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자면, 우린 우리가 누구인지 더 잘 알기 위해 제약투성이인 조건 속에서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 알기 위해 콜레트를 읽었다. 물론 그 조건이란 우리가 여자라는 것이었고-다른 조건이 동등하다면-사랑(갓난아기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온 이야기)이야말로 우리가 삶과 제대로 한판 대결을 펼쳐볼 만한 전장이었다. - P60

아무리 고군분투해도 여자는 언제나 독립을 향한 열망과 정념을 향한 더 큰 갈망 사이에서 갈등할 수밖에 없다고, 콜레트는 말한다. - P65

이 책들에서 대문자 L로 표기된 ‘사랑‘은 여자의 삶에서 영예인 만큼이나 절망이기도 했다. 그 영예와 절망을 동시에 경험한다는 건(대체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초절을 획득한다는 의미였다. - P66

반세기 만에 이 책들을 다시 읽는 경험은 불편하고 심란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사태였다. 이전과 달라진 느낌이 기분 나쁘게 입안에 감돌았다. 이번에는 읽을수록 자꾸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콜레트는 르네- 병적으로 불안하고 끝없이 환상에 빠지며 지독히도 우울하게 노화에 집착하는 여자-를 기막히게 생생하게 그려내는구나. 그런데 이 상황은 얄팍하게만 느껴지네. 르네의 성찰은 항상, 오로지, 아무것도 모르는 자아로만 거듭 귀결된다. 그리고 작품에서 여실히 드러나는바, 사유하는 작가라고 해서 인물들보다 더 많은 걸 알지도 못한다.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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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미정 엄마에게서는 절대로 누군가에게 함부로 휘둘리지 않으려는 결기가 느껴졌고, 나는 미정 엄마의 삶을 닮고 싶어했다. 그러니까, 내가 누군가를 이용하더라도 그것이 그 누군가에게 절대로 해를 끼치지 않는 삶. 어떤 사건에 휘말리더라도 그 속에서 꼿꼿이 허리를 편 채 눈을 부릅뜨는 삶. 그때 나는 미정 엄마가 그런 삶을 살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삶이라는 게 정말 누군가에게 해가 되지 않는 방식으로 이뤄질 수 있는 건가? 기어코 해가 되고 마는 것이 삶 아닌가. - P118

현수 언니와 함께 일한 지 일 년이 다 되어갔다. 그사이 할머니는 죽었고 나는 발인 다음날까지도 일을 했다. 그래서 그때는 마치 사는 것과 슬픔이 별개의 문제처럼 여겨졌다. 슬퍼할 장소와 웃어야 할 장소가 명확하게 나뉘어져 있었으니까. - P121

내가 겪어왔던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처럼 엄마도 당신이 겪은 일련의 사건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게 문제라고 생각했다. 빤히 보이는데 보이지 않는 척하는 것. 서로가 떠안은 일들에 지쳐 상대의 상처에는 그저 눈을 감아버리는 태도. 우리가 그런데도 서로를 친밀한 사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는 것인가?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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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차 삶을 생각해 볼 때 그녀는 마치 자신이 생매장되고 있는 듯이 느꼈다. - P24

그녀는 자기의 처지가 전혀 달라지지 않을 것인지 생각하며 집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그녀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소녀시절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나온 듯했고, 보텀스의 뒤뜰을 무거운 몸으로 걷고 있는 그 사람이 십년 전 쉬어니스의 방파제에서 그다지도 가볍게 뛰어다녔던 사람과 같은 존재인지 의아할 정도였다. - P25

때로 삶은 한 인간을 사로잡아 그 육신을 이끌고 다니면서 그 사람의 역사를 완성하지만 그 삶은 진실로 여겨지지 않고 그의 자아는 무심하게 내버려진다. - P25

그 아이는 어머니에게 환멸의 쓰라림이 가장 견디기 어려울 때, 삶에 대한 그녀의 믿음이 흔들리고 그녀의 영혼이 황량하고 외로울 때 태어났다. 그녀는 아이를 대단히 소중하게 여겼고 아이의 아버지는 그것을 질투했다.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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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생이 적당한 시점에 최악의 결말로 끝나버릴 거라는 염세적인 기분을 느끼곤 했다. 하지만 최악의 결말은 존재하지 않고, 늘 최악의 순간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이제 와서 생각건대, 그 감각은 세계가 이루 말할 수 없는 불가해한 상황으로 구성되고, 나는 속절없이 휘말릴 뿐이라는 것을 그 시절에 이미 알아차렸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었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걸레가 되고 그 짓거리 하는 년이 되고 씨발년이 된다. 그건 내 의도도 누구의 의도도 아니다. 세계가 그렇게 나를 그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 P86

