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2. 25.
노동 일지
삭제된 기록
언젠가 너무나 분해서 낙서를 하던 일기장을 모두 찢어 버린 적이 있다. 몇 권의 공책은 더 이상 필요 없었다. 기록은 모두 지우면 그만이었다. 이번 연말에는 처음 출근을 벗삼던 노동 현장이 생각난다. 지방 대학에서 여유 자금을 위한 임금 노동을 헤매다가 찾은 어느 물류 센터였다. 그날은 지금처럼 쌀쌀한 9월이었다. 긴장을 안으며 간단한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듣고는 곧바로 짐을 나르러 다녔다. 곧바로 배달원 전용 수송 차량에 싣는 작업이었다. 주어진 시간 내에 차곡히 짐을 테트리스처럼 쌓았을 때, 어느 관리자는 도대체 서툰 몸으로 비오듯 쏟아지는 땀을 보면서 물 하나 건내는 법이 없었다. 당시에는 8시간 이상의 밤샘도 거뜬히 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이 새벽 노동은 80년대 공장 제조 사례와 무관하지 않았다. 노동의 집중은 곧 정신 단결과 같았다. 그 일로 인해 등이 살짝 굽었다. 일주일 중에 5일 연속으로 그곳으로 향했다. 기간제가 아닌 시간제로 노동한 적이 더 많았다. 임금의 산정 방식도 일한 만큼 수령했기에, 노동의 강도 대비 보상은 소비에 비하면 늘 부족하기 마련이었다.
마음을 다치는 일은 현장에서는 부차적인 일이 된다. 밀려오는 화물이 산만하게 쌓여있던 시절에는 그 짐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를 정도로 빠르게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이 끝나고 나면 몇 번 잠을 설친 적이 있어, 방학 기간 중에는 시간제로 5일 동안 밤낮으로 2개의 일을 병행하던 동료의 비슷한 사연을 듣곤 했다. 단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임금의 산정 방식 또한 차분하게 고려할 시간마저 없었고, 주어진 조건에 해당하면 무조건 생계가 먼저였다. 지방 대학의 등록금을 감당하기 이전에 겨우 학점을 맞추어 장학금을 탈 수 있었다. 그렇게 짐 싣는 작업을 그만두고, 다음은 동료의 이륜차를 몰 기회가 생겨 잠시 배달일을 하였다. 때가 되었을 무렵에는 군대에 입대해야 했다. 총구 요대 사용과 행군 훈련 중 무거운 배낭으로 인해 왼쪽 어깨가 기울어졌다. 보직 특성상 장시간 서 있어야 했기 때문에, 나중에는 최소한 그곳에 남아 있던 부조리만큼은 제거하고자 했다. 온갖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감추는 일은 사회 현장에서 처음 배우게 되었다.
비밀리에, 노동 현장에 근무하면서 가족조차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일한 적을 따로 밝힌 적은 없었다. 몇 번은 경미한 손목 부상이나 장기간 다리 근육 풀림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마른 체형이었을 때는 지금 체형보다 더 큰 짐을 옮겨야 했기에 마땅히 도움을 구할 수 없어 큰 위협이 되었다. 영상 속의 현장 시청만으로는 큰 도움 역시 주지 못했다. 그러다가 최근 오랜만에 그곳을 다시 방문할 기회가 생겼다. 모든 사업을 처분했기에 그곳의 부름을 받은 듯이 자원했다. 겨우 1일 체험에 불과한 현장 방문으로 다른 보직을 심사 받았다. 면접 이후의 심사 여부는 통과였지만, 그동안 무리했음을 실감하게 된 순간이었다. 가족이라면 그러한 일에 대해서는 말로만 들었기 때문에 아무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루를 일제히 마치고 돌아오는 사람들의 퇴근 모습이 여전히 보상에 대한 다음 준비와 어두운 모습으로만 읽혔다. 그래서 더는 할 수 없다고 드디어 판단을 내렸다. 그제서야 다른 일을 알아보고 싶어졌다.
