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수치스러운 몰락에 기진한 나는 콩가의 어두컴컴한 거실에 있는 오래된 적갈색 안락의자에 털썩 주저앉았고, 어느덧 깊이 잠들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한 가지 끈질긴 의문이 무한 루프처럼 재생되고 있었다.
나는 누구냐....? 그 질문은 묻고 있었다. 나는 누구냐......? - P46

그때 나는 풀잎해룡의 무시무시한 평정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상상했지만, 한 일생을 거친 뒤에야 비로소 그 평정의 이유, 즉 일체의 선도 일체의 악도 똑같이 불가피한 것이라는 인식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이해하는 풀잎해룡은 자신이 이해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괘념치 않는 듯 보였다. - P51

삶이란 등에 지고 다니며 그 안에서 살다 죽는 무의미한 등딱지에 불과할 뿐이니. - P5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뇨. 난 소울메이트는 안 믿어요. 모든 사람에게 완벽한 한 명의 짝만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완벽한 짝은 많고, 가끔은 짝을 찾지 못하거나 두 명 혹은 그 이상을 찾는다고 생각해요. 복불복이죠." - P327

현실에서는 우리가 걱정했던 일과 다른 일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 P349

우리 모두가 그렇듯 그저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불특정한 인간이었다. 딱히 좋은 사람도, 딱히 나쁜 사람도 아니었다. 잭은 앨리슨을 해치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죽이고 싶었다. 앨리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한 시스템의 작은 부품이었고, 잭은 이 시스템을 조정해야 했다. 이 우주의 업보가 제대로 작동하게 하는 중이었다. - P350

그 특별한 시련을 겪은 뒤에 잭은 약간 변했다. 자신이 하찮은 인간일 뿐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이 하찮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맞다. 이 시기에 해적 협회의 아이들을 죽이고 세상을 바로잡는 환상을 품기 시작했다. - P359

나쁜 사람은 늘 처벌받지 않고, 죄 없는 사람은 지독하게 고통받는다. - P376

나도 그 무고한 여덟 명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것만이 유일한 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행성에 거주해온 인류의 오랜 역사에서 나의 작은 보복 행위는 미미할 테지만 그래도 의미 있는 일이다. 악을 악으로 갚아봐야 좋을 게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한 번도 억울한 일을 겪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 P377

나 역시 내 동생의 죽음에 죄가 있으니 그 명단에 이름을 올려야 마땅했다. 앞으로 내가 맞이할 죽음이 그렇듯이. - P38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서워요?" 그녀가 물었다.
"죽는 거요?"
"음, 그냥 죽는 게 아니라 곧 죽을지 모른다는 거요. 우리가 명단에 올랐기 때문에 죽는다는 거." - P202

"확실히 긴장은 돼요. 하지만 사실 난 매사에 긴장하며 살았어요. 수업할 때마다 긴장하고, 카페에서 주문할 차례가 됐을 때도 긴장하고, 일주일에 한 번 엄마에게 전화할 때도 긴장해요. 우리가 하는 이야기라곤 텔레비전에서 봤던 프로그램과 전날 저녁에 했던 요리가 전부인데도. 하지만 이제 정말로 긴장해야 할 일이 생겼어요. 죽어가는 사람들 명단에 내 이름이 올랐으니, 이번에는 긴장해도 괜찮을 것 같아요. 내 감정이 현실과 일치하는 듯해서 갑자기 기분이 나아졌어요. 이게 말이 되나요?" - P203

"죽음을 앞두고 있으니 매사를 객관적으로 보게 되는 것 같아요."
"비록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앞두고 있지만요." - P204

미국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한 척하지만 사실 그건 피부색이 어떻든 권력자들이 당신을 기꺼이 엿 먹일 수 있다는 뜻에 불과했다. - P211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서늘한 안개 때문에 등대 너머로 펼쳐져 있을 바다조차 보이지 않았다. 등대에서는 램프가 돌아가고 주기적으로 경적이 울렸다. 마치 해안선을 따라 회색 커튼이 드리워진 듯했다. 아니, 꼭 그렇지는 않았다. 마치 세상이 어떤 지점 너머로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된 것처럼 텅빈 공간을 바라보는 듯했다. - P215

"생각하기 싫어서였겠지. 그 때문 아니겠니? 사람들이 어떤 일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으려 하는 이유가 보통 그거잖아." - P229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서 생각을 정리하려 애썼다. 우선 그녀의 아버지와 아서 크루즈의 아버지 사이에는 분명한 연결고리가 있었다. 그리고 둘이서 뭔가 나쁜 짓을 저질렀다. 그 나쁜 짓이 무엇이든 간에 그게 이번 사건의 핵심이라고 제시카는 확신했다. - P230

