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노래 (1.2권 합본) - 우리 소설로의 초대 4 (양장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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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히 씌어진 글을 겨우겨우 읽습니다. 김훈이 이빨 여덟 개가 빠지도록 혼신을 다한 연후에 간신히 그려낼 정도로 불가해하고 다층적이며 도도했던 이순신의 내면, 그 내면을 육화된 휘모리 장단으로 고스란히 살려낸 빼어난 문장, 그 문장에 녹아있는, 죽처럼 흘러내려 우리를 목 매이게 하는 인간적이면서도 스산한 그의 시선.

이를 어찌 한 호흡에 성큼성큼 읽어치우고 말 수 있겠습니까? 최소한의 인간적인 떨림이나 가다듬음으로도 가당찮은 일입니다. 그야말로 겨우겨우 읽어낼 따름입니다. 때론 결기가 치솟아 부르르 떨고 때론 연민으로 미어지면서 말입니다.

이순신의 시대는 봉건적 질곡의 한 정점에 닿아있던 때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회 구조의 모순만 그러했던 게 아닙니다. 그 시대를 농단했던 인적 구성들의 의식 세계가 전근대적이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 동토의 왕국을 다스렸던 임금이라는 작자는 미성숙한 인격에다가 조울증까지 곁들인 치기 어린 시샘의 대가였습니다. 영웅은 자기 혼자여야 하고 칭송은 독점적으로 향유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강박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김덕령에게, 곽재우에게, 이황에게 또 이순신에게 끊임없이 열등감과 권력 상실 피해 의식을 느껴오고 있었습니다. 그런 왕 앞에서 의식 있는 이들이 택할 수 있는 길은 오직 두 갈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 하나는 홍의 장군 곽재우가 나아갔던 절연과 초월의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이순신 식의 자멸의 길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무사는 백성의 고통스런 현실을 외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백성들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괴감과 이제는 어루만져 주어야 한다는 책무감으로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절연과 초월의 길을 택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순신은 절망의 길로 스스로를 소멸시켜 가는 자학적인 방법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런 이순신이었기에 우리는 역사와 신화 속에 등장하는 스테레오 타입화한 영웅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흔들리고 무너지고 상처받는 나약한 인간으로서, 다른 이들에게 보호 본능을 유발하는 그리하여 연민의 시선이 절로 가 닿게되는 한 범인(凡人)을 만나게 됩니다. 정형화된 영웅의 드라마틱한 활약상이나 초월적 심성, 전능한 역량은 다만 허상이요 후대 호사가들의 의미부여 놀음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에게 실제로 닥친 시대는 아픔뿐이었고 시절은 언제나 추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늘 불안했고 결핍한 상태로 쫓겨다녀야 했습니다. 통증을 느끼고 오한에 떠는 한 개별적 인간의 나약한 실존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와 같은 수준의 몸과 마음의 상태를 지닌 한 인간으로서의 이순신을 재삼 생각하게 됩니다. 이를 악물고 무서움을 참아내며 고통을 버텨내고 울음을 삼키는, 그리하여 인간의 피가 도는 따뜻한 실존으로서의 그를 말입니다. 왜소한 인간일 수밖에 없는 가여운 단독자가 거기 쓸쓸하게 서 있는 것입니다. 이로써 그와 우리는 상호 연민의 시선으로 더 나아가 연대감으로 일체가 될 수도 있는 수준으로 다가서게 됩니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이순신도 이처럼 하나의 인간으로 외따로이 태어나서 홀로 애쓰다가 그 만의 고통 속에 자신의 몸 속으로 죽음을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이순신과 그 시대의 이름 없는 백성들, 또 적군인 왜병들, 아니 그런 인간의 운명 앞에 자유로울 수 없는 모든 나약한 실존들 앞에 우리는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경건히 머리 숙일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들 하나 하나의 삶이 익명화된 집단의 논리로 설명되기에는 너무나 벅차고 의미 있고 장(壯)한 생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김훈은 개별적 실존으로서의 이순신의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모든 인간의 저마다의 삶이 비할 데 없이 중차대한 것임을 인간의 호흡으로 우리의 사고 수준으로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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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좌파 - 김규항 칼럼집
김규항 지음 / 야간비행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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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은 원래 비판자이다. 품격 있는 분별력으로 무장한 그들에게 수준 미달의 개인이나 세련되게 제도화되어있지 못한 집단의 거친 면들은 유난히 부각되어 보일 것이고 생리적으로 자신과 상관없는 일에까지 관심을 갖고 참견하려는 '먹물'의 속성상 이를 그냥 지나칠 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순기능적으로만 볼 때 이런 비판적 지식인은 시대의 길눈이요 역사의 좌표 역할을 수행하는 막중한 직분을 담당하고 있는 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런 고결한 책무에 어울리지 않는 저급한 도덕적 수준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비판의 시각이 타인이나 이질적인 집단을 향할 때는 그지없이 단호하고 준엄하게 가 닿다가도 정작 자신의 내면이나 자기와 관련된 집단의 어두움에 대해서는 눈감기 일쑤다. 한정적인 지적 색맹 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김규항의 시선은 깨끗하고 곧다. 잡스런 이해 관계가 개입됨이 없이 모든 이들에게 공정하게 권한의 크기에 비례한 책임의 무게를 형평성 있게 따지고 있다. 사회적 약자라 할 수 있는 청소년, 폭주족, 동성애자 및 연예인들에 대해서는 지나치리만큼 관용적 눈길로 따뜻이 감싸다가도 주류 기득권자들에 대해서는 가혹하리만큼 냉정한 잣대로 그들의 의식과 행태를 재단하고 있다.

