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노동일

 

10-1. 노동일의 한계들

 

노동력은 그 가치대로 매매된다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노동력 가치는 여타 상품과 마찬가지로 노동력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 시간으로 결정된다. 노동자가 매일 평균적으로 소비하는 생활 수단의 생산에 6시간이 필요하다면,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매일 재생산하거나 판매 가치(임금)를 재생산하고자 평균적으로 하루에 6시간을 노동해야 한다. 6시간이 노동일에서 필요 노동 부분이 되며,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 이는 고정된 양이다.

 

그러나 이 6시간만으로는 노동일 자체의 길이는 결정되지 않는다. 선분 A-B가 이 6시간의 필요 노동 시간을 나타낸다고 가정할 때, 노동이 A-B를 넘어 1시간, 3시간, 또는 6시간 등으로 연장됨에 따라,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상이한 노동일 길이를 얻게 된다.

 

노동일

 

1. A-B + 1시간 (7시간)

2. A-B + 3시간 (9시간)

3. A-B + 6시간 (12시간)

 

이 연장된 부분, 곧 필요 노동 시간을 초과하는 노동은 잉여 노동이며, 이 잉여 노동 부분이 노동일에서 전체 길이를 규정한다.

 

제시된 세 노동일은 각각 7시간, 9시간, 12시간으로 구성된다.

 

노동일은 필요 노동(AB)과 잉여 노동(BC)의 합, = AC = AB + BC 로 정의된다. 잉여 노동(BC)의 변화에 따라, 노동일(AC)의 길이도 변한다. 필요 노동(AB)이 고정되어 있으므로, 잉여 노동(BC)과 필요 노동(AB)의 비율을 측정할 수 있다.

 

잉여 가치율

 

잉여 가치율은 필요 노동 시간에 대한 잉여 노동 시간의 비율, BC/AB로 규정된다.

 

· 노동일 I: BCAB1/6= 잉여 가치율 16.7%

· 노동일 II: BCAB3/6= 잉여 가치율 50%

· 노동일 III: BCAB6/6= 잉여 가치율 100%

 

잉여 가치율만으로는 노동일의 실제 길이를 알 수 없다. 예를 들어, 잉여 가치율이 100%라 해도, 노동일은 8시간, 10시간, 12시간 등 다양할 수 있다. 100%의 잉여 가치율은 노동일의 두 구성 요소[필요 노동(AB)과 잉여 노동(BC)]의 크기가 같음[필요 노동(AB) = 잉여 노동(BC)]을 나타내지만, 각 부분의 절대적인 크기는 알려주지 않는다.

 

노동일은 고정된 수량이 아닌 변동하는 수량이다. 노동일의 두 구성 부분 중 필요 노동은 노동력 재생산에 필요한 시간으로 결정되나, 노동일의 총 길이는 잉여 노동의 지속 시간에 따라 변동한다. 따라서 노동일은 결정될 수 있지만, 그 자체로서는 불확정적이다. 이처럼 노동일은 고정적지 않고 유동적이지만, 오직 일정한 한도 안에서만 변동할 수 있다. 잉여 노동(BC)0이라고 가정할 경우, 노동일은 노동자가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노동해야 하는 최소 한도에 도달하는 것은 사실이나, 이 최소 한도는 규정될 수 없다.

 

자본주의 생산 양식에서 필요 노동은 항상 노동일의 일부에 지나지 않으므로, 노동일은 결코 최소 한도까지 단축될 수 없다. 다른 한편, 노동일에는 일정한 한계 이상으로 연장될 수 없는 최대 한도가 존재하며, 이는 두 가지 요인으로 규정된다.

 

첫째로, 노동력의 육체적 한계이다. 인간은 1 자연일(24시간) 동안 일정한 양의 생명령만을 지출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은 하루 중 일정한 시간을 휴식과 수면에 할애해야 하며, 식사, 세수, 목욕, 의복 착용 등 그 밖의 육체적 욕구 충족에도 시간을 사용해야 한다. 예를 들어, 말이 날마다 일할 경우 하루 8시간만 일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둘째로, 노동일의 연장은 순전히 육체적인 한계 외에 사회적 한계에 직면한다. 노동자는 지적 및 사회적 욕구 충족을 위한 시간을 필요로 하며, 이 욕구의 크기와 종류는 해당 사회에서 일반적 문화 수준으로 규정된다. 따라서 노동일의 길이는 육체적 및 사회적 한계 내에서 변동한다. 그러나 이 두 한계는 모두 매우 탄력적이며, 변동 폭이 커서, 실제로는 8시간, 10시간, 12시간, 14시간, 16시간, 18시간 등 길이가 매우 다양한 노동일이 관찰된다.

 

자본가는 노동력을 그 하루 가치로 구매했으므로, 1 노동일 동안에 노동력의 사용 가치는 자본가에게 귀속된다. 이는 곧 자본가가 하루 동안 노동자를 자기에게 노동시킬 수 있는 권리를 획득했음을 의미한다. 1 노동일은 자연의 하루(24시간)보다는 짧지만, 그 정확한 길이에 대한 자본가의 견해는 독특하다. 자본가는 인격화된 자본에 불과하며, 그의 정신은 곧 자본의 정신이다. 따라서 자본가에게는 단 하나의 충동만이 존재하는데, 이는 자신의 가치를 증식시키고, 잉여 가치를 창조하며, 자신의 불변 부분인 생산 수단을 최대한 많은 양의 잉여 노동을 흡수하게 하려는 일이다.

 

자본은 주어진 일정한 가치인 죽은 노동이며, 흡혈귀처럼 살아 있는 노동을 흡수할 때에만 활력을 얻고, 흡수량이 증가할수록, 더욱 활기를 띤다. 노동자가 노동하는 시간은 자본가가 구매한 노동력의 사용 가치를 소비하는 시간이다. 노동자가 자본가의 처분에 맡긴 시간을 자신을 위해 사용한다면, 자본가는 이를 자본가의 물건을 훔치는 행위로 간주한다. 자본가는 상품 교환의 법칙에 의거하여, 다른 모든 구매자처럼 자신이 획득한 상품(노동력)의 사용 가치로부터 최대한 많은 이익을 짜내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산 과정에서 거친 소음 속에서 침묵하던 노동자의 목소리가 돌연 나타난다.

 

내가 당신에게 판매한 상품(노동력)은 소비되면 가치, 심지어 그 자체 가치보다 더 큰 가치를 창조한다는 점에서 여타 상품과 다르며, 당신이 이를 구매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당신에게 자본의 가치 증식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나에게는 노동력의 초과 지출이 된다. 당신과 나는 시장에서 오직 상품 교환의 법칙만을 알고 있으며, 상품의 소비 권한은 판매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사들인 구매자에게 있다. 그러므로 나의 노동력에서 하루 사용은 당신에게 속한다. 그러나 나는 매일 노동력을 팔아 얻은 돈으로 매일 그것을 재생산해야 하며, 그래야만 반복적으로 노동력을 팔 수 있다. 나는 노화 등의 자연적 건강 약화는 제외하고라도, 내일도 오늘과 마찬가지로 정상적인 상태의 힘, 건강, 원기를 가지고 노동할 수 있어야 한다.

 

당신은 언제나 나에게 절약과 절욕의 복음을 설교한다. 나는 분별 있고 근검절약하는 소유주처럼 나의 유일한 재산인 노동력을 아껴 쓰고, 어리석게 낭비하는 일을 삼가려 한다. 나는 노동력의 정상적인 유지와 건전한 발달에 적합한 정도로만 매일 그것을 지출하고, 운동시키고, 노동으로 전환시킬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노동일을 무제한 연장하면서 내가 사흘에 걸려 회복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노동력을 하루 동안 소진시킬 수도 있다. 이로 인해 당신이 노동으로부터 이득을 보는 것만큼, 나는 노동 실체를 잃게 된다. 나의 노동력을 이용하는 일과 그것을 약탈하는 일은 전혀 다르다.

 

평균적인 노동자가 합리적인 노동으로 30년을 생존할 수 있다면, 당신이 매일 나에게 지불해야 할 노동력의 가치는 총 가치의 365×30 = 10,950, 1/10,950이다. 그러나 당신이 나의 노동력 전체를 10년만에 소진시키려고 하면서도, 10년 생존에 필요한 일일 가치(1/3,650)이 아닌, 1/10,950만을 지불한다면, 당신은 노동력의 하루 가치 중 1/3만을 지불하는 일이 된다. 결과적으로 당신은 매일 나로부터 내 상품 가치의 2/3를 훔치는 일이다. , 당신은 3일분의 노동력을 사용하면서 1일분의 대가만을 지불하는 셈이다. 이는 우리 간 계약과 상품 교환 법칙 모두에 위반된다. 따라서 나는 알맞은 길이의 노동일을 요구한다.

나는 당신의 동정이 아닌 요구를 표명한다. 상거래에서는 인정(人情)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이 모범적인 시민이거나, 동물 학대 방지 협회의 회원이거나, 심지어 성인이라는 명성을 누릴지라도, 당신이 나와의 관계에서 대표하는 자본은 심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거기에서 고동치듯이 보인다면, 그것은 오직 나 자신의 심장의 고동일 뿐이다. 나는 표준 노동일을 요구한다. 그 이유는, 다른 모든 판매자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내 상품의 가치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상품 교환 자체의 본질은, 약간의 탄력적인 제한을 제외하고는, 노동일이나 잉여 노동에 어떠한 절대적인 한계도 부과하지 않는다. 자본가가 노동일을 최대한 연장하여 기어이, 1 노동일을 2 노동일로 만들려고 할 때, 그는 구매자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다. 반면에, 판매된 상품(노동력)의 특수한 성질은 그 소비에 일정한 한계가 있음을 암시하는데, 노동자가 노동일을 일정한 표준적인 길이로 제한하려고 할 때, 그는 판매자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다. 따라서 여기에는 권리 대 권리라는 이율배반이 발생한다. 쌍방 모두 상품 교환의 법칙이 보증하는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는 상황에서, 힘이 문제를 해결하게 된다. 그래서 자본주의 생산의 역사에서 노동일의 표준화는 노동일의 한계를 둘러싼 투쟁, , 총자본(자본가 계급)과 총노동(노동자 계급) 사이의 투쟁으로 결정된다.

 

10-2. 잉여 노동에 대한 탐욕, 공장주와 보야르

 

자본이 잉여 노동을 발명한 것은 아니다. 생산 수단이 특정 사회 구성원의 독점 하에 있는 곳이라면, 노동자는 그 신분과 무관하게 (자유롭든, 비자유롭든) 자신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노동 시간을 넘어선 잔여 시간을 생산 수단 소유자(아테네 귀족, 에트루리아 신정관, 로마 시민, 노르망디 영주, 미국 노예 소유자, 왈라키아 봉건적 대지주, 현대 지주와 자본가 등)를 위한 생산 수단 생산에 할애해야 한다. 그러나 생산물의 사용 가치가 지배하는 경제 체제에서는 잉여 노동이 욕구의 한정으로 인해 제약을 받으며, 생산 자체의 성격으로부터 잉여 노동에 대한 무제한의 욕구가 발생하지는 않는다.

 

고대에는 교환 가치의 독립적인 화폐 형태 획득이 이뤄진 금이나 은의 생산징에서만 과도 노동이 두드러졌으며, 이때 죽도록 일을 시키는 강제 노동이 공인된 형태였다. 디오도루스 시쿨루스의 기록 이를 입증한다. 이는 고대에 예외적인 현상이었으나, 노예 노동이나 부역 노동 같은 낮은 생산 형태에 의존하는 민족들이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지배하는 세계 시장으로 편입되고, 생산물의 해외 판매를 중시하게 되면서 상황은 변했다. 이에 따라 노예제나 농노제의 야만적 잔학성 위에 과도 노동이라는 문명화된 잔학성이 결합된다.

 

미국 남부 주들의 흑인 노동은 당초 국내 수요 충족이 주 목적인 온건한 가부장적 성격을 띠었으나, 면화 수출이 사활 문제가 되면서, 과도 노동 및 7년간의 노동으로, 흑인 생명을 소모하는 일이 계획적인 수익 증대 수단이 되었다. 이는 더 이상, 유용한 생산물 확보가 아닌 잉여 가치 그 자체의 생산을 목표로 했음을 의미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다뉴브 제후국(현 루마니아)의 부역 노동에서도 잉여 노동에 대한 탐욕이 나타났는데, 특히 부역 노동에서는 잉여 노동이 독립적이고 구별할 수 있는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이를 영국 공장의 잉여 노동과 비교하는 일은 흥미롭다.

하루 노동이 필요 노동 6시간과 잉여 노동 6시간으로 구성될 때, 자유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주당 6×6, 36시간의 잉여 노동을 제공한다. 이는 그가 주 3일은 자신을 위해, 나머지 3일은 자본가를 위해 무상으로 노동하는 것과 실질적으로 동일하다. 하지만 잉여 노동과 필요 노동이 혼합되어 있어, 이러한 사실은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이 관계는 매분 30초가 자신을 위해, 30초는 자본가를 위해 노동하는 형태로도 설명될 수 있다. 반면, 이러한 사실은 부역 노동에서는 직접적으로 명확하게 드러난다.

 

왈라키아의 농민의 필요 노동은 자신의 경작지에서, 잉여 노동은 영주(보야르)의 농장에서 수행되기에, 두 노동은 명백히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병존한다. 부역 노동에서 잉여 노동이 필요 노동과 명확히 분리되는, 이러한 현상 형태의 차이가 잉여 노동과 필요 노동의 양적 비율 자체를 변경시키지는 않는다. , 3일간의 잉여 노동은 부역 노동이든, 임금 노동이든, 노동자에게 아무런 등가물을 주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다. 다만, 잉여 노동에 대한 탐욕은 자본가에게는 노동일 무제한 연장 충동으로 나타나는 반면, 보야르에게는 훨씬 직접적으로 부역 일수 자체의 추구로 나타난다.

 

다뉴브 제후국에서 부역 노동은 현물 지대 및 기타 농노제 부속물과 결합되어 있었으나, 지배 계급에게 가장 중요한 공납은 여전히 부역 노동이었다. 이곳에서는 농노제가 부역 노동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는데, 루마니아 지방도 마찬가지였다. 루마니아에서 본래 생산 양식은 공동체적 소유에 기반을 두었으며, 이는 슬라브적 또는 인도적 형태와는 달랐다. 토지의 일부는 공동체 구성원들로부터 독립적인 자유로운 사적 소유로 경작되었고, 나머지 일부인 공유지는 공동으로 경작되었다. 이 공동 노동의 생산물은 흉작과 재해에 대비한 예비 재원 또는 전쟁 비용, 종교 비용 등 공동체 지출을 위한 국고로 활용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군사적, 종교적 고위층이 공유지와 그에 결부된 공동 노동을 횡령하였다. 그 결과, 자유로운 농민들의 공유지 노동은 공유지 횡령자들에 대한 부역 노동으로 변질되었다. 이 부역 노동은 곧 농노적 관계로 발전하였고, 이후 해당 지역을 점령한 러시아가 농노제 폐지를 명분으로 삼아 부역 노동을 법으로 제정하였다. 1831, 러시아 장군 키셀료프가 공포한 부역 노동 법전은 실질적으로 보야르의 구술을 토대로 만들어졌으며, 이로부터 러시아는 다뉴브 제후국 귀족들과 유럽 자유주의자들의 지지를 동시에 얻을 수 있었다.

 

국가기본법 또는 헌법에 해당하는레글루만 오르가니크(Reglement organique)는 부역 노동 법전이었으며, 왈라키아의 농민들은 소위 지주에게 상세히 규정된 현물 공납에 더하여 특정 부역 의무를 이행해야 했다.

 

법정 부여 일수

 

1. 12일의 일반 노동

 

2. 1일의 경작 노동

 

3. 1일의 목재 운반 노동

 

전체 부역 일수는 연간 14일로 합산된다. 그러나 이 노동일은 통상적 의미가 아닌, 1일분의 평균 생산물 생산에 필요한 노동일로 해석되었는데, 이 평균 생산물의 양은 교활하게도 아무리 건장한 사람이라도, 24시간 안에 도저히 완수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따라서레글루만자체도 이러한 사실을 러시아식의 풍자적이고, 노골적인 언어로 명확히 드러낸다.

 

법전에서 명시된 12일의 일반 노동은 실제로는 36일의 육체 노동으로, 1일의 경작 노동은 3일의 경작 노동으로, 1일의 목재 운반 노동 역시 3배로 해석되어, 합계 42일의 부역일이 도출된다. 여기에 영주의 특별한 필요에 따라 마을 인구수에 비례해 차출되는 추가 노동 봉사인 요바기Jobbagio’가 더해진다.

 

왈라키아의 농민 1인당 14일로 책정된 이 추가 부역 노동을 합하면, 연간 의무적인 부역 노동은 총 56일에 이른다. 왈라키아는 기후 불순으로 인해, 연간 노동 경일수가 210일에 불과하며, 일요일과 명절 40, 악천후로 인한 휴일 평균 30일을 제외하면, 실제 농민이 노동할 수 있는 잔여 일수는 140일이다.

 

가용한 노동 일수 140일 가운데 휴일 70일을 제외하고, 남은 140일에서 부역 일수 56일을 제외한 필요 노동일 수는(140 - 56 = 84)이다. 이에 대한 부역 노동의 비율, 곧 잉여 가치율은 56/84, 662/3%, 이는 영국 농업 및 공장 노동자의 잉여 가치율보다 낮은 수치이다. 그러나 법률상 제정된 부역 노동에 불과하며, 영국 공장법보다 자유주의적레글루만는 그 규정을 쉽게 우회할 방법을 마련해 두었다.

 

이 법은 56일 부역일 각각의 명목상 하루 작업량이 실제로는 다음 날로 넘겨야 할 정도로 과도하게 규정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하루에 베어야 할 풀밭 면적은 실제 소요 시간의 두 배에 달했으며, 특히 옥수수 밭의 제초 작업이 그러했다. 일부 농업 노동의 경우, 법정 1일분 노동은 5월에 시작해 10월에 끝난다고 해석될 수 있었다. 몰다우 지방에서는 규정이 더욱 가혹하여, 승리에 도취한 보야르는 레글루만에 규정된 14부역일은 1365일이다.”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다뉴브 제후국의레글루만이 잉여 노동에 대한 탐욕을 승인하고, 합법화하는 반면, 영국 공장법은 이와 상반된 역할을 수행한다. , 자본가와 지주가 지배하는 국가가 노동일을 강제적으로 제한하여, 노동력의 무제한 착취를 추구하는 자본의 충동을 억제하는 일이다. 증가하는 노동 운동을 제외하고 보더라도, 공장 노동일의 제한은 영국의 경작지에 구아노 비료(남미 바다새의 배설물)를 뿌리게 한 일과 동일한 필요성에서 발생했다. 이는 이윤에 대한 맹목적인 탐욕이, 한편으로는 토지를 메마르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민의 생명력을 뿌리째 파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주기적인 전염병 발생과 독일, 프랑스 병사들의 표준 키 감소는 이러한 현실을 명백히 보여준다.

 

현재(1867) 시행 중인, 1850년 공장법은 하루 평균 10시간 노동을 규정한다. 주초 5일은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총 12시간이지만, 아침 식사 30분과 점심 식사 1시간을 제외하여 실제 노동 시간은 10시간 반이다. 토요일은 아침 6시부터 오후 2시까지, 8시간 중 아침 식사 30분을 제외하여, 7시간 반의 노동을 허용한다. 결과적으로, 주 노동 시간은 총 60시간이다. 이 법률의 집행을 위해 내무 장관 직속의 공장 감독관이 임명되며, 그들의 반년간 보고서가 의회로부터 공표되어, 잉여 노동에 대한 자본가의 탐욕에 관한 공식적인 통계 자료를 제공한다. 이제 공장 감독관들의 보고 내용을 잠시 살펴본다.

 

부정직한 공장주는 법정 시작 시간인, 아침 6시보다 15분 일찍, 또는 그보다 빠르거나, 늦게 작업을 개시하고, 종료 시간인 오후 6시보다 15분 늦게, 또는 그보다 빠르거나 늦게 작업을 종료한다. 또한, 명목상 아침 식사 시간 30분의 처음과 마지막에서 각각 5분씩을, 점심 시간 1시간의 처음과 마지막에서 각각 10분씩을 단축한다. 토요일에는 법정 종료 시간인 오후 2시보다 15분 늦게, 또는 그보다 빠르거나 늦게 작업을 끝낸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가 얻는 추가적인 노동 시간, 곧 이득은 다음과 같다.

 

평일

 

· 오전 6시 이전: 시간(): 15, 5일간 합계(): 75

· 오후 6시 이후: 시간(): 15, 5일간 합계(): 75

· 아침 식사 때: 시간(): 10, 5일간 합계(): 50

· 점심 식사 때: 시간(): 20, 5일간 합계(): 100

 

· 1일 합계: 시간(): 60

 

· 5일간 합계(): 300

 

토요일

 

· 오전 6시 이전: 시간(): 15

· 아침 식사 때: 시간(): 10

· 오후 2시 이후: 시간(): 15

 

· 토요일 합계: 시간() 40

 

· 1주간 총계: 340(5시간 40)

 

공장주가 노동장에게서 착취하는 추가 노동 시간은 1주일에 5시간 40(340)이다. 이 이득을 공휴일이나 임시 휴업 2주를 제외한, 50 노동 주간에 걸쳐 누적하면, 27 노동일에 해당한다. 이는 [(340×50) ÷ (10.5시간(630)]로 나누어 산출된 수치이다.’

 

노동일이 매일 5분씩 연장된다면, 이는 연간 총 2.5 노동일의 추가 노동량을 초래한다. 아침 6시 이전, 오후 6시 이후, 그리고 식사 시간 전후에서 시간을 조금씩 단축하여, 하루에 총 1시간을 추가로 확보한다면, 이는 실질적으로 1년에 13개월 노동하는 것과 동일한 효과가 생긴다.’