마거릿이 대학에서 에릭과 만난 이야기를 좀더 자세하게 들려주는 동안 잭은 왜 착한 여자는 꼭 나쁜 남자와 엮이는지 다시 한번 궁금해졌다. 인생 최대의 미스터리는 아니더라도 미스터리임은 분명했다. 에릭은 당연히 그가 느낀 첫인상과 일치하는 인간일 것이다.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느끼는 상대에게는 잘난 척하고, 자신보다 힘이 세다고 믿는 상대에게는 굽실거리는,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깡패. 에릭은 이 가여운 여자가 그의 곁을 떠나거나 신경쇠약에 걸릴 때까지 들들 볶을 것이다. 함께 보낸 시간이 채 십 분도 안 되는 사람을 두고 억측이 지나치다는 건 잭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옳다고 확신했다. - P248

잭은 죽는다는 두려움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기는 해도 죽음이 두렵지는 않았다. - P252

운동화를 잃어버리고 슬퍼하는 제러미의 모습은 제이에게 중요한 경험이 되었다. 타인에겐 상처지만 자신에겐 기쁨이 되는 일을 남몰래 해낸 것이다. 그 순간이 그에게는 전환점이었다. - P266

"어디선가 읽었는데, 인간은 사실 자기 죽음을 상상할 수 없대요. 만약 상상할 수 있다면 두려움에 마비될 거라고 하더군요." - P269

"예전에 정신과에 다닐 때, 아마 닥터 페니였을 텐데, 선생님이 그러더구나. 우울증으로 괴로워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우울증의 장점은 기억력이 떨어지는 거라고. 내 삶에서 기억나지 않는 일들이 있는데, 나중에 보니까 기억할 가치가 없는 일들이었어." - P281

외로움의 끔찍한 점은 항상 타인으로 치유되지만은 않는 것이라고 잭은 다시 한번 생각했다. 어쨌든 그의 경험으로는 그랬다. 다른 사람들,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혼자 있을 때보다 더 외로웠다. 그는 거의 평생 그런 외로움을 느끼며 살았다. 오래전 누이가 죽은 뒤로, 그리고 부모님이 그 상실감을 끝내 극복하지 못한 뒤로. - P287

"친밀감을 결정하는 것은 시간이나 기회가 아니라 오로지 성향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칠 년이라는 시간도 서로를 알아가기에 부족할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칠 일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 - P31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메멘토 모리 구슬의 아름다운 점은 신앙심이 있든 없든 모든 사람에게 의미가 있는 물건이라는 것이었다. 지금은 아서도 자신을 불가지론자라고 생각했다. 저 구슬이 말하듯이 우리가 세상에 머무는 시간이 짧다는 사실은 다들 안다. 비록 그 사실은 늘 체감하지는 못할지라도 머리로는 알고 있다. 육신의 아름다움은 찰나고, 뼈는 우리보다 오래 살아남는다. - P155

이번 사건에는 나름의 체계가 있어. 명단에 있는 사람들은 결코 우연히 선택된 게 아니야. 그리고 프랭크가 제일 먼저 살해됐어. - P192

그는 아는 수사관이 많았는데, 그들의 공통점은 자신이 천하무적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사진을 들여다보던 피셔는 객관적으로 볼 때 제시카가 꽤 미인이며 외견상으로는 자신의 아내와 상당히 비슷하다는 걸 깨달았다. 피부색이 같고, 광대뼈가 도드라졌으며, 눈은 연갈색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어떤 감정이 드는 건 아니었다. 그저 약간 흥미가 생겼을 뿐이었다. 이 여자도 자신과 아내처럼 군인 출신인지 궁금했다. 그녀에게는 군인의 표정이 있었다. 결혼은 했는지, 아이는 있는지도 궁금했다. 피셔의 이런 궁금증은 누군가의 부고 기사를 읽을 때와 똑같았다. 지금 그는 죽은 여자를 보는 셈이었다. 그가 이 일을 수락한 순간, 제시카는 죽은 목숨이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경제적으로든 다른 면으로든 그의 가족의 삶은 더 안정되었다. 그게 세상의 이치였고 늘 그래왔다. - P197

사진 속 그녀의 이목구비를 머릿속에 새기며 피셔는 그녀의 죽음과 자기 가족이 누릴 안전 사이의 방정식을 좀더 생각했다. 그가 의뢰를 수락할 때마다 거치는 의식의 일부였다. 이 방정식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다. 비록 인간은 간혹 잊기도 하지만 지구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다. 그리고 세상은 잔인하고 냉혹하다. 이 사실 역시 미국인들은 간혹 잊는다. 모두에게 돌아갈 몫이 충분하지 않으므로 내가 갖든가 아니면 남들이 갖든가 둘 중 하나다. 이는 내 가족을 보호해야 한다는 뜻이다. 유사 이래 늘 그런 뜻이었다. 이 세상에 가족을 보호할 수단이 돈만 있는 건 아니지만 가장 중요한 수단이기는 하다. 피셔는 그렇다고 확신했다. - P19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격과 운명은 하나의 개념에 붙은 두 개의 이름이라고 윌리엄 뷜로 굴드는 썼지만, 으레 그랬듯이 그는 이 점에서도 보기 좋게 틀렸다. - P14

