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한국공산당 (서기원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2839252</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비판이란 해부용 칼이 아니라, 무기이다.  </description><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Thu, 15 Oct 2026 18:01:37 +0900</lastBuildDate><image><title>서기원</titl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myface/pt_19987781_639217413502022451.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02839252</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서기원</description></image><item><author>서기원</author><category>학습·배움터</category><title>『공산당 선언』 소개</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573367</link><pubDate>Thu, 15 Oct 2026 14:0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573367</guid><description><![CDATA[<br><br>『공산당 선언』 녹음본 소개]]></description></item><item><author>서기원</author><category>학습·배움터</category><title>레닌, 『러시아 자본주의 발전』 정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573175</link><pubDate>Thu, 15 Oct 2026 11:2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573175</guid><description><![CDATA[&nbsp;<br>레닌, 『러시아에서 자본주의 발전』이 집필되고 발표되던 시기 (1896년~1899년)는 레닌의 혁명가 생애에서 체포, 투옥, 그리고 시베리아 유배로 이어진 고난의 시기이자,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서 거대한 이론적 성취를 이뤄낸 결정적 전환기였다.<br>1895년 말~1897년 초에는 체포와 상트페테르부르크 감옥 생활로, 노동자 해방 투쟁 맹우에서 활동한 레닌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마르크스주의 노동자 운동을 조직하다가 1895년 말 차르 체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1년이 넘는 엄격한 옥중 생활 동안, 레닌은 가족들의 도움 (누이들과 어머니를 통한 도서 반입)을 받아 러시아 경제 통계와 자료를 수집하며 『러시아 자본주의 발전』의 구상을 다지고 집필을 시작했다.<br>1897년~1900년까지는 시베리아 슈셴스코예 유배와 집필에 몰두한 시기로, 1897년 초, 레닌은 동시베리아의 오지인 슈셴스코예 마을로 3년간의 유배 처분을 받아 이송되었다. 유배지에는 동료이자 마르크스주의 활동가였던 나데즈다 크룹스카야가 합류했고, 두 사람은 1898년에 유배지에서 결혼했다. 크룹스카야는 레닌의 든든한 동반자이자 비서로서 연구 활동을 도왔다. 차르 당국의 감시 속에서도 레닌은 젬스트보 (지방 자치회) 통계 보고서, 공장 통계, 농업 조사 등 방대한 자료를 분석하며 1898년 10월에 『러시아 자본주의 발전』 초고를 완성했다.<br>1899년 봄에 책으로 합법적으로 출판되면서 유배 생활이 끝나갈 무렵인 1899년 3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본인의 이름이 아닌 필명 (“블라디미르 일린”)으로 이 책을 합법적으로 출판하는 데 성공했다. 이 책은 당시 러시아 사회를 지배하던 인민주의자들 (보론초프, 미하일롭스키 등)의 주장, 즉 “러시아는 서구와 달리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고 농민 공동체 (미르)를 통해 곧바로 사회주의로 갈 수 있다”는 환상을 철저한 통계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으로 박살 낸 역작이었다.<br>이처럼 레닌은 물리적으로는 고립된 유배지와 감옥에 갇혀 있었으나, 이념저으로는 러시아 경제 전반에 자본주의가 이미 깊숙이 뿌리내렸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성장하고 있음을 실증적으로 증명하여, 향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을 이끌고 볼셰비키 혁명을 준비하는 이론적 토대를 완성했다.<br>&nbsp;제1장 인민주의 오류<br><br>자본주의 발전의 전체 과정은 사회적 분업에 기초한다. 자연 경제 사회가 동질적이고 자급자족적인 단위였다면, 상품 경제는 제조업이 원자재 산업 및 농업으로부터 분리되고 산업 부문이 세분화되는 전문화 과정을 거친다.<br>인민주의자들은 모든 상품 경제의 근간을 이루는 이러한 사회적 분업을 ‘인위적인 조치의 결과’로 왜곡하여 이해했다. 자본주의 발전은 불변 자본 (생산 수단)을 증가시키는 반면 가변 자본 (노동력)의 상대적 감소를 초래하며, 농업 부문에서 비농업 인구로의 이동을 가속화한다. 인민주의자들은 소규모 생산자가 몰락하고 파산하면 구매력이 약화되어 국내 시장이 위축된다고 주장했다.<br>그러나 레닌은 생산 수단을 상실한 생산자가 노동력 판매자 (임금 노동자)가 되는 과정에서, 그 생산 수단이 다른 사람의 수중에 들어가 자본으로 전화된다고 지적했다. 새로운 자본가 계급은 새로운 도구, 원자재, 소비재 등에 대한 거대한 수요를 창출하므로 국내 시장은 오히려 확대된다.<br>애덤 스미스와 훗날의 인민주의자들 (불가코프 등)은 상품 가격 및 연간 총생산물에서 불변 자본 (생산 수단 가치)을 누락하고, 이를 임금·이윤·지대라는 수입 (소득)으로만 분해하여 고찰하는 오류를 범했다.<br>마르크스의 사회적 재생산 공식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의 총생산물은 불변 자본 (c) + 가변 자본 (v) + 초과 가치 (m)으로 구성된다. 생산은 크게 생산 수단 생산 부문 (제Ⅰ부문)과 소비재 생산 부문 (제Ⅱ부문)으로 나뉘며, 단순 재생산과 축적 과정에서 이들 부문 간의 교환과 (균형)이 이루어진다.<br>자본주의적 축적의 본질은 개인 소비의 발달보다 생산적 소비 (불변 자본의 증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생산의 (무한한) 확장 추진력과 제한된 구매력 (과소 소비) 사이의 모순 속에서 경제 위기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br>인민주의자들은 국내 시장의 협소함과 자본주의의 과소 소비 성향 때문에 초과 가치나 잉여 생산물을 실현하려면 반드시 해외 시장 (외국 시장)에 의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br>그러나 레닌은 대외 무역은 자본주의 발전의 결과이자 유통의 한 형태일 뿐이며, 초과 가치 실현의 절대적 전제는 아니라고 지적했다. 자본주의는 각 산업 부문의 불균등한 발전과 겅쟁을 통해 국내외로 시장을 개척하며, 오래된 고립적 경제 단위를 파괴하고 세계를 하나의 경제 단위로 연결하는 역사적 과업을 수행한다.<br>이러한 소비와 분배 중심의 한계로 프루동, 로드베르투스, 베른슈타인, 불가코프 등 부르주아 개량주의자들과 인민주의자들은 새산력과 자본의 재생산 구조를 과학적으로 분석하지 못하고, 단순한 분배와 소비 문제, 과소소비론, 혹은 부유층의 소비 증가를 통한 위기 해소 가능성 등에 매몰되었다.<br>국내 시장의 발전은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의 발전 정도와 정확히 일치한다. 직접 생산자가 자본가와 임금 노동자로 분리되는 과정 자체가 국내 시장을 창출하는 근본 동력이다.<br><br>제2장 농민층 분화 요인과 젬스트보 통계 및 인구 조사<br>&nbsp;러시아 각 지역의 젬스트보 통계 조사는 남부 및 중부 러시아 농촌 사회가 동질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이미 자본주의적 상품 경제와 화폐 관계에 의해 내부적으로 분화되었음을 보여주는 객관적 증거를 제공한다.<br>인민주의 경제학자들 (카리셰프, 포스트니코프 등)은 명백한 통계적 수치 속에서도 ‘평균 농민’이라는 허구적 범주와 ‘할당 분류’ 방식을 고수하며 농민층 분화를 부정하고 공동체적 유대와 균등론을 주장하는 중대한 오류를 범했다.<br>노보로시아 (남러시아) 구베르니아 (포스티니코프 자료)<br>타우리다 지역 등에서 부농 (가구의 1/5)은 경작 면적의 절반 이상을 집중시키고 상업적 농업 (환금작물 재배 및 대평양 양 사육 등)을 주도한 반면, 빈농들은 토지와 쟁기 등 생산 수단을 상실했다. 부농은 가족 노동력을 초과하는 경작 면적으로 인해 다수의 농촌 임금 노동자 (일용직·정규직)를 고용했다. 반면 빈농은 생계를 위해 노동력을 판매하고 토지를 임대해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자본주의적 국내 시장이 창출되었다. 농민 부유층은 상인 자본 및 고리대금업과 결합하여 토지를 담보로 투기를 벌였으며, 이는 전통적 공동체 해체와 농민의 몰락을 가속화했다.<br>사마라 구베르니아 (노보우젠스크·니콜라예프스키 지역)<br>상층 농민은 철제 쟁기, 증기 탈곡기 등 개량 농기구의 대부분 (81.9%)을 독점하며 대규모 자본주의적 농경과 가축 사육을 결합한 반면, 빈농층은 농기구가 전무하고 가축조차 없어 생계형 일용직으로 전락했다. 매수 토지의 9/10과 임대 토지의 대다수가 소수의 농민 자본가 (상위 계급) 수중에 집중되었으나, 인민주의자들은 이를 외면하고 평균적 수치만 강조했다.&nbsp;사라토프 구베르니아 (카미신 지역 등)<br>카미신 지역의 부농 (인구의 1/3)은 작물 재배 면적의 53.3%와 막대한 가축을 소유했다. 통계학자들이 ‘산업 고용’이나 ‘할당 분류’라는 무차별적 범주를 사용하여 고용주와 임금 노동자, 부농과 빈농을 하나의 평균값으로 묶어버림으로써 농민층 분화의 실상을 가리고 자본주의적 현실을 왜곡했다고 레닌은 비판했다.&nbsp;페름 구베르니아 (크라스노우핌스크·예카테린부르크 지역)<br>상위 농민층으로 갈수록 게절적 일용직뿐만 아니라 정규직 농장 노동자 고용이 체계적으로 확립되어 자본주의적 농업 경영의 전형을 보여주었다.<br>보론초프 등 인민주의자들이 주장한 ‘농민 전체의 농기구 개선’과 달리, 개량 농기구와 비료 사용은 철저하게 상층 부농들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nbsp;오렐 구베르니아 (옐츠·트르부체프스크 지역)<br>대마 재배 등 상업적 농업이 발달한 이 지역에서도 부농들은 빈농들로부터 비료를 매입하고 토지를 대규모로 임대·집중시켰다.<br>오렐 지역 역시 토지 포기 및 노동력 매각에 따른 ‘농촌 무산층’과 토지 매수·임대 및 고용 노동을 결합한 ‘농촌 부르주아’라는 두 가지 정반대의 유형으로 명확하게 분화되었다.<br>인민주의 경제학자들 (카리셰프, 보론초프, 포스트니코프의 비판적 한계 등)은 통계 자료를 다룰 때 ‘할당 분류’와 ‘평균값’이라는 허구적 지표를 사용하여, 부농에 의한 빈농 수탈과 자본주의적 분화라는 본질을 의도적이거나 무지하게 은폐했다. 젬스트보 통계의 세부 자료를 과학적으로 재조사하면, 러시아 농촌 공동체 (미르) 내부에서 이미 소규모 생산자가 몰락하여 임금 노동자와 자본가 (농민 부르주아)로 나뉘는 자본주의적 분화가 예외 없이 관철되고 있음을 명백히 증명할 수 있다.&nbsp;보로네즈 구베르니아 (자돈스크, 젬랸스크 등 4개 군)<br>통계 자료가 방대했음에도 여러 부류를 일괄적으로 묶은 ‘중립 집단 (평균값)’ 산정 방식으로 인해 농민층 분화의 실상이 흐려지는 한계가 있었다. 산업 종사자 및 외부 노동자의 대다수는 농장 노동자, 짐꾼, 비숙련 노동자 등 ‘농촌 무산층’이었으며, 농업이 아닌 산업 (외부 고용)으로 생계를 유지했다.<br>수적으로는 매우 적지만, 곡물 판매 위주, 농장 노동자 고용, 개량 농기구 및 상업·산업 시설소유를 독점하며 자본주의적 발전을 주도했다.&nbsp;니즈니노브고로드 구베르니아 (크냐진, 마카라예브, 바질 지역)<br>법적 배정지 소유 규모와 실제 토지 소유·경작 면적은 큰 괴리가 있었으며, 부농들은 매입 토지와 임대 토지를 집중시켜 실질적 지배력을 확대했다. 비료 (분뇨) 사용량에 따라 호밀 수확량이 극단적으로 갈렸으며, 부농들이 자본을 투입해 농업 생산성을 크게 높인 반면 빈농들은 소외되었다.&nbsp;기타 주별 검토 (노브고로드, 체르니고프, 예니세이, 폴타바 등)<br>노브고로드·체르니고프 등에서는 가축 보유량에 따른 분석 결과, 상위 집단으로 갈수록 매입·임대 토지와 산업용 건물의 소유가 집중되었고, 하위 집단 (가축 없는 농민)은 토지를 떠나 임금 노동자로 전락했다.<br>시베리아 (예니세이 등)에서는 ‘할당지’라는 법적 제도가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가축이 없는 다수의 빈농과 5마리 이상을 소유한 부유층 (경작지의 73% 소유) 간의 자본주의적 분화와 임금 노동 의존 관계가 동일하게 나타났다.<br>트레리 등의 왜곡으로는 일부 인민주의 성향의 통계학자들 (비흘라예프 등)은 평등주의적 환상에 사로잡혀 공동체 내부의 차별화 과정을 부정하고 자연 경제와 인민 생산을 맹신하는 오류를 범했다.<br>지역별·구베르니아별 절대적 수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전체 가구의 상위 20% (부농)와 하위 50% (빈농)을 기준으로 재분류하는 표준화된 분석 방식을 적용했다.<br>농민 분화의 보편적 법칙으로 법적 평등인 배정지와 달리, 매수 및 임대 토지는 철저하게 상위 20%의 부농 수중에 집중되었다. 부농층은 임금 노동자 (정규직·일용직)을 고용하고 개량 농기구와 상업·산업 시설을 독점한 반면, 빈농층은 토지를 상실하고 노동력을 판매하는 무산층 (프롤레타리아트)으로 전락했다.<br>인민주의자들과 카리셰프 등은 젬스트보 통계의 명백한 수치 속에서도 ‘평균’과 ‘할당 평등’이라는 허구를 내세워 자본주의적 분화 과정을 은폐하려 했으나, 실제 통계는 러시아 농촌 사회가 이미 자본주의적 상품 경제와 계급 분화의 길에 들어섰음을 명백히 증명하고 있다.<br>러시아 전역을 포괄하는 통일된 농업 인구 조사가 부재한 상황에서, 중앙 통계 위원회가 실시한 ‘군마 인구 조사 (1888년, 1891년, 1893~1894년 등)’는 러시아 농민층의 분화 정도를 파악할 수 있는 핵심적인 전국적 자료를 제공한다. 유럽 러시아의 통계를 결합해 보면, 전체 가구의 약 22% (약 220만 가구)인 상위 부유층이 전체 가구의 56.3%를 소유한 반면, 가축이 전혀 없는 가구 (280만 가구)를 포함한 다수의 빈농층은 극심한 빈곤 상태에 놓여 있었다.<br>1888~1900년을 비교했을 때, 수탈의 심화는 시기가 지날수록 가구 수는 약 100만 가구 증가했으나 가축 수는 오히려 감소했으며, 가축이 없는 빈농 가구 비율이 27.3%에서 29.2%로 급증하여 농민에 대한 수탈과 몰락이 가속화되었음을 보여준다.<br>통계학자들이 흔히 제시하는 ‘평균 농민 예산’은 극단적인 빈곤층과 부유층의 현실을 은폐하는 허구에 불과하며, 실제 예산은 농장 규모와 가축 보유량에 따라 극단적으로 갈린다.<br>무마농 및 일마농 (하층)은 농업 소득이 미미하고 생계의 상당 부분을 임금 노동 (고용 노동)에 의존하며, 현금 적자와 생계 위기에 시달렸다. 이들의 생활 수준은 일반 농촌 임금 노동자보다도 못하거나 그 최저선에 머물렀다.<br>농촌 기업가 (상층)은 수백 루블에 달하는 순소득을 올리며, 농장 지출과 생산적 소비 (개량 농기구, 고용 노동, 상업·산업 시설 투자)가 전체 지출의 과반을 차지했다.<br>이에 따라 국내 시장의 이중적 창출이 지적되며, 무마층 (농촌 무산층)은 토지와 생산 수단을 상실하고 임금 노동자로 전락하면서 주로 소비재 시장을 창출한다.<br>부농 (농촌 부르주아)은 농업과 상업·산업을 결합하며 대규모 생산 수단과 투자를 확대하며 주로 생산 수단 시장을 창출한다.<br>이 과정 전반이 자본주의 발전과 국내 시장 형성의 역사적 필연성임을 레닌은 강조한다.<br>사브리나 등 일부 통계학자들은 마르크스주의 용어를 왜곡·남용하고 ‘평균 수요 법칙’이나 단순 평균화 방식을 적용하여 농촌 무산층과 부유층의 계급적 격차를 지워버리는 오류를 범했다.<br>마을 공동체 내에서 세금과 공과금은 할당지 면적을 기준으로 일률적으로 부과되었으나, 실제 경제 능력이 파괴된 빈농들에게 세금 부감이 가중되어 이들의 몰락을 더욱 부채질했다.<br>현대 러시아 농민들은 낙후된 조건 속에서도 이미 시장 (개인 소비, 세금 납부 등)에 깊이 예속되어 있었다. 촌락 공동체 (미르) 내부에는 경쟁, 독점, 소수 생산 집중, 다수의 무산 계급화, 착취 등 자본주의의 모든 모순이 그대로 내재되어 있었다. 인민주의자들의 주장과 달리, 러시아의 촌락 공동체는 자본주의의 대척점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있는 가장 깊고 단단한 경제적 토대였다.<br>기존의 가부장적인 농민층은 단순한 재산 불평등에 그치지 않고 완전히 해체되었으며, 농촌 주민들은 자본주의적 상품 경제를 지배하는 새로운 계급 유형으로 재편되었다. 이를 레닌은 ‘농민화’로 규정했다.<br>마르크스, 『자본』 제Ⅲ권에 나오는 노동 지대, 현물 지대, 화폐 지대의 역사적 단계를 거치면서 직접 생산자들 내부의 경제적 격차가 벌어지고 착취 수단이 싹트게 된다. 현물 지대가 화폐 지대로 전환되면서 종속 농민들은 토지와 자유를 매수당하고, 돈을 위해 고용된 무산 일용직 노동 계급이 형성된다. 부농들은 이를 바탕으로 자본가로 변모하며, 자본주의적 발전은 시골 전역으로 확산된다.<br>이에 따라 농민 분화로 창출되는 두 개의 새로운 계급이 출현한다.<br>농촌 부르주아지 (농민 상층, 가구의 1/5 이내)는 상업적 농업을 경영하는 자영농, 상업 및 산업 시설의 소유주 등으로 구성된다. 이들의 특징은 가족 노동력을 초과하는 대규모 경작을 위해 농장 노동자와 일용직 노동자를 상시 고용하며, 고리대금과 상인 자본, 토지 매수 및 임대를 통해 농촌 경제를 장악한다. 수적으로는 소수이나 생산 수단과 생산물 총량에서 현대 농촌의 주인을 자처하며, 주로 생산 수단 시장 (생산적 소비)을 확대한다.<br>농촌 무산층 (농민 하층, 전체 농가의 40~50% 이상)은 토지를 전혀 소유하지 못한 빈농뿐만 아니라, 척박한 소규모 토지만 보유한 채 생계를 위해 노동력을 판매해야 하는 토지 소유 임금 노동자 (일용직, 미숙련·건설 노동자 등)가 전형적인 대표자로 구성된다. 이들의 특징은 극도로 낮은 생활 수준과 현금 적자에 시달리며, 주로 소비재 시장 (개인적 소비)을 형성한다.<br>인민주의자들은 러시아 마을 공동체의 ‘공동체 정신’과 유럽식 자본주의 농업 (발트해 연안의 오스트제 체계 등)을 대립시키나, 실제 오스트제 지역의 농장 노동자들도 토지 소유자와 임금 노동을 겸용하고 있어 경제적 실질은 러시아 농민과 다를 바 없다. 상인 자본과 고리대금은 낡은 생산 양식을 해체하는 전제가 되지만, 그 자체만으로는 산업 자본으로 곧바로 이어지지 않으며 오히려 독립적 발달이 과도할 경우 농업 생산의 발전을 지연시킨다. 그러나 쿨락 (고리대금업자)과 진취적인 부농은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자본 축적 과정에서 한 뿌리에서 나오는 경제적 현상이다.<br>전근대적 잔재인 노동 용역 (부역 경제)은 초기 자본주의적 분화를 지연시키는 요인이었으나, 이러한 봉건적 예속과 속박이 청산될수록 농민층의 양극화와 계급 분화는 더욱 가속화된다.<br>&nbsp;제3장 지주 부역 경제<br>&nbsp;농노제 시대의 경제 체제는 영지의 토지가 영주 토지와 농민 토지 (할당지)로 나뉘며, 농민들은 자신들의 생계 수단과 노동 도구로 할당지를 경작하는 동시에, 동일한 도구로 지주의 토지를 무상으로 경작 (초과 노동)하는 구조였다.<br>코르베 경제는 생산자에게 토지를 제공하는 기반 위에 성립하며 농민에 대한 인신적·개인적 의존 (강제력)을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반면 자본주의 경제는 생산자로부터 토지를 박탈하는 기반 위에 성립한다. 코르베 경제와 그에 따르는 개인적 의존 및 무지는 농업을 빈곤과 타락, 기술적 정체 상태에 머물게 했다.<br>1861년 개혁으로 농민 농장은 지주 농장과 분리되고 토지를 매입했으나, 자본주의적 고용 노동에 필요한 조건이 완전히 성숙하지 않았다. 또한 지주들은 숲, 초원, 수경 시설 등 농민 자립에 필수적인 토지 (차단된 토지)를 계속 장악하고 있었다.<br>경제적 압력 외에 신체적 처벌, 집단 책임 등의 구속력이 잔존하는 속에서, 지주들이 농민의 도구와 가축을 이용해 토지를 경작시키고 그 대가로 토지 임대나 빚을 상환하게 하는 노동 용역 체계가 자본주의 체제와 혼합된 과도기적 형태로 지배하게 되었다. 순수 러시아 구베르니아에서는 노동 용역 제도가 우세했던 반면, 유럽 러시아 전체로는 자본주의적 지주 농업 제도가 점차 확대되는 등 상반된 체제가 얽혀 심오한 갈등과 파산을 초래했다.<br>이러한 노동 용역 제도는 일자리 고용, 데시아틴 고용, 반작물 임대, 법적 벌금 노역 등 제반 명칭 (오트라보키, 스코프시나 등)으로 불리며 밭 경작, 수확, 가금류 배달 등 농촌 생활 전반을 포괄했다. 노동 용역에 기반한 임금은 자본주의적 자유 고용에 비해 훨씬 저렴했으며, 농민들이 지주에게 개인적으로 종속되는 상태를 강제했다. 오랜 노예 생활의 잔재로 인해 농민들은 생산력 저하와 극심한 빈곤에 시달렸다.<br>인민주의자들은 노동 용역이나 반작물 임대 같은 전근대적 예속 형태를 마치 빈곤층을 돕는 유익한 제도인 것처럼 미화했으나, 이는 실질적으로 농민을 파멸시키고 농장 노동자 (무산층)로 전락시키는 수단일 뿐이었다.<br>지주 부역 경제에서 자본주의 경제로의 이행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전근대적 속박과 자본주의적 요소가 결합된 과도기를 거쳤다. 이러한 봉건적 잔재 (노동 용역, 고리대금, 예속)가 청산되고 상품 경제와 화폐 관계가 확고해질수록 농민층의 계급 분화와 자본주의적 발전은 더욱 가속화되었다.<br>상품 경제와 상업적 농업의 성장은 자연 경제와 불변 기술에 기반한 노동 용역 체제와 본질적으로 상충하며 이를 훼손한다. 노동 용역에는 소작농 (가축과 농기구를 소유한 중농)이 수행하는 ‘순환 경작’ 등의 노동 영역과 농기구가 없는 농촌 무산층 (빈농)이 수행하는 수확, 풀베기, 탈곡 등의 노동 용역이 있다. 흉작과 가축 수의 급감, 그리고 농민층의 극심한 분화로 인해 중농층이 몰락하면서 노동 용역의 기초가 무너졌다.<br>중농들은 파산하여 노동 용역을 수행하기 어려워졌고, 무산층 (빈농)은 지주에게 속박되기보다 더 유리한 조건과 현금 임금을 찾아 도시나 광산, 외부 고용 시장으로 이탈했다. 이로 인해 지주들은 기존의 노동 용역 체제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br>인민주의자들은 노동 용역 체제를 이상화하거나 영속시키려 했으나, 실제로는 자본주의적 발전과 농민층 분화로 인해 노동 용역의 뿌리가 약화되고 자본주의적 고용 노동으로 대체되는 것이 역사적 필연이었다.<br>개혁 이후 농업 기계 생산과 사용은 1860년대 도입 시기의 실패를 거쳐, 1870년대 말~1880년대의 점진적 증가, 1885년 이후 관세 부과와 위기를 거쳐, 1890년대 초부터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초기 서부 외곽 지역 중심에서 1890년대에는 남러시아 대평원 및 러시아 본토 지역으로 자본주의적 농업 및 기계화의 중심지가 확대되었다.<br>철제 쟁기, 수확기, 탈곡기 등의 생산과 판매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으며, 지주뿐만 아니라 ‘농민 부르주아 (부농)’층에서도 개량 농기구를 광범위하게 구입·사용했다. 특히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증기 발전기와 증기 탈곡기가 대거 도입되어 상업적 대규모 농업 경영의 필수 요소가 되었다.<br>곡물 가격 하락과 경쟁 격화는 지주와 부농들로 하여금 생산 비용을 절감하고 생산성을 높이도록 강제했으며, 이는 구식 수작업과 노동 용역을 몰아내고 자본주의적 기계 농업을 확산시키는 주된 동력이 되었다.<br>개혁 이후 농기계 생산과 활용은 1860년대 도입 시기의 실패, 1870~80년대의 점진적 증가를 거쳐, 1890년대 초부터 비약적인 생산 및 보급 확대 단계로 진입했다. 철제 쟁기와 수확기, 탈곡기 등의 국내 생산과 수입이 급증했으며, 특히 남부 대평원 지역을 중심으로 증기 발전기와 증기 탈곡기가 대거 도입되어 상업적 대규모 농업의 필수 요소가 되었다.<br>곡물 가격의 지속적인 하락과 경쟁 격화는 생산 비용을 절감하고 생산성을 높여야 하는 자본주의적 압력으로 작용했으며, 이는 구식 수작업과 노동 용역을 몰아내는 결정적 동력이 되었다.<br>인구가 밀집하고 노동 용역이 지배적이던 중앙 흑토 지대 등 북부·서부 지역에서, 상업적 곡물 농업이 발달한 남부 및 동부 외곽 지역 (베사라비아, 헤르손, 타우리다, 돈 지역 등)으로 매년 수백만 명의 농업 이주 노동자가 유입되었다. 이는 농촌 무산층으로 전락한 빈농들이 생계를 위해 고향을 떠나 자본주의적 임금 노동 시장으로 흡수되는 과정이었다.<br>젬스트보 통계 및 루드네브 등의 연구에 따르면, 유럽 러시아의 농업 노동자 수는 약 350만 명에 달했으며, 취업 연령 남성의 약 20%가 부농과 지주를 위한 임금 노동을 주된 작업으로 삼고 있었다. 남부 및 남동부 지역에서는 수천 명의 노동자와 고용주가 모이는 거대한 노동 시장 (카호브카 등)이 형성되었다. 전근대적 속박 관계가 점차 사라지고, 오직 노동력을 사고파는 ‘무정한 현금 지불’과 자유 경쟁에 기반한 자본주의적 고용 관계가 지배적이 되었다.<br>기계의 도입과 보급은 대규모 농장을 노동자로부터 어느 정도 독립시켜 주었으나, 동시에 이주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위협하고 임금을 지속적으로 하락시켜 농업적 노동 예비군 (과잉 인구)를 창출했다. 