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08. 30.
장기수
사상이 다르기 때문에 자신의 고향으로 걷는 걸음을 아무도 막을 수는 없다. 비전향 장기수에 대한 말이다. 납북도 아니고, 미국에게 쉽게 원조하고, 여태껏 한 수령을 따른 사람에게 간첩의 적으로 쉽게 몰아간다는 건, 오히려 남한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비전향 장기수를 알기 전까지는 남한 사회는 그런 분들이 없이 깨끗한 줄로만 알았다. 아니. 기껏해야 시위로 인해 체포되고, 정치법을 위반해서 징역살이를 하는 사람들만 존재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장기수 중에서도 40년이 훌쩍 넘은 비전향 장기수에게는, 국가보안법에 따라 북한 체제에 동조하고 있다는 그 하나만으로, 그들에게는 독재 권력의 하수인이라는 불명예를 남기고 말았다. 직접 두 발을 걸으며 북쪽으로 향하는 그 걸음에 어느 군대라도 막을 수 있을까. 아니다. 막을 수 없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늘 북쪽을 향할 수가 없다. 국가는 엄연히 존재하지만 언제나 갈라지고 마는 건, 서로 다른 사상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그 사상 하나 때문에 남북은 서로가 대립각을 세우고, 대치를 준비 중이다. 그의 한 걸음은 정말로 북한을 동경해서가 아니라, 북쪽을 걷고 싶다는 깊은 심정과 의도를 보여준다. 앞 세대는 언젠가 아이가 자라면 북쪽녘을 밟을 수 있을거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세월은 묻고, 채비는 더욱 늦어진다.
아무리 협의를 하더라도 보내주는 게 맞다. 스스로 결정한 선택마저 그 누가 막을 수 있을까. 그는 대부분 전 생애를 남한에게 바쳤다. 그러나 또 얼마나 무의미해지는가. 사정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은 이들에게 적색 분자와 빨갱이라는 오명을 남겨줬다. 전향이라는 말조차 아까울 뿐이다. 자본주의에 눈이 멀어 목숨을 걸고, 소수를 위한 민주주의에게 대의 정치를 바라는 이상적인 지도자를 더 간절하게 바라는 데 그친다. 정작 이마저도 자신은 없었다. 지도자는 한낱 모두의 공무원이지만, 어느덧 중심은 귀족이며, 왕이고, 우두머리일 뿐이다. 어디 북한이라고 다르던가. 김씨 일가는 여전히 자신의 권력이 무너지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오로지 타인의 목숨과 희생을 쌓으면서 손 쉽게 전쟁 지원이라는 부를 축적한다. 자본주의 왕국들이 호시탐탐 공산 독재 국가의 붕괴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그 누가 자본주의 아래에서 공산 독재 국가가 무너지기를 바라고 있는가. 경제적 여유가 충분하고, 여권이 있으면 언제든 해외 도피자가 되어 도망칠 수 있는 자유가 그들에게 이미 존재할 때조차. 정작 민주적이라는 착한 독재 앞에서는 사상이 다르기 때문에 비전향 장기수에게는 선택할 수 없는 자유를 내던진다. 그들이 먼저 전향해버렸지만, 정작 의도는 남북한 앞에서 무너지고 있음에도 말이다.
언론에서는 국가의 안보에 있어 지도자의 칭찬으로 마무리한다. 그러나 그 속에도 조국은 없다. 아니 무산 계급에게 조국은 벌써 죽었다.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 세상에서 너나 할 것 없는 자본의 깊은 뿌리 속에서 여전히 북한은 남한의 주적일 뿐이고, 생김새가 다른 짐승일 뿐이다. 아무도 자신의 짐승이 귀한 줄 모르고, 사람의 생김새를 말하고 언구럭하며 서로 비하해댄다. 자신의 모습은 더욱 풍만하거나, 비대해지고, 숱마저 망가진 남한 국가조차 그 누구도 장기수가 바라는 북한의 실상이 아니라 북쪽의 희망을 말해주지 않는다. 더군다나 남한의 실상이란 언제든 떠날 채비를 마친 이들이 수도권으로 모아진, 부풀어오른 풍선 같다. 아무리 해외에서 관심을 갖고 남한의 사정을 알아주더라도, 3·8선 앞에 자유는 없다. 그들이 말하는 평화와 통일은 튼튼한 군대와 국방이라는 무력을 내세우는 저 부르주아지를 지키고자 갖은 애를 쓰는 모습이다. 언젠가 북쪽 땅을 밟아보는 건 높은 하늘 아래 공허한 바램일 뿐이다. 북쪽의 자연 경관이 아니라 경제적 효과를 먼저 기대하고, 전쟁 속 내전이라는 침략과 압박에 대한 명분을 먼저 기대하는 한, 자본이라는 영원한 감옥에 갇힌 무산자에게 녹슨 사슬을 푸는 해방이라는 쇳물은 더욱 머나먼 일이다.
