엥겔스: 『자본』 제Ⅲ권에 대한 보충 설명
『자본』 제Ⅲ권은 발간 이래 여러 해석의 대상이 되어 왔으며, 이는 충분히 필연적인 결과라 할 수 있다. 편집 과정에서 핵심 원칙은 마르크스 원문을 그대로 보존하여, 그가 도출한 독창적 성과를 본인의 문체로 가감 없이 제시하는 데 있었다. 이에 따라 필자의 개입은 불가피한 경우로 엄격히 제한하였고, 보충 설명이 이루어지는 지점에서도 독자가 사실 관계를 명확히 판별할 수 있도록 조치하여 기술의 객관성을 확보하였다.
본고에 대한 비판적 견해는 필자가 재료를 체계적으로 재구성하여 완결된 저작으로 완성했어야 함을 지적한다. 이는 독자의 가독성을 위해 마르크스 원문을 훼손해야 한다는 주장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필자는 이를 자신의 임무로 상정하지 않았으며, 그와 같은 개작을 감행할 어떠한 권한도 부여받지 않았다. 마르크스와 같은 인물은 자신의 고유한 서술 방식에서 과학적 성과를 온전히 후세에 계승할 권리를 지닌다. 나아가 이처럼 위대한 인물의 유고에 자의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필자에게 있어 신의를 저버리는 배신 행위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한 시도는 실로 무익한 일이었을 것이다. 읽을 능력이 없거나 읽으려는 의사조차 없는 이들, 곧 제Ⅰ권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필요한 노력보다 이미 오해하는 데 더 많은 노고를 쏟아부은 이들을 위해 내용을 부가하는 행위는 아무런 실익도 거둘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진정한 이해를 구하는 이들에게 가장 핵심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은 오직 원문 그 자체다. 이들에게 필자의 개작은 기껏해야 미발간 상태인 원안에 대한 주석 정도의 의미밖에 가질 수 없다. 결국 최초의 논쟁 과정에서 이미 원문은 원용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논의가 거듭될수록 원문 전체의 공표는 피할 수 없는 필연적 귀결이었을 것이다.
새로운 시각을 담아 급하게 집필한 탓에 곳곳에 누락이 존재하는 초고 상태의 저작에서 논쟁이 발생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 따라서 난점을 해소하고 본문에서 그 의의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핵심 관점들을 더욱 부각하며, 1865년의 원안을 1895년의 정세에 부합하도록 미미하나 중요한 보완을 부가하는 작업에 필자가 개입하는 것은 중대한 가치를 지닌다. 실제로 현시점에서 심도 있는 논의가 요구된다고 사료되는 지점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Ⅰ. 가치 법칙과 이윤율
이 두 요소 사이의 외관상 모순을 해결하는 과제는 본문 발행 전후를 막론하고 격렬한 논쟁을 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대다수는 일종의 경이로운 해법을 기대했으나, 정작 제시된 해결책이 명료하고 합리적이며 산문적인 평범함에 머물자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이러한 반응 중에서도 특히 주목할 만한 인물은 이미 서문에서 언급한 바 있는 로리아다. 그는 드디어 자기와 같은 ‘비미한 존재’라도 마르크스라는 견고하고 거대한 건축물을 단숨에 붕괴시킬 수 있는 아르키메데스의 지렛대를 마침내 포착했다고 확신하며, 격분 섞인 어조로 이것은 해결이 아닌 순전한 기만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경제학자들이 가치를 논할 때 상정하는 것은 오직 교환 과정에서 실제로 실현되고 확인되는 가치뿐이라는 논리다.
‘상품이 가치대로 판매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판매될 공산조차 없는 가치를 연구하는 일은, 분별 있는 경제학자라면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을 것이며 실질적으로 성립하지도 않는다. 상품이 노동량에 비례해 규정되는 가치대로 판매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제하면서도 마르크스가 그 가치를 주장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상품의 실제 판매 가치가 지출된 노동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고전파 경제학의 명제를 모순적으로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 개별 가격이 가치와 불일치하더라도 모든 상품의 총가격과 총가치, 곧 총상품량에 투하된 노동량은 일치한다는 마르크스 설명 또한 논리적 타당성을 결여한다. 본래 가치란 상품 간의 교환 비율을 의미하므로, 총가치라는 관념 자체가 형용 모순이자 불합리하며 무의미한 상정이기 때문이다.’
로리아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저작의 서두에서 두 상품의 교환이 성립하는 근거로 그것들이 오직 하나의 동등한 종류 및 크기의 요소, 곧 동일한 노동량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후 상품들이 포함된 노동량과는 판이한 비율로 교환된다고 단언하며, 자신의 이전 논리를 매우 엄숙하게 부정하는 모순에 직면한다.
‘이와 같은 ‘불합리’로의 완전한 귀착은 그 어떠한 사례보다도 처참한 ‘이론적 파산’이자, ‘학문적 자살’을 가장 화려하고 엄숙하게 집행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누오바 안톨로지아』, 1895년 2월 1일: 477-479).
로리아는 이 지점에서 크게 환호한다. 마르크스를 자신과 다름없는 평범한 사기꾼으로 격하시킨 자신의 판단이 정당했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의 시각에서 마르크스는 독자를 기만하며 우롱하는 행태를 보였다는 점에서 이탈리아의 평범한 경제학 교수인 자신과 결을 같이한다. 그러나 사기꾼의 대명사인 ‘둘카마라’로 묘사되는 로리아 자신은 자신의 직업적 술책에 능숙했던 반면, 서투른 북방인인 마르크스는 전개 과정마다 난처한 처지에 직면하여 궤변을 늘어놓다 결국 장엄한 ‘자살’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다.
상품이 노동으로 규정된 가치대로 결코 판매되지 않으며 판매될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한 고찰은 차후로 미루기로 한다. 여기에서는 우선 ‘가치란 한 상품이 다른 상품과 교환되는 비율에 불과하므로, 총가치라는 관념 자체가 이미 궤변이다.’는 로리아의 주장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논리 구조에 따르면, 두 상품의 교환 비율인 가치는 전적으로 우연적 요소에 입각하여 규정되며 외적 조건에 따라 상품에 부과되어 매 순간 가변하는 성질을 띠게 된다. 1톤의 밀이 1그램의 금과 교환되든 1킬로그램의 금과 교환되든, 이는 밀이나 금 자체에 내재하는 조건과는 무관하며 오직 두 객체와 분리된 외적 사정에만 의존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 내재적 조건이 교환 과정에서 규정력을 행사함에 따라 가치가 교환 행위와 무관한 자립적 실체로 현존할 수 있고, 나아가 상품들의 총가치를 논하는 것도 성립하겠으나, 로리아는 이러한 전제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단언한다. 요컨대 일정 비율로 교환되는 현상 자체가 곧 가치의 전부이며, 두 상품이 교환되는 비율 그 자체가 가치일 뿐이다. 가치는 가격과 동일하므로, 각 상품은 시장에서 실현되는 가격만큼의 가치를 지닐 뿐이다. 결국 가격을 규정하는 핵심 기제는 수요와 공급이며, 이 범위를 초과하는 근원적 원리를 규명하려는 시도는 공허한 논의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지점에는 결정적인 논리적 결함이 존재한다. 규정적 상태에서 수요와 공급은 상호 일치함을 전제로 한다. 전 세계의 모든 상품을 두 범주로 양분하여 각각을 수요 부문과 공급 부문이라 명명하고, 각 부문이 100만 원의 가격을 체현한다고 상정하자. 이 경우 전체 상품의 가격 또는 가치 총액은 200만 원이 된다.
