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04. 16.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란 무엇인가

 

꾸준하게 말하지만 <국가와 혁명>을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뜻에 대해서도 숙고해 볼 필요는 있다고 본다. 모든 저작을 곱씹어 볼 때도, 우리는 <국가와 혁명>은 꼭 읽어봐야 할 저작이라고 자신 있게 말해본다. 마찬가지로 <프랑스 내전>에서도 언급했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대한 물음이란 곧 코뮌에 대한 질문과도 일치하기 때문이다. 바로 앞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졌다. 그리고 다음 질문이란 민주주의를 정의 내리지도 못하고, 추상적으로만 아는 민주주의 수호가 도대체 무슨 소용인가라는 점이다. 그렇다. 여기서 추상이라고 한다면 대중들은 민주주의에 대해 관념적으로만 뭉뚱그렸거나, 또는 엉뚱하게도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그리고 간접적인 대의 민주주의를 직접 민주주의와 뒤섞어 놓고는 알아서 혼동하기도 한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 민주주의는 곧 직접 참가를 바라는 민주주의를 요구한다. 그리고 지식인 계급만이 아니라, 인민 모두에 대한 참가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을 포괄할 수 있고, 소수 지식인들로부터 사고됐던 민주 요구를 옮겨와 대중 모두에게도 집중할 수 있는 민주 제도를 구비하고자 더욱 노력해왔다. 그러나 여기서 대중 요구에만 머물지도 않는다. 그들은 '시민'이라 말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투쟁하므로, 우리는 더 이상 한 나라 속에만 갇힌 국민도 아닌 여러 나라 속 인민이자 또한 더 많은, 더 나은 요구를 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여태까지 우리는 추상적인 사상에서만 머물 수도 없었다. 그리고 맹동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언제든 요구한다. 또한 혁명으로부터 늘 배운다. 우리는 노동 계급을 만나고 어울려서 학습한다. 무엇을. 바로 계급 투쟁을 배운다. 그리고 혁명 이론을 학습하고, 곧 학습으로만 머물지도 않고 언제든 조직할 줄 안다. 놓치기 쉽지만 직접 민주주의란 전 세계 국민들도 인민 참가를 전제로 한다. 그리고 단지 민주주의를 더욱 집중한다고 해서 나라를 포기한다는 협소하거나, 좁은 의미도 아니다. 오히려 더욱 폭 넓다고 본다. 그렇다고 우리는 무산 운동이라는 대의를 저버리지도 않고자 노력한다. 기존 부르주아 의회 정치에 가담했던 외국인과 장애인들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모두 아무런 포부를 내세우지도, 거부하고 싶어도 어쩔 수 없는 체제로부터 순종을 보노라면 처참하다고는 말할 수 있다. 덕분에 추진하던 포괄적인 차별금지법 제정도 미뤄졌다. 여러 요구들도 담길 수 있는 대표하는 법안이었다.

 

이번 집회에서는 개인으로 왔지만, 조직을 꾸리고자 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그리고 각자 방식대로, 나름대로 조직에 대한 염원이라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프롤레타리아트는 어떤 조직을 바라는가. 단지 미약한 자생적인 조직을 말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군중에서 모여진 대중들도 바로 질서 잡힌 조직도 아닌 언제든 탈퇴는 손 쉽고, 강제도 없는 강령 조직이자 곧 낡고 오래된 관료에 대한 불만에서부터 터져나오고 있다고 본다. 전쟁이라는 얼룩진 폭력에 몰두하느라 놓치기 쉬운 점이란 바로 프롤레타리아트들은 실천으로 말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더욱 많은 사람들은 부르주아지가 일으키고자 한 범죄들로부터도 곧 효율적일 줄 알았던 낡은 전쟁에 대한 경제적 손실을 목도하고 있다. 어쩌면 쉬운 말일지도 모르지만, 돈만이 아니라 재물마저 축적하는 부르주아 일당들로부터 잔존하는 체제를 무너뜨리고 혁명으로 보답하고자 노력하는 참된 사람들로는 다음으로 말해주는 말도 곰곰이는 곱씹어본다.

 

'노동 계급에게는 더 이상 국가란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25. 04. 16. 


