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시 노동자 투쟁
많은 농민들은 도시 노동자의 불안과 동요를 들었다. 어떤 농민은 중요한 도시나 공장에서 경찰 공무원으로부터, 지방 반란이라고 부르는 봉기를 보았다. 다른 농민은 여기에 참가해서 관리로부터 농촌으로 쫓겨난 노동자를 알고 있다. 또 다른 농민은 노동자 투쟁에 대한 노동자 유인물과 소책자를 손에 넣었다. 어떤 농민은 다만 도시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 경험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만 들었다. 이전에는 학생들만이 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현재에는 모든 대도시에서도 수 많은 노동자들이 일어나고 있다. 노동자들은 가장 부지런히 노동자들의 주인, 공장주, 자본가들과 싸운다. 노동자 파업을 일으키고, 공장에서 모두 일제히 일을 쉬면서 임금을 더 달라고 요구하고, 하루 10시간이 아니라, 8시간만 노동시키라고 요구 한다. 노동자는 생활 개선을 요구한다. 노동자들은 작업장이 더 잘 설비되고, 기계에 노동자를 보호하는 특수 장치를 설치해서 산업 재해를 예방하고, 노동자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고, 병자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노동자 살림집은 강아지 굴이 아닌, 사람이 충분히 살 수 있는 집이 되어야만 한다고 희망한다.
그러나 경찰은 노동자 투쟁에 간섭한다. 경찰은 노동자를 체포하고, 노동자들을 감옥에다 집어넣고는, 고향이나 시베리아, 저 멀리까지 쫓아버린다. 정부는 법률로부터 노동자 파업과 집회를 금지시킨다. 노동자는 관리나 정부와 투쟁한다. 노동자들은 말한다. 수 백만 노동 대중은 이미 충분히 참아왔고, 자기 자신도 가난뱅이인 채로 지내면서, 부자를 위해 실컷 벌었고, 실컷 착취시켜 왔다고. 그래서 모든 노동자를 일대 노동 동맹(노동당)에 단결시켜서 공동으로, 보다 좋은 생활을 쟁취하고자 한다. 새롭고 보다 좋은 사회 조직을 쟁취하고자 한다. 새롭고 보다 좋은 사회에서는 부자도 가난뱅이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노동에 참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 움큼이나 가진 부자들이 아니라, 노동하는 모든 사람들이 공동 노동에 따른 성과를 차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기계와 기타 설비에 따른 개선은 모든 사람들의 노동을 쉽게 하려는 까닭이지, 수 많은 민중을 희생시켜, 몇몇 사람을 부자로 만들기 위함이 아니다.
새롭고 보다 좋은 사회는 사회주의 사회라고 불리우며, 사회에 대한 학설을 사회주의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보다는 좋은 사회를 건설하고자 싸우는 노동 동맹은 사회민주당이라고 불리운다. 이런 정당은 러시아와 터키를 제외하고는, 모든 국가에서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으며, 또 우리나라 노동자도 소양을 갖춘 사람으로부터 성립된 사회주의자와 공동해서, 사회민주노동당이라고 불리우는 정당을 만들어냈다. 정부는 사회민주노동당을 박해한다. 그러나 당은 모든 탄압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기관지와 소책자를 발행하고, 비밀 동맹을 만들기까지 해서, 은밀하게 존재한다. 그리고 노동자는 비밀 모임을 열 뿐만이 아니라, 떼를 지어, 거리로 나타나서 '하루 8시간 노동 만세!', '해방 만세!', '사회주의 만세!'라고 쓴 깃발을 휘날린다. 정부는 이런 까닭에도 기를 쓰고, 노동자를 박해한다. 정부는 그들을 총으로 다스리고자, 군대까지 움직인다. 군대는 야로슬라블, 페테르스부르크, 리가, 돈 강가 로스토프, 여러 곳에서 노동자를 쏴 죽였다. 그러나 노동자는 더욱 굴복하지도 않는다. 노동자 투쟁은 이어진다. 노동자는 말한다.
'어떠한 박해도, 감옥도, 추방도, 주검도, 두렵하게 하지는 못하리. 행동은 정당하다. 수천만, 수억 민중을 압제와 가난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싸운다. 노동자는 더욱 자신을 자각해간다. 사회민주주의 수는 모든 국가에서도 재빠르게 늘어간다. 어떠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이겨낸다.'
가난한 농민 여러분에게, 사회민주주의자란 과연 어떤 사람인가.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무엇을 바라는가. 민중을 위한 행복을 쟁취하고자 하는 사회민주주의자를 원조하고자, 농촌에서도 어떻게 행동해야만 하는가를 똑똑히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2. 사회민주주의자는 무엇을 요구하는가.
사회민주주의자는 무엇보다 먼저 정치적 자유를 얻고자 노력한다. 정치적 자유는 새롭고 보다 좋은 사회주의 사회 조직 투쟁에서도 모든 노동자를 널리 공공연하게 단결하고자 필요하다. 먼저 농민 해방과 농노제를 비교해보자. 농노제 아래에서 농민은 지주 허락 없이는 결혼을 못했으나, 현재에는 아무 허락 없이도 자유롭게 결혼할 수 있다. 농노제 아래에서는 농민 촌장이 지정한 날에는 자기 주인을 위해 억지로 일하지 않으면 안 됐다. 현재에는 어떤 주인 밑에서든 어느 날에 얼마만큼 품삯으로 일할까를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다. 농노제 아래에서 농민은 주인 허락 없이 마을에서 다른 데로 나갈 수도 없었다. 현재에는 공동체에서 허락하고 세금이 밀린 게 없고, 여행권을 받아 도지사, 지방 경찰 서장이 이사하기를 금하지 않는다면, 어디로든 자유롭게 갈 수 있다. 어디로든지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는 완전한 자유, 곧 이동에 따른 완전한 자유를 아직까지 농민은 갖지 못하고 있고, 여전히 절반은 농노적 상태에 있다는 걸 의미한다. 무엇 때문에 농민이 절반은 농노적 상태에 놓여 있는지 또는 어떻게 그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지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겠다.
농노제 아래에서 농민은 주인 허락 없이는 재산을 가질 수 없었고, 토지를 살 수도 없었다. 현재 농민은 재산을 소유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공동체에서 나가는 완전한 자유, 자기 토지를 마음대로 처분하는 완전한 자유는 현재에도 갖고 있지는 못하다. 농노제 아래에서 농민은 지주에게 체형도 받았다. 농민은 비록 체형에서 해방되지 못했지만, 자기 지주에게 벌 받는 일은 없다. 여기서 자유란 시민적 자유, 가정 상 자유, 개인 상 자유, 재산 상 자유라고 불리운다. 농민과 노동자는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자신의 가정 생활을 해나가고, 개인적인 일을 하고, 자기 노동을 처리하고 자기 재산을 처분하는 자유를 가진다. 그러나 국내 노동자도, 모든 인민도 자기들의 일반 인민 문제를 처리할 자유를 갖고 있지는 않다. 모든 인민은 농민이 지주 밑에 매여 있으며 관리 아래에서도 매우 예속적이다. 민중은 관리를 택할 권리도 가지지 못하고, 국가 전체를 위한 법률을 제정하는 대표자를 뽑을 선거권조차 갖고 있지 않다. 인민은 국가적 문제를 의논하고자, 회의를 열 권리조차 갖고 있지 않다. 동의 없이 위에서 군림하고 있는 관리는 오래 전부터 농민 동의 없이 촌장을 임명하듯이, 신문이나 서적 출판을 간섭한다. 국가 전체 문제에 대해서도 모든 사람 앞에서 모든 사람을 위해 말할 수도 없다. 농민이 지주 노예였듯이, 인민은 여전히 관리 노예로만 남아 있다. 농민이 농노제 아래에서는 시민적 자유를 갖지 못하듯이, 인민은 여전히 정치적 자유를 가지지 못한다. 정치적 자유란, 자신들의 일반 인민적·국가적 문제를 처리하는 인민 자유를 뜻한다. 정치적 자유란 국회에 자신들의 대표자를 선거하는 인민 권리를 의미한다. 모든 법률은 심의한 뒤 반포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한 모든 세금은 인민 자신이 선거한 의회에서만 결정되어야만 한다. 정치적 자유란 인민 자신이 모든 관리를 택하고, 모든 국가적 문제를 심의하고자, 집회를 열고 아무런 허가도 없이 마음대로 신문이나 서적을 발행하는 권리를 의미한다. 모든 다른 유럽 인민은 오래 전부터 이미 정치적 자유를 쟁취했다. 오직 터키와 러시아에서만 인민은 술탄 군주의 정부와 차르 황제의 전제 정부 아래에서 정치적인 노예 상태에 있다. 황제에 따른 전제 정치란 황제로부터 무제한적인 전제 권력으로부터, 모든 법률을 제정하고, 앞잡이가 된 모든 관리를 임명하는 걸 말한다. 그러나 황제가 모든 법률, 모든 관리를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황제로부터 국가에서 무엇이 시행되고 있는가도 알 수 없다. 황제는 다만 많은 사람들의 가장 지위 높고, 가장 이름난 관리 의사를 승인할 뿐이다. 한 사람의 인간이 아무리 스스로를 희망해도, 큰 나라를 지배할 수는 없다. 황제가 국가를 통치하고 있는 게 아니라, 한 인간의 전제 정치에 대해서는 오직 말로만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다. 한줌 가장 돈 많고, 가장 이름난 관리들이 국가를 통치한다. 황제는 다만 이 소수 사람들에게 이로운 일만 알고 있다. 황제는 한줌 궁정 귀족 의사에 반대되는 일에는 무엇도 할 수 없다. 황제는 자신이 지주고, 귀족이다. 황제는 어릴 때부터 오직 이름난 사람들 사이에서만 생활한다. 그들은 차르를 교육하고, 교도한다. 전 인민에 대해 황제는 오직 유명한 귀족, 돈 많은 지주, 궁정에 가까운 가장 돈 많은 상인 가운데 소수가 아는 사실만 안다. 어느 군청에서도 여러분은 황제의 초상을 그린 그림을 볼 수 있다. 황제는 즉위식에 참석한 마을 노인들에게,
'귀족 회장 말을 잘 들어라'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니콜라이 2세도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곧 황제 자신이 귀족 원조를 얻지 않고는, 귀족 중개를 거치지 않고는 국가를 다스릴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있다. 농민은 귀족에게 순종하라고 말하는 황제 말을 머릿 속에 새겨두지 않으면 안 된다. 황제 지배를 가장 좋은 지배같이 꾸미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인민에게 어떤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다른 국가에서는 선거 제도가 시행된다. 거기서는 부자들이 뽑힌다. 그런데 부자들은 불공평하게 통치하고, 가난한 사람을 괴롭힌다. 그러나 선거 제도가 시행되지 않고, 전제 군주 황제가 모든 일을 지배한다. 황제는 부자나 가난한 사람보다도 위대하다. 황제는 모든 가난한 사람에게도 부자에게도 똑같이 공정하다.
이런 언사는 거짓말이다. 누구나 제도가 공정하다는 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고 있다. 누구라도, 한낱 노동자, 날품팔이 농민이라도 '원로원'에 들어갈 수 있는지쯤은 알고 있다. 그런데 모든 다른 유럽 제국에서는 공장 노동자와 호미를 맨 농업 노동자가 국회로 들어갔다. 그래서 모든 인민 앞에서 노동자의 괴로운 생활에 대해 자유롭게 말하고, 노동자의 보다 좋은 생할을 위해 결합과 투쟁을 권고한다. 그러나 아무도 국민 대표의 연설을 중지시킬 수 없고, 경관이더라도 그들에게 손을 댈 수 없다. 대표자 제도조차 없다. 그저 부자나 유명한 사람들이 통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 가운데 가장 악질분자들이 통치한다. 궁정에서 보다 교묘하게 비방하고, 보다 재치 있게 알랑거리고, 남 흉을 보고, 굽실거리고, 아첨하는 무리들이 정치를 쥔다. 정치는 비밀리에 진행되어, 인민은 어떤 법률이 준비되는지, 어떤 전쟁이 일어나는지, 어떤 세금이 부과되는지, 어떤 관리가 무슨 까닭으로 포상을 받는지, 누가 바뀌는지 알 수 없고, 알 도리도 없다.
국내처럼 관리들이 많은 국가도 없다. 관리들은 어두운 수풀같이 투표권 없는 인민 위에 군림한다. 한낱 노동자는 결코 수풀에 다다를 수 없고, 결코 진리에 다다를 수도 없다. 수뢰·약탈·폭압이라는 죄목으로 관리에게 고발해도, 억울한 소송은 하나도 발표되지도 않는다. 곧 윗사람들이 주책이 없는 까닭에, 억울한 하소연이 물거품이 되고 만다. 한 사람 소리는 결코 전 국민 귀에 미치지도 못하고, 어두운 밀림 속으로 사라지고는, 경찰 고문실 안에서 질식해버리고 만다. 인민으로부터 선출되지도 아니하고, 인민에게 책임 질 의무도 없는 관리 떼는 두꺼운 거미줄을 펼쳐놓는다. 사람들은 파리 같이 둥우리 속에서 손발을 벌벌 떤다. 황제의 전제 정치는 관리의 전제 정치다. 황제의 전제 정치는 인민 관리로부터, 특히 경찰로부터 농노적 예속이다. 황제의 전제 정치는 경찰의 전제 정치이다. 이런 이유로 노동자는 거리로 나와, 그들의 깃발에 '전제 정치 타도하라!', '정치적 자유 만세!'라고 쓴다.
이런 까닭에 수천만 가난한 농민 대중이 도시 노동자의 전투적 외침을 지지하고, 공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도시 노동자와 같이 시골 노동자와 무산 농민은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적의 위협이나, 폭압에도 결코 놀라지 않으며, 첫 패배에도 마음 쓰지 말고, 모든 인민 자유 획득에 따른 결정적 투쟁에 나서서, 먼저 인민 대표자 소집을 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민 자신으로 하여금, 전 국가에서 이들의 의원을 선출시키자. 그리고 의원으로 하여금 최고 회의를 만들도록 하라. 그래서 회의에서 국가에서 대의 제도를 창립하고, 관리와 경관에 대한 농노적 예속으로부터, 인민을 해방하고, 인민에게 언론·집회·결사 자유를 보장하자.
사회민주주의자는 먼저 이상을 요구한다. 최초 요구인 정치적 자유에 따른 요구이다. 정치적 자유, 국회 선거에 따른 자유, 집회에 따른 자유, 출판에 따른 자유가 고통 속에 있는 인민을 가난과 압박으로부터 곧바로 해방시키는 건 아님을 알고 있다. 도시와 농촌에 따른 가난한 사람을 곧바로 부자를 위한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수단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 노동 인민은 자신 이외에 누구에게도 도움 받을 수 없다. 노동자, 스스로 자신을 해방하지 않으면, 아무도 그를 가난에서 해방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을 해방하기 위해서 노동자는 모든 지방에서, 전 국가에서 하나의 동맹으로, 하나의 당으로 결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전제적인 경찰 정부가 일체의 집회, 일체의 노동 신문, 노동자 대표에 따른 모든 선거를 금지한다면, 수백만 노동자는 함께 결합할 수 없다. 결합하기 위해서는 모든 동맹을 결성할 권리를 가져야만 하고, 정치적 자유를 지녀야만 한다.
정치적 자유가 노동 인민을 곧바로 가난으로부터 해방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노동자에게는 가난으로부터 싸우는 무기를 준다. 노동자 자신의 단결 이외에, 가난과 싸울 다른 수단은 없고, 또 있을 수도 없다. 정치적 자유가 없다면 수 많은 인민이 단결할 수도 없다. 국민이 제 손으로 정치적 자유를 쟁취한 유럽, 여러 국가에서 노동자는 벌써 오래 전부터 단결해갔다. 토지도, 재산도 갖지 못하고는 일생을 다른 사람 아래에서 고용살이를 하고, 지내는 노동자를 유럽, 모든 곳에서는 프롤레타리아라고 부른다. 몇년 전에 노동하는 인민 결합을 촉구하는 부르짖음이 있었다.
"만국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이 말은 최근에도, 전 세계에서 널리 퍼졌다. 이 말은 수 많은 노동자 집회에서도 거듭 부르짖어 왔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 말을 모든 국어로 씌어진 수 많은 사회민주주의 소책자와 신문 가운데서 찾을 수 있다. 물론 수 많은 노동자들을 하나의 동맹, 하나의 정당으로 연합한다는 건 오랜 시간, 인내심, 꾸준함, 용기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쉽지 않은 일이다. 노동자는 가난 때문에 지치고, 자본가나 지주에 대한 끊임 없는 고역으로 우둔해져간다. 노동자들은 왜 자신들이 영구적으로 가난하고, 어떻게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할 시간조차 거의 갖지도 못한다. 노동자 단결은 여러 가지로도 방해된다. 곧 정치적 자유가 없는 국가에서는 직접적인 광포한 탄압 또는 사회주의 학설을 선전하는 노동자를 일터에 고용하기를 거절한다든지, 또는 최후에는 기만이나, 매수로부터 방해한다. 그러나 어떤 폭압도, 어떤 박해도, 전 노동 대중을 가난과 압박으로부터 해방하는 위대한 사업을 위해 싸우는 노동자·무산자 운동을 막아낼 수는 없다. 사회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노동자 수효는 끊임 없이 늘어간다.
이웃 나라 독일에서는 대의 제도가 갖춰졌다. 이전에는 독일에도 무제한적인 절대·전제적 군주 정치가 존재했다. 그런데 독일인은 무력으로 전제 정치를 타파하고, 자신의 손으로 정치적 자유를 쟁취했다. 독일에서는 법률이 한줌 관리로부터 발표된 게 아니라, 국민 대표 집회에서나, 의회에서 또는 제국 의회로부터 제정됐다. 성년이 된 모든 남자는 의회에서 대표를 선거한다. 그런 까닭에 사회민주당원에게 얼마나 투표됐는가를 계산할 수 있다. 1887년에는 전체 투표 1/10은 사회민주당원에게 투표됐다. 독일 제국의회로부터 1891년 시행된 사회민주당 투표 수는 약 3배로 늘었다. 전체 투표 수 1/4 이상이 이미 사회민주당에게 던져진 셈이었다. 200만 이상 성인 남자는 사회민주당 대의원을 의회로 보냈다. 아직 독일에서는 사회주의가 농촌 노동자들에게 널리 보급되지는 못했으나, 농촌 지방으로 확대된다. 그래서 날품팔이와 무산 빈농 대중이 도시 형제와 서로 손을 잡으며, 독일 노동자는 승리를 얻고, 노동자의 가난도 압박도 존재하지 않는 질서를 세울 수 있다.
