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농업 혁명과 산업 자본의 국내 시장

 

일시적 중단을 거쳤음에도, 끊임없이 재현된 농촌 주민의 수탈과 축출은, 전적으로 길드의 규제로부터 벗어난 다수의 프롤레타리아를 도시 공업에 제공하였다. 애덤 앤더슨(제임스 앤더슨과 혼동 불가)은 자신의상업사에서 신의 직접적 간섭이라 기술한다.

 

시초 축적의 이 요소에 대한 추가적 고찰이 필요하다. 조프로아 생틸레르가 우주 물질의 한 측면에서는 응축을, 다른 측면에서는 희박으로 설명했듯이, 독립적 자영 농민의 희박은 공업 프롤레아리아트의 응축과 직접적으로 상응한다. 그러나 이것이 결과의 전부는 아니다. 토지 소유 관계의 혁명은 경작 방식의 개량, 협업의 확대, 생산 수단의 집적을 수반한다. 따라서 경작자 수의 감소에도 토지는 동일하거나 증대된 양의 생산물을 산출하는 결과를 낳는다. 더욱이, 농업 임금 노동자들은 더 높은 노동 강도를 강요받았으며, 그들 자체 생존을 위한 생산 영역은 점진적으로 축소된다. 이처럼, 농촌 주민이 풀려나면서(축출)’, 이들의 기존 생존 수단 역시 풀려난다(박탈)’. 이러한 생존 수단은 이제 가변 자본의 물질적 요소로 전환된다. 오갈 데 없이 축출된 농민은 이 생존 수단의 가치를 임금 형태로 (자신의 새로운 주인인) 산업 자본가에게서 획득해야 한다. 국내 농업에 의존하던 공업 원료 역시 생활 수단과 동일한 사정에 놓이게 되었으며, 이는 불변 자본의 한 요소로 변모하였다.

 

예를 들어, 프리드리히 2세 시대에 모두 아마 방적에 종사하던 베스트팔렌 농민 중 일부는 폭력적으로 토지를 수탈당하고 추방되며, 나머지 일부는 대규모 차지 농업가의 일용 노동자로 전락한다. 동시에 대형 아마 방적 및 직조 업체가 출현하여 풀려난 사람들(축출된 사람들)’이 그곳에서 임금 노동을 하게 된다고 가정한다. 이 과정에서 아마 자체는 겉보기에는 이전과 동일하다.

 

아마 섬유 한 가닥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 아마 속에는 새로운 사회적 영혼이 깃든다. 이제 아마는 공장제 수공업의 불변 자본 일부를 이룬다. 이전에는 (자신이 재배하여 가족과 함께 소량 방직하던) 무수히 많은 소규모 생산자들 사이에 분배되었던 아마가, 이제는 (타인으로 하여금 자신을 위해 방적하고 직조하는) 한 사람의 자본가 수중에 집중된다.

 

아마 방적에 투입된 추가적 노동은 이전에는 무수한 농민 가족들의 추가 소득 또는 프리드리히 2세 시대에는 프로이센 왕을 위한 조세로 실현되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소수 자본가의 이윤으로 실현된다. 이전에는 농촌 일대에 분산되어 있던 방추와 직기는 지금 노동자와 원료와 함께 소수의 대규모 작업장에 집중된다. 나아가, 방추, 직기, 원료는 이전에는 방적공과 직조공의 독립적 생존을 보장하는 수단이었으나, 이제는 그들을 지휘하고 지불받지 않은 노동(잉여 노동)을 착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환된다.

 

대규모 공장제 수공업이나 대규모 농장의 외관만으로는, 그것들이 수많은 소규모 생산 거점들을 합병한 것이며, 독립적 소생산자들의 수탈로부터 형성된 것임을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나 편견 없는 분석가는 이러한 외모에 속지 않는다. ‘혁명의 사자’ H. 미라보의 시대에는 대규모 공장제 수공업을, 오늘날 우리가 합병된 농지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합병된 공장제 수공업 또는 합병된 작업장이라 불렀다. 미라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들은 수백 명의 사람이 한 명의 지배인 밑에서 노동하며, 통상 합병된 공장제 수공업이라 불리는 대규모 공장제 수공업에 대해서만 주목한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분산되어 각자 자신의 타산에 따라 노동하는 작업장들은 고려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며, 완전히 무시된다. 이것은 큰 오류이다이들이야말로 국민적 부의 핵심적 구성 요소를 이루기 때문이다. 합병된 공장은 소수 기업가를 막대하게 부유하게 만드는 반면, 노동자들은 임금 수준과 무관하게 일용직 노동자 역할에 머무를 뿐, 사업의 성공을 누릴 수 없다. 이와 대조적으로, 분산된 공장에서는 누구도 막대한 부를 이루지 못하지만, 많은 노동자가 행복하게 생활한다. 근면하고 검소한 노동자의 수가 증가할 것이다. 그들은 현명한 생활 방식(곧 근면)이 자신들의 처지를 본질적으로 개선하는 수단임을 인정하며, 소액의 임금 인상 (이는 장래에 중요할 수 없으며 기껏해야 하루살이 살림을 조금 낫게 해줄 뿐이다)을 위한 수단으로는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체로 소규모 농업과 결합되어 있는 분산적, 개별적 공장제 수공업만이 자유로운 공장제 수공업이다.

     

농촌 주민 일부의 수탈과 추방은 산업 자본을 위해 노동자와 이들의 생활 수단 및 노동 재료를 풀려나게(해방) 했을 뿐 아니라, 국내 시장을 형성하였다. 실제로 소농을 임금 노동자로 전환시키고 이들의 생활 수단 및 노동 수단을 자본의 물질적 요소로 전환시킨 사건들은 동시에 자본을 위한 국내 시장을 형성하였다. 이전에는 농민 가족이 생활 수단과 원료를 스스로 생산하고, 그 대부분을 스스로 소비하였다. 그런데 이제 이 원료와 생활 수단은 상품으로 변모하였고, 대규모 차지 농업가는 공장제 수공업에서 자신의 상품을 판매할 시장을 발견하였다. 이전에는 각 농민 가족이 자신의 원료로 소비를 위해 방직하고 직조하던 실, 아마포, 거친 모직물 등의 물건들이 이제 공장제 수공업의 제품으로 전환되고, 그 제품의 판로는 다름 아닌 농촌 지방이 된다.

 

종래에는 자신의 타산에 따라 노동하는 다수의 소생산자들이 다수의 분산된 고객들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이제 이 고객들은 산업 자본으로부터 공급되는 하나의 큰 시장으로 집합한다. 따라서 농촌 부업의 파괴와 공장제 수공업 및 농업의 분리 과정이 이전의 자립적 농민들의 수탈 및 생산 수단으로부터의 격리와 나란히 진행된다.

 

농촌의 가내 공업을 파괴하는 일만으로도 한 나라의 국내 시장은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에 필요한 규모와 안전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진정한 공장제 수공업 시기는 아직 이 변혁을 근본적이고 완전히 수행하지 못한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공장제 수공업은 도시의 수공업과 농촌의 가내 부업을 폭넓은 배경으로 삼으면서 국민 생산을 매우 부분적으로만 장악할 따름이다.

 

공장제 수공업은 이러한 부업과 수공업을 특정 형태, 공업 부문, 지점에서 파괴하는 한편, 원료 가공을 위해 일정 정도 이를 필요로 하기에 다른 형태, 다른 부문, 다른 지점에서 재생시킨다. 그러므로 공장제 수공업은 토지 경작을 부업으로, (그 생산물이 직접 또는 상인의 손을 거쳐 공장제 수공업에 판매되는) 공업 노동을 본업으로 삼는 새로운 소농민 계급을 탄생시킨다.

 

이 사실은 잉글랜드 역사 연구가를 혼란에 빠지게 하는 주요 이유 중 하나이다. 이 연구가는 한편으로 15세기 마지막 1/3부터 농촌에서 자본주의적 농업이 발달하고, 농민층의 몰락이 더욱 심해진다는,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불평을 접해왔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농민층이 수는 감소하고, 형편은 악화되고 있지만, 계속 존재하고 있음을 목격하기 때문이다.