하지만 로리아는 이러한 총계 산출이 무의미하며 불합리하다고 주장한다. 두 부문의 합계가 가격 측면에서는 200만 원을 나타낼지 모르나, 가치의 수준에서는 두 부문의 성격이 전혀 다르다는 논리다. 가격의 연산이 1+1=2라면, 적어도 상품 전체가 문제로 되는 한, 상품 전체를 포괄하는 가치의 연산은 1+1=0이 된다는 것이 그의 요지다.
로리아의 논거에 따르면, 한 부문이 다른 부문의 상품에 대해 100만 원을 지불할 의사와 능력이 있는 상황에서 각 부문의 상품 가치는 오직 100만 원으로 한정된다. 두 부문의 상품 전체를 제3자의 수중에 귀속시킨다면, 해당 상품들은 제3자의 내부에서 더 이상 교환될 필요가 없으므로,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제3자는 어떠한 가치도 보유하지 못하며, 궁극적으로 그 누구도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렇듯 가치 개념을 형체도 없이 파괴해 버린 남방인 로리아의 수완은 탄복할 만하며, 이는 가히 속류 경제학의 정점이라 할 수 있다.
브라운이 주재한 『사회 입법 기록』 제7권 제4호 (베를린, 1894년)에 수록된 좀바르트 (1894)의 마르크스 체계 개관은 매우 탁월한 식견을 보여준다. 독일의 학자가 마르크스의 저작(을 통해) 저자의 실제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체계에 대한 비판이 단순한 반박이 아닌 이론적 전개에 있음을 명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그는 비판의 영역을 ‘정치적 야심가들의 몫으로 남겨둠에 따라’ 학술적 태도를 견지한다.
좀바르트도 역시 현재 논의 중인 문제를 다루며 마르크스 체계 내 가치의 의의를 고찰한다. 그는 가치가 자본주의적 상품의 교환 관계라는 현상적 수준이나 생산 담당자들의 의식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명확히 한다. 가치는 실증적 사실이라기보다 관념적 또는 논리적 사실에 가깝다. 마르크스에게 물질적 규정성으로서의 가치 개념은 노동의 사회적 생산성이 경제 생활의 기초를 이룬다는 사실의 경제적 표현이다. 자본주의 경제 질서에서 모든 경제 과정을 궁극적으로 규제하는 가치 법칙의 일반적 내용은, 상품 가치가 노동 생산성이라는 결정적 요소에 따라 관철되는 특수한 역사적 형태라는 점에 있다.
생산의 자본주의적 형태에서 가치 법칙의 의의를 이와 같이 파악하는 것은 결코 오류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지나치게 일반적이며, 따라서 더욱 치밀하고 정교한 정식화가 요구된다. 단순히 보편적인 수준에 머무르는 파악 방식으로는 가치 법칙이 사회의 경제 발전 단계에 대해 가지는 구체적이고 포괄적인 의의를 온전히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브라운이 편집하는 『사회 정책 중앙 신문』 제22호 (1895년 2월 25일)에는 『자본』 제Ⅲ권에 관한 슈미트 (1895)의 우수한 논문이 실려 있다. 이 논문에서 특히 주목할 지점은 마르크스가 잉여 가치에서 평균 이윤을 도출하여, 평균 이윤율의 결정 방식과 그 수치가 왜 특정 수준 (예컨대 50%나 100%가 아닌 10%나 15%)을 형성하는가라는 문제에 최초로 해답을 제시했음을 증명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이전의 경제학자들이 제기조차 하지 못했던 핵심적인 문제에 대해 처음으로 대답했음을 입증한다. 산업 자본가가 선차적으로 취득하는 잉여 가치가 이윤과 지대의 유일한 원천임을 파악하고 있다면, 이 문제는 필연적으로 해결된다. 따라서 슈미트 논문의 해당 대목은 사실상 로리아와 같은 경제학자들을 겨냥한 것으로 판단된다. 물론 진실을 외면하려는 이들의 눈을 뜨게 하려는 노력이 시간 낭비가 아니라는 전제하에 그러하다.
슈미트 역시 가치 법칙에 관해 형식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가치 법칙을 현실적 교환 과정을 규명하기 위한 과학적 가설로 규정하며, 이것이 외관상 상충하는 경쟁 체계하의 가격 현상을 설명하는 데 필수 불가결한 이론적 출발점임을 실증하고자 한다. 그의 관점에 따르면, 가치 법칙 배제 시 자본주의 경제 기제에 관한 어떠한 이론적 안목도 난망해진다. 실제로 필자가 3월 12일 답장을 보낸 슈미트는 1895년 3월 1일 자 서신에서, 생산의 자본주의적 형태에서 가치 법칙을 ‘이론적으로는 필요하나 실질적으로는 하나의 허구’라고 언명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파악은 부당하다. 가치 법칙은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에 있어 단순한 가정이나 허구적 장치를 상회하는, 훨씬 더 본질적이고 명확한 의의를 지니기 때문이다.
좀바르트와 슈미트, 그리고 이들의 관점에 부합하는 속류 경제학자 로리아는 다음의 본질적 지점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곧 우리가 현재 고찰하는 대상은 단순한 논리적 전개 과정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역사적 과정이자 그 과정이 사고 속에 논리적으로 체현하고 재조직하는 방식이며, 나아가 해당 과정 내부에 존재하는 유기적 연관성들에 대한 엄밀한 논리적 추적이라는 사실이다.
결정적인 단락은 제Ⅲ권 제10장 217쪽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문제의 근원은 상품이 단순 상품으로서 교환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생산물로서 교환된다는 점에 있다. 자본은 사회적 잉여 가치 총량으로부터 각 자본의 크기에 비례하는 일정한 몫을 요구하며, 이에 따라 동일한 크기의 자본에는 동일한 몫의 배분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원리가 관철된다.’
단순 상품과 자본의 생산물로서의 상품을 구별하기 위해, 노동자가 자신의 생산 수단을 직접 소유하고 동일한 노동 시간과 강도로 노동하며 상품을 교환한다고 전제한다. 이 경우 두 노동자는 일일 노동으로 생산물에 동일한 새로운 가치를 부가하지만, 각 생산물의 총가치는 이미 투하된 생산 수단의 가치량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생산 수단의 가치는 자본주의적 경제 범주의 불변 자본에 대응하며, 새로 부가된 가치 중 노동자의 생활 수단에 해당하는 부분은 가변 자본에, 그 나머지 부분은 잉여 가치에 대응한다. 다만 이 전제 하에서는 잉여 가치 역시 노동자 자신의 몫으로 귀속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노동자는 상품 교환에 따라 지출된 노동량에 비례하는 가치를 온전히 실현하며, 투하된 생산 수단의 가치 또한 결손 없이 회수한다.
