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늙는다는 건 고약한 일이야. - P73

야생초들과 그가 아는 모든 것, 그 모든 것이 이 세상에서 그가 속한 자리다. 그의 것이다, 언덕, 보트하우스, 해변의 돌들, 그 전부가, 그런데 그것들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것들은 마치 소리처럼, 그렇다 그 안의 소리처럼 그의 일부로 그 안에 머물 것이었다. 요한네스는 손을 들어 눈을 비비고 다시 바라본다. 모든 것이 아스라이 멀어져가는 것을, 하늘 저 뒤편에서, 사방에서, 돌 하나하나가, 보트 한 척 한 척이 그에게서 희미하게 멀어져가고 그는 이제 더이상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오늘은 모든 것이 과거 어느 때와도 다르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대체 무슨 일일까? - P74

바다가 더이상 자네를 원하지 않는구먼, 그가 말한다 - P81

그래도 닥칠 일은 닥치는 법이야, 그가 말한다 사람이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 언젠가는 우리 모두 차례가 오는걸, 그가 말한다 - P124

자네 삶과의 연결을 끊어야 하니 뭔가는 해야 했지, 페테르가 말한다 - P130

우리가 가는 곳은 어떤 장소가 아니야 그래서 이름도 없지, 페테르가 말한다 - P131

우리가 가는 곳에는 말이란 게 없다네, 페테르가 말한다 - P131

우리가 가는 곳엔 몸이란 게 없다네, 그러니 아플 것도 없지,
페테르가 말한다 하지만 영혼은, 영혼은 아프지 않단 말인가? 요한네스가 묻는다 - P131

우리가 가는 그곳에는 너도 나도 없다네, 페테르가 말한다 좋은가, 그곳은? 요한네스가 묻는다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어, 하지만 거대하고 고요하고 잔잔히 떨리며 빛이 나지, 환하기도 해, 하지만 이런 말은 별로 도움이 안 될 걸세, 페테르가 말한다 - P132

자네가 사랑하는 건 거기 다 있다네, 사랑하지 않는 건 없고 말이야, 페테르가 말한다 - P133

그리고 페테르와 그는 그 자신이면서 동시에 아니기도 하다. 모든 것이 하나이며 서로 다르고, 하나이면서 정확히 바로 그 자신이기도 하다. 저마다 다르면서 차이가 없고 모든 것이 고요하다 -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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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우리 몸에 눈꺼풀과 입술이 있다는 건.
그것들이 때로 밖에서 닫히거나.
안에서부터 단단히 걸어잠길 수 있다는 건. - P161

눈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침묵이라면, 비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끝없이 긴 문장들인지도 모른다. -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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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츰 그의 얼굴이 그녀에게 낯익은 것이 되었다. 그의 평범한 이목구비와 표정과 체구와 자세가, 고유한 이목구비와 표정과 체구와 자세가 되었다. - P92

말을 잃고 나자 그 모든 풍경이 조각조각의 선명한 파편이 되었다. 만화경 속에서 끝끝내 침묵하던, 무수한 차가운 꽃잎같이 일제히 무늬를 바꾸던 색종이들처럼. - P99

우리가 가진 가장 약하고 연하고 쓸쓸한 것, 바로 우리의 생명을 언젠가 물질의 세계에 반납할 때, 어떤 대가도 우리에게 돌아오지않을 거라고.
언젠가 그 순간이 나에게 찾아올 때, 내가 이끌고 온 모든 경험의기억을 나는 결코 아름다웠다고만은 기억할 수 없을 것 같다고.
그렇게 남루한 맥락에서 나는 플라톤을 이해한다고 믿고 있는 것이라고
그 역시 아름다운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라고
완전한 것은 영원히 없다는 사실을 적어도 이 세상에서는 - P120

넌 나에게 말했지.
병실의 벤젠 냄새 속에서 성장한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도 자신을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아름다움은 오직 강렬한 것, 생생한 힘이어야 한다고. - P122

삶이란 게 결코 견디는 일이 되어선 안 된다고.
여기가 아닌 다른 세계를 꿈꾸는 건 죄악이라고. - P123

어떻게 된 게, 이놈의 나라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하고 눈이 마주칠 때마다 웃어야 한다니. 이제 그만 안 웃고 살고 싶다. 그냥 내마음 가는 대로 살고 싶어. 집에서라도 나는 안 웃으련다. 내가 안 웃어도 화난 거 아니니까 오해 마라. -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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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자면, 학생들을 지켜보다보면 문득 부러워질 때가있어. 우리처럼 인생과 언어와 문화가 두동강나본 적 없는 사람들만 가질 수 있을 어떤 확고함 같은 것이 - P76