 

그 주요 원인은, 잉글랜드에서 시대의 변천에 따라 곡물 재배 또는 목축업이 우세하게 되면서 농민 경영의 규모가 변동한다는 데 있다. 오직 대규모 공업만이 기계 형태로 자본주의적 농업에 확고한 토대를 제공하며, 농촌 주민의 압도적 대다수를 근본적으로 수탈하고, 농촌 가내 공업의 근본인 방적업과 직조업을 파괴하면서, 농업과 농촌 가내 공업 사이의 분리를 완성한다. 그러므로 오직 대규모 공업만이 비로소 산업 자본을 위해 전체 국내 시장을 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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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자본주의적 차지 농업가의 탄생

 

무일푼의 자유로운 프롤레타리아트의 폭력적 형성, 임금 노동자로의 전환을 강제한 가혹한 규율, 그리고 착취를 강화하고 자본 축적을 증진시키고자 국가 공권력을 동원한 조치들을 규탄하였다. 이에 따라, 자본가가 그 시초에 어디에서 출현하였는가 하는 근원적 의문이 제기된다.

 

농촌 주민의 수탈은 직접적으로는 대토지 소유자 계급만을 창출했을 뿐이다. 그러나 차지 농업가의 탄생은 수세기에 걸친 완만한 과정이었기에 그 정확한 연원을 규명할 수 있다. 농노는 자유로운 소규모 토지 소유자와 마찬가지로 상이한 소유 관계 속에서 토지를 보유하였으며, 그에 따라 매우 상이한 경제적 조건 하에서 해방되었다.

 

잉글랜드에서 차지 농업가의 초기 형태는 본래 농노였던 베일리프였다. 그의 지위는 고대 로마의 빌리쿠스와 비슷했으나 활동 범위가 더 좁았다. 14세기 후반, 베일리프는 지주로부터 종자, 가축, 농기구를 공급받는 차지 농업가로 대체되었다. 이 차지 농업가의 처지는 소농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다만 더 많은 임금 노동을 착취했을 뿐이다.

 

그는 곧 분익농인 메테예가 되었다. 그는 농업에 필요한 자본의 일부를 스스로 투하하고, 지주가 나머지를 투하했다. 양자는 계약된 비율에 따라 총생산물을 분배하였다. 이 형태는 잉글랜드에서 급속히 소멸하고, 진정한 차지 농업가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이 차지 농업가는 임금 노동자를 고용하여 자신의 자본을 증식시키며, 잉여 생산물의 일부를 화폐 또는 현물로 지주에게 지대로 지불한다.

 

15세기까지는 독립적 소농과 임금 노동에 종사하면서 자작하는 농업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으로 부를 얻는 한, 차지 농업가의 형편과 그들의 생산 영역은 평범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15세기 말 1/3부터 16세기의 거의 전 기간(마지막 10년 제외)에 걸쳐 지속된 농업 혁명은 농촌 주민의 대다수를 빈곤하게 만든 속도와 동일하게 차지 농업가를 부유하게 만들었다.

 

공유지 등의 횡령으로부터 차지 농업가는 거의 비용 지출 없이 가축 수를 현저히 늘릴 수 있었으며, 이 가축은 자신의 토지에 풍부한 비료를 제공했다. 16세기에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계기가 추가되었다. 당시의 차지 계약은 때로 99년에 달하는 장기 계약으로 체결되었다. 이 시기, 귀금속의 가치, 곧 화폐의 가치가 지속적으로 하락한 점은 차지 농업가에게 매우 유리하게 작용했다.

 

위에서 언급된 모든 사정 외에도, 화폐 가치 하락은 (실질) 임금을 저하시켰다. 이 임금액의 일부가 이제 차지 농업가의 이윤에 첨가되었다. 곡물, 양모, 육류 등 모든 농산물 가격의 지속적인 상승으로 인해 차지 농업가는 가만히 앉아 화폐 자본을 증가시켰다. 반면, 그가 지불해야 할 지대는 종전의 화폐 가치로 계약되었기에 감소했다. 따라서 그는 임금 노동자와 지주를 동시에 희생시켜 치부했다. 그러므로 영국에서 16세기 말, 당시로는 부유한 자본주의적 차지 농업가계급이 형성되었다는 점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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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15세기 말 법제: 토지 수탈민 규율과 강제 임금 인하

 

봉건적 가신 집단의 해체와 폭력적인 토지 수탈로 추방된 무일푼의 자유로운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들의 등장 속도만큼 신흥 공장제 수공업에 빠르게 흡수되지 못한다. 관습적 생활 궤도에서 갑작스레 축출된 이들이 새로운 환경의 규율에 즉각적으로 순응하는 것 또한 어려웠다. 그 결과, 이들은 대규모로 거지, 도둑, 부랑자로 전락하며, 그 원인은 일부의 성향보다는 대부분 피할 수 없는 생존의 도리에 있다. 이에 따라,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전 기간, 서유럽 전역에서 부랑자에 대한 잔인한 입법이 시행된다. 현재 노동자 계급의 선조들은 부득이하게 부랑자와 극빈자로 전락한 사실 자체로 먼저 징벌당한다. 입법은 이들을 자발적인범죄자로 취급하며, 이미 소멸한 종래의 조건에서 계속 노동할지 여부가 오직 그들의 의지에 달렸있다고 규정한다. 잉글랜드에서 이러한 입법은 헨리 7세의 통치기에 시작된다.

 

헨리 8, 1530: 늙고 노동 능력 없는 거지는 거지 면허를 받는다. 반면, 건장한 부랑자는 태형과 감금에 처한다. 그들은 달구지 뒤에 결박되어 몸에서 피가 흐르도록 매질을 당한 후, 그들의 출생지나 최근 3년간 거주한 곳으로 돌아가 노동에 종사하겠다.’는 맹세를 해야 한다. 이 얼마나 잔인한 이율배반인가! 헨리 8세 제27년의 법령은 앞선 법령을 반복함과 동시에 한층 더 가혹한 내용을 추가한다. 부랑죄로 두 번 체포되면 다시 태형에 처하고 귀를 절반 자르며, 세 번 체포될 경우, 그는 중죄인이자 공동체의 적으로 간주되어 사형에 처하게 된다.

 

에드워드 6, 1547년 법령: 노동을 거부하는 자는 그를 게으름뱅이라고 고발한 사람의 노예가 된다. 주인은 노예에게 빵, , 멀건 죽, 그리고 적당한 고기 부스러기를 지급한다. 주인은 채찍과 쇠사슬을 사용하여 노예가 아무리 싫어하는 일이라도 시킬 권리를 가진다. 노예가 2주일 도주하면 종신 노예로 선고되며, 이마나 뺨에 ‘S’자 낙인이 찍힌다. 세 번 도주할 경우, 반역자로 사형에 처한다. 주인은 노예를 모든 동산이나 가축과 동일하게 팔아넘기거나, 유산으로 물려주거나, 노예로 임대할 수 있다. 노예가 주인에게 반대하는 행위만으로도 사형에 처할 수 있다. 치안 판사는 주인의 신고가 있을 시 도주한 노예를 반드시 수사해야 한다. 부랑자가 3일간 일 없이 돌아다닌 사실이 밝혀지면, 그는 출생지로 끌려와 불에 달군 쇠로 가슴에 ‘V’자 낙인이 찍히며, 그곳에서 쇠사슬에 매인 채 도로 작업이나 기타 작업에 동원된다. 자기 출생지를 속인 부랑자는 처벌로 그곳 주민 또는 단체의 종신 노예가 되며, ‘S’자로 낙인이 찍힌다. 누구든지 부랑자의 자녀를 빼앗아 도제로 삼을 권리가 있으며, 남자는 24, 여자는 20세가 될 때까지 사역한다. 이들이 도주하면 위의 나이가 될 때까지 장인의 노예상태로 있어야 하며, 장인은 이들을 마음대로 쇠사슬에 붙들어 매거나 채찍으로 때릴 수 있다. 모든 장인은 자기 노예의 목, , 다리에 쇠고리를 채워 쉽게 식별하고 소유권을 명확히 할 수 있다. 이 법령의 마지막 규정은 빈민들이 그들에게 음식물과 일을 제공하려는 지역이나 개인에게서 일해야 함을 명시한다. 이러한 종류의 교구 노예는 떠돌이라는 이름으로 19세기 중엽까지도 잉글랜드에 여전히 존재했다.

 

엘리자베스 여왕, 1572: 14세 이상의 면허 없는 거지들은 2년간 그들을 사용하려는 사람이 없을 경우, 혹독한 매를 맞고 왼쪽 귀에 낙인이 찍힌다. 재범이고 18세 이상이며, 2년간 사용자가 없을 때에는 사형에 처하며, 세 번째 위반인 경우에는 용서 없이 반역자로 사형에 처한다. 엘리자베스 통치 제18(1576) 법령 제13장과 1579년 법령에도 이와 비슷한 규정이 존재한다.