양심수
활동을 하면서 감옥에 가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여길 때가 몇 번 있었다. 하나는 과격한 시위에 직접 몸 담아서 경찰에 체포되지 않았을 때고, 둘째는 국가보안법을 위반할 만큼 '이적 표현'을 하거나 어겨서 누명과 조사 끝에 수감 생활을 하지 않을 때다. 표현의 자유가 주어지더라도, 정부의 검열이 두렵지만 필요한 말도 함부로 꺼낼 수 없을 때, 정부에서는 범죄자가 아니라, 노조 사람을 수시로 잡아갔다. 간부들은 정부에게 간청하고, 일부 양심수들은 대체로 국가보안법을 위반했기 때문에 경찰에게 수사를 받고, 법적인 비용을 청구 받고, 징역 살이를 하고 있다. 정치범 특혜 논란이 붉어졌을 때도, 천지개벽인 세상에서도 노동자는 붉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쉽게 정치몰이를 당하고 징역 살이를 한다. 물론 얼마나 노골적으로 이적 표현을 쓸 수 있으면 감옥에서 수감 생활을 할 수 있을지 실감이 잘 가지는 않는다. 더불어 아무리 양심수라고 하더라도 단지 몸이 고생이라고 쓸 만큼, 그러한 편지가 도착하더라도, 그 의미가 충분히 닿지 않을 수도 있는 법이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은 달랐다. 그리고 정말로 오래됐다. 단지 체제를 극단적으로 전복시킨다는 명분으로, 누군가의 감시를 받고, 경찰에게 불려가 조사를 받을 수 있다. 그럴 때도 늘 마음을 다잡아야만 하는 부분이 생긴다. 오히려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반대로, 대체로는 사면 심사에서 탈락했음을 보여주는건가. 노동법을 위반해서 들어가야만 하는 사람들은, 한낱 노조 위원장이 아니라, 범죄 이력이 더 많은 저기 서있는 자본가이다. 자본의 투기를 더욱 조장하고, 노동자를 개무시하고 말거나, 취약한 약자들만 더욱 잡아가는 공포 앞에서도 무력해진다. 그동안 함부로 글을 쓸 수 없었던 사람들은 입만 앞서는 정치인들이 아니라, '국가보안법'을 위반해서 옥살이를 하고 있는 정치범들이었다. 그리고 단순히 정치범이 아니라, 양심수라고 부르는 게 더 알맞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책을 읽는 자유가 보장디면, 옥살이 중에는 신문 하나 겨우 펼칠 수가 없어서 세상의 소식과 차단될 수밖에 없다. 노동자들의 사면은 정치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시위에 매우 가담했거나, 이적 표현을 썼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끌려갈 수는 없다. 법 앞에서가 아니라, 한 지도자 앞에서만 노동자는 탄원을 해야하고, 청을 들어줄지 말지가 결정된다는 건, 부르주아지의 국가가 바로 서고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잘못됐다는 점을 반증하고 있다.
정치인 사면에 따른 특혜 논란은 부르주아지를 위한 특혜만이 아니라, 일종의 거래 속에서 풀려난 자유와도 같다. 모조리 참된 말을 하는 사람들은 잡아갈 수 있고, 노동의 배신이라는 성과를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두가 바라는 단죄는 정작 자유인들이 사람들에게 거는 족쇄와도 같다. 무거운 사슬을 풀 수 있을 때, 활동가들이 모르는 사람들에게 당해야만 했을 모욕들도,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국가를 잠재울 수 있는가. 또 다른 자본이라는 포화 속에서, 국가도, 국적도 심지어 가족조차 볼 수 없는 프롤레타리아는 정말로 무기력해진 세월을 아낄 수 없음을 말해준다. '국가보안법', 그 앞에서는 거리를 깨끗하게 청소하고, 가난한 프롤레타리아라는 이름마저 쓸 수 없게 만든다. 더 합법적인 운동에 대한 요구는 부르주아지의 더 많은 관심을 끌어모으고, 소시민이라는 이름으로도 충분히 호응을 얻고 말해진다. 모두 역사의 정의로운 심판이 아니라, 단죄 앞에 비겁한 죄인이었음을 깨닫는 순간일 뿐이다. 정상이라는 말은 그래서 무섭다. 꼭 필요한 이론도 먼지처럼 가루로 만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