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02. 05.


고용 조건의 한계



고용 조건 : 성별 제약 

 

성별의 고정 관념은 자본주의 발달 과정과 함께 설명된다. 최근 생산직 노동에 종사하는 여성의 비율은 이전보다 증가했다. 집수리 기사 및 교통 운송의 비중에서도 여성의 직종 및 고용 범위가 확대됐다. 그러나 남성의 직업군은 여전히 고정된 상태이다. 특히 서비스 업종의 종사에서 성별 비중의 한계로 인해 역으로 부당한 제약을 받는 경우가 일부 존재한다. 이를테면 조리 및 카운터 시스템은 주로 여성들이 차지하여 이들의 비중은 혼성의 비율보다는 여성의 비중이 우월하다. 주로 '힘을 쓰는 사람은 남성'이라는 인식관이 잔존하기 때문이다. 물론 서구 사회의 기준에서 수용된 '젠더' 개념이 수입된 이후로 부당한 성차별의 원인을 설명하고자 했지만, 정작 직업상의 이유가 다변하는 사회의 형태와 자본주의 질서의 충돌로 인해 관념적 한계를 보인다는 지적도 대두된다

 

물론 남성이 여성보다는 근육 및 발육 면에서 활발한 신체적 활동으로 인해 고도의 성장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꼭 남성의 신체가 우수하여 해당 직업군에 종사할 수 없다는 이유는 아닐 것이다. 부르주아 인식관이라면 '젠더의 구분 없이도 자유롭게 성별을 선택하는 사회를 존중한다'고 표면적으로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이 논의 자체가 또 다른 성적인 차별을 부추길 수도 있다. 특히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직업군을 선택함에 있어 성별로 인해 고려해야 할 사항까지 '까다롭게' 증가했기에 신규 노동자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를테면 우리 사회는 화장품 가게에 종사하는 남성을 좀처럼 볼 수 없다. 반대로, 비록 외국인 노동자의 고용률이 높아졌더라도 여성이 건설업 및 운수업에 소속되는 비중은 신체적이나 여러 환경의 제약을 받는다. 이러한 제약의 이유라면 최근 직장 내 성폭력 문제가 대두됨에 따라 특정 성별에 대한 잠정적인 가해를 보편적인 사례로 부추긴 언론에도 존재할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영향력으로 인해 새로운 노동 직업을 희망하는 이들은 성별이나 연령의 제약으로 인해 근로 및 취업 조건에 제약을 받는다거나, 특정 외모를 충족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불합리하게 고용 심사 과정에서 탈락되는 사례도 존재한다.  

 

비슷한 예시로, 승무원들은 연령 및 외모의 비중이 여전히 높게 작용한다거나, 방송국의 아나운서 역시 외모의 비중이 높아 신체적 평가를 은근히 강요한다. 이러한 성적인 차별의 관점은 부당하며 오래된 사회적 조건이 잔존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고용 조건의 제약을 심화시키고, 사회적 평균을 더 높은 기준에서 측정하여 고용자들에게 요구할 수도 있다. 성차별 해석에서 파생된 '오염된' 언어의 예시로는 '인셀', '백래시' 등이 거론된다. 이러한 용어들은 범위 외의 특정 인물을 규정하기 위함이었지만, 정작 노동자를 생산력의 종사자로 정당하게 평가하지 못하거나, 성별에 따른 도덕적 강요로 인해 또 다른 차별을 생산할 수 있다. 어느 기관지에서는 이러한 고용 방식은 해당 직업의 고용률과 직업적 능률성을 오히려 하락시킬 수도 있다고 밝혔다

 

