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상품

 

1-1. 상품사용 가치와 그 가치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의 부() ‘방대한 상품더미로 나타나며개개의 상품은 이 부의 기본 단위를 이룬다. 따라서 이 체제에 대한 분석은 상품 분석에서 시작한다상품은 인간 외부에 존재하는 하나의 대상이며, 그 속성으로 인간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킨다이때 욕구의 성격이나 기원은 중요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상품이 그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식, 곧 소비재로 직접적으로 만족시키는지 또는 생산적으로 간접적으로 만족시키는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철이나 종이와 같이 유용한 물건은 질적 및 양적 측면에서 고찰할 수 있다. 각각의 물건은 수많은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특정한 유용성을 제공한다. 이처럼 다양한 용도를 발견하는 일은 인류 역사의 과제다유용한 물건의 양을 측정하는 사회적 척도를 찾아내는 일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척도들이 다양한 이유는 측정 대상의 본질적인 성격과 사회적 관습 때문이다.


물건의 유용성은 그 물건을 사용 가치로 만든다. 이 유용성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며, 상품의 물리적 속성에서 비롯되고 상품 자체와 분리될 수 없다. 따라서 철, 밀, 금강석 등 상품 자체가 사용 가치이자 유용한 물건이다상품의 이러한 속성은 그 유용성을 얻고자 인간 노동이 얼마나 투입됐는지와는 무관하다. 사용 가치를 논할 때는 항상 일정량(몇 개의 시계몇 톤의 철몇 미터의 아마포)을 전제로 한다상품의 사용 가치는 상품학이라는 특정 학문의 연구 대상이며, 오직 사용이나 소비로만 실현된다사용 가치는 사회적 부의 형태와 관계없이 부의 물질적 내용을 구성한다. 우리가 분석하는 사회에서는 사용 가치가 동시에 교환 가치를 지닌 물건이다교환 가치는 일차적으로 양적 관계곧 특정 종류의 사용 가치가 다른 종류의 사용 가치와 교환되는 비율로 나타난다그런데 이 비율은 시공간에 따라 끊임없이 변동하므로교환 가치는 우연적이고 순전히 상대적으로 보인다. 따라서 상품 자체에 내재된 교환 가치라는 개념은 일종의 형용 모순으로 비치기도 한다. 이 문제를 더 깊이 고찰해 보도록 하자.

 

밀 1리터 X량의 구두약, Y량의 명주, Z량의 금 등 다양한 상품과 여러 비율로 교환될 때, 이는 밀이 하나가 아닌 수많은 교환 가치를 가진다는 의미다. 여기서 X량의 구두약, Y량의 명주, Z량의 금은 모두 밀 1리터의 교환 가치를 표현한다따라서 이들은 교환 가치로서 동일한 크기를 지닌 동일물로 대체될 수 있다.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첫째특정 상품의 다양한 교환 가치들은 모두 동일한 '어떤 것'을 표현한다. 둘째교환 가치는 그 자체와는 구별되는 어떤 내재적 내용의 표현 양식이자 현상 상태에 불과하다. 1리터 밀과 X킬로미터 철이 교환되는 등식, '1L 밀 = Xkg' 철은 두 개의 서로 다른 물건, 곧 밀과 철에 공통된 어떤 것이 동일한 양만큼 들어 있음을 의미한다. 교환 가치로서 이 두 상품은 각각 이 공통의 제3자로 환원될 수 있다. 

 

간단한 기하학의 실례로부터 이 원리를 설명할 수 있다. 우리는 다양한 다각형의 면적을 구하고, 비교하고자 그것들을 삼각형으로 분해한다. 그리고 이 삼각형 자체를 겉모습과 전혀 다른 표현인 밑변과 높이의 곱에서 1/2로 환원한다이와 마찬가지로상품의 교환 가치 역시 공통적인 어떤 양을 표현하며 그 양으로 환원된다상품에 공통된 그 무엇은 기하학적, 물리학적, 화학적 또는 그 밖에 자연적 속성일 수 없다그러한 속성들은 상품의 유용성, 곧 사용가치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품의 교환 관계는 그들의 사용 가치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명확한 특징을 지닌다. 곧, 교환 관계에서 어떤 특정 사용 가치는 그것이 충분히 존재하기만 하면 다른 어떤 사용 가치와 마찬가지로 유용하다또는 노련한 바본이 언급한,더욱 가벼운 신화폐 주조에 관한 이야기에 따르면,


‘하나의 상품과 다른 상품은 그 교환 가치가 같다면 차이가 없다. 동일한 크기의 교환 가치를 지닌 물건들 사이에는 어떠한 질적 차이나 구별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100원의 가치를 지닌 납이나 철은 100원의 가치를 지닌 금이나 은과 똑같은 크기의 교환 가치를 갖는다.’


사용 가치로서의 상품은 질적으로 구별되지만교환 가치로서의 상품은 오직 양적인 차이만을 지닌다. 따라서 교환 가치에는 사용 가치가 전혀 포함되지 않는다. 상품의 사용 가치를 무시하면, 오직 하나의 속성이 남는다. 곧 노동 생산물이라는 속성뿐이다. 그러나 이 노동 생산물 또한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지닌다사용 가치를 무시하면서, 노동 생산물을 사용 가치로 만드는 물질적 구성 요소와 형태도 함께 사라진다이제 이 생산물은 책상, 집, 면사 또는 기타 어떤 유용한 물건이 아니다감각으로 포착할 수 있는 모든 속성이 사라진다. 그것은 더 이상 가구공, 벽돌공, 방적공의 노동 생산물이 아니며, 그 어떤 특정한 생산적 노동의 결과물도 아니다노동 생산물의 유용성이 사라지면서, 그 안에 체화된 노동의 유용한 성질도 함께 사라진다. 따라서 노동의 구체적인 다양한 형태도 사라진다이 노동들은 더 이상 서로 구별되지 않는, 동일한 종류의 인간 노동 일반곧 추상적인 인간 노동으로 환원된다


이제 노동 생산물은 유령 같은 모양을 띠는데, 이는 동질적인 인간 노동이 응고된 형태이다노동 생산물은 인간 노동력이 그 지출 형태와 관계없이 투입되고 응고된 결과물이다생산에 인간 노동력이 지출됐고인간 노동이 그 속에 퇴적되어 있다모든 노동 생산물은 그들에게 공통된 이러한 사회적 실체가 응고되어 있기 때문에 가치곧 상품 가치를 가진다이미 상품이 교환될 때, 그 교환 가치는 사용 가치와 전혀 무관하다는 점을 확인했다상품의 사용 가치를 무시하면 상품 가치만 남는다. 따라서 상품의 교환 관계 또는 교환 가치에서 나타나는 공통 인자는 바로 상품 가치다연구로부터 교환 가치야말로 가치의 필연적인 표현 양식이자 현상 형태임을 알 수 있다그러나 당분간은 가치 성질을 그 현상 형태와 관계없이 고찰해야 한다사용 가치 또는 유용한 물건이 가치를 지니는 이유는 오직 그 안에 추상적인 인간 노동이 대상화되거나 체현되어 있기 때문이다그렇다면 그 가치 크기는 어떻게 측정되는가. 이는 물건에 담긴 가치를 형성하는 실체인 노동의 양으로 측정된다노동의 양은 노동의 지속 시간으로 측정되며, 이 지속 시간은 시간, 일, 주 등을 기준으로 삼아 측정한다.

 

상품 가치가 생산에 투입된 노동량에 따라 결정된다면, 게으르거나 숙련도가 낮은 노동자가 생산한 상품은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므로 가치가 더 높아야한다는 모순적인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가치 실체를 이루는 노동은 동질적인 인간 노동, 곧 동일한 인간 노동력의 지출이다상품 세계의 가치로 표현되는 사회의 총노동력은 비록 수많은 개별 노동력으로 구성되지만, 전체적으로는 거대한 하나의 동질적 노동력으로 간주된다각 단위의 노동력은 사회적 평균 단위의 성격을 가지며한 상품 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 시간만이 투입된다고 간주된다.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 시간이란 특정 사회에서 정상적인 생산 조건, 그리고 지배적인 평균적 노동 숙련도와 노동 강도에서 어떤 사용 가치를 생산하는 데 드는 노동 시간이다. 특히 영국에서 증기 직기기 도입된 뒤로 일정량의 실을 천으로 바꾸는 데 필요한 노동 시간이 절반으로 줄었다증기 직기 도입 이후에도 수직공들이 이전과 동일한 시간을 들여 직조했지만, 그들의 개별 노동 1시간은 이제 사회적 노동에서 1/2시간밖에 대표하지 못하게 됐기 때문에 생산물 가치는 이전 가치의 절반으로 하락했다. 따라서 어떤 물건의 가치량은 오직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량곧 생산에 사회적으로 투입되는 노동 시간에 따라 결정된다. 이 경우 개개의 상품은 그 종류의 평균적 표본으로 간주된다. 동일한 노동 시간에 생산할 수 있는 상품들은 동일한 가치량을 가진다상품 간 가치 비율도 이와 같다. 따라서 "가치에서 모든 상품은 일정한 크기의 응고된 노동 시간에 불과하다."


상품 가치는 생산에 투입된 노동 시간이 변하지 않는 한 일정하다. 그러나 노동 시간은 노동 생산성이 변할 때마다 변화한다노동 생산성은 여러 요인에 따라 결정된다. 특히 노동자들의 평균적 숙련도과학 및 기술 발전 정도생산 과정의 사회적 조직생산 수단의 규모와 효율, 자연적 조건이 여기에 포함된다. 동일한 양의 노동을 투입하더라도 풍년에는 밀 8리터를 생산하는 반면, 흉년에는 겨우 4리터밖에 생산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풍부한 광산은 빈약한 광산보다 더 많은 금속을 생산한다. 다이아몬드는 지표면에서 쉽게 발견되지 않아, 이를 채굴하는 데 평균적으로 많은 노동 시간이 필요하다. 따라서 적은 양의 다이아몬드가 많은 노동을 대표하게 된다. 제이콥(Jacobs)이 금에 대해 그 완전한 가치가 지불됐는지 의문을 제기했듯이, 이는 다이아몬드에 더욱 적합한 말이다. 에슈베게(Eschwege)에 따르면, 1823년까지 80년 간 브라질 다이아몬드 광산의 총산출액은 브라질 사탕 또는 커피 농장의 1년 반 분의 평균 생산물 가격에도 미치지 못했다. 광산이 더 풍부해진다면, 동일한 양의 노동은 더 많은 다이아몬드로 체화되며, 따라서 다이아몬드 가치는 하락하게 된다. 아주 적은 노동으로 석탄을 다이아몬드로 전환하는 기술이 개발된다면, 다이아몬드 가치는 벽돌 가치보다 낮아질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노동 생산성이 높을수록 상품 생산에 필요한 노동 시간과 응고되는 노동량은 줄어들며, 따라서 상품 가치도 감소한다. 반대로, 노동 생산성이 낮을수록 상품 생산에 걸리는 노동 시간과 상품 가치는 커진다. 따라서 상품 가치는 상품에 체화된 노동량에 정비례하고, 노동 생산성에 반비례한다

   

어떤 물건은 가치를 가지지 않으면서 사용 가치일 수 있다. 이는 인간에 대한 물건의 유용성이 노동에 따라 매개되지 않을 때 발생한다. 공기, 미개간지, 자연 초원, 야생 수목 등이 그러한 예다. 어떤 물건, 그리고 인간 노동의 생산물은 상품이 아니면서도 유용할 수 있다. 자신의 노동 생산물로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는 사람은 사용 가치를 창출하지만 상품을 만들지는 않는다. 상품을 생산하려면 사용 가치를 생산할 뿐만 아니라 타인을 위한 사용 가치, 곧 사회적 사용 가치를 생산해야 한다. 그러나 단순히 타인을 위한 사용 가치 생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중세 농민은 봉건 영주에게 바칠 공납이나 성직자에게 바칠 십일조용 곡물을 생산했지만, 이는 타인을 위해 생산됐다는 이유만으로는 상품이 되지 않는다. 생산물이 상품이 되려면 그 생산물을 사용 가치로 소비할 사람에게 교환으로 이전되어야 한다. 따라서 어떤 물건도 사용 대상이 아니고서는 가치를 가질 수 없다. 어떤 물건이 쓸모없다면, 그 안에 투입된 노동 또한 쓸모없게 되어 노동으로 계산되지 않으며, 따라서 아무런 가치도 형성하지 못한다

   

1-2. 상품에 체현된 노동의 이중성

 

상품은 사용 가치와 교환 가치라는 이중성을 가진 물건으로 나타났다. 이어서 노동 또한 이중성을 띠게 된다. 노동이 가치로 표현될 경우 더 이상 사용 가치를 창조하는 성격을 가지지 않는다. 상품에 체현된 노동의 이중성은 필자가 처음으로 지적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했으며, 정치경제학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기에 좀 더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두 상품, 저고리 1벌과 아마포 10미터가 있다고 가정하자. 저고리 가치가 아마포 가치보다 두 배라면, 아마포 10미터 = W일 때, 저고리 1벌 = 2W가 된저고리는 특정 욕구를 충족시키는 사용 가치이며, 이를 생산하고자 특수한 종류의 생산 활동이 필요하다. 이러한 생산 활동은 그 목적, 작업 방식, 수단, 결과에 따라 결정된다. 노동의 유용성이 생산물의 사용 가치로 나타나거나, 또는 노동이 그 생산물을 사용 가치로 만들어 스스로 표현하는 노동을 유용 노동이라고 부른다. 이 경우, 노동의 유용 효과만 고려된다.  


저고리와 아마포가 질적으로 다른 사용 가치이듯이, 이를 만들어낸 노동 또한 질적으로 다른 재봉 노동과 직조 노동이다. 이 두 물건이 질적으로 다른 사용 가치가 아니거나 질적으로 다른 유용 노동의 산물이 아니라면, 상품으로서 서로 마주할 수 없다. 저고리가 저고리와 교환되지 않듯, 동일한 사용 가치를 가진 물건은 교환되지 않는다. 다양한 사용 가치들의 총체는 다양한 유용 노동들의 총체, 곧 사회적 분업을 나타낸다. 사회적 분업은 상품 생산의 필수 조건이지만, 상품 생산이 사회적 분업의 필수 조건은 아니다. 고대 인도 공동체에서는 노동이 사회적으로 분할됐지만, 그 생산물은 상품이 아니었다. 또한 현대의 어떤 공장에서도 노동은 체계적으로 분할되지만, 이러한 분업은 노동자들이 개별 생산물을 서로 교환하면서 유지되지는 않는다. 오직 독립적으로 행해지는, 곧 상호 의존하지 않는 사적 노동의 생산물만이 상품으로서 서로 마주하게 된다. 각 상품의 사용 가치에는 유용 노동, 곧 일정한 종류의 합목적적인 생산 활동이 담겨 있다. 여러 가지 사용 가치는 질적으로 다른 유용 노동이 담겨 있지 않다면 상품으로서 서로 마주할 수 없다. 생산물이 일반적으로 상품 형태를 취하는 사회, 곧 상품 생산자 사회에서는 개별 생산자들이 상호 독립적으로 자신의 계산에 따라 수행하는 다양한 형태의 유용 노동 사이에 질적 차이가 하나의 복잡한 체계인 사회적 분업으로 발전한다


재봉사 자신이 저고리를 입든, 그의 고객이 입든, 저고리는 사용 가치로 기능한다. 마찬가지로, 저고리와 이를 생산하는 노동 사이에 관계는 재봉일이 사회적 분업의 독립적인 한 부분이 됐다고 해서 달라지지는 않는다. 인간은 옷을 입어야만 했기에 전문 재봉사가 나타나기 수천 년 전부터 이미 재봉일을 해왔다. 그러나 저고리와 아마포는 자연이 미리 제공하지 않는 여타 물적 부와 마찬가지로, 특정 자연 소재를 인간 욕구에 맞게 변형시키는 특수한 합목적적 생산 활동을 거쳐서만 창조될 수 있다. 그러므로 노동은 사용 가치를 창조하는 유용 노동으로서, 어떠한 사회 형태와도 무관하게 인간 생존의 조건이자 인간과 자연 사이에 물질대사를 매개하는 영원한 자연적 필연성이다


사용 가치인 저고리나 아마포 같은 상품체는 자연 재료와 노동이라는 두 요소의 결합으로 이뤄진다. 저고리나 아마포 등에 들어 있는 모든 유용 노동을 제거하면, 인간의 개입 없이 자연이 제공하는 물질적 바탕만 남게 된다. 인간은 생산 과정에서 자연이 그러하듯 물질 형태만을 변경할 수 있으며, 심지어 이 과정에서도 끊임없이 자연력의 도움을 받는다. 따라서 노동은 노동으로 생산되는 사용 가치, 곧 물적 부의 유일한 원천은 아니다. 윌리엄 페티가 지적했듯이, '노동은 물적인 부의 아버지이며, 토지는 어머니이다.'

 

가정했던 대로 저고리가 아마포보다 두 배의 가치를 가진다면, 이는 양적인 차이에 불과하다. 지금은 양적 차이보다는 본질에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1벌의 저고리 가치가 10미터 아마포 가치의 두 배라면, 20미터 아마포는 1벌 저고리와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하면 된다. 가치라는 측면에서 볼 때, 저고리와 아마포는 동일한 실체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동질 노동의 객체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재봉 노동과 직조 노동은 질적으로 다른 형태의 노동이다. 하지만 한 사람이 번갈아 재봉과 직조를 하는 사회도 존재한다. 이 경우, 두 가지 다른 노동 방식은 동일한 개인이 행하는 노동의 변형일 뿐이며, 서로 다른 개인에게 고정된 기능은 아니다. 마치 재봉사가 오늘은 저고리를 만들고 내일은 바지를 만들고자 자신의 개인 노동을 바꾸는 일과 같다. 더 나아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 수요 변화에 따라 사회적 노동의 일부가 번갈아 재봉 또는 직조의 형태로 공급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노동 형태의 변화가 마찰 없이 일어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는 현상이다

 

생산 활동의 명확한 질, 곧 노동의 유용한 성격을 무시하면 생산 활동은 단순히 인간 노동력의 지출에 불과하다재봉과 직조가 질적으로 다른 생산 활동일지라도, 둘 다 인간의 두뇌, 근육, 신경, 손 등을 생산적 사용하며, 이 점에서 모두 인간 노동이다. 곧, 재봉과 직조는 인간 노동력이 지출되는 두 가지 다른 형태일 뿐이다. 물론 인간 노동력이 다양한 형태로 지출되려면, 노동력 그 자체가 어느 정도 발전해야 한다. 하지만 상품 가치는 순수하고 단순한 인간 노동, 곧 인간 노동력의 일반적인 지출을 나타낸다. 부르주아 사회에서 장군이나 은행가가 위대한 역할을 하지만 평범한 인간은 보잘것없는 기능밖에 하지 못하듯이, 인간 노동도 마찬가지다. 인간 노동은 특수한 방향으로 발달하지 않은 평범한 인간이 육체적이고 평균적인 단순 노동력을 지출한다. 물론 단순하고 평균적 노동 자체도 국가나 문화 발전 단계에 따라 성격이 달라지지만, 일정한 사회에서는 이미 그 특성이 잘 알려져 있다. 더 복잡한 노동은 강화되거나 몇 배로 된 단순 노동으로 간주하며, 따라서 적은 양의 복잡 노동은 더 많은 양의 단순 노동과 동등하게 여긴다. 이러한 환산 과정은 끊임없이 일어나며, 이는 경험적으로 알 수 있다. 어떤 상품이 복잡한 노동의 산물이라 할지라도, 그 가치에 있어서는 단순 노동의 산물과 동등해지며, 일정한 양의 단순 노동을 대표할 뿐이다. 서로 다른 종류의 노동이 그 측정 단위인 단순 노동으로 환원되는 비율은 생산자들 배후에서 진행되는 하나의 사회적 과정에 따라 결정되며, 따라서 생산자들에게는 관습으로 전해 내려온다. 앞으로의 논의를 단순화하고자, 여기서는 모든 노동력을 단순 노동력으로 간주하고자 한다. 이는 다만 환산의 수고를 덜기 위함이다.  


가치로서 저고리와 아마포를 고찰할 때, 그 사용 가치의 차이를 무시하듯이, 그것들의 가치로 포함된 재봉과 직조라는 노동 의 유용성 형태 차이도 무시하게 된다. 사용 가치로서 저고리와 아마포는 특정 목적의 생산 활동이 천이나 실과 결합하여 만들어지지만, 가치로서 둘은 단순히 동질적인 노동의 응고물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그 가치에 내재된 노동 역시 천이나 실에 대한 생산적 작용의 의미를 갖는다는 말이 아니라, 오직 인간 노동력의 지출로만 의미를 갖는다. 재봉과 직조는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사용 가치인 저고리와 아마포를 형성하는 요소가 된다. 그러나 재봉과 직조의 특수한 질이 무시되고, 둘 다 인간 노동이라는 질을 가지는 한, 이 노동은 저고리와 아마포 가치의 실체를 형성한다. 그런데 저고리와 아마포는 가치일 뿐만 아니라 일정한 크기의 가치를 지닌다. 우리의 가정에 따르면, 1벌 저고리는 10미터 아마포보다 두 배 가치를 가진다. 그렇다면 이러한 가치량의 차이는 무엇 때문인가. 이는 아마포가 저고리에 들어 있는 노동의 절반만을 포함하고, 저고리 생산에 아마포 생산에 드는 시간보다 두 배나 긴 노동력이 지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상품에 체현된 노동은 상품 가치와 관련해서는 질적으로, 가치와 관련해서는 양적으로 고려된다. 전자의 경우 노동이 어떻게 수행되고 무엇을 생산하는지가 중요하지만, 후자의 경우 노동력이 얼마나 지출되는지, 곧 노동의 지속 시간이 중요해진다. 상품 가치의 크기는 그 상품에 투입된 노동량만을 나타내므로, 상품들은 일정한 비율에 따라 동일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 저고리 생산에 필요한 유용 노동의 생산성이 변하지 않는다면, 생산된 저고리의 가치량은 그 개수에 비례하여 증가한다. 1벌의 저고리가 X일의 노동을 나타낸다면, 2벌의 저고리는 2X일의 노동을 나타내게 된다. 하지만 저고리 생산에 필요한 노동이 두 배로 늘거나 절반으로 줄어든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전자의 경우 1벌의 저고리가 이전에 2벌의 저고리와 같은 가치를 지니게 되고, 후자의 경우에는 2벌의 저고리가 이전에 1벌의 저고리와 같은 가치밖에 갖지 못한다. 두 경우 모두 저고리가 제공하는 편의(사용 가치)나 그 안에 담긴 유용 노동은 변함이 없더라도, 저고리 생산에 드는 노동량이 달라졌기 때문에 가치도 변한다


상품의 양적 증가는 그 자체로 물적 부의 증가를 의미한다. 2벌의 저고리는 1벌의 저고리보다 더 많은 사람을 입힐 수 있기에 더 큰 물적 부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물적 부의 증가는 때때로 가치량 감소를 동반할 수 있는데, 이러한 모순된 현상은 바로 노동의 이중성에서 기인한다. 생산성은 항상 구체적인 유용 노동의 생산성을 의미한다. 이는 주어진 시간 동안 특정 생산 활동이 목표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달성하는지를 나타낸다. 따라서 유용 노동은 생산성의 변동에 따라 더 많거나 적은 생산물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노동이 가치로 표현될 때는 구체적 유용 형태가 무시되기 때문에 생산성과는 무관해진다. 동일한 시간에 투입된 노동은 생산성의 변동과 관계없이 언제나 동일한 가치량을 창조한다. 그럼에도 생산성이 변동하면, 노동은 같은 시간 동안 다른 양의 상품을 생산한다. 곧, 생산성이 오르면 더 많은 상품을, 생산성이 떨어지면 더 적은 상품을 생산한다생산성이 상승하여 일정한 시간에 생산되는 상품의 총량을 증가할 경우, 이 총량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총 노동 시간은 단축되므로, 상품 총량의 총 가치는 감소하게 된다. 반대의 경우에는 그 반대 현상이 일어난다. 따라서 모든 노동은 생리학적으로 인간 노동력의 지출이며, 이 동등하고 추상적인 인간 노동이라는 속성에서 상품 가치를 형성한다. 반면에, 모든 노동은 특정한 합목적적 형태로 인간 노동력을 지출하며, 이 구체적이고 유용한 노동이라는 속성에서 사용 가치를 생산한다

 

1-3. 가치 형태 또는 교환 가치

 

사용 가치 형태를 지닌 철, 아마포, 밀 등은 평범한 평범한 현물로 세상에 나타나는 상품이다. 이러한 상품은 사용 대상임과 동시에 가치를 지닌다는 이중적인 성격을 띠므로, 현물 형태와 가치 형태를 모두 지닐 때 비로소 상품이라는 형태를 갖춘다. 상품 가치가 객관적으로 실재한다는 점은 셰익스피어 희곡헨리 4에 등장하는 과부 퀵클리가 "어느 누구도 그것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한 바와 구분된다. 상품 가치의 실재에는 상품체의 거칠고 감각적인 객관적 실재와 달리 단 한 분자의 물질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아무리 상품을 돌려가며 그것이 가치를 지닌 물건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모든 상품이 인간 노동이라는 동일한 사회적 실체의 표현일 때 비로소 가치로서 객관적인 성격을 가지며, 이러한 가치의 객관적 성격이 순전히 사회적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가치는 오직 상품과 상품 사이에 사회적 관계에서만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사실, 상품의 교환 가치 또는 교환 관계로부터 출발하여 상품 속에 숨어 있는 가치를 찾아낼 수 있다. 이제 다시 가치의 현상 형태로 돌아가 보자. 


상품들은 다양한 사용 가치 형태와 분명하게 구별되는 공통의 가치 형태인 화폐 형태를 지닌다. 누구나 이 사실을 알지만,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화폐 형태의 기원을 밝혀야 한다. 이는 부르주아 경제학이 시도하지 못했던 과제다. 그리고 상품 가치 관계에 내재된 가치 표현이 가장 단순하고 미미한 형태에서 출발하여, 찬란한 화폐 형태로 발전해 온 과정을 추적한다. 이 과정으로부터 화폐의 신비는 비로소 풀린다. 가장 단순한 가치 관계는 두말할 필요 없이, 한 상품과 다른 종류의 한 상품 사이에 가치 관계다. 따라서 두 상품의 가치 사이에 관계는 한 상품의 가치의 가장 단순한 표현을 제공한다


. 1형태: 단순하고 개별적인 가치 형태

 

X량의 상품 A = Y량의 상품 또는 X량의 상품 AY량의 상품 B와 가치가 같다

(예: 20미터 아마포 = 1개 저고리 또는 20미터 아마포는 1개 저고리와 가치가 같다.)

 

가치 표현의 두가지 형태: 상대적 가치 형태와 등가 형태

 

모든 가치 형태의 비밀은 이 단순한 가치 형태 속에 숨어 있다. 그러므로 이 형태를 분석하는 일은 중요한 과제이다. 여기서 아마포와 저고리라는 두 종류의 상품은 분명히 서로 다른 역할을 한다. 아마포는 자신의 가치를 저고리로 표현하고, 저고리는 이러한 가치 표현의 재료가 된다. 곧, 첫 번째 상품(아마포)은 능동적인 기능을 하고, 두 번째 상품(저고리)은 수동적인 기능을 한다. 첫 번째 상품은 자신의 가치를 상대적 가치 형태로 표현하고, 두 번째 상품은 등가 형태로 기능한다.  


상대적 가치 형태와 등가 형태는 서로 의존하며 제약하는 불가분의 요소들이지만, 동시에 상호 배제하며 대립하는 두 극단, 곧 가치 표현의 양 끝이다. 이 두 끝은 가치 표현으로 상호 연관을 맺는 서로 다른 상품들이 맡는다. 아마포 자체만으로는 아마포 가치를 실현할 수 없다. '20미터 아마포 = 20미터 아마포'라는 등식은 결코 가치 표현이 아니다. 이 등식이 의미하는 바는 오히려 그 반대로, 20미터의 아마포가 그저 사용 대상으로 고찰한 아마포의 일정량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아마포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곧 다른 상품으로만 표현될 수 있다. 그러므로 아마포의 상대적 가치 형태는 어떤 다른 상품이 등가 형태로서 아마포와 마주한다고 전제한다. 다른 한편으로, 등가물 기능을 하는 상품은 동시에 상대적 가치 형태일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상품은 자신의 가치 표현이 아닌, 오직 첫 번째 상품 가치를 표현하는 재료를 제공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20미터 아마포 = 1개 저고리'라는 표현은 1개 저고리 = 20미터 아마포'라는 역관계를 내포한다. 그러나 저고리의 가치를 상대적으로 표현하려면 등식을 뒤집어야 하고, 그렇게 되면 아마포가 등가물이 된다. 따라서 동일한 상품은 하나의 가치 표현에서 동시에 두 가지 형태를 가질 수 없다. 이 두 형태는 정반대로 서로를 배제한다. 어떤 상품이 상대적 가치 형태에 있는지, 아니면 등가 형태에 있는지는 오직 그 상품이 가치 표현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곧, 그 상품이 자신의 가치를 표현하는지, 아니면 다른 상품의 가치를 표현하는지에 달려 있다.   

 

상대적 가치 형태의 내용 

 

한 상품이 가지는 가치의 단순한 표현이 두 상품의 가치 관계 속에 어떻게 숨어 있는지를 해명하려면, 이 가치 관계를 먼저 양적 측면으로부터 완전히 떠나 고찰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보통 이와 정반대의 연구 방법을 취해, 가치 관계에서 두 상품의 일정한 양이 서로 같아지는 비율만 본다. 그들은 이때 상이한 물건들의 크기는 동일한 단위로 환원된 뒤에야 비로소 양적으로 비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동일한 단위로 표현했을 때만 물건들의 크기는 공통분모를 가지며, 따라서 서로 비교할 수 있다


20미터의 아마포가 1개, 20개, 또는 X개의 저고리와 같든, 곧 아마포의 양이 많은 적든, 이러한 비율의 존재는 항상 아마포와 저고리가 가치량이라는 동일한 단위로 표현되며, 동일한 성질을 가진 물건들임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아마포 = 저고리'라는 사실이 이 등식의 기초다

 

이 등식에서는 두 상품은 질적으로 동일하지만, 동일한 기능을 하지는 않는다. 여기서는 오직 아마포의 가치만이 표현될 뿐이다. 아마포는 자신과 교환될 수 있는 물건인 저고리와의 관계로부터 자신의 가치를 표현한다. 이 관계에서 저고리는 가치의 존재 형태, 곧 가치의 물리적 모습으로 간주된다. 이는 오직 그럴 때만 저고리가 아마포와 동일하게 취급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관계 속에서 아마포의 가치 실재는 독립적인 표현을 얻는다. 아마포는 오직 가치로서만 저고리와 동등하며, 자신과 교환될 수 있는 물건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 화학에서는 부티르산과 프로필포름산은 서로 다른 물질이지만, 둘 다 탄소(C)와 수소(H)와 산소(O)라는 동일한 화학적 실체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비율 또한 'C4H8O2'로 같다. 이제 부티르산을 프로필포름산과 같다고 표시하면, 이 관계는 첫째, 프로필포름산은 'C4H8O2'의 존재 형태일 뿐이며, 둘째, 부티르산 역시 'C4H8O2'로 구성됐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부티르산을 프로필포름산과 동일시하면서, 물리적 형태와는 화학적 구성을 표현하게 된다


상품 가치를 논할 때, 상품을 인간 노동의 단순한 응고물로 분석하여 추상적 가치 차원으로 환원하지만, 그 자체로 현물 형태와는 다른 새로운 가치 형태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상품 가치는 오직 두 번째 상품과 관계로만 표면에 드러난다. 저고리를 아마포의 등가물로 삼으면, 이는 저고리에 담긴 노동이 아마포에 응결된 노동과 동일하다고 표현한다. 재봉과 직조는 분명 종류가 다른 구체적인 노동이지만, 재봉을 직조와 동일시하면서, 사실상 이 두 노동을 인간 노동이라는 공통된 성격으로 환원하게 된다. 이것은 직조 또한 가치를 창출하는 한에서는 재봉과 다르지 않으며, 따라서 추상적 인간 노동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우회적인 방식이다. 서로 다른 상품들 간의 등가 표현만이 그 상품들에 담긴 다양한 노동을 공통적인 인간 노동 일반으로 실제로 환원하며, 이로부터 가치를 형성하는 노동의 독자적 성격이 명확해진다.  


그러나 아마포 가치를 형성하는 노동의 독특한 성격을 표현하는 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인간 노동력은 운동하면서 가치를 창조하지만, 그 자체로 가치는 아니다. 인간 노동은 어떤 대상의 형태로 응고된 상태에서만 가치가 된다. 따라서 아마포 가치를 인간 노동의 응고물로 표현하려면, 그 가치가 아마포 그 자체와는 물질적으로 구별되면서도, 동시에 아마포와 다른 모든 상품에 공통되는 하나의 객관적 실재를 지닌다고 표현되어야 한다. 이 문제는 이미 해결됐다. 저고리와의 관계 속에서 아마포 가치를 표현할 때, 저고리는 가치라는 점에서 질적으로 아마포와 같은 종류로 간주된다. 이는 곧 저고리가 가차를 나타내는 물건, 다시 말해 가치를 손으로 만져 느낄 수 있는 현물 형태로 표현하는 물건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저고리 그 자체는 순수한 사용 가치에 불과하다. 저고리가 스스로 가치를 표현할 수 없는 일은, 임의의 아마포 한 조각이 스스로 가치를 표현할 수 없는 일과 마찬가지다. 상품은 오직 가치 관계 속에서만 자신의 가치를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저고리가 아마포와 가치 관계 안에 있을 때, 그 관계 밖에 있을 때보다 더 큰 의의를 지닌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는 많은 사람이 금으로 장식된 제복을 입을 때, 그렇지 않을 때보다 더 큰 중요성을 가지게 되는 일과도 같다. 


저고리를 만드는 과정에서 실제로 재봉이라는 형태의 인간 노동력이 투입된다. 따라서 저고리에는 인간 노동이 응축되어 있으며, 이 점에서 저고리는 '가치를 지닌 존재'. 물론 이러한 속성은 저고리가 아무리 닳아 얇아진다 해도 눈에 보이지는 않는다. 가치 등식에서 아마포의 등가물로서 저고리는 이러한 자격, 곧 구체적인 형상을 띤 가치 또는 가치체로서 기능한다. 저고리가 비록 단추를 채운 채 나타났을지라도, 아마포는 그 속에 있는 가치라는 동류의식을 느낀다. 그러나 저고리가 아마포에게 가치를 대표하려면, 아마포에게 가치는 반드시 저고리의 형태를 취해야만 한다. 이는 개인 A가 개인 B로부터 '국왕'으로 숭배를 받고자, B의 눈에 국왕이 A의 육체를 가지고 나타나야 하는 일과도 같다. 더군다나 A의 용모와 머리털 등은 '국왕'이 바뀔 때마다 변해야 하는 일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저고리가 아마포 등가물이 되는 가치 관계에서, 저고리 형태는 가치 형태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상품인 아마포 가치는 상품인 저고리라는 물체로 표현된다. 이는 한 상품의 가치가 다른 상품의 사용 가치로 나타난다는 의미다. 사용 가치 면에서 아마포는 저고리와 명확히 구별되는 물건이지만, 가치라는 측면에서는 아마포가 저고리와 같으며, 따라서 저고리처럼 보인다. 이로부터 아마포는 자신의 현물 형태와는 다른 가치 형태를 얻게 된다. 아마포의 가치는 아마포와 저고리의 동등성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기독교도의 순한 양과 같은 성질을 '기독교도 = 신의 어린 양'이라고 표현하는 일과 같다


상품 가치에 대한 분석은 아마포가 저고리와 교환되는 순간, 그 모든 과정을 상품 자신만의 언어로 다시 설명해 준다. 아마포는 자신의 가치가 추상적인 인간 노동으로 창조됐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저고리가 자신과 동등하게 여겨질 때, 곧 가치일 경우에만 저고리 또한 자신과 동일한 노동을 구성됐다고 말한다. 또한 자신의 고상한 객관적 실재가 자신의 거친 육체와는 다르다는 점을 표현하고자, 아마포는 저고리 형태로 자신의 가치를 나타내며, 자신 역시 가치물인 한 저고리와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덧붙여, 상품 언어는 히브리어 외에도 다양한 방언을 가지고 있다. 상품 B를 상품 A와 등치시키는 일이 상품 A의 가치를 표현하는 방식임을 나타낼 때, 독일어인 'Wertsein'(가치가 있다)이라는 표현은 라틴어 계통 동사들인 'valere', 'valer', 'valoir'에 비해 덜 적절하다. 1593 앙리 4세가 "파리는 확실히 미사를 받을 만하다!"고 말했듯이 말이다.


이러한 가치 관계로부터 상품 B의 현물 형태는 상품 A의 가치 형태가 된다. 다시 말해, 상품 B의 물체는 상품 A의 가치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상품 A 가치체이자 인간 노동의 체현물인 상품 B와 관계를 맺으면서, 상품 B의 사용 가치를 자기 가치 표현의 재료로 삼는다. 이러한 방식으로 상품 A 가치는 상품 B의 사용 가치로부터 표현되어 상대적 가치 형태를 얻게 된다


상대적 가치 형태의 양적 규정

 

자신의 가치를 나타내야 하는 각 상품은, 15리터 밀이나, 100그램 커피처럼, 일정한 양의 유용한 물건이다. 이 정해진 상품량에는 특정 양의 인간 노동이 일정량이 포함됐다. 따라서 가치 형태는 가치 일반뿐 아니라, 양적으로 규정된 가치인 가치량도 나타내야 한다. 상품 A가 상품 B에 대해 갖는 가치 관계, 곧 아마포가 저고리에 대해 갖는 가치 관계를 보면, 저고리라는 상품 종류가 가치체 일반으로 아마포에 질적으로 등가일 뿐 아니라, 1개 저고리라는 특정량의 가치체 또는 등가물이 20미터 아마포라는 특정량에 등가라는 점을 알 수 있다. 


‘20미터 아마포 = 1개 저고리'라는 등식, 20미터 아마포와 1개 저고리 가치는 같다는 등식은 1개 저고리에 20미터 아마포에 들어 있는 것과 동일한 양의 가치 실체가 담겨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두 상품량은 같은 양의 노동, 곧 동일한 노동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20미터 아마포나 1개 저고리를 생산하는 데 걸리는 노동 시간은 재봉이나 직조의 생산성이 변할 때마다 달라진다. 이제 이런 변동이 가치량의 상대적 표현에 미치는 영향을 더 자세히 살펴보겠다. 


1. 아마포 가치는 변동하지만, 저고리 가치는 변동하지 않는 경우

 

아마포 생산에 드는 노동 시간이 아마를 재배지에 비옥도 저하로 인해 두 배가 되면, 아마포 가치 역시 두 배로 상승한다. 기존의 '20미터 아마포 = 1개 저고리'라는 등식은 이제 '20미터 아마포 = 2개 저고리'로 바뀐다. 이는 1개 저고리 생산에 드는 노동 시간이 20미터 아마포 생산에 드는 노동 시간에 절반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토지 개량으로 인해 아마포 생산에 필요한 노동 시간이 절반으로 감소한다면, 아마포 가치도 절반으로 하락한다. 이에 따라 등식은 '20미터 아마포 = 1/2개 저고리'가 된다. 이처럼 상품 B(저고리) 가치가 변하지 않더라도, 상품 A(아마포)의 상대적 가치, 곧 상품 B로 표현되는 상품 A 가치는 상품 A 가치에 정비례하여 상승하거나 또는 하락한다.


2. 아마포 가치는 변동하지 않고, 저고리 가치가 변동하는 경우

 

양털 흉작으로 인해 저고리 생산에 필요한 노동 시간이 두 배로 늘어난다면, 기존의 '20미터 아마포 = 1개 저고리'라는 등식은 이제 '20미터 아마포 = 1/2개의 저고리'로 바뀐다. 반대로, 저고리 가치가 절반으로 하락하면, 등식은 '20미터 아마포 = 2개 저고리'가 된다. 따라서 상품 A(아마포) 가치는 변하지 않더라도, 상품 B(저고리)로 표현하는 상품 A의 상대적 가치는 상품 B의 가치 변동에 반비례하여 상승하거나 또는 하락한다.


1번2번의 여러 경우를 비교해 보면, 동일한 양의 상대적 가치 변동이 정반대 원인으로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20미터 아마포 = 1개 저고리'라는 등식이 '20미터 아마포 = 2개 저고리'로 변하는 경우를 보자. 이는 때로는 아마포 가치가 두 배로 오르기 때문이며, 때로는 저고리 가치가 절반으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20미터 아마포 = 1/2개 저고리'가 되는 경우도 있다. 이는 때로는 아마포 가치가 절반으로 떨어지기 때문이고, 때로는 저고리 가치가 두 배로 오르기 때문이다. 

 

3. 아마포와 저고리 생산에 필요한 노동량이 동시에 동일한 방향과 비율로 변동하는 경우

 

이 경우에는 두 상품 가치가 아무리 변동하더라도, '20미터 아마포 = 1개 저고리'라는 등식은 그대로 유지된다. 이들의 가치 변동은 가치가 변하지 않은 제3의 상품과 비교할 때에만 드러난다. 모든 상품 가치가 동시에 같은 비율로 상승하거나 하락한다면, 그 상품들의 상대적 가치는 변동하지 않는다. 이 경우, 상품 가치의 실제 변동은 동일한 노동 시간으로 생산할 수 있는 상품의 양이 이전보다 증가했는지, 또는 감소했는지로 나타난다.

 

4. 아마포와 저고리 각각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 시간이 동시에, 동일한 방향이면서 서로 다른 정도로 또는 반대 방향으로 변동하는 경우

 

이러한 다양한 조합이 한 상품의 상대적 가치에 미치는 영향은 앞서 살펴본 1. 2. 3번의 경우를 응용해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가치량의 실제 변동이 상대적 가치 크기에 명확하고 완전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 상품에서 상대적 가치는 자신의 가치가 변하지 않더라도 변동할 수 있고, 반대로 자신의 가치가 변하더라도 상대적 가치는 변하지 않을 수 있다. 또한, 상품 가치의 양적 변화와 그 상대적 표현이 동시에 변하더라도, 그 변동 정도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등가 형태

 

상품 A(아마포)는 자신의 가치를 자신과는 다른 종류의 상품 B(저고리)의 사용 가치로 표현하면서, 상품 B등가물이라는 독특한 가치 형태를 부여한다. 아마포는 저고리가 자신의 본래 형태와 구별되는 가치 형태를 취하지 않으면서도 아마포와 등치될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가치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외부에 드러낸다. 저고리가 아마포와 직접 교환될 수 있다는 형식 자체가 아마포가 가치로서 자기의 존재를 실질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어떤 상품이 등가 형태로 존재할 때, 그 상품은 다른 상품들과 직접 교환될 수 있다.


특정 상품 종류(저고리)가 다른 상품(아마포)을 위한 등가물로 기능하며 직접 교환될 수 있는 독특한 속성을 획득한다 해도, 이것만으로는 둘 사이에 교환 비율이 결정되지 않는다. 이 비율은 아마포의 가치량이 주어질 때, 저고리의 가치량에 따라 정해진다. 저고리가 등가물로, 아마포가 상대적 가치로 표현되든, 또는 그 반대이든, 저고리 가치량은 저고리 생산에 필요한 노동 시간으로 규정되며, 이는 저고리의 가치 형태와는 무관하다. 그러나 가치는 양적으로 표현될 수 없으며, 저고리는 가치 등식에서 다만 사용 가치의 특정량으로만 나타날 뿐이다.


40미터 아마포는 얼마의 가치가 있는가. 저고리 2개와 같다. 이 경우, 상품 종류인 저고리는 등가물 기능을 하며, 저고리라는 사용 가치는 아마포에 대해 가치체로 인정된다. 따라서 특정량의 저고리는 아마포의 가치량을 표현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므로 2개의 저고리는 40미터의 아마포의 가치량을 나타낼 수 있지만, 결코 자기 자신의 가치량을 표현할 수는 없다. 가치 등식에서 등가물이 항상 어떤 물건, 곧 사용 가치의 양적 형태로만 나타난다는 사실을 피상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베일리를 비롯한 그의 선행자와 후계자 다수는 가치 표현에서 오직 양적 관계만 보는 오류를 범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떤 상품이 등가물로 기능할 때, 그 상품 가치의 양적 크기는 표현되지 않는다.

 

등가 형태를 고찰할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특징은, 사용 가치가 자신의 대립물인 가치 현상의 형태로 된다는 점이다. 곧, 상품의 본래적인 현물 형태가 가치 형태로 전환된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이러한 전환은 상품 B(저고리, 밀, 철 등)임의의 다른 상품 A(아마포 등)와 가치 관계를 맺을 때에만, 그리고 오직 그 관계 안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다. 어떤 상품도 자기 자신에 대해 등가물이 될 수 없으며, 따라서 자신의 현물 형태를 자기 가치 표현으로 삼을 수 없다. 그러므로 상품은 반드시 다른 상품을 등가물로 삼아 관계를 맺어야 한다. 곧, 다른 상품의 현물 형태를 자신의 가치 형태로 삼는다. 

 

덩어리 사탕은 물체이므로 무게가 있지만, 그 무게는 눈으로 직접 볼 수 없고 손으로 감지할 수도 없다. 따라서 사람들은 미리 무게가 정해진 다양한 쇳붙이 조각, 곧 저울추를 사용한다. 저울추의 물체 형태 그 자체는 덩어리 사탕과 마찬가지로 무게의 현상 형태가 아니다. 하지만 덩어리 사탕의 무게로 표현하고자 사탕을 저울추와 중량 관계에 놓으면, 저울추는 무게 외에는 아무것도 나타내지 않는 물체로 기능하게 된다. 저울추의 크기는 사탕의 무게를 측정하는 역할을 하며, 덩어리 사탕에 대해 오직 무게의 화신 또는 무게의 현상 형태만을 대표한다. 저울추가 이러한 기능을 하는 일은 무게가 측정되어야 할 사탕 또는 다른 물체와 맺는 관계 안에서 할 수 있다. 이 두 물체가 모두 무게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이러한 관계를 맺을 수 없고, 따라서 한 쪽이 다른 쪽의 무게를 표현할 수도 없다. 이 두 물체를 저울 위에 놓을 때, 무게라는 점에서 서로 동일하며, 따라서 일정한 비율을 취하면 동일한 무게를 가졌다고 확인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가치 표현에서 저울추라는 물체가 무게 척도로 덩어리 사탕과 관계를 맺으며 오직 무게만을 대표하듯이, 저고리라는 물체는 아마포와의 관계에서 오직 가치만을 대표한다. 