사회 질서 아래에서, 왜 거대한 국민 대중에 따른 가난이 생기는가를 똑바로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부유한 도시가 발달하고, 화려한 상점과 가옥이 건설되고, 철도가 부설되고, 공업과 농업에서 모든 기계에 따른 개선이 실시된다. 그런데 수백만 인민은 변함 없이 가난으로부터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오직 가족을 부양하고자, 자신의 일생을 바치고만 있다. 뿐만이 아니라, 실업자는 더욱 증가하고, 전혀 아무 일도 찾을 수 없는 사람들이 도시에서나, 농촌에서나, 더욱 더 증가해간다. 농촌에서는 굶주리고, 도시 실업자는 떠돌이와 룸펜 무리를 증가시키고는, 교외 오막살이나, 모스크바 피트로 시장에 있는 무서운 빈민굴이나, 지하실에서 짐승 같은 생활을 지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부는 더욱 늘어나고, 사치는 더욱 더 심해져만 가는데,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모든 부를 만들어 내는 수 많은 사람들은 정작 늘 가난에 시달린다. 무슨 까닭일까. 농민은 굶주린 채로 죽어가고, 노동자는 직업이 없어서 거리를 방황한다. 그런데도 상인들은 국내로부터 외국에다 수백만 푸드 밀을 수출한다. 상품을 둘 곳도 없으며, 팔 곳도 없어서 공장마저 쉰다. 도대체 무슨 까닭일까.
먼저 막대한 토지, 공장, 제작소, 기계, 건물, 기선 등이 소수 부자 사유로 있기 때문이다. 토지, 공장, 제작소에는 수 많은 인민들이 노동하지만, 그것은 또 수 많은 부자·지주·상인·공장주들에게 소속된다. 부자들을 위해 인민이 고용되어 품삯을 위해, 고작 빵부스러기를 위해 노동한다. 약간의 노동자 생활비 이상으로 만든 건 모드 부자 손으로 들어가고, 그들의 이윤, '수입'을 이룬다. 기계와 노동 개량으로부터, 모든 이익은 토지 소유자, 자본가 품 속으로 들어간다. 그들은 수 많은 부를 축적한다. 그러나 노동자에게는 이 부에서 아주 약간 남은 것만 주어진다. 노동하는 사람들은 노동하고자 한데 모인다. 규모가 큰 농장이나, 대공장에서는 수백 명 또는 수천 명 노동자들이 함께 모인다. 대단히 여러 가지, 기계를 사용해서 노동하기 때문에, 일의 능률도 더욱 높아진다. 한 사람 노동자는 예전에는 아무런 기계또 쓰지 않고 일하는 수십 명 노동자보다 훨씬 더 많은 걸 생산한다. 그러나 노동에 따른 능률성과 생산성을 이용하는 건, 모든 노동자들이 아니라, 다만 소수 대지주·상인·공장주뿐이다. 지주와 상인은 인민에게 일을 주고 빈민에게는 날품을 준다. 가까운 공장 또는 농장이 지방 농민을 부양한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노동자가 그의 노동으로부터 스스로 노동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부양한다. 그런데 지주 토지와 공장 또는 철도에서 일하는 걸 허락받는 대가로 노동자를 아주 약간 생활비를 받고 자신이 생산한 걸 모두 소유자에게 무료로 넘기고 있다. 곧 실제로 지주나 상인이 노동자에게 자신의 노동 대부분을 무료로 소비해서, 노동으로부터 모든 사람을 부양하고 있다.
더욱 상세하게 이야기해보자면, 모든 근대적 국가에서 인민의 가난은, 노동자가 판매를 위해 시장을 목표로 하고, 일체 물품을 만들기 때문에 생긴다. 공장주와 제조업자, 지주와 붕농은 판매를 하고, 돈을 받고자 여러 제조품을 생산하고, 가축을 기르고, 곡식을 심고 수확한다. 돈이 도처에서 주요한 힘이 된다. 인간 노동에서 모든 생산물을 돈과 교환된다. 필요한 건 무엇이든지 돈으로 살 수 있다. 곧 무산 대중으로 하여금, 돈 가진 사람을 위해 노동한다. 예전에는 토지가 주요한 힘이었다. 특히 농노제 아래에서 그러했다. 토지를 가진 사람은 힘과 권력을 가졌었다. 그러나 지금에는 돈, 곧 자본이 주요한 힘이 된다. 토지는 돈으로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 돈 없이는 토지를 충분히 이용할 수도 없다. 세금 내는 것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쟁기나 다른 기구를 살 수도 없으며, 가축과 의복, 다른 모든 도시의 상품도 살 수 없다. 거의 모든 지주들이 돈을 목적으로 은행에 자기네 토지를 담보로 넣었다. 돈을 얻고자 정부는 전 세계 부자와 은행가에게 빚을 내고, 빚 때문에 1년에 수억 루블의 이자를 낸다. 돈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지금도 서로 무서운 싸움을 벌인다. 누구든지 더 싸게 사고, 더 비싸게 팔려고 애쓴다. 누구든지 남에게 뒤지지 않게 상품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팔고, 값을 내리고, 유리한 판매 시장 또는 유리한 주문을 다른 사람에게 숨기려고 애쓴다. 소자본가, 소장인, 소농민 등은 공통 싸움에서 돈 때문에 누구보다 더 곤란에 빠진다. 그들은 늘 돈 많은 상인이나 돈 많은 농민에게도 뒤떨어진다. 그들에게는 조그만 저축도 없다. 그날마다 먹고 산다. 재정 곤란이나, 불행한 일이 닥쳐올 때마다, 그들은 가정 집기를 전당포에다 잡히거나, 최후에는 아주 헐값으로다가 밭갈이에 쓰는 가축을 팔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로는 한 번 부농이나, 고리대금업자 손에 떨어지면 그뿐으로, 그 손에서 벗어나는 일은 매우 드물고, 대부분은 몰락해간다.
매년 수 많은 소농과 소수공업자가 그의 집을 다 버리고는 거의 무료 단체로 토지를 넘기고는 임금 노동자, 농업 노동자, 미숙련 노동자, 무산자가 되고 만다. 그런데 부자는 이 돈을 위해 투쟁에서부터 더욱 더 부자가 되고, 번창해간다. 부자는 수백만, 수억 루블을 은행에다 예금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돈뿐만이 아니라, 은행에 예금한 남의 돈으로도 이익을 본다. 소자본가는 은행이나 저축 은행에 예금한 수십 루블이나 수백 루블에 대해 1루블 당 3,4카페이카 이자를 받지만, 부자는 이 수십 루블의 돈으로부터 수백만 루블의 돈을 만들고, 수백만 루블의 돈으로부터 자기 거래를 확대해서, 1루블 당 10카페이카나 20카페이카씩 벌어들였다.
그러므로 금융업에서 지금 상태를 아래로부터 위까지 고치고는 사회주의 기구를 만들 때, 곧 대지주에게 그들의 토지를, 공장주에게서 그들의 공장과 경영을, 은행주에게 그들의 화폐 자본을 몰수할 때, 그들의 사유 재산을 폐기해서, 전국 노동 민중 손으로 놓여지게 될 때, 비로소 민중의 가난은 끝날 수 있다고,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는 말한다. 노동자 노동은 남의 노동으로 사는 돈 많은 사람이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노동자 자신과 그들이 뽑은 대표자들이 처리한다. 공동 노동에 따른 결과와 모든 개선 및 기계 장점을 모든 노동자도 이용한다. 부도 더욱 빠르게 증가하는 데, 왜냐하면, 노동자가 스스로를 위해 자본가를 위할 때보다, 더 열심히 노동할 수 있고, 노동일을 더욱 줄이고, 노동자 생계가 더욱 좋아져 모든 생활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융 상태를 개선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오랫동안 꾸준한 싸움이 필요하다. 모든 부자, 모든 자본가, 모든 부르주아지는 모든 힘을 다해, 재산을 지킨다. 모든 유산 계급 및 부자 계급을 수호하고자, 관리와 군대가 일어선다. 정부 자신이 유산 계급 손에 쥐어져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남의 노동으로 사는 모든 사람에게 대항하는 싸움에서 한 사람같이 단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노동자는 자신과 모든 무산자를 하나의 노동 계급으로, 하나의 무산 계급으로, 단결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싸움은 노동 계급에게는 결코 쉽지도 않다. 반드시 노동자 승리로 끝난다. 왜냐하면, 부르주아 혹은 남의 노동으로 사는 사람들은 모든 민중에게는 매우 작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 계급은 모든 민중 절대 다수다. 노동자 대 자본가는 다수 대 소수를 말한다. 노동자는 위대한 투쟁을 위해 하나의 사회민주노동당으로 연합해간다. 경찰 눈을 피하며, 비밀리에 연합하는 일이 아무리 곤란하더라도, 역시 연합은 공고히 되고 발전된다. 인민이 정치적 자유를 자기 손으로 쟁취할 때, 노동 계급을 연합하는 사업인 사회주의 사업은 독일 노동자 사이에서도 진행되고 있으며, 훨씬 더 빠르게 진행된다.
3. 부유와 가난, 농촌에서 재산 소유자와 노동자
사회민주주의자는 인민을 가난으로부터 해방하고자 모든 부유한 계급과 싸운다. 그런데 농촌에서 가난 또한 도시에 못지 않다. 농촌 가난이 얼마나 심각한지 일일이 말하지는 않겠다. 농촌에 거주해 본 일이 있는 모든 노동자와 농민은 농촌 가난·굶주림·거덜에 대해 대단히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농민은 왜 가난하고, 굶주리고, 거덜나고 있는가. 또 어떤 방법으로 궁핍으로부터 빠져나갈 수 있는가를 알지 못한다. 알기 위해서는 먼저 왜 도시나 농촌에 모든 궁핍과 빈곤이 생기는지를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무산 농민과 농촌 노동자는 도시 노동자와 단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건 알았다. 그러나 불충분하다. 더구나 농촌에서 어떤 사람들이 부자나 재산 소유자 쪽에 서고, 어떤 사람들이 노동자나 사회민주주의자 쪽에 서는가를 알아야만 된다. 지주에 못지않게 자본을 모으고, 남 노동으로 생활할 수 있는 농민이 얼마나 많은가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사실을 명백하게 구명하지 않으면, 빈곤에 대한 어떤 설명도 쓸모가 없게 된다. 농촌에서는 누가 서로 연합하고, 또 도시 노동자와 연합하는가. 연합이 확실한 동맹이 되고자, 지주 이외에 동료인 부농이 농민을 속이지 못하도록 하고자, 어떻게 할 수 있을지를 농촌 빈민은 잘 알지 못한다. 사실을 구명하고자, 지금 농촌 지주 힘은 어떠하고, 또 부농 힘은 어떠한가를 살펴봐야만 한다.
지주부터 보자면, 그들의 힘은 먼저 그들의 사유 토지에 따른 수량으로부터 판단할 수 있다. 특히 러시아 토지 전체 면적은 국유지를 제외하고는, 농민 분유지와 사유지를 합하면 약 2억 4000만 데샤티나에 달한다. 농민, 1000만 호 이상 수중에 있는 2억 4000만 데샤티나 가운데 1억 3000만 데샤티나 분유지가 포함됐다. 개인적 사유자 수중에서는, 50만 이하 가족 수중에는 1억 900만 데샤티나 토지가 있다. 소수점 이하를 떼버리고 계산해보면, 농민 한 가족에게는 13데샤티나밖에 안 되지만, 사유자 한 가족은 218데샤티니이다. 토지 분배에 따른 불공평은 훨씬 더 심각하다. 1억 900만 데샤티나에 따른 사유지 가운데 700만 데샤티나에 따른 왕궁 토지, 차르 황제 가족의 사유지가 있다. 황제는 그의 가족과 더불어 대지주 가운데 첫 번째를 차지한다. 황제는 러시아에서도 가장 큰 지주이다. 한 가족이 50만 농민 가족보다 더 많은 토지를 갖고 있다. 더욱이나, 교회와 수도원에는 약 600만 데샤티나 토지가 있다. 목회자들은 농민에게 무욕과 절제를 설교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정당한 방법과 부정한 방법으로부터, 막대한 토지를 손에 넣는다. 다음에 약 200만 데샤티나 토지는 도시와 상인 거주지 소유가 되어 있고, 같은 수량에 따른 토지가 각종 상공업 단체와 회사 소유로 된다. 9200만 데샤티나 토지인 91,605,845데샤티나지만, 끝자리 수는 떼어버리고, 50만 이하인 481,358데샤티나는 토지 소유자 가족에게 귀속됐다. 가족 수 절반은 모두 작은 토지 사유자다. 각자는 10데샤티나 이하 토지를 가진 데 불과하다. 토지를 전부 합해봐도, 100만 데샤티나 이하다. 그런데 1만 6000 세대 가족은 각각 1000데샤티나 이상 토지를 갖는다. 토지를 전부 합치면 6500만 데샤티나다. 얼마나 막대한 토지가 대지주 손 안에 집중됐는가는 1000데샤티나 이하 924데샤티나인 소수 가족이 각자 1만 데샤티나 이상 토지를 영유하고 있고, 그들 토지를 전부 합치면, 2700만 데샤티나에 달한다. 1천 세대 가족이 소유하고 있는 만큼 토지를 200만 세대 농민 가족이 소유한다. 수천 명 부자들이 이런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는 동안에 더 수 많은 인민이 가난하고, 굶주릴 수밖에는 없고, 또 영구적으로 가난하고, 굶주리게 되리라는 걸 깨닫게 된다. 황제 권력도, 정부 자신도 그때까지는 대지주에 따라 의도대로 일하리라는 걸 알 수 있다. 또한 빈농이 자신이 지주 계급과 꾸준하고, 필사적인 투쟁을 위해 단결해서, 하나의 계급으로 연합하기까지는 누구로부터 또 어디로부터도 원조를 기대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주의할 점은, 러시아에서는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교양 있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 수는 국가가 훨씬 많은 토지를 갖고 있다. 따라서 지주 계급에 대해 잘못된 견해를 갖고 있다. 같은 견해를 가진 충고자들은 농민에게 이미 현재에 러시아 영토, 곧 모든 토지 대부분은 국가에게 귀속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오류가 있으며, 그들로부터 러시아에서는 1억 5000만 데샤티나의 토지가 국고에 소속됐다는 말을 들었다. 실상도 그러했다. 그러나 그들은 1억 5000만 데샤티나가 거의 전부 극북 지방, 아르항겔스크, 베르호얀스크, 오브도르스크 지방 볼모지거나, 삼림이라는 점을 잊고 있다. 국고에는 경영 상 전혀 쓸데없는 토지는 400만 데샤티나 이하인데, 유용한 관유지, 특히 사마라 지방에서는 대단히 저렴한 값으로 부자에게 임대된다. 부자는 이런 토지를 수 천, 수 만 데샤티나씩 얻고는, 다시 농민에게 3배나 비싸게 빌려준다. 국고에 토지를 많이 가졌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농민에 대한 악질적인 충고자들이다. 실제로 많은 좋은 토지는 황제를 포함한 대토지 사유자 손에 있고, 대지주는 국고를 자기 수중에 장악하고 있다. 빈농인 결합하고, 결합으로부터 위력을 보이지 않는 한, 그때까지 국고는 늘 지주 계급의 충실한 하인으로 남아 있는다. 또 이전에는 오직 귀족만이 지주였다는 점을 잊어서도 안 된다. 물론 귀족은 지금도 많은 토지를 가지고 있다. 1877-1878년에는 11만 5000명 귀족이 7300만 데샤티나 토지를 가지고 있었다. 여전히 화폐 자본이 주요한 힘이 된다. 상인과 돈 많은 농민이 대단히 많은 토지를 구매한 1863-1892년, 30년 간에 귀족들은 6억 루블 이상 되는 금액의 토지를 잃었다고 추측된다. 곧 사는 토지보다 파는 토지 쪽이 더 많았다. 그런데도 상인과 유명한 시민은 2억 5000만 루블에 해당하는 상당한 액수의 토지를 얻었다. 농민, 카자흐족과 그 외 시골 백성은 3억 루블이나 되는 토지를 샀다. 매년 평균 러시아 전체 농민은 1000만 루블 상당으로 토지를 사유하고자 사들였다. 그러므로 여러 종류 농민들이 있다. 어떤 사람은 가난하고 굶주리고, 다른 사람은 돈을 많이 가진다. 부농은 지주 쪽으로 가까워지고, 노동자에 맞서 부자 쪽으로 간다. 이런 부농은 더욱 더 늘어만 간다. 도시 노동자와 결합하고자 하는 빈농은 이 점을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런 부농이 많이 있는지, 그들의 힘은 어느 정도인지, 이 힘과 싸우고자 어떤 동맹이 필요한가를 구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농민에 대한 악질적인 충고자에 대해 환기시켰는 데, 악질적인 충고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려고 든다.
'곧 농민은 이미 동맹을 가지고 있다. 동맹은 공동체다. 공동체는 큰 힘이다. 공동체로부터 단결은 농민을 긴밀하게 묶어놓았다. 공동체에 가입한 농민 조직에 따른 연합 및 동맹은 방대하다.'
정당하지도 않다. 꿈 같은 이야기이다. 선량한 사람이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역시 꿈 같은 이야기다. 이런 동화에 귀를 기울인다면, 빈농의 도시 노동자와 동맹이라는 사업을 파괴할 뿐이다. 개별적으로는 농촌 거주자로 하여금 주위를 살펴보게 하라. 과연 공동체의 단결, 혹은 공동체가 모든 부자, 곧 남의 노동으로부터 생활하고 있는 모든 사람과 투쟁을 위한 빈농 동맹과도 비슷한가. 아니다. 비슷하지도 않고, 또 비슷할 턱도 없다. 각 농촌에, 각 공동체에 많은 농업 노동자와 가난한 농민이 있고, 스스로 농업 노동자를 고용해서 영구하게 토지를 경작하는 부농도 있다. 부농은 힘이 있는 까닭에 같은 공동체 구성원이면서도 공동체를 지도한다. 그러나 과연 부농이 가입하고, 지도하고 있는 동맹이 꼭 필요하던가. 꼭 그렇지 않다. 부농과 투쟁하고자 동맹이 필요하다. 곧 공동체로부터 동맹은 전혀 소용없다. 자유의지 동맹, 도시 노동자와 단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아는 사람들만으로 이뤄진 동맹이 필요하다. 그러나 공동체는 자유의지 동맹이 아니고, 정부가 만든 동맹이다. 공동체는 부농을 위해 일하며, 서로 협력해서 부농과 투쟁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가입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 의사대로 공동체에 가입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부모가 토지에 살고 있고, 지주 아래로부터 노동하고 있기 때문이며, 자신들의 장관이 공동체에 명부를 두게 한 까닭이다. 빈농은 공동체에서 자유로이 나갈 수 없다. 경찰 통제로부터 다른 군에 명부를 둔 사람은 자유롭게 가입시키지도 않는다. 동맹을 위해서는 이 점이야말로, 절실하게 요구된다. 다른 사람의 노동으로부터 살고 있는 모든 사람과 투쟁을 위해 일하는 사람과 가난한 농민만으로 이뤄진 자유의사 동맹이 필요하다.
