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책들 창립 35주년 기념 세계문학 중단편 NOON 세트 - 전10권 열린책들 창립 35주년 기념 세계문학 중단편 세트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외 지음, 황현산 외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8월
평점 :
품절


열린책들 창립35주년 기념 세계문학 세트 “noon”을 드디어 끝냈다. 이제 Midnight 세트에서 이방인, 변신, 인간실격 세권만 남았다. 위 세 작품은 다 이미 읽은데다가 어두운 내용들이라 뒤로 계속 밀렸다.

Noon 세트 열권 중 어린왕자, 동물농장, 노인과바다, 자기만의방, 행복한왕자는 재독이었고 토니오크뢰거, 벨낀이야기, 백야, 다섯 개의 오렌지 씨앗, 푸른 십자가는 처음 접했다.
토마스만은 왠지 재미없을 듯한 이미지였는데 ㅋㅋ 의외로 토니오크뢰거 재밌었다. 특히 유년시절의 자기가 갖지 못한 것에 대해 동경하는 심리의 섬세한 묘사가. 벨낀이야기로 처음 접한 푸쉬낀도 아침드라마 같고 풍자적인 이야기들이 재미있었다. 백야는 지금 읽은지가 꽤 되어 기억이 분명하지 않지만 도스토프예스키 치고 밝고 긍정적인 느낌이라 신선했다. 다섯 개의 오렌지 씨앗은 코넌 도일, 푸른 십자가는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의 추리소설이다.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은 이름도 처음 들어보고 하나도 기대가 없었는데, 의외로 이 브라운신부 시리즈가 재미있었다.

열린책들 세계문학 세트는 자그맣고 가벼운 판형에 각 작가들의 대표작을 추려서 실어놓았다. 컬러풀한 색감과 심플한 표지 디자인이 마음에 든다. 사길 잘했어☺️

이렇게 오늘의 50분 자유시간 아름답게 마무리!


여기서 그만두게. 자네 안에는 아직도 젊음과 명예, 유머가 있지 않나. 이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들이 영원할 수 있을 거라는 환상을 버리게. 선함의 수준은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지만, 악함의 수준을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네. 그 길은 계속 내리막이야. 친절한 사람도 술을 마시면 잔인해지고, 친절한 사람도 살인을 하면 거짓말을 하게 되네.
-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 “날아다니는 별들” 중 93쪽


댓글(20)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건수하 2023-05-20 11: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브라운 신부 재밌죠! (전집을 갖고 있는 자) 😄

독서괭 2023-05-20 11:55   좋아요 1 | URL
오 전집을 가지고 계시다니!! 어디 건가요?

건수하 2023-05-20 12:27   좋아요 1 | URL
예전에 나온 북하우스인데.. 아직도 팔고 있네요 ^^

독서괭 2023-05-20 16:14   좋아요 1 | URL
그러네요~ 이북으로도 있고요🤔

레삭매냐 2023-05-20 12: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50분 간의 자유시간,
부럽습니다.

아침부터 청소에 재활용에
분주하네요.

독서괭 2023-05-20 16:15   좋아요 0 | URL
ㅎㅎ 바쁜 일 끝나셨나요? 레삭매냐님 자녀는 저희 애들만큼 어리진 않았던 것 같은데, 설마 50분의 자유시간도 없으신 건 아니겠죠..!

새파랑 2023-05-20 13: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한잔의 커피와 열린책들 35주년 세트라니~!! 멋집니다~!!

독서괭 2023-05-20 16:15   좋아요 1 | URL
새파랑님은 진작에 읽으신 세트를 이제야^^

책읽는나무 2023-05-20 21: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아름다웠던 50분의 타임!!!!!!
책표지랑 카페 분위기랑 깔맞춤이네요ㅋㅋㅋ

독서괭 2023-05-21 12:52   좋아요 1 | URL
50분의 자유시간마다 가는 조그만 카페인데 이날은 밀크티 마셨어요! 맛남!!^^

은오 2023-05-21 10: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 세트 저도 나왔을때 가격도 괜찮고 구성도 좋고 예쁘댜!! 하면서 살까 고민했는데, 전집류나 세트는 사놔도 땡기는 몇 권만 읽고 나머지는 계속 묵혀두는 저의 이력이 있기에 결국 구입하지 않았던.... 오랜만에 보네요 ㅋㅋㅋㅋ
저는 반대로 어두운 작품들에 더 끌려서 괭님이 미뤄두신 이방인 변신 인간실격을 예전에 읽었어요! noon 세트에서는 자기만의방만 읽었네요 ㅋㅋㅋㅋ

독서괭 2023-05-21 17:06   좋아요 3 | URL
오 저도 그런 이력이 많은데도 못 참고 질렀는데요 ㅋㅋ 그래도 한세트 끝낸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그런데 Noon세트에 어린왕자도 있는데 아직 안 읽으셨다는??😲
그나저나 과제는 다 끝내셨나요 은오님? 해치우고 쉬고 계시길 바랍니다^^

은오 2023-05-22 13:29   좋아요 1 | URL
네 ㅠㅠ 어린왕자도 어릴때 어린이만화로 읽은 게 다네요 ㅋㅋㅋ

공쟝쟝 2023-05-22 07:1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하나하나 꾸준히 정복하는 독서괭님 멋있어요! 이 페이퍼가 너무 감동적이기 때문에… 저는 바로 오늘 지금 당장 책사는 손을 자르기로 했습니다…
… 서걱서걱 쓱싹쓱싹….
..

오른손을 잘랐고요.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게 하기 위해 왼선으로 키보드를 치는 중입니다. 오타가나느 군요.. 그럼…

은오 2023-05-22 13:29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너무 귀여운거 아니에요?

독서괭 2023-05-22 19:54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 아니 쟝쟝님의 소중한 오른손 어떻게 책임지지요!? 앞으로 오타 나도 이걸로 변명하시려고??ㅋㅋㅋ

건수하 2023-05-24 09:49   좋아요 2 | URL
손을 어디서 잘랐는지, 사연이 궁금해서 찾으러 왔습니다.
쟝님, 보고싶을 거예요.

