의 지리 이야기]는 아이들을 지리의 세계로 바짝 끌어당기는 요소를 두루 지니고 있다. 익숙한 문학 작품 속에 녹아 있는 지리 개념은 낯설지 않게 다가오고, 문학적 감성과 인간에 대한 연민이 듬뿍 밴 문장은 몰입도를 높인다. 사회문제를 톺아보는 따뜻하면서도 축축한 시선은 자연스레 집중하게 만든다. 이런 미덕으로 빼곡한 책이니 아이들을 지리의 세계로 이어주는 징검다리로 손색이 없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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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기의 뒤죽박죽 경제상식 경제공부는 경제저축이다 4
최진기 지음, 신동민 그림 / 스마트북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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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최진기는 정통 경제학자가 아니다. 이력을 보니 사회학 전공으로 증권사 근무 경력이 있을뿐 체계적으로 경제학을 이수한 건 아니다. 그래도 이론과 실무를 아우른 경제 실력 하나 만큼은 교수님들 뺨치는 수준이라는 게 주지의 사실인데 지나치게 겸손해서인지 이 책 이름을 뒤죽박죽 경제상식으로 잡았다. 기품과 권위를 따지는 교수님들이라면 붙이지 않을 제목으로 말이다. 그러나 이 책은 단언컨데 뒤죽박죽 앞뒤 맥락 없이 뜬구름 잡듯 씌어진 게 아니다. 오히려 어떤 경제학 서적, 정통이든 요즘 유행하는 소프트류까지 포함해서든, 보다 더 논리가 일관되게 꿰어지는 구조로 짜여져 있다.

우선 서론이랄까, 입문 부분부터 인상적이다. "경제 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는 권고는 역설적으로 경제 공부가 꼭 필요함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면서 경제 공부를 위한 나름의 로드맵을 제시하며 앞으로 활용 가능성이 누구에게나 무궁무진 열려있음을 강조하는 대목에서 벌써 그의 아우라에 휩쓸려 들어간 기분이 들었다.

고등학생도 다 아는 경제상식 이라는 표현도 실은 제대로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현실을 반어적으로 말한 게 아닐까? 누구나 다 알아야 하는 데 당신은 왜 여태...라고 들린다. 그렇게 워엄업을 한 다음 각론으로 들어가 금리, 채권, 통화, 경기정책, 환율, 세계경제 및 주식시장에 대해 톺아본다. 경제 전반을 두루 다루고 있는데 아쉽게도 재정 부분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다고 할까? 그의 주전공이 금융 분야여서 일테다. 그러니 이 책은 결코 뒤죽박죽 엉망진창으로 꼬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하겠다. 엄밀한 체계로 구축된 스코프와 시퀀스를 보여주고 있으니.

이 책은 쉽게 잘 읽히며 재미도 있는데 이 또한 뒤죽박죽 혼란스럽다면 불가능할 것이다. 세부 제목인 통화가 부풀어, 앗 뜨거라 하이퍼인플레이션 등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상큼하게 통통 튀고 있다. 학자의 젠 체 하는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쉽고 실감나게 경제의 세계로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신똥의 그림도 이해도를 높이는 데 한 몫하고 있다.