수확기와 증기 탈곡기 등의 도입은 노동 강도를 극단적으로 높였으며, 야간 작업의 상시화와 함께 수많은 산재 부상과 직업병 (정신적 트라우마 등)을 야기했다. 기계 사용은 성인 남성 노동을 상대적으로 저렴한 여성 및 아동 노동 (14세 미만 소년·소녀 노동자 포함)으로 대체하는 경향을 가속화했다.<br>인민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의 이주 현상을 부정적으로 보거나 노동 용역 체제를 이상화하며 자본주의적 발전을 외면했으나, 실제 농민들은 전근대적 속박보다 차라리 ‘순수한’ 자본주의적 고용 관계와 이동의 자유를 더 선호했다.<br><br>제4장 상업 농업 발전과 농산물 가공과 농업 위기<br>&nbsp;개혁 이후 인구의 상업·산업 부문 전환과 이주로 인해 농업 인구 비율은 감소했으나, 농업 노동 생산력이 향상되면서 곡물 및 감자 생산량이 크게 증가하고 상업 농업이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헤르손, 타우리다, 사마라, 사라토프 등 남동부 외곽 지역과 노보로시야 대평원 지역이 새로운 곡물 생산의 중심지로 부상하며 기존의 중앙 흑토 지방을 밀어냈다. 이 지역들은 풍부한 자유 토지를 바탕으로 대규모 자본주의적 농경과 해외 수출용 밀 생산을 주도했으며, 임금 노동자와 대규모 기계 (수확기, 증기 탈곡기 등)를 전면적으로 활용했다. 인민주의자들은 곡물 가격 하락과 상업 농업의 발전을 외면하고 자연 경제의 정체성을 옹호했으나, 실제로는 시장 경제와 자본주의적 전문화가 러시아 농업 전반을 깊숙이 재편하고 있었다.<br>발트해 연안, 서부 구베르니아, 북부 산업 지역 및 일부 중부 지역을 중심으로 분뇨 생산만을 위한 가축 사육에서 우유·버터·치즈 등 상업적 유제품 생산을 위한 낙농업으로 급격히 전환되었다. 아르텔 (협동조합)과 자본주의적 공장화가 전개되면서 야로슬라블, 볼로그다 등지에서 치즈 제조와 버터 생산이 상업적 성격을 띠며 발전했고, 원심 분리기 등 최신 기계와 순수 배양 기술이 도입되면서 생산이 집중되었다. 통합 낙농업과 소농의 종속으로 인해 대도시 인근의 대규모 유제품 시설은 공공업체와 계약을 맺고 품질 기준을 강제하며 소규모 농가들을 자본주의적 시장에 종속시켰다. 상인 자본과 목축업자들은 파산 직전의 농민들로부터 가축을 헐값에 사들이는 방식으로 소농들을 완전히 예속시키고 이들의 삶을 황폐화했다.<br>낙농업과 상업적 축산의 발달은 기존의 삼포제 윤작을 폐지하고 사료용 풀 재배와 다포제 토지 제도를 도입하는 등 지주 농업의 합리화와 기업가적 경영으로의 전환을 이끌었다. 산업 구베르니아와 낙농 지역의 농업 노동 수요는 연중으로 점차 고르게 분포되는 경향을 보였으나, 농업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과 위생 조건은 공업 노동자들보다 훨씬 열악했다. 기계의 도입과 자본주의적 착취는 노동 강도를 극단적으로 높였으며, 직업병, 산재 부상, 그리고 성인 남성 노동을 저렴한 여성 및 아동 노동으로 대체하는 경향을 심화시켰다.<br>상업적 낙농업과 축산업의 발전은 농업 기술 향상, 풀 재배 도입, 개량 농기구 보급 등 농업 생산력의 발전을 가져왔으나, 동시에 빈농들의 식량 사정 악화, 새로운 유형의 수탈과 예속, 그리고 농민층의 극심한 몰락을 동반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구베르니아 등 비흑토 낙농 지역에서도 소를 전혀 키우지 않거나 1마리만 소유한 하층 농민 (절반 이상)은 낙농업의 혜택에서 소외된 채 영양실조와 빈곤에 시달렸으며, 3마리 이상을 소유한 상위 부농층이 낙농업 수익의 대부분을 독점했다. 부농들은 클로버 등 풀 재배를 확대하고 토지 사유화를 추구하며 임금 노동자를 고용해 자본주의적 축산을 주도한 반면, 다수의 빈농들은 가난 속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전락하거나 굶주림에 시달렸다.<br>포스코프, 트베리, 블라디미르 등 흑토 지대가 아닌 지역을 중심으로 상업적 아마 재배가 급격히 확대되었으며, 이는 농민들의 주요 화폐 수입원이자 시장 경제 의존도를 높이는 핵심 요인이었다. 아마 재배는 투기적 성격을 띠며 발전했고, 프스코프 등의 지역에서는 높은 토지 임대료와 구매자 (상인)들에 대한 절대적 의존으로 인해 농민 대중이 절망적인 예속 상태에 빠졌다. 초기에는 상인 자본과 고리대금업이 농민을 지배했으나, 기계 (스카처 등)와 개량 종자 세척기 도입, 건조실·압착기 운영 등이 확산되면서 상인 자본은 점차 산업적·자본주의적 성격으로 대체되었고, 농민층 내부에서도 농촌 부르주아의 형성과 노동 용역의 자본주의적 전환이 가속화되었다.<br>개혁 이후 감자 증류를 중심으로 증류 산업이 급속히 발전했으며, 증류소의 대다수는 지주 영지 및 농업과 직접 연관되어 있었다. 감자 재배 면적과 수확량의 폭발적 증가는 3포제에서 다포제 순환으로의 전환을 이끌었으며, 노동 집약적인 뿌리작물 재배는 농촌 일용직 노동자에 대한 수요를 크게 증가시켰다.<br>사탕무 재배와 제당업은 대규모 자본주의적 기업 (주로 귀족 지주 영지)에 집중되었으며, 경작 면적과 가공량이 수배 이상 급증했다. 사탕무 밭의 경작과 수확에는 막대한 농업 임금 노동 (특히 여성과 아동 노동)이 투입되었으나, 노동자들의 숙소와 위생 조건은 극도로 열악하여 전전염병과 질병이 만연했다.<br>전분 제조, 식물성 기름 압착 (해바라기씨 등), 상업적 담배 재배 등은 농민 부르주아지 (부농)의 성장을 촉진하는 한편, 상인 자본과 고리대금업의 지배 속에서 빈농층의 파산과 무산화 (프롤레타리아화)를 가속화했다.<br>철도의 부설은 도시와 산업 중심지로의 농산물 운송을 촉진하며 과일, 채소, 멜론 등의 상업적 재배 (교외 농업)를 급격히 발전시켰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로스토프 (포레치예) 등 대도시 주변의 채소·온실 재배 지역에서는 토지 소유와 임대의 불평등이 심화되었고, 부농 (농촌 부르주아)들이 대규모 틀과 온실을 운영하며 수많은 임금 노동자를 착취했다. 교외 농업은 가부장적 농민을 자본의 힘과 일반 상품 생산 법칙에 온전히 예속시키는 산업가 (자본가적 소생산자)로 변모시켰으며, 도시와 산업의 성장은 온 마을을 교외와 같은 상품 공급처로 전환시켰다.<br>사유지뿐만 아니라 소농 경제에 이르기까지 농업은 단순한 자급자족적 자연 경제에서 벗어나 상업적·기업가적 성격으로 전환되었다. 농업의 전문화와 상업화는 농산물 교환, 제조업 생산물에 대한 수요 급증, 농기계 및 생산 수단 시장의 확대, 그리고 정규직 및 일용직 농업 노동력 시장을 전면적으로 창출했다. 자본주의는 전근대적 노동 용역과 개인적 종속 관계를 무자비하게 파괴하고 이를 비인격적인 화폐 지불 및 고용 노동 관계로 대체하여, 분산되어 있던 농업을 사회적 규모의 생산으로 전환시켰다.<br>인민주의자들은 농업 위기와 곡물 가격 하락을 근거로 자본주의의 역사적 발전 역할을 부정하려 했으나, 엥겔스의 분석대로 현재의 위기는 세계 시장 경쟁과 자본주의적 생산의 무한한 확대로 인해 오히려 구시대적 독점과 봉건적 잔재를 해체하는 과정이다. 인민주의자들은 농업 노동의 계절적 불균형 (겨울철 실업)을 근거로 자본주의가 농민을 파멸시킨다고 ‘겨울철 해방론’을 주장했으나, 실제로는 해당 이론은 허구성을 띠며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산업과 농업 간의 이동성이 높아지며, 겨울철 실업과 예속은 자본주의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전근대적 노동 용역과 불충분한 자본주의적 발전에 기인한다. 인민주의자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을 인용하여 소농 경제를 미화하고 자본주의의 진보적 역할을 부인하려 했으나, 마르크스는 소농 소유가 고립, 무지, 그리고 인간력의 거대한 낭비를 초래하는 반면, 자본주의는 과학적 농업과 농업의 사회화를 이룩한 위대한 역사적 업적임을 명백히 밝혔다.<br>토지 소유의 법적 형태 (마을 공동체 등) 자체는 자본주의 발전에 절대적 장애물이 아니며, 진정한 문제는 공동체의 신분적 고립, 높은 세금, 그리고 농민의 이동 및 정착의 자유를 박탈하는 중세적 과거의 잔재들이다.<br><br>제5장 산업 자본주의<br><br>원자재를 생산하는 농민 가족이 직접 가공하는 가내 산업은 자연 경제의 필수적 잔재로, 러시아 산업이 농업과 불가분하게 결합되어 있던 초기 형태였다. 가부장적 농업에서 분리된 첫 산업 형태는 소비자 주문에 따라 제품을 생산하는 수공업 (장인) 생산이었다. 이들은 주로 고객의 주문에 따라 무두질, 부츠 제작, 대장간 작업 등을 수행하며 농업을 보완하는 역할을 했다. 이러한 장인들의 노동 생산물은 시장에 유통되지 않고 농민의 자연 경제 테두리 안에 머물렀으며, 아직 본격적인 상품 생산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br>장인의 생산물이 시장에 등장하고 전문 상인 (매수자)이 개입하면서, 수공업자는 점차 시장을 위해 생산하는 소규모 상품 생산자로 전화되었다. 시장이 확대되고 경쟁이 심화되면서 소규모 산업가들은 치명적인 경쟁을 피하기 위해 기술적 발명과 노하우를 비밀로 유지하고 독점적 지위를 지키려 했다.<br>중앙 지방의 발전된 장인들이 경쟁과 공장제 발달을 피해 남부 등 새로운 외곽 지역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소규모 산업의 토대를 마련했다. 러시아 중부 등지에서 새로운 소규모 산업이 형성되어 주변 마을로 확산되었으며, 이는 자본이 무역에서 산업으로 이동하는 과정과 맞물려 전국적인 자본주의 관계를 확산시켰다.<br>모스크바 및 페름 지역의 수공예 인구 조사 분석 결과, 소규모 상품 생산자들은 평등하지 않고 내부적으로 극심하게 분화되어 있었다. 하위 등급은 가족 노동에 의존하며 영세한 규모를 유지하는 소규모 생산자였으며, 상위 등급 (소부르주아지)는 다수의 임금 노동자를 고용하고, 높은 노동 생산성과 개량된 도구를 바탕으로 대규모 자본주의적 작업작으로 발전한 계급이다. 소규모 산업이 초기에는 가족 노동에 기반했으나, 사업 규모가 커지면서 ‘타인의 손으로 일하게 시키는’ 착취적 자본주의적 협업 관계로 전환되었다. 생산 시설의 규모가 커질수록 노동 생산성 (노동자 1인당 생산량)이 향상되고 기술적 우위를 점하게 되며, 이는 소규모 영세 사업자들의 몰락과 임금 노동자 (농촌 프롤레타리아트) 대중의 형성을 가속화하는 근본 동력이 되었다.<br>소규모 상품 생산자들이 다수의 노동자를 한 자본가의 지휘 아래 동일한 노동 장소에소 고용하여 대규모로 생산을 조직할 때 비로소 자본주의적 생산이 시작된다. 이는 개별 노동자의 숙련도 차이를 해소하고 생산 비용을 절감하며 안전성을 부여한다. 이에 따라 자본주의적 협업의 시작이 되며, 상품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분산된 소규모 생산자들은 대규모 도매 시장에 직접 접근하기 어려워지고, 이 틈을 타 상인 자본 (매수자)이 유통을 장악하게 된다. 상인 자본은 고리대금과 결합하여 생산자들을 철저히 예속시키고 착취한다. 매수자들이 단순히 완제품을 매입하는 것을 넘어 원자재를 공급하고 가공을 지시하는 단계로 나아가면서, 상인 자본은 산업 자본으로 전환되고 자본주의적 가내 산업이 형성된다.<br>자본주의 초기 단계에서는 산업가와 농민이 거의 구분되지 않으나, 사업 규모가 커질수록 부유한 산업가 (부농·소부르주아)는 농업 노동자를 고용하고 농업 방식을 개선하는 반면, 빈농은 파산하여 임금 노동자로 전락한다. 인민주의자들은 공업 농업의 결합이 ‘인민 생산’의 정상적 형태라고 주장했으나, 실제 역사적 과정에서 이는 자연 경제의 잔재이거나 자본주의적 발전 속에서 농민층 분화와 수탈을 매개하는 다양한 과도적 형태로 나타났다. 이러한 중세적 장벽과 신분적 구분에 갇혀 있던 자본주의 이전의 농촌 경제는 자본주의의 침투와 경쟁, 그리고 상인 자본과 화폐 경제의 발전 속에서 산산조각이 나며 거대한 국가 시장 및 세계 시장으로 통합되었다.<br>&nbsp;제6장 공장제 수공업과 가내 공업<br>&nbsp;공장제 수공업 (매뉴팩처)은 다수의 노동자가 작업장에 모여 체계적인 분업을 수행하는 자본주의 초기 단계의 생산 형태이다. 제조업은 대규모 기계 산업으로 완전히 전환되기 전 단계로, 여전히 수작업 기술을 기반으로 한다. 이로 인해 도시 수공예와 농촌의 가내 노동 (재택 공장 노동)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며, 대자본이 원자재 구매와 전국적 시장 판매를 통제하면서 수많은 무산 노동자 대중을 지배하는 구조를 형성한다. 경제 문헌과 공식 통계는 가내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수공예 산업’으로, 작업장의 노동자를 ‘공장’으로 인위적으로 분리하여 과학적 현실을 왜곡했으나, 실제로는 단일한 자본주의적 제조 체계의 일부이다.<br>직조 및 섬유 산업<br>면직, 견직, 양모 등 직조 산업은 대자본가들이 원자재를 대량 구매하여 자체 작업장에서 가공하거나 수공예 농민들에게 가내 노동으로 배분하는 방식으로 조직되었다. 이바노프 (블라디미르) 같은 대규모 비농업 제조 중심지가 형성되었으며, 직조공들은 토지와 분리되어 자본가에게 완전히 예속된 프롤레타리아 인구로 전화되었다.<br>가축 및 축산물 가공 산업 (가죽·모피·신발)&nbsp;보고로드스코예 (니즈니노브고로드), 킴리 (트베리), 사라풀 등지에서는 무두질, 신발 제작, 모피 가공 등이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적 제조업의 중심지를 이루었다. 대자본가들이 연쇄 무두질 공장과 대규모 작업장을 소유하고, 수많은 외부 노동자와 가내 노동자들을 지배하며 도시적 생활 양식을 지닌 숙련된 장인 및 노동자 인구를 배출했다.<br>금속 가공 및 기타 제조업 (파블로보·툴라 등)&nbsp;자물쇠와 칼붙이 (파블로보), 사모바르 및 아코디언 (툴라), 단추 및 빗 제작 등은 엄격한 분업에 기반한 수작업 생산과 가내 노동이 결합된 대표적 제조업 형태였다. 살인적인 장시간 노동 (14~18시간)과 물품 대금 지불 등 극심한 착취가 자행되었으며, 대자본의 지휘 아래 수많은 소규모 생산자와 가내 노동자들이 단일한 생산 기계의 부품처럼 포섭되었다.<br>제조업은 기계 대공업으로 완전히 전환되기 전 단계로 수작업 생산을 기반으로 하며, 분업의 발전과 확장이 매우 느리게 진행되어 수십 년 또는 수백 년 동안 그 형태를 유지한다. 생산 과정을 가장 단순한 세부 작업으로 분할하는 분업은 향후 대규모 기계 생산을 도입하기 위한 필수적인 준비 단계이자, 숙련된 노동자를 양성하는 기초가 되었다. 제조업의 세부 분업은 높은 수준의 기술 (기교)을 발전시키는 한편, 노동자들의 신체를 기형적으로 만들고 (척추 굽음, 가슴 발달 저해 등) 극심한 착취와 불구 상태로 내몰았다.<br>지역적 분업과 공업·농업의 분리로 인해 원자재의 가용성과 운송 비용의 제약으로 인해 특정 지역이 특정 제품 생산을 전문화하는 영토적 노동 분업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제조업이 발전하면서 주민들이 농업을 완전히 포기하고 상업·산업적 성격에 정착한 비농업 중심지 (도시 및 산업 마을)가 형성되었다. 제조업은 소규모 수공업을 완전히 소멸시키지 못하고 주변 마을의 농민-공업가들을 포섭하며, 대규모 기계 산업으로 나아가는 과도기적 성격을 지녔다.<br>제조업 단계에서는 대공장 소유주가 원자재 구매, 도매 판매뿐만 아니라 소주주와 가내 노동자들에게 자재를 유통하고 제품을 매입하는 상인 자본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다. 자본가들은 작업장 건설 비용을 줄이고 시장 변화에 즉각 대응하기 위해 수많은 농촌 무산자들에게 가내 노동을 배분하였고, 이는 ‘발한 체계 (생체 체계)’, 식량 지급 체계, 채무 노예제 등 가장 가혹한 착취를 낳았다.<br>공식 통계와 인민주의자들이 ‘수공예 산업’으로 분류한 대다수의 영세 노동자들은 실제로는 자본가에게 완전히 종속된 200만 명 이상의 자본주의적 가내 노동자 및 임금 노동자 대중이었다.<br><br>제7장 대규모 기계 공업<br><br>마르크스가 지적했듯 대규모 기계 공업은 생산을 위한 기계 체계의 도입이라는 자본주의의 가장 높은 발전 단계에서 성립한다. 공장제 수공업에서 기계 공업으로의 전환은 수세기 동안 축적된 장인의 수작업 기술을 파괴하는 완전한 기술 혁명이다.<br>인민주의 경제학자들은 순진하게 자본주의를 단순히 공장 산업과 동일시하고, 공장 통계에만 의존하며 자본주의의 역사적 사명을 파악하려 했다. 그러나 초기 공식 공장 통계 (상무제조부 및 주지사 보고서 등)는 명확한 기준 없이 소규모 장인·수공예 시설, 제분소, 가내 노동자들까지 무분별하게 ‘공장’으로 합산하여 실제보다 수치를 심각하게 과장하거나 왜곡했다.<br>섬유 및 면직물 산업&nbsp;면방적과 직조 분야에서는 동력 직기와 증기 동력의 도입 등 대규모 기계 생산이 엄청난 속도로 발전했다. 다만 초기 통계는 가내 노동자와 공장 노동자를 혼재시켜 실제 대규모 기계 공장 노동자의 성장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 우랄 산맥은 농노제의 잔재 (토지 무상 임대 등을 통한 저임금 구조, 구식 내풍로 사용 등)가 자본주의 전성기까지 이어지면서 기술적 후진성과 침체에 빠졌다. 남부 광산 지역 (도네츠 문지 등)은 전통과 신분적 구분을 타파하고 세계 자본과 기계 설비를 적극 유입하여,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폭발적인 속도로 철강 및 석탄 생산을 증대시켰다. 바쿠 등 코카서스 지역의 석유 생산은 미국산을 대체하며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자본주의 발전은 개인적 소비재보다도 생산 수단과 연료 같은 생산적 소비새 생산 부문에서 훨씬 더 빠르게 진행되었다.<br>1865년에서 1890년 사이 유럽 러시아의 공장 노동자 총 수는 약 50만 명에서 84만 명 이상으로 65% 증가했으며, 광부 수는 2배 이상 (107% 증가), 철도 노동자까지 포함할 경우 대규모 자본주의 기업의 노동자 수는 25년 만에 두 배 이상 늘어나 일반 인구 및 도시 인구 증가율을 크게 상회했다. 인민주의자들은 공식 공장 통계가 수공예 시설과 가내 노동자까지 무분별하게 포함하여 부풀려졌다는 점을 악용하거나, 전체 인구 대비 공장 노동자의 비율 (약 1% 등)만 강조하며 자본주의의 발전 가능성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성장을 의도적으로 축소·왜곡했다. 1897년 인구 조사를 바탕으로 분석할 때, 러시아 전체 인구는 농업 인구 (농민층 내부의 부농·중농·빈농/무산층 분화)와 상업·산업 인구 (대부르주아, 소부르주아, 그리고 다수의 프롤레타리아 및 준프롤레타리아트)로 확고하게 계급 분화가 이루어진 자본주의 사회였다.<br>증기 기관의 총 마력 용량은 16년 만에 3배로 증가했으며, 특히 상트페테르부르크·모스크바 외에 폴란드 (페트로코프)와 남부 (예카테리노슬라프) 등 신흥 산업 중심지가 급부상했다. 개인 소비재 생산보다 철도, 광업, 야금 등 생산적 소비재 (생산 수단)를 생산하는 산업이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전체 공장 수 대비 100명 이상의 노동자를 고용한 대형 공장의 비중은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1890년에는 전체 공장 노동자의 71%, 생산량의 57% 이상을 집중시켰다. 광업 부문에서는 100명 이상 고용 기업에 전체 광부의 84.5%가 집중되는 등 극심한 생산 집중 현상을 보였다.<br>도시뿐만 아니라 농촌 공장 중심지 (오레호보 주예보 등)로 산업이 빠르게 확산되었으며, 농촌 지역의 대규모 공장들은 고립된 외딴 지역까지 깊숙이 침투하여 농민들을 거대한 자본주의적 임금 노동자 대중으로 흡수했다. 이러한 연료 및 건설 산업의 자본주의화로 인해 목재 산업은 노예적 조건과 가혹한 착취 속에 최저 임금의 농촌 프롤레타리아트를 양산했고, 도시 및 철도 건설 호황에 따른 건설 산업은 100만 명 이상의 이주 건설 노동자층을 형성하며 새로운 산업 프롤레타리아트의 발전을 가속화했다.<br>인민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노동자와 토지를 완전히 분리하지 못했다고 주장했으나, 모스크바 위생 통계 (데멘티예프의 조사) 등 실증적 자료에 따르면 수동 공장 노동자와 달리 기계화된 대규모 공장 노동자들은 토지 (농업)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고 정규직 공장 노동층을 형성했다. 대규모 기계 산업은 세대를 이어온 공장 계보를 지닌 무산 노동자 (프롤레타리아트)를 창출했으며, 대형 공장일수록 연중 가동 일수가 길어 (평균 연간 253일 이상) 이들을 전통적인 가부장적 농업 및 생활 전통으로부터 완전히 영구적으로 분리시켰다.<br>소규모 상품 생산 (농민 산업), 자본주의적 공장제 수공업 (매뉴팩처)), 대규모 공장 및 기계 산업은 서로 단절된 것이 아니라 긴밀하게 연관된 연속적인 발전 단계이다. 사바 모로조프 같은 대다수 거대 공장주들 역시 과거에는 가장 영세한 소규모 수공예인이었다.<br>기계 체계의 진화로는, 소규모 상품 생산은 태곳적부터 이어져 온 원시적 수작업 기술과 전통적 농민의 가공 방식을 유지한다. 공장제 수공업은 분업을 도입하여 기술적 변화를 가져오나, 여전히 수작업에 기반하여 발전 속도가 느리다. 대규모 기계 산업은 수작업 기술을 압도하고 과학을 체계적으로 적용하는 근본적인 기술 혁명을 일으킨다. 소규모 생산 단계에서는 대자본이나 프롤레타리아트가 미미하나, 제조업 단계에서 양극화가 진행되며, 대규모 기계 산업에 이르러 모든 저해 요인이 사라지고 자본주의적 모순이 극점에 달한다. 좁은 지역 시장을 상대로 하던 소규모 생산은 비교적 안정적이나 기술 정체를 수반한다. 반면 전국적·세계적 시장을 상대하는 공장제와 기계 공업은 호황과 불황의 순환 속에서 극심한 불안전성과 대규모 실업자 예비군을 창출한다.<br>소규모 산업가들은 농민적 외양을 유지하나, 제조업을 거쳐 대규모 기계 산업에 이르면 농업과 완전히 분리되어 전통적 삶의 방식과 단절된 정규직 공장 노동층 (프롤레타리아트)을 형성한다. (모스크바 위생 통계 등에서도 기계화된 공장일수록 토지로 돌아가는 비율이 급감함을 증명함) 대규모 기계 산업은 낡은 가부장적 고립을 파괴하고 전국적인 인구 이동성 (이주 노동)을 창출하며, 노동의 사회화에 따른 여성과 청소년의 사회적 생산 참가를 촉진한다.<br>국내 시장의 확대로 인해 생산 수단과 연료 등 생산적 소비재에 대한 수요와 개인 소비재 시장을 동시에 폭발적으로 확장시키며 인구를 농업에서 상업·산업 부문으로 전면적으로 전환시킨다.<br>&nbsp;제8장 국내 시장 형성<br>&nbsp;러시아의 철도 체계는 1865년에서 1890년 사이 7배 이상 증가했으며, 철도 운송량과 수상 운송량, 외항선 수용량 역시 비약적으로 폭증하여 전국적인 상품 유통과 국내 시장 형성의 물리적 기반을 다졌다. 도시 인구는 농촌 인구보다 두 배 빠른 속도로 증가했으며, 특히 5만 명 이상의 대규모 산업 중심지로 인구와 자본이 급격히 집중되었다. 중부 농업 지역의 과잉 인구가 남부·동부의 새로운 외각 지역으로 대거 이주 (식민화)하면서 새로운 농업 인구와 시장을 형성하는 동시에, 비농업 이주 노동자 (500만~600만 명 이상)가 급증하여 자본주의적 임금 노동 계급을 다수 배출했다.<br>농업, 공장, 광산, 철도, 건설, 목재 등 제반 부문에서 성인 남성 노동자의 절반 가량이 임금 노동에 종사하게 되었으며, 이들은 토지와 완전히 결합된 상태에서 점차 분리되어 자본주의적 실업 예비군 (상대적 초과 인구)을 구성했다. 중앙 농업 지역의 저임금 노동력이 자본주의적으로 발달한 남부·동부 외곽 지역과 대도시·산업 주(州)로 유입되면서 화폐 경제가 자연 경제를 대체하고, 농촌과 산업 전반에서 자본주의적 관계와 임금 노동 시장이 확고하게 뿌리내렸다. 중부 지역의 대형 공장들은 기존 시장의 한계를 넘어 남부 노보로시야, 북코카서스, 시베리아 등 신흥 식민지 지역으로 시장을 급속히 확장하며 세계 상품 유통 영역으로 편입시켰다.<br>이러한 수작업 생산을 압도하는 사회적 노동 생산력의 발전 (기계제 대공업 도입)으로 분산된 소규모 경제를 통합하고 전국적·세계적 규모로 노동을 집중시키는 노동의 사회화 (개인적 종속 관계 타파, 인구 이동성 창출, 산업 중심지 확대, 국민 사고방식의 변화)가 이뤄졌으며, 자본주의 발전은 호황과 불황, 부문 간 불균형 속에서 진행되며, 낡은 가부장적 제도를 파괴하는 동시에 극심한 사회적 모순과 노동자 계급에 대한 착취를 심화시켰다. 인민주의자들은 이러한 자본주의의 객관적 발전 과정을 오해하고 왜곡하여 공상적이고 소부르주아적인 시각에 머물렀다.]]></description></item><item><author>서기원</author><category>입장·보고</category><title>레닌, 『러시아 자본주의 발전』 보고</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572767</link><pubDate>Thu, 15 Oct 2026 01:3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572767</guid><description><![CDATA[<br>레닌, 『러시아 자본주의 발전』은 레닌의 문체를 최대한 살리면서 가독성을 높였다. 초기 수작업으로 진행했던 기록을 그대로 보존했다. 기존 김진수 역본 (태백)에 비해 미진한 부분이 있을 수 있지만, 원문의 결을 복원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nbsp;<br>수작업의 의의를 담은 자료이다.&nbsp;<br>]]></description></item><item><author>서기원</author><category>정치경제학</category><title>자본주의 체제와 범죄의 상관관계</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572747</link><pubDate>Thu, 15 Oct 2026 01:0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572747</guid><description><![CDATA[<br>자본주의 체제와 반동적 범죄의 구조적 실태<br>자본주의 체제와 고도의 범죄율 사이에는 매우 높은 상관관계가 존재하며, 이는 과거 여러 혁명 이론적 저술에서도 입증된 바 있다. 특히 현대 사회에 이르러 발생하는 ‘묻지마 범죄 (이상동기 범죄)’는 세대를 막론하고 전방위적으로 출현한다는 특징을 보인다. 