 

공황기에 생산이 중단되어 주당 며칠만 작업하는 단축된 시간작업이 시행되더라도, 이는 노동일을 연장하려는 충동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사업 규모가 축소될수록, 그 축소된 사업에서 발생하는 이윤은 더 커져야 하므로, 작업 시간이 짧아질수록, 그중에 잉여 노동 시간은 오히려 더 길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1857-1858년 공황기 동안 공장 감독관들은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경기 침체 시기에 과도 노동이 발생하는 일은 모순적으로 보이나, 이 불경기가 오히려 파렴치한 자들에게 위법 행위를 충동하여 초과 이윤을 얻게 한다. 호너는 지난 반 년간, 자신의 관할 구역에서 122개 공장이 폐업하고, 143개 공장이 휴업했음에도 불구하고, 법정 시간 이상의 과도 노동이 지속되고 있음을 보고한다. 마찬가지로, 하우엘은 불황으로 많은 공장이 폐업하거나, 조업을 단축하는 기간에도, 노동자들이 법률로 보장된 식사 시간과 휴식 시간을 침해당하며, 매일 1/2시간 내지 3/4시간을 강탈당하고 있다는 불만을 여전히 많이 접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1861년에서 1865년 사이의 격심했던 면화 공황기에도, 이와 동일한 현상이 다소 작은 규모로 반복되었다.

 

식사 시간이나 기타 불법적인 시간에 노동이 이루어지는 현장을 적발했을 때, 공장주들은 노동자들이 정해진 시간에 공장을 떠나려 하지 않아, 노동(기계 청소 등)을 중지시키기 위해, 특히 토요일 오후에는 강제가 필요했다고 변명한다. 그러나 직공들이 기계가 멈춘 뒤에도 공장에 머무는 실제 이유는, 평일에는 오후 6시 이전, 토요일에는 오후 2시 이전에 청소 등의 작업을 할 틈을 노동자들에게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법정 시간을 초과하는 과도 노동에서 발생하는 초과 이윤은 많은 공장주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큰 유혹으로 작용한다. 이들은 적발되지 않기를 바라며, 설령 적발되더라도, 벌금액과 재판 비용이 적기 때문에, 그 차액이 여전히 이익이 될 것이라고 계산한다. 특히, 하루 중 시간을 조금씩 도용하여, 추가 노동 시간이 누적되는 경우, 감독관들이 그 위법 행위를 입증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이 이러한 행위를 부추긴다.’

 

자본이 노동자의 식사 시간과 휴식 시간에서 불법적으로 착취하는 행위를 공장 감독관들은 ()도둑또는 분 뜯어먹기라 칭하며, 노동자들의 이를 식사 시간 야금야금 깎아먹기라고 부른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는 잉여 노동에 따른 잉여 가치의 형성이 전혀 은폐되지 않고 명백하게 드러난다.

 

매일 단 10분의 시간외 노동만 허용한다면, 그것은 연간 1,000 파운드를 내 주머니에 넣어주는 일과 같다고, 한 존경받는 공장주가 나에게 말했다. 이는 매 순간마다 바로 이윤의 요소가 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하루 종일 노동하는 노동자를 전일제 노동자(full timer)’, 하루 6시간 초과 노동이 허용되지 않는 13세 미만 아동을 단시간 노동자(half timer)’로 칭하는 일보다 더 특징적인 일은 없다. 노동자는 이 체제 내에서 단지 노동 시간의 인격화에 불과하며, 모든 개인적 차이는 전일제 노동자단시간 노동자라는 구분으로 해소된다.

 

10-3. 착취의 법적 제한이 없는 영국의 산업 부문

 

우리가 지금까지 고찰했던 산업 분야는 노동일 연장과 잉여 노동에 대한 자본의 늑대와 같은 탐욕이 극에 달해, 결국에는 법적 규제의 사슬에 얽매일 수밖에 없었던 곳이었다. 이는 영국 부르주아 경제학자가 언급했듯, 아메리카 인디언에 대한 스페인 사람들의 잔학성에 못지않은 자본의 극도한 무법성에서 기인했다. 이제 시선을 돌려, 노동력 착취가 현재도, 또는 아주 최근까지도 아무런 구속이나 규제를 받지 않고 있는 소수 생산 부문을 살펴보려 한다.

 

‘1860114, 노팅엄시 회의실 집회에서 의장을 맡은 주의 치안 판사 찰턴은 이 도시 레이스(lace) 제조업 종사자들 사이의 참상을 폭로했다. 그는 영국 또는 문명 세계에서 전례를 찾기 어려운, 극심한 궁핍과 고통이 지배하고 있음을 밝혔다. 특히 9세에서 10세 아동들은 생계를 유지하고자, 새벽 2, 3, 4시에 불결한 잠자리에서 끌려나와 밤 10, 11, 12시까지 강제 노동에 시달렸다. 그 결과, 아이들의 팔다리는 위축되고, 신체 발육은 저해되었으며, 얼굴은 창백해졌고, 인간성은 완전히 마비되어 목석처럼 무감각한 상태가 되었는데, 이는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지경이었다.

 

말레트와 다른 공장주들이 이 토론에 항의하며 나선 것은 당연한 일이다. 몬터규 밸피 목사가 지적했듯이, 이러한 노동 제도는 사회적, 육체적, 도덕적, 정신적으로 변함없는 노예 제도나 마찬가지이다. 성인 남자의 노동 시간을 하루 18시간으로 제한해 달라고 청원하는 공청회가 열리는 도시의 실상은 충격적이다.

 

우리는 버지니아나 캐롤라이나의 면화 재배자들을 비난하지만, 그들의 흑인 시장, 채찍, 인간 매매가, 자본가가 돈벌이를 위해 면사포와 옷깃(칼라)를 제조하며, 매일 자행하는 완만한 인간 희생보다 더 흉악하다고 단정할 수 없다.’

 

스태퍼드셔에서 도자기 제조업은 지난 22년간 세 차례에 걸쳐 의회 조사를 받았다. 그 결과는 1841년 스크리븐의 보고(아동 노동 조사 위원회 제출), 1860년 그린하우의 보고(추밀원 의무관 지시 공표,공중 위생, 3차 보고서수록), 1863년 론지의 보고(1863613일자아동 노동 조사 위원회, 1차 보고서수록)에 담겨 있다. 여기서는 1860년과 1863년 보고서에서 착취당한 아동들 자신의 증언 인부를 인용하는 일로 충분하다. 이 아동들의 상태로부터 성인, 특히 부녀자들의 상태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며, 이들이 종사하는 도자기 제조업은 면방적업이 비교적으로 훨씬 쾌적하고 건전한 직업으로 보일 정도로 열악하다.

 

아홉 살, 윌리엄 우드는 만 710개월에 노동을 시작했다. 그의 업무는 그릇 만드는 틀을 나르는 일로, 완성된 제품이 담긴 틀을 건조실로 운반하고 빈 틀을 회수해 오는 일이었다. 그는 매일 아침 6시에 출근하여, 보통 저녁 9시경에 퇴근했다. 그는 저는 1주일에 6일 동안 날마다 저녁 9시까지 일합니다. 나는 최근 7, 8주일 동안 그렇게 해왔습니다.”라고 증언했다. 이는 일곱 살 난 아이가 하루 15시간 노동을 수행했음을 보여준다. 다음은 12살 난 소년 머리의 증언이다.

 

저는 그릇 만드는 틀을 운반하며 물레를 돌립니다. 내가 일하러 오는 시간은 아침 6시인데, 때로는 4시에 올 때도 있습니다. 저는 어젯밤 밤을 새워 오늘 아침 6시까지 일했습니다. 그저께는 밤부터 자지 못했습니다. 어젯밤은 저와 함께 8, 9명의 다른 소년들도 밤샘 작업을 했으며, 한 아이를 제외하고는 모두 오늘 아침에도 출근했습니다. 저는 주급으로, 3실링 6펜스를 받고 있습니다. 밤샘 노동을 해도 추가 수당은 없었습니다. 저는 지난 주에 이틀 밤을 새워 일했습니다.”

 

10세 소년 퍼니하우는 식사 시간의 부족함을 증언했다.

 

저는 저녁 식사를 위해 온전한 1시간을 확보하지 못합니다. 특히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에는 식사 시간이 반 시간에 불과한 경우가 자주 있었습니다.”

 

그린하우는 스토크 온 트렌트나 월스탠턴의 도자기 제조 지역에서 평균 수명이 특히 짧다고 보고했다. 스토크 지방에서는 20세 이상의 성인 남자 인구의 36.6%, 월스탠턴에서는 30.4%가 도자기 제조업에 종사한다. 이 연령층 성인 남자들의 폐병으로 인한 총 사망자 가운데, 스토크 지방은 절반 이상, 월스탠턴은 약 2/5가 도자기공이다. 헨리의 의사인 부스로이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며, 직업병의 심각성을 강조했다.

 

도자기공들은 세대가 지남에 따라 점차로 체격이 작아지고 허약해지고 있다.”

 

다른 의사인 맥빈 역시 이 현상을 확인했으며,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내가 25년 전에, 도자기공들을 상대로 개업한 이래, 그들은 현저하게 퇴화하고 있는데, 특히 키와 몸무게가 점점 감소하고 있다.”

 

이는 도자기공들의 노동 환경이 신체적 악화와 세대적인 퇴행을 초래하고 있음을 입증한다.

 

앞선 증언들은 그린하우의 1860년 보고서에서 인용되었다. 1863년 위원회 보고서에는 추가적인 증언이 수록되어 있다. 북부 스태퍼드셔 병원의 선임 의사인 알레지는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도자기공층은 남녀를 불문하고, 육체적, 도덕적으로 퇴화된 양상을 보인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발육 부진으로 체격이 불량하며, 가슴 기형이 흔하고, 조기 노화 및 단명을 특징으로 한다. 무기력하고 핏기가 없으며, 허약한 체질 탓에 위장병, ·신장병, 류마티스 등 만성 질환에 취약하다. 주요 질병은 폐렴, 폐결핵, 기관지염, 천식 등 폐 질환이며, 특히 이들에게 특유한 도자기공의 천식 또는 폐병이라 불리는 형태의 천식이 있다. 또한, 도자기공의 2/3 이상이 분비샘, 뼈 또는 신체 기간 부위를 침범하는 연주창에 시달린다. 이 지역 주민의 신체적 퇴화가 더 심해지지 않은 일은 주변 농촌 지역으로부터 인원 보충과 건강층과의 결혼 덕택으로 인한 영향으로 분석된다.”

 

전임 병원 외과 의사였던 찰스 파슨스는, 위원회 위원 론지에게 보낸 서신에서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이 통계적 자료가 아닌 개인적 관찰에 기반한 일임을 명확히 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일은, 불쌍한 아이들의 건강이 부모나 고용주의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희생되는 상황을 목격하고, 분개를 금치 못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음을 주저 없이 밝힌다.’

 

도자기공 질병에 주요 원인은 장시간 노동으로 집약된다. 이 위원회의 보고서는 다음과 같은 요망 사항을 지적했다.

 

세계적으로 지배적인 지위를 확보한 제조 산업이 더 이상 자신의 노동과 기능으로부터 성공을 가져온 노동 인구의 육체적 퇴화, 각종 신체적 고통, 조기 사망이라는 수치를 동반해서는 안 된다.’

 

잉글랜드에서 도자기업에 관한 설명은 스코틀랜드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한편, 성냥 제조업은 1833, ()을 나뭇개비에 붙이는 방법이 발명되면서 시작되었다. 이 산업은 1845년 이후 잉글랜드에서 급속히 발전하여, 런던 인구 밀집 지역에서 출발해 맨체스터, 버밍엄, 리버풀, 브리스톨, 노리지, 뉴캐슬, 글래스고까지 확산되었다. 이러한 산업의 확대와 더불어 파상풍이 만연하였는데, 이 질병은 이미 1845년 비엔나의 한 의사로부터 성냥 제조공들에게 고유한 질병으로 확인된 바 있다. 해당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절반은 13세 미만의 아동과 18세 미만의 미성년자들로 구성된다. 해당 제조업은 비위생적이고, 열악한 작업 조건으로 악명이 높았으며, 이로 인해 굶주린 과부와 같은 가장 비참한 노동층이 자신들의 누더기를 걸치고, 굶어 죽어가는, 교육도 받지 못한, 아동들을 이곳에 보내는 실정이었다.

 

당시 위원회 위원 화이트가 1863년에 심문한 증인 가운데 270명이 18세 미만이었고, 그중 50명은 10세 미만, 10명은 겨우 8, 5명은 겨우 6세였다. 노동 시간은 12시간에서 14-15시간에 달했고, 야간 노동까지 이루어졌다. 식사 시간은 불규칙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인()의 독이 가득한 작업장 내에서 해결해야 했다. 당시의 참상은 극도로 심각하여, 단테조차 이 광경을 목격했다면, 자신이 묘사했던 지옥의 모습도 여기에 비할 수 없음을 인정했을 것이다.

 

벽지 공장에서 거친 종류의 벽지는 기계로 인쇄하며, 정밀한 벽지는 수작업으로 인쇄한다. 이 공장에 성수기는 10월 초부터 4월 말까지의 기간이다. 이 성수기 동안 작업은 때때로 오전 6시부터 밤 10시 또는 그 이후까지, 거의 중단 없이 지속된다.

 

제조업 노동자들의 증언은 극심한 과로와 아동 노동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리치: 1862, 지난 겨울 19명의 소녀 중 6명이 과로로 결근했으며, 아이들이 졸지 않도록 고함을 쳐야만 했다.

 

더피: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조차 피로로 인해 눈을 뜨고 있기 힘들었다.

 

라이트본: 나는 13세이다. 지난 겨울, 저녁 9, 재작년 겨울에는 저녁 10시까지 일했으며, 발의 상처가 쑤시고 아파, 거의 매일 저녁 울고 지냈다.

 

아프스덴: 나는 내 아이가 7세 되던 때, 내 아이가 매일 16시간씩 일했으며, 아이를 등에 업고 눈길을 오갔다. 내 아이가 기계 곁에 서 있는 동안, 기계에서 떠나거나 멈출 수 없어, 무릎을 꿇고 음식을 먹여준 적이 있다.”

 

이 증언들은 노동 환경의 비인간적인 혹사와 아동 노동 착취의 수준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맨체스터 공장의 공동 경영자인 스미스: 우리 직공들은 식사 시간 없이 노동을 지속하며, 10시간 반의 일일 노동이 오후 4시 반에 종료된 후의 시간은 모두 시간외 노동으로 처리된다. 자신은 오후 6시 이전에 작업을 마치는 경우가 드물다. 이 공장의 아동(18세 미만 미성년자 포함 152)과 성인(140) 노동자들은 지난 18개월 동안 평균적으로 최소 주당 78시간 반, 75시간을 일했다. 특히 186252일까지, 6주 동안은 노동량이 더욱 증가하여, 주당 84시간, 곧 주 8일을 일했다.”

 

이는 사실상 일 년 내내 시간외 노동을 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자본가들의 장시간 노동 정당화 시도는 명백하게 드러난다. 앞서 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해 자신과 노동자를 동일시하려 했던, 공동 경영자 스미스는 미소를 띠고, “기계 노동은 쉽다.”고 주장한다. 이와 비슷하게, 목판 인쇄 공장주들 역시, “손노동은 기계 노동보다 건강에 더 좋다.”고 말하며, 장시간 노동을 합리화하려 한다. 공장주들은 일반적으로 적어도 식사 시간 중에는 기계를 정지시켜야 한다.’는 제안에 대해 격분하며, 반대하는 태도를 보인다.

 

런던의 벽지 공장 지배인 오틀리는 노동 시간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오전 6시부터, 저녁 9시까지 노동 시간을 허가하는 법률은 자신들에게 매우 적합하지만, 오전 6시부터, 저녁 6시까지로 정한 공장법의 노동 시간은 적합하지 않다. 우리는 공장에서 점심 식사 시간에 기계를 정지시키며, 이 정지가 종이나 물감에 큰 손실을 주지 않는다.”

 

그는 덧붙인다.

 

그러나 나는 시간의 손실을 불평하는, 다른 사람들의 입장은 이해할 수 있다.”

 

위원회 보고서는 일부 유력한 회사들이 시간(곧 타인의 노동을 훔칠 시간)과 그에 따른 이윤 손실을 염려하는 일은 인정한다. 그러나 보고서는 이러한 우려가 13세 미만의 아동과 18세 미만의 미성년자에게 하루 12-16시간 노동을 강요하며, 점심 식사를 제공하지 않는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없음을 명확히 한다.

 

나아가, 보고서는 생산 과정에서 노동 수단에 보조 재료를 공급하듯이, (: 증기 기관에 석탄과 물, 양모에 비누, 수레바퀴에 기름) 이들에게 점심 식사를 제공하는 것 또한 충분한 이유가가 되지 못한다고 지적하며, 아동 및 미성년 노동에 대한 비인간적 착취와 기본적인 생존권 박탈을 비판한다. 이는 단순히 노동력 재생산을 위한 보조 수단 수준이 아닌, 인간 대우 문제임을 강조하는 일이다.

 

영국 산업 중 빵제조업은 (최근 도입된 기계 사용을 제외하고) 예수 이전 시대에 생산 방식, 곧 로마 제국 시인의 기록에서나 접할 수 있는 형태를 현재까지 고수하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자본은 초기에는 자신이 지배하는 노동 과정에서 기술적 성격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며, 단순히 노동 과정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자본이 기술 혁신을 주도하기보다는, 일단 기존의 생산 방식을 포섭하여, 이윤을 추출하는 데 집중했음을 시사한다.

 

빵의 불량 제조가 만연했던 실태, 특히 런던에서의 심각성은 1855년에서 1856년 사이에 식료품의 불량 제조에 관한하원 위원회 보고서와 하살(Hassall)적발된 불량품(Adulterations Detected)으로부터 최초로 폭로되었다. 이러한 폭로에 따라, 186086, ‘불량음식료품 제조의 방지를 위한법률이 제정되었으나, 이 법은 불량품 판매로 정직한 돈벌이를 하려던 자유상업주의자들에게 지나치게 대해하게 적용되어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위원회는 자유 상업이 본질적으로 불량품, 영국인들이 세련된(sophisticated)’ 상품이라 재치 있게 부르는, 거래를 수반한다는 확신을 대체로 솔직하게 드러냈다. 이러한 상업적 궤변(sophistry)은 그 능력이 고대 철학자, 프로타고라스(Protagoras)에 비견될 정도로 흑을 백으로, 백을 흑으로 둔갑시킬 수 있으며, 심지어 엘레아 학파처럼 모든 실재적인 것을 단순한 가상(illusion)으로 입증해 보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는 자유 상업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불량품 거래와 기만 행위의 본질을 고전 철학적 수사에 빗대어 비판한다.

 

위원회는 대중의 일용할 양식문제, 곧 빵제조업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와 병행하여, 런던 빵제조 직인(journeyman)들은 공공 집회와 의회 탄원서로부터 자신들의 과도한 노동에 대한 절박한 불만을 제기했다. 이러한 문제 제기의 심각성으로 인해, 앞서 언급된 1863년 위원회 위원 중 한 명이었던, 트리멘히어(Trememheere)가 칙명조사위원으로 임명되어 해당 사안을 조사하게 되었다.

 

트리멘히어의 보고와 증인들의 증언은 대중의 위장을 충격에 빠뜨렸지, 단순히 마음만 움직인 일은 아니었다. 성서로부터 영국인은 누구나 (특정 특권층을 제외하고) 이마에 땀을 흘려 자신의 빵을 얻어야 한다는 운명을 알고 있었으나, 그들이 매일 소비하는 빵에 명반, 모래, 광물성 혼합물 외에도 종기의 고름, 거미줄, 바퀴벌레 시체, 썩은 독일제 효모 등의 역겨운 물질과 더불어 일정한 양의 인간 땀이 섞여 있다는 사실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이 폭로는 노동의 신성함과는 동떨어진 비위생적이고, 비인간적인 현실을 고발했다.

 

조사 결과에 따라, 그때까지 자유로웠던빵제조업은 신성시되던 자유 상업에 대한 고려 없이 국가 감독원의 감시 하에 놓이게 되었다 (1863년 의회 회기 말). 특히 의회 법령으로 18세 미만 빵제조 직인에게는 오전 9시부터 오전 5시 사이에 노동이 금지되었다. 이 금지 조항은 이 오래되고, 익숙한 사업 부문에서 행해지던 과도한 노동 실태를 여러 권의 책보다 더욱 웅변적으로 입증한다.

 

런던의 빵제조 직인은 보통 밤 11시에 노동을 시작하며, 이때 반죽 작업을 한다. 이 과정은 구워낼 분량과 품질에 따라 30분 내지 45분 동안 계속되는 매우 힘든 작업이다. 반죽을 마친 뒤, 직인은 밀가루통 뚜껑으로도 사용되는, 반죽판 위에 누워 밀가루 포대를 베개와 이불 삼아 약 두 시간 동안 수면을 취한다. 이 짧은 휴식 뒤에는, 5시간 동안 반죽을 던지고, 무게를 달고, 형태를 만들고, 가마솥에 넣고 꺼내는 등, 신속하고 쉴 새 없는 노동이 이어진다.

 

빵제조실의 온도는 보통 화씨 75도에서 90(섭씨 24도에서 32)에 이르며, 소규모 제조실은 이보다 더 높은 온도인 경우가 일반적이다. 식빵이나 원통형 빵 등의 제조가 완료되면, 빵 배달 업무가 시작된다. 대부분 빵제조 직인은 힘든 야간 노동을 마친 뒤에도, 낮 동안 빵을 광주리나 손수리에 싣고 몇 시간 동안 배달하며, 때로는 제조실 내에서 다른 작업도 병행한다. 그 결과, 노동은 계절 및 제빵장의 업무 규모에 따라, 오후 1시에서 6시 사이에 종료되지만, 일부 직인들은 오후 늦게까지 제조실에서 작업을 지속한다.

