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08. 30.
인민의 적들, 갈등이라는 씨앗
불행의 시작: 인민의 벗으로 둔갑한 자유주의자들
여기서는 지면 논쟁으로 마무리할 수밖에는 없지만 『인민의 벗』을 정리하다보면, '자유주의자'라는 수식어가 자주 나온다. 생각해보면, 이 자유주의라는 수식어는 오히려 유효 기관도 오래된, 철이 많이 지난 사상이다. 한 자유주의자의 계급적인 몰이해로부터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출판 및 언론에서는 손 쉽게도 이와 같은 주장을 지지한다. 특히 통제된 매체로부터 자주 거론되는 대표적인 인물이 한 사람 있다. 바로 유시민 씨이다. 처음에는 민중사관에 대한 지지와 운동권 비판에 대한 강한 기조를 유지하다가도, 지금은 과거 인민주의자들보다도 더 못한 너저분한 서민주의를 내세우고 있다. 이전 참여 정부 시절의 논조를 그대로 갖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 죄는 상당히 깊어졌다. 그는 '인민의 벗'으로 둔갑한 채로 이제는 '인민의 적'이 되고 말았다. 분명 민중적인 시각에서는 여러 대중들에게 국민 경제에 대한 요구와 민주주의 수호까지 매우 전방위적으로 활동했지만, 정작 서구식 문명과 문물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의식적으로 자극하게 만드는 문화적인 충동을 대중들에게 불러일으킨다. 그러한 역사적 결과는 바로 대한민국의 수립이라는 헌정 질서의 역사적인 과정과도 분명하게 일치한다. 여태까지 모든 개혁 정부의 산하에서는 지식인들과 의원들은 다함께였다. 참여 정부부터 시작된 개혁적인 요구가, 더 이상 인민의 요구와 일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높은 소시민적인 의식과 다양성을 보장하겠다는 말마따나, 개혁적인 허구라는 잣대를 여기서도 들이대고 만다. 그러한 유시민 씨 주위로 관련된 인물들이 여러 급진주의자들과 어울리기도 하고, 때로는 더욱 국수론적인 애국주의를 펼친다거나, 앞선 정치적인 한 걸음에서는 더욱 뒤로 물러나 관조하는 태도까지 보여줬다. 유시민 씨 주위 지인들을 살펴보면, 매체에서도 폭 넓게 분포된다. 그 중에서는 유명 방송국 사장, 연예인 및 시장 조사자, 심지어 통계학자와 교수 등도 있었다. 일반적인 국민 경제에 대한 시각에서부터 요구된 정치적 발전에 있어 대중 서적에 기여한 몫에 비하면, 오히려 전체 정치경제적인 시각을 더욱 퇴보시켰다는 해석이다.
부르주아지들이 독점한 자본주의에 관해서라면 줄곧 눈독을 들이다가도, 매체와 방송에도 잔뜩 출연해서 지식인의 양심을 얼씨구 설파하는 와중에, 노동 계급에 대한 인식은 고작 '합법적인' 민주 노조에 대한 희망찬 기대와도 맞물리기만 한다. 유시민 씨는 아마 민주 노조에 대한 생소한 존재를 들어본 적도, 그들의 세세한 요구에 대해서는 개혁 정부 아래로부터 노동부 장관 산하와 부르주아지의 지원을 동시에 받고 있을 뿐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프러포즈 청혼인가. 이 둘 모두에게, 소시민적인 민주주의를 말하면서, 출신 운동권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진단을 포기하고 마는 희망찬 기대로부터, 한국의 자유주의자들은 여전히 '민주주의 만세'를 '아멘'과 마찬가지로 연호해댄다. 이와 같은 갈등은 역사적으로도 꽤 오래됐다. 얼마나 큰 영향력이냐면, 전향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특히 선구적인 담론에 입맞추면서 자신들을 기득권 세력이라고 대놓고 인정하면서도, 노동 탄압법과 미국 원조 사업에 대해서라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될 정도이다. 그들의 표현대로라면, 바짓가랑이 사이로 기어들어가면서 애원할 수 있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그 여파도 매우 컸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만 그치지도 않는다. 이번에는, 사회진화론적인 시각에 대한 해석으로 들어가서는 다윈의 진화론을 위시한 동물의 습성을 일찍부터 파악해서 그걸 한 인물에게 대입시키고, 희화하는 방식에는 비단 지배 계급, 노동 계급을 가리지도 않는다. 인간을 일찍부터 혐오하도록 만들고, 또 다른 누군가에 대한 갈등을 부추긴 인물들에게는 다름 아닌 소시민적인 자유주의자의 하늘과 같이 높고도, 높은 주관적인 관념 속으로 비상해서는 오히려 노동 계급의 추락을 염원하고, 무산 계급을 생산하는 데 부추기도록 더욱 보탬을 주고 만다. 기본 논지마저, 마무리는 늘 선거를 잘못한 대중의 요구가 때때로 어리석다는 전제로부터 해석해간다.
