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바다를 마주하고 있다. 새하얀 얼굴. 모래에 반쯤 파묻힌 채, 시체처럼 움직이지 않는 두 손. 멈춰진 후, 부재 쪽으로 옮겨진 힘. 도주의 움직임 속에서 멈춰진. 그 사실을 모르는, 자신을 모르는 사람 - P14

둑 너머엔 다른 도시가 있다, 저 너머엔, 도달할 수 없는, 다른 도시가, 푸르른, 전등 불빛으로 반짝거리기 시작한 다른 도시가 더 멀리에는 다른 도시들이, 또다른 도시들이 하나의 도시. - P15

그는 바다를 마주한 채 모래 위에 앉아 있다. 해변, 바다, 걷고 있는 남자, 눈을 감은 여자, 그게 무엇이든 그는 더이상 바라보지 않는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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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있는 남자의 오른쪽, 해변의 어떤 곳 위로, 빛의 움직임이 있다. 비어 있는 웅덩이가 하나 있다, 샘이, 강이, 강들이, 쉼없이, 소금 구렁을 만들어낸다. - P10

걷고 있는 남자는 보지 않는다, 아무것도, 자신 앞에 펼쳐진 모래 외에는 다른 그 무엇도.
그의 걸음은 계속되고, 한결같고, 아득하다. - P10

해가 저문다.
바다가, 하늘이, 공간을 차지한다. 멀리, 바다는 어둑해진 빛에 의해 이미 녹이 슬었다, 하늘도 그렇다.
셋, 그들은 셋이다, 어두워지는 빛, 그 더딤의 그물 속에서. - P11

바다를 따라 걷고 있는 남자, 그만은, 원래 자신의 움직임을 유지한다. 그는 죄수처럼 한없는 발걸음으로 계속 걷고 있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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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뜻인지 송희도 알았다. 메달 하나 딴 적 없는 자기는, 끼워파는 과자 같은 선수라는 걸. - P240

나는 덤이 아니야.
그때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선택지는 분명해졌다. 덤이 되거나, 아무것도 못 되거나. 그걸 선택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 P241

용감하면 카지노 손님이 되고, 똑똑하면 카지노 직원이 된다. - P242

용감하지도 똑똑하지도 못한 대부분의 동네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는 송희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무엇이든 팔았다. 밥을 팔고 술을 팔고. 어떤 사람들은 모두가 쉬쉬하는 것을 팔았다. - P243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역도에 내려놓는 동작은 존재하지 않았다. 들었다면 그것으로 끝이기 때문에 그대로 바닥에 버렸다.
송희는 들어보고 싶다기보다 버려보고 싶었다. - P245

무게는 다 똑같아.
코치는 말했다. 송희는 그 사실이 왠지 마음에 들었다. 손가락을 감아 봉을 쥐었다. 서늘하고 단단한 금속의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 P246

왜 하필 몸 쓰는 일이냐?
아버지는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 요즘 세상에 누가 몸으로 돈 버니. 아빠 때나 배운 게 없으니 막장 가서 몸으로 때웠지 이젠 막장도 없어요. 운동? 운동판도 잘되려면 다 돈이고 인맥이다...... - P246

세상이 그렇게 반듯하지가 않아. 사기꾼 놈들이 얼마나 약았는데. 그래서 정보가 중요하다고. 정보. - P248

무거운 걸 들면 기분이 좋아?
그렇게 묻는 남자애가 있었다. 들지 못하던 것을 들면 물론 기뻤다. 하지만 버리는 기분은 더 좋았다. 더 무거운 것을 버릴수록 더 좋았다. 온몸의 무게가 일시에 사라지는 느낌. 아주 잠깐, 두 발이 떠오르는 것 같은. 송희는 그 느낌을 비밀로 남겨두었다. - P249

마당에서 방까지 끌다시피 아버지를 옮기며 송희는 생각했다. 자기가 역도를 하며 70킬로그램, 80킬로그램을 어렵지 않게 들어올릴 수 있는 건, 오직 바벨이 바벨의 모양이기 때문임을. - P254

