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라이어는 산들바람에 몸을 숙이는 꽃을 보면 살아 있는 게 기쁘구나.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가 있지? - P19

당시 내 양면성은 극에 달해 있었다. 그러니까 밖으로 보이는 모습과 내면의 모습이 달랐다. 겉모습은 가짜이고 내면이 진짜였다. 그때도 겉으로는 겸손과 고마움을 담아 기쁨의 탄성을 내질렀지만, 속으로는 내 마음에서 그 시를 한 줄 한 줄, 단어 하나하나 남김없이 모두 지워버리겠다고 맹세했다. - P20

그저 한 걸음이었지만 나에게는 나 자신도 인식하지 못했던 어떤 것이 저지당한 느낌이었다. - P20

봄이 시작된다는 그날 세찬 눈보라가 찾아왔고, 그날 하루에만 겨우내 왔던 눈보다 더 많은 눈이 내렸다. 머라이어는 나를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늘 이렇다니까." 그렇게 말했는데 아는 사람에게 막 배신이라도 당한 투였다. 난 웃어주었지만, 사실은 정말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날씨가 마음을 바꾸었다고, 날씨가 자기 기대에 어긋났다고 비참한 기분에 빠질 수 있지? 사람이 어떻게 그렇지? - P21

한 곳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남자에게 매맞는 여자아이가 있고, 다른 한 곳에는 눈에 보이는 남자에게 목이 베이는 여자아이가 있구나. 이렇게 넓고 넓은 세상인데 어째서 내 인생에는 선택지가 고작 그 둘뿐이지? - P22

의심을 가질 필요가 없었으므로 확신을 가져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녀에게는 늘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나니까 일어났으면 하는 일이 일어나니까. 그래서 난 다시 생각했다.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가 있지? - P26

머라이어에게는 좋은 향기가 났다. 좋은 향기, 바로 그거였다. 그리고 난 생각했다. 바로 그게 머라이어의 문제라고. 좋은 향기가 난다는 것. 나로 말하자면 내게서 진한 냄새가 났으면 좋겠고, 그게 불쾌하건 말건 개의치 않는다는 것을 그때 이미 깨달았기 때문이다. - P27

"아줌마는 내가 열아홉이 될 때까지 실제로 보지도 못할 꽃을 노래한 긴 시를 열 살의 나이에 암기해야 했다는 사실을 알기나 해요?" - P28

그녀가 아름다운 꽃을 보는 그곳에서 나는 비통함과 원한만을 본다는 사실은 어떻게 해도 달라질 수 없었다. 우리가 그 장면을 똑같이 보고 함께 눈물을 흘릴 수도 있겠지만, 그 눈물의 맛은 다를 것이었다.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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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경험한 모든 일-승강기를 타고 아파트에 들어서고 냉장고에 넣어둔 묵은 음식을 먹는 일-이 얼마나 멋진지 그런 일에 익숙해지고 아주 좋아하게 될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처음에는 워낙 새로워서 입꼬리를 내린 채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 P10

내 피부색이 부드러운 천으로 한참 문지른 견과류의 갈색이라든가 내 이름이 뭔지 아는 것처럼 늘 알았고, 나로선 아주 당연했는데, ‘햇볕이 내리쬐면 공기가 따뜻하다‘라는 것이 사실이 아니었다. 나는 이제 열대지방에 있지 않았고, 그 깨달음이 바짝 말라붙은 땅 위로 물줄기가 흐르듯 내 삶으로 흘러들어와 두 개의 강둑을 만들었다. 한쪽 강둑은 나의 과거였다. 워낙 빤하고 익숙해서, 당시의불행조차 지금 떠올리니 행복한 마음이 들었다. 다른 하나는 나의 미래였다. 텅 빈 잿빛 공간. 비가 내리고 배 한 척 눈에 띄지 않는, 구름이 잔뜩 낀 바다 풍경이었다. 이제 내가 있는 곳은 열대지방이 아니었고, 몸의 거죽도 속도 다 추웠다. 그런 감각에 휩싸인 것은 처음이었다. - P11

다들 어찌나 친절하던지, 나더러 한 가족으로 생각하고 편하게 지내라고 했다. 그 말은 진심인 것 같았다. 진짜 가족에게 그런 말을 하는 법은 없으니까. 가족이란 결국 내 삶의 목덜미에 맷돌처럼 매달린 사람들 아니던가? - P12

아이들이 없을 때면 내 책을 보고 저녁에는 학교에 갔다. 난 불행했다.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고향과 나 사이에는 대양이 가로놓여 있었는데, 대양이 아니라 한 잔밖에 안 되는 물이라 한들 뭐가 달랐을까? 돌아갈 수는 없었다. - P14

그들에게 내 꿈 이야기를 들려준 것은 내가 그들을 받아들였다는것을 알려주고 싶어서였다. 내 꿈에는 내게 아주 중요한 사람들만 나오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걸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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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내 삶을 통제하고 있는 살인자에게 분노가 치밀었다. 어떤 식으로도 넘어설 수 없는 골짜기 같은 두려움에 절망을 느꼈다. - P437

인간관계란 상호 반응의 결과물이다. 내가 딱밤을 때리면 저쪽에서도 최소한 딱밤이 온다. - P459

"삶이 소중한 건 언젠가는 끝나기 때문이야." - P491

견디고 맞서고 이겨내려는 욕망이었다. 나는 이 욕망에 야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는 어쩌면 신이 인간 본성에 부여한 특별한 성질일지도 몰랐다. 스스로 봉인을 풀고 깨어나야 한다는 점에서 자기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요소라는 점에서 어떠한 운명의 설계로도 변질시킬 수 없는 항구적 기질이라는 점에서. - P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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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감당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제한도 제약도 없는 완벽한 자유란 없다. 자유란 적응하는 것, 즉 우리가 원하는 대로 만든 환경이 아닌 이미 존재하는 환경에서 우리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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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를 학자 특유의 위엄 있는 옷차림을 한 모습으로만 상상한다. 그러나 그들도 여느 평범한 이들처럼 친구들과 웃으며 담소를 나누는 순수한 사람들이었다. 플라톤은 《법률》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을 기꺼이 즐기면서 집필했고, 그렇게 자신들의 저작을 완성했다. 그들의 삶에서 그 일은 가장 철학자답지 않으며 가장 진지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들은 단순하고 평온하게 생활할 때 오히려 가장 철학자다웠다. 정치에 관한 그들의 저술 활동은 광인들의 병원과도 같은 이 혼란스러운 세상을 통제하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파스칼, 《팡세>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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