비정규직이나 기간제의 수습 기간에 대한 정당성을 논하기 이전에, 현장에서 배운 점이라면 오히려 무질서함과 때때로 안면조차 없는 사람들의 반복된 육체 낭비였다. 덕분에, 노조 활동을 관두게 되었고, 가입 여부를 묻거나 다시 신청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정당 활동은 더 이상 노동자를 대변할 수 없다는 일념 아래로 모아졌다. 노동과 관련된 법적 · 형식적 노동 법률을 권하기 이전에, 그 현장의 ‘개선’이 결국 ‘수용’되어 초과 근무를 유도하기에, 노동에 대한 욕심 역시 더욱 생기기 마련이다. 두 번째는 공사 현장이었다. 건축 기사에게 연장을 구분하지 못해 들은 아주 쓰디쓴 고함과 초보 노동자의 기본적인 시멘트 벽돌 운반 및 삽일은 든든한 아파트의 견고물이 되었다. 부실한 철판 위로 올라갔을 때, 흔들거리는 운반 지게를 등에 멜 때면, 이것이 감내해야 할 의무라 여겼다. 당연하게도 더욱 무게를 늘렸을 때는 연신 감사만 짤막하게 전달했다. 일찍부터 쌀쌀한 새벽 대기로 인해 긴장된 몸을 풀 시간마저 제한되어 곧바로 현장으로 달려가야만 했던, 그 고정된 형식이 임금보다 중요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을까. 다만 남은 사업을 유지해야 한다는 명목만이 그 노동을 정당화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생애의 봄은 아니, 스물은 그렇게 지나갔다. 서툰 사람에게는 내용조차 빈 종이에 불과하다면, 지금도 현장의 노동이 과연 나아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일이 똑같이 일어났다면 그 누구도 함부로 말할 수 없다. 가까운 노동자이자 동료가 내 옆에서 의문의 사고를 당해 익명으로 장례식을 방문하여 부조를 했을 때조차, 그것이 주체와 운동이라는 사상보다 더 중요한 태도의 문제로 다가왔다.
현장의 노동 앞에서는 누구나 경직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위안을 보내더라도, 그 일은 자신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사무실에서 뭉뚱그려진 태도가 철학으로 보이더라도, 어떤 일은 더 이상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그 다짐마저, 때로는 계속해서 노동을 ‘재생산’할 수 있게 하는 동력이 되어 보람으로 그치고 만다. 그래서 쉬고 싶다는 말을 자주 입에 담았다. 그동안 남들처럼 먹고, 구경하고, 만난 모두가 소멸되거나 소실된 채 부족한 일로만 받아들였다. 몸이 쓰러지면 각오가 온 몸을 지배했지만, 우스꽝스러운 신세보다 못한 부족한 경력과 실력은 말 그대로, 어디 명함도 못 내미는 일이 되어 지금의 내부 작업을 구성하고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묻는다면, 이곳에 태어난 것을 두고 평생 저주하면서 사느니, 내일을 준비하며 그나마 생존할 수 있다는 도달의 순간이나 안도 밖에는 남는 것이 없어진다. 적어도, 가난한 마음의 일부를 이루었다면, 그것이 찢어진 노동 일지의 마지막 기록이었다. 그리고 과거를 묻어버렸다.
위탁 업체와 말단 사원
그녀를 알게 된 건, 정규직 사원 때의 일이었다. 사회 초년생이었기 때문에 여러 부서를 정처없이 이동하고 다녔다. 사업의 소유주라는 사실 역시 밝힌 적은 없었다. 예전에는 초년생이었기에 몇 번의 연상 분들과 어울릴 수 있는 기회가 잦았다. 연상 분들은 특유의 성숙한 생각을 지니고 있었지만, 불안정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의존하며 기대게 되었다. 잠깐의 연락들이 모여서 사회적 관계의 진전은 그렇게 썩 괜찮은 결말을 맞이하지는 않았다. 예전에는 모든 일들이 전부 내 탓이라고만 여겼다. 의견을 먼저 숨겨야만 했던 이유를 적절히 말해야 하는 순간에, 때를 놓치게 되거나 사회적 관계에 대한 의미 부여를 많이 했기 때문에 사람에 대한 의심은 깊어졌다.