또 하나 얘기하고 싶은 게 이 책이 실용서이기만 한가 하는 점이다. 책 표지에 보면 재테크도, 시사도, 취업시험도 이 책으로 준비하면 안 될 게 없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래서 수험생을 위한 실용서라는 느낌이 물씬 든다. 그러나 내용을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오히려 경제학의 체계를 잡지 못해 혼란스러워하는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에게 안성맞춤일 듯하다. 이론적 깊이도 만만찮은 것이다. 단순히 실무 상식과 현실 대처 요령만 그리고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의 배경이 되는 이론적 토대와 학문적 원리를 제시한 다음 현실 문제를 곁들여 적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제목과는 다르게 정선된 체계를 지니고 있으며, 수험생만을 대상으로 한 실용서로 폄훼할 게 아니라 이론적 토대도 탄탄하게 갖춘 기본서라 하겠다. 난해하여 일반인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는 경제학을 쉽고 재미 있게 정리하고 있다. 이론의 구조를 명료하게 파악하고픈 이들과 더불어 경제 원리를 실생활에도 적용하고픈 이들 모두에게 이 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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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 - 위대한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의 삶과 꿈
코린 마이에르 지음, 안 시몽 그림, 권지현 옮김 / 거북이북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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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프로이트가 직접 썼거나 다른 이들이 그의 생애와 사상을 분석한 책 몇 권을 읽어보았지만 이 책만큼 인상적인 것은 없었다 하겠다. 만화 형식으로 접근한 것이어서 처음엔 아이들 그림책마냥 겉핥기 정도에 그치는 게 아닌가 염려했는데 기우였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으니. 코린 마이에르의 글도 직관적이고 명료하게 정리된 것이어서 프로이트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지만 화가 안 시몽의 빼어난 삽화가 이 책의 깊이와 품격을 더 두드러지게 만들고 있다. 세밀화도 아니고 그렇다고 추상화도 아닌, 구상과 비구상을 오가며 독자들이 쉽게 프로이트의 세계에 진입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생애와 사상은 온통 파란만장하고 대부분 눈길을 끄는 것들이지만 이 책에서 특기할만한 대목 몇 군데가 우뚝 돋보였다. 먼저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을 통한 정신분석을 시도하게 된 계기를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 눈에 확 띄었다. 1897년, 외롭고 우울증에 시달리던 프로이트는 스스로를 분석해 보고픈 충동을 느낀다. 그 과정에서 프로이트는 친구인 빌헬름 플리스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몇 가지 켕기는 것들을 곰곰 짚어보게 된다. 그 기억들은 꿈인지 현실인지 모호하게 아른거린다. 어릴 적 여동생에게서 민들레 한 다발을 빼앗았던 것, 엄마의 벌거벗은 몸을 목격한 일, 시각장애인이 성기를 내놓고 노상방뇨하는 소변을 통으로 받는 모습 등을 연쇄적으로 떠올리며 그는 자신의 생각을 발전시켜 나간다. 그 과정을 안 시몽은 각종 도형과 물건이 그려진 뇌구조 모양의 미로로 형상화하여 물음표로 나타낸 핵심에 도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프로이트는 이를 통해 꿈은 그림 수수께끼와 같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러면서 꿈은 욕망을 충족시켜주고 잠을 지켜주는 수면 유지 기능도 있으며 판단하거나 계산하지 않고 단지 기억을 변형시키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그의 이론을 소개한 것 중에선 무의식에 대한 설명과 그림이 압권이었다. 프로이트는 꿈을 무의식으로 가는 지름길로 여겼다. 이르마라는 환자를 치료한 경험을 통해 환자에게 진료 과정에서 차마 할 수 없었던 말을 꿈속에서 내뱉는다. 죽어라!

 

무의식적 실언, 말실수나 문득 떠오른 재치 있는 말도 속마음을 드러내는 변형된 방식으로 보았다. 회의 진행을 부담스러워하는 의장은 개회선언을 해야 할 상황에서 폐회사를 해버리고 거지는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을 에둘러 나타내며 남편은 아내와 헤어지고픈 마음을 무의식적 중 내뱉는다는 것이다.

 

무의식적 실착, 실수는 욕망을 드러내는 또 다른 방식으로 보았다. 비너스상을 떨어뜨리는 행위는 다른 골동품을 구매하고픈 욕구가 드러난 것이란 얘기다.

 

무의식과 더불어 프로이트가 강조한 핵심 개념이 신경증의 원인에 대한 분석이다. 프로이트는 억압된 성이 신경증의 근본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처럼 말이다. 프로이트와 성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 하겠다. 그래서인지 프로이트의 정신과 병원 주소까지 야릇하게 여겨졌다 할까? 베르가세 거리 19번지, 그 19에 쳐진 동그라미가 내 눈엔 왜 그리 크고 빨갛게 보였던지?

 

프로이트의 생애 후반부를 다루고 있는 부분도 새겨볼 만하다. 여러 학자나 예술가들과 교유하고 정신분석학파를 결성하였으며 동료들과 견해 차이로 결별하는 등 그의 생애는 결코 순탄치 않았다. 2차 대전 중에는 나치에 점령당한 오스트리아를 탈출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인류의 파괴 본능과 죽음의 충동에 대한 직관도 가능했으리라.