이러한 반동적 범죄의 실상은 가해자 개인의 비도덕적 일탈이나 심리적 이상만으로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으며, 정치경제학적 구조 요인으로 접근할 때 비로소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정치적·경제적 변동이 극심해질수록 범죄 양상이 급격히 증폭하는 까닭은, 시장 경쟁 구도에서 밀려난 취약 고령층의 계급적 몰락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의 경우 66세 이상 노인의 상대적 빈곤율이 40% 내외에 달하며, 2024년 경찰청 범죄 통계에서는 60세 이상 고령층 피의자 비중이 18.8%를 기록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20대 피의자 비중을 추월했다. 특히 최근 5년간 71세 이상 고령층의 절도 범죄가 약 68% 폭증한 지표는, 사회적 생산 기구에서 배제된 고령층이 생존을 위협받는 현실을 단적으로 입증한다.   &nbsp;  자본주의 체제 내 계급 간 경쟁이 심화할수록 구조적 가장자리에 몰린 이들일수록 범죄 조건에 취약해진다는 점은 명백하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모순적으로 감옥을 선택하는 생계형 범죄나, 불특정 다수의 피해자를 낳는 ‘묻지마 범죄’는 모두 이들의 경제적 취약성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나아가 정치적 변동 속에서 이들이 구조적 격차를 체제적 층위에서 자각하고 혁명적 동력으로 전환할 계급 의식 능력을 상실했다는 점을 드러낸다. 실업 상태에 처했거나 정년퇴직자, 혹은 장기간 노동 시장에서 이탈해 있는 ‘룸펜’ 상태의 집단에서 나타나는 범죄율 상승은 단순히 가해자가 일으킨 법적 불안정 상태로만 볼 수 없다. 이는 자본주의 체제 내 정치적 지형 및 기존 법적 조치의 한계를 드러내며, 부르주아적 국가 기구가 방관해 온 공권력과 경찰력 통제의 근본적 한계를 명확히 수렴한다.   &nbsp;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정년퇴직이나 신체적 노화로 노동 생산성을 상실한 고령층은 ‘상대적 잉여 인구’로 전락한다. 부르주아 국가 기구의 부실한 제도적 안전 기구만을 제공함에 따라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은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 의도적으로 법적 불안정 상태를 야기하기도 한다. 법무부 수용자 통계에 따르면 교도소 재소자 중 저소득층 및 무직자의 비율이 70% 이상을 차지하며, 65세 이상 수용자 수 역시 최근 10년 사이에 2배 이상 증가했다. 이는 형벌 기구여야 할 교도소가 모순적으로 최소한의 의식주와 의료 보장을 제공받는 ‘대체 기구’로 전락했음을 보여주는 ‘빈곤의 사법화’ 현상이다.  &nbsp;  한편, 장기 구직자나 실업자로 구성된 ‘룸펜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의 증가는 무동기 범죄의 직접적인 동인으로 작용한다. 자본주의 노동 시장에서 배제되어 파편화된 개인들은 공동체적 연대나 조직화의 기회를 잃고, 체제 모순을 자각하여 혁명적 동력으로 전환할 계급 의식을 상실하게 된다. 대검찰청과 경찰청의 이상동기 범죄 피의자 분석에서도 가해자의 70% 이상이 장기 무직이나 일용직 상태였으며, 극심한 사회적 고립에 처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매체로 인해 가중되는 상대적 박탈감과 사회적 배제 속에서, 체제 모순의 원인을 정확히 타격하지 못하는 이들의 분노는 불특정 다수나 무고한 대상을 향한 무차별적이고 반동적인 폭력의 형태로 일그러져 분출된다.  &nbsp;  이와 같은 자본주의적 범죄 원리는 한국뿐만 아니라 다른 주요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동일하게 포착된다.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일본에서는 전체 형법범 중 65세 이상 비율이 20%를 상회하며, 출소 후 생계 수단이 없는 고령층이 식료품을 훔쳐 교도소로 재입소하는 생계형 절도 (만비키) 현상이 고착화되었다. 동시에 사회적 노동 시장에서 완전히 탈락한 장기 은둔·무직 계급이 자행하는 길거리 무차별 난동인 ‘토오리마’ 범죄가 지속적인 사회적 위협이 되고 있다. 미국 역시 극단적인 신자유주의적 계급 분화와 취약한 의료 보장 체계로 인해 노년층의 의료비 파산 및 생계형 범죄가 급증하고 있으며, 사회적 소외와 총기 유통이 결합하여 연간 수백 건의 무차별 대량 총기 난사라는 치명적인 형태로 발현되고 있다.  &nbsp;  결국 현대 사회에서 분출하는 노인 범죄와 묻지마 범죄는 자본주의 체제 내의 정치적 지형과 국가 사법 기구가 지닌 근본적 한계를 명확히 드러낸다. 국가 기구가 계급적 분화의 구조적 원인을 도외시한 채 경찰력 강화나 형벌 수위 상향과 같은 응징적 통제 조치에만 의존하는 것은 부르주아 기구의 방관이자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사회적 생산 기구에서 밀려난 잉여 인구와 룸펜 계급의 범죄를 근본적으로 예방하기 위해서는 사법적 통제에 머무르는 대신, 세대를 아울러&nbsp;정치경제학적 비판적 층위에서 사회적 생존 보장 체계를 재건하고 계급적 배제와 분화를 해소하는 혁명적 변혁이 필수적이다.]]></description></item><item><author>서기원</author><category>입장·보고</category><title>민족 문제에 관하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568664</link><pubDate>Mon, 12 Oct 2026 23:1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568664</guid><description><![CDATA[  &nbsp; 마르크스주의와 민족 문제&nbsp;  &nbsp;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제기될 때, 그것은 결국 ‘국가’라는 틀로 포섭된다는 근본적 한계를 지닌다. 그러나 이 국가의 본질이란 추상적인 언어적 담론에서 벗어나는 순간, 특수한 문제에서 보편적인 문제로 변질되기 마련이다. 우리가 ‘한국인’이라 칭할 때의 국적은 사실상 민족의 일환으로 작용하는 한계를 지님과 동시에, 부르주아 국가인 ‘대한민국’으로 수렴된다는 한계를 함께 가진다. 마르크스주의가 투쟁해야 할 지점이 바로 여기다.  &nbsp;  이와 관련하여 스탈린, 『마르크스주의와 민족 문제』는 이론적으로 참고할 만한 대목을 제시한다. 이는 사회민주주의적 한계를 직시하게 함과 동시에, 계급 투쟁적 관점에서 ‘민족 문제’가 정체성으로 고착화되는 순간을 포착해낸다. ‘한국인’에 대한 추상적 담론에 머무는 사회학자들의 편견 어린 시선과는 달리, 마르크스주의자는 적극적으로 국제주의를 지지하고 인터내셔널의 대의를 옹호하는 한에서만 자신의 당위성을 증명할 수 있다. 이는 당 내부의 사정에 기인하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핵심은 부르주아 국가 체계로 포섭되는 현상에 맞서 노동자 국가의 방향성을 현실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라는 중대한 논의의 출발점이 된다는 데 있다.   &nbsp;이 문제는 비단 한국인의 정체성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피식민지 및 제3세계의 민족의 경우에도 ‘민족 문제’로 발생하는 제반 분쟁에 대한 해석은, 결국 부르주아 질서로 포섭된 국적의 문제로 귀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단순히 ‘지지 표명’에 그쳐서는 안 되며, 현상의 전개가 ‘자본주의적 객관적 본질을 얼마나 포착하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민족 문제는 단지 언어적 구상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 현상과 결합된 사회·정치적 본질이라는 마르크스주의적 시각에서 출발해야 옳다.   &nbsp;  특히 사회민주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오류가 중첩되어 폐쇄적인 사회배외주의로 낙오하거나 수정주의적 변절로 이어지는 경향이 다수 포착된다. 자본주의 국가 내 갈등이 심화되는 현 상황일수록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국제주의적 노력이 필수적이다. 여기서 스탈린, 『마르크스주의와 민족 문제』를 언급하는 이유는 강력한 국가 통제에 대한 원칙을 지지하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국제주의적 비판점을 명확히 하여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탈피하고 전 노동 계급으로 합류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자본주의 국가에 종속된 노동 계급이라는 공허한 모순을 지적하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주체가 되는 국제 질서를 객관적으로 분석해야 할 필요성을 증명하는 일이다.   &nbsp;  ‘국민성’과 ‘민족 자결권’을 다룰 때 주의해야 할 점은, 피억압 민족의 해방 투쟁에 대한 단편적인 지지 표명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민족 해방 운동은 혁명 투쟁의 진전 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를 철저히 유념할수록 자국 내에서 발생하는 계급 분화 현상을 우선적으로 목격하고, 그 전개 과정을 파악·분석하는 것이 급선무다. 이는 관념론적 수사와 절연함과 동시에, 노동 계급의 실질적 단결을 위한 당면 과제에 집중함을 의미한다.   &nbsp;“자국의 민족 문제란 곧 프롤레타리아 국제 문제이다.” 이는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시사점이다. 국가 권력이 자행하는 노동 계급 탄압과 운동 저지, 그리고 과거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선진적 노력을 왜곡·폄하하는 시각에 대해서도 단호히 투쟁해야 한다.   &nbsp;  현대의 ‘인민의 벗’들이 보여주는 ‘철학의 빈곤’은, 마르크스가 『철학의 빈곤』에서 비판했던 소부르주아적 경향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그 결과 국가 내부에서의 관료주의적 타협, 그리고 농촌·농민 내부의 계급적 분화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전근대적 시각을 반복할 뿐이다.&nbsp;독립과 민족 해방이라는 틀에 갇혀 노동 계급 투쟁의 전말을 직시하지 못하는 현대 ‘인민의 벗들’에 대한 경고는 여전히 유효하다. 반동적 계급 시각을 습관적으로 답습하는 부류를 끊어내지 못하고 방관하는 당파적 한계 극복을 위해서라도, 부르주아 경제의 실체를 국내 정세에 연관하여 깊이 분석해야 한다.   &nbsp;  행동에 앞서 선행되어야 할 이론적 분석을 소홀히 할 경우, 운동은 결국 관념론적 단상에 그치고 만다. 현대 사회로 진입할수록 산업 발달의 조건은 한층 선진화되었음에도 이론이 도리어 후퇴하는 이유는, 민족 문제를 여전히 부르주아 국가의 시각 내에 국한하여 해석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시각과 단호히 절연해야 한다.&nbsp;  &nbsp;  코민테른과 인터내셔널의 역사적 의의를 되짚지 못하는 자들, 자본주의 체제 내에 안주하며 전 인민의 노동 해방 투쟁을 방해하는 ‘문명자’들의 체제 타협적 습관이야말로 가장 노골적인 노동 계급에 대한 배반이자 질타이다. 이는 ‘타협주의’이자 ‘수정주의’에 고착된 체제 안주적 태도일 뿐이다.  &nbsp;  인민을 대변한다는 명목의 공화국에서조차 민족성만을 강조한 채, 인터내셔널의 취지와 국제 노동 계급의 단결을 호도하고 실패한 역사를 되풀이하는 ‘어리석은 노인’들의 정치는 현대 ‘인민의 벗들’이 보여주는 노동 해방 각오조차 무기력한 ‘이빨 빠진 호랑이’에 불과하다. 이는 한국 인민 사회에서 ‘수령제’가 보여주는 또 다른 형태의 무산 계급 분단적 비극일 뿐이다.&nbsp;]]></description></item><item><author>서기원</author><category>김남주 </category><title>노동 해방의 숨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561820</link><pubDate>Thu, 08 Oct 2026 23:0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561820</guid><description><![CDATA[<br>시인의 흔적을 찾아서<br>문득 전라도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경상도 일대는 자주 방문했지만, 전라도 광주와 해남 땅긑마을로 향하는 길은 살면서 처음이었다. 일주일 남짓의 여정을 계획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김남주 시인의 생가와 묘역을 직접 둘러보고 싶어서였다.  &nbsp;  여정의 시작은 시인의 생가가 있는 해남이었다. 작은 고속버스가 드물게 다니는 해남의 한 시골 마을. 배차 간격이 긴 버스를 기다리기보다 택시에 올라타 기사님께 김남주 시인의 생가로 가달라고 부탁드렸다. 기사님은 “요즘 같은 세상에 젊은이가 김남주 시인을 찾아가다니 대단하다”며 흥미로운 표정으로 차를 몰았다.  &nbsp;  도착한 곳은 정말 논밭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그 한가운데 작은 초가집 한 채가 덜렁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 앞에 서 있는 시인의 동상은 무엇보다 우직하고 당당했다. 생가 옆에 무성하게 자란 대나무 숲, 그리고 그가 겪었던 오랜 옥고의 세월을 증언하듯 보존되어 있던 감옥의 흔적을 마주하니 묵직한 여운이 밀려왔다. 치열했던 그의 땀이 생생했다.  &nbsp;  광주로 이동하여 찾아간 곳은 5·18민주묘지였다. 여러 민주화 주역들이 안장된 그곳에서 안내원분의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군부 독재 시절의 잔혹한 진압과 희생자들, 그리고 아직도 신원을 찾지 못한 채 남아있는 수많은 비극의 참상을 접했다. 예전에 서울에서 방문했던 ‘서대문 형무소’나 ‘대공분실’과는 또 다른 무게감이었다. 화면으로 접할 때는 재를 뿌리는 추모 공간 정도로만 생각했으나, 직접 눈으로 확인한 그 넓은 땅 전체가 묘역이라는 점이었다. 세대 간의 시간 차이로 그 시절을 직접 겪지는 못했지만, 왜곡되지 않은 시선으로 역사의 숨결을 온전히 마주할 수 있었다.  &nbsp;  이어 김남주 시인의 기념관이 있다는 모 대학교 인문 강당을 찾았다. 교무실에 사정을 전하여 내부를 둘러볼 수 있었다. 그곳에는 생전에 출판된 그의 시집들과 보존된 기록물들이 가지런히 전시되어 있었고, 시인의 발자취를 다시 한번 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해남으로 다시 내려가 둘러본 땅끝 마을의 바다는 아득할 만큼 넓었다. 케이블카 대신 경사를 따라 직접 걸어 오르며 마주한 바다, 그리고 유리가 깔린 전망대 바닥 너머의 풍경은 장관이었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행군 군인들을 촬영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스산하리만치 긴 버스 대기 시간과 드문 배차 간격을 겪으며, 이곳에서 생계를 이어가는 청년들과 학생들의 정주 여건이 쉽지만은 않겠단 생각이 들기도 했다.  &nbsp;  다시 광주 시내로 돌아와 5·18 유적들을 살펴보았다. 특히 당시 헬기 사격의 총탄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건물을 올려다보았을 때는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nbsp;  &nbsp;  이번 여정은 겉으로 보기엔 광주 민주화 운동의 유적지를 둘러본 역사 탐방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여행은 오롯이 김남주 시인을 기리고 그의 발자취를 추적한 여정이었다.  &nbsp;  광주와 해남은 여전히 깊은 여운을 준다. 그 여운이란 단순히 ‘민주화’라는 거창한 정치적 구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우직한 역사 속에서 이어져 온 혁명의 숨결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nbsp;<br>&lt;김남주 시인 동상&gt;<br><br>&lt;광주 내 5·18 추념탑&gt;<br><br>&lt;광주 5·18 광장&gt;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1008/pimg_639270976463178064.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561820</link></image></item><item><author>서기원</author><category>기록 해방</category><title>자본과 소생산자의 몰락</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561617</link><pubDate>Thu, 08 Oct 2026 21:5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561617</guid><description><![CDATA[<br>길 위에서 마주한 자본<br>사업이 불안정할 때 지인을 초대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2023년 무렵, 정규직으로 입사했던 첫 회사를 퇴사하고 생계를 유지할 여력조차 바닥을 치던 때였다. 사업도 어느덧 끝물을 향해 가고 있었다. 사업장 바로 옆 구역에는 대형 기업형 카페가 들어섰다. 대자본을 쥔 유명 기업가가 찾아왔을 때 지인과 직접 방문해 보았지만, 소자본으로 버티던 사업장은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점심 무렵 찾아오는 동네 지인들이나 간간이 들르는 여행객만이 자리를 채울 뿐이었다.   &nbsp;  본의 아니게 사업장 대표를 맡고 있었으나, 훗날 사업을 정리하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탕감받기 전까지 사업장에 갚지 못한 대출금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가족이 함께 운영하는 중소 사업장의 경우, 이처럼 누적되는 채무를 명확히 파악하지 못한 채 생계를 위해 가업처럼 사업을 계속 이어나가야 하는 비극이 종종 발생한다.   &nbsp;  당시 아파트에 거주하면서도 사업장 옆 작은 별채에서 가족과 분리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배달업체의 수수료와 배달료를 감당하기엔 지나치게 과도하다고 판단해, 배달 영업을 가장 먼저 중단하자고 제안한 것도 본인이었다.    &nbsp;  그 무렵은 초기 AI 기술이 막 개화하던 시기였다. 평소 영문학 교수의 논문을 구독해 읽곤 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신행정주의’, ‘기계에 대한 불안’을 다룬 메일과 영상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영상 매체 ‘알고리즘’은 디스토피아적인 콘텐츠로 이끌었고, SNS 역시 자극적인 기계 문명의 암울한 전망을 끊임없이 띄어주었다. 고립된 공간에서 접한 그 정보들은 심리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나중에야 깨달았다. 하얀색 긴 옷을 입고, 아파트 안 대형 칠판에 적어 두었던 수많은 단상들을 지우며 점차 기계처럼 강박에 사로잡혀 가고 있었다는 것을. 사업에 대한 불안은 어느새 ‘기계가 언제가 자신을 삼켜버릴지도 모른다’는 망상으로 번져갔다. 지금 돌이켜보면 AI 시대를 맞아 직장을 떠나는 노동자들의 불안이나 당시 본인이 겪었던 망상들은, 지배 계급이 은연중에 부추긴 시각이 아니었을까 싶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비로소 가질 수 있게 된 시선이다.  &nbsp;  결국 배달 영업을 끊고, 사업장 문 앞에 임시 휴업을 알리는 표지판을 걸어둔 채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힘든 시간을 어떻게든 이겨보려는 절박한 시도였다. ‘붉은 라디오’로 시작하여 글을 게시하기 시작한 것도 2023년 무렵이었다. 가까웠던 지인과의 연락마저 두절되자 심리적 불안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가족과의 갈등도 깊어졌다.  &nbsp;  첫 번째 걸음은 첫 회사를 향해 나선 길이었다. 사업장에서 출발해 중산간 도로를 지나 북동쪽으로 올라갔다. 약 22~24km 달하는 먼 길이었고, 5시간 반에서 6시간 반가량이 걸리는 고된 여정이었다. 물 한 모금 없이 앞치마만 두른 채 길을 나섰다. 이었다. 이른 점심에 출발했찌만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중간에 화장실이 급해 염치 불구하고 타인의 집 문을 두드렸다. 실례가 되지 않도록 화장실을 깨끗이 청소하고 용변을 보았다. 집으로 돌아온 뒤, 직접 바느질해 만든 컵 받침대를 가지고 그 집을 다시 찾아가 감사의 마음을 전했던 기억이 난다.  &nbsp;  걸으면 금방 도착할 거라 생각했던 길이었지만, 이른 점심에 출발해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는 이미 해가 기울고 있었다. 당시 걸어가던 길목은 주위의 나무를 밀어내고 도로를 건설하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쌩쌩 달리는 차들 옆을 걷는 것은 매우 위험했다. 그렇게 도착한 첫 회사 터에는 그토록 아끼던 나무가 이미 뿌리째 뽑혀 있었다. 깊은 실망감을 안고 다시 돌아섰다. 돌아오는 5시간 반 동안 차선 불빛들이 아스팔트 위에서 마치 자궁의 형상처럼 피어오르는 환영을 보았다. 탈진 직전의 순간,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nbsp;  한적한 야밤, 캄캄한 도로를 혼자 걸어가는데 소형차 한 대가 불빛을 비추며 다가왔다. 운전자는 위험하다며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물었다. 집으로 가는 중이라 답하자, 가로등이 나오는 도로까지 헤드라이트를 비춰주며 안내해 주었다. 곧이어 경찰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다가왔다. 생전 처음으로 경찰차를 타고 사업장까지 이송되어 돌아왔다. 그 후로도 한동안 운전 중 좌회전만 고집하거나, 맨발로 동네 한 바퀴를 돌고 근처 학교 운동장을 정처 없이 거니는 등 기행을 이어갔다. 사업의 불안 속에서 일자리를 잃고 사회 밖으로 내던져진 자의 방황이었다.   &nbsp;  바닷가를 바라보며 ‘이대로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라디오에 기대어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이번에는 시내까지 걸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도상으로 섬 절반을 하루 만에 돌겠다는 무모한 시도였다. 걸음은 망설임 없이 떼어졌다. 95~105km에 달하는 거리, 꼬박 24~26시간이 걸리는 먼 길이었다. 여전히 물 한 모금 없이 앞치마 하나만 두른 채였다.  &nbsp;  한겨울의 해안 도로에 어둠이 내리고 가로등 불빛만 남았을 때는 엄습하는 추위에 ‘이대로 얼어 죽을 수도 있겠다’는 공포가 밀려왔다. 마침내 공항 근처에 다다랐을 때 비행기 소리가 귓가를 울렸고 소방서의 모습도 보였지만, 사람들을 피해 계속 걸었다. 한밤중에 앞치마를 두르고 걸어가는 본인을 의아하게 바라보는 시선들이 있었지만, 오직 걷는 데만 집중했다.  &nbsp;  시내에 도달했을 때는 이미 하루가 지나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다리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겨울이라 물도 마시지 못한 채 버티다, 앞치마 주머니에 들어있던 지폐 몇 장으로 편의점에서 간신히 간식을 사 먹었다. 하루 전 공항에 도착해 본인을 찾고 있을 가족들 생각이 나, 공항 전화기를 빌려 부모님께 연락을 드렸다. 몇 번이나 사라진 자식 때문에 덜컥 겁이 났었다던 부모님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선하다.   &nbsp;  이러한 무모한 수행 같은 걸음에도 사업은 나아지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하루라도 자리를 비우면 버틸 수 없는 구조였고, 동네 지인들이 그토록 아끼던 공간이었음에도 끊임없이 울려대는 전화기를 끄고 세상을 차단해 버렸다. 소자본으로 시작해 10년 넘게 이끌어온 가계 사업이었지만, 노후화된 시설과 대자본의 공세 앞에서 한 개인인 소생산자가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 훗날 마르크스, 『자본』을 공부하며 그것이 자본주의 구조 속에서 어쩌면 필연적인 일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nbsp;  도시로 넘어온 지금도 그때의 무리한 시도와 심리적 불안이 가끔 떠올린다. 끊임없이 더 많은 돈을 추구하는 굴레가 어떻게 인간의 존엄을 망가뜨리는지 깊이 실감하고 있다. 