 

런던 사교 시즌(London Season) 동안, 웨스트 엔드(West End) 지역에서 정가 판매 빵집 직인들은 노동 강도가 더욱 심화된다. 이들은 보통 밤 11시에 작업을 시작하여, 한두 번의 매우 짧은 휴식만을 취하며, 다음 날 아침 8시까지 빵을 굽는다. 이후에는 오후 4, 5, 6, 때로는 7시까지 빵 배달을 하거나, 빵제조실에서 비스킷을 굽는 등 추가 작업을 수행한다. 이들이 작업을 마치고 다시 시작하기까지 확보할 수 있는 수면 시간은 대개 5-6시간이며, 종종 4-5시간에 불과하다.

 

금요일의 노동은 보통 저녁 10시에 시작하여 다음 날인 토요일 저녁 8시까지 이어지며, 심지어는 일요일 아침 4시나 5시까지 계속되는 일이 일반적이다. 일요일에도 직인들은 다음 날 준비를 하려면, 공장에 두세 번 나와 한두 시간씩 일해야 한다. 런던 전체 빵집의 약 3/4을 차지하는 싸구려 빵집(정가 이하 판매) 노동자들의 노동 시간은 이보다 더 길 뿐 아니라, 그들의 작업은 빵제조실 내부에 거의 전적으로 한정된다. 이는 빵집 주인이 자신의 가게에서 직접 판매하거나, 소규모 소매점에 공급하는 일을 제외하고는, 타인으로부터 배달을 맡기는 일이 관례이기 때문이다. 특히 주말이 다가오면, 노동은 목요일 밤 10시부터 시작되어, 짧은 중단만 있을 뿐, 토요일 밤늦게까지 지속된다.’

 

부르주아적 지식인들조차도 싸구려 빵집의 경쟁력 원천이 노동자들에게 지불받지 않은 노동에 있음을 인지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정가판매 빵제조업는 자신들의 경쟁사인 싸구려 빵집을 타인 노동의 도둑이자 불량품 제조자로 조사 위원회에 고발하고 있다.

 

이 고발의 핵심은 싸구려 빵집이, 첫째로 대중을 기만하고, 둘째로 그들의 노동자들에게 12시간분의 임금만 지불하고, 18시간 노동을 시키는 것으로부터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초과 착취로부터 이윤 창출 구조를 명확히 드러낸다.’

 

빵의 불량 제조와 정가 이하 판매 빵제조업자의 등장은 영국에서 18세기 초부터 시작되었다. 이는 해당 업종의 길드적 성격이 해체되고, 명목상의 빵제조 장인 배후에 제분업자나 밀가루 도매상 형태의 자본가가 실질적으로 등장한 시점과 일치한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이 분야에는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 노동일의 무제한 연장, 야간 노동의 토대가 마련되었는데, 특히 야간 노동은 런던에서조차, 1824년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그 기반을 확립했다.

 

앞선 서술들로부터, 위원회 보고서가 빵제조공을 수명이 짧은 노동자로 분류한 이유를 알 수 있다. 빵제조공은 노동자 계급 아동들이 흔히 겪는 유아 사망은 면했지만, 42세까지 생존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그럼에도, 빵제조업에는 지원 노동자가 항상 넘쳐난다. 런던의 이 노동력공급원은 주로 스코틀랜드, 잉글랜드의 서부 농업 지대, 그리고 독일이다.

 

1858년에서 1860년 사이에 아일랜드 빵제조 직인들은 야간 노동 및 일요 노동 반대 운동을 추진하며, 자체 비용으로 대규모 집회를 조직했다. 대중들은 18605, 더블린 집회에서 드러났듯이, 아일랜드 특유의 열정으로 직인들의 입장을 지지했다. 이 운동의 직접적인 성과로, 웩스포드, 킬케니, 클론멜, 워터퍼드 등의 지역에서는 야간 노동이 철폐되고, 주간 노동만이 성공적으로 정착되었다.

 

직인들의 고통이 심각했던 리메르크에서는 이 노동 운동이 빵제조 장인들, 특히 제분업을 겸하는 장인들의 강한 반항에 부딪혀 결국 실패했다. 리메르크의 실패는 곧 에니스와 티페레리에서의 패배로 이어졌다. 대중 분노가 가장 거셌던 코크에서는 장인들이 직인들을 해고하여, 노동 운동을 좌절시켰다. 한편, 더블린에서는 빵제조 장인들이 가장 단호하게 저항하며, 운동의 선두에 섰던 직인들을 박해했고, 이로 인해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신념과 달리 야간 노동과 일요 노동에 동의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영국 정부는 식민지인 아일랜드에서는 빈틈없이 무장하고 대체로 잘 통제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정작 영국 정부 위원회는 더블린, 리메르크, 코크 등지에서 무자비한 빵제조 장인들에게는 애원하는 어조로 충고하는 데 그쳤다. 이는 식민지 지배를 위한 강압적인 공권력 행사와 본국 내 자본가에 대한 무력한 태도 사이에 극명한 대비를 드러낸다.

 

위원회는 노동 시간이 자연법으로부터 제한되며, 그 위반은 반드시 처벌을 수반한다고 확신한다. 빵제조 장인들이 해고 위협으로부터 노동자들에게 종교적 신념 위배, 국법 불복종, 여론 무시(일요 노동과 관련)를 강요하는 행위는, 노동자와 장인 간 불화를 초래하고, 종교, 도덕, 사회 질서에 위험한 선례를 남긴다고 위원회는 지적한다. 나아가, 하루 12시간을 초과하는 노동은 노동자의 가정 및 개인 생활을 침해하고, 가정을 파괴하며, 자식, 형제, 남편, 아버지로의 가족적 의무 수행을 방해하여, 해로운 도덕적 결과를 낳는다고 판단한다. 이러한 과도한 노동은 노동자의 건강을 파괴하고, 조기 노령화와 사망을 초래하며, 결국 노동자의 가족은 가장의 보호와 도움이 가장 절실한 시점에, 그를 잃는 비극을 겪게 된다고 결론짓는다.’

 

우리는 아일랜드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스코틀랜드에서는 농업 노동자들이 거친 기후 속에서 하루 13-14시간의 쟁기질 노동과 더불어, 일요일에도 4시간의 추가 노동을 강요받는 현실(심지어 안식일을 엄수하는 나라에서)에 항의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시기에, 런던에서는 끔찍한 철도 사고로, 수백 명의 승객이 희생된 사건이 발생했고, 여객 승무원, 기관사, 신호수 세 명의 철도 노동자가 검시배심원 앞에 출두했다. 사고 원인은 이들의 부주의였으며, 배심원 앞에서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진술한 사실이 주목받는다.

 

철도 노동자들은 10년에서 12년 전까지만 해도 노동이 하루 8시간에 불과했다. 그러나 최근 5년에서 6년 사이에 노동 시간이 14시간, 18시간, 심지어 20시간까지 늘어났으며, 성수기와 같이 승객이 집중되는 시기에는 중단 없이 40시간에서 50시간 동안 노동이 지속되었다. 이들은 보통의 인간이지 키클롭스가 아니기에, 특정 지점에 도달하면, 노동력은 고갈되고, 무감각 상태에 빠져, 두뇌는 생각을, 눈은 보기를 중단하게 된다. 이에 대해 존경할 만한 영국의 배심원들은 노동자들을 살인 혐의로 순회 재판에 회부한다고 판결했으나, 철도 관계 대자본가들에게는 앞으로 필요한 수의 노동력을 구입하는 데 돈을 아끼지 말고, 구입한 노동력을 착취하는 데 절도 있게’, ‘욕심 적게’, ‘검소하게하기를 바란다는 경건한 희망을 부드러운 어조로 덧붙이는 데 그쳤다.

 

율리시즈 주위로 몰려드는 학살당한 영혼들처럼, 옆구리에 정부 보고서가 없어도 과도 노동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직업, 나이, 성별이 다양한 노동자들 중에서, 부인복 제조공과 대장장이 두 인물을 선별해 보자. 이 두 인물은 서로 현격한 대조를 이루지만, 그들은 자본 앞에서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사실을 명확히 실증한다.

 

18636월 마지막 주, 런던의 모든 일간 신문은 순전히 과로로 말미암은 사망이라는 충격적인 기사를 실었다. 이 사건은 명성 있는 어느 부인복 제봉소에서 노동하던 20세의 여공 워클리가 엘리스라는 이름의 귀부인에게 착취당하다 사망한 일이었다. 이 폭로는 이미 세간에 떠돌던 오래된 소문을 재차 공론화했다. 해당 제봉소의 소녀들은 평균 하루 16시간 반을 노동했으며, 사교 계절에는 때로 30시간 동안 쉬지 않고 노동해야 했다. 그들의 노동력이 극도로 지쳤을 때는 작업 능률을 회복시키고자, 셰리주, 포도주 또는 커피가 공급되었다. 당시 사교 계절이 한창이었고, 새로 온 웨일즈 공주를 축하하는 무도회에 참석할 귀부인들의 화려한 옷을 신속하게 제작해야 했다. 워클리는 60명의 다른 소녀들과 함께, 30명씩 배치되었으나, 필요한 공기량의 1/3에도 못 미치는 공기만 있는 방에서, 중단 없이 26시간 반 동안 노동했다. 밤이 되면, 그들은 널빤지로 칸막이를 쳐 숨 막히게 여러 개의 구멍 같은 침실 가운데 한 곳에서 두 명씩 잠을 자야 했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환경은 런던 부인복 재봉소 중 시설이 좋은 편에 속했다. 워클리는 금요일에 병이 나 일요일에 사망했으며, 고용주였던 엘리스 부인은 소녀가 하던 일을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했다. 뒤늦게 사망한 소녀의 침대로 불려온 의사 키즈는 검시배심원 앞에서 다음과 같이 솔직하게 증언했다.

 

메어리 안 워클리는 지나치게 빽빽한 작업실에서 장시간 노동했고, 환기가 잘 안 되는 너무나 좁은 침실에서 잤기 때문에 죽었다.”

 

이 의사에게 본때를 보여주고자, 검시배심원은 그의 솔직한 증언에 맞서 다음과 같이 판정했다.

 

사망 원인은 졸도이나, 이 여자의 사망이 지나치게 빽빽한 작업실의 과도 노동 등으로부터 촉진된 일이 아닌가 의심할 만한 이유도 있기는 하다.”

 

는 단서를 달았다. 이는 직접적인 사망 원인을 모호하게 처리하면서도, 과도 노동이 사망을 부추겼을 여지를 마지못해 인정하는, 착취에 면죄부를 주려는 태도를 나타낸다.

 

자유무역주의자 콥덴과 브라이트의 기관지인,모닝 스타는 워클리 사건을 두고, “우리의 백인 노예는 무덤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혹사당하다가 지쳐 쓰러져 소리도 없이 죽어간다.”고 격렬히 비판했다.

 

죽도록 노동하는 현실이 부인복 재봉소뿐 아니라 몇 천 개의 장소에서, 더 정확히 말해, 사업이 잘 되는 모든 곳에서 일상적이다. 어느 시인의 말에 따르면, 이 세상에서 대장장이보다 더 원기가 왕성하고, 더 쾌활한 인간은 없다.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태양보다도 먼저 불꽃을 튀긴다일반적으로 대장장이는 가장 잘 먹고, 잘 마시며, 잘 자는 인물로 여겨진다. 육체적 관점에서 볼 때, 노동이 지나치지만 않다면, 대장장이는 실로 인간의 가장 좋은 상태 중 하나에 속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도시로 가서, 그의 강력한 두 어깨가 짊어지는 노동의 무게와, 우리나라 사망률 표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치를 확인하며, 그 현실을 들여다봐야 한다런던 중서부 구, 메릴레본에서는 대장장이 사망률은 연간 1,000명당 31명으로, 이는 영국 성인 남자의 평균 사망률보다 11명이나 높은 수치이다. 이 직업은 본능적인 인간의 기능에 가깝고, 그 자체로는 혐오할 만한 요소가 없지만, 단지 과도한 노동 때문에 파괴된다. 한 인간이 하루에 쇠망치를 내리칠 수 있는 횟수, 걸을 수 있는 걸음 수, 호흡할 수 있는 횟수, 생산할 수 있는 양에는 한계가 있으며, 대장장이는 평균적으로 약 50년 정도를 생존할 수 있을 뿐이다대장장이가 매일할 수 있는 노동량보다 1/4만큼 더 많이 망치질하고, 더 많은 걸음을 걸으며, 더 자주 호흡하도록 강요당하며, 생명력 지출을 매일 1/4만큼 증가시킨다고 가정하자. 그 결과, 그는 일정 기간 동안, 실제로 1/4만큼 더 많은 일을 해내지만, 그 대신 평균 수명인 50세가 아니라 37세에 사망하게 된다. 이는 과도한 노동이 일시적인 생산 증대를 가져오지만, 궁극적으로는, 노동자의 생명을 희생시키는 치명적인 교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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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잉여 가치율

 

9-1. 노동력 착취도

 

투하 자본 C는 생산 과정에서 잉여 가치, 곧 자본 가치 C의 증식분을 창출한다. 이 잉여 가치는 생산물 가치가 생산 요소의 가치 총액을 초과하는 부분으로 나타난다.

 

투하 자본 C는 생산 수단에 투입되는 화폐액 c와 노동력에 투입되는 화폐액 v의 두 부분으로 구성된. 여기서 c는 불변 자본으로, v는 가변 자본으로 전환된 가치를 의미한다.

 

초기 투하 자본

 

투하 자본(C) = 불변 자본(c) + 가변 자본(v)

 

예를 들어, 투하 자본이 500일 경우, 이는 불변 자본(c) 410원과 가변 자본(v) 90원으로 구성된다. 생산 공정 완료 후 생산물 가치는 불변 자본(c) + 가변 자본(v) + 잉여 가치(s)로 산출된다. 예시의 경우, 생산물 가치는 410c + 90v + 90s이다. 이로 인해 최초 자본 C500은 증식 자본 590으로 변화한다. 이 둘의 차액인 90이 잉여 가치(s)에 해당한다.

 

생산 요소들의 가치가 투하 자본의 가치와 동일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생산물 가치가 생산 요소 가치를 초과하는 부분이 투하 자본 가치의 증식분, 곧 생산된 잉여 가치와 동일하다는 말은 동어 반복이다.

 

이러한 동어 반복은 보다 심층적인 검토를 필요로 한다. 생산물의 가치는 그 생산에 투입된 생산 요소들의 가치와 비교된다. 그러나 이미 언급했듯이, 노동 수단(: 기계)을 구성하는 불변 자본(c)은 가치의 일부만 생산물로 이전한다. 그 가치의 잔여분은 원래의 노동 수단 형태 유지된다. 이 잔여분은 가치 형성 과정에서 어떠한 기능도 수행하지 않으므로, 본 논의에서는 제외한다. 이를 포함하더라도 계산에는 변함이 없다.

 

예를 들어, 불변 자본(c) 410원은 원료 312, 보조 재료 44, 그리고 생선 과정 중 마멸된 기계 가치 54로 구성된다. 실제 사용된 기계 설비의 총 가치는 1,054이다. 이 중 생산물에 이전되는 가치는 마멸로 인해 손실되는 54뿐이다. 기계 형태로 남아 있는 잔여 가치 1,000원까지 생산물에 이전된 것으로 간주하려면, 이 금액을 투하된 가치와 생산물 가치 양쪽에 동시에 포함해야 한다.

 

그러한 계산법을 적용할 경우, 투하 자본은 1,500 = [기계(1,054) + 원료(312) + 보조 재료(44) + 가변 자본(90)]이 되고, 생산물 가치는 1,590 = [잔여 기계(1,000) + 마멸된 기계(54) + 원료(312) + 보조 재료(44) + 가변 자본(90) + 잉여 가치(90)] 이 된다.

 

결과적으로, 두 값의 차액인 잉여 가치는 여전히 90으로 동일하다. 따라서 가치의 생산에 투하된 불변 자본은 문맥상 다른 의미로 해석되지 않는 한, 생산 과정에서 실제로 소비된 생산 수단의 가치만을 의미한다.

 

이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투하 자본(C) = 불변 자본(c) + 가변 자본(v) 공식은 증식 자본 이 공식은 증식 자본(C´) = [불변 자본(c) + 가변 자본(v)] + 잉여 가치(s)로 전환된다. 여기서 투하 자본(C)는 증식 자본(C´)으로 변화한다.

 

불변 자본(c)의 가치는 생산물로 이전되어 재생산될 뿐이다. 따라서 생산 과정에서 실제로 창출된 새로운 가치(가치 생산물)는 생산물 가치와 다르다. 얼핏 보면, 가치 생산물은 [불변 자본(c) + 가변 자본(v)] + 잉여 가치(s), [410(c) + 90(v)] + 90(s)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변 자본(v) + 잉여 가치(s), 90(v) + 90(s)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 가치 생산물은 590이 아닌 180이다.

 

불변 자본(c) = 0인 경우, 곧 자본가가 기존의 노동으로부터 생산된 생산 수단(원료, 보조 재료, 노동 도구 등)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오직 천연 소재와 노동력만을 사용하는 산업 부문이 있다면, 생산물로 이전되는 불변 자본은 존재하지 않는다.

 

생산물의 가치에서 불변 자본(c) 410은 소멸되지만, 새롭게 창조된 가치(가치 생산물) 180은 불변 자본(c)의 크기와 관계없이 동일하다.

 

불변 자본(c)0일 경우, 투하 자본(C) = 가변 자본(v)이 된다. 증식 자본(C´) = 가변 자본(v) + 잉여 가치(s)이며, 증식 자본(C´)과 투하 자본(C)의 차액은 여전히 잉여 가치(s)와 같다.

 

반대로, 잉여 가치(s) = 0일 경우, 곧 노동력이 등가물만을 생산하면, 투하 자본(C) = 불변 자본(c) + 가변 자본(v)과 증식 자본(C´) = [불변 자본(c) + 가변 자본(v)] + 0은 동일해진다. 이 경우, 투하 자본(C) = 가치 증식한 자본(C´)이 되기 때문에, 투하 자본은 가치를 증식시키지 못한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잉여 가치(s)는 가변 자본(v), 곧 노동력으로 전환된 자본 부분의 가치 변화로 인해 발생한다. 따라서 가변 자본(v) + 잉여 가치(s) = 가변 자본(v) + 가변 자본의 증가분(Δv)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가변 자본(v)만이 변화하며, 그 변화 비율은 총 투하 자본(C)이 가변 부분의 증가에 따라 함께 커진다는 사실로 인해 불분명해진다.

 

예를 들어, 총 투하 자본은 500에서 590원으로 증식될 수 있다. 정확한 분석을 위해, 생산물의 가치 중 불변 자본(c)의 가치 재생산분에 해당하는 부분은 완전히 제외해야 한다. 불변 자본(c) = 0이라고 가정하는 일은, 덧셈과 뺄셈으로 결합된 불변량과 가변량에서 불변량을 제외하더라도 결과의 변동은 동일하다는 수학적 원리를 적용한 일이다. 또 다른 어려움은 가변 자본의 원래 형태에서 비롯된다. 앞의 예시에서, 증식 자본(C´) = 불변 자본(410) + 가변 자본(90) + 잉여 가치(90). 여기서 가변 자본(90)은 고정된 양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 가치가 겪는 변동 과정을 나타낸다.

 

노동력 구매에 투하된 자본은 일정한 양의 대상화된 노동이며, 이는 구매한 노동력의 가치와 동일하게 불변의 가치량이다. 그러나 생산 과정에서는 투하된 90의 화폐 대신 활동하는 노동력이 투입된다. , 죽은 노동 대신 살아있는 노동이, 정지된 양 대신 움직이는 양이, 불변량 대신 가변량이 등장한다. 결과적으로, 이는 가변 자본(v)의 재생산과 증가분을 초래한다. 자본주의 생산 관점에서, 이 과정은 본래 불변하는 가치가 노동력으로 전환되어 스스로 운동하듯이 보인다. 과정과 결과 모두 이 가치의 자기 운동에서 비롯된다. ‘90의 가변 자본또는 일정한 양의 자기 증식하는 가치와 같은 표현이 모순적으로 보인다면, 이는 자본주의 생산 자체에 내재된 모순을 나타낸다.

 

불변 자본(c)0이라고 가정하는 일은 일견 비논리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일반적인 경제 계산에서 흔히 적용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영국 면직물 산업의 이윤을 산출할 때, 미국, 인도, 이집트 등에 지불한 면화 가격을 먼저 공제한다. 이는 곧 생산물 가치에 재현될 뿐인 자본 가치를 0으로 간주하는 일과 같다. 물론 잉여 가치(s)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가변 자본(v)에 대한 잉여 가치의 비율인 잉여 가치율뿐만 아니라, 총 투하 자본(C)에 대한 잉여 가치의 비율인 이윤율도 중요한 경제적 의미를 지닌다. 이윤율에 대해서는 이 책의 3권에서 상세하게 다룬다.