여기에서 유사성은 끝난다. 덩어리 사탕의 무게를 표현할 때 저울추는 두 물체에 공통된 자연적 속성인 무게를 나타낸다. 하지만 아마포의 가치를 표현할 때, 저고리는 두 물건의 사회적(초자연적) 속성, 곧 가치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어떤 상품(아마포)의 상대적 가치 형태는, 아마포의 가치 존재를 아마포 자체나 그 속성과는 전혀 다르게, 저고리와 같다고 표현한다. 이 표현은 그 뒤에 어떤 사회적 관계가 숨어 있음을 암시한다. 반면, 등가 형태는 이와 반대다. 등가 형태에서 상품(저고리)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가치를 표현하며, 처음부터 가치 형태로 보인다. 물론 이는 저고리가 상품인 아마포에 대해 등가물이 되는 가치 관계 안에서만 성립하는 일이다. 그러나 어떤 물건의 속성은 다른 물건과의 관계로부터 생겨나는 게 아니라, 그러한 관계 속에서 단지 증명될 뿐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저고리가 무게가 있고 체온을 보존하는 속성을 지니듯이, 등가 형태를 처음부터 가진다고 생각하기 쉽다. 등가 형태의 신비성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이 등가 형태가 화폐라는 완성된 형태로 눈앞에 나타날 때 비로소 그 신비성에 주목한다. 그때 그들은 금과 은의 신비성을 깨뜨리고자, 금과 은을 덜 화려한 다른 상품들로 대체하며 과거에 등가물로 기능했던 모든 평범한 상품들의 목록을 만족스럽게 나열한다. 하지만 그들은 '20미터 아마포 = 1개 저고리'라는 가장 단순한 가치 표현조차 이미 풀어야 할 등가 형태의 수수께끼를 제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등가물로 기능하는 상품체는 통념상 추상적 인간 노동이 구체적 형태를 띠고 나타나지만, 등가물은 언제나 특정한 유용성을 가진 구체적 노동의 생산물이다. 따라서 구체적 노동이 추상적 인간 노동을 표현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저고리가 단순히 추상적 인간 노동의 구체화라면, 저고리 안에 실제로 구현된 재봉 노동은 눈에 보이는 추상적 인간 노동이 되는 셈이다. 아마포의 가치를 표현하는 맥락에서, 재봉 노동의 유용성은 옷을 만드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은 가치를 지닌 물체(아마포 가치에 객간화된 노동과 구별되지 않는 응고물)을 창조하는 데 있다. 가치의 거울 역할을 하고자, 재봉 노동 그 자체는 인간 노동이라는 추상적 속성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나타내서는 안 된다.

 

인간 노동력은 재봉이라는 형태, 직조라는 형태로 지출된다. 따라서 이 두 형태는 인간 노동이라는 공통된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어떤 경우(가치 생산)에는 오직 이 관점에서만 고려되어야 한다. 여기에는 어떤 신비도 없다. 그러나 상품의 가치 표현에서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다. 직조가 직조라는 구체적 노동이 아닌, 인간 노동이라는 일반적 속성에서 아마초의 가치를 형성한다고 표현하고자, 아마포의 등가물(저고리)을 생산하는 구체적 노동인 재봉과 대비시킨다. 이 순간 재봉은 추상적인 인간 노동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현실화된다.


등가 형태의 두 번째 특징은 구체적 노동이 그 대립물인 추상적 인간 노동의 현상 형태가 된다는 점이다. 이 구체적 노동(재봉)이 무차별적인 인간 노동의 표현으로 인정받게 되므로, 이 노동은 다른 노동(아마포에 들어 있는 노동)과 동일하다는 속성을 갖는다. 따라서 이 노동은 다른 모든 상품 생산 노동과 마찬가지로 사적 노동이면서도, 동시에 직접적으로 사회적 형태의 노동이 된다. 바로 이 때문에 이 노동은 다른 상품들과 직접 교환될 수 있는 생산물, 곧 저고리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사적 노동이 그 대립물인 직접적인 사회적 형태의 노동으로 변하는 일은 바로 등가 형태의 셋 번째 특징이다. 등가 형태의 마지막 두 특징은 사고 형태, 사회 형태, 자연 형태와 함께 가치 형태를 처음으로 분석한 저 위대한 학자,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연구로부터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상품의 화폐 형태가 단순한 가치 형태(어떤 상품의 가치를 임의의 다른 상품으로 표현한 것)가 발전한 형태에 불과하다고 명확히 지적했다. 이는 그가 다음과 같이 말했기 때문이다.

 

‘5개의 침대 = 한 채의 가옥이라고 말한다면‘5개의 침대 = 얼마의 화폐라고 말하는 바와 다르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는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더 나아가, 이러한 가치 표현을 할 수 있는 가치 관계는 집과 침대가 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조건을 전제로 한다는 점을 꿰뚫었다. 그는 감각적으로 서로 다른 이 물건들이 본질적으로 동일하지 않다면 같은 단위로 측정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교환은 동일성 없이는 있을 수 없으며, 동일성은 측량의 공통성 없이는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난관에 부딪혔고, 가치 형태에 대한 추가 분석을 포기했다. 그는 ‘그러나 종류가 서로 다른 물건들이 같은 단위로 측정된다면, 곧 질적으로 동일하다는 말은, 실제로는 이뤄질 수 없다.’라고 말했다. 그에게 이러한 등식은 물건들의 진정한 성질과 다를 수밖에 없으므로, 실제적인 필요를 위한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더 이상 분석할 수 없었던 일은 바로 가치 개념의 부재 때문이었다. 침대의 가치를 표현할 때, 집이 침대를 위해 나타내는 그 동일한 공통의 실체는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제로는 존재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집이 침대와 집 모두가 가진, 진정으로 똑같은 무엇을 대표하는 한, 집은 침대에 대해 어떤 동일한 것을 표현하게 된다. 바로 인간 노동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상품 가치 형태에서 모든 노동이 동등한 인간 노동, 곧 동일한 질의 노동으로 표현된다는 사실을 가치 형태 분석에서 밝혀내지 못한 이유가 있다. 그리스 사회는 노예 노동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에, 사람들도 동등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노동력 또한 같지 않다는 점을 사회의 자연적 토대로 삼고 있었다. 모든 노동이 인간 노동 일반이기 때문에, 그리고 오직 그런 경우에만 동등하며 동일하다는 가치 표현의 비밀은, 인간들이 서로 동등하다는 개념이 대중적 선입관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을 때 비로소 해명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은 상품 형태가 노동 생산물의 일반적 형태가 되고, 인간들이 상품 소유자로 맺는 관계가 지배적인 사회적 관계가 되는 사회에서만 이뤄질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천재성은 바로 그가 상품의 가치 표현에서 하나의 동등 관계를 찾아냈다는 점에서 훌륭하게 드러난다. 다만, 그가 살던 사회의 역사적 한계 때문에 바로 이 동등 관계가 실제로 무엇인지를 규명할 수 없었다. 

   

전체로 본 단순한 가치 형태

 

한 상품의 단순한 가치 형태는 다른 종류의 상품과 맺는 가치 관계, 곧 교환 관계에 포함된다. 상품 A의 가치는 상품 B와 직접 교환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질적으로 표현되며, 일정햔 양의 상품 B가 주어진 양의 상품 A와 교환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양적으로 표현된다. 다시 말해, 한 상품의 가치는 그 교환 가치가 주어져야만 비로소 독립적인 표현을 얻게 된다. 이 장의 첫 부분에서 '상품은 사용가치이자 동시에 교환 가치'라고 말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는 정확하지 않다. 상품은 유용한 물체인 사용 가치이면서 동시에 가치다. 상품은 자신의 가치가 본래의 현물 형태와는 다른 독특한 표현 형태, 곧 교환 가치를 가질 때 비로소 그 이중성을 드러낸다. 상품은 단독으로 존재할 때는 교환 가치라는 형태를 띠지 않으며, 자신과 종류가 다른 상품에 대한 가치 관계나 교환 관계에서만 이 형태를 취한다. 하지만 이러한 점을 이해하고 있다면, 상품은 사용 가치이면서 동시에 교환가치다’라는 표현은 부정확하더라도 간편한 표현이 될 수 있다. 


분석에서 증명했듯이, 상품의 가치 형태와 가치 표현은 상품 가치의 본질에서 비롯된다. 가치와 가치량이 상품 교환 가치의 표현 방식에서 나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후자의 사고방식은 근대적 추종자인 페리에, 가닐 같은 중상주의자들이 가졌던 착각이었다. 그리고 그들과는 정반대 입장에 있던 바스티아와 그의 동료들 같은 근대 자유무역론자들 역시 이와 같은 착각을 지니고 있었다. 중상주의자들은 가치 표현의 질적인 측면, 곧 화폐를 그 완성 형태로 하는 상품의 등가 형태에 초점을 맞춘다. 반면, 어떤 가격에서든 자기 상품을 팔아야 하는 근대 자유무역 상인들은 상대적 가치 형태의 양적인 측면에 중시한다. 따라서 그들에게 상품의 가치나 가치량은 오직 교환 관계의 표현, 곧 매일의 상품 시세표에만 존재할 뿐이다. 런던에서 금융가의 혼란스러운 관념들을 그럴듯하게 정리하는 일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던 스코틀랜드 사람, 맥클라우드는 미신을 숭배하는 중상주의자와 개화된 자유 무역 상인에 훌륭한 혼혈이라고 할 수 있다. 


상품 AB의 가치 관계에 포함된 상품 A의 가치 표현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관계 안에서 상품 A의 본래 형태는 오직 사용 가치로만 나타나고, 상품 B의 본래 형태는 오직 가치 형태 또는 가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상품 내부에 숨어 있는 사용 가치와 가치 사이에 내적 대립은 두 상품 간 외적 대립으로 표출된다, 곧, 자신의 가치를 표현해야 하는 한쪽 상품은 직접적으로는 사용 가치로만 여겨지고, 그 가치를 표현하는 다른 쪽 상품은 직접적으로는 교환 가치로만 여겨진다. 따라서 한 상품의 단순한 가치 형태는 그 상품 내부에 존재하는 사용 가치와 가치 사이에 대립이 단순하게 외부에 나타난 형태다.


노동 생산물은 어떤 사회 제도에서도 사용될 수 있는 대상이지만, 그 생산에 투입된 노동이 물건의 객관적 속성, 곧 가치로 나타나는 일은 오직 역사적으로 특수한 발전 단계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다. 바로 이 단계에서 노동 생산물은 상품으로 전환된다. 그러므로 상품의 단순한 가치 형태는 동시에 노동 생산물의 단순한 상품 형태이며, 상품 형태의 발전은 가치 형태의 발전과 함께 진행된다.


단순한 가치 형태가 불충분하다는 점은 첫눈에도 명백하다. 그것은 상품 가치를 화페량으로 표현하는 가격 형태로 성숙하기 전, 하나의 싹에 불과하다. 상품 A의 가치를 다른 어떤 상품 B로 표현한다면, 다만 상품 A의 가치를 그것의 사용 가치와 구별하는 데 그친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상품 A를 오직 한 가지 상품 종류(B)와 교환 관계에 놓을 뿐이며, 다른 모든 상품들과 상품 A 사이에 질적인 동등성이나 양적인 비율을 표현하지는 않는다. 하나의 상품(아마포)에 대한 단순한 상대적 가치 형태에는 다른 하나의 상품(저고리)에 대한 개별적인 등가 형태가 대응한다. 따라서 아마포의 상대적 가치 표현에서 저고리는 이 하나의 상품 종류, 곧 아마포에 대해서만 등가 형태, 직접적으로 교환할 수 있는 형태를 취한다.

 

단순한 가치 형태는 스스로 더 완전한 형태로 나아간다. 물론 단순한 가치 형태는 한 상품 A의 가치를 다만 한 종류의 다른 상품으로만 표현한다. 그러나 이 두 번째 상품이 저고리이든, 쇠이든, 밀이든, 그 무엇이든 전혀 상관없다. 따라서 상품 A가 어떤 다른 상품 종류와 가치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상품 A의 단순한 가치 표현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가치 표현 의 수는 상품 A를 제외한 다른 상품 종류의 수로부터만 제한된다. 그러므로 상품 A의 개별적인 가치 표현은 무한히 연속되는 다양하고 단순한 가치 표현들로 전환된다.


. 2형태: 전체적 또는 전개된 가치 형태

 

z량의 상품

 = u량의 상품 B

 = v량의 상품 C

 = w량의 상품 D

 = x량의 상품 E

 = 기타 등등

 

20미터의 아마포 

 = 1개의 저고리

 = 10그램 차

 = 40그램 커피

 = 1리터 밀

 = 2온스 금

 = 1/2톤 철

 = 기타 등등

 

전개된 상대적 가치 형태

 

이제 한 상품인 아마포 가치는 상품 세계에 있는 무수한 다른 상품들로 표현된다. 이로써 다른 모든 상품체는 아마포 가치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이러한 형태는 아마포 가치 자체가 진정으로 무차별적인 인간 노동의 응고물임을 보여준다. 아마포 가치를 형성하는 노동은 이제 다른 어떤 형태의 인간 노동(저고리, 밀, 쇠, 금 등 어떤 현물 형태로 대상화된)과도 동일한 노동으로 명확하게 표현되기 때문이다. 아마포는 자신의 가치 형태로부터 단 하나의 다른 상품과 사회적 관계를 맺는 게 아니라, 상품 세계 전체와 사회적 관계를 맺는다. 아마포는 상품으로 세계의 한 시민이 된다. 동시에, 아마포 가치를 무한히 표현하는 이러한 연속적인 관계로부터, 아마포 가치는 그것을 드러내는 사용 가치의 특수한 형태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점이 드러난다.

 

1형태에서 두 상품이 일정한 양적 비율로 교환될 수 있다는 점은 우연적 사건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와 달리 2형태에서는 이러한 우연적 현상과 본질적으로 다르며, 교환 비율을 규정하는 배경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아마포 가치는 그것이 저고리, 커피, 철 등 수많은 다른 소유자들의 상품으로 표현될 때마다 그 크기가 항상 동일하다. 이는 두 개인적 상품 소유자 사이에 우연적 관계를 제거한다. 이제 상품 교환이 상품 가치량을 규제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상품 가치량이 상품 교환 비율을 명백하게 규제한다.


특수한 등가 형태

 

저고리, 커피, 철, 차, 밀 등의 상품은 아마포 가치를 표현할 때 등가물로, 곧 가치체로 기능한다. 이 상품들 각각의 현물 형태는 다른 여러 상품과 함께 하나의 특수한 등가 형태가 된다. 마찬가지로, 여러 상품체에 포함된 다양한 구체적 유용 노동들은 이제 인간 노동 일반의 특수한 실현 형태 또는 현상 형태로 간주된다.

   

전체적 또는 전개된 가치 형태의 결함


전체적 또는 전개된 가치 형태에는 여러 결함이 있다. 첫째로, 상품의 상대적 가치 표현은 미완성이다. 상품 가치를 나타내는 연속이 끝없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 가치 등식의 사슬은 새로운 상품 종류가 등장할 때마다 연장된다. 둘째, 이 사슬은 조각조각 끊어진 잡다한 가치 표현들의 다채로운 조각무늬를 이룬다. 끝으로, 각 상품의 상대적 가치가 이러한 전개된 형태로 표현되면, 모든 상품의 상대적 가치 형태는 서로 다른 무한한 가치 표현들의 연속으로 된다. 전개된 상대적 가치 형태의 결함은 그에 대응하는 등가 형태에도 나타난다. 각 상품 종류의 현물 형태는 수많은 등가 형태 가운데 하나가 되며, 각각의 등가 형태는 서로를 배제하기 때문에, 여기에는 오직 파편적 등가 형태만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각각의 특수한 등가물 상품에 포함된 특정한 구체적 유용 노동은 인간 노동의 특수한 종류일 뿐이므로, 인간 노동 일반의 포괄적 현상 형태가 될 수 없다. 물론 인간 노동의 완전한 또는 전체적인 현상 형태는 그 특수한 현상 형태들의 총체로 구성되는 일은 사실이지만, 이 경우 인간 노동은 하나의 통일적인 현상 형태를 가지지 못한다.

 

전개된 상대적 가치 형태는 단순한 상대적 가치 표현들의 합계, 곧 제1형태에 속하는 여러 등식들의 합계에 불과하다.

 

20미터 아마포 = 1개 저고리

20미터 아마포 = 10그램 차 등

 

그러나 이 등식들은 각각 좌변과 우변을 바꾸어 놓은 다음과 같은 등식 또한 내포한다. 

 

1개 저고리 = 20미터 아마포

10그램 차 = 20미터 아마포 등등

 

사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아마포를 여러 다른 많은 상품들과 교환하고, 그로 인해 아마포 가치를 일련의 다른 상품들로 표현한다면, 필연적으로 다른 상품 소유자들도 자신의 상품을 아마포와 교환하게 된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의 여러 상품 가치를 동일한 제3의 상품, 곧 아마포로 표현하게 된다. 여기서 '20미터 아마포 = 1개 저고리', 또는 '= 10그램 차', 등과 같은 연속을 거꾸로 뒤집어, 이미 내포된 역관계를 표현하면 다음과 같은 형태가 나타난다. 


. 3형태: 일반적 가치 형태

 

· 1개 저고리

· 10그램 차

· 40그램 커피

· 1리터 밀

· 2온스 금

· 1/2톤 철

· X량의 상품 A

· 기타 등등 상품

 

 = 20미터 아마포 

 

가치 형태의 변화한 성격

 

이제 여러 가지 상품들은 자신의 가치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1). 간단하게 표현한다: 단 하나의 상품으로 가치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2). 통일적으로 표현한다: 왜냐하면 동일한 상품으로 가치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품들의 가치 형태는 간단하고, 공통적이며, 일반적이다.


1형태와 제2형태는 한 상품의 가치를 자신의 사용 가치(상품체)와 구별되는 다른 것으로 표현하는 데 불과했다. 1형태는 '1개 저고리 = 20미터 아마포', '10그램 차 = 1/2톤 철' 과 같은 가치 등식을 제공했다. 그러나 저고리의 가치 표현(아마포와 동등함)과 차의 가치 표현(철과 동등함)은 아마포와 철이 서로 다르듯이 전혀 관계가 없는 별개다. 이러한 형태는 노동 생산물이 우발적이고 간헐적인 교환 행위로부터 상품으로 전환되는 교환 초기 단계에서만 실제로 나타난다.


2형태는 제1형태보다 한 상품의 가치를 자신의 상품 가치와 더 완전하게 구별한다. 자기의 사용 가치와 구별한다이제 아마포 가치는 저고리, 쇠, 차 등 아마포를 제외한 다른 모든 물건과 동등하게 되어 아마포의 본래적인 현물 형태와 대립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형태는 모든 상품의 공통된 가치 표현을 직접적으로 배제된다. 각 상품의 가치 표현에 다른 모든 상품들이 등가물로 나타나기 때문에, 통일된 등가물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전개된 가치 형태는 특정 노동 생산물, 가축이 예외적이 아닌 관습적으로 다양한 상품들과 교환되는 시점에서 비로소 실제로 나타난다.

 

새로 얻은 제3형태는 상품 세계의 가치를 그 안에서 선별된 한 종류의 상품, 곧 아마포로 표현한다. 이 형태로부터 모든 상품은 아마포와 동등해지면서 자신의 가치를 표현한다. 이제 어떤 상품의 가치도 자신의 사용 가치뿐만 아니라 모든 사용 가치로부터 구별된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모든 상품 가치가 아마포라는 공통의 매개체로 표현된다. 따라서 이 형태로부터 비로소 상품들은 실제 가치로 서로 관계를 맺거나 상호 간 교환 가치로 나타나게 된다.


이전에 두 가치 형태는 각 상품 가치를 단 하나의 다른 상품으로 표현하거나, 또는 그 상품과 다른 여러 상품들로 표현한다. 어느 경우든, 개별 상품이 가치 형태를 얻는 일은, 그 상품만의 개인적인 일로 보이며다른 상품들의 협력 없이 달성된다다른 상품들은 그저 등가물이라는 수동적인 역할을 할 뿐이다. 그러나 일반적 가치 형태는 오직 상품 세계 전체의 공동 사업으로만 완성될 수 있다. 한 상품이 자신의 가치를 보편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이유는 다른 모든 상품들이 동일한 등가물로 자신의 가치를 표현하고, 새로 등장하는 상품 종류 또한 그렇게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상품이 가치로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일은 순전히 이 물건들의 사회적 존재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객관적 실재는 상품들의 전면적인 사회적 관계로부터만 표현될 수 있으며, 따라서 상품의 가치 형태는 반드시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형태여야 한다는 점이 명백해진다.

 

모든 상품이 아마포와 동등해지는 이러한 형태에서, 모든 상품은 이제 질적으로 서로 동등한 가치 일반으로 나타날 뿐 아니라, 양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가치량으로 나타난다. 이는 모든 상품의 가치량이 동일한 재료인 아마포로 표현되기 때문에 서로 비교된다. 10그램의 차 = 20미터 아마포와 같고, 40그램 커피 = 20미터 아마포와 같다면, 10그램 차 = 40그램 커피와 같다. 이는 1그램 커피에는 1그램 차에 들어 있는 가치 실체(노동)의 1/4만 들어 있다는 의미이다.


일반적인 상대적 가치 형태는 상품 세계에서 분리된 아마포에 일반적 등가물의 성격을 부여한다. 아마포의 현물 형태는 이제 모든 상품의 가치가 공통적으로 취하는 형태가 되며, 따라서 다른 모든 상품과 직접 교환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이러한 형태에서 아마포의 생산(직조)은 모든 인간 노동의 눈에 보이는 화신, 곧 모든 인간 노동의 사회적 현상 형태로 간주된다. 곧, 사적 노동인 직조는 다른 모든 종류의 노동과 동등하다는 일반적인 사회 형태를 획득한다. 일반적 가치 형태를 구성하는 수많은 등식은 아마포에 구현된 노동을 다른 상품에 포함된 다양한 노동과 차례로 동등하게 만들어, 직조를 무차별적인 인간 노동의 일반적 현상 형태로 만든다. 이처럼 상품 가치에 객관화된 노동은 현실적 노동의 모든 구체적 형태와 유용한 속성을 제거하는 소극적 표현과 동시에, 모든 종류의 현실적 노동을 인간 노동력 지출이라는 공통된 성질로 환원시키는 적극적 표현을 갖게 된다. 따라서 모든 노동 생산물을 무차별적인 인간 노동의 단순한 응고물로 표현하는 일반적 가치 형태는 그 구조 자체로 상품 세계의 사회적 표현임을 보여준다. 이로써 상품 세계 안에서는 노동의 일반적 인간적 성격이 그 노동의 독자적인 사회적 성격을 형성한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상대적 가치 형태와 등가 형태의 상호의존적 발전

 

상대적 가치 형태의 발전 정도와 등가 형태의 발전 정도는 서로 대응한다. 그러나 등가 형태의 발전은 상대적 가치 형태 발전의 단순한 표현이자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 단순한 가치 형태한 상품에서 가치를 다른 한 상품으로 표현하는 단순한 상대적 가치 형태는 그 다른 상품을 개별적 등가물로 만든다


· 전개된 가치 형태: 한 상품에서 가치를 다른 모든 상품들로 표현하는 전개된 상대적 가치 형태는 다른 모든 상품들에게 각기 다른 종류의 특수한 등가물 형태를 부여한다. 


· 일반적 가치 형태: 기타 모든 상품들이 한 가지 특수한 상품을 자신들의 통일적이고 보편적인 가치 표현의 재료로 삼기 때문에, 그 특수한 상품은 일반적 등가물의 형태를 취하게 된다. 


그러나 가치 형태가 발전함에 따라, 그 두 끝인 상대적 가치 형태와 등가 형태 사이에 대립 또한 발전한다.


이미 제1형태인 '20미터 아마포 = 1개 저고리'라는 등식에도 이러한 대립은 내포되어 있지만, 아직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이는 등식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는지, 또는 그 반대로 읽는지에 따라 아마포와 저고리라는 두 상품이 각각 상대적 가치 형태가 되기도 하고, 등가 형태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단계에서는 두 극의 대립성을 분명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2형태에서는 한 번에 단 한 가지 상품만이 자신의 상대적 가치를 완전히 전개할 수 있다. 이는 다른 모든 상품이 그 한 가지 상품에 대한 등가물로 기능하기 때문에, 그리고 오직 그때에만, 그 상품이 전개된 상대적 가치 형태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형태에서는 '20미터 아마포 = 1개 저고리, 또는 = 10그램 차'와 같은 가치 등식의 좌우를 바꾸어 놓을 수 없다. 등식을 바꾸면, 그 전체적인 성격이 변경되어 전개된 가치 형태가 일반적 가치 형태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3형태는 상품 세계에 일반적이고 사회적인 상대적 가치 형태를 부여한다. 이것은 오직 하나의 상품을 제외한 모든 상품이 등가 형태에서 배제되기 때문에 성립한다. 따라서 아마포라는 단 하나의 상품만이 다른 모든 상품과 직접 교환할 수 있는 직접적 사회 형태를 얻게 된다. 이는 다른 모든 상품들이 이러한 형태를 획득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때에만 성립하는 특수한 조건이다. 

 

다른 한편으로, 일반적 등가물로 기능하는 상품은 통일적이고 일반적인 상대적 가치 형태로부터 제외된다. 아마포(일반적 등가물)가 동시에 상대적 가치 형태에도 포함된다면, 아마포는 자기 자신의 등가물이 되어야 한다. 이 경우 '20미터 아마포 = 20미터 아마포'라는 동어 반복이 발생하며, 이는 가치나 가치량을 표현하지 못한다. 일반적 등가물의 상대적 가치를 표현하려면 오히려 제3형태를 역으로 적용해야 한다. 곧, 일반적 등가물은 다른 상품들과 공통된 상대적 가치 형태를 가지지 않으며, 그 가치는 다른 모든 상품체의 무한한 연속으로 상대적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전개된 상대적 가치 형태(2형태)가 바로 등가물 상품의 독자적인 상대적 가치 형태로 나타난다. 

 

일반적 가치 형태가 화폐 형태로 이행

 

일반적 등가 형태는 가치 일반의 한 가지 형태이므로, 어떤 상품이든 이를 취할 수 있다. 그러나 3형태에서 한 상품이 일반적 등가물이 되는 일은 오직 다른 모든 상품이 그 상품을 자신들의 등가물로 선택하고 배제할 때에만 성립한다. 이러한 배제 과정이 최종적으로 하나의 특수한 상품 종류에 한정되는 순간, 상품 세계의 통일적인 상대적 가치 형태는 비로소 객관적인 고정성과 일반적인 사회적 타당성을 획득한다. 


자신의 본래 형태가 사회적 등가물로 간주되는 특수한 상품 종류는 이제 화폐 상품이 된다. 곧, 화폐로 기능하게 된다. 이 상품은 상품 세게에서 일반적 등가물로 작용하며, 이 역할은 그 상품만의 독점적인 사회적 기능이 된다. 역사적으로, 2형태에서 개별 등가물로 기능했고 제3형태에서 공통적으로 상대적 가치를 표현했던 여러 상품들 가운데, 금이라는 특정 상품이 이러한 특권적 지위를 차지하게 됐다. 3형태에서 아마포 자리에 금을 놓으면 다음과 같은 형태가 된다.

  

. 4형태: 화폐 형태

 

· 2미터 아마포

· 1개 저고리

· 10그램 차

· 40그램 커피

· 1리터 밀

· 1/2톤 철

· X량의 상품 A

 

 = 20미터 아마포


1형태에서 2형태로, 그리고 다시 제2형태에서 제3형태로의 이행 과정에서는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하지만 4형태는 제3형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아마포 대신 금이 이제 일반적 등가 형태를 취한다는 점만이 유일한 차이점이다. 제4형태에서 금은 3형태의 아마포와 마찬가지로 일반적 등가물의 기능을 수행한다. 발전한 점은, 직접적으로 보편적인 교환 형태, 곧 일반적 등가 형태가 사회적 관습으로부터 금이라는 특수한 현물 형태와 최종적으로 동일시됐다는 점뿐이다. 금이 다른 여러 상품에 대해 화폐로 기능하는 점은, 이미 그 전부터 금이 그들과 상품으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상품과 마찬가지로, 금도 개별적인 교환에서는 개별적 등가물로, 전개된 교환에서는 여러 다른 등가물 상품과 함께 특수한 등가물로 기능했다. 그러다가 점차 때로는 좁은 범위에서, 때로는 더 넓은 범위에서, 일반적 등가물로 기능하게 된다. 금이 상품 세계의 가치 표현에서 일반적 등가물의 지위를 독점하자마자, 비로소 화폐 상품이 된다. 금이 화폐 상품이 됐을 때, 4형태는 이전 형태들과 구별된다. 곧, 일반적 가치 형태가 화폐 형태로 전환된다. 한 상품(아마포)의 상대적 가치를 화폐 상품(금)으로 표현하는 가장 단순한 형태를 가격 형태라고 한다. 따라서 아마포의 가격 형태는 다음과 같다.

 

20미터 아마포 = 2온스 금

 

또는 금 2온스 주화의 명칭이 2원이라면,

 

20미터 아마포 = 2


화폐 형태 개념을 이해하기 어려운 주된 이유는 일반적 등가 형태, 곧 일반적 가치 형태(3형태)를 명확히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제3형태(일반적 가치 형태)를 역으로 되돌리면, 2형태(전개된 가치 형태)로 환원된다. 


· 이 제2형태의 구성 요소는 제1형태(단순한 가치 형태)인 '20미터 아마포 = 1개 저고리'와 같은 개별적인 가치 등식이다.  


따라서 가장 단순한 형태인 단순한 상품 형태(단순한 가치 형태)가 바로 화폐 형태의 싹이다. 


1-4. 상품의 물신적 성격과 그 비밀

 

상품은 겉보기에는 평범하고 당연한 물건이다. 그러나 분석하면, 그것은 형이상학적 궤변과 신학적 잔소리로 가득한 기묘한 물건임이 드러난다. 상품이 사용 가치인 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속성을 지니든, 인간 노동의 산물로 그 속성을 얻게 되든, 그 안에 신비한 요소는 전혀 없다. 인간이 자신의 활동으로부터 자연 재료의 형태를 인간에게 유용하게 바꾸는 일은 자명하다. 나무로 책상을 만들면 나무의 형태가 변할 뿐, 책상은 여전히 나무로 만들어진 감각적인 물건이다. 그러나 이 책상이 상품으로 변하는 순간, 그것은 초감각적인 물건으로 변모한다. 책상은 자기 발로 마룻바닥 위에 서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상품과 역관계를 맺으며, 책상이 스스로 춤을 추는 일보다 훨씬 더 기이한 환상을 그 나무 머리에서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상품의 신비한 성격은 그 사용 가치에서 비롯되지 않고, 상품 가치를 규정하는 요소들의 성격에서도 나오지 않는다. 첫째, 유용 노동이나 생산 활동은 그 종류가 다양하더라도 언제나 인간 유기체의 기능이며, 그 성격과 형태가 어떠하든 본질적으로 인간의 뇌, 신경, 근육, 감각 기관 등을 소모하는 생리학적 진리이기 때문이다. 둘째, 가치의 양을 규정하는 토대인 노동력 지출의 지속 시간, 곧 노동량은 노동의 질과는 명확히 구별되기 때문이다. 어떤 사회에서든 생활 수단 생산에 필요한 노동 시간은 사람들의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비록 발전 단계에 따라 그 정도는 다를지라도). 끝으로, 사람들이 서로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노동하게 되면, 그들의 노동 역시 사회적 형태를 띠게 된다. 그렇다면 노동 생산물이 상품 형태를 취하는 순간 생기는 이 수수께끼 같은 성격은 어디에서 오는가. 분명히 이 형태 자체에서 온다. 왜냐하면 다양한 인간 노동이 동등하다는 점은 노동 생산물이 가치로서 동등한 객관성을 가진다는 구체적인 형태를 취하며, 인간 노동력 지출을 그 지속 시간으로 측정하는 일은 노동 생산물의 가치량이라는 형태를 취하고, 생산자들 사이에 관계(그들의 노동의 사회적 성격이 증명되는)는 노동 생산물 사이에 사회적 관계라는 형태를 취하기 때문이다.


상품 형태의 신비함은, 그것이 인간 노동의 사회적 성격을 노동 생산물 자체의 물리적 특성처럼 보이도록 하며, 생산자들의 사회적 관계를 그들 밖에 존재하는 물건들 사이에 사회적 관계처럼 보이게 한다는 사실에 있다. 이처럼 변형된 노동 생산물은 상품이 되며, 감각적이면서 동시에 초감각적(사회적)인 물건이 된다. 이는 물건에서 나오는 빛이 시신경을 자극해 물건을 보게 된다고 여기지 않고, 그 빛을 눈 밖에 존재하는 물건의 객관적 형태로 간주하는 일과 비슷하다. 물론 사물을 볼 때 빛은 실제로 한 물건(외부 대상)에서 다른 물건()으로 던져지는, 물리적 대상들 간 물리적 관계이다. 그러나 상품의 경우는 다르다. 노동 생산물이 상품으로 존재하고, 노동 생산물 사이에 가치 관계(상품이라는 표식을 부여하는)가 형성되는 일은 생산물의 물리적 속성이나 그로부터 발생하는 물질적 관계와는 무관하다. 이는 인간들의 눈에는 물건들 사이에 관계로 보이는 환상적인 형태일 뿐, 실제로는 인간들 간 특정한 사회적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비슷한 예를 찾으려면 몽롱한 종교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그곳에서 인간 두뇌의 산물들은 스스로 생명을 가진 자립적인 인물로 등장하여 그들 상호 간, 그리고 인간과의 관계를 맺는다. 마찬가지로 상품 세계에서는 인간 손의 산물들이 그러한 역할을 한다. 이를 필자는 물신 숭배라 부르는데, 이는 노동 생산물이 상품으로 생산되는 순간 상품에 들러붙고, 따라서 상품 생산과 분리될 수 없다. 상품 세계의 이러한 물신 숭배는 앞선 분석이 보여주듯,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 특유의 사회적 성격에서 비롯된다. 

 

유용한 물건이 상품이 되는 이유는 그것이 서로 독립적으로 작업하는 사적 개인들의 노동 생산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적 개인들의 노동 총합이 곧 사회의 총노동을 이룬다. 생산자들은 자신의 노동 생산물을 교환하면서 비로소 사회적으로 접촉하게 되며, 그들의 사적 노동에 내재된 독특한 사회적 성격은 오직 이 교환 과정에서만 드러난다. 곧, 교환 행위가 노동 생산자들 사이에, 그리고 노동 생산물을 매개로 생산자들 사이에 맺어주는 관계에서만, 사적 개인의 노동은 비로소 사회 총노동의 한 요소로 나타난다. 따라서 생산자들에게는 자신들의 사적 노동 간 사회적 관계가, 개개인이 작업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맺는 사회적 관계가 아니라, 실제로 눈에 보이는 바와 같이 물건으로부터 개인들이 맺는 관계, 그리고 물건들 사이에 사회적 관계로 나타난다.

 

노동 생산물은 교환으로부터 비로소 유용한 물건이라는 감각적이고 다양한 물체와 구별되는 사회적으로 동등한 객관적 실재, 곧 가치를 얻는다. 노동 생산물이 유용한 물건과 가치 있는 물건으로 분리되는 현상은, 교환이 이미 충분히 보편화되어 유용한 물건이 교환을 위해 생산되고, 그 물건 가치로서의 성격이 이미 생산 단계에서부터 고려될 때 비로소 실제로 나타난다. 이 순간부터 개별 생산자의 사적 노동은 이중적인 사회적 성격을 띠게 된다. 한편으로는, 사적 노동이 특정한 유용 노동으로서 일정한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그러면서 자연 발생적인 사회적 분업의 한 부분으로 사회 총노동의 한 요소가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적 노동이 개별 생산자 자신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일은, 각각의 특수한 유용하고 사적 노동들이 서로 교환되고, 서로 동등하다고 인정될 때뿐이다. 이처럼 서로 다른 종류의 노동을 완전히 동등하게 만드는 일은, 그 현실적 차이를 무시하고 모든 노동을 인간 노동력 지출(추상적 인간 노동)이라는 공통적 성격으로 환원할 때만 성립한다. 사적 생산자들의 머릿속에서 그들의 사적 노동이 지닌 이러한 이중적인 사회적 성격은 생산물 교환이라는 실제 거래 형태로만 나타난다. 따라서 사적 노동의 사회적 유용성은 노동 생산물이 타인에게 유용해야 한다는 형태로 나타나고, 다양한 노동의 동등성이라는 사회적 성격은 물질적으로 서로 다른 노동 생산물이 모두 하나의 공통된 성질(가치)을 가지고 있다는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노동 생산물이 단순히 동질의 인간 노동을 품고 있는 물질적 겉껍데기이기 때문에 서로 가치로서 관계를 맺는다고 보지 않으며, 그 반대로 생각한다. 곧, 사람들은 자신들의 다양한 생산물을 교환 과정에서 서로 가치로서 동일하게 취급하면서, 그들의 서로 다른 노동을 인간 노동으로 동등하게 만든다. 그들은 이것을 의식하지 못하면서도 그렇게 한다. 가치는 자신의 이마에 가치라고 써 붙이고 있지 않다. 오히려 가치는 각각의 노동 생산물을 하나의 사회적 상형 문자로 바꾸어 놓는다. 이후에 사람들은 이 상형 문자의 의미를 해독하여 자신들의 사회적 산물(가치)의 비밀을 해명하려고 노력한다유용한 물건이 가치라는 성격을 갖게 된 일은, 언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사회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노동 생산물이 가치인 한, 그것은 생산에 투여된 인간 노동의 물질적 표현에 불과하다는 후대의 과학적 발견은 인류 발전사에 획기적인 일이지만, 노동의 사회적 성격이 생산물 자체의 객관적 성격으로 보이게 하는 환상을 결코 없애지는 못한다. 상품 생산이라는 특수한 생산 형태에 속한 사람들은, 위에 과학적 발견 이전에든 이후든,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절대적 타당성으로 여긴다. 곧, 서로 독립적인 사적 노동의 독특한 사회적 성격이 인간 노동으로 동등하다는 점에 있고, 그 사회적 성격이 노동 생산물에서 가치라는 존재 형태를 취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는 공기의 구성 성분이 과학적으로 발견된 뒤에도 공기 그 자체는 아무런 변화 없이 그대로 존재한다는 사실과 마찬가지의 절대적 타당성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생산자들이 교환을 할 때, 그들이 가장 먼저 실제로 관심을 갖는 일은 자신의 생산물이 타인의 생산물을 얼마나 얻을 수 있는가, 곧 어떤 비율로 교환되는가다. 이 비율이 관습으로 어느 정도 안정되면, 그 비율은 노동 생산물의 본질에서 나오듯이 보인다. 그래서 '1톤 쇠와 2온스 금이 가치가 같다'는 말은 '1그램 금과 1그램 쇠가 물리적, 화학적 속성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같은 무게를 가진다'는 사실처럼 자연스럽게 생각된다. 노동 생산물의 가치 성격은 생산물들이 가치량으로 상호 작용할 때 비로소 명확해진다. 왜냐하면 이 가치량은 교환하는 사람들의 의지, 예견, 행동과는 무관하게 끊임없이 변동하기 때문이다. 사회 안에서 교환자들 자신의 행동은 그들에게 물건들의 운동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데, 그들은 이 운동을 통제하기는커녕 도리어 그 운동으로부터 통제당하고 있다. 서로 독립적으로 수행되면서도 사회적 분업의 자연 발생적 일환로서 전면적으로 상호 의존는 모든 종류의 사적 노동이 사회가 요구하는 양적 비율로 끊임없이 조정된다는 과학적 인식은, 경험 자체로부터 생겨나려면 상품 생산이 완전히 발전해야만 한다. 이러한 조정이 이뤄지는 이유는, 생산물들 사이에 우연적이고 끊임없이 변동하는 교환 관계 속에서 생산물 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 시간이 중력 법칙과 같이 규제적인 자연 법칙으로 자신을 관철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동 시간에 따른 가치량의 결정은 상품의 상대적 가치 현상 뒤에 숨어 있는 하나의 비밀이다. 이 비밀을 찾아내더라도, 노동 생산물의 가치 크기가 순전히 우연적으로 결정되는 일 같은 겉모습을 없앨 수는 있어도, 가치 크기가 결정되는 형태를 완전히 없애지는 못한다. 

 

사회 생활 형태들에 대한 고찰, 곧 이 형태들의 과학적 분석은 그것들의 실제 역사적 발전 경로와는 반대로 이루어진다. 분석은 잔치가 끝난 뒤에, 곧 발전 과정의 결과를 가지고 시작하기 때문이다. 노동 생산물에 상품이라는 표식을 찍고, 따라서 상품 유통의 전제 조건이 되는 형태들은, 사람들이 그 형태들의 역사적 성격을 파악하기도 전에(왜냐하면 그 형태들은 역사적으로 변하지 않는 듯이 보이기 때문에), 이미 사회 생활의 자연적 형태라는 확신을 얻게 된다. 그래서 오직 상품 가격을 분석할 때만 가치량 결정의 문제가 제기됐고, 모든 상품이 공통적으로 화폐로 표현된다는 사실로부터만 상품 = 가치라는 성격이 확정됐다. 그러나 바로 상품 세계의 이 완성된 형태, 곧 화폐 형태는 사적 노동의 사회적 성격과 개별 노동자들 사이에 사회적 관계를 숨김없이 폭로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그 관계를 물건들 사이에 관계로 나타내며 은폐하고 있다. 아마포가 추상적 인간 노동의 일반적 화신이기 때문에 저고리나 장화와 관계를 맺는다는 올바른 주장은 명백히 황당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저고리와 장화 생산자들이 자신의 상품을 일반적 등가물인 아마포나 금, 은과 비교할 때, 이 비교가 사회의 총노동과 그들의 사적 노동 사이에 관계를 표현한다는 올바른 인식 또한 생산자들에게는 똑같이 황당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부르주아 경제학의 범주들은 이와 같은 형태들로 구성됐다. 이러한 범주들은 역사적으로 규정된 특정한 사회적 생산양식(상품생산)의 생산 관계에서는 사회적으로 타당하고 객관적인 사고 형태이다. 그러므로 상품의 모든 신비(상품 생산의 토대로 노동 생산물을 둘러싼 모든 환상과 황당함)는 다른 생산 형태로 이행하는 순간 사라진다. 정치경제학자가 자주 언급하는 로빈슨 크루소를 예로 들어보자. 크루소는 검소한 성격이지만 다양한 욕구를 충족해야 하므로 도구를 만들고, 가구를 제작하며, 염소를 기르고, 물고리를 잡는 등 여러 유용 노동을 해야 한다. 기도를 하거나 이와 비슷한 행위는 여기에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크루소는 이 모든 활동을 즐기고 위안거리로 삼기 때문이다. 그의 다양한 생산 활동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여러 기능들이 모두 자신의 다양한 활동 형태, 곧 인간 노동의 여러 방식에 불과하다는 점을 알고 있다. 그는 절실한 필요에 따라 자신의 시간을 여러 기능에 정확하게 배분한다. 어떤 활동이 자신의 전체 활동에서 더 많은 시간을 차지할지는, 목적하는 유용한 효과를 얻는 데 부딪치는 어려움의 크기에 달려 있음을 그는 경험으로 이를 안다. 난파선에서 시계, 장부, 잉크, 펜을 구해낸 크루소는 훌륭한 영국인답게 자신의 일들을 장부에 적기 시작한다. 그의 장부에는 그가 소유한 유용한 물건들과 그것을 만드는 데 필요한 여러 작업, 그리고 일정량의 생산물을 만드는 데 평균적으로 걸리는 노동 시간이 상세히 기록됐다. 로빈슨 크루소와 그 자신의 손으로 만든 부를 구성하는 물건들 사이에 모든 관계는 너무나 간단명료하여 누구라도 특별히 머리를 쓰지 않고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이 관계들은 이미 가치를 규정하는 본질적인 모든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이제 로빈슨 크루소의 밝은 섬에서 벗어나, 음울한 중세 유럽으로 눈을 돌려보자. 이곳에는 독립적인 개인이 아닌, 모두가 서로에게 의존적인 농노와 영주, 가신과 제후, 평민과 성직자가 존재한다. 인격적 예속이 물질적 생산의 사회적 관계와 그에 기반한 삶의 여러 부문을 규정한다. 그러나 바로 이 인격적 예속 관계가 사회 기반을 이루기 때문에, 노동과 노동 생산물은 그들의 실제 모습과는 다른 환상적인 모습을 띨 필요가 없다. 노동과 생산물은 사회 거래에서 부역과 공물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상품 생산 사회와 같이 노동의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형태가 아니라, 이곳에서는 노동의 특수하고 자연적인 형태가 노동의 직접적인 사회적 형태이다. 부역은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과 마찬가지로 시간으로 측정되지만, 어떤 농노도 자신이 영주에게 바치는 노동이 자신의 노동력 가운데 일부라는 점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가 교회에 내야 하는 십일조는 성직자로부터 받는 축복보다 훨씬 더 명확하다. 중세 사람들의 서로에 다양한 노동을 어떻게 평가하든, 노동을 하면서 맺게 되는 사회적 관계가 그들 자신 사이에 인격적 관계로 직접적으로 드러나며, 물건들(노동생산물들) 사이에 사회적 관계로 위장되지 않는다.

  

공동 노동, 또는 직접적으로 연합한 노동의 예를 찾고자 모든 문화 민족의 역사 초기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는 없다. 가까운 예로 가족의 필요를 위해 밀, 가축, 천, 아마포, 의복 등을 생산하는 농민 가족의 가부장적 생산이 있다. 이런 물건들은 그들 가족의 공동 노동으로 만들어진 생산물이지만, 상품으로 서로 마주하지는 않는다. 이 생산물을 만드는 여러 종류의 노동(농경, 목축, 방적, 직조, 재봉 등)은 있는 그대로 사회적 기능이다. 이는 상품 생산에 기반을 둔 사회와 마찬가지로, 자체의 자연 발생적인 분업 체계를 가진 가족 기능이기 때문이다. 가족 구성원의 성별, 나이 차이와 계절 변화에 따라 변동하는 노동의 자연적 조건이 가족 구성원 사이에 노동 배분이나 각자의 노동 시간을 규제한다. 이 경우, 각 개인의 노동력은 처음부터 가족 전체 노동력의 한 부분으로 간주되므로, 개별 노동력 소모를 그 지속 시간으로 측정하는 일은 이미 노동 자체의 사회적 특징 가운데 하나로 나타난다.