하지만 지배 세력을 재단하는 척도보다 더 정밀하고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여 통렬하게 질타하는 대상이 있다. 바로 그의 우군이자 동지요 형제라 할 수 있는 지식인들, 운동권 및 사회개혁가들에 대해서이다. 그들, 김규항이 동질감을 느꼈거나 느끼고 있는 내집단 구성원이라 할 수 있는 이들에 대해 맹렬한 눈빛으로 쏘아보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그들 가운데 시대의 첨단이자 전위로 자처했던 지도적 인물에 대해서는 더더욱 가차가 없다. '조개구이'와 '달콤 쌉쌀한 초콜릿'에서는 전향한 박노해의 행태에 대해 우회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폄하하며 충고까지 곁들이고 있다.

한때 노동 해방의 기수요, 사노맹의 리더로서 사회주의자임을 당당하게 공표하던 그의 변절과 일탈에 대해 비판의 극한을 보여주고 있다. 또 그가 존경한다는 선배인 홍세화가 전도하고 있는 똘레랑스에 대해서도 반역자나 극우 반동 세력의 과오에 대해서까지 눈감고 넘어가자는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악용될 수 있다며 신중해야 한다고 뼈아픈 권고를 하고 있다. 또 가상 현실 게임의 몽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도량이 좁고 장진구와 같은 속물 근성에 절어 있는 기괴한 모습의 이 시대 좌파 지식인들에 대해 허위 의식을 버리라고 공박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김규항의 내부를 향한 비판의 시선이 경박하거나 공허하지 않고 힘이 실려있으며 울림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질타의 토대가 준엄한 자아비판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을 좌파 같잖은 좌파, 곧 초보이자 B급으로 여기고 있으며 수시로 신념에 철저하지 못했다며 자괴감에 휩싸이고 또 그러한 심정과 정신의 부끄러운 편력을 가감없이 드러내기까지 하는 겸손과 솔직함이 그러한 권위를 낳게 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그리나 김규항의 시선은 늘 젖어 있다. 애정과 온기로 축축하며 재건과 연대의 뜨거운 소망을 담고 있다. 통렬하되 파탄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돌아오기를, 그리하여 다시 구축하기를 염원하는 간절한 마음이 절절이 배어 있는 것이다. 김규항이 바라보는 우파는 이념도 아니다. 그저 자신의 현재 이익 유지에 골몰하고 있는 집단의 자기 방어 논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에게서 이 사회의 건전한 유지와 진보를 기대할 수는 없다. 오직 좌파들의 고결한 이념적 헌신만이 이를 가능케 할 뿐임을 김규항은 잘 알고 있다. 따라서 그는 이들 좌파들에게서 희망의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는 것이다. 안타까운 연민이 묻어있는 비판과 질타의 준엄한 시선으로 다시금 분발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인간을 해방하고 사회를 진보시키고자 하는 이상을 지닌 좌파로서의 심성과 지성의 충실한 전범, 진정한 좌파 김규항의 시선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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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1
최명희 지음 / 한길사 / 199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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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최악의 수난기였던 일제 강점기 말엽의 전북 남원과 만주 봉천을 무대로 자기 앞의 생과 시대의 질곡에 맞서고자 분투하였던 이들의 처연한 혹은 강고한 삶을 장중하게 그려낸 민족의 대 로망 혼불. 여기에다가 지금은 거의 사라져버린 민족 고유의 습속, 의례, 본연의 심성 등 당시의 생활 양식을 세밀하게 묘사, 기록하여 문화인류학적 문헌으로서의 가치도 충분히 지니고 있는 소중한 작품 혼불. 그리하여 혼불은 짧은 호흡에 얕은 묘사로 일관하고 있는 허다한 글들과는 구별된 모습으로 우뚝 서 있는, 한국 문학의 한 획을 그은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자리 매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많은 미덕에도 불구하고 혼불은 서사 구조가 내적 완결성이 결여된 면을 보이고 있어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이를테면 암울한 상황하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생기발랄하게 미래를 예비하던 강호와 그의 처 사리반댁의 지향과, 참혹한 시대적 모순을 일거에 해결하고자 하였던 강태의 정신 세계가 분명 다른 세계관을 구축하고 있었던 바, 그 예비된 의식이 어떻게 표출되면서 역동적인 정반합의 과정을 극적으로 보여주는지 나타내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또 서로 질시하며 때론 연민의 정을 느껴왔던 효원과 강실 그리고 오유끼 사이의 갈등 해소도 시도되지 않고 있다. 그들이 서로 뜨겁게 화해하는 모습을 보았으면 하였다. 앞서의 서사 구조에서 무수히 복선으로 깔며 미래를 암시하였던 묘사와 기술들이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감이 드는 것이다. 따라서 혼불은 서사 구조상 역동적인 호흡과 흐름의 연결이 결여된 미완의 작품으로 비춰진다. 오로지 당시의 사회 문화적 상황과 풍물을 미시적으로 그려나가는 모습으로만 일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비록 그 폭과 깊이가 방대하고 심원하며 더불어 민속지로서의 학술적 가치까지 충만하다는 미덕조차도 왠지 작아 보이기까지 한다.