 

자본의 일부를 노동력으로 전환시켜 가치를 증식하려면, 다른 부분은 생산 수단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가변 자본이 기능하려면, 노동 과정의 기술적 특성에 맞게 불변 자본이 적절한 비율로 투입되어야 한다. 그러나 화학적 분석에서 증류기나 용기를 무시할 수 있듯이, 가치 창조와 가치 변화를 순수하게 고찰할 때, 불변 자본의 물질적 형태인 생산 수단은 가치를 창조하는 노동력이 결합될 소재를 제공하는 역할만 수행한다. 따라서 이 소재의 성질이나 가치는 중요하지 않다. 필요한 것은 단지 생산 과정 중 투입되는 노동량을 흡수하기에 충분한 양만 있으면 된다. 해당 양이 충족된다면, 그 가치가 오르거 내리거나, 심지어 토지나 바다처럼 가치가 없더라도, 가치 창조와 가치 변화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따라서 불변 자본(c)0으로 가정한다. 이에 따라 투하 자본은 불변 자본(c) + 가변 자본(v)에서 가변 자본(v)로 축소되며, 생산물 가치[불변 자본(c) + 가변 자본(v) + 잉여 가치(s)]는 가치 생산물[가변 자본(v) + 잉여 가치(s)]로 단순화된다.

 

가치 생산물 180이 전체 투하 노동을 나타낸다고 가정하면, 여기에서 가변 자본 90을 제외한 잉여 가치 90이 남는다. 90은 생산된 잉여 가치(s)의 절대량이다. 그러나 잉여 가치의 상대량, 곧 가변 자본이 증식된 비율은 가변 자본(v)에 대한 잉여 가치(s)의 비율, 잉여 가치(s) / 가변 자본(v)로 결정된다. 앞의 예에서 이 비율은 이 비율은 90/90 = 100%이다. 가변 자본의 가치 증식 비율 또는 잉여 가치의 상대적 크기를 잉여 가치율이라고 부른다.

 

이전에 언급된 바와 같이, 노동자는 노동 과정의 일부 기간 동안 자신의 노동력 가치에 해당하는 가치, 곧 생존에 필요한 생활 수단의 가치를 생산한다. 사회적 분업 체계 속에서, 그는 생활 수단을 직접 생산하는 대신, 특정 상품(: 면사)의 형태로 자신의 생활 수단 가치와 동등하거나, 생활 수단 구매에 필요한 화폐와 동일한 가치를 창출한다. 그가 이러한 가치를 생산하는 데 소요되는 노동일의 기간은, 하루 평균 생활 수단의 가치 또는 이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평균 노동 시간에 따라 증감한다.

 

노동자의 하루 생활 수단 가치가 평균 6시간의 대상화된 노동에 해당한다면, 그는 이 가치를 생산하고자 하루 평균 6시간을 노동해야 한다. 그가 자본가를 위해서가 아닌 자신을 위해 독립적으로 노동하더라도, 다른 조건이 변하지 않는 한, 그는 자신의 노동력 가치를 생산하고, 생계를 유지하고자, 하루 평균 6시간을 노동해야 한다.

 

노동자는 노동일 중 자신의 노동력 가치(: 3)를 생산하는 시간 동안, 자본가가 이미 투하(지불)한 가변 자본의 등가물만을 창출한다. 이처럼 새로 창조된 가치는 투하된 가변 자본의 가치를 단순히 대체할 뿐이며, 이는 단순 재생산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이 재생산이 이루어지는 노동일의 부분을 필요 노동 시간이라 부르며, 이때 수행하는 노동을 필요 노동이라 부른다. 이 노동은 노동자에게는 사회적 형태와 무관하게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며, 자본주의적 관점에서는 노동자의 지속적인 생존에 필요하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노동 과정에서 필요 노동 시간을 초과하는 제2의 기간 동안,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사용하지만, 자신을 위한 어떠한 가치도 창출하지 않는다. 그는 자본가에게 잉여 가치를 창조하며, 이는 자본가에게 무()로부터의 가치 창출이라는 큰 매력을 지닌다. 노동일 중 이 부분을 잉여 노동 시간이라고 부르며, 이때 수행하는 노동을 잉여 노동이라고 한다.

 

가치를 응고된 노동 시간, 곧 대상화된 노동으로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듯이, 잉여 가치를 응고된 잉여 노동 시간, 곧 대상화된 잉여 노동으로 이해하는 일이 중요하다. 다양한 경제적 사회 구성체, 예를 들어, 노예 노동과 임금 노동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의 차이는 잉여 노동이 직접 생산자인 노동자로부터 착취되는 방식의 차이에 있다.

 

가변 자본(v)의 가치는 구매한 노동력의 가치와 같으며, 이는 노동일의 필요 노동 시간을 결정한다. 동시에 잉여 가치(s)는 노동일에서 잉여 노동 시간으로부터 발생한다. 따라서 가변 자본에 대한 잉여 가치의 비율은 필요 노동에 대한 잉여 노동의 비율과 동일하다. 이를 공식으로 표현하면,

 

잉여 가치율 공식

 

잉여 가치율 = 잉여 가치(s) / 가변 자본(v) = 잉여 노동 / 필요 노동

 

이다. 이 두 비율은 동일한 관계를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전자는 대상화된 노동의 형태로, 후자는 살아있는 노동의 형태로 나타낸다. 그러므로 잉여 가치율은 자본이 노동력을 착취하는 정도, 곧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정도를 정확하게 나타내는 지표이다.

 

우리의 가정에 따르면, 생산물의 가치는 불변 자본(410) + 가변 자본(90) + 잉여 가치(90)였고, 투하 자본(C)500이었다. 잉여 가치는 90이고, 투하 자본은 500이므로, 통상적인 계산법으로는 잉여 가치율이 이윤율과 혼동되어 잉여 가치(90) / 투하 자본(500) = 18%로 산출된다. 이는 캐리나 다른 조화론자들에게는 낮은 비율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잉여 가치율은 잉여 가치(s) / 투하 자본(C) 또는 잉여 가치(s) / [불변 자본(c) + 가변 자본(v)]가 아니라, 잉여 가치(s) / 가변 자본(v)이다. 따라서 90/500(18%)이 아니라, 90/90 = 100%이다. 이는 겉으로 보이는 착취율보다 5배 이상 높다. 우리가 노동일의 절대적 길이, 노동 과정의 지속 기간, 또는 90의 가변 자본이 고용하는 노동자 수를 알 수 없더라도, 잉여 가치율 = 잉여 가치(s) / 가변 자본(v)은 그와 동일한 잉여 노동 / 필요 노동이라는 표현으로부터 노동일의 두 부분 사이에 비율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이 비율은 100%이므로, 노동자는 노동일의 절반을 자신을 위해, 그리고 나머지 절반을 자본가를 위해 노동한다.

 

잉여 가치율 계산 방법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먼저, 생산물의 총 가치에서 재현될 뿐인 불변 자본(c)의 가치를 제외한다. 남은 가치액이 생산 과정에서 실제로 창조된 새로운 가치이다. 잉여 가치량이 주어져 있다면, 이 새로운 가치에서 잉여 가치량을 빼서 가변 자본을 산출한다. 반대로, 가변 자본이 주어져 있다면, 잉여 가치를 찾아내고자 그 반대의 연산을 수행한다. 잉여 가치(s)와 가변 자본(v)이 모두 주어졌을 경우, 가변 자본에 대한 잉여 가치의 비율, 곧 잉여 가치(s) / 가변 자본(v)를 계산하여 잉여 가치율을 도출한다. 이 방법은 간단하지만, 실제 사례로부터 그 원리를 이해하는 일이 효과적이다.

 

미국산 면화로 32번수 면사를 생산하는 방적 공장의 사례를 들어보겠다. 이 공장은 1만 개의 뮬 방추를 운영하며, 각 방추는 매주 1파운드(453g)의 면사를 생산한다.

 

생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낙면율은 6%이다. 따라서 매주 10,600파운드의 면화가 투입되어 10,000파운드의 면사와 600파운드의 낙면이 생산된다. 18714, 면화 가격은 파운드당 7.75펜스(d.)였다.

 

이에 따라 투입된 10,600파운드의 면화 가격은 약 342 = [7.75(d.)×10,600(lbs.) ÷ 240(d.)]이다. (1971215일 화폐 단위 변경 전, 120실링(s.) 또는 240펜스(d.)였다.)

 

공장에서 1만 개 방추(준비 설비와 증기 기관 포함)는 방추당 1, 10,000의 가치를 지닌다.

 

방추의 연간 마멸은 10%(1,000), 주간 마멸은 20이다. 공장 건물 임대료는

연간 300, 주간 6이다.

 

석탄 소비량은 1시간 1마력당 4파운드로, 100마력 기준으로 주 60시간 사용한다. 난방용을 포함해 주당 11톤을 소비하며, 톤당 8실링(s.) 6펜스(d.)로 계산해 주간 비용은 약 4.5이다. 가스와 기름 비용은 각각 주당 14.5이다.

 

따라서 주간 생산물의 불변 가치(c) 부분은 [원료(342) + 방추 마멸(20) + 건물 임대료(6) + 석탄(4.5) + 가스(1) + 기름(4.5)] = 378이다.

 

주간 임금(v)52이다. 면사 가격은 파운드당 12.25펜스로, 10,000파운드의 면사 가격은 510이다. 잉여 가치(s) = 면사 가치(510) - [불변 자본(378) + 가변 가치(52)] = 80이다.

 

가치 창조에 참여하지 않는 불변 자본(c)3780으로 간주하면, 주간 가치 생산물은 가변 자본(v = £52) + 잉여 가치(s = £80) = 132가 된다.

 

잉여 가치율(s/v)£80/£52 = 153.85%이다. 10시간의 노동일 중 필요 노동은 3.939시간(3시간 5620.4), 잉여 노동은 6.061시간(6시간 339.6)이다.

 

다음은 1815, 제이콥이 밀 가격을 1쿼터(0.946리터)8실링(s.), 1에이커(4,047)당 평균 수확량을 22부셸(800리터)로 가정하여 계산한 예시이다. 이 계산은 일부 항목이 미리 조정되어 완전하지는 않지만, 목적에는 부합한다.

 

1에이커당 생산물 가치

 

종자(): 1파운드 9실링(1 9s.)

비료: 2파운드 10실링(2 10s.)

임금: 3파운드 10실링(3 10s.)

 

총계: 7파운드 9실링(7 9s.)

 

십일조, 지방세, 국세: 1파운드 1실링(1 1s.)

지대: 1파운드 8실링(1 8s.)

농가 이윤 및 이자: 1파운드 2실링(1 2s.)

 

총계: 3파운드 11실링(3 11s)

 

생산물 가격이 가치와 동일하고 잉여 가치가 이윤, 이자, 십일조 등으로 분할된다고 가정할 때, 잉여 가치는 3파운드 11실링(3 11s.)이다.

 

불변 자본(c)은 종자 및 비료 비용인 3파운드 19실링(3 19s.)이며, 이를 0으로 간주하면, 투하된 가변 자본(v)3파운드 10실링(3 10s.)이 남는다. 새로 생산된 가치는 3파운드 10실링(3 10s.) + 3파운드 11실링(3 11s.)가 된다.

 

따라서 잉여 가치율(s/v) = 잉여 가치(s) / 가변 자본(v) = 3파운드 11실링(£3 11s.) / 3파운드 10실링(£3 10s.), 이는 101.4%이다. , 노동자는 노동일의 절반 이상을 잉여 가치 생산에 할애하며, 이 잉여 가치는 지대, 세금, 이윤 등 다양한 명목으로 자본가와 그 이해 관계자들에게 지분으로 분배된다.

   

9-2. 생산물 가치 구성 부분들을 생산물 자체의 해당 부분들로 표시

 

자본가가 화폐를 자본으로 전환하는 과정의 예실로 돌아가 보자. 방적공의 필요 노동과 잉여 노동은 각각 6시간이었고, 노동력의 착취율은 100%였다. 12시간 노동일 동안 생산된 20kg 면사는 30 가치를 지닌다. 이 중 최소 80%24원은 소비된 생산 수단(20kg 면화 20, 소모된 방추 4)의 가치가 재현된 것으로, 이는 불변 자본(c)을 구성한다. 나머지 20%6은 방적 과정에서 새로 창조된 가치이며, 그 절반(3)은 하루 노동력 가치인 가변 자본(v)을 대체하고, 나머지 절반(3)은 잉여 가치(s)를 이룬다. 따라서 20kg 면사의 총 가치는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면사 가치 30 = 불변 자본(c=24) + 가변 자본(v=3) + 잉여 가치(s=3)

 

총 가치 30은 총 생산물인 20kg 면사에 포함되어 있다. 이 가치는 불변 자본과 가변 자본으로 나뉜다. 이 중 불변 자본 24, 이는 총 생산 가치의 8/10에 해당한다. 이 불변 자본(24)은 생산물의 8/10, 16kg 면사에 해당한다. 16kg 면사의 가치는 다시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3.333kg 면사는 원료(방적된 면화) 가치 20, 나머지 2.67kg 면사는 소비된 보조 재료와 노동 수단(방추) 가치 4를 나타낸다. 따라서 13.333kg의 면사는 총 생산물 20kg을 만드는 데 사용된 면화 원료를 나타내며, 그 가치는 20이다.

 

결과적으로, 총 생산물 20kg의 면사 가치는 30이며, 이 가치는 생산 과정에 투여된 모든 원료, 도구, 그리고 노동을 포함한다. 이러한 가치 구성 측면에서 볼 때, 생산물의 8/10에 해당하는 16kg의 면사는 원료(면화)와 노동 수단(방추)의 가치, 곧 불변 자본(24)이 재현된 부분을 나타낸다. 이 가치 중 20은 방적 과정에 사용된 면화 원료 가치에 해당하고, 나머지 4는 보조 재료와 노동 수단의 가치에 해당한다. 따라서 16kg의 면사는 방적 노동의 산물이자 동시에 그 노동으로부터 옮겨진 과거 노동의 가치를 포함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20kg의 면사 전체에 창조된 가치(가변 자본 3 + 잉여 가치 3)는 생산물 전체에 고루 스며들어 있다.

 

20kg 면화가 면사로 변환되는 과정. 그중 16kg 면사는 원료인 면화, 방추, 석탄 등과 같은 생산 수단 가치를 고스란히 옮겨 놓은 결과물이다. 자본가가 이 면사를 24에 팔아 다시 생산 수단을 구매할 때, 이 사실은 명확해진다. 이 면사는 실질적으로 소비된 자원 가치를 재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나머지 4kg 면사는 12시간 방적 노동으로부터 새롭게 창출된 가치, 6을 담고 있다. 이는 방적공이 오직 노동만으로 4kg 면사를 만들어낸 일과 같다. 따라서 20kg 면사 전체에 내재된 노동 가치는 전체 생산물의 2/10에 해당하는 4kg에 집중되어 있다.

 

매일의 방적 과정에서 새롭게 창조된 가치는 4kg 면사로 나타난다. 이 중 절반은 가변 자본(3), 곧 소비된 노동력 가치이며, 나머지 절반은 잉여 가치(3)이다. 방적공의 12시간 노동은 6원의 가치를 창출하며, 이 가치는 4kg의 면사로 구현된다. 한편, 20kg의 전체 면사 가치(30)에는 총 60시간의 노동이 대상화되어 있다. 60시간 중 8/10에 해당하는 48시간은 방적 과정 시작 전에 생산 수단에 투입된 대상화된 노동이며, 나머지 2/10에 해당하는 12시간은 방적 과정에서 새롭게 투입된 대상화된 노동이다.

 

앞에서 논의된 바와 같이, 면사 가치는 면사 생산 중 새롭게 창조된 새로운 가치에, 생산 수단에 이미 내재된 가치를 더한 것과 같다. 우리는 이제 생산물의 가치를 기능적 또는 개념적으로 구분되는 여러 성분들로 표현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생산 과정의 결과물인 생산물은 다음과 같은 부분들로 나뉜다.

 

· 불변 자본: 생산 수단에 내재된 노동을 나타내는 부분 자본을 대표하는 부분과,

· 가변 자본: 생산 과정 중 추가된 필요 노동을 나타내는 부분

· 잉여 가치: 생산 과정 중 추가된 잉여 노동을 나타내는 부분

 

이러한 분할은 단순하면서도 중요하며, 추후 복잡하고 미해결된 문제들에 적용될 수 있다.

 

총생산물은 12시간 노동일의 최종 결과물이다. 우리는 이제는 생산 단계를 기준으로 총생산물을 분석하며, 서로 다른 단계에서 산출되는 부분적 생산물들을 기능적 구성 요소로 구분할 수 있다.

 

방적공은 12시간 동안 20kg 면사를 생산하며, 시간당 1.67kg을 생산한다.

 

· 13.333kg 면사는 8시간 동안 생산되며, 이는 하루 노동에 사용된 면화와 보조 재료의 총가치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 4kg 면사는 2시간 24(2.4시간) 동안 생산되며, 이는 방적 과정에서 새롭게 창조된 가치에 해당한다.

· 4kg 2kg1시간 12(1.2시간) 동안 생산되어 노동력의 가치인 가변 자본을 나타내고, 나머지 2kg1시간 12분 동안 생산되어 잉여 가치를 나타낸다.

 

이처럼 생산 단계별로 창출되는 가치는 총생산물의 물리적 부분들로 표현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그는 남은 1시간 12분 동안 다시 2kg 면사를 생산하며, 그 가치는 반일분 잉여 노동으로부터 창출된 잉여 가치와 동일하다. 이러한 계산 방식은 영국 공장주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데, 예를 들어, 그들은 하루 노동의 첫 8시간(또는 2/3) 동안은 면화 가치만을 회수하고, 나머지 시간 동안은 다른 가치를 회수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방식은 완성된 생산물의 공간적 구분에서 생산물 부분이 순차적 생산 시간의 흐름으로 전환한 것으로, 분석적으로는 올바르다. 그러나 이 방식은 특히 가치 증식 과정에 실질적 이해 관계가 있으면서도 이론적으로는 이를 왜곡하는 일이 유리한 사람들에게 매우 원시적인 사고방식을 초래할 수 있다.

 

특정 관점에서 보면, 방적공은 노동일의 첫 8시간 동안 면화 가치를 생산하는 일이 아니라 면화 가치를 재현하고, 다음 1시간 36분 동안 소비된 노동 수단의 가치를 재현하는 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최후의 한 시간’ (1시간 12)만이 공장주를 위한 잉여 가치 생산에 사용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방적공에게 두 가지 기적적인 과제를 부여하는 일과 같다. 첫째, 면화, 방추, 증기 기관, 석탄, 기름 등을 사용하여 실을 뽑는 바로 그 순간에 해당 생산 수단을 생산해야 하는 일이다. 둘째, 일정한 강도를 가진 1일 노동을 동일한 강도의 5일 노동(60시간)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이러한 기적적인 사고방식이 쉽게 믿어지는 이유는, 원료와 노동 수단의 생산에 투입된 48시간의 과거 노동과 그것들을 면사로 만드는 데 투입된 12시간의 현재 노동을 분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끝없는 탐욕이 이러한 상고방식을 쉽게 받아들이게 하고, 이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어용학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잘 드러난다.

 

9-3. 시니어의 최후의 한 시간

 

1836년 어느 날, 경제학자 나소 시니어는 옥스퍼드에서 멘체스터로 초빙되었다. 옥스퍼드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던 그는 맨체스터에서는 공장주들에게서 배우기 위함이었다. 당시 공장법 (1833)‘10시간 노동 운동에 맞설 투사로 선택된 공장주들은, 시니어 교수의 학문적 지식이 현장 실무와는 거리가 멀다는 점을 간파했다. 그들은 그를 맨체스터로 초청해 현장 지식을 전수했다. 시니어는 맨체스터에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공장법이 면공업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편지(1837, 런던)라는 소책자를 발간했다. 이 책자에는 특히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현행법상 18세 미만 노동자를 고용하는 공장은 매일 11.5시간(512시간, 토요일 9시간)을 초과해 작업할 수 없다. 이러한 공장의 순이익 전체가 노동일의 마지막 한 시간에서 발생한다.

 

이를테면, 한 공장주가 100,000원을 투자했다고 가정하자. 이 중 80,000은 공장 건물 및 기계에, 20,000원은 원료와 임금에 투입된다. 연간 자본 회전율 1, 총이윤 15%(감가상각 5% + 순이윤 10%)를 가정하면, 연간 매출액은 115,000이 되어야 한다. 1일 노동일 11.5시간은 23개의 30분 단위로 나뉘며, 각 단위는 115,0001/23을 생산한다.

 

· 100,000에 해당하는 20/23은 자본 보전에 사용된다.

· 5,000에 해당하는 1/23은 공장 및 기계의 마멸을 보상한다.

· 남은 2/23(매일 마지막 1시간)이 순이윤 10%(10,000)를 창출한다.

 

가격 변동이 없을 경우, 2,600의 유동 자본 추가 투입으로 노동 시간을 11.5시간에서 13시간으로 늘리면, 순이윤이 두 배 이상 증가한다. 반면, 노동 시간이 하루 한 시간 단축되면 순이윤은 사라지고, 1.5시간 단축되면 총이윤마저 없어진다.’

 

시니어 교수는 이를 분석이라고 칭했다. 그러나 그가 노동일의 마지막 한 시간에서만 이윤이 발생한다는 공장주들의 하소연을 그대로 믿었다면, 굳이 분석을 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는 단지 다음과 같이 답변하기만 하면 되었다.

 

여러분, 당신들에게 최후의 한 시간은 모든 이윤의 원천이다. 노동 시간을 10시간으로 단축한다면, 다른 조건이 동일한 경우 당신들은 그 한 시간을 잃게 된다. 따라서 당신들이 잃는 만큼 이윤도 사라진다.’

 

시니어가 공장주들의 말을 그대로 믿지 않고, 전문가의 분석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면, 그는 노동일 길이와 순이윤 관계를 명확히 하고자 공장주들에게 다음과 같이 요청했어야 한다.

 

첫째, 기계 설비, 공장 건물, 원료, 노동을 혼합하지 말고 구분할 것.

 

둘째, 한쪽에는 공장 건물, 기계 설비, 원료 등에 투하된 불변 자본을, 다른 한쪽에는 임금에 투하된 가변 자본을 명확히 분리할 것.