 

번역가의 유머러스하고 직관적인 말투도 흡인력을 높이는 요인이다. 쥐 인간의 사례를 소개하며 그의 뇌구조와 내뱉은 말들을 열거하는데 글쎄 쥐띠, 쥐드래곤, 쥐며느리가 등장하는 게 아닌가? 친숙한 어휘들로 분위기를 살리며 내용에 몰입하게 만들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만화 장르라 하여 후루룩 읽어버리고 말 성질이 아니라 하겠다. 그림 하나 하나가 의미를 담고 내용을 실어 발언하고 있었던 것이다. 프로이트의 저작이나 학자들의 관련 서적에서 무의식이니, 신경증 등등 난해한 관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독자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프로이트의 세계에 손쉽게 접근하여 그의 진면목을 명료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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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과 선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경남 옮김 / 모비딕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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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봄 예기치 않은 초거대 쓰나미가 우리 사회를 휩쓸어버렸다. 꽃다운 아이들을 처참하게 수장시킨 전대미문의 사건이라 격랑의 여파는 깊고 넓었다. 이와 관련하여 곳곳에서 개탄의 목소리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격앙된 이들은 자본의 노예가 되어버린 기업의 행태와 이를 사주한 사이비 종교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지만 그 와중에 국가는 도대체 무얼 했는가 하는 근원적 의문을 제기하는 원성도 만만찮았다. 생명이 경각에 달린 절체절명의 순간에 공권력은 어디로 실종해버렸는지를 따져 묻는 것이다. 여기에 음모론까지 가세하여 국가와 세월호 선사가 블랙 커넥션으로 이어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억측도 난무하고 있다. 사후 수습에 미적대고 은연중 증거를 은폐, 조작하려는 시도까지 보이고 있어 음모론은 갈수록 확대재생산 되는 지경이다.

 

[점과 선]을 읽으며 자연스레 세월호 사건이 오버랩되었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눈에 비친 당시 일본 공직사회의 모습과 우리의 그것이 너무 흡사했기 때문이다. 비리와 부정이 습속처럼 몸에 밴 그들은 음험한 계략을 다반사로 실행하고 제 잇속을 챙기는 일이라면 별의별 짓도 서슴지 않는다. 도쿄 관가와 납품업자 간 얽히고설킨 로비 커넥션과 이와 관련된 상층 엘리트들의 치졸한 행태는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생각해보면 우리 해경과 정부 당국자들도 거기서 오십보백보, 별 차이가 없을 듯하다. 그래서일까? 의로운 분노를 일으킨 두 형사, 도리카이 주타로와 미하라 기이치의 활약상에서 묘한 대리만족을 느꼈다. 정의에 대한 열망으로 불타오른 우리의 영웅들이 그예 악한 세력의 실상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말았으니.

 

그런데 [점과 선]은 의외의 매력도 지니고 있었다. 사회구조적 모순에만 포커스를 맞추고 있는 게 아니었다. 추리물 특유의 은근한 암시와 지적인 게임을 곳곳에 배치하여 지루할 틈이 없게 만든다. 점과 선, 시간과 공간을 연결하며 꼬인 실타래를 풀어나가는 해결 기법은 추리물 가운데 손가락을 꼽을 정도로 탁월한 설정이라 하겠다. 또 하나 두드러지게 다가온 것은 도리카이 주타로 형사와 미하라 기이치의 문학적 감수성이랄까, 상황에 딱 어울리는 용어로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이었다. 그들은 사태의 본질을 콕콕 집어내며 주제를 호명하고 있었다. 하여 [점과 선]은 사회물에 미스터리 기법을 가미하고 직관적인 용어로 상황을 정리하는 등 다른 작품에서 찾아보기 힘든 여러 미덕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여기서 두 형사의 직관적 사태 파악 능력과 적절한 언어 표현법에 대해 좀 더 살펴보고자 한다.