 

제임스 1: 방랑하며 구걸하는 사람은 부랑자와 불량배로 선포된다. 경범죄 재판소의 치안 판사는 이들에게 공개적 태형을 처할 권한을 가지며, 초범은 6개월, 재범은 2년간 감금시킨다. 옥중에 있는 동안, 그들은 치안 판사가 적당하다고 판단하는 시기와 횟수만큼 매를 맞는다. 선도할 수 없는 위험한 불량배는 왼편 어깨에 ‘R’자 낙인이 찍히고 강제 노동에 처해지며, 걸식죄로 재차 체포되면 용서 없이 사형에 처한다. 이 법규들은 18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유효했으며, 앤 여왕 제12(1714)의 법령 제23장으로부터 비로소 폐지된다.

 

프랑스에서도 비슷한 법령이 존재했으며, 17세기 중엽 파리에 이른바 부랑자 왕국이 형성된다. 루이 16세 초기(1777713일 칙령)에도 16세부터 60세 사이의 건강하지만 일정한 직업과 생활 수단이 없는 사람은 갤리선을 젓는 형벌에 처해진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네덜란드에 적용된 칼 5세의 법령(153710), 네덜란드 주와 도시들의 제1칙령(1614310일자), 1649625일자 연합주의 포고 따위가 있다. 이렇듯, 폭력적으로 토지를 수탈당하고 추방되어 부랑자가 된 농촌 주민들은 다음 단계로 무시무시한 법령들로부터 채찍, 낙인, 고문을 당하며 임금 노동 제도에 필요한 규율을 습득한다. 노동 조건들이 자본의 형태로 나타나고, 다른 한편에서, 자신의 노동력 외에는 팔 것이 없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또한 그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을 팔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만으로도 불충분하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진전되면서 교육, 전통, 관습으로부터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요구들을 자명한 자연 법칙으로 수용하는 노동자 계급이 발전한다. 일단 완전히 발전한 자본주의적 생산 과정의 조직은 모든 저항을 타파하는 힘을 발휘한다. 상대적 과잉 인구의 지속적인 창출은 노동의 수요와 공급 법칙, 나아가 임금을 자본 증식의 욕구에 적합한 한계 내로 유지시킨다. 이 경제적 관계의 말이 없는 강제는 노동자에 대한 자본가의 지배를 확고히 한다.

 

직접적인 경제 외적 폭력이 여전히 사용되기는 하나, 이는 다만 예외적이다.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노동자를 생산의 자연 법칙에 내맡길 수 있다. , 생산 조건 그 자체로부터 발생하며 영구히 보장되는 자본에 대한 노동자의 종속에 위임하는 일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의 역사적 생성기에는 상황이 달랐다. 신흥 부르주아지는 국가 권력을 필요로 하며 그것을 이용한다. 이는 임금 규제로부터, 임금을 이윤 획득에 적합한 범위로 억압하고, 노동일을 연장하며, 노동자 자신을 평균적인 척도로 자본에 종속시키기 위함이다. 이것이 이른바 시초 축적의 본질적 측면 중 하나이다.

 

14세기 후반에 출현한 임금 노동자 계급은 당시뿐 아니라 이후 100년간도 주민의 극히 작은 부분을 차지했으며, 그 지위는 농촌의 자립적 농민 경영과 도시의 길드 조직으로부터 강력하게 보호받는다. 농촌과 도시 모두에서 고용주와 노동자 사이에 사회적 구별이 크지 않았고, 자본에 대한 노동의 종속은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다. , 생산 방식 자체는 아직 진정한 자본주의적 성격을 띠고 못했다. 이 시기, 가변 자본 요소는 불변 자본 요소에 비해 큰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임금 노동에 대한 수요는 자본 축적과 함께 급속히 증가했지만, 임금 노동의 공급은 완만하게 뒤따르는 수준에 그친다. 국민 총생산의 상당 부분이 후일 자본의 축적 재원으로 전환되지만, 당시에는 아직 노동자의 소비 재원으로 귀속되었다.

 

임금 노동에 관한 입법은 처음부터 노동자의 착취를 목적으로 했으며, 자체 발전 과정에서도 언제나 노동자 계급에 적대적이었다. 이 입법은 잉글랜드에서는 에드워드 3세 통치기인 1349년에 제정된 노동자 법령이 그 시초다. 프랑스에서 이에 대응하는 것은 쟝 왕 명의로 발포된 1350년의 칙령이다.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입법은 나란히 진행되었으며 내용도 동일하다. 이러한 노동법이 노동일의 강제적 연장을 목적으로 하는 측면은, 이미 앞서(10장 제5) 상세히 고찰했으므로 다시 언급하지 않는다.

 

노동자 법령은 하원의 절실한 요청으로부터 제정된다. 한 토리당원은 소박하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전에는 빈민들(노동자들)이 높은 임금을 요구하여 산업과 부에 위협을 주었다. 지금은 그들의 임금이 너무나 낮아 역시 산업과 부에 위협을 주고 있는데, 이는 이전과는 사정이 다르며, 아마도 이전보다 더 위험할 것이다.’

 

법령에 따라 도시와 농촌 모두에서 성과급 노동과 일급 노동에 대한 임금률이 확정된다. 농촌 노동자는 1년 기간으로, 도시 노동자는 공개 시장에서 고용되어야 한다. 법률로 정한 임금보다 많이 지불하는 행위는 금고형으로 금지되었는데, 더 높은 임금을 받는 쪽이 그것을 지불하는 쪽보다 더 엄한 처벌을 받는다. (: 엘리자베스 도제법 제18조 및 제19조는 법률 이상 임금 지불 시 10일간 금고형, 수령 시 21일간 금고형에 처하도록 규정한다.)

 

1360년의 법령은 이 형벌을 더욱 엄격하게 만들었으며, 심지어 고용주에게 육체적 처벌로부터 법정 임금률로 노동을 착취할 권한까지 부여한다. 석공이나 목공이 연합하여 맺은 모든 결사, 계약, 서약 등은 무효로 선포된다. 노동자들의 단결은 14세기부터 (단결 금지법이 폐지된) 1825년에 이르기까지 무거운 죄로 취급된다. 1349년의 노동자 법령과 그 이후 모든 법령의 정신은 국가가 임금의 최고 한도는 제정하지만, 결코 그 최저 한도는 제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잘 알려진 대로, 16세기에 노동자의 형편은 크게 악화된다. 화폐 임금은 인상되었으나, 화폐 교환 가치의 감소와 이에 상응하는 상품 가격의 등귀에 비례하여 인상되지는 못한다. 결과적으로, 실질 임금은 하락한다. 그럼에도, 임금 인하를 위한 법령들은 아무도 고용하려 하지 않는이들의 귀 자르기 및 낙인과 함께 존속한다.

 

엘리자베스 통치 제5년의 도제법 제3장에 의거, 치안 판사는 임금 수준을 확정할 권한과 더불어 계절과 상품 가격에 따라 그것을 변경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된다. 제임스 1세는 이러한 노동 규제들을 직조공, 방적공, 기타 모든 노동자 범주에까지 확대한다. 조지 2(재위 1727-1760)는 노동자의 단결을 금지하는 법령들을 전체 공장제 수공업으로 확대한다. 진정한 공장제 수공업 시기에 이르러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이 충분히 강화되면서 임금에 대한 법적 규제를 실시하는 일은 불필요하고 또 불가능해진다. 하지만 지배 계급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옛 무기 창고의 이 무기를 유지하려 한다.

 

조지 1세 통치 제7년의 법령은 여전히 런던과 그 부근의 직인 재봉공에 대해 국장(國葬)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2실링 7.5펜스 이상의 일급 지불을 금지한다. 또한 조지 3세 통치 제13년의 법령 제68조는 견직공에 대한 임금 규제를 치안 판사에게 위임한다. 1796년에도 임금에 관한 치안 판사의 명령이 농업 노동자가 아닌 노동자에게도 적용될지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고등 법원의 두 가지 판결이 필요했다. 또한 1799년에도 의회는 스코틀랜드 광부의 임금이 엘리자베스 법령과 1661년 및 1671년 스코틀랜드 두 법령으로부터 규제된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했다. 이 기간 동안 사정이 얼마나 심하게 변했는지는 영국 하원에서 일어난 전대미문의 한 사건으로부터 증명된다. 임금의 최고 한도에 관한 법령만을 400년 이상 만들어온 이 하원에서, 위트브레드는 1796년에 농업 노동자에 대한 법정 최저 임금을 제안한다. 피트는 이에 반대하면서도 빈민의 형편은 참혹하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결국, 1813년에 임금 규제에 관한 법령들이 폐지된다.