8권에서 보여주었던 사리반댁의 모습은 실로 눈부시다. 힘겨운 와중에서도 활기를 잃지 않고 스스로를 길러 나가며 밝아올 미래를 의연하게 대비하고 있는 앞선 의식에서 민족의 희망찬 미래가 선하게 그려진다. 강호의 민족 문화의 외연과 깊이에 대한 눈뜸도 인상적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의 의식화는 민족 해방 내지는 반봉건적 운동의 한 방식이 내면에서 자연스레 배태되게 할 것이나 강태는 민중이 진정으로 해방되려면 주체적인 계급 역량으로 억압적인 사회 구조를 혁파하는 길밖에 없다고 믿고 있다. 작가는 앞서의 여러 부분에서 이러한 것들이 앞으로 극적으로 대립 혹은 공존하며 전개될 것이라 암시하고 있었는데 정작 이들이 갈고 닦은 역량으로 그 뜻을 펼쳐 나가는 모습은 그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효원과 강실, 그리고 오유끼는 본래 따스한 심성과 깊이 있는 내면을 지닌 인간미 있는 여인들이지만 시대와 상황의 그늘이 힘겹게 그들을 내리누르고 있다. 심약한 강모가 효원에게 위압감을 느껴 퇴행 대상으로 선택한 강실이, 죄책감과 자포자기적 심리 그리고 연민의 심성에서 비롯된 강모의 또 하나의 희생양 오유끼, 그리하여 그들은 강모를 사이에 두고 때론 미움과 시샘을 때론 측은함과 동병상련의 마음을 가지며 살아온 것이다. 그들의 인간성을 꽃피워주었으면 하고 내내 기대했었다. 그들이 동질적 인간임을 자각하고 화해하는 모습을 바라며 서사 구조를 좇아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말이 없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미흡한 작가 의식을 확인한 것 같은 마음을 지울 수 없다. 만약 작가가 작품 활동을 지속하였더라면 서사 구조의 연속성과 완결성을 후속 작업들을 통해 달성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랬더라면 가문과 시대의 주역으로 부상한 강호와 강태가 눈부시게 활약하는 모습과, 또 그들의 상이한 방법론상의 갈등을 변증법적으로 통합해 가는 과정과 아울러 효원과 강실이와 오유끼가 뜨겁게 화해해 나가는 모습을 통해 가해자인 강모와 그 배경이 되는 가부장적 사회 구조에 대해 용서에 이은 극복 대안 제시까지 가능했을 것인데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기대난이다. 매안과 우리 강토 전역에 상서로운 혼불이 피어오를 그 날을 기대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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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놀이 이야기 우리 문화 그림책 1
곽영권 그림, 김동원 글 / 사계절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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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선생님은 <나무야 나무야>에서 사람의 내면은 그를 에워싸고 있는 산천을 닮는다고 곡진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이러할진대 역사와 문화와 운명의 동질적 공동체인 민족 구성원의 심성과 그 심성의 외적 실현인 생활 양식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들 공통의 삶의 여건인 자연에 기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또한 시대의 사회적 상황은 동시대인들의 의식과 삶의 모습을 규정하는 토대로 작용합니다. 『사물놀이 이야기』는 사물놀이도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자연과 사회적 상황에 크게 관련을 맺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곧 사물놀이를 우리 산천, 우리의 자연과 교감하는 생태의 소리이자, 민족 구성원 개개인의 숙명적 정한과 시대의 구조적 모순을 풀어 나가는 해원의 과정으로, 또 이를 통해 실현되는 통합과 상생의 정신을 오롯이 담고 있는 사회적 산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평화를 사랑하고 자연과 친화하며 고요히 살아온 선한 겨레였습니다. 그런 우리를 외세는 한시도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무수한 시련과 갈등, 암흑의 시기를 거쳐왔습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우리는 결코 좌절하지 않고 슬기롭게 맞서 나갔습니다. 때론 투혼을 불태우기도 하였습니다. 이 글에서는 이런 우리 겨레의 강인한 모습을 잿빛귀신의 위세에도 굴하지 않고 사람의 탑을 쌓으며 하나님께 간절한 염원을 담은 기도를 드리는 장면으로 꿋꿋하게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무리하게 억지를 부리지 않고 자연의 원리에 순응하면서 꾸준하게 슬기를 발휘하여 기어이 뜻을 이뤄내곤 하는 모습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민족의 의지와 지혜를 지은이는 사물놀이 기구들을 얻는 과정을 통해 더욱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남쪽 주작에게서 천둥과 번개를 가리키는 꽹과리를, 북쪽 현무로부터는 바람을 일으키는 징을, 동쪽 청룡한테서는 장고를 그리고 서쪽 백호와 맞서서는 구름을 불러오는 북을 얻는 과정은 그야말로 끈질긴 도전 정신과 자연의 순리를 따르면서도 슬기롭게 이를 극복해 내려했던 모습을 실감나게 그려 보이고 있습니다.