그렇다면, 자유주의 논객들에게도 과연 이러한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당신의 민주주의, 아니 당신들의 민주주의란 바로, 근거도 없는 통계와 해석, 심지어 증거도 없이 들이미는 해학적인 국가 경제의 붕괴 조짐을 말하고 다니면서, 자유주의자들에게 있어서는 대중들이란 자신들의 편에서 '선진적인 투표'로부터 일궈내어 정치적인 권리를 행사한 '합당한' 지도자를 뽑았을 때나 칭찬하는 길들여진 사람들일 뿐인가. 그리고 모종의 거래가 성사가 된 뒤에도, 때는 이미 뒤늦은 법이다. 양국 거래로부터 전가되는 폭발적인 국가 부채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탕진해버리고 마는 국가 경제력이란, 나중에 손 쓸 수 없었을 때는 국민의 원조로 일축해버리고 마는 환희로부터, 초토화되어 온갖 부르주아 세상에 기여하고 만다. 덕분에 자유주의자들은 노동 계급을 자유로운 노동의 해방이라는 보장이 아니라, 가끔은 노동부 지도자들과 발맞추면서 급진적이기도 하고, 때로는 부르주아지들과 입맞추면서 미온적인 태도로 기분을 싹 전환해간다. 여기에서도 빈 대중들은 이미 설득된다. 더군다나 실제로는 분단을 조장하고 만 책임까지 가난한 사람들에게 뒤집어 씌우면서, 유시민 씨는 고도로 높은 자신의 머릿수를 애써가며, 해박한 지식을 현혹된 대중들에게 더욱 뽐내고 만다.
언젠가 유시민 씨도 이오덕 선생의 말마따라, 좋은 글은 쉽게 쓰여야만 한다고 말했다. 좋은 말이다. 그렇다면 이런 말들에 대해서도, 과연 자유주의 비판을 신랄하게 가하는 논조에 대해서는 과연 얼마나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분명 거들고 싶을 뿐이다. 언제나 또 다른 대중 인민들에게 기대어,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논지를 강화시킬 수 있는 방안이라면 만족하고도, 또 이제는 충분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노동 계급은 재산의 유무마저 갈라지고 말아서 단순히 높은 '합법적인' 민주 노조의 연대 의식과 시위 보장만을 요구하기만 하면, 모든 지도자가 청을 들어줄 수 있을거라는 오래된 생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걸 잘 보여준다. 여기에서 세대론은 더 이상 없다. 어떤 위치에 있고, 또 어떤 자리에 앉는가가 오히려 그들의 저급한 의식 수준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도, 유시민 씨는 더 이상 대중 인민을 위한 논객이 아니다. 기껏해야, 편안하게 낚시를 하면서, 시조를 읊으며 방관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누구와도 점점 닮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인 집단들 아래에서, 한국 부르주아지들에게 시중일관 봉사를 하면서, 계급에 대한 몰이해와 더불어 가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서적을 거론하면서 대중 인민의 호응을 유도하고 있을 때면,「노동자 연대」에 소속된 일부 지식인들도 얼마나 환호하던가. 이러한 낚시 앞에서는 모든 갈등과 불행의 씨앗을 잘 보여주고 있는 듯 하다. 민들레의 씨앗이 퍼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민주주의라는 꽃을 필 수 없도록 만든 장본인들이야말로, 과연 부르주아 자유주의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누가 권력을 가지고 있는지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지배하고 있는지가 더 중요시 여겨지고 만다. 그리고 우리는 생각해보면, 그러한 정책을 펴라고 감히 말해본 적도 없었다.