 

공장주들이 계산에서 노동일의 1시간 12(1.2시간)이 임금을 재생산하거나 대체한다는 결론이 나온다면, 그는 분석을 계속하여 이윤의 진정한 원천을 파고들었을 것이다.

 

 

공장주들의 진술에 따르면, 노동자는 마지막에서 두 번째 시간에 자신의 임금을 생산하고 마지막 시간에 자본가의 순이윤을 창출한다. 그러나 동일한 시간 동안 동일한 크기의 가치를 생산하기 때문에, 이 두 시간 동안의 생산물은 같은 가치를 가진다. 노동자의 가치 생산은 오직 노동 시간으로부터 이루어지며, 노동량은 노동 시간으로 측정된다. 공장주들의 진술에 따르면, 이 노동 시간은 하루 11.5시간이다. 따라서 임금과 잉여 가치가 동일한 크기이므로, 노동자는 자신의 임금을 5.75시간 동안 생산하고, 나머지 5.75시간 동안 자본가의 순이윤을 생산하는 일이 분명하다. 이러한 결론은 노동일의 마지막 1시간이 순이윤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시니어의 주장과 모순된다. 오히려 노동자는 필요 노동 시간(임금을 생산하는 시간)을 자본가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일로 오해하고 있다.

 

지금부터는 매우 까다로운 점을 다뤄보자. 노동일의 마지막에서 두 번째 시간은 첫 번째 시간과 마찬가지로 보통의 1시간 노동일 뿐이다. 따라서 노동자는 1시간 노동으로 5.75시간 노동을 대표하는 가치를 생산할 수 없다. 그는 오직 1시간 노동에 해당하는 새로운 가치만을 창출한다.

 

이 면사 가치가 5.75시간 노동으로 측정된다는 주장은 가치 이전과 가치 창출을 혼동한 결과다. 5.75시간 노동 중 4.75시간은 생산 수단(면화, 기계설비 등)에 이미 포함되어 있었던 과거의 노동이 면사로 이전된 가치를 의미하고, 나머지 1시간은 방적공 자신이 새롭게 추가한 현재의 노동을 의미한다. 따라서 노동자의 임금은 5.75시간 동안 생산된 것이 아니라, 1시간의 노동으로 창출된 가치(가변 자본)와 동일하다는 논리는 마술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노동 가치를 과거 노동과 현재 노동으로 명확히 구분하는 논리적인 분석이다.

 

노동자가 면화나 기계 설비 등의 가치를 재생산하거나 대체하는 데 노동일의 단 한 순간이라도 낭비한다는 생각은 완전히 잘못된 일이다. 오히려 노동은 생산 수단의 가치를 스스로 면사로 이전시키는 필수적인 수단이다. 이는 노동이 그 질에 따라 사용 가치를 창출하고, 그 양에 따라 가치를 이전시키기 때문이다.

 

1시간 동안 면사로 이전되는 면화 가치는 30분 동안 이전되는 것보다 많다. 그 이유는 노동자가 30분보다 1시간 동안 더 많은 면화를 방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의 질적 측면(방적 노동)이 면화의 가치를 면사로 옮기는 동시에, 노동의 양적 측면(노동 시간)은 이전되는 가치의 양을 결정한다. 결론적으로, 노동은 낭비가 아니라 생산 수단의 가치를 생산물로 이전시키는 필수적인 행위이다. 이처럼 가치의 이전은 노동의 양에 비례하며, 그 과정에서 새로운 가치[노동력의 가치(v) + 잉여 가치(s)]가 창출된다.

 

공장주들의 진술에 따르면, 노동일의 마지막 한 시간 동안에만 순이윤이 창출된다. 그러나 이 주장은 노동 시간과 가치 생산의 비례 관계를 무시한 일이다. 노동자가 노동일의 전반부 5.75시간 동안 자신의 임금을 생산하고, 후반부 5.75시간 동안 순이윤을 생산한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노동일의 절반이 임금(필요 노동), 나머지 절반이 잉여 가치(잉여 노동)에 해당함을 의미할 뿐이다. 따라서 2시간 동안 생산된 면사에는 2시간에 해당하는 새로운 가치만이 구현되어 있다. 11.5시간의 노동이 포함된 면사는 11.5시간 노동으로 생산된다. 공장주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노동에 대한 지불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노동력 가치를 보상하는 필요 노동과 이윤을 창출하는 잉여 노동을 의도적으로 혼동한다. 따라서 임금을 지불하는 필요 노동 시간과 지불하지 않는 잉여 노동 시간의 비율, 곧 잉여 가치율은 5.75시간 : 5.75시간으로, 100%에 달한다. 이는 결코 낮은 비율이 아니다. 노동일이 1.5시간 연장되어 13시간이 된다면, 이 추가적인 1.5시간은 모두 잉여 노동 시간에 포함된다. 그 결과, 잉여 노동 시간은 5.75시간에서 7.25시간으로 증가하며, 잉여 가치율은 100%에서 126.09%로 상승한다.

 

1.5시간의 추가 노동으로 잉여 가치율이 100%에서 200% 이상으로 증가할 것이라 기대한다면, 이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견해다. 반대로, 노동일을 11.5시간에서 10.5시간으로 단축할 때, 순이윤이 모두 사라질까 걱정한다면, 지나치게 소심한 비관적인 견해이다. (특히 돈에 사로잡힌 인간의 심리는 이상하기 마련이다). 그러한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 잉여 노동은 5.75시간에서 4.75시간으로 줄어들지만, 이는 여전히 82.61%에 달하는 높은 잉여 가치율이다.

 

최후의 한 시간에 대한 여러분의 주장은 비현실적이다. 노동일이 단축되면 순이윤은 그만큼 비례하여 줄어들 수밖에 없다. 또한, 이윤의 원천이 오직 그 한 시간에만 있다고 주장하는 일은, 노동일의 다른 시간 동안 발생한 잉여 가치를 의도적으로 숨기려는 행위이다. 이러한 논리는 노동이 생산 수단의 가치만을 재생산하듯이 보이게 하여 아동을 비롯한 노동자의 착취를 정당화하려는 일이다. 언젠가 여러분의 최후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릴 때, 이 옥스퍼드 교수를 떠올리시길. 그럼 저 세상에서 다시 만납시다. 안녕히.’

 

1836, 시니어가 고안한 최후의 한 시간이라는 구호는, 1848415일 런던,이코노미스트에서 다시 한번 강조되었다. 이는 1843년 잡지를 창간한, 고위 경제 관료, 제임스 윌슨이 ‘10시간 노동 법안에 반대하고자 사용했다.

 

9-4. 잉여 생산물

 

생산물 가운데 잉여 가치를 대표하는 부분(앞의 예에서는 20kg 면사의 1/10, 2kg의 면사)을 잉여 생산물이라고 한다. 잉여 가치율이 총자본에 대한 잉여 가치의 비율이 아닌, 자본의 가변적 부분에 대한 잉여 가치의 비율로 결정되는 일과 마찬가지로, 잉여 생산물의 상대적 크기 역시 총 생산물에서 잉여 생산물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불변 자본과 가변 자본에 해당하는 부분)에 대한 비율이 아니라, 총 생산물 가운데 필요 노동을 나타내는 부분(가변 자본 부분)에 대한 비율로 결정된다. 잉여 가치의 생산이 자본주의 생산의 주된 목적이므로, 주어진 부의 크기는 생산물의 절대량이 아닌 잉여 생산물의 상대적 크기로 측정되어야 한다. 필요 노동과 잉여 노동의 합계(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 가치를 대체하는 시간과 잉여 가치를 생산하는 시간의 합)가 노동자의 총 노동 시간, 곧 노동일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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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불변 자본과 가변 자본

 

노동 과정에서 생산물의 가치 형성에 기여하는 요소들은 상이한 방식으로 작용한다. 노동자의 활동은 구체적인 기술이나 목적과는 무관하게, 지출된 노동량만큼 새로운 가치를 생산물에 더한다. 동시에, 생산 수단이 갖는 가치 또한 소멸하지 않고 생산물로 이전되어 그 가치의 일부를 형성한다. 예를 들어, 면화와 방추 가치는 면사 가치로 보존되며 이전된다. 이러한 가치 이전은 생산 수단이 생산물로 변형되는 노동 과정에서 매개된다.

 

노동자는 동일한 시간 동안 두 가지 노동을 수행하지 않는다. 그는 면화에 새로운 가치를 첨가하고자 생산 수단의 가치를 보존하고자 별도로 노동하지 않는다. 대신, 새로운 가치를 부가하는 행위 그 자체로 기존의 가치를 보존한다. 하지만 이 두 가지 결과는 동일한 노동 시간 내에 동시에 발생하지만, 서로 다른 속성을 지닌다. , 한 측면에서는 가치를 창조하고, 다른 측면에서는 기존 가치를 보존하거나 이전한다.

 

각 노동자는 자신의 고유한 생산적 노동 방식으로부터 새로운 노동 시간과 가치를 추가한다. 방적공은 실을 뽑고, 직조공은 천을 짜고, 대장장이는 쇠를 단련하듯이, 그들은 자신만의 목적에 부합하는 노동을 수행하면서 새로운 사용 가치(생산물)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목적적 노동으로만 생산 수단(면화, 방추 등)은 생산물의 구성 요소로 전환된다.

 

생산 수단이 지닌 사용 가치는 소멸하지만, 이는 새로운 사용 가치로 재생되기 위함이다. 가치 형성 과정에서 보았듯이, 어떤 사용 가치가 목적에 맞게 소비되면, 그 사용 가치를 생산하는 데 투입된 노동 시간은 새로운 사용 가치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 시간의 일부가 된다. , 이는 소비된 생산 수단으로부터 새로운 생산물로 이전되는 노동 시간이다. 따라서 노동자가 소비된 생산 수단의 가치를 보전하여 생산물의 가치 요소로 이전시키는 일은 단순히 노동을 투입하는 일만으로는 이뤄질 수 없다. 이는 노동의 특수한 유용성과 생산적 형태로부터 비롯된다. 방족, 직조, 단야와 같은 목적성 있는 생산 활동은 생산 수단을 다시 활성화시켜 노동 과정의 요소로 전환시키고, 이로부터 생산물을 창조한다.

 

노동자가 방적이 아닌 다른 생산적 노동을 한다면, 그는 면화를 면사로 전환시키지 못하며, 결과적으로 면화와 방추의 가치 역시 면사로 이전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노동자가 목공으로 작업을 바꾸더라도, 그는 여전히 하루의 노동으로부터 재료에 가치를 부가한다. 따라서 노동자가 가치를 첨가하는 일은 그의 노동이 방적이나 목공이라는 특정 행위이기 때문이 아니라, 추상적 사회적 노동이라는 노동 일반의 성격 때문이다. 또한, 그가 특정한 가치량을 첨가하는 일은 그의 노동이 특수한 유용성을 지니기 때문이 아니라, 일정 시간 동안 지속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방적공의 노동은 인간 노동력 지출이라는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성질로부터 면화와 방추의 가치에 새로운 가치를 부가한다. 반면에, 방적이라는 구체적이고 유용한 성질로부터 생산 수단의 가치를 생산물로 이전시키고 보존한다. 이처럼 동일한 시간 안에 이루어지는 노동은 두 가지 상이한 결과를 만들어 낸다. , 노동에서 단순한 양적 투입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투입되는 노동의 질적 속성은 생산 수단의 기존 가치를 보존한다. 이러한 노동의 이중성은 다양한 현상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어떤 발명으로 인해 방적공이 36시간에 걸쳐 방적하던 면화량을 이제 6시간 만에 처리할 수 있다고 가정하자. 그의 목적적이고 유용한 생산 할동의 효율은 6배로 증가했다. 6시간 노동의 생산물은 이전의 6배에 달하며, 6kg의 면화가 흡수하던 일과 동일한 노동량을 흡수한다. 이 새로운 방식으로는 면화 1kg당 이전 방식의 1/6에 해당하는 새로운 노동과 가치만이 부과된다. 반면, 36kg의 면사 생산물에는 이전보다 6배의 면화 가치가 포함된다. 6시간의 방적 작업 동안 이전의 6배에 달하는 원료 가치가 보존되어 생산물로 이전된다. 물론 이때 각 1kg의 원료에는 이전의 1/6에 불과한 새로운 가치가 첨가된다. 이는 하나의 분리할 수 없는 과정 속에서 노동이 가치를 보존하는 속성과 가치를 창조하는 속성이 얼마나 본질적으로 다른지 명확히 보여준다.

 

면화 방적에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될수록, 면화에 부가되는 새로운 가치는 커진다. 반대로, 동일한 노동 시간 내에 더 많은 면화를 방적할수록, 생산물에 이전되어 보존되는 가치는 증가한다. 방적 노동의 생산성이 변하지 않아 방적공이 1kg의 면화를 방적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 동일하다고 가정하자. 하지만 면화 자체의 교환 가치가 6배 상승하거나 1/6로 하락한다면, 방적공은 동일한 양의 면화에 동일한 노동량과 가치를 첨가하고, 같은 시간 동안 동일한 양의 면사를 생산한다. 그럼에도, 그가 면화에서 면사로 이전시키는 가치는 면화 가격이 6배 상승했을 때는 이전보다 6배가 되고, 1/6로 하락했을 때는 이전의 1/6이 된다. 이와 동일한 결과는 노동 수단의 유용성은 변함이 없으나 그 가치가 증감하는 경우에도 발생한다.

 

방적 과정의 기술적 조건과 생산 수단의 가치에 변동이 없다면, 방적공은 동일한 노동 시간동안 동일한 양의 원료와 기계를 소비한다. 그가 생산물에 보존하는 가치는 그가 새로 부가하는 가치에 정비례한다. 예를 들어, 2주 동안 그는 1주 동안보다 2배의 노동과 가치를 첨가하고, 동시에 2배 가치의 원료와 기계를 소모한다. 따라서 2주간의 생산물에 보존되는 가치는 1주간의 생산물에 보존되는 가치의 2배가 된다. , 주어진 불변의 생산 조건에서는 노동자가 더 많은 가치를 부가할수록, 더 많은 가치를 이전하여 보존한다. 그러나 그가 더 많은 가치를 보존하는 일은 새로운 가치를 부가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 부가 행위가 불변의 생산 조건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상대적인 볼 때, 노동자는 항상 새로운 가치 첨가량에 비례해 기존 가치를 보존한다고 말할 수 있다. 면화 가격이 1원에서 2원으로 오르거나 0.5원으로 떨어지더라도, 1시간 노동으로 생산된 면사 속에 보존된 면화 가치는 2시간 노동으로 생산된 면사 속 가치의 절반에 불과하다. 또한, 노동자의 생산성이 향상되거나 저하된다면, 그는 1시간 동안 더 많거나 더 적은 양의 면화를 방적하게 되며, 이에 따라 1시간 노동 생산물에 보존되는 면화 가치도 달라진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2시간 노동으로 보존하는 가치는 1시간 노동으로 보존하는 가치의 2배가 된다.

 

가치는 사용 가치를 지닌 물건 속에만 존재한다. (인간 역시 노동력의 인격화로 보면 일종의 자연물이며, 노동은 노동력의 육체적 발현이다.) 따라서 어떤 물건이 사용 가치를 잃으면 가치도 상실한다. 하지만 생산 수단은 사용 가치를 잃는다고 해서 가치마저 상실하지는 않는다. 이는 생산 과정에서 원래의 사용 가치 형태를 잃는 동시에 생산물 속에서 새로운 가치 형태를 얻기 때문이다. 가치는 존재할 수 있는 사용 가치를 가져야 하지만, 어떤 사용 가치 안에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따라서 노동 과정에서 생산 수단이 가치를 생산물로 이전시키는 일은, 생산 수단이 고유의 사용 가치와 교환 가치를 상실하는 만큼만 이뤄진다. , 생산 수단은 자신이 잃는 가치만을 생산물에 넘겨준다. 그러나 노동 과정에서 여러 물질적 요소들이 모두 동일하게 작용하지는 않는다.

 

보일러 가열에 사용되는 석탄이나 바퀴 축에 바르는 기름은 흔적 없이 사라진다. 염료와 같은 보조 재료 역시 소모되지만, 생산물의 속성으로 다시 나타난다. 원료는 형태가 변할지라도 생산물의 실체를 이룬다. 따라서 원료와 보조 재료는 노동 과정에 투입될 때의 독자적인 모습을 잃는다. 진정한 의미에서 노동 수단은 앞선 경우와 다르다. 도구, 기계, 공장 건물, 용기 등은 원래의 형태를 유지한 채 매일 반복적으로 노동 과정에 투입될 수 있어야만 유용하다. 이들은 노동 과정 중에 고유한 모습을 유지하며, 수명이 다한 후에도 생산물과 별개로 잔해 형태로 남는다. 이러한 노동 수단이 생산에 기여한 전체 기간을 살펴보면, 그 사용 가치는 완전히 소멸되고 그 교환 가치는 생산물로 전부 이전된다.

 

예를 들어, 수명이 10년인 방직 기계의 총가치는 10년간의 노동 과정을 거치며 그 기간의 생산물로 이전된다. 따라서 하나의 노동 수단은 여러 차례 반복되는 노동 과정으로 존재한다. 노동 수단은 인간과 비슷한 운명을 겪는다. 인간이 매일 죽음에 가까워지듯이, 노동 수단도 수명이 정해져 있다. 개인의 정확한 수명 예측은 어렵지만, 생명 보험 회사가 평균 이론을 바탕으로 인간의 수명에 대한 신뢰성 있는 결론을 도출하듯이, 노동 수단도 마찬가지다.

   

어떤 종류의 기계가 평균적으로 얼마나 존속할 수 있는지는 경험으로 알 수 있다. 어떤 기계의 사용 가치가 평균 6일 동안만 유지된다면, 이 기계는 매일 사용 가치의 1/6을 잃고, 그날의 생산물에 자신의 가치 중 1/6을 이전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모든 노동 수단은 마모되면서 매일 사용 가치를 상실하고, 이에 비례해 매일 가치를 생산물로 이전하게 된다. 노동 과정에서 생산 수단은 자신이 상실하는 가치 이상을 생산물에 이전하지 않는다. 생산 수단이 그 자체로 아무런 가치도 없다면, 곧 인간 노동의 산물이 아니라면, 그것은 생산물에 가치를 이전할 수 없다. 이러한 생산 수단은 사용 가치를 형성하는 데는 기여하지만, 교환 가치를 형성하는 데는 참여하지 않는다. 토지, 바람, , 광석 형태의 금속, 원시림의 나무 등 인간의 노동을 거치지 않은 자연 상태의 생산 수단이 여기에 해당한다.

 

하나의 흥미로운 현상은 다음과 같다. 가치가 1,000원이고 1000일 후에 마모될 기계를 가정하자. 이 경우, 기계의 가치는 매일 1/1,000씩 생산물로 이전된다. 하지만 기계는 비록 점차 성능이 저하되더라도 노동 과정 전체에 기능적으로 참여한다. 이는 노동 과정과 가치 형성 과정 간 차이를 보여준다. 동일한 생산 수단이 노동 과정의 요소로는 전체적으로 참여하지만, 가치 형성의 요소로는 부분적으로만 계산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생산 수단이 노동 과정에 부분적으로만 참여해도 가치 형성 과정에는 전체적으로 포함될 수 있다. 예를 들어, 115kg의 면화로 실을 뽑을 때, 15kg의 낙면이 생겨 면사로 되지 못하고 솜 부스러기가 된다고 가정하자. 15kg의 낙면 발생이 방적의 평균적이고 불가피한 조건이라면, 이 낙면의 가치 역시 면사로 만들어진 100kg 면화의 가치와 함께 면사 가치에 포함된다.

 

100kg 면사를 생산하려면, 15kg 면화가 솜 부스러기로 소모되는 일은 피할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면화의 낭비는 면사 생산의 필수적인 조건이 되며, 그만큼의 가치를 면사로 이전시킨다. 이 원리는 노동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폐기물에 적용된다. , 이 폐기물이 새로운 생산 수단이나 독립적인 사용 가치로 재활용되지 않는 경우에만 해당된다. 예를 들어, 맨체스터의 대규모 기계 제작 공장에서는 큰 기계를 깎아낸 쇠 부스러기가 산더미처럼 쌓인다. 이 쇠 부스러기는 저녁에 제철소로 운반되어, 다음 날 다시 대량의 철로 가공되고, 공장으로 되돌아온다.

 

생산 수단은 노동 과정에서 원래 형태의 사용 가치를 상실하는 만큼만 새로운 생산물에 가치를 이전한다. 생산 수단이 잃을 수 있는 최대 가치는 노동 과정 투입 시점에 원래 가지고 있던 가치량, 곧 그 생산에 필요한 노동 시간으로 제한된다. 따라서 생산 수단은 노동 과정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보유했던 가치보다 더 큰 가치를 생산물에 부가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어떤 생산 수단의 가치가 3,000(500일의 노동 시간)이라면, 그것은 생산물의 가치에 3,000원 이상을 부가할 수 없다. 생산 수단의 가치는 그것이 생산 수단으로 투입되는 노동 과정으로부터 결정되지는 않으며, 그것이 생산물로 나온 이전의 노동 과정으로부터 결정된다. 노동 과정에서 생산 수단은 단지 유용한 속성을 지닌 물건, 곧 사용 가치로 기능할 뿐이다. 그러므로 이 과정에 투입되기 전에 가치가 없었다면, 그것은 생산물에 어떠한 가치도 이전하지 못한다.