거대 자본을 쥔 이들은 한 개인으로서 사업장을 직접 운영하며 자신의 모든 세계가 무너져 내리는 순간을 결코 해보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description></item><item><author>서기원</author><category>학습·배움터</category><title>불가능한 사랑</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559900</link><pubDate>Wed, 07 Oct 2026 23:2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559900</guid><description><![CDATA[<br>최근에는 공산주의자들의 사랑에 대해 생각한다. 어쩌면 이들의 생애는 처음부터 비극을 내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단순히 질병이나 낭만적인 연애와는 거리가 먼, 투쟁 속에서의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극 때문에 공산주의자의 길을 선택한다는 것은 언제나 사랑과의 이별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되곤 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이는 공산주의자들의 사랑이 실패했음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르주아적 사랑이 제도와 결합하고, 결국 이별을 반복하여 사랑의 실패를 초래했음을 보여줄 뿐이다. 물론 사랑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다. 사랑은 오직 서로 간의 깊은 우정 속에서 피어날 뿐이다. 이 지점에서 과거의 인연이란, 공산주의자들에게도 그저 스쳐 지나간 흔적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nbsp;  여성이 페미니스트의 시각에서 벗어나 자신이 공산주의자임을 자각하고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자본 체제의 종식을 목도하는 때일 것이다. 계급적 위선으로 포장된 ‘가능한 사랑’은 노동자를 시혜적으로 바라보지만, 모순적이게도 진정한 사랑을 불가능하게 만들며 인간을 체제에 안주하게 한다. 이는 인간의 나약함을 증폭시켜 개인의 사사로운 시각에 머물게 할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자본주의적 사랑과 ‘이별’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과거의 시각과 폐단은 자연스럽게 소멸하지 않으며, 새로운 시각의 자리에는 짙은 부르주아적 독백만이 남을 뿐이다.  &nbsp;  예전에 한 호텔에서 값비싼 식사를 한 적이 있다. 그곳은 무제한으로 음식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었지만, 막대한 낭비와 폐기물을 생각하면 집밥보다 무의미한 일이었다. 한 사람의 희생으로 유지되어 온 가정과 가족의 존재에 반하여, 페미니스트들은 고독을 장려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이 마주하는 ‘가능한 사랑’에 안주한 나머지 ‘불가능한 사랑’을 생각하기를 꺼렸던 태도는, 결국 그들에게 독약과도 같은 혹독한 시련을 안겨주고 있다. 그것은 더 이상 자유가 아니다. 빈약한 죽음을 담보로 소비된 사랑을 장려하는 시대에, ‘불가능한 사랑’은 영화 매체조차 담아낼 수 없는 현실의 투쟁 속에서 비로소 실현된다.  &nbsp;  수많은 이들을 남몰래 만나며 타인을 사랑하는 이들은, 그것만으로는 인간의 근원적 결핍을 채울 수 없음을 안다. 온갖 사적인 비밀로 도배된 불가능한 사랑의 끝에는 오직 고독한 인간만이 남을 뿐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가능한 사랑’이란 계급적 차이나 의식적 수준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당신의 것을 내가 나눈다”는 실천 속에 존재한다.   &nbsp;  ]]></description></item><item><author>서기원</author><category>시사·투고</category><title>부분적 사형제 도입의 필요성</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559748</link><pubDate>Wed, 07 Oct 2026 22:2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559748</guid><description><![CDATA[<br>사형제를 둘러싼 도덕적·윤리적 논란은 혁명의 본질을 가리는 구실에 불과하다. 우리는 혁명적 형벌로서 사형제 도입의 당위성을 적극 주장한다. 부르주아 법체계는 무고한 민중을 억압해 온 반면, 정작 처발받아야 할 자들에게는 심판을 유예하며 민중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혁명기의 사형제는 더 이상 프롤레타리아트의 억압 기구가 아니다. 그것은 부르주아지를 단죄하는 민중의 혁명적 재판이어야 한다. 한국의 신흥 부르주아지가 자본의 본원적 축적과 사유 재산을 사수하려 할 때, 생산 수단을 전유한 프롤레타리아트가 전 세계 부르주아지를 청산하기 위해 혁명적 사형제를 단호히 결정하는 것은 역사적 필연이다.&nbsp;  &nbsp;  제국주의와 대자본이 야기한 사회·경제적 해악은 명백하다. 단순히 감옥에 가두어 방치하는 온건한 처벌 방식으로는 부르주아지에 대한 진정한 단죄가 될 수 없다. 자본의 결탁과 인적·물적 영향력을 보존한 채 감금되는 것은 반혁명적 복권의 여지를 남겨둘 뿐이며, 이는 민중의 피해와 계급적 수탈을 근본적으로 청산하지 못한다. 혁명적 사형제는 과거의 무차별적 숙청이 아니며, 단순한 경제 성장 가속화 수단도 아니다. 이는 지배 계급의 반혁명적 유산을 청산하고 역사를 진전시키기 위한 단계적이고 결정적인 단죄이다. 평화적 해법이라는 소시민적 착각은 대자본의 생산 수단 독점을 눈감아주는 결과만을 낳을 뿐이다.&nbsp;  &nbsp;  자본주의 국가의 법적 기준은 주로 하층민이 저지르는 ‘거리 범죄’를 집중 처벌하지만, 실제 사회적·경제저 피해 규모는 부르주아지 (기업 및 대자본가)가 저지르는 범죄가 월등히 크다. 노동자에게 임금을 지급하지 않는 임금 체불 역시 중대한 범죄 행위임에도, 형사 처벌보다는 민사상 합의나 과태료 처분 정도로 유야무야되는 것이 현실이다.&nbsp;이처럼 사법 체계가 계급에 따라 다르게 작동한다는 사실은 통계적으로도 증명된다. 소액 절도나 생계형 범죄를 저지른 하층민의 구속 및 실형 선고율은 매우 높은 반면, 수천억 원대 배임·횡령을 자행한 대기업 총수나 자본가에게는 집행유예, 보석, 사면이라는 특혜가 압도적인 비율로 부여된다. 전 세계 교도소 수감자의 80~90% 이상이 하층 계급 및 소외 계급 출신이라는 구조적 통계는 자본주의 형법 기구의 본질을 폭로한다. 결국 현행 법 체계는 자본가의 범죄를 ‘경영상 실수’나 ‘비폭력 범죄’로 포장하여 보장하는 반면, 소외 계급의 범죄만을 선별적으로 단속하고 진압하는 계급적 도구에 불과하다.&nbsp;우리는 부르주아 정부의 법집행이 무능과 범죄에 불과함을 입증한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직접 집행하는 혁명 재판만이 무고한 이들을 희생시켜 온 부르주아 '평화 정치'의 허구를 폭로하고, 역사적 정의를 바로 세우는 유일한 길임을 선언한다. 부르주아지의 위선은 분야를 막론하고 점차 노골적이고 해악적인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 이에 맞서는 우리의 과제는 더 이상 일방적 순종이 아니라, 자본의 계급적 수탈 방식에 대한&nbsp;역사적 소명을 다하는 단호한 투쟁이다.&nbsp;]]></description></item><item><author>서기원</author><category>시사·투고</category><title>공공재의 부분적 유료화 비판</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552978</link><pubDate>Sat, 03 Oct 2026 22:5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552978</guid><description><![CDATA[<br>최근 OTT나 AI 등 기술 매체가 기획·개발 단계부터 ‘유료화’를 전제로 삼는 현상은,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는 기술 발전이 어떻게 공공재를 사적 소유물로 취급하는지를 보여준다. 본래 이러한 매체와 기술은 사회적 생산 수단이자 공공재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특히 AI·AGI (인공일반지능) 등의 유료화는 거대 자본의 사적 이윤 창출과 독점을 위한 민영화 기제 및 투자 수단으로 손쉽게 변질될 위험을 안고 있다.   &nbsp;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기술 매체의 사용 자체를 단순히 거부하는 방식만으로는 현대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는 데 한계가 존재한다. 기술주의자들이 제기하는 거부론이나 비판은 때로 공허한 ‘종말론’을 부추기는 데 그치거나, 모순적으로 자본이 형성한 상품성에 종속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기술 사용을 거부하는 소극적 태도는 공공재를 부분적으로 유료화하며 사적 이윤을 정당화하려는 자본의 점유 시도에 제대로 맞서지 못한다는 점에서 명확한 한계를 지닌다.&nbsp;  &nbsp;  오늘날 대기업이 주도하는 AI 기술 등은 정치적·법적 권리를 바탕으로 자본가가 그 소유권을 독점하고 있는 구조에서 비롯된다. 노동자나 대중의 통제권이 부재한 상황에서, 자본 기업은 공공적 가치를 지닌 기술마저도 부분적 유료화로 이윤 창출의 도구로 전환하고 있다. 하지만 기업 내부의 개별 노동자나 대중이 이러한 유료화 공세에 맞서 반대 목소리를 내기는 결코 쉽지 않다. 기업 경영진이 지닌 법적 권한과 거대한 법률 조직, 그리고 투자 유치를 명분으로 기술 발전과 공공재의 상품화를 정당화해 왔기 때문이다.&nbsp;나아가 기술의 유료화는 자본에 접근할 수 있는 계급만이 첨단 기술을 활용해 생산성을 독점하는 ‘기술적 소외’를 정착시킨다. 이는 지식과 생산 수단에 대한 접근 권한을 자산 규모에 따라 제한하여 사회적 격차를 구조적으로 고착화한다.&nbsp;자본 기업이 아무리 ‘할인율 적용’이나 ‘구독 방식의 정당성’을 포장하더라도, 유료화 전략의 본질은 개인적 자본 수탈에서 사적 이윤 추구를 정당화하는 기제에 불과하다.&nbsp;  &nbsp;따라서 개별적 수준에서 유료화 제약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공공재의 사적 점유에 동의해서는 안 되며 기술 발전에 따른 결실이 사회 전체에 분배될 수 있도록 구조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기술의 이점은 개인이 비싼 비용을 치르고 사서 쓰는 상품이 아니라, 만인이 누릴 수 있는 공공의 자유여야 한다. 이는 현대 예술계에서도 저작권을 둘러사고 벌어지는 법적·정치적 분쟁의 사례에서도 잘 드러난다. 기술 발전이 가속화될수록&nbsp;사용자에 대한 기술적 제약을 강화할 것이 아니라,&nbsp;이를 독점하려는 자본에 맞서 공공재로부터 사적 이윤을 취득하지 못하도록 사회적 통제와 제한을 강화해야 한다.&nbsp;]]></description></item><item><author>서기원</author><category>입장·보고</category><title>당의 전진과 국유화 강령</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549977</link><pubDate>Fri, 02 Oct 2026 01:3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549977</guid><description><![CDATA[<br>당의 전진과 선진적 사회주의 투쟁을 수행하시는 일꾼 여러분, 당이 추구하는 노선과 운동의 장기적 전략적 전환을 위해 몇 가지 핵심적인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nbsp;  모든 혁명 운동에는 반동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이러한 자명한 사실 속에서 우리는 반동성과의 투쟁 중 포착되는 소부르주아적·유토피아적 성향의 실체를 직시해야 한다. 이는 혁명적 노동 운동에서 저항적 수습이 일시적 단계에 그치거나, 민주주의의 탈을 썼으나 본질은 전제 정부와 다름없는 부르주아 정부의 실태가 반복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nbsp;  최근 『노동자 연대』는&nbsp;현 부르주아 정부를 향해 ‘줬다 뺐는다’라는 표현을 쓰며 혹독한 비판을 가했다. 한편 정파 ‘전진’ 내에서는 1960~80년대 그리스, 아르헨티나, 유고슬라비아 등에서 시행되었던 국유화 방식을 바탕으로 생산 수단을 먼저 점유해야 한다는 주장이 잇따르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노동자 연대』의 비판점이 노동자 계급의 자각된 조직적 투쟁과 정치권력 쟁취가 빠진 ‘자본주의 국가 주도 국유화’의 한계를 지적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노동 운동 투쟁의 무게 중심이 단순히 국유화에 따른 생산 수단 점유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nbsp;  레닌은 1921년 『제3차 코민테른 대회』에 이르기까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계급적 결집뿐만 아니라 경제 문제에 대해서도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일부 기사에서는 레닌의 국유화에 대한 우호적 시각만을 단편적으로 서술하지만, 그 본질은 자본주의 국가가 가질 내적 모순과 위력을 명확히 파악하고 제3차 코민테른 및 노동자 인터내셔널의 중요성을 꾸준히 강조했다는 데 있다.  &nbsp;  신자유주의 도입에 따른 민영화나 관료주의적 행정에 대한 지적은 현대 자본주의 국가를 바라보는 일반적 시각에 불과할 수 있다. 우리가 직시해야 할 점은 자본주의 체제 내 인민들의 저조한 계급 의식 수준이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재교육을 논할 때, 노동자 계급의 무지를 탓하는 부르주아적 시각을 답습해서는 결코 안 된다.  &nbsp;  제1차 세계대전과 크론슈타트 반란 등 소비에트 내외의 중대한 시련이 상충했던 1921년의 상황을 기억해야 한다. 국유화 논쟁과 관련하여 마르크스와 엥겔스 역시 『토지 문제에 관하여』 등에서 실질적인 토지 소유화 및 투기·투매 행태에 대해 엄혹한 비판을 가한 바 있다. 국유화의 전개는 노동자들이 부르주아 정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직접 정치 권력을 획득할 때 비로소 성립한다. 아직 이러한 단계에 도달하지 못했고 반동성이 장기간 지속된 체제 하에서는 인민들의 즉각적인 동의를 얻기 어렵다.  &nbsp;따라서 당의 전망은 단순히 국유화를 외치는 허황된 구호에 국한되지 않는다. 당의 노선은 자본주의적 선거 제도나 법적 틀 안에서의 권력 획득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전 노동 인민의 단결에서 비로소 출발한다.   &nbsp;  ‘전진’이 추구하는 방향이 단순히 자본주의 체제 내의 협동조합, 단순 국유화, 일부 노조와의 타협에 머무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를 조속히 본격적인 사회주의 투쟁으로 전환할 것을 긴급히 요구한다. 노동자 권력 획득이라는 과제는 관념적 구상이나 시간의 경과로 해결되지 않는다. 이는 계급적 폭력에 노출된 노동 인민의 실질적 투쟁과 봉기를 요구한다. 현장의 일시적 파업이나 선동 구호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체제에 종속된&nbsp;사회적·구조적 본질을 명확히 제시해야 한다.  &nbsp;  우리는 과거의 반동적 굴레에 안주하지 않는다. 우리의 시선은 오직 불편한 현실을 직시하는 데 있다. 우리의 투쟁은 자본주의 체제 내 부르주아지에게 국유화를 구걸하는 소수의 요구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이 결집하여 선언하는 참된 국유화 강령이 되어야 한다.<br><br>]]></description></item><item><author>서기원</author><category>정치경제학</category><title>세계 자본 경제의 수축</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547925</link><pubDate>Wed, 30 Sep 2026 23:4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547925</guid><description><![CDATA[<br>뉴욕 증시의 하락세와 세계 자본 경제의 수축<br>최근 미국 뉴욕 증시의 하락세와 세계 자본 경제의 수축 현상은 단순한 금융 변동이나 계절적 악재로 설명할 수 없다. 이는 자본주의 체제가 지닌 구조적 모순이 표출된 결과이다. 미 연준의 매파적 긴축과 국채 금리 급등, 고용 및 소비 지표의 둔화는 실물 생산 부문에서 이윤율이 하락한 상황을 드러낸다. 기술 혁신과 자동화 (IT·AI) 설비 투자로 인해 불변 자본 (c)의 비중이 가변 자본 (v)에 비해 크게 늘어나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 상승이 진행되었으며, 잉여 가치의 유일한 원천인 노동의 비중을 축소시켜 이윤율의 경향적 하락을 촉진했다. 이러한 실물 이윤율의 저하를 상쇄하기 위해 형성되었던 가공 자본 (주식·부동산)의 거품은 고금리와 실질 구매력 약화라는 벽에 부딪히며 본격적인 평가절하 단계를 맞이하고 있다.  &nbsp;  이러한 체제적 모순은 지정학적 충돌과 제국주의적 대립을 매개로 더욱 계급적 폭력으로 분출된다.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군사적 긴장과 이란 지정학적 위기는 석유 및 물류 등 필수 불변 자본 (c) 비용을 폭증시켜 기업의 이윤율에 직접적인 타격을 가하고 있다. 레닌이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핵심 자원 수송로와 시장 독점을 둘러싼 국가 대립은 자본의 세계적 순환을 가로막는 병목을 형성하며, 인플레이션을 유발해 중앙은행의 고금리 유지를 강제한다. 이는 노동자의 실질 임금을 침식하여 유효 수요 부족과 과잉 생산 위기를 심화시키는 한편, 증시 시장에서 가공 자본의 이탈을 가속하는 계기로 작동한다.  &nbsp;  장기적 관점에서 이러한 뉴욕 증시의 하락은 ‘팍스 아메리카나 (Pax Americana)’로 대표되던 미국 지배권의 구조적 쇠퇴와 맞물려 진행된다. 제조업 기반을 해외로 이전하고 금융화 및 달러 지배력으로 유지해 온 미국 경제는, 실물 가치 창출의 한계 속에서 가공 자본에 지나치게 의존해 왔다. 이러한 우위성의 균열은 증시 상장사들의 통계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천문학적인 설비 투자 (c)를 집행했으나 단기적 잉여 가치 실현에 난관을 겪는 독점 기술 자본 (빅테크) 및 반도체 기업들이 급격한 평가절하을 겪고 있으며, 고금리로 신용 압박을 받는 소형주 지수 (러셀 2000)와 가계 부실 위험에 직면한 금융·소비재 업종이 큰 낙폭을 기록하는 것은 미국 자본주의의 총체적 위기를 보여주는 통계적 증거이다.   &nbsp;  지표명통계적 사실노동 생산성과 임금의 격차 미국 정책연구소(EPI) 분석에 따르면, 1979년부터 최근까지 미국 노동자의 실질 생산성은 약 60% 이상 증가한 반면, 실질 시간당 임금은 약 15~18% 상승하는 데 그쳤다. 이는 노동자가 창출한 가치의 대부분을 자본가가 잉여 가치 (m)로 흡수했음을 증명한다.총생산물 가치 내 노동 소득 분배율 하락미국 노동통계청(BLS) 통계에 따르면, 미국 국민 소득 중 노동소득 점유율은 1970년대 약 64%에서 최근 56~57% 수준으로 구조적 하락을 기록했다. 이는 전체 부의 창출에서 가변 자본 (v)으로 돌아가는 몫이 크게 축소되었음을 의미한다.착취율 (m/v)의 극대화미국 제조업 및 비금융 기업 부문 전체의 임금 총액 대비 기업 이윤 및 자본소득의 비율인 착취율 (m/v)은 지속적으로 상승하여, 노동자가 자기 생존에 필요한 시간 (필요 노동 시간)보다 자본가를 위해 일하는 시간 (잉여 노동 시간)의 비중이 역사상 최고 수준에 달해 있다. &nbsp; &nbsp;증시 하락으로 대표되는 가공 자본의 파열은 실물 경제의 이윤율 하락을 증명함과 동시에, 자본가 계급이 이윤율 방어를 위해 노동자 계급에 가하는 수탈을 극대화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미국 경제분석국 (BEA)과 노동통계청 (BLS) 등의 통계에 따르면, 미국 비금융 기업의 이윤율은 장기적인 하락 추세를 그리는 반면, 노동자의 실질 생산성 증가율에 비해 실질 임금 상승률은 턱없이 미달하여 노동 소득 점유율이 구조적으로 하락해 왔다. 이는 자본이 착취율 (m/v)을 극대화하여 이윤율 감소를 저지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실질 소득 감소와 신용 카드 및 자동차 대출 연체율의 급증은, 노동자 가계가 고금리 조건 속에서 신용 수탈과 파산 위기로 몰리고 있음을 입증한다.  &nbsp;  미 연준 (Fed)의 고금리 및 긴축 정책은 부르주아 경제학이 주장하는 편파적인 ‘물가 안정 수단’이 아니라, 노동자의 임금 인상 요구를 억압하고 자본의 이윤을 수호하기 위한 계급 투쟁의 도구이다. 연준이 목표로 하는 ‘노동 시장 과열 수습’의 본질은 마르크스가 명시한 ‘산업예비군’을 인위적으로 창출하는 것이다. 고금리를 동원하여 경기 후퇴를 유도하고 실업의 공포를 유포하여 노동자 계급의 저항력을 무력화하고 임금 상승을 억제하려는 것이다. 1980년대 초 폴 볼커 연준 의장이 20%에 다하는 극단적인 고금리로 10.8%의 실업률을 유발하며 노동조합을 해체하고 신자유주의 착취 체제의 문을 열었던 ‘볼커 쇼크’와 마찬가지로, 현재 제롬 파월 체제의 긴축 역시 이윤율 위기를 노동자의 희생으로 돌리려는 동일한 계급적 공격이다. 다만 오늘날의 노동자 계급은 노조 조직률의 추락과 높은 가계 부채로 인해 볼커 시대보다 훨씬 취약한 생존 조건에 놓여 있다.  &nbsp;  나아가 최근 자동화 및 AI 기술에 대한 폭발적인 투자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 (c/v) 상승을 정례 없는 속도로 가속화하며 산업 예비군의 양상을 재편하고 있다. 독점 기술 자본 (빅테크) 자본이 자동화 생산 수단 등 불변 자본 (c) 투입을 급증시키는 반면 지식·사무 노동력 (v)을 축소함에 따라, 과거 안전지대로 여겨졌던 전문 노동자들마저 유동적·잠재적·정체적 산업예비군으로 전락하고 있다. 노동자 계급의 대규모 예비군화는 재직 노동자에 대한 임금 억제와 노동 통제의 무기로 활용된다. 그러나 모든 자본가가 가변 자본을 줄이고 불변 자본 (AI)에 집중할수록, 노동자의 구매력 저하로 인한 과잉 생산 위기가 깊어지고 가치 창출의 원천이 축소되어 체제 전체의 이윤율이 장기적으로 하락하는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은 더욱 심화된다.   &nbsp;  ]]></description></item><item><author>서기원</author><category>입장·보고</category><title>자본주의 체제의 균열</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544310</link><pubDate>Tue, 29 Sep 2026 21:5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544310</guid><description><![CDATA[  &nbsp; 부르주아적 시민 사회는 시민 교육과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주입하는 담론으로 도배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이 표방하는 ‘선진적 노동 의제’의 실상은 노동자 해방이 아니라, 자본의 계급적 억압에 맞선 투쟁을 가로막는 장벽에 불과하다. 마르크스주의가 결여된 시민 교육은 반동적 노동관을 답습하는 동어반복일 뿐임이 자명하다. 이러한 비생산적 담론의 반복은 사회주의 전진을 저해하는 요소일 뿐이다.&nbsp;부르주아적 시민 사회가 추구하는 자유론의 한계는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이미 명확히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자본주의 체제 내의 역학 관계 속에서 시민 사회가 결국 반동적 질서로 흡수된다”는 점을 명시했다.   &nbsp;  이러한 균열은 한국 상황에서도 결코 특수한 예외가 아니다. 민주주의 사회라는 틀 안에서 노동 의제에 대한 관심이 직간접적으로 표방된다 하더라도, 사회주의 체제가 부재한 공허한 민주적 수사는 마르크스주의를 왜곡한다. 결국 노동 계급의 투쟁을 단순한 제도적 법제화, 시민 사회로의 흡수, 노조의 관료적 의존성에 매달리게 만들어 노동 계급의 사회주의적 전진을 지속적으로 방해할 뿐이다.  &nbsp;  이러한 자본 체제의 균열은 현대 전제 정부 국가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럼에도 기존 학계와 담론 체계는 이러한 조짐을 ‘인정 투쟁’이나 ‘신유물론’적 접근으로 포섭하거나, ‘이념적 국가 기구’ 식의 해석에 그치는 관념론적·수사적 공리공론에 빠져 있다. 부르주아 시민 사회의 질서는 결코 ‘교양’스럽지도 ‘우월’하지도 않으며, 이는 자본 체제 내에서 생산되는 제반 담론과 소부르주아적 모임 등에서도 여실히 확인된다.   &nbsp;  전(全) 노동 계급은 이러한 부르주아적 시각과 철저히 단절해야 한다. 시민 사회 내부에서 추구하는 체제적 사고의 그늘에는 언제나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이 존재하며, 노동 계급의 시각은 부르주아적 틀에 갇혀 있지 않다.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적·역사적 유물론을 간과한 채 시민 사회의 관념론에 매몰되고 부르주아적 자유관으로 도피하는 것은, 모순적으로 계급 투쟁의 전면에서 부르주아지와의 철저한 단절 및 전투적 유물론으로의 전환이 왜 필요한지를 입증할 뿐이다.  &nbsp;  부르주아 시민 사회와 전제 정부의 관계는 언제나 동일한 역사적 궤적을 반복해 왔다. 이들은 부를 축적한 자본가들과 전근대적 귀족의 수혜를 누려온 역사관을 유지한 채 계급적 교육을 장려하고 있다. 시민 사회 내에서 자행되는 노동 계급에 대한 억압과 무의미한 소부르주아적 단상들은, 한국 시민 사회가 지향하는 이상적 모델이 결국 부르주아적 질서로의 귀속을 반복할 뿐임을 보여준다. 이 같은 자본 체제의 균열은 체제 내 노동 계급을 억압하고, 나아가 타국 인민에 대한 수탈과 학살을 정당화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nbsp;  이러한 시민 사회 담론의 공허한 반동성은 자명하다. 따라서 노동 계급은 계급 투쟁에 있어 부르주아 시민 사회 이론과 완전히 단절하고, 독자적인 프롤레타리아 노선인 마르크스·레닌주의적 공산당 강령의 입장을 명확히 표방해야 한다. 전 노동 계급은 노골적인 부르주아 시민 사회의 기만과 책동에 더 이상 휘둘리지 말고 전투적 투쟁에 나설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nbsp;  ]]></description></item><item><author>서기원</author><category>정치경제학</category><title>여성 해방을 위한 당의 실천</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542302</link><pubDate>Mon, 28 Sep 2026 23:0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542302</guid><description><![CDATA[  &nbsp;자본주의 체제 내 가부장적 구조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 일부 부르주아 여성주의는 개혁적 의식 제고나 제도 개선 수준의 한계에 봉착했다. 이는 여성에 대한 실존적·관념적 고찰의 한계와도 맞물려 있다. 특히 일부 여성 철학자나 성학자들의 추상적 인식 체계는 여성 대중의 동요를 혁명적 실천으로 끌어올리지 못하고, 오히려 체제 내적 미봉책에 의존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해석에 반대하여』류의 저작들이 추구하는 ‘전근대적’ 단상이나 모호한 어휘는, 세대 갈등을 전 사회적으로 확장하며 민주화 열망을 자유주의적 부르주아 질서로 편입시키기려는 시도에 불과했음이 드러났다.  &nbsp;  정희진를 비롯한 일부 여성학자들의 담론 역시 실질적인 여성 해방과는 거리가 먼 비생산적 논의를 반복하며, 부르주아 계급 질서를 옹호하는 성격을 명확하게 띤다. 자본주의 체제 내 여성은 이미 심각하게 계급적으로 분화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들 담론은 여성을 단순한 ‘소비의 주체’로 규정하는 오류를 범하며, 대다수 민중 여성의 지지를 받기보다는 소부르주아 중간 계급에 호소하는 신여성적 한계를 답습한다. 이는 남한 정부가 추진하는 성평등 정책의 ‘체제 내적 흡수’ 기조와도 직결되어 있다.   &nbsp;  그러나 여성 노동자들은 이러한 비논리적 체계성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자본주의 민주주의 사회는 ‘다양성’의 수용이나 부르주아 질서를 위한 ‘공권력 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여성의 신변을 위협하고 불안을 자극하는 구조적 폭력을 방치·조장한다. 이에 가담하는 언론 역시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한다. ‘여성 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우거나 관념적·종교적 환각에 기댄 여성주의자들의 책략은 프롤레타리아 여성을 대변하지 못하며, 이들을 자본주의 체제 내로 강제 편입시킬 뿐이다.  &nbsp;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여성이 겪는 추가적 지출 부담은 크게 (1) 필수 생필품 및 위생용품 비용, (2) 노동 시장 편입 및 고용 유지를 위해 강제되는 노동력 유지 비용, (3) 신변 안전 확보를 위한 주거 및 추가 비용 등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비용은 여성이 노동 시장에서 노동력을 판매하거나 생존·고용을 유지하기 위해 의무적으로 부담해야 하는 구조적 지출이다. 결국 저임금·비정규직에 집중된 여성 노동자는 월 수입 대비 과도한 지출을 강요받으며, 이는 체제 내 계급 분화를 더욱 심화시키는 주요 원인이 된다.    &nbsp;  특히 프롤레타리아 여성이 취약한 지위에 내몰리는 이유는 단순한 소비 행위 때문이 아니라, 체제가 강제하는 ‘소비 형태와 구조’에 있다. 이는 단지 계급 격차라는 눈앞의 현상에 그치지 않고, 자본주의 체제가 자연적 생산 및 가부장적 구조와 결합하여 여성의 생산 동력을 자본 축적에 지속적으로 동원하는 방식과 직결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구조적 폭력을 명확히 지적하는 한편, 자본주의 민주주의가 생산하는 담론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사회주의적 노선의 우위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nbsp;여성의 계급적 단결은 필수적이지만,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계급적 분화가 더욱 심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국가가 여성의 생산성을 독려하는 방식은 자본주의 생산 동력의 확장을 지속적으로 압박하는 과정에 불과하다. 이러한 부르주아적 공권력과 국가 기관에 대한 비판적 토론의 부재는 상류층 여성만을 위한 형식적 교육과 기회의 평등으로 귀결되며, 이는 계급적 차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급적 폭력을 가중시킬 뿐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내 여성 해방의 의의는 여성주의 담론이 양산하는 ‘타자성’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적 혁명 실천 속에서 노동자 여성이 주체성을 획득하도록 이끄는 데 있다. 이는 사회주의자들에게 부여된 가장 핵심적인 과제이다.&nbsp;당의 실천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전면적 단결이자, 프롤레타리아 여성 해방을 향한 전진에 있다.]]></description></item><item><author>서기원</author><category>입장·보고</category><title>『인민의 벗』 3부 보고</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540525</link><pubDate>Mon, 28 Sep 2026 00:1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540525</guid><description><![CDATA[<br>3부 '인민의 벗들의 정치 강령을 들여다보면'의 검수를 마쳤다.&nbsp;<br>본 단원은 인민주의자들이 소부르주아적 자유주의 및 개량주의적 타협주의로 변질된 근본 원인을 날카롭게 분석한다. 아울러 당시 전제 정부와 인민주의 세력이 결탁·응수하며 자행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왜곡과 희화화, 그리고 그들의 왜소한 식견의 오류를 잘 보여준다. 이는 비단 당시의 역사적 사건에 그치지 않고 현대 사회의 이념적 대립과 타협 기제를 파악하는 데에도 시사점을 준다.&nbsp;]]></description></item><item><author>서기원</author><category>문학·미학</category><title>체르니셰프스키,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읽고,</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540373</link><pubDate>Sun, 27 Sep 2026 23:3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540373</guid><description><![CDATA[<br>체르니셰프스키의 생애   &nbsp;  체르니셰프스키는 사제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신학 대신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에 진학해 유물론 철학과 공상적 사회주의를 흡수했다. 이후 당대 최고의 진보 잡지인 『현대인』의 편집을 맡아 사회 비판적 논설과 비평을 쏟아내며 청년들의 사상적 지주로 떠올랐다. 1861년 러시아 농농해방령이 농민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자, 혁명적 농민 운동을 선동했다는 혐의로 1862년 제정 러시아 당국에 체포되었다.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그의 가장 유명한 대표작 『무엇을 할 것인가?』 (1863)를 집필했다. 1864년 ‘시빌 공판 (가짜 사형 집행 의식)’을 거쳐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시베리아에서 고된 유배 및 강제 노동 생활을 했다. 건강이 극도로 악화된 후 1883년에야 고향 사라토프 부근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nbsp;  『무엇을 할 것인가?』  &nbsp;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소설은 감옥에 갇혀 있던 체르니셰프스키가 집필한 작품으로, ‘새로운 사람들(신인류)’이라 불리는 급진적 진보 지식인들의 삶과 사랑, 그리고 노동 조합 공동체를 다룬다. 주인공 베라 파블로브나는 속물적이고 가부장적인 부모의 압박과 원치 않는 정략결혼 위기에 처해 있다. 이때 그녀의 남동생 가정교사이자 의학도인 드미트리 로푸호프가 그녀를 돕기 위해 나선다. 로푸호프는 베라에게 법적·사회적 독립을 제공하기 위해 위장 결혼을 제안하고, 두 사람은 형식적인 부부가 되어 부모의 집을 떠난다.  &nbsp;  독립한 베라는 경제적 자립을 위해 여성 노동자들을 모아 봉제 작업장 (협동조합)을 설립한다. 이 작업장은 기존 자본주의 공장과 달리, 모든 노동자가 이익을 공평하게 나누고 경영에 동등하게 참여하는 구조이다. 베라는 단순한 경제적 자립에서 여성들이 교육을 받고 자존감을 되찾는 공동체 공간으로 발전시킨다.  &nbsp;  소설에는 베라가 꾸는 네 가지 주요 꿈이 등장한다.&nbsp;  &nbsp;  첫 번째 꿈에서 베라는 어둡고 습기 찬 지하실에 갇혀 다리가 마비된 상태로 누워 있다. 이때 신비의 여신 (‘민중에 대한 사랑’ 혹은 ‘해방’)이 나타나 그녀의 손을 잡자, 베라의 마비가 풀리고 지하실 밖으로 나와 들판을 달리게 된다. 여신은 베라에게 “사람들을 감옥에서 풀어주라”고 당부한다. 이 꿈에서 베라는 억압에서의 해방과 자립을 깨닫는다.  &nbsp;  두 번째 꿈에서 로푸호프와 베라가 들판을 거닐고 있다. 들판에는 이삭이 자라고 있지만, 관리되지 않아 황폐해진 땅과 기름지고 풍요로운 땅이 대비되어 나타난다. 꿈속에서 이성적 판단과 자연적 순리가 대화를 나누며, 어째서 어떤 땅은 황폐하고 어떤 땅은 결실을 맺는지를 설명한다. 이 꿈에서 자연과 이성의 조화를 이해한다.  &nbsp;  세 번째 꿈에서 베라는 자신의 비밀 일기장을 읽어주는 여신의 목소리를 듣는다. 일기장에는 베라가 자신도 모르게 숨겨왔던 진심이 적혀 있다. 베라는 자신을 구출해 준 첫 남편 로푸호프에게 깊은 감사와 존경을 느끼고 있지만, 그것은 사상적 동반자로서의 감정이자 부채의식일 뿐 성적·감정적 울림을 주는 ‘진정한 연애 감정’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꿈에서 베라는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다.  &nbsp;  네 번째 꿈에서 베라는 여신의 안내를 받아 인류 역사 속 여성의 지위 변화를 살펴본 뒤, 미래의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목격한다.   &nbsp;  베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로푸호프의 친구이자 의사인 알렉산드르 키르사노프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보통의 통속 소설이라면 질투와 갈등이 일어났겠지만, 로푸호프는 ‘합리적 이기주의’ 철학에 따라 행동한다. 소유욕이나 질투로 베라를 구속하는 것은 모두의 행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로푸호프는 두 사람의 행복을 위해 자신이 자살한 것처럼 위장한 뒤 미국으로 떠난다. 이후 베라와 키르사노프는 정식으로 연인이 되어 서로를 존중하는 사상적 동반자이자 연인으로 살아간다.   &nbsp;  소설 중반에 등장하는 라흐메토프는 일반적인 ‘새로운 사람’에서 ‘헌신적인 혁명가’의 전형이다. 그는 오직 민중의 해방과 혁명이라는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자신의 모든 사사로운 욕망, 편암함, 사랑까지 포기한다.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참아내기 위해 뾰족한 못이 박힌 침대에서 자는 등 극단적인 금욕주의와 훈련을 거친다. 작품 전체에서 비중은 크지 않지만, 당대 러시아 청년들에게 가장 강력한 혁명적 모범을 제시한 인물이다.  &nbsp;  훗날 미국에서 돌아온 로푸호프는 다른 여성과 결혼하여 베라·키르사노프 부부 근처로 이사한다. 두 부부는 서로 깊은 우정을 나누며, 이상적인 공동체와 사업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nbsp;  체르니셰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 (1863)는 단순히 한 편의 문학 작품에서 19세기 러시아 사회를 흔들고 러시아 혁명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한 가장 강력한 정치·사회적 선언문으로 평가받는다.  &nbsp;  새로운 사람들 (신인류)라는 행동하는 지식인상을 제시하여 소설은 관념적 논쟁에만 머물던 기존 1840년대 세대 (‘잉여인간’)와 달리, 이성과 행동으로 삶을 주도하는 1860년대 진보 청년층 (‘신인류’)의 모델을 제시했다. 베라, 로푸호프, 키르사노프 같은 인물들에서 이기주의와 타인에 대한 봉사가 대립하지 않고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합리적 이기주의’를 보여주었다. 금욕과 철저한 자율 훈련으로 자신을 단련하는 라흐메토프는 당대 청년들에게 ‘민중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전천후 혁명가’의 완벽한 표상이 되었다.  &nbsp;  가부장적 억압이 극심했던 당대 러시아 사회에서 이 소설은 여성의 인권과 경제적 자립을 최초로 정면 다룬 작품 중 하나이다. 부모의 압제나 정략결혼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방 수단으로 ‘위장 결혼’을 제시했다. 베라가 만든 봉제 작업장은 단순히 돈을 버는 곳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착취 없이 이익을 나누는 생산자 협동조합이자 여성이 사회 구성원으로 성장하는 공간이었다. 이는 러시아 여성 운동과 초기 사회주의 운동의 시험대가 되었다.  &nbsp;  이 소설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러시아 혁명가들의 ‘지침서’ 역할을 했다. 1870년대 “민중 속으로 (브나로드)”를 외치며 농촌으로 내려간 수많은 청년들이 이 책에서 직접적인 영감을 받았다.&nbsp;]]></description></item><item><author>서기원</author><category>입장·보고</category><title>당의 이론적 오류와 관련하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538359</link><pubDate>Sat, 26 Sep 2026 22:3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538359</guid><description><![CDATA[<br>정치적 성향을 막론하고, 당 내 특정 집단이 저지르는 마르크스에 대한 노골적인 왜곡은 엄중히 다루어져야 한다. 이는 공산당이 추구하는 이론적 모범에 대한 심각한 모욕이자 훼손이다.   &nbsp;  특히 자본주의 체제 내 매체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평생에 걸쳐 규명한 ‘자본주의 분석과 세계 부르주아 질서에 대한 통렬한 반박’을 두고 ‘실패한 사상’이라는 딱지를 붙여 자신들의 이론적 궤변을 정당화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체제적 모순을 깊이 파악하지 못한 채, 자본주의의 수혜를 누리는 지식인층 학자들과 손잡고 마르크스의 ‘단편성’에만 집착하는 태도는 그들이 정치적 기득권과의 타협이 케케묵은 수준에 도달했음을 폭로할 뿐이다.   &nbsp;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재해석’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소시민적 연대나 노조 민주화 등을 합리화하고, 기존 정권과의 일시적 타협을 도모하고 있다. 급기야 마르크스의 과학적 분석과 당시 러시아 노동자들의 역사적 경향마저 ‘실패’로 단정 짓는 논리적 파단을 저지르고 있다. 그러나 운동권에서 사회주의 운동으로 나아가는 것은 당 내 투쟁이자 공산당의 확실한 일보 전진을 의미한다. 마르크스라는 대의명분 아래 그의 평생에 걸친 연구가 정확했음을 인정해야 한다.&nbsp; &nbsp;&nbsp;『공산당 선언』을 주의 깊게 읽은 독자라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국제노동자협회에서 제시했던 선언의 참뜻을 알 것이다. 즉 “당의 전진을 가로막는 반동적 경향”에 맞서 엄중히 투쟁하고 “부르주아적 이상에 대한 반박”을 전개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는 결코 안일하고 귀찮은 일이 아니며, “끈질기고 집요하게” 걸어가야 할 길이다. 이러한 반동적 경향들은 늘 ‘전통적 색채’나 ‘진보적 수사’를 들먹이며 자신들을 합리화해 왔으며, 자본주의 체제와 국가가 발전함에 따라 더욱 노골적으로 논변을 ‘수정’하고 ‘변질’시켜 왔다.&nbsp;따라서 독자라면 원전이 갖는 중요성을 끊임없이 자문하고, 이를 실천하는 데 게을러져서는 안 된다.&nbsp;<br>엥겔스는 마르크스 추모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nbsp;  “마르크스는 비록 세상을 떠났지만, 단 한 사람이라도 당당한 자부심으로 그의 평생의 과업을 돌아볼 수 있는 한 그는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엥겔스,『제2인터내셔널 폐막 연설』 中  &nbsp;  단순히 마르크스를 입맛대로 요약하여 재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남긴 평생의 유산과 노고를 되새기는 실천이야말로 우리 당이 추구해야 할 가장 정확한 노선이자 선구적인 조직 투쟁의 결집이다.   &nbsp;  만국의 부르주아지를 심판하자! 그들의 녹슨 사슬은 ‘현대화’로 둔갑한 전근대적 자본의 비참한 결말일 뿐이다. 공산당의 전진에는 오늘날 계급 투쟁의 역사가 함께하고 있으며, 이는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시대적 사명이다.&nbsp;]]></description></item><item><author>서기원</author><category>학습·배움터</category><title>한국 경제의 파산성</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535583</link><pubDate>Thu, 24 Sep 2026 23:2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535583</guid><description><![CDATA[<br>"한국의 경제적 파산은 단계상 충분히 예정된 것이지만, 그것을 대비한 중도 보수층의 집결 역시 몰락의 국면이 예고된다."&nbsp;<br>자본이라는 구체제의 숨결이 지도자 개인을 거두어 가듯이,&nbsp;&nbsp;]]></description></item><item><author>서기원</author><category>시사·투고</category><title>노동 제도의 구조적 모순</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535459</link><pubDate>Thu, 24 Sep 2026 22:4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535459</guid><description><![CDATA[<br>취업 지도 제도와 노동 시장의 구조적 모순<br>한국의 대표적인 취업 지원 제도인 국민취업지원제도와 공공 고용 서비스는 청년과 구직자들에게 경제적 유인을 제공하는 사회적 측면에도, 실질적 취업 연계의 부족과 형식적 운영이라는 구조적 한계를 노출하고 있다. 《감사원 검사 결과》와 《한국고용정보원》 등의 실태 조사에 따르면, 참여자의 30%~40% 이상이 고용복지플러스센터 등의 상담 프로그램이 단순 수당 수급 조건을 채우기 위한 형식적 절차에 그치며 실질적인 구직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응답했다. 수당 지원 등 경제적 만족도는 높은 반면, 일자리 프로그램이나 알선 서비스에 대해서는 희망 직종과 무관한 단순 사무 및 행정 알선에 불과하다는 부정적 평가가 지배적이다. 실제로 제도 종료 후 6개월 이내 취업률은 50%대 수준에 머무르고 있으며, 취업에 성공하더라도 1년 이상 고용 유지율은 50% 안팎으로 떨어져 단기 및 전전형 취업이 반복되고 있다. 아울러 국비 지원 직업 훈련 수료자 중 훈련 분야와 실제 취업 직종이 일치하는 직무 연계율은 30%에서 40%대에 불과해, 양적 확대에 비해 질적 불균형이 심각한 상황이다.  &nbsp;  이러한 형식적 한계는 단순한 행정적 미숙함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 체제와 고용 제도가 결합하는 방식에서 비롯된 구조적 문제이며, 전 세대에 걸친 노동자 박탈 현상으로 고착화되고 있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취업 지원 제도는 개별 노동자의 장기적 역량 개발보다 ‘몇 명을 시장에 재배치했는가’라는 수치적 실적에 집중하며, 구직자를 저임금 및 단기 노동력을 공급하는 상품화 수단으로 전락시킨다. 또한 수당 지급에 엄격한 구직 활동 조건을 걸어두어 구직자를 주체적인 노동자가 아닌 행정 절차의 통제 대상으로 취급한다. 이로 인해 청년층은 양질의 노동 시장에 진입하지 못한 채 단순 보조직을 전전하며 역량 축적 기회를 박탈당하고, 중장년층은 평생 쌓아온 경력과 존엄성을 부정당한 채 하위 노동 시장으로 강제 이동하는 이중 하향 취업을 겪으며, 노년층은 죽을 때까지 저임금 노동을 지속해야만 하는 생존형 노동 박탈로 이어지는 전 세대적 고용 불안정을 겪게 된다.  &nbsp;  제도가 형식적이고 관료적인 양상을 띠는 원인은 운용하는 행정 체계의 내적 구조와 자본주의적 시장 질서 속에서 목표가 왜곡된 결과에 기인한다.   &nbsp;  첫째, 고용센터와 민간 위탁 기관의 성과 평가가 단기적 취업률 숫자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여, 상담원과 기관은 구직자의 작성이나 일자리의 질을 고민하기보다 채용이 쉽고 퇴사율이 높은 일자리에 우선 알선하게 된다.   &nbsp;  둘째, 신공공관리론에 따라 고용 서비스를 민간에 대거 위탁하면서 최저가 입찰과 영리성 추구가 도입되었고, 이로 인해 개별 맞춤 상담 대신 서류 양식 채우기나 형식적 전화 상담 등 최소한의 요식 행위가 구조화되었다.   &nbsp;  셋째, 상담원 1인이 수십에서 백여 명의 구직자를 담당하는 과중한 업무로드 속에서, 상담원들은 진정성 있는 진로 설계를 포기하고 수당 지급 기준 검토나 부정수급 방지 서류 확인 같은 형식적 행정 처리자로 전락했다.   &nbsp;  넷째, “구직자가 수당만 받고 일하지 않을 것”이라는 도덕적 해이가 작동하면서, 제도의 중심축이 역량 강화 지원이 아닌 구직 활동 증명을 요구하는 감시 및 통제 행정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nbsp;  이러한 관료화와 형식화는 단기적 행정 예산 낭비만이 아니라 노동 시장 전체에 심각한 장기적 해악을 끼치고 있다. 우선 구직자들이 하위 노동 시장에 갇히는 고착화 현상이 발생하여 사회 전반의 소득 양극화가 심화된다. 특히 급변하는 고용 조건 속에서 기업들은 신입에게마저 ‘즉시 전력감이 되는 중고 신입’이나 다름없는 연차별 실무 경력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으나, 형식적 취업 지원 제도는 이러한 현실을 외면한 채 구직자들을 단기 알선과 부실한 훈련에 머물게 하여 심각한 경력 단절을 유발하고 있다.   &nbsp;  이처럼 체계적인 경력 형성이 차단된 노동자들이 다시 노동 시장에 유입될 때, 기업들은 오히려 이들에게 더욱 까다롭고 과도한 경력직 수준의 ‘스펙과 요건’을 들이밀며 진입 장벽을 높이고 있어, 구직자들은 일자리를 구할수록 오히려 더 깊은 미숙련화와 고용 불안의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또한 높은 퇴직률과 재실업의 무한 반복 속에서 국가 전체의 노동력과 노동 생산성이 저하되며, 청년층의 경우 제도에 대한 불신이 학습된 무력감으로 이어져 구직을 포기하고 비경제 활동 인구로 돌아서는 역효과를 낳는다. 자본 기업 입장에서는 정부 보조금과 제도를 활용한 저비용 노동력 돌려막기에 안주하게 만들어 근로 조건 개선과 기술 혁신 등 체질 개선 유인을 완전히 상쇄시키며, 결과적으로 현행 취업 지원 제도는 노동자의 삶과 숙련을 보장하지 못한 채 자본의 유연화 요구만을 나타내면서 노동 시장의 양극화와 노동 생산성 하락을 가속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description></item><item><author>서기원</author><category>시사·투고</category><title>재입북 및 월북 보고   </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533767</link><pubDate>Wed, 23 Sep 2026 22:1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533767</guid><description><![CDATA[  &nbsp;  <br> 탈북민의 재입북 현상&nbsp;&nbsp;남한에 정착한 북한이탈주민 약 34,000여 명 중 다시 북한으로 되돌아가는 재입북 인원의 비율은 약 0.09%로 공식 파악 기준 30여 명 수준에 불과하다. 그러나 재입북 대신 영국, 캐나다, 유럽 등 제3국으로 재이주하는 탈남 인원이나 거주지가 불분명한 이들이 최근 5년간 2,000여 명에 달한다는 점은, 북한으로 직접 복귀하지 않더라도 한국 사회에 안착하지 못하고 이탈하는 비율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임을 보여준다.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로 진입한 인원이 북한 체제로 되돌아가는 것은 일반적인 국가 간 이동 경로와 달라 매우 특수하게 평가된다.  &nbsp;  이러한 재입북 현상은 자본주의 경쟁 사회에서의 구조적 적응 실패와 상대적 박탈감에서 비롯된다. 경제적 빈곤을 피해 남한으로 왔으나 높은 기술 요구 수준과 치열한 경쟁 속에서 최저임금 직군에 고착되거나 극심한 경제적 고립을 겪는 경우가 많다. 자본주의의 유연성과 신용 중심 구조에 익숙지 않아 사기를 당하거나 채무 압박에 시달리는 등 사회적 안전망에서 탈락할 때, 이들은 재입북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감행하게 된다. 여기에 북한 국가보위성이 잔류 가족의 안위를 담보로 재입북을 종용하거나 복귀 시 처벌 없이 주택과 직장을 제공하겠다는 선전을 활용하는 점도 크게 작용한다. 홀로 탈북했다는 중압감과 북에 남겨진 가족이 받을 처벌에 대한 죄책감이 재입북 결정의 주요 동기로 작용하는 것이다. 북한 정권은 이들을 즉각 관영 매체에 출연시켜 남한을 비하하고 주민들에게 탈북의 무용성을 압박하는 내부 단속 기제로 활용된다. 이는 현재 입국 후 2~3년에 집중된 단기 지원책의 한계를 명확히 드러내며, 남북 채제 경쟁에서의 파급력을 고려할 때 탈북자 개인의 부적응에 대한 지적이 아니라 지원 체계의 정밀화가 시급함을 시사한다.  &nbsp;  탈북민이 겪는 핵심 어려움은 노동 시장 진입 장벽과 고용 불안정이다. 직업교육훈련 이수율은 90% 이상으로 높으나 실제 교육 분야 취업률은 절반 수준에 불과하며, 경력과 기술의 연결성 부재로 제조·단순노무·서비스업 등 저임금 직종 진입률이 높다. 탈북민의 평균 근속 기간은 38개월 안팎으로 전체 국민 평균인 76개월의 절반 수준에 머물고 실업률 역시 일반 국민 대비 2배 이상 높다. 남한의 조직 문화, 직장 내 소통 방식 차이, 신용 및 근로 계약 체계 이해 부족이 주요 이직과 퇴직의 원인으로 작동한다.  &nbsp;  언어적 차이와 사회적 차별 역시 큰 장벽이다. 표준국어대사전과 조선말대사전 비교 시 전문어의 약 66%, 일반어의 38%에 달하는 차이가 존재하여 행정, 금융, IT 용어에 주로 쓰이는 외래어 적응에 고충을 겪는다. 실제로 탈북민 3명 중 2명에 해당하는 66.7%가 말투와 생활 방식 차이로 인한 차별과 무시를 겪었다고 응답했으며, 이는 정체성을 숨기거나 관계를 축소하여 사회적 고립을 심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 또한 신용카드, 대출, 투자, 보험 등 복잡한 자본주의 금융 구조에 쉽게 노출되면서 금융 지식 부재로 인한 보이스피싱, 명의 대여, 사기 투자, 과도한 채무 발생 등 경제적 사각지대에 내몰리기도 한다. 탈북 과정의 위험과 탈남·중국 체류 시의 불안, 북한 잔류 가족에 대한 죄책감으로 우울증과 불안 장애 수치가 매우 높으며, 전체 탈북민 가구의 33% 이상을 차지하는 1인 가구는 정서적 안전망을 제공할 친인척이 없어 고독사 위험과 정서적 위기에 취약하게 노출되어 있다.  &nbsp;  남한 사회의 월북에 대한 특수 현상<br>남한 정부는 『북한이탈주민법』에 따라 하나원 교육, 초기 정착금, 주택 알선, 거주지 보호 담당관 및 하나센터 운영 등 제도를 가동 중이지만 구조적 한계가 명확하다. 주요 정착 지원이 입국 후 1~3년 초기에만 집중되어 있어, 실제 금융 및 행정 사기를 당하거나 무력감이 찾아오는 3~5년 차 이후에는 사회적 안전망이 현저히 약화된다. 현장 전담 인력의 과부하도 심각하여 지자체 및 경찰의 거주지 보호 담당관 1인이 담당하는 탈북민 수가 300명을 넘어서는 지역이 많으며, 이로 인해 밀착 관리가 어렵고 정기 전화나 단순 방문 수준의 행정 확인에 그치는 실정이다. 연령, 학력, 북한 내 직업, 심리 상태와 무관하게 일률적인 교육과 훈련이 제공되며, 장애인, 노인, 탈북 청소년, 제3국 출생 탈북민 자녀 등 세부 집단별 특수성을 고려한 세분화된 지원책도 부재한다. 아울러 초기 기초생활수급비 지급 기준과 취업에 따른 수급 타락 기준 간의 격차는, 취업 시 당장의 생계 지원이 끊길 것을 우려해 저임금 임시직이나 비공식 노동에 안주하게 만드는 제도적 모순을 낳고 있다.   &nbsp;  반면, 남한 출신 국민의 월북은 군사분계선이나 해상에서 직접 월북, 또는 제3국을 거친 월북으로 나뉜다. 이는 연간 0건에서 1건 수준으로 극히 드문 특수 사건이지만,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라난 남한 국민이 스스로 북한으로 넘어가는 행위는 일반적인 국가 간 이동 기준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현상이다.  &nbsp;  남한 국민의 월북은 주로 현실 도피 기제로 작동한다. 월북자의 상당수는 신용불량, 거액의 채무, 범죄 수사 피의자, 정신질환, 극심한 가난 등 남한 사회에서 법적·경제적·사회적으로 절벽 끝에 내몰린 이들이다. 남한의 사회적 안전망에서 완전히 소외된 이들이 극단적인 선택의 대안으로 북한으로 가면 처벌이나 채무를 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릇된 판단을 내리기도 한다. 일부는 과거 북한 선전 매체를 접하고 북한이 의료와 주거를 무료로 제공하는 사회주의 낙원이라는 현실과 다른 환상을 품고 월북을 감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북한 정권은 이들을 체제 우위 선전 도구로 일시 활용한 뒤 선전 가치가 떨어지면 감금, 고문, 수용소 수용을 하거나 억류 후 방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남한 출신 국민이 철책이나 해상에서 월북에 성공하는 사건은 국군의 경계 태세 및 감시 장비의 허점을 드러내어 남북 간 군사적 긴장을 유발하고 내부 안보 책임론 등 정치적 논쟁으로 확대된다. 헌법상 북한 주민도 국민으로 간주되지만 월북은 남한 국가보안법상 탈출·잠입에 해당하여 엄중한 처벌 대상이 되며, 북한에 억류된 국민의 인권 박탈 문제와 함께 정부가 생사와 안전을 확인하거나 송환받기 까다로운 외교·안보적 난제를 발생시킨다.  &nbsp;  결과적으로 남한 국민의 월북은 자본주의 사회의 극단적 소외자가 선택하는 현실 도피이자 북한 체제에 대한 정보 부재가 낳은 비극이며, 군 경계 체제와 사회적 안전망을 제고하게 만드는 특수한 사건이다. 반면 탈북민의 재입북은 자본주의적 구조에 대한 적응 실패와 잔류 가족에 대한 심리적 압박이 결합된 복합적 이탈 현상이다. 두 현상 모두 남한 사회의 제도적 사각지대와 안보 체계의 한계를 드러내는 경고 신호이다. 특히 탈북민의 문제를 단순히 개인의 부적응으로 치부하는 남한 언론의 자극적 보도 방식과, 이들을 자본주의 체제로 포섭하는 데 그친 채 실질적인 사회적 제도를 보장하지 못하는 현실은 한국 자본주의 정치·경제 제도의 구조적 결함을 극명히 보여준다.]]></description></item><item><author>서기원</author><category>입장·보고</category><title>당내 투쟁 노선에 관하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529661</link><pubDate>Mon, 21 Sep 2026 21:2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529661</guid><description><![CDATA[<br>혁명 정당의 입지 면에서 현대의 정치적 지형은 여전히 공산 진영에 불리한 점이 많다. 다만 최근 유럽에서는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들이 감지되고 있다. 독일의 경우 기독교민주연합 (기민련)보다 사회민주당 (사민당)에 대한 지지가 높아지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특히 독일 사민당은 스파르타쿠스단 계열이나 타국 공산당의 역사와 비교할 때 이념적 성격이 독자적이며, 반군국주의적 입장을 명확히 표명해 온 역사를 지닌다. 하지만 이러한 유럽 내 자본주의 비판 노력에도, 자본가 정당의 의석수와 비교하면 공산당의 영향력이 점차 퇴조하고 있는 것 또한 엄연한 현실이다.    &nbsp;  그럼에도 주목해야 할 점은, 최근 독일 내 공산 진영이 보여주는 새로운 전진과 세력 재편의 움직임이다. 기존 자본주의 체제 및 중도화된 사민주의에 실망한 대중 표심이 주거권 국유화, 에너지 공공성 확보, 무분별한 군비 증강 반대 등 선명한 계급적 요구를 내건 혁명적 정파들로 결집하고 있다. 자본가 정당의 압도적인 의석수와 자본의 왜곡 속에서도, 노동자 민중의 실질적 삶의 위기를 파고드는 이들의 정당 지지율 반등은 공산주의적 가치와 반자본주의 투쟁이 여전히 강력한 대중적 잠재력을 지니고 있음을 증명한다.  &nbsp;  그러나 자본주의 진영 학계의 논리와는 달리, 공산당의 존재 의의와 실천적 비판가들의 관점에서 볼 때 현대 자본주의 체제가 오직 ‘민주주의적 기틀’ 위에서만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의 역사적 의의 역시 자본주의 발전보다 선진적인 과제를 수행하는 데 있으며, 그 과정에서 수반되는 반동성에 맞서기 위해서라도 당내 투쟁 노선과 내부적 비판이 끊임없이 병행되어야 함은 분명하다.   &nbsp;  현재 사회주의 정권 전반에서 제기되는 ‘우익화 논란’은, 사회 혁명적 요소가 당내 투쟁 노선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득표율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이는 단순히 빈약한 자본의 문제에 그치지 않으며, 실질적인 ‘투쟁 전선’의 확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제국주의 및 자본주의 국가 내 공산당은 거대 자본의 투여 없이는 당내 투쟁을 공론화하기 어렵고, 대중적 인지도 또한 빈약해지기 쉽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노력은 단지 ‘득표율 제고’라는 목표를 넘어서야 하며, 기득권 논리에 편승한 대중주의적 시각 대신 프롤레타리아트 투쟁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제기해야 한다.   &nbsp;  최근 미국 내에서도 사회주의 정당의 정치적 지분과 의석 확보에 대한 요구가 점차 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단기적 일탈로만 볼 수는 없다. 이는 기존의 양대 정당 (공화당과 민주당) 사이에서 방황하는 대중과 중산층 몰락 현상이 전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한계, 즉 과도한 착취 구조와 맞물려 나타난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nbsp;  특히 미국 내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진영의 전진은 보수적인 양당제의 견고한 벽을 뚫고 지방 의회와 연방 정치 영역 모두에서 가시적인 정치적 성과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청년층과 세입자, 산별 노동자들을 중심축으로 한 미국 사회주의자들의 세력 확장과 자본주의 핵심부 내 공산주의·사회주의 조직들의 선거적·운동적 결합은, 신자유주의적 착취에 신음하는 대중에게도 기존의 양당 구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급적 요구를 열망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nbsp;이러한 전 세계의 사회주의적 요구는, 그동안 혁명적 투쟁성을 상실하고 타협해 온 기존 공산 진영을 비판하고 바로잡을 수 있는 진정한 혁명적 공산당의 존재를 다시금 요청하고 있다. 그리스뿐만 아니라 독일과 미국 등 자본주의 중심부 국가들에서 관측되는 공산·사회주의 진영의 전진을 단순한 의석 확보에서 실질적인 프롤레타리아트 혁명 동력으로 전환시키는 것, 끊임없는 당내 비판과 조직적·혁명적 투쟁성을 갖추는 것, 이것이야말로 현대 사회주의 정당이 추진해야 할 최선이자 최고의 투쟁 방식이다.]]></description></item><item><author>서기원</author><category>정치경제학</category><title>날조된 역사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528116</link><pubDate>Sun, 20 Sep 2026 23:0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528116</guid><description><![CDATA[<br>維新 체제의 복고적 모순  &nbsp;  최근 언론과 대중 매체에서 ‘박정희’와 유신 체제가 끊임없이 재호출되는 현상은 단순한 상업적 언론의 부추김이나 과거에 대한 향수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위기 국면마다 자본가 계급과 국가 권력이 기득권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가동하는 ‘정치적·이념적 복고’이자 반동적 계급 동원의 일환이다. 해방 이후 이승만 정부에서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진 헌정사는 제국 자본과 국내 독점 자본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한 계급적 재편의 역사였다. 군사 쿠데타 세력이 내세운 '민주주의'나 민족 부흥'이라는 수사는 본질적으로 민중의 계급 의식을 마비시키기 위한 이념적 착시일 뿐이며, 그 실체는 자본주의적 노동 착취 체제를 국가 폭력으로 강제한 반동적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수립이었다. 10·26 사태 당시 김재규의 증언 등에서 드러난 유신 체제의 모순은 독재자의 개인적 비극이 아니라, 노동자 민중의 저항과 자본 축적 한계가 결합하며 폭발한 체제 자체의 내적 균열을 보여주는 계급적 사건이었다.  &nbsp;  상암동 박정희 대통령 기념 도서관이나 대구 박정희 동상 건립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 속에서도 이러한 독재 우상화 시설들이 철거되지 않고 유지되는 배경에는, 산업화 이후 완성된 자본과 언론, 그리고 국가 기구의 유기적 결탁 구조가 자리 잡고 있다. 고(故) 김수행 교수가 저서 『박정희 체제의 성립과 전개 및 몰락』에서 분석했듯, ‘한국의 후발 자본주의는 독점 자본 (재벌)에게 과도한 잉여 가치 수탈권을 부여’하고 ‘노동자의 기본권을 법적·물리적으로 압살하는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었다. 일제 강점기 식민지 군사 기구의 일원이었던 ‘다카키 마사오’가 해방 후 이름과 탈을 바꾸어 신식민지 국가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한 역사적 궤적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자체가 지녔던 부르주아적 한계와 식민지적 연장선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유신 체제는 결국 자본의 원시적 축적과 가혹한 잉여 가치 착취를 국가 기구의 총구로 보증한 부르주아 독재의 정점이었다.  &nbsp;  최근 박정희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남한 사회를 운영하는 게임이나 문화 매체가 등장하는 현상은 자본주의 국가 기구가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자본 매체는 역사적 독재와 국가 폭력을 하나의 '효율적 경영'이나 '놀이'로 희화화·상품화하여 자본주의적 통치 체제를 ‘자연화’한다. 박정희 사후 전두환으로 이어진 계엄과 비상 사태의 연쇄는 민주주의의 일시적 정지가 아니라, 노동자 계급의 조직적 저항을 억누르고 자본의 안정적 축적 조건을 재조성하기 위해 부르주아지가 국가의 폭력 장치를 비상 동원한 결정적 순간들이었다.&nbsp;  &nbsp;  한국 사회가 여전히 특정 인물에 대한 성역화와 정파적 이해관계에 갇혀 ‘반공주의’라는 이념적 무기로 노동 운동을 ‘불순 세력’으로 매도하고 국가 폭력을 정당화해 온 교육관을 주입한 것 역시, 자본가 계급의 지배를 영속화하기 위한 체제 재정비 수단이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쿠데타 전범들의 유산이 한국 민주주의 역사와 왜곡되게 병존하는 현상은 단순한 역사적 비극이 아니라, 일제 군국주의를 거쳐&nbsp;한국 부르주아지가 자신의 계급적 이익을 위해 독재와 파시즘적 잔재를 결코 포기할 수 없음을 증명하는 체제적 모순이다. 따라서 이 날조된 역사관에 대해서는 단순한 도덕적 비판이 아닌, 그 뒤에 숨은 자본주의적 수탈 구조와 극우적 책동의 계급적 본질을 폭로하고 해체하는 데 있다.]]></description></item><item><author>서기원</author><category>학습·배움터</category><title>변화를 원한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526281</link><pubDate>Sat, 19 Sep 2026 23:0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526281</guid><description><![CDATA[<br>국내 사회주의 문헌 자료의 부재성<br>북한을 사회주의 공화국이라 비판할 때 간과하기 쉬운 지점은, 이들 국가 내부에 작동하는 강력한 인민 통제 기반을 지적하는 것보다 사회·과학적 분석 자료가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가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 스탈린주의 자료를 포함한 전집 발간의 의의가 수령제의 한계 속에서 평가되고 있음을 감안하더라도, 여기서 그러한 한계를 지적하는 것은 경솔한 일일 수 있다. 북한이 사회주의 공화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숱한 당내 투쟁을 거쳐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조선의 과학성에 대한 사회주의적 고찰을 담은 서적을 북한 도서관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반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결합된 남한 구조에서는 이러한 자료가 상업적으로 판매되는 출판물의 형태로만 허용된다. 물론 북한 내 자료 열람 방식 역시 언제나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정부 관할하에 통제되어 왔으므로, 이러한 개방성이 온라인으로 확장되었을지라도 그 한계는 명확하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전에 남북한의 한국 마르크스주의 전통성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성으로 발전하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사회·과학적 분석은 기존의 인문주의적 혹은 관념적 철학 사고에 그치지 않고 유물론적 분석에 기반한 사회·정치 분석에서 출발했으며, 이는 곧 마르크스주의 입장을 지지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이러한 논의가 제대로 허용될 수 없음이 여실히 증명되고 있다. 직접 서점을 방문하더라도 출판물의 비중이 온통 자본 경제학 관련 내용으로 도배되어 있는 현실은 매우 모순적이다.  &nbsp;  반면 북한학 전공자들에게는 남한 서적 및 자료의 한계가 자본성과 미진한 상업성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 명백히 보일 것이다. 남한 학계의 분석이 비체계적이고 비과학적이며 인민의 성격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점은 《로동신문》만 조금 살펴보아도 알 수 있다. 이전에도 북한 인민들은 비록 수령제하에서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대목에 미세한 차이를 보였으나, 그보다는 인민들이 주체적으로 남한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분석을 수행해 왔다. 이러한 점에서 남한의 자본주의 교육은 갈수록 계급적 의식 수준이 미달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레닌 역시 《소비에트 교육부 서한》에서 “문맹을 탈피하는 계몽적 의식 수준보다 중요한 것은 계급적 의식을 갖춘 인민들의 무장”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 지적이 타당하다면 남한의 교육 수준은 양적으로는 방대할지 몰라도 질적으로는 미달한 상태다. 북한 내부의 ‘인민대학당’만 보더라도 약 2,600만 부에 달하는 사회·과학 및 마르크스주의 관련 자료가 보관되어 있다. 이에 비하면 실패한 자본주의 분석을 여실히 보여주는 남한 사회의 역사적 발전성은 오히려 낙후된 상황에 놓여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물론, 경제적 수준 자체는 천차만별이지만 말이다.  &nbsp;  학습 공간인 도서관이 점차 아동의 수준에 머무르는 민주주의적 교육관에 기대는 한, 마르크스주의 및 사회·과학 분석과 자본주의 경제학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에 불과하다. 남한에서 재출간되는 사회·과학의 비중이 경영학에 편중되는 현상은 막대한 자본을 불필요한 곳에 투여한 결과다. 이는 최근 재출간된 『공산당 선언』의 미약한 번역 수준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지점에서 남한 자본주의가 양적으로는 비대할지 몰라도 질적으로는 낙후되었다는 지적에 부분적으로 동의한다. 이는 계급적 고찰의 시각이 부재한 남한 학계 전반의 오류와 무관하지 않다. 물론 체제 내부의 대중이 이러한 한계를 스스로 파악하기는 어렵겠지만, 이는 전적으로 한국 정부, 즉 남한 사회 체제의 문제다.&nbsp;]]></description></item><item><author>서기원</author><category>입장·보고</category><title>반론은 정당하다   </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524355</link><pubDate>Fri, 18 Sep 2026 20:0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524355</guid><description><![CDATA[<br>마르크스주의와 청년 투쟁의 중요성<br>역대 사회주의 투쟁의 역사에서 청년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모든 역사적 국면에서 청년은 자본주의가 생산한 가혹한 희생물이 아니라 생생하게 움직이는 혁명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문화가 오염시킨 청년 담론과 달리, 청년 주체를 역사적 무대로 소환하는 것은 이들에게 자본주의 질서에 대한 정당한 반론을 제기할 특수한 임무와 기회를 부여하는 일이다. &nbsp;물론 기성 세대가 구축한 질서와 현 청년 세대가 지향하는 방향 사이에 깊은 격차가 존재한다는 지적이 존재한다. 한국 사회에서 소비되는 세대론은 자본주의가 고도화된 제국주의 국가의 특성상 기성 질서에 포섭된 청년들의 모습만을 보여준다는 한계를 지닌다. 그러나 혁명이 도래하는 시기에는 청년의 역사적 지향은 달라지기 마련이다. 청년은 전방위적으로 누적된 체제 모순의 한계를 딛고, 자본주의 정치가 야기한 기득권 구조를 포함해 사회 전반에 대한 생생한 변혁의 요구를 담아내게 된다. 