 

 

식욕과 애정의 문제 : 도리카이 주타로 형사의 경우

 

늙다리 형사 도리카이 주타로는 지혜로운 조언자 캐릭터이다. 젊은 미하라의 멘토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새파란 후배인 미하라 형사에게 기꺼이 수사 편의를 제공하고 아이디어를 보태며, 삶의 연륜이 듬뿍 담긴 편지로 수사의욕을 북돋우기도 한다. 그런데 사실 그는 지극히 평범한 생활인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일본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권위적인 가장의 모습에다 직장에서는 상사를 성의껏 모시는 하급자 역할에 충실한, 별 두드러질 것 없는 자다. 그런 그에게 작가 세이초는 막중한 역할을 맡기고 있다. 작은 일에도 반짝 지혜로운 발상으로 다가가 이를 토대로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내도록 이끈다. 그는 일견 무시해버리기 십상인 열차 식당칸의 영수증에 착안하여 사건의 얼개를 새롭게 그려낸다. 흔하디흔한 신파조의 동반자살 사건으로 치부하여 수사를 매듭지으려는 분위기가 흐르는 와중에 그는 단순 자살사건이 아님을 직감한다. 식사 영수증을 두고 고심을 거듭하던 도리카이는 우연히 결혼을 앞두고 있는 딸과의 대화를 통해 본질을 꿰뚫는다. 딸의 얘긴즉슨 연인이 식사하러 가자고 제의할 경우, 비록 포만감을 느끼고 있는 상태라도 동행해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었다. 도리카이는 단번에 1인으로 표기된 영수증의 문제점을 알아차렸다.

 

그건 식욕이 아니라 애정의 문제라고.

 

그래서 동승했던 둘은 연인 관계가 아니며 이후 일정도 함께 하지 않았음을 확신한다. 이보다 더 절묘하게 사태를 정리할 수는 없을 듯하다. 명쾌한 용어로 상황의 고갱이를 파악해버렸으니 이후 수사는 급진전될 밖에. 세이초는 도리카이 형사의 입을 빌어 사건의 성격을 또렷하게 규정하고 있었다.

 

 

우연과 조작의 문제 : 미하라 기이치 형사의 경우

 

미하라 형사는 통상적인 추리물 주인공 캐릭터와는 거리가 있다. 치밀한 논리에 집요한 의지 같은 이 분야 특유의 미덕은 기본이고 상사와의 공감과 소통능력 보유에다 직속 라인이 아닌 도리카이 형사의 조언까지 경청하는 등 유교적 덕목까지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의 추리력은 그렇게 반짝거리는 것은 아니지만 차분하고 끈질긴 상념 끝에 결국은 사건의 핵심에 다가가고 만다. 야스다 다쓰오 사장이 왜 도쿄역 플랫폼까지 출입 업소의 종업원을 대동했는지, 그것도 꼭 그 시각에 그 지점에 들어갔는지, 또 굳이 부르지 않아도 될 거래처 영업부장을 한밤중에 사포로역으로 왜 불러냈는지 등등,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념 가운데 한걸음씩 본질에 접근한다.

 

그는 야스다 사장의 정신세계와 행동방식에서 특이한 점을 발견한다. 알리바이가 지나치게 완벽했던 것이다. 그는 사건이 일어났던 시각에 큐슈의 가사이만에 있는 외딴 바닷가 바위투성이 해변에 존재하지 않았음을 점과 선, 시간과 공간 관념으로 확고하게 입증해 보이고 있다. 여기서 미하라 형사는 아귀가 너무 딱딱 맞아떨어지는 게 도리어 부자연스럽고 짜 맞춘 냄새가 나는 것을 느낀다. 치밀한 부재증명은 역으로 존재 증명의 개연성을 높여주고 있다고 말이다. 우연의 일치가 몇 번이나 겹쳐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조작된 필연이라는 점을 간파한다.

 

그것은 우연을 빙자한 인위적인 조작이기 십상이라고.

 

언어란 사고를 담는 그릇이고 행동을 유발하는 원천이다. 사태의 추이를 고스란히 함축하고 있는 테마를 잡고 나니 다음 단계로 자연스레 이어져 결국엔 해결이라는 수순을 밟게 될 밖에.