무산 혁명과 농민

 

농민들은 때로는 매우 억센 민중이기도 하다. 바로 농촌 사회로는 노동 계급 투쟁보다도 매우 끈질기게 성과를 얻어내기도 했다. 바로 모든 정권에도 속 깊게 도전한다는 점으로는 일반 노동 계급들 가운데에서도 무산 농민들은 경제 요구와 그러한 반발에 대해서는 매우 정확하고 깊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훨씬 정당하고, 또 과격하기도 하다. 농촌 사회에서 농민들은 계급 층위로도 나뉘었다고 지적한 사람으로는 다름 아닌 레닌이기도 했다는 점을 받아들일 줄 안다면, 과거 소련에서는 지주 자본가라는 쿨라크에 대한 비판과 청산으로부터 제기한 집단 농업이라는 형태마저도 여러 정책으로부터 시행해볼 수 있었고,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개별 농업에 대한 한계에서부터 자본주의와 무관한 공산주의 경제로부터 독립한 식량 생산에 대한 여러 연구를 실천하고 또 진행했다는 점에서도 찾아볼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지주 토지 문제로는 농촌 사회에서도 많은 훼방과 방해를 야기하기도 했다. 단지 토지 소유권에 대한 단편적인 시각이 아니라, 공동 농업 뿐만이 아닌, 해양에서도 수산업으로도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임업도 있다. 당시 소련은 전형적인 농업 국가였다는 점을 간과하곤 한다. 그러나 각국마다 같은 생산 수단들에 대한 생산력들은 따라서 무슨 일에 종사하는가에 따라서 매우 다르다는 점을 쉽게 잊거나, 까먹곤 한다. 소련 농촌 교육에서는 특히 단지 까막눈 운동이라는 문맹에 대한 해소로만 끝나지 않았고, 계급 문제에 대한 고찰로까지 전개할 수 있었다는 점으로도, 시사하고 배울 점도 크다고 본다. 따라서 단지 과거 유산이라는 문제로만 취급하거나, 바라 볼 문제도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지주 자본가에 대한 전원 생활에 대한 환상을 일소하는 데로는 계급 문제를 꾸준하게 제기한 사람들도 있다는 점이다.


레닌은 노동 계급을 다룰 때도 단순하게 도시 노동가만이 아니라, 농민들에게도 매우 깊은 관심과 또한 흥미를 보였다는 점이다. 처음 소련 대략 80% 농민들로는 단지 농촌 사회에서 오래 거주하고 있었다는 측면에서가 아니라, 개별 농업에서도 여러 과학 연구를 환경에도 알맞게 혼재했을 뿐만 아니라, 생산력을 늘릴 수 있는 방안들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를 해왔다는 점이다. 그리고 처음으로 농민에게도 계급 생산에 있어서 지주만이 아니라 부농, 중농, 소농으로 분류하기도 했다는 점이다. 그러한 농촌 사회에서도 지배된 계급 사회에 대한 문제를 당시로는 앞서 증명하고자 했고, 또 그러한 농촌 사회 참된 개혁에도 앞장 섰다는 점에서 계획 경제에 대한 실천에서도 배울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또 말하고자 한다.

 

무산 혁명은 농민 민중들과도 무관하다는 식에서, 그리고 농민들이나 민중들은 하나도 배운 게 없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오히려 무산 계급을 지지하는 농촌 사회로는 경제적이고 효율적으로만 찾던 집단 농업만이 아니라 코뮌 경제를 먼저 내세웠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토지와 임농에 대한 같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미리 땅 투기를 해서, 관광업을 개발한다는 목적으로, 자본을 공들여 여러 가구들과 처음부터 있던 공동 농업 토지를 되돌릴 수도 없도록 훼손하고, 황폐하도록 만들었다는 문제를 이제는 제기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러한 관광지들은 자본 산업으로부터 특히 자연 경제에 대한 여러 문제들도 남겨왔다는 점이다. 그리고 우리로는 문제를 제기할 때는 단지 자연 훼손이나 환경 파괴로만 문제를 일축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러한 경제들은 모두 계급 문제 특히 농업 사회에서도 나타나는 무분별한 노동 개발과 농촌 사회라는 문제에서도 두각을 보이고 깊은 골과도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지주와 자본가라는 오래된 토지 문제로는 국내에서도 시급하게 제기할 자본주의에 대한 물음이라고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25. 04. 16. 