더 무거운 걸 버릴 때 더 기쁘다면, 더 무거운 걸 떨어뜨리면 더 화날까 - P259

다시 땅에 붙인 두 발바닥. 송희는 두 발 아래 깊이 묻혀 있는 검은 돌들을 떠올렸다. 시간과 열기와 압력 속에서 태어나 빚어진 것들. 그로부터 시작된 분화, 아득히 오래전부터 솟구친 힘이 마침내 도착하는 정확한 자리. 송희는 숨을 참았다. 굳게 잠긴 복부 안에서 작고 단단한 무엇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뜨거워. 나 지금 뜨거워. - P262

눈 내리는 겨울 오후의 고요. 산등성이의 헐벗은 자리. 교정의 새파란 인조 잔디. 철교와 고가도로. 박물관 앞에 전시된 녹슨 탄차. 모텔과 마사지숍의 현란한 입간판. 주인 없는 자동차들. 모두가 공평하고도 아늑하게 하얀 눈에 덮여서, 미처 닿지 않는 그늘에서도 단정한 마음으로 목도리를 여밀 수 있었던 날, 왼발 오른발을 눈밭에 디디며 빙판과 진창의 시간을 예비하던 긴 겨울의 한가운데.
그날이 송희가 정말로 역도를 그만둔 날이었다. - P262

여러 위험을 평가해보면 문을 열어두고 잔다고 아침을 맞이하지 못할 확률은 극히 낮았다. 낮음과 없음은 다르다. 낮음은 없음이 아니다. 그러나 ‘극히 낮음‘은 ‘없음‘으로 여겨야 정상적인 사고다. 정상적인 사고라는 말은 무섭다. 무서워서 문을 닫고 싶었다. 문을 닫아야 했다. 이런저런 이유가 없더라도 문이라는 장치의 기본값은 닫힘이다. - P269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어떤 실수는 바로잡을 수 없을 뿐이다. - P272

사람들은 어떤 환자들에게는 연민 이면에 경계심을 채비한다. 내가 아는 누군가는 나를 정신병자라고 부를 준비가 되어 있다. - P277

말이 식물은 몰라도 인간은 변화시키는것이다. 폭언을 들으며 성장한 아동이 추후에 정신적 어려움을 겪을 확률이 높다면, 거꾸로도 가능하지 않을까. - P280

‘거의 사실‘은 ‘사실‘과는 조금 다르지만 ‘거짓‘과는 굉장히 다르다. -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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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것만으로 포근해지는 그 요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끈적한 지방덩어리가 들러붙은 닭의 사지를 썰고 핏물을 빼야 했다. 그는 누군가를 먹이려면 피를 봐야 한다는 사실을 도마 앞에 서서 뒤늦게 배워갔지만 그 기분이 싫지는 않았다. - P225

"그때는 이게 우연 같지 않았지요. 잘될 것 같았고, 잘할 수있을 것 같았습니다. 초침처럼 한 칸 한 칸, 시계추처럼 침착하게 살 거라고요." - P227

기억이란 한번 열쇠를 꽂고 태엽을 감으면 줄줄이 흘러나오는 것일지도 몰랐다. - P229

돌아보면 우스운 일이 있었고 울적한 일이 있었다. 정말 있었을까 싶은 일과 정말 없었을까 싶은 일, 이제는 물어볼 사람이 없는 일이 있었다. - P230

세상에는 여러 일이 일어났고 방문을 열었을 때 무엇을 보게 될지는 알 수 없었다. -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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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파도란 배를 뒤집거나 사람을 삼키는 것으로만 알았고, 그렇게 영영 사라진 누구네 삼촌들의 성씨를 기억했다. 파도가 돈이 되리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물이 들어올 때, 아니 파도가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할 것 같았으나 정확히 무엇을 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 P219

하지만 여관으로부터 게스트하우스까지 삼십 년 동안 모든 손님은 모르는 사람이었다. -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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