 

생산적 노동이 생산 수단을 새로운 생산물의 형성 요소로 전환시키면서, 생산 수단의 가치는 일종의 윤회 과정을 거친다. 소모된 육체로부터 새로 만들어진 육체로 가치가 이전되는 일이다. 이 과정은 현실적 노동의 배후에서 일어난다. 노동자는 기존의 가치를 보존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노동을 투입하거나 가치를 창조할 수 없다. 그가 투입하는 노동은 반드시 특정한 유용한 형태를 가져야 하며, 생산 수단들을 활용해 그 가치를 새로운 생산물로 이전하지 않고서는 유용한 노동을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치를 부가하면서 동시에 가치를 보존하는 일은 활동 중의 노동력, 곧 살아 있는 노동의 본질적인 속성이다. 이 속성은 노동자에게는 추가적인 비용을 발생시키지 않지만, 자본가에게는 기존 자본 가치를 보존하는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 준다. 호황기에는 자본가가 이윤 추구에 몰두하여 이 공짜 선물을 인지하지 못하지만, 공황과 같은 노동 과정에서 강제적 중단은 자본가로 하여금 이를 절실히 깨닫게 만든다.

 

생산 과정에서 실제로 소모되는 일은 생산 수단 사용 가치이며, 이 소비로부터 노동은 생산물을 형성한다. 사실상 생산 수단의 가치 자체는 소비되지 않으므로, 그 가치가 재생산된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대신, 그 가치는 보존된다. 이러한 보존은 가치 자체에 대한 조작이 아니라, 가치가 본래 담겨 있던 사용 가치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비록 다른 사용 가치 속으로 들어가지만 말이다. 따라서 생산 수단의 가치는 생산물의 가치에 다시 나타나기는 하지만, 엄밀히 말해 재생산되는 것은 아니다. 생산되는 것은 기존의 교환 가치가 재현되는 새로운 사용 가치다.

 

노동 과정에서 활동하는 노동력, 곧 주체적 요소는 사정이 다르다. 노동은 특정 목적을 위해 수행되며 생산 수단의 가치를 생산물에 이전, 보존하는 동시에 매 순간 추가적이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한다.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 가치에 해당하는 가치, 예를 들어, 6시간의 노동으로 3원의 가치를 부가했을 때, 생산 과정이 멈춘다고 가정하자. 3원의 가치는 생산물 가치에서 생산 수단가치로부터 이전된 부분을 초과하는 분량이다. 이 가치는 생산 과정 내부에서 발생한 유일한 본원적 가치이며, 이 과정 자체로부터 생산된 유일한 부분이다. 이 새로운 가치 3원은 자본가가 노동력을 구매하는 데 지출한 돈과, 노동자가 생필품 구매에 사용한 돈을 대체할 뿐이다. 따라서 이 지출된 3원과 관련하여, 새로운 가치 3원은 재생산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는 생산 수단의 가치처럼 외형적으로만 재생산(사실상 이전)된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재생산된 것이다. 이 경우 한 가지를 다른 가치가 대체하는 과정은 새로운 가치의 창조로부터 이루어진다.

 

우리가 이미 아는 바와 같이, 노동 과정은 노동력 가치의 단순한 등가물을 재생산하는 것을 넘어 계속된다. 노동력 가치의 등가물 재생산에는 6시간이 충분하지만, 노동 과정은 12시간지속될 수 있다. 따라서 노동력의 발휘는 자기 가치를 재생산할 뿐 아니라 일정한 초과 가치를 생산한다. 이 잉여 가치는 생산물의 가치와 그 생산물 형성에 소모된 요소들(생산 수단 및 노동력)의 가치 간 차이다.

 

생산물 가치 형성에 있어 노동 과정의 다양한 요소들이 수행하는 역할은, 사실상 자본 증식 과정에서 각 자본 요소가 갖는 특징적 기능을 보여준다. 생산물 총 가치에서 생산 요소들의 총 가치를 초과하는 부분은, 최초 투입된 자본 가치를 넘어서 증식된 자본의 초과분이다. 생산 수단과 노동력은 최초 자본 가치가 화폐 형태를 벗고 노동 과정의 요소로 변환된 데 불과하다. 이처럼 자본 중에서 생산 수단(원료, 보조 재료, 노동 수단)으로 변환되는 부분은 생산 과정에서 그 가치량이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를 불변 자본이라고 부른다.

 

자본 중 노동력으로 전환되는 부분은 이와 달리 생산 과정에서 그 가치가 변동한다. 노동력은 자신의 가치 등가물을 재생산하고, 추가적으로 초과 가치를 창출하는데, 이 잉여 가치는 상황에 따라 그 크기가 변할 수 있다. 이처럼 자본의 이 부분은 불변적인 크기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크기로 전환된다. 따라서 이를 가변 자본이라고 부른다. 결론적으로, 노동 과정의 관점에서 생산 수단과 노동력으로 구별되는 자본 요소들은, 가치 증식 과정의 관점에서는 각각 불변 자본과 가변 자본으로 구분된다.

 

불변 자본의 정의가 그 구성 요소 가치의 변동성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면화 1kg 가격이 0.5원에서 흉작으로 인해 1원으로 상승했다고 가정하자. 이전에 0.5원으로 구매되어 가공 중인 면화는 이제 생산물에 1원의 가치를 이전한다. 이미 방적되어 시장에서 유통 중인 면사 역시 원래 가치에서 두 배를 생산물에 이전시킨다. , 면화 가격 상승 이전에 생산된 면사의 가치도 상승한다.

 

하지만 이러한 가치 변동이 방적 과정 자체에서 발생하는 면화의 가치 증식과는 무관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전에 구매한 면화가 아직 방적되지 않았다면, 0.5원이 아닌 1원에 다시 판매될 수도 있다. 또한 면화가 이미 노동 과정에 투입되었다면, 가공 단계가 적을수록, 그 가치는 1원에 더 가깝다. 이 때문에 급격한 가치 변동이 일어날 때, 투기 원칙은 직물보다 면사, 면사보다 면화 자체와 같이 가장 적게 가공된 원료에 투자한다. 이러한 가치 변동은 면화가 생산되는 과정에서 기인하며, 면화가 생산 수단이자 불변 자본으로 기능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일이 아니다. 어떤 상품 가치는 물론 그 상품에 투입된 노동량으로 결정되지만, 이 노동량 자체는 사회적으로 결정된다.

 

상품 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 시간이 변화하면, 이전에 생산된 상품들에도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동일한 양의 면화라도 풍작일 때보다 흉작일 때 더 많은 노동량을 대표하게 된다. 이것은 모든 상품이 동일한 종류의 개별 표본에 불과하며, 특정 시점에서 가치는 해당 상품을 생산하는 데 당시 사회적 조건에서 필요한 노동량으로 측정되기 때문이다. 원료 가치와 마찬가지로, 이미 생산 과정에서 사용 중인 노동 수단(기계 등)의 가치, 그리고 이들이 생산물에 이전하는 가치 부분도 변동할 수 있다. 새로운 발명으로 인해 동일한 종류의 기계가 더 적은 노동으로 생산된다면, 기존 기계 설비의 가치는 다소간 하락하며, 이에 비례해 생산물로 이전되는 가치도 줄어든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가치 변동은 기계가 생산 수단으로 기능하는 과정 외부에서 발생한 일이다. 해당 생산 과정에서 기계는 자신이 원래 보유했던 가치 이상을 결코 이전할 수 없다.


생산 수단의 가치 변동이 생산 과정 중에도 영향을 미치더라도, 이는 생산 수단이 불변 자본이라는 본질을 바꾸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불변 자본과 가변 자본 사이의 비율 변동도 자본의 기능적 차이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예를 들어, 10명의 노동자가 적은 가치의 도구로 소량의 원료를 가공하던 상황에서, 기술이 발전해 단 1명의 노동자가 고가 기계로 100배의 원료를 가공하게 된다고 가정하자. 이 경우, 불변 자본(생산 수단의 총가치)은 크게 증가하지만, 노동력에 투입되는 가변 자본은 크게 감소한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불변 자본과 가변 자본 간 양적 비율만을 바꿀 뿐, 이들의 본질적 차이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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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절대적 초과 가치의 생산

 

7. 노동 과정과 가치 증식 과정

 

7-1. 노동 과정 (사용 가치의 생산)

 

자본가는 노동력을 사용하고자 이를 구매하며, 이 사용 행위가 곧 노동이다. 노동력 구매자는 판매자에게 노동을 지시하고 소비하면서, 판매자를 잠재적 노동력 상태에서 실제 활동하는 노동자, 현실적 노동자로 전환시킨다.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을 상품에 구현하려면, 먼저 그 노동을 사용 가치(특정한 욕구를 충족하는 물건)에 구현해야 한다. 따라서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생산을 지시하는 일은 바로 이 특정한 사용 가치다. 사용 가치 또는 재화 생산은 그것이 자본가의 감독 아래에서 이루어진다 해도 본질적인 일반적 속성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노동 과정을 특정 사회 형태와 무관하게 고찰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노동은 본질적으로 인간과 자연 간 과정이며, 인간은 이 과정으로부터 자신과 자연 사이에서 물질대사를 매개하고, 규제하며, 통제한다. 인간은 팔, 다리, 머리, 손과 같은 신체적 자연력을 활용하여 자연 소재에 작용한다. 이 작용으로부터 외부 자연을 변화시키고, 동시에 자기 자신의 본성을 변화시킨다. , 인간은 자신의 잠재력을 발전시키고, 그 힘을 자신의 통제 아래 둔다.

 

여기에서는 동물적인 본능적 노동 형태는 논하지 않는다.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판매하고자 시장에 나타나는 시기는, 인간 노동이 본능적 형태를 벗어난 지 한참 후다. 우리가 다루는 노동은 오직 인간에게만 고유한 형태의 노동이다. 거미의 직조나 꿀벌의 건축은 인간 건축가를 능가하지만, 가장 서투른 건축가라도 집을 짓기 전에 머릿속으로 먼저 계획한다는 점에서 꿀벌과 구별된다.

 

노동 과정은 노동자의 머릿속에 관념적으로 이미 존재했던 결과물이 실제로 나타나는 과정이다. 노동자는 자연물의 형태를 변화시키는 동시에, 자신의 목적을 그 자연물에 구현한다. 이 목적은 법칙처럼 노동자의 행동 방식을 규정하며, 노동자는 자신의 의지를 그 목적에 복종시켜야 한다. 이 복종은 단순히 한순간의 행위가 아니라, 노동 내내 신체 기관의 긴장과 함께 합목적인 의지, 곧 치밀한 주의력을 요구한다. 특히 노동의 내용이나 방식이 노동자의 흥미를 끌지 않고, 그가 노동을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힘을 자유롭게 발휘하는 행위를 즐기지 못할수록, 더욱 치밀한 주의력이 필요하다.

 

노동 과정의 기본 요소

 

1. 인간의 합목적적 활동 (노동 그 자체)

 

2. 노동 대상

 

3. 노동 수단

 

인간에게 식량이나 생활 수단을 제공하는 토지(경제학적 관점에서는 물도 포함)는 인간의 수고 없이도 존재하는 일반적 노동 대상이다. 자연으로부터 직접 분리된 물건, 곧 물에서 잡힌 물고기, 원시림에서 벤 원목, 광맥에서 채취한 광석 등도 천연적으로 존재하는 노동 대상이다. 반면, 이미 과거의 노동이 투입된 노동 대상은 원료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채굴되어 세광 과정에 들어가는 광석이 이에 해당한다. 모든 원료는 노동 대상이지만, 모든 노동 대상이 원료는 아니다. 노동 대상은 이미 노동을 거쳐 어떤 변화가 가해졌을 때 비로소 원료가 된다.

 

노동 수단은 노동자가 자신과 노동 대상 사이에 두고, 자신의 활동을 전달하는 도구 또는 도구들의 조합이다. 노동자는 물질들의 기계적, 물리적, 화학적 성질을 활용하여 그것들을 자신의 힘으로 삼아 다른 물질에 작용하게 한다. 과일처럼 신체 기관만으로 채취하는 생활 수단을 제외하면, 노동자가 직접 다루는 일은 노동 대상이 아니라 노동 수단이다. 이 과정에서 자연은 노동자에게 활동 기관의 일부가 된다. 노동자는 자연을 활용해 자신의 신체 기관을 확장하며, 자신의 자연적 존재를 연장하는 셈이다.

 

토지는 노동자의 기본적인 식량뿐만 아니라 노동 수단의 원천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던지거나, 문지르거나, 누르거나, 자르는 데, 사용하는 돌이 그렇다. 토지 그 자체도 노동 수단이 될 수 있지만, 농업에서 사용되려면 고도로 발달한 노동력과 다른 많은 노동 수단이 전제되어야 한다. 노동 과정이 조금이라도 진화하면 특별히 가공된 노동 수단이 필요해진다. 그래서 태고의 동굴에서도 돌로 만든 도구나 무기가 발견된다. 인류 역사의 초기에는 가공된 돌, 나무, , 조개뿐만 아니라, 특정 목적을 위해 길들여진 동물들도 중요한 노동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노동 수단을 사용하고 제조하는 일은 인간 고유의 노동 과정을 특징짓는 요소다. (비록 그 원시적인 형태는 일부 동물에게서도 발견되지만). 이 때문에 프랭클린은 인간은 도구를 만든는 동물이라고 정의한다. 멸종한 동물 종의 연구에서 화석 유골이 중요하듯이, 과거의 경제적 사회 구조를 탐구하는 데는 노동 수단의 유물이 중요하다. 경제적 시대는 무엇을 생산해는가보다, 어떤 노동 수단을 사용하여 어떻게 생산하는가로 구분된다. 노동 수단은 인간 노동력 발달의 척도일 뿐 아니라, 사람들이 그 속에서 일하는 사회적 관계를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노동 수단 중에서도 생산의 골격이나 근유에 비유할 수 있는 역학적 노동 수단은 생산의 혈관에 비유되는 용기 형태의 노동 수단 (: , , 바구니, 항아리 등)보다 사회적 생산 시대를 훨씬 더 명확하게 규정한다. 용기로서의 노동 수단은 화학 공업에서 비로소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노동 대상에 대한 활동을 중개하는 도구들 외에, 노동 과정 수행에 필수적인 모든 객관적

조건들은 더 넓은 의미에서 노동 수단에 포함될 수 있다. 이러한 수단들은 직접적으로 노동 과정에 참여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없으면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거나 불완전하게 진행된다. 대표적인 보편적 노동 수단은 토지 그 자체다. 토지는 노동자에게 설 자리를 제공하고, 노동 과정에 작업 공간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미 과거의 노동이 투입된 이러한 종류의 노동 수단으로는 공장, 운하, 도로 등이 있다.

 

노동 과정은 인간 활동이 노동 수단으로부터 노동 대상에 의도된 변화를 일으키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최종 생산물, 곧 사용 가치 속에 사라지며, 그 생산물은 형태가 변형된 자연 재료가 인간 욕구에 적합하게 된다. 노동은 그 대상과 결합되어 대상화되었으며, 대상은 변형되었다. 노동자의 움직임으로 나타났던 일이 이제 생산물에서는 정지된 형태로 나타난다. 노동자가 방적 노동을 했다면, 그 결과물은 방적된 실이다. 이 전체 과정을 생산물의 관점에서 보면, 노동 수단과 노동 대상은 생산 수단이 되고, 노동 그 자체는 생산적 노동이 된다. 어떤 노동 과정에서 생산된 사용 가치는 그 자체로 생산물인 동시에, 다음 노동 과정에서는 다른 사용 가치를 만들기 위한 생산 수단이 된다. 따라서 생산물은 단순히 노동 과정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또 다른 노동 과정의 필수 조건이기도 하다.

 

광업, 수렵, 어업 등 노동 대상이 농업은 자연 그대로인 채취 산업(, 미개척지를 개간하는 최초의 농업 포함)을 제외하면, 모든 산업 부문은 이미 노동 과정에서 거친 원료를 다룬다. 농업의 종자가 그 예다. 우리가 흔히 자연 산물로 여기는 동식물조차 현재 모습은 지난 노동 생산물이며, 여러 세대에 걸쳐 인간 통제와 노동으로부터 점진적으로 변화된 산물이다. 특히 대부분의 노동 수단은 표면적으로도 오랜 노동 흔적을 명백히 보여준다.

 

원료는 생산물의 주된 실체가 될 수도 있고, 생산물 형성에 보조적으로 참여할 수도 있다.

보조 재료는 다음과 같이 소비된다.


보조 재료의 소비

 

1). 증기 기관에 사용되는 석탄, 자동차에 사용되는 휘발유, 말에 주는 건초처럼 노동 수단으로 소비된다.

 

2). 표백을 위해 아마포에 넣은 염소, 철에 첨가하는 석탄, 양모 사용하는 염료처럼 원료에 변화를 주고자 첨가된다.

 

3). 작업장 조명이나 난방처럼 노동 수행 자체를 돕는 데 사용된다.

 

화학 공업에서는 주요 재료와 보조 재료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투입된 원료가 생산물에서 원래 형태로 다시 나타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물건은 다양한 속성과 용도를 가지므로, 동일한 생산물이 여러 노동 과정에서 원료로 사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곡물은 제분업자, 전분업자, 양조업자, 목축업자에게 원료가 되며, 씨앗으로는 자신을 다시 생산하는 원료가 된다. 마찬가지로 석탄은 광업이 생산물이면서 동시에 광업에 필요한 생산 수단으로 투입된다. 심지어 동일한 노동 과정에서도 하나의 생산물이 노동 수단과 원료 역할을 동시에 할 수 있다. 가축 사육에서 가축은 원료인 동시에 비료 생산 수단이 되는 경우가 그렇다.

 

소비를 위해 완성된 생산물이 다른 생산물의 원료가 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포도가 포도주 원료로 되는 것이다. 반대로, 오직 원료로만 사용되는 생산물도 있는데, 이를 반제품 또는 더 정확하게는 중간 제품이라 한다. 면사나 면포가 그 예다. 이들은 이미 생산물이지만, 여러 공정을 거치면서 계속해서 모습을 바꾸는 원료로 기능하고, 최종 공정에서야 비로소 완성된 생활 수단이나 노동 수단이 된다.

 

어떤 사용 가치가 원료, 노동 수단, 또는 생산물이 되는지는 전적으로 그 사용 가치가 노동 과정에서 맡는 역할과 위치에 달려 있다. 이 위치가 바뀌면 사용 가치에 대한 규정도 달라진다. 예를 들어, 생산물이 새로운 노동 과정에서 생산 수단으로 투입되면, 생산물이라는 성격을 잃고, 살아 있는 노동의 객관적 요소로 기능하게 된다. 방적공은 방추를 실을 뽑는 수단, 아마를 실을 뽑는 대상으로만 다룬다. 방적 재료인 아마와 방추 없이 방적을 할 수 없기에. 이들이 이미 생산물이라는 사실이 전제되기는 한다. 그러나 방적 과정 자체에서는 아마와 방추가 과거 노동 생산물이라는 점은 중요하지 않다. 이는 빵이 농부, 제분업자, 제빵사에게 있어 과거 노동 산물이라는 사실이 소화 과정과 무관한 일과 같다.

 

생산 수단이 과거 노동의 산물이라는 점이 두드러진다면, 이는 그 생산 수단에 결함이 있을 때다. 잘 들지 않는 칼이나 잘 끊어지는 실은 그것을 만든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반면, 우수한 생산물은 그것의 유용한 속성을 부여한 과거 노동을 완전히 흡수하여 사라지게 한다.

 

노동 과정에 쓰이지 않는 기계는 쓸모가 없다. 게다가 자연의 파괴력으로 인해 쇠는 녹슬고 나무는 썩는다. 직조나 편직에 사용되지 않는 실은 낭비된 솜에 불과하다. 살아 있는 노동은 이러한 물건들을 되살려 잠재적인 사용 가치에서 실제 유용한 사용 가치로 전환시킨다. 이 물건들은 노동의 과정으로 흡수되어 유기체의 일부처럼 활성화되며, 목적에 맞는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이로부터 이 물건들은 개인적 소비를 위한 생활 수단이나 새로운 노동 과정에 투입될 생산 수단 같은 새로운 사용 가치와 생산물의 구성 요소로 유용하게 소비된다.

 

어떤 생산물은 노동 과정의 결과인 동시에 그 과정의 필수 조건이다. 마찬가지로, 생산물이 살아 있는 노동과 결합되는 일은 생산물을 사용 가치로 활용하고 실현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노동은 노동 대상과 노동 수단을 소모하므로, 그 자체로 소비 행위이다. 하지만 이러한 생산적 소비는 개인적 소비와는 다르다. 개인적 소비가 생산물을 살아 있는 개인 생활 수단으로 소모하는 반면, 생산적 소비는 생산물을 노동력 발휘를 위한 수단으로 소모한다. 따라서 개인적 소비의 결과는 소비자 자신이지만, 생산적 소비의 결과는 소비자와는 별개인 생산물이다.