 

마지막으로, 기분 전환을 위해 공동 생산 수단을 사용하며, 다양한 개인들의 노동력을 하나의 사회적 노동력으로 의식적으로 활용하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을 가정해보자. 여기에는 로빈슨 크루소의 노동이 지녔던 모든 특징이 다시 나타나지만, 개인적 노동이 아닌 사회적 노동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로빈슨이 생산한 모든 것은 전적으로 그 자신의 개인적 노동의 결과였으며, 따라서 그가 사용할 물건이었다. 이 자유로운 개인들 연합의 총생산물은 사회적 생산물이다. 이 생산물의 일부는 다시 생산 수단으로 쓰이고자 사회에 남고, 다른 일부는 연합의 구성원들이 생활 수단으로 소비한다. 따라서 이 부분은 구성원들 사이에 분배되어야 한다. 이 분배 방식은 공동체 생산 조직과 생산자들의 역사적 발전 수준에 따라 달라진다. 다만 상품 생산과 대조하고자, 각 개별 생산자에게 돌아가는 생활 수단의 분배 몫이 각자의 노동 시간으로 결정된다고 가정해보자. 이 경우 노동 시간은 두 가지 역할을 한다. 정확한 사회적 계획에 따른 노동 시간 배분은 연합의 다양한 욕구와 필요한 작업들 사이에 적절한 비율을 설정하고 유지한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 시간은 각 개인이 공동 노동에 참가한 정도를 재는 척도로 기능하며, 따라서 총생산물 가운데 개인적으로 소비되는 부분에 대한 그의 분배 몫의 척도가 된다. 개별 생산자들이 노동이나 노동 생산물에서 맺게 되는 사회적 관계는 생산뿐만 아니라 분배에서도 단순하고 투명하다.


종교 세계는 현실 세계의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 생산자 일반이 자신의 생산물을 상품과 가치로 취급하여, 자신의 개인적인 사적 노동을 동질적인 인간 노동으로 환원하며 서로 사회적 관계를 맺는 상품 생산 사회에서는, 추상적 인간을 숭배하는 기독교, 특히 그 부르주아적 발전 형태인 프로테스탄트교나 이신론이 가장 적합한 종교 형태이다. 고대 아시아적, 그리고 다른 고대적 생산 양식에서는 생산물이 상품으로, 인간이 상품 생산자로 전환되는 일이 종속적인 위치를 차지했는데, 원시 공동체가 붕괴 단계에 접어들면서 그 중요성이 커졌다. 진정한 상업 민족은 고대 세계에서는 오직 틈새에만 존재했다. 에피쿠로스가 말한 두 세계에 사는 신처럼, 또는 폴란드 사회의 틈새에 끼여 사는 유대인들처럼 말이다. 이러한 고대 사회의 생산 유기체는  부르주아 사회에 비해 매우 단순하고 투명했다. 그러나 고대 생산 유기체는 인간의 미성숙한 발달(원시 부족 공동체에서는 개인이 자신과 동료들 사이에 탯줄을 아직 끊지 못했다는 점)이나 직접적인 지배와 종속 관계에 기반을 두었다. 이러한 생산 유기체는 노동 생산력이 낮은 단계를 넘지 못하고, 따라서 물질적 생활 영역 안에서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 사이에 사회적 관계가 좁을 때만 생겨나고 존속할 수 있다. 이러한 사회적 관계의 좁음은 고대에 자연 숭배와 민간 신앙의 다른 요소들에 반영됐다. 현실 세계에서 종교적 반영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에 일상적이고 실질적인 관계가 완전히 투명하고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사람들에게 나타날 때에만 비로소 소멸될 수 있다.

   

사회적 생활 과정, 곧 물질적 생산 과정은 자유로운 연합들의 생산이 되고, 그들의 의식적이고 계획적인 통제 아래 놓일 때에 야 비로소 신비의 베일이 벗겨진다. 그러나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사회는 특정한 물질적 토대와 생존 조건을 갖춰야 하는데, 이 조건들 자체도 길고 힘든 발전 과정에서 자연 발생적 산물이다. 정치경제학은 가치와 가치량을 비록 불완전하더라도 분석하고, 이러한 형태들 속에 숨어 있는 내용을 발견했다. 그러나 정치경제학은 왜 이 내용이 그런 형태를 취했는지, 곧 왜 노동이 가치로 표현되고 노동 시간으로 노동의 측정이 노동 생산물의 가치량으로 표현되는지에 대한 질문을 한 번도 던진 적이 없다. 생산 과정이 인간을 지배하고 인간이 아직 생산 과정을 지배하지 않는 사회 구성체에 속해 있다는 명확한 표식이 찍힌 이러한 형태들도 정치경제학자의 부르주아적 의식에서는 생산적 노동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당연한 자연적 필연성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정치경제학이 부르주아 이전에 사회적 생산 조직 형태들을 다루는 태도는, 대체로 성직자들이 기독교 이전에 종교를 다루는 태도와 비슷하다.

    

일부 경제학자들이 상품 세계에서 나타나는 물신성이나 노동의 사회적 성격이 객관적인 형태로 드러나는 현상으로 인해 얼마나 혼란에 빠지는지는, 특히 교환 가치 형성에 대한 자연의 기여를 둘러싼 지루하고 무의미한 논쟁에서 잘 드러난다. 교환 가치는 어떤 물건에 투입된 노동을 표현하는 사회적 방식이므로, 환율과 마찬가지로 자연 소재를 포함할 수가 없다. 상품 형태는(이것은 화폐 형태와 자본 형태로 발전한다부르주아적 생산에서 가장 일반적이면서 가장 미발달된 형태이다. 따라서 상품 형태는 비록 오늘날처럼 지배적이고 특징적인 방식은 아니더라도 비교적 일찍부터 나타났고, 그렇기 때문에 그 물신적 성격이 비교적 쉽게 파악될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구체적으로 발달한 형태에서는 이러한 단순성이라는 겉모습마저 사라진다. 중금주의자들의 환상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들은 금과 은이 사회적 생산 관계인 화폐를 대표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금과 은이라는 자연 물질이 독특한 사회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현대 경제학은 거만한 태도로 중금주의를 비웃고 있지만, 자본을 다루게 되면 그들 자신의 물신 숭배성이 아주 뚜렷해지지 않는가. 지대는 토지에서 생기지 사회에서 생기지 않는다는 중농주의자들의 환상이 사라진 일도 최근이 아닌가. 그러나 너무 앞서 나가지는 않고자, 여기에서는 상품 형태 자체에 대한 또 다른 예시를 드는 데 그치려 한다. 상품이 말을 할 줄 안다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사용 가치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모르지만, 그것은 물건인 우리에게 속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에게 속하는 일은 바로 우리의 가치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상품으로 교환된다는 사실이 이것을 증명합니다. 우리는 오직 교환 가치로서만 서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경제학자들이 이러한 상품의 심정을 어떻게 전하고 있는지 들어보자.

 

가치(교환 가치)는 물건의 속성이고, (, 사용 가치)는 인간의 속성이다. 이런 점에서 가치는 필연적으로 교환을 전제로 하지만, 부는 그렇지 않다. 부는 인간의 속성인 반면, 가치는 상품의 속성이다. 인간 사회는 부유하며, 진주나 다이아몬드는 가치 있는 물건이다. 따라서 진주나 다이아몬드는 그 자체로 진주나 다이아몬드만큼 가치를 가진다.’

 

진주나 다이아몬드 안에서 교환 가치를 발견한 화학자는 아직 한 사람도 없다. 그런데 경제학자들이 자신들이 이 화학적 실체를 발견했다고 자부하며, 물건의 사용 가치는 물건의 물질적 속성과 무관하게 존재하지만, 물건의 가치는 그 물건의 일부를 구성한다는 엉뚱한 주장을 펼친다. 이러한 엉터리 견해를 확증해주는 것은, 물건의 사용 가치가 교환 없이 물건과 사람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 속에서 실현되는 반면, 물건의 가치는 오직 교환, 곧 사회적 과정에서만 실현된다는 기묘한 사정이다. 이쯤 되면 셰익스피어의헛소동에서, 저 선량한 독베리가 경비원 시콜에게 가르쳐 준 충고, 전혀 말이 되지 않는 조언이 떠오른다.


인기 있는 사람이 되는 일은 운명의 덕택이지만, 읽고 쓰는 일은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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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에 대한 정리 작업


아무래도『러시아 자본주의 발전』을 마치고 나면, 『자본』정리로 곧바로 들어가고자 한다. 미숙한 언어 사용의 관계로, 처음에는 번역기를 참고해서 정리했기 때문에 문장이 어색하거나 전달에 있어 체계적이지 못한 부분도 보였기 때문이다. 아래부터 차근차근 글을 다듬어 가고 있지만, 『자본』정리로 본격적으로 들어갈 것 같다. 그동안 '장'(章)으로 늘려진 분류를 한 '부'(部)로 잘 묶어내어 되도록 내용에도 손상이 없게 만들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는 도표 통계나, 주석 등 부수적인 내용들은 될 수 있는 한 제외한다. 혼자 힘으로는 역부족이기 때문에 관련 기술의 도움도 받고자 한다.『자본』을 먼저 정리했을 때는 과연 어떻게 나타날지도 궁금해지기 때문이다. 물론 서문에 관한 인용은 수 차례 여러 자료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으므로, 크게 다루지는 않겠다. 다음에는『자본』에서 강연을 듣거나, 간접적인 지식으로 단편적인 시각을 제공하여 국내『자본』의 번역은 충분히 이뤄졌음에도 몇 가지 이론화에 대한 작업이 매우 미흡했다는 점이 다시금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파가 현재에도 얼마나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하지만『자본』의 해석은 다시 기본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어 보인다. 


『자본』의 요구


이론에 대한 해석을 늘릴 수 있지만, 정리를 시도하지 않고는 본래 말하고자 하는 바도 적절한 논리를 파악할 수 없게 되며 이내 맥락과 갈피를 놓쳐버릴 수 있다. 『자본』을 남용하거나, 잘못 해석할 여지도 충분히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준비 과정에 있어서는 최대한 '수정'을 줄이고, 올바르게 개념을 정의하고, 관련 용어를 사용하려는 노력이 더 필요해 보인다. 미리 밝히지만, 본래 작은 계획이 하나 있었다. 바로 한국 경제에 대한 준비된 마르크스주의 비판을 행하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더 나아갈 수 있다면, 이론적 계획에 힘입어, 연구 수행에 있어 관련된 정치적 저작들도 정리해서, 정치적·경제적 투쟁, 그리고 사회적 투쟁까지 다뤄보고 싶기 때문이다. 더불어 자료 수행 과정에서도 먼저 그동안의 이전 저작 자료들을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는 연구 풍토가 이뤄질 수 있는 노력도 선행되어야만 한다. 아무리 많은 전문적인 투쟁의 요구라도 걸맞은 정확하고 체계적인 이론이 없다면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는,『자본』은 먼지만 쌓여 잠깐 소비되고 마는 고전 서적 취급만 받을 뿐이다. 


잘 알려진 대로,『자본』의Ⅰ권은 마르크스, 당신께서 직접 수기로 작성했다. 이후로 그의 자녀들과 엥겔스의 도움으로 소위 Ⅱ,Ⅲ권이 나올 수 있었다. 물론 『잉여 가치 학설사』라고 불리는 Ⅳ권의 여부도 따로 있지만, 먼저『자본』은 가장 중요한 저작이기 때문에 여러 번역서 가운데 김수행 본을 기준으로 참고했다. 그렇다고 해당 본만 전적으로 의존해서 번역하는 일도 아니며 다만 정리 작업이 목적이기 때문에 따로 흥미가 생긴다면 직접 해당 자료를 찾아보시기를 추천한다. 번역 자료들이 충분히 많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이면서 이 작업을 행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적어도 보람을 더 느끼고 있기 때문에 잔여 시간을 투자해서라도, 이 작업은 꾸준하게 이어가겠다. 국내에서도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잘 세우고 이러한 뜻을 올바로 실천할 수 있는 날까지,   


『자본』의 중요성


전에는 늘 새로운 주장을 모색하거나, 자료를 읽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 과정에서 자료 조사가 아닌 독서의 한계를 알 수 있었다. 특히 무료 열람이 가능한 전문 도서관을 자주 방문한다. 그곳에서는 많은 자료들이 모아져 있지만, 가까운 동네 도서관에서는 비록 최신 자료들이지만 전문적인 자료 하나 없이 흩어져 있다. 새로운 주장을 하려면, 많은 근거 자료와 통계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어떤 연구자들은 전문적인 영역을 다룰 수 있는 시설과 관련 인물들에게 기대어 조언을 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본인은 그럴 수 없었다. 더군다나 그런 연구자들은 이미 자신들의 한정된 시각에만 머물고 말았기 때문에 더 이상 연구의 진척을 잘 보이지도 않는다. 그들은 손쉬운 출판의 요구에 더 손을 들어주고 만다. 자본의 공격이 더욱 거세지고 있음에도, 그것을 실감하고 있는 연구자가 드물다는 점은 단순히 인구가 줄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라 문제를 올바로 파악할 줄 아는 연구자들이 드물다는 말이다. 특히 한 사회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한 진단이나 분석에서는 이론적 기반이 없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본질을 놓치고 만다. 더군다나 무산자들이 더욱 중요해짐에도, 사회적 인식이 더욱 계급적인 시각을 기르는 걸 막고 있다. 전부 권리 · 차별적인 논쟁이나 권력 논의로만 일소하고 만다면, 실제로 계급에 대한 논쟁을 다뤄볼 기회가 살면서 얼마나 있을까. 그리고 앞으로의 현실은 계급에 대한 시각이 직업 선택에 있어 중요해지고 있음에도 말이다. 


하지만 자료 정리 작업을 다시 하면서 배운 점은 기존에 있는 자료를 잘 활용해서도 충분히 연구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교수들이나 연구진들은 늘 새로운 주장에 목을 맨다. 최신 연구와 유행을 좇는 현상은 지금도 많은 대학가에서 일어나는 중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러한 주장들이 아무리 비과학적이더라도, 몇 년 동안이나 오래 지속되는 경우는 드물다. 특히 이론적 기반이 비교적 명료한 혁명 저작을 읽으면서 보람을 얻게 된 강력한 동기가 하나 있다. 바로 말을 올바로 배우고 글을 익힐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국내에서도 수 많은 선배 연구자들이 있겠지만, 그들이 모두 전문적이거나, 직책을 맡고 있기 때문에 따른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기존의 선배 연구자들을 충분한 근거로 비판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한계를 진단하는 기준에 있어 혁명에 기울인 노력을 연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앞선 연구자들의 지식을 가늠해볼 수 있는 척도가 생겨난다. 따라서 여기서 다루고 있는 저작들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앞으로도 이러한 이론들은 더 많은 교훈과 시사하는 바를 제공할 수 있다고 본다. 단순히 전 생애를 걸쳐 연구의 길에 매진하고, 혁명을 실천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학습을 게을리 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국내 연구에 있어 자료의 정리와 올바른 번역은 필수라는 생각이다. 따라서 필요한 자료로부터 그것을 비판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일은 본인에게 있어 꼭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사명감을 저절로 가지게 된다. 더 많이 가진 자들이 소수의 발언권을 얻는 세상보다는, 오히려 자본주의 앞에서 벌어지는 온갖 문제를 제기하고 진정한 길을 제시하는 일이 더 큰 보람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음가짐이 없이는 아무리 재미 삼은 지식이더라도 무용지물이다. 한 현상에 있어 단편적인 시각은 분명 지식인들만이 아니라 연구자들의 그 수준을 드러낸다. 이는 국내에서도 연구의 선행에 있어 앞으로는 단순한 흥미보다 깊은 시각을 체계적으로 기를 필요가 더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자본』연구와 그 적용은 자본주의의 문제를 깊게 분석하고, 그 한계를 전반적으로 내다보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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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품


'자본가에게 상품의 부는 상품의 집적인 표식이고상품은 부의 기초이다.'

 

마르크스,『자본』에서 생산물들은 대부분 상품이다노동의 형태장소에 따라 새로운 효용을 증대시키고효용을 탄생시킨 물품이 바로 생산물이다곧 상품은 생산물이며생산자 자신은 다른 생산물과 교환될 목적을 지닌 물건이어야만 한다그러므로 상품은 인간의 효용에 도움이 되며교환할 수 있따는 조건에서만 필요하다상품이 교환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욕망 역시나 충족시켜야만 하기 때문이다따라서 상품은 사용가치도 가진다사용가치는 상품의 내용을 가지지만원시공산사회의 생산물 등은 사용가치는 있지만 상품은 아니다자연물과 별개로 상품이 다른 상품과 교환되는 비율은 교환가치이다상품이 다른 상품과 교환되어도상품은 전혀 다른 모습을 갖지만교환가치는 외견 상 아무리 달라도내용 상으로는 동일하다물건의 중량과도 같기 때문이다상품의 교환에서 가치는 어떻게 구성될까그것은 인간 노동의 결과이며자본주의 생산 방법의 모순 구조가 바로 가치이다상품은 사용가치에 따라 많은 자연적 성질을 갖지만단지 공통의 자연적 성질 때문만은 아니며상품에서 사용가치가 교환 비율을 결정하지는 아니하며상품의 사용가치라는 자연적 성질을 제거하면 노동생산물이라는 성질만이 남는다생산물은 인간 노동에서 축적의 산물이고생산물은 곧 가치이다그러므로 상품은 인간의 노동을 대상화함에 따라 가치를 가진다상품 가치의 대소 비교는 인간 노동의 분량을 조사하면 된다노동의 분량은 노동 시간의 장단을 기준으로 계산하며생산품에서도 장시간의 노동이 투여한 상품일수록 가치는 더 커지고짧은 시간일 때는 보다 저렴해지기 때문이다상품의 재료는 자연이 공급하며가치는 노동이 만든다노동력이란 일정한 형태를 가진 인간의 행위이다사용가치는 인간의 생산 활동이며노동력은 생산 활동이 상이함에 다라 다르게 나타난다인간 노동력의 지출은 노동만이 가치를 만들도록 한다각종 노동으로 말하자면모두 단순 평균 노동이며복잡한 노동은 단순 노동에서 배가된다가치는 역사적인 개념이지마상품을 생산하는 사회에서는 사회적 관계로 묶여진다부는 물질적인 개념이고많은 사용가치의 합성물이다경제적 부란어떠한 생산 방법 아래에서도 산출되며자연 공급된 그대로의 경제적 부도 있다반대로 인간에게는 노동 활동으로만 생기는 부란 없다노동 생산력의 증진과 한 나라에서 재료적인 부도 증대하고노동생산력의 감소와 더불어 부 역시나 감소한다지출된 노동 분량에도 증감이 없다면한 나라에 존재하는 가치 총량 역시나 변하지는 않는다


부란 생산에서 지출된 사회에서 필요한 노동 분량에서 변화가 없다면전년도의 부의 가치와 동일하기 때문에 상품 가격 연구에서는 가치량이 큰 상품일수록 가격이 높고가치량이 작을수록 가격은 낮다그렇다고 가치가 꼭 가격의 원인은 아니다금과 다이아몬드가 가치 그대로 가격을 가진 일이 없기 때문이다마르크스도 지적했지만 사용가치란 필요 노동시간에 따른 분량에서 나올 뿐이다상품 가치 크기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 시간에 따라 결정되며가치 크기를 노동 시간으로 표현할 수는 없다상품 교환이 행해지려면빈번한 거래로부터 다른 상품의 가치를 잘 표현하고다른 상품의 가치마저 표현하는 유일한 상품이다상품이 되기 위한 전제 조건이라면,

 

1. 상품 교환이 행해지려면비소유자에게는 사용가치이며 소유자에게는 비사용가치여야 한다.


2. 교환자는 상호 교환하는 상품 소유자라는 사실을 인식한다.

 

생산의 교환 비율이 처음에는 우연적이지만나중에는 정확하게 규칙적으로 사회적 과정으로 형성된다초과가치의 교환만이 아니라교환을 목적으로 사용가치를 생산하기 때문이다따라서 사용가치에서 교환 비율은 생산 조건에 따라 좌우되며상품 가치량마저 생산에 필요한 노동 시간에 따른 크기로 결정된다따라서 상품 교환에 따른 등가가 필요해진다재단사가 목수에게 가구를 필요로 하거나목수가 재단사에게 양복을 필요로 할 때는 등가가 성립하지만정육점과 거래할 때는 목수와 재단사에게는 빵과 고기를 필요로 하므로필수적인 가치가 필요 가치로 등가함에 따라사정에 따라서도 정해지지만등가의 역할을 독점해서 화폐가 될 수 있는 자질을 품은 것은 금과 은이다.

 

2. 화폐

 

금과 은이 화폐의 지위를 갖출 수 있었던 것은자연적인 성질 가운데에서도 비교적 불변적 성질이었고장식 재료 및 편리함을 지녔기 때문이다또한 다른 상품에 비하면 독점적으로 동등한 가치를 갖고화폐 역할도 가능하다상품으로 금과 음은 교환 과정에서 수행할 수 있는 역할에 따른 화폐 상품이다화폐가 되려면 상품의 가치 척도 역할을 해야하고모든 상품은 동질이며상호 간 비교할 수 있어야만 한다따라서 인간의 노동이 들어간다상품은 일정한 표준 상품으로 잴 수 있으며일정한 상품이란 다른 모든 상품의 공통적인 가치 척도이다이렇듯 화폐는 가치 척도이며노동 시간을 필연적으로 요구한다화폐 상품에서 상품의 가치란 화폐 형태 또는 가격이다상품의 가격에서 자연적인 성질과는 다르게 판매자가 구매자에 따라 정해진다따라서 가격 표시에 있어 각 상품은 일정량 금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다른 분량의 금을 잼에 따라제반 가격 표준을 만들 필요가 있다따라서 많은 나라에서는 가격 표준의 단위를 이름으로 금속 중량 명을 사용한다영국의 파운드도 있으며화폐는 가치 척도와 가격 표준의 기능을 가진다인간의 노동 역시나 화폐로 교환된다또한 상품의 효력이 있다면 구매하고자 팔 수도 있다화폐를 얻는 거래는 매우 곤란하다상품 생산 사회에서 화폐는 상품 소유자에게도 필요하기 때문이다사회적 분업에 따라 생산자의 노동은 더욱 전문적이며욕망만큼 점점 더 다방면으로 퍼져가기 때문이다상품을 화폐로 변환하려면 사용가치가 있어야만 한다화폐 소유자들이 갑에서 을로 옮겨가는 과정에서도판매의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무수한 교환의 순환으로부터 총체적인 운동들은 상품에서 유통을 구성해간다그러나 상품 유통이란 물물 교환과 같은 일반적인 성질과는 다르다상품의 수취에 대한 제한을 철폐시켜버렸기 때문이다화폐를 취득하고자교환이 성행하고상품 유통의 발달은 사회의 생활 상태마저 더욱 복잡하게 꼬아버렸고원시적인 공산 사회만큼 사회적 연락망마저 자유롭게 지배할 수조차 없도록 만들었다사회적 힘에 따른 질서를 교란시키고공황을 일으키고는 만다화폐는 농부로부터 출발했지만상품 순환의 진척으로부터상품 소유자로 옮겨가고다른 상품 소유자들에게로 넓혀갔으며화폐의 유통을 진행하도록 했다그리고 화폐의 유통 속도는 상품 순화의 속도에 따라 결정된다상품은 유통에서 구매로 들어가고화폐의 유통마저 신속해진다속도에 따라 완만해질 경우유통부 내부로 출장하는 화페마저 감소하므로상품 유통이 정체된다고 생각하기도 하므로각국 정부는 국가에서 정한 금속 주화를 만든다일정한 주화로부터 보증을 받는다따라서 주화도 유통 도구로 동일한 가치를 나타낼 수 있다보조 화폐가 있으며더군다나 금화만큼 지폐를 동일한 가치로 부상시키곤 한다지폐가 남발함에 따라상품의 가치가 하락해버리고는 하는데한 나라에 따라서는 가치가 전혀 없어진 경우도 생긴다인간의 화폐 욕구는 상품 유통에 수반한다더욱 발달한 사회에서는 화폐 축적은 욕망만이 아니라필요가 된다생활에서도 화폐를 소유할 필요마저 증가하며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물건을 구매해야만 하기 때문이다사려면 물건을 팔아야만 하기 때문이다퇴장 화폐란 유통 화폐의 크기에 따라 물가상품의 분량과 순환 속도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에화폐의 저장은 유통 정체를 완화시키는 데 필요하다화폐는 일정량의 가치를 인도하며계약과 의무를 이행하고자 도구로 쓰인다상품을 받고대금을 지불하는 경우 판매자는 채권자로구매자는 채무자가 된다신용화폐에서 어음과 수표로부터 채권자는 약속한 현금 대신 증서를 지불하기도 한다따라서 환전은행이나수표교환소와 같은 특수한 시설도 만들어진다신용 제도가 발달할수록 대부가 가능해지며채무만기일까지 지불에 사용되는 화폐액을 축적할 수도 있게 된다또한 금융 공황마저 일어나기란 매우 쉽다그러나 채무자 장기간 지급불능에 빠질수록 신용 증권의 가치는 더욱 상실하며현금을 더욱 요구하므로금융대공황이 발생한다생산 및 상업 상 거래에서도 상품생산제도 아래에서 화폐는 신용증권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세계 시장은 금융 거래를 주로하며국내 시장에서는 주로 단일한 주화와 지폐로부터 투자 거래를 유도한다그리고 세계 화폐마저 수출입 과부족에 따른 국제 무역차액으로 지불되고 있기 때문이다상품 소유자는 새로운 상품을 팔고자 유통에서 벗어나서 화폐로 지출된다마지막 화폐액은 처음 화폐액보다 크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화폐액의 증식은 화폐 순환의 원동력이며보다 값 비싸게 팔고자 상품을 구매하기도 한다지출한 화폐액에서 부가된 화폐액은 화폐 순환 운동에서 초과가치라는 이윤으로 구체화된다초과가치에서 이윤·이자·지대는 모두 초과 가치의 현상이다화폐는 자본의 순환 형태에서도 운동 가치를 부여한다자본이란 초과가치를 생기도록 하는 가치들이기 때문이다자본의 운동에 따라서도 화폐로 태어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초과가치는 물물교환에서 발생하는 게 아니라화폐로부터 매개되는 상품 유통에서 발생한다는 사실과초과가치는 또한 넘쳐나는 화폐로 나타난다더욱 값을 올리고자상품 유통에서 물물 교환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상품 교환이 이뤄진다면초과 가치를 생산할 수 없기 때문이다초과 가치의 점유란 약탈에서 역사적인 기원을 둔다상업 자본으로부터 타인이 소유한 가치를 점유하는가아니면 고리대 자본으로 직접 타인의 가치를 점유하는가그러나 둘 모두 등액의 가치만으로 교환된다는 원칙을 깨뜨리지는 않기 때문이다보다 고급스러운 자본일수록 상업 자본과 금리 자본을 상품 유통과 일치시키는 많은 중간 매개가 생겨나며자본들은 사기와 약탈 등에서 성질을 상실하도록 만든다자본 공식이란 구매와 판매로부터 성립하지만상품 유통에서 화폐와 상품은 가치는 동일해야만 하기 때문이다상품 구매로부터 본래 가진 이상의 가치를 만들어서증대시킬 수 있는 상품인 경우에만 해당한다또한 상품 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노동 뿐이다상품에서는 인간의 노동력이 상품으로 전제되는 경우로만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따라서 초과 가치란 인간의 노동에서 생겨난다.


3. 노동력

 

상품 형태에서 노동력은 시장으로 나타난다노동력은 상품으로 존속하며상품 교환 조건에서 상품 소유자는 상품에 대한 완전한 지배권을 갖는다상대방의 요구로부터 일정한 시간을 들여 노동력을 팔지 않으면 상품의 소유자는 자신의 노예가 되어 상품 자체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상품이 시장으로 출현하기 위해서는 노동자의 노동력이 필요하며 노동력도 상품이며상품의 가치란 다른 모든 상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생산하는데 필요한 노동량에 따라서 결정된다노동력이란 말 그대로노동자의 신체를 필요로 하며의식주를 비롯한 생활비가 필요하므로의식주의 가치에 따라서 노동력의 가치는 결정된다따라서 임금이란 주어진 노동력에 대해서 지불한 대가이다노동력 유징서 요구되는 생활비 속에는 가족 부양도 필요하다그리고 교육비도 추가하지 않을 수 없다노동력은 상품 소유자에게는 사용가치가 아니여야만 하고노동 시장에서 상품 소유자인 노동자에게는 사용가치가 아닌 상품이어야만 한다노동 시장에서 화폐 소유자에게는 화폐를 자본으로 교환할 수 있는 하나의 예비 조건이다그렇다고 같은 조건이라고 해서 모든 사회 형태에서도 고유하지는 않는다그와 같은 조건의 결과는 자연적 결과가 아니고역사적 결과이기 때문이다임금의 지불이 자본가에서 노동자에게로 생산물을 판매하기 전에는 임금 지불을 끝낼 수 있다고 경제학자들을 해석했지만실제로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노동을 미리 제공해서 지불한다그러면 노동자는 임금이 지급되는 날짜와는 무관하게임금에 대한 위험을 감수할 뿐만 아니라생활비를 줄여서라도 구매를 줄이기 때문이다노동자는 추상적인 노동력으로 자본가에게 독점되는 초과 가치와 여러 가치를 창출하고구체적인 노동력으로 지출된 생산 수단의 가치를 다른 생산물로 이전시킨다이로부터 자본가는 착취를 정당화한다자본가는 생산 기관과 노동력을 구매해서 사업에 이용한다또한 생산 과정에 따른 전대 이상의 자본 외에 일정한 초과 가치를 획득한다가진 자본금에서 생산기관 구입에 지출한 불변 자본과 노동력을 구매한 가변 자본으로 충당한 사업의 결과는 초과가치를 생겨나도록 하며초과가치와 가변자본에 투입한 창출 가치가 생기지만자본가에게는 불변자본만으로는 산출된 초과가치 크기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으므로생산물의 가치는 노동 가치와 관계한다전대 자본은 가변 자본의 비례적 가치 증식이다초과 가치와 비례하는 크기는 초과가치율이다하지만 초과가치율이 곧 이윤은 아니고비록 이윤 가치에서 파생했지만 하루 노동량에 따른 필요노동시간과 가변 자본이라는 동등한 가치가 필요하므로초과노동시간에서 발생한 노동량을 두고 초과가치라고 불렀다따라서 초과가치에 따른 필요노동에 대한 비율은 가변 가치에 대한 비율과 동등하며 일정량 생산물로도 생산되므로 초과 생산물이라고 부른다.

 

4. 생산력

 

노동자는 임금 교환으로부터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상품으로 판매한다반대로자본가는 노동자의 노동으로 상품을 만들고구매한 노동력을 지불한다노동력에 의존하는 노동 생산으로 사용가치와 상품가치를 만든다사용가치 노동은 상품 생산에는 따로 해당되지 않지만인간의 생존 상으로는 인간 활동노동 생산물노동 도구가 필요하다인간은 자신의 사용에 맞게끔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고자자연물을 이용한다노동자는 노동 도구를 사용해서노동 대상을 가공하고노동 생산물을 생산한다여기서 생산 기관이란 노동 도구와 노동대상을 총칭한다이를테면 목수가 물건을 제작하는 경우로는 목재라는 재료와 마감 원료톱과 대패와 같은 노동 도구를 필요로 하며물건은 생산물이다이와 같은 생산 과정 속에서 드는 동일한 사용 가치는 목수에게는 노동력으로 작용한다생산 기관이 모인 생산 양식들은 노동 도구에 따라 결정되고각 생산법들은 다시금 사회 관계를 결정해서법률적종교적철학적에술적으로 상응하는 상위 개념을 만든다상품 생산자에게 상품 생산은 사용가치의 생산 과정이면서도상품 가치의 생산 과정이기 때문이다이를테면 기계 생산물을 소유한 지조공은 자신의 생활비를 위해 자본가에게 고용된다고용된 직조공은 자본가에게 끊임없이 감시를 당하며직조공은 자신이 아닌 자본가를 위해 노동한다직조공이 하루에 생산한 생산물들은 자본가의 소유이므로자본가는 생산 과정을 지배하고통제한다자본가는 하루 동안에 드는 노동력을 노동자로부터 구매한다자본가는 노동력의 사용가치를 단 하루 분만을 샀더라도정직하게 임금을 지불했다그러나 노동의 사용가치를 이용할 권리를 갖고 있으므로, 6시간 뿐만 아니라, 8시간을 초과한 12시간을 일을 더 시킨다그리고 하루의 끝에 다시 정산할수록, 6시간만큼의 이익이 추가로 발생한다자본가에게 정상적인 수익의 창출로는 상품 교환의 법칙을 깨지는 않았기 때문이다이와 같은 법칙을 작용해서자본가는 노동자로부터 초과 가치를 생산한다직접적인 생산자인 노동자는 초과 가치를 소유할 수 없으며자본가는 초과 가치를 단지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초과 가치를 다른 곳에 팔아서 이익을 창출해서 수익을 얻는 것이 목적이다따라서 장기간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서는 노동자에게 장시간의 노동을 강요해야만 한다또한 구매한 노동 가치를 생산물의 가치로 회수하는 시점에서 생산 과정을 늘려야만 하기 때문이다물론 소규모 공업자들도 지불한 생산비 회수에 필요한 초과 노동 시간을 요구하므로가치 증식 과정이 발생한다다음으로 다른 곳에서 구입한 노동력으로 운영할 때 비로소 자본주의 생산 과정이며내용 상으로는 가치 증식 과정이 된다.


5. 불변 자본 가변 자본

 

노동은 중첩 작용을 한다노동은 새로운 가치를 생산하고종래의 유용 가치를 이전한다노동 생산력은 증감하더라도가치 분량이 증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일정한 시간 안에서 생산되는 사용가치 분량은 노동 생산력을 따른다생산 기관이 없으면 생산할 수 없으므로상품 생산에서 노동이란 단순히 가치를 만들 뿐만이 아니라가치를 보존하는 역할도 수행한다지불되는 생산 기관의 가치를 생산물로 이전할 뿐만이 아니라생산기관의 가치를 소멸시키지 않고자 가치를 보존하기 때문이다시간에 따라 생산기관의 가치는 상품 가치와 함께 소멸한다기계가 시간이 들어 마멸되면 다른 생산물로 이전해가기 때문이다생산 기관에서 재료와 원료노동 도구 등 자본 부분은 생산 과정에서 가치량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불변 자본이다한편 노동력으로 변화시킨 자본 부분은 초과 가치를 생산하므로초과 가치도 변화하기 때문에 가변 자본이다.

 

6. 노동일

 

노동일은 필요노동시간과 초과노동시간을 합한 값이다자본가는 초과가치율을 늘리고자노동일을 연장하고자 한다노동자의 소모되는 순시간은 자본가의 관점에서는 절도나 약탈이다초과가치 증식에는 노동시간 연장 또는 단축 등이 있다유럽 각국에서는 14세기 말-17세기 말에 걸쳐 자본가 쪽에서 시간 연장을 위해 정부에게 간섭했던 일이 있었다노동 시간 단축을 위한 운동이 노동 계급에게도 일어났고따라서 19세기에는 각국에서는 공장법으로 노동 시간 단축을 보았다자본 계급과 노동 계급 간 투쟁에서 노동 운동은 정치 운동으로까지 늘어나고국가가 가진 힘으로부터 노동 시간을 단축시킨다.


7. 초과 가치의 생산 및 자본화

 

필요노동시간은 일정한 크기를 가지며초과 가치 비율은 노동 시간에 따라 증가한다아무리 자본가가 노력할수록국가와 노동자로부터 노동일은 제한되기 때문이다초과가치란 필요노동시간으로부터 얻을 수 있으며 초과가치는 상대적·절대적 초과가치로 구분된다반대로임금을 인하한다면 필요노동시간 단축으로초과 가치를 증대시킨다노동력의 가격을 가치 이하로 내려버리기 때문이다노동생산력을 증진시키고자 한다면생산 방법그러니까 노동 도구노동 방법 등으로 개선할 수 있다상대적 초과가치는 노동 방법을 개혁하는 조건으로 증대한다노동력 가치의 절감에 따른 필요 수량의 상품 생산에서는 자본주의에 따른 생산 방버븡로 더욱 혁신하고자 하지만 상대적 초과가치를 증대시키는 원인이기도 하다따라서 노동 생산력이 증대할수록 상대적인 초과가치도 증진하므로상품 가치가 저렴해진다자본주의 생산 방법에서는 노동 생산력이 증진할수록 노동자의 초과 노동시간이 더욱 길어지는 이유이다반대로 절대적 초과가치는 노동 시간 연장으로 생산되며상대적 초과가치는 노동 시간은 일정하더라도필요노동시간을 단축함으로 생산된다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절대적인 초과 가치 생산을 기초로 하고생산력이 증가할수록생산물 단위 당 가치는 상대적으로 작아지게 되며지출되는 생활비의 가치는 하락한다따라서 적은 화폐로 이전과 같은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한다필요노동 시간 단축으로도 상대적인 초과가치 생산은 할 수 있다축적된 초과 가치는 자본으로 탈바꿈한다초과가치가 자본이 되기 위해서는 상품에서 화폐로다시 상품으로 거쳐야만 한다초과 가치 총액을 계산하려면초과가치물이 생산기관 및 노동자가 지불해야만 하는 생산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면자본으로 바뀌지는 않는다자본가가 지불하는 초과가치는 역사적으로 정해진 크기가 있으며생활 표준에 따라 정해지기 때문이다자본가와 노동자 모두 자본으로 예속된다자본가는 다른 자본가와 경쟁하기 때문에 자신의 사업에서 자본주의 생산 방법의 온갖 수단을 다하고자 힘을 쏟는다방종하거나또 지나치게 인색하면 신용을 상실하기 때문이다자본가는 일정 시기와 사회 범위에 따른 정해진 부분만 지불해야만 한다초과 가치의 크기 만큼 축적 점위를 증대시키기 때문이다노동자에 대한 지불이 작을수록 초과가치율은 커진다자본가의 지불 수준에 큰 변동이 없는 한 축적되는 초과가치도 역시나 커진다노동력의 가치와 임금을 하락시키는 요인들은 자본 축적을 조장한다불변자본을 영업자본으로 투자했다면 동일한 비율로 늘리지 않아도 추가적으로 가변자본의 생산을 확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한 제조업자가 더 많은 생산을 원한다면노동 시간을 연장시키면금새 목적을 달성할 수 있고원료와 조성 비용만 늘리면 된다자본은 토지노동과학마저 자신의 소유물로 만들었으며과학의 발전은 노동 생산력을 촉진시켰고생겨난 모든 이익을 자본의 수중으로 들어가도록 만들었다.

 

8. 기계

 

현재에는 자본주의적인 대규모 공업이 성행했으므로예전과 같은 가내 수공업은 공장 노동자에 비하면 훨씬 더 비참하다공장 제도 비교적 이른 곳일수록 노동자 처지는 더욱 악화되며공장 이외의 노동자 처지는 한층 더 열악해진다.또한 공장 노동자의 모든 괴로움과 결핍을 두 배로 가중시키며가내 노동자를 더욱 괴롭힌다기계와 염가 경쟁에 지쳐 빈곤한 영양 상태의복환기휴식 등 기본적인 요구마저 절약하게 되므로기계 농업의 성장으로 농민은 몰락한다자본에 따라 농경지에서 착취된 도시 영양분은 농경지가 아니라 거름과 먼지라는 성분으로 도시를 오염시킨다농민들에게는 토지에 부과되는 것들이 많아지고수공업자들과 동일한 처지에도 놓이게 된다그러나 거대한 노동자 집단의 출현은 전통적인 모든 생산 방식과 선입관에 따른 편견은 파괴된다다량의 자본으로부터, 남녀 노소어린 아이 가릴 것 없이 공장에서 노동하는 직업노동 주부가 되어 뒷바라지를 하게 된다대규모 공업은 가족 형태에서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아이들이 자란 뒤에는 아무런 미련 없이 부모를 떠나지만자본주의 착취 방법으로는 미성숙한 노동력마저 착취하기 때문이다자본주의 내부에서 기존의 가족제도 해체에 따른 대규모 공업으로 조직된 생산 과정에서는 보다 세련된 가족 형태가 출현하여 경제적 기초를 생산하게 된다태생부터 야만적인 자본주의 제도 아래에서 기계마저 부패와 노예 상태에 원천이기는 하지만성숙한 발전으로 거듭나는 원천이기도 하므로수 많은 무산 계급들의 시체로 비옥해진 땅에서는 더욱 새로운 종자들로부터세련된 사회로새로운 인류로 도약하고자 한다기계 생산에서 인류는 가내 수공업 제도에서 벗어나며더 이상 원시공산주의사회와 같은 자연 노예도 아닌동등한 사회 구성원으로 거듭난다.

 

9. 단순 재생산

 

초과 가치가 생산 과정에서 영향을 끼친다면생산 과정이 반복되는 재생산일 때 뿐이다이와 같은 사회 상태에서도 일정한 주기로 생산을 반복해야만 하기 때문이다지출 형태 아래에서는 지출액 이외에도소비 자료에 따른 생산 기관도 끊임 없이 생산되어야만 한다초과 가치 생산을 반복하는 것은 자본이 존속하는 필요 조건이다초과 가치 산출 운동으로 자본가의 수입도 생겨난다자본가의 지출은 재생산으로초과 가치 전부나 일부를추가 자본으로 자본 축적으로 이뤄져야만 재생산 규모도 확대된다단순 재생산에서는 생산 과정도 동일한 규모로 반복된다노동 기관으로 지출한 불변 자본과 노동자의 임금으로 지출한 가변 자본은 임금으로 지출한다생산 과정에서 지불된 임금은 자본가 자신의 노동이 아닌이전 노동자가 생산한 노동 가치이며노동 기관이라는 불변 자본의 가치를 생산물로 이전 시킬 뿐만 아니라임금은 자본가에게 선불된다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자노동력의 가치와 초과 가치가 더해지기 때문이다자본주의 생산 과정에서 노동자는 임금을 지급 받는 형태는실제로는 이전 생산 기간에 제조되어판매를 마친 생산물에서 얻어진다자본가는 촉과 가치를 지출하므로줄어들지 않는 자본 가치는 초과 가치에서 발생하므로모든 자본은 어떤 원천이 발생하든일정 기간 경과한 뒤에는 단순 재상산에 따른 자본화한 초과가치로부터 타인인 노동자의 초과 노동으로부터 축적된 자본으로 전화되는 과정이다자본주의 생산 과정은 노동자가 생산 기관에서 분리되어 무산 노동으로 축적되고생활 자료와 생산 기관이 축적된다또한 자본 및 임금 노동자를 생산하고 보존한다자본가는 노동력을 필수로 구매해야만 하며생활 자료와 생산 기관을 소유한다노동자가 복종과 곤궁한 전제 조건이기 때문이다노동력을 지출하여 자본주의 생산 과정을 갱신하며노동 시간 이외에도 자본 계급을 위해 복무하기 때문이다자본가가 임금으로 노동자에게 노동력을 지불하는 것은 노동 계급을 보존시키는 수단이다노동자는 임금으로 생활 자료로부터 생활비를 지출하고스스로 노동력마저 매물로 내놓는다아무리 자유로운 시간마저 자본가의 이익을 위해서만 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더불어 자본 계급을 위해 노동력을 보존해야만 하기 때문에 늘 어디서든 자본과 맞닥뜨린다.

 

10. 산업 예비군

 

노동자는 경박한 생활 습관 탓에 생활비를 늘리고인구를 증식시키기도 한다많은 수의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고용되고자자본가 밑에서 직업을 구한다그러므로 노동자의 증식을 제한하지 않는 한 노동계급의 실업기아 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자본의 신장과 수축은 자본주의 생산 방법이 더욱 발전할수록 크기가 자유로우며격렬하고방대해진다. 대공업도 특수한 순환 운동을 하며영업 상태에서 활기를 띠던 경제 상 호경기에도 생산력은 확장하지만다음에는 공황이 발생하여영업도 침체로 접어든다시장이 활기를 띨수록초과 생산물을 흡수해서 더 큰 규모로 동일한 운동을 한다주기적으로 자본이 신장할수록노동력에 대한 수요는 증대하고임금은 오른다노동 인구는 자본 기회로 편승할 수 있는 충분한 증식을 가진다고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진단하지만단기간 지속하지는 않을 것이며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으로는 인위적·작위적으로 초과 노동 인구를 만들며더 이상 자본이 요구하는 추가 노동자를 채용할 수 없는 예비군이 된다인구 증가는 자본 요구에 맞춰서 비례해 노동 인구도 맞춰야만 하기 때문이다이전에 초과 인구는 생산 자료에 따른 초과 생산으로 주로 미국·호주·인도 등지에서 식육·빵 경쟁에서부터 나타났다노동자는 자본의 부속물에 불과했으며생산 과정에서는 생산 기관이 노동자를 사용하는 일도 벌어진다노동자는 생활을 유지하고자 생산물을 구매하면서 힘겨운 생존 투쟁을 벌인다노동자는 생산물에 종속되며자신의 노동력으로 생산물에 종속되며그 자신의 노동력으로 생산물에 봉사하여길들여지고복종하고 만다따라서 실업의 누적에 따른 자본주의 사회가 고도화 됨에 따라 초과 노동 인구상대적인 인구가 생기므로산업 예비군으로자본가는 초과 이윤을 더욱 획득하고자노동 생산력보다는 발전된 기술을 채용하므로자본의 기술적 측면에서 생산 수단의 크기는 늘리고노동 크기는 줄인다자본 구성에 따라 불변 자본을 고의적으로 감소시키므로노동 수요는 총 자본에 견주어 커짐에 따라가속도는 감소하게 된다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에서 노동 인구의 절대적 증가는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에서 특수한 상대적인 초과 인구는 불가피하다.