 

이처럼 도리카이 형사와 미하라 형사는 상황 전개에 딱 어울리는 용어로 사건의 성격과 본질을 명료하게 정리하고 있다. 놀라울 정도의 직관력을 발휘하여 문제의 포인트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세이초는 이처럼 사태에 부합되는 언어 표현으로 복잡한 문제를 일거에 정리해버리는 묘수를 두고 있다.

 

하여 [점과 선]은 사회성 짙은 추리물이라는 점만으로도 다른 작품과 차별성이 두드러지지만 절묘한 표현으로 주제를 함축, 정리하고 있는 것이 오히려 더 독자들에게 어필하는 매력이라 하겠다. 그러니 다들 세이초, 세이초 하는 것 아니겠나 싶다. 어떻게 일본에서 히가시노 게이고 같은 작가가 나올 수 있었는지, 미야베 미유키가 왜 그토록 세이초에 열광하며 그에게 헌정하듯 작품을 썼는지 이유를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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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문장 한국어 글쓰기 강좌 1
고종석 지음 / 알마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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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생각만 해도 숨이 턱 막혀오는 일이다. 우리말 특유의 섬세한 결을 살리면서 정확한 논리적 근거에다 기품까지 갖춘 글을 쓰기란 까마득 멀어 보인다. 종종 글이랍시고 끼적거리지만 이게 과연 제대로 된 건지, 다른 이들에게 가닿는 의미 있는 글인지 자문해보면 슬몃 꼬리를 내리게 된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간 글쓰기에 관한 책 몇 권을 살펴보았지만 진작 알고 있던 기법을 확인하는 정도여서 만족할만한 답을 얻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엔 제대로 걸렸다 싶다. 고종석의 글을 읽고는 어렴풋하게나마 윤곽이 잡히는 것 같고 왠지 의욕이 되살아났던 것이다. 글쓰기 형식에 관한 기초 이론에다 글 내용에 담길 컨텐츠의 배경지식은 물론, 우리말을 맛깔스럽게 살리는 기법에 이르기까지 막힘없이 이어지는 그의 얘기를 따라가다 어느새 훌쩍 커버린 느낌이 들었다 할까? 그는 글쓰기를 업으로 하지 않는 아마추어 작가들이 늘 묵직하게 지니고 있던 체증을 후련하게 뚫어주고 있었다. 그것도 전문가 특유의 젠체하는 밉살스런 모습이 아니라 이웃집 아저씨 같이 친근하게 다가와 두런두런 얘기를 풀어나가고 있어 부담 없이 다가갈 수 있었다. 압권은 이론 설명에만 그치지 않고 실제 텍스트를 분석한 다음 첨삭까지 곁들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꼼꼼하게 짚어가며 잘못되었거나 어색한 부분을 하나하나 바로잡아 어느새 아름답고 정확한 글로 탈바꿈시키는 과정은 절로 무릎을 치게 만들었다.

 

고종석은 특히 우리말다운 글쓰기를 강조한다. 일본어 풍을 쏙 빼고 유럽 자연언어의 영향으로 널리 회자되고 있는 번역문투를 최대한 배제하여 한국어 특유의 감칠맛을 도드라지게 살리는 글쓰기 말이다. 그 단적인 예로 우리말에 특히 발달되어 있는 의성어와 의태어 활용을 권하고 있다. 풍부한 색채어를 구사하여 다른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섬세한 감정의 결을 오롯이 느끼게 하는 것도 비법으로 제시한다.

 

그는 또 정확하고 논리적인 글쓰기의 중요성을 몇 번에 걸쳐 힘주어 말한다. 깔끔하고 멋스런 글보단 사실에 부합되는 글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일환으로 맞춤법과 문장의 호응 등도 유의해야 하는데 이는 글의 완성도를 확인하는 퇴고 작업을 통해 면밀히 보완되어야 할 점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자주 글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배경지식을 곁들이고 있다. 그래서 글 쓰는 기법은 물론 상식의 폭을 넓힐 수 있어 흐뭇했다.