공동체가 힘이 된 시대는 이미 오래 전에 지나갔다. 그리고 그 시대는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농민 간 농업 노동자와 품삯을 벌고자, 전국에서 방랑하는 노동자가 거의 없던 시대에도, 부농이 거의 존재하지 않던 시대에도, 농노 소유자인 주인만이 모든 살마을 압박하고 있던 시대에도, 공동체는 힘이 됐다. 그러나 지금은 화폐가 주요한 힘이다. 돈을 위해 동일한 공동체 구성원들은 날쌘 짐승같이 서로 싸우기 바쁘다. 돈을 가지고 있던 농민들은 다른 지주보다도 더 심하게 자기 공동체 구성원을 압박하고, 약탈한다. 공동체 동맹이 필요한 게 아니라, 돈과 권력, 자본 권력에 크게 맞설 수 있는 동맹이, 여러 가지 단체에 소속하는 모든 농촌 노동자와 빈농 동맹, 지주와 부농에 대한 투쟁을 위해 도시 노동자와 모든 농촌 빈민 동맹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지주 힘을 이제는 알았다. 이번에는 돈 많은 농민은 얼마나 있는가. 그들의 힘은 또 어떠한가.
지주 힘에 대해서는 그들 소유지의 크기, 그들이 가진 토지의 수량으로부터 판단한다. 지주는 자유롭게 자기 토지를 처분하고, 자유롭게 그것을 사든지, 팔든지 한다. 그들의 힘은, 그들이 가진 토지의 수량으로부터 매우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다. 그런데 농민은 자유롭게 자기 토지를 처분할 권리를 가지지는 못했다. 자신들의 공동체에 얽매인, 절반 농노로, 크게 뒤떨어졌다. 돈 많은 농민 힘은 분유지 수량에 따라서만 판단할 건 아니다. 돈 많은 농민은 자신의 분유지로부터 돈이 많은 게 아니다. 영구적으로 자기 소유로 사거나, 임대차로부터 기한을 한정해서 사거나 한다. 그들은 지주로부터, 자기 동료인 농민으로부터, 토지를 내버리는 자로부터, 너무나 가난해서 분유지를 양도하는 자로부터 토지를 산다. 그러므로 가지고 있는 말의 수효도에 따라, 부농·중농·빈농을 구별하는 게 가장 확실하다. 말을 많이 가지고 있는 농민은 대부분 부농이다. 그가 많은 경작용 가축을 치고 있다면, 그가 많은 농경지를 가지고 있고, 분유지 이외 토지를 소유하고, 예금을 갖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유럽 쪽 러시아에서는 많은 말을 가진 농민이 얼마나 있을까. 물론 여기서는 어림수로만 짐작해서 설명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각 지방마다 매우 큰 차이가 있다. 가령 도회지 부근에는 몇 마리 말만 가진 부농도 자주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유리한 체소원예업에 종사하고, 어떤 사람은 말을 많이 기르지 않고, 소를 많이 쳐서 우유를 판다. 러시아에서는 토지로 이익을 보지 않고, 상업으로 이익을 보는 농민이 도처에 있다. 곧 버터 제조소, 밀 제분소 등 공장을 세운다. 농촌에 살고 있는 자는 누구나 자기 마을이나, 군에서 부농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빈농에게 있어 어떤 자가 그의 동지고, 어떤 자가 그의 적인지를 보다 정확하기 알기 위해서는 부농이 얼마나 있고, 그들의 힘이 어떠한가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말의 숫자로는 부농이 많은가, 빈농이 많은가를 조사해 보자. 이미 러시아에서도 전체 농가 호수가 약 1000만 가구에 달한다. 그들이 갖고 있는 말의 총 수는 약 1500만 필이다. 14년 전에는, 17000만 필이었지만 감소됐다. 어림수로 계산해보면, 10가구 당 15필 말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적은 사람에게 말이 매우 많고, 대다수에게는 말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말을 갖지 못한 농민은 300만 이상이고, 약 350만 가구 농가는 1필의 말밖에는 없다. 모든 사람들은 완전히 몰락한 농민이거나, 무산 농민이다. 가난한 농민이라고 부를 수 있다. 1000만 가구 가운데 650만 가구를 차지한다. 곧 2/3에 상당한다. 경작용 가축 2필을 가진 중농이 있다. 중농은 약 200만 가구가 있고, 약 400만 필의 말을 갖고 있다. 그 다음으로는 2필 이상 경작용 가축을 갖고 있는 부농이 있다. 150만 가구이고, 750만 필의 말을 소유한다. 해당 사실로는 말의 절반이 대략 전체 1/6 가구 사람들에게도 있다는 걸 의미한다. 이 사실을 알고 나면, 부농의 힘에 대해 충분히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다. 수효 면에서나, 그들은 매우 적다. 여러 공동체와 군에서도, 그들은 100가구 당 10가구, 20가구 정도다. 그러나 소수 농가는 가장 부유하다. 그래서 그들은 전체로도 그 밖의 농민 전체가 소유하고 있는 수량과 동일한 말을 소유한다. 또 그들이 소유한 경작지도 모든 농민 경작지의 거의 절반이다. 농민은 자기 가족에게 필요한 수량보다 훨씬 더 많은 곡식을 수확한다.
그들은 곡식을 매우 많이 판다. 곡식은 그들이 먹고자 필요한 게 아니고, 더 많이 팔고자, 돈을 모고자 필요하다. 이런 농민은 돈을 저축할 수 있다. 그들은 우체국이나 은행에다 예금한다. 그들은 사유하고자 토지를 산다. 얼마나 많은 토지가 전체 매년 농민에게 매수되는가를 이제는 알았다. 토지 대부분은 많지도 않은 부농 수중으로 들어만 간다. 빈농은 토지를 살 생각은 꿈에도 하지도 못하고, 어떻게 먹고 지낼지를 걱정한다. 그런 까닭에 일반적으로 모든 은행, 특히 농민 은행은 모든 농민 토지 획득을 조성하는 게 아니라, 다만 극소수 부농만 토지 획득을 조성시킨다. 그러므로 농민에 대한 악질적인 충고자들은 농민 토지 매수로부터 마치 토지가 자본으로부터 노동으로 흘러가고 있듯이 말하는 데 이는 거짓말이다. 노동으로부터, 일하는 무산자에게로 토지는 결코 흘러갈 수 없다. 토지를 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여분의 돈을 갖고 있지 않은 빈농에게는 흘러가지 않는다. 토지는 다만 돈을 가진 부농에게만, 자본에게만, 곧 빈농이 도시 노동자와 동맹해서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에게만 흘러간다.
부농은 영구적으로 토지를 살 뿐만이 아니라, 토지를 몇 년 기한을 두어 임차한다. 곧 토지를 빌린다. 그들은 큰 구획에 따른 토지를 차입해서, 토지를 빈농으로부터 탈취시킨다. 폴타바 지방 일부에서는, 얼마만큼 토지를 부농이 차지했는지를 계산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매 가구 30데샤티나 이상 차지한 사람은 매우 희소했고, 15가구 당 2가구로 비례했다. 그러나 부농은 모든 임차지 절반을 자기 손아귀에다 넣어버렸다. 그래서 부농 한 명 당, 임차지는 75데샤티나였다. 타우리드 지방에서는 농민이 공동체로부터 국고에서 차입한 토지 가운데 어느 정도 토지를 부농이 탈취했는가라는 게 계산됐다. 따라서 전체 가구에서 1/5에 해당하는 부농이 전체 임차지에서 3/4를 수중에다 넣었다. 도처에서 돈만 있으면 토지는 분배되는데, 돈은 다만 소수 부농에게로 들어간다. 더욱 자세하게는, 농민 자신도 많은 토지를 양도한다. 그들은 분유지를 내버리고 있다. 가축이 없고, 종자가 없고, 농업을 경양할 수단이 없는 까닭에, 돈 없이는 토지가 있어도 어쩔 수 없다. 노보체스카 지방에서는 부농 3가구 가운데 1가구 또는 2가구는 분유지를 자기 소유로 하든지, 다른 공동체 소유로 해서 손에 넣는다. 그러나 말이 없는 사람과 말이 1필밖에 없는 사람은 분유지를 양도한다. 타우리드 지방에서는 농가 가구에 따른 1/3이 분유지를 양도했다. 따라서 농민 전체 분유지에서 1/4인 25만 데샤티나가 양도됐다. 그리고 25만 데샤티나 가운데 15만 데샤티나, 3/5는 부농 손에 들어갔다. 여기에서도 빈농에게 공동체 동맹이 적당한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농촌 공동체에서는 돈 가진 자가 힘을 가진다. 따라서 모든 공동체로부터 규합한 빈농 동맹이 필요하다.
토지 구입에서 마찬가지로, 쟁기와 수확기와 다른 모든 개량 도구를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다는 논의도 농민을 속인다. 농업 창고와 조합이 설립된다. 그리고 개량된 농구는 농민 상태를 개량한다고 떠벌린다. 한낱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개량된 농구는 다만 부농 손에만 들어가고, 빈농이 입수할 여지는 전혀 없다. 빈농에게는 쟁기나 수확기는 둘째 문제고, 겨우 살아가는 게 더 먼저다. 모든 농민에 대한 원조는 부농에 대한 원조일 뿐이다. 토지도, 가축도, 저축도 못 가진 빈농 대중에게는 개량 농구가 값싸진다고 하더라도, 생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마라 지방, 한 군에서는 부농과 빈농이 소유한 모든 농구가 계산됐다. 결과로는, 가구 1/5, 곧 가장 부유한 농민 일부가 모든 개량 농구에서 거의 3/4를 가지고 있었고, 가구 절반에 해당하는 빈농은 모두 합해서 1/30을 가지는 데 불과했다. 말 없는 농민과 말을 1필밖에 못 가진 농민은 해당 지역 2만 8000의 전체 가구 중에서, 1만 가구를 차지했다. 1만 가구가 소유한 개량 농구는 전체 군, 전체 농가가 소유한 5,724개 개량 농구 가운데 총 7개에 지나지 않았다. 전체 농민을 원조하듯이 말하는 농업 경영에 따른 개량, 쟁기와 수확기 보급에서 농민 차지다. 농업 개량에 따른 개선을 설교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기대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최후로 부농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는 부농이 농업 노동자와 일용직 노동자를 고용한다는 점이다. 지주와 마찬가지로 부농도 남의 힘으로 살고 있고 또 부유하다. 왜냐하면 농민 대중이 몰락하고, 궁핍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주와 마찬가지로 될 수 있는 대로 자기가 고용하는 농업 노동자에 따른 노동을 착취하고, 될 수 있는 대로는 적게 품삯을 주려고 힘쓴다. 수백만 농민이 전혀 몰락하지 않고, 할 수 없이 남에게 일감을 구하지도 않고, 자기 노동력을 팔지도 않는다면, 부농은 존재할 수 없고, 농업 경영을 할 수 없다. 그런 경우 어디에서도 내버린 분유지를 얻을 수 없고, 또 어디에서도 농업 노동자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전체 러시아에서는 150만 가구의 부농이 100만 가구를 밑돌지 않는 농업 노동자와 일용직 노동자를 고용한다. 유산 계급과 무산 계급, 경영주와 노동자,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간 대규모 투쟁에서 부농이 노동 계급에 맞서 유산자 쪽에 서는 건 당연해진다.
부농 상태와 힘을 알았다. 그렇다면 빈농은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가. 이미 막대한 수효, 곧 전체 농민 가구에서 약 2/3이 빈농 범주에 속한다고 했다. 먼저 말을 가지지 못한 농가가 결코 300만 가구를 밑돌지 않았다. 더욱 많아져 350만 가구에 달했다. 또한 기근이 있는 해마다 1만 가구의 경영이 몰락해 간다. 인구는 증가하고, 생활은 더욱 곤란해진다. 그러나 모든 좋은 토지는 이미 지주와 부농 손에 떨어져버렸다. 그러므로 해마다 인민은 더욱 많이 몰락해서, 도시로 나와 공장에 들어가거나, 농업 노동자 무리에 들어가 숙련되지 못한 노동자가 된다. 무마 농민은 완전한 무산자가 되버린다. 바로 프롤레타리아다. 무산자는 토지로부터 농업 경영에 따라 겨우 연명해서 생활하는 게 아니라, 임금 노동으로부터 생활하게 된다. 도시 노동자의 실제 형편이다. 무마 농민에게 토지는 아무런 소용도 없다. 무마 농가 절반은 자기 분유지를 남에게 빌리든지, 때로는 대가 없이 공동체에다 양도시킨다. 왜냐하면 무마 농가에서는 토지를 경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마 농민은 1데샤티나 또는 많으면 2데샤티나를 경작한다. 무마 농민은 늘 곡식을 구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자신이 수확한 곡식만으로는 결코 먹고 지낼 수 없기 때문이다. 전체 러시아에서 약 350만에 달하는 1필의 말을 가진 농민도 조금 생활이 나을 뿐이다. 물론 예외도 있다. 이미 중류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과 말 1필을 가진 부농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예외나 각 지방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니라, 국내 전체에 대해 말하고 있다.
말 1필을 소유한 농민 전체를 취해본다면, 농민 전체는 가난한 농민들이고, 가난한 사람들이다. 말 1필을 가진 농민이 농업 지방에서 3, 4데샤티나 드물게 5데샤티나를 경작하는 일까지 있다. 그렇지만 자신이 수확한 곡식만으로 지내지는 못한다. 풍년에도 무마 농민보다 더 나은 생활을 못 한다. 따라서 영구하게 배불리 먹지 못하고, 굶주린다. 농업 경영은 매우 쇠퇴 상태에 빠지고, 가축은 여위고, 가축 사료는 불충분해서 토지 관리는 좋지 못하기까지 하다. 힘도 없다. 말 1필을 가진 농민은 자신의 농업 경영 전체에 가축 사육 이외에 약간만 돈을 쓸 뿐이다. 우오로네지 지방에서는 1년에 20루블 이하를 쓰고 있다. 부유한 사람은 10배나 더 많이 쓴다. 1년에 20루블은 토치 차용에도, 가축 구입에도, 쟁기와 기타 기구 수선에도 방목하는 사람들에게도, 그 외 일체에 대한 비용이다. 과연 농업 경영일까. 물론 아니다. 과로고, 고역이고, 빈곤이다. 말 1필을 가진 농민 가운데 자신의 분유지를 양도한 사람도 있는데, 그것이 적지 않다는 건 명백하다. 가난한 사람이 토지에서 얻는 이익은 극히 적다. 돈이 없으면 토지에서 돈을 벌기는커녕 자신의 먹거리조차 손에 들어오지 못한다. 게다가 식료와 의복, 농업 경영, 세금 등 모든 일 때문에 돈도 필요해진다. 우오로네지 지방에서는 일마 농민으로부터 징수하는 세금은 보통 1년에 18루블이었다. 그런데 모든 비용을 모두 합해도, 1년에 75루블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므로 토지 구입이라든지, 개량 농구라든지, 농업 은행에 대해 말할 때면 그저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빈농은 이런 일을 행한다는 걸 전혀 생각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빈농은 무엇으로부터 돈을 얻는가. 오직 품삯밖에는 없다. 일마 농민은 무마 농민과 마찬가지로 품삯으로만 날마다 살아갈 뿐이다. 그러면 품삯은 무엇을 뜻하는가. 다른 사람에게로 노동, 고용된 노동을 뜻한다. 일마 농민 절반은 경영주를 중지하고 고용꾼, 프롤레타리아가 된다는 걸 의미한다. 그래서 이런 농민은 절반 프롤레타리아라고 불리운다. 사실상 도시 노동자 형제다. 도시 노동자는 모든 경영자에게 모든 수단으로부터 수탈 당하고 있으므로, 마찬가지로 모든 부농, 모든 소유자에 대한 투쟁을 위해 협력하고, 사회민주주의와 단결하는, 이외에는 도망칠 길도, 다른 구제 방법조차도 없다. 철도 부설을 위해 누가 일하는가. 청부인은 누구를 수탈하는가. 누가 나무를 베고, 재목을 강으로 띄워 보내는가. 누가 농업 노동자로 일하는가. 누가 일용직 노동자로 되고 있는가. 누가 도시와 부두에서 미숙련 노동을 하고 있는가. 그는 바로 빈농이다. 그들은 모두 말을 갖지도 못한 농민과 말 1필밖에는 없는 농민이다. 그러한 노동은 모두 농촌 프롤레타리아와 절반인 프롤레타리아가 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런 사람들이 참 많다. 해마다 러시아 전체 카프카스, 시베리아를 제외하고는 800만, 때로는 900만 여행권이 나온다. 이름만 농민이지, 실제로는 고용꾼이다. 모두 도시 노동자와 하나의 동맹에 연합되지 않으면 안 되고, 농촌에 비추는 빛과 앎을 비추는 빛은 모두 이 동맹을 북돋고 공고하게 한다.
품삯에 대해서도 잊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 모든 관리와 사물을 관리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곧 일반 농민에게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토지와 품삯이다. 인민을 원조하려면, 농촌에서 보다 많은 부업을 일으키고, 보다 많은 품삯을 줄 필요가 있다. 이런 언사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가난한 농민에게 품삯은 곧 고용 노동이다. 농민에게 품삯을 주는 건 농민을 고용 노동자로 전화시키는 걸 의미한다. 물론 원조는 좋은 일이다. 부농에게는 자본을 필요로 하는 다른 품삯이 있다. 물레방앗간, 다른 건물 축조, 탈곡기 구입, 장사 등이다. 그러나 부자 날품일과 빈농 고용 노동을 혼동한다는 건, 빈농을 속이는 일이다. 물론 기만은 부자에게 이익이다. 모든 품삯이 모든 농민에게 적당하고, 또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도록 만든다는 건, 그들에게 이익일 뿐이다. 그러나 가난한 농민에게 참된 선행을 베풀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들에게 모든 참을 말하고, 또 참말만 말해야만 한다.
다음으로는 중농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이미 전체 러시아에서는 2필의 경작용 가축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을 대체로 중농으로 보고, 이런 중농 가구로는 1000만 가구 가운데, 약 200만 가구가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중농은 부농과 프롤레타리아 중간에 서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중농이라고 불리운다. 그들의 생활도 중류다. 곧 풍년에는 자기 경영만으로 어쨌든 지나가지만, 궁핍은 늘 그들의 등 뒤에 서 있다. 그들에게는 저축이 전혀 없든지, 매우 적다. 그러므로 그들의 경영도 불안정하다. 그들은 손에 돈을 넣기가 어렵다. 자기 겅영으로부터 필요한 돈을 모으는 건 샛별 따기처럼 힘들다. 날품팔이를 하러 간다는 건, 농업 경영을 포기한다는 걸 의미하고, 따라서 농업 경영은 등한시 되기가 쉽다. 많은 중농도 역시나 날품일 없이는 한시도 지낼 수 없다. 곧 고용꾼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궁핍으로 인해, 중농은 지주의 노예가 되고, 할 수 없이 빚을 진다. 더군다나 중농은 빚을 지지 않을 수 없다. 그들에게는 부농같이 확실한 수입마저 없다. 그러므로 한 번 빚을 지게 되면, 자신의 몸에 굴레를 채운다. 완전히 몰락하지 않는 한, 빚에서 발을 뺄 수 없다. 중농은 지주에게 품을 팔러 가장 많이 간다. 왜냐하면 지주가 돈을 빌려줄 때는, 2필 말을 갖고 있고, 농영 경영에 따른 설비가 상당히 정돈되어 몰락하지 않은 농민을 대상으로 하므로, 중농이 그걸 피해 나가기는 곤란하다. 단절된 토지, 임차, 겨울 동안 빚을 갚고자 지주에 대한 자신을 노예로 만든다. 지주와 부농 이외에, 돈 많은 마을 사람도 중농을 압박한다. 그들은 늘 중농에게서 토지를 빼앗고, 결코 중농을 압박할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중농은 이와 같이 생활한다. 그들은 물고기도, 새도 아니다. 그들은 진정한 경영주도, 진정한 노동자도 아니다. 모든 중농은 경영주가 되고자 하고, 토지 소유주가 되려고만 한다. 그렇지만 그들의 희망대로 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농업 노동자 또는 일용직 노동자를 두고 자신은 남의 노동으로부터 돈을 벌어서, 남의 덕으로부터 부농이 되려고 힘쓰는 중농은 극히 적다. 대다수 중농은 사람을 두기는커녕 자신이 고용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이기 때문이다. 부농과 빈농 사이, 토지 소유자와 노동자 사이에서 투쟁이 시작된 곳에서는 어디서나, 중농은 중간에 붕떠서 어디로 갈지를 결정하지 못한다. 부농은 그들을 자신의 쪽으로 불러서 말한다.