청년이 직면한 그늘은 단순히 체제 내적인 만족에 국한되지 않으며, 불안정한 삶의 실상에서 촉발된 체제 불만은 자본주의 내부에서도 충분히 폭발적 힘으로 표출될 수 있다.  &nbsp;  마르크스주의 교육관이 부재한 현실 속에서도, 자본주의 체제의 한계에 대한 객관적 고찰과 청년 주체가 던지는 날카로운 반론들은 기성 시대가 안주해 온 기존 질서의 오류를 명백히 증명하고 있다. 특히 《조선일보》 등 언론이 청년층의 ‘극우화’를 부추기는 기사를 생산할 때조차, 그러한 언론 기저에 깔린 시각은 한국 부르주아지가 초래한 결과물이자 민족성에 기대어 봉건적 질서를 유지하려는 전근대적 태도에 불과하다. 이러한 구태의연한 정치적 시각은 이미 역사적 수명을 다했다. 이탈리아의 혁명가 안토니오 그람시가 《옥중수고》에서 “청년이 부재한 정치는 정치적 무관심을 초래하며 그 결과는 자명하다”고 지적했듯, 청년들의 반론을 단순한 세대 갈등이나 ‘극우화 현상’이라는 틀에 가두어 단정해서는 안 된다.  &nbsp;  청년들이 투쟁할 가치는 앞으로도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청년 세대가 찬란한 세계를 건설하고, 사회주의 공화국 실현 이후 주체적인 노동 해방과 혁명 투쟁에 대한 헌신을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적 역할이 요구된다. 청년들의 자립성에 대한 요구는 자본이 행사하는 소비의 위력을 압도할 수 있다.   &nbsp;  줄어드는 인구 구조를 들어 회의론을 제기하는 시각과 달리, 소수화된 청년 노동자들의 단결과 밑바닥에서의 조직적 노력은 마르크스주의적 실천과 충분히 부합할 수 있다. 청년들을 마르크스주의 이론으로 재교육하고 이들의 사회주의적 투쟁을 적극 지지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으며, 이는&nbsp;다가오는 전 세계의 부르주아지 단죄와도 무관하지 않다.&nbsp;]]></description></item><item><author>서기원</author><category>시사·투고</category><title>정부 기조의 개혁주의 비판</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523980</link><pubDate>Fri, 18 Sep 2026 16:1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523980</guid><description><![CDATA[  &nbsp;  개혁주의 정치의 후퇴와 조직적 투쟁의 부재<br>이재명 정부 지지율이 최근 36.8~38% 수준으로 하락하고 부정 평가가 56%로 과반을 넘어섰다. 이는 정부 지지율의 하락이 개혁주의 정치 성향을 띠던 민주 진영 지지층의 지속적인 이탈을 나타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경향신문》이 ETF 정책의 실패와 이에 대한 통령 정부의 전적인 책임을 지적한 점은 매우 시사적이다. 아울러 이란 전쟁 당시 호르무즈 파병설과 관련해 정부는 공식적으로 파병을 일축했으나, 한국 정부의 이름으로 막대한 군 장비 수출이 미국의 지원 목록에 등록되었다. 주식 시장의 우려에서 시작된 개혁주의 정치인의 이러한 행보는 점차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nbsp;  민주노총 지도부는 이재명 정부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며 노사 협조 방안을 수립했으나, 그 결과는 ‘선택 근로제 확대’, ‘기간제 연장 보장’, ‘노란봉투법 개정안’ 등 노동 정책의 후퇴로 나타났다. 노동계가 이를 임시방편으로 지지하는 와중에도, 대중교통 공공 임금 협상 투쟁이 격화되고 지도부의 ‘숙의’나 ‘합의’가 ‘사적 대화’ 수준에 비밀리에 머물러 있다는 점은 개혁주의 성과의 명확한 한계를 보여준다. 이는 정부 초기에 공무원 노동자들을 강하게 압박했던 조치의 결과이기도 하다.  &nbsp;  국민의힘이 이재명 정부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배경 역시 여기에 있다. 국민의힘이 정부의 전쟁 불관여·불개입 기조 속에서 국회 진입에 실패한 후 차기 정권 잡기와 당의 부흥을 모색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을지라도, 민주당의 영향력 아래 부르주아지가 가담한 개혁주의 성과가 어떠한 양상을 띠는지 명확히 보여준다.   &nbsp;  이 지점에서 민주주의적 개혁의 한계는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재명 정부는 민주주의적 노선의 중심을 유지하려 시도하지만, 부르주아 질서에 통합된 정부 기조가 여전히 ‘국민성’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이러한 국민성은 1948년 헌정 수립 이후 부르주아 질서하에 통합되어 온 대한민국 국민성의 역사적 한계와 일치한다. 최근 촛불혁명이나 빛의혁명으로 포장된 민주 시민 사회가 보여준 계몽 의식은, 모순적으로 개혁주의가 지닌 한계로 인해 기존 정치 질서로 복귀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최근 용혜인 의원의 15일 교체 파동에서 드러난 인사권 행사나, 정부의 수령금에 의존하며 은퇴 시기만을 모색하는 모습 등은 이 정부의 개혁주의가 무용지물이며 혁명성조차 상실했음을 증명한다. 이것이 민주 정부가 지향하는 방향이라면, 이재명 정권의 노선은 옥중에서 재판받는 정치범들의 한계와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다.  &nbsp;  이번 지방 선거 과정에서 선거법 위반 혐의가 불거졌을 때조차 정부는 사태 수습을 선관위에 미루었으며 재선거에 대한 명확한 입장이나 발언을 내놓지 않았다. 청년층 과반이 무당층으로 돌아서며 ‘정치 고아’ 현상이 심화되는 상황은 공산당에 대한 체계적인 시각과 정치적 노력이 부재한 가운데 한국 정치의 방향성이 실종되었음을 반증한다. 이재명 정부 특유의 개혁주의적 기조는 청년층에게 대책 없는 판단 유보와 ‘김어준 현상’에 기반한 지지를 유도했으나, 결과적으로 최소한의 ‘합의’조차 이끌어내지 못했다.  &nbsp;  이들의 좌파적 정책 역시 트럼프 관세 협상 등 미국의 원조에 의존한 결과 경제 성장률 하락을 초래했고, 투기적 주식 시장의 불안전성을 증명하는 사례만을 남겼다. 이 모든 책임은 이재명 정부에 있다. 한국 부르주아지는 이러한 현실을 ‘중산층 서민 정책’이라는 명목으로 포장하며 동일한 기만을 반복하고 있다. 자본 질서에 편입된 기성 정치인들의 본모습은 이처럼 기만적이며, 그 결과가 초래할 미래는 암담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공산당 선언』에서 우려했던, 조직적 투쟁이 부재한 자본주의 사회의 실체이다.]]></description></item><item><author>서기원</author><category>입장·보고</category><title>시이 가즈오 사상에 대한 비판적 고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506398</link><pubDate>Thu, 10 Sep 2026 02:2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506398</guid><description><![CDATA[<br><br>『지금, 일본 공산당』에 나타난 시이 가즈오 연설문의 사상적 특징  &nbsp;  <br>· 의회주의적 사회 변혁론과 민주주의 혁명 지향  &nbsp;  시이 가즈오는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단번에 이루어지는 혁명적 변혁이 아니라, 다수의 합의에 기반하여 계단을 오르는 단계적 과정으로 규정한다. 현시점 일본 사회에 필요한 변혁은 즉각적인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대미 종속과 대기업 중심주의를 타파하는 ‘민주주의 혁명 (자본주의 틀 내의 민주적 개혁’임을 명확히 한다. 또한 과거 소련 방식의 억압적 체제를 배격하고 의회 선거와 다수파 획득에 따른 평화적·민주적 변혁을 지향한다.   &nbsp;  · 자주 독립 노선과 패권주의 및 교조주의 비판  &nbsp;  당의 운동 노선을 결정함에 있어 외부 강대국의 지시나 간섭을 배제하는 자주 독립 태도를 견지한다. 과거 소련 및 중국의 간섭을 배격하고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및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폭거’로 비판했으며, 소련 공산당 붕괴 당시에도 패권주의의 해악이 사라진 것으로 보아 이를 환영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는 기존 국제 공산주의 운동 내 교조주의 및 패권주의와 선을 긋는 대목이다.  &nbsp;  · 반제국주의·반전 평화주의 및 역사 의식  &nbsp;  태평양 전쟁 이전 전전 (前戰) 시기부터 천황제 전제 정치 아래서 일관되게 침략 전쟁과 식민지 지배에 반대해 온 역사를 강조한다. 헌법 9조 개악 저지와 평화 수호를 핵심 과제로 제시하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 범죄에 대해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죄와 배상, 근본적 청산이 이루어져야 진정한 동아시아 평화와 한일 우호가 성립한다는 확고한 반제국주의 및 반전 평화주의 입장을 보인다.  &nbsp;  · 대중적 기반에 입각한 풀뿌리 민주주의   &nbsp;  정당의 정통성과 동력의 원천을 의회 내 의석수뿐만 아니라 당원, 지역·직장 지부, 기관지 (신문 아카하타) 독자층, 기업 및 국가 보조금을 받지 않는 재정적 독립성 등 민중 삶 속의 ‘풀뿌리 조직력’에서 찾는다.  &nbsp;  · 역사적 연속성과 과학적 성찰에 따른 당위성 확보  &nbsp;  창당 이후 당명을 단 한 번도 바꾸지 않은 정당성을 침략 전쟁 반대라는 일관된 투쟁 역사에서 찾는다. 동시에 당의 무오류성을 주장하는 완고함을 배격하고, 과거의 오류나 역사적 제약을 공식 문서 『일본 공산당 80년』에서 인정하고 반성하는 과학적·성찰적 태도를 취한다.<br>· 한일 관계 및 식민지 지배 책임에 대한 구조적·역사적 시각  &nbsp;  시이 가즈오는 1965년 한·일 기본 조약의 부실성을 지적하며 1910년 ‘한·일 병합’이 무력을 동원한 위협과 부력 행시로 이루어진 불법·부당한 것이었음을 확실히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또한 한반도 분단과 한국 내 군사 독재 정권의 장기화 문제까지도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연관하여 파악한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근대 사회로 진입한 한반도 주민들로부터 민주주의적 정치 경험과 훈련 기회를 박탈함으로써 분단의 소지와 독재의 역사적 원인을 제공했다고 분석한다. 따라서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과 민주적 발전을 위한 국제적 환경 조성에 일본이 역사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본다.   &nbsp;  <br>시이 가즈오와 ‘풀뿌리 민주주의’<br>  &nbsp;  현장 (풀뿌리 운동)과 의회 정치의 결합에 따라 정치 변혁과 대중적 요구의 실현은 의회 내부의 활동만으로 성립하지 않으며, 현장에서 나오는 고발 및 시민 운동과 의회 질의가 결합할 때 이루어진다고 본다. 기업의 불법 초과 근무 (서비스 잔업) 추궁, 대부업체 고금리 (그레이 존 금리) 철폐, 중고 가전 PSE 마크 강제 규제 철회, ‘애국심 통지표’ 문제 시정 등의 사례를 들어, 현장의 구체적 고발과 대중 운동을 바탕으로 의회에서 총리나 정부 부처를 추궁해 현실을 바꾸는 방식을 핵심적인 정당 활동 모델로 제시한다.  &nbsp;  기념비적이고 거대한 정강 정책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다중 채무·파산 등 시민의 삶에 직접적인 피해를 주는 문제 해결을 정당의 본분으로 삼는다. 그는 20년 이상 쌓아온 생활 상담 활동과 지역 지부의 밀착 대응을 공산당 특유의 강점으로 내세우며, 민중의 실제적 이익을 수호하는 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nbsp;  일본 내 자민당, 공명당, 민주당 등이 기득권 세력이나 대부업체 등 이익 단체의 후원금 및 헌금에 얽매여 대기업과 금융업계의 불법·폭리를 묵인할 때, 공산당은 기업 기부금이나 국가 정당 보조금을 받지 않기에 타협 없이 강력한 추궁을 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nbsp;  당시 전국 2만 4,000여 개 지부, 3,385명의 지방 의원, 130만 명의 《신문 아카히타》 독자 등 풀뿌리 네트워크를 당의 최대 자산으로 여긴다. 나가사키, 미야자키, 훗카이도 등 농촌 지역에서 지방 의원 수와 점유율을 늘려가는 성과를 제시하며, 지역 주민과 밀착하여 성실히 일하는 의정 활동이 정당 신뢰의 근간이라고 판단한다.<br>  &nbsp;  시이 가즈오의 연설문에 나타난 일본 공산당의 특징<br>  &nbsp;  일본 공산당은 주민 이익에 밀착한 실천적 지방 의정 활동을 중요시한다. 의원의 자격은 당파가 아니라 ‘주민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제대로 발언하고 행동하는가’에 달렸다고 본다. 나가사키현 코야기초나 이바라키현 쿠즈우마치 사례처럼, 지방 합병으로 소외된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현장에서 솔선수범하는 의정 활동이야말로 보수 성향 주민들의 지지까지 이끌어내는 원동력이라 평가한다.   &nbsp;  시이 가즈오가 내린 일본 공산당의 가장 큰 자산은 현장 지강과 지역에 뿌리내린 풀뿌리 조직이다. 과거부터 이어진 부당한 차별과 반공 공격 속에서도 노동자와 시민의 이익을 지켜온 단련된 조직력을 당의 힘으로 본다. 서유럽과 달리 일본 내에 잔존하는 공산당에 대한 편견과 공격에 굴하지 않고, 아래로부터의 풀뿌리 조직을 계속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nbsp;  일본 공산당이 84년간 당명을 바꾸지 않고 유지해 온 근거는 과거 제국주의의 침략 전쟁과 식민지 지배에 목숨을 걸고 반대해 온 일관된 역사에 있다. 전쟁 직전 당을 해산하거나 재편하여 전후 이름을 바꾼 타 정당들과 달리, 침략에 맞선 도덕적 자부심이 있기에 당명을 고수할 수 있으며, 이 역사가 동아시아 국가들과 신뢰를 형성하는 핵심 기초가 된다고 판단한다.   &nbsp;  자민당과 민주당 내 우익 세력 (‘일본회의 국회의원 간담회’ 등)이 추진하는 교육기본법 개악,&nbsp;교육칙어 찬양, 야스쿠니 신사 참배 정례화 등을 강력히 비판한다.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고 전전(前戰)의 제국 의회 시절로 돌아가려는 시도는 ‘해외에서 전쟁을 수항하는 나라’를 만들고 평화헌법 9조를 파괴하는 행위이므로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 이에 따라 우익 개헌파의 역사 왜곡과 군국주의 회귀를 비판한다.  &nbsp;  시이 가즈오는 민주당을 비롯한 여타 야당들은 자민당 출신 인사들이나 과거 연립 정부에 참여했던 세력들이 합류하여 만든 집단에 불과하여 자민당 정치의 가담자이자 패배의 역사를 공유한다고 본다. 전후 정치사에서 자민당 정치에 맞서 일관되게 대립각을 세우고 고유한 정체성을 지켜온 정당은 일본 공산당뿐이라고 강조한다.<br><br>마르크스주의적 관점 및 혁명적 정당론의 비판  &nbsp;    &nbsp;  시이 가즈오의 주된 논지는 계급 투쟁이나 자본주의 생산 양식 자체에 대한 근본적 비판이 아닌, ‘주민의 이익 대변’, ‘의회에서의 적극적인 발언’, ‘역사 인식 (식민지 지배 및 침략 전쟁 반대)’ 수준에 그친다. 이는 마르크스·레닌주의가 강조하는 생산 수단의 사회화, 프롤레타리아 독재, 자본주의 체제 폐지와 같은 변혁적 사상 체계가 철저히 배제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글의 전반도 자본주의 내 개량 및 민주주의적 가치로 수렴되며, 핵심 가치는 ‘평화헌법 수호’, ‘교육기본법 개악 저지’, ‘의회 민주주의 내 정당한 의정 활동’ 등 거대 정당들에 맞선 ‘자유민주주의적·헌법적 가치의 원상 복원’에 가까운 개념들이다. 사상적 기반이 마르크스의 사적 유물론이나 경제학 비판에 기초하기보다, 전후 일본의 평화주의 및 개혁적 민주주의 범주 내에 머물러 있다.   &nbsp;    &nbsp;  실천적 행보에서 배제되어 있는 지향점  &nbsp;    &nbsp;  시즈 가즈오가 강조하는 현장과 풀뿌리 조직의 역량은 결국 ‘의회에서의 추궁과 발언’, ‘선거에서의 승리’, ‘지방 의석 확보’라는 의회 정치적 결과물로 수렴된다. 이는 노동자 계급의 총파업이나 체제 변혁을 목표로 하는 노동 운동 등 의회 제도의 틀에 국한된 것이 아닌 실천적 총파업·대중 투쟁 노선이 실질적으로 배제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nbsp;  일본 공산당 내에서도 자민당·민주당 등 기존 정치 세력의 도덕적 타락과 우경화, 개헌 시도에 대해서는 강력히 비판하지만, 국가 기구 체제 자체에 대한 근본적 비판이 배제되어 있어 현대 자본주의 국가 기구 (의회, 법원, 행정 조직) 자체의 계급적 성격에 대한 비판은 찾아보기 어렵다. 의회라는 기존의 제도적 틀 내부에서 ‘더 정직하고 깨끗하며 주민을 위해 일하는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려는 의회주의적 개량주의에 실천에 방점이 찍혀 있다.   &nbsp;  국제주의적 단결 및 생산 현장 중심 투쟁의 한계도 보인다.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교류 기준 역시 ‘과거 침략 전쟁에 반대했던 역사적 도덕성’과 ‘신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자본의 세계화에 맞서는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단결이나, 생산 현장에서의 노동자 자치·통제와 같은 노동 중심적 실천 지향은 담론에서 제외되어 있다.  &nbsp;    &nbsp;  시이 가즈오와 일본공산당의 소련 비판 및 그 역사적 한계  &nbsp;  <br>시이 가즈오와 일본공산당이 보인 소련 비판은 전후 일본이라는 정치·지형학적 조건 속에서 자당의 생존과 대중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내린 전략적 선택의 성격이 짙다. 이러한 방식의 소련 비판과 정세 대응이 지닌 역사적 한계는 분명하다.   &nbsp;  일본공산당의 소련 비판은 관료주의화된 현실 사회주의 체제가 자본주의로의 이행기에서 발생시킨 생산관계의 왜곡이나 계급적 한계를 구조적으로 규명하는 데로 깊이 나아가지 못했다. 대신 소련의 일국패권주의, 인권 억압, 독재적 통치 스타일 등을 비판하며 “우리는 저들과 다른 성숙한 민주주의 정당”임을 증명하는 데 집중했다. 이는 자본주의 세력의 반공 공세를 방어하는 데는 효과적이었을지 몰라도, 마르크스주의 정당으로서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 원인을 정밀하게 분석하고 사회적 생산 양식과 사회 모델을 제시하는 사상적 심화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시이 가즈오는 과학적·체제론적 비판이 아닌 ‘도덕적·자유주의적’ 선 긋기의 한계를 보인다.   &nbsp;  소련 및 서기장파와의 대립 (1960년대 50년 문제 및 중·소 분쟁 등) 과정에서 형성된 일본공산당의 ‘자주 독립 노선’은, 의회주의적 자당 방어를 위한 정략적·사후적 정당화의 한계를 보이며 냉전기 일본 내에서 ‘스탈린주의의 하수인’이라는 공격을 피하고 의회 내 의석을 확보하기 위한 선거 공학적 목적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정치적·지형학적 압박에 대응해 사후적으로 소련을 ‘사회주의가 아닌 패권주의’로 규정하여 단절을 선언하는 방식은, 마르크스주의적 원칙에 입각한 일관된 정세 분석이라기보다 의회 내 입지 강화를 위한 정세 추종적 탈색에 가깝다는 한계를 지닌다.   &nbsp;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원리 중 하나는 전 세계 노동자 계급의 국제적 단결이다. 그러나 소련과 동구권 체제를 단순히 ‘거부하고 단절해야 할 대상을 넘어선 타자’로 규정하고 자국 내 선거와 평화헌법 수호라는 일국적 과제에 집중하면서, 국제 공산주의 운동 및 세계 수준의 반자본주의 연대 전선에서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냉전 이후에도 세계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공세에 맞서는 국제적 노동자 투쟁의 축을 구축하지 못하고, 일본 내부의 서구식 사회민주주의적 개량 정당과 유사한 지위에 머물게 된 원인이 되었다.  &nbsp;  소련의 실패와 거리를 두기 위해 ‘자유’, ‘민주주의’, ‘의회 절차’, ‘헌법 수호’를 과도하게 강조한 결과, 일본 공산당의 노선은 체제 내화에 따른 변혁적 동력을 상실하고, 자본주의 국가 기구와 법질서 자체를 승인하는 틀 안에 갇히게 되었다. 소련식 독재를 경계하는 과정에서 체제 자체를 흔드는 혁명적·변혁적 실천 지향까지 함께 탈색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자민당 정권이 구축한 전후 체제 내부에서 ‘가장 깨끗하고 성실한 야당’이라는 제약된 역할에 스스로를 가두는 역사적 한계를 드러냈다.   ]]></description></item><item><author>서기원</author><category>시사·투고</category><title>징집의 그늘</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504094</link><pubDate>Wed, 09 Sep 2026 00:3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504094</guid><description><![CDATA[  &nbsp;  징집의 그늘: 우크라이나군의 동원 규모  &nbsp;우크라이나 정부 및 군 당국의 동원 계획 기준, 월 약 2만~3만 명 수준의 충원을 지속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연간 단위로는 약 20만~30만 명 이상의 병력을 새로 충원하는 것을 목표로 설정하여 법 개정 및 단속을 강화해 왔다. 장기전 속에서 우크라이나 군의 총 상비군 규모는 약 80만~90만 명선, 예비역을 포함하면 100만 명 이상 규모를 유지하고 있으나, 전선 손실 및 순환 근무 수요로 인해 끊임없는 신규 인력 충원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nbsp;  ‘강제 동원’ 방식과 사회적 마찰 (부시피카치야)  &nbsp;  우크라이나 현지 및 국제 사회에서는 승합차를 이용한 강제 연행식 징집인 이른바 ‘부시피카치야’라 불리는 과격한 단속 방식이 주요 논란으로 부상했다. 징집 연령 기준을 기존 27세에서 25세로 하향 조정하고, 전자 등록 체계를 도입해 모바일 및 길거리 단속을 결합하고 있다. 병력 채우기 목표에 직면한 지역징집센터(TCC) 관계자들이 쇼핑몰, 대중교통, 거리 등에서 남성들을 강제로 승합차에 태우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사례가 잇따라 보고되었으며, 인권 위원회 (Lubinets)에 접수된 TCC 관련 인권 침해 민원 건수가 2022년 수십 건에서 최근 연간 수천 건 단위로 급증했다.  &nbsp;  동원 거부·탈영·유출 규모  &nbsp;  강제 동원이 가속화되면서 부작용 또한 수치로 드러나고 있다. 사법 당국 통계에 따르면, 전쟁 개발 이후 누적 무단 이탈 (AWOL) 수사 건수는 20만 건을 넘어섰으며, 이 중 절반 이상이 최근 1~2년 사이에 집중 발생했다. 탈영 입건 건수 역시 5만 건 이상을 기록하고 있다. 징집 대상 연령대 남성 수만 명이 국경을 불법으로 넘거나, 해외 보호 신청으로 체류를 연장하는 등 징집 회피 현상이 본격화되었다. 우크라이나 정부 등록 통계 기준, 징집 연령대 남성 중 약 400만 명 이상이 아직 군에 복무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어 국가의 동원 압박과 민간의 회피 간 갈등이 지속되는 핵심 원인이 되고 있다.  &nbsp;  우크라이나의 징집 체계는 ‘월 3만 명 안팎, 연간 20만~30만 명 규모’의 병력 충원을 강행하는 과정에서, 자발적 입대 지원자의 고갈과 과격한 길거리 단속 방식이 맞물려 심각한 사회적 갈등, 탈영 급증, 인권 침해 논란이라는 그늘을 겪고 있다.  &nbsp;  우크라이나 정부 및 군 당국이 밝힌 공식 수치에 따르면, 현재 우크라이나는 월 평균 3만 명에서 3만 4천 명 안팎의 인원을 지속적으로 동원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실 및 군 수뇌부는 현재 전선의 방어선을 유지하고 인력 손실을 메우기 위해 최소 월 3만 명 이상의 충원이 불가피한 최저선이라고 설명한다. 징집을 담당하는 지역 징집 센터 (TCC)의 강제/경찰력 동원이 전체 신규 충원 인원의 약 90%를 차지한다. 군 부대 직접 모집 및 자발적 계약직 입대장의 비중은 10% 안팎에 불과하여, 사실상 월 3만 명 대부분이 국가의 강제적 단속과 행정 명령에 따라 군에 배치되는 구조이다. 월 3만 명 동원에 따른 전선에서의 사상자 발생의 빈자리를 채우는 한편, 장기간 전투로 지친 기존 장병들의 순환 근무 및 휴가를 위해 지속적인 인력 투입이 요구된다. 