 

기품 있는 글쓰기도 고종석이 강조하는 것 가운데 하나다. 글의 품격은 글쓴이의 인격과도 관련이 있지만 읽는 이를 존중하는 차원에서도 꼭 필요한 일임을 말하고 있다. 직설적이고 노골적인 글쓰기 풍조가 만연하고 있는 요즘 세태에 비추어 다들 새겨 들어야 할 대목이라 하겠다.

 

이 글을 쓰는 사람이 정말 기분이 더럽기 짝이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절대 글에서 써서는 안 될 표현입니다. 격앙된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글의 기품을 떨어뜨리는 짓입니다. (148쪽) 

 

그런데 기품을 강조한다 하여 고급스런 취향이나 지적 우월감 과시 같은 것을 떠올리면 곤란하다. 오히려 그의 말과 글은 수더분해 보일 정도로 스스로를 낮추고 있다. 그는 특히 자신을 돋보이려는 의도로 씌어진 젠체하는 글을 혐오한다.

 

‘그건 내가 처음 한 말이야!’하고 잘난 척하기 위해서 쓴 글입니다. 이런 글은 쓰지 마세요. 쓰고 나서 후회합니다. (153쪽)

 

깐깐한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게 그는 말글살이에 관해 너그러운 스탠스를 취하고 있어 신선하게 다가왔다. 글의 품격을 떨어뜨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SNS언어 등 사회 방언과 특정 계층의 하위문화인 신조어도 허용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언중의 영향력을 인정하는 개방적 입장을 여러 군데 드러내고 있다. 더러 문법에 어긋나는 말과 글도 언중이 즐겨 사용하면 언젠가 길이 되듯 자연스레 받아들여 질 것이라며 시대 변화에 따른 언어의 부침과 변화를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걸으면 길이 되고, 많은 사람이 말하면 표준어가 됩니다. 표준어에 대한 최종 심판권은 언중입니다. 그래서 저는 SNS의 사회방언들을 대할 때 흐뭇합니다. (247쪽)

 

앞에서 얘기했듯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실제 글쓰기 첨삭지도 코너라 하겠다. 그런데 텍스트로 삼은 것이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수강생 두 명의 글을 제외하곤 모두 그의 책 [자유의 무늬]를 대상으로 하고 있어서 인상적이었다. 비록 자신이 쓴 글이지만 처음엔 의식하지 못했던 부족한 대목을 신랄하게 자아비판하고 있어 때론 말리고 싶을 정도였다. 잘못된 글쓰기 사례, 뱃 케이스로 자신의 글을 지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앞에 든 책에 실린 글을 인용하고선 이 문장은 나쁜 문장이라고 단언하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 ‘개인적으로’라는 말이 과연 필요할까요? 여러분 생각은 어떠세요?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생각하지, 집단적으로 생각하겠어요? 이런 쓸데없는 말은 다 쳐내야 합니다. 그냥 나쁜 말버릇일 뿐입니다. 간결한 문장이 좋은 문장입니다. 필요 없는 말은 절대 쓰지 마세요. (138쪽) 

 

글을 어떻게 쓰는 게 나쁘게 쓰는 것인가에 대한 가장 적나라한 예입니다. 여러분은 절대 이러시면 안 됩니다. (140쪽)

 

이렇게 여러 미덕을 두루 갖추고 있어서인지 그의 글은 쉽게 읽히면서 마음까지 훈훈하게 만든다. 처음엔 딱딱하고 난해한 문법서이면서 정교한 논리가 전면에 도드라지는 냉랭한 글일 거라 지레짐작 했는데 어쩜 허술하달 정도로 친근하게 다가와 그의 자장으로 슬몃 이끌고 있어 솔직히 의외란 생각도 들었다. 래포 형성이 되었기 때문이랄까, 몰캉하고 따스한 글은 어느새 방어기제를 무색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러면서도 꼭 필요한 얘기는 정확하게 전하고 있었다. 설득과 더불어 의사소통에도 성공한 것이다. 글쓰기를 앞두고 막막하던 마음 뻥 뚫린 기분이다. 같은 이유로 답답해 하며 망설이는 이들이 있다면 그를 권하고 싶다. 한 줄기 서늘하고 기분 좋은 바람을 쐰 것 같은 청량감을 한껏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일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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