 

노동 수단과 노동 대상이 이미 생산물인 경우, 노동은 새로운 생산물을 만들고자 기존의 생산물을 소비한다. , 한 종류의 생산물을 다른 종류의 생산물을 위한 생산 수단으로 전환하며 소비한다. 하지만 노동 과정은 최초에 인간과 자연 그대로의 토지 사이에서 이루어졌듯이, 지금도 여전히 인간의 노력이 가해지지 않은 천연적 생산 수단을 많이 활용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한 노동 과정은 사용 가치를 생산하는 합목적적 활동이다. 이는 인간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자연을 활용하며, 인간과 자연 간 물질대사를 위한 일반적이고 영구적인 자연적 조건이다. 따라서 노동 과정은 어떤 사회 형태에도 구애받지 않고, 오히려 모든 사회 형태에 공통으로 존재한다. 우리는 이 노동 과정을 설명하고자 노동자와 다른 노동자 간 관계를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 한쪽에는 인간과 그의 노동, 다른 쪽에는 자연과 그 소재만으로 충분했다. 빵의 맛을 보고 누가 밀을 경작했는지 알 수 없듯이, 노동 과정만을 보아서는 그것이 어떤 조건에서 이루어지는지 알 수 없다. 노예 감시인의 잔인한 채찍 아래서인지, 자본가의 감시 아래서인지, 아니면 킨키나투스가 자신의 작은 땅을 경작하는지, 또는 미개인이 돌로 짐승을 사냥하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이제 장래 자본가에게로 돌아가 보자. 그는 상품 시장에서 생산 수단(객체적 요소)과 노동력(인적 요소)을 구매한 뒤, 자신의 사업에 맞는 생산 수단과 노동력을 전문가처럼 꼼꼼하게 선택했다. 자본가는 이제 구매한 상품인 노동력 소비에 착수한다. 그는 노동자로 하여금 노동으로부터 생산 수단을 소비하게 만든다. 이 노동 과정에서 일반적인 성격은 노동자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자본가를 위해 노동한다는 사실로 인해 변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자본가가 개입했다고 해서 장화를 만들거나 실을 뽑는 특정 방식이 당장 바뀌는 일도 아니다. 자본가는 먼저 시장에서 접하는 노동력을 활용해야 하며, 자본주의가 없던 시절의 노동 방식에 만족할 수밖에 없다. 노동이 자본에 종속되면서 나타나는 생산 방식 자체의 변화는 나중에 발생하므로, 이는 추후에 논의할 문제다.

 

노동 과정이 자본가의 노동력 소비 과정으로 전환되면, 두 가지 특징이 나타난다.

 

첫째,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을 소유한 자본가의 감독 아래 노동한다. 자본가는 노동이 질서정연하게 이루어지고 생산 수단이 합목적적으로 사용되도록 감시한다, 이는 원료 낭비를 막고, 노동 도구가 꼭 필요한 만큼만 닳도록 감시하기 위함이다.

 

둘째, 생산물은 노동자의 소유가 아닌 자본가의 소유물이다. 자본가가 노동력의 하루 가치를 지불하면, 하루 동안 그 노동력을 사용할 권리는 자본가에게 귀속된다. 이는 자본가가 하루 동안 빌린 말의 사용 권리를 갖는 일과 마찬가지다. 상품에서 사용 권리가 구매자에게 있듯이, 노동력 소유자인 노동자는 자신이 판매한 사용 가치, 곧 노동을 제공할 뿐이다.

 

노동자가 자본가의 작업장에 들어서는 순간, 그의 노동력 사용 가치, 곧 노동은 자본가 소유가 된다. 자본가는 구매한 노동력을 살아있는 효모처럼 그의 소유인 생산물 형성 요소들 (기계, 원료 등)과 결합시킨다. 자본가의 관점에서 노동 과정은 그가 구매한 노동력을 소비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다만, 그는 노동력에 생산 수단을 결합하면서만 이를 소비할 수 있다. 이 노동 과정은 자본가 소유 물건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과정이므로, 그 결과물인 생산물 또한 그의 소유가 된다. 이는 그의 포도주 창고에서 일어나는 발효 과정의 생산물이 그의 것과 마찬가지다.

 

7-2. 가치 증식 과정 (초과 가치의 생산)

 

자본가가 얻는 생산물은 실이나 장화 등과 같은 사용 가치다. 장화가 사회적 발전에 기여할지라도, 자본가는 장화 자체를 위해 이를 생산하지 않는다. 상품 생산에서 사용 가치는 그 자체로 사랑받는물건은 아니다. 사용 가치는 교환 가치의 물질적 토대이자, 이를 담는 그릇이므로, 오직 이러한 역할을 할 때만 생산된다.

 

자본가의 목적

 

1. 교환 가치를 지닌 사용 가치, 곧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상품을 생산하는 일.

 

2. 생산에 투입된 상품들의 가치 총액(생산 수단과 노동력의 가치 총액)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닌 상품을 생산하는 일.

 

그는 사용 가치뿐만 아니라 상품을, 그리고 가치뿐만 아니라 초과 가치를 생산하고자 한다.

 

상품 생산이 논의의 초점이므로, 지금까지 다룬 노동 과정은 생산 과정의 한 측면일 뿐이다. 상품 자체가 사용 가치와 가치의 통일체이듯, 상품의 생산 과정도 노동 과정과 가치 형성 과정의 통일이어야 한다.

 

이제 생산 과정을 가치 형성 과정으로 살펴보자. 우리는 각 상품의 가치가 그 사용 가치에 구현된 노동량, 곧 상품 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 시간으로 결정된다는 점을 알고 있다. 이는 자본가가 노동 과정의 결과로 얻은 생산물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예를 들어, 생산물이 실이라고 가정하고, 이 실에 구현된 노동량을 계산해 보자.

 

면사 생산에는 원료인 면화 10킬로그램이 필요하다. 자본가는 이를 시장에서 가치대로 10원에 구매했으며, 이 가격에는 면화 생산에 투입된 사회적 평균 노동이 이미 담겨 있다. 또한, 면화 가공에 사용된 방추의 소모량을 2원이라 가정하자. (다른 모든 노동 수단을 대표하는 값이다). 12원의 가치를 생산하는 데 24시간(2노동일)이 소요된다면, 이 면사에는 이미 2노동일의 노동이 투입된다. (면화 소비량 10원과 방추 소모량 2).

 

면화 형태가 변하고 방추가 소모되어 사라졌다는 사실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일반적 가치 법칙에 따르면, 40kg 면사 가치와 40kg 면화 가치 및 방추 한 개의 가치는 동일하며, 생산에 필요한 노동 시간도 같다. 이 경우, 동일한 노동 시간이 한편에서는 면사라는 사용 가치로, 다른 한편에서는 면화와 방추라는 사용 가치로 표현될 뿐이다. 따라서 가치가 면사, 방추, 또는 면화 중 어느 형태로 나타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방적 과정에서 방추와 면화가 결합되어 면사로 변형되는 과정 자체는 그들의 가치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마치 단순한 교환으로부터 면사라는 등가물로 바뀌는 일과 같다.

 

면화 생산에 필요한 노동 시간은, 면화를 원료로 하는 면사 생산에 필요한 노동 시간의 일부로 면사에 포함된다. 방적 과정에서 마모되거나 소모되는 방추 생산에 투입된 노동 시간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면사의 가치를 결정할 때, 곧 면사 생산에 필요한 총 노동 시간을 계산할 때, 다음의 두 과정을 동일한 노동 과정에서 순차적 단계로 간주할 수 있다.

 

1. 면화와 소모되는 방추를 생산하는 노동

 

2. 면화와 방추로 면사를 생산하는 노동

 

면사 생산에 투입된 면화와 방추는 모두 과거의 노동 산물이다. 면사 생산에 필요한 여러 작업들이 최종 방적 작업보다 시간적으로 앞섰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예를 들어, 한 채의 집을 짓는 데 총 30의 노동이 필요하다면, 마지막 30일째 노동이 첫 째 날보다 29일 늦게 시작되었어도 집에 투입된 총 노동 시간은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노동 재료와 노동 수단에 포함된 노동은 방적 과정의 초기 단계에서 이미 투입된 일로 간주할 수 있다. 요약하면, 면화와 방추와 같은 생산 수단의 가치(12)는 최종 생산물인 면사의 가치를 구성하는 일부가 된다.

 

다음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면화와 방추는 사용 가치 생산에 실제로 기여해야 한다. , 이들이 면사로 전환되어야 한다. 어떤 사용 가치가 가치를 담는 그릇이 되든 상관없지만, 그 그릇은 반드시 사용 가치를 지녀야 한다.

 

둘째, 투입된 노동 시간은 주어진 사회적 생산 조건에서 필요한 노동 시간을 초과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면사 1kg을 생산하는 데 면사 1kg만 필요하다면, 그만큼만 소비되어야 한다. 방추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자본가가 망령이 들어 철제 대신 금 방추를 사용한다 해도, 면사의 가치에는 철 방추 생산에 필요한 노동 시간만 계산된다.

 

면화와 방추라는 생산 수단이 면사 가치에서 차지하는 부분은 12, 2노동일에 해당한다. 다음으로, 방적공의 노동이 면화에 더하는 가치 부분을 살펴보자. 우리는 이제 노동을 노동 과정에서와는 다른 관점으로 봐야 한다. 노동 과정에서는 단순히 면화를 면사로 바꾸는 합목적적 활동으로 노동을 보았다. 그 목적에 잘 부합할수록 더 나은 실이 만들어진다는 점도 알았다. 방적공의 노동은 주관적으로는 방적이라는 특정 목적에서, 객관적으로는 특수한 작업 방식, 생산 수단의 성질, 생산물의 사용 가치에서 다른 생산적 노동과 독특한 차이를 보인다. 면화와 방추는 방적에 필수적이지만 대포 생산에는 무용지물이다. 그러나 방적공의 노동이 가치를 창조한다는 측면에서는, 대포를 깎는 노동자의 노동과 다르지 않다. 더 나아가, 면사 생산에 투입된 면화 재배자와 방추 제조자의 노동과도 동일하다. 이러한 동일성 때문에 면화 재배, 방추 제조, 방적은 모두 면사 가치라는 하나의 총 가치를 형성하는, 양적으로만 구분되는 부분들이 될 수 있다. 여기서는 노동의 질이나 성질, 내용이 아닌 오직 노동의 양만이 문제이며, 이 양이 계산되어야 한다.

 

우리는 방적 노동을 단순한 사회적 평균 노동으로 가정한다. 이와 반대되는 가정을 하더라도 결론은 변하지 않는다. 노동 과정에서 노동자의 활동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형태에서 정지된 대상의 형태로, 곧 노동자의 작업에서 생산물로 전환된다. 한 시간 뒤에는 방적이라는 활동이 일정량의 실로 구현된다. , 한 시간의 노동이 면화에 추가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방적이라는 특수한 활동이 아니라, 방적공의 생명력의 소모로서의 노동 그 자체다. 방적 노동은 노동력 지출이기 때문에 의미를 갖는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면화를 면사로 바꾸는 작업에서 오직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 시간만이 인정된다는 사실이다. 사회의 정상적인 생산 조건에서 1시간의 노동으로 면화 a 킬로그램이 면사 b 킬로그램으로 바뀐다면, 12시간의 하루 노동은 12a 킬로그램의 면화가 12b 킬로그램의 면사로 전환되지 않으면 인정되지 않는다. 오직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 시간만이 가치를 형성하는 것으로 계산되기 때문이다.

 

노동 자체와 마찬가지로, 원료와 생산물은 단순한 노동 과정에서와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이제 원료는 단지 일정량의 노동을 흡수하는 기능을 한다. , 방적 형태의 노동력 지출이 원료에 더해지면서 원료는 면사로 변한다. 반면, 생산물인 면사는 이제 면화가 흡수한 노동량을 측정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1시간에 1.67kg의 면화가 면사로 바뀐다면, 10kg의 면사는 6시간의 노동을 흡수한 것을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경험적으로 확정된 일정량의 생산물은 특정량의 노동, 곧 응고된 노동 시간을 대표하는 물질적 형태일 따름이다. 이 노동이 방적 노동이고, 재료가 면화이며, 생산물이 면사라는 사실은, 노동 대상 자체가 이미 생산물이라는 점과 마찬가지로 중요하지 않다. 노동자가 방적 공장이 아닌 탄광에서 노동한다면, 노동 대상인 석탄은 자연적으로 존재한다. 그럼에도, 탄층에서 채굴된 일정량의 석탄의 역시 일정량의 노동을 흡수한 것을 나타낸다.

 

우리는 노동력의 하루 가치가 3원이며, 이는 6시간의 노동에 구현된 노동량, 곧 노동자의 하루 평균 생활 수단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것이라고 가정했다. 이제 방적공이 1시간의 노동에 면화 1.67kg을 면사 1.67kg으로 바꾼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6시간 동안에는 면화 10kg을 면사 10kg으로 전환하게 된다. 이 방적 과정에서 면화는 6시간의 노동을 흡수한 셈이다. 6시간의 노동은 3원의 금량에 해당하므로, 방적 노동 그 자체로부터 3원의 가치가 면화에 추가된다.

 

생산물인 면사 10kg의 총가치를 검토해 보자. 이 면사에는 총 2.5노동일(30시간)의 노동이 투입되었다. 이 중 2일분의 노동(24시간)은 소비된 면화와 방추에 포함되어 있었고, 0.5일분의 노동(6시간)은 방적 과정에서 추가되었다. 2.5노동일은 15원의 가치를 지닌 금량에 해당한다. 따라서 10kg 면사의 가격은 15원이며, 1kg의 가격은 1.5원이다.

 

자본가는 놀랄 수밖에 없다. 생산물 가치가 투입된 자본의 가치와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가치가 증식되지 않았고, 초과 가치도 생산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화폐는 자본으로 전환되지 못했다. 면사 10kg의 가격은 15원인데, 이 생산물의 구성 요소들(면화, 방추, 노동력)을 구매하는 데도 시장에서 정확히 15원이 지출되었다. 면사의 가치가 각 구성 요소의 가치보다 크다고 해도 소용없다. 면사의 가치는 이전에 면화, 방추, 노동력에 분산되어 있던 가치들의 단순한 합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기존 가치를 합치는 일만으로는 결코 초과 가치가 생길 수 없다. 이제 모든 가치가 하나의 물건에 집중되었지만, 15원이라는 화폐 역시 세 가지 상품을 구매하기 전에는 집중된 상태였다. 이 결과는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1kg 면사의 가치가 1.5원이므로, 자본가가 10kg 면사를 구매하려면 시장에서 15원을 지불해야 한다. 자본가가 집을 이미 지어진 상태로 사든, 직접 짓게 하든, 집에 투입된 돈의 가치는 증식되지 않는다.

 

유행에 밝은 자본가는 나는 더 많은 화폐를 얻고자 돈을 투자했다고 말한다. 선한 의도로 지옥 가는 길이 포장되듯, 그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고 이윤을 얻으려 했을 수도 있다. 그는 두 번 다시는 속지 않겠다고 위협하며, 앞으로는 직접 상품을 만들지 않고 시장에서 완제품을 사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모든 동료 자본가들이 그렇게 한다면, 그는 어디서 상품을 찾을 수 있을까. 그렇다고 화폐를 먹을 수는 없다. 그는 내 절약 정신을 고려해야 하지 않는가. 나는 15원을 낭비할 수도 있었지만, 생산적으로 소비해 면사를 만들지 않았는가라고 호소한다. 그렇다. 그래서 그는 이제 나쁜 양심 대신 훌륭한 면사를 갖게 된 것 아닌가.

 

화폐를 쌓아두는 사람의 행동을 반복하는 일은 그에게 이득이 되지 않는다. 그러한 금욕이 초래하는 부정적 결과는 이미 우리가 확인한 바와 같다. 게다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는 황제조차 힘을 잃는다. 그의 금욕이 어떤 장점을 지녔든, 생산물 가치가 투입된 상품 가치의 총액과 동일하므로, 특별한 보상은 없다. 그는 미덕의 보상이 미덕 그 자체라고 여기며 스스로를 위로해야 할 뿐이다. 하지만 자본가는 더욱 집요하게 주장한다. “면사는 내게 필요 없다. 나는 팔고자 생산했다.” 그렇다면 그는 팔면 된다. 또는 더 간단하게, 앞으로는 자신에게 필요한 물건만 생산하면 된다. 이것은 자본가의 가족 주치의 매컬록이 과잉 생산이라는 유행병에 대한 특효약으로 처방했던 내용이다.

 

그러나 자본가는 여전히 완강하게 주장한다. “노동자가 아무것도 없이 맨손으로 상품을 생산할 수 있는가. 내가 재료를 제공했기에,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을 거기에 투입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그리고 사회 대다수가 빈털터리인데, 내가 생산 수단(면화, 방추)과 심지어 생활 수단까지 공급하면서 사회에 엄청난 봉사를 한 것 아닌가. 그런데도 나는 이 모든 봉사에 대해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다는 말인가.”라고 말한다.

 

그러나 노동자 또한 자본가를 위해 면화와 방추를 면사로 바꾸면서 봉사하지 않았던가. 여기서 핵심은 봉사가 아니다. 봉사란 상품이든, 노동이든, 어떤 사용 가치의 유용한 효과 일 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환 가치다.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3원의 가치를 지불했고, 노동자는 면화에 추가된 3원의 가치로 정확한 등가를, 곧 가치에 대해 가치를 반환했다.

 

이때까지 자본을 뽐내던 우리의 친구는 갑자기 고용된 노동자처럼 겸손해지며 말한다. “나 도 방적공을 감독하고 총괄하는 노동을 했다. 이런 노동 역시 가치를 형성하지 않았는가.”그의 감독과 관리인들은 어이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다. 그러자 자본가는 유쾌하게 웃으며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다. 그가 장황하게 늘어놓은 말은 우리를 속이려는 것이었다. 그 자신은 그런 주장에 관심이 없다. 그러한 변명과 속임수는 고용된 경제학 교수들에게 맡겨둔다. 그는 실무적인 사람이라, 사업 외의 일은 깊이 생각하지 않지만, 사업에 대해서는 언제나 잘 알고 있다.

 

이 문제를 더 자세히 살펴보자. 노동력의 하루 가치는 3원이며, 이는 노동력 그 자체에 0.5노동일(6시간의 노동)이 구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 노동력 생산에 필요한 매일의 생활 수단은 0.5노동일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노동력에 포함된 과거 노동(노동력의 매일 유지비)과 노동력이 제공할 수 있는 살아 있는 노동(노동력의 매일 지출)은 그 크기가 전혀 다른 두 가지 양이다. 전자는 노동력의 교환 가치를, 후자는 노동력의 사용 가치를 형성한다. 노동자의 생명을 24시간 유지하는 데, 0.5노동일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그가 하루 종일 노동하는 것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결론적으로, 노동력의 가치와 노동 과정에서 노동력이 창출하는 가치는 그 크기가 서로 다르다.

 

자본가는 노동력을 구매할 때, 이미 이 가치 차이를 염두에 둔다. 면사나 장화를 만드는 노동력의 유용한 성질은 그에게 필수 조건일 뿐인데, 이는 가치를 형성하려면, 노동이 유용한 형태로 지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가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노동력의 독특한 사용 가치였다. 노동력은 가치의 원천일 뿐 아니라, 그 자신이 가진 가치보다 더 많은 가치를 창출하는 원천이다. 이것이 바로 자본가가 노동력으로부터 기대하는 독특한 봉사이며, 그는 노동자와의 거래에서 상품 교환의 영원한 법칙에 따라 행동한다. 실제로 노동력 판매자는 다른 모든 상품 판매자와 마찬가지로, 노동력의 교환 가치를 실현하는 대가로 그 사용 가치를 넘겨준다.

 

교환 가치를 얻으려면 사용 가치를 넘겨주어야 한다. 노동력의 사용 가치인 노동 그 자체는, 팔린 기름이 더 이상 기름 판매자의 것이 아니듯이, 노동력 판매자의 소유가 아니다. 화페 소유자는 이미 노동력의 하루 가치를 지불했으므로, 하루 동안의 노동력 사용, 곧 하루의 노동은 그의 것이다. 노동력이 하루 종일 활동할 수 있는데도, 그 유지에는 0.5노동일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 곧 하루에 노동이 창출하는 가치가 하루 노동력 가치의 두 배가 된다는 사실은 구매자에게는 큰 행운이다. 그러나 이는 판매자를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가는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유쾌하게 웃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는 작업장에서 6시간이 아닌 12시간 동안 노동하는 데 필요한 생산 수단을 사용하게 된다. 면화 10kg6시간의 노동을 흡수해 면사 10kg이 되었다면, 면화 20kg12시간의 노동을 흡수해 면사 20kg이 된다.

 

이제 이 연장된 노동 과정의 생산물을 살펴보자. 면사 20kg에는 총 5노동일이 구현되어 있다.

 

· 4노동일(48시간): 소비된 면화(20)와 방추(4)에 투입된 노동

· 1노동일: 방적 과정에서 추가된 노동

 

5노동일(60시간)의 화폐 가치는 30원이다. 따라서 20kg 면사의 가격은 30원이고, 1kg당 가격은 이전과 같이 1.5원이다. 하지만 방적 과정에 투입된 상품들의 가치총액은 27원이다. 생산물의 가치(30)는 투입된 가치(27)보다 1/9만큼 증가하여, 3원의 초과 가치를 창출했다. 마침내 마법이 성공한 것이다. 화폐는 자본으로 전환되었다.

 

문제의 모든 조건은 충족되었고, 상품 교환의 법칙은 전혀 위반되지 않았다. 등가물은 등가물과 교환되었다. 자본가는 구매자로 면화, 방추, 노동력 등 모든 상품의 가치를 정당하게 지불했다. 그 후 다른 모든 상품 구매자처럼 그 상품들의 사용 가치를 소비했다. 노동력의 소비 과정은 동시에 상품 생산 과정이었고, 그 결과 30원의 가치를 지닌 20kg 면사가 생산되었다. 이제 자본가는 시장으로 돌아간다. 이전에는 상품을 구매했지만, 이번에는 상품을 판매하기 위해서다.

 

그는 면사를 1kg1.5, 곧 그 가치대로 판매한다. 그런데도 그는 처음에 시장에 투입했던 것보다 3원 더 많이 회수한다.

 

화폐가 자본으로 전환되는 이 모든 과정은 유통 영역 내부와 외부 모두에서 진행된다.

 

· 유통 내부: 상품 시장에서 노동력 구매로부터 이루어진다.

· 유통 외부: 유통은 단지 생산 영역에서 발생하는 가치 증식 과정을 준비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결론적으로, 이 모든 과정이 가능한 최선의 세계에서는 만사가 최선의 상태에 있다.”라는 명제를 충족시킨다.