 

11. 자본주의 생산 방법

 

공업 상 자본 역시나 농노제부역제 등 어떤 관계 아래에 선 적 없는 노동자가 없으면 일어날 수 없다자본주의 투쟁은 강제와 특권 속에서 자유·평등을 부르짖으며 등장했으며대체로는 유산 계급들이 이를 반복해서 언급했다자본으로 마주치는 큰 장애물은 길드 조직과 촌락 공동체의 토지 공유였지만봉건 귀족들은 막았다상업 및 상품 생산이 십자군 이후로 더욱 발전했다도시 상공업자는 화폐를 목적으로 부를 축적하고자 했었지만봉건 귀족의 부는 예속된 농민의 물적 또는 인적 제공 및 급부에 토대를 두기에화폐는 극히 적었다따라서 봉건 귀족들은 물건을 훔치고자 했고국가 권력도 더욱 부상했다그렇다고 대놓고 약탈은 할 수 없었기에농민들에게 화폐와 재물을 과도하게 징수해갔다봉건 귀족들은 도시민이 되어 상품 생산자로 판매를 수단으로 화폐를 입수할 수 있게 됐다농업 경업과 대리 관리인 등을 고용하고관리해서 이전시킬 수도 있었다농업 확대는 자작 농민 희생으로 이뤄졌다자작농은 농노로 전락하여토지는 영주의 경영로 병합되어 토지에서 쫓겨나고과거에 있던 촌락 공유는 영주 사유지에 속해버려서 자작농은 경제 상으로도 자멸했다.


12. 무산 계급

 

양모 생산의 확대로부터 농경지는 양목장으로 바뀌게 됐고도시 비중으로 보자면 직물 제조업과 시골 자작농 수가 동일한 비율로 증가했다봉건 귀족과 같은 높은 벼슬아치들은 많은 가신들을 해고했다종교 개혁은 이러한 봉건 귀족 때문에 일어났으며재정을 축내는 데 가신들이 큰 문제였기 때문이다투기꾼들은 소작인을 몰아냈다무산 게급은 인위적인 초과 인구자본 요구에 따른 노동력이 뒷따르는 무산 계급이 탄생했다봉건 군주는 자본으로 도로 정비 사업교회농촌 프롤레타리아를 공급하며 활동 범위를 부여했다대규모 토지 소유제 아래에서 농업도 자본주의적 성질을 띠었다여러 유랑자들이 있었다는 역사적인 기록으로도자작농을 정말로 많이 수탈해갔다특히 공장제 수공업 시대에는 숙련공을 얻으려면여러 해가 소요되기도 했으므로초기 자본주의 생산 방법에서는 노동자 공급이 자본 수요에 맞지 않는 경우도 생겨났으며가변 자본이 불변 자본보다 더 커졌다따라서 자본 축적에 따른 임금 노동 수요는 증대했었지만정작 노동력은 증가하지 않았다숙련된 수공업 · 기술자들은 고용주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다는 포부를 가졌으며아직은 수공업의 전통이 남아 있었다임금 노동자들은 슬슬 자각하기 시작했다영구적이고단순하기만 한 자본주의적인 공업 훈련을 따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따라서 더욱 순종적인 노동자를 얻고자자본에 따른 국가는 법규로도 임금의 최고 한도를 정하여노동 시간을 더욱 연장했고노동자 단결을 금지시켰다자본 시장은 무산 계급 발생과 나란히 등장했고공업 지방에서 생활 자료는 이전 공유지와 자작농 소유지가 결합되어대규모 소유지에서 상품으로 생산되어 판매되고농가 생활 자료와 가내 공업물은 공업 및 대소유지에서 자본주의적 공업 생산물은 임금 노동자농민들 사이에서 판매처가 되었다자작농과 가내 공업이 쇠퇴했고자본가 · 상인은 이들을 대신하여 무산 계급과 인위적인 초과 인구로 자본주의적 생산 방법을 발전시켰고대량으로 재생산했다부의 집중은 고리대 자본과 상업 자본으로 형성했으며그렇다고 공업 자본으로 곧바로 전화된 화폐엑에 따른 근거는 아니었다금은광 발견토착민 멸망과 노예화동인도 정복과 약탈 등으로 자본주의의 서막을 알렸고자본 축적의 원인이 됐다유럽 각국에서는 상업 전쟁 · 무역 전쟁이 일어났고,식민 · 국채 · 조세법을 조직하고모두 봉건적인 생산 방법에서 변화하도록 조장했다또한 모든 구 사회에 대한 동력이자국가 권력으로 이용하도록 만들었다따라서 단순 상품 생산에서도 자본주의적 상품 생산 방법으로 더욱 빠르게 변화하면서자작농 및 소규모 수공업은 파괴 · 축출되어 자본주의적 대규모 경영에게 빼앗기게 됐다원시적 생산 방법은 개혁적 · 계량적으로 조직된 사회적인 노동에 뿌리를 둔다생산 기관 및 생산물의 사회적 소유는 생산 방법 아래에서 생산물은 분배되고사람의 사용 대상인 한에서 생산물은 개인적인 소유가 된다사회적 노동에서 생산물은 먼저 사회적 소유가 되어야만 한다단순 상품 생산은 독립적인 노동자가 경영하고노동자는 자신의 생산 기관을 가지고 생산물을 만든다생산물은 곧바로 자신의 사유물이다자본주의적인 상품 생산은 서로 독립적인 노동자를 대신해서 대규모적인 노동 경영이 출현했다계량화된 사회 생산으로 조직됐기 때문이다자본주의적인 대규모 경영은 상품 생산자가 서로 대립하기에상품 교환 및 생산 기관생산물에 대한 사유화가 퍼진다자본주의적인 생산에서 노동자는 생산물의 소유자가 되지 못한다일반적인 생산이 사회적인 생산으로 대체되면서 모든 부의 소유자는 노동자가 아닌 사람에게로기존의 노동자는 더 이상 노동자가 아닌 사람들이 되어간다자본주의적 상품 생산 아래에서 노동력은 하나의 상품이다모든 상품의 가치는 노동 생산력의 증진과 동일하게 떨어졌다노동 생산력이 커질수록 노동자가 노동력 가치로부터 순 이익에 의존할 수 있는 정도는 상대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자본주의적인 생산 방법이 지배적일수록 임금 노동자가 되는 사람들은 더욱 커질 것이다왜냐하면 대부분 증가된 노동 생산력의 분배에서 멀어지기 때문이다모든 대립은 자연적이고당연하게도 필연적으로 자본 계급과 노동 게급의 충돌이 생겨난다노동자는 계급 의식을 더욱 가지게 되며정치적으로도 진출해서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노동 정당이 출현할 것이기 때문이다노동의 사회적 성질과 생산 기관 및 생산물에 대한 전해진 점유 사이에서 자본주의적 생산 방법의 모순은 노동의 사회적인 성질을 철폐하고 단순 상품 생산 상태로수공업 및 자작농으로 하여금 대규모 경영을 대신하도록 하거나생산 기관 및 생산물 소유를 사회적 소유로 한다단지 사회적인 사정을 가부장제적인 단순한 사정으로 되돌리는 일이 무효하다는 것만이 아니라사회의 꾸준한 발전에서 남겨진 유일한 과정이기 때문이다기존의 점유 형태를 생산 방법과 일치하고생산 기관을 사회 소유로 속하도록 하고자본으로 인해 절반 밖에 수행하지 못했던 개별적인 생산 이전을 따로 다시 도모하지 않고도완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따라서 무정부 · 무방비한 상품 생산을 대신해서 계획적인 사회 생산 조직이 등장한다생산자에 따른 생산력 지배는 종말을 고하며여태까지 인류는 자연력의 지배자였지만 이제는 사회력의 지배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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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독일군 진격, 프스코프 함락으로부터 페테르부르크에 있던 정부로는 큰 위험에도 빠져들었다핀란드에서는 내전도 일어났다. 모스크바로 철수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조직으로도 필요한 일이었다. 311, 소비에트 정부로는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정부 중심부였던 모스크바로 이전했다. 모스크바는 국경에서 멀리 떨어졌다. 모스크바로 이전하던 날, 311, 레닌은 <우리 시대 주요 과제>라는 기고문을 작성했다. 312일 자, <진실>에 게재한 기고문으로는 강령 성격을 띠고 있었다. 레닌은 글에서 짤막하고, 압축한 형태로 프롤레타리아 모든 의의를 말했었고, 브레스트 강화 협정에서 온갖 모멸적인 측면을 지적했다.

 

레닌은 19171025일부터 방어론이라고 썼고, 조국 수호를 지지한다고 했다. 조국 전쟁이란 사회주의 조국 전쟁이고, 조국으로 사회주의를 위한 전쟁, 전 세계 사회주의 군대에 대한 분견대로 소비에트 공화국 전쟁이라고 봤다레닌, <우리 시대 주요 과제>라는 글에서는 분명한 목표를 제기했다. 318, 400-500여명 수병들로 이뤄진 영국 해병대는 무르만스크로 상륙했다. 차르 정부 때 협약으로부터 만들어진 군사 시설물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이었다. 상륙 부대가 뜻하는 바는 명백했다. 정부 기관들과 주요 인사들은 크레믈린에서 거주하기로 결정했다. 붉은 군대는 처음 얼마 동안이지만 보통 군대와도 매우 달랐다. 열정으로 들끓었지만 겉으로는 원시적이었다. 붉은 군대로는 정해진 복장은 없었다. 각자 자기 맞는 옷을 입었고, 엄격한 규정, 정해진 규칙도 없었다. 소비에트 권력 적들은 붉은 군대를 비웃기도 했다. 볼셰비키로는 강하고, 굳센 군대를 창설할 수 있으리라 믿지 않았다. 주민들은 무슨 약탈로 생각하고는 붉은 군대를 두려워했다. 크레믈린을 지키고 있던 붉은 군대를 무서워했다. 그러나 정작 어디에서나 정해진 형태 행동이 없었던 수비대 모습을 보이고는 외국인들도 특히 놀라워했다. 7차 당대회 191836-8, 독일 평화 협정을 체결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었다. 그러나 결정은 치열한 투쟁 끝에 채택했다독일과 강화조약 비준 문제, 중앙 위원회 저치 보고를 한꺼번에 다룬 보고처로는 레닌은 연설했고, 좌익 공산주의 모임을 대표하는 공동 보고처로는 부하린이었다. 모든 문제들은 매우 날카롭게 제기했다. 대회로는 30만 당원들을 대표해서 의결권을 가진 46명은 참석했다. 당은 지금과 같지 않았다. 통일 단결은 아직은 없는 상태였다. 46명 대회 참석 가운데 30명은 브레스트 강화 협정 비준에 찬성했고, 12명은 반대했고, 4명은 기권했다. 대략 1/3 대의원들은 중앙 위원회 노선, 레닌 노선에 반대했다. 많은 사람들은 뛰어난 볼셰비키였다. 223, 6명은 소비에트 당 직위에서 물러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당 안팎에서 선동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보장 받았다. 224, 모스크바 지역 사무국으로는 중앙 위원회 불신임안을 제출했다.

 

오스트리아 독일과 강화 조약 이행 조건들과 관련한 중앙 위원회 결정에 불복종했고, 결의안에 첨부한 해명서로는 장래 당 분열은 해소되지 않을거라고 천명했다. 모스크바 지역 사무국으로는 1918년 초, 전 러시아로부터 좌익 공산주의 조직 중앙 역할을 했다. 레닌은 좌익 공산주의에 맞섰다. 혁명 미사여구에도 맞서, 열심히 연설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1918221, <진실>에서도 썼다.

 

레닌도 대중은 좌익 공산주의가 아닌 레닌을 따를거라 알고 있었다. 4차 전러시아소비에트 비상 대회로는 강화 조약을 비준해야만 했다. 좌익 공산주의들로는 소비에트 권력을 잃을 수 있을거라 각오까지 했었다. 224일 자 성명에서도, 국제 혁명을 위해 순전히 형식적인 기관인 소비에트 권력을 잃는 게 합목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레닌은 문구를 보고 격분했다312, 모스크바 노동농민붉은군대대표소비에트에서 대중 대표들 앞에서 연설하면서 뜨겁고, 사력을 다했다. 레닌은 2월 혁명을 앞서 언급하면서, 러시아 혁명은 서유럽 혁명과 매우 다르게 이뤘다고 말했다. 314-16일까지 열린 제4차 전 러시아 소비에트 비상대회에서, 레닌은 소비에트 대표들 앞에서 연설하면서 대중 앞에 연설할 때면 언제나 그랬듯이 충심으로, 진솔하게 문구 하나 무심코 대충 말하지도 않았다. 혁명가이자, 투사였던 특징이기도 했다.

 

4차 소비에트 대회로는 724명 찬성, 276명 반대로, 강화 조약을 비준했다. 118명은 기권했다. 4차 소비에트 대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볼셰비키만이 아니었다. 멘세비키, 무정부주의 공산주의들, 사회주의혁명가당 우파,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로는 평화 협정 조인을 반대했다. 대표들은 223,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서 평화 협정이라는 독일 쪽 조건에다 서명하기를 반대하는 연설을 했다. 따라서 역관계로는 724명은 찬성했고, 276명은 반대했다. 따라서 레닌 노선은 중차대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독일과 조약 문제를 마무리했다. 따라서 러시아에서 소비에트 권력 활동을 보다 폭 넓게 전개해갈 수 있도록 활용하고자 했다. <소비에트 정부 당면 과제>라는 소책자 집필에도 들어갔다. 레닌은 집필할 때, 스베르들로프로는 속기사를 쓰라고도 설득했었지만, 오랫동안 말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미하일로비치로부터 끝끝내 설득한 끝에 훌륭한 속기사를 보냈음에도, 레닌은 같은 작업 방식을 고집했다. 먼저 두 쪽 정도 글을 쓴다. 다음, 좀 더 잘 쓸 수 있을 거리도 있는지 한참 생각했다. 그러나 낯선 사람이 있으니 잘 되지는 않았다. 병이 이미 위중했을 때 스스로 글 쓸 수 없었던 1923년에 와서야 비로소 글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아쓰도록 허락했다. 그래도 무척이나 힘들어했다. 포치예바, 글랴세르, 마누차리얀츠, 볼로지체바 등 동지들은 글을 받아적기도 했었다. 서기국에서도 이미 오랫동안 레닌 곁에서도 일해 온 사람들이라서 꺼려할 일은 전혀 없었지만, 집무실에서는 당혹스러운 소리도 가끔 들려오곤 했다.

 

1918, 3월 말-4월 사이로, 레닌은 <소비에트 정부 당면 과제>를 열심히 집필했다. 글로는 428, <소식>에서도 게재했고, 뒤로는 오랜 세월 동안 볼셰비키 행동 지침이었다. 러시아 사회주의 건설로 갖는 주요한 난제에 대해 레닌은 소책자로부터 간단하고, 명백하게, 그리고 명료하게 밝힌 글은 어디에도 없었다. 러시아는 10월로는 소농민 나라였다. 수백만 농민들은 소자산가 심리로 속속들이 젖어 들었다. 모두들 자기 자신, 생계, 땅 조각만 생각학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대체로 농민들은 자기 자신이나, 신의 가호만을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레닌은 소자산가 심리와 해악에 대해서도 수십 차례 글을 쓴 바 있다. 제헌 의회는 해산하고 나서야 권력 문제로는 최종 결정이 났을 때, 브레스트 강화 협정이라는 일정 기간을 가질 수 있었고, 대중을 재교육하고, 새로운 심리, 집단을 중시하는 심리를 교육하도록 할 방법 문제를 전면에서 제기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지주, 자본가들을 쓸어버렸고 소부르주아 세계에다 빗장을 열었다. 지주 부를 분배하면서 빼앗은 재산에 대한 투기도 벌어졌다. 소부르주아 세계를 장악하고, 대중을 재교육하고자, 새로운 사회주의 체제를 창출하고, 행정을 조직할 수 있을지, 레닌으로는 1918, 3-4월에도 모든 관심을 쏟아냈다. 전 인민 회계, 관리를 조직하고, 노동 생산을 높이고, 일하는 법을 가르치고, 사회 활동에서 대중을 끌어들이고, 의식을 높이고, 노동과 노동 규육을 새롭게 조직할지에 대해서도, <소비에트 권력 당면 과제>로부터 레닌은 써놓았다. 소책자에서 사회주의 경쟁에 대해 말하기도 했다. 사회주의 건설에서 경쟁도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를 다들 간과하곤 했다. 내전도 부분적으로 일조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경쟁은 대규모로 폭 넓게 적용할 수 있었다. 15개년 계획을 위한 투쟁을 전개하던 1928년에 이르러서도, 레닌은 글 쓴 지 10년 뒤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소책자로는 <노동 생산 향상>이라는 특수한 장도 있다. 언제나 레닌은 한 문제를 두고 모든 연관, 매개 관계 속에서 포착했고, 다른 기본 문제들과 일일이 연결해서 다루었다. 따라서 레닌은 노동 생산 향상이라는 문제도 경쟁 문제와도 연관할 수 있었다레닌은 <소비에트 권력 당면 과제>에서 노동 생산을 높이는 과제로는 장기적이라고 지적했다. 1936년 초, 스타하노프 운동을 체험했고, 15개년 계획, 25개년 계획으로부터 조성한 새로운 기술 기반 아래로부터 노동층에서도 노동 생산 제고를 위한 운동도 드높아졌다. 그리고 노동 생산도 매우 높았고, <소비에트 권력 당면 과제>라는 글도 새롭게 조명됐다. 글에서 제시한 레닌 기본 방침들도 매우 중요했다. 레닌은 노동, 농민들과 무척 많이 대화했다. 일할 능력이 결여됐음을 목격했고, 단지 일할 능력이 결여됐을 뿐만 아니라, 수 세기로 거친 강요된 노동으로부터 생겨난 유산으로 노동을 저주스럽고, 최소해야 할 무엇으로도 대하고 있었다. 혁명 노동계급들을 늘 재촉하고, 욕하고, 주먹질을 대 해던 십장, 중간 감독들을 일소했다. 노동 계급들로는 아무도 재촉하지 않을 수 있었고, 덕분에 피곤하면 앉아서 담배라도 한 대 피울 수 있어서 기뻐했다. 초창기 공장 조직으로는 노동 계급들에게도 많은 회합을 가도록 공장에서도 쉽게 내보내줬다. 한 노동 계급은 투표를 하기도 했고, 공장에서 저녁 회합 모임, 집안일 때문에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1918년 초에 일어난 일이었다. 착취 주인들, 충실한 하인들, 재촉하며 채근하던 사람들도 몰아냈다. 공장은 사회 소유였고, 사회 소유로부터 보호받았고, 노동 생산을 꼭 강화하고 높여야만 한다는 의식도 잘 없었다. 따라서 레닌은 같은 측면을 그토록 강조했다. 레닌은 진실을 직실할 줄 알았다. 노동 의식, 노동에 대한 의식 태도로부터 북돋고자 했고, 노동 전반, 삶에서도 전체를 실용해서 조직하고자 했다.

 

레닌은 <소비에트 권력 당면 과제>에서 특히 신랄하게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를 소부르주아지 대표라고, 실천적이고, 실용적인 활동 전반에 대한 중요함을 이해하지도 못했고, 실용주의나 단계주의로만 취급하면서, 혁명 전쟁이나 꿈꾸는 사람, 등등이라고 규정했다. 레닌은 지도역량을 믿었던 계급으로는 바로 프롤레타리아트였다. 글은 428일자, <소식>에도 게재했고, 429, 레닌은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에서도 연설했다. 모스크바 노동 열심 활동가들도 소비에트 권력 당면 과제에 대한 레닌 보고를 들을 수 있도록 종합기술박물관에서도 보고를 이뤄지기도 했다. 레닌은 연설로부터 혁명 특징, 승리 원인, 소부르주아 국가라는 환경에서 사회주의 건설 어려움 등과, 부르주아지 성격, 약점을 규정했고, 서구와 미국 부르주아지로부터, 트러스트를 조직한 사람들에게 생산을 조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촉구하기도 했다. 또한 소부르주아 세계를 대표하는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를 비난했고, 영향력에 굴복한 좌익 공산주의를 비난했고, 프롤레타리아트 역할, 소부르주아 세계 영향력, 사회주의 조직 의미, 프롤레타리아트를 새롭게 조직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새롭게 조직할 때만 비로소 프롤레타리아트로는 모든 노동 대중들을 규합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429,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서 행한 연설에서는, 대공장에서 규율을 익힌 프롤레타리아트와 현 시기 과제로 볼 때, 중앙 위원회로부터 노동절에 제기한 자본을 물리칠 수 있는 조직과 철도에 대한 중요함도 함께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329, 4차 소비에트 대회는 끝난 뒤 러시아 공산당 모스크바 지역 사무국을 수반으로 한 좌익 공산주의들로는 여전히 주간지, <공산주의>를 발행하고는 자신들만의 견해를 고수하기로 결정했었다. 420, 발행한 창간호에서 좌익 공산주의들은 편집부 이름으로, <현 시국에 대한 테제>를 실었다. 429,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로부터 해한 레닌 연설은 대부분 개진한 견해에 대한 답변들이었다. 또한 레닌으로는 <좌익 공산주의라는 유치한 단계>, <소부르주아지 근성>이라는 기고문에서 그들 견해를 좀 더 자세하게 분석했다. 글들로는 191859-11일자 <진실>에다 게재했다. 기고문으로는 사회하 부분으로는 특히 흥미로웠다. 국유화 몰수라는 문제에서 결단력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매우 위대한 결단력이더라도, 국유화와 몰수로부터 사회화로 이행하고자 충분하지는 않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현 시국과 국유화에서 사회화라는 이행 본질 자체를 알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제기한 좌익 문제로는 순진하고, 어리석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현 시국 핵심은 바로 단지 몰수로부터 결단력 하나가 아니라, 사회화로부터 계산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집단 농장에 대해서도 같은 기준이었다. 따라서 <공산주의>에 게재한 좌익 공산주의 자료를 분석해봐도, 신랄하게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그리고 몰계급적이고, 소부르주아 지식 계급 근성이 뼛속까지 물들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공산주의>로는 6월에 마지막 호는 나옴으로부터 겨우 네 번 나왔다. 레닌 노선에 맞서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로는 매우 투쟁했었다.

 

191852-3,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로는 볼셰비키에게 스피리도노바, 카렐린을 수반으로 하는 농업 최고인민위원회의를 실질적으로 완전하게 통제할 수 있도록 내어주기를 요구했다. 게다가 문제를 최후통첩으로 제시했다. 레닌으로는 농업 최고인민위원회에서 일하던 볼셰비키, 메셰랴코프, 세레다 등과 협의했었고, 볼셰비키 분파로는 단호하게 반대했다. 당 중앙 위원회도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와 같은 제안을 거절했다. 농업 최고인민위원회 회의에 대한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 영향력은 약화했다. 볼셰비키로는 농촌 계급 분화 노선을 취했었다522, 레닌은 페테르부르크 노동 계급들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경제 문제로는 빵과 기타 식료품들을 둘러싸고는 투기가 횡행했다. 기근에 대한 원인으로는 단지 러시아 곡물이 없어서 생긴 게 아니라, 부르주아지, 부유층 전체가 노동하는 사람들 지배, 노동 소비에트 권력 지배에도 맞서 매우 심각한 문제인 곡물 문제를 두고 최후 결전을 벌였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라 지적했다. 농촌 부자 쿨라크를 포함한 모든 부유층, 부르주아지로는 국가 곡물 분배를 파괴하고 있고, 부르주아지로는 고정 가격을 뒤흔들고 있고, 곡물을 투매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곡물 1푸드, 16.38kg마다 100루블, 200루블, 또는 이상으로 돈을 벌고 있다고 지적했다. 곡물 독점을 파괴하고, 뇌물 매수 온갖 책동을 파괴하는 건 사회주의 시작이자, 기본이고, 또 근원 원천이자 원칙으로는 일하지 않는 사람이여, 먹지도 말라라는 원칙을 성공하고 또 실현하고 있는 노동 권력을 죽이고 있다고도 지적했다. 실제로도 모스크바에서는 곡물 투기를 도처에서 이뤄졌다. 부농이자 소자산가로는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무언가를 빼앗기지 않고자 했다. 따라서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으로도, 부자·쿨라크·소자산가 심리, 낮은 생산, 무지, 경제 후진 따위와 싸워나가고자, , 소비에트 권력 앞에 놓인 길도 매우 험난했다. 5월 말, 레닌으로는 페테르부르크 노동 계급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리고 혁명 조직 작업에 대해서도 썼다. 국가를 방어하고자 조직화, 발발한 내전에 대한 지도와 대처를 사회주의 건설로부터 덧붙여 엄청난 작업들을 수행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산업 국유화 법령 단행, 국영 기업 노동 지침 작성, 노동 조합 대회, 전러시아인민경제최고회의, 인민경제평의회 제1차 대회 등에서 보고, 노동최고인민위원회 대회, 공장 단위 대표 회합, 공장 위원회 협의회 등에서 연설했다. 또 페테르부르크, 옐레츠 등에서 온 노동 계급과 면담, 전선으로 동원한 공산주의들 앞에서 연설하기도 했다. 모스크바 계엄령 공표 직전, 매우 날카로웠던 시기로는 525, 최고인민위원회에다 사회주의사회과학아카데미에 대한 법령 초안도 제출했다. 65일로는 국제주의 교사들 앞에서 연설했다. 610일에는 체코슬라바키아 반혁명 반란에 대한 격문을 작성했고, 같은 날 최고인민위원회의로는 기술가들을 활동으로 합류하는 문제를 제기했다. 부상 입기 이틀 전, 교육 대회에서도 연설했고,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대의에서 학교로부터 갖는 의의를 말하기도 했다.

 

레닌은 매주 여러 지구로 가서 연설했고, 하루에도 수 차례씩이나 연설하는 일도 잦았다. 대중 사이에서 작업, 기본 작업도 헛되지 않았고, 작업들도 승리를 돕기도 했다. 1918년 봄과 여름에도, 레닌은 모스크바에서 살면서도 말 그대로 온몸을 바치면서 일했다. 중농은 소비에트 권력에도 공감했다. 왜냐하면 소비에트 권력은 평화를 위해 싸웠고, 지주에도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동들은 소비에트 권력은 안전하다고 아직 믿지는 못했었다. 그리고 농민들도 더 이상 자신들의 소자산가적인 중립을 지킬 수는 없게 됐다. 5월 중순부터 계급 투쟁은 도처에서도 불붙었다. 1918년 여름은 몹시 힘들기도 했다. 레닌으로는 부상을 입어 무엇도 쓰지 못했고,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힘겨운 시절이었다.

 

모든 잃어버린 부르주아지로는 외국 도움을 강구했다. 연합국에게 반란을 조직할 자금을 받아오거나, 주민들을 약탈에 내맡긴 채로 독일군 지원에다 호소했다. 그리고 사방으로 미친 듯이 날뛰었다. 독일로는 핀란드 백위군을 지원하거나, 우크라이나를 점령했고, 터키로는 아제르바이잔 무사바트 민족주의들과 그루지야 멘셰비키를 지원하러 나섰다. 독일은 크림을 차지했고, 영국은 무르만을 차지했고, 연합국으로는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혁명가당 우파로는 시베리아를 중앙 지역으로 차단하고자 도왔다. 우크라이나, 시베리아에서는 곡물 수송을 중단했고, 수도 두 곳이던 모스크바, 페테르부르크는 기근에도 시달렸다. 전선 포위망도 좁아졌다따라서 레닌은 520, 페테르부르크 노동 계급들에게 전신을 보냈다. 연이어 반혁명 반란으로는 쿨라크를 일으키고, 그들을 조직했다. 쿨라크로는 곡식을 숨겨뒀다. 기아 투쟁과 반혁명에도 맞서는 투쟁도 함께 이뤄졌다. 레닌은 빈민 위원회를 조직하자고 내세웠고, 노동 계급들로는 식량 파견대로 들어가서 농촌에서 혁명 경험을 쌓아야만 한다고 열심히 선동했다. 레닌으로는 노동 계급들에게도 현 시기 곡물 투쟁이란 사회주의 투쟁이라고도 말했었다. 선진 노동 계급이란 빈민 지도가이자, 농촌 노동 대중이라는 지도가로, 노동 국가를 건설하는 사람으로, 인민에게 한 발자국 더 나아갈 수 있어야만 한다고 레닌으로는 페테르부르크 노동 계급들에게 썼다. 투쟁 속에서도 중요한 건 단련할 수 있고, 또 노련한 노동 계급이라는 혁명 전위라고 썼다. 놀랍게도 페테르부르크 노동 계급들로는 레닌 호소에도 부응했다. 곡식 투기꾼·쿨라크·조직 파괴가·뇌물 수수가 등에 맞선 십자군을 조직했다. 빈민들도 소비에트 권력 주위로 더욱 결합해갔다. 그리고 611,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로부터 빈민 위원회 조직에 대한 법령을 승인할 수 있었다. 레닌도 빈민을 배려했고, 빈민들도 레닌을 배려했다.

 

독일로는 러시아사회주의연방소비에트공화국, 브레스트 강화 조약을 체결하고는 러시아에 대한 공격을 일시적으로는 중단했지만, 러시아를 장악하려는 계획을 포기하지는 않았었다. 아직 브레스트에서 협상 진행 시기에도 독일 정부로는 우크라이나 의회와 협정을 맺고는, 볼셰비키로부터 맞서는 투쟁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하고는 말았다. 독일로는 우크라이나를 점령하고는 소비에트 군력을 전복하도록 한 뒤로, 의회를 함부로 해산하고는, 차르 장군이던 스코로바츠키를 우크라이나 통치가이자, 수장 자리로 앉혀놨다. 따라서 우크라이나로는 사실상 독일 식민지로 나떨어지고는 말았다. 곡물, 가축, 설탕, 원료 등도 우크라이나에서 독일로 대량 반출됐다. 독일 제국주의들은 갖은 수를 써내서라도, 내전 도화선을 앞당기고자 했었다. 돈스카야 지방으로 도망간 돈스카야 대장이기도 했던 크라스노프로는 독일에다 지원을 호소했었고, 독일로는 크라스노프로부터 카자크 백위군 부대들을 통합하기를 도왔었다. 독일로는 핀란드에서 백위군이 혁명을 진압하고, 핀란드 혁명가들에게 무자비한 보복을 가하도록 돕기도 했다. 독일만 공격해오지도 않았다. 4월 초에는 일본, 영국은 블라지보스토크에도 상륙했다.

 

따라서 4월로는, 이미 상당 수로 반소비에트 당들은 부흥 동맹으로 연합했다. 사회주의혁명가당, 입헌민주당, 인민사회주의, 멘셰비키, 단결 모임 등도 들어가 있었다. 부흥 동맹은 협상국과 남몰래 협정을 체결하고는, 볼셰비키에 맞서는 협상국 군대를 러시아로 파견하기로 하고, 러시아에서 소비에트 권력을 전복하도록 하는 반란을 조직하고자 체코 군단을 활용했다. 케렌스키 정부 때 체코 군단 수로는 42천여 명에 달했다. 러시아 검은 백인조 장군들, 장교들 상당 수도 가담했었다. 사회주의혁명가당 중앙 위원들, 시베리아 사회주의혁명가당 대표들도 프랑스 군사 사절과 반란 계획을 논의했다. 극동 지역으로 철수했던 체코슬라바키아 군대로는 우랄, 시베리아, 우수리 등 철도에 있던 주요 기지를 점령하기로 결정했다.

 

5월 말, 체코 군단은 첼랴빈스크, 페트로파블로프스크, 타이가, 톰스크 등 역을 점령했고, 6월 초로는 옴스크, 사마라를 점령했다. 5월 말, 모스크바로는 자유조국수호동맹이 주도한 백위군 근위대 음모를 적발했었고, 크림에서는 반혁명을 진격했고, 발틱 함대에서 반란을 기도했다. 64, 크림에서 부르주아 민족주의 정부를 수립했었고, 619일로는 이르쿠츠크에서 반혁명 반란도 일어났다. 620일에는 코즐로프, 예카체린부르크에서, 629일에는 코스트로마에서 군주주의 음모를 적발했다. 630일에는 시베리아 지역 두마에서 부르주아 정부 권력을 선포했었다. 사회주의혁명가당은 부르주아지와 손을 맞잡았다. 68, 체코슬라바키아로는 사마라를 함락한 뒤로부터, 그곳에다 제헌 의회 위원회를 결성했었고, 619일에는 땀보프스카야에서 사회주의혁명가당 우파가 반란을 일으켰다. 다음 날. 페테르부르크에서는 볼로다르스키 동지는 그들로부터 살해됐다.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 역시나 반혁명 길로 나섰다.

 

624, 그들은 독일 대사 미르바흐를 살해하고, 소비에트 권력에도 반대하는 무장 봉기를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627, 영국 상륙 부대로는 무르만스크로 상륙했다. 71일에는 모스크바에서 사절단 지도로부터 결성된 백위군 근위대를 적발해서 체포했다. 74, 전러시아소비에트대회를 열었다. 76, 사회주의혁명가당은 미르바흐를 살해하고, 모스크바와 야로슬라블에서 폭동을 조직했다. 75, 이미 레닌은 제5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연설로부터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에게 우유부단함, 공황 상태 조장, 사태에 대한 몰이해 등을 일일이 비판했다. 그들로는 폭동을 일으키지는 않을거라 생각했지만, 폭동도 일어났다.

 

76,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였던 블륨킨, 안드레예프로는 제네주니 거리에 있던 독일 대사관 건물로 나타났다. 개인적으로 독일 대사였던 미르바흐 백작을 만나는 데 성공했고, 그에게 폭탄을 투척하고는 죽인 다음, 전러시아비상위원회였던 체카 분실로 몸을 숨겼다.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였던 포포프는 지휘하던 곳에서 트료흐스뱌치젤스키 거리로 있었고,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 중앙 위원회 전체는 임시로 이전했던 상태였다. 살인가를 체포하고자 전러시아비상위원회 위원장 제르진스키는 체포되고 말았다. 또한 포포프로부터 자악한 분실로는 인근 거리마다 순찰병을 파견했고, 모스크바 소비에트 의장 스마도비치, 체신 최고인민위원 포드벨스키, 전러시아비상위원회 위원 라치스 등을 체포하고는, 우체국, 전화국을 장악했다.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 중앙 위원회로는 모스크바에서 반란 소식을 러시아 전역, 체코슬로바키아 전서에다 보내고는 독일과 전쟁을 촉구했다.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로부터 획책한 군사 행동에도 대응하고자 최고인민위원회로는 2천 명 보병, 8문 대포, 1대 장갑차를 가지고, 포포프 분실에 대한 군사 행동을 개시했다. 78일 아침 트료흐스뱌치젤스키 거리를 사방으로 포위하고는 포격을 가했었다. 사회주의혁명가당으로는 크메믈린 사격에 대응하고자 크레믈린 마당에다 몇 차례 대포를 명중하고자 했다. 그러나 포포프 분실은 얼마 저항하지도 못했고, 블라지미르스코예 대로로 퇴각해서 도주했다가 곧 이내 산산이 흩어졌다. 300명 포로를 붙잡았다.

 

트료흐스뱌치젤스키 거리에서 사회주의혁명가당 당원들을 괴멸한 뒤로 레닌은 반란을 일으킨 사회주의혁명가당 당원들이 임시 사령부로 사용했던 가옥을 보고자 방문했다. 포위됐을 때 이미 사회주의혁명가당 당원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던 문서들을 모두 다 찢어버렸다. 78, 5차 소비에트 대회로는 67-8일 폭동에 동조했었던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를 소비에트에서 제명하기로 결정했다. 710일 대회는 소비에트 헌법을 채택했다. 그리고 활동을 종결했다. 7월도 극도로 어려웠다.

 

체코슬로바키아와 싸웠던 군대 지휘관으로는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였던 무라비요프였다. 10월 혁명 뒤로 소비에트 권력 쪽에 가담해서, 케렌스키, 크라스노프가 페트로그라드로 진격하기를 맞서 싸웠고, 중부 지역 의회들에도 맞서 싸웠으며, 루마니아 전선에서도 싸웠다. 그러나 76-7일에는 사회주의혁명가당 당원들은 반란을 개시하자 무라비요프로는 그들 쪽으로 이내 돌아서고는 군대를 모스크바로 돌리고자 했다. 그러나 무라비요프에게 의존했던 사람들로는 지지하지는 않았다. 무라비요프로는 심비르스크 소비에트에 의존했으나 소비에트에서도 무라비요프를 지원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사람들은 무라비요프를 체포했으면 했으나, 저항하자 죽였다. 심비르스크는 곧 체코슬라바키아로부터 함락됐다. 체코슬로바키아로는 니콜라이 2세를 구금했던 예카체린부르크로 접근해갔다. 716, 니콜라이 2세와 가족을 총살했다. 따라서 체코슬로바키아는 니콜라이 2세를 구하지 못했다. 그들은 723일이 되어서야 예카체린부르크를 함락했다.

 

북부로는 영국 프랑스 군대로부터 무스만스크 철도 일부를 장악했다. 바쿠 멘셰비키로는 영국군을 불러들였다. 백위군 의용군은 치호레츠크 역, 아르마비르 역을 차지했다. 독일은 대사관을 경호하고자, 일개 보병 대대를 모스크바로 진입해주기를 요구했다. 힘겨웠지만, 그래도 레닌은 실망하지는 않았다. 심정이 묻어난 글로는, 726, 제트킨에게 쓴 핀지에도 있었다. 스파르타쿠스당을 지지했고, 또 응원했다. 그러나 반혁명 반란은 계속해서 몰아쳤다. 체코슬로바키아로는 카잔을 점령했고, 영국 프랑스 군대로부터 아르한겔스크를 점령했었다. 북부 지역 사회주의혁명가당 당원들은 반란을 조직했고, 이제프스크에서 사회주의혁명가당 우파 군대로는 사라풀을 점령했다. 소비에트 군대로는 치타를 포기하고 떠났고, 반혁명 부대 의용군은 예카체린부르크를 점령했다. 그러나 모스크바, 야로슬라블 반란도 실패하자, 사회주의혁명가당 대오로는 눈에 띄게 동요했다. 새 전력을 갖추고자, 독일과 연합국들 간에도 전쟁이 벌어지면서부터 러시아에서도 개입할 수밖에는 없었다. 여러 국가들은 러시아에 관심을 잃었다. 116, 체코슬로바키아로는 벨라야 강에서 패배했다. 따라서 모든 무장 병력을 통합하고자 했다. 일련으로 중요한 조직 대책들을 마련했었고, 노동 조직은 곡물 징수에도 참가하고, 추수 부대, 암거래 저지 부대를 조직하고자 법령을 공표했다. 곡식 사정은 조금 개선할 수 있었고, 부르주아 신문들도 폐간해서 사람들을 도발하는 행위도 중단했다. 외국인 노동 계급들 사이에서 개입에 반대하는 선동도 강화해갔다. 89, 외교 최고인민위원회의로는 연합국 평화 협정을 제안하라고 미국 정부에다 호소했다.

 

사회주의혁명가당 우파로는 자신들의 기반이 아래로부터 무너지고 있다고 느끼면서부터 레닌을 비롯한 여러 볼셰비키 지도가들을 대거 암살하기로 결정했다. 830, 오전 10, 레닌그라드 비상 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우리츠키 동지는 살해됐다는 소식을 레닌도 받았다. 밤에 레닌은 모스크바 위원회 동원령과 관련해서 바스만니 지구, 자모스크보레츠키 지구에서 연설하기로 했다. 부하린도 말렸으나, 레닌은 집회로 갔다. 2모스크바국립대학교에서 인민 교육에 대한 회의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레닌은 자리에서 이틀 전 연설도 했었다. 집으로 갈 채비를 마치고는, 크레믈린 광장으로 지인 교사를 마중하고, 운전수로는 레닌을 미헬손 공장으로 태우고 가던 도중에, 한 사람은 레닌에게 총을 쏘아서 가벼운 부상을 입기도 했다. 서둘러 병상으로 옮기고는 스베르들로프도 엄숙한 상태였다. 루나차르스키도 놀랐다고 한다. 여러 동지들도 걱정했다. 스탈린은 전선으로 나간 상태였다. 레닌 부상으로 모든 당 조직들뿐만 아니라 폭 넓은 노동 계급, 농민, 붉은 군대 대중을 동요하게 만들었다. 동요하는 모든 신문들도 용태와 상태 보고를 주시했다. 830일 저녁, 스베르들로프로부터 서명한 레닌 암살 기도에 대한 당 입장을 발표했다. 노동 계급은 지도가를 향한 암살 기도에 대해서는 더욱 큰 단결로 답하고, 모든 혁명 적들에 대해서는 맞서고자 가차 없는 대중 테러로 답하겠다고 밝혔다. 암살 기도는 노동 계급을 더욱 집결하도록 했고, 더욱 단결하고자 긴장해서 활동했다. 그리고 사회주의혁명가당은 붕괴했다.

 

 

레닌은 부상을 당한 다음 날, 신문에는 사회주의혁명가당은 암살 기도와 무관하다는 당 입장을 모스크바 사무국 발표로부터 게재했다. 7월 폭동 뒤로는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는 이미 사회주의혁명가당에서 이탈해갔다. 특히 노동 계급들은 더욱 그러했다. 콜레가예프, 피첸코, 우스치노프 등은 주도하고, 인민주의 공산주의라고 칭한 분파도 당에서 분리됐다. 브레스트 강화 조약을 무력으로 결렬하도록, 테러 행위도, 공산당과 적긎거인 투쟁도 모두 허용하지 않았다. 남은 사회주의혁명가당 당원들은 더욱 우경화되어 쿨라크 반란을 지지했으나, 영향력은 약화해갔다. 레닌 암살 기도로부터 사회주의혁명가당 붕괴 과정을 강화하도록 했고, 대중 속에서도 영향력을 더욱 지리멸렬하게 했다. 레닌은 살아남았다. 하루라도 업무로 복귀하고 싶어했다. 마침내. 910, 레닌 병세를 묻는 전화로부터 의사들을 번거롭게 하지는 말기를 바란다는 당부 지시를 내렸다는 보도는 <진실>로부터 나올 수 있었다. 916, 레닌은 최고인민위원회의로 가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비록 화는 났었지만, 업무로 다시 복귀할 수 있어 기뻐했다.

 

916, 레닌은 최고인민위원회의 회의를 주재했다. 프롤레타리아문화교육조직협의회 간부 회의에다 보내는 환영사를 썼다. 해당 협의회로는 영향력도 무척이나 컸었다. 그러나 해당 조직은 인민 의식 증대, 노동 계급 전진, 소비에트 국가 행정이라는 대의 종사를 준비하는 데 있어서는 별로 돕지는 못했다고 결함을 생각하기도 했다. 레닌은 협의회에다 환영사를 보냈고, 앞으로 제기하는 정치 임무를 여러 차례 언급했다. 이틀 정도 기간에 또 다른 기고문도 썼다. <러시아 신문들 성격에 대하여>였다. 레닌은 신문들이 주위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노동, 농민 대중으로부터 생활로 가까이, 또 좀 더 면밀하게 들여다봐야만 한다고 촉구하기도 했다. 업무로도 다시 복귀하자, 식량 문제에 대한 심원한 지점도 파고들었고, 농촌 고용주들에게 현물세를 부과하는 법령을 마련하는 데 적극적으로도 참가했다. 주로 소박한 집에서 지내왔고, 값 싼 방, 값 싼 해외 하숙집에 얹혀 사는 데 익숙해져 있던 터라, 라인 보트 집으로 이사갔을 때는 제일 작은 방을 골랐었고, 또한 거처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나중에 여섯 해 뒤로는 레닌으로는 숨을 거둔 곳이기도 했다. 아무튼 전선도 바뀌어가고 있었다. 붉은 군대는 승리를 거두었다. 93, 카잔에서는 노동 계급들로는 체코슬로바키아 점령 권력, 사회주의혁명가당 우파에도 맞서 봉기를 일으켰다. 소비에트 군대로는 7월 카잔을 점령했다. 12월로는 볼스크, 심비르스크, 17일로는 흐발린스크, 20일로는 치스토폴, 107일로는 사마라를 점령했다. 99일에는 소비에트 군대로는 그로즈니, 우랄스크를 점령했다. 국면을 전환했다. 소비에트 권력 일주년을 맞이했을 때, 레닌은 연설로부터 산개했던 붉은 호위병은 강력한 붉은 군대라고 당당하게 말하기도 했다. 독일로는 무르익어 갔던 혁명 소식도 고르키로 끊임없이 들어왔다. 101, 레닌은 모스크바, 스베르들로프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다. 그리고 노동 조합, 기타 등등 합동 회의를 소집하고자 했다. 왜냐하면 독일에서도 혁명을 개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레닌은 주로 보급을 위한 식량 확보, 군 입대를 더욱 늘릴 수 있고, 국제 노동 혁명을 도울 수 있는, 3백만 군대도 모으고자 했다. 그리고 비록 동의를 얻지는 못했었지만. 결의안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합동 회합으로는 목요일 3일이었고, 수요일 2일에, 레닌은 회합에다 보내는 편지를 썼다. 합동 회합에서는 레닌 편지를 경청했고, 바랬던 기조로 결의안을 채택할 수 있었다. 결의안으로는 모든 나라, 소비에트러시아공화국 전역으로도 타진했다. 다음 날 <전진>에도 게재할 수 있었다. 독일 노동 계급들도 동요는 심해졌다. 이론 투쟁에서는 분명한 이론 입장에다 늘 지대한 의의를 부여했다. 한때 마르크스 학설을 대중화하고자 일련 저서를 썼던 베른슈타인과 기회주의 언명으로 반대하고 나섰던 카우츠키로는 독일 이론가로는 어떠한 권위를 누렸는지를 잘 알았고, 따라서 레닌은 카우츠키에 대해 특히 분개했다. 920일자로, <진실>에다 게재한 볼셰비키주의에 반대하는 카우츠키 기고문에서 발췌 부분을 보고는 매우 격분했다. 곧바로 스위스에서 살았고, 소비에트러시아공화국 대표이기도 했던 보로프스키에게 편지를 보냈다. 제트킨, 메링, 다른 사람들도 카우츠키 독재 문재에 대해서는 마르크스주의도 아니고, 진부한 베른슈타인주의를 퍼뜨리고 있었다는 원칙적인 이론 성명을 언론에도 발표해야만 한다고 했다. 레닌은 카우츠키 수정주의 입장을 분석한 소책자, <국가와 혁명>을 조속하게 독일어로 번역해야만 한다고 썼었고, 카우츠키 소책자,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출판하는 대로 보내주기를, 그리고 볼세비키주의에 대한 카우츠키 모든 기고문들을 보내주기를 부탁했다.