난티나무 2023-05-24 14:13   좋아요 2 | URL
2222222 😿

우끼 2023-05-24 15:36   좋아요 1 | URL
2222222😭

독서괭 2023-05-31 13:03   좋아요 2 | URL
그니까요, 이사람.. 이러고 사라지다니 이러기 있기없긔 ㅠㅠ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
나혜석 지음, 장영은 엮음 / 민음사 / 201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잠 오는 떄 잠 자지 못하는 자처럼 불행 고통은 없을 터이다. 이것은 실로 이브가 선악과 따먹었다는 죗값으로 하느님의 분풀이보다 너무 참혹한 저주이다. 나는 이러한 첫 경험으로 인하여 태고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모(母)가 불쌍한 줄을 알았다.  - 258쪽



 나혜석은 한밤중 아기의 울음소리에 잠을 깨는 장면으로 '모(母) 된 감상기'를 시작한다. 반복되는 수면 부족의 고통을 절절히 호소하는 그녀의 글에 나는 마음 깊이 공감한다. 아이들 신생아 시절, 아기의 수면패턴에 맞추어 생활하며 나의 수면패턴은 완전히 망가져가던 그 시절... 그때 나는 아기 울음소리에 깨어나는 기분을 '멱살잡혀 깨워지는 기분'이라 생각했다. 갓난아기만의 사랑스러움이 아무리 좋아도, 다시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나혜석은 어디선가 이름과 함께 '비참한 말로' 정도의 인상만 남아있던 사람이다. 추천사를 쓴 이민경 작가 역시 그랬나 보다. 그는 추천사에서 "삶이 뜻대로 되지 않는 순간에 느꼈던 좌절감에는 언제나 일말의 안도가 섞여 있었다. 대체 어디서 들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나혜석의 마지막이 효과적인 경고로 작동했다."(331쪽)고 토로한다. 괜찮은 가정에 태어나 당시 여성으로서 드물게 일본 대학을 졸업하고 외교관이자 변호사인 남편과 살던 여자가, 이혼 후 예술가로서도 점점 명성을 잃다가 결국 객사로 생을 마감. 이건 딱 '나대는 여성의 말로'로서 여성에게 들이밀기 좋은 줄거리가 아닌가. 이 책은 그런 나혜석이 실은 어떤 인물이었는지, 그녀의 글들을 통해 되새겨 보게 한다. 


일제 강점기 시대 조선 여성 치고 편안한 처지에 있었던 듯한 나혜석. 

그러나 그녀에게도 굴곡과 설움은 있었다. 소설 '경희'에서는 일본에서 대학교육을 받고 있는 '신여성' 경희의 처지가 생생하게 그려진다. 방학을 맞아 집으로 돌아온 경희에게 쏟아지는 편견을 담은 시선, 그리고 결혼하라는 압박. 나혜석도 실제로 대학교육 중간에 아버지가 학비 보조를 중단하여 1년간 선생일을 하면서 돈을 모은 후 다시 돌아가 학업을 마쳤다고 하니, '경희'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라 할 수 있겠다. 공부 같은 것 그만두고 시집이나 가라는 아버지에 대항한 경희의 말, "먹고만 살다 죽으면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금수이지요. 보리밥이라도 제 노력으로 제 밥을 제가 먹는 것이 사람인 줄 압니다."(64쪽)라는 외침에는 학업을 중단당한 나혜석의 절박함이 담겨있는 것이다. 


나혜석에게는 약혼자가 있었는데 젊은 나이에 사망해 버린다. 여기에 대해서는 직접 다룬 글이 없으나 열아홉의 나혜석이 받은 고통은 컸을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뜻이 없던 나혜석에게 적극 구혼한 남자 김우영, 결국 나혜석은 세가지 조건을 걸어 결혼을 승낙한다. "일생을 두고 지금과 같이 나를 사랑해 주시오.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마시오.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케 하여 주시오."(161쪽) 후에 나혜석은 '모 된 감상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책임 면하려고 시집가라고 강권하던 형제들의 소위가 괘씸하고, 감언이설로 ˝너 아니면 죽겠다.˝ 하여 결국 제 성욕을 만족케 하던 남편은 원망스럽고, 한 사람이라도 어서 속히 생활이 안정되기를 희망하던 친구님네 내 몸 보니 속 시원하겠소 하며 들이대고 싶으리 만치 악만 났다." (238-239쪽)


그래도 대체로 처음 약속한 조건을 잘 지키던 결혼생활은 평탄하게 흘러갔던 모양이다. 그러나 한창 예술에 파고들고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 나가던 나혜석에게 준비되지 않은 임신은 큰 절망감을 안겨 주었다. 



너무나 억울하였다. 자연이 광풍을 보내사 겨우 방긋한 꽃봉오리를 참혹히 꺾어 버린다 하면 다시 누구에게 애기(哀祈)할(애처롭게 기원할) 곳이 있으리오마는, 그래도 설마 ‘자연‘만은 그럴 리 없을 듯하여 애원하고 싶었다. ‘이렇게 억울하고 원통한 일도 또 있겠느냐'고.
나는 할 일이 많았다. 아니 꼭 해야만 할 일이 부지기수이다.
게다가 내 눈이 겨우 좀 뜨이려고 하는 때이었다. 예술이 무엇이며, 어떠한 것이 인생인지, 조선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겠고, 조선 여자는 이리 해야만 하겠다는 것을, 이 모든 일이 결코 타인에게 미룰 것이 아니라 내가 꼭 해야 할 일이었다.  - 240쪽