 

자본가는 화폐를 생산물 또는 노동 과정의 요소로 사용되는 상품들로 바꾸고, 죽은 물체에 살아 있는 노동력을 결합한다. 이 과정으로부터, 그는 가치(대상화된 과거의 죽은 노동)를 자본(자신을 증식시키는 가치, ‘사랑의 정열로 가슴이 꽉 찬활기찬 괴물)으로 전환시킨다.

 

가치 형성 과정과 가치 증식 과정을 비교하면, 가치 증식 과정은 일정 수준 이상으로 연장된 가치 형성 과정에 불과하다는 점이 명확해진다. 이 과정이, 자본이 지불한 노동력의 가치가 새로운 등가물로 보상되는 시점까지만 진행된다면, 그것은 단순히 가치 형성 과정에 머문다. 그러나 이 지점을 넘어 계속된다면, 가치 증식 과정으로 전환된다.

 

노동 과정과 가치 형성 과정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노동 과정은 사용 가치를 생산하는 유용한 노동으로 이루어지며, 생산 활동은 생산물의 종류, 목적, 내용에 따라 질적으로 분석된다. 반면, 가치 형성 과정에서는 동일한 노동이 양적인 측면에서만 고려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노동자의 작업 시간, 곧 노동력이 유용하게 사용되는 지속 시간뿐이다. 노동 과정에 투입되는 상품들은 더 이상 노동력이 가공하는 물질적 요소가 아니라, 단순히 대상화된 노동의 양으로 여겨진다. 노동이 생산 수단에 포함된 것인지, 노동력으로부터 추가된 것인지와 관계없이, 노동은 오직 그 지속 시간으로만 측정된다. 이는 몇 시간, 또는 며칠 등으로 계산된다.

 

사용 가치 생산에 투입된 노동 시간은 사회적으로 필요한 시간만큼만 계산된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첫째, 노동력은 반드시 정상적인 조건에서 기능해야 한다. 자동 뮬 방적 기계가 사회적으로 지배적인 생산 수단이라면, 노동자에게 물레를 쥐여주면 안 된다. 또한, 정상적인 품질의 면화 대신 계속 끊어지는 부스러기 솜을 주어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노동자는 1kg 면사 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투입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추가 시간은 가치나 화폐를 창출하지 못한다. 노동의 대상적 요소들이 정상적인지는 노동자가 아닌 전적으로 자본가에게 달려 있는 문제다. 또 다른 조건은 노동력 자체가 평균적인 능률을 갖춰야 한다는 점이다. 노동력은 해당 부문을 지배하는 평균 수준의 기능, 숙련도, 민첩성을 보유해야 한다. 자본가는 노동 시장에서 이러한 정상적인 질의 노동력을 구매하려 노력한다. 노동력은 평균적인 긴장도와 강도로 투입되어야 한다. 자본가는 노동자가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감시한다. 그는 노동력을 정해진 기간 동안 구매했기에, 자신의 것을 잃지 않으려 주의한다. 그는 도둑맞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원료와 노동 수단의 낭비가 없어야 한다. 이 점에 대해, 자본가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형법을 가지고 있다. 낭비는 대상화된 노동의 헛된 지출을 의미하며, 이는 생산물이나 그 가치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상품 분석으로부터 우리는 사용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과 가치를 창조하는 노동 사이의 차이를 찾아냈고, 이 차이는 이제 생산 과정의 두 가지 측면으로 나타난다. 노동 과정과 가치 형성 과정의 결합 측면에서 보면, 생산 과정은 상품 생산 과정이다. 반면, 노동 과정과 가치 증식 과정의 결합 측면에서 보면, 생산 과정은 자본주의적 형태다.

 

자본가가 사용하는 노동이 단순한 사회적 평균 노동이든, 더 복잡한 노동이든, 가치 증식 과정에서는 중요하지 않다. 더 복잡한 고급 노동은 숙련되지 않은 노동보다 양성 비용이 더 많이 들고, 생산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투입된다. 따라서 이러한 노동력은 가치가 더 커지고, 동일한 시간 안에 더 큰 가치를 창출한다. 그러나 보석 세공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 가치를 보상하는 부분과 초과 가치를 창출하는 추가 노동 부분은 질적으로는 다르지 않다. 방적 노동에서와 마찬가지로 보석 세공 노동에서도 초과 가치는 오직 노동량의 초과로부터, 곧 동일한 노동 과정(한쪽은 실을 만들고, 다른 쪽은 보석을 만드는)의 시간적 연장으로부터만 발생한다. 한편, 모든 가치 형성 과정에서 고급 노동은 항상 사회적 평균 노동으로 환원된다, 예를 들어, 하루의 고급 노동은 X일의 사회적 평균 노동으로 환산된다. 따라서 우리는 자본가가 고용하는 노동자가 단순한 사회적 평균 노동을 수행한다고 가정하면서, 불필요한 조작을 생략하고, 분석을 단순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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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노동력의 구매와 판매

 

화폐는 구매나 지불 수단으로 가격을 실현할 뿐이므로, 그 자체로는 가치 변화가 이뤄질 수 없다. 또한 본래 형태로 존재하는 화폐는 불변의 가치량으로 고정된다. 따라서 가치 변화는 상품의 재판매와 같은 제2의 유통 행위로부터도 발생할 수 없다. 이러한 행위는 다만 상품을 다시 화폐 형태로 전환하는 과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치 변화는 제1의 유통 행위인 화폐(M) - 상품(C) 구매 과정에서 발생해야 한다. 하지만 이 변화는 상품 자체의 가치에서 비롯되는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교환은 등가물 사이에서 이루어지며, 상품은 그 가치에 따라 지불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치 변화는 오직 상품의 현실적인 사용 가치, 곧 상품의 소비 과정에서만 발생할 수 있다. 화폐 소유자가 가치를 창출하려면, 유통 영역에서 소비로부터 가치가 생성되는 특수한 상품을 찾아야만 한다. , 그 상품 소비가 노동을 대상화하여 가치를 형성하는 속성을 지녀야 한다. 화폐 소유자는 시장에서 이와 같은 특수한 상품, 곧 노동력을 찾아내게 된다.

 

노동력은 인간이 모든 종류의 사용 가치를 생산할 때마다 발휘하는, 인간의 신체에 내재된 육체적, 정신적 능력의 총체를 의미한다.

 

화폐 소유자가 시장에서 노동을 상품으로 찾아내려면, 특정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상품 교환은 본래 어떤 종속 관계도 내포하지 않으므로, 노동력이 상품으로 시장에 나오려면, 그 소유자가 스스로 그것을 상품으로 내어놓고 판매해야만 한다.

 

노동력의 소유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판매하려면, 그는 그것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어야 하고 자신의 능력과 인격에 대한 자유로운 소유자여야 한다. 시장에서 노동력 소유자와 화폐 소유자는 동등한 상품 소유자로 관계를 맺는다. 둘의 유일한 차이점은 한쪽이 판매자이고, 다른 쪽이 구매자라는 점이며, 양자 모두 법적으로 평등한 존재다이러한 관계가 유지되려면, 노동력 소유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항상 일정 시간 동안만 판매해야 한다. 그가 노동력을 한꺼번에 전부 판다면, 그는 자기 자신을 파는 일과 같아 자유인에서 노예로, 상품 소유자에서 상품으로 전락하게 된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노동력을 자신의 소유물이자 상품으로 다루어야 하며, 이는 노동력을 일시적이고 한정된 기간 동안만 구매자의 자유재량에 맡겨 사용하게 하면서 노동력에 대한 자신의 소유권을 포기하지 않을 때만 이루어진다.

 

화폐 소유자가 시장에서 노동력을 상품으로 발견하려면, 노동력 소유자는 자신이 만든 상품을 판매할 수 없어 자신의 노동력 그 자체를 상품으로 내놓아야 하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다른 상품을 판매하려면, 생산 수단(원료, 도구 등)과 생활 수단을 소유해야 한다. 가죽이 없으면 장화를 만들 수 없듯이, 생산자는 미래의 생산물로 살 수 없다. 생산을 시작하기 전과 생산 과정 중에도 소비는 계속된다. 생산물이 상품으로 만들어지면, 생산자는 그것을 판매해야만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 따라서 생산에 필요한 시간에 더해 판매에 필요한 시간까지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화폐가 자본으로 전환되려면, 화폐 소유자는 상품 시장에서 자유로운 노동자를 만나야만 한다. 여기서 자유롭다는 말은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첫째,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는 자유인이라는 점이다. 둘째, 그는 자신의 노동력 외에 다른 상품을 전혀 소유하고 있지 않으며, 자신의 노동력을 현실화하는 데 필요한 모든 물건으로부터 자유로운’, 곧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상태라는 점이다.

 

자유로운 노동자가 시장에서 화폐 소유자와 마주하게 되는 근본적 이유는, 화폐 소유자나 우리의 당면 관심사가 아니다. 화폐 소유자가 그 사실을 실질적으로 받아들이듯, 우리는 그 사실을 이론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자연적으로 화폐 소유자와 노동력 소유자가 따로 태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러한 관계는 자연적이거나 모든 역사적 시대에 보편적인 사회적 관계가 아니다. 이는 수많은 경제적 변혁과 과거 사회적 생산 구조의 몰락을 거쳐 형성된 역사적 발전의 결과이다. (1권 제8, ‘이른바 시초 축적참조.)

 

앞서 고찰한 경제적 범주들 역시 그 역사적 흔적을 지닌다. 생산물이 상품이 되려면, 특정 역사적 조건이 필요하며, 생산자 자신의 직접적인 생활 수단으로 생산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생산물, 또는 그 대다수가 상품 형태를 취하는 경우는 오직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라는 매우 독특한 생산 방식에서만 나타난다이러한 탐구는 상품 분석의 범위를 넘어서는 문제이다. 비록 생산물의 대부분이 직접 소비되고 상품으로 전환되지 않더라도, 곧 사회적 생산 과정이 교환 가치로부터 아직 지배되지 않더라도, 상품 생산과 상품 유통은 발생할 수 있다. 생산물이 상품 형태로 나타나려면, 사회적 분업이 어느 정도 발전하여 사용 가치와 교환 가치의 분리가 이미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발전은 역사적으로 매우 다양한 경제적 사회 구성체에서 나타난다.

 

화폐는 상품 교환의 특정 발전 단계를 전제로 한다. 다양한 화폐 형태들(단순한 상품 등가물, 유통 수단, 지불 수단, 퇴장 화폐, 세계 화폐 등)은 사회적 생산 과정에서 기능과 중요도에 따라 상이한 수준을 나타낸다. 하지만 상품 유통이 조금만 발전해도, 모든 화폐 형태가 나타난다는 사실은 경험적으로 확인된다그러나 자본은 상품 유통이나 화폐 유통만으로 존재할 수 없다. 자본의 역사적 존재 조건은 생산 수단과 생활 수단을 소유한 자가 시장에서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는 자유로운 노동자를 발견하는 경우에만 형성된다. 이 단 하나의 역사적 전제 조건이 세계사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자본은 태생부터 사회적 생산 과정에서 새로운 시대를 여는 존재이다.

 

이제 특수한 상품인 노동력을 더 자세히 고찰해야 한다. 다른 모든 상품과 마찬가지로 노동력 역시 가치를 가진다. 이 가치는 어떻게 결정되는가. 노동력 가치는 이 특수한 상품 생산과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 시간으로 결정된다. 따라서 노동력은 그 가치만큼 사회적 평균 노동량을 대상화하여 표현하는 존재다. 노동력은 오직 살아 있는 개인 능력으로만 존재한다.

 

노동력 생산은 곧 개인 생존을 전제로 하며, 이는 개인 자신의 재생산 및 생활 유지와 동일하다. 개인이 생존하려면, 일정한 양의 생활 수단이 필요하다. 따라서 노동력 생산에 필요한 노동 시간은 결국 이 생활 수단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 시간이 된다. , 노동력 가치는 노동력 소유자의 생존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생활 수단의 가치로 결정된다노동력은 그 발휘인 노동으로부터 비로소 실현된다. 노동 과정에서 사용되는 인간의 근육, 신경, 뇌 등의 힘은 반드시 보충되어야 하며, 이는 소득 증가로부터 이루어진다. 노동력 소유자는 오늘의 노동을 마친 후에도, 내일 동일한 힘과 건강으로 같은 과정을 반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생활 수단의 총량은 노동하는 개인이 정상적인 상태를 유지하기에 충분해야 한다의식주와 같은 인간의 자연적 욕구는 한 나라의 기후와 자연적 특성에 따라 달라진다. 또한 필수적인 욕구 범위와 충족 방식은 그 자체가 역사적 산물이므로, 주로 그 나라의 문화 수준, 특히 자유로운 노동자 계급이 어떤 조건과 관습, 기대를 가지고 형성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므로 노동력의 가치를 규정하는 데는 다른 상품들과 달리 역사적, 도덕적(정신적) 요소가 포함된다. 하지만 주어진 시대와 나라에서는 노동자에게 필요한 생활 수단의 평균적인 범위는 이미 정해져 있다.

 

노동력 소유자는 필멸의 존재다. 따라서 화폐가 지속적으로 자본으로 전환되려면, 노동력 판매자는 생명체가 생식으로 자신을 영속화하듯이’, 스스로를 영구화해야 한다. 소모와 사망으로 인해 시장에서 사라지는 노동력은 끊임없이 새로운 노동력으로 보충되어야 한다그러므로 노동력 생산에 필요한 생활 수단의 총량에는 노동자의 자녀들, 곧 이러한 보충 인원의 생활 수단이 포함되다. 이로부터 노동력 소유자라는 독특한 종족은 상품 시장에 영구적으로 존재하게 된다또한, 인간 유기체의 일반적인 본성을 특정 노동 부문에 적합하도록 변화시키고 숙련된 특수 노동력을 양성하고자 일정한 훈련이나 교육이 필요하며, 이는 일정한 비용(상품 또는 그 등가물)을 수반한다. 이러한 비용은 노동력 생산에 지출되는 가치에 포함된다. (보통 노동력의 경우 이 비용은 매우 적다.)

 

노동력 가치는 특정 양의 생활 수단 가치로 분해될 수 있으며, 그 가치는 생활 수단 생산에 필요한 노동 시간에 따라 변동한다. 식료품이나 연료 같은 생활 수단은 매일 소비되고, 매일 보충되어야 하는 반면, 의복이나 가구 같은 생활 수단은 비교적 긴 시간에 걸쳐 소모되므로, 보충 주기가 더 길 수 있다.

 

특정 상품들은 매주, 매분기 등 주기적으로 구매되거나 지불되어야 한다. 이 지출 총합은 연간 어떻게 분배되든 매일의 평균 소득으로 충당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노동력 생산에 매일 필요한 상품량을 A, 매주 필요한 양을 B, 매분기에 필요한 양을 C라고 가정하자.

 

평균 소득

 

하루 평균 소득 = [365() · 매일 필요한 양 (A) + 52() · 매주 필요한 양(B) + 4(분기) · 매분기에 필요한 양(C) + 기타] / 365

 

와 같이 산정된다.

 

이러한 하루 평균 상품 묶음이 6시간 사회적 노동을 포함한다면, 매일의 노동력에는 반일분의 사회적 평균 노동이 대상화되어 있다. 이는 노동일이 12시간일 때, 노동력의 매일 생산에 반나절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이 노동량은 하루 가치를 형성하는데, 반일분의 사회적 평균 노동이 3원으로 표시된다면, 3원은 노동력의 하루 가치에 해당하는 가격이 된다.

 

노동력 소유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매일 3원에 판매하는 경우, 노동력의 판매 가격은 그 가치와 일치한다. 우리 전제에 따르면, 3원을 자본으로 전환하려는 화폐 소유자는 이 가치를 실제로 지불한다.

 

노동력 가치의 최소 한계는, 노동력 소유자가 생명을 유지하고자 매일 공급받아야 하는, 곧 육체적으로 필수적인 생활 수단의 가치로 결정된다. 노동력의 가격이 이 최소 한계 아래로 떨어진다면, 그 가격은 노동력의 가치보다 낮아진다. 이 경우, 노동력은 위축된 상태로만 유지되고 발휘된다. 어떤 상품이든 그 가치는 정상적인 품질을 유지하며 공급하는 데 필요한 노동 시간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노동력의 가치가 사물의 본성에서 결정되는 이 방식에 대해, 로시 등과 함께 잔인하다며 한탄하는 일은 값싼 감상이다.

 

생산 과정에 있는 노동자의 생활 수단을 배제하고 노동력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망상이다. 노동 또는 노동력에 대해 말한다면, 노동자와 그의 생활 수단, 곧 노동자와 그의 임금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노동력에 대한 논의는 노동 자체에 대한 논의와 다르다. 이는 소화 능력과 소화 과정을 구분하는 일과 비슷하다. 소화 과정이 이루어지려면 튼튼한 위장 외에 다른 요소들이 필요하듯, 노동력이 발휘되려면, 그 이상의 것이 요구된다. 노동력의 가치는 그 유지에 필요한 생활 수단의 가치로 표현되므로, 노동력을 논할 때, 생활 수단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노동력이 판매되지 않으면, 노동자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다. 오히려 노동자는 노동력의 생산과 재생산에 필수적인 생활 수단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현실을 가혹한 자연적 필연성으로 느끼게 된다. 이 상황에서 그는 시스몽디가 말했듯, ‘노동력은 팔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노동력은 특수한 상품이기에, 구매자와 판매자가 계약을 맺더라도, 그 사용 가치가 즉시 구매자에게 넘어가지 않는다. 노동력의 가치는 유통에 투입되기 이전에 이미 결정된다. 이는 노동력 생산을 위해 일정한 양의 사회적 노동(생활 수단)이 이미 지출되었기 때문이다. 노동력의 사용 가치는 이후에 노동력 발휘에 존재한다. 따라서 노동력 양도(판매)와 구매자의 실제 사용(이용)은 시간적으로 분리된다. 이처럼 형식적인 양도와 현실적인 인도 사이에 시간적 간극이 있을 때, 구매자의 화폐는 대개 지불 수단으로 기능한다.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지배하는 모든 국가에서, 노동력은 계약된 기간만큼 기능한 뒤에야 (예를 들어, 매주 말에) 대가를 지불받는다. 따라서 노동자는 노동력의 사용 가치를 자본가에게 미리 빌려주는 셈이다. ,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구매자의 소비에 맡기고 나서야 그 대가를 받는다. 이는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신용을 제공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자본가가 파산했을 때, 임금을 받지 못하는 경우나, 이보다 더 장기적인 영향을 미치는 수많은 사건들에서 이러한 신용 관계가 단순한 허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화폐가 구매 수단 또는 지불 수단으로 기능하더라도, 상품 교환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노동력 가격은 가옥 임대료처럼 계약으로 확정되며, 비록 그 대가가 나중에 지불되더라도 노동력은 이미 판매된 상태다. 하지만 이 관계를 명확히 파악하려면, 노동력 소유자가 판매와 동시에 계약된 가격을 즉시 받는다고 전제하는 일이 더 이롭다


이제 화폐 소유자가 독특한 상품인 노동력에 대해 지불하는 가치가 어떻게 결정되는지 알게 되었다. 화폐 소유자가 교환으로부터 얻는 사용 가치는 노동력의 실제 사용, 곧 노동력의 소비 과정에서 비로소 나타난다. 화폐 소유자는 이 과정에 필요한 모든 물건(: 원료)을 상품 시장에서 구매하고 그에 대한 정당한 가격을 지불한다.

 

노동력 소비 과정은 동시에 상품 생산과 초과 가치 생산 과정이다. 이 과정은 다른 상품의 소비와 마찬가지로, 시장이나 유통 영역 밖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화폐 소유자와 노동력 소유자를 따라, 모든 일이 표면에 드러나는 유통 영역을 벗어나,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는 표지가 붙은 은밀한 생산 현장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곳에서 자본이 어떻게 생산되며, 나아가 자본 그 자체가 어떻게 생산되는지 알게 된다. 이윤 창조의 비밀이 마침내 밝혀지는 곳이 바로 여기다.

 

노동력 매매가 이루어지는 유통 또는 상품 교환 영역은 천부 인권의 낙원이다. 이곳을 지배하는 원칙은 자유, 평등, 소유, 그리고 벤담(공리주의)이다.

 

자유! 이는 노동력의 구매자와 판매자가 각자의 자유 의지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법적으로 대등한 자유로운 인격으로 계약을 맺으며, 이 계약은 그들의 공동 의지가 법적 형태로 표현된 최종 결과이다.

 

평등! 이는 그들이 오직 상품 소유자로 서로 관계를 맺고, 등가물을 등가물로 교환하기 때문이다.

 

소유! 이는 각자가 자신의 것만을 자유롭게 처분하기 때문이다.

 

벤담! 이는 각자가 자기 자신의 이익에만 몰두하기 때문이다. 그들을 묶어주는 유일한 힘은 각자의 이기심, 이득, 사적 이익이다.

 

각자는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고, 타인에게는 무관심하다. 그러나 바로 이 이기적인 행동으로부터, 사물의 예정 조화와 신의 섭리에 따라, 그들은 상호 이익, 공익, 나아가 전체의 이익을 실현하게 된다.

 

속류 자유무역주의자들은 단순 상품 유통 및 상품 교환 분야에서 자본과 임금 노동에 기반한 사회에 대한 견해를 도출한다. 그러나 이 영역을 벗어나는 순간, 등장인물들의 모습이 변화하는 일을 볼 수 있다.

 

이전의 화폐 소유자는 이제 자본가가 되어 앞서 걷고, 노동력 소유자는 그의 노동자가 되어 뒤따른다. 전자는 사업에 시작할 열의에 차 거만하게 미소 짓고 바삐 걷는 반면, 후자는 자신의 가죽을 시장에 팔아버려 이제 무두질만 기다리는 사람처럼 겁에 질려 머뭇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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