 

자본가가 자신의 사적 입법으로부터 자기 공장을 규제하기 시작하고, 구빈세로 농촌 노동자의 임금을 불가결한 최저 한도까지 보충해 주게 되면서, 그러한 법령들은 필요 없게 된다. 그러나 고용주와 노동자 사이의 계약에 관한 노동 법령의 조항들(해고 예고나 퇴직 예고 등을 포함하며, 계약 위반 시 고용주에게는 민사 소송만을 허용하고, 노동자에게는 형사 소송을 허용하는 일 등)은 오늘날도 완전히 효력을 유지하고 있다.

 

(1875고용주와 노동자에 관한 법령에서 폐기된다.) 노동자의 단결을 금지하는 가혹한 법령들은 1825년 프롤레타리아트의 태도가 위협적으로 변하자 폐지된다. 그러나 이는 부분적인 폐지에 그친다. 옛 법령들의 일부 잔재는 1859년에야 비로소 사라진다. 마침내, 1871629일의 의회 법령이 노동 조합을 법적으로 승인하면서, 위와 같은 계급 입법의 최후의 흔적을 제거하는 시늉을 한다. 그러나 같은 날짜의 다른 의회 법령(폭력, 협박, 방해에 관한 형법 개정 법령)은 사실상 이전 상태를 새로운 형태로 복구한다. 이러한 의회의 속임수로 인해 파업이나 공장 폐쇄의 경우 노동자들이 취할 수 있는 모든 수단에 대해 일반법이 아닌 특별 형법이 적용된다. 그리고 이 특별 형법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치안 판사인 공장주들의 재량에 달려 있었다.

 

그보다 2년 전, 동일한 하원과 글래드스턴은 통상적으로 존경할 만한 방식으로 노동자 계급에 대한 모든 특별 형법을 폐지하는 법률안을 제출한다. 그러나 이 법률안은 제2독회를 넘기지도 못한 채 오랫동안 방치된다. 마침내 대자유당이 토리당과 연합하여 용기를 얻고, 자신들을 집권시킨 바로 그 프롤레타리아트를 결정적으로 배반한다. ‘대자유당은 이러한 배반에 그치지 않고, 언제나 지배 계급에게 아부하는 영국 재판관들로 하여금 이미 낡은 음모단속법을 부활시켜 이를 노동자의 결사에 적용하도록 했다.

 

영국 의회는 대중의 압력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파업과 노동 조합을 금지하는 법령들을 단념하게 되지만, 이것은 의회 자체가 500년 동안 파렴치한 이기주의로 (노동자를 반대하는) 자본가들의 상설 조합 지위를 고수한 뒤에 나타난 일이다.

 

프랑스 부르주아지는 1789년 프랑스 혁명의 폭풍이 몰아치는 바로 그 시기에, 노동자들이 막 쟁취한 결사의 권리를 다시 박탈하려 했다. 1791614일의 포고로부터, 부르주아지는 노동자의 모든 단결을 자유와 인권 선언에 대한 위반으로 선언하고, 이를 500리브르의 벌금과 1년간의 시민권 박탈로 처벌하도록 규정한다.

 

자본과 노동 사이의 투쟁을 국가의 공권력으로 자본에 유리한 범위 내로 제한하는 이 법령은 여러 차례의 혁명과 왕조 교체를 겪고도 존속했다. 자코뱅 공포 정치(17936-17946)조차도 이것에는 손대지 않았다. 이 법령은 아주 최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형법에서 삭제된다.

 

이 부르주아적 쿠데타(1791614일의 포고)의 구실보다 더 특징적인 일은 없다. 이 법령에 관한 특별 위원회의 보고자 르 샤프리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임금이 현재보다 인상되어 그 임금을 받는 사람이 생활 필수품의 결핍으로 말미암은 절대적 예속(거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는 일은 바랄만한 것이지만,’

 

노동자들에게는 자신의 이익에 관해 협의하거나 공동 행동을 취하며 절대적 예속(거의 노예 상태)’을 완화하는 일이 허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렇게 하면서 그들의 이전의 장인인 현재 기업가의 자유’ (, 노동자를 노예 상태로 유지하는 자유!)를 침해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전 길드 장인의 독재를 반대하는 단결은 프랑스 헌법으로부터 폐지된 길드의 재건과 같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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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농민 토지 수탈

 

잉글랜드에서 농노제는 14세기 말 사실상 소멸했다. 당시 주민의 압도적 다수는, 15세기에 이르러 그 수가 더욱 증대하며, 자유로운 자영농민으로 구성되었다 (봉건적 직함이 그들의 소유권을 아무리 은폐했을지라도). 비교적 대규모 영지에서는 농노였던 베일리프(영주 토지 관리인)가 자유로운 차지 농민으로 대체되었다. 농업 임금 노동자 일부는 여가 시간을 활용해 대토지 소유자의 토지에서 노동하는 농민들로, 일부는 독자적인 진정한 임금 노동자 계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후자는 상대적·절대적으로 소수). 그런데 이 후자 역시 실질적으로는 농민과 다름없었다. 그들은 임금 외에 4에이커 이상의 경작지와 오두막집을 제공받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들은 다른 농민과 함께 공유지를 이용하며 가축 방목과 재목, 장작, 토탄 등을 조달했다.

 

유럽 전역에서 봉건적 생산은 토지를 최대한 많은 신하에게 분할하는 일을 특징으로 한다. 봉건 영주의 권력은 여타 주권자의 권력과 마찬가지로, 지대 크기가 아닌 신하·백성의 수로부터 규정되며, 이는 자영농민의 수에 의존했다. 따라서 잉글랜드 토지는 노르만 정복(1066) 이후 900개의 앵글로색슨 귀족령을 포함하는 거대한 남작령으로 분할되었음에도, 소농 경영이 여전히 주를 이루었으며, 다만 비교적 큰 영주 직영지가 산재했다. 이러한 상황은 15세기의 도시 번영과 결합하여, 대법관 포테스큐가 저서잉글랜드법의 찬미에서 주장한 인민의 부를 발달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은 자본주의적 부의 여지는 허용하지 않았다.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토대를 놓는 변혁의 서곡은 15세기 마지막 1/316세기 첫 10년 사이에 시작되었다. 제임스 스튜어트의 적절한 표현대로, ‘곳곳마다 쓸모없이 저택과 성에 가득 차 있던봉건적 가신 집단이 해체되면서, 대량의 무일푼 자유로운 프롤레타리아들이 노동 시장에 유입되었다. 부르주아적 발전의 산물인 왕권은 절대적 주권을 획득하려 노력하며 이 가신 집단의 해체를 폭력적으로 촉진했으나, 유일한 원인은 아니었다. 오히려 대규모 봉건 영주들 자신이 왕권과 의회에 완강하게 저항하며, 자신과 마찬가지로, 토지에 대해 동일한 봉건적 권리를 가진 농민들을 그 토지로부터 축출하고, 공유지를 횡령하면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큰 프롤레타리아트를 창출했다.

 

이 과정은 특히 플랑드르 양모 공장제 수공업의 번영과 그에 따른, 잉글랜드 양모 가격의 등귀로부터 직접적으로 자극받았다. 종래의 봉건 귀족은 거대한 봉건 전쟁으로 소멸되었고, 새로운 귀족은 화폐가 모든 권력 중의 권력이 된 시대의 산물이었다. 그래서 경작지를 목양지로 전환하는 일이 그들의 구호가 되었다. 해리슨의 저서잉글랜드의 묘사(1587)에서 소농 수탈이 국토를 얼마나 파괴했는지 기록한다. ‘우리의 대약탈자들이 그 무엇을 꺼릴소냐!’ 농민의 주택과 노동자의 오두막집을 폭력적으로 헐어버리거나 허물어지도록 방치했다. 해리슨은 이렇게 서술한다.