무산 독재라는 당면 과제

 

프롤레타리아트와 독재

   

독재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도 못하고, 부정하는 사람들과는 다음과 같은 논의를 진행할 수는 없다. 바로 독재란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과거 운동권들은 강렬하고, 또 강력한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부터 혁명을 성취할 수 있다고 믿어오기도 했지만, 돌아온 폭풍은 반동이라는 자본주의 성취로 퇴행하고 복귀했을 뿐이었다. 여러 파업과 시위들에서도 볼 수 있는 임금 인상, 안정화 등에 대한 요구가 도리어 체제에 대해 더욱 효과적이거나, 장기적이지도 못한 이유에 대한 원인은 무엇일까. 바로 결정권에 대한 물음을 던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독재는 곧 결정권을 가진다. 그리고 부르주아 독재와 군부 독재가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흠은 바로 그러한 결정권 앞에 소수 결정만을 앞세웠다는 점이다. 여기서 소수란 바로 가진 사람들, 곧바로 지배·권력은 누구인가를 뜻하기도 한다. 쉬운 예시로는 한 무리나 집단에서도 볼 수 있다. 직장에서 서열화로는 의사를 두고 토론하지도, 주어지거나 맡은 일에 대해 바른 물음을 던지지도 못하게 막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정은 언제나 서열이 높거나, 직권이 높은 사람들을 중심으로만 모여지기도 한다. 바로 그러한 점에서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간에 사람을 하대하는 관료주의가 작동하거나, 기능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같은 조직들로는 한치 앞도 모르거나. 정작 무너질 수 있다는 불안과 위험을 내재한 채로 질주하기만 한다는 여러 특징들도 보인다.

 

특히 부르주아 독재와 군부 독재를 겪고 있거나, 경험한 국가들로는 그러한 민주주의 요구가 달성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폭력에 대한 결정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폭력을 쉽게 도덕·윤리에 대한 수단으로만 여기거나,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바로 죽음과 희생을 두렵게만 느끼거나, 그리고 도달해야만 하는 필수로 여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부르주아지가 행사하는 폭력은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제기하는 폭력과 매우 다르고, 전개로도 발휘할 때는 여러 혁명가들도 지적했지만, 소수 시위나 파업 투쟁과는 매우 다른 전투로까지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불황기에도, 그러한 전투로까지 확장될 수 없다고 믿는 여론들도 있지만, 실제로는 결정권에 대한 물음이라면 전개와 양상도 매우 달라질 수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우 다르다는 점도 간과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늘 체제로부터 잔존하는 물음으로는 딱 한 가지가 있었다. 누가 조직 안에서도 결정권을 가지는가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러한 물음이 바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달성하도록 할 수 있는 조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단지 정치·경제적인 한 표를 획득하기 위한 결정권이었는가. 아니면 혁명을 결정한다는 결정권이었는가에 따라서도 목적이나 수단은 그리고, 투쟁으로도, 또 경과로도, 과정과 결과로도, 잘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이다. 새삼 놀랍지는 않지만. 집회와 파업이 끝나고나면 무서울만큼 반복되는 일상 복귀라는 이름으로도. 정상화를 위해 기여를 한다는 점에서도. 사람들은 그러한 투쟁을 추상적으로만 이해하지. 정작 투쟁을 하는 원인이나, 체제를 지적하고, 혁명을 제기해야만하는 물음을 잘 던지지는 못했다는 점은 쉽게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로는 식민지로부터 달성되는 자유·의회 민주주의만이 문명화를 가늠하는 척도이거나, 꼭 진보를 뜻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자유로운 민주주의로부터 노동 인민들이나 대중들에 대한 의사들도 꼭 반영하지도 않는다고 본다. 그러한 물음들은 누가 대신해서 처리해준다는 안일한 태도로도 아니고. 모든 추상적인 의식에서가 아니라 당면한 제기할 수 있는 물음들이나 문제들에도 직접 참가하고, 스스로 따져보고, 결정한다는 뜻에서 발휘할 수 있을 때만 비로소 참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원론적인 민주주의보다 더욱 혁명으로도 성취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25. 04. 16. 


자국 혁명

 

비서구권(3세계)에서도 독립에 대한 요구들은 늘 있어왔다. 그러나, 앞다투어 경제적인 면에서도 밀리거나, 식민지로 분할됐다. 그러나 종속적으로 억압되진 않았다. 비서구권, 특히나 아시아권에서도 제국주의에 대한 운동들은 규모 면에서도 컸기 때문이다, 이러한 움직임들도 함께 해왔다. 그러니까, 아무리 서구권에 대한, 그리고 넓은 대륙이나, 인구 유입 면에서도, 인구율에서도 많은 국가들이나 지역들에서는 훨씬 비정상적으로, 선진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하지만, 그러나 대체로 선진국들이라는 배경에는

 

제국주의에도 찬성하고, 자본주의에도 동의했다. 아직도, 같은 비서구권 국가들에서는, 개발도상국이나, 경제적으로 이룩할 수 있는 선진국으로 향한 몸부림들을 부린다. 바로 국민들이라는 희생, 그리고, 노동계급들에 대한 죽음들을 토대로 말이다. 각국에 혁명가들에게는, 여러 글이나 시사들을 읽어보자. 과연, 노동계급들에 대한 죽음들은 얼마나 다루었으며,