어떤 반응도 하지 않은 채 그 사람은 물끄러미 나를 건너다보았어. 그때 내가 느낀 이상한 절망을 너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 여자의 침묵에는 두려운 데가, 어딘가 지독한 데가 있었어. 오래전,
죽은 삐비의 몸을 하얀 가제수건에 싸려고 들어올렸을 때...... 우리가 얼어붙은 숟가락으로 파낸 작은 구덩이 속을 들여다보았을 때 느꼈던 정적 같은. 상상할 수 있겠니. 살아 있는 사람에게서 그런 침묵을 본 건 처음이었어. - P77

텅 빈 식탁 앞에서 지독히 맛없는 뮈슬리를 나눠 먹던 저녁에 고개를 수그린 채 너는 중얼거렸어. 형편없는 악기인 네 육체와, 이제 곧 불러야 할 노래 사이의 정적이 벼랑처럼 무섭게 느껴질 때가 있다고.
빨갛게 언 손이 시리다고 말하는 여섯 살 여자아이의 얼굴로, 아무것도 알 수 없어졌다는 듯 너는 나를 우두머니 건너다보았지. 그때 생각했어. 네 목소리론 네 얼굴을 만져줄 수 없는 모양이구나.
그러면 무엇이 너를 만져줄까. 아마 나는 절망을 느꼈던 것 같아. - P80

가끔 생각해.
혈육이란 얼마나 이상한 것인지.
얼마나 이상한 방식으로 서글픈 것인지. - P80

내가 눈이 완전히 먼다 해도 지혜를 얻지 못할 사람이라는 걸 너는 알지. 마음의 눈 따위가 결코 떠지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혼란스러운 수많은 기억들, 예민한 감정들 속에서 길을 잃고 말 거라는걸. 타고난 그 어리석음 속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걸. 무엇을 기다리는지 모르면서, 다만 끈질기게 - P83

그녀는 그 단어들을 알지만, 동시에 알지 못한다. 구역질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그 단어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지만, 관계를 맺을 수 없다. 그것들을 쓸 수 있지만, 쓸 수 없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다. 조심스럽게 숨을 내쉰다. 들이마시고 싶지 않다. 깊게 들이마신다. - P87

누군가에게 말을 걸 때 그가 짓는 특유의 표정이 있다. 겸손하게 상대의 동의를 구하는 눈길인데, 때로 겸손하다는 말로만은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슬픔 같은 것이 어려 있을 때가 있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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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에는 악과 고통이 있고, 거기 희생되는 무고한 사람들이 있다.
신이 선하지만 그것을 바로잡을 수 없다면 그는 무능한 존재이다.신이 선하지 않고 다만 전능하며 그것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그는 악한 존재이다.
신이 선하지도, 전능하지도 않다면 그를 신이라고 부를 수 없다.
그러므로 선하고 전능한 신이란 성립 불가능한 오류다. - P43

인간의 모든 고통과 후회, 집착과 슬픔과 나약함 들을 참과 거짓의 성근 그물코 사이로 빠져나가게 한 뒤 사금 한줌 같은 명제를 건져올리는 논증의 과정에는 늘 위태하고 석연찮은 데가 있기 마련입니다. 대담하게 오류들을 내던지며 한 발 한 발 좁다란 평균대 위를 나아가는 동안, 스스로 묻고 답한 명철한 문장들의 그물 사이로 시퍼런 물 같은 침묵이 일렁이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계속 묻고 답합니다. 두 눈은 침묵 속에, 시시각각 물처럼 차오르는 시퍼런 정적 속에 담가둔 채, 나는 당신에게 왜 그토록 어리석은 연인이었을까요. 당신에 대한 사랑은 어리석지 않았으나 내가 어리석었으므로, 그 어리석음이 사랑까지 어리석은 것으로 만든 걸까요. 나는 그만큼 어리석지는 않았지만, 사랑의 어리석은 속성이 내 어리석음을 일깨워 마침내 모든 것을 부숴버린 걸까요. - P44

세계는 그녀에게 당연스럽게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캄캄한 암흑 속에서 수많은 변수들이 만나 우연히 허락된 가능성, 아슬아슬하게 잠시 부풀어오른 얇은 거품일 뿐이었다. - P52

말할 수 있었을 때, 이따금 그녀는 말하는 대신 물끄러미 상대를 바라보았다. 말하려는 내용을 시선으로 완전하게 번역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처럼. 말 대신 눈으로 인사하고, 말 대신 눈으로 감사를 표하고, 말 대신 눈으로 미안해했다. 시선만큼 즉각적이고 직관적인 접촉의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녀는 느꼈다. 접촉하지 않으면서 접촉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 P55

오래전에 끓어올랐던 증오는 끓어오른 채 그 자리에 멈춰 있고,
오래전에 부풀어올랐던 고통은 부풀어오른 채 더이상 수포가 터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물지 않았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 P62

말로 열리는 통로가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들어갔다는 것을, 이대로 가면 아이를 영영 잃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알았다. 알면 알수록 통로는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들어갔다. 간절히 구할수록 그것을 거꾸로 행하는 신이 있는 것처럼. 신음이 나오지 않았으므로 그녀는 더 고요해졌다. 피도 고름도 눈에서 흐르지 않았다.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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