 

고르키에서 휴가를 보내면서 레닌은 카우츠키를 폭로하는 데 착수했다. 따라서 소책자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를 집필했다. 마지막 몇 줄은 191810월 쓰여졌다. 1018, 레닌은 모스크바로 이주했고, 1023, 베를린 주재 대사에게 서한을 보냈다1023, 칼 리프크네히트는 석방됐다. 독일 노동 계급들은 러시아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1918115, 독일 정부로는 베를린 주재 소비에트 대표부는 독일 혁명 운동에도 개입했다고 비난하고는 소비에트 대사 이오페를 수반으로 한 소비에트러시아공화국 외교관들, 영사관 대표들에게도 곧바로 독일을 떠나기를 요구했었다. 119, 베를린 노동병사대표소비에트로는 대사관 직원들과 러시아로 향하던 이오페를 혁명 베를린으로 되돌아가게 했다. 소비에트 권력 수립 일주년 기념식도 열었다. 10월 말, 레닌은 중앙집행위원회, 인민위원회의 이름으로 오스트리아 노동 계급들에게 보낼 호소문, 초안 작성에도 참가했다. 113일에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혁명을 기념해서 열린 시위대 앞에서 연설했다. 10월 혁명 기념 기간 동안에는 제6차 전러시아소비에트 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116일에 대회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 기념일을 맞이해서>라는 레닌 연설을 시작으로 개회했다. 같은 날, 레닌은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모스크바 노동조합평의회 승리 기념 회의, 모스크바 프롤레타리아문화교육조직협의회 저녁 모임에서도 연설했다. 7일 레닌은 10월 혁명 투사 기념 현판, 제막식에도 참석해서 연설했다. 7일에는 또한 마르크스와 엥겔스 기념비를 제막할 수 있었고, 학설 의의에 대해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대한 선견지명에 대해서도 말했었다.

 

118, 9, 10, 11, 레닌도 독일 혁명에 대한 소식에 완전하게 몰두했다. 또한 쉬지 않고 연설했다. 118일에는 모스크바 지역 농촌빈민협의회에서도 연설했다. 레닌은 장기 활동에 대한 필요를 느끼기도 했다. 또한 빈농은 쿨라크와도 투쟁해야만 한다고 밝혔다. 대책으로는 토지 사회 경작, 코뮌, 협동 경작, 농민 조합 등을 내놓기도 했고, 소규모 농업 취약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리고 쿨라크 추종가, 착취가를 비판했다. 19181116, 1차 전 러시아 여성 노동 대회를 열었다. 대회로는 여성 노동 계급들 사이에서 선전, 선동을 주제로 러시아 공산당 볼셰비키 중앙 위원회로부터 소집했다. 이네사, 사모일로바, 콜론타이, 스탈, 칼라니나 등 동지로는 대회 조직을 맡아 열심히 일했다. 1,147명 대표들도 대회에 참석했다. 여성 노동 대회였으므로, 여성 농민들은 참가하지 않았다. 소수 민족 사이에서 노동에 대한 문제 역시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회에서 연설하면서 레닌은 쏠려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많이 말하기도 했다. 농촌에 대해서였고, 여성은 예전 처지를 사회주의 아래로만 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소규모 경제에서 공동 경제로, 토지 공동 경작으로도 이행할 수 있을 때에만, 비로소 여성은 완전하게 해방할 수 있고, 또 노예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도 말했다. 레닌으로는 빈민 위원회로부터 사회주의 혁명을 강화할 수 있도록 호소했다. 레닌은 어느 곳에서 연설하더라도, 농민에 대해서, 또 토지 사회화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리고 자주 칼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 보낸 1856년 편지를 떠올리곤 했었다. 레닌은 1918, 1211, 1차 전러시아토지국 대회에서 연설하기도 했다.

 

1919년은 치열한 내전 해였다. 콜차크, 제니킨, 유제니치와 투쟁한 해이기도 했다. 기아, 경제 붕괴로부터 벌어졌다. 공장, 제작소 가동은 중지됐다. 운송은 완전 붕괴됐다. 붉은 군대도 조직력을 갖추지 못했고, 무장 수준도 형편 없었다. 따라서 소비에트 권력도 예정대로 모든 곳에서 조직되지는 못했었고, 아직은 주민들과 함께 성장하지도 않았다. 소비에트 권력에 대한 적대적인 당, 구 권력 아래에서 호강과 호의호식하며 살던 모든 사람들, 곧 지주, 자본가, 하수인들, 쿨라크, 상인 등은 볼셰비키에도 반대하는 선정적인 선동을 벌여나갔고, 폭 넓은 농촌 대중 무지, 정보 부족을 이용해서 온갖 유언비어만 퍼뜨리고 다녔었다.

 

그러나 레닌은 지주와 자본가에도 맞섰다. 그리고 토지와 평화 쪽에 섰다. 비록 전투나 전선으로 나가지는 않았어도, 늘 노동, 농민, 붉은 군대와도, 대열로도 함께하고자 했다. 레닌은 최고인민위원회 의장이기도 했고, 활동도 많았다. 활동은 주로 내전 문제들, 소비에트 권력을 위한 투쟁 문제들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어려운 난관들에도, 소비에트 권력은 정책으로도 올바른 길을 가고자 했다. 사회주의 건설 핵심으로는 조직에 있다고 레닌은 늘 되풀이해 말하곤 했다. 그리고 노동 계급, 조직 관록, 노동 농민과 친밀하도록 하고, 또 이전 군대, 전문가들로부터도 조직 경험에 대한 일체를 습득할 수 있도록 요구했고, 과학과 지식으로는 소비에트 국가로부터 노동하는 사람들에게도 봉사할 수 있도록 요구했다19279, 1차 미국 노동 사절단 대담에서 스탈린은 전쟁에서 운명이란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로는 적들이 콜차크, 제니킨에게 풍부하게 공급하는 장비들이 아니라, 올바른 정책, 수백만 국민 대중 공감, 지지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1919년 소비에트 권력 정책은 주로 대중 관계를 강화하는 노선이었지만, 레닌은 공산주의 당을 말했고, 외적인 장애물도 종식하고자 노력하고, 구체제를 분쇄할 때, 그리고 수 많은 사람들에 대한 조직 문제를 맞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고 응수하기도 했다. 그리고 1917, 10월 열린 제2차 전러시아소비에트 대회에서 레닌은 사회주의 건설 핵심은 조직에 달렸다고 말하기도 했다. 17개월 뒤로는 1919, 3월에는 소비에트 권력은 이미 스스로, 발로도 설 수 있으면서, 조직 문제도 떠올랐다. 레닌은 제8차 당 대회에서도 다뤘던 모든 문제들을 조직 문제와도 긴밀하게 묶었다. 기구, 관료주의, 문화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문화 부재는 사회주의 건설을 가로막을 수 있다고 지적했고, 사회주의 건설에서 폭 넓은 대중 유입은 저해할 수 있고, 과거 잔재와도 투쟁을 방해하고, 관료주의를 근절하고자 방해하고 있는지도 말했었다.

 

농촌에 대해서도 프롤레타리아트는 농촌 노동 계급들과, 빈민에게도 미치는 영향력, 폭 넓은 계층에서는 농민들, 노동력 착취로부터가 아닌 노동으로 살아가는 중간층 농민들에 대한 영향력까지도 강화하고자 말했었고, 또한 농민 계급을 소비에트 권력 기둥으로 만들고자 배급 문제에 대한 봉사와 협동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리고 자본주의로부터 반면교사를 배워서, 남은 공산주의를 건설해야만 한다고도 말했었다. 공산주의 힘만이 아니라, 구 체제 전문가들과 과학, 또한 부르주아 건설에 대한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는 경험 일체를 활용해서 필요하기를 취할 줄도 알아야만 한다고 말했었다. 대회를 열기 이틀 전,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 스베르들로프는 사망했다. 레닌도 장례식에 참석했었고, 이론과 실천을 결합할 줄 알았을 뿐만 아니라, 도덕 권위, 타고난 조직 능력으로부터, 폭 넓은 프롤레타리아트 대중 조직가로도 잘 활용하고, 또 활동할 줄 알았기 때문에 소중했다는 점을 말하기도 했었다.

 

레닌은 조직 사회주의 노동 운동과 무정부주의 사이에서 모순에 대해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1905, 탐메르포르스 협의회 참석할 때, 레닌은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에서도 탁월하게 무정부주의 특징을 보여줬다. 19195월 제1차 전 러시아 교회 교육 대회에서도 레닌은 대회에서 환영사를 했고, 대회로는 800명 대의원도 참석했다. 그리고 소비에트 권력 건설에서도 무정부주의 정서와 투쟁해야 한다면, 붉은 군대에게도 투쟁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왜냐하면 무정부주의 정서로는 게릴라, 유격 활동 방식도 스며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크라이나 내전 경험도 붉은 군대 조직에서 어려움을 잘 보여주곤 했다. 레닌은 191974,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모스크바 노동농민대표소비에트, 모스크바 노동조합소비에트, 모스크바 공장위원회 대표들 합동 회의에서도 연설하기도 했었고, 분견대를 꾸준하게 없애야만 했던 일에 대해서도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비조직적, 게릴라식 활동 및 혼란으로는 우크라이나에서도 재앙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레닌은 농업 분야에서 소농 경제 특수한 분산으로부터 지닌 해악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리고 처음부터 집단 경영 형태로 이행은 꼭 필요하다고 강조하기도 했고, 토지 사회 경작을 담당할 수 있는 대규모 집단 조합, 농업 코뮌, 협동 조합을 만들어야만 한다고 지적했다. 도시, 농촌 노동 계급들로부터 사업 주도가이자, 노동 계급들에 대한 모든 독창과 창발을 지지했다. 1918년 봄에도, 농업 협동 조합을 조직하고자, 시베리아, 세미팔라친스크로 간 오부호프, 세먀니코프 노동 계급들에 대한 독창과 창발을 많이 지지했다. 또한 토지 집단 경작 노선에서 소박한 유형이지만 여러 조치들도 모두 지지했다. 레닌에게 농촌 환상 따위는 없었다. 1919년 봄, 레닌은 거주했던 고르키 노동 계급들 앞에서 새로운 유형으로, 집단 경제를 조직하는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여러 농업을 연구하기도 하던 동지들을 만나기도 했다. 농업으로는 채소 협동 조합으로부터, 붉은 군대에도 납품하도록 계약을 체결했고, 품질 좋은 배추들도 재배하기도 했다. 비료, 신품종, 파종범도 시험했다. 덕분에 채소 수확량도 늘었고, 45가구에 대해서는 노동 가족은 일 년 내내 건강한 채소도 공급받을 수 있었다. 1918318-23, 8차 당대회 때 중농에 대한 태도 문제를 제기했을 때도, 레닌은 검증된 중농으로부터는 강제력이 아닌 동지로부터 함께 기본 규칙, 지침들을 요구하고 마련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1924, 1, 채택한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새 헌법에서도 노동, 농민 선거권은 평등하고 나올 수 있었다. 1919330,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서 레닌은 고인이던 스베르들로프를 대신할 중앙집행위원회 후보로는 페테르부르크 노동가이자, 트베르스카야도 농민 출신이었던, 칼리닌을 추천하기도 했다. 그리고 여러 안건으로부터도 최선을 다하고자 했다.

 

교육 분야로, 레닌은 교외 교육 대회에서 대의원들도 전선으로 나가, 붉은 군대도 읽고 쓰는 법을 빠르게 배울 수 있도록 가르치기도 했다. 소비에트 교육으로는 지식에 대한 갈망, 교육 성과는 무엇보다 주로 교외 교육으로부터 이뤄진 경우는 더 많았다. 노동 대중 교육은 성과를 거두고 있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정치 교육원들이었던, 세르기에프스카야, 라고진스키도 전선을 순방했다. 그리고 수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소비에트 교외 사업국으로는 농촌용 대중 신문을 만드는 문제를 고심하기도 했고, 19181212, 이미 최고인민위원회로는 <글을 깨친 사람들에 대한 동원, 소비에트 체제 선전에서 조직에 대한 법령>을 발표한 바도 있었다법령은 노동 거주 지역 조직과 농촌 법령, 신문 기사들, 소책자들을 강독할 조직도 있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농촌 활동을 관장하는 분과도 있어서, 8차 당대회 때 만들어졌다. 분과를 대표해서, 레닌은 보고했다. 분과로는 66명 대의원들도 들어갔다. 세레다, 루나차르스키, 미트로파노프, 밀류친, 이바노프, 파호모프, 쿠라예프, 바레이키스, 보리소바 등 테제를 기초할 위원으로 선출했다. 또한 레닌은 모든 당, 문제에도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고자 했다. 농촌 지역들에도 신문, , 책방들도 보급하고자 노력했다. 농촌 노동, 농민, 문맹에 대한 지침으로는 사후 1928년에서야 발표한 <소비에트 기관 운영 규칙 초안>에서 기술하기도 했다. 1919년에는 80%는 문맹이었다고 보고하기도 했고, 또 문맹을 줄이고자 했다. 1919년은 도서관들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고, 또 민원 활동 분야에서도, 소비에트 권력 선전 및 여러 법령들에 대한 선전도 실천해서 옮길 수 있었다.

 

레닌은 민원실 뿐만이 아니라, 1919412, 칼리닌, 레닌, 스탈린으로부터 서명한 국가 감독에 대한 재조직 법령을 공표하기도 했다. 스탈린은 국가 감독 최고인민위원으로 있었다. 그리고 재조직 법령으로는 낡은 관료주의를 분쇄하고자 했고, 관료들에 대한 보수성, 꾸물거림, 주인 의식 결여, 해이함을 비판했고, 어떠한 형태로 발현되는 관료주의와 부조리에 대해서는 일체 허용하지 않는다고 천명했다. 단호한 조치로부터 소비에트 기관에서도 근절하고자 했다. 소비에트 권력은 폭 넓은 노동, 농민도 국가 행정에도 참가할 수 있고, 또 행정 기관들을 폭 넓게 감독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제도에 대한 불충분함을 해소하고, 관료주의와 부조리부터 근절해갈 수 있다고 공표했다. 191954, 국가 감독 최고인민위원회로는 산하에다 중앙 민원실도 설치하는 법령을 발표했다. 524일에도, 중앙 민원실 지방 지국들을 설치하는 법령도 발표했다. 레닌은 소비에트 기구 안에서 관료주의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투쟁하기를 촉구했고, 또 요구했다. 러시아로는 1860년대부터 문학 작품들에서도 관료주의에 대한 온갖 조소를 보내기도 했다. 1859년 창간해서, 1973년 폐간된 혁명 민주주의 잡지였던, <불꽃> 시인들, 첼르니셰프스키파 시인들도 그러했다. 쿠로치킨, 줄레프 등등과 같은 <불꽃> 시인들도 관료주의, 일 지체, 뇌물 수수 등에 대해서도 수도 없이 저주를 퍼부었고, 또 거부하기도 했다.

 

레닌은 보내온 편지들에 대해서도 각별한 관심으로 대했고, <레닌 저작선> 24권에 수록된 문서는, 예시로도 같은 점을 잘 보여줄 수 있다. 그리고 수 많은 진정서들도 레닌에게 들어왔고, 직접 답장을 보내곤 했다. 레닌 연구소 문서 보관국 사례들도 있지만, 기록되지 않은 문서들도 많았다. 국가 기부 안에서도 온갖 관료주의를 근절하고자 노력했다. 활동가 한 사람마다 주의 깊은 태도를 보이고자 했고, 자기 부서 사람들을 잘 알고, 업무로나, 알맞은 업무 환경 조성으로나, 나서서 돕기를 요구했다. 레닌은 부서 직원들을 하대하지도 않았고, 더욱 친절하게 배려하고자 노력했고, 증거로도 짤막한 기록들도 상당수 보관됐다. 이를테면, 38, 레닌은 최고인민위원회 회의로부터 중앙 통계청 직원이던 흐랴쇼바는 먼 곳에서 살았고, 걸어서 출근해야만 했다. 그래서 통계 일이 없을 경우 흐랴쇼바에게 일찍 퇴근할 수 있도록 하거나, 바쁘면 꼭 굳이 아예 오지 않아도 된다고 비서에게 요령껏 설명해달라고 글을 써주기도 했다그리고 넉넉하지 않는 생활과 활동을 수행해야만 했던 여러 동지이자 동료들에 대한 물질적인 처우나 처지들도 특히 염려했다. 운송 최고인민위원회의 추루파, 마르코프 등 동지들은 굶주리는 생활을 했다고 드러났을 때도, 중앙집행위원회 동료 직원들 뿐만 아니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상시적으로 할동할 수 있는 수당을 꼭 지급하라고 당부하고 또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19194월 말부터는 동부 전선에서도 사태는 전환됐고, 붉은 군대는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백위군에게서 우핌스카야와 일련 다른 도시들도 탈환해냈다. 그러나 1919년 하반기는 상반기보다 훨씬 열악했다. 9, 10, 11월 초는 더욱 그랬다. 왜냐하면 내전도 격화했기 때문이었다. 콜차크는 패했지만, 백위군은 소비에트 권력 심장부였던 모스크바, 페테르부르크를 차지하고자 할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니킨은 우크라이나 주요 거점들을 차례로 점령했다. 남쪽에서부터 진격하기 시작했고, 서쪽으로는 유제니치는 움직이고자 개시하고 있었고, 이미 페테르부르크로 접근한 상태였다. 백위군 승리는 숨어 있떤 적들도 기운을 북돋도록 만들었다. 11월 말, 페트로그라드에서 유제니치와 연계했고, 협상국 지원을 받던 반혁명 조직들도 적발했다.

 

제니킨, 유제니치는 승승장구하는 동안에도 내내 레닌 앞으로는 온갖 욕설, 협박, 조롱으로 가득찬 수 많은 익명 편지들도 왔다. 지식 계급은 동요했었고, 소비에트 권력 쪽으로 넘어온 사람들은 치미랴제프를 위시한, 선진 부분뿐이었다. 사회주의혁명가 당원들에게 지원을 받은 무정부주의들도 925, 레온치예프스키 거리에 있는 러시아 공산당 볼셰비키 모스크바 위원회 건물에다 폭탄을 터뜨리고는 수 많은 동지들도 목숨을 잃었다. 기아와 빈곤도 내내 기승을 부렸다. 따라서 붉은 군대를 강화하고, 후방 노동 중심 지역들에도 식량을 공급했다. 그리고 선동과 해명 활동들도 폭 넓게 전개해야만 했다. 대체로 레닌은 집무실에서 여러 보낼 전보들을 보내거나, 사람들을 맞이하곤 했다. 주로 매우 날카롭던 문제로는 곡물 문제였다. 소규모 농민 경제는 붕괴됐고, 광적인 투기마저 횡행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1919117, 추루바를 식량 최고 인민 위원회, 위원으로 임명했다. <불꽃>에다 글을 쓰기도 했다. 1919729-30, 모스크바 소비에트, 모스크바 노동 조합 평의회로는 공장 위원회들, 모스크바 중앙노동협동조합, 협동조합 평의회 위임을 받은 노동 조합 대표들 등, 협의회를 소집하고는 모스크바 단일 소비 조합을 구성하는 문제를 논의하기도 했다. 협의회로는 멘셰비키, 독립 협동 조합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참석했다. 레닌으로는 730, 협의회에서 연설하기도 했다. 레닌은 연설에서, 협의회로는 잘 활동하기를 바랬지만, 내전에서도 승리를 거두어 협동 조합에서 올바른 방향을 잘 제시할 수 있는 사회 체제로부터는 혁명으로부터 더욱 새롭게 개혁하고, 또 개선할 수 있는지에 달려있다고도 강조하기도 했다.

 

경제 분야에서 레닌은 개별 경제에서, 집단 경제로 대체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기아와 착취, 다른 사람에게 얻은 부를 축적하는 일은 근절해야만 한다고 강조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최후 결전으로는 사회주의로부터 실현할 수 있고, 또 해결할 수 있다고 봤다. 그리고 레닌은 어떤 범죄도 마다하지 않는 파괴 분자들, 노동하는 사람들로는 적들인, 지주, 자본가, 파괴 분자들, 백위군에 대해서는 소비에트 권력으로는 해악을 끼칠 수 있고, 또 가차 없는 태도를 보여야만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때를 맞추어 1919, 모든 사람들은 고등교육기관 문호를 개방할 수 있는 일련 법령들도 도입했고, 노동 단과 대학들도 조직했고, 노동 강좌도 개설했다. 최초 소비에트 당 학교도 1919년에 조직했다. 페테르부르크에서는 810-17일까지 당 주간을 열었고, 8차 당 대회 결정에도 따라 9월 말까지 당원 재등록 기간도 지속할 수 있었다. 모스크바로는 108-15일까지 당 주간 행사를 개최하기도 했다. 1011, 레닌은 <노동 국가와 당 주간>이라는 논설을 쓰기도 했다. 글로는 당에 대한 레닌 견해, 새로운 소비에트 기구에 대한 설명, 노동 계급들과 노동 농민들로부터 더 많은 역량을 기구에도 끌어들일 수 있도록 해야만 한다고 견해를 명백하게 드러냈다. 그리고 노동 계급, 농민들에게도, 전위에도 공감할 수 있는 힘에 대해서도 알리고자 노력했다. 정치교육국원들은 주로 제1기 소비에트 당 학교 일에도 매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레닌은 정치 교육원들에게도 연설하기도 했고, 곧 지침에도 도움을 줬다고 한다.

 

덕분에 소비에트 권력 2주년 기념식을 승리로 맞이할 수 있었다. 제니킨은 오룔까지 접근해 온 10월 초순에 당 중앙 위원회로는 스탈린을 혁명군사평의회 의원 자격으로 남부 전선으로 파견했다. 스탈린은 새로운 진격 계획을 제출했고, 중앙 위원회는 승인했다. 레닌은 전적으로 지지했다. 남부 전선에서는 빠르게 국면도 전환됐다. 1019, 군대는 보로네슈 근방에서 슈쿠로 장군, 마몬토프 장군을 제압할 수 있었다. 1020, 오룔을 탈환했고, 1021, 풀코프 전투에서 페테르부르크까지 진격했던 유제니치도 패배했다. 10월 혁명 기념일에서 레닌은 페테르부르크 노동 계급들에게 뜨거운 축하 인사를 쓰고는, <진실>로는, <소비에트 권력, 여성 지위>를 실었고, <빈곤>에도 실을 농민을 위한 기고문, <소비에트 권력 2>을 작성했다. 117, 레닌은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모스크바 소비에트, 전러시아중앙노동조합평의회, 공장위원회 대표들 합동 회의로부터, <소비에트 권력 2>을 연설하기도 했다. 그러나 레닌은 기념식에서 연설하기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회합 연설은 선동 성격이 아니라 단순 사무였기 때문이었다. 레닌은 지난 2년 동안 소비에트 권력으로부터 이룩한 여러 중요한 성과와 업적 가운데로는 노동 권력 건설이란느 교훈, 국가와 전반적인 행정에서도 노동 계급들은 참가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1919년 노동 대표들도 차지하는 비율로는 30%-80%로 증가할 수 있었다. 당 주간 동안 모스크바에서 입당한 당원만 하더라도, 14,000명은 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노동, 농민, 예비대를 편성함으로부터, 전반적인 행정에서도 실천 투쟁 속에서도 단련됐다. 그러나 더욱 주의를 기울이고자, 매우 중요한 수백만 농민들과도 올바른 관계를 구축하는 일, 농민들에게 폭 넓은 선전 활동들도 꼭 벌일 수 있다고 말했다. 레닌은 내전으로부터도 농민 사태에서 진실로 잘 볼 줄 알았다. 레닌은 늘 조용하게 말했지만, 모두들 북돋는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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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1912.

 

1910년 말에도 이미 혁명은 북돋는 징조를 보였다. 1911-1914년까지 시기, 전쟁은 시작되기 전, 19148월까지로는, 매달 노동 운동도 성장했다. 1905년에 앞선 노동 운동 성장과는 다른 조건과, 1905년 혁명으로부터 운동 성장은 이뤄질 수 있었다. 프롤레타리아트도 많은 일들을 겪었다. 파업, 무장 봉기, 대중 운동, 패배 등 몇 년이나 겪었다. 모든 면에서 같은 점으로도 확연하게 드러났기 때문에, 레닌도 프롤레타리아트 성장을 온몸으로 느꼈다. 프롤레타리아트뿐만 아니라 전체 상황 또한 옛날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지식 계급도 이미 달라졌다1905년에는 폭 넓은 층으로부터 지식 계급은 노동계급을 지원했다. 프롤레타리아트로는 수행할 수 있는 투쟁 성격은 이미 명백했다. 투쟁은 타협 없이 냉혹했고, 프롤레타리아트로는 부르주아지로부터 원했던 제한된 헌법으로부터 얻고자 벌인 투쟁으로 빌려주지는 않았다. 노동 계급은 부르주아지 개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노동계급은 이끌어갔고, 끌려가지도 않았다. 더욱이나 투쟁 조건도 매우 달라졌다. 차르 정부에서도 1905년 혁명 경험도 생겼다. 정부는 모든 노동 조직들에다 첩자를 심어 놓았다. 그들은 그저 불쑥 나타나서 몸 숨길 기회를 주던 작자들이 아니라, 말리노프스키, 로마노프, 브렌진스키, 체르노마조프 등과 같이 당에서 중책을 맡고는, 정부 미행과 체포, 또 첩자들도 엄밀하게 계획해서는 진행했다. 그래서 기회주의들은 판을 쳤다. 노동계급 전위이자, 지도부로는 당을 청산하려는 청산주의 노선은 폭 넓은 지식인층 지지를 받았다. 청산주의들로는 좌우 양측에서도 커갔기 때문이다. 입헌민주당 당원들은 저마다 비합법 당을 향해 침을 뱉었다. 투쟁 조건마저 평등하지도 않았다. 청산주의들로는 기회주의였기 때문에 러시아에서 강력한 합법 중앙을 가질 수 있었고, 대중 속에서 폭 넓은 청산주의 활동을 수행할 수 있었지만, 볼셰비키는 무엇 하나라도 쟁취하고자, 지하 활동이라는 힘들기 짝 없는 조건에서도 투쟁해야만 했다.

 

검열이라는 장애물을 제거하고자, 당에서 비합법 조직을 강화하고자 벌인 과감한 투쟁은 1911년부터 시작했다. 19101, 중앙 위원회 전체 회의로부터 설립한 해외 연합 안에서부터 시작했으나, 곧 틀을 넘어서 터져나왔다. 페테르부르크에서는 <>, 모스크바에서는 <사상>을 발간했다. 그러나 해외에서 발간한 비합법 신문들은 러시아로 들어가기로는 1905년 이전보다도 훨씬 어려웠다. 러시아와 해외 모두 첩자들은 넘쳐 났고, 일 망치는 건 다반사였다. 따라서 볼셰비키로는 기고할 수 있는 합법 신문, 잡지로부터 러시아에서도 발간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레닌은 기뻐했다.

 

<> 편집부로는 볼셰비키파, 플레하노프파, 두마 파견원들로 구성했다. <> 신문은 두마 파견대 대변지였다. 창간호로는 플레하노프 사설도 실렸다. 레닌은 창간호를 썩 달가워하지도 않았다. 색채는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모스크바 <사상> 1호를 보고는 매우 흡족했다. 레닌은 <>, <사상>에다 글도 열심히 썼다. 모스크바 1910, 2월에는 여러 동지들도 체포됐다. 4월에는 <사상>은 폐간됐고, 6월에는 두마 파견대, <>25호를 끝으로 발행을 중지했다. 복간은 11월이었다. <>은 이미 볼셰비키 신문이었다. 바쿠에서도 볼셰비키 신문으로는 <현대 생활>도 발행했다. 7월에는 한 동지와 협의 끝에, 페테르부르크에서 <계몽>이라는 합법 잡지를 출판했다. 잡지는 1911년 말에 이르러서야 발간할 수 있었다. 레닌은 출판문들에 대한 경과를 잘 지켜보고, 실을 글들을 썼다. 볼로냐 학생들은 카프리 학생들과 같은 방법으로 수업 경험을 하고자 했지만, 정작 아무런 소득은 없이 끝나기만 했다소환주의들로는 191011, 이미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학교를 세웠다. 학생들은 단, 플레하노프, 레닌을 비롯해서 여러 강사들을 초청하고자 했다. 그러나 레닌은 부탁을 거절했고, 파리로 와달라고 했다. 그러나 카프리 사태를 겪은 바 있어서, 전진파는 일을 꼬왔고, 멘셰비키, 중앙위원회 해외 사무국에서 공식 초청을 요구했다. 그리고 레닌에 반대하는 학생들과 함께 파리로 와서는 자율권을 요구했다. 수업은 성사하지 못했고, 중앙위원회 해외 사무국으로는 학생들을 러시아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1911년 봄, 마침내 볼셰비키로는 파리 근교에서도 당 학교를 세울 수 있었다. 학교에는 노동계급들, 멘셰비키 당 유지파, 전진파 소환주의 노동 계급들도 참여는 했지만 두 집단으로는 모두 매우 적은 수에만 불과했다.

 

레닌도 여러 노동 계급들과 만날 수 있었다. 사람들에게 독일에서 임시 일자리를 마련해주거나, 파리에서는 롱주모 마을에다 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먼저 학생들은 방을 세냈고, 이네사 아르망은 집 한 채를 통째로 빌렸고, 집에서는 학생들을 위한 식당을 마련했다. 지노비예프 가족도 롱주모로 옮겼다. 따라서 일을 할 수 있었다. 마르토프도 투르한스크에서 유형을 살기도 했고, 나중에는 비합법 활동을 했던 동지는 살림을 맡았다. 이네사 아르망은 빌린 집에서 여러 수강생들도 파리에서 묵을 수 있었다. 레닌은 플레하노프파, 청산주의파, 전진파 등에 대해 취할 노선을 밝히고자, 서신을 자세하게 밝혔다. 주로 카프카스 볼셰비키와 우호해서 서신을 교류했다.

 

이네사 아르망 집에는 온갖 볼셰비키 사람들은 다 모여 살 수 있었다. 마을 다른 쪽 끝에 살고는 있었지만 공동 식당으로 점심을 먹으러 다녔다. 학생들과 잡담을 나누고는 많은 문제들에 대해 질문할 수 있었고, 정기적으로는 시사 문제를 토론할 수도 있었다. 가죽 노동가로부터 세를 낸 방 두 개에서 살았기 때문에, 소규모 공장에서 노동계급 생활을 잘 살펴볼 수도 있었다. 집 주변에는 정이라곤 하나도 없었고. 힙겹고, 암담하기만 한 삶이었다. 고된 일에만 시달리다가, 일요일에는 성당에 다디는 게 전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존하는 사회 체제를 변화하도록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아무도 해보지도 못했다. 프랑스 사람들은 볼셰비키를 잘 알지는 못했다. 동지들 가운데로는 프라하 당 협의회에 참석한 사람도 있었고, 볼셰비키 대열에서 오랫동안 싸우다가 백위군에게 피살되기도 했다. 그리고 백위군에게 피살된 26명 바쿠 인민 위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또 첩자가 된 사람으로는 10루블이라는 푼돈을 받고, 쥐꼬리만한 임금에 의존하면서 살다가, 롱주모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도 있었다.

 

학기 중간에는 레닌은 수업을 매우 규칙적으로 진행했다. 레닌은 정치경제학(30), 농업 문제(10), 사회주의 이론과 실천(5)을 강의했다. 정치경제학 토론회로는 이네사 아르망으로부터 지도했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는 당 역사를 강의했고, 세마슈코도 강좌 두 개를 맡았다. 다른 강사들 가운데로는 랴자노프는 서유럽 노동 운동 역사를, 샤를 라포포르는 프랑스 운동을, 스체클로프, 핀예노타예프스키는 각각 공법, 재정학을, 루나차르스키는 문학, 스타니슬라프 볼스키는 신문 인쇄술을 가르쳤다. 학생들도 많은 시간을 두고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다.

저녁 때는 가끔씩 들판으로 나가 노래를 불렀고, 건초 더미 아래로 누워 도란도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레닌도 가끔씩 함께 다녔다.

 

카메네프는 롱주모에서 살지는 않았고, 가끔 강의할 때만 왔다. <두 개 당>이라는 책을 집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책 문제를 두고 레닌하고 논의하곤 했다. 마을 너퍼 골짜기 풀숲에서 레닌은 생각을 카메네프에게 들려주곤 했다. 책 서문도 써줬다. 1910, 8월 중순에는 파리로 거처를 옮겼다. 19101월에 공들였던 모든 분파 통합마저 빠르게 붕괴해갔다. 러시아에서도 실천 활동 과제마저 제기함에 따라, 공동 활동마저 할 수 없다고 더욱 분명해져만 갔기 때문이었다. 실천 활동을 요구하자, 당 소속에서 멘셰비키 본색마저 드러났다.

 

충성이라는 그럴듯한 명분 이래로 청산주의들, 전진파를 통합하고자 했던 트로츠키 충성에 대한 본질도 무엇인지를 드러내고는 말았고, 러시아에서 활동마저 좀 더 원활하게 조직해야 할 필요를 감지했다. 모든 통합은 인위적이었다고 드러났다. 1910년 말로는 이미, 레닌,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등은 중앙위원회 해외 사무국에서 중앙 위원회 전체 회의를 해외에서 소집해야 한다는 성명서를 제출했다. 한 달여 시간은 지나서야 성명서에 대한 답변을 받았다. 멘셰비키 노선으로는 중앙위원회 해외 사무국은 제안을 거부했다. 문제를 둘러싼 협상으로는 19115월 말까지 질질 끌어만 갔다. 중앙위원회 해외 사무국과는 이야기해봐야 아무런 소용마저 없었다. 중앙위원회 해외 사무국이었던 볼셰비키 대표로는 세마슈코 동지는 사퇴했고, 볼셰비키로는 해외에 있던 중앙 위원회 회의를 소집했다. 따라서 19116월 중앙 위원은 아홉 명이었다. 멘셰비키와 분프나느 도중에 회의장을 나가 버렸고, 나머지 살마들은 매우 시급한 문제부터 논의하고, 당 협의회 소집 문제를 논의해서, 러시아에서 당 협의회 소집을 위한 러시아 조직 위원회를 만들고자 결정했다. 여러 동지들도 지역으로 파견됐다. 라이프치히에서 브렌진스키라는 한 운반책은 첩자이기도 했다. 협의회는 바쿠에서 소집했다. 여러 활동가들도 체포됐다. 다섯 개 조직에서 대표는 참석했고, 협의회로는 볼셰비키와 플레하노프파로 대변했다. 훗날 첩자로 밝혀진 체르노마조프 역시나 협의회로 참석했다. 러시아조직위원회로는 몫을 다 해낸 끝에서야 19121월에서야 당 협의회는 소집할 수 있었다.

 

1911년 파리에서 볼셰비키 모임은 대단히 강력한 조직이었다. 세마슈코, 블라지미르스키, 안토노프, 쿠즈네조프, 벨렌키 형제, 이네사 아르망, 스탈, 나타샤 고프네르, 고틀랴렌코, 체르노프, 레닌,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릴리나, 타라투타, 류비모프, 블라지미로프 등 동지들도 속했다. 모두 합해서 40명은 넘었다. 러시아와 제대로 된 관계를 맺었고, 혁명 경험도 풍부했다. 청산주의, 트로츠키파 등등 사람들과 투쟁으로부터 모임은 더욱 강인하게 단련했다. 적지 않은 프랑스인들, 수 많은 망명한 노동 계급들 사이에서도 일정한 활동을 수행할 수 있었다. 파리에서는 망명객들도 무척 많았다. 스탈 동지와 크룹스카야는 꽤 오랫동안 모자 믹공, 재봉사 등 여성 망명 노동 대중 속에서 활동을 수행하고자 했었다. 수 차례 회합을 가졌으나 활동을 과소평가했고, 일은 잘 풀리지는 않았다. 회합을 할 때면, 꼭 누군가 분란을 일으키는 질문을 해댔기 때문이었다. 주로 무엇 때문에 꼭 여성들에게 회합을 소집해야만 하는가라고 물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 유용한 성과는 있었으나, 일은 시들해져만 갔다. 레닌은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19119월 말, 레닌은 국제사회주의사무국이라는 인터내셔널 사무국 회의를 참석하고자 취리히로 다녀왔다. 독일사회민주주의당 중앙 위원회에서 보낸 몰켄부르크 편지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편지는 선거와 관련해서, 모로코 사태로부터 식민 정책에 대한 비판에서 위축해서는 안 된다고 내세웠다. 룩셈부르크도 편지를 출판했다. 베벨은 일에 분개하기만 했다. 레닌은 룩셈부르크를 옹호했다. 독일사회민주주의당에서 기회주의 정책으로는 회의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레닌은 여행 기간 동안 스위스에서 여러 차례 강연했다. 1911, 10, 라파르그 부부는 자살했다. 레닌은 죽음에 대해 심한 충격을 받았다. 몸소 방문했던 일도 떠올랐다. “당을 위해 더 이상 일할 수 없다면 라파르그 부부와 같이 진실을 직시할 줄 알고, 그렇게 죽어야만 한다고.” 레닌은 말했다. 라파르그 시신을 앞에 두고 활동마저 헛되지 않았고, 폴 라파르그, 라우라 라파르그로부터 그토록 긴밀하게 시작했던 마르크스라는 대의로부터 폭 넓게 성장할 수 있었고, 또한 아시아로까지 번질 수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마침 중국에서는 대중 혁명 운동이던 신해 혁명도 일어났다. 레닌은 조사를 썼고, 이네사 아르망은 번역했다. 레닌은 러시아사회민주주의노동당 이름으로 장례식에서 죽음 사람에 대한 조사를 낭독했을 때 크룹스카야는 가슴마저 뭉클했다고 한다. 1912년을 앞두고, 볼셰비키로는 볼셰비키해외모임에서 회의를 열었다. 망명 생활로부터 모두들 지독하게 신경마저 날카로워졌지만, 그러나 분위기로는 활기로웠다.

 

협의회 준비 작업에도 박차를 가했다. 레닌은 국제사회주의사무국에서 체코 사회민주주의 대표였던 네메츠와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협의회 개최 문제를 결정했다. 프라하에서 협의회를 개최하고자 했다. 플레하노프는 협의회로 오지 않았다. 대신 플레하노프는 답신으로는 협의회 구성은 너무 동질이 강해서 나는 참여하지 않는 쪽이 당 통일을 위해서도 좋겠다고 답했다. 협의회에서는 첩자는 주로 참석하지 못하도록 잘 막아냈고, 프라하 협의회로는 러시아 활동가들은 1908년 뒤로 청므으로 개최해냈던 당 협의회였다. 협의회에서는 러시아 활동과도 관련한 문제들을 실무로도 논의했고, 정확한 활동 노선을 마련하고자 했다. 현 시기 당 임무, 4대 두마 선거, 두마 안에서 사회민주주의 분파, 당 활동 성격과 조직 형태, 기아 투쟁에서 사회주의 임무, 노동 계급들을 위한 국가 보험에 대한 두마 입법 초안, 청원 운동, 등등, 여러 결의안들도 채택했다. 프라하 협의회로부터 러시아 안에서도 활동에 대한 당 노선, 실천 활동에 대한 분명한 지도력을 얻어낼 수 있었다.

 

협의회로는 레닌, 지노비예프, 오르조니키제, 슈바르츠만, 골로셰킨, 스판다랸, 말리노프스키를 중앙 위원으로 선출했다. 중앙 위원은 체포될 경우로 대비해서 후보들도 미리 지명해뒀다. 협의회는 끝난 직후로는 중앙위원회로는 스탈린, 페테르부르크 노동 계급, 롱주모 학교 학생이기도 했던 벨로스토츠키를 보궐 선출했다. 중앙위원회는 단결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어려운 시기에 활동을 수행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 활동으로부터 더는 분열하지 않도록 확대를 사전에 막음으로부터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딜 수 있도록 한 공로는 협의회에도 있었다청산주의, 트로츠키는 악의 찬 말들, 플레하노프와 분트파 외교술 등등, 모든 걸 신랄하게 또 반박하고, 해명하고자 했지만, 같은 논쟁들에 대한 비중으로는 줄어들었고, 주요한 중점도 러시아에 대한 활동으로 옮겨졌다. 말리노프스키도 중앙 위원이었지만 대수로운 일은 아니었고, 협의회는 끝나고 나서야 제3대 두마 의원이었던 폴레타예프, 슈르카노프로는 라이프치히에서 회의한 내용을 토대로 경찰마저 세세하고 알고 있었다는 일도 큰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알고 보니 슈르카노프 역시나 첩자였기 때문이었다. 첩자들은 활동가들을 교란하도록 했고, 또 조지을 약화하도록 한 분명한 사실도 있었지만, 경찰은 북돋는 노동 운동을 막을 수조차 없었고, 운동을 올바른 노선 정립으로부터도, 바른 궤도에도 들어섰고, 새로운 세력들도 점차 성장했다.

 

레닌은 자금 상환 문제를 피신탁인들과 합의하고자, 라이프치히에서 베를린으로 잠시 들렸다. 폴레타예프, 슈르카노프를 만났다. 쇼트만은 파리 집을 방문했고, 핀란드에서 일하고 있었다. 프라하 협의회로는 차르 체제, 3대 두마에서 핀란드 정책을 격렬하게 비판했고, 차르 체제, 반혁명 부르주아지에 맞서 투쟁하는 핀란드, 러시아 노동자들에게 통일할 수 있는 과제를 강조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핀란드에서는 조직은 비합법적으로 활동했다. 핀란드에서도 봉기를 준비했고, 군대 안에서도 활동하는 비합법 조직들도 이미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사태는 진격에 이르지도 못했다. 조직은 빠르게 무너졌고, 곧바로 대대적인 체포를 시작해서, 57명은 봉기를 도모한 혐의로 재판으로 회부됐다. 19124월 중순에 터진 레나 금광 지대 사건, 도처에서도 일어난 항의 파업을 보자면, 몇 해 동안 프롤레타리아트는 무엇도 잊지 않으면서도, 많이 성장했다. 운동은 이미 높은 단계라는 대열로도 올라섰다. 레닌은 러시아 노동 운동 앞에서 제기한 많은 과제들에 대해 생각했다. 체르니셰프스키, <인민 의지>에 이르는 많은 혁명가들도 선동을 이어받아서, 확대하고, 강화해갔다. 끝까지 유일한 혁명 계급이었던 프롤레타리아트로는 수백만 농민들로부터 처음으로 공개 혁명 투쟁에 나서도록 일으켰고, 선두에도 우뚝 섰다. 로마노프 사건도 일어났고, 한 동지는 1904, 징역 12년을 선고 받기도 했다. 치타 공화국을 조직했다가, 시베리아 토벌대에게 붙잡히고는 사형을 선고 받았고, 기차로 수송됐다. 혁명가들에게 총살 장면을 보여주고 위협하기 위해서였다. 나중에 사형은 종신형으로 감형했다. 러시아에서는 <진실>도 발행하고 있었다. 레닌은 꾸준하게 고리키에게 소식을 위한 편지를 보냈다.

 

1912-1914.

 

크로코프로 갔을 때, 유대인들은 특수 지구에 살았고, 옷도 색다르게 입고 다니곤 했다. 바르샤바 위원회는 비밀 경찰과 관련됐다는 소문도 있었고, 레닌은 바르샤바 위원회 쪽에서 옹호하는 글을 썼고, 국제 사회주의 사무국으로부터 당 중앙 행위로는 항의하는 서한을 썼다. 바르샤바 위원회로는 바르샤바 및 기타 노동 중심지들에게 대중과 강하게 연계했다. 레닌은 로즐라모프파 사태를 남일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모든 당내 투쟁이었고, 또 방관자로만 남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레닌은 자국 러시아로 집중했다. 페테르부르크 위원회를 재건했고, 뒤이어 북부지역사무국을 결성해서, 여러 동지들과 결합했다. 페레트부르크에서는 청산주의로부터 맞서는 결렬한 투쟁마저 진행했다. 레닌은 <진실>에다 강력한 편지를 썼다.

 

페테르부르크에서는 1912, 916, 일요일에, 노동 대표 선거를 예정했다. 경찰도 선거에 대비했다. 14일에는 이네사와 사파로프도 체포됐다. 그러나 경찰은 유형지에서 도망친 스탈린은 12일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는 못했다. 노동 선거로는 잘 치러져서, 단 한 명 우익 후보도 당선하지 못했다. 곳곳에서는 정치 성격을 지닌 결의안들도 채택했다. 10월 내내 모든 관심을 선거로부터 집중했다. 노동 대중으로는 전통으로, 후진으로부터 모든 지역에서 여전히 선거에는 무관심했고,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폭 넓은 선동도 필요했다. 따라서 노동계급들은 어디서나 사회민주주의를 선출할 수 있었다. 대규모 공업 중심지에서 노동 선거로는 볼셰비키는 모두 승리했다. 높은 권위를 누렸던 노동 당원들도 선출했다. 두마로는 6명 볼셰비키 의원들, 7명 멘셰비키 의원들을 선출했으나, 볼셰비키 노동 의원들은 백만명 노동계급들을 대표했지만, 반면 멘셰비키 노동 의원들은 25만 명도 채 대표하지도 못했다. 볼셰비키 의원들은 초반부터 매우 조직력과 결속력도 잘 보여줬다. 두마에서는 노동 시위, 파업들도 이어질 수 있었고, 1018일 개원했다.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로는 두마에서는 함께 할동했지만, 당 안에서는 관계를 매우 악화됐다. 1월에는 볼셰비키 세력 조직화에 지대한 역할을 했던 프라하 협의회를 열었다. 1912, 8월 말 비엔나, 트로츠키 적극적인 참가, 주도로부터 당 협의회를 소집했다. 청산주의 행위로부터 당 노선은 얼마나 심각하게 대치햇고, 또 전혀 멀어졌는지 생각하지도 않은 구호였다. 협의회로는 전진파도 초청했다. 중앙 위원회를 중심으로, 볼셰비키는 협의회로 참가하지 않았고, 해외에서 발행했던 플레하노프 잡지, <당을 위하여>를 중심으로 모였던 플레하노프파, 멘셰비키와 타협주의 볼셰비키 역시 참가를 거부했다. 폴란드인들도 참가하지 않았고, 전진파를 대표해서 협의회로 온 알렉신스키는 협의회 빈약한 구성을 폭로했다. 협의회 참가는 대부분 해외에서 거주하던 인물이었고, 카프카스 대표 두 명으로는 카프카스 지역 사무국 대표로 파견됐고, 모든 대표들은 매우 한정된 집단에서 선출한 사람들이었다. 협의회 결의문으로는 청산주의를 극대화했다. 선거 강령에서 민주 공화국이라는 구호도 삭제했고, 지주 토지 몰수라는 구호는 제3대 두마 농업 입법 재검토라는 구호로 대체했다. 주요한 발제자는 보리스 골드만이었다. 당은 있지도 않았고, 협의회로는 창립 회의여야만 한다고 했다. 알렉신스키조차 항의했다. 8월 블록이라 불린 협의회로는 중앙 위원회로 대립하고자 했고, 프라하 협의회로부터 결정을 갖는 권위를 실추하도록 애썼다. 사회민주주의 세력에게 통합이라는 탈을 쓰고는 볼셰비키 반대파와 통합하고자 했다.