두 노동자는 투입한 ‘불변’ 자본의 가치 부분을 보충하고 남은 잉여분을 매개로 동등한 가치를 획득한다. 이때 잉여 가치량과 생산 수단 가치 사이의 비율, 곧 자본주의적 이윤율에 대응하는 수치는 두 부문 간에 격차가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불균등은 교환 과정에서 각자의 생산 수단 가치를 온전히 회수한다는 사실로 인해 완전히 상쇄되므로, 논리적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
‘따라서 상품이 가치 또는 그에 근접한 수준에서 교환되는 단계는, 일정 수준의 자본주의적 발전을 전제로 하는 생산 가격에 따른 교환보다 훨씬 초기적 발전 단계에 해당한다. 가격과 그 운동을 규제하는 가치 법칙의 구체적 기제를 차치하더라도, 가치가 이론적·역사적으로 생산 가격에 선행한다는 주장은 전적으로 정당하다. 이러한 논리는 생산 수단을 직접 소유한 노동자의 경제 형태에 적용되는데, 이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자기 노동에 기초한 소토지 소유 농민과 수공업자에게서 일관되게 확인된다. 이는 생산물의 상품화가 동일 공동체 내부가 아닌 서로 다른 공동체 간의 교환으로부터 발생한다는 기존의 견해와도 합치한다. 나아가 이 원리는 원시 상태뿐만 아니라 노예제와 농노제에 기반한 후기 사회, 그리고 길드 체제의 수공업 생산 방식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각 생산 부문에 투하된 생산 수단은 부문 간 이전이 수월하지 않기에, 이들 부문 간의 관계는 일정 수준까지 서로 다른 국가 간의 관계 또는 결합체 사이의 교환 관계와 상응하는 양상을 띠기 때문이다.’ (제Ⅲ권 제10장: 219-220).
마르크스가 『자본』 제Ⅲ권을 재검토하였다면 본 단락에 대해 분명 더욱 상세한 논의를 전개하였을 것이다. 현재의 서술은 해당 문제의 핵심적인 윤곽만을 제시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따라서 이하에서는 이 단락이 내포한 논리적 함의를 보다 정밀하게 고찰하고자 한다.
초기 사회의 생산물은 생산자 자신에게 소비되었으며, 생산자들은 자연 발생적인 본원적 공동체 내에 결속되어 있었다. 잉여 생산물이 외부인과 교환을 매개로 생산물이 상품으로 전환되는 과정은 그보다 후대의 사건이다. 이러한 교환은 초기에는 서로 다른 종족 공동체 사이에서 발생하였으나, 점차 공동체 내부로 침투하면서 공동체가 개별 가족 집단으로 해체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공동체 해체 이후에도 교환의 주체인 가구주는 여전히 노동 농민으로서의 위상을 유지한다. 이들은 가계 유지에 필요한 필수품의 대부분을 자신의 농토에서 가족 노동에 의거해 자급하며, 극히 일부분만을 잉여 생산물과의 교환에 따라 외부에서 수급한다. 당시의 가족 단위는 농업과 축산에 종사할 뿐 아니라, 원료를 최종 완성재로 가공하는 가내 공업까지 병행하며 포괄적인 생산 영역을 점유한다. 곡물을 제분하여 빵을 굽는 공정부터 아마와 양모의 방적·염색·직조, 가죽 가공, 가옥의 축조 및 수리, 각종 도구와 기구 제작, 나아가 철공과 금속 세공에 이르기까지 그 범주는 매우 넓다. 결과적으로 가족 또는 가족 집단은 생산과 소비가 결합한 기초적인 자급자족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19세기 초까지 독일의 농가에서 교환이나 매매를 거쳐 확보해야 했던 품목은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이는 주로 농민이 제조 공정을 숙지하고 있음에도 적절한 원료가 없거나, 직접 생산하는 것보다 전문 수공업자에게 구매하는 것이 품질과 비용 측면에서 경제적이었던 수공업 제품들에 국한되었다.
따라서 중세 농민은 자신이 교환으로 획득하는 물품의 생산에 투입되는 노동 시간을 매우 정밀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마을의 대장장이나 수레 제조공은 농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작업을 수행하였으며, 재봉사와 구두 제조공 역시 농가를 직접 방문하여 가문 소유의 원료로 의류와 신발을 제작하였다. 이처럼 생산 과정이 공개적으로 수행되는 조건에서 노동 시간은 교환 가치를 규정하는 가장 객관적인 기준이 된다.
농민과 판매자 모두 스스로가 노동자였으며, 교환되는 물품은 곧 자신의 노동 생산물이었다. 이들이 물품 생산을 위해 투입한 요소는 오직 노동뿐이다. 도구를 유지·관리하거나 원료를 생산 및 가공하는 과정 전반에서 자신의 노동력 이외에는 어떠한 자본적 지출도 발생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이 자신의 생산물을 타인의 생산물과 교환할 때, 각 물품에 투여된 노동 시간에 비례하여 등가 교환을 수행하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해당 생산물에 투여된 노동 시간은 교환 가치의 양적 규정을 위한 유일하고도 가장 적합한 척도였다. 그 이외의 척도는 존재하지 않았다. 농민과 수공업자가 자신의 10시간 노동 생산물을 타인의 1시간 노동 생산물과 교환하는 비합리적 선택을 감수할 가망은 희박하기 때문이다. 소농민적 자연 경제 시기 전반에 걸쳐 상품 교환은 각 상품에 체현된 노동량에 규정되는 법칙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경제 형태에 화폐가 침투하기 시작하면서, 마르크스가 정식화한 가치 법칙에 부합하는 준거는 더욱 명확해진다. 비록 고리대 자본의 간섭이나 재정적 수탈로 인해 가격이 가치에 평균적으로 수렴하기까지 시차가 발생하는 이탈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으나, 가치 법칙의 규정력 자체는 더욱 공고해졌다.