 

혹시 그러한 논리나, 근거들은, 지배계급들을 위한 처우에만 개선됐거나, 심지어는 경제적으로는, 개량화에만 머문 통계들은 아닌가. 자국에서는, 민족투쟁도 늘 함께해왔지만, 정작 민족투쟁자들 가운데 일부는 도시민과 민중마저 배신(배반)했으며, 위선으로 똘똘 뭉쳐서 구축했다. 그러한 친절에는 과연 얼마나 감사할 수나 있을까. 자국 혁명이란 바로,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무엇도 할 수 없다는 패배감에서도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알기로는, 앞서 간 혁명 선배들은 제국주의 초기 전쟁 시기 동안에는, 각국에서도 내전과 혁명으로도 전환할 수 있도록 무산계급들, 심지어는 인민들까지도 지도했으며, 노동계급들을 설득하고자 매우 노력해왔다. 따라서 앞당겨진 종말론에 맞서, 계급적인 분노를 정당화하고자 한다.

 

투쟁하는 사람들에게, 동지들에게, 안부를 먼저 전한다. 우선 뒤늦게나마, 고맙다고 말하고자 한다. 그리고, 단지 자결권만 필요한 국가에도 맞서, 세계주의에 대해서만 국제화를 선전했던, 민족투쟁들과 자국 혁명에 대해서는 심화된 연구를 더 해보겠다. 또한 할 수 있다면, 선진화에 대한 특히 경제 부문들에 대해서도 검토 해보고자 한다.

 

이를테면, 비서구권(3세계)에 대한 대가로, 우선 종속이론을 제외하고, 카다피는 <녹색서>를 집필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의 죽음에 대한 한계는 지금에서 생각해보면, 명확했다. 그러나 주로 미국과도 연관됐다. 3세계에 대한 당시의 상황들이나 정보들을 조사해보면, 현재를 보더라도, 추종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꼭 틀린 말은 아니었다고 본다. 그러나 국내 여론들도 카다피를 직접 만나서 묻기도 했었지만, 질문인들마저, 제국주의 우호적인 발언들도 있었다.

 

현실 사회주의 정권 의의

 


본지는 현존하는 사회주의 국가 전반에서 부르주아지 독재를 내세우기 위한 명분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말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제국주의와 자본 국가들과 치밀하고도 지독한 싸움 끝에 그래도 독자적인 정권을 세우고자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실 사회주의에서도 얼마든지 독재 체제로부터 얼마나 부패하고, 또한 내부 모순을 간직한 채로 부르주아지와 군부 쿠데타라는 협조 끝에 제국주의 아래에서 식민지에 대한 민낯으로 자행될 수 있다는 점을 오히려 지적하고자 한다.

 

같은 투쟁 노력이란 바로 자본 국가들에 대한 위선과 비겁함을 폭로하고자 하기 위함이고,

 

또한 모든 부르주아 국가 권력에 대한 여전히 잔혹하고 건재함을 밝히고자 하기 위함이다.

 

어쩌면 남한에서는 아옌데, 게베라에 대한 최초 언급일지도 모르겠다. 바로 칠레와 쿠바다. 두 국가는 인민대중정당과 공산당도 있고, 주로 사회당을 주축으로 현재에도 이루고 있다. 한 쪽에서는 포퓰리즘으로 비판을 받고, 한 쪽에서는 게릴라 전술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로는 오히려 유치할 뿐더러, 치사하다는 지적을 겸하고자 한다. 두 국가는 비록 공산당에 대한 헌신을 잘 보여주기도 했지만, 오히려 결과적으로는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모습과 정책들을 잘 보여준 국가들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의료 정책에 대한 깊은 흥미 때문이기도 하고, 자본 국가보다 공정하고 투명한 선거 제도를 후원한다. 물론 아메리카에 대한 우호적인 시각이나, 반공주의에 대한 철저한 비난을 겸한 비판까지도 잊지 않고 인민 혁명에 대한 열정도 잘 보여준다.


자본 국가에서는 두 사람 모두를 소비하고, 판매한다는 건 이제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자본주의에 충실한 국가일수록 오히려 깎아내리고, 수사하는 데만 예산을 쏟아붓는다. 그러나 우리는 같은 노력에 대한 열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고, 또한 뜻을 자주 되새기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앞서 여전히 현실 투쟁이자, 계급 투쟁에 대한 깊은 영감을 주고 있고 있다. 따라서 일반적인 자본 국가 부상에 따른 현실 사회주의 정권 붕괴라는 지적도 아니고, 현실 사회주의 정권에서 정책에 대한 의의를 주로 다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25. 12. 25. 


