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지난주에 본 사람처럼, 너는 내게 아직도 생생해. 영원히 과거가 되지 않은 채 현재로 남아 있어. 그러니까, 너에게도 나라는 사람의 어떤 부분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을 게 분명해. 뭐든 일방적인 것은 없으니까. 그때 네가 나에게 말했듯이 말이야. - P10
낡고 오래된 것들은 깎이고 버려지고 사라져버리기 마련이니까. 그게 세상의 이치니까. - P11
익명이기에 얻을 수 있는 한줌의 자유. - P20
(비밀은 사람을 필요 이상으로 조숙하게 만들어버리곤 한다). - P31
언제부터인가 나는 카멜레온처럼 보호색으로 나를 위장해왔는데, 그것은 피곤하지만 동시에 은밀한 즐거움을 주는 일이기도 했다. 누구보다도 검은 속내를 품은 채 다른 사람들을 기만하고 있다는 데서 오는 묘한 쾌감. 상대방의 감정을 내 뜻대로 조종할 수 있다는 모종의 자신감. 이런 연유로 나는 누구도 감쪽같이 속일 수 있는 개연성 있는 거짓말을 지어낸다거나 능숙하게 감정을 절제하는 등 또래답지 않은 능력을 갖게 되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것은 스스로가 보편의 무엇에 속할 수 없다는 것을 일찍이 깨달아버린 사람이 갖게 되는, 일종의 강박이자 콤플렉스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 P40
당시 나에게 가족이라는 것은 나를 속박하는 굴레에 불과했으며, 내가 가진 모든 욕망은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했다.지금의 이 삶을 벗어나고 싶다. - P41
모두가 하나가 된 세상에 속하고 싶지 않다는 치기어린 반항심이 들면서도 단 한 순간만이라도 어딘가에 속해보고 싶다는 과장된 고독감이 나를 휘감았다. - P41
"만약 기억이 통조림이라면 영원히 유통기한이 없었으면 좋겠다." - P42
‘평범한 존재‘로 여겨져야 한다는 강박과 나만의 고유한 취향을 가지고 싶다는 상반된 욕망이 내 안에서 끊임없이 부딪쳤다. - P49
침묵과 비밀.그것은 모든 걸 안개 속에 밀어넣어버리고 인간을 외롭게 만든다. - P53
모든 처음은 흔적을 남긴다는 것을 나는 우습게도 담배를 피우며 배웠다. - P68
단 한순간의 망설임이 치명적인 것이 된다. - P276
"이건 삶의 방식 자체의 문제예요. 항상 진지하게 자신의 몸을 지키려는 자세가 중요해요. 공격받는 걸 그저 감수하기만 해서는 어떻게도 해결이 안 되죠. 만성적인 무력감은 사람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손상시킵니다." - P284
문화인류학의 목적 중 한 가지는 사람들이 품은 개별적인 이미지를 상대화하고, 거기서 인간에게 있어 보편적인 공통점을 찾아내어 다시 그것을 개인에 피드백하는 것이야.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자립적이면서도 어딘가에 속한다는 포지션을 획득할 수 있거든. - P318
그들의 교리는 너무도 편협하고 일방적이고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현실과는 한참 동떨어져 있다. 하지만 정말 어쩌다가 하나씩, 그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도 있다. 그것이 가령 어떤 이야기이건 대화할 사람을 원하는 이들이 세상에는 존재한다. - P323
일요일에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마음껏 뛰어놀아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어르고 달래며 수금을 하거나 무서운 세상의 종말을 선전하고 다니거나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 건 - 만일 그럴 필요가 있다면 그렇다는 것이지만 -어른들이 하면 된다. - P326
일요일에는 시간이 기묘하게 흐르고 풍경이 불가사의하게 뒤틀린다. - P329
말을 잃어버린 삶을, 앞을 못 보는 삶을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의미없이 내뱉는 말의 홍수 속에, 아무 생각없이 지껄여대는 말들에, 또는 무심코 던져진 말의 폭력에 상처받는다. 그녀 역시 바늘처럼 맨몸을 찌르는 말로 인해 말을 잃었다. 말을 잃은 그녀와 앞을 볼 수 없는 그가 희랍어 시간에 만난다. 상실의 아픔을 지닌 그와 그녀의 만남.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줌으로써 그들의 상처는 치유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의 힘겨운 삶에 힘찬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한 생명이 태어난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추운 세상으로 나온다. 그리고 그곳에서 혼자가 된다. 그 세상은 자애로운 신뿐만 아니라 사탄 역시 지배하는 세상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지나가고, 스러져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삶이라고 작가는 말한다.우리가 삶을 끝내고 가는 곳은 어떤 곳일까. 페테르의 말대로 이름도 없고, 말도, 몸도 없는 곳일까. 그래서 아플 것도 없는 곳,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는 곳일까. 거대하고 고요하고 잔잔히 떨리며 빛이 나서 환한 곳일까. 또 그곳은 우리가 사랑하는 건 다 있고 사랑하지 않는 건 없는 곳일까
덴고는 겨드랑이 아래로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가슴이 옥죄는 느낌이 들었다.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는 일, 그리고 새로운 무언가가 몰고 오는 것들. 그로 인해 자신의 지금 존재가 위협받는 것. - P220
"두려워할 거 없어요. 여느 때의 일요일이 아니니까." 소녀는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을 알려주듯이 그렇게 말했다. - P221
이상이 발생한 건 내가 아니라 이 세계다.그래, 맞아.어딘가의 시점에서 내가 알고 있는 세계는 소멸하고, 혹은 퇴장하고, 다른 세계가 거기에 자리바꿈을 한 것이다. 레일 포인트가 전환되는 것처럼. - P231
그런 일을 하고 나면 그다음의 일상 풍경이 평소와는 조금 다르게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겉모습에 속지 않도록 하세요. 현실은 언제나 단 하나뿐입니다. - P235
"뭔가로 보이지 않는다는 건 결코 나쁜 일이 아니지. 요컨대 아직 틀에 박히지 않았다는 얘기니까." - P253
"‘모든 일에는 반드시 두 개의 측면이 있다‘ 라는 것이 그의 생각입니다." 덴고는 말했다. "좋은 면과 그다지 나쁘지 않은 면, 두 가지입니다." - P2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