그의 비릿한 물고기들을 만나면서 나는 우리가-우리의 역사와 우리의 영혼이 끝없는 부패와 재창조 과정 속에 있다고 믿게 되었으며, 이 책이 내 심장의 퇴비 더미 얘기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 들뜬 펜으로도 그때의 황홀함, 그 경이로움에는 다가갈 수 없다. ‘물고기 책‘을 펼친 순간 그 강렬함에 압도되어 나머지 세계- 세계!-가 암흑으로 곤두박질하고, 낡은 책갈피에서 뿜어져나온 빛만이 놀란 두 눈으로 들어와 우주 전체에 존재하는 유일한 빛처럼 느껴졌으니 말이다. - P14

어쩌면 일 없이 놀았기 때문에 더 기적에 민감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특별히 보고자 하는 것이 없었기에 성모의 발현을 목격했던 포르투갈의 가난한 시골 소녀처럼, 나 또한 주변 세상을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 P14

어쩌면 우리는 기적을 본다든지 환상을 본다든지 하는, 우리 자신이 여태껏 알고 있는 바와는 다르게 더 큰 존재라는 걸 이해하는 능력을, 그 육감을 상실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진화는 생각보다 더 오랫동안 역행해왔으며, 이미 우리는 애처롭고 멍청한 물고기인 건지도 모른다. - P15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삶엔 확신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여러분에게는 터무니없는 소리로 들릴지 몰라도 나는 진실을 소중히 여긴다. 하지만-죽고 나서야 윌리엄 뷜로 굴드의 끝없는 무익한 질문으로부터 벗어난 물고기들에게 그가 그 뒤로도 끈질기게 물었던 대로 물어보자면- 어디서 진실을 찾을 것인가? - P16

색의 경이가 그가 속한 세계의 참상을 상쇄해 주었을까? - P28

"역사는요, 해밋 씨, 눈에 보이지 않는 겁니다. 역사에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짜에는 아무것도 없지요." - P31

"게다가 사료를 검토해보면, " 교수는 계속 말을 이었지만 그때쯤 나는 그가 ‘물고기 책‘을 혐오한다는 것을, 이야기가 아닌 사실 속에서 진실을 추구한다는 것을, 그에게 역사란 현재에 대한 침울한 체념의 구실에 불과함을, 그런 머리 모양을 한 남자는 얄팍한 향수에 젖는 경향이 있으며 이런 경향은 삶이 자기 자신처럼 따분하다는 감각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음을 알아차린 터였다. - P33

지금에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물고기 책‘은 자기가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중이었으며, 내게서 끝이 났으니만큼 역설적으로 다른 이들에게서 시작되고 있었다. - P39

그러나 몇 개월이 흐르자 나는 끔찍한 진실을 대면해야 했다.
한없이 경이롭고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끝없이 증식하며 펼쳐지는 ‘물고기 책‘은 사라졌다. 나는 근본적인 무엇을 잃었고 그 대신 기이한 전염병에, 지독한 짝사랑에 감염되었다. - P40

책을 만든다는 것은, 설령 그것이 지금 여러분이 읽는 이 형편없는 책처럼 불완전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책장 속에 살아 있는 이들을 향해 우리가 느껴야 할 적절한 감정은 사랑뿐임을 깨닫는 일과도 같다. 어쩌면 책을 읽고 쓰는 행위는 인간 존엄성에 남은 최후의 방어선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른다. 결국 이 행위가, 이 가차없는 굴욕의 시대에 신마저 증발되어버리기 이전, 신이 우리에게 깨우쳐주었던 것을 다시금 일깨우기 때문이다-우리가 우리보다 더 큰 존재임을, 우리에게 영혼이 있음을, 그보다 더 큰 것도 있음을. - P42

홍 선생이 말한다. 한 권의 책이란 최초에는 삶을 이해하는 새로운길-독창적인 우주-일 수도 있지만, 머잖아 아첨꾼들의 과찬과 동시대인의 경멸을 받으며 두 편 중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는, 저술사의 각주로 전락한다고. 책의 운명은 가혹하며 책의 숙명은 부조리하다. 독자들에게 무시당하면 사멸하고, 후대의 승인을 받으면 영원히 곡해될 운명에 처하는 것이다. 또 그 저자들은 처음에는 신이 되고, 그다음에는 필연적으로, 그들이 빅토르 위고가 아니라면, 악마가 된다. - P4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