사실은 몇 번 연락한 분들은 대체로 호의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늘 비정규직과 계약직을 전전했기 때문에 정규직 사원이라는 존재에 대한 시기 역시 없지는 않았다. 물론 여유 자금이 있어야 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어울릴 수 있지만, 지출되는 비용과 경제적 관념 역시 부족했으므로, 의식적인 높은 학구열이 때로는 과도한 열정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렇게 정규직 사원이 되면 지루하거나 무의미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사람은 사회적 관계를 맺으면서 새로운 의미가 예고 없이 문을 두드린다. 정규직 사원을 처음 지원했을 때는 늘 예정에 없던 현장을 먼저 방문했다. 그때 합격 통보를 받았고, 고정적이고, 새로운 일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으로 지원했다. 그러나 처음 고용된 정규직 사원이란 위탁 업무였고, 업무 분담의 일정한 숙달된 능력을 요구했기에 그 한계로 인해 당시에도 쉽게 응해주지 않았다. 정규직 사원들은 대체로 친절로 무장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퇴사에 대한 결정 역시 숨기게 된다. 더 높은 사회적 지위의 자리를 위한 무한 경쟁처럼 온갖 사원들 간의 마찰 역시 빚어지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대표를 중심으로 둘러싼 사회적 지위 경쟁이 일어났지만, 대표 사업주가 고용한 정직원 말단 사원이 실은 젊은 소사업주라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그곳에서 만난 젊은 동료들은 같은 초년생이라기에는 가족을 잃었거나 보살핌이 필요한 존재들이었다. 적어도 모두 미숙했기에, 초기 사업은 사원이라 볼 수 없는 형태의 직장을 다녔다. 관광지라는 이점을 지닌 곳이더라도, 주위의 경관을 위해 또 다른 자연 경관에는 해악을 끼치는 일들이 자주 일어났다. 그제야 그곳은 오래 다닐 수 없는 직장임을 이해하게 되었다. 위탁 업체에 고용된 이들은 많이 일하고, 기간제처럼 짧은 기간에 퇴사를 했다. 그러나 사회적 초년생이 안정적인 직장을 바랬던 일이 욕심이었을까. 지난 날에 비하면 1년을 넘기지 못한 그 하루가 더욱 예민한 신경을 긁고 말았다. 짙은 가난의 냄새가 배이고, 육체의 피로도가 증가했다.
퇴사를 결정하기 몇 달 전에 일이었다. 가끔 주위를 배회하던 온화한 동료가 종종 보였다. 오래 근무하지는 않았지만, 퇴사를 결정한 날에 마지막 퇴근 준비를 했을 때, 그녀가 먼저 말을 건냈다. 자신의 출퇴근 자가용을 태워줄 수 있느냐는 말이었다. 순간 멍해졌다. 곡예 운전까지는 아니었지만 질주의 본능을 은근히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딘가로 바래다준다는 일 역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사정이 생겨서 곧바로 그렇다고 수긍할 수도 없었다. 우연히 같은 정류장에서 마주치는 일이 잦았고, 같은 대학을 다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비슷한 무렵이었다. 그것은 계기였다. 사내에서 피어난 관계가 조금씩 깊어지고 있었다.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장담했지만, 대중 교통이 끊긴 상태에서도 같은 시간에 출근을 해야 하거나 사업장의 거리가 멀어 이동 간 불편을 초래하는 일이 잦았다. 어떤 식으로든 사정상 퇴사를 결정하고, 사업까지 마무리해야 했지만, 상경을 하고 싶어도 가족이 묶여 있는 한 그럴 수 없었다. 한 겨울에는 높은 산 중턱에 거주지가 있었기 때문에 올라가는 도중에 만나는 일도 있었다. 목소리를 높여 반갑게 맞이하기도 했다. 그렇게 자가용에 태우면서 동네 영화관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몇 개의 단편극을 시청했고, 그분은 처음 방문한 집에서 읽고 있던 책에 대한 흥미를 보였다. 서서히 알아가면서 그녀의 존재가 보였다. 그 당시 금발 색상의 단발을 하고, 차분한 여우처럼 예리한 눈매가 돋보였다. 가까이에서는 솜사탕 냄새처럼 달콤한 냄새였다. 비슷한 연하와 사회적 관계를 맺는 일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출판사를 위한 번역 작업을 했을 때도 응원을 해주거나, 사업장에 직접 방문해 활력 음료를 들고 온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곳을 일찍 정리하고, 상경하기를 내심 바라는 눈치였다.
사회성을 미리 갖추었기 때문이었을까. 그전에는 직접 고른 일기장을 선물했지만, 점점 경제적 여유가 잃어감에 따라 선을 그어야만 했던 시기였기에, 더 깊어졌다면 아마 나조차 저세상 사람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사회적 관계를 맺기에는 너무나 미숙했다. 시간이 지나면 결정을 해야 했다. 결국, 통보는 문자 연락이었고, 그것은 최악이었다. 그 최악의 일을 나중에서야 부재로 이해하게 되었다. 밤낮으로 걸으면서 수행했을 때조차 그 최악을 붙잡으면서 버텼다. 나중에서야 자연스럽게 떠나게 됐다. 이처럼, 사회적 관계가 깊어지는 일은 당시에도 어려운 일이었다. 드디어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는 기대가 점점 시들해지고, 충족될 수 없는 갈증으로 남았을 때, 비로소 자유를 되찾았다. 돌이킬 수 없는 발걸음처럼, 초년생의 묵은 때를 씻어내고 있었다.