 

러시아에서는 노동 운동은 북돋고 있었다. 12월 말, 1월 초 사이로는 두마 의원들도 첫 회의를 열었다. 두마 회의에서는 비합법 당 활동, 긴밀한 결속을 논의했고, 바다예프는 <진실>을 전담하기로 했다. 인터내셔널사무국도 도처에서 항의 집회를 조직했다. 크라코프에서도 집회를 열었다. 그러나 크라코프 항의 집회로는 특이한 성격을 띠었다. 전쟁에 항의하는 집회라기 보다는 러시아에 대한 대중에게 증오를 조직한 집회였기 때문이다. 인터내셔널 사무국으로는 1111-1112, 바젤에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비상 회의를 열었다. 러시아사회민주주의노동당 중앙 위원회를 대표해서, 카메네프도 바젤 대회로 참가했다.

 

레닌은 <신시대>에 실린 기회주의를 점철한 카우츠키 기고문을 보고는 격분했다. 글에서는 노동계급들은 전쟁에 반대하고, 무장 파업, 파업을 조직한다면 잘못했다고 말했다. 레닌은 여러 차례 1905, 혁명에서 파업에 대한 조직 역할이라는 글 썼다. 레닌은 기고문으로부터 더욱 면밀하게 문제를 조명해갔고, 노동 대중에게 모든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행동으로부터 파업에서도 지대한 의의를 부여했다. 바젤 대회로는 만장일치로 전쟁에도 반대하는 선언문을 채택했고, 대규모 반전 시위를 조직했다. 2인터내셔널은 기회주의로부터 얼마나 잠식당했는지는 1914년에서야 드러났다.

 

제국주의 전쟁을 발발하기 직전, 크라코프 시절, 레닌은 민족 문제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젊은 시절부터 온갖 민족 박해를 증오했기 때문이다. 한 민족이 다른 민족에게 종속되는 더 큰 불행이 없다고 마르크스 말을 레닌은 공감했고, 또 이해했다. 그러나 전쟁은 닥쳐왔다. 부르주아지 민족주의 정서를 고양했고, 민족 적개심으로부터 불을 질렀다. 전쟁은 닥쳐오면서부터, 약소 민족에 대한 억압, 독립에 대한 탄압도 잇따랐다. 전쟁은 반드시 봉기로 전화할 수 있고, 피억압 민족들도 독립을 강력하게 요구하기를 레닌은 의심하지 않았다. 또한 당연한 권리이기도 했다.

 

 

1896, 런던에서 개최한 국제 사회주의 대회로는 이미 권리를 확인했다. 1912년 말-1913년 초와 같인 전쟁을 목적으로 둔 시기로부터 민족자결권을 과소평가한 데 레닌은 분노했다. 8월 블록으로는 시대 요구 문제, 첨예화하지도 않은 채로, 문화, 민족 자치권을 강령 민족 자결권 조항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결정을 승인했다. 같은 결정은 1903, 2차 당 대회에서도 이미 논란이었지만 부결했다. 따라서 민족 문제에 대한 입장을 포기했다. 문화는 정치 체제 전체로부터 수천 갈래로 얽혔다고 분명하게 알지 못했기 때문에 문화라는 문제 하나로만, 모든 투쟁을 제한했기 때문이었다. 레닌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기회주의로 봤다. 민족자결권에 대한 문제에서 주요한 논쟁으로는 폴란드들과 벌어졌다. 룩셈부르크, 즐라모프파마저도 민족자결권은 분리권을 뜻하지 않는다고 내세웠다.

 

레닌은 민족자결권에 대한 폴란드인들에 대한 정서는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를 잘 알았다. 차르 전제 정치에 대한 증오는 폴란드 대중 속에도 있었다. 전쟁은 닥쳐왔다. 검은 100인조 민족주의, 열강 부르주아 폐쇄주의를 고조했다. 폴란드 사회주의 당으로는 폴란드 독립을 키워나갔다. 소부르주아적 폴란드사회주의당에서는 분리주의마저 커져만 가자, 폴란드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우려도 생겨났다. 그래서 폴란드 사회민주주의들로는 분리에도 반대해싿. 레닌은 폴란드사회주의당 당원들을 만났고, 당 활동가들 가운데 한 사람과도 여러 차례 대화를 나누면서 발언들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레닌은 폴란드인 관점으로만 민족자결권 문제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민족 문제에 대한 논쟁으로는 제2차 당대횡서도 제기한 적 있었다. 1913-1914년 전쟁 직전에는 매우 날카로운 수준으로 번져갔다. 제국주의 전쟁은 고조되던 1916년까지도 계속됐다. 레닌은 논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분명하고 강력한 문제를 제기했다. 당은 소비에트 국가라는 틀 안에서 민족 문제를 올바르게 해결할 수 있고,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을 창건한 뒤로는 민족 사이에서 불평등이 있거나, 어떠한 민족 권리를 축소하는 일은 없도록 했다. 견딜 수 없는 박해를 받았던 민족들로는 문화로도 빠르게 성장해갔고, 공동 사회주의 건설로 통합하고 있는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연방에서 모든 민족들은 더욱 긴밀하게 결합했다.

 

크라코프에서는 레닌은 민족 문제만 치중한 게 아니라, 늘 지대한 의의를 부여해 온 농민 문제와 같은 여러 문제들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레닌은 크로코프 시절, 농민 문제에 대한 40편도 넘는 글을 썼다. 두마 의원, 샤코프를 위해, <현 정부 농업 정책 문제에 대하여>를 썼고, 페트로프스키를 위해 <농업 예산 문제에 대하여>를 썼다. 레닌은 크라코프에서 미국 자료를 연구하기를 기초로부터, <농업에서 자본주의 발전 법칙에 대한 새로운 자료들>이라는 방대한 글을 썼다. 미국 통계는 정확하고, 풍부한 국가로 명성을 떨쳤다. 레닌은 수하노프 견해를 논박하고자, 글을 쓰기도 했다. 레닌은 수하노프 견해를 두고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농업은 비자분주의적으로 전화해야만 한다는 힘머 이론으로는 본질적으로는 압도적 다수로부터 부르주아 교수들, 부르주아 민주주의 및 전 세계 노동 운동 안에서 기회주의 이론이라고 말했다. 크라코프에서 시작한 미국 농업에 대한 소책자는 1915년 마쳤고, 1917년에서야 출판할 수 있었다. 병석에 누웠던 1923년에 레닌은 혁명에 대한 수하노프 논고를 읽고, 글을 구술하기도 했다. 크라코프 시절 쓴 수 많은 글들로부터 레닌은 농민, 지주 농업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줬다여러 당에서 농업 강령을 설명하고, 국가 조치 성격을 폭로하고, 이주 문제, 농업에서 고용 노동, 아동 노동, 토지 거래, 농지 동원 등등 여러 문제들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고자 했다. 농민 요구, 농촌에 대해서도 레닌은 너무 잘 알았고, 노동계급, 농민계급들도, 잘 알았다1912년 말, 혁명 노동 운동은 북돋고 있었고, <진실>도 많은 역할을 했다. 전진파는 물론이고, 모든 사람들도 알았다. 191211, 알렉신스키로는 파리에서 전진파를 대표해서 <진실>에게 협력하기를 제안했다. 알렉신스키는 <진실>에서 많은 글을 쓰기도 했고, 전진파 논문집<최근 쟁점에 대하여> 3호에서 청산주의를 투쟁하고자 볼셰비키 안에서 투쟁을 중단하고, 모든 볼셰비키 구역을 이룰 필요가 있다는 글까지 썼다. <진실> 편집부는 알렉신스키가 가입된 파리 모임뿐만 아니라, 보그다노프까지도 투고하고자 명부에도 포함했다. 레닌은 원칙적인 문제를 대할 때는 철두철미 신중하면서도, 사람들을 대할 때는 매우 밝았다. 낙천주의로는 오류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대의를 위해서는 무척 유익했다. 그러나 원칙 문제에서 합일점을 찾지도 못한다면, 타협이란 있을 수는 없었다.

 

크라코프 시절, 레닌은 이미 사회주의 건설로 향했다. 크라코프 시절로는 사회주의 건설 준비기였다. 레닌은 문화 문제에도 무척 많은 관심을 보였다. 12월 말, 페테르부르크에서 피트메르고등학교는 수색을 당하고는 학생들은 체포됐다. 교장과 남편은 1890년대 초창기 마르크스주의 모임에서도 적극 참가했고, 1905-1907년에는 볼셰비키를 여러 가지로 돕기도 했다. 피트메르 고등학교에서는 학생들 정치 참가, 모임 조직 등을 금지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경찰은 급습했다. 학생들은 체포됐고, 두마에서 조사를 실시했다. 카소 장관을 해명했지만, 과반 수 의원들은 해명은 불충분하다고 판단했다.

 

레닌은 1913, <계몽>, 3, 4호에서 게재한 기고문, 10장에서, 두마로부터 피르메르 고등학교 학생들에 대한 체포와 관련해서, 카소 인민 교육부 장관에 대한 불신을 표명한다고 지적했다. 레닌은 문화에 대해서도 언제나 정치 및 경제 구조 관계를 강조했다. 문화, 민족 자치라는 구호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1913, 2, 레닌은 <러시아인과 흑인>이라는 특수한 글을 쓰기도 했다. 1913년 여름, 레닌은 바다예프 동지로부터, <인민 교육부 정책 문제에 대하여>라는 두마 연설문 초안을 작성했다. 두마 의장은 바다예프를 제지했고, 발언권을 박탈했다. 레닌은 러시아에서 문화는 후진했고, 인민 교육에 할당된 재원들마저 형편 없고는, 차르 정부 정책으로부터도 인구 90%에게 교육 기회를 차단했음을 드러냈다. 미국에서는 국민 11%가 문맹이고, 흑인들은 44%가 문맹이라고 말했다. 1910, 흑인들은 러시아 농민들보다도 더 계몽됐다. 왜냐하면 미국 인민으로는 반 세기 전부터 이미 미국 노예 소유를 완전하게 박설내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몽 문명 국가를 만들고자, 러시아 인민도 자국 정부를 타도해야만 해씩 때문이었다.

 

샤코프 동지를 위해 쓴 연설문에서도, 레닌은 지주로는 농민에게 토지를 넘겨줄 때만 러시아는 게몽 국가일 수 있다고 적었다. <인민 교육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글에서도 레닌은 미국 도서관 분야를 상세하게 묘사했고, 러시아에서도 마련해야만 한다고 적었다. 6월에는 <노동계급, 신맬서스주의>에서도 교육 투쟁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했다. 사회주의 건설 문제에서도 실천 의의를 지닌 다른 많은 문제들을 다뤘다.

 

크라코프 시절, 레닌은 <기술에서 위대한 승리 가운데 하나>로는 자본주의 아래에서 발명과 사회주의 아래에서 발명과 역할을 비교하기도 했다. 자본주의 발명에서는 한 줌 백만장자들만, 더욱 부유해지고, 노동 계급들에 대한 전반적인 처지로는 더욱 악화되고, 실업마저 증가한다. 사회주의 아래에서는 램지 시스템으로부터, 수백만 광산 노동계급들은 노동에서도 해방할 수 있고, 모든 노동계급들에 대한 노동일도 곧바로 8시간에서 7시간으로, 또 아래로도 단축할 수 있다고 봤다. 모든 공장, 철도를 전기화하면, 노동 조건도 더욱 위생적이고, 수백만 명 노동계급들도 연기, 먼지, 진흙 따위에서 벗어날 수 있고, 더럽고 역겨운 작업장들도 깨끗하고, 밝고, 품위를 갖춘 실험실로 바꿀 수 있다고 촉진하고자 했다. 모든 집에서 전기 조명, 전기 난방을 이용한다면, 수백만 가사 노예들도, 삶을 3/4를 어두침침한 부엌에서 보내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자본주의 기술이란 노동하는 사람들을 고용 노예 상태라는 사회 조건들이란 날로 갈수록 증대하도록 만든다고 적었다.

 

일찍 레닌은 전기화, 하루 7시간 노동, 취사 공장, 여성 해방 등에 대해 생각했다. <최신 업종 가운데 하나>라는 글에서도, 사회주의 아래에서 자동차 개발에 대한 의의를 깊이 생각했다<농업에서 철제품>에서 철을 국가 문화에서 단단한 기반이라고 말했다. <선진 자본 사상>이라는 레닌 글로는 한 미국 백만장자 사상을 분석하기도 했다. 주로 백만장자 산업가들이 자신들의 중세 특권을 푸리슈케비치라는 검은 100인조 패거리와 협작하고는, 중세 반문화주의로부터 조국을 해방하도록 하는 일에 대해서는 탄식했기 때문이다. 레닌은 한 미국 백만장자를 두고는 전 세계 노동계급을 바보라고 믿냐고, 따져묻기도 했다. 1912, 가을, 부하린을 알았다. <진실>에서 신문 구독 명단으로는, 주로 90%는 노동계급이었다. 배포 도표로는 몰랐던 큰 공장도 나오곤 했다. 크라코프에서는 그네비치, 단스키는 발행하기도 했다. 레닌은 보험 문제에서, 대중, 당 관계를 강화하도록 할거라고 생각했다.

 

19132월 중순, 중앙 위원회 회의로는 크라코프에서 열렸다. 두마 의원, 스탈린도 왔다. 레닌은 탐메르포르스 협의회, 스톡홀름 협의회, 런던 대회 등으로부터 스탈린을 알았다. 레닌은 민족 문제에 대해서 스탈린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진지한 관심을 표명하기도 했다. 같은 문제를 분석한 사람을 만나 기뻐하기도 했다. 스탈린은 비엔나에서 두 달을 지내면서, 민족 문제를 연구했다. 비엔나 동지들, 부하린, 트로야노프스키와 주로 가까운 사이였다. 스탈린으로는 222, 러시아로 돌아가자, 페테르부르크에서 체포됐다. 9월에는 중앙 위원회 회의를 열기로 했다. <진실>은 폐간당했고, <노동 진실>을 발간했으나, 압수당했다. 파업도 높이 치솟아 올라, 페테르부르크, 리가, 니콜라예프, 바쿠 등지로도 파업은 벌어졌다. 카메네프 가족은 집 이층으로 이사 왔다. 레닌은 저녁 식사를 하고 나면, 오랫동안 주방 식탁에 앉아서, 러시아로부터 오는 소식들에 대해 논의했다.

 

여름 회의로 잘 알려진, 당 협의회를 위한 준비 작업도 진행했다. 회의로는 1913922-101일까지 포로닌에서 열렸다. 여러 파견단 의원들도 참석했고, 말리노프스키로는 <노동 진실>, 모스크바 신문, <계몽>, 파도 출판사, 협동조합 및 판매원 대회, 정례적인 다른 과제 등도 논의했다. 협의회 중간에는 이네사 아르망도 도착했다. 19129, 체포된 이래로 다른 사람 이름으로 감옥에 수감됐고, 힘든 환경 속에서 결핵을 앓아서 건강은 많이 나빠졌다. 그러나 당 활동에 더욱 투신했다. 협의회로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22명이었다. 노동 운동 성장 배경으로는, 5차 런던 대회를 열린 이래로, 대회를 필요로 했다. 노동 운동도 성장할 수 있었던 까닭으로는 파업 운동, 정치 총파업 준비, 선동 임무, 일련 대중 소책자 출판, 민주 공화제 구호 선동 축소 불허용, 지주 영지 몰수, 하루 8시간 노동제 등 여러 문제들도 회의에서 다뤄져야만 했다. 두마 사회민주주의당에서 소수 노동계급들에 대한 견해만 대표할 7인조로부터 볼셰비키를 반대표를 던지기를 허용할 수 없고,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에 대한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고, 전적으로 레닌, 민족 문제에 대한 중요한 결의안을 채택했다. 19141, 말리노프스키로는 카르코프로 와서 레닌과 함께 파리로 갔다고 다시 브뤼셀로 갔다. 113일에 열린 제4차 라트비아 사회민주주의 대회로 참석하고자 했다. 레닌은 파리에서 돌아온 직후로 겨울에는 <진실> 지도, 두마 파견단 작업을 위해, 카메네프를 러시아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신문도, 두마 파견단도 도움은 필요했따. 1914, 38, 페레트부르크에서 대중 잡지, <여성 노동> 첫 호는 나왔다. 파리에서는 이네사, 스탈, 크라코프에서는 릴리나, 크룹스카야는 <여성 노동>에도 글을 썼다. 일곱 호를 발간했다. 8호에서는 비엔나에서 열릴 여성 사회주의 회의와 관련한 기고문들을 싣기로 했지만, 그러지는 못했다. 전쟁은 일어났다. 비엔나에서 8월로 예정한 국제 대회 기간 동안 당 대회를 열기로 했다. 일부 사람들은 합법으로 국경을 넘을 수 있으리라 예상했다. 6월 중순, 국제사회주의사무국으로는 러시아사회민주주의노동당에서 각기 다른 경향, 11개 조직 대표들에게 브뤼셀에서 회동을 갖고, 통합을 위해 각 조직은 서로 의견을 교환하자고 했다. 그러나 청산주의, 트로츠키파, 분트 등은 볼셰비키 활동을 제한했고, 여러 가지 조항들로부터 활동을 구속하고자 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는 볼셰비키 영향력은 커져만 갔다. 바다예프, <국가 두마 안에서 볼셰비키>라는 책에서도 지적했지만, 1914년 여름 무렵부터, 페테르부르크에도 있던 18개 노동 조합 가운데 14개 조합 지도부로는 볼셰비키로 구성할 수 있었다. 모든 노동 조합 조직 가운데 수적으로도 매우 많고, 매우 힘 있는 조합으로는 금속 노동 조합을 비롯해서, 강력한 모든 조합들도 볼셰비키 쪽이었다. 보험 기관 노동계급들 가운데에서도 같은 비율이었다. 모스크바, 페테르부르크와 같은 수도권 보험 기관, 노동 대표로 선출한 사람들 가운데로는 37명은 볼셰비키였고, 멘셰비키는 모두 7명이었다. 전 러시아 보험 기관에서 선출한 사람들 가운데 47명은 볼셰비키, 10명은 멘셰비키였다. 따라서 비엔나에서는 국제 대회를 위한 선거를 폭 넓게 조직해갔다. 대다수 노동 조직들도 볼셰비키에게 국제사회주의대회 위임장을 넘겨주고자 했다.

 

청산주의, 트로츠키파, 전진파, 플레하노프파, 카프카스 지역 위원회 등으로는, 브뤼셀에서 사적인 회동을 갖고는 반볼셰비키 구역을 결성하고는, 조정된 정세를 활용해서 볼셰비키에게 압력을 가하기로 결정했다. 통합을 둘러싸고는 브뤼셀에서 질질 끌린 일로부터 1914년 여름, 레닌은 또 다른 극히 중대한 사태에도 몰두했다. 바로 말리노프스키 사태였다. 내무성 장관으로 임명한 준코프스키 장군은 말리노프스키를 첩자로 활동했다고 알았고, 두마 의장, 로잔코에세 사실을 알리고는 정치 추문은 일어나지 않도록 무마하고자 했다. 58, 말리노프스키는 로잔코에게 두마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하고는 해외로 나가버렸다. 지역, 중앙 기관들은 말리노프스키는 무정부주의와 같고, 조직을 파괴하는 행동에 대해 책임을 묻고는 당에서 제명했다.

그러나 말리노프스키를 두고 첩자라고 비난한다면, 너무도 황당했기 때문에, 중앙 위원회로는 가네츠키를 위원장으로 하는 특수 위원회를 구성했고, 레닌, 지노비예프도 소속됐다. 레닌도 믿지 못했다. 위언회는 말리노프스키에게 첩자 행위를 추적하거나, 증언을 들었지만, 궤도로부터 멀리 떨어진 말리노프스키로는 프로닌을 배회하다가, 정체는 2월 혁명 때 드러나고는 말았다. 10월 혁명 뒤로 제 발로 러시아로 돌아와서는 소비에트 정권으로 인계됐고, 대법원 판결로부터 총살됐다. 러시아에서는 투쟁도 격화했다. 파업 운동도 커져갔다. 바쿠 성장은 폭발했다. 노동 계급은 바쿠 파업 참가자들을 지지하는 가운데 12천 명도 모인 푸질로프 공장 집회에서 경찰은 총 쏘았다. 경찰과 충돌도 심각한 양상을 띠었고, 두마 파견단은 궐기한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도했다. 대규모 파업은 일상이었다. 77, 페테르부르크에서 13만 명은 파업했다. 프롤레타리아트로는 전쟁을 준비했다. 파업은 가라앉지도 않았고, 더욱 커져만 갔다. 붉은 페테르부르크 거리로는 바리케이드를 설치했다.

 

81, 독일은 러시아에다 선전 포고를 했다. 83일에는 프랑스, 84일에는 벨기에는 선전 포고를 받았다. 같은 날 영국은 독일에다 선전 포고를 했고, 86일에는 오스트리아, 헝가리로는 러시아에다, 811일로는 프랑스, 영국은 오스트리아, 헝가리에다 선전 포고를 했다. 세계 대전은 시작됐다. 전쟁을 북돋던 러시아 혁명 운동을 일시적으로 정지하도록 만들었고, 전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고, 일련 위기마저 만들어 내고는 말았다. 혁명 투쟁 문제들도 더욱 새롭게 날카롭게 제기했고, 모든 노동 계급에 대한 지도가로는 프롤레타리아트 역할은 두드러졌고, 새로운 계층들도 투쟁으로 일어섰고, 프롤레타리아트 승리는 러시아로부터 생사 문제였다.

   

 

1914-1917. 전쟁기.

 

크라코프.

 

이미 오래 전부터 전쟁 기운은 감돌았다. 막상 전쟁을 선포하자 모두들 충격에 휩싸였다. 레닌은 코펜하겐 동지에게 편지를 쓰고는 스톡홀름, 연락망 구축하기와 여러 부탁을 했다. 산골 지역 주민들도 동원을 시작하자 완전 짓눌린 분위기였다. 심지어 누구와 전쟁을 하는지도, 무엇 때문에 전쟁을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어떠한 각성도 없는 상태로 도살장으로 끌려가듯 전쟁터로 갔다. 191487일에는 헌병대는 레닌을 체포하겠다고 위협까지 했다. 더군다나 전쟁 초기에는 지나가다 사람 하나 죽는 건 일도 아니었다. 치호미르노프는 올로네츠에서 유형을 마치고 돌아왔다. 유형지에서 이미 망가진 심신을 휴양하고, <진실>에도 실을 자료들을 기초로부터 러시아에서 벌어진 노동 출판물 운동 등에 대한 정리 작업을 하고는 레닌을 돕고자, <진실> 편집부로는 포로닌으로 보냈다.

 

레닌, 크룹스카야도 밤새 잠을 못 이뤘다. 너무나 걱정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차르 황실 관구 촌장은 레닌은 국제 사회주의 사무국 회원이므로, 데리고 있는 사람은 생명에도 책임을 져야만 한다고 한바탕 소동마저 일으켰다. 레닌은 비엔나 인터내셔널 사무국원이던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당 의원 빅토르 아들러에게 편지를 썼다. 레닌도 정치적이거나, 간첩 행위를 한 증거가 없음을 변호하고자, 여러 동지들도 전보를 부쳤다. 수 많은 지역 농민들은 수감됐다. 단지 여권이 만료됐거나, 세금을 내지 않았거나, 지역 정부와 분쟁을 벌였다는 이유만으로도 체포해갔다. 동지들은 탄원서를 써주기도 했다. 레닌은 형사범 감옥 안에서도 수감자들은 잠든 상태에서도 밤마다 당은 무엇을 해야 하고, 발발한 세계대전으로부터도 프롤레타리아트, 부르주아 세계적인 충돌로부터 전화하고자 어떤 행보를 취할 수 있는지 늘 생각했다. 크룹스카야로는 전쟁에 대한 소식을 입수하면 레닌에게도 전달했다. 레닌은 풀려난다 하더라도, 포로닌에 남아 있을 수는 없었다. 크룹스카야는 짐을 쌌고, 꼭 챙겨 가야만 하거나, 포로닌에 남겨 둬야만 하는 걸 골라냈다. 집 형편은 엉망이었다. 레닌은 체포됐지만, 크룹스카야 가족들은 전쟁에 동원된 줄로 알기도 했다. 레닌을 변호했던 비엔나, 빅토르 아들러 의원, 리보프 지아만드 의원은 압력을 행사해서 마침내 효력을 나타냈다. 레닌은 819일에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임시 거처로 정한 건물 창문으로부터 참혹한 광경을 보기도 했다. 크라스니크에서 사망자, 부상자를 실은 기차도 막 도착했다. 크라니스크 일대에서 전투에도 참가했던 사람들은 친처들도 들것 주변으로 몰려들어 두려운 눈으로 가득찬 채로 죽은 사람들, 죽어 가는 사람들 가운데 아는 사람들도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부상 정도는 비교적 경미한 사람들도 목이고, 팔이고, 붕대를 칭칭 감고는 천천히 역 밖으로 걸어 나왔다. 겨우 첫 전투에 불과했다.

 

크라코프에서는 중립국이던 스위스로 출국할 권리를 아주 빨리 취득할 수 있었다. 처리해야 할 일들도 좀 있었다. 여러 가족들 덕분에 1917년 가운데까지도 아껴뒀던 여비 돈은 조금 남아서 일시적인 생활비로 그래도 충당할 수는 있었다. 19177, 페테르부르크에서 집을 수색 당했을 때도, 경찰은 돈 영수증을 압수해갔고, 레닌은 간첩 활동을 한 대가로부터 독일 정부로부터 돈 받았다는 증거로 삼고자 가져가기도 했다. 비엔나에서는 필요한 증명서들을 입수하거나, 돈 문제를 처리하느라, 스위스로 입국할 수 있도록 보증해 달라는 전보를 스위스로 보내느라 하루 동안 머물기도 했다. 스위스 사회민주주의당 노당 당원, 그로일리히는 레닌에게 보증을 서주기도 했다. 비엔나에서 라쟈노프는 레닌을 데리고 체포를 피할 수 있도록 도와준 빅토르 아들러를 찾아갔다. 레닌은 차르 정부로부터 적이었다.

 

베른.

 

191495일에는 스위스에서 입국해서 베른으로 향했다. 제네바와 베른 가운데 어디에서 살지는 아직 완전하게 결정을 못 내린 상태였다. 레닌은 옛날에 살던 익숙한 곳이던 제네바로 마음은 끌려 있었다. 러시아 장서 등을 훌륭하게 갖췄던 독서회도 있었기 때문에 일하기도 수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다른 도시들에서도 망명가들도 몰려들어 너무나 많은 북새통을 이루고 있기도 했다. 따라서 베른에서 방을 구했다. 레닌은 곧바로 제네바와 연락을 취했고, 러시아와는 연락망을 구축하고자 사람들을 모았다. 러시아로 갈 수 있는 사람, 러시아 인쇄소, 전단 등을 알아보았다. 베른에 있던 볼셰비키, 여러 동지들과도 회동했다. 발발한 전쟁 성격을 두고 제국주의 약탈 전쟁으로 규정하고, 전쟁 채권 발행에도 찬성한 제2인터내셔널 지도부 행위를 프롤레타리아트 대위에 대한 배반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결의안을 앞서 채택했다. 결의안 내용으로는 러시아 모든 민족 노동 계급, 노동 대중 관점에서 볼 때도 폴란드, 우크라이나, 러시아에서 수 많은 민족들을 압박하는 차르 군주정, 군대는 패배하는 쪽이 그나마도 더 낫다고 했다. 결의안으로는 또한 사회주의 혁명, 내전, 모든 나라에서도 어김 없이 나타나는 애국주의 및 폐쇄주의에 대한 가차 없는 투쟁 등에 대한 구호도 내걸었고, 군주정에 맞서는 투쟁, 혁명 선전, 공화국 쟁취 투쟁, 대러시아인들로부터 억압받는 민족들에 대한 해방 투쟁, 지주 소유지 몰수, 하루 8시간 노동 쟁취 투쟁이라는 큰 러시아 행동 강령을 정했다.

 

베른 결의안에서 핵심으로는 자본주의 세계 전체에 대한 도전이었다. 베른 결의안은 은밀하게 보관하고자 작정하기 위함도 아니었다. 결의안은 먼저 볼셰비키 해외 지부로부터 각각 배포했다. 다음으로는 러시아 중앙 위원회 및 두마 파견단 토의로부터 사모일로프 테제들을 가져갔다. 러시아와 통신은 두절된 상태였다. 러시아 중앙 위원회, 볼셰비키 두마 파견단은 처음부터 올바른 노선을 취했었다. 전쟁에 대한 국제 대회 결의안으로는 선진 노동계급들과 당 조직들에게 종이 조각에 불과하지도 않았고, 행동 지침이기도 했다. 동원령을 발포했을 때는 전쟁 초창기에 중앙 위원회로는 <전쟁 타도. 전쟁에는 전쟁으로>라는 호소문을 살포했다. 페테르부르크 일부 기업에서도 예비군을 동원하던 날 파업도 일어났고, 시위를 조직하고자 했다. 그러나 전쟁은 검은 100인조 애국주의를 들끓게 하고는 군부 반동을 강화하도록 했고, 따라서 많은 일들도 실패했다. 그러나 두마 파견단은 전쟁에 대한 투쟁, 차르 권력에 대한 지속할 수 있는 투쟁이라는 노선을 굳건하게 지켜나갔다. 멘셰비키조차 감동해서는 사회민주주의 분파 전체는 공동 결의안을 채택할 수 있었고, 두마 연단에도 공표했다. 사회민주주의 파견단으로는 전쟁 채권 투표에도 참가하지 않았고, 항의 표시로 회의장을 박차고 나오기도 했다. 볼셰비키 조직으로는 신속하게 지하 깊숙하게 숨어들고는, 혁명 전쟁을 전개해나갔고, 심화하고자 전쟁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지시하는 전단을 발행하고자 했다. 지방에서도 반전 선전을 했다. 지역에서 온 소식들로부터 혁명 성향 노동 계급들도 같은 선전을 지지하기도 했다. 해외에 있어서 한참 뒤에서야 알았다. 그러나 두마 파견단, 러시아 볼셰비키 조직만큼 굳건함을 견지하지는 못했었다. 왜냐하면 문제를 분명하게 파악하지도 못했고, 어느 쪽에서 침략자냐는 식으로만 말들만 많이 해댔기 때문이었다.

 

파리로는 대다수 모임들도 우여곡절 끝에 전쟁, 자원병에 반대한다는 의사를 표명하기는 했었지만, 일부 동지들은 자원병으로도 프랑스군으로 들어갔다. 멘셰비키, 일부 볼셰비키, 사회주의혁명가당 당원 등도 80명 정도 자원병들은 러시아 공화주의를 대표해서 성명을 채택하고는 프랑스 언론에다 성명을 발표했다. 파리를 떠나는 자원병을 앞에 두고 플레하노프는 환송사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다수 파리 모임은 자원병들을 비난해댔다. 그러나 다른 모임에서는 문제를 제대로 명확하게 잘 인식하지도 못했었다. 레닌은 중차대한 시기로는 온갖 미묘한 사안들에서도 의미를 초반부터 곧바로 규정한다면 불합리할 수 있기 때문에, 볼셰비키로는 사태 의미를 보다 명확하게 파악하고, 동지로부터 의견을 교류하고, 끝까지 논의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했다. 한 사례로는 제네바 지부 입장을 피력한 카르핀스키 동지로부터 보낸 편지에도 답하면서 레닌에 대한 비판과 카르핀스키에 대한 레닌, 반비판와 같이 더욱 좋은 토론 거리일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레닌은 편지에서도 동지 토론으로부터 더 좋은 결론으로 도출하고자 했다. 그러나 때는 때이니만큼 볼셰비키라는 협소한 모임 안에서도 동지 토론이라는 틀로만 머물거나, 오래도록 묶여 있을 수는 없었다.

 

10월 초에는 파리로 돌아온 플레하노프로는 이미 제네바에서 연설하고자 강연하러 로잔으로 가고자 했다. 레닌은 마음 상했다. 플레하노프는 방어론만 내세웠기 때문이었다. 레닌은 플레하노프는 과거 군 생활을 겪어서 그렇다고 말하기도 했다. 베른에서는 두 주 정도, 늦게 도착했던 지노비예프 부부, 이네사 아르망도 살고 있었다. <레닌 연구소 회보>에서는 회고록 가운데로는 강연회에 대한 설명도 있었다. 여러 곳에서 강연장으로 모여들었고, 베른에서는 지노비예프, 이네사, 슈클로프스키 등, 클라렌스 부근, 보쥐에서는 로즈미로비치, 크릴렌코, 부하린 및 로잔 동지들도 갔다. 레닌은 플레하노프와 멘셰비키 때문에 많은 수 볼셰비키를 들여보내 주지는 않을까 매우 불안했다. 슈투트가르트, 코펜하겐, 바젤 등지에서도 국제 대회로는 임박한 전쟁에 대한 사회주의 입장을 취하고자, 이미 결정한 바 있었다. 사회민주주의들로는 자국 폐쇄주의 위협으로 맞서 싸울 때 의무를 다하고자 했다. 그리고 시작된 전쟁을 프롤레타리아트, 지배 계급 사이에서 결정적인 격돌로 전환하도록 해야만 했다. 레닌에게는 10분이라는 시간만 주어졌고, 요점만 말해냈다. 플레하노프는 레닌을 반박했다. 압도적인 다수였던 멘셰비키는 플레하노프에게만 박수를 쳐댔다. 사흘 뒤로는 1014, 플레하노프로는 강연했던 바로 같은 장소에서 레닌은 강연했다. 강당은 만원을 이루었고, 강연은 매우 성공했다. 레닌은 전투 분위기였다. 레닌은 전쟁을 두고 제국주의 전쟁으로 보는 견해를 충분하게 털어놨다. 레닌으로는 이미 중앙 위원회로부터 만든 반전 전단도 나왔고, 카프카스 조직, 몇몇 다른 조직들도 같은 전단을 유포했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레닌은 강연에서 유럽에서는 마르토프로부터 기고하고 있는 <목소리>는 매우 훌륭한 사회주의 신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마르토프와 의견으로 심각하게 대립할수록, 사회민주주의는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고 더욱 단호하게 말하고자 했다. 마르토프는 자국 정부를 비판하고, 자국 부르주아지를 폭로하고, 자국 장관들을 비난했기 때문이었다. 레닌은 마르토프도 볼셰비키 쪽으로 가담하기를 좋겠다고 여러 번 말하곤 했었다. 아무튼 레닌 강연은 매우 성공했다. 제네바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와 전쟁>이라는 제목으로 같은 강연을 했다.

 

벨기에로는 대의원으로부터 두마 안에서 사회민주주의당 두 분파, 모두에게 전보를 보냈다. 벨기에로는 러시아 정부로는 협상국 쪽에서 독일과 결전을 수행하도록 사회민주주의 의원단도 협조해주기를 호소했다. 초기 전쟁 채권에도 투표하기를 거부했던 멘셰비키 의원들도 대다수 사회주의 정당들은 어떠한 입장을 취했는지 알자 심하게 동요했다. 따라서 벨기에에서 보낸 답신으로부터 이미 처음과는 완전히 다른 성격이었으므로, 전쟁에도 반대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볼셰비키 의원단으로는 전쟁을 지지하고, 차르 정부에 맞선 투쟁을 중단에 대해 일축하는 답신을 보냈다. 그리고 볼셰비키 의원단은 취했던 주요한 노선을 옳았다. 따라서 레닌은 슐라프니코프는 스톡홀름에도 남아서 두마 의원단 및 러시아와 연락을 강화할 수 있도록 해야만 한다고 내세웠다. 레닌은 제네바에서 전단에 대한 내용을 두고 여러 테제를 채택했고, 선언문으로 개정하고자, 동지들과 여러 가지로 의논했다. 그리고 <사회민주주의> 신문을 중앙 기관지로 발행하고자 결정하기로 했다는 소식도 접했다. 10월 말, 레닌은 다시 강연하고자, 몬트레, 취리히로 갔다. 취리히에서는 트로츠키도 연설했다. 누가 어떤 노선을 취하는지 분명하게 밝히고자, 모든 문제를 일부러 극히 날카롭게 제기했다. 그리고 방어론에 대한 투쟁도 전면적으로 진행했다. 진행 중인 투쟁은 당 안에서 벌어지는 투쟁도 아니었고, 러시아 문제로만 국한되지도 아니했고, 국제 성격에서 투쟁이었다.

 

레닌은 기회주의에 잠식된 제2인터내셔널은 죽었다.”고 내세웠다. 따라서 기회주의를 쓸어버리고 새로운 세 번째 인터내셔널을 위해 세력을 결집하고자 했다. 그러나 러시아 사회민주주의들을 제외하고는 전쟁 채권에 투표하지 않는 나라들로는 세르비아 사회민주주의들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세르비아 의회에서도 단 두 명에만 불과했다. 독일에서 전쟁은 시작하자 모든 사람들은 전쟁 채권에다 찬성표를 던졌지만, 910일에는 칼 리프크네히트, 프란츠 메링, 로자 룩셈부르크, 클라라 제트킨 등은 독일사회민주주의당 다수로부터 취한 입장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성명서를 작성했다. 성명서를 10월 말에서야 스위스 신문들에다 발표할 수 있었고, 독일에서는 정작 성명서는 신문에도 실리지를 못했다. 독일 신문들 가운데 전쟁을 시작한 순간부터 매우 좌익 입장을 취했던 신문으로는 <브레멘 시민 신문>이었다. 신문은 823, 프롤레타리아 인터내셔널은 붕괴했다고 발표했다. 프랑스에서는 게드, 베이앙을 수반으로 하는 사회주의당 폐쇄주의 손을 들어줬다. 당 바닥에서부터 전쟁을 반대하는 분위기는 매우 확산해갔다.

 

벨기에 당 성격으로는 반데르벨데 처신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영국에서는 기회주의 독립노동당 맥도날드, 케어 하디로부터 하인드만 영국사회주의당 전체로부터 폐쇄주의로도 반격을 가했다. 중립국들로는 반전 분위기는 퍼졌고, 평화주의 성격은 주조를 이뤘다. <전진>을 필두로 이탈리아 사회주의당은 다른 당들보다 혁명을 추구했다. 당은 폐쇄주의에도 맞서 투쟁했었고, 전쟁 호소로부터 숨어 있던 탐욕스러운 이면도 폭로했다. 선진 노동 계급들도 지지했따. 927일에는 루가노에서 이탈리아, 스위스 사회주의 협의회를 열었다. 전쟁에 대한 테제들을 협의회에다 보냈다. 협의회로는 전쟁 성격을 제국주의 전쟁으로 규정하고, 국제 프롤레타리아트 평화를 위해 투쟁하기를 요구했다.

 

레닌은 카우츠키는 누구보다도 해롭다고 더 말했다. 왜냐하면 인터내셔널을 그저 단순하게 재건하자는 구호만으로는 옳지 않고, 평화라는 구호도 옳지 않고, 국가 간 전쟁을 내전으로 전화하자는 구호여야만 했다. 전쟁을 방해하거나, 그러한 분위기에서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행동이 아닌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하도록 할 수 있는 방향으로부터 대규모 선전도 말했다. 러시아에서는 불행한 벨기에, 우크라이나로부터 하는 말들 속에서, 또는 독일인들에 대한 카이사르주의에 대한 인민 증오 속에서부터 폐쇄주의는 숨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절대적인 의무로는 같은 궤변들에도 맞서 투쟁한다. 보다 정확하고 분명한 노선에 따라 투쟁을 이뤄지고자, 러시아에서는 노동 대중, 노동 계급이라는 이해 관계라는 관점으로도, 러시아인들은 죄를 덜 지을 수 있도록, 전쟁에서 차르 전제 정치를 타도해야만 하고, 차르 전제 정치로는 카이사르주의보다 훨씬 더 나쁘다고 말했다. 따라서 전쟁을 방해할 게 아니라, 폐쇄주의에도 맞서 투쟁해야만 하고, 내전을 목적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 국제적인 단결을 선전하고, 선동하는 데 매진하고자 했다. 단지 장교들을 사살하는 개인적인 행동을 촉구하거나, 카이사르주의로부터 협력하고 싶지 않다는 등 주장을 허용한다면 잘못됐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행동은 무정부주의로 기울어졌고, 카이사르주의와 협력 거부만 내세운다면 기회주의로 기울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스로, 군대로도 대규모로 아니면, 최소한 집단 진격을 준비해야만 하고, 자국 군대로만 국한해서는 안 된다. 모든 선전, 선동 활동으로도 같은 방향에서 수행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국가 간 전쟁을 내전으로도 전환할 수 있다는 정신으로 작업을 진행하고, 긴 시간도 들어도, 완강하고, 체계적인 작업으로부터, 개시할 수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레닌은 전환 시점을 무르익도록 만들고자 했다.

 

그러므로 레닌은 평화라는 구호는 현 시점에서도 옳지도 못하고, 성지자들이나 내거는 평범한 구호이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 구호로는 내전이어만 했다. 레닌은 바젤 결의안도 같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레닌에게 내전은 함부로 약속할 수도, 지시할 수는 없다고 했다. 매우 장기적으로 활동을 수행하기를 의무라고 받아들였다. 전쟁이 발발한 지 두 달 반만에, 레닌은 이미 분명하고, 명확한 투쟁 노선을 수립해냈다. 레닌은 제국주의 전쟁으로부터 제기할 수 있는 새로운 과제들에 대해서도 그토록 신속하고, 굳건하게 올바른 노선을 취할 수 있었다. 당 건설, 노동 계급들을 조직하고자, 이전 몇 년 동안 어렵게 활동해 온 결과이기도 했다. 국제 투쟁이라는 한가운데로 있었던 경험마저 없었더라면, 레닌은 굳건하게 러시아를 프롤레타리아트 10월로 승리를 이끄지는 못했을 수도 있다.

 

<사회민주주의>, 33호는 1914, 111일에 나왔다. 처음에는 겨우 500부만 인쇄했다가, 나중에는 1,000부를 추가 발행했다. 1114일에 레닌은 중앙 기관지로는 국경에서 멀지 않은 지점 가운데 한 곳에 도착했다. 1113일에는 나인, 그라버로부터 뇌샤텔 노동 중심지였던 쇼드퐁에서 프랑스어로 간행하는 스위스 신문 <파수꾼>에 대한 선언문을 요악한 내용을 게재할 수 있었다. 선언문 번역본을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 신문들에 보냈다. 레닌은 제2인터새녀설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 대의에 대한 배반에 맞서 투쟁을 전개했고, 베른으로 도착하자마자 그라나트 백과사전에 실릴, <칼 마르크스> 항목 내용을 작성하는 데 착수했따. 레닌은 마르크스 학설을 논하면서부터, 마르크스 세계관 개요로는 철학 유물론, 변증법으로 글을 시작했고, 마르크스 경제 학설을 서술한 뒤로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트 계급 투쟁 전술이라는 문제로 어떻게 접근했는지를 조명했다. 레닌은 마르크스 학설을 설명하면서, 철학 유물론, 변증법에 대한 장을 저술하면서, 레닌은 헤겔, 다른 철학가들을 열심히 다시 읽었다. 마르크스 관련 글을 끝낸 뒤에도 같은 공부를 멈추지는 않았다. 철학을 공부한 목적을 두고 철학을 구체적인 행동 지침으로까지 전환하도록 할 수 있는 방법도 얻어냈다. 1921, 트로츠키, 부하린 등과 노동 조합 문제에 대한 논쟁을 붙었을 때, 모든 현상에 대해 변증법으로 접근해야만 한다고 짤막하게 언급하기도 했고, 베른으로 도착하면서부터 마하주의들로부터 싸우던 1909-1909년 철학 연구 연속선으로도, 행했던 철학 연습은 큰 결실과 여러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다. 따라서 레닌에게 투쟁, 학습, 학술 활동은 언제나 튼튼한 매듭이었다. 얼핏 보면 평행선을 달리하듯이 보일 수 있지만, 관계로는 언제나 무엇보다 직접적이고, 더욱 심도 깊었다. 그리고 1915년 초에는 해외 볼셰비키 모임으로부터 단결을 위한 활동을 꾸준하게 강화해갔다.