정직히 자백하면 내가 전에 생각하던 바와 지금 당하는 사실 중에 모순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나 어느 틈에 내가 처가 되고 모(母)가 되었나? 생각하면 확실히 꿈속 일이다. 내가 때때로 말하는 ˝공상도 분수가 있지!˝ 하는 간단한 경탄어가 만 2개 년간 사회에 대한, 가정에 대한 다소의 쓴맛 단맛을 맛본 나머지의 말이다. 실로 나는 재릿재릿하고 부르르 떨리며 달고 열나는 소위 사랑의 꿈은 꾸고 있을지언정 그 생활에 사장(私藏)된[사사로이 간직한] 반찬 걱정, 옷 걱정, 쌀 걱정, 나무 걱정, 더럽고 게으르고 속이기 좋아하는 하인과의 싸움으로부터 접객에 대한 범절, 친척에 대한 의리, 일언일동이 모두 남을 위하여 살아야 할 소위 가정이라는 것이 있는 줄 뉘가 알았겠으며, 더구나 빨아 댈 새 없이 적셔 내놓는 기저귀며, 주야 불문하고 단조로운 목소리로 깨깨 우는 소위 자식이라는 것이 생기어 내 몸이 쇠약해지고, 내 정신이 혼미하여져서 ˝내 평생 소원은 잠이나 실컷 자 보았으면.˝ 하게 될 줄이야 뉘라서 상상이나 하였으랴!   - 236쪽



막 꽃피려하는 인생을 가뿐히 즈려밟을 수 있는 아이라는 존재.. 그리하여 나혜석은 "자식이란 모체의 살점을 떼어 가는 악마"라고 정의한다.(257쪽) 나처럼 아이를 고대하여 기쁘게 낳은 사람도, 아이를 낳아 키우는 과정에서 잃어버린 나 자신을 위한 시간과 기회를 생각하면 때로 아쉽고 원망스러운 마음이 드는데, 기대하지 않은 임신이 주는 고통은 얼마나 컸으랴. 아이가 생겨도 크게 변하지 않는 남자쪽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이 대목에서는 <케빈에 대하여>가 떠오르기도 했다. 원하지 않는 임신과 악마같은 아이로 인한 극도의 괴로움을 세밀하게 그려낸 작품. 

'모 된 감상기'가 실리자 이에 많은 비판이 가해졌는데, 여기에 대한 나혜석의 재반박('백결생에게 답함')이 통쾌하다. '감상기'는 '논문'과 달리 객관성에 의한 반박이 적합하지 않은 종류의 글임을 지적하면서, "이다지까지 여성 자체를 불신용하고 조선 신여자의 인격 전체를 덮어놓고 멸시하여야만 자기 반박문이 빛이 날 것이 무엇인지?"(268)라며 신여성을 싸잡아 비난하는 반박문의 편견과 독단을 예리하게 비판한다. 


그렇게 아이들을 낳고 키우며 결혼생활을 이어가던 중, 결국 시가쪽 친척들이 찾아와 얹혀 산다든지,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집안 살림에 과하게 간섭한다든지 하는 문제들이 생긴다. 그러다 파리에서 만난 최린, 그는 아마도 나혜석의 소울메이트 였던 듯. 나혜석은 "나는 공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내 남편과 이혼은 아니 하렵니다."라 하였고(169쪽) 두사람의 감정은 마음에만 품고 헤어진 듯하다. 그러나 집안 살림이 어려워져 도움을 청하려고 최린에게 보냈던 편지가 발단이 되어, 김우영은 나혜석에게 이혼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이혼 고백장'은 결혼생활과 이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감정을 절제하고 담담하게 써내려간 글이다. 이 글에 의하면, 최린과는 부정한 행위가 없었음에도, 심지어 김우영은 기생집에 다니는 상황에서 나혜석에게 이혼을 요구하며 몰아부친다. 



아아, 남성은 평시 무사할 때는 여성이 바치는 애정을 충분히 향락하면서 한 번 법률이라든가 체면이라는 형식적 속박을 받으면 어제까지의 방자하고 향락하던 자기 몸을 돌이켜 금일의 군자가 되어 점잔을 빼는 비겁자요, 횡포자가 아닌가. 우리 여성은 모두 일어나 남성을 저주하고자 하노라.   - 173쪽 



이혼 후, 나혜석은 다시 자기를 찾아 나서고자 한다. 그녀는 '신생활에 들면서'라는 글에서 이같은 결심을 밝히고 있다. "사람은 그 생명이 붙어 있는 동안이 사는 시간이 아니요, 감정을 움직이는 것이 사는 것"이니, "자기 자신의 인격적 우아로 색채가 풍부한 신생활을 창조해 낼 것"이라고. 

나는 누구에게 대해서든지 이렇게 말한다. “독신자처럼 불행하고도 행복스러운 자는 없다.˝고.

여자는 시집가서 자식 낳고 아침 저녁 반찬 걱정하다가 일생을 보내는 범위를 떠나면 불행이라 한다. 그러나 그 범위 내에서 갈팡질팡하는 것이 행복이고 한번 그 범위를 벗어나서 그 범위 내에 있는 자를 보라. 도리어 그들이 불행하고 자기가 행복된 것을 느끼나니, 날마다 같은 생활을 되풀이하는 그 침체한 생활에 비교하여 시시각각으로 변천하는 감각의 생활을 하는 자기를 보라. 얼마나 날마다 그 인생관이 자라가고 생의 가치를 느껴 가는지. 사람은 그 생명이 붙어 있는 동안이 사는 시간이 아니요. 감정을 움직이는 것이 사는 것이다.  - 214쪽