 

어느 기사령의 현재 상태를 과거의 재산 목록과 비교해보면, 17, 18채 또는 20채의 가옥이 사라졌음을 알게 된다. 잉글랜드에는 지금보다 더 적은 사람이 살았던 적이 없다.’ 도시와 읍 중 일부는 다소 증대했지만, 대체로 완전히 몰락했거나 1/4 또는 1/2 이상 축소되었다. 파괴되어 목양지가 되고 영주의 저택만이 남아 있는 읍들에 관해서는, 나는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옛 연대기 편집자의 한탄은 흔히 과장된 측면이 있지만, 이는 생산 관계들의 혁명이 당대인들에게 남긴 인상을 정확히 드러낸다. 대법관 포테스큐와 토머스 모어의 저술을 비교하면 15세기와 16세기 사이의 차이를 명확히 파악할 수 있다. 손턴이 적절하게 지적한 대로, 잉글랜드 노동 계급은 어떠한 과도적 중간 단계도 없이 황금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 추락했다.

 

입법부는 이 거대한 변혁에 놀라움을 표했다. 입법부는 아직 국민의 부’, 곧 자본의 형성과 국민 대중에 대한 무자비한 착취 및 궁핍화가 모든 국가 정책의 극치로 간주되는 높은 문명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베이컨은 저서헨리 7세의 통치사(1870)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당시(1489) 울타리 치기(인클로저)는 점점 빈번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노동 없이는 경작될 수 없던 경작지가 소수의 양치기로 쉽게 관리되는 목장으로 전환되었다. 계약 기간을 종신, 1년 또는 마음대로 정하는 차지 농장, 곧 대다수의 자영 농민(yeomanry)이 살던 곳이 영주의 직영지로 바뀌었다. 이로 인해, 인민은 쇠약해졌으며, 도시, 교회, 십일조 역시 쇠퇴했다. 이 폐해를 시정하려는 당시 왕과 의회의 지혜는 경탄할 만했다. 그들은 인구를 감소시키는 인클로저와 목장 경영에 맞서 대책을 세웠다.’

 

1489년 헨리 7세의 한 법령(19)은 최소 20에이커 토지에 딸린 농민 가옥의 파괴를 일절 금지했다. 헨리 8세 통치 제25년의 법령은 이를 갱신했다. 이 법령은 다수의 차지 농장과 수많은 가축, 특히 양이 소수인의 수중에 집중되면서 지대가 크게 올랐으나, 경작은 크게 쇠퇴하고, 교회와 가옥들은 파괴되었으며, 놀랄 만큼 많은 인민 대중이 생계 수단을 박탈당했음을 명시했다. 이에 따라, 이 법령은 피폐한 농장의 재건을 명하고, 곡물 경작지와 목장지 사이의 비율을 규정했다. 1533년의 법령은 일부 사람들이 24,000마리에 달하는 양을 소유하고 있는 점을 지적하며, 그 소유 두수를 2,000마리로 제한했다. 그러나 헨리 7세 이래 150년에 걸친 소규모 차지 농업가와 농민 수탈을 반대한 국민들의 원성이나 입법은 모두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 성과 없던 비밀을 베이컨은 무심결에 누설한다. 그는 저서 도덕론과 정치론29장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헨리 7세의 법령은 일정한 표준의 농장과 농가를 만들어 냈다는 점에서 사려 깊고 경탄할 만한 것이었다. 곧 농장과 농가에 일정한 비율의 토지를 보유하게 하면서, 신민들로 하여금 풍족하게 살고, 노예의 상태에 빠지지 않게 하며, 또 쟁기를 단순한 일꾼의 수중이 아니라 그 소유자의 수중에 유지할 수 있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가 요구한 것은 이와 반대로, 국민 대중의 예속 상태, 곧 국민 대중을 고용되는 사람으로 전환시키고 그들의 노동 수단을 자본으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이 과도기에 입법은 또한 농촌 임금 노동자의 오두막집에 최소한 4에이커의 토지를 보장하려 노력했고, 그들의 오두막집에 하숙인을 받아들이는 일을 금지했다.

 

1627년 찰스 1세 통치기에, 폰트밀의 로저 크로커는 폰트밀 토지에 4에이커의 영구 채마밭이 없는 오두막집을 세운 이유로 처벌받았다. 1638년 찰스 1세 통치기에는 옛 법령들(특히 4에이커 토지에 관한 법령)의 준수를 강요하기 위한 칙명 위원회가 임명되었다. 심지어 크롬웰까지도 런던 주변 4마일 이내에 4에이커 채마밭이 없는 가옥 건축을 금지했다. 18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농촌 노동자의 오두막집에 1-2에이커의 채마밭이 없을 경우 소송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자신의 오두막집에 작은 뜰이 있거나, 멀리 떨어진 곳이라도 작은 토지를 빌릴 수 있다면 그는 다행이다. 헌터는 이렇게 말한다.

 

지주와 차지 농업가는 이 점에서는 뜻을 같이한다. 오두막집에 붙어 있는 몇 에이커의 토지는 노동자를 지나치게 독립적으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 대중에 대한 폭력적 수탈 과정은 16세기 종교 개혁과 그에 따른 교회 재산의 방대한 횡령에서 강력한 새로운 자극을 얻었다. 종교 개혁 당시, 가톨릭 교회는 영국 토지의 상당 부분을 소유한 봉건적 소유자였다.

 

수도원 등의 해산은 그곳 주민들을 프롤레타리아트로 전환시켰다. 교회 토지는 대부분 왕의 총애를 받는 탐욕스러운 신하들에게 증여되거나, 투기적인 차지 농업가와 도시 부르주아에게 헐값으로 매각되었는데, 그들은 종전의 세습적 소작인들을 대량으로 축출하고 이들의 경영지를 통합했다.

 

법적으로 보장되던 교회 십일조 일부에 대한 가난한 농민들의 소유권 역시 암암리에 몰수되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잉글랜드를 순행한 후, ‘도처에 거지라고 외쳤다. 결국 여왕 통치 제43(1601), 정부는 구빈세를 도입하며 극빈층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법령 작성자들은 그 이유를 밝히는 것을 수치스러워했고, 따라서 (모든 관례를 깨고) 어떠한 전문도 없이 그것을 공포했다.’

 

이 구빈세는 찰스 1세 통치 제16(1641)의 제4조례로부터 영구적인 것으로 선포되었고, 실제로는 1834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더 강력하고 새로운 형태로 바뀌었다. 종교 개혁의 이러한 직접적인 결과가 가장 오래 지속된 영향은 아니었다. 교회의 재산은 전통적 토지 소유 관계의 종교적 보루였으므로, 이 보루가 무너지자 그 토지 소유 관계 또한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던 것이다.

 

17세기 마지막 10년까지도 자영 농민층은 차지 농업가 계급보다 수가 더 많았다. 그들은 크롬웰 군대의 주력을 이루었으며, 매콜리의 고백에 따르더라도, 주정뱅이 귀족이나 그들에게 봉사하는 농촌 목사들(귀족의 버림받은 애첩과 결혼해야 했던)에 비해 형편이 더 나았다. 심지어 농촌 임금 노동자들까지도 공유지의 공동 소유자였다. 그러나 1750년경에 이르면 자영 농민층은 사라졌고, 18세기 마지막 10년에는 농업 노동자의 공유지는 흔적조차 없어졌다. 여기서는 이 농업 혁명의 순수 경제적 추진력은 무시하고, 다만 이 혁명의 폭력적 수단만을 다룬다.

 

스튜어트 왕정 복고(1603) 이후, 토지 소유자들은 법적 절차를 밟아 약탈을 감행했다 (유럽 대륙에서는 법적 절차 없이 수행되었던 것과 대조적이다). 그들은 봉건적 토지 제도를 철폐하고, 국가에 대한 토지의 모든 공납 의무를 폐지했다. 그 대신 농민층과 기타 국민 대중에 대한 과세로 국가에 배상했으며, 봉건적 권리만을 가지고 있던 토지에 대해 근대적 사유권을 확립했다. 끝으로, 그들은 거주 법(거주 이동 금지법)을 제정했는데, 이는 타타르 사람 보리스 고두노프의 칙령이 러시아 농민층에 주었던 일과 비슷한 영향 (필요한 수정을 가하면)을 잉글랜드 농촌 노동자들에게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명예 혁명’(1688)은 오렌지공 윌리엄 3세와 더불어 지주적·자본가적 잉여 가치 취득자들을 지배층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이전까지 조심스럽게 진행되던 국유지 횡령을 방대한 규모로 실행하며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국유지는 증여되거나, 헐값으로 매각되거나, 또는 직접적 횡령으로부터 사유지에 병합되었다. 이 모든 과정은 법적 형식을 거의 고려하지 않고 수행되었다. 이렇듯, 사기와 횡령으로 취득한 국유지는, 17세기 중엽 내전에서 상실되지 않은 교회로부터 약탈한 토지와 함께 잉글랜드 과두 지배층의 현재 귀족령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부르주아적 자본가들은 이러한 활동이 특히 토지를 자유 매매의 대상으로 전환시키고, 대규모 농업 생산의 영역을 확대하며, 농촌으로부터 무일푼의 자유로운 프롤레타리아 공급을 증가시키므로 이를 적극 지지했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토지 귀족은 새로운 은행 귀족, 막 태동한 대금융업자, 그리고 당시 보호 관세로 보호받던 대공장제 수공업 소유자들의 자연적 동맹자였다. 잉글랜드의 부르주아지는 스웨덴의 도시 부르주아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아주 현명하게 행동했다. 다만 스웨덴의 부르주아지는 오히려 자신들의 경제적 세력의 보루인 농민층과 연합하여, 왕들이 과두 지배층으로부터 왕령을 폭력적으로 탈환하는 것(1604년 이후부터 칼 10세와 칼 11세의 치하까지)을 지지했다는 점이 달랐다.

