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격과 운명은 하나의 개념에 붙은 두 개의 이름이라고 윌리엄 뷜로 굴드는 썼지만, 으레 그랬듯이 그는 이 점에서도 보기 좋게 틀렸다. - P14
그의 비릿한 물고기들을 만나면서 나는 우리가-우리의 역사와 우리의 영혼이 끝없는 부패와 재창조 과정 속에 있다고 믿게 되었으며, 이 책이 내 심장의 퇴비 더미 얘기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 들뜬 펜으로도 그때의 황홀함, 그 경이로움에는 다가갈 수 없다. ‘물고기 책‘을 펼친 순간 그 강렬함에 압도되어 나머지 세계- 세계!-가 암흑으로 곤두박질하고, 낡은 책갈피에서 뿜어져나온 빛만이 놀란 두 눈으로 들어와 우주 전체에 존재하는 유일한 빛처럼 느껴졌으니 말이다. - P14
어쩌면 일 없이 놀았기 때문에 더 기적에 민감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특별히 보고자 하는 것이 없었기에 성모의 발현을 목격했던 포르투갈의 가난한 시골 소녀처럼, 나 또한 주변 세상을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 P14
어쩌면 우리는 기적을 본다든지 환상을 본다든지 하는, 우리 자신이 여태껏 알고 있는 바와는 다르게 더 큰 존재라는 걸 이해하는 능력을, 그 육감을 상실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진화는 생각보다 더 오랫동안 역행해왔으며, 이미 우리는 애처롭고 멍청한 물고기인 건지도 모른다. - P15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삶엔 확신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여러분에게는 터무니없는 소리로 들릴지 몰라도 나는 진실을 소중히 여긴다. 하지만-죽고 나서야 윌리엄 뷜로 굴드의 끝없는 무익한 질문으로부터 벗어난 물고기들에게 그가 그 뒤로도 끈질기게 물었던 대로 물어보자면- 어디서 진실을 찾을 것인가? - P16
색의 경이가 그가 속한 세계의 참상을 상쇄해 주었을까? - P28
"역사는요, 해밋 씨, 눈에 보이지 않는 겁니다. 역사에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짜에는 아무것도 없지요." - P31
"게다가 사료를 검토해보면, " 교수는 계속 말을 이었지만 그때쯤 나는 그가 ‘물고기 책‘을 혐오한다는 것을, 이야기가 아닌 사실 속에서 진실을 추구한다는 것을, 그에게 역사란 현재에 대한 침울한 체념의 구실에 불과함을, 그런 머리 모양을 한 남자는 얄팍한 향수에 젖는 경향이 있으며 이런 경향은 삶이 자기 자신처럼 따분하다는 감각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음을 알아차린 터였다. - P33
지금에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물고기 책‘은 자기가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중이었으며, 내게서 끝이 났으니만큼 역설적으로 다른 이들에게서 시작되고 있었다. - P39
그러나 몇 개월이 흐르자 나는 끔찍한 진실을 대면해야 했다. 한없이 경이롭고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끝없이 증식하며 펼쳐지는 ‘물고기 책‘은 사라졌다. 나는 근본적인 무엇을 잃었고 그 대신 기이한 전염병에, 지독한 짝사랑에 감염되었다. - P40
책을 만든다는 것은, 설령 그것이 지금 여러분이 읽는 이 형편없는 책처럼 불완전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책장 속에 살아 있는 이들을 향해 우리가 느껴야 할 적절한 감정은 사랑뿐임을 깨닫는 일과도 같다. 어쩌면 책을 읽고 쓰는 행위는 인간 존엄성에 남은 최후의 방어선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른다. 결국 이 행위가, 이 가차없는 굴욕의 시대에 신마저 증발되어버리기 이전, 신이 우리에게 깨우쳐주었던 것을 다시금 일깨우기 때문이다-우리가 우리보다 더 큰 존재임을, 우리에게 영혼이 있음을, 그보다 더 큰 것도 있음을. - P42
홍 선생이 말한다. 한 권의 책이란 최초에는 삶을 이해하는 새로운길-독창적인 우주-일 수도 있지만, 머잖아 아첨꾼들의 과찬과 동시대인의 경멸을 받으며 두 편 중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는, 저술사의 각주로 전락한다고. 책의 운명은 가혹하며 책의 숙명은 부조리하다. 독자들에게 무시당하면 사멸하고, 후대의 승인을 받으면 영원히 곡해될 운명에 처하는 것이다. 또 그 저자들은 처음에는 신이 되고, 그다음에는 필연적으로, 그들이 빅토르 위고가 아니라면, 악마가 된다.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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