이처럼, 성별 고정 문제는 현대 사회에서 성차별 문제와도 깊은 연관을 맺는다. 그것은 엄연히 특정 신체적 발언에서 성별과 무관하게 당사자의 성적인 수치심을 일으킨다면 유효할 수 있다. 최근 'n번방 사건' 이후 온라인 공간에서는 신체를 과시하는 저작권 없는 사진을 도용하는 관습이 기술적 발달에 따른 표현의 자유인지에 대한 논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비밀리에 은밀한 사진을 전파하는 습관 역시 만연한 사회적 인식을 형성하여 유년기 아동에게도 일찍 그것을 접할 우려 또한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 사회가 앞으로 '막연한' 신규 창업 부상 및 고용률에 응답하기 이전에, 노동 및 근로 조건의 창출과 그 사회적 환경 및 차별 인식의 실상에 먼저 대답해야 할 것이다

 

고용 조건 : 자격증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과정에서 요구되는 각종 자격과 심사는 노동자 간의 무모한 경쟁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전락했다. 자본이 설정한 실적 위주의 평가 구조는 노동자를 주체적인 존재가 아닌, 자본 체제에 순응하는 부품으로 재편한다. 유년기부터 성적이라는 서열에 노출된 이들은 교육 현장의 폭력에 길들여진 채 사회로 투입되며, 이 과정에서 탄생한 비인간적인 경쟁 구도는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괴물처럼 우리 사회를 위협하고 있다

 

자본가는 노동자가 일에 적응하고 자기 실현을 탐색할 체계를 고려하지 않으며, 최대한의 수익을 착취하는 데만 집중한다. 노동자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성찰할 시간을 박탈당한 채, 성인이 되자마자 타인의 의지에 종속된 삶을 시작한다. 이러한 외부적 압박은 점차 노동자의 의식 전반에 자리 잡아, 체제의 모순을 인식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심리적 간극을 형성한다. 결국 노동자는 자본의 관성을 자신의 본성으로 착각하며 스스로를 구속하는 굴레에 갇히게 된다

 

사내 집단적 따돌림 등과 같은 폭력적 관성은 성인이 되어서도 멈추지 않으며, 이는 노동자가 서로를 해로운 존재로 인식하게 만든다. 정작 본인 역시 자본에 의해 착취당하는 노동자임을 망각한 채, 서로를 공격하며 생애 전반의 권리를 박탈당하는 현실은 비극적이다. 표준화된 성적과 자격에 복종하려는 기질을 단순히 개인의 '보수화'로만 치부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을 무방비 상태로 몰아넣는 자본의 거대한 폭력 구조에서 기인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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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02. 04.


노동자 파업


 

현대 사회에는 파업에도 다양한 방식이 존재한다. 특히 노동자 정당들은 해당 분야에서 충분히 많은 일을 겪은 상태이다. 일부 시민들은 파업을 두려워한다. 대체로 교통이나 작업상의 방해가 되는 일이라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번 장애인 교통로를 위한 지하철 파업 당시에도 불만을 표출한 일부 시민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전에 1960-80년대의 파업은 가히 공권력과 노동력의 대치 상황이라 불릴 정도로 대규모의 유혈 파업이 진행되었다. 주로 시설 폐업 결정에 따른 구조 조정과 극악무도한 재개발 사업의 진척을 위한 노동자 탄압에서 비롯되었다.

 

민주화 시민 혁명 이전에도 노동자 분신 자살을 비롯한 특수한 파업의 경향이 일어났으며 단순히 근로 시간 준수라는 이유였다. 지금도 전 세계에서는 노동자 파업이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그러나 현대에도 노동자 파업은 일어나지만 이전처럼 잦은 유혈 대치 상황이 발생하지는 않는다. 이를 두고 사회가 고도로 안정화되었다고 판단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단지 보도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 대형 언론사는 국내에서도 일어나는 잦은 파업이 대규모 방식으로 진행되더라도 이를자극적이라 판단하여 방송사에서 따로 송출하려 하지는 않는다. 대형 언론사마저 사업을 위한 사장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이시위라 불리는 수준의 정도라면 일종의평화적이고합법적 매체 정도로 검열된다. 이마저도 기존의 방송사는 시청률을 염두하기에 시청자를 위한 방송이 아닌 특수한 진영을 위한 '편향된 보도'로 이를 다루려고 하지 않는다. 본래 노동자는 대규모 파업을 조직하는 주체이기도 하다. 그것은 양 진영 논리와 무관하게, 노동자의 요구에 대응하는 불충분한 사건이 발생하면 자발적으로 때로는 조직적으로 형성된다. 여기서 파업주의란 노동자 파업의 실현이임금 조정이 이뤄지는 시기에 특히 미정산된 또는 부족한 임금이 주된 주제로 거론된다