노동 일지

 

삭제된 기록

 

언젠가 너무나 분해서 낙서를 하던 일기장을 모두 찢어 버린 적이 있다. 몇 권의 공책은 더 이상 필요 없었다. 기록은 모두 지우면 그만이었다. 이번 연말에는 처음 출근을 벗삼던 노동 현장이 생각난다. 지방 대학에서 여유 자금을 위한 임금 노동을 헤매다가 찾은 어느 물류 센터였다. 그날은 지금처럼 쌀쌀한 9월이었다. 긴장을 안으며 간단한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듣고는 곧바로 짐을 나르러 다녔다. 곧바로 배달원 전용 수송 차량에 싣는 작업이었다. 주어진 시간 내에 차곡히 짐을 테트리스처럼 쌓았을 때, 어느 관리자는 도대체 서툰 몸으로 비오듯 쏟아지는 땀을 보면서 물 하나 건내는 법이 없었다. 당시에는 8시간 이상의 밤샘도 거뜬히 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새벽 노동은 80년대 공장 제조 사례와 무관하지 않았다. 노동의 집중은 곧 정신 단결과 같았다. 그 일로 인해 등이 살짝 굽었다. 일주일 중에 5일 연속으로 그곳으로 향했다. 기간제가 아닌 시간제로 노동한 적이 더 많았다. 임금의 산정 방식도 일한 만큼 수령했기에, 노동의 강도 대비 보상은 소비에 비하면 늘 부족하기 마련이었다.

 

마음을 다치는 일은 현장에서는 부차적인 일이 된다. 밀려오는 화물이 산만하게 쌓여있던 시절에는 그 짐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를 정도로 빠르게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이 끝나고 나면 몇 번 잠을 설친 적이 있어, 방학 기간 중에는 시간제로 5일 동안 밤낮으로 2개의 일을 병행하던 동료의 비슷한 사연을 듣곤 했다. 단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임금의 산정 방식 또한 차분하게 고려할 시간마저 없었고, 주어진 조건에 해당하면 무조건 생계가 먼저였다. 지방 대학의 등록금을 감당하기 이전에 겨우 학점을 맞추어 장학금을 탈 수 있었다. 그렇게 짐 싣는 작업을 그만두고, 다음은 동료의 이륜차를 몰 기회가 생겨 잠시 배달일을 하였다. 때가 되었을 무렵에는 군대에 입대해야 했다. 총구 요대 사용과 행군 훈련 중 무거운 배낭으로 인해 왼쪽 어깨가 기울어졌다. 보직 특성상 장시간 서 있어야 했기 때문에, 나중에는 최소한 그곳에 남아 있던 부조리만큼은 제거하고자 했다. 온갖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감추는 일은 사회 현장에서 처음 배우게 되었다.

 

비밀리에, 노동 현장에 근무하면서 가족조차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일한 적을 따로 밝힌 적은 없었다. 몇 번은 경미한 손목 부상이나 장기간 다리 근육 풀림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마른 체형이었을 때는 지금 체형보다 더 큰 짐을 옮겨야 했기에 마땅히 도움을 구할 수 없어 큰 위협이 되었다. 영상 속의 현장 시청만으로는 큰 도움 역시 주지 못했다. 그러다가 최근 오랜만에 그곳을 다시 방문할 기회가 생겼다. 모든 사업을 처분했기에 그곳의 부름을 받은 듯이 자원했다. 겨우 1일 체험에 불과한 현장 방문으로 다른 보직을 심사 받았다. 면접 이후의 심사 여부는 통과였지만, 그동안 무리했음을 실감하게 된 순간이었다. 가족이라면 그러한 일에 대해서는 말로만 들었기 때문에 아무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루를 일제히 마치고 돌아오는 사람들의 퇴근 모습이 여전히 보상에 대한 다음 준비와 어두운 모습으로만 읽혔다. 그래서 더는 할 수 없다고 드디어 판단을 내렸다. 그제서야 다른 일을 알아보고 싶어졌다.