나는 언제까지든지 젊은 기분으로 모든 사물을 매력 있게 만들 것이다. 그는 항상 내 생존을 미화하는 까닭이요. 자기의 하는 모든 일이 내 전체로 아는 까닭에 희열을 느끼는 감이 생긴다.
나는 영혼의 매력이 깊은 것을 알았고 따라서 자기 자신의 인격적 우아로 색채가 풍부한 신생활을 창조해 낼 것이다. 사람 앞 에 나갈지라도 형식과 습관과 속박을 버리고 존귀함으로써 공적 생활에 대할 것이다. 나는 남보다 말이 적을 것이다. 그러나 그 침묵과 미소는 말을 많이 하는 것보다 오히려 웅변일 것이지, 아무리 외면은 흐르는 냇물과 같더라도 그 밑은 견고한 리듬으로 통일이 있을 것이다. 행복으로 빛날 때든 치명을 받을 때든 안정하든 번민하든 냉혹하든 정열 있든 기쁘든 울든 어떤 환경에 있든 나는 다수의 여자인 동시에 1인의 여자일 것이다.  - 217쪽



결국 객사로 마감된 생이나, 그의 '신생활'에 대해 감히 평면적으로 '불행'으로 결론지을 수는 없겠다. 신생활에 임하며 세웠던 신념과 각오에 따라, "거기에 아무러한 고통이 있을지라도 그 고통 중에서 일신일변할지언정 결코 패배를 당할 이치는 만무"한 삶을 살아갔으리라 믿어 본다. 


조선시대 여성이, '정조는 취미', '자식은 모체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라는 글을 쓰고, 이혼 과정을 세세히 글로 써서 발표하였다는 것. <토지>에서 잡지에 기고한 신여성 강선혜(아마도 남녀평등에 관한 글이었던 듯)에게 쏟아진 뭇 남성들의 비웃음과 비아냥을 생각하면, 더욱 그 용기가 대단하게 느껴진다. 

추가로, 비중이 높지 않으나 나혜석이 일제강점기를 살아가면서 독립운동에 관여했던 내용도 찾아볼 수 있다. 나혜석은 3.1운동 만세사건으로 수감된 바 있고, 결혼 후 남편과 함께 김원봉을 비롯한 의열단 단원들에게 도움을 아끼지 않았으며, 1923년 황옥 경부 폭탄사건에도 개입했다고 하니, 진정한 여성 지식인이라 할 수 있겠다. 



설치고, 떠들고, 말하고, 생각하고 여성이 직접 말하고, 생각하고, 글을 쓰고, 문제를 제기하고, 새 로운 삶을 모색하는 일체의 행위 자체가 당시 남성들에게는 그저 못마땅한 일이었다. 나혜석은 불완전한 상태로라도 스스로 고민하고 방황하며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 가는 여성의 삶을 꿈꾸었고, 그 꿈을 글쓰기로 실천했다. 여성의 삶이 모순적이고 분노와 좌절의 연속인데, 어떻게 여성의 언어가 아름답고 완전하고 완벽하기를 바라느냐는 나혜석의 질문은 지금도 유효하다. - P233


댓글(9)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햇살과함께 2023-05-16 16: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서괭님 이 책 읽으셨군요~
마침 저도 오늘 민음북클럽 에디션 <이혼 고백장> 읽고 있는데,
이 책에서 주요한 4편을 뽑아서 엮은 것 같더라고요~
나혜석은 정말 선구자입니다!

독서괭 2023-05-17 11:11   좋아요 1 | URL
네 햇살님 민음북클럽으로 선택하신 거 봤었는데, 거기 4편이 담겨있군요. 저는 이혼고백장, 모된감상기, 백결생에게답함, 신생활에들면서 가 제일 좋더라고요^^

거리의화가 2023-05-16 17: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018년 전시에 갔다가 나혜석의 삶을 좀 알아야겠다 싶었을 때 이 책을 읽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무렵부터 나혜석의 삶이 조명이 많이 되면서 여러 매체를 통해서 소개가 되기도 했지요.
이번 전시에 가서도 느낀 점이지만 저는 여성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나혜석의 삶이 멋지더라구요. 그리고 무엇보다 직업인으로서의 소명 의식도 투철하달까요. 조선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의 경우 서양화를 일본에서 배워왔지만 결국 조선에 들어와서 주목받지 못하면서(서양화가 생소하던 시절이니까) 동양화를 그리거든요. 그런데 나혜석은 끝까지 자신의 붓끝을 서양화에 그대로 두었던 점을 누구보다 높이 삽니다. 물론 여성으로서도 선구적이었지만요!

독서괭 2023-05-17 11:19   좋아요 1 | URL
화가님은 그림 먼저 접하고 진작에 책도 읽으셨군요^^ 저는 아직 그림은 보지 못했습니다.
서양화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자기 길을 갔다니 더 멋있네요. ‘자기를 잃지 않는 삶‘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언행일치인 것 같네요.
여성문제에 관해서 이야기 하기 위해 본인의 실제 경험을 소상히 밝히는 용기도, 참 내면이 비범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책읽는나무 2023-05-16 2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오래 전에 읽었었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좀 가물거리지만 나혜석 님의 삶은 참 서글프긴 했지만, 그 투지와 강단은 존경스럽더군요^^
지금 태어나셨더라면??
천재 화가이자, 페미니즘을 잘 이끌어갔을 지도자이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나저나 ‘멱살 잡혀 깨워지는 기분‘ㅋㅋㅋ
찰떡표현이에요.ㅋㅋㅋ
그 시절 비몽사몽간에 우유 타고...
어떻게 버텼나? 싶긴 합니다.
얼른 커라, 얼른 커라 주문을 외웠었는데 애들이 커도...
엄마는 늘 잠이 부족하네요????
왜 그럴까요???ㅋㅋㅋ

독서괭 2023-05-17 11:21   좋아요 1 | URL
책나무님도 진작에 읽으셨군요! 저도 진작에 읽을 것을. 참 인상적인 인물이었어요. 현대에 태어났다면 인터넷 등을 통한 비방에 시달리셨겠지만 그래도 용기있게 밀고 나가는 지도자가 되셨을 것 같네요 ㅎㅎ
멱살 잡혀 깨워지는 기분, 맞죠? ㅠㅠ 편안하게 따뜻한 물에 몸 담그고 있다가 갑자기 찬공기에 이끌려나오는 느낌 같기도 하고요. ㅋㅋ
애들이 커도 엄마는 잠이 부족하다니 이 무슨 일인가요. 저에게 희망을 주세요!! ㅋㅋ

난티나무 2023-05-16 2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이 책 있는데 들춰만 보고 아직도… 얼른 읽어야 겠어요!