 

공유지는 (앞서 논의한 국유지와는 별개로) 봉건주의라는 외피 아래 존속했던 고대 게르만적 제도였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공유지에 대한 폭력적 약탈은 대개 경작지를 목양지로 전환하는 일을 수반하며, 15세기 말에 시작되어 16세기에도 지속되었다. 그러나 당시 이 과정은 개인적 폭행의 형태로 이루어졌으며, 이에 대해 법률은 150년 동안 싸웠으나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법률 자체가 국민의 공유지를 약탈하는 도구로 발전했다는 점에서 변화가 있었다. 그렇다고 대규모 차지 농업가들이 자신들만의 별개의 사적 방법들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이 약탈의 의회적 형태가 바로 공유지 인클로저 법이다. 이는 지주(국회 의원들)가 인민의 토지를 사유지로 자신에게 증여하는 법령, 곧 인민 수탈의 법령이다.

 

이든은 공유지를 봉건 영주를 대신한 대규모 토지 소유자의 사유지라고 설명하는 자신의 교활한 변호론을 스스로 모순시킨다. 그 자신이 공유지 인클로저에 관한 일반적 의회 법령을 요구하며, 공유지를 사유지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의회적인 쿠데타가 필요함을 인정한 것이다. 더욱이 그는 이 공유지를 빼앗긴 빈민에 대해 손해를 배상할할 것을 입법부에 요구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독립적 자영 농민 대신 임의 차지 농업가 (1년 계약으로 토지를 빌리며 지주의 독단적 의사에 좌우되는 예속적인 소규모 차지 농업가)가 등장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공유지의 체계적인 횡령은 국유지 약탈과 결합하여 18세기에 자본 농장 또는 상인 농장이라 불리는 대규모 농장의 확대를 크게 조장했으며, 농촌 인구가 공업을 위한 프롤레타리아트로 풀려나는일을 촉진했다. 그러나 18세기에는 나라의 부와 대중의 빈곤이 동일하다는 사실이 19세기처럼 완전히 인식되지는 못했다. 그래서 당시 경제 문헌에서는 공유지 인클로저에 관한 격렬한 논쟁이 발생했다. 필자가 보유한 방대한 자료 중에서 당시 상태를 특히 생생하게 보여주는 일부 발췌를 인용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 격분할 필자는 하트퍼드셔의 많은 교구에서 평균 15-150에이커이던 24개의 농장이 3개 농장으로 합병되었다.’고 기록한다.

 

노샘프턴셔와 레스터셔에서는 공유지 인클로저가 극심하게 성행했으며, 인클로저로 생겨난 새로운 영지들은 대부분 목장으로 전환되었다. 그 결과, 이전에는 1,500에이커나 경작되던 많은 영지들이 지금은 50에이커도 경작되지 못하고 있다. 이전 주택, 곳간, 외양간 따위의 폐허만이 이전 주민들이 남긴 유일한 흔적이다.’

 

몇몇의 개방 경지 촌락에서는 100호의 집과 가족들이 불과 8-10호로 감소되었다. 15년 또는 20년 전부터 비로소 인클로저가 진행된 대부분의 교구들에서 토지 소유자는 인클로저 이전 개방 경지 시대의 토지 소유자들에 비해 매우 소수다. 이전에는 20-30명의 차지 농업가와 동일한 수의 소규모 소작인 및 소유자의 수중에 있었던 큰 영지들이 인클로저 진행 후 4, 5인의 부유한 목축업자에게 횡령되는 것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 이들 모두는 자기 가족과, 고용하고 먹여 살리던 다수의 다른 가족과 함께 자기들의 점유지에서 쫓겨났다.’

 

인클로저의 구실 아래 인접한 지주들이 합병한 토지에는 휴경지뿐 아니라, 공동으로 경작하거나 공동체에 일정한 지대를 지불하고 경작하는 토지 역시 흔히 있었다. 프라이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여기에서 개방 경지와 이미 개간된 토지의 인클로저를 염두에 두고 말한다. 인클로저를 옹호하는 저술가들조차 인클로저가 대규모 농장의 독점을 강화하며, 생활 수단의 가격을 높이고, 인구를 감소시킨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현재 시행되는) 황무지의 인클로저 또한 빈민으로부터 그의 생활 수단의 일부를 약탈하며, 그렇지 않아도 원래 지나치게 큰 농장을 더욱 크게 만든다.’

 

토지가 소수의 대규모 농민 수중에 들어가면, 작은 농민들은 타인을 위한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하며, 필요한 모든 것을 시장에서 구매해야 한다. 이 작은 농민들은 그들 자신이 경작하는 토지의 생산물과, 공유지에서 기르는 양, , 돼지 따위로 자신과 가족의 생활을 유지하여 생활 수단을 거의 살 필요가 없던 다수의 소규모 토지 소유자 및 소규모 차지 농업가들이다. 노동에 대한 더 많은 강제가 시행되면서 아마도 더 많은 노동이 수행될 것이다. 도시와 공장제 수공업은 발달할 것이다. 왜냐하면, 거주지와 일터를 찾아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몰려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농장의 집중이 필연적으로 일으키는 결과이며, 실제로도 수년 동안 이 나라에서 그러한 결과가 일어나고 있다.’

 

프라이스는 인클로저의 결과들을 다음과 같이 총괄한다.

 

전체적으로 보아, 하층 계급의 상태는 거의 모든 점에서 악화되었고, 소규모 토지 소유자와 소규모 차지 농업가는 날품팔이와 고용된 사람의 처지로 전락했으며, 동시에 그들의 생활 유지는 더욱 곤란해졌다.’

 

실제로 공유지의 횡령과 이에 수반된 농업 혁명은 농업 노동자의 상태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이든 자신의 언급에서조차 그들의 임금은 1765년과 1780년 사이에 최저 한도 이하로 떨어지기 시작하여 공적 빈민 구호금으로 보충되어야만 했다. 그는 그들의 임금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생활상의 필요를 겨우 충족시킬 따름이었다.’

 

이제 잠시 인클로저를 옹호하며 프라이스를 반대하는 사람의 말을 들어본다.

 

개방 경지에서 자기 노동을 낭비하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인구가 감소했다는 결론은 부당하다. 작은 농민들을 타인을 위해 노동해야 할 사람으로 전환시키면서 더 많은 양의 노동이 발생한다면, 이야말로 국민 (물론 전환된 작은 농민들은 국민에 속하지 않는다)이 원하는 이익이 될 것이다. 그들의 결합된 노동이 하나의 농장에서 사용된다면 더 많은 생산물을 얻게 될 것이며, 이에 따라 공장제 수공업을 위한 잉여 생산물이 생길 것이고, 그렇게 되면서 우리 국민의 금광 중 하나인 공장제 수공업이 곡물 생산량에 비례하여 증가하게 될 것이다.’

 

신성한 소유권에 대한 가장 파렴치한 침해와 인간에 대한 가장 난폭한 폭행마저도,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토대를 구축하는 데 필요하다면, 경제학자들은 스토아 학파적 태연자약함으로 이를 바라본다. 이 표본을 우리는 이든 (정치적으로 토리적 경향을 지니며 박애주의자’)에게서 확인할 수 있다.

 

15세기 마지막 1/3부터 18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국민에 대한 폭력적 수탈 과정에서 발생한 수 많은 약탈 행위, 잔인한 행동, 국민의 고난조차도, 그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편안한결론을 내리게 했을 뿐이다.