 

비정규직이나 기간제의 수습 기간에 대한 정당성을 논하기 이전에, 현장에서 배운 점이라면 오히려 무질서함과 때때로 안면조차 없는 사람들의 반복된 육체 낭비였다. 덕분에, 노조 활동을 관두게 되었고, 가입 여부를 묻거나 다시 신청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정당 활동은 더 이상 노동자를 대변할 수 없다는 일념 아래로 모아졌다. 노동과 관련된 법적 · 형식적 노동 법률을 권하기 이전에, 그 현장의개선이 결국수용되어 초과 근무를 유도하기에, 노동에 대한 욕심 역시 더욱 생기기 마련이다. 두 번째는 공사 현장이었다. 건축 기사에게 연장을 구분하지 못해 들은 아주 쓰디쓴 고함과 초보 노동자의 기본적인 시멘트 벽돌 운반 및 삽일은 든든한 아파트의 견고물이 되었다. 부실한 철판 위로 올라갔을 때, 흔들거리는 운반 지게를 등에 멜 때면, 이것이 감내해야 할 의무라 여겼다. 당연하게도 더욱 무게를 늘렸을 때는 연신 감사만 짤막하게 전달했다. 일찍부터 쌀쌀한 새벽 대기로 인해 긴장된 몸을 풀 시간마저 제한되어 곧바로 현장으로 달려가야만 했던, 그 고정된 형식이 임금보다 중요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을까. 다만 남은 사업을 유지해야 한다는 명목만이 그 노동을 정당화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생애의 봄은 아니, 스물은 그렇게 지나갔다. 서툰 사람에게는 내용조차 빈 종이에 불과하다면, 지금도 현장의 노동이 과연 나아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일이 똑같이 일어났다면 그 누구도 함부로 말할 수 없다. 가까운 노동자이자 동료가 내 옆에서 의문의 사고를 당해 익명으로 장례식을 방문하여 부조를 했을 때조차, 그것이 주체와 운동이라는 사상보다 더 중요한 태도의 문제로 다가왔다.

 

현장의 노동 앞에서는 누구나 경직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위안을 보내더라도, 그 일은 자신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사무실에서 뭉뚱그려진 태도가 철학으로 보이더라도, 어떤 일은 더 이상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그 다짐마저, 때로는 계속해서 노동을재생산할 수 있게 하는 동력이 되어 보람으로 그치고 만다. 그래서 쉬고 싶다는 말을 자주 입에 담았다. 그동안 남들처럼 먹고, 구경하고, 만난 모두가 소멸되거나 소실된 채 부족한 일로만 받아들였다. 몸이 쓰러지면 각오가 온 몸을 지배했지만, 우스꽝스러운 신세보다 못한 부족한 경력과 실력은 말 그대로, 어디 명함도 못 내미는 일이 되어 지금의 내부 작업을 구성하고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묻는다면, 이곳에 태어난 것을 두고 평생 저주하면서 사느니, 내일을 준비하며 그나마 생존할 수 있다는 도달의 순간이나 안도 밖에는 남는 것이 없어진다. 적어도, 가난한 마음의 일부를 이루었다면, 그것이 찢어진 노동 일지의 마지막 기록이었다. 그리고 과거를 묻어버렸다

   

위탁 업체와 말단 사원

 

그녀를 알게 된 건, 정규직 사원 때의 일이었다. 사회 초년생이었기 때문에 여러 부서를 정처없이 이동하고 다녔다. 사업의 소유주라는 사실 역시 밝힌 적은 없었다. 예전에는 초년생이었기에 몇 번의 연상 분들과 어울릴 수 있는 기회가 잦았다. 연상 분들은 특유의 성숙한 생각을 지니고 있었지만, 불안정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의존하며 기대게 되었다. 잠깐의 연락들이 모여서 사회적 관계의 진전은 그렇게 썩 괜찮은 결말을 맞이하지는 않았다. 예전에는 모든 일들이 전부 내 탓이라고만 여겼다. 의견을 먼저 숨겨야만 했던 이유를 적절히 말해야 하는 순간에, 때를 놓치게 되거나 사회적 관계에 대한 의미 부여를 많이 했기 때문에 사람에 대한 의심은 깊어졌다.

 