독서괭 2023-05-17 11:22   좋아요 1 | URL
난티나무님 갖고 계시군요! 어서 읽어보시지요~ 재밌습니다^^

새파랑 2023-05-18 0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혜석에 대한 삶의 이야기를 봤는데 북플에서 자주봤는데 정말 선구자적이더라구요. 안그래도 이책 장바구니에 담아놨는데 역시 독서괭님이 딱 올려주시네요 ㅋ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 / 어느 계단의 이야기 - 희곡 대산세계문학총서 9
안토니오 부에로 바예호 지음, 김보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안토니오 부에로 바예호라는, 이름이 참 안 외워지는 스페인 극작가의 희곡을 사게 된 이유는, 희곡 마니아 2~4위가 모두 플친님들이고, 그중 한 분의 강추강추 페이퍼가 있었으며, 최근 다시 <시녀들>을 샀다고 하시며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어느 계단의 이야기> 아직 안 읽으신 분은 당장 읽어라! 하셨기 때문이다. 말 잘 듣는 독서괭입니다. 딸랑딸랑~ 


읽은 희곡 작품은 셰익스피어 합쳐서 열 손가락에 꼽을 것 같고, 연극도 많이 보지 못했지만 좋아하는 편이다. 일단 무대 위에서 사람들이 뭔가를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는 걸 좋아하기에, 1도 모르는 클래식 공연도, 발레 공연도, 다 보고 있으면 좋다. 재미 위주인 <라이어> 같은 연극도, 재미보단 예술성을 추구하는 연극도 다 나름대로 재밌었다. 물론 배우들이 연기를 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 연극을 가장 흥미롭게 만드는 요소는, 한정된 공간에서 몇 안 되는 배우들로 다양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연출이라 생각한다. 실제 연극으로 만들 때의 연출도 그렇지만, 애초 희곡을 쓸 때부터 작가가 연출을 하기 때문에 희곡 역시 그 점이 흥미롭다. 


스페인을 대표하는 극작가라는 안토니오 부에로 바예호가 쓴 두 편의 희곡,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어느 계단의 이야기>는 무대가 거의 변하지 않는다.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의 경우, 등장인물 거의 전부가 맹인이라는 설정과 그 설정의 상징성, 그리고 관객체험의 일환으로 조명을 모두 꺼 잠시 동안 완전한 어둠을 경험하게 하는 연출이 재미있었다.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의 배경은 맹인들을 위한 학교로, 그 안의 학생들은 "우리는 비맹인 못지 않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다. 모든 학교 구조를 완전히 숙지하고 있기 때문에 지팡이가 없어도 자신 있게 걸어다닌다. 다만 그들이 말할 때 상대를 응시하지 않고 허공을 보므로 관객은 이들이 맹인임을 깨달을 수 있다. 어느 날  이 학교에 전학 온 또 다른 맹인 학생 이그나시오로 인해 학교는 분열된다. 이그나시오는 자신의 장애를 뼈저리게 의식하면서 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과 좌절을 숨기지 않는다. 비록 시각장애라는 분명한 '어둠'을 장치로 삼고 있지만, 이 작품은 어떤 종류의 '어둠'이든 이를 대하는 자의 태도에 관해 말하고 있다. 어둠의 부정성을 부정한 채 긍정의 힘으로 살아가느냐, 어둠의 부정성을 또렷이 바라보고 분노하느냐.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작품 속 이그나시오는 딱히 좌절과 분노의 힘을 바탕으로 현실을 개선하려는 투쟁으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다만 그의 힘은 기존 학생들에게 스며들어 학생들을 두 파로 나뉘게 한다. 결말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끝까지 어둠을 부정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진실을 가리는 것이 과연 진정한 희망일까? 앞으로 이 학교 학생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가 좋았음에도, '어느 계단의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드는 이유는, 덜 상징적이고 더 일상적이기 때문인 듯하다. '어느 계단의 이야기'는 허름한 다세대주택(?)의 계단을 배경으로, 세대만 10년 후, 20년 후로 바뀌며 거기 사는 평범한 서민들의 삶을 보여준다. 전기세가 올라 투덜거리고, 젊은이들은 연애를 하며, 이웃끼리 소문을 숙덕거리는. 사랑에 빠졌던 두 사람이 각자 다른 호실의 사람과 결혼을 하고 같은 건물에서 계속 살며 마주치는 상황은 참으로 아침드라마스러운데, 거기서 한발 더 나간다. 다세대주택 버전 로미오와 줄리엣이랄까..쿨럭. 세대를 넘어 계속되는 빈곤, 차례차례 죽는 늙은 세대들, 그럼에도 희망을 품는 젊은 세대... 

이 작품은 그야말로 좁은 무대 위에 인생을 펼쳐 보인 수작이 아닐까 싶다. 덮으면서 크~ 감탄사와 함께, 인간이란, 인생이란 무엇인가... 곱씹어보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부모님들보다 강해야 해. 그들은 삶이 그들을 짓밟도록 내버려뒀어. 30년 동안 이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날이 갈수록 비굴하고 저질스러워지며. 그러나 우리는 이 환경이 우리를 지배하도록 놔두지 않을 거야. 절대로. 왜냐하면 우리는 이곳을 떠날 테니까.   178쪽 


희곡마니아들의 강력 추천 작품! 믿고 읽어보시라!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파랑 2023-05-09 07:3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희곡천재 잠자냥님 추천으로 읽었는데 아주 좋더라구요~!! 저도 이 작품 읽고 희곡을 찾아읽었었습니다 ㅋ 요새는 좀 뜸하지만...