농민과 도시 수공업자 간의 생산물 교환 역시 동일한 원리가 적용된다. 초기 단계의 교환은 농민이 직접 팔고 사는 도시 장날에 상인의 매개 없이 이루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생산 주체들은 서로의 노동 조건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다. 수공업자 또한 채마밭과 과수원을 가꾸거나 때때로 일정 규모의 경작지 및 가축을 보유하는 등 여전히 농민적 요소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세의 생산자들은 적어도 매일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물품에 관한 한, 원료와 보조 재료 및 투여된 노동 시간 등 상대방의 생산비를 상당히 정확하게 산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노동량이 생산물 교환의 척도로서 기능할 때, 곡물이나 가축처럼 생산물 생산 기간이 장기적이고 노동 중단이 빈번하며 성과마저 불확실한 품목의 투입 노동량을 산정하는 일은 지극히 난해하다. 비록 그것이 간접적이고 상대적인 방식일지라도, 수치적 계산에 익숙하지 않은 초기 생산자들에게 이는 암중모색의 긴 과정이 강요되었다. 그 과정에서 시행착오와 오류의 누적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객관적 기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자신이 투하한 비용을 회수해야 한다는 현실적 필요성은 계산의 방향을 끊임없이 소거하고 정립하는 동력으로 작용하였다. 교환 품목의 가짓수가 제한적이고 생산 방식이 수 세기에 걸쳐 정체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노동량에 기초한 교환 체계가 안정적으로 확립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생산물의 상대적 가치가 단기간에 정밀하게 확정되었음은, 생산 주기가 길어 가치 산정이 어려운 가축이 초기 화폐 상품으로 널리 통용되었다는 사실에서 입증된다. 가축이 보편적 화폐 자격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다수 종족 사이에서 가축과 여타 상품 간의 교환 비율, 곧 가치가 이미 객관적으로 공인되고 확정되어 있어야만 했다. 가축 사육자와 그 교환 상대들은 자신이 투여한 노동 시간에 상응하는 등가를 보상받지 못할 경우 교환을 거부할 만큼 경제적 합리성을 갖추고 있었다. 상품 생산의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을수록, 생산자들은 자신이 지출한 노동 시간의 완전한 보전을 실현하기 위해 매우 집요하고 장구한 흥정 과정을 거치며 가치 확정의 정밀도를 유지한다.
노동 시간에 기초한 가치 결정에서 출발하여 상품 생산의 전 과정과 가치 법칙의 제반 양태가 관철되는 연관은 『자본』 제Ⅰ권 제1편의 분석과 같이 전개된다. 따라서 특히 노동만이 가치를 형성한다는 조건이 이 과정에서 명확히 도출된다. 이러한 조건들은 당사자들의 의식 여부와 상관없이 객관적 필연성으로 작용하며, 통상적 실천 속에 매개되어 있기에 엄밀한 이론적 규명에 의거해서만 비로소 포착될 수 있다. 이는 마르크스가 밝힌 바와 같이 상품 생산의 본성에서 기인하여 자연 법칙과도 같은 강제력을 지니고 관철된다.
금속 화폐로의 이행은 화폐 형태 발달에서 가장 결정적인 도약을 의미하나, 이로 인해 노동 시간에 기초한 가치 결정 원리는 상품 교환의 표면에서 은폐된다. 거래되는 상품의 종류가 다변화되고 원거리 무역에 수반하여 유입되는 품목이 증가함에 따라, 개별 상품의 생산에 투입된 노동 시간을 파악하는 것이 사실상 난망해지면서 화폐는 더욱 확고한 가치 척도로 기능하게 된다. 초기 화폐의 상당 부분이 외부에서 유입되었고, 국내에서 귀금속이 채취되는 경우라도 개별 생산자가 그 채취에 소요된 노동량을 산출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또한 가치를 화폐 단위로 계산하는 관습이 고착됨에 따라, 노동이 지니는 가치 척도적 속성에 대한 의식은 희미해졌으며, 결과적으로 일반적 관념 속에서 화폐는 절대적 가치를 체현하는 표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요컨대 마르크스의 가치 법칙은 단순 상품 생산의 전 시기에 걸쳐, 곧 자본주의적 생산 형태의 출현으로 인해 단순 상품 생산이 변형되기 전까지, 어떤 경제 법칙이 타당한 만큼이나 일반적인 타당성을 지닌다. 이 시기 동안 가격은 가치 법칙에 규정되는 가치를 지향하며, 이를 중심으로 운동한다. 따라서 단순 상품 생산이 온전히 발달할수록, 외적인 격렬한 동요가 없는 비교적 장기적인 관점에서 평균 가격은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의 편차만을 남긴 채 가치와 일치하게 된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의 가치 법칙은 생산물이 상품으로 전환되기 시작한 교환의 시초부터 서기 15세기에 이르기까지 일반적인 경제적 타당성을 지닌다. 그런데 상품 교환은 상품 교환의 역사가 문자 기록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이집트에서는 적어도 기원전 3,500년, 바빌론에서는 기원전 4,000년 내지 6,000년까지 소급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가치 법칙은 대략 5,000년에서 7,000년 동안 경제 체제를 지배해 온 셈이다.
따라서 우리는 수천 년의 세월 동안 직접적인 타당성을 유지해 온 가치 개념을 두고, 상품이 가치대로 판매된 적도 없고 판매될 수도 없기에 건전한 상식을 가진 경제학자라면 누구도 가치를 문제 삼지 않을 것이라 강변하는 로리아의 주장에는 실로 경탄을 금하기 어렵다!
이제까지 우리는 상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단순 상품 생산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으로의 전환 과정을 고찰함에 있어 상인의 개입을 필수적으로 전제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상인은 모든 사회적 조건이 세습을 토대로 고착된 것처럼 안정적이었던 단순 상품 생산 사회에서 유일하게 혁명적인 요소로 작용하였다. 당시 농민은 경작지뿐만 아니라 자유 소유농이나 예속적 소작농 또는 농노라는 사회적 신분 자체를 세습적으로 이어받았으며, 도시 수공업자 역시 자신의 생업과 길드 특권을 양도할 수 없는 자산으로 물려받았다.
또한 각 생산자는 자신에게 할당된 단골과 판매 시장은 물론, 세습적 가업 수행을 위해 어릴 때부터 체득한 숙련된 기예까지 대물림하며 정체된 질서를 유지하였다. 상인은 이러한 폐쇄적 사회에 출현하여 체제를 변혁하기 시작하였으나, 그는 의식적인 혁명가가 아니라 그 반대로 해당 사회의 피와 살로서, 곧 구조 내부에 깊이 뿌리박힌 유기적 구성원으로서 등장하였다.
중세의 상인은 결코 고립된 개인주의자가 아니었으며, 당대의 여타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공동체의 일원이었다. 농촌 사회를 지배하던 원시 공산주의 마르크 공동체에서 각 농민은 초기에는 균등한 질과 크기의 경작지 지분을 점유하였고, 마르크 공유지에 대해서도 동등한 권리를 행사하였다. 이후 마르크 공동체가 폐쇄적 구조로 고착되어 새로운 경작지 지분의 분배가 중단되자, 상속 등에 따른 경작지 지분의 세분화가 진행되었으며 이에 대응하여 공유지에 대한 권리 또한 비례적으로 분할되었다. 그럼에도 완전한 경작지 지분은 여전히 하나의 기본 단위로 기능하였고, 이에 따라 분할된 1/2, 1/4, 1/8의 경작지 지분에는 그에 상응하는 공유지 용익권이 부여되었다.