 

경작지와 목장 사이에는 적절한 비율이 설정되어야 했다. 14세기 전체와 15세기 대부분에 걸쳐 농경지 2, 3, 심지어 4에이커당 목장은 1에이커 비율이었다. 16세기 중엽에 이 비율은 경작지 2에이커 대 목장 2에이커로 변동했다. 이후 경작지 1에이커 대 목장 2에이커를 거쳐, 마침내 경작지 1에이커 대 목장 3에이커라는 적당한 비율에 도달했다.’

 

19세기에는 농업 노동장와 공유지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기억조차 사라졌다. 최근 일은 고사하고, 1801년과 1831년 사이에 지주들로 구성된 의회가 농촌 주민으로부터 약탈하여 지주들에게 분배한 3,511,770에이커의 공유지에 대해 농촌 주민이 과연 단 한 푼의 배상이라도 받은 적이 있는가. 끝으로, 농촌 주민으로부터 토지를 빼앗은 최후의 대규모 수탈 과정은 이른바 사유지 청소’ (곧 사유지로부터 인간을 청소하여 내쫓는 일)였다. 위에서 살펴본 모든 잉글랜드식 수탈 방법 중에서 청소가 그 절정을 이룬다.

 

앞선 장에서 이미 근대의 상태를 보았듯이, 청소될 독립적 농민이 더 이상 없을 때는 토지로부터 오두막집의 청소가 시행되었다. 이로 인해 농업 노동자들은 자신이 경작하는 토지에서 거주할 장소를 찾을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진정한 사유지 청소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근대적 낭만주의 문학의 성지인 스코틀랜드의 고지에서 비로소 명확히 드러난다. 거기서 이 과정의 특징은 그 체계적인 성격, 단번에 수행되는 매우 큰 규모 (아일랜드에서는 지주들이 몇 개의 촌락을 일시에 청소했지만, 스코틀랜드 고지에서는 독일의 공국만한 크기의 지면이 일시에 청소된다는 점), 그리고 수탈되는 토지 소유 형태가 특수하다는 점이다.

 

스코틀랜드 고지의 켈트 사람들은 씨족들로 조직되었으며, 각 씨족은 그들이 정착하는 토지의 소유자였다. 씨족의 대표자인 수장 또는 대인은 이 토지의 명목상 소유자에 불과했으며, 이는 영국 여왕이 국토 전체의 명목상 소유자인 것과 마찬가지였다. 잉글랜드 정부가 이 대인들사이의 내전과 대인들이 스코틀랜드 저지 평야를 끊임없이 침입하는 일을 진입하는 데 성공했을 때, 씨족의 수장들은 그들의 종래의 약탈업을 포기하지 않고 다만 그 형태를 바꾸었을 뿐이다. 수장들은 자신의 권위로 토지에 대한 그들의 명목상 소유권을 사적 소유권으로 전환시켰다. 씨족원들의 저항에 부딪히자 그들은 공공연한 폭력으로 씨족 구성원들을 토지에서 추방하기로 결심했다. 뉴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영국 왕도 마찬가지 이유로, 그의 신하와 백성을 바다 속으로 몰아넣을 권리를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스코틀랜드에서 왕위 참칭자의 최후 반란(1745-1746) 직후 개시된 이 혁명의 초기 단계는 J. 스튜어트와 J. 앤더슨의 저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18세기에 게일 사람들(스코틀랜드 고지인들)은 토지에서 축출되었을 뿐 아니라 국외 이주마저 금지되었는데, 이는 그들을 글래스고나 기타 공장 도시로 몰아넣기 위함이었다.

 

19세기에 사용된 방법의 한 예로, 여기서는 서덜랜드 공작 부인이 실행한 청소를 드는 것으로 충분하다. 경제학에 밝은 이 인물은 씨족의 수장이 되자마자, 경제적 근본 치료책으로, 서덜랜드 주 전체 (이미 비슷한 과정으로 주민 수가 15,000명으로 감소된 상태)를 목양지로 전환하기로 결심했다. 1814년부터 1820년까지, 15,000명의 주민, 3,000세대의 가족은 체계적으로 축출되고 소탕되었다. 그들의 모든 촌락은 파괴되고 소각되었으며, 모든 경지는 목장으로 전환되었다.

 

영국 병사들이 이것을 집행하기 위해 파견되었으며, 주민들과 싸움까지 벌어졌다. 자신의 오두막집을 떠나기 거부한 노파는 불길 속에서 타 죽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 귀부인은 아득한 옛날부터 씨족의 소유였던 794,000에이커의 토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는 추방된 주민에게 한 가족당 2에이커씩, 6,000에이커의 토지를 해변에 배당했다. 6,000에이커는 이전에는 황무지였으며, 소유자에게 아무런 수입도 가져다주지 못했던 땅이다. 이 공작 부인은 자신의 고귀한 심정에서 (수세기 동안 자신의 가문을 위해 피를 흘린) 씨족민들에게서 약탈한 전체 토지를 29개의 대규모 차지 목양지로 분할했으며, 그 각 목양지에는 불과 한 가족, 대개는 잉글랜드에서 이주해 온 농장 관리인만이 거주했다.

 

1821년에 이미 15,000명의 게일 사람들은 131,000마리의 양으로 대체되었다. 해변으로 추방된 주민들은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려 했다. 그들은 반은 육상에서, 반은 수상에서 생활했지만, 육상과 해상을 합쳐도 그들 생활비의 절반밖에 충당되지 못했다. 그러나 선량한 게일 사람들은 씨족의 대인에 대한 낭만적이고 산악인 다운 숭배 때문에 한층 더 가혹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물고기 비린내가 대인들의 코를 찔렀을 때, 그들은 거기에 돈벌이가 있음을 알아차렸고, 그 해변을 런던의 큰 생선 장수들에게 임대했다. 게일 사람들은 다시금 추방되었다. 결국, 목양지의 일부는 이번에는 사슴 사냥터로 재전환되었다. 잘 아는 바와 같이, 잉글랜드에는 참다운 삼림이 없다. 귀족들의 수렵장에 있는 사슴은 체질상 가축이나 다름없으며, 런던 시의회 의원들처럼 살쪄 있다. 따라서 스코틀랜드는 고귀한 정열의 마지막 안식처가 된 것이다. 1848년 서머즈는 이같이 기록한다.

 

스코틀랜드 고지에서는 새로운 삼림이 버섯처럼 급증한다. 게이크 주변에는 글렌피시와 아드버키의 새 삼림이 존재하며, 최근 조성된 크넓은 황무지인 블랙 마운트도 포함된다. 동쪽(애버딘 부근)에서 서쪽(오번의 암초)에 이르기까지 길게 뻗은 삼림 지대가 형성되었다. 고지의 다른 지역들에는 로흐 아케이그, 글렌개리, 글렌모리스턴 등의 새로운 삼림이 들어섰다. 소경영 농민들의 공동체였던 골짜기에 양이 도입되고, 게일 사람들은 더 척박한 토지로 몰려났다. 이제는 사슴이 양을 몰아내기 시작하며, 게일 사람들을 더욱 척박한 토지, 한층 더 비참한 궁핍으로 몰아넣는다. 사슴 수렵림과 주민은 공존할 수 없다. 어느 한쪽이 반드시 자리를 내놓아야 한다. 앞으로 1/4세기 동안 수렵장이 과거 1/4세기 동안 발달한 만큼 그 수와 규모가 확대된다면, 게일 사람은 단 한 명도 자기 고향땅에 남아 있지 못할 것이다. 고지 지주들 사이의 이런 운동은 일부 지주에게는 야망, 수렵 스포츠 따위 때문이지만, 더 실질적인 지주에게는 오직 이득에 착안해 사슴 거래 때문이다. 수렵장으로 변한 고지는 많은 경우 목양지로 임대하는 것보다 더 유리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수렵지를 구하는 사람들은 돈주머니가 허용하는 대로 값을 지불한다. 스코틀랜드의 고지가 겪는 고통은 잉글랜드가 노르만 왕들(1066-1154)의 정책으로부터 당한 고통에 못지않게 혹독한 것이었다. 사슴은 더욱 자유로운 놀이터를 얻었으며, 사람들은 점점 더 협소한 지역으로 몰려갔다. 주민의 자유는 하나씩 빼앗겼고, 억압은 나날이 증대되어 간다. 주민의 청소와 축출은 (아메리카나 오스트레일리아의 황야에서 농업상 필연적으로 수목과 수풀을 뽑아 없애는 일과 마찬가지로) 확고한 원칙으로 지주들로부터 수행되며, 이 업무는 조용하고 사무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무자비한 폭력 아래에서 수행된 교회 재산의 약탈, 국유지의 사기적 양도, 공유지의 횡령, 봉건적·씨족적 소유의 약탈과 그것의 사적 소유로 전환은 모두 시초 축적의 목가적 방법이었다. 이것들은 자본주의적 농업을 위한 무대를 마련하고, 토지를 자본에 결합시켰으며, 도시 산업에 필요한 무일푼의 자유로운 프롤레타리아트를 공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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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시초 축적

 

26. 시초 축적의 비밀

 

화폐의 자본 전환, 자본의 잉여 가치 생산, 잉여 가치로부터 자본 증식 과정을 확인했다. 그러나 자본 축적은 잉여 가치를 전제하고, 잉여 가치는 자본주의적 생산을, 자본주의적 생산은 생산자 수중에 자본과 노동력의 구비를 선행 조건으로 한다. 이 모든 운동은 필연적으로 순환 논리에 갇힌 양상을 보인다. 이 순환에서 벗어나려면, 자본주의적 축적에 앞서는 시초 축적(애덤 스미스의 이전의 축적이자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결과가 아닌 그 출발점)을 전제할 필요가 있다.