체호프의 <벚꽃동산>이랑 차페크의 <곤충극장>도 추천합니다 ^^

독서괭 2023-05-09 12:50   좋아요 0 | URL
새파랑님 이 작품 이후 희곡 찾아 읽으시면서 희곡마니아 3위에 등극하셨군요!!^^
저 두 작품 새파랑님이 좋다고 하신 글 본 것 같습니다. 추천 감사합니다. 희곡만의 매력이 있는 것 같아요!

그레이스 2023-05-09 09: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 페이퍼 보고 장바구니에 넣었으나 아직 장바구니에만 있네요^^
다시 생각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독서괭 2023-05-09 12:50   좋아요 1 | URL
ㅋㅋㅋ 그레이스님, 장바구니 결제 가시는 겁니다, 고고!!

잠자냥 2023-05-09 13: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괭님은 무대 위에서 상연하는 거에 초점을 두고 분석하신 점이 재미납니다.
전 역시 연극보다는 글자로 읽는 게 더 좋은... 인간 혐오자 ㅋㅋㅋㅋㅋ

독서괭 2023-05-10 12:25   좋아요 1 | URL
역시 쉽지 않은 프랑스 고냥이시군요. 연극무대 같이 보자고 꼬실수도 없겠네요 ㅋㅋ
전 실제 무대 상연할 때 어떻게 재현될지 상상해 보는 게 좋더라고요. ‘계단 이야기‘ 한국적으로 해석해서 연출하면 재미날 것 같습니다^^

바람돌이 2023-05-09 14: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말 잘듣는 저도 이 책 샀습니다. ㅎㅎ
이번에는 괭님까지.... 믿고 읽어보겠습니다. ^^

독서괭 2023-05-10 12:25   좋아요 1 | URL
오오 바람돌이님, 어서 읽어보시지요^^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 / 어느 계단의 이야기 - 희곡 대산세계문학총서 9
안토니오 부에로 바예호 지음, 김보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희곡 잘 모르는 내가 봐도, 좁은 무대에서 펼쳐지는 연극의 특성을 살려 공간 변화가 거의 없으면서도 그 안에 삶의 핵심을 찌르는 통렬함을 담아낸 수작으로 느껴진다.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도 좋았지만, <어느 계단의 이야기>를 덮으면서는 크~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자냥오별, 품질보증!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3-05-06 09: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 오별이 좀 과장되거나 제 취향덕에 더 부풀려질 때도 있지만 이건 그냥 별다섯!

독서괭 2023-05-06 10:13   좋아요 0 | URL
지금까진 자냥오별에 실망한 적이 없네요. ㅎㅎㅎ

새파랑 2023-05-06 09: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희곡 작가 잠자냥님이 추천했으니 동의합니다~!!

독서괭 2023-05-06 10:14   좋아요 2 | URL
이제 보니 골드문트님-새파랑님-잠자냥님이 희곡마니아 2-4위시네요? 새파랑님 언제 치고 올라가셨나요! 깜놀😳

새파랑 2023-05-06 10:18   좋아요 0 | URL
저는 그냥 빼주십시요~!! 두분들에 비해 너무 허접합니다 ㅎㅎ

독서괭 2023-05-06 10:37   좋아요 2 | URL
에이 새파랑님 겸손의 말씀!!
 
순수의 시대 마카롱 에디션
이디스 워튼 지음, 김애주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뉴랜드 아처는 명망높은 아처 가문의 상속자로서 뉴욕 사교계의 촉망받는 젊은이다. 소설은 그가 어슬렁어슬렁, 사교계의 관습에 따라 다소 늦장을 부린 후 오페라 무대로 향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그의 약혼녀(가 될) 메이 웰랜드가 자리한 관람석에 운명의 그녀- 엘렌 올렌스카 부인이 나타나자, 오페라를 보러 왔지만 실은 다른 이들의 동정 살피기에 바쁜 사교계 인사들이 모두 술렁인다. 작가는 이 첫 장면에서 1870년, 뉴욕 사교계의 분위기를 효율적으로 전달한다. 올렌스카 백작과 결혼해 프랑스에서 엄청난 명성과 부를 누리다가 남편을 떠나 비서와 도주했다는 소문과 함께 등장한 엘렌, 그녀 주위로 폭풍이 몰아치리라는 예감이 들면서 독자의 흥미를 끈다. 


뉴랜드 아처는 기존의 관습에 의문을 던지며 엘렌을 옹호하는 한편, 약혼녀 메이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다. 작가는 뉴랜드가 읽는 책들(진보적인 과학서적 등)을 슬쩍 보여주며 그가 틀에 사로잡힌 사람이 아님을 보여주긴 하지만, 그의 그런 성향을 폭발시켜 실제 삶에 적용하게 만든, 당연시 여기던 것들에 의문을 던지게 만든 계기는 엘렌이라는 존재다. 엘렌을 향한 욕망은 그 실현을 가로막는 온갖 사교계 관습과 메이라는 인물을 회의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마치 눈으로 만들어진 형상 같은 그녀의 순수는, 이를 부수는 지배자의 쾌락을 맛보기 위한, 아처가 원하고 소유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아처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었다.