퇴보한 진화론자: 저버린 약속
대중 인민들은 몰랐다. 학술자들이 이렇게 처첨하게 주관적인 시각을 넓혀가고 있을 줄은, 자신들의 우생학을 교묘하게 발전시키고, 성별에다 대입시키고, 인구에다 대입시키고, 오히려 부르주아지 정부가 파시즘에 대한 공포를 불러일으키고, 대중들을 불안에 떨도록 만들 수도 있다는 강력한 생각과 커다란 발상으로, 사회진화론자들이 줄곧 말하는 수입된 이론에서 자신들의 논리를 강화시켜나가고, 또 다른 군사력에 대응할 수 있도록 고도로 식민지화될 수 있는 통합된 국가 부채를 끌어안고자 일반 대중들에게도 조금씩 전가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과연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조선업 사업에서도 왜 방위 산업에 대한 고조된 관심을 대일, 대미 사업으로 포장해서 원조하고 마는 걸까. 자유로운 진화론자들의 추측은 여기서도 멈추지 않는다. 앞선 소비에트는 늘 붕괴될 조짐을 보였다. 바로 강력한 자본주의 앞에서 내부부터 서서히 부패해서는, 부르주아 집단의 끄나풀과 무력한 힘 앞에서 자신을 굴복시키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산 계급의 역사는 말해준다. 다윈의 진화론적인 시각에서도, 링컨의 민주론에 대한 시각적인 기틀에서도 아니라, 결국에는 모두 자본주의 발전 앞에서 목전으로 다가와 굴복하고, 순종적인 문화를 수용하도록 '선구적', '전방위적', '전위적'이라고 단지 몇 마디 떠들어왔음에. 그들에게 주어진 독립이란, 자본주의 앞에서 자주 국가에 따른 튼튼한 안보와 국방력에 기인했을 뿐이다. 이제는 제국주의로부터 한미 대원조라는 안락한 협상 의자에 앉아서 몇 마디만 주고받기만 하면 손 쉽게 이뤄지는 아름다운 '하모니'와 평화로부터, 노동 대중에게도 크나큰 빚더미를 필수로 요구한다. 그동안 대중 인민들에게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아름답게 맞잡은 두 손으로 평화·통일을 이룰 수 있다는 관찰된 인식에서부터 주관적이고도, 현상적인 관조를 자본주의 체제에 더욱 대입시키고,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무산 노동 계급에게 맞서왔기 때문이다.
이런 관계에 힘입어 유시민 씨는 최재천 씨와도 친밀할 수밖에 없었다. 아름다운 발전 사학을 가지고서 앞으로도 한국의 자본주의가 일반 대중적인 민주주의에 힘입어 계급의 소멸을 완성시킬 수 있다는 헛된 믿음을 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성한 동맹' 앞에서 한·미·일 대원조는 국민들이 아니라, 바로 노동 계급과 무산 계급에게 전가되고, 이들에게 더더욱 치명적인 상처를 또 입히고 만다. 우리에게는 동맹할 수도, 연대할 수도, 심지어 사회민주주의자들을 방기시키거나, 오로지 저기 자본 계급과 유산 계급에게 더욱 기대어 낙원적인 이상향을 말하며, 뜬구름을 잡는 소시민적인 관성에 더욱 기대어 좌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기회를 틈타 술수를 부리는 자유주의자들은 더 이상 대중들을 설득시킬 수 없다고 회의하면서도 자신의 쪽 수가 적으면 크게 좌절하고, 고도의 약물에 의존하는 매춘부와도 같이 자신의 외모와 몸매로부터 어쩔 수 없이 두각시킬 수 밖에 없는 겉모습만 내세울 뿐이다. 여기에서도 '표현의 자유'란 '국가보안법'으로 검열되고, 더군다나 일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쉽게 자유주의자로 전향된 모습을 보여준다. 변모된 민주주의가 바로 군사 독재를 일으켰다는 충격적인 진실을 과연 누가 믿고 싶어할까. 평범한 소시민들은 자신들의 안위에 기대어, 부르주아지들의 비웃음을 참아내면서도 정권 교체에 혈안을 맺는다. 부르주아 국회로부터 소속된 의원들을 포함해서, 정치적인 민주주의의 소비화된 형태와 그 끝에서는 개조된 역사 공사를 매우 잘 보여 줄 뿐이다. 그러나 유시민 씨와 같이 민중을 대변한다는 소위 자유주의자들에게는 큰 아픔이란 없다. 악어의 눈물로 위장한 거짓된 위선도 선이며, 계급에 대한 인식을 주관적이고, 그릇된 편견으로 치부해버리고 만다.
덕분에 진화론자들의 운동은 프롤레타리아트 없는 관성적인 움직임에 따라 반동적으로 자신들의 법적인 근거를 해석하는 데 혈안을 맺게 되고, 자포자기 상태로 이끌어버리고 만 군사적인 움직임만 더욱 강화시킬 뿐이다. 그렇다면 '국가의 탄생'이란 바로 무엇인가. 이와 같이 민중적인 시각 아래에서는 부르주아적인 자유주의를 내세우는 자들에게 공물을 받치는 크나큰 영광이었을 따름이다. 여기에는 국가도 없으며 오직 부르주아, 곧 지배 계급으로 두둔된 소시민의 추상적인 발상에서도 비롯되는 힘 없는 노인들의 모습만 보여줄 뿐이다. 전차와 군인을 막아낸 건 분명히 인민들이었다. 그러나 그 공은 또 다른 지도자에게로 돌아가고, 국민 헌장이나 뽑아대는 모습에서도 얼마나 추락하고도, 추악한 '어른이'들의 현실을 보여주고 말았는가. 심지어 국내에서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점점 더 드물어진다. 이러한 관계에서도 그들 모두는 한국 자본주의가 대중적인 민주주의로부터 계급적인 소멸을 완성시킬 수 있다는 헛된 믿음을,『성경』구절만큼 전파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