"너도 같은 경영주고, 토지 소유주다. 너는 맨몸뚱이 노동자와 손 잡을 필요가 전혀 없다."
그러나 노동자는 말한다.
"부농은 너를 속이고, 또 약탈해간다. 따라서 너에게는 모든 부농과 투쟁에서 우리 원조 이외에 따로 구조될 방법이 없다."
중농 논쟁에서 사회민주주의자인 노동자는 노동대중 해방을 위해 싸우는 모든 국가에서도 진행된다. 국내 논쟁은 지금 막 시작됐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을 잘 조사해서, 부농이 어떤 기만으로부터, 중농을 끌어당기고 있고, 어째서 부농의 기만을 폭로하고, 중농으로부터 참된 동지를 찾을 수 있도록 원조해야만 하는가를 분명하게 알아아먄 한다. 사회민주주의자인 노동자가 곧 참된 길로 나선다면, 독일 노동자 동지보다도 훨씬 더 빠르게 농촌 노동자와 공고하게 동맹을 조직할 수 있고, 노역자의 모든 적으로부터 승리에도 꽤 빠르게 도달할 수 있다.
4. 중농은 어디로.
모든 토지 소유자와 부르주아지는 농업 경영 개선, 값싼 쟁기, 농업 은행, 목초 파종 실행, 가축과 비료에 따른 염가 판매 등을 위해 모든 수단을 취하기를 중농에게 약속하고, 또 동시에 농민을 모든 농업 동맹, 곧 경영 개선 목적으로 모든 경영주 사이에 맺은 동맹을 가맹시키면서부터 중농을 자기 쪽으로 만들고자 힘쓴다. 이런 방법으로 부르주아지는 중농을 노동 동맹,더 나아가 소농, 프롤레타리아와, 동맹에서 떼어버리려고 힘쓰고, 부르주아지와 노동자, 프롤레타리아 투쟁에서 그들을 부농, 부르주아지 쪽에 서게 하려고 힘쓴다. 사회민주당원인 노동자는 말한다. 농업 경영 개선은 좋은 일이다. 값싼 쟁기를 사는 건 전혀 나쁜 일이 아니다. 상인은 바보가 아닌 다음에서야, 누구나 구매자를 끌고자 저렴하게 팔려고 힘쓴다. 그러나 빈농이나 중농에게, 농업 경영 개선과 쟁기에 따른 염가 판매가 궁핍에서 모면하도록 하고, 부자 도움을 받지 않고, 독립하는 데 기여한다는 말은 기만에 불과하다. 이런 개선과 싼값, 그리고 물건을 저렴하게 판매하고, 유리하게 파는 동맹과 협동조합이라는 회사에서는 부농이 훨씬 더 많은 이익을 본다. 부농은 더욱 힘세고, 더욱 더 혹독하게, 빈농과 중농을 압박시킨다. 부농이 부유하게 되는 한, 자기 수중 토지, 가축, 농기구, 금전 대부분을 쥐고 있을 때까지 빈농뿐만이 아니라, 중농도 궁핍을 면할 수는 없다. 한두 사람 중농만 경영 개선과 회사 도움으로부터 부농 대열에 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모든 인민과 중농도 더욱 궁핍이라는 구렁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모든 중농이 넉넉하게 살고자 한다면 부농 자체를 내쫓는 게 필요하다. 도시 노동자와 지방 빈농과 동맹만이 그들을 내쫓을 수 있다. 부르주아지는 중농에 대해 소농에 대해서까지 말한다.
'우리는 너에게 싼 토지와 쟁기를 판다. 너는 우리에게 네 영혼을 팔아라. 그러고서 너는 모든 부농에 대한 투쟁을 거절하라.'
사회민주당원인 노동자는 다음으로 응답한다.
'정말로 저렴하게 팔려면, 왜 돈이 있는 사람이 사서는 안 되는가. 장사가 아니다. 그러나 자신의 영혼만큼은 결코 팔 수 없다.'
모든 부르주아지에 대해 도시 노동자와 공동으로 싸우기를 거절한다는 건, 영구적으로 빈곤과 궁핍 속에 머문다는 걸 뜻한다. 물건이 저렴해지면서부터 부농은 보다 이익을 더욱 더 많이 번다. 그러나 공장에서 일하는 돈 없는 사람은 부르주아지에게서 돈을 받지도 못한다. 부르주아지는 쓸데없는 여물통을 목에 걸고 다니듯이, 아무 소용 없는 회사 간판을 둘러메고 다닌다. '사회혁명당원'이라고 스스로 칭하는 사람들까지도 부르주아지의 엉덩이 뒤에서 농민에게 가장 필요한 건 회사라고 부르짖는다.
국내에서도 모든 회사를 일으키는 운동이 시작됐다. 그러나 그리 많지는 않았다. 정치적 자유가 없는 동안에는 적다. 그런데 독일 농민 사이에서는 모든 종류로 된 회사가 매우 많다. 그러나 이러한 회사에서는 누구를 제일 많이 원조하는지를 보라. 모든 독일에서는 14만 농가가 우유와 유제품 판매 때문에, 조합에도 가맹한다. 그리고 14만의 농가에서는 110만 필의 소를 친다. 모든 독일 빈농 수는 400만에 이르렀다. 그들 중에 겨우 4만 명만이 조합에 든다. 다시 말해, 빈농 100명 당 한 사람 비율로 회사를 이용한다. 4만 비농이 소유한 소의 수효는 겨우 10만 필에 불과했다. 또 중농은 100만 명에 달하며, 그 중에는 5만이, 5/100이 회사에 참가한다.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소의 수효는 20만 필이다. 돈 많은 농가, 지주와 부농을 합치면 100만의 1/3이다. 그 중 100명 당 17명, 5만 명이 회사에 또 참가한다. 그들이 소유한 소의 수효는 80만 필에 달한다.
회사에서는 누구를 더 많이 원조하는가를 알 수 있다. 싸게 사고, 유리하게 팔고자, 모든 비슷한 동맹으로부터 중농을 구제한다고 부르짖는 사람들은 명백히 농민을 우롱한다. 부르주아지는 빈농과 중농을 자기 쪽으로 이끄는 사회민주주의자 손에서도 매우 저렴하게 탈취하기를 바란다. 러시아에서도 버터제조조합, 집합적인 조합이 설립됐다. 상호 조합(알르체르)와 공동체(미르)로부터 동맹, 협동 조합 등이야말로, 일반 사람들에게 필요하다고 부르짖는 사람들 또한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상호 조합과 협동 조합과 공동체에 따른 토지 임차가 누구 손에 들어가는지를 보라. 러시아에서는 100가구 가운데 20가구를 밑돌지 않은 수효가 전혀 소를 갖지도 못했었다. 30가구는 소 1필씩을 갖는다. 이들은 심한 궁핍에 못 견디어 우유를 판다. 아이들에게 먹일 우유마저 남지를 않는다. 아이들은 궁핍해서, 파리같이 죽어 넘어진다. 그런데도 돈 많은 농민은 3, 4필 또는 그 이상의 소를 갖는다. 그리고 부농은 모든 소의 절반을 가진다. 버터제조조합이 누구 이익이 되는가. 먼저 지주와 농촌 부르주아지 이익이 명백하게 된다. 또한 중농과 빈농이 그들을 추종한다는 점, 모든 노동자에 따른 모든 부르주아지에 대한 투쟁을 궁핍에서 모면하는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자신의 처지에서 기어 올라가서 부농 대열이 되고자 하는 중농의 희망은 지주와 농촌 부르주아지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점은 명백해진다.
부르주아지에 따른 모든 앞잡이는 자기들이야말로, 빈농 쪽이고, 친구라고 속이고는 이러한 희망을 지지하고, 고취시킨다. 그래서 마음이 순박한 사람들은 양의 가죽 속에 이리가 있다는 걸 알지 못하고, 빈농과 중농에게 이익을 가져온다고 생각하면서, 부르주아지의 기만을 되풀이한다. 서적이나 연설 가운데 다음과 같다.
'소농 경영은 가장 편리하고, 가장 이익이 높다. 소농 경영은 발달했다. 그리고 모든 양전이 부르주아지에게 점령되고, 모든 돈도 그들 수중에 쥐어 있는데, 빈농은 압박만 받아 평생 동안 약간의 토지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다.'
소농에게는 많은 돈을 쓸 곳이 없다고, 감언이설을 좋아하는 그들은 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소농과 중농은 대농보다 절약 정신이 강하고, 보다 부지런하고, 간편하게 생활한다. 그들은 가축 때문에 목초를 사는 대신, 짚으로 태워버린다. 비싼 기계를 사는 대신,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기계 대신 긴 시간 일한다. 부자는 물건의 수선을 남에게 맡기지만, 그들이 쉬는 날에는 스스로 도끼를 잡고, 목수 일을 하므로, 대농보다 모든 일에 싸게 먹힌다. 그들은 경작용 비싼 말, 황소를 기르는 대신에, 젖소를 부린다. 독일에서는 젖소로 경작한다. 중농과 소농이 부저린히 일하며, 간편한 생활을 하고, 방종에 흐르지도 않고, 사회주의 일을 생각하지도 않고, 자기 경영만 생각한다는 건 얼마나 칭찬할 일인가. 부르주아지에게 파업을 일으키는 노동자에게 이끌리지도 않고, 부자 뒤에만 붙어서 착한 인간이 되고자, 기회를 늘 기다린다. 만일 모두가 이와 같이 열심히 또 근면하고, 간소하게 생활하고, 술을 마시지 않고, 보다 많이 돈을 저축하고, 사치스러운 옷을 입지도 않고, 아이를 너무 낳지도 않도록 한다면, 모두 잘 생활할 수 있고, 괴롭거나, 궁핍도 맛보지 않을 수 있다.'
부르주아지는 중농에게 달콤한 말을 속삭인다. 그리고 달콤한 말을 믿고, 스스로 되풀이하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달콤한 언사는 기만이고, 농민을 조롱한다. 중농과 소농으로 하여금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게 시키고, 빵 하나 때문에 애쓰고, 한 푼 지출까지도 단념시키는 이 궁핍, 이 혹독한 궁핍을 달콤한 언사로 속살거리는 무리들은 값싸고, 유리한 경영이라고 부른다. 물론 3년 동안 한 벌 바지를 입고, 여름에는 구두 없이 걷고, 호미를 새끼줄로 동여매어 쓰고, 젖소에게는 지붕에서 빼낸 썩은 짚을 먹이는 데 비교하면, '보다 싸고, 보다 이익이 있을 뿐이다.' 부르주아나 부농으로 하여금 '싸고, 유리한 경영을 담당하도록 한다면' 곧바로 자신의 달콤한 언사를 잊어버린다. 소농 경영을 칭찬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대로 농민에게 이익을 주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손해만 준다.
제비뽑기가 인민을 기만하듯이, 그들은 달콤한 언사로 일반 사람을 속인다. 제비뽑기란 무엇인가. 자신이 50루블짜리 소 1필을 가졌을 때, 이 소를 제비뽑기에 부치면, 1루블짜리 패를 모든 사람에게 판다. 물론 1루블로 소를 얻을 수도 있다. 인민은 이 달콤한 말에 걸려든다. 1루블의 은화가 모이면 100루블이 모였을 때, 제비를 조사해서 소가 맞은 패를 찾아낸다. 그러면 다른 패는 모두 빈 패가 된다. 그렇다면 이 소는 인민에게 싼값인 셈인가. 아니다. 매우 비싸다. 왜냐하면 가격의 2배의 돈이 지출되고, 제비를 만든 사람과 소를 얻은 사람은 조금도 힘을 들이지도 않고 이익을 보았고, 돈을 잃은 99명분의 이익을 보았다. 제베가 인민에게 이익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인민을 기만하는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회사, 농업 경영 상에 따른 모든 개선, 모든 은행, 그 외의 방법으로부터 괴롭고, 궁핍에서 해방을 약속하는 사람은 농민을 기만하는 사람이다. 제비로 한 사람이 이익을 보고, 다른 사람이 손해를 보는 일은 여기서도 일어난다. 중농 한 사람이 곤궁을 면해서, 부농의 동료로 들어간다. 그러나 99명의 동료는 궁핍에서 벗어나지도 못하고, 더욱 더 파산해서 한 평생을 계속 괴롭게 당해야만 한다. 각 지방 주민이 궁핍을 잊어버렸는가. 그리고 일생 동안 이 궁핍에서 벗어나지도 못하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파산해서 마을을 떠난 사람은 얼마나 있는가. 앞서 본 바와 같이, 모든 러시아에서도 중농 경영에 따른 수효가 200만 이하는 아니다. 저렴하게 사고, 유리하게 팔기 위한 동맹 수효가 지금보다 10배 많아졌을 때, 어떻게 될까. 10만의 중농이 부농으로 올라간다면 너무나 많다. 무엇을 뜻하는가. 100명의 중농 가운데 5명이 부자가 됐다는 걸 뜻한다. 나머지 95명은 어찌되는가. 그들은 여전히 괴로운 생활을 하고, 훨씬 혹심해진다. 빈농은 더욱 더 파산한다.
부르주아지에게 필요한 건, 중농과 소능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자신의 쪽으로 끌어들여, 그들로 하여금 부르주아지와의 투쟁 없이도 궁핍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게 하고, 자신의 근면과 저축에 모든 걸 걸도록 하고, 농촌과 도시 노동자와 동맹을 더욱 불신하도록 만든다. 부르주아지는 온 힘을 다해 일반 사람이 걸려든 믿음과 희망을 지지하고자 힘쓰고, 모든 달콤한 언사를 써가며, 그를 잠들게 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한다. 모든 감언이설의 기만을 폭로하고자 할 때는, 그들에게는 세 가지 질문을 제출하면 충분하다.
1). 모든 러시아에서 2억 4000만 데샤티나의 경작지 가운데 1억 데샤티나가 토지 소유자에게 소유되고 있을 때, 노동하고 있는 인민은 가난과 궁핍에서 해방될 수 있는가. 1만 6천의 대토지 소유자의 손에 6500만 데샤티나의 토지가 쥐어지고 있는 때에도.
2). 150만 가구의 1000만 가구의 모든 농가 가운데 부농이 농민의 모든 경지와 말, 가축 절반, 또한 농민 곡식과 저축액보다 훨씬 많은 걸 자신의 수중에 쥐고 있을 때, 노동하고 있는 인민은 괴로움과 가난에서 해방될 수 있는가. 농민 부르주아지가 빈농과 중농을 압박하고, 농업 노동자와 날품 노동자의 노동을 착취해서, 더욱 더 부유해가고 있을 때, 농가 600만 가구가 늘 굶주리면서 모든 고용 노동으로부터 약간의 빵 조각을 얻고 있는 파산한 빈농인 때에도.
3). 돈이 주요한 힘이 되고, 돈이 모든 것, 곧 공장도, 토지도, 고용 노동자·고용 노예로 인간 자체도 살 수 있을 때, 노동하고 있는 인민은 괴로움과 가난에서도 해방될 수 있는가. 돈이 없으면 생활할 수 없고, 농업 경영도 할 수 없는 때에도. 소경영주와 빈농이 돈을 얻고자, 대경영주와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되는 때에도. 수 많은 지주·상인·공장주·은행가들이 자신의 수중에 수억 루블을 쥐고, 그 이외에도 수십억 루블의 돈이 모여 있는 모든 은행을 지배하고 있는 때에도.
소농 경영이나, 회사의 이익에 대해 아무리 미사여구를 나열해봐도, 이 질문을 결코 회피할 수는 없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오직 하나다. 노동하고 있는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 진정한 회사, 그것은 모든 부르주아지와 투쟁하고자 농촌 빈농과 도시에서 사회민주주의자인 노동자와 동맹이다. 동맹이 급속도록 확대하고, 공고하게 될수록 중농은 더욱 빨리 부르주아지의 약속의 모든 허위를 이해하고, 우리 쪽이 된다.
부르주아지는 이 점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달콤한 언사 이외에도 사회민주주의자에 관한 온갖 비방을 퍼뜨리고 다닌다.
그들은 말한다.
'사회민주주의자는 중농과 소농으로부터 사유권을 박탈한다.'
거짓말이다. 사회민주주의자는 오직 소유자로부터만, 남의 노동으로 먹고 사는 사람으로부터만 소유권을 몰수한다. 사회민주주의자는 소농과 노동자를 고용하지 않은 중농으로부터는 그들의 소유권을 결코 몰수하지도 않는다. 사회민주주의자는 가장 자각하고, 단결된 도시 노동자뿐만이 아니라, 농촌 노동자, 작은 수공업자와 농민까지 포함해서, 그들이 노동자를 사용하지 않고, 부자에게 끌리지도 않고, 부르주아지 쪽으로 가지도 않는다면 모든 노동 대중 이익을 보호하자고 내세운다. 아직도 부르주아지 지배를 뒤엎지 못한 현재에도 일반적이며, 또 부르주아지 투쟁을 쉽게 할 수 있는, 노동자와 농민 생활에서 일체 개선을 위해 투쟁한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자는 농민을 기만하지 않는다. 농민에게 모든 참만 말한다. 부르주아지가 지배하고 있는 동안에는 어떤 개선도 결코 인민을 괴로움과 가난에서 해방하지 못함을 미리 앞서 정직하게 말한다. 사회민주주의자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를 모든 인민에게 알리고자, 사회민주주의자는 스스로 강령을 만들었다. 강령이란, 당이 무엇을 쟁취하는가. 무엇 때문에 싸우는가 하는 모든 점에 대해 간단하게, 명료하게, 정확하게 선언해야만 한다. 사회민주당은, 모든 인민이 이를 알고 있고, 또 이를 보고자 부르주아지의 압박으로부터 노동하고 있는 모든 인민 해방을 위해 참으로 투쟁하기를 바라고 있고, 이런 투쟁을 위해 누구와 단결해야만 하는지, 또 어떻게 이 투쟁을 지도할 수 있을지를 정당하게 깨달은 사람들만이 당에 가입할 수 있도록, 명료하고, 정확한 강령을 내건 유일한 당이다. 그 밖에도 사회민주주의자는 노동하고 있는 인민의 괴로움가 가난이 어디에서 생기는가. 왜 노동자 동맹은 더욱 더 확대되고, 더욱 더 강대하게 되는가를 강령 속에 정직하게, 공공연하게, 정확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는 걸 인정하고 있다. 우리 생활은 비참하다. 혁명을 일으키라고 부르짖기만으로는 불충분하다. 그런 건 큰소리로 장담하기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큰 이익은 못 된다. 노동하고 있는 인민은 왜 자신들이 가난하고, 궁핍에서 해방을 위해 자신들이 누구와 단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똑똑하게 깨달아야만 한다.