이건 좀 상투적인 생각이었다. 결혼식을 앞둔 젊은 남자들은 흔히 이렇게 생각한다. 여기에는 양심의 가책이나 자기 비하가 따르게 마련이나, 사실 뉴랜드 아처에게는 그러한 느낌들조차 없었다. 그는 (마치 새커리의 상류사회 영웅들이 종종 그런 식이어서 아처를 화나게 하듯이) 그녀가 주고자 하는 흠결 없는 책의 한 장에 대한 교환물로, 그만큼 순수하고 하얀 페이지를 건네줄 수 없다고 해서 한탄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메이처럼 자라왔다면, 숲 속의 아이들처럼 인생에서 쉽게 잘 속아 넘어가는 바보들로 살 거라는 진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왜 신부에게 자신이 경험해 온 자유가 허용되지 않았는지 아무리 고심해 보아도, (그가 가졌던 일시적 기쁨과 남성적인 허영에 대한 열정 같은) 정당한 이유를 생각해 낼 수 없었다.   - 59쪽


메이의 순수를 높이 여기고 은방울꽃을 선물하던 뉴랜드의 입장 전환. 어쩌면 엘렌에게 다가가기 위한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무의식적 노력의 일환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입장을 다진 후, 그는 점점 엘렌에게 다가간다. 그는 (비록 명문가 자제의 의무치레였을지라도) 법률회사에서 일하고 있었고 엘렌의 사촌 메이의 약혼자였기 때문에, 집안의 명예가 달린 엘렌의 향후 처신과 관련하여 조언이나 설득을 부탁받으며 자꾸 엮인다. 엘렌의 태도는 미묘하다.그러나 결국 뉴랜드는 마음을 고백하고, 엘렌의 마음도 확인하게 되는데, 그 순간 도착한 메이의 전보. "결혼식을 앞당기게 되었어!" 두둥~ 



**아래부터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일일드라마 뺨치는 전개로 끝난 1부에 이어, 2부에서는 결혼식이 열린다. 뉴랜드는 거의 영혼이 반은 나가있는 상태로 결혼식에 임한다.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전형적이고 답답한 결혼생활이 이어지던 와중, 그는 몇번의 엇갈림 끝에 엘렌과 재회하게 된다. 뉴랜드는 엘렌에게 도망가자고 구애하고, 엘렌은 거절하면서도 흔들린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고 있으리라 여겼던 메이는 사실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사교계에는 뉴랜드와 엘렌의 관계에 대한 소문이 이미 파다했던 것. 메이는 엘렌에게 임신을 했다는 거짓말을 하여 엘렌을 떠나게 만들고, 남편에게 돌아가기를 거부한 엘렌을 불편하게 여기던 사교계 사람들은 한 마음 한 뜻으로 그녀에게 환송파티를 열어준다. 

그렇게 그들의 사랑은 끝났다. 그리고 몇십년뒤, 메이가 먼저 사망한 후 첫째 아들과 함께 엘렌이 살고 있는 파리에 방문하게 된 뉴랜드는 함께 엘렌을 만나자는 아들의 요청을 거절한다.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 마음속에 간직한 애틋한 연정.. 

그런 이야기로만 이 책을 읽을 수 없었던 것은, 메이 웰랜드라는 인물 때문이었다. 

뉴랜드가 화자로서 내세워진 이 소설 속에서 메이의 존재감은 희미하다. 은방울꽃처럼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처녀 메이는 엘렌의 강렬한 매력의 그림자에 가려진다. 뉴랜드는 처녀의 순수성을 잘 지키다가 남편에게 넘겨주는 관습에 의문을 표하고, 여성에게도 그가 누린 만큼의 경험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아무리 메이 웰랜드에게 눈을 뜨라고 해도, 그녀가 단지 멍하니 텅 빈 곳을 본다면 어쩔 것인가?"(100쪽) 한탄한다. 그가 메이의 눈을 뜨게 하려고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는 의문이지만, 가문과 단단하게 엮인 그녀가 가문의 관습에서 벗어나기란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메이 웰랜드, 그녀는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가정을 지키기 위해 아무것도 모르는 척, '가정의 천사'로서 밝은 모습을 유지한다. 그 속이 얼마나 썩어 들어갔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뉴랜드는 메이가 죽기 전 아들에게 '너희 아버지는 나와 결혼하면서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했다'고 말한 사실을 뒤늦게 전해듣고서야 자기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고 연민한 사람이 메이였음을 꺠닫는다. 뉴랜드가 가장 원하던 것을 포기한 결과 좋은 환경에서 클 수 있었던 아들과 딸. 뉴랜드가 늘 답답하게 여겼던 결혼생활이 포기한 연정보다 가치없는 것일까? 


제목을 <순수의 시대>라고 지은 작가의 의도가 궁금하다. 

우선은 위선과 허위, 허영으로 가득한 사교계 속에서 가장된 순수, 즉 메이 웰랜드가 표상하는 순수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한편으로는, 뉴랜드와 메이의 아들이 보여주는 새로운 세대, 즉 원하는 건 뭐든지 가질 수 있는 시대와 달리, 원하는 걸 가질 수 없는 제약 속에서 오히려 순수하게 보존되는 무언가가 있었던 시대, 바로 뉴랜드와 메이와 엘렌의 시대에 대한 노스탤지어도 느껴지는 듯하다. 작가 자신이 뉴욕 명문가에서 태어나 유럽에서도 오랫동안 살았고, <순수의 시대>는 1862년생인 이디스 워튼이 1920년에 발표했다고 하니 그 자신이 느낀 뉴욕과 유럽, 1870년과 1920년 무렵의 세대 변화를 잘 담은 소설이 아닐까 싶다. 

더불어, 뉴랜드를 보고 있으면 차암 팔자 조오타.. 싶어지긴 하는데, 그럼에도 그의 감정에 깊이 공감하며 읽어나가게 되는 것은 작가의 섬세한 필력 덕인 것 같다.


이디스 워튼을 더 읽고 싶다. 앗, 집에 <기쁨의 집>이 있었지? 하고 찾아보니 2권 밖에 없다.. 잉?

검색해보니 따로따로 사긴 했지만 1,2권 모두 샀는데.. 판 내역도 없는데.. 

본가에 있나 싶어 엄마에게 물어봤지만 없다고 한다. 

오, 그렇다면 이참에 표지갈이?? 하고 찾아봤으나 <기쁨의 집>은 내가 산 펭귄클래식코리아 밖에 안 나와있다..잉??