 

이번 정부에서도 정권 초반기부터 파업 운동이 발생했다. 최근 홈플러스세종 호텔의 사례 등이다. 두 회사는 SPC노동자 끼임 사고’, 작년리튬 배터리 폭파 사고등과 같은 노동자 사고가 아닌 구조 조정에 의한 비정규직 고용 및 임금 정산 문제가 거론되었다. 지금도 이들은 고공 농성 중이다. 그러나 현 노동부 장관은 이 소식을 보고 받았지만 늦장 대응했다. 공권력은 이미 출동했고, 파업을 진압하려는 경찰의 대응으로 인해 일부 노동자들이 연행되는 과정 중에서 작년에 이어 이번에도 일부 폭행 시도가 접수되었다.

 

분명 파업이 일어나기 전에, 정부 부처는 노동자의 인권을 신경쓰며 부임했다. 그러나 코스피 5% 급락에 더 신경이 쓰였던지 노동자 탄압을 방지하기 위한 미연에 대책 마련을 확보하지 못하였다. 파업이 발생하면 주로 관련 대표 기업가들은 경찰 신고를 통하여 노동자의 파업을 저지할 수 있다. 그들은 정부와 면담할 보충 인력까지 존재하기에 언제든 파업을 무산시켜 파괴하려는 자본의 힘을 드러낼 수 있다. 이러한 위협 속에서도 일부 지역에서는 노동자들의크레인 고공 행진 이어지는 중이다.

 

이러한 파업들이 모인 결과라면 고용된 노동자들의 정규직 전환과 정산 및 조정된 임금, 노조의 성립 등을 겨우 이루게 되며, 이를 부정하는 자들은 파업만으로 자신의 처지를 개선할 수 없다는 오랜 편견이 있다. 노동자가 노조의 성립 자체를 부정한다면 파업의 효과 역시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자본가들이 여전히 잉여 가치를 창출할 생산 수단과 노동력을 갖추고 있는 한 노동자 역시 그것을 요구하는 것은 합당한 것이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이 과정이 당연히 ‘합법적으로 전개될 것이라 판단한다면 개인의 착각일 수도 있다실제로 공권력이 투입되는 과정은 기업과 정부가 연계하여 진행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그것을 노동자들이 미연에 방지조차 못한다면 결국 더 큰 인명 사고가 발생하게 된다파업의 장기화란 이러한 공권력의 실상을 고발하고정부의 정책에만 의존하는 노동자가 아닌노동자 자신이 바로 생산자 주체임을 증명하는 단결된 투쟁에서 겨우 밝힐 수 있다이것이 ‘구조 조정가에게 조정되는 개별적인 노동자의 조직이 해체되어 파편화되는 과정이라면지금의 기업 자본가들은 그들의 집단 사이에 보유한 막대한 수익을 토대로 이러한 ‘합법화된 가치의 창출 아래 더 많은 노동자를 단념하게 만들 수도 있다지금의 정부가 ‘설레발로 시작한 주식 시장의 하락한 5%에 대해 시민들과 ‘호들갑을 떠는 이유는 여기에도 있겠다. 그렇다면 주식 가치가 상승하고 있다면 지금도 체불되는 노동자의 임금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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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02. 02.