 

해외조직위원회라 불리우던 볼셰비키 모임에서 중앙은 전쟁 전까지 파리에 있었다. 따라서 중앙을 중립국이던 스위스 베른으로 옮겨야만 했다. 중앙 기관지 편집국 역시 베른에 있었다. 전쟁에 대한 평가, 당 앞에 마주한 새로운 과제들, 과제들에 대한 해결 방법 등에 대해서도 최종적인 합의를 필요로 했고, 모임 활동을 구체적으로도 정할 필요는 있었다. 크릴렌코, 부하린, 로즈미로비치와 같은 보쥐파는 해외 기관지, <>을 발행하기로 결정하고는 성급하게 일에 착수하기만 했고, 중앙 기관지와 협의하지도 않았다. 발행하는 일도 별로 합리적이지는 않았고, 중앙 기관지 발간에 필요한 돈도 없는 상태였다. 또한 견해도 많이 달랐다. 2월 말, 베른에서는 해외 모임 협의회를 소집했다. 파리 방어론 분위기를 상세하게 말해줬다. 뜻을 같이할 수 있는 새로운 동지마저 절실하게 필요했다. 주로 일본, 미국 등지에서 활동한 키예프 파타코프, 옐레나 표도로브, 로즈미로비치라는 보슈 남매 동지도 있던 일본파를 좋아했다. 덕분에 해외 모임에서 힘을 강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동지마저 절박하게 필요한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협의회로는 전쟁에 대한 분명한 결의안을 채택했고, 유럽합중국 구호에 대해 토론했고, 해외 모임들로부터 활동 성격을 정했고, 보쥐 신문을 발간하지 않기로 결정했따. 또한 베른 사람들 가운데로는 슈클로프스키, 카스파로프, 이네사 아르망, 릴리나, 크룹스카야 등 새로운 해외조직위원회 위원으로 선출했다. 카스파로프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 1913년 베를린에서 살았다. 레닌은 바쿠에서 온 예누키제, 샤우만 등으로부터 전재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레닌은 민족 문제에도 특히 몰두했다. 같은 문제에 관심을 갖고, 올바르게 접근할 수 있는 사람들과 좀 더 긴밀한 관계를 맺기를 원했다. 1913년 여름, 카스파로프는 <계몽>에다 실을 민족 문제에 대한 글을 썼다. 레닌은 민족 문제에 대한 편지를 썼다. 카스파로프에게 민족 문제에 대한 자료를 모으고, 일들을 맡겼다. 1914, 7, 페테르부르크에서는 노동 운동도 발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다. 어려운 과제였고, 1915, 214일에 열린 협상국, 영국, 벨기에, 프랑스, 러시아 사회주의 정당들도 런던 협의회를 보면 한 눈에 알 수 있다. 협의회로는 영국독립노동당와 여러 국가에서 사회주의 당원들도 들어왔다. 레닌은 중앙 위원회 선언문 초안을 작성했고, 반데르벨데, 게드, 상바 등에게 즉각 벨기에, 프랑스 부르주아 내각에서 사퇴하고, 모든 사회주의 정당은 차르 전제 정치에 맞선 러시아 노동 투쟁을 지지하기를 촉구하는 내용을 제시했다. 선언문은 독일,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로부터 전쟁 채권을 지지하고, 융커, 성직자, 부르주아 등과 시민 평화를 체결함으로부터, 사회주의와 인터내셔널에 대해 무서운 범죄를 저질렀고, 벨기에, 프랑스 사회주의들도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 러시아 노동계급들은 독일에서 칼 리프크네히트, 세르비아, 이탈리아 사회주의들, 독립노동당 영국 동지들, 영국사회주의당 일부 당원들, 그리고 러시아사회민주주의노동당에서 체포당한 동지들 같이 행동하는 사회주의들엑게 동지로 손을 내밀었다. 사회주의 길로 나서기를 촉구하고, 프롤레타리아 대의를 파괴하는 폐쇄주의를 타도하고자 했다. 그리고 국제 사회주의를 환영한다고 선언문에다 적었다. 같은 시기로는 국제여성협의회도 준비했다. 협의회는 단지 평화주의 성격을 띠지는 말고, 명백하게 혁명 입장을 취하도록 했다. 이네사 아르망은 클라라 제트킨, 발라바노바, 콜론타이, 영국 여성 등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국제 연락에서 첫 가닥을 이어 갔다. 이네사 아르망, 스탈은 프랑스 동지들과 편지를 교환했었고, 발라바노바는 이탈리아에서 활동했고, <전진>으로 참가했다. 이탈리아사회주의당은 매우 혁명 정서를 지니고 있기도 했다. 독일에서는 방어론에도 반대하는 분위기는 퍼져갔다. 122, 칼 리프크네히트로는 전쟁 채권에 반대하는 표를 던졌다. 클라라 제트킨은 국제여성협의회를 소집했다. 제트킨은 국제여성사회주의사무국 서기였다. 칼 리프크네히트, 로자 룩셈부르크, 프란츠 메링과 함께 클라라 제트킨은 독일사회민주주의당 다수파 폐쇄주의에도 맞서 투쟁했다. 콜란타이로는 멘셰비키와 결별했다. 그리고 콜란타이와 편지로 연락해서, 볼셰비키 입장을 분명하게 밝혔다. 주로 평화 구호를 내걸었던 콜론타이로는 협의회로 오지는 못했다. 베른 국제 협의회로는 326-328일까지 개최했다. 최대 규모로 잘 조직한 대표단은 클라라 제트킨을 수반으로 한 독일 대표단이었다. 러시아 중앙위원회 대표단으로는 아르망, 릴리나, 라비치, 크룹스카야, 로즈미로비치였다. 폴란드 로즐라모프파 대표로는 돔스카야라는 카멘스카야도 있었다. 주로 중앙 위원회 대표단과 함께 움직였다. 조직 위원회를 대표하는 러시아인은 두 명 더 있었다. 발라바노바는 이탈리아 대표단이었고, 프랑스 여성으로는 루이즈 소모노로는 발라바노바 영향을 많이 받았다. 네덜란드 대표들은 완전 평화주의 분위기였다. 따라서 좌익에 속하기만 했던 롤란트 홀스트는 올 수도 없었고, 폐쇄주의 트뢸스트라파 대의원들도 왔다. 영국 대표들은 기회주의 독립노동당 소속이었다. 스위스 대표들은 역시나 평화주의로만 경도됐다. 그리고 같은 경도는 지배적이었다. 독일 대표들 대다수로는 칼 리프크네히트, 로자 룩셈부르크 모임에도 속했다. 이마 자국 폐쇄주의 추종자들과 갈라서서, 자국 정부로부터 맞서 싸웠다. 로자 룩셈부르크로는 이미 자국에서는 체포된 상태였다. 국제 무대에서 실제로는 전선 승전국 나라 대표단이었으므로, 최대한 양보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협의회에 대한 실패 책임을 피하고자, 클라라 제트킨은 평화주의들로부터 양보했고, 결의안에서 혁명 내용을 희석하고자 했다. 레닌은 콜론타이에게도 편지를 썼던 관점으로부터, 피상적인 단결이 아니라, 폐쇄주의로 맞선 혁명 투쟁 단결, 지배 계급에도 맞서는 프롤레타리아트 혁명 투쟁을 위한 단결 문제였다. 그러나 정작 독일, 영국, 네덜란드 대표들로 구성한 위원회에서 작성한 결의안에는 폐쇄주의를 비난하는 내용은 없었다. 따라서 따로 특수한 결의안을 들고 나갔고, 이네사 아르망, 폴란드 대표 카멘스카야도 지지했다.


특수 결의안에서는 분열 정책을 비난했다. 그리고 입장은 옳았다. 영국, 네덜란드와 같은 착한 평화주의로는 국제 행동을 한 걸음도 앞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전쟁 조기 종결에 대한 제 몫을 한 건, 정작 혁명 투쟁, 폐쇄주의 결별이었기 때문이었다. 레닌은 국제 전선에서도 투쟁 세력을 모으는 데 모든 열정을 바쳤다. 레닌은 콜란타이뿐만 아니라, 제트킨에게도 평화주의로 경도해서도 안 되고, 모든 문제들을 날카롭게 만들어야만 한다고 열렬하게 부탁했고, 또 설득하고자 했다. 417, 베른에서 또 다른 국제 협의회를 열였다. 사회주의청년협의회였다. 스위스에서는 제국주의 전쟁에도 참전하고자 전선에 나가기를 원하지 않던 많은 교전국 청년들도 많았다. 중립국이던 스위스로 망명했다. 청년들은 혁명 정서를 갖고 있었다. 여성협의회에 이어서 사회주의청년협의회를 열었다. 이네사, 사파로프로는 협의회에서 당 중앙 위원회를 대표해서 연설했다. 크룹스카야 어머니도 돌아가셔서, 가정생활도 힘들어지자, 집주인은 다른 방을 구해보라고 했고, 다른 방으로 이사하기도 했다. 210, 5명 두마 의원들에 대한 재판도 열었다. 페트로프스키, 무라노프, 바다예프, 사모일로프, 샤고프 등 볼셰비키 의원 전원은 유형을 선고 받았고, 카메네프에게도 유형을 선고했다. 레닌은 1915, 329일자로, <러시아사회민주주의노동당 의원단에 대한 재판은 무엇을 보여주는가>를 기고했다. 그리고 무라노프 활동으로부터 러시아에서 의식 있는 노동 계급들로는 4/5는 단결을 이룰 수 있었다. <진실>을 구매했던 노동 계급들 수로는 약 4만 명이었다. 신문을 구독하는 사람들도 훨씬 더 많았다. 프롤레타리아트 계층들도, 입헌민주당 당원들, 트루도비키, 플레하노프와 <우리 여명> 등에서도 보인 사회 폐쇄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 이끌어갔다. 그리고 사회 폐쇄주의에도 맞서 단결을 지켜내야만 했고, 단결을 따라 노동 운동을 단지 민족주의, 자유주의를 따르는 유럽 방식이 아니라, 사회 혁명이라는 방향으로까지 발전하도록 해야만 했다. 레닌은 얼마나 옳았는지도 증명했다. 레닌은 국제주의 사상을 또 선전했고, 온갖 형태로 사회 폐쇄주의를 폭로하는 일에서 잠시도 손을 떼지도 않았다. 크룹스카야는 갑상샌 질환은 재발했을 때, 베른을 떠나기 전에는 보슈, 퍄따코프 동지들도 왔다. 주차대한 문제들을 상세하게 논할 수 있는 비합법적인 잡지를 해외에서도 간행할 계획을 세워 뒀다. <공산주의>라는 잡지로는 중앙 기관지 편집국에서 발간해야만 했고, 일본파는 일에서도 합류도록 합의를 봤다. 레닌은 같은 해 여름에, <공산주의>에도 실을 <2인터내셔널 붕괴>라는 장문 기고문을 썼고, 같은 기간, 국제주의협의회 준비와 관련해서, 지노비예프와 공동으로, <사회주의와 전쟁>이라는 소책자도 쓸 수 있었다. 레닌은 스위스를 좋아했다.

 

독일에서는 투쟁은 격화됐다. 4, 로자 룩셈부르크, 프란츠 메링은 <인터내셔널>을 창간했고, 발간 즉시 폐간당했다. 유니우스, <독일 사회민주주의 위기>라는 소책자도 나왔다. 칼 리프크네히트로는 <주적은 자기 나라에 있다>라는 독일 좌파 사회민주주의 호소문도 나왔다. 6월 초, 칼 리프크네히트, 둥커는 전쟁에 대한 사회민주주의당 다수 태도에도 항의하는 <사회민주주의당 중앙위원회와 제국의회 파견단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작성했다. 수천 명 당 실무가들도 <공개서한>에다 서명했다. 독일사회민주주의당 중앙 위원회로는 좌파 사회민주주의들에 대한 영향력을 증가하는 걸 보고는 반대 행동을 결정했다. 카우츠키, 하제, 베른슈타인으로부터 서명한 선언문을 발표해서는 합병을 반대하고, 당 단결을 호소했고, 다른 쪽으로는 의회 파견단 일므으로 좌파 반대에 대해 반대하고 나섰다. 스위스로는 로베르트 그림은 좌파 국제 협의회를 준비하고자, 예비 회의를 711, 베른에서 소집했다. 회의에는 그림, 지노비예프, 악셀로트, 바르스키, 발렌츠키, 발라바노바, 모르가리, 7명은 참석했다. 예비 회의로는 지노비예프를 제외하고는 참된 좌파는 없었고, 참석가들 가운데, 좌파 협의회 소집을 진지하게 원하는 사람도 정작 아무도 없었다.

 

레닌은 참된 좌파 입지를 확보하고, 좌파들 상호 간 최대 단결을 확보할 수 있도록 도왔다. 8월 중순에는 볼셰비키로는 이미 선언문, 결의안, 성명서 초안을 작성했고, 매우 좌파 동지들에게 검토하도록 했다. 10얼에는 레닌, 지노비예프 소책자, <사회주의와 전쟁>은 독일어로 번역했다. 협의회로는 95-8일까지 짐머발트에서 개최했다. 11개국 대표들, 모두 38명도 참석했다. 짐머발트 좌파에 속한 사람들은 고작 9명뿐이었다. 레닌, 지노비예프, 베르진, 회글룬트, 네르만, 라데크, 보르카르트, 플라텐, 협의회 끝난 뒤로 뒤늦게 합류한 롤란트 홀스트였다. 러시아 대표 협의회로 참석한 다른 사람들로는, 트로츠키, 악셀로트, 마르토프, 나탄손, 빅토르 미하일로비치 체르노프, 분트파 한 명이었다. 트로츠키는 짐머발트 좌파에는 가담하지도 않았다. 협의회 다수파로는 좌파 초안을 거부했더고, 훨신 모호하고, 덜 전투적인 선언문을 채택했다. 따라서 좌파는 공동 선언문에다 서명했다. <첫 걸음>이라는 레닌 기고문에서도 짐머발트 협의회에 대해 평가하기도 했다. 협의회에서는 소책자, <사회주의와 전쟁> 독일어판을 배포하기도 했다. 기회주의에도 맞서 일관되지 못한 입장을 비판하고, 독일, 프랑스, 스웨덴, 노르웨이, 스위스 등 소수파와 함께하는 일보 전진을 거부한다면, 분파주의라고도 말했다. 스위스에서도 속물주의는 만연했다. 이네사 아르망은 레닌에게 활동에 대한 편지를 자세하게 썼다. 그리고 트로츠키, 메렝은 네덜란드 잡지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고 알렸다. 행동위원회 회합에서는 호소문을 논의하기도 했다. 트로츠키 초안은 기각했고, 메렝 초안으로 대체했다. 여러 논쟁도 벌였다고 했다. 논쟁에서 이네사 아르망은 게드파를 옹호하기도 했었다. 이네사 아르망은 청년 활동, 전단 발행 계획, 기계공·인부들·기타 노동조합주의 접선 등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써주었다. 이네사 아르망은 파리 모임으로도 많은 활동을 했다. 처음부터 전선에도 자원했었고, 볼셰비키 견해에도 공감했다. 또한 프랑스 병사들 속에서 선전을 개시한 사포슈코프와도 만났다. 베른 활동은 주로 이론을 대했다. 1914, 111, 중앙 기관지에서도 중앙 위원회 선언으로는 폐쇄주의에 대한, 제국주의 경제적인 본질도 보다 명확해졌다. 레닌은 자본주의 아래에서 유럽합중국은 식민지 분배 협정이나 마찬가지이고, 세계합중국도, 민족 연합, 민족 자유에 대한 국가적 형태이고, 사회주의와 연관할 수는 있으나, 독자적인 구호로는 올바르지 못하다고 봤다. 1915년 말, 1916, 레닌은 사회주의 혁명 시기, 방법 및 발전에 대한 좀 더 분명한 생각을 갖고자, <자본주의 최고 단계로 제국주의>라는 소책자를 쓰고자, 자료를 모으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다시 읽고 또 읽으면서, 같은 문제를 연구했다.

취리히.

 

1916, 1, 레닌은 돛 출판사에도 낼 제국주의에 대한 소책자를 집필했다. 레닌은 취리히 도서관에서 일하러 갔다. 크룹스카야는 존 리드, <혁명가 딸>을 읽기도 했다. 존 리드로는 매춘부를 직업이나, 사랑이라는 문제 관점이 아니라, 다른 이해 관계라는 관점에서 그리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기도 했다. 밑바닥 세계를 그릴 때, 생활 상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레닌은 취리히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다. 고리키, <밑바닥에서>를 상영한 예술 극장에서 보기도 했다. 일본에게도 자금 문제를 솔직하게 제기하기도 했었지만, 가진 게 없다고 말하기도 했고, 스톡홀름에서는 생활비마저 훨씬 비쌌다고 한다. 레닌은 또 도서관에서 일하고, 많은 시간들을 보냈다. 취리히 운동으로는 당 서기관으로는, 프리츠 플라텐으로부터 지도했고, 짐머발트 좌파로 가담했다. 취리히 신문, <인민 권리>도 있었다. 편집장이던 노브스도 짐버발트 좌파로 가담했다. 빌리 뮌젠베르그를 수반으로 한 청년 이주 노동가들도 취리히에서도 많았다. 매우 좌파를 지지했다. 그러나 스위스에는 강력한 노동 계급은 없었다. 휴양을 최우선으로 삼았기 때문에, 자본주의 국가들로부터 부스러기나 먹고 사는 작은 나라였다. 민주주의, 민족 문제 해결만으로는 스위스는 사회주의 혁명 전원일수는 없었다. 레닌은 스위스 노동 계급들 앞에서도 강연하기도 했고, 플라텐, 노브스, 뮌젠베르그 등과 긴밀한 관계도 유지할 수 있었다. 취리히 모임 폴란드 동지들과도 함께 스위스 조직, 공동 회의를 구상하기도 했다. 취리히에서 레닌은 주로 제국주의에 대한 소책자 집필 작업에 매달렸다. 작업에 몰두해서 많은 발췌를 하기도 했다. 주된 관심으로는 식민지였다. 자료들을 엄청 모아뒀다. 아르피카 식민지에 대한 영문 자료를 번역 맡기기도 했다. 소책자는 7월 탈고할 수 있었다. 1916, 424-30일까지 제2차 짐버발트 협의회라는 킨탈 협의회를 개최했다. 1차 협의회 이래로 8개월 시간도 흘러갔고, 8개월 기간 동안, 제국주의 전쟁도 더욱 확산해갔다. 짐머발트 좌파도 늘어갔다. 짐머발트 선언문에서는 지속적인 평화 투쟁이란, 자본주의 기초가 아니라, 사회주의 실현 투쟁 속에서만 발휘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자본가뿐만 아니라, 사회 폐쇄주의 추종가들, 카우츠키파 역시나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말해야만 했다.

 

추디비제에도 잠시 머물기도 했다. 이론 노선을 확립하고자, 로자 룩셈부르크, 라데크, 네덜란드 사람들, 부하린, 파탸코프, 그리고 콜론타이와도 견해는 달랐다. 매우 큰 견해로는 키예프스키라는 퍄타코프와 달랐다. 8, <프로레타리아트와 민족자결권>이라는 기고문을 레닌은 읽었고, 답장으로는 <마르크스주의 희화화와 제국주의적 경제주의에 대하여>라는 소책자 한 권이었다. 1894-1901년까지 옛 경제주의들로는 자본주의는 승리했고, 정치 문제를 도외시했다. 따라서 러시아에서 정치 투쟁을 부정했기 때문이었다. 제국주의 경제주의들도, 제국주의는 승리했으므로, 따라서 정치 민주주의 문제를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다고 적었다.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에서도 민주주의 역할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 민주주의와 완전한 민주주의를 실현해야만 한다고 봤다. 그리고 러시아 경험에서도 레닌은 입증했다. 레닌은 1915-1916년 사이에서 이미 민주주의라는 문제를 깊이 사고했고,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관점으로도, 191510, 파라벨룸이라는 라데크, <베른 파수꾼>11월 반박하기도 했다. 반자본주의 혁명 투쟁에서 민주주의 요구에 대한 혁명 강령, 전술과 결합하고자, 공화국, 민병대, 인민 관리 선출, 여성 평등, 민족 자결 등등도 그러했다. 그러나 자본주의로는 예외적이고, 불완전하고, 왜곡된 형태로만 실현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파라벨룸을 반박하는 기고문은 1927, <마르크스주의 희화화>1924년에 나왔다. 레닌, 트로츠키와 늘 나 있던 깊었던 골은 바로 트로츠키로는 민주주의라는 참된 정신, 사회주의 건설에서 민주주의 원리, 대중 생활 양식 전체를 재조직하는 과정 등을 이해하지는 못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1916년에는 레닌, 부하린 사이에서도 생긴 견해는 싹으로 자라 달라졌다. 레닌은 <청년 인터내셔널>에서 부하린, 8월 말, <청년 인터내셔널> 6호에서 게재한, <주목하라>라는 짧은 글에서 국가 역할에 대한 과소평가, 프롤레타리아트 역할에 대한 과소평가를 드러내고는 말았다. 레닌은 1916년 하반기,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특히 관심으로 뒀다. 레닌은 국가에 대한 마르크스, 엥겔스 글들을 열심히 다시 읽고, 발췌했다. 레닌은 스위스 좌파였던 빈터투르에서 온 아르투르 슈미트에게도, 1130일 전쟁에 대한 태도 문제를 놓고, <레닌 저작집> 17권에 발표한 191612월 편지에서도, 군국주의에 대한 완전한 폐지는 자본주의 폐지로부터 이뤄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레닌은 모든 사태에 대해 변증법으로 접근하는 문제에도 특히 골몰했다. 레닌은 엥겔스로부터 에르푸르트 강령 초안 비판에다 쓴 문구를 곧바로 거머쥐웠다. 레닌은 유니우스 소책자에 대한 서평으로도, 마르크스 변증법은 각각 특수한 역사적인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요구한다고 썼다. 1916년 가을, 1917년 초에는 레닌은 이론 작업에 골몰했다. 레닌으로는 제2인터내셔널, 국제사회주의사무국, 카우츠키 일파 등과 결별할 필요도 있었고, 짐머발트 좌파 세력으로는 제3인터내셔널을 세워야만 한다고 내세웠다. 그리고 러시아로는 지헤이제, 스코벨레프, 조직위원회 지지가들, 트로츠키와도 즉각 결별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사회주의를 위한 혁명 투쟁을 수행하고, 기회주의들을 참으로 가차 없이 폭로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기회주의들은 말과 행동마저 다른 사람들이었다. 사실상 부르주아지에게 봉사하고는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대의를 저버리고, 배신하고는 말았다. 레닌은 그토록 비타협적인 태도를 보였던 기간으로는, 1916년 마지막 몇 개월, 1917년 초 몇 개월 간이었고, 정말 유일무이한 경우였기 때문이었다. 혁명은 서서히 닥쳐오고 있다고 레닌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1917-1919.


1917122, 망명지였던 취리히 인민 회관에서 열린 청년 회합을 연설했다. 레닌은 1905년 혁명에 대해 말했다. 취리히에서는 다른 나라들, 곧 독일, 이탈리아 등지에서도 제국주의 저쟁에도 참가하기를 거부하는 혁명 정서 청년들도 많았다. 레닌은 청년들에게 노동 계급들에 대한 혁명 투쟁 경험을 할 수 있다면 풍부하게 조명하고, 모스크바 봉기 중요성을 보여 주고자 했다. 레닌은 다가올 혁명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고, 사회주의 혁명이라고 봤다.

 

2월 혁명.

 

브론스키로부터 혁명 소식을 접했다. 긴급 속보로 타전했다. 전보를 수 차레나 읽었다. 러시아에서도 혁명은 일어나고 말았다. 레닌은 집중해서 생각했다. 나머지 시간과 밤도 후딱 지나갔다. 파리 코뮌 기념일이던 318, 레닌은 스위스 대규모 노동 중심지인 쇼드퐁으로 다녀왔다. 파리 코뮌에 대해 많이 생각했고, 또 러시아 혁명 운동에도 적용하고자 노력했다. 318, 페테르부르크에서 <진실>을 발행했다. 또한 <먼 곳에서 온 편지들>을 썼다. <1차 혁명 첫 단계>, <새 정부와 프롤레타리아트>, <프롤레타리아트 민병대에 대하여>, <어떻게 평화를 성취할건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국가 체제 건설이라는 과제>, 이렇게 모두 다섯 글이었다. 레닌은 페테르부르크에서 도착하던 날에서야, 겨우 첫 번째 편지만 게재했다. 세 글은 편집국에 그대로 놓여 있었고, 다섯 번째로는 아예 <진실>에도 배달하지 않은 상태였다.

   

<프롤레타리아트 민병대에 대하여>는 레닌 사망 1924년에야 발표했다. 프롤레타리아 국가에 대한 생각을 잘 서술해놨다. 레닌, <국가와 혁명>을 온전하게 이해하고 싶다면, <먼 곳에서 온 편지>도 반드시 읽어야만 한다. 글 전체는 구체적으로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레닌은 <인민 권리>에다 보낼 기고문으로는 <러시아 혁명에서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노동당 임무>, <스위스 노동가들에게 보내는 작별 편지>를 썼다. <포로가 되어 고통 받는 동지들에게>라는 편지도 썼다. 덕분에 여러 포로 동지들도 만날 수 있었다. 베른 인민 회관에서도 러시아로 가는 여러 동지들도 모두 모였다. 페테르부르크에서는 대중, 노동계급들, 병사들, 수병들도 지도가를 맞이하고자 나왔다. 친한 동지들도 맞이했고, 또 많이 있었다. 롱주모 학교 학생들도 축축한 붉은 색 넓은 띠를 어깨에 두른 채로 있었다. 얼굴은 모두 눈물로 젖어 있었다. 주위로는 온통 사람들 물결로 바다를 이루었다. 붉은 깃발들, 크론슈타트 수병들로 이뤄진 의장대, 핀란드 역에서부터 크셰신스카야 저택까지 길을 비춰주던 페트로파블로프스카야 요새 탐조등 불빛, 장갑차들, 길을 둘러싸고 사슬같이 이어진 노동계급들, 치헤이제, 스코벨레프는 페트로그라드 노동벼사대표소비에트 공식 대표 자격으로, 핀란드역으로 맞이했다. 동지들은 차르 접견실로 안내했고, 대위 한 명도 다가와 차렷 자세로 경례했다. 뜻 밖에 사태에 다소 당황했던 레닌도 거수경례를 했다. 덕분에 장갑차를 탈 수 있었고, 크셰신스카야 저택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수 많은 사람들도 외쳤다. 당 중앙 위원회, 당 페트로그라드 위원회도 들어섰다. 다과회와 동지들은 환영사도 준비했으나, 레닌은 화제를 돌렸고, 전술 문제에 대해 말했다. 크셰신스카야 저택 옆에도 노동계급들, 병사들도 장사진을 이뤘다. 발코니에서 연설해야만 했다. 전 러시아노동병사대표소비에트 볼셰비키 구성원들도 회동 자리로 레닌을 데려갔다. 레닌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신 견해를 몇 가지 테제로 서술했다. 멘셰비키도 회의를 열었고, 볼셰비키 회합은 나중에 전체 사회민주주의들 합동 회합에서 연설을 다시 한다고 결정했다. 레닌도 따랐다회합은 타브리다 궁전 대강당에서 열었고, 골젠베르크는 의장석에 앉았다. 1905년 혁명 때 굳건한 볼셰비키였지만, 플레하노프 뒤좇아, 방어론을 지지했다. 레닌은 연설했고, 골젠베르크는 반대 연설도 했다. 레닌은 혁명 민주주의 사이에서 내전 깃발을 높이 세웠다고 말했다. 콜론타이도 레닌 테제들을 열렬하게 옹호했다. 플레하노프로는 <단결>에서 레닌 테제들을 헛소리라고 일축했다. 사흘 뒤 47, 레닌 테제들은 <진실>에도 게재했다. 레닌 테제와 거리를 둔 카메네프 기고문, <우리 견해 차이>도 등장했다. 카메네프는 <진실> 기존 입장을 고수했고, 볼셰비키로는 중앙위원회사무국 테제들을 승인했다. 볼셰비키 조직 안에서도 투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투쟁은 오래 가지는 않았다. 페트로그라드 볼셰비키 시 협의회를 열었지만, 레닌 관점은 승리했다. 협의회는 414-22일까지 8일간 지속했고, 같은 기간 레닌은 옳았음을 증명한 굵직한 사건들도 이어서 나타났다. 47, 레넨 테제들도 언론에 등장한 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로는 자유 공채에도 찬성하는 표결을 했다.

 

부르주아 신문들, 방어론 신문들은 레닌, 볼셰비키를 두고 미친 듯이 공격해댔다. 아무도 카메네프 발언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덕분에 볼셰비키 조직 안에서 레닌 관점은 우위를 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레닌에 대한 공격으로 테제들은 빠르게 유명해지기도 했다. 레닌은 제국주의 전쟁을 약탈 전쟁이라고 칭했기 때문이었다. 410, 레닌으로는 이즈마일로프 연대에서도 연설했고, 15일에는 <병사 진실>도 나올 수 있었다. 16일에는 페트로그라드 병사, 수병들은 레닌, 볼셰비키에 대한 공격에 반대하는 시위를 조직할 수 있었다418일이라는 51, 러시아에서는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거대한 규모로 메이데이 시위도 열렸다. 러시아에서는 외무부 장관 밀류코프로부터 전쟁을 계속하고자 임시 정부 이름으로 발표했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무엇을 했을까. 볼셰비크는 의무를 언론으로부터 잘 설명했다. 볼셰비키로는 니콜라이 2세 정부, 차르 일당이 내린 의무를 임시 정부는 수행하고 있다고 약속했음을 지적했다. 따라서 부르주아지 앞에 놓인 의무라고 고발했다. 대중들도 거리로 나왔다. 421, 대중은 넵스키 대로에서 시위를 벌였다. 임시 정부 지지가들 역시 넵스키 대로에서 시위를 벌였다. 같은 사건들로부터 볼셰비키는 단결할 수 있었다. 페트로그라드 볼셰비키 조직으로는 레닌 관점에 입각해서 결의안을 채택했다. 421, 22, 중앙 위원회로는 임시 정부를 폭로하고자 했다. 그리고 밝히고자 결의안을 냈따.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화해 전술을 비난했다. 노동 계급, 병사 대표들을 재선출하기를 촉구했고, 소비에트를 강화하자고, 더욱 촉구했다. 폭 넓은 홍보 활동을 수행하자고 호소하기도 했다. 또한 임시 정부를 즉시 전복하려는 시도는 시의적절하지는 않다고도 지적했다. 레닌 테제들로부터 공표한 뒤로 3주나 지난 뒤, 전러시아협의회는 개최될 무렵부터, 볼셰비키 사이로는 이미 단결을 이뤘다. 중앙 위원들도 찾아왔고, 레닌은 바빴다. 밤에 집 창문을 열고, 열띤 논쟁을 듣기도 했다. 병사, 이웃집 요리사, 젊은이들 너 나 할 거 없이, 밤새 열띤 논쟁을 벌였다. 여전히 정치, 집회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페테르부르크 백야는 철야 집회였다. 중앙 위원회 서기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많은 경향 지지가들, 곧 볼세비키, 멘셰비키, 사회주의혁명가당 당원들, 무정부주의들 등도 있었다. 5만 명에 달하는 젊은이들도 조직에 들어왔다. 중앙위원회 회의나 페트로그라드 위원회 소식인지라, 학생들은 볼셰비키를 향해 온갖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교사 대회에도 참석했따. 교단은 순 사회주의혁명가당 당원들이었다. 방어론들도 대회에서 연설했다. 알렉신스키도 연설했다. 볼셰비키, 국제주의 멘셰삐키 등 사회민주주의들로는 15-20명이었다. 별도 작은 방에도 모여, 어떤 학교를 만들지, 그리고 투쟁할지에 대해서 서로 생각을 교환했다. 회합에 참석했던 많은 사람들은 나중에 지역 평의회로부터 일했다. 많은 교사들은 폐쇄주의로 오염되어 있었다.

 

레닌은 메이데이집회에도 참석했다. 오흐타, 그리고 화성 광정에서 연설했다. 여러 동지들을 만났고, 424-29일까지 전 러시아 4월 협의회를 개최했다. 151명 대의원도 참석했다. 협의회로는 새로운 중앙 위원회를 선출하고, 현 시국, 전쟁, 3인터내셔널 준비, 민족 문제, 농업 문제, 당 강령 등과 같은 매우 중요한 문제들을 토론했다. 정치 경험에 대한 중요성을 말했다. 레닌은 현 시국에 대해 러시아 혁명은 소비에트를 창출했다고 말했다. 과제에 대해서는 소비에트로부터 토지 사적 소유 철페를 말했다. 그리고 낡은 국가 관료제도를 비판했다. 레닌은 연설에서 한 석탄 광부 말을 인용하기도 했다. 책에 있는 말을 하나도 쓰지 않으면서, 어떻게 혁명을 이뤄냈는지를 레닌에게 이야기해줬다. 대통령이 나올 수 있는 가라는 따위가 아니었다. 광부들에게 문제는 광산을 장악했을 때, 생산 중단을 막고자 케이블을 보존해야 한다고 말했고, 그리고 빵 이야기를 먼저 나눴다. 그러니까 가진 빵이 없을 때, 빵을 확보할 수 있는 조건을 어떻게 하면 마련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바로 책에서 읽는 게 아닌, 참된 혁명 강령이었기 때문이었다.

 

19175월 초, 레닌은 당 강령 개정안을 작성했다. 크룹스카야로는 <병사 진실>에다 레닌에 대한 글을 썼고, <당 역사 한 쪽>이라고 제목을 붙이기도 했다. 레닌은 글 초고를 읽고는 몇 가지를 정정해주기도 했었다. 1917513일 자, <병사 진실> 21호로 게재했다레닌은 자주 지치곤 했다. 1913, 레닌은 민족 문제에 대해 샤우만과도 활발하게 편지를 주고 받았다. 19145, 레닌은 모든 민족, 또는 대다수 민족 마르크스주의들로부터 민족 평등, 소수 민족 권리 보호를 위한 법률 초안을 작성해서, 두마로부터 제출할 필요는 있다고 개진했던 편지도 흥미롭다. 레닌은 초안에 따르면, 평등이라는 개념을 해석할 때는, 들어가는 모든 곧 언어, 학교, 문화 등을 포함한 모든 문제들을 포함할 수 있어야만 하고, 모든 관계 및 상관 관계 측면으로도, 다 고려해서 다룰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1917, 레닌은 스체판을 만나서, 볼셰비키로부터 직면했던 날카로운 문제들을 충분하게 토의했다. 여러 연설과 6월 지방 평의회 선거도 치렀다. 대중은 혁명 분위기를 북돋았다.

 

볼셰비키로는 610, 시위를 열기로 했다. 소비에트 대회로는 사흘 동안 어떠한 시위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결정을 내렸고, 시위를 금지하고자 했다. 레닌은 페트로그라드 위원회로부터 정한 시위는 취소해야만 한다고 내세웠다. 레닌은 소비에트 권력을 인정한다면,대회 결정에 불복해서도 안 되고, 그렇게 한다면 반대가들 손으로 무기를 쥐어 주는 격이라고 봤기 때문이었다. 소비에트 대회로는 618일 자체 시위를 벌였다. 시위로는 약 40만 명 노동 계급, 병사들도 참가했다. 시위대는 깃발, 현수막으로는 90% 볼셰비키 중앙 위원회 구호로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열 명 자본가 장관들을 타도하라.’ 라고 내걸었다. 나머지는 임시 정부를 지지한다는 내용 뿐이었다. 레닌은 618일을 분기점으로 규정했다. 6월 지방 평의회 선거는 끝났다. 비보르프스키 지구에서는 볼셰비키, 소수 국제주의 멘셰비키만 선출했다. 그러나 멘셰비키로는 평의회 활동을 거절했다. 노동 대중들도 여러 정치, 문화 분야에서도 두각을 발휘했다. 인민 교육 소비에트도 빠른 속도로 설립했다. 교육 위원회로는 기관총 연대 문화교육위원회와도 몇몇 문화 활동 문제를 공동으로 논의하고자 월요일에 모이기로 합의를 보기도 했다. 기관총 연대에서는 아무도 오지는 않았다. 중앙 위원회로는 평화 구호를 내걸고자 했으나, 노동 시위대, 기관총 연대로는 이미 바리케이드를 만들고 있었다. 중앙 위원회로는 시위를 중단하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작성했지만, 임시 정부로는 사관 생도들, 카자크 병사들을 동원했다. 사도바야 거리에서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를 해댔다사관생도들은 <진실> 편집국을 습격했다. 파업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중앙 위원들을 만났다. 노동 운동은 진압됐다. 여러 동지들도 레닌에게 독일 첩자라는 둥 악의적인 비방을 퍼뜨렸고, 중상모략으로 영향력을 마비하도록 하고자 했다. 77, 임시 정부로는 레닌, 지노비예프, 카메네프를 체포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크셰신스카야 저택도 정부군을 점거했다. 레닌은 피신했다. 여러 집 수색을 당하기도 했었다. 79일에는 카메네프를 체포했고, 712일에는 전선에서 사형 집행 명령을 내렸고, 715일에는 <진실>, <참호 진실>도 폐간됐다. 전선에서는 집회 금지령도 내려졌고, 헬싱포르스에서는 볼셰비키를 체포했고, 볼셰비키 신문, <파도>마저 폐간됐다. 718일에는 핀란드 국회를 해산했고, 코르닐로프 장군은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722, 트로츠키, 루나차르스키는 체포됐다.

 

7월이 지나자, 케렌스키로는 군대 내 규율을 강화하고자 여러 조치들을 궁리해냈다. 7, 기관총 연대 무장을 해체하도록 한 채로 광장으로 내몰아 모욕을 줬다. 무장해제 당한 연대는 광장으로 걸어갔지만. 증오마저 타올랐다. 기관총 연대로는 10월에 헌신해서 볼셰비키를 지원했고, 스몰니에서도 레닌을 호위하기도 했다. 볼셰비키당으로는 반헌법 상태였으나, 무척이나 컸고 또 셌다. 6차 당대회 726일 무렵에는 당원 수로는 이미 177,000명에 달했다. 3개월 전 러시아볼셰비키 4월 협의회에 비하면, 두 배는 넘었다. 825, 코르닐로프 군대는 페트로그라드 진격을 시작했다. 페레트부르크 노동계급들, 비보르스키 지구 사람들은 맨 먼저 페트로그라드를 방어하고자 달려갔다. 코르닐로프 군대 부대들, 이른바 야만 군단에 맞서고자 선동가들도 파견했다. 따라서 금방 와해할 수 있었고, 실질적인 진격마저 잘 이뤄지지도 못했다. 페트로그라드로 파견된 부대 지휘관이었던 크리모프 장군은 권총으로 자살했다.

 

레닌은 라즐리프 오두막에서 더 지내기는 어려웠으므로, 핀란드로 거쳐를 옮겼고, <국가와 혁명>을 집필했다. 핀란드에서는 신문을 잘 살펴볼 수 있었다. 가발을 쓰거나, 분장을 하기도 했다. 913-14, 레닌은 중앙 위원회에다 <마르크스주의와 봉기>라는 편지를 썼고, 9월 말에는 이미 페테르부르크로 더 가까이 있을 수 있도록 헬싱포르스에서 비보르스키로 거처를 옮겼다. 또한 <볼셰비키는 국가 권력을 잡을 수 있는가>라는 기고문에서 농민, 병사들에게 보내는 격문, 페테르부르크시협의회 비공개 회의에서 쓴 편지에서도, 볼셰비키로는 권력을 잡고자, 구체적인 조치들도 취했다. 중앙 위원회, 모스크바 위원회, 페테르부르트 위원회 등 위원들,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모스크바 소비에트 볼셰비키 의원들에게도 같은 내용으로도 글을 썼다레닌은 107, 비보르스키에서 페테르부르크로 다시 거처를 옮겼다. 철저한 보안을 지키고자, 몸을 숨긴 주소를 중앙 위원들에게도 말하지는 않았다. 1010, 레닌은 수하노바 집에서 열린 중앙 위원회 회의에도 참석했다. 회의에서 무장 봉기에 대한 결의안을 채택했다. 중앙 위원 열 명, 레닌, 스베르들로프, 스탈린, 제르진스키, 트로츠키, 우리츠키, 콜론타이, 부브노프, 소콜니노프, 로모프는 무장 봉기에도 찬성했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는 반대했다. 1015, 페트로그라드 조직 회의를 개최했다. 스몰니에서 열었고, 지구 대표들도 여덟 명, 참석했다. 16일에는 레스노이 대로에 있던 레스노이 지구 평의회 사무실에서 중앙 위원회 확대 회를 열였다. 중앙 위원들 외로, 페트로그라드 위원회, 군사 조직 집행 위원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대표들, 노동 조합, 공장 위원회 및 철도 노동 계급들도 회의로 참석했다. 회합에서 두 개 노선을 논의했다. 즉각적인 봉기에도 찬성한 사람들은 대다수였고, 반대했던 사람은 소수였다. 레닌 결의안은 압도적인 다수표를 획득할 수 있었다. 찬성 19, 반대 2, 기권 4표였다. 결정은 났고. 중앙 위원회 비공개 회의에서 군사 혁명 중앙을 선출했다. 레닌을 만나러 갈 수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였다. 1024일에 레닌은 중앙 위원회에다 즉시 권력을 장악해야만 한다고 편지를 썼다. 비보르스키 지구로는 봉기를 준비했다. 1917, 1025일이자 117, 아침에 임시정부는 전복됐다. 페트로그라드 프롤레타리아트, 경비대를 통솔하던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기구로는 군사혁명위원회로는 국가 권력을 넘겨줄 수밖에는 없었다. 바로 제2차 전 러시아노동병사대표소비에트 대회에서 노동, 농민 정부를 수립했고, 인민 위원회를 창설해서는 레닌을 의장으로 지명했다.

 

10월 혁명.

 

10월 권력 장악은 프롤레타리아트 당이던 볼셰비키 당으로부터 모든 면에서 연구하고, 준비했다. 7월 봉기로는 자연발생이었다. 그러나 당에서는 끝까지 진중한 사고를 견지했고, 시기상조로 봤다. 진실을 직시할 필요도 있다. 대중은 아직 봉기할 준비는 되지 않았다. 중앙 위원회에서는 봉기를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전투로 폭발해서 봉기를 일으킨 사람들을 자제하도록 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볼셰비키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할 바를 다했다. 봉기 순간까지도 올바르게 선택할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레닌은 핀란드에 몸을 숨겨야만 했고, 912-14일 사이에 중앙 위원회에다 편지를 썼다. 레닌은 봉기를 성공하고자 세 가지를 제안했다.

 

1. 음모나 당에 의존할 게 아니라 보다 나아간 진보 계급에게 의존한다.

 

2. 인민 혁명으로 북돋고자 의존한다.

 

3. 봉기로는 혁명 역사에서 매우 북돋는 상태에서 진보 인민 대오로는 크게 활동하고, 적들 대오로는 유유부단해서 약하고, 어중간한 벗들 대오로는 매우 심하게 동요하거나, 그러한 분기점에 의존해야만 한다고.

 

따라서 반란부들에 대한 사령부를 조직하고, 역량을 배치하고, 믿을 수 있는 부대를 매우 중요한 지점으로 이동하도록 하고, 알렉산드린카를 포위하고,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를 점거하고, 사령부와 정부 각료를 체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무장 노동계급들을 동원해서라도, 마지막 전투까지 결사로 싸우기를 촉구해야만 했다. 전신, 전화국을 일거에 점령했고, 중앙 전화국으로는 봉기 사령부를 설치해서, 모든 공장 부대, 무장 투쟁 지점들로부터 사령부와 전화로도 통신할 수 있다고 해야만 했다. 기술 하나론는 봉기에 접근하지 않고서는 현재 정세에서도 마르크스주의에만 충실할 수도, 혁명에만 충실할 수도 없다고 보여 주는 예시에 불과하다고 봉기에 대해서는 말하기도 했다.

 

레닌은 핀란드에 머물면서, 봉기 호기를 놓치지 않고자, 107, 페테르부르크 시협의회에다 편지를 썼고, 중앙 위원회, 모스크바 위원회, 페트로그라드 위원회,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모스크바 소비에트, 볼셰비키 대표들에게도 편지를 썼다. 마지막 한 달 동안은 오로지 봉기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무장 봉기란 정치 투쟁에서 특수한 형태이고, 주의 깊게 고찰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마르크스는 무장 봉기야말로, 전쟁과도 꼭 마찬가지로는 기술이라고 진리를 매우 분명하게 드러냈다.

 

1. 봉기를 가지고 장난을 쳐서도 안 된다. 시작했다면 끝까지 가야만 한다고 굳게 알아야만 한다.

 

2. 결정적인 순간에 결정적인 장소에서 압도적으로 많은 세력을 모을 수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더 잘 준비되고, 조직된 적은 반란군을 괴멸하도록 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봉기를 시작한다면, 위대한 결단력을 가지고 행동해야만 한다. 무조건 공세로 넘어간다.

방어는 무장 봉기에서는 죽음이기 때문이다.

 

4. 적에게 허를 찌르도록 노력한다. 또한 군대를 분산하는 순간을 잘 포착한다.

 

5. 어떠한 경우에도 도덕적 우위를 견지하면서 아주 작더라도, 도시 단위로는 매시간, 매일 성과를 올려야만 한다.

 

마르크스로는 혁명 전술에서 대가들 가운데 당통으로부터도 배울 수 있는 대담함을 빌려 무장 봉기에 대한 모든 혁명 교훈들을 총괄하고자 했다고 적었다. 191710, 러시아에서도 적용해보자면, 안과 밖 모두에서, 노동 거주 지역과 같은, 핀란드·레벨·크론슈타트에서도 할 수 있는 한 기습할 수 있고, 빠르게 페테르부르크로 진격하고, 모든 함대는 공격을 단행한다. 15천 명에서 2만 명 규모로는 사관생도와 같은 부르주아 수비대, 방데 군대보다 매우 더 많은 세력들을 모으고 결집해야만 했다. 어떠한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전화, 전신, 철도역, 교량을 먼저 점령해서 지켜낼 수 있도록, 3대 주요한 병력으로는 함대, 노동계급, 일부 육군을 결합하도록 한다.

 

결단력 높은 분자들로는 타격대, 청년 노동계급들, 그리고 훌륭한 수병들도, 매우 중요한 지점들을 점거하고, 도처에서, 모든 중요한 작전에도 참가할 수 있도록 하고자, 소규모 부대로 분산해서 편성해야만 한다. 작전들 예시로는, 페테르부르크를 포위해서 고립하고자 한다. 함대·노동계급·육군으로는 합동 공격을 감행해서, 페테르부르크를 장악하는 등이다. 기술과 더불어 세 배 대담함을 요구하는 임무이기 때문이다.

 

전멸하더라도, 적을 보내 주지 않는다는 구호를 내걸고, 적 중심부 사관학교, 전신, 전화 등등을 공격해서, 포위하고자, 소총, 폭탄을 가진 최정예 노동 부대를 구성해야만 한다. 지도가들도, 당통, 마르크스에 대한 유훈을 성공해서 적용할 수 있으리라 바란다고 했다. 2-3일 간 투쟁으로도 러시아 혁명, 세계 혁명 성공은 달려 있다고 말했다. 21이자 8, 22일이자 9, 중앙 위원회를 열어, 무장 봉기에 대한 결의안을 통과하도록 했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는 봉기를 보란 듯이 반대했고, 중앙 위원회 긴급 전체 회의 소집을 요구했따. 카메네프는 중앙 위원회를 사퇴한다고 선언했다. 레닌은 당에서 그들에게 매우 엄중한 징계를 내리도록 요구했다기회주의 경향을 분쇄해갔고, 봉기 준비도 강도 높았다. 1025일이자 12,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 위원회로는 군사 혁명 위원회 설립에 대한 결정을 내렸다. 29일이자 16일에는 중앙 위원회, 당 조직들 대표들은 함께 모여 확대 회의를 열었다. 바로 중앙 위원회 회의로부터, 스탈린, 스베르들로프, 제르진스키 등을 수반으로 한 봉기 실천 지도부로는 군사혁명본부를 구성했다. 30일이자 17일로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뿐만 아니라, 소이베트 전체로는 군사혁명위원회 조직안을 승인했다. 닷새 뒤로는 연대 위원들 회합에서,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를 페트로그라드 군 부대 지도 기관으로 인정하고, 군사혁명위원회로부터 서명 인증도 없는 사령부 명령에는 복종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렸다.