이후 등장한 모든 생산 공동체는 이러한 마르크 공동체의 조직 원리를 전형으로 삼았다. 특히 도시 길드는 마르크 공동체의 구성 원리를 토지가 아닌 수공업적 특권이라는 영역에 대입하여 구현한 것에 불과하였다. 조직 전체가 확보한 특권과 용익권에 모든 구성원이 균등하게 참여하는 운영 원리는 길드 조직의 핵심이었으며, 이는 1527년 엘베르펠트와 바르멘의 ‘면사 조합’ 특허장에서도 명확히 확인된다. (툰, 1879: 164 이하). 이러한 원리는 광업 조합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어, 각 광산 지분은 동등한 자격을 가졌으며 그에 따른 권리와 의무 역시 해당 공동체의 경작지 배분 방식과 동일한 논리로 분할되었다.
해외 무역을 주도한 상인 조합의 경우도 이와 동일한 원리로 작동하였다. 알렉산드리아나 콘스탄티노플 등지에 거류하며 독자적인 ‘폰다코’ (주택·여관·창고·전시장·판매장을 겸한 중앙 사무소)를 운영했던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각 ‘국민’은 외부 경쟁자와 고객에게 폐쇄적인 완전한 상인 조합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내부 협약으로 정한 가격에 따라 상품을 판매하였고, 공적 검사를 거쳐 보증·검인된 물품만을 취급하였으며, 현지 생산물에 대한 매입 가격 또한 공동으로 결정하였다. 노르웨이 베르겐의 ‘독일 다리’에 근거지를 둔 한자 동맹 상인들은 물론, 그들의 경쟁 상대였던 네덜란드와 영국 상인 역시 이러한 체제를 유지하였다. 협정 가격보다 낮게 판매하거나 높게 매입하는 구성원이 발생할 경우, 조합 자체의 직접적인 처벌은 차치하더라도 즉각적인 집단적 거래 거부 (보이코트)가 단행되었으며 이는 곧 해당 상인의 무조건적인 파멸을 의미하였다.
나아가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더욱 긴밀한 형태의 조합들도 출현하였다. 14-15세기 소아시아의 포캐아와 키오스섬의 명반석 광산을 장기간 지배했던 제노바 ‘마오나’가 대표적이며, 14세기 말부터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 사업을 전개하며 거류지를 건설한 거대 조직인 라벤스베르크 상사 또한 이에 해당한다. 또한 66,000두카트의 자본과 선박 세 척을 동원하여 1505-1506년 포르투갈의 인도 원정에 참가하여 150%-175%의 순이익을 거둔 아우크스부르크의 푸거, 벨저, 페린, 회히슈테터 등과 뉘른베르크의 히르쉬포겔 등 독일 회사들 (하이트, 『중세의 근동 무역사』, 1879: 524), 그리고 루터가 격렬히 비난했던 일련의 ‘독점’ 회사들 역시 이러한 폐쇄적이고 강력한 공동체적 유대를 바탕으로 운영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처음으로 이윤 및 이윤율의 문제와 마주하게 된다. 상인들의 활동은 모든 참여자의 이윤율을 균등화하려는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방향으로 전개된다. 근동의 베네치아 상인이나 북방의 한자 동맹 상인들은 누구나 자기 이웃 상인과 동일한 가격으로 상품을 매입하였고, 수송비 역시 동등하게 부담하였다. 또한 상품 판매 시에도 동일 ‘국민’에 속한 다른 상인들과 같은 가격을 적용받았으며, 귀로에 확보하는 화물 또한 동일한 조건으로 구매하였다. 결과적으로 이윤율은 모든 이에게 균등하게 보장되었다.
거대 상사에서 이윤이 출자된 자본 지분에 비례하여 분배되는 것은, 이는 마르크 공유지에서의 권리 행사가 공인된 경작지 지분에 비례하고 광산 이윤의 배분이 광산 지분에 비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명한 논리다. 따라서 가장 발달한 형태에서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최종 결과물 중 하나인 평균 이윤율은, 그 가장 단순한 형태에 있어서는 자본의 역사적 출발점 중 하나로 확인된다. 나아가 이는 원시 공산주의로부터 기원하는 마르크 공동체의 직접적 결과물로서 그 성격을 드러낸다.
이 최초의 이윤율은 필연적으로 매우 높은 수준에서 형성되었다. 사업은 만연한 해적 행위뿐 아니라 경쟁국들이 기회 있을 때마다 자행하는 온갖 강압적 수단으로 인해 극히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또한 판매 시장과 조건이 외국 통치자의 특허에 의거하고 있었으나, 이러한 특허는 수시로 파기되거나 취소되기 일쑤였다. 따라서 이윤 항목에는 필연적으로 높은 보험료가 포함될 수밖에 없었다. 아울러 자본의 회전은 완만하고 거래 체결 과정은 난해하였으나, 상업은 상황이 가장 우호적인 시기에 비록 그 지속 기간이 대개 짧았을지라도 독점 이윤을 수반하는 독점적 사업의 성격을 띠었다. 이윤율이 평균적으로 매우 높았다는 사실은 당시 통용되던 매우 높은 수준의 이자율로 증명되는데, 이 이자율은 예외 없이 상업 이윤의 일반적 수준보다는 낮은 지점에서 형성되었다.
조합적 공조에 기반하여 획득되는 이 이윤율은 모든 참여자에게 균등하게 분배되나, 오직 해당 조합 또는 ‘국민’ 내에서만 유효한 구속력를 가졌다. 이에 따라 베네치아, 제노바, 한자 동맹, 네덜란드 상인 등은 각 국민별로 독립적인 이윤율을 형성했으며, 초기에는 개별 판매 시장에 따라서도 서로 다른 특수한 이윤율 체계를 유지했다.
이러한 각종 조합별 이윤율의 균등화는 경쟁을 매개로 달성되었다. 초기에는 동일한 국민 내에서 서로 다른 시장 간의 이윤율이 먼저 균등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가령 알렉산드리아가 키프로스, 콘스탄티노플, 트레비존드보다 베네치아의 상품에 대해 높은 이윤율을 보장한다면, 베네치아 상인들은 알렉산드리아에 더 많은 자본을 투하하는 대신 기타 시장에서의 상업에서는 자본을 철수시키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이후 동일한 시장에 동일하거나 동종의 상품을 수출하는 각 국민 간에도 이윤율이 점차 균등화되는 과정이 뒤따랐다. 이 과정에서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한 특정 국민들은 몰락하여 시장의 무대에서 퇴장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러한 과정은 정치적 격변들로 인해 끊임없이 중단되었다. 일례로 근동 (레반트) 무역 전체는 몽골과 터키 세력의 침략으로 인해 쇠퇴하기 시작했으며, 1492년 이후 전개된 지리상·상업상의 대항해는 이러한 쇠퇴를 더욱 촉진하여 영구적인 상태로 고착시켰다.