꿈에 그리던 사물놀이 기구들을 손에 넣은 임금님의 아들딸들이 백두산에 모여 사물을 울리는 모습은 과히 압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동과 해원의 지경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물이 울리니 그렇게나 잠잠하게 있던 태평소가 신비롭게도 울리게 됩니다. 태평 성대를 알리는 밝고 흔쾌한 가락이 뿜어져 나온 것입니다. 이윽고 우리 겨레는 사물놀이와 더불어 하나로 어우러지게 됩니다. 대동 세상, 통합의 한 마당이 실현된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분출된 상승적 시너지에 의해 잿빛귀신의 암흑 세상이 물러가고 광명의 신천지가 열리게 됩니다. 이제 만물은 본연의 제자리를 찾게되고 생태와 공존하는, 자연과 교감하는 우리 인간의 참모습도 회복되었습니다. 천지인이 합일하고 더러운 것이 씻겨지는 크고 하나된 울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참으로 역동적이고 실감나게 그려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지은이는 이처럼 사물놀이를 구성하는 악기의 성질과 그 연주의 역동적 과정 및 악기간의 통합적인 상승작용에 의한 하나됨의 과정을 우리의 역사와 신화, 생태와 자연 및 심성과 문화에 이입하여 생동감 있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오염된 우리의 산천, 일그러진 민족의 심성과 겨레의 사회적 갈등을 치유하고 해결함으로써 통합을 이뤄내어 마침내 상생의 길로 나아가는 모습을 사물놀이에 비유한 것입니다. 진정 자연과 교감하며 해원과 상생을 지향하는 민족의 소리 사물놀이처럼 우리 민족 개개인의 가슴에 응어리진 한과 사회의 제반 모순과 질곡들도 남김없이 해소되어 밝은 누리 참 인간 세상이 펼쳐졌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게 가져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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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정체성 -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001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1
탁석산 지음 / 책세상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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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인의 사유 방식이나 학계의 지적 풍토는 사물이나 현상의 외연을 일견에 통찰하고 단계를 축약하여 거침없이 핵심을 꿰뚫어 본질을 밝히는 직관을 중시해 왔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경우 논의의 초입부터 미리 제시되는 거대 담론을 안고 이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논리 전개가 이루어지기 일쑤다. 그러나 탁석산의 <한국의 정체성>은 이러한 사고 패턴에 따른 논의에 익숙해 있는 우리의 기대에 좀처럼 부응하지 않는다. '정체성'의 정체를 결코 선명하게 보여주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성급한 일부 논자들은 예단하기를 설익은 논리로 변죽만 울리다가 정작 '정체성'의 실체는 윤곽도 못 잡고 유야무야 마무리 될 잡문의 하나로 치부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근대 이후 서양의 학풍, 특히 대륙 계통의 연역적 방법론의 경우 느닷없이 주어지는 통속적인 답은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된다. 전제들을 하나하나 깔고 단계를 밟아나가며 여과식으로 압축하거나, 서서히 개념을 명료화해나가는 그리하여 자연스레 결론으로 이어질 논리 전개만이 타당성을 인정받는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일반화된 방법을 사용하여 제삼자에 의한 반복 시행의 경우에도 동일한 결과가 도출됨을 인정받아야만 한다. 한마디로 내용의 범주나 수준이 문제가 아니고 절차적 적합성이 학문적 성과 판별의 초점이 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결과물은 지극히 당연한 조그만 것이 되기 십상이다. 과욕을 부리다가는 일체가 부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서구 학계에 있어서 대가연(大家然)하는 허세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담백함, 성실성, 철저함 및 진지성 등이 학문적 정도이기 때문이다.