의회 투쟁 및 선거 전략

 


(이 논의는 주로 노동 대중에게 유익한 설명을 위함이다.)

 

19-20세기 전반은 지식인들이 중심으로 형성된 혁명적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 중심에는 서한 교환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특히 맑스, 엥겔스, 레닌, 심지어 스탈린까지 연락 체계에 있어 서신 교환 및 통신 체계를 중요하게 다루었다. 이에 따라 각 시대적 상황에 맞추어 빠르게 각국의 혁명가들은 자신의 고유한 증명을 검증하고, 독자의 질문에 추가로 답변할 수 있는 서신 방식을 많이 채택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트로츠키, 로자 룩셈부르크, 그람시 등도 당대 지식 사회의 큰 의문을 던진 인물들이다. 자신의 선배들에게 많은 질문을 터울 없이 교환했으며, 이들과 빠르게 동지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

 

레닌, 의회 투쟁 및 선거 전략에서 중요한 부분이라면, 당시 러시아 두마 회의가 소수 분파에서 시작한 볼셰비키와 다수 분파에서 시작한 멘셰비키 간 본격적인 투쟁이 개시되기 이전부터 각 진영 간 우편 및 서신 관계를 활발하게 교류하여 이들의 저작을 충분히 보급하고 확대할 수 있던 비결에도 있었다. 미리 간략한 개괄을 설명하자면, 기본적으로 급격한 사회 변동이 개시되는 시점에서는 현재의 기술적 발달이 전환기를 맞이한 지점에서 자본주의적 발전과의 관계와 오히려 충돌하거나 반비례한다는 점을 설명하는 것이 오히려 중요해지는 시점이다

 

실제로 21세기 초에 발생한 공황의 여파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지금까지 장기적인 위협의 요소가 되는 중이다. 이는 여러 현상에 대한 기존의 경제학자들의 설명만으로 이를 명쾌하게 해명할 수 없는 부분은 그들이 이전 사회를 올바로 파악하지 못했던 이유에도 존재한다. 자본이후로 자본주의 전개의 실상을 충분히 짚어내지 못했던 이유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주로 레닌은 의회주의와 반의회주의의 간극을 짚는 과정에서 '새로운 전개'를 위한 단초까지 명시했다. 다시 말해, 소수 분파에서 시작된 공산당 건설에 있어 각국의 부르주아 사회로 진입하는 과정을 목격한 다수 인민들 역시 존재함을 명시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자체는 비록 내적 모순을 안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스스로 붕괴하지만은 않는 것 같다. 지금도 더 악랄한 방식으로 그것의 착취를 정당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세계 질서의 재편 과정에서 국내 공산당의 '새로운' 건설이 진행되려면 기존의 이론적 비판 역시 전제된다. 그것은 이러한 의회 내 투쟁 과정이 실질적으로 부르주아 사회의 일부 편에 가담하여 진행되는 선거 과정임을 드러내는 것이 점차 중요해지고 있다. 특히 일부 세대 교체에 따른 다음 운동 과정에 대한 관심사가 높아진 만큼, 정치적 기대에 대한 유효성이 과거 인물에 대한 영향력을 과소 평가한 지점이 존재하지만, 지금의 정책적 보완 방식으로 지연시키는 효과만으로는, 실제로 훨씬 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트 간의 심화되는 대립 양상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된다

 

적어도, 우리의 선거 전략이 있다면, 결과적으로 소수 분파부터 시작하려면 개별적인 작은 운동이 모일 수 있도록 의견을 단합하는 것이 필요해진다. 이를테면 각국의 민주주의 가치가 실제로 훼손된 시점을 고려한다면,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 창출에 훨씬 더 많은 도움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사회 건설 실험이라는 붕괴된 시점에서 서술된 막연한 해석에는 반대하고, 이전부터 두마 의회에서 진행된 선구적인 투쟁으로 인한 선거 결과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다소 선구적인 저작의 인용까지는 시간상 생략하더라도, 오늘날 인민들은 그 진행 과정까지는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실질적인 상황에 진입했을 때, 우리의 역할 및 판도가 전환되기에, 부르주아 사회의 선거 전략을 의도적으로 차용하려는 '노골적인' 진보 정당의 주된 논제와도 우선 '차별화'될 필요는 있어 보인다.  