이후 일어난 판매 영역의 급격한 확장과 이와 관련된 무역로의 변혁은 초기 상업 경영 방식에 본질적인 변화를 야기하지 않았다. 인도 및 아메리카와의 무역은 여전히 조합 체제 아래 수행되었으나, 이제 그 배후에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국가적 위세가 자리 잡았다. 근동 무역의 카탈로니아 상인들과 달리 아메리카 무역에서는 통합된 스페인이라는 거대 국가가 등장했으며, 영국과 프랑스가 그 뒤를 이었다.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조차 전성기의 상업국이었던 베네치아와 대등하거나 이를 능가하는 국력을 보유했다. 이러한 국가적 비호는 16-17세기 ‘모험 상인’들에게 강력한 보호막이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무장력을 수단으로 조합원을 보호하던 기존 조합의 역할은 점점 더 불필요해진 반면 그 유지 비용은 과도한 부담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개인의 수중에 축적된 부가 급격히 증대함에 따라, 개별 상인은 이전 시기 조합 전체가 분담하던 규모의 자본을 독자적으로 출자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기존의 조합이 존속하는 경우에도 이는 대체로 무장 상사의 형태로 전환되었으며, 본국의 보호와 주권 아래 새롭게 개척된 영토 전체를 정복하고 독점적으로 수탈하는 양상을 띠었다. 그러나 새로운 지역의 식민지 건설이 점차 국가 주도로 이루어짐에 따라, 조합 무역의 위상은 개별 상인의 활동 배후로 물러나 점차 자취를 감추었으며, 이에 따라 이윤율의 균등화는 결국 전적인 경쟁의 결과로서 관철되기에 이르렀다.
지금까지의 고찰은 오직 상업 자본의 이윤율에만 국한되었는데, 이는 당대 경제 구조에서 상업 자본과 고리대 자본만이 지배적이었으며 산업 자본은 태동기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당시 생산은 여전히 주로 자기 소유의 생산 수단을 보유한 개별 노동자들의 수중에 있었으므로, 이들의 노동이 자본을 위한 직접적인 잉여 가치를 창출하는 구조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생산물 일부가 제3자에게 무상으로 귀속되는 경우라 할지라도, 이는 자본의 증식이 아닌 봉건 영주에 대한 공납 형태를 띠었을 뿐이다. 따라서 상업 자본은 초기 단계에서 적어도 국내 생산물을 매입하는 해외 구매자나 외국 생산물을 구매하는 국내 구매자 사이의 유통 차익에 기반하여 이윤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말기, 특히 이탈리아에서 근동 무역이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국면은 전환되었다. 격화되는 외국의 경쟁과 판로 확보의 난항 속에서, 수출 상품을 생산하는 수공업자들은 비로소 자신의 생산물을 수출 상인에게 가치 이하의 가격으로 매각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개별 생산자 간의 국내 소매 거래에서는 상품이 평균적으로 그 가치에 따라 판매되나, 세계 무역에서는 상술한 제반 사정으로 인해 대체로 가치와 이탈한 가격 형성이 이루어지는 현상을 목격하게 된다. 이는 세계 무역과 도매 거래에서는 생산 가격이 지배적인 규정력을 행사하는 반면, 도시의 소매 거래에서는 이와 전혀 다른 이윤율이 가격 형성을 주도하는 오늘날의 구조와는 정반대의 구도를 보여준다. 일례로 쇠고기 유통 과정을 살펴보면, 런던의 도매상에서 최종 실수요자에게 유통되는 과정의 가격 마진이 시카고에서 런던의 도매상에 이르기까지 발생하는 가격 인상분 (운임 포함)보다 더욱 크게 나타난다.
가격 형성의 이러한 변혁을 추동한 핵심 동력은 산업 자본이었다. 이미 중세 시기에 해운업, 광업, 섬유 공업 분야에서는 산업 자본의 씨앗이 발아되고 있었다. 이탈리아와 한자 동맹의 해양국들이 운영하던 대규모의 해운업은 임금 노동자의 존재를 전제로 하였으며, 그 당시의 갤리선 또한 임금 노동자나 노예의 노동력 없이는 운용이 불가하였다. 비록 이들의 임금 관계가 이윤 배분형 조합 형태로 인해 일시적으로 은폐되었을지라도, 실질적인 고용 구조는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초기 노동자들의 자발적 조합이었던 광산 회사들 역시 점차 임금 노동에 기반한 채광 중심의 주식 회사 체제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섬유 공업 분야에서는 상인이 소규모 직물 장인들에게 원료인 실을 공급하고 고정 임금을 지불하며 자신의 계산 아래 상품을 가공하게 하는 방식이 도입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상인은 단순한 중개인에서 벗어나 이른바 ‘선대 상인’으로 변모하였으며, 생산자들을 자신의 자본에 직접적으로 복속시키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자본주의적 잉여 가치 형성의 결정적인 단서를 포착하게 된다. 광산 회사는 배타적인 독점 단체로서의 특수성을 지니기에 논의에서 제외하더라도, 해운업의 경우 이윤이 최소한 통상적인 육상 운송 이윤에 선박 보험료와 마멸 비용 등을 합산한 수준과 일치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섬유업 분야의 선대 상인은 어떠했는가. 그는 자본가의 계산에 의거하여 직접 생산된 상품을, 곧 동종 상품과 경쟁할 상품을 시장에 내놓는 최초의 인물이었다. 이 지점에서 상업 자본이 생산 과정에 직접 개입하며 발생하는 가치 증식의 기제는 더욱 명확해진다.
상업 자본의 이윤율은 이미 주어진 사실로서 존재하였으며, 적어도 각 지방에서는 일정한 평균치로 이미 균등화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상인이 선대업자의 기능까지 담당하게 되었는가. 이유는 명백하다. 판매 가격을 타 상인과 동등하게 유지하면서도 더 큰 이윤을 획득할 수 있다는 전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상인은 소규모 장인을 자신에게 예속함으로 인해, 생산자가 단순히 완성품만을 판매해야 한다는 전통적 생산의 제한을 타파하였다. 상인은 노동력을 구매하였고, 이 노동력은 당분간 생산 도구는 소유했으나 이미 원료 소유권은 상실한 상태였다. 따라서 선대 상인은 직조공에게 규칙적인 고용을 보장하는 대가로 그의 임금을 인하하여, 수행된 노동 시간의 일부를 지불하지 않았으며 결과적으로 기존의 상업 이윤에 더해 잉여 가치까지 점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를 위해 상인은 실 등을 구매하여 직물이 완성될 때까지 직조공의 수중에 맡겨두어야 하므로, 추가 자본을 투하해야 한다. 이전에는 상인은 이 직물을 매입하는 시점에 비로소 그 가격 전체를 지불하면 되었으나, 선대 상인은 그 이전 단계에서 이미 추가 자본을 지출한다. 이는 직조공이 채무 노예 상태에 빠진 뒤에야 비로소 새로운 생산 조건에 굴복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을 배제하더라도 경제적 계산은 다음과 같은 형태를 취한다.