사실은 몇 번 연락한 분들은 대체로 호의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늘 비정규직과 계약직을 전전했기 때문에 정규직 사원이라는 존재에 대한 시기 역시 없지는 않았다. 물론 여유 자금이 있어야 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어울릴 수 있지만, 지출되는 비용과 경제적 관념 역시 부족했으므로, 의식적인 높은 학구열이 때로는 과도한 열정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렇게 정규직 사원이 되면 지루하거나 무의미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사람은 사회적 관계를 맺으면서 새로운 의미가 예고 없이 문을 두드린다. 정규직 사원을 처음 지원했을 때는 늘 예정에 없던 현장을 먼저 방문했다. 그때 합격 통보를 받았고, 고정적이고, 새로운 일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으로 지원했다. 그러나 처음 고용된 정규직 사원이란 위탁 업무였고, 업무 분담의 일정한 숙달된 능력을 요구했기에 그 한계로 인해 당시에도 쉽게 응해주지 않았다. 정규직 사원들은 대체로 친절로 무장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퇴사에 대한 결정 역시 숨기게 된다. 더 높은 사회적 지위의 자리를 위한 무한 경쟁처럼 온갖 사원들 간의 마찰 역시 빚어지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대표를 중심으로 둘러싼 사회적 지위 경쟁이 일어났지만, 대표 사업주가 고용한 정직원 말단 사원이 실은 젊은 소사업주라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그곳에서 만난 젊은 동료들은 같은 초년생이라기에는 가족을 잃었거나 보살핌이 필요한 존재들이었다. 적어도 모두 미숙했기에, 초기 사업은 사원이라 볼 수 없는 형태의 직장을 다녔다. 관광지라는 이점을 지닌 곳이더라도, 주위의 경관을 위해 또 다른 자연 경관에는 해악을 끼치는 일들이 자주 일어났다. 그제야 그곳은 오래 다닐 수 없는 직장임을 이해하게 되었다. 위탁 업체에 고용된 이들은 많이 일하고, 기간제처럼 짧은 기간에 퇴사를 했다. 그러나 사회적 초년생이 안정적인 직장을 바랬던 일이 욕심이었을까. 지난 날에 비하면 1년을 넘기지 못한 그 하루가 더욱 예민한 신경을 긁고 말았다. 짙은 가난의 냄새가 배이고, 육체의 피로도가 증가했다

 

퇴사를 결정하기 몇 달 전에 일이었다. 가끔 주위를 배회하던 온화한 동료가 종종 보였다. 오래 근무하지는 않았지만, 퇴사를 결정한 날에 마지막 퇴근 준비를 했을 때, 그녀가 먼저 말을 건냈다. 자신의 출퇴근 자가용을 태워줄 수 있느냐는 말이었다. 순간 멍해졌다. 곡예 운전까지는 아니었지만 질주의 본능을 은근히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딘가로 바래다준다는 일 역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사정이 생겨서 곧바로 그렇다고 수긍할 수도 없었다. 우연히 같은 정류장에서 마주치는 일이 잦았고, 같은 대학을 다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비슷한 무렵이었다. 그것은 계기였다. 사내에서 피어난 관계가 조금씩 깊어지고 있었다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장담했지만, 대중 교통이 끊긴 상태에서도 같은 시간에 출근을 해야 하거나 사업장의 거리가 멀어 이동 간 불편을 초래하는 일이 잦았다. 어떤 식으로든 사정상 퇴사를 결정하고, 사업까지 마무리해야 했지만, 상경을 하고 싶어도 가족이 묶여 있는 한 그럴 수 없었다. 한 겨울에는 높은 산 중턱에 거주지가 있었기 때문에 올라가는 도중에 만나는 일도 있었다. 목소리를 높여 반갑게 맞이하기도 했다. 그렇게 자가용에 태우면서 동네 영화관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몇 개의 단편극을 시청했고, 그분은 처음 방문한 집에서 읽고 있던 책에 대한 흥미를 보였다. 서서히 알아가면서 그녀의 존재가 보였다. 당시 금발 색상의 단발을 하고, 차분한 여우처럼 예리한 눈매가 돋보였다. 가까이에서는 솜사탕 냄새처럼 달콤한 냄새였다. 비슷한 연하와 사회적 관계를 맺는 일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출판사를 위한 번역 작업을 했을 때도 응원을 해주거나, 사업장에 직접 방문해 활력 음료를 들고 온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곳을 일찍 정리하고, 상경하기를 내심 바라는 눈치였다.  

 

사회성을 미리 갖추었기 때문이었을까. 그전에는 직접 고른 일기장을 선물했지만, 점점 경제적 여유가 잃어감에 따라 선을 그어야만 했던 시기였기에, 더 깊어졌다면 아마 나조차 저세상 사람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사회적 관계를 맺기에는 너무나 미숙했다. 시간이 지나면 결정을 해야 했다. 결국, 통보는 문자 연락이었고, 그것은 최악이었다. 그 최악의 일을 나중에서야 부재로 이해하게 되었다. 밤낮으로 걸으면서 수행했을 때조차 그 최악을 붙잡으면서 버텼다. 나중에서야 자연스럽게 떠나게 됐다. 이처럼, 사회적 관계가 깊어지는 일은 당시에도 어려운 일이었다. 드디어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는 기대가 점점 시들해지고, 충족될 수 없는 갈증으로 남았을 때, 비로소 자유를 되찾았다. 돌이킬 수 없는 발걸음처럼, 초년생의 묵은 때를 씻어내고 있었다