누구도 원하지 않지만 해야 하는 싸움이었다. 세상에는 그런 싸움도 있는 법이다. - P88

나는 초등학교 시절 아빠가 컴퓨터를 부순 이후로 아빠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아빠가 교육의 일종이랍시고 하는 모든 일이 내게는 단순한 화풀이로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P91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나는 동생이 생긴다는 것의 의미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가족이 하나 더 생긴다는 건 식구가 는다는 거고, 식구가 는다는 건 더 깊고 깊은 가난의 늪에 빠지게 된다는 거다. - P92

집에 가는 도중에 미정에게서 문자가 왔다. 장문의 문자였다. 나는 그 문자를 읽은 뒤 그냥 삭제해 버렸다. 조금 후회했지만, 이윽고 후회 따윈 하지 않는 채로 삶을 새롭게 시작해야겠다고 다짐했다. - P109

얘들아, 무망한 게 제일로 무섭다. 할머니는 침대에 묶인 채로 그런 말을 했다. 나는 그 얘기를 듣고 몹시 놀랐다. 그럼 할머니는 기어코 무엇을 열망하면서 평생을 살아왔단 말인가. - P113

내가 내보이는 모든 모양새에 무심함이 묻어나야 한다. 그게 어른들의 세계에 잠입하는 방식이다. - P113

누군가의 생이 끝나버릴 뿐인 생리 현상을 그와의 영원한 작별로 편리하게 의미화해버리는 어른들의 태도가 우스웠다. 끝이라는것이 그렇게 간단하게 정해진다면 우리는 진작 고통받는 일없이 살고 있을텐데 - P115

상대방이 신중하지 않은 태도로 뱉은 말은 절대로 믿어선 안 된다.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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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세월 내가 이 책을 그토록 소중히 마음에 간직해온 이유는 엉뚱한 것이었지만 그건 오독 때문이 아니라 앎이 아직 여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책이 오히려 더욱 위대하고 감동적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책 한권의 풍요한 의미를 향해 여행을 해야 하는 쪽은 독자인 나라는 걸 처음 똑똑히 깨닫기도 했다. - P32

소설의 핵심에 놓인 투쟁은 폴과 모친의 갈등보다는, 성애를 해방으로 착각하는 풀이 자기 환상을 붙잡고 씨름하는 데 있다. 까마득히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나는 비로소 이 통찰을 제대로 이해했다. - P35

이상적인 삶-교육받은 삶, 용감한 삶, 더 넓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이라면, 사랑은 추구할 뿐아니라 반드시 쟁취해야 하는 목표여야 마땅했다. 사랑만 쟁취하면 존재는 철저히 탈바꿈한다. 그러면우리가 일상적으로 서로에게 건네는 내면의 삶을 제대로 표현하지도 못하는 어설픈 보고서 따위가 아닌, 풍요롭고 심오하고 질감이 살아 있는 산문을 직조할 수 있게 된다고들 했다. 사랑의 약속 하나만 있으면 우리는 얼마든지 진정성 있는 경험을 찾아 저 바깥으로 고개를 돌려 이런저런 경고에 시달려야 하는 감시관할구역을 떠나는 꿈을 꿀 수 있었다. 심지어 확실한 결혼 약속 같은 것 없이도 거침없이 낭만적 열정에, 그러니까 사랑에 풍덩 빠질 때에만 경험을 얻어낼 수 있었다. - P37

감각하는 인간이면서도 자기 내면과 대화할 줄 모르고 언어가 없어서 기쁨을 잃은 본연의 자아에 접근할 길도 막혀버린 그의 머릿속엔 혼돈만이 가득하다. (이 모든 것 안에 나는 어디 있나?) - P39

작가는 폴을 통해 육체나 영혼에 정확히 얼마나 헌신해야 하는지를 탐문함으로써 아들과 연인에 근본적으로 깔린 문제를 다룬다. 나는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작품에 깔린 진짜 문제를 깨달았다. 어떻게 해야 안에서 밖으로 내면을 외재화하며 자아를 구축할까. 그것이 문제였다. - P44

사실이 그러했다. 영혼을 기형으로 일그러뜨리는 대상을 앞에 두고 기분 나빠하면서도 침착하게 대처한다는 건 어중이떠중이의 도덕률이다. 격렬한 분노로 맞서 싸우는것이야말로 혁명적 변화를 이끌어낼 길이다.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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