우리의 상인이 30,000의 자본으로 수출업을 경영하며, 그중 10,000은 국내 상품 구매에 사용되고 20,000은 해외 시장 판매에 투하한다고 상정한다. 이 자본이 2년에 1회 회전할 경우 연간 회전액은 15,000이 된다. 이때 상인이 자기 부담으로 직물을 제조하는 선대 상인으로 전환하고자 한다면 추가 자본 투하가 불가피하다. 그렇다면 그는 얼마만큼의 자본을 추가해야 하는가. 그가 판매하는 종류의 직물 1필의 생산 시간을 평균 2개월로 상정하고, 또한 그가 모든 거래를 현금으로 집행해야 한다고 전제할 때, 상인은 직조공에게 2개월분 실을 공급할 수 있는 충분한 자본을 추가로 확보해야 한다.
연간 회전액이 15,000인 상인은 2개월마다 2,500 상당의 직물을 구매하는 셈이다. 이 중 실의 가치가 2,000이고 직조공의 임금이 500이라면, 상인은 생산을 위해 2,000의 추가 자본을 필요로 한다. 이때 이러한 새로운 생산 방식 하에서 추출하는 잉여 가치가 직물 가치의 5%에 불과하다고 상정하면, 잉여 가치율은 25%로 매우 낮은 수준이 된다 (2,000c + 500v + 125s; s´ = 125/500 = 25%; 이윤율 p´ = 125/2,500 = 5%). 이 경우 상인은 연간 회전액 15,000에 대하여 750의 특별 이윤 (= 125 × 15,000/2,500)을 얻게 되며, 결과적으로 투하된 추가 자본을 2 2/3년 (2,000/750)만에 회수할 수 있다.
그러나 상인은 자신의 판매와 회전을 촉진하여 동일한 자본으로 더 짧은 시간에 이윤을 얻거나, 또는 동일한 시간에 더 큰 이윤을 확보하고자 잉여 가치의 일부를 구매자에게 이전하여 경쟁자보다 저렴한 가격에 상품을 판매하려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경쟁자들 또한 점차 선대 상인으로 전환하게 되며, 결국 참여자들의 특별 이윤 (초과 이윤)은 증가한 자본에 대한 평균 이윤 또는 그보다 더 낮은 수준으로 수렴하게 된다. 이에 따라 이윤율의 균등화가 다시금 이루어지나, 이는 국내에서 창출된 잉여 가치의 일부가 해외 구매자에게 이전된 결과이기에 이윤율은 이전과는 다른 수준에서 형성된다.
자본이 산업을 포섭하는 과정에서 다음 단계는 공장제 수공업 (매뉴팩처)의 도입으로 구체화된다. 17-18세기에 일반적이었던 수출 상인을 겸한 공장제 수공업 (매뉴팩처) 소유주는 기존 수공업자보다 저렴한 생산 비용을 확보하여 경쟁 우위를 점한다. 이러한 경향은 독일의 경우 1850년대까지 폭넓게 나타났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여기서 앞서 언급한 것과 동일한 논리적 과정이 반복되는데, 곧 공장제 수공업 (매뉴팩처) 자본가가 획득한 초과 잉여 가치는 그 자신이나 이윤을 분배받는 수출 상인이 경쟁자보다 낮은 가격으로 상품을 판매할 수 있는 물적 토대가 된다. 이러한 상태는 새로운 생산 방식인 공장제 수공업 (매뉴팩처)이 보편화되어 다시금 균등화가 이루어질 때까지 지속된다. 이미 확립된 지배적 상업 이윤율은 비록 국지적인 균등화에도, 여전히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 같은 강제력을 발휘하며, 산업 부문에서 발생하는 초과 잉여 가치를 그 규격에 맞추어 무자비하게 삭감한다.
공장제 수공업 (매뉴팩처)이 생산물의 가격 저감에 기초하여 번성했다면, 대공업은 훨씬 더 압도적이었다. 대공업은 기존 생산 방식의 끊임없는 파괴를 동력 삼아 상품 생산비를 더욱 감축시키며 이전의 모든 생산 방식을 무자비하게 파멸시킨다. 대공업은 자본을 위해 국내 시장을 최종적으로 정복했으며, 자급자족적인 농민 가족의 소상품 생산과 현물 경제를 종식시켰다. 또한 소상품 생산자들 사이의 직접적 교환을 제거하여 국민 전체를 자본에 예속되게 만들었다.
대공업은 상업과 공업의 제반 분야에 걸친 이윤율을 하나의 일반적 이윤율로 균등화하며, 이러한 기제로 공업에 합당한 지배적 위상을 확립한다. 이는 대공업이 지금까지 서로 다른 부문 간의 자본 이동을 가로막던 장애물을 대부분 제거하였기에 필연적인 결과다. 이에 따라 교환의 전 영역에서 가치의 생산 가격으로의 전환이 비로소 완성된다. 이러한 전환은 개별 당사자들의 의도나 의식과는 무관하게 객관적인 법칙에 따라 관철된다.
경쟁이 일반적 수준을 상회하는 이윤을 평균치로 하락시키며, 최초 취득자인 산업가로부터 초과 잉여 가치를 회수한다는 사실은 이론적으로는 하등의 난점이 없다. 그러나 현실적인 측면에서는 중대한 곤란이 발생한다. 초과 잉여 가치를 창출하는 생산 분야, 곧 불변 자본에 비해 가변 자본의 비중이 커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낮은 분야들은 그 성질상 농업과 같이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에 가장 늦게, 그리고 가장 불완전하게 포섭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반면, 자본 구성이 높은 부문에서 상품 가치를 상회하는 수준으로 생산 가격을 설정하는 과정은 이론적으로는 난해해 보일 수 있으나, 현실에서는 매우 신속하고 원활하게 전개된다. 이러한 가격 상향은 해당 부문의 생산물에 내재된 불충분한 잉여 가치를 평균 이윤율 수준으로 보전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이 범주의 상품들이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에 따라 생산되어 자본주의적 상업에 진입하는 순간, 동종의 다른 상품들과 경쟁하게 된다. 후자, 곧 자본주의 이전의 방식으로 생산된 상품들은 가격 경쟁력이 낮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자는 초과 잉여 가치의 일부를 양보하더라도, 당시 지배적인 일반 이윤율을 확보하는 데 무리가 없다. 여기서의 일반 이윤율은 산업 이윤율이 확립되기 훨씬 이전부터 이미 상업 자본에 기반하여 형성되어 있었기에, 초기에는 잉여 가치와 직접적인 상관관계를 맺지 않은 채 기능한다.