탁석산의 머리와 가슴은 서구의 지적 풍토에 뿌리하고 있다. 그리하여 서구 학계의 미덕을 체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동양적 학풍에 익숙한 우리의 선입견에 따른 예단은 맥을 잘못 짚은 것이다.

탁석산은 그 동안의 '정체성' 관련 논의가 너무 안이하게 이루어져왔다고 지적하고 있다. 본질을 규명하기보다는 그 각론적 현란함에 매달렸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정작 '정체성'의 정체에 대해서는 천착하지 않고 언저리만 들락거린 셈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정체성'은 형이상학적 난제라 여겨질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은 대상이라고 탁석산은 보고 있다. 따라서 그는 이에 대해 결연히 정면 도전을 하고 나선 것이다. '정체성'의 실체를 밝히자면 사전에 전제로 깔고 미리부터 규명해야 할 것들이 많으므로 이에 대해 엄정한 단계를 밟으며 검토해 나가고 있다. 그리하여 암중 모색하듯이 여러 논의를 거친 연후에, 겨우 '정체성'은 개성이고 개성은 고유성과 창의성의 합이라는 것을 보인 다음 그러한 '정체성'이 갖추어야 할 기준, 곧 '정체성' 판단 기준으로 현재성과 대중성 및 주체성을 제시하면서 글을 맺고 있다.

물론 탁석산의 연구는 그 자체가 자기 완결적인 것이 아님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이는 차후 이루어질 각계 각층의 다양한 '정체성' 연구의 전제와 방법론의 기초가 되어질 것이다. 이를테면 전통 신앙으로서 샤머니즘을 연구하여 한국 정신 세계의 핵심을 발견한다던가, 생명이 긴 대중 가요를 통한 한국인의 심성을 분석하여 '정체성'의 개념을 구성해 나가고자 할 때 그 준거이자 전제로 활용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앞으로 한국의 '정체성'의 실체 규명과 관련된 작업이 다방면으로 풍성하게 이루어지고, 또 그 결과로서 각 하위문화들의 총체적 연관하에 한국 정체성의 진면목을 구성해 내는 데 있어 판별식 역할을 해 낼 수 있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탁석산의 글은 이러한 후속 활동들의 선행 작업으로서 '정체성'의 토대와 근거 및 이념을 제공하고 있는 '정체성' 연구의 총론이자 체계적 접근의 출발점이 되는 시론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 학문적 의의가 자못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로 탁석산의 글은 저급한 잡문이 아닌 진정성과 학구적 철저함이 배어있는 격조있는 성찰적 결과물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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