사회민주주의자는 무엇을 바라고 있고, 또 노동하고 있는 인민의 괴로움과 궁핍은 왜 생기는지, 빈농은 누구와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이미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들 투쟁으로부터, 현재 어떤 개선을, 곧 노동자와 농민 생활에서 어떤 개선을 쟁취할 수 있는지를 말하도록 하자.
5. 사회민주주의자는 모든 인민과 노동자를 위해 어떤 개선을 쟁취하는가.
사회민주주의자는 일체의 약탈, 압박, 부정으로부터 모든 노동 대중을 해방하고자 싸운다. 그러나 해방되기 위해서는 노동 계급은 먼저 연합해야만 한다. 그리고 연합하기 위해서는 결사의 자유 및 권리를 가져야만 한다. 또 정치적 자유를 가져야만 한다. 전체적인 지배가 인민 관리와 경찰의 예속이라는 건 이미 말했다. 그러므로 정치적 자유는 궁정에 출입할 수 있는 모든 고관, 귀족, 졸부 등 소수들 말고도 모든 국민에게 필요하다. 그 중에서도 노동자와 농민에게 가장 필요하다. 부자는 관리와 경찰 횡포와 부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 부자는 고위층에다 탄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경찰·관리가 가난한 사람에게 일삼는 부정한 짓을 부자에게 그러는 일은 훨씬 드물다. 노동자와 농민이 경찰이나 관리로부터 벗어날 방법은 전혀 없다. 또 누구에게 탄원한다고 해도, 탄원할 사람이 없다. 또 재판을 하더라도 자신의 힘이 미치지도 못한다. 노동자와 농민은, 국가에 선거 제도가 존재하지 않는 동안에, 대표자 인민 회의가 존재하지 않는 동안에는, 경찰과 관리의 질책과 횡포, 모욕적인 행위로부터 결코 도망칠 수도 없다. 오직 이런 대표자 인민 회의만이 인민을 관리로부터 예속 상태에서 해방할 수 있다. 모든 자각한 농민은 황제 정부에서 무엇보다 먼저 중요한 대표자 인민 회의 소집을 요구하고 있는 사회민주주의를 지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분의 구별 없이, 부자와 가난한 사람 구별 없이, 모든 사람들이 대표자를 뽑아야만 한다. 선거는 관리 간섭 없이 자유로워야만 한다. 선거를 감시하는 임무를 위임받는 일반인이 맡겨야지, 마을 경찰이나, 젬스트보 장관이어서도 안 된다. 선거가 실시되면 모든 국민에게 선출된 대표자는 모든 국민적인 가난을 심의할 수 있고, 국내에서 보다 좋은 제도를 세울 수 있다.
사회민주주의자는 재판을 하지 않고, 경찰이 아무나 투옥해서는 안 된다고 요구한다. 관리의 불법 감금 행위는 엄중하게 처벌해야만 한다. 관리의 자의적인 행위를 중지시키고자, 인민은 스스로 관리를 선출하고, 개개인이 관리에 대한 탄원을 직접 재판소에 제기할 수 있는 권리를 갖도록 해야만 한다. 그런데 마을 경관을 자치청 젬스트보에게 또한 자치청 장관을 지사에게 고소하면 어찌 되는가. 물론 자치청 장관은 마을 경관을 옹호하고, 현 지사는 장관을 옹호해서, 도리어 탄원자가 혼날 뿐이다. 탄원자를 감옥에 집어넣든지, 시베리아와 같이 멀리 유형 보내든지 한다. 국내에서도 다른 모든 국가에서도 그러하듯이, 모든 사람들은 인민 집회나 인민 재판소에 탄원을 제출하고, 자신의 가난을 자유롭게 말하고, 또는 신문을 발행할 수 있는 때에 비로소 관리에게 징벌이 가해진다.
인민은 오늘날까지도 관리에 대해 농노적인 예속 상태에 묶여 있다. 관리의 허가 없이는 국민은 집회를 개최하지도, 책과 신문을 인쇄하지도 못한다. 과연 농노적인 예속 상태가 아닌가. 자유롭게 집회를 열지도 못하고, 자유롭게 책을 인쇄하지도 못한다면, 어떻게 관리와 부자에게 정의를 요구할 수 있을까. 물론 정당한 책의 인쇄도 모든 관리는 금지시킨다. 그리고 인민의 가난에 대한 정당한 말도 그들은 모두 금지시킨다. 따라서 사회민주당은 이런 서적을 비밀리에라도 인쇄하고, 배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책을 갖고 있는 사람은 이런 걸 무서워하지 않고, 더욱 많은 서적을 발행하고, 인민에게 올바른 책을 읽도록 더욱 더 배포한다. 따라서 어떤 감옥도, 어떤 박해도, 인민의 자유를 위한 투쟁을 저지하지는 못한다.
사회민주주의자는 신분 제도가 폐지되고, 국가의 모든 시민이 평등권을 갖도록 요구한다. 러시아에서는 세금을 바치지 않는 신분과 세금을 바치는 신분이 존재한다. 특권이 있는 신분과 특권이 없는 신분이 존재하고, 흰 뼈와 검은 뼈가 존재한다. 천한 인민에게는 아직도 태형이 남아 있다. 어떤 국가에서도 노동자와 농민에게 이와 같이 냉대하지는 않다. 러시아 이외의 어떤 국가에서도 여러 가지 신분을 위해, 여러 가지 법률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민이 일어나서 일반 사람들에게도 귀족이 가진 모든 권리를 달라고 요구해야만 한다. 농노제 폐지 뒤로 40년이 지난 현재에도 아직까지도 태형이 시행되고, 납공하는 신분이 존재한다는 건 치욕스럽다. 사회민주주의자는 인민을 위해 완전한 이동의 자유, 부업의 자유를 요구한다. 이동의 자유란 무엇을 뜻하는가. 농민이 스스로 가고 싶은 데로 마음대로 가는 권리, 가고 싶은 곳으로 이전하는 권리, 누구의 허가도 받지 않고, 어떤 촌락이나 도시라도 선택할 권리를 말한다. 또한 여행권이 폐지되고, 어떤 촌장이나 군장도 농민의 자유로운 거주와 노동을 방해하지는 못한다는 걸 뜻한다. 일반 사람은 자유롭게 도시에 갈 수도 없고, 자유롭게 새로운 토지에 이주하지도 못할 만큼 아직까지도 관리에게 예속된다. 정부 대신은 현 지사에게 농민의 자유로운 이주를 허락하지 말라고, 명령한다. 현 지사는 일반 사람이 어디로 가는지 일반 사람보다 더 잘 알고 있다. 그의 생각에 일반 사람은 어린애일 뿐이다. 장관 없이는 움직일 수조차 없다. 과연 농노적 예속이 아니던가. 모든 자신의 재산을 방탕하게 낭비하는 귀족이 분별력 있는 경영주와 경작인을 지배하고 있다는 건 과연 인민에 대한 모욕이 아니던가.
당시에 농무부 장관이던, 엘모로프, 『흉작과 인민 기근』이라는 책이 있었다. 이 책에는 '지주 여러분이 노동자의 손을 필요로 할 때에는 그 장소에서는 농민을 이주시켜서는 안 된다.'고 명백하게 말했었다. 장관은 또 일반 사람은 이런 말을 듣지 않을 거고, 듣더라도 그걸 이해하지는 못할 거라고 거침없이 말했었고, 또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는 말했었다.
'지주들이 값싼 임금 노동자를 필요로 할 시기에 왜 인민을 내놓는가. 인민이 더 괴롭게 생활할수록 지주에게는 더 유리하고, 그들의 가난이 클수록, 그들은 더 싸게 고용되고, 모든 압제를 더 온순하게 참고 견딘다. 이전에는 촌장이 귀족의 이익의 뒷배를 봐줬으나, 현재에는 자치청 장관과 지사가 그걸 봐준다. 이전에는 촌장이 마구간에서 농민을 구타했으나, 현재 농민은 군청에서 태형을 받는다.'
사회민주주의자는 상비군이 폐지되어야만 하고, 대신에 국민군이 조직되어야만 하며, 모든 인민이 무장하기를 요구한다. 상비군이란 인민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할, 인민을 사살하고자 준비된 군대다. 병사는 수년 간 비인간적으로 교육되지 않았다면, 과연 그가 자신의 형제를, 노동자와 농민을 사살할 수 있을까. 적의 공격에서도 국가를 방위하는 데 있어, 상비군은 전혀 필요 없다. 그 역할은 국민군으로도 충분하다. 국가의 각 시민이 무장한다면, 국내로는 어떤 적도 무서울 게 없다. 그리고 국민은 군국주의에 따른 속박에서도 벗어난다. 정부는 군비를 위해 매년 수억 루블을 쓴다. 돈은 모두 인민에게 거둔다. 그런 까닭에 세금은 매우 높고, 생활은 더욱 괴롭다. 군국주의는 관리 권력과 국민에 대한 경찰 권력을 강화시킨다. 군국주의는 다른 인민을, 특히 중국 영토를 약탈하고자 필요해진다. 이런 까닭에 인민 부담은 더욱 무거워진다. 더군다나 새로운 세금이 부과될 경우에는 더 괴롭다. 모든 인민 무장으로부터 상비군을 폐지하는 건 모든 노동자와 농민에 따른 막대한 부담을 가볍게 한다.
인민에 대한 막대한 부담에 따른 경감은 사회민주주의로부터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간접세 폐지로부터 실현된다. 간접세는 토지, 농업 경영에서 징수되는 게 아니고, 상품 가격에 덧붙여져 있다. 간접세는 상품 구입 시 인민에게 간접적으로 받아들이는 세금이다. 국고는 인민에게 설탕, 보트카, 석유, 성냥, 그 외 모든 소비품에 대해 과세한다. 세금은 상인 또는 공장이나, 국고에다 바치며, 물론 자신의 돈에서 바치는 게 아니라, 그 물건을 산 사람이 그에게 내준 돈으로 바친다. 세금 때문에 보트카, 설탕, 석유, 성냥 가격은 올라간다. 그리고 각각의 구매자는 보드카 1병, 설탕 1푼트에 대해 상품 가격뿐만이 아니라, 그에 대한 세금도 지출한다. 여러분이 1푼트 설탕에 대해 14카페이카를 줬을 때, 그 중에서 4페이카는 세금이다. 설탕 제조업자는 이 세금을 이미 국고에다 바친다. 그리고 국고에 바친 만큼 금액을 각각의 구매자에게 징수한다. 간접세는 소비품에 부과하는 세금이고, 사는 사람은 상품을 원래 가격보다 비싼 가격을 무는 형식이다. 어떤 사람은 이에 대해,
'간접세는 가장 정당한 세금이다. 왜냐하면 산 사람이 자신의 산 물건에 대해 그만큼 바치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당하지 않다. 간접세는 가장 부당한 세금이다. 왜냐하면 부자보다는 가난한 사람이 지출하는 게 더 괴롭기 때문이다. 부자는 농민이나, 노동자보다 10배나 더 많은 수입을 얻는다. 아니 100배나 더 많은 수입이 있다. 그러나 과연 부자가 설탕을 100배나 더 많이 살 필요가 있을까. 보드카나 성냥을 10배나 더 많이 살 필요가 있을까. 또 석유는 어떠한가. 물론 그렇지 않다. 부유한 가정은 석유, 보드카, 설탕을 가난한 사람보다 2배 혹은 기껏해야 3배 분량을 사는 데 불과하다. 그러나 이 점은 부자가 가난한 사람보다 적은 비례의 금액을 세금 형식으로 자신의 수입에서 지출하고 있다는 걸 뜻한다.
빈농 수입을 1년에 200루블이라고 가정했을 때, 간접세가 붙어 가격이 높아진 60루블 상당의 상품을 산다고 하자. 60루블 가운데 20루블은 세금이 된다. 가난한 사람은 자신이 빌린, 1루블에 대해 10카페이카를 간접세 형식으로 지출한다. 그런데 부농 수입은 1000루블이고, 세금이 부과한 상품을 150루블만 산다고 했을 때, 세금은 150루블에 맞추어, 50루블이 지출된다. 그러므로 부농은 자신의 수입 가운데 1루블에 대해 간접세 형식으로 겨우 5카페이카밖에 지출하지 않는다. 부자일수록, 자신의 수입에서 지출하는 간접세 액수가 더욱 작아진다. 그러므로 간접세는 가장 부당한 세금이다. 간접세는 가난한 사람에게 부과될 세금이다. 농민과 노동자는 모든 인구에서 95%를 차지하고, 전체 간접세에서 9/10 혹은 8/10을 지출한다. 그런데 노동자와 농민은 모든 수입에서 4/10 이하를 받는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자는 간접세 폐지와 수입 및 상속에 대한 누진세 설치를 요구한다. 이 방식은 수입이 많을수록, 누진적으로 더 많은 세금을 내는 방식이다. 1천 루블 수입이 있는 사람에게는, 1루블에 1카페이카씩, 2천 루블 수입이 있는 사람에게는 1루블에 2카페이카씩, 이하는 여기에 준하도록 과세한다. 가정 적은 수입, 400루블 이하의 수입을 얻는 사람으로는 전혀 과세하지 않도록 한다. 가장 큰 부자가 가장 막대한 세금을 지출하도록 한다. 소득세 혹은 누진 소득세는 간접세보다 훨씬 정당하다. 사회민주주의자는 간접세 폐지와 누진 소득세 실시를 획득하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모든 토지 소유자, 모든 부르주아지는 이를 원치도 않고, 반대한다는 건 명확한 사실이다. 오직 빈농과 도시 노동자에 따른 공고한 동맹만이 부르주아지로부터 세제 개선을 쟁취할 수 있다.
모든 인민, 빈농에 대해 중대한 개선은 아동 무상교육제도이다. 사회민주주의자는 무상교육제도를 요구한다. 농촌에서는 도시에서보다 학교 수효가 훨씬 적다. 어디서나 부자 계급, 부르주아지만이 아이들에게 좋은 교육을 받는다. 모든 아동의 의무·무상 교육만이 인민으로 하여금 문맹 상태에서 어느 정도 해방할 수 있다. 빈농은 특히 문맹으로 어려움을 겪고, 교육을 더욱 더 필요로 한다. 물론 참된 자유로운 교육을 필요로 하는데, 관리나 승려가 원하는 자유 교육은 아니다. 사회민주주의자는 각 개인이 어떤 종교든지, 마음대로 믿을 수 있는 완전한 권리를 얻기를 요구한다. 다만 유럽 각국 가운데 터키와 러시아에서만 다른 인종에 대해 수치스러운 법률, 이교도·분리파·유태인에 대한 부당한 법률이 남아 있다. 이런 법률은 직접 어떤 신앙을 금지하든지, 그것의 선전을 금지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믿는 자의 권리를 일부 박탈한다. 모든 법률은 가장 부당하고, 폭력적이고, 수치스럽다. 각 개인은 자신이 원하는 종교를 믿을 자유뿐만이 아니라, 좋아하는 종교를 선전하고, 그 신앙을 변경하는 완전한 자유를 가져야만 한다. 어떤 관리라도, 어떤 신앙에 대해 타인에게 질문할 권리를 가져선 안 된다. 문제는 양심의 문제다. 누구라도 문제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 어느 곳에서든, 신앙 또는 교회는 있을 수 없다. 모든 신앙, 모든 교회는 법률 앞에 평등해먄 한다. 여러 가지 종파의 승려에 대해서, 그 종교에 속한 사람들이 생활 자료를 주어도 좋지만, 국가는 국고의 돈으로는 어떤 종교라도 보호해서는 안 된다. 어떤 승려에게도, 어떤 그리스 정교도에게도, 어떤 분파에게도, 어떤 이교도에게도, 그 밖의 어떤 자에게도 생활비를 주어선 안 된다. 사회민주주의자는 이 모든 점에 대해 크게 맞선다. 앞서 말한 수단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아무런 법규의 절차도 없이 적용되고 있는 동안에는, 인민은 신앙에 대한 수치스러운 경찰의 압박에 못지않게, 수치스러운 어떤 종교에 대한 경찰의 특별 대우로부터 해방되지 않는다.
사회민주주의자는 모든 인민을, 특히 빈농을 위해 어떤 개선을 쟁취하고자는 하는지를 살펴봤다. 이제 사회민주주의자는 노동자를 위해, 공장이나, 도시 노동자만이 아니라, 농촌 노동자를 위해 어떤 개선을 쟁취하는지를 살펴보자. 공장 노동자는 비좁은 곳에서 겨우 생활한다. 대공장에서 노동한다. 교양 있는 가문 출신인 사회민주주의자 원조를 이용하는 건 더욱 쉽다. 따라서 도시 노동자는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도 훨씬 먼저 경영주와 투쟁을 개시해서, 현저한 개선을 쟁취하고, 공장법 제정도 쟁취했다. 사회민주주의자는 모든 인민을 위해, 도시와 농촌 가정에서 주인을 위해 일하는 수공업자를 위해서도, 소경영자를 위해서도, 수공업자 밑에서 일하는 고용 노동자를 위해서도, 목수, 석공 등 건축 노동자 및 목재 노동자를 위해서도, 미숙련 노동자를 위해서도, 더불어 농촌 노동자를 위해서도 투쟁을 지속한다. 모든 노동자들은 지금도 전국에서 확대되어, 연합하기 시작했다. 공장 노동자를 뒤쫓아 원조를 얻어, 보다 좋은 생활 조건을 획득하고자, 보다 짧은 노동 시간을 위해, 보다 높은 임금을 위해 연합을 개시했다.
사회민주당은 생활 개선을 위한 투쟁에 있어 모든 노동자를 지지하고, 가장 튼튼하고, 가장 믿음직한 노동자를 공고한 동맹에 조직하고자 원조하고, 소책자와 안내서를 배포하고, 초보적인 사람들을 위해 경험 있는 노동자를 파견하고, 그 외에도 일반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에 대해 모두 원조하기를 자신의 임무로 삼는다. 정치적 자유를 획득할 때, 대표자 인민 회의에서도 자신의 쪽인 사람, 노동자 대표자, 사회민주주의자는 출석한다. 다른 국가에서도 자기 쪽 동지와 마찬가지로 노동자에게 유리한 법률 발표를 요구한다. 사회민주당은 노동자를 위해 쟁취하려고 하는 모든 개선을 열거하지는 않겠다. 개선은 강령 가운데 충분히 열거했고, 「국내 노동자 사업」에서도 상세하게 설명했다. 개선 항목 가운데 중대한 점을 충분하게 들어보자.