Ⅱ. 증권 거래소
1. 『자본』 제Ⅲ권 제5편, 특히 제27장은 자본주의적 생산 일반에서 증권 거래소가 점유하는 (지위)를 명확히 규명한다. 그러나 원고가 집필된 1865년 이래로 중대한 구조적 변화가 발생했는데, 이는 오늘날 증권 거래소에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대하고도 지속적으로 증대하는 기능을 부여했다. 이러한 변화의 진전은 공업과 농업을 아우르는 생산 전 영역은 물론, 교통·통신 수단과 교환 기능을 포함한 상업 전체를 증권 거래업자의 수중으로 집중시키는 경향을 내포한다. 결과적으로 증권 거래소는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 그 자체를 가장 강력하게 대변하는 기구로 격상된다.
2. 1865년 당시 증권 거래소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여전히 부차적인 위상에 머물러 있었다. 국채가 거래의 근간을 형성했으나 그 절대적 규모는 미미했으며, 유럽 대륙이나 아메리카와 달리 영국 내 주식 은행은 귀족적 개인 은행을 이제 막 흡수하기 시작한 단계로서 수적 중요성 또한 상대적으로 희소했다. 철도주 역시 현재의 시장 점유 수준에 비하면 미약한 상태였다. 특히 직접 생산에 종사하는 주식 회사 형태의 기업은 극히 드물었는데, 이는 ‘주인의 감독’이 필수적이라는 전근대적 독단이 여전히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러한 형태의 기업은 오히려 자본 축적이 지체되었던 독일, 오스트리아, 아메리카 등에서 은행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제한적으로 경영되고 있었을 뿐이다.
따라서 당시의 증권 거래소는 자본가들이 상호 간에 축적된 자본을 탈취하는 각축장에 불과했다. 노동자들에게 증권 거래소는 자본주의 경제가 현시하는 전형적인 퇴폐상의 새로운 증거일 뿐이었으며, 나아가 칼뱅주의 교의인 ‘예정설’을 실증하는 무대로 간주되었다. 곧, 세속에서의 은총과 징벌, 풍요에 따른 탐닉과 지배력, 그리고 빈곤에 기인한 결핍과 예속이 오로지 자의성이라는 형태를 빌린 신성한 결정의 발현으로 확증된다는 점을 입증하는 영역으로 각인되었을 뿐이다.
3. 그러나 오늘날의 사정은 판이하다. 1866년 공황 이후 축적은 가속화된 반면, 영국과 같은 공업국에서 생산의 확대는 축적의 증대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이에 따라 개별 자본가의 축적 자본 전체를 본래의 사업 확장에 전적으로 재투입하는 것이 한계에 봉착했는데, 이러한 현상은 이미 1845년 영국 면공업과 철도 투기 과정에서 가시화된 바 있다. 축적의 진전과 더불어 금리 생활자 층이 형성되었으며, 사업상의 상시적인 긴장에서 탈피하여 향락을 추구하거나 기업 중역으로서 명목상의 직무만을 수행하려는 인구 또한 증가하였다. 나아가 이처럼 부유하는 방대한 화폐 자본의 투자를 용이하게 하려고, 유한 책임 법인이라는 새로운 법적 형태가 도처에서 출현하였으며, 종전의 무제한 변제 의무에 기반했던 주주의 부담 한도 또한 대폭 경감되기에 이르렀다. (1890년 독일의 주식 회사들의 경우, 주식 공모 비율이 40%에 달했다!)
4. 이에 따라 산업의 주식 회사 법인화는 특정 분야에서 시작되어 점차 전 산업 영역으로 확산하며, 각 부문은 순차적으로 이러한 역사적 필연성을 마주한다. 가장 먼저 막대한 고정 자본 투하가 요구되는 철강업과 광업이 주식 제도로 이행하였으며, 이어 화학 공업과 기계 제작 공업이 그 뒤를 이었다. 섬유 공업의 경우 유럽 대륙 전반에서 이러한 전환이 나타났으나, 영국의 경우 랭커셔의 올덤 (방적업)이나 번리 (직물업) 등 일부 지역에서만 국한되는 양상을 보였다. (재봉업 조합은 주식 회사 법인화의 예비 단계에 불과하여 차후 공황이 닥치면 다시 개별 자본가의 수중으로 회귀하는 가변성을 보인다). 이후 양조 공업 분야에서도 기네스, 바스, 올소프와 같은 기업들에 대해 영국 자본가 주도의 기업 매수가 진행되며 주식 회사로의 전환이 가속화되었다. 나아가 유나이티드 알칼리 등과 같이 공동 경영 체제를 갖춘 거대 기업인 트러스트가 출현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일반적인 개인 기업은 독립된 경제 단위로서의 위상을 상실하고, 오직 ‘주식 회사로의 전환’을 위해 규모를 확장하는 예비 단계로서의 성격만을 지니게 되었다.
상업 부문 역시 동일한 경로를 밟고 있다. 리프스, 파슨즈, 몰리스, 모리슨, 딜런 등과 같은 주요 상사들은 이미 주식 회사로 전환되었으며, 이러한 추세는 소매업 분야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는 단순히 ‘연쇄 상점 (연쇄점)’이라는 조합 형태에 국한되지 않고 유통 부문 전반으로 확산하는 양상이다.
은행을 비롯한 신용 기관에서도 이러한 변화는 예외가 아니며, 심지어 보수적인 영국 금융권조차 예외는 아니다. 새롭게 설립되는 무수한 금융 기관들은 모두 유한 책임 주식 회사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글린과 같은 유서 깊은 은행들마저 7명의 개인 주주를 둔 유한 책임 회사로 체제를 전환하기에 이르렀다.
5. 농업 영역 또한 예외가 아니다. 은행 자본이 거대하게 확장됨에 따라, 특히 독일에서는 각종 관료주의적 명칭 아래 은행이 점차 저당권의 실질적 보유자로 부상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은행 주식의 유통과 함께 토지의 궁극적 소유권이 증권 거래소로 이전되는 현상이 가속화되며, 이는 토지가 채권자의 수중으로 귀속될수록 더욱 명확해진다. 여기에 대평원 경작에 기반한 농업 혁명이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추세가 지속된다면 영국과 프랑스의 토지 역시 증권 거래소의 지배하에 놓이는 시기가 도래한다.
6. 아울러 해외 투자 전반이 주식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 영국의 사례에서 여실히 드러나는 바와 같이, 남북 아메리카의 철도와 금광 등 대규모 자본이 투하되는 사업들은 모두 주식 상장 목록에 이름을 올리며 자본의 주식 자본화 (증권화) 추세를 뒷받침한다.
7. 식민지 팽창 또한 간과할 수 없는 지점이다. 오늘날 식민지는 오로지 증권 거래소의 부속물로서 운용된다. 실제로 유럽 열강은 증권 거래소의 이익을 관철하고자 수년 전 아프리카 분할을 감행하였으며, 프랑스는 튀니지와 통킹을 정복하기에 이르렀다. 아프리카 대륙의 주요 영토들은 니제르, 남아프리카, 독일령 서남아프리카, 동아프리카의 사례 등과 같이 회사들에 직접 임대되었고, 마쇼너랜드와 나탈은 세실 로즈의 손을 거쳐 증권 거래소의 전유물로 포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