   

집안 내력


역시 학문의 전당이란 그 명예에 비하면 초라한 것이다. 높은 지위에 올라선 권위가 오랫동안 변치 않을 수 있다면 그것은 희망 사항일 뿐이니 말이다. 그러나 학문의 전당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법이다. 사실 유전이라든가 태생과는 별개의 문제일 뿐이다. 정치적 성향 역시 고정되어 있다는 오래된 사고 역시 편향된 관념의 시각을 기르면서 학자들 간의 조정된 일부 견해임을 보여줄 수 있지만, 결국 핵심은 얼마나 오랫동안 문제를 연구하면서 이를 인내할 수 있는 자질을 기르는지이다. 따라서 기존의 고찰된 문제는 언제나 무너질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만다.  

 

우수한 성적을 유지한다면 자신에게 좋은 일일 수 있지만, 그로 인해 누구나 성공한 인생을 갖출 수 있는 것도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노력과 성실만으로는 상당한 지위에 오르기란 대단히 어렵다. 이처럼, 성공과 실패란 단지 삶의 전반으로 볼 때는 비좁은 시각의 일부일 뿐이다. 우리가 자고 있는 사이에도 사회 전체의 과정은 어떤 식으로든 진행되기 마련이다. 이러한 운동을 역행하려는 자들은 오히려 그 사실조차 거역하고 만다. 때로는 신중하지 못하거나 조금은 덜 떨어졌기 때문에 그것을 너무나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노골적인 반항으로 표현한다. 이를 두고 반동의 역사라 부를 수 있다면 사회적 운동의 관점에서는 진행의 반작용이란 그렇게 오래가지 않는다는 말일 수 있다.

 

거창한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투쟁의 시기 역시 시기상조가 있기 마련이다. 단순히 세월이 묻었다고 해서 성숙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지긋한 세월일수록 침묵하며 듣는 쪽이 경건한 태도를 보여주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수용만 하는 얇은 귀가 포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런 점에서 세심한 비판이 때로는 무의미한 가치보다 유익하다

 

이 점에서 독일 공산당의 역사는 매우 유명하다. 대부분의 사상가들의 생애가 그리스 다음으로 이곳에서 탄생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저명한 인사들이 등장했다. 특히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는 가장 잘 알려진 인물들이다. 칼 리프크네히트의 아버지였던 빌헬름 리프크네히트 역시 엥겔스와의 몇 안 되는 서신 교환 인물이다. 이를 두고 단순히 집안 내력이나 가문의 자격이라 부른다면 큰 오산일 수 있다. 오히려 영향의 작용으로 보는 쪽이 더 알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칼 리프크네히트는 이와 관련하여군국주의와 반군국주의에서 유명한 말을 한 적은 있다.

 

자신이 사회민주주의자라면, 그의 자녀 역시 사회민주주의자로 자랄 수 있다.’

 

어쩌면 이 말보다가장 정치적인 말은 앞으로 두고 봐도 없을 것이다적어도꼭 사회민주주의자로 자라지 않았을지라도, 단순히 가족과 무관하게 탄생했을 수도 있고비슷한 영향 아래에서 자랄 기회라도 있었다면 세상에 대한 시각 역시나 매우 다르게 보면서 그러한 시각을 견지했을 수 있기 때문이다때로는 강제된 교육보다는 문제시되는 한 독서가 그 대상의 비판을 기르도록 하기 마련이다열린 의문을 갖추고자본을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읽는다면 어느 순간그 말의 의미 역시 가깝게 다가온다. 물론 꼭 자본일 필요는 없다이처럼유전과 매체에 익숙해지며 유명한 타인의 관점에서만 발언되어 소외되거나 한정되는 지금의 모습은 너무나 위협적으로 보일 때가 있다그것은 노후화된 국가 속에서 더욱 자라날 수 있는 청년의 무의미한 자살이나 중년의 후회만큼 닮아 있다모든 가족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너무나 가족의 불필요함만을 겪어야만 했던 집안 내력이란 사회 전반에 걸친 범죄의 소굴 속에서 자란 자본주의자들의 기만과 사기의 배후에 직면하여 충돌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이들이 더욱 성숙해지는 계기는 어쩌면 필연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 균열이 언제까지 없다고만 말할 수 있을까. 최소한 지금의 행동 역시 먼 훗날의 후회가 되지 않도록 다만 나아갈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