- 노동 시간은 1주일에 8시간 이상이어서는 안 된다.
- 1주일에 하루는 휴식을 위해 늘 노동에서 해방되지 않으면 안 된다.
- 잔업 및 야간 업무는 완전히 금지해야만 한다.
- 아동은 16세까지 무상 교육을 받아야만 한다. 또 16세까지 고용 노동은 허락되지 않는다.
- 신체에 유해한 사업에서 부녀자는 일해서는 안 된다.
- 노동할 때 모든 상해에 대해서는 고용주가 배상해야만 한다.
이를테면 탈곡기를 다루다가, 입은 상해에 대해 임금을 지출할 경우, 모든 고용주는 늘 1주일 분 임금을 지급해야만 한다.
- 농촌에서 고용된 경우 품삯을 2개월에 한 번만, 3개월에 한 번만 지불받아서는 안 된다.
노동자에게는 일주일에 한 번 정확히 지불받는 게 매우 중대하다.
그때에는 반드시 현금을 받고, 물품으로 받아서는 안 된다.
- 고용주는 물품을 줄 경우, 3배나 비싼 가격으로 모든 나쁜 물품을 강요한다. 무법을 막고자, 무조건 법률로부터 물품에 따른 품삯 지불을 금지시킨다.
- 정년을 넘은 노동자는 국가로부터 연금을 받아야만 한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모든 계급, 모든 국가를 부양하고 있으므로,
노동자들은 관리가 받는 것보다도, 더 많은 연금을 충분히 받을 권리가 있다.
- 경영주는 자신의 지위를 악용해서, 노동자를 위해 만든 규약을 파기하지 않도록, 공장에 대해서만 아니라, 대규모 농장에 대해서도, 일반적으로 고용 노동자를 사용하는 모든 기업에 대해서도, 감독관이 임명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감독관에는 관리, 경찰에 근무하는 사람은 임명되어선 안 되고, 또 장관이나 지사로부터 임명되어서도 안 된다. 감독관은 노동자로부터 선출한 사람이어먄 한다.
- 노동자로부터 자유롭게 스스로 뽑은 노동자 의뢰인에게는 국고에서 급료를 지불한다.
- 노동자로부터 뽑힌 대표자는 노동자 주택이 잘 설비되는지, 경영주가 노동자를 토굴이나, 토막에 거주시키는 건 아닌지, 노동자 휴식에 관한 규정도 잘 시행되고 있는지를 감시해야만 한다.
- 정치적 자유가 존재하지 않는 한, 경찰은 전권을 휘둘러, 인민을 무책임하게 다루는 한, 노동자들로부터 선출된 어떤 대표자라고 하더라도, 아무 이익을 줄 수 없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 모든 사람에게 있어 경찰은 재판도 없이, 노동자의 대표자를 체포하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말하고, 법률 위반을 폭로하고, 노동자로 하여금 연합하도록 호소하고 있는 노동자들까지도 체포한다. 그러나 정치적 자유를 획득할 때에는 노동자 대표자는 많은 이익을 가져다 준다.
- 모든 공장주, 지주, 청부인, 부농과 같은 고용주에 대해 자신의 임의대로 어떤 노동 임금 삭감이라도, 불합격품에 대한 삭감, 벌금 형식으로부터 삭감 등등을 금지시켜야만 한다. 고용주가 함부로 노동 임금을 삭감하는 건 위법이고, 또 강제다. 어떤 형식의 삭감이든, 경영주는 노동자 임금을 함부로 내려서도 안 된다.
- 고용주는 자신 스스로를 재판해서는 안 된다. 고용주는 공공 재판에 고소해야만 한다. 그리고 재판은 노동자 대표와 경영주 대표를 절반씩 뽑아 실시해야만 한다. 이런 재판만이 노동자에 대한 경영주에 따른 모든 불만족과 경영주에 대한 노동자 불평·불만을 정당하게 심의한다.
사회민주주의자는 이상과 같은 개선을 모든 노동 계급을 위해 쟁취하고자 한다. 각 소유지에서도 노동자, 각 농장에서도 노동자, 각 청부인 아래에서 노동자는 신용할 수 있는 사람과 협력해서, 어떤 개선을 획득할 필요가 있고, 어떤 요구를 제기할 수 있을지를, 심의하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사회민주당 위원회는 전국 모든 노동자에 대해 자신의 요구를 정확하고, 또 분명하게 결정하도록 돕고, 요구로부터 노동자·경영주·관리에게 알리는 안내서를 인쇄하기를 원조한다. 노동자는 한 사람같이 협력해서, 자신의 요구를 위해 일어선다면, 경영주는 분명 양보하고, 타협한다. 도시 노동자들은 이미 해당 방법으로부터 많은 개선을 쟁취했다. 현재 장인·수공업자·농촌 노동자도 자신의 요구를 위해 조직하기 시작했고, 싸움을 개시한다. 정치적 자유를 얻지 못한 시기에는 투쟁을 은밀하게, 모든 소책자 안내서 제작과 노동자 단결을 금지하고 있는 경찰을 따돌리고, 몰래 해 나가기도 했다. 그러나 정치적 자유를 쟁취할 때에는, 투쟁을 한층 더 확대해서, 모든 사람들 앞에 공공연하게 수행하고, 전국 모든 노동 대중과 연합해서, 더 긴밀하게 연합하면서부터, 폭압으로부터도 자신을 방위해나갈 수 있다. 많은 노동자는 사회민주노동당과 연합할수록, 힘은 보다 굳세게 되어 모든 압박에서도, 모든 고용 노동에서도, 부르주아를 위한 모든 노동에서도, 노동 게급에 따른 완전한 해방을 보다 빠르게 성취할 수 있다.
따라서 이미 사회민주노동당이 노동자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모든 농민을 위해서도, 개선을 쟁취하고자 있음을 밝혔다. 다음은 당에서는 모든 농민을 위해 어떤 개선을 획득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6. 사회민주주의자는 모든 농민을 위해 어떤 개선을 쟁취하는가.
모든 노역자의 완전한 해방을 위해 가난한 농민은 도시 노동자와 동맹해서 모든 부르주아지, 그 중에서는 부농에 대해서도 투쟁을 감행해야만 한다. 부농은 자신이 고용하는 농촌 노동자에 대해 보다 싸게 지출하고, 보다 오랫동안, 보다 가혹하게 일하도록 노력한다. 가난한 농민은 부유한 농민을 제외한 특수한 자신들의 동맹을 결성해야만 한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부농과 빈농을 모두 포함한 모든 농민이 많은 점에서는, 여전히 농노의 처지로 뒤떨어져 있다. 모두 열등하고, 천하고 납공하는 신분을 이루고 있다. 모두 경찰 관리와 자치청 장관에게 예속된다. 모두 절단된 토지, 용수지, 경지, 초원, 지주 때문에 농노 시대와 똑같은 방법으로 노동한다. 모든 농민은 새로운 농노 상태에서 해방되기를 원한다. 모든 사람은 지주를 미워한다. 지주야말로, 지금까지 농민으로 하여금 부역 제도 아래에서 혹사시켰고, 토지, 경지, 용수지, 초원에서도 고역을 시키고, 가축이 경지를 밟아서 생긴 손해 때문에 사역을 시키고, 경의를 표하고자 수확기에는 부녀자를 내도록 만들었다. 빈농은 모든 고역 때문에 부농보다 더 많은 해를 입는다. 부농은 지주를 위한 노동에서도 해방된다. 그럼에도 지주는 역시 부농을 매우 압박한다. 그래서 부농은 빈농과 함께 한 상태에 놓여 있는 지방과 관구가 국내에서 많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모든 전국 노동자와 빈농은 두 손으로, 두 길에서, 한 손으로는 모든 노동자와 동맹해서 모든 부르주아지에 대한 투쟁을, 다른 한 손으로는 모든 농민과 동맹을 맺어, 농촌에서 관리와 투쟁하고, 농노제를 강제하는 지주와 투쟁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빈농은 부농에게 분리해서 자신의 특수한 동맹을 결성하지 않는다면, 부농은 빈농을 속이고, 배척하며 스스로 지주 쪽으로 간다. 그리고 토지를 갖지 않은 농민을 그대로 내버려둘 뿐만이 아니라, 그에게 단결하는 자유를 주지도 않는다. 빈농이 부농과 함께 농노적 노예 상태에서 대항하지 않는다면, 빈농은 현 상태에서도 꼼짝 못하고, 도시 노동자와 단결하는 완전한 자유를 얻지도 못한다. 가난한 농민은 맨 처음에 지주를 공격해서, 최악의 가장 유해한 부역 제도에 따른 노예 상태만이라도 폐지시켜야만 한다. 이 점에서는 다수 부농과 부르주아지까지도 함께 빈농 쪽에 선다. 왜냐하면 지주의 거만함은 모든 사람을 싫증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주 권력을 축소시키자마자, 부농은 곧 가변을 벗어던지고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발톱을 편다. 그러나 이 발톱은 물건을 수집하는 발톱이고, 이미 많이 모아들였다. 그러므로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고, 강고하고, 파괴하기 어려운 동맹을 도시 노동자와 함께 조직하자.
도시 노동자는 지주의 나쁜 습관을 타파하기를 원조하고, 부농을 진압한다. 가난한 농민은 도시 노동자와 동맹 없이는 결코 모든 노예 상태와 모든 궁핍과 빈곤으로부터도 벗어나지 못한다. 도시 노동자 이외에는 어떤 사람도 가난한 농민을 원조할 수 없고, 자신을 믿는 이외에 어떤 사람에게도 맡길 수는 없다. 그러나 보다 빠르게 획득할 수 있는 위대한 투쟁이라는 첫 걸음에서 곧바로 획득할 수 있는 개선도 있다. 다른 국가에서는 오래 전에 소멸한 관리의 예속 상태가, 부역적·농노적인 노예 상태가 모든 전국 농민에게도 지금 곧 벗어날 수 있는 노예 상태가 국내에서도 많이 현존한다.
그렇다면 사회민주노동당은 모든 전국 농민을 적어도 최악의 농노적인 노예 상태에서도 해방하고자, 모든 부르주아지와 투쟁에서 가난한 농민의 손을 자유롭게 하고자, 먼저 어떤 개선을 쟁취할 수 있는가. 사회민주당에 따른 최초 요구로는 '납공할 의무가 있는' 농민에게 부과된 모든 배상금에 따른 지출, 모든 임대료 및 그 외 일체 부담을 폐지한다. 전국 황제의 귀족 위원회·귀족 정부는 농민을 농노적인 예속에서 해방했을 때, 농민에게 자신들의 사유 토지를, 더욱 농민이 예로부터 경작하고 있던 토지를 사도록 만들었다. 바로 약탈이다. 귀족 위원회는 황제 정부의 원조로부터 직접 농민을 약탈했다. 약간의 절단된 분유지를 받기를 바라지 않은 농민에게 대해서는 군사적 집행 처분 할 목적으로, 강제적인 재판 규정을 실시하고자, 황제 정부는 여러 지방에 군대를 파견했다. 군대 원조, 박해, 사살 없이는 귀족 위원회는 농노 해방 당시에도 농민을 약탈할 수는 결코 없었다. 지주와 귀족 위원회는 농민을 어떻게 기만하고, 약탈했는지를 농민을 늘 생각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현재에도 농민을 위한 새로운 법률이 심의될 때에는, 여전히 황제 정부가 늘 지주와 귀족 위원회를 임명했기 때문이다. 황제는 1903년 2월 26일자 선언을 발표했다. 그 속에서 황제는 농민에 관한 법률 수정과 개선을 약속했다. 그러나 누가 수정했는가. 누가 개선하는가. 그것은 다시 귀족이 한다. 또 관리가 한다. 농민 생활 개선을 위해 농민 위원회가 창립되지 않는 동안에도 농민은 늘 기만된다. 지주, 자치청 장관, 모든 관리는 이미 충분히 농민을 혹독하게 부렸다. 자치청 장관과 지사라고 부르는 모든 관리로부터, 모든 방탕한 귀족 자식의 예속은 충분하다. 농민은 스스로 자신의 사업을 수행하고, 스스로 새로운 법률을 심사하고, 실행하는 자유를 요구해야만 한다. 농민은 자유롭게 선거된 농민 위원회를 요구해야만 한다. 이걸 쟁취하지 않는다면 귀족 관리는 늘 기만하고, 약탈해간다. 농부 스스로 자신을 해방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운명을 자신의 손에 잡고자 연합하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이라도 관리 앞잡이로부터 해방하지도 않는다.
사회민주주의자는 배상금 지출, 임대료 지출, 그 외 일체 부담에 따른 완전하고, 즉각적인 철폐를 요구하고 있으며, 배상금에 따른 납입금을 인민에게 반환해주기를 요구한다. 모든 전국 농민은 귀족 위원회로부터 농노제에서 해방된 그때부터도, 수억 루블에 따른 돈을 지출한다. 농민은 돈을 도로 달라고 요구해야만 한다. 정부로부터 대지주 귀족에게 특별세를 부과시키자. 수도원과 제후가 영유하는 토지, 황제 가족으로부터 땅을 반환시키자. 대표자 인민 위원회로부터 농민 이익이 되도록 돈을 처분시키자. 국내에서도 농민에 대한 멸시, 농민에 대한 박해, 굶주려 죽는 수백만 농민의 무서운 사망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다. 귀족 위원회는 아직까지도 농민을 약탈했으므로, 농노 해방부터 매년 옛 농노 후계자에게 낡은 납공을 강요하고, 배상금과 임대료를 착취해 온 까닭에 국내 농민은 지금도 굶어 죽고 있다. 약탈하고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책임을 지도록 하자. 굶어 죽게 된 사람에게 참된 원조를 주고자 귀족과 대지주에게 돈을 징수하자. 굶어 죽는 농민에게 자선이나 약간의 선물도 필요 없다. 굶어 죽는 농민에게 매년 지주와 국가에게 바치고 있는 돈을 반환하도록 요구하자. 대표자 인민 위원회와 농민 위원회는 참 원조로부터 굶어 죽는 사람에게 충분하게 줄 수 있다.
사회민주노동당은 연대 제도와 토지 처분에 관해 농민을 압박하는 모든 법률에 따른 즉각적인 완전한 폐지를 요구한다. 1903년 2월 26일에 있었던, 황제 선언은 연대제에 따른 철폐를 약속한다. 이미 철폐에 관한 법률이 발표됐지만, 불충분하다. 그 외에 농민 토지 처분에 관해 농민을 압박하는 모든 법률에 따른 즉각적인 철폐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농민은 연대 제도가 철폐될지라도, 완전히 자유롭게 되지 못하고, 절반은 농노인 상태로 여전히 남게 된다. 농민은 자신의 토지를 처분하는 완전한 자유, 누구에게도 상의하지 않고, 토지를 양도하고, 마음에 맞는 사람에게 팔아 넘기는 완전한 자유를 얻어야만 한다. 모든 귀족·상인·시민은 자유롭게 토지를 처분할 수 있으나, 농민은 그렇지도 못하다. 농민은 갓난애다. 유모처럼 감시하고자 농민에게는 자치청 장관을 붙여둘 필요가 있다. 농민에게는 자신의 분유지 팔기를 금지해야만 한다. 그런 와중에도 분유지를 신용하는 바도 있어서, 농민에게 선을 희망하면서도, 농민에게는 토지를 팔기를 금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인민파와 사회혁명당원은 부화뇌동해서 국내 농민을 약간 노예 상태로 남겨두고는 토지를 팔지 않도록 하는 쪽이 좋다는 걸 인정해버린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자는 말한다. 한낱 허례허식이다. 그건 한낱 말뿐이다. 달콤한 언사에 지나지도 않는다. 사회주의를 쟁취할 때에는, 노동 계급이 부르주아지를 정복할 때에는 모든 토지가 공유되고, 누구라도 토지를 팔 권리는 없어진다. 그러나 그때까지 어떻게 할 건가. 귀족과 상인은 팔 수 있지만, 많은 농민은 팔 수 없다. 귀족과 상인은 자유지만, 농민은 절반인 농노 상태에 있다. 농민은 또 장관에게 허가를 얻어야만 한다. 따라서 달콤한 언사로 가려진 하나의 기만에 불과하다. 귀족과 상인에게 토지를 판다는 걸 허락되고 있는 이상, 그때까지 농민은 자신의 토지를 파는 완전한 권리와 귀족, 상인과 마찬가지로 매우 자유롭게 토지를 처분하는 완전한 권리를 가져야만 한다. 노동 계급이 모든 부르주아지를 정복할 때에는, 노동 계급은 대지주에게서 토지를 몰수한다. 노동하는 사람들은 함께 협력해서, 경작하고, 토지 경영자로는 자유롭게 위임할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하고, 노동을 경감하고자 모든 기계를 소유하고, 교대로 매일 8시간 때로는 6시간 노동을 하고자, 노동 계급은 대농장에서 협동조합 농업경영을 수립한다. 이전과 같이는 혼자서 경영하기를 바라는 소농은 시장에서 처음 만난 사람에게 팔고자, 경작하는 게 아니고, 노동 조합에 따른 빵, 고기, 채소를 제공하는 데 비해 노동자는 무료로 소농에게 농구, 가축, 비료, 의복, 그 외 필요한 모든 걸 제공한다. 금전 때문에도 대경영주와 소경영주 사이에서 투쟁이 생기지 않는다. 남을 위해 일하는 고용 노동은 없어지고, 모든 노동자는 스스로를 위해 일한다. 노동 상 모든 개선과 기계는 노동자 자신의 이익을 위해 노동을 경감하고, 생활을 개선하고자 이용된다. 그렇지만 모든 사려 깊은 사람들은, 사회주의가 단번에 실현되는 건 결코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모든 부르주아지와, 모든 사람들과, 모든 정부와 필사적인 투쟁을 감행해야만 한다. 또한 모든 전국에 걸친 모든 도시 노동자와 가난한 농민을 견고한 강철 같은 동맹으로 단결해야만 한다. 위대한 사업이다. 사업을 위해 전 생애를 바쳐도 아깝지 않을 만큼. 그러나 아직은 사회주의를 획득하지 못한 동안에는 대경영주는 늘 금전을 위해 소경영주와 투쟁한다. 과연 대농은 자유롭게 토지를 팔아도 좋으나, 소농은 토지를 팔면 안 되는가. 다시 한 번 되풀이하자. 농민은 갓난애도 아니다. 농민은 누구에게도 지배시키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농민은 매우 제한 없이 귀족과 상인이 가지고 있는 모든 권리를 손에 넣어야만 한다.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도 있다.