<순수의 시대>만큼 히트친 작품이 아니라 그런가보다. 할 수 없다. 1권을 다시 살 수 밖에 ㅠㅠ  



댓글(16)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3-05-04 14: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04 15: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04 16: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04 2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난티나무 2023-05-04 14:5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연정과 맺어졌대도 ‘결혼생활’은 엇비슷해졌으리라는 데에 제… 손가락은 소중하니 ㅋㅋㅋ 제 깎은 손톱을 걸겠어요!!! ㅋㅋㅋ 이 무슨 소리 ㅋㅋㅋㅋ
일케 헛소리 써놓고 생각…하다가 골치가 아파와서, 뉴랜드 바보똥멍충이!!!!!!!!!!! (혹시 메이가 스트레스로 죽은 건 아닐까욥?)

독서괭 2023-05-04 15:38   좋아요 2 | URL
아악 ㅋㅋㅋㅋ 엘렌과 맺어졌어도 결혼생활은 엇비슷 ㅋㅋㅋㅋ 완전 정곡을 찌르신 듯 합니다 ㅋㅋㅋ
난티나무님, 저는 메이가 스트레스로 죽었다는 데에 제 깎은 손톱을 걸어보겠습니다. ㅋㅋㅋ

다락방 2023-05-04 17:08   좋아요 2 | URL
수하 님의 깎은 손톱이 여기서 나왔군요!!

건수하 2023-05-04 22:16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다 ^^ 난티님이 원조~

다락방 2023-05-04 15:0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1. 기쁨의 집은 민음사 판으로는 <환락의 집> 으로 있으니, 표지갈이 하셔도 된다고 봅니다. ㅎㅎ

2. <이선 프롬>은 한 권짜리인데 강추합니다.

저는 <순수의 시대>에서 아처와 엘렌한테 이입했던 것 같아요. 저는 언제나 사랑 이야기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 사람들의 쪽이거든요. 그런데 오늘 독서괭 님의 리뷰 읽고나니, 아 이번에는 메이의 입장에서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는 어쩜 그렇게 잔인했을까요? 가슴속에 다른 여자 품고 사는 남자와 아이까지 낳고 살아가는 그 마음은 어땠을지. 흑 ㅠㅠ

독서괭 2023-05-04 15:43   좋아요 2 | URL
1. 제목이 달랐다니!!! 생각도 못했어요. 꿀정보 감사합니다~ 신나는 표지갈이~~ ㅋㅋ
2. 이선프롬, 여름 이런 작품들 읽고 싶은데 새책을 사긴 좀 그래서 ㅠㅠ

저도 첨엔 아처와 엘렌한테 이입했어요~ 다 읽고 나서도 그 아련한 감성은 좋더라고요. 하지만 아무래도 저는 결혼한 여자라 그런지 ㅋㅋ 곰곰 되씹어볼수록 메이에게 마음이 가더라고요. 가슴속에 다른 여자 품은 거 뻔히 알면서 모른척 가정을 유지하는 그 마음 ㅠㅠ 전 남성작가가 이 이야기를 썼다면 메이 캐릭터가 평면적이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이디스 워튼이 썼기에.. 그 이면이 보였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잠자냥 2023-05-04 16:16   좋아요 2 | URL
저도 <이선 프롬> 강추....
저는 민음 <환락의 집>으로 읽었어요. 여기도 대환장파티 ㅋㅋㅋㅋㅋ

건수하 2023-05-04 16:41   좋아요 2 | URL
이디스 워튼이 쓰지 않았다면 밋밋했을 거라는데 저도 깎은 손톱을 걸겠습니다. 안나 카레니나 읽을 때 (자세히 묘사하려 노력할 수록) 여주에 잘 감정 이입이 안 되었던 기억이 나네요.

다락방 2023-05-04 17:08   좋아요 3 | URL
수하 님의 깎은 손톱… 수하님은 개구쟁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3-05-04 21:06   좋아요 2 | URL
깎은 손톱 걸기.. 유행하나요?ㅋㅋㅋㅋ
이선 프롬 꼭 읽어야겠군요!

책읽는나무 2023-05-06 12: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이틀 전에 손톱을 깎은 잡니다.
손톱을 괜히 버렸?ㅋㅋㅋ
전 책은 안 읽고, 영화로 봤었거든요.
세 주인공이 모두 피해자이자 답답한 주인공들로 보여졌습니다만...엘렌과 메이 두 여성이 굉장히 속 깊고 현명한 여성들이었기에 자식들이 잘 컸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메이가 안됐더군요. 그런 남편을 말 없이 한평생 지켜보고 살았다는 건ㅜㅜ
전 영화 볼 때 엘렌 넘 얄밉다! 그러면서 봤어요. 아처는 왜 저래? 했구요ㅋㅋ
마지막 장면 엘렌을 만나지 않고 아들과 함께 돌아서는 장면은 좀 아련미가 있긴 했지만, 그 정도의 양심은 갖춰야지 않나? 뭐 그런....^^
저도 기혼자의 시선으로 흐름을 지켜 봤던 것 같네요^^;;;
그리고 책도 읽어봐야겠다! 하면서 손을 놓아 버렸네요^^
리뷰 굉장하네요. 역시 👍

독서괭 2023-05-08 12:49   좋아요 1 | URL
오 책나무님, ˝그 정도의 양심은 갖춰야지 않나?˝ ㅋㅋㅋㅋ 기혼자의 시선 ㅋㅋㅋ
우리 기혼자들에게 연애세포는 사라진 걸까요?^^; 좀 슬프구만요..
전 영화 못 봤는데 궁금해요. 어떻게 표현했을지..
아처를 화자로 내세우면서도 두 여성의 심리를 따라갈 수 있도록 쓴 것 같아서 좀 신기하더라구요. 이디스 워튼은 <이선 프롬>도 남성 화자 작품이던데, 많이들 강추하셔서 매우 궁금합니다.
깎은 손톱은 추후 어디에 걸 일 있을지 모르니 앞으로는 잘 모아두시구요 ㅋㅋㅋ
칭찬 감사합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