 

* 아마 국가 원수나 주석 등은 상부의 '일방적인' 지령을 내리지만, 우리라면 하부의 서기를 남겨 '체계적인' 지시를 내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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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01. 31.


토론: 검증된 논증의 성립 과정

 


민주주의에도 가치가 있다면 독단적인 결정 권한이 주어졌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치열한 논쟁을 기반으로 검증된 토론을 거치면서 이루어진다. 물론 실무적인 여러 정치적 현안이 주어짐에 따라 결정권이 행사되더라도, 결국에는 민주주의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 간에 기나긴 토의를 거친 안건들을 토대로 의원 간 치열한 내부 토론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는 단순히 논객 간 질의응답이 보장되는 자유 토론 형식과는 전혀 다른 일이다

 

각 국가에서 선출된 의원들은 법적인 협의가 보장되기 이전까지 합의될 수 없는 지점이 있더라도 치열한 토론을 전제한다. 단순히 자신의 사고방식만으로는 민주주의를 판단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적 유산에 있어 계승이라는 중대한 문제가 주어지게 된다. 단순히 정치적 권력을 독점하여 행사할 수 있다는 자본의 논리로 대다수의 의원들을 설득하여 통합하기 이전에, 마르크스주의는 비록 사상적이지만, 그 방향에 있어 기존의 민주주의와도 대치되는 입장이기에 필사적인 논의를 기반으로 독자적으로 전개된다. 그런 점에서 대다수는 마르크스가 부정한 마르크스주의의 본래 의미마저 희석하고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의 고유한 가치라면 단순히 협의에 의한 토의가 아니라, 치열한 논증을 전개하고 예상되는 답변에 부응하는 토론에서 출발한다. 지금도 국회에는 누적된 안건들이 여전히 누락된 상태에 있다. 이를 두고 단순히 국정 운영이란 행정·실무적인 판단하에 최종 권한의 허락만을 구해야 한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또한 앞으로의 의회 투쟁이 어떻게 전개되어야 하는지를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적어도, 지금까지 모든 사회주의자들은 자신이 한 발언에 대해 평생의 명예를 걸었으며 논증의 성립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다. 이는 철학의 중심적 토대인 논리학의 시작을 계승하는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최소한 자신의 논증이 더 이상 갈피를 잡지 못하여 실제로 적용될 수 없다면, 그것은 더 이상 논증에서 토론으로 발전할 수 없는 개인적 성찰에 불과할 뿐이다. 따라서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다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는 중요한 지점이다.  

 

지금도 정치에 불만을 가지는 대다수가 간과하는 부분이 있다면 적어도, 민주주의의 절차적 토론 과정에서 중요한 일이란 현안에 대한 주장을 내세우기 이전에 전제에 대해 질문하고, 어떠한 과정으로 전개되어 결과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상호 검토하는 진행 과정이 필수적이다. 그동안 한국의 교육은 이러한 기본적인 정치적 현안조차 다각도에서 볼 수 없도록 통제한 측면이 존재한다. 이는 이전부터 주어진 사회적 관습 및 전통 방식으로 인해 형성된 기존의 사안들을 다만 반복하고 있었다

 