"농민 토지는 자신의 것이 아니고, 공동의 것이다. 그러므로 각자는 사회적인 토지를 파는 걸 결코 허락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건 또 하나의 기만이다. 귀족과 상인에게도 농민 같은 단체가 존재하지 않는가. 귀족과 상인은 짝이 되어 함께 토지와 공장을 그리고, 무엇이든 마음에 드는 걸 사지 않는가. 어찌해서 귀족 단체에는 아무런 압박도 가하지 않고, 농민에게는 모든 경찰에 따른 먹지도 못한 걸 제한과 금지를 하려고 기회를 노리는가. 결코 농민은 관리에게 선행을 받은 일이 없다. 다만 구타와 연공과 치욕을 받았을 뿐이다. 농민들은 스스로 모든 일을 스스로 손으로 하지 않는 동안, 완전한 평등에 따른 권리와 완전한 자유를 쟁취하지 않는 동안에는 결코 지위에 따른 개선을 기대할 수는 없다. 아무도 방해할 수는 없다. 자진해서 어떤 구성의, 어떤 형식의 단체라도 조직하는 데 동의하고 있고, 자유롭게 어떤 단체 계약에도 서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어떤 관리라도 농민에 따른 사회적인 문제에 간섭할 게 아니고, 누구라도 농민을 영리하게 만들려고도 않고, 농민을 위해 압박과 금지를 생각하게 해서는 안 된다.
사회민주주의자는 또 하나 농민을 위해 중대한 개선을 쟁취하고자 힘쓴다. 농민 귀족의 노예 상태, 농노적인 노예 상태를 즉시 제한하려고 힘쓰고 있다. 세상에 궁핍이 존재하고 있는 동안에는, 궁핍이 제거되지 않은 동안에는, 토지와 공장이 부르주아지 손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에서 주요한 힘이 돈인 동안에는, 사회주의 사회가 건설되지 않는 동안에는, 모든 노예 상태가 제거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직은 사회주의가 시행되지 않은 다른 여러 국가에서도 볼 수 없는 특히 나쁜 노예 상태가 국내 농촌에서도 많이 남아 있다. 모든 지주에게는 이익이지만, 모든 농민을 압박하고, 지금 당장에라도 폐지해야만 하고, 또 폐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농노적인 노예 상태가 국내에서도 많이 잔존한다. 그렇다면 어떤 노예 상태를 농노적인 노예 상태라고 부르는가. 모든 농촌 주민은 지주 토지가 농민 토지와 나란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농노해방기에는 농민으로부터 필요한 토지, 경지, 방목지, 숲, 그리고 용수지를 전달했다. 농민은 절단된 토지와 경지, 용수지 없이는 아무런 일을 할 수 없다. 좋거나, 싫거나 불문하고 지주에게 청해서 가축에게 물을 먹이든지, 경지를 달라고 해야만 한다. 그런데도 지주는 자신의 경영을 스스로 하지도 않고, 또 한 푼도 쓰지 않으며, 농민을 혹사시킨다. 농민은 절단된 토지로부터 지주에게 돈을 받지도 않고 노동한다. 자신의 말을 갖고, 지주 토지를 경작하고, 곡식과 벌판 풀을 모으고, 지주를 위해 곡식을 거두고, 어떤 곳에서는 지주 토지에다 자신의 비료를 뿌려주며, 지주의 집에는 옷감과 계란과 그 밖의 모든 음식을 가져다 준다. 농노제 시대와 똑같다. 농노 시대에 농민은 지주 세습지에 거주해서, 해당 지주를 위해 노동하며, 귀족 위원회 손에서 해방된 때에도 농민 손에서 떠난 동일한 토지 때문에 다만 지주를 위해 노동한다. 부역 제도와 완전히 틀리지 않는다. 어떤 지방에서는 농민 자신은 노동을 주인을 위한 노동, 또는 '판쉬나'라고 부른다. 바로 농노적인 노예 상태이다.
지주와 귀족 위원회는 농노해방 때에도 이전과 같이 농민을 사역시킬 수 있도록 고의로 농민 분유지를 절단해서, 쐐기처럼 지주 토지를 사이에 넣거나, 농민에게서 닭을 몰수해서 못 기르게 한다거나, 고의로 나쁜 토지에 이전시키거나, 용수지로 가는 길을 지주 토지로 막아버렸다. 농민들로 하여금 고난의 그물 속에 붙잡히도록, 이전과 같이 맨손인 채로 포로가 되도록 고의로 꾸며놓았다. 농촌은 국내에도 얼마나 있는가. 농민이 인근 지주 포로가 되어, 농노 시대와 똑같이 포로 상태에 놓여 있는 곳도 무수하다. 농촌에서는 빈농이나 부농이나, 모두 손 발이 묶여 지주 손에 결박된다. 따라서 빈농은 부농보다 훨씬 더 괴로운 생활을 한다. 부농은 자신의 토지를 소유하고, 주인을 위한 노동에 자신을 대신해서 농업 노동자를 보낸다. 반면에, 빈농은 몸둘 곳도 전혀 없고, 지주는 결박하려고 새끼를 꼰다. 농노 상태에 있는 빈농에게는 흔히 탄식할 시간도 없다. 지주에 대한 노동 때문에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없다. 모든 빈농과 도시 노동자와 하나의 동맹, 하나의 당에 자유롭게 연합한다는 건 생각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곧 단숨에 농노 상태를 폐지할 방법은 과연 없을까. 사회민주당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 두 가지 방법을 농민에게 제공한다. 그러나 모든 농노 상태에서 모든 가난한 농민을 구원한다는 건 오직 사회주의뿐이라는 걸 다시 한 번 되풀이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대체로 부자가 힘을 가지고 있으면, 그들은 늘 어떻게 해서든지 빈농을 압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농노 상태를 한 걸음에 결코 폐지할 수 없다. 그러나 빈농과 중농, 부농까지도 압박하는 가장 나쁘고 가장 추한 농노적인 노예 상태를 굳세게 배격해서, 곧 농민을 위해 현실 개선을 쟁취할 수 있다. 두 가지 방법이 있다.
1. 농촌에서 농업 노동자와 가장 가난한 농민, 부농과 지주로부터 신입받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자유롭게 선출된 재판소 설치다.
2. 자유롭게 선출된 농민 위원회다. 농민 위원회는 부역 제도 폐지와 농노제 잔재 폐지를 위해 모든 방법을 심의하고, 채택할 권리를 가질 뿐 아니라, 절단된 토지를 압수해서 농민에게 반환하는 권리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자세하게 살펴보자면, 신임을 받은 사람들은 자유롭게 선출된 재판소는 노예 상태에 관한 농민 호소를 모두 심사한다. 재판소는, 지주가 농민 궁핍을 이용해서 너무 비싸게 토지 차지료를 결정한다면, 인하하는 권리를 가진다. 재판소는 농민을 법 이외에도 지출에서 권하는 권리를 가진다. 지주가 여름 노동 절반 액수로부터 겨울에 농민을 고용했다면 재판소는 사건을 심사해서, 정당한 품삯을 사정한다. 물론 관리로 구성되지 않고, 자유롭게 선출된 신임받는 사람들로부터 구성된 농촌 농업 노동자와 가난한 농민으로부터 선출된 사람 수효는 반드시 부농과 지주로부터 선출된 사람 수효보다 적어서도 안 된다. 재판소는 또 노동자와 경영주 간 모든 사건도 해결한다. 노동자와 모든 가난한 농민은 재판소에서 보다 쉽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상호 간 연합을 성취해서, 어떤 사람들을 신용할 수 있고, 진실로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 쪽이 될 수 있는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또 하나 방법은 더욱 중대하다. 각 군에 따른 농업 노동자·빈농·중농으로부터 위임받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선출된 자유로운 농민 위원회다. 어느 사람이라도 어떤 노예 상태가 압박하는지는 농민 자신보다도 잘 알 수는 없다. 또한 농노적인 노예 상태로부터 생활해 온 지주 죄악을 농민 자신보다 더 잘 폭로할 수는 없다. 농민 위원회는 절단됐던 토지, 초원, 경지, 그 밖의 것이 어떻게 부정한 방법으로 농민 손에서 떠나갔는가를 심의한다. 그래서 토지를 그저 압수할 건가 또는 대지주로 하여금 토지를 구입한 사람에게 배상시킬지를 심의한다. 농민 위원회는 적어도 다수 귀족 지주 위원회가 몰아넣은 고난의 그물로부터 농민들을 해방한다. 농민 위원회는 관리 간섭에서 농민을 구원하고, 농민 자신이 자신의 일을 처리하기를 원하고, 또 처리할 수 있다. 그리고 농민과 궁핍을 상의하고, 참된 가난한 농민 쪽이 되어, 도시 노동자와 동맹을 위해 일어설 수 있는 사람들을 조사하는 등 원조한다. 농민 위원회는 벽촌에서 농민이 자신의 발로 일어서서,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운명을 쥐기 위한 첫걸음이 된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자인 노동자는 농민에게 경고한다.
- 어떤 귀족 위원회, 어떤 관리 위원회도 신용하지 말라.
- 대표자 전체 인민 회의를 요구하라.
- 농민 위원회 창립을 요구하라.
- 모든 서적과 신문을 인쇄하는 완전한 자유를 요구하라.
모든 사람은 아무도 무서워하지 않고, 대표자 모든 인민 위원회, 농민 위원회, 신문지상에서 자신의 의견과 희망을 진술하는 권리를 가질 경우, 누가 노동자 쪽이 되고, 누가 부르주아지 쪽이 되는가는 매우 빠르게 알려진다. 매우 많은 사람들은 이 사실을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 자신의 진짜 의견을 숨기고 있던 몇몇은 고의로 속였다. 그러나 앞의 경우에는 모든 사람들이 이 사실을 생각하고, 숨길 필요도 없게 되며, 모든 문제를 빠르게 알아갈 수 있다. 이미 부르주아지가 자신의 쪽으로 부농을 끌어당기고 있다. 농노제 노예 상태를 보다 빠르게 폐지할수록, 그 정도가 크면 클수록, 농민이 참된 자유를 보다 많이 획득할수록, 가난한 농민은 더욱 빠르게 서로 연합하고, 부농도 더욱 빠르게 모든 부르주아지와 결합해간다. 그리고 마음대로 결합시키도록 하자. 부농이 결합으로부터 더 강력하게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으나, 무서워하지는 않는다. 같이 연합하면 된다. 동맹으로부터, 가난한 농민과 도시 노동자 동맹은 더욱 헤아릴 수 없을만큼 다수이고, 상대 쪽 10만 명 동맹에 비해 수천 만 명의 동맹이 된다.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쪽으로 중농과 소농을 끌어들이고자 노력한다. 기만하려고 애쓰고, 충동질하고, 분리시키고, 각 개인을 부농으로 만들겠다고 큰소리친다. 부르주아지가 어떤 수단으로, 어떤 기만책으로 중농을 충동질하는지를 이미 말했다. 그러므로 가난한 농민에게 눈을 열어주고, 부르주아지에 대한 도시 노동자와 가난한 농민에게 있어 특수한 동맹을 공고하게 해야만 한다. 농촌 각 주민으로 하여금, 자신의 주위를 잘 살피도록 하자. 부농이 얼마나 자주 영주와 지주에 대해 반대말을 하고 있는지를. 인민에 대한 압박을 호소하고, 영주 토지가 황폐하게 내러벼졌다고 얼마나 죽는 소리를 해대는가. 농민이 토지를 압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떠들어대기를 또 얼마나 즐기는가.
부농이 말하는 걸 믿을 수 있는가. 아니다. 빈농들은 인민을 위해 토지를 바라고 있다. 빈농은 이미 토지를 매입하든지, 임차해서 손에 넣었다. 그러나 아직 충분하지는 못하다. 지주에 대항해서 빈농은 오랫동안 부농과 함께 걸어 나갈 수는 없다. 다만 지주에 대항한 첫 단계에서만 부농과 함께할 수 있을 뿐이며, 다음 단계에서는 다른 길을 걷는다. 따라서 처음 한 걸음 뒤에 밟는 중요한 걸음은 분명하게 구별한다. 농촌에서 첫 걸음은 농민의 완전한 해방으로부터 농민이 얻을 완전한 권리와 절단지 반환을 위한 농민 위원회 설치다. 그리고 농촌과 도시에서 밟아야 할 마지막 걸음은 모든 토지와 공장을 모든 지주와 부르주아지로부터 몰수해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해간다. 처음과 마지막 걸음 사이에서 적지 않은 투쟁을 치루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첫 걸음과 마지막 걸음을 혼동하는 사람은 투쟁을 방해하는 사람이며, 자신으로는 알지도 못하고, 빈농의 눈을 가리고 마는 사람이다. 가난한 농민은 처음 한 걸음을 모든 농민과 함께 밟고 나간다. 일부 부농은 퇴각을 시작하고, 100명의 농민 가운데 한 사람은 어떤 노예 상태라도 달갑게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대한 인민 큰 덩어리는 하나를 위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 평등권은 모든 농민에게 필요해진다. 지주로부터 노예 상태는 모든 사람의 수족을 결박시킨다. 그러나 마지막 걸음을 모든 농민이 함께 걸어가는 일은 결코 없다. 같은 시기에 모든 부농은 농업 노동자에게 반항하고, 또 일어선다. 거기서 먼저 빈농과 사회민주주의자인 도시 노동자와 공고한 동맹이 필요하다. 농민에게 처음과 마지막 걸음을 함께 밟고, 나갈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농민을 기만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농민 자신 간에 일어나는 위대한 투쟁을 잊어버린다.
사회민주주의자는 농민에게 주지육림 같은 이상향을 약속하는 게 아니다. 사회민주주의자는 먼저 모든 노동 계급에 따른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투쟁을 위해, 폭 넓은 모든 국민적 투쟁을 위해서도 완전한 자유를 요구한다. 사회민주주의자는 적지만, 확실한 첫 걸음을 지시한다. 일부 사람들은, 노예 상태 제한과 절단지 반환을 위해 농민 위원회를 창설하려는 요구가 장애와 장벽이 된다고만 생각한다. 그 이상 더 나아가지도 말라고 말한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사회민주주의가 희망하는 데 있어 대단히 곡해하고 있다. 노예 상태 개선과 절단지 반환을 위해 농민 위원회를 설립하려는 요구는 장애도 아니다. 요구는 하나의 문이다. 보다 멀리, 넓게 열린 길을 따라 가장 끝까지 가려면, 국내에서도 모든 노역자 대중을 완전하게 해방시키는 데까지 나아가려면, 먼저 이 문에 들어가야만 한다. 농민은 이 문을 빠져 나가지 않고서는, 암흑 속에서, 노예 상태 속에서만 남아 있다. 완전한 권리나, 참된 자유 없이 농민은 자신들 안에서 노동자 동무가 누구고, 적이 누구인가를 철저하게 구분하지도 못한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자는 문을 가리키고, 먼저 모든 공동체, 모든 인민은 문으로 몰려와서, 타파해야만 한다고 말해야만 한다. 그러나 자신을 인민파라거나, 사회혁명당이라고 일컫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도 농민에게 선행하기를 바라고, 떠들고, 부르짖고, 손을 휘두르며 원조를 희망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 문을 보지 않는다. 농민에게 자신의 토지를 자유롭게 지배할 권리를 전혀 줄 필요가 없다고 말할 때마다, 그들은 얼마나 눈이 먼 자들이던가. 그들은 때때로 농민에게 '선행을 하라'는 등 농노 소유자와 같은 말을 한다. 동무로부터는 원조를 많이 얻지도 못한다. 자신이 파괴하지 안흐면 안 될 최초의 문이 분명하게 보이지 않는다면, 농민에게 아무리 선행하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도시뿐만 아니라, 농촌 지주, 공동체 내부 부농에 대항해서 자유로운 국민적인 투쟁 길로 어떻게 나가야 하는지도 모른다면, 아무리 사회주의를 위해 노력한들 무엇을 획득할 수 있는가. 따라서 사회민주주의자는 꾸준하게 가장 가까운 최초 관문을 지시한다. 현재 모든 종류로부터 선량한 희망을 말하고, 참된 길을 지시하고, 어떻게든 처음 한 걸음을 밟고 나가는가를 분명하게 깨닫도록 하는 건 곤란하지 않다. 국내 농민은 노예 상태에 떨어져 있어 그로 인해 고생하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미 40년 간이나, 농민의 동지들이 직접 글로 쓰기도 하고, 연설하기도 했다. 지주가 모든 절단지를 빌미로 해서 얼마나 불법적으로 농민을 약탈하고, 혹사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국내 사회민주주의자가 나타나기 오래 전부터 농민 모든 동지로부터 많은 책도 씌어졌다. 농민을 곧 구제해야만 하고, 노예 상태에서 미약하게나마 해방해야만 한다는 건 모든 정직한 사람들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경찰과 정부 관리까지도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첫 걸음을 내딛는가. 그리고 먼저 어떤 문을 파괴할 지에 달려 있다.
해당 문제에 대해 여러 사람들은 특히 농민에게 선행하기를 원하는 사람 가운데 두 가지 다른 해답을 준다. 모든 농촌 프롤레타리아는 두 가지 해답을 분명하게 깨달아야만 하고, 스스로 확정적인, 강고한 의견을 갖도록 노력한다. 인민파와 사회혁명당원은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먼저 농민 사이에서 모든 종류의 협동조합을 발달시켜야만 한다. 공동체 동맹을 공고하게 한다. 각자 농민에게 자신의 토지를 자유롭게 처분할 권리를 줄 필요는 없다. 공동체로 하여금 권력을 더 많이 갖도록 하자. 국내 모든 토지를 영구하게 공동체 토지로 만들자. 토지가 보다 쉽게 자본에서 노동에 이전되도록 토지 구매에 관한 모든 걸 농민에게 경감하도록 해야만 한다."
사회민주주의자는 다른 해답을 내린다.
"농민은 먼저 귀족과 상인이 가지고 있는 모든 권리를 예외 없이 쟁취한다. 농민은 자신의 토지를 자유롭게 처분하는 완전한 자유를 가진다. 가장 더러운 노예 상태를 절멸시키고자, 절단지 반환을 위해 농민 위원회를 창설해야만 한다. 공동체 동맹이 필요한 게 아니고, 모든 국내에서 가지각색 농민을 모아놓은 가난한 농민 동맹, 도시 노동자와 농촌 프롤레타리아 동맹이 필요하다. 모든 종류의 협동조합과 공동체 토지 구매는 늘 부농에게만 많은 이익을 주고, 중농을 기만해간다."