 

시초 축적의 역할은 정치경제학에서 원죄가 신학에서 차지하는 구실과 같다. 아담이 사과를 따 먹어 인류에게 죄가 도래했듯, 시초 축적 역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태곳적 사실로 설명된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아주 먼 옛날, 한편에는, 근면하고 영리하며 무엇보다 절약하는 특출한 무리가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게으르고 자신의 모든 것을 탕진하는 불량배가 있었다는 점이다. 신학적 원죄 전설이 인간의 이마에 땀 흘려 생계를 유지하게 된 숙명을 설명한다면, 경제학적 원죄의 역사는 정반대로, 땀 흘릴 필요가 전혀 없는 인간들(: 자본가 계급)이 어떻게 출현했는지를 밝혀준다.

 

이 서로 다른 원죄 이야기들이 공통으로 말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근면하고 절약했던 이는 부를 축적했고, 게으른 불량배는 결국 자신의 가죽 이외에는 팔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 원죄로부터, 다수의 빈곤(계속 노동해도 자신 외에는 팔 것이 없는 빈곤)과 소수의 부(오래전에 노동을 멈추었음에도 끊임없이 증가하는 부)가 유래한다. 이 낡고 유치한 이야기는 소유(재산)를 옹호하기 위해 매일 설교된다. 예를 들어, 티에르는 정치인다운 엄숙함으로 한때 재기 넘치던 프랑스인들에게 이 유치한 이야기를 지루하게 되풀이한다. 그러나 소유 문제가 등장하면, 이 유치원 이야기의 관점이 모든 연령과 발달 단계의 사람들에게 가장 적합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신성한 의무가 된다.

 

현실 역사는 정복, 노예화, 강탈, 살인, 곧 폭력이 큰 역할을 했음을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정치경제학의 온화한 역사 속에서는 옛날부터 소박하고 전원적인 말투가 지배했다. 정의와 노동만이 유일한 치부 수단이었는데, 물론 금년은 항상 예외였다. 결론적으로, 시초 축적의 방법들은 사실상 전혀 목가적이지 않다.

 

화폐와 상품 그 자체가 처음부터 자본이 아니듯, 생산 수단과 생활 수단 역시 처음부터 자본은 아니다. 그것들은 자본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 전환은 오직 특정한 사정, 곧 아주 다른 두 종류의 상품 소유자들이 서로 마주하고 접촉하는 상황에서만 성립된다. 한편은, 화폐, 생산 수단, 생활 수단의 소유자들로, 이들은 타인 노동력의 매입으로부터 자신이 소유한 가치액을 증가시키기를 열망하는 자들이다. 다른 한편은, 자유로운 노동자, 곧 자기 자신의 노동력의 판매자이자 노동의 판매자들이다. 자유로운 노동자라는 개념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곧 노예나 농노 등과는 달리 그들 자신이 생산 수단의 일부가 아니라는 의미, 곧 자유인이라는 의미와, 자영농민 등과는 달리 자기 자신의 생산 수단을 가지지 못하며 따라서 생산 수단으로부터 분리되고 자유로운 상태를 의미한다.

 

상품 시장의 이러한 양극 분화와 함께 자본주의적 생산의 기본 조건들이 충족된다. 자본주의 체제는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을 실현할 수 있는 조건들(생산 수단)의 소유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있음을 전제한다. 일단 자본주의적 생산이 자립하게 되면, 이 체제는 이러한 분리를 유지할 뿐 아니라 끊임없이 확대되는 규모로 재생산한다. 따라서 자본주의 체제를 만들어내는 과정은 결국 노동자를 그가 소유하던 노동 조건으로부터 분리하는 과정과 동일하다. 이는 한편으로, 사회적 생활 수단과 생산 수단을 자본으로 전환시키고, 다른 한편으로, 직접적 생산자를 임금 노동자로 전환시키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이른바 시초 축적이란, 생산자와 생산 수단 사이의 역사적 분리 과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것이 시초적인이유는, 그것이 자본의 이전 역사 단계이자 자본에 상응하는 생산 양식의 이전 역사 단계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 구조는 봉건 사회의 경제 구조로부터 발달했으며, 후자의 해체는 전자의 요소들을 해방시켰다.

 

직접적 생산자인 노동자는, 토지에 묶여있지 않고, 또 타인의 노예나 농노이기를 멈춘 뒤에야 비로소 자신의 몸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었다. 또한, 그가 노동력의 자유로운 판매자가 되어 자신의 상품(노동력)을 수요가 있는 곳 어디든지 가져가기 위해서는, 길드(동업조합)의 지배, 도제와 직인에 관한 길드의 규약, 그리고 길드의 구속적인 노동 규제에서 벗어나야 했다. 따라서 생산자를 임금 노동자로 전환시키는 역사적 과정은 한편으로, 농노적 예속과 길드의 속박에서 그들이 해방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부르주아 역사가들은 이 측면만을 중시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새로 해방된 사람들은 그들의 모든 생산 수단을 빼앗기고 종래 봉건 제도가 제공하던 모든 생존 보장을 빼앗긴 뒤에야, 비로소 자신을 판매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수탈의 역사는 피와 불의 문자로 인류의 연대기에 기록되어 있다.

 

산업 자본가라는 새로운 패권 세력은 길드의 수공업적 장인(마스터)들뿐 아니라 부의 원천을 장악한 봉건 영주들까지 축출해야 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산업 자본가의 등장은 봉건 세력과 그 특권에 반대하는 투쟁, 그리고 길드와 그 속박(이들이 생산의 자유로운 발전과 인간으로부터 인간의 자유로운 착취를 제한했으므로)에 반대하는 투쟁이 승리한 결과로 보인다. 그러나 산업의 기사들은 그들 자신이 전혀 관여하지 않은 사건들을 이용하면서만 칼을 쥔 기사들을 축출할 수 있었다. 그들은 (옛 로마의 자유민이 한때 보호자였던 사람들을 지배하기 위해 썼던 것과 같은) 비열한 방법으로 패권을 장악했다.

 

임금 노동자와 함께 자본가를 탄생시킨 발전의 출발점은 노동자의 예속 상태였다. 이 출발점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전진은 노동자의 예속 형태를 변화시키는 일, 곧 봉건적 착취를 자본주의적 착취로 전환시키는 데 있었다. 이 전환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멀리 소급할 필요는 없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최초 단서가 이미 14세기나 15세기 지중해 연안 일부 도시에서 드문드문 확인되었지만, 자본주의 시대는 16세기부터 비로소 시작된다. 자본주의 시대가 출현하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이미 오래전에 농노제가 철폐되었고, 중세의 절정을 이루는 독립적인 자유 도시 역시 이미 오래 전에 시들어 버렸다.

 

시초 축적의 역사에서, 자본가 계급 형성의 지렛대로 기능한 모든 변혁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획기적인 일은, 수많은 인간이 갑자기 그리고 폭력적으로 자신의 생존 수단에서 분리되어 무일푼의 자유롭고 의지할 곳 없는프롤레타리아로 노동 시장에 투입되는 순간이었다. 농업 생산자인 농민으로부터 토지를 빼앗는 일은 전체 과정의 토대를 이룬다. 이 수탈의 역사는 나라마다 그 양상이 다르며, 통과하는 각종 국면의 순서와 시대 역시 나라마다 다르다. 이 과정이 가장 전형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는 곳이 바로 잉글랜드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나라를 예로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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