이조차, 일부 선조들만이 의사 결정 과정에서 토론과 논증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정작 대다수 사람들은 실무적인 안건에서 이를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방법조차 개별적으로 배우지는 못하였다. 사회화의 형성 과정에서도 토론이란 단순히 무력을 행사하여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는 수단이 아니라, 사물의 본질에 대해 올바로 판단하여 이치가 그릇되지 않음을 요구하는 한 방식이다. 현대 사회가 과거 소피스트처럼 의회의 독점을 차지하려 들 때, 본래 의사 결정이란 협의 과정에서 계승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차질 속에서 빚어지는 투쟁과 비판이 있을 때 계승되어 발전하며, 이러한 독점 권한을 가진 지배 계급이 차지한 의회 내 고질적인 모순임을 서서히 자각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필자 역시 제안자로 한정했을 때, '제한된 토론이 주어진 상황에서는 어떻게 자신의 논리가 전개될 수 있을까.'를 묻게 된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충분히 고민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리고 행방의 실마리를 위해 미리 결론을 내리자면, 지금은 결정을 무조건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주어진 현안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이 더 필요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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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01. 20. 


한국 혁명



독재의 시간: 무산 계급에게 독재란 무엇인가.

 

통상적으로 현대 민주주의 체제 내에서 '독재'라는 언어는 절대 권력을 한 개인에게 위임하는 전제 정치나 군주제와 동일시되며 무조건적인 부정의 대상으로만 인식된다. 사전적으로는 독재는 '통치자의 독단으로 행하는 정치'로 규정되며, 이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비판마저 결여된 모소불위의 권력에 대한 공포는 타당하며, 선거마다 권리 행사의 부담을 감지하는 현대 시민들에게 독재와 민주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대척점인 개념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사회를 단일한 시민의 집합이 아닌 계급적 구도 및 관계 속에서 파악한다면, 이러한 보편적 인식의 한계와 언젠가 마주하게 된다. 현대 자본주의 역시 똑같이 표방하는 민주주의가 과연 노동자 계급에게 실질적인 권력을 부여했는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동안 무산 계급은 민주적 권력을 정당하게 행사한다는 착각 속에 머물렀다. 민주화 운동의 역사나 독립 투쟁의 성과를 기리는 행위가 국가적 수준에서는 유의미할지라도, 정작 그 주체였던 노동 계급이 마주한 실질적인 현실은 '민주'라는 개념이 지닌 고질적인 한계 역시 드러낸다.

 

레닌, 국가와 혁명에서 강조된 '독재'의 개념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노동 계급에게 요구한 것은 단순한 지식 계급의 정권 교체가 아니었다. 그것은 노동 계급이 비로소 정치적 주체로 실현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였다. 이는 소수 독재자의 횡포가 아니라, 대의제라는 허울 뒤에 숨은 자본가 계급의 모순을 타파하고,일보전진 이보후퇴에서 설명된 기나긴 의회 투쟁의 시간 속에서 겨우 부상한 노동 계급의 직접 통치권을 주장한 바로 그 순간에 탄생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이러한 진정한 의미마저 단기간의 한계로만 평가하는 것 같다

 

당면한 현실이라면 자본주의와 결합된 민주주의 체제는 더 이상 '영원한 평화'마저 약속하지 못하고 있다. 자본의 논리와 정치적 수사 속에서 체제의 근본적인 이행마저 외면당하고 있으며, 인구 감소라는 통계 수치보다 더 시급한 노동자들의 죽음은 방치되고 있다. 이른바 독재자로 명명된 이들이 인민을 대변하지 못한 채 좌절하여 자본가에게 굴복하는 현상은 혁명의 조건이 상실된 시대의 비극을 온전히 보여준다. 1917년 볼셰비키가 역사적 무대에 등장한 이후로도 노동 계급은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온전한 주체가 되어본 적이 없었다. 지금도 그 운명을 수용할 노동자에게도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내포한 정치적 본질, 곧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갖는 기만을 폭로하고, 동시에 노동자의 직접 통치를 지향하는 그 가치는 시간만 바뀌었지 형태의 본질이 고스란히 유지되는 시대의 보수성 앞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의미를 지닌다. 이 유효성 앞에서 그동안의자본읽기가 왜 실천적 실패로 귀결되었는지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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