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와도 충돌하지 않으면서 누구와도 친하지 않았다. 감정노동 없이 만날 수 있는 사람, 흔히 ‘친구‘라 부르는 관계를 맺지 않았다. 인간의 보편적 욕구라는 친밀한 접촉은 오직 승주에게만 허용됐다. - P41
나는 일찍이 중학생 시절에 패기를 폐기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패기란 위험을 수용하는 범위와 동의어였다. 위험이란 생존을 압박하는 무엇이며, 내겐 그 ‘무엇‘을 품고 살 이유가 없었다. 태어난 것 자체가 위험인 인생에 뭘 더 얹겠다고....... - P42
나는 뒤늦게야 알게 되었다. 모든 것을 잃는 순간에 인간의 무의식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 적극적으로 자신을 놔버리는 것이다. - P44
나를 집안에 가둔 건 승주의 죽음으로 인한 죄책감이나 슬픔이 아니었다. 삶의 불운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좌절감도 아니었다. 불공평한 운명에 대한 분노 역시 아니었다. 그런 건 살고 싶어 할 때에나 생기는감정이었다. 살려는 마음이 사라지면 평화가 온다. - P45
아무것도 하지 않는 평화, 아무 생각도 없는 평화, 아무 감정도 일지 않는 평화. 새로운 평화주의 자아는 내게 밖으로 나가라는 훈계를 하지 않았다. 집 안에 갇힌 나는 한없이 평화로웠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술에서 막 깨어난 아침만 빼고. - P45
그 새벽 이래로 나는 삶에 대해 희망을 품지 않았다. 내게 희망이란, 실체 없이 의미만 수십 개인 사기꾼의 언어가 되었다. 절망의 강도를 드러내는 표지기, 여섯 시간이면 약효가 사라지는 타이레놀, 반드시 그리되리라 믿고 싶은 자기충족적 계시, 그 밖에 자기기만을 의미하는 모든 단어. - P52
살다 보면 불판을 갈아야 할 때가 있는 법이야.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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