국내 정부는 농민에 대한 억압을 완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국내 정부는 대단하지도 않은 완화로 그때만을 모면하고, 모든 일을 관리시켜 처리한다. 귀족 위원회는 농민들을 기만하듯이, 관리 위원회도 농민들을 속였기 때문에 농민들은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농민은 자유로운 농민 위원회 선거를 요구해야만 한다. 문제는 관리로부터 예속 완화를 기대하는 게 아니라, 농민 자신이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운명을 움켜쥔다는 점에 있다. 처음에 다만 첫 걸음을 내딛도록 하자. 처음에는 다만 가장 나쁜 노예 상태에서 해방하자. 적어도 농민들에게도 자신의 힘을 느끼게 하고, 자유롭게 상의하도록 하여 연합하자. 양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절단된 토지가 흔히 가장 불법적인 농노적 노예 상태에 쓸모 있다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양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장 초보적이고, 가장 정당한 요구가 바로 농민으로 하여금 모든 농노적인 노예 상태 폐지를 위해 관리가 참가하지 않은 농민 위원회를 자유롭게 선출하도록 하자는 걸 안다. 자유로운 농민 위원회에서 사회민주주의자는 모든 힘을 다해, 농촌 프롤레타리아와 도시 프롤레타리아의 특수한 동맹을 공고하게 한다. 사회민주주의자는 농촌 프롤레타리아의 이익을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하고, 될 수 있는 대로 빠르게 첫 걸음을 내딛고, 결속해서, 두 걸음, 세 걸음을 내딛으며, 프롤레타리아에 따른 완전한 승리를 쟁취할 때까지 원조한다. 내일 두 번째 걸음을 내딛는 데 있어, 어떤 요구를 내걸을 건지를 지금 당장 말할 수 있는가. 아니다. 결코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부농과 모든 협동조합에 종사하는 많은 교양인들은 내일 어떤 태도를 취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음 날 지주와 결합하지 못하고, 지주 권력을 끝까지 타도할지도 모른다. 훌륭한 일이다. 사회민주주의자에게는 좋은 일이다. 그리고 사회민주주의자는 도시와 농촌 프롤레타리아에게 모든 토지를 지주로부터 압수해서, 자유로운 인민 국가에게 양도하기를 요구하도록 충고한다. 사회민주주의자는 농촌 프롤레타리아가 기만당하지 않도록, 프롤레타리아의 완전한 자유 쟁취라는 종국적인 투쟁을 위해 보다 잘 결합하도록 주의 깊게 살핀다.
그러나 다른 양상이 벌어질지는 알 수 없다. 정반대의 사태가 일어나리라 예상하는 건 그럴듯할지도 모른다. 부농과 많은 교양인들은 열악한 노예 상태가 일단 완화되고, 배제되자마자, 내일이라도 지주와 결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농촌 프롤레타리아에 반대해서, 모든 농촌 부르주아지는 일어선다. 지주만을 투쟁 대상으로 삼는 건 참으로 우스꽝스럽다. 모든 부르주아지와 싸우고, 먼저 투쟁을 위해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자유와 활동 여지를 요구하고, 투쟁을 용이하도록 하고자, 노동자에 따른 생활고 경감을 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쨌든 가장 중요하고도, 당연한 임무는 농촌 프롤레타리아와 절반인 프롤레타리아, 도시 프롤레타리아 동맹을 공고하도록 한다. 동맹을 위해 인민의 완전한 정치적 자유와 농민의 완전한 평등과 농노적 노예 상태 폐지가 필요하다. 그리고 동맹이 결성되고, 공고하게 될 때에 부르주아지가 중농을 충동질해 온 모든 기만을 보다 쉽게 폭로할 수 있다. 모든 부르주아지에게, 정부의 모든 힘에 대항해서 쉽고 재빠르게 두 걸음, 세 걸음, 그리고 마지막 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 틀림없이 승리 길로 나아가 속히 모든 노동 대중에 따른 완전한 해방을 쟁취한다.
7. 농촌에서 계급 투쟁
계급 투쟁이란 무엇인가. 인민 일부분에 따른 다른 부분에 대한 투쟁이고, 압박 당하는 권리 없는 노역자 대중에 따른 특권 소유자·압박자·기생자에 대한 투쟁이고, 고용 노동자·프롤레타리아 토지 소유자 또는 부르주아지에 대한 투쟁이다. 국내 농촌에서는 위대한 투쟁이 계속 진행됐고, 지금도 진행된다. 모든 사람들은 투쟁을 인정하지만, 그 의의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농노제가 존재했을 때, 모든 노동 대중은 황제 정부를 방위하고, 보호하고, 지지하고 있던 자신들의 압박자·지주 계급과 싸운다. 농민은 연합할 수도 없었다. 농민은 그 당시에 암흑 세계에 짓눌리고 있었다. 농민은 도시 노동자와 형제 관계에 있지도 못하고, 원조도 받지 못했다. 그러나 농민은 할수 있는 한 힘 닿는 데까지 싸웠다. 농민은 정부 박해와 사형 집행·태형을 무서워하지도 않았다.
'농노제는 신의 성전으로부터 채용되고, 신으로부터 교지된다.'
모든 힘을 다해 설교한 승려를 농민은 믿지 않았다. 농민은 여러 곳에서 봉기하고, 정부는 농민 총 봉기를 두려워해서 양보했다. 농노제는 폐지됐으나, 완전히 폐지된 건 아니었다. 농민은 권리가 전혀 없는 하등 납공 의무만 있는 비천한 신분으로 남겨졌다. 그러므로 농민은 아직도 계속해서 동요한다. 농민은 완전하고, 참된 자유를 찾아가고 있다. 농노제 폐지 뒤로 새로운 계급 투쟁,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간 투쟁이 벌어진다. 부는 더욱 커지고, 철도가 부설되고, 큰 공장이 건설되고, 도시는 더욱 더 인구가 늘어가고, 보다 더 화려해진다. 그러나 소수 사람들은 모든 부를 자신의 손아귀에 쥐고, 인민은 더욱 가난하게 되어, 파산하고, 굶주리고, 남의 밑으로 고용 노동을 하러 떠난다. 도시 노동자는 모든 가난한 사람에게 모든 부자에 대한 새로운 위대한 투쟁을 시작한다. 도시 노동자는 사회민주당 아래에 연합해서,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가서 위대한 종국적인 투쟁을 준비하고, 모든 인민을 위해 정치적 자유를 요구하면서, 꾸준하게 굳게 협력하고, 자신의 투쟁을 감행한다. 드디어 농민은 견디지 못한다. 1902년 봄 폴타바, 하르코프 및 기타 여러 지방에서도 농민들은 분개했다. 농민들은 지주에게 몰려가서 지주 곡창을 열어젖히고, 전 재산을 스스로 분배하고, 농민이 씨 뿌리고 거두었고, 또한 지주가 집어간 곡식을 굶주린 사람들에게 주고, 토지를 새롭게 분배하도록 요구했다. 농민은 극도의 압박을 견디지 못해 보다 좋은 토지를 찾아갔다. 농민은 투쟁하지 않고, 굶어 죽기보다는 압제자와 투쟁으로 죽는 쪽이 더 낫다고 결심했다. 그렇지만 농민은 보다 좋은 토지를 쟁취하지는 못했었다.
황제 정부는 농민들을 일반 폭동자, 약탈자라고 선고했다. 황제 정부는 적을 대하듯이 군대를 보냈다. 그래서 농민은 패했다. 농민들은 총에 맞아죽고, 짐승같이 몸을 찢기고, 죽을 정도로 얻어맞았다. 황제 정부는 농민들을, 아무리 터키인이라도 결코 자신의 적인 기독교도로부터 그럴 정도로 잔인하게 하지는 않을 만큼 학대했다. 황제의 사자인 지사는 실제로 사형 집행인같이 누구보다 많이 혹독하게 폭동을 자행했다. 병사는 농민의 처와 딸에게 능욕을 가했다. 모든 걸 다한 뒤에 농민을 관리 재판으로부터 판결하고, 농민에게는 지주를 위해 80만 루블을 내도록 했다. 수치스럽고, 비밀스러운 고문 재판에서 변호인은, 황제 사자, 오보렌스크 지사, 그 외 황제 종복이 어떻게 농민을 학대하고, 괴롭혔는지를 말하는 건 허락되지도 않았다. 농민은 옳은 사업을 위해 싸웠다. 국내 노동 계급은 황제의 종복들로부터 총에 맞거나, 얻어맞아 죽은 수난자들을 회고하며, 늘 존경한다. 이 수난자들은 노동 대중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싸운 전사였다. 농민은 참패했다. 그러나 더욱 일어난다. 최초의 패배로부터 의기가 꺾이지는 않는다. 자각한 노동자는 도시와 농촌에 따른 노동 대중에게 농민 투쟁에 대해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알도록 하고, 보다 희망 있는 새로웉 투쟁을 분비하고자 전력을 다한다. 계급 의식을 가진 노동자는 농민이 패배하고, 농민 봉기가 진압된 이유는 무엇이고, 황제와 황제 부하에게 농민과 노동자가 승리를 얻기 위해 무엇을 하는지를 농민에게 분명히 보여주고자 모든 힘을 다하여 애쓴다. 농민 봉기가 진압된 이유는 무지하고, 의식 없는 대중 봉기, 곧 일정하고, 명백한 정치적 요구, 국가 기구를 바꾸라는 요구가 없는 봉기였기 때문이다. 또한 농민 봉기는 준비가 없는 까닭에 진압됐다. 그리고 농민 봉기는 농촌 프롤레타리아가 도시 프롤레타리아와 연합하지 못한 까닭에 진압됐다. 최초 농민 봉기가 실패한 세 가지 원인이다.
봉기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목적 의식을 가지고, 준비를 잘 갖추고, 모든 국내를 장악하고, 또 도시 노동자와 동맹을 맺어야만 한다. 그리고 도시 노동자 투쟁에서 한 걸음, 한 걸음은, 사회민주주의 책자와 신문 하나 하나는, 농촌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계급 의식이 있는 노동자 연설 한 마디, 한 마디는 봉기를 자주 일어나도록 하고, 승리로 끝마칠 수 있도록 가까이 오도록 한다. 농민은 더욱 견딜 수 없기 때문에, 말 없이 또 반항 없이 죽기를 원하지는 않기 때문에, 스스로 봉기해갔다. 농민들은 모든 약탈과 압박과 고통을 너무나도 심하게 받아왔기 때문에, 또 황제의 은총에 대한 나쁜 평판의 진상을 전혀 의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굶주린 사람들, 일생 동안 남을 위해 노동한 사람들, 씨 뿌리고 또 거둬들인 사람들, 그러나 지금 지주 곡식 창고 옆에서 굶어 죽게 된 사람들, 곡식을 분배하는 게 정당하고 믿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부자, 곧 지주와 부르주아지들이 보다 좋은 토지와 공장을 움켜쥐고, 인민을 노동시키고 있다는 점을 농민은 잊어버리고 만다. 농민은 부자 계급의 옹호를 위해 승려가 설교할 뿐만이 아니라, 많은 관리와 병사를 가진 황제 정부도 또한 황제의 옹호를 위해 만들어진다는 점을 잊어버리고 만다. 황제 정부는 이 점을 농민에게 깨닫도록 한다. 황제 정부는 짐승같이 참혹하게 국가 권력이 무엇이고, 누구에게 도움을 주고, 누구를 옹호하는지를 농민에게 알린다.
다만 될 수 있는 대로, 교훈을 농민에게 상기시키면 된다. 농민들은 국가 기구 전환이 왜 필요하고, 정치적 자유가 왜 필요한지를 쉽게 깨달을 수 있다. 매우 많은 국민은 이 점을 깨달으며, 매우 무식하지 않은, 사려 깊은 모든 농민이 무엇보다 먼저 쟁취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세 가지 중요한 요구를 안다면, 농민 봉기는 계획 없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첫째 요구는, 전제적 지배를 탈피하고, 국내에서도 인민 지배 확립을 위해 대표자 모든 인민 회의를 소집한다.
둘째 요구는, 모든 사람들과 각 분야 살마에게 도서와 신문을 인쇄할 완전한 자유를 갖도록 한다.
셋째 요구는, 농민과 다른 신분과 완전한 평등을 법률로 인정하고, 최우선으로 모든 농노적인 노예 상태 폐지를 위해 선거로부터 농민 위원회를 건설한다.
세 가지는 사회민주주의자에게 중요하고, 기본적인 요구다. 그리고 요구를 깨닫고, 인민 자유를 위한 투쟁을 어디서부터 시작할지를 깨닫는 건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농민은 요구를 깨달을 때, 비로소 빠르게 장구하고, 꾸준하고, 굳세게 투쟁을 준비하고, 또 혼자가 아니라 도시 노동자, 사회민주주의자와 함께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금방 깨닫는다. 자각한 농민 개개인과 노동자 개개인으로 하여금, 곁에서 가장 총명하고, 가장 장래성 있고, 가장 용감한 동지들을 모으도록 하자. 모든 사람들은 어떤 투쟁을 수행하고, 무엇을 요구할지를 깨닫고자, 사회민주주의자는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를 설명하도록 노력하게 하자. 자각한 사회민주주의자로부터 서서히 주의 깊게, 그러나 꾸준하게 자신의 학설을 농민에게 가르치고,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소책자를 읽도록 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작은 모임에서부터 소책자를 설명하도록 하자. 그러나 서적으로부터 사회민주주의 학설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말고, 주위에서 생기고 있는 모든 압박과 부정을, 각각의 실례로부터 겨를을 포착하고,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회민주주의 학설은 모든 압박에 대한 투쟁, 모든 약탈에 대한 투쟁, 모든 부정에 대한 투쟁에 대한 학설이다. 오로지 압박 원인을 알고, 자신의 전 생애에 있어 어떤 경우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싸우는 사람만이 참된 사회민주주의자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가. 자각한 사회민주주의자는 자신의 도시와 농촌에서 함께 모여, 모든 노동 계급에게 이익을 가져오고자 어떻게 일을 할 수 있는지를 스스로 결정해야만 한다.
한 두 가지 경우로는, 사회민주주의자인 노동자가 자신의 농촌에 찾아왔을 때, 모든 농촌은 거미줄에 걸린 파리와 같이 인근에 사는 지주에게 손발이 잡혀 일생을 노예 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노예 상태에서 어디로도 도망갈 곳도 없다. 가장 총명하고, 사려 깊으며, 장래성 있는 농민을 선택해서, 농민에게 왜 노예 상태에 빠져 있는가를 설명하고, 또한 지주가 어떻게 농민을 기만해서, 귀족 위원회에서 어떻게 농민을 착취하는지를 폭로하고, 부자의 힘과 황제 정부의 지지를 널리 알리고, 더 나아가 사회민주주의자인 노동자 요구에 대해 말해야만 한다. 농민이 지극히 간단한 모든 기구를 이해할 경우에는 지주에게 일제히 공격할지, 아니면 최초의 중요한 요구, 도시에서는 노동자가 자신의 요구를 공장주에게 제출할 지를 협력해서 잘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주로부터 큰 촌락이나, 몇몇 마을이 노예 상태에 놓여 있다면, 믿을 수 있는 사람들로부터 부근 사회민주당 위원회에서 안내문을 입수하는 게 가장 좋다. 사회민주당 위원회는 안내문 내용 안에서 처음부터 농민은 어떤 노예 상태로 고통을 받는가. 제일 먼저 무엇을 요구하는가. 구체적으로 말하면, 토지 임차료를 더 저렴하게 하고, 겨울철 고용 때에도 실제 가격으로 계산하고, 절반 가격으로 계산하지 말고, 가축이 밭을 밟거나, 곡식을 먹을 때 생긴 손해에 대해 배상을 요구하지도 말고, 다른 여러 가지 요구에 대해 압박하지도 말기를 적어놓는다. 안내문으로부터 문자를 읽을 줄 알게 된 농민은 문제를 잘 깨닫고 나서부터, 문제를 읽을 줄 모르는 농민에게 내용을 잘 설명해준다. 그렇게 되면 농민은, 사회민주주의는 같은 쪽이 되어 일어서고, 또 사회민주주의자는 모든 약탈을 배격한다는 걸 분명하게 알아간다. 농민은 결속해서 일어선다면, 어떠한 경감이 아무리 적더라도, 경감임을 틀림없다는 걸 알고, 쟁취할 수 있는가 하고, 모든 국가에서 어떠한 큰 경감을 사회민주주의자인 도시 노동자와 위대한 공동 투쟁으로부터 쟁취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깨닫는다. 농민은 더욱 열심히 투쟁을 준비해가고, 장래성 있는 투사를 어떻게 찾아내고, 자신의 요구를 위해 어떻게 협력하고 일어서는지를 배우게 된다. 도시 노동자가 하고 있듯이, 파업을 일으키는 데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
실제로 농촌에서는 더욱 곤란하지만, 때때로 실행할 수는 있다. 다른 여러 국가에서는 지주와 돈 많은 농민은 다수의 노동자를 필요로 하는 농번기에 노동 대중이 성공적으로 파업을 일으킨 적도 있었다. 빈농이 파업을 준비하고, 모든 사람은 일반적인 요구에 대해 이미 오래 전부터 동의하고, 요구가 안내서 안에서 설명되든지, 또는 모임에서 충분히 토론된 경우에는 모든 사람들이 결속해서, 일어선다. 따라서 지주는 양보하거나, 약간의 약탈로부터 겨우 생활을 유지한다. 파업의 결속을 굳게 하고, 원기 왕성한 시기에 일어난다면, 지주와 군대를 가진 관청이더라도, 어떠한 수단으로든 기만하기는 곤란해진다. 시일이 경과해서, 지주에게 파산이 닥쳐올 때에 지주는 속이 수그러든다. 물론 새 사업이다. 새 사업은 처음에는 잘 되지 않는다. 도시 노동자도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단결된 투쟁을 하지는 못했다. 또 협력해서 어떤 요구를 제출할지를 알지 못하고, 단순히 기계를 부수고, 공장을 파괴했을 뿐이다. 노동자는 결속해서 일어선다고 하더라도, 먼저 한 걸음 내디디면, 힘든 상태 경감 이상은 쟁취하지 못하더라도, 인민은 협력적 공격에 익숙해져서, 더욱 더 결정적인 투쟁을 준비한다는 걸 깨닫는다. 따라서 농민은 가장 흉포한 약탈자에게 어떻게 공격을 가하고, 결속해서 경감을 어떤 방법으로 요구하고, 어떻게 자유를 위한 위대한 투쟁을 서서히, 억세게 전국적으로 준비해야 하는가를 깨닫는다. 자각한 노동자와 농민 수효는 더욱 늘어가고, 농촌 사회민주주의자 동맹은 더욱 더 강고해서, 지주로부터 노예 상태, 승려로부터 납공 경찰의 포학, 경찰의 압박이 있을 때마다 더욱 더 인민의 눈을 뜨고, 인민을 결속한 맞서는 힘에 대해 국가 제도를 변혁하는 게 필연적이라는 사상에도 익숙해진다.
소책자 맨 처음에는 도시 노동자는 길거리, 광장으로 나가서 모든 사람 앞에 공공연하게 자유를 요구하고,
'전제 정부를 타도하라!'
라고 깃대에 쓰고, 또한 구호를 부르짖는다고 말했었다. 도시 노동자 대중은 다만 길거리에서 부르짖고, 행진하기 위해서만 아니라, 위대한 결정적인 투쟁을 위해 일어서는 날이, 노동자는 한 사람같이
"우리는 투쟁이라는 파도 속에서 죽든지, 그렇지 않으면 자유를 획득한다."
라고 부르짖는 날이, 투쟁이라는 파도 속에 죽고 넘어질 100명을 대신해서, 새로운 보다 더 확고한 1000명의 투사는 일어서는 날이 속히 다가온다. 농민도 모든 국내 도처에서부터 일어나서, 도시 노동자를 원조하고, 농민과 노동자 자유를 위해 최후까지 싸운다. 어떤 황제 쪽 연대도 대항할 수 없다. 승리는 노동 대중 머리 위에 온다. 그리고 노동 계급은 모든 노역자를 속박으로부터, 해방하고자 드넓은 길을 걸어 나간다. 노동 계급은 사회주의 쟁취를 위한 투쟁에서 자유를 이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