 

115일이자 1023일로는 이미 군사혁명위원회로는 군부대에서 인민 위원이던, 코미사르들을 임명했다. 다음 날로는 116일이자, 1024일로는 임시 정부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들을 기소했고, 군부대로 임명한 인민 위원들을 체포하라는 결정을 내리고는 사관생도들을 겨울 궁전으로 소집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미 뒤늦은 일이었다. 군부대들도 볼셰비키 쪽이었고, 노동계급들은 소비에트 권력을 넘기기를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군사혁명위원회로는 당 중앙위원회 직접적인 지도를 받아 일했다. 스탈린, 스베르들로프, 몰로토프, 제르진스키, 부브노프 등 대부분 중앙 위원들도 군사혁명위원회로 들어왔다. 봉기를 개시했다.

 

116일이자, 1024일로는 레닌은 비보르프스키 변두리에 있는 당원 포파노바 집, 볼쇼이 삼프소니예프스키 거리, 세르도볼스카야 거리로부터 만나는 모퉁이 92/1번지 42호에서 은식하고 있었다. 봉기를 준비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활동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로 괴로워했다. 마르가리타로부터 봉기를 지연하도록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쪽지를 전달했다고도 한다. 레닌은 핀란드인 동지였던 아이노에게 스탈린을 보내 달라고 부탁했으나, 군사혁명위원회 소속이었어서, 멀어서 올 수는 없었다. 레닌은 곧장 스몰니로 몸소 바로 가기로 결정하고는 서둘렀다. 비보르프스키는 지구는 밤에 무장을 갖추었고, 봉기를 준비했다. 스몰니로는 불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고, 온통 열기로 가득했다. 붉은 근위대, 공장 대표들, 병사들 지시를 받고자 방방곡곡으로 모여들었다. 타자기를 두드리는 소리, 전화벨 울리는 소리, 한 묶은 전신들을 분류하고, 군사혁명위원회 회의도 열리고 있었다. 스몰니 앞 광장에서는 장갑차들 엔진 소리도 요란했고, 3인치 야포를 대기하도록 했고, 바리케이드를 세울 장작도 쌓여 있었다. 입구로는 기관총, 무기들도 세워졌고, 문마다 보초를 섰다.

 

1025일이자, 117. 오전 10시로는 이미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군사혁명위원회로는 이름으로, <러시아 시민에게>라는 호소문을 언론에다 배포했다. 다음 내용은 이와 같다.

 

임시 정부는 점복됐다. 국가 권력은 페트로그라드 프롤레타리아트, 경비대 지도부이자 페트로그라드노동병사대표소비에트 기관이던 군사혁명위원회로 넘겨졌다. 인민은 곧장 민주주의 평화, 지주 토지 소유 철폐, 노동 생산 관리, 소비에트 정부 수립이라는 대의를 쟁취하고자 싸워 왔다. 대의를 이행했다. 오후 230. 페트로그라드노동병사대표소비에트 회의를 열었다. ·우체국·전신·국립은행 등도 접수했다는 보고를 맞이했다. 겨울 궁전에 대한 공격도 진행했다. 병사들도 놀라운 영웅심을 발휘했다. 무혈 변혁으로 이뤄졌다. 소비에트는 회의에 참석하러 온 레닌을 열렬하게 환영했다. 레닌은 연설했다. 거머쥔 승리에 대한 대단한 말은 전혀 하지도 않았다. 레닌 특징이었다. 소비에트 권력 앞에 놓인 과제들, 반드시 끝까지 이행해야만 하는 과제들에 대해서만 말했다.

 

소비에트 정부로는 부르주아지 참가 없이도 업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1.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를 철폐하는 법령을 공포한다.

 

2. 생산에 대한 노동 계급들로부터 감독하도록 도입한다.

 

3. 사회주의 투쟁을 전개한다.

 

4. 낡은 국가 기구는 분쇄되어 파기하고, 새로운 권력, 소비에트 조직들로 권력을 수립한다.

 

대중 조직 힘으로도, 평화 협정을 체결하고자 했다. 수도에서 승리를 거둬야만 했다. 국제 프롤레타리아트도 평화 협정을 체결하고자 돕고 나섰고, 이미 혁명 동요에 대한 징후마저 나타났다. 특히 연설은 페트로그라드노동병사대표소비에트 구성원들에게도 매우 가까웠다. 대중은일어설 수 있었고, 부르주아 권력은 무너졌다. 지주에게 땅을 몰수하고, 공장주에게 재갈을 물릴 수 있고, 더욱 중요하게로는 평화를 쟁취할 수 있었다. 세계 혁명도 도왔다. 레닌은 옳았고,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기도 했다.

 

소비에트 제2차 대회로는 저녁에 열렸다. 대회에서 소비에트 권력을 선언했고, 승리를 공식적으로 승인해야만 했다. 소이베트 대표들도 모여들었고, 선동을 진행했다. 노동 권력도 농민과 함께 해야만 했다. 사회주의혁명가당은 농민 의견을 대변하는 당이었다. 부농, 곧 쿨라크 계급으로는 사회주의혁명가당우파를 이념 대변인으로 삼고 있었다. 소농민 이념 대변인으로는 사회주의혁명가당좌파로는 전형적인 소부르주아지 대표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부르주아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서 동요하고만 있었다. 사회주의혁명가당 페트로그라드 위원회 수반으로는 나탄손, 스피리도노바, 캄코프 등이었다. 레닌은 첫 번째 망명 시기 때, 나탄손을 잘 알고 있기도 했다. 페테르부르크,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로는 대중 볼셰비키 성향으로 큰 영향을 받았다. 다른 누구보다도 볼셰비키를 우호했다. 볼셰비키로부터 모든 지주 땅을 몰수해서, 농민에게 양도하고자 열심히 투쟁하기를 보았다.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로는 평등한 토지 이용을 도입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볼셰비키로는 농업 전체를 사회주의로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레닌은 지금 매우 중요한 건 지주 토지 몰수이고, 개혁은 어떻게 이뤄지는 경험으로도 알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레닌도 토지 법령에 대한 작성을 두고 고심하기도 했다. 포파노바 회고록 가운데로는 레닌은 <전러시아농민대표소비에트 소식>, 지난 호를 모두 구해달라고 하기도 했다. 연구용 교재였다. 레닌은 밤낮으로 일에 전념했고, 사회주의혁명가당을 샅샅이 연구했다. 마르가리타로는 직업은 농업학이기도 해서, 활동하면서 같은 문제들을 다룰 수 있었다.

 

1025일 밤 1045, 2차 전러시아소비에트 대회를 개최했다. 밤 대회로는 간부회를 구성해서 선출하고, 권한을 정했다. 670명 대표들 가운데로는 볼셰비키로는 겨우 300명뿐이었다. 사회주의혁명가 당원으로는 다음으로 많은 193명이었고, 멘셰비키로는 68명이었다. 사회주의혁명가당 우파, 멘셰비키, 분트파는 길길이 날뛰었다. 그들은 선언문을 낭독하거나, 대회장을 나가 버리곤 했다. 멘셰비키 국제주의 가운데 일부도 나가버렸다. 사회주의혁명가당 대표들 가운데 압도적 다수 193명 가운데 169명을 점하고 있었던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는 남아 있었다. 대회장을 도중에 나간 사람으로는 모두 50명이었다. 레닌은 25일 회의에 참석하지는 않았다.

 

2차 소비에트 대회를 열린 시간에, 겨울 궁전에 대한 공격을 진행했다. 케렌스키는 병사들, 노동계급들로부터 권력을 장악한 페트로그라드 출병을 조직하고자, 모스크바로 갔다. 키슈킨을 비롯한 나머지 각료들은 사관생도들, 여성 타격대 비호를 받고는 겨울 궁전에 숨어 있었다. 멘셰비키, 사회주의혁명가당 우파, 분트파로는 겨울 궁전을 포위하기를 두고 믿지 않을만큼 신경쇠약증 반응을 보이기도 했었다. 에을리히는 시 평의회 일부 의원들은 궁전에 대한 사격을 중지하지 않는 까닭에, 비무장 상태로부터 겨울 궁전 광장으로 총받이로 갔다. 농민대표소비에트 집행 위원회, 멘셰비키 분파, 사회주의혁명가당 분파도 합류했다. 멘셰비키, 사회주의혁명가당 당원들은 퇴장한 뒤로 정회를 선포했다. 회의를 재개한 310분에, 겨울 궁전은 함락했고, 각료들은 체포됐고, 장교와 사관생도들도 무장 해제됐고, 케렌스키로는 페트로그라드로 보낸 제3자 전거대대로부터도 혁명 인민 쪽으로 넘어왔다는 소식마저 전달 받았다. 레닌은 1026이자, 118일 저녁, 대회에서 토지에 대한 법령을 도입해야만 하는 근거를 설명하는 연설을 했다. 1026일이자, 118, 저녁 회의에서 평화에 대한 법령, 토지에 대한 법령도 승인했다. 같은 지점에서는 사회주의혁명가당 당원들과 합의를 이뤘으나, 정부 구성 문제로는 한층 더 힘들었다.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로는 농민 대중에 대한 영향력을 잃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025, 사회주의혁명가당 우파, 멘셰비키는 도중에 대회장을 나가고는 볼셰비키 모험주의, 권력 장악 등등을 비난했기 때문에 매우 심하게 동요하고 있었다.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 지도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캄코프는 민주적인 연립 정부를 지지한다고 천명했다.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로는 대회장을 도중에 나간 당들과, 볼셰비키 간 중재 역할을 하기를 원했다. 볼셰비키로는 협상을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레닌은 같은 대화로 나올 수 있는 건 무엇도 없으리라고,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1026일 대회를 열리기 두 시간쯤 전에는, 같은 문제를 두고,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 대표들과 회동했다. 저녁 9시에 회의를 열었고, 토지에 대한 법령 근거를 설명하고자 연설했다. 케렌스키로부터 전선에도 도입했던 사형 제도를 폐지했고, 평화에 대한 법령, 토지에 대한 법령, 노동 감독에 대한 법령 등을 채택했고, 최고 인민위원회에서도 볼셰비키 구성원들을 확정했다. 최고인민위원회 의장으로는 레닌을 지명했다. 내무로는 리코프, 농업에는 밀류친, 노동에는 슐라프니코프, 육해군 위원회로는 각각 안토노프, 크릴렌코, 디벤코, 통상 및 공업에는 노긴, 인민 교육에는 루나차르스키, 재무로는 스체파노프, 외무로는 트로츠키, 법무로는 로모프, 식품으로는 테오도로비치, 체신으로는 글레보프, 민족 문제로는 스탈린 등을 지명했다. 교통 통신 최고인민위원 자리로는 공석으로 남았다. 관료주의와도 매우 멀었고, <노동과 농민 정부를 수립하기를>라는 제2차 소비에트 규정에도 잘 드러났다. 매주 약 40개 공장에서 온 대표들과 회합을 갖고는 무엇을 해야 할지, 여러 조치들을 어떻게 수행할지를 두고 의논했다. 그리고 결정할 수 있으면, 곧바로 실천으로 옮겼다. 공장 경연진을 압박해서 자금을 확보했고, 학교 교육, 보육원 현황, 도서관 사업 형태를 토론했다. 핵심은 노동계급 창발이었다. 상당한 역량도 인민 교육국으로 결합했다. 관료주의를 매우 비판했다.

 

그러나 먼저 해야 할 일로는 소비에트 권력을 무력으로 쓰러뜨리려는 적 시도, 내부로부터 붕괴하도록 하려는 시도로부터 권력을 지키고자 했다. 그리고 대오를 강화하도록 했다. 119-15일에 걸쳐 소비에트 권력 자체로부터 실현을 위한 투쟁을 며칠간 벌였다. 레닌은 파리 코뮌을 매우 주의 깊게 연구했다. 적에게 보여준 유약함에서 파멸을 찾아냈다. 10월 혁명 초기로도, 불필요한 유악함도 적지는 않았다. 케렌스키를 도망치도록 해주거나, 다른 여러 각료들을 도망가도록 해주거나, 겨울 궁전을 지키던 사관생도들을 선서만 받고 풀어주거나, 진격에나선 케렌스키 부대를 지휘한 크라스노프 장군을 가택 연금 상태로 그저 두기 등이었다.

 

제국주의 전쟁에서도 지친 인민으로는 무열 혁명을 원했다. 적들은 전투로 내몰았다. 사회 체제 전체를 사회주의로 재건하는 문제를 무엇보다도 더 많이 고심했던 레닌으로는 혁명을 수호하는 일에 맨 먼저 매진해야만 했다. 119, 케렌스키는 가치나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포드보이스키 동지로는, 1927116, <붉은 신문>에서 <변혁 나날들 속 레닌>이라는 글에서 페트로그라드 방어 기간 동안 레닌으로부터 수행한 어마무시한 활동들을 너무나도 생생하게 묘사했다. 레닌은 지역 사령부에도 와서 필요한 상황을 보고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지도를 더욱 꼼꼼하게 들여다봤고, 여러 공장이나, 소비에트 방어에도 집중하고자, 탁월한 인민 지도가로도 성장하고 있었다. 레닌은 대중을 행동하도록 만들 줄 알았고, 또 늘 앞서 구체적인 목표를 제시할 줄도 알았다.

 

1111일이자 1029, 케렌스키는 전력으로 진격하자, 선서를 하고는 겨울 궁전에서 풀려난 사관생도들도 케렌스키를 돕기로 결정하고는 반란을 일으켰다. 붉은 근위대 병사들은 사관생도 반란을 신속하게 진압했다. 레닌은 페트로그라드 수비대 연대 대표 회의에서 연설했다. 케렌스키로는 코르닐로프로부터 실패한 8월 군사 쿠데타와 같은 가련한 모험이라고 말했다. 1114, 케렌스키 반란은 진압했고, 가치나을 탈환했다. 러시아에서는 내전으로 격화했다. 118일이자, 1026, 칼레진 장군은 돈스카야 지역에서 계엄 상태를 선포했고, 소비에트 권력으로 대항할 카자크들을 조직하고자 했다. 119, 카자크 대장이던 두포프로는 오렌부르크를 함락하도록 했다. 모스크바에서 사태는 질질 끌려갔다. 백위군은 크레믈린을 장악했다. 전투로는 페테르부르크에서보다 더 격렬한 상태였다.

 

118일이자, 1026, 2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퇴장했던 사회주의혁명가당 우파, 멘셰비키와 다른 분파들로는 조국혁명구원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들은 소비에트 권력을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을 주위로 결집하고자 했다. 시 중앙평의회 대표 9, 예비의회 간부회 전원, 전러시아노동병사대표소비에트 및 농민대표소비에트에서 집행위원회 각각 3, 사회주의혁명가당, 멘셰비키 분파, 멘셰비키통합파 대표들, 전러시아수병중앙집행위원회 대표들, 플레하노프 모임인 단결 대표 2명도 가담했다. 권력을 움켜쥔 모험주의들로부터 조국, 혁명을 구해 내고자 했다. 그러나 많은 일을 이룰 수는 없었다. 평화를 위해. 토지를 위해. 라는 구호로는 대중 사이에서도 이미 너무 잘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대중은 아무런 동요도 없이 볼셰비키를 지지했다모스크바에서 만들어진 사회완전위원회도 페테로그라드 조국혁명구원위원로 가담했다. 기구로는 모스크바 시 평의회 발의로 창설했고, 사회주의혁명가당 우파 루드네프도 위원장이었다. 모스크바 사회안전위원회로는 공개적으로 반혁명을 지원했다.

 

모스크바에도 지원권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나 철도집행위원회는 취했던 입장 때문에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철도집행위원회로는 내전에서는 중립적인 입장만 취했었다. 어느 쪽에서도 군대를 통과할 수 없다고 천명하고는 말았다. 중립은 볼셰비키를 겨냥했고, 모스크바로 지원병을 보내기를 방해했다. 철도집행위원회 방해 공작을 깬 건, 군대 수송을 지지한 철도 노동계급들이었다. 1116일이자 3일로는 군사혁명위원회로는 페트로그라드에서 모스크바로 군대를 파견했다. 하지만 도착하기도 전에 모스크바에서는 백위군 저항으로는 곧 분쇄되고는 말았다.

 

페트로그라드 사관생도들 반란을 진압하고, 케렌스키는 진격해오고, 모스크바에서 투쟁도 벌어졌을 때, 중앙 위원들로는 모두 동요했었다. 상황이 절망적이라고만 보고, 양보해야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같은 동요로는 극명하게 드러난 철도집행위원회와 협상할 때도 있었다. 119, 철도집행위원회로는 볼세비키로부터 인민사회주의까지를 포함하는 모든 사회주의 정당들로 구성한 정부를 수립해야만 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하고자, 중재가로 나서겠다고 제안했다. 중앙위원회와도 협상하면서부터 철도집행위원회로는 좌파만 참석했다. 중앙위원회로는 카메네프, 스콜니코프에게 협상 전권을 위임한 상태였고, 멘셰비키, 사회주의혁명가당 우파로는 처음에는 협상에도 개입하지는 않았으나, 케렌스키 진격, 모스크바에서 상황으로는 볼셰비키로는 궁지에 몰렸다고 여겨지고는 중앙위원회 안에서도 동요하기 시작했다고 알아차리자, 극도로 뻔뻔스러워졌다. 철도집행위원회 회동에도 참석해서 소비에트 권력을 거부하고, 10월 변혁 주동가들도, 정부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체르노프, 압크센치예프를 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기를 요구했다. 카메네프를 수반으로 한 볼셰비키 대표단으로는 회합에서 퇴장하지 않았다. 그렇게 함으로부터 멘셰비키, 사회주의혁명가당 우파로부터 제기한 안건도 토의했다. 1114일이자 1, 중앙 위원회를 소집했다. 레닌은 칼레진, 코르닐로프 같은 쪽에 선 철도집행위원회 협상을 즉각 중단하기를 요구했다. 당 중앙위원회로는 상응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1117일이자 4, 노긴, 리코프, 밀류친, 테오도로비치 등은 모든 사회주의 정당들로 구성한 사회주의 정보를 조직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는 최고인민위원직에서 물러났다. 대다수 다른 최고인민위원들도 그들 쪽으로 가담했다. 카메네프, 리코프, 지노비예프, 노긴, 밀류친 등은 당 중앙 위원직을 사퇴한다고 발표했다. 그들 모두 10월 혁명 승리 직후로 모든 당들로 참여하는 연립 정부 수립을 지지하는 사람들이었다. 중앙 위원회로는 그들에게 당 규율로부터 복종하기를 요구했다. 레닌은 화를 내고는 전력을 다해 그들을 압박했다. 지노비예프로는 중앙 위원회 복귀를 선언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레닌으로는 사회주의 체제 건설, 2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채택한 결정들을 실행하는 문제로 완전하게 몰입했다.

 

따라서 1117일이자 4, 레닌은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에서 연설했고, 전선에서 온 대표들, 페트로그라드 노동병사대표소비에트로부터 공동으로 연 회의에서도 연설했다. 케렌스키 정부에 대해 일축하고는 사회주의 정신이란, 국가 관료주의 무의식 작동과는 완전하게 다르고, 살아 있는 창조 사회주의로는 인민 대중 스스로 만들어낸다고 말했다. 멘셰비키, 사회주의혁명가당 우파로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방해 공작을 선동했다. 19171121, 경질된 카메네프를 대신해서, 스베르들로프를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의장으로 선출했다. 레닌은 추천했다. 뛰어난 조직가였다.

 

스탈린도 부각됐다. 최고인민위원회들도 임명했던 제2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레닌은 스탈린에게 민족 문제를 맡기기로 제안했다. 레닌은 오랜 세월 민족 해방, 민족 자결권을 위해 투쟁했다. 레닌은 열강 폐쇄주의를 지독하게 혐오했고, 소비에트 공화국으로는 약소 민족들을 억압하는 제국주의 정책과 완전하게 대비하는, 민족들에 대한 완전한 해방 정책, 동지로 배려하는 정책을 쓰기를 참으로 원했다. 그래서 민족 문제에 대한 스탈린 견해도 잘 알고 있었다. 크라코프에서 같은 문제를 두고 많은 대화를 나누기도 했었다. 스탈린으로는 과거 몇 년 동안이나 생각하고 검토해왔고, 스탈린에게는 명예로울 수 있다고 확신했다. 모든 민족들에게 자결권을 주어져야만 했다. 과제는 복잡하고, 어려웠던 건 날카로운 게급투쟁이라는 조건 속에서 그러한 권리를 실현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민족 자결권 실현이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위한 투쟁, 소비에트 권력 실현을 위한 투쟁과도 결합해야만 했다. 프롤레타리아트 국제 투쟁 문제, 내전 문제들과도 긴밀하게 연관했다. 민족 전선 활동을 책임질 사람이라는 폭 넓은 시야, 투철한 신념, 실천으로 일을 조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어야만 했다. 그래서 레닌은 스탈린을 그러한 업무로 추천했었다. 따라서 새롭게 활동하는 법, 자신에게도 모든 습관을 바꾸는 법, 혁명 문제를 반대했던 사람을 책임감 있고, 능력 있고 손 굵은 사회주의 체제 건설가로 바꾸는 법을 배워야만 하는 문제도 당 활동가들로는 큰 과제로 놓였다.

브레스트 강화 조약.

 

레닌은 1921115, <지금, 그리고 사회주의 완전하게 뒤로 금 중요성에 대하여>라는 기고문에서, 19171025일부터 몇 주일 동안 빠르게 소비에트 국가를 건설했고, 제국주의 전쟁에서 벗어났지만,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으로부터, 브레스트강화조약이라는 퇴보를 겪었지만, 모든 일 중심에도 서서, 레닌그라드, 스몰니에서 거주하던 기간, 3월 중순, 모스크바로 거처를 옮기기 전까지였다. 레닌은 모든 일 중심에도 서서 소비에트를 잘 조직하고자 했다. 물론 재정·행정·회계·계획 부분에서 상황은 엉망이었다. 일은 잘 처리했다. 식량 공급, 재정, 은행에서 부르주아지는 부문에서 방어하고자, 주요한 역량을 쏟아 붓고는 있었다. 겨울 궁전을 장악했고, 일부 사람들로는 사관생도들을 무찔렀고, 케렌스키 진격을 격퇴했으니 다 됐다고 착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구를 어떻게 수립하고, 최고인민위원회 활동을 잘 정립할 수 있을지에 대한 관심을 갖는 사람들도 드물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대의를 위해 싸우기를 배웠다. 고르부노프는 회고록에서도 10월 혁명 기간에 최고인민위원회회의 노동 기구는 어떻게 만들었고, 재정 부문에서 어떻게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는지를 풀어서 이야기해줬다. 정부 법령들, 자금을 풀라는 요구에도, 국립 은행으로는 태업했다. 재무 인민 위원으로는 국립은행장을 체포하는 등 온갖 조치들을 취했음에도 혁명에 필요한 자금을 정부에다 풀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국립은행장을 스몰니로 이송해서, 몇 시간 동안 구금했다. 레닌은 천만 루블 자금을 받아오라고 지시를 내렸다. 하급 직원들, 사환들과 붉은 호위대는 위협하자, 출납계원은 하는 수 없이 요구 받은 금액을 내놓았다. 은행 무장 경비는 총을 장전한 상태에서 돈을 수령했다. 은행 국유화는 스탈린 지도로부터 작전을 수행했고, 본치 브루예비치와도 상의해서 모든 일을 준비하고, 명령을 작성하고는 수송대 28개 사격대를 조직하는 등 일을 했다.

28곳 은행을 점거했고, 28명 은행장들을 체포해야만 했다. 최고인민위원들도 은행으로 파견했고, 국립 은행으로도 모든 자금, 통화를 집중하도록 하는 데 필요한 선에서 은행 업무를 했다토지 문제도 진전해갔고, 1118, 레닌은 <농민 질문에 대한 답변>, <주민들에게>라는 호소문도 작성했다. <답변>에서는 지주 소유 철폐에 대한 법령을 확인도 했다. 각 마을 위원회로부터 지주 소유 철폐에 대한 법령을 확인했다. 각 마을 위원회로는 스스로 지주 토지를 접수하라고 촉구했다. 1123, 농민대표소비에트 비상대회를 개최했다. 레닌은 대회에서 두 번 연설했고, 330명 대표들 가운데 195명은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였고, 결정권을 가진 모임이었다. 사회주의혁명가당 우파 65명과도 투쟁을 벌였다. 레닌은 나흘 휴가 기간 가운데 썼었던 글을 미와으로 생각해서 출간하지는 않았다. <옛 시대 붕괴에 겁 먹은 사람들과 새 시대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 <경쟁을 어떻게 조직할까>, <소비 코뮌에 대한 법령 초안> 등은 당시로는 출간하지 않았다가, 사망한 지 다섯 해 지나서야 출판했다. 레닌을 강하게 사로잡은 문제들로는 어떻게 하면 일상적인 경제 생화릉ㄹ 매우 훌륭하게 조직하고, 어떻게 노동계급들에게 좀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고 겪고 있던 힘든 상황을 스스로 해결하도록 할까, 어떻게 소비 코뮌을 조직하고, 아이들에게 우유를 공급하도록 하는 문제를 조직할까, 어떻게 노동계급들을 더 나은 집으로 이주하도록 할까, 그리고 일상 회계, 관리를 조직할까, 어떻게 모든 문제들을 노동 대중들도 참가해서, 같은 방향으로 자율로 발전하도록 하고, 독창과 창발을 일깨울 수 있도록 조직할 수 있을지에 대한 등등이었다. 모든 일에 필요한 능력으로는 탁월한 조직가들로부터 노동계급들 가운데 발탁하고자 했고, 경쟁에서 조직 역할에 대해서도 썼다1918년 초 제헌 의회 문제도 이미 너무나 분명해진 상태였다. 제헌 의회로는 그저 계급 없는 사회로는 생겨나지 않기를 당으로는 10월 혁명 있기 오래 전부터 이미 이해했었다.


1917, 볼셰비키로는 제헌 의회 따위를 기다리지 않고, 10월에 권력을 잡았다. 임시 정부로는 제헌 의회를 둘러싸고, 일련 환상을 만들어 놨다. 그래서 환상을 깨고자, 제헌 의회를 소집했고, 의회로부터 혁명으로 복무하도록 만들고자 했다. 압도적인 다수 농민 표로는 사회주의 혁명가당이었고 우파, 좌파로 나뉘었다. 2차 소비에트 대회는 끝난 뒤로 사회주의혁명가당 중앙 위원회로는 대회에도 참석했던 좌파를 당에서 제명했다. 1123일이자 128, 열린 농민 대표 소비에트로는 비상대회에서 레닌을 연설했고, 비상 대회로는 소비에트 권력을 승인했다. 대회로 참석한 전원으로는 노동병사대표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를 열었던 스몰니로 가서 회의로 합류했다. 농민 대표 소비에트 비상대회로는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 대표들로부터 정부 참가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레닌으로는 <진실>에다 <노동, 농민과 착취 당하는 농민 동맹>이라는 기고문을 썼다. 농민 대표들 비상 대회로는, 10월 변혁, 전선에서 보내온 병사들 편지 등에 영향을 받아, 농촌 극빈층, 중간층으로부터 더욱 볼셰비키를 지지하게 됐다


소비에트 권력으로 가담했다. 농민들은 대체로는 사회주의혁명가당을 전체에게 지지표를 던지고 있었지만, 주로 좌파 쪽으로 서 있었다. 레닌으로는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로부터, 이전에 선출한 대표들을 소환할 권리를 도입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제시했었다. 사실상 소환권이란 대표로부터 말, 행동으로부터 감독할 수 있는 권리라고 말했다. 혁명 전통에도 힘 입어 미국, 스위스 몇몇 주로는 그러한 권리는 아직 남아 있었다. 소환권으로는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에서 승인했었고, 법령은 1917126일에 공표했따. 임시정부로는 이미 지난 8월 입헌민주당, 사회주의혁명가당 우파로 구성한 제헌의회선거위원회를 승인한 바 있었다. 위원회로는 선거 준비 작업에 온갖 방법으로 제동을 걸었고, 최고인민위원회의에다 선거 진행 경과를 보고하기를 거부했다. 소환권에 대한 법령을 승인하고자, 같은 날 126, 선거위원회 활동을 지도하고자, 우리츠키 동지로부터 인민 위원으로 임명했다. 위원회로는 지도 아래 일하기를 거부해서 체포됐으나, 1210, 레닌 명령으로 석방됐다. 제헌 의회를 둘러싸고, 날카로운 투쟁도 벌어졌다. 레닌은 제헌 의회 파견단을 대상으로 중앙 위원회로부터 보고하고, 제헌 의회 문제에 대한 테제를 작성하기로 결정내렸다. 테제로는 제헌 의회에게 소비에트 권력을 승인하도록 하고, 평화, 토지, 노동 관리, 반혁명에 맞선 투쟁 등에서 소비에트 권력을 취하는 혁명 노선을 승인하도록 요구하는 내용을 분명하게 제시했따. 제헌 의회로는 1918118일이자, 5일에 개원하기로 했다. 레닌 지도 아래로부터, 당에서 치밀하게 제헌 의회를 준비하도록 소비에트 권력 강화 단계에서도 매우 중요했다. 그리고 형식적이기만 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에도 맞선 투쟁을 벌여나갔고, 노동 대중으로부터, 사회주의 체제 건설로도 모든 분야에서 지대한 혁명 활동을 폭 넓게 전개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참된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도 벌여나갔다.

 

사회주의혁명가당 우파로는 볼셰비키와 투쟁해야만 한다고 말하고는, 그들 가운데 극우파 군사 조직을 조직해서, 11, 레닌 암살까지 도모했으나, 실패하기도 했었다. 조직은 제헌 의회로부터 개원하는 118일이자 5, 무장 봉기를 일으키고자, 활발하게 준비했었다. 118일이자, 5일로는 시위로는 대단히 국지적이 성격이었지만, 시내로는 무장 봉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볼셰비키로는 반격을 준비했다. 제헌 의회로는 타브리다 궁전에서 열리고 했었다. 군 본부를 조직해서, 스베르들로프, 포드보이스키, 프로시얀, 우리츠키, 본치 브루예비치 등도 참가했다. 시내, 스몰니 지구로는 여러 구역으로 나뉘어서, 노동 경비를 책임지고는 있었다. 중앙집행위원회 이름으로 전날, <진실>에다 게재했었던, <착취당하는 노동 인민 권리 선언문>을 읽었다. 레닌은 작성했고 스탈린, 부하린으로부터 함께 교열했다<선언>에는,

 

1. 러시아는 노동병사농민대표소비에트공화국이다. 따라서 중앙 지방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 속한다.

 

2. 소비에트러시아공화국은 자유로운 민족들, 자유로운 연합에 기초해서, 소비에트 민족공화국 연방으로 설립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선언>으로는 제2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채택한 법령들을 승인하고 있었다최고인민위원회로부터 채택한 결정들로는 제헌 의회 비준을 받도록 했다. 제헌 의회 우파로는 의회 활동에 대해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고, 제헌 의회로부터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자 했다. 대다수는 사회주의혁명가당 우파 족이었다. 사회주의혁명가당 우파로는 체르노프를 의장으로 추천했었고, 볼셰비키,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로는 스피리도노바를 추천했었다. 체르노프는 224, 스피리도노바로는 151표를 얻었었다. 볼셰비키로는 제헌 의회로는 소비에트 권력을 지지할지, 아닐지에 대한 근본 문제도 있었기 때문에, 스피리도노바에게 투표했다.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도 볼셰비키와 보조를 맞췄다. 체르노프를 의장으로 선출한 뒤로는 논쟁을 벌여나갔다. 체르노프는 토지 문제를 발언했지만, 부하린으로는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선언을 맨 먼저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제헌 의회로는 누구와 함께할지에 대해, 칼레진, 사관생도들, 공장주들, 상인들, 할인 은행 은행장, 아니면 회색 군복들, 노동계급들, 병사, 수병들인가, 누구인지를 먼저 결정해야만 했다. 멘셰비키를 대표한 체레첼리로는 볼셰비키를 온갖 공격했고, 내전으로 위협해서는 모든 권력을 제헌 의회로 넘기기를 제안했다.

 

많은 세월도 지났다. 독일과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도 사회민주주의로는 똑같은 방법으로, 달콤한 사탕발림, 내전 위협, 온갖 약속들로부터 노동 계급 대의를 배반하기를 목격했다. 저 야만적인 반동주의들로부터 죽어 가는 지주 및 자본가들로부터 흉악한 지지가들, 공산주의들을 끔찍이도 두려워하고는 말로는 평화를 설파하지만, 실제로는 지주, 자본가들은 노동하는 사람들을 노골적으로 착취하기를 도와주고는 새로운, 예전보다 더욱 한층 잔혹한 세계 전쟁 나락으로 몰아넣는 파시스트들에게 권력을 잡도록 도와주기를 목격했다. 레닌은 연설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볼셰비키로는 사회주의혁명가당 우파, 멘셰비키에 협조하면 어디에 이르는지를 분명하게 잘 알고 있었다.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선언문을 심의하자는 데로는 146명 대표들만 찬성했었고, 247명은 반대했다. 볼셰삐키,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로는 휴회를 요구했다. 제헌의회 볼셰비키 분파로는 앞으로 무엇을 할지에 대해 의논하고자 회합했다. 볼셰비키로는 자리에서 회의장으로 복귀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렸다. 볼셰비키 분파로는 또한 의회를 해산하도록 하지는 않았고, 회의를 끝날 때까지 더 기다리기도 했따. 회의는 16, 440분까지 했고, 끝나서야 대표들도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로는 제헌 의회 해산을 결정했다. 의회는 열릴 기회조차 없었고, 열리지도 않았다. 제헌 의회 해산을 대중은 묵묵하게 받아들였다. 의회는 권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해산됐다고 해서, 동요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앞으로 작업에 방해 되는 거추장스러운 물건을 제거하고, 모든 화해주의 분위기에다 쐐기마저 박았다.

   

전진을 방해하던 제헌 의회라는 거추장스러운 물건을 제거했다. 훨씬 더 어려운 과제로는나라를 파멸시키고 있었던 제국주의 전쟁이라는 수렁을 헤쳐 나오는 일이었다. 118, 2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평화에 대한 법령을 채택했다. 소비에트 권력으로는 처음 며칠 동안이나, 진격한 케렌스키 군대 및 반란을 일으킨 사관생도들과 전투를 벌이느라, 또 당 중앙 위원회 안에서 화해주의 움직임과 투쟁하느라 시간을 다 보냈다. 1120, 최고인민위원회로부터 최고 사령관, 두호닌 장군에게 4개국, 독일, 오스트리아, 터키, 불가리아와 전투를 중단했고, 평화 협상을 시작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122일 직통 전화로 통화한 결과, 두호닌 장군은 최고인민위원회 명령을 거부했다. 경질됐고, 크릴렌코 동지는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렌니은 모든 연대, 사단, 군단, 군대 위원회 및 기타 위원회들, 혁명군 모든 병사들, 혁명 함대 모든 수병들에게도 무선 방송으로부터 병사, 수병들로부터 적극 사태에 개입하라고 촉구했었다. 장군들이 아니라 병사 대중으로는 레닌에게 손을 들어줬다. 레닌은 반혁명 장군들로부터 위대한 평화 대의를 망치도록 내버려두지 말라고 병사 대중들에게 호소했다.

 

1121, 소비에트 정부로는 러시아 연합을 맺은 나라 대표들에게 평화 법령을 검토하기를 제안하는 호소문을 보냈다.

 

1123, 레닌은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에서 연설했다. 평화를 위한 투쟁을 굳센 투쟁이라고 말했다. 다른 나라들과도 비밀 조약을 신문에다 발표했다. 정부는 얼마나 뻔뻔스럽게도, 대중에게 거짓말을 해댔고, 대중을 기만했는지를 적나라게 알 수 있었다.

 

1123, 소비에트 정부로는 전쟁에 대한 이해 관계를 갖고 있지도 않은 중립국들에게, 소비에트 정부로는 평화 협상에 돌입할 준비는 됐음을 공식 경로로부터 적국 정부에게도 알려주기를 제안했었다. 레닌은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에서 평화는 위로부터만 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아래로부터 평화를 쟁취해야 한다고 연설했다.

 

1127, 독일 최고사령관으로부터 평화 협상에 동의한다는 답변을 받았다. 독일 상황은 좋지 않았다. 식량 부족도 심각했었다. 인민은 전쟁에서도 지쳤다. 독일로는 러시아화 평화 체결로부터 프랑스와 싸움에 힘을 보태줄 수 있고, 프랑스에 승리하고 나면 뒤로는 러시아도 처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독일 사령관 답신이 오자, 최고인민위원회의로는 즉시 연합국들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미국에게 121, 상대방과 평화 협상을 시작할 용의를 밝혔다. 연합국들은 답을 주는 대신 소비에트 정부를 건너뛰고, 해임된 두호닌 장군에게 단독 강화에 항의하는 편지를 보냈다.

 

121, 이오페를 단장으로 하는 대표단 전선으로 떠났다. 대표단으로는 카라한, 카메네프, 소콜니코프, 비첸코, 므스치슬라프스키로 들어갔고, 노동, 농민, 수병, 병사 대표도 각각 한 명씩 들어갔다. 최고인민위원회로는 독일 노동계급들에게 보내는 호소문도 배포했다.

 

123, 휴전 협상을 개시했다. 소비에트 대표단은 협상 목적으로, 민족 자결권을 보장하고, 합방, 배상 없이 포괄적인 평화를 달성하고자, 다른 모든 교전 당사국들에게 현재 협상에 참가하라는 제안을 보내자는 내용으로 선언문을 발표했다.

 

125, 일주일 동안 군사 행동을 중단한다는 협정을 조인했다.

 

127, 외무 최고인민위원회의로는 다시 한 번 연합국 대표들에게 평화 협상에 대한 태도를 결정해달라고 했다. 답변은 오지도 않았다.

 

1211, 보크로프스키, 파블로비치는 보강된 대표단으로 다시 브레스트로 떠났다.

 

1213, 평화 협상을 재개했고, 114일까지 휴전을 연장했다. 협상은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1225, 독일로는 강화 조약에다 모든 교전국을 가입한다면, 합방, 배상 없는 평화에 동의한다고, 네 동맹국 일므으로 천명했다. 그들은 그런 일이 없으리라고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선언은 네 나라는 전쟁에 대한 모든 책임을 연합국에다 떠넘기기를 원한다는 뜻을 담아냈다.

 

12월 말까지 협상은 선동에 가까운 성격이었다. 협상 성과라면 일시적인 휴전을 달성하고, 독일 군대 안에서 평화를 지지하는 선동 활동은 폭 넓게 전개했다.

 

1918년 초부터 협상 성격은 변했었다. 1월 초 군국주의 합방 정책을 지지하던 류덴도르프, 힌덴부르크로는 빌헬름 2세에게 최후 통첩을 보내고는, 브레스트 리도프스크에서 단호한 합방 정책을 시행했고, 협상 지도권을 군 사령부에다 넘기라는 요구를 실현하지 않을 경우 사임하겠다고 협박했다. 평화 협상 지도권은 호프만 장군에게 넘어 갔다.

 

17, 이번에는 트로츠키로부터 이끄는 협상단은 브레스트로 다시 떠났다. 19, 평화 협상을 재개했다. 독일 대표단은 최후통첩을 보냈다. 120일 무렵, 독일 태도는 명백해졌다계속 전쟁을 할지, 합방에 대한 강화를 할지 택하라고 했었다. 독일은 자신들이 점령한 모든 땅을 그대로 가지고는 대외적으로는 포로 유지비라는 명목으로 은폐한 약 30억 루블 배상금을 몇 년간 나누어 지불하는 조건으로 러시아에다 부과하고자 했었다.

 

19181월 중순, 비엔나에서 총파업을 개시했다. 기아는 극심해졌다. 평화를 갈망하는 노동계급들은 브레스트 리도프스크에서 동맹국들이 보인 합방 정책에도 격분했기 때문이었다. 파업은 전국을 휩쓸었고, 노동대표소비에트 결성으로 이어졌다. 베를린에서도 파업은 개시했다. 공식 자료로는 50만 명 노동게급들도 파업을 벌였다. 다른 도시들에서도 파업은 일어났다. 파업 노동계급들로는 공화국을 선포하고, 강화를 맺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혁명은 아직도 멀었다. 모든 권력은 빌헬름 2, 힌덴부르크, 류덴도르프, 부르주아지 손에 있었다.

 

레닌은 다가오는 세계 혁명으로 크게 바랬었다. 114일에, 전선으로 떠나는 최초 사회주의 군용 열차를 전송하면서, 인민은 깨어나고 있다고 말했었다. 아직은 미래 일이었다. 레닌 특징은 현실은 아무리 비참할지라도, 스스로를 속이지는 않았고, 성공에도 취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늘 냉정한 눈으로 현실을 잘 직시할 줄 알았다. 그리고 그렇게 한다는 건 늘 쉬운 일도 아니었다. 레닌은 냉철하게 판단하고, 철저하게 계산만하는 체스 선수와는 거리도 먼 사람이었다. 그러나 레닌에게는 강한 의지도 있엇다. 많은 인내를 했고 다시 생각해야만 했다레닌은 두려움 없이 진실을 직시할 줄 알았다.

 

과연 우리에게도 싸울 힘은 있는가라고 물었고, 전선에서 온 병사 대표들과 늘 대담을 나누었고, 전선에서 상황, 군 상태를 철저하게 연구했었고, 동원 해제에 대한 제1차 전군 회의에도 참석하기도 했었다. 레닌은 군대 대표들에게도 세 가지 질문을 던졌다.

 

1). 독일은 진격하리라고 예상할 근거는 있는가.


2). 독일이 진격할 경우로는 군대가 군수품, 일부 장비와 대포를 전선에서 후방 깊숙하게 빼낼 수 있는가.

 

3). 현재 상태로 군대는 독일 진격을 저지할 수 있는가였다.

 

회동에 참석한 대다수로는 1).에서 긍정적이었지만, 2). 3). 에서는 부정적이었다. 왜냐하면 병사들 동원 해제 분위기, 늘어가는 탈영, 불충분한 사료 공급으로부터 말 탈진 등도 이유였다.

회동으로는 약 300명 대표들도 참석했었다. 레닌은 시점으로는 독일과 싸움을 계속할 수 없다고 전적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레닌은 비관주의로 빠지지는 않았다. 조국을 방어하고자, 붉은 군대를 조직하자는 강력한 운동을 벌여나갔다. 문제를 분명하게 제기했다. 현재로는 전투를 치를 수는 없었다. 레닌은 전쟁을 할 수 있다는 동지들에게도 말했다. 전선으로 나가보시오. 그리고 충고도 했다. 병사들과도 이야기를 나누어 보라고. 우랄 분위기는 전투적이었다. 노동계급들은 전투에도 뛰어들 준비를 마쳤고, 분견대와 대포를 준비했다. 3월 초에 열린 제7차 당대회에서 레닌은 10월 혁명 뒤로 10, 11, 12월 초기 몇 개월 동안이나 반혁명, 소비에트 권력 적들에게 맞선 전선에서도 승리를 거듭했다고 말했었다. 그리고는 브레스트 협상에서 합방과 배상 없이 강화가 이뤄질 수 있다고 했으나, 독일 제국주의로부터 속이기만 했다. 그래서 합방으로부터 강화를 택하든가, 아니면 전쟁으로 깨지든 미리 알면서도 전쟁을 계속하든가, 양단간 즉시 답을 내놓아야만 했다. 따라서 레닌은 관점을 고수했고, 두 달 내내 내부 투쟁으로부터 말할 수 없이 힘들었다. 페트로그라드 위원회, 모스크바 위원회도 레닌을 반대했다. 좌익 공산주의 분파로는 페테르부르크에서 일간지, <공산주의>를 발간했다. 굴욕적인 평화 협정을 체결하느니, 소비에트 권력을 죽이는 게 차라리 낫다는 등 헛소리를 해댔다. 역량을 전혀 고려하지도 않고 혁명 투쟁만 논했었다. 그들에게는 독일 제국주의 정부와 평화 협정을 체결한다면, 모든 혁명 입장을 포기하고, 국제 프롤레타리아트 대의를 배신한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리고 좌익 공산주의들로 가담했다. 정작 레닌 주변은 텅 비어버린 듯 했었다.

 

처음에는 중앙 위원회 다수로는 레닌에게 반대표를 던졌다. 124일이자 11, 다수 9명은 평화 협정을 체결하지 말고, 동원을 해제하자는 트로츠키 안을 찬성했다. 반대한 사람은 7명이었다. 23일이자 121, 평화 협정을 체결하는 문제로는 5명은 찬성했고, 9명은 반대했다. 217일로는 독일 평화 협정을 즉각 제안하자는 데 5명은 찬성했고, 6명은 반대했고, 218일로는 독일 평화 협상을 재개를 제안하자는 데, 6명은 찬성하고, 7명은 반대했다.

 

역관계로는 223, 독일은 조건을 통보했고, 48시간 이내로 답하라고 요구하는 한편 진격을 단행하고는, 도시들을 차례로 점령해서는 상황은 바뀌고 나서야 달라졌다. 레닌은 혁명 문구만 늘어놓는 정책을 계속한다면, 중앙 위원회, 정부에서 사임하겠다고 결정했다. 독일 조건을 받아들일지에 대해 7명은 찬성했고, 4명은 반대했다. 그리고 4명은 기권했다. 기권 가운데로는 중대한 문제를 결정하는 그토록 중요한 순간에도, 책임을 지고자 하지 않았던 트로츠키도 포함됐다. 독일 요구 조건에 기반을 둔다고 해도 평화 협정을 체결하기로 찬성한 주요한 다섯 명, 레닌, 스베르들로프, 스탈린, 소콜니코프, 스밀가에 지노비예프, 사타소바도 합세했다. 평화 협정에도 반대한 사람들은 선동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독일 진군으로 매우 빠르게 사람들은 정신을 차렸다. 7차 당대회 열릴 무렵, 레닌 관점은 압도적인 다수를 획득했다. 38, 7차 당대회로는 찬성 30, 반대 12, 기권 4, 브레스트 리도프스크에서 조인한 강화 조약을 비준해야 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316, 모스크바에서 소집한 제4차 소비에트 대회로는 찬성 704, 반대 285, 기권 115로 브레스트 조약을 비준했다.

 

동지들은 낙관적일 때도, 레닌은 더욱 신중했다. 7차 당대회 요지로는,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혁명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도박꾼같이 행동할 수 있으므로, 무르 익지 않은 국제 혁명 대신, 실제로는 조성된 상황에서 무력하게만 남아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레닌은 크룹스카야에게도, 평화 협정도 체결하지 않고, 전쟁도 하지 않는다는 입장은 근본적으로 틀렸고, 모든 논거를 거듭해서 말해 주곤 했다. 그러나 1918119일에야 독일에서 혁명을 개시했고, 19181113,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로는 브레스트 조약을 파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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