집안 내력
역시 학문의 전당이란 그 명예에 비하면 초라한 것이다. 높은 지위에 올라선 권위가 오랫동안 변치 않을 수 있다면 그것은 희망 사항일 뿐이니 말이다. 그러나 학문의 전당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법이다. 사실 유전이라든가 태생과는 별개의 문제일 뿐이다. 정치적 성향 역시 고정되어 있다는 오래된 사고 역시 편향된 관념의 시각을 기르면서 학자들 간의 조정된 일부 견해임을 보여줄 수 있지만, 결국 핵심은 얼마나 오랫동안 문제를 연구하면서 이를 인내할 수 있는 자질을 기르는지이다. 따라서 기존의 고찰된 문제는 언제나 무너질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만다.
우수한 성적을 유지한다면 자신에게 좋은 일일 수 있지만, 그로 인해 누구나 성공한 인생을 갖출 수 있는 것도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노력과 성실만으로는 상당한 지위에 오르기란 대단히 어렵다. 이처럼, 성공과 실패란 단지 삶의 전반으로 볼 때는 비좁은 시각의 일부일 뿐이다. 우리가 자고 있는 사이에도 사회 전체의 과정은 어떤 식으로든 진행되기 마련이다. 이러한 운동을 역행하려는 자들은 오히려 그 사실조차 거역하고 만다. 때로는 신중하지 못하거나 조금은 덜 떨어졌기 때문에 그것을 너무나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노골적인 반항으로 표현한다. 이를 두고 반동의 역사라 부를 수 있다면 사회적 운동의 관점에서는 진행의 반작용이란 그렇게 오래가지 않는다는 말일 수 있다.
거창한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투쟁의 시기 역시 시기상조가 있기 마련이다. 단순히 세월이 묻었다고 해서 성숙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지긋한 세월일수록 침묵하며 듣는 쪽이 경건한 태도를 보여주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수용만 하는 얇은 귀가 포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런 점에서 세심한 비판이 때로는 무의미한 가치보다 유익하다.
이 점에서 독일 공산당의 역사는 매우 유명하다. 대부분의 사상가들의 생애가 그리스 다음으로 이곳에서 탄생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저명한 인사들이 등장했다. 특히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는 가장 잘 알려진 인물들이다. 칼 리프크네히트의 아버지였던 빌헬름 리프크네히트 역시 엥겔스와의 몇 안 되는 서신 교환 인물이다. 이를 두고 단순히 집안 내력이나 가문의 자격이라 부른다면 큰 오산일 수 있다. 오히려 영향의 작용으로 보는 쪽이 더 알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칼 리프크네히트는 이와 관련하여『군국주의와 반군국주의』에서 유명한 말을 한 적은 있다.
‘자신이 사회민주주의자라면, 그의 자녀 역시 사회민주주의자로 자랄 수 있다.’
어쩌면 이 말보다, 가장 정치적인 말은 앞으로 두고 봐도 없을 것이다. 적어도, 꼭 사회민주주의자로 자라지 않았을지라도, 단순히 가족과 무관하게 탄생했을 수도 있고, 비슷한 영향 아래에서 자랄 기회라도 있었다면 세상에 대한 시각 역시나 매우 다르게 보면서 그러한 시각을 견지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강제된 교육보다는 문제시되는 한 독서가 그 대상의 비판을 기르도록 하기 마련이다. 열린 의문을 갖추고, 『자본』을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읽는다면 어느 순간, 그 말의 의미 역시 가깝게 다가온다. 물론 꼭 『자본』일 필요는 없다. 이처럼, 유전과 매체에 익숙해지며 유명한 타인의 관점에서만 발언되어 소외되거나 한정되는 지금의 모습은 너무나 위협적으로 보일 때가 있다. 그것은 노후화된 국가 속에서 더욱 자라날 수 있는 청년의 무의미한 자살이나 중년의 후회만큼 닮아 있다. 모든 가족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너무나 가족의 불필요함만을 겪어야만 했던 집안 내력이란 사회 전반에 걸친 범죄의 소굴 속에서 자란 자본주의자들의 기만과 사기의 배후에 직면하여 충돌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이들이 더욱 성숙해지는 계기는 어쩌면 필연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 균열이 언제까지 없다고만 말할 수 있을까. 최소한 지금의 행동 역시 먼 훗날의 후회가 되지 않도록 다만 나아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