우크라이나 당국의 발표에 따르면, 러시아의 월 동원 규모는 우크라이나보다 약 1만 명 이상 많은 월 4만~4만 5천 명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 숫자상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동원 압박을 완화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nbsp;  2024년 중반 징집 연령 하향 (27세→25세) 및 전자 등록제 도입 직후에는 월 3만 명 목표치를 상회하기도 했으나, 징집 대상 인원 고갈과 회피 현상 심화로 인해 실질 충원율이 다시 저하되거나 과격한 현장 단속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화되었다. 월 3만 여 명 규모로 동원되는 인력은 통상 1~2개월 안팎의 기초 군사 훈련만 거친 뒤 전선 부대에 배치되고 있어, 숙련도 부족 및 조기 손실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발생하고 있다.  &nbsp;  연간 동원 목표치 및 인원의 세부 구성 요소의 한계  &nbsp;  2023년 말~2024년 초 군 수뇌부 (당시 발레리 잘루즈니 총사령관 등)는 전선에서의 심각한 인력 부족과 장기전 대처를 위해 추가로 45만~50만 명 규모의 대규모 연간 동원이 필요하다고 정부에 요청했다. 그러나 50만 명 동원에 필요한 조세·재정 부담, 경제 파급력, 사회적 반발을 고려해 대통령과 정부는 해당 수치를 재검토했다. 이후 연간 최소 20만 명에서 최대 30만 명 수준의 현실적 목표치로 하향 조정하여 충원 절차를 진행해 왔다.  &nbsp;  연간 20만~30만 명이라는 목표 수치는 단순히 전선 인원을 늘리기 위한 목적에 그치지 않으며, 크게 세 가지 수요로 분할된다.  &nbsp;  1. 전사상자 손실 보충: 연간 목표치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최전선에서 발생하는 전선·전상자 및 질병·부상으로 인한 임무 불가 인원을 메우기 위한 즉각적인 대체 인력이다.  &nbsp;  2. 복무 장기화에 따른 순환 배치: 2~3년 이상 전선에 고립되어 싸워온 장기 복무자들의 교체 및 휴가 제공, 후방 재편성을 위한 예비역 교체 수요이다.&nbsp; &nbsp;3. 신규 여단 창설 및 예비 전력 확보: 서방에서 지원되는 신규 무기 및 장비를 운용할 신규 여단을 편제하고, 적의 대규모 공세에 대응할 전략 예비대를 구성하기 위한 인력이다.  &nbsp;  우크라이나 정부는 연간 목표 달성이 차질을 빚자 2024년 중반부터 강력한 법적 조치들을 단계적으로 시행했다. 기존 27세였던 최소 징집 연령을 25세로 전격 하향 조정하여 청년층 대상 인력 풀을 확충했다. 기존의 면제 사유 (건강 상태, 다자녀 가구, 간병인 지정 등) 기준을 대폭 강화하고, 병역 의무를 완화해 주던 행정적 허점을 차단했다. 모든 징집 대상 남성이 모바일 및 전자 체계에 따른 자신의 개인정보와 거주지를 정해진 기한 내에 최신화하도록 법제화했다. 미등록 시 금융 거래 제한, 운전면허 정지, 과태료 부과 등의 불이익을 적용했다.  &nbsp;  강화된 법안 도입 초기에는 동원 수치가 일시적으로 반등했으나, 징집 회피 현상 심화 및 대상 인원 고갈로 인해 연간 목표치를 안정적으로 채우는 데 지속적인 난항을 겪었다. 군인 1명을 동원하여 훈련하고 무장시키는 데 연간 수십만 흐리우냐 이상의 예산이 소요되며, 이는 경제 활동 인구의 직장 이탈로 이어져 국가 세수 감소라는 중복 악재를 초래했다. 연간 목표 수치를 맞추기 위한 현장 TCC (지역징집센터)의 실적 압박이 강해지면서, 길거리 강제 연행 및 인권 침해 사례가 상시화되는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했다.  &nbsp;  우크라이나군의 상비군 및 예비군 체급  &nbsp;  개전 전 약 20만 명 수준이던 우크라이나 상비군 전력은 전면전 개시 및 국가총동원령 발령 이후 약 4~5배 이상 급증하여 현재 80만 명에서 최대 100만 명 선을 유지하고 있다. 육군 상비군의 중추로 약 50만~60만 명 이상이 배치되어 있으며, 핵심 전투 여단 (기계화·보병·포병 등)을 형성한다.  &nbsp;  국토 방위군은 개전 초기 자발적 민병대로 출발했으나 현재는 군 정규 체계로 편입되어 지역 방어 및 후방 경계, 전선 보충 전력으로 약 10만~15만 명 규모를 구성한다.  &nbsp;  공군·해군·특수작전군 (SOF)·공중강습군 및 드론전력군은 항공, 해안 방어, 특수작전 및 2024년 신설된 드론 전담 부대 등에 약 15만~20만 명이 배치되어 있다.  &nbsp;  내무부 산하 국가친위대 및 국경검문단은 준군사조직 성격으로 약 10만~25만 명이 전선 지원 및 치안·국경 경무를 담당한다.  &nbsp;  공식적·행정적 예비군 수치는 매우 거대하지만, 실제 전투 가용 인원 간에는 상당한 격차가 존재한다.  &nbsp;  1차 예비역으로는 군 복무 경험이 있거나 2014년 이후 동부 전선 (ATO) 실전 경험을 가진 핵심 예비역으로, 개전 초기에 이미 대부분 현역 부대로 편입되어 소모된 상태이다.  &nbsp;  명부상 예비군 (전체 등록 자원)은 우크라이나 행정 등록 통계 및 세계 군사 통계에 따르면, 과거 군 복무 이력자 및 동원 대상자를 포함한 예비역 명부 체급은 약 90만 명에서 최대 400만 명에 달한다.  &nbsp;  실질 가용 자원 (약 300만~400만 명 중 일부)은 징집 연령대 (25~60세) 남성 중 군에 복무하지 않은 인원이 수백만 명 존재하지만, 국외 유출, 국경 이탈, 건강상 부적격, 국가 필수 산업 종사 (유예자) 등을 제외하면 현장에 즉시 투입 가용 실질 자원은 크게 제한되어 있다.  &nbsp;  상비군 체급 유지의 한계와 병목 현상도 심화되었다. 100만 명 규모의 대대적인 상비군을 전선에 유지하기 위해서는 매달 발생하는 전사, 전상, 질병, 탈영 인원을 메우기 위해 끊임없이 월 3만 명 규모의 신규 징집이 이루어져야만 체급이 유지되는 구조이다.  &nbsp;  대규모 징집을 거치며 현역 장병의 평균 연령이 40세 안팎으로 높아졌다. 청년층 보호를 위해 징집 연령 하한선 (25세)을 유지하고 있으나, 이는 체력적 소모가 심한 최전선 전투력 유지에 부담으로 작용한다.  &nbsp;  100만 명의 상비군에게 월급, 식량, 군복, 무기, 탄약을 제공하는 비용은 우크라이나 국가 재정 (GDP 및 정부 지출의 상당 부분)과 서방의 군사 지원 없이는 지속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nbsp;  우크라이나는 상비군 80만~100만 명, 준군사조직 10만~25만 명을 합쳐 세계 최고 수준의 대규모 군사 체급을 유지하고 있으나, 이를 유지하기 위한 지속적인 인력 소모와 인력 풀의 고갈로 인해 강제 징집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에 직면해 있다.  &nbsp;  우크라이나는 그동안 청년층 인구 감소와 경제 허리층 보호를 위해 최저 징집 연령을 27세로 유지해 왔으나, 최전선 인력 고갈로 인해 법안을 전격 개정했다 (법안 제3127-IX호). 25세 이상~60세 이하의 남성이 즉시 강제 동원 대상 (의무 복무 대상자)으로 편입되었다. 징집 연령 미만인 18~24세 남성에게는 기존의 입대 의무 대신 3~5개월간의 기초 군사 훈련 및 의무 교육 과정을 거치도록 개편했다. 훈련을 마친 인원은 25세 도달 시 즉시 현역으로 차출될 수 있는 자원으로 분류된다.  &nbsp;  징집 대상을 추적하고 거주지 불명 등으로 인한 회피를 차단하기 위해 행정 및 디지털 통제를 대폭 강화했다. 18세~60세 사이의 모든 남성은 거주지, 전화번호, 이메일 등의 최신 정보를 국가 데이터베이스에 의무적으로 최신화해야 했다. 모바일 앱을 출시하여 비대면으로 군적을 등록하고 전자 군사 ID를 발급받도록 유도했다. 외출 시 신분증과 함께 군적 증명서를 상시 지참해야 하며, 경찰, 국경경비대, TCC (지역징집센터) 직원이 길거리나 공공장소에서 상시 검문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을 부여했다.  &nbsp;  기존 법의 허점을 이용한 징집 회피를 막기 위해 예외 조항을 엄격하게 재편했다. 기존에 ‘부분적 건강 이상’으로 현역 입대가 면제되었던 등급을 전면 폐지했다. 해당 판정을 받았던 인원들은 일정 기간 내 재검진 (MMC)을 받아 ‘적합’ 또는 ‘완전 부적합’으로 재분류되도록 강제하여 동원 자원으로 끌어들였다. 학업을 이유로 한 징집 유예는 ‘이전 학위보다 더 높은 단계의 정규 학위 과정을 밟는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인정하여, 징집을 피하기 위한 반복적인 대학 재입학이나 동일 학위 재등록을 차단했다. 다자녀 가구라도 양육비 체납 이력이 있거나, 장애인 가족 간병을 이유로 유예를 신청할 경우 실질적인 대체 간병인이 없는지 엄격히 검증하도록 바꿨다.  &nbsp;  징집 명령이나 정보 최신화 요구에 응하지 않는 남성들에 대해 행정적·경제적 불이익 조치를 명시했다. TCC의 출석 요구에 응하지 않을 경우, 법원 판결로 운전면허를 일시 정지할 수 있도록 했다. 군적 등록 및 동원법 위반 시 부과되는 벌금을 종전 대비 수배 이상 인상 (최대 25,500 흐리우냐 수준)했다. 해외에 체류 중인 우크라이나 남성이 여권 재발급이나 영사 업무를 이용하려면 반드시 전자 등록으로 군적을 최신화했음을 증명해야 하도록 제한 조치를 내렸다.  &nbsp;  강화된 동원법 개정안의 초안에는 ‘36개월 이상 복무한 장장기 복무자의 제대 기준’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군 수뇌부 (올렉산드르 시르스키 총사령관 등)의 요쳥으로 제대 관련 조항이 최종안에서 삭제되었다. 2022년 개전 초기 자발적으로 입대한 장병들과 그 가족들 사이에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무기한 복무에 갇혔다”는 거센 반발이 일어났다. 전선 복무자의 제대가 어려워지면서 신규 인력 충원 요구는 더 가혹해졌고, 이는 현장의 강제 연행식 징집과 탈영/복무 이탈 급증으로 이어지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nbsp;  ‘부시피카치야’의 구체적 단속 양상  &nbsp;  우크라이나 현지에서 ‘부시피카치야’라는 신조어로 불리는 현장 강제 연행 방식은 대표적인 과잉 단속 사례다. TCC 직원들은 경찰과 합동으로 대중교통 승강장, 지하철역, 지하철 입구, 쇼핑몰, 체육관, 공연장 주변 등을 기습적으로 통제한다. 2024년 말 키이우 스포츠 궁전에서 열린 대형 콘서트장 입구를 수백 명의 TCC와 경찰이 봉쇄하고 남성들의 신원 증명서를 일제히 검문해 즉석 연행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신분증이나 군적 증명서를 지참하지 않았거나 등록 정보가 부실한 남성을 사전 서면 통지 없이 현장에서 즉시 무력으로 압송한다. 사복이나 군복을 입은 단속원들이 대상자를 승합차에 강제로 밀어 넣는 영상이 SNS로 지속해서 유포되고 있다. 연행 직후 TCC 시설에 기습 구금하여 외부 (가족, 변호사)와의 연락을 차단한 채, 수 시간 내에 신체검사 절차를 속성으로 끝내고 바로 훈련소로 이송하는 사례가 다수 보고되었다.  &nbsp;  할당된 동원 실적을 채우기 위한 TCC 단속원들의 폭력과 부주의로 인해 치명적인 인권 침해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 단속에 저항하거나 연행을 거부하는 민간인을 향해 최루가스를 분사하거나, 길거리에서 폭행 및 구타를 가하는 행위가 문제시되었다. UN 우크라이나 인권감시단 (HRMMU) 및 현지 사법 당국 보고에 따르면, 징집센터로 끌려간 인원이 체포 및 조사 과정에서 머리 등에 치명적인 타박상을 입고 병원으로 이송된 후 사망하거나 구금 시설 내에서 숨진 사건이 확인되었다. TCC 측은 “지병으로 인한 심장마비”나 “의식 불명으로 인한 낙상”이라고 주장하지만, 유가족과 인권단체는 과도한 폭력 및 치료 방치를 원인으로 지적한다. 중증 지병이나 신체 장애가 있는 인원임에도, 군의무위원회 (MMC)가 형식적인 검진만 거쳐 ‘복무 적합’ 판정을 내린 후 전선에 배치하는 의료 방임·불법 판정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  &nbsp;  과잉 단속 및 인권 침해 양상은 국가 기관과 국제 기구의 공식 통계로도 확인된다. 우크라이나 의회 인권옴부즈맨 (드미트로 루비네츠)에 접수된 TCC 관련 인권 침해 및 불법 연행 민원 건수는 전쟁 초기 수십 건에 불과했으나, 최근 연간 수천 건 단위 (6,000건 이상)로 폭증했다. 옴부즈맨은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TCC의 불법 강제 징집과 관련한 민원이 들어오지 않는 지역이 없다”고 밝히기도 했다. 유럽연합 인권담당관과 UN 인권고등판무관실은 우크라이나 정부에 전달한 보고서에서 “강제 연행, 폭행, 변호인 접견권 박탈, 장애인에 대한 무차별 동원 등 체계적 인권 침해가 발생하고 있다”고 공식 지적하며 독립적인 감시 기구 신설을 촉구했다.  &nbsp;  TCC의 무력 동원이 일상화되면서 민간인과의 유혈 충돌 및 법 집행 기피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 시민들이 단속 중인 TCC 차량을 둘러싸고 물리적으로 연행을 막아서거나 징집관과 몸싸움을 벌이는 일이 빈번해졌다. 심지어 분노한 시민이 TCC 직원을 향해 흉기를 휘둘러 징집관이 사망하거나 TCC 건물에 화염병을 투척하는 폭력 사태까지 이어지고 있다. 징집 연령대 남성들이 TCC 단속을 피해 직장을 그만두고 외출을 완전히 삼가는 ‘은둔 생활’을 선택함에 따라 자영업, 건설, 물류 등 민간 경제 현장의 인력난이 가중되고 있다.  &nbsp;  우크라이나군에서 발생하고 있는 무단 이탈 (AWOL, 부대 무단 이탈) 및 탈영 수치의 세부적인 현황으로는 우크라이나 형법은 단순 복무 이탈 (제407조)과 복무 의무를 완전히 버릴 목적으로 이탈하는 탈영 (제408조)을 구별하여 사법 처리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검찰총장실과 현지 사법 당국 통계에 따르면, 개전 (2022년 2월) 이후 누적 입건된 이탈·탈영 사건은 총 25만 건 이상에 달한다.  &nbsp;  무단 이탈 (AWOL) 입건 수치  &nbsp;  2022년: 6,988건  &nbsp;  2023년: 17,658건  &nbsp;  2024년: 67,840건 (전년 대비 약 4배 급증)  &nbsp;  2025년 (1~7월): 110,511건 (불과 7개월 만에 과거 3년 누적치를 상회)  &nbsp;  탈영(Desertion) 입건 수치   &nbsp;  2022년~2025년 중반 기준 50,000건 이상  &nbsp;  전쟁 장기화로 복무 피로도가 극에 달하고 강제 동원 (부시피카치야)이 가속화된 2024~2025년 기간에 이탈 수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우크라이나 국방부는 공식 허가 없이 복무지나 부대를 이탈한 병력의 실질적 누적 규모를 약 20만 명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는 우크라이나 전체 상비군 전력 (80만~100만 명)의 약 20%에 해당하는 거대한 수치다. 부대 이탈자 외에도 TCC (지역징집센터)의 징집 통지서 수령을 거부하거나 신원 등록을 하지 않아 경찰 과 사법 당국에 병역 기피자로 수배 및 추적 명부에 오른 인원은 200만 명 이상에 달한다.  &nbsp;  개별적인 무단 이탈 외에도, 전선 소모전 속에서 중대·대대급 집단 이탈 사례가 잇따라 발생했다. 2024년 말 우흘레다르 방어전 당시 제123국토방우여단 소속 수백 명의 장병이 압도적인 화력 차이와 병력 부족, 지휘관과의 갈등을 이유로 진지를 버리고 단체로 이탈한 사건이 발생했다. 서방 국가 (독일, 영국 등)로 신규 장비 운용 및 기초 군사 훈련을 받기 위해 파견된 이탈자도 속출했다. 독일 주간지 등 외신에 따르면, 독일 군사훈련장에서 훈련을 받던 우크라이나 군인 수십 명 이상이 현지에서 무단 이탈하여 자취를 감추는 사례가 보고되었다.  &nbsp;  탈영 건수가 폭증하자 우크라이나 사법 당국 및 국방부는 다음과 같은 현실적 한계와 비상 조치에 직면했다. 무단 이탈 발생 건수가 전 사법 기관의 수사 역량을 초과함에 따라, 실제 수사를 거쳐 정식 기소되거나 재판에 넘겨진 비율은 전체 사건의 7% 안팎에 불과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이탈자들을 형사 처벌하는 것보다 전선으로 북귀시키는 것이 시급하다고 판단하여, “최초 이탈자에 한해 자발적으로 부대로 복귀할 경우 형사 처벌을 면제하고 급여와 복지 혜택을 재개한다”는 법안을 승인 및 시행했다. 이 조치 등으로 보름~수개월 사이 약 3만 명 안팎의 이탈 장병이 전선 부대로 자진 복귀하기도 했으나, 이탈의 근본 원인이 해결되지 않아 재이탈률 또한 지속해서 발생하는 실정이다.  &nbsp;  복무 기한 (36개월 제대안) 조항이 전면 삭제되면서 “부상을 입거나 전사하지 않는 한 끝나지 않는다”는 절망감이 이탈로 이어졌다. ‘부시피카치야’로 인해 길거리에서 강제로 끌려온 인원의 경우, 자발적 입대자에 비해 복무 의지와 충성도가 극히 낮아 배치 직후 이탈할 확률이 매우 높다. 최소한의 순환 배치 없이 장기간 최전선에 고립되면서 극심한 전투 피로와 PTSD를 겪은 장병들의 무단 이탈이 상시화되었다.  &nbsp;  국경 탈출 및 적발 수치  &nbsp;  우크라이나 국경경비대 (SBSU) 및 의회 보고서, 외신 통계에 따르면 징집을 피해 국경을 넘으려다 적발되거나 성공한 인원은 수만 명 단위에 달한다. 개전 이후 국경 검문소나 산악·강경계 지역에서 불법 탈출을 시도하다 우크라이나 국경경비대에 적발된 징집 대상 남성은 누적 4만 5,000명~5만 명 이상으로 집계된다. 루마니아, 몰도바, 폴란드, 슬로바키아, 헝가리 등 인접국 정부 통계에 따르면, 국경을 넘은 뒤 현지 당국에 난민 또는 보호 신청을 내며 체류를 인정받는 징집 대상 남성은 최소 2만~4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산악 지대 (카르파티아 산맥)를 도보로 넘거나 티사 강을 헤엄쳐 건너는 방식이 가장 흔하다. (이 과정에서 익사하거나 익사체로 발견되는 남성이 수십 명 이상 발생해 현지에서 ‘죽음의 강’으로 불리기도 한다.) 최근 EU 국경 단속이 강화되자 상대적으로 단속이 허술한 국경이나 벨라루스 방향으로 탈출을 시도하는 비율이 이전 대비 대폭 증가했다.  &nbsp;  국경 통제가 엄격해짐에 따라 징집 회피를 돕는 조직적인 범죄 브로커 네트워크가 텔레그램 등을 중심으로 거대 암시장을 형성했다.  &nbsp;  밀탈출 비용 (1인당 5,000 ~ 15,000달러)  &nbsp;  위험 경로 (산악·강 도보 통과)는 1인당 약 5,000 ~ 8,000달러 선으로, 국경경비대의 순찰 사건을 피해 감시망을 우회하는 국경 접근 지지도 및 도보 가이드를 제공한다.  &nbsp;  안전 경로는 1인당 10,000 ~ 15,000달러 이상으로, 단속 초소를 우회하는 전용 차량 운격 지원 및 국경 인근 브로커 조력망이 결합된 형태다.  &nbsp;  허위 문서 및 체계 조작 암거래는 의료진 및 병역판정위원회 (MMC)에 뇌물을 주고 허위 장애 판정이나 복무 불인정 진단서를 발급받는 비용이 수천 달러에 거래된다.  &nbsp;  ‘슐라흐 (Shlyakh)’ 인도적 운송 체계 악용으로 구호물자 운송 기사나 인도적 지원 활동가 명목으로 출국 허가를 받아낸 뒤 해외로 나간 후 돌아오지 않는 방식으로, 이 체계로 탈출한 인원만 수만 명에 달한다.  &nbsp;  해외로 피신해 체류 중인 남성들의 문제가 우크라이나 정부와 서방 국가 간의 외교적·사회적 이슈로 확대되었다. 유로스탯 (Eurostat) 통계에 따르면, EU 국가 내에서 임시 보호 지위를 얻어 체류 중인 우크라이나인 약 400만여 명 중 20% 이상 (약 80만~90만 명)이 징집 대상 연령대의 성인 남성이다. 우크라이나 외무부는 해외 체류 남성들의 귀국 및 징집 등록을 강제하기 위해, 전자 군적 (Reserve +) 등록을 완료하지 않은 해외 남성에 대해 여권 재발급 및 영사 업무 제공을 전면 중단하는 강경 조치를 취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EU 인접국들에 병역 기피자들의 강제 송환을 요청했으나,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인권법 및 자국 난민 보호 법적 절차를 이유로 단순 병역 기피자를 강제로 우크라이나로 송환하는 것에 불응하거나 난색을 표하고 있다.  &nbsp;  국경을 넘지 못한 우크라이나 남성들 사이에서도 징집을 피하기 위한 생활 방식의 변화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TCC (지역징집센터)의 단속을 피하기 위해 공식적인 직장을 그만두고 현금 결제 위주의 비공식 노동에 종사하거나, 거주지를 등록하지 않은 친인척 집으로 옮겨 외출을 극도로 자제하는 남성들이 늘어났다. 지역별로 TCC 단속원과 승합차가 어디에서 검문을 진행 중인지 실시간으로 제보하고 공유하는 텔레그램 단체방 (회원 수 수십만 명 규모)이 활발하게 운용되고 있으며, 당국은 이를 채널의 운영자를 처벌하거나 차단하는 조치를 지속하고 있다. 징집 유예 조건을 얻기 위해 연령대가 높은 대학/대학원 과정에 형식적으로 재입학하거나, 장애인과의 허위 혼인, 다자녀 가구로의 명의 변경 등 행정적 허점을 이용한 회피 기법이 성행했다.  &nbsp;  우크라이나 의회 경제개발위원회 및 국가 등록 통계에 따르면, 개전 후 징집 연령대에 해당하는 25~59세 남성 인구는 총 약 1,110만 명 (1,110만 6,000여 명)으로 집계된다. 그러나 이는 1,110만 명 전체가 즉시 현장에 투입 가용 자원은 아니며, 법적·물리적 사유에 따라 다음과 같이 세부 분류된다.  &nbsp;  1,100만 명 중 군 복무에 직접 동원할 수 없는 인원은 전체의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개전 후 불법/합법적으로 국경을 넘었거나 전쟁 전부터 해외에 거주하던 징집 대상 남성이다. 유럽연합 (EU) 국가 내 임시 보호 지위를 신청한 우크라이나 성인 남성만 약 80만~90만 명에 달하며, 전체 해외 체류자는 수백만 명 규모다.  &nbsp;  · 장애 및 건강 이상 판정자 (약 15만 명): 신체적·정신적 장애나 중증 지병으로 인해 법적으로 복무가 불가용한 인원이다.  &nbsp;  · 국가 필수 산업 지정 및 유예자 (약 60만~100만 명): 방위 산업, 에너지, 수송, 공공 행정 등 국가 기능 유지 및 필수 경제 활동을 위해 법적으로 징집이 유예 (예약)된 남성들이다.  &nbsp;  이미 복무 중인 전력 (약 100만 명): 상비군, 국토방위군, 경찰, 국경경비대 등 이미 군에 편입되어 복무 중인 인원이다.  &nbsp;  위의 유예·장애·해외 체류 및 기존 복무자를 제외하고 국내에 체류하면서 복무 경험이 없는 ‘실진 동원 가용 자원’은 약 300만~400만 명 안팎으로 추산된다. 미등록 및 ‘음지’ 체류자 (약 150만~200만 명)은 전자 등록제 (Reserve+)나 징집센터 (TCC)에 자신의 최신 거주지 및 신원 정보를 최신화하지 않고 추적을 피해 경제 활동을 대면/현금화하거나 은둔 생활을 하는 남성들이다. 사법 당국의 추적 대상자 (약 200만 명)은 우크라이나 국방부 및 사법 당국 발표에 따르면, 징집 통지서 수령 거부, 군적 미등록, 검진 기피 등으로 인해 병역 기피 수배 명부 및 신원 추적 데이터베이스에 오른 남성이 약 200만 명에 달한다.  &nbsp;  우크라이나 정부가 징집 연령 하한선을 25세 미만으로 쉽게 내리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인구 구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는 2000년 대 초반 극심한 저출생을 겪어, 현재 18세~24세 연령대 나성 인구는 약 150만 명 수준에 불과하다. 이는 30대~40대 연령군 인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가장 작은 인구 집단이다. 18세 24세 청년층을 대규모로 전선에 동원하여 손실될 경우, 전쟁 이후 국가 재건과 인구 재생산 (출산율) 자체가 어려워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작용하여 해당 연령대는 자발적 계약 입대 (특례 프로그램) 외의 강제 징집을 유예하고 있다.  &nbsp;  우크라이나는 서류상 1,110만 명이라는 거대한 남성 인구 자원을 가지고 있으나, 해외 유출, 장애/건강 부적격, 경제 필수 인력 유예, 그리고 200만 명에 달하는 미등록·기피자로 인해 현장에서 즉시 동원할 수 있는 인력 풀은 고갈 상태에 직면해 있다. 이 때문에 국가가 남은 자원을 끌어모으기 위해 과격한 현장 단속과 법적 압박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형성되었다.  &nbsp;  강제 징집 동원의 사회·경제적 결론  &nbsp;  징집 연령대 (25~59세) 남성은 공장, 건설, 물류, IT, 자영업 등 민간 경제의 핵심 생산 축이다. 이들의 대규모 동원과 단속을 피하기 위한 은둔형 경제 활동 (음지화)으로 인해 산업 현장은 심각한 노동력 부족을 겪고 있다. 국제노동기구 (ILO)는 우크라이나 노동 시장에 심각한 공백이 발생했음을 지적한 바 있다. 미등록 남성들의 비공식 현금 노동 선호로 인해 근로소득세와 기업 세수가 대폭 감소했다. 반면, 100만 명 규모의 상비군을 유지하기 위한 식량, 무기, 월급 등 군사 지출은 지속 증가하여 서방의 재정 지원 없이는 자체 유지가 어려운 구조적 적자에 직면해 있다. 징집 면제 진단서 거래, 해외 도피 브로커 네트워크, TCC 단속 회피 암거래 등에 수억 달러 규모의 자금이 유입되며 거대 지하 경제가 형성되었고, 이는 국가 부패지수를 악화시키고 경제 순환을 교란하고 있다.  &nbsp;  재력이나 권력이 있는 기득권층은 뇌물, 유학, 해외 피신 등으로 징집을 피하고, 농촌 지역 남성들이 집중적으로 길거리 강제 연행 (부시피카치야)의 대상이 된다는 박탈감이 극에 달했다. 전선에서 생사를 넘어 돌아온 참전 용사들 (부상자, 제대자)과 후방에서 징집을 회피하며 일상을 유지하던 민간인 간의 상호 불신 및 도덕적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 이는 향후 전후 사회에 거대한 장벽이 될 것으로 평가된다. 지역징집센터 (TCC)가 방어의 주체가 아니라 ‘인민을 사냥하는 압제 기관’으로 여겨지면서, 인민들이 징집관을 습격하거나 화염병을 던지는 등 법 집행 기관에 대한 저항 행위와 사회적 파편화가 상시화되었다.  &nbsp;  강제 징집은 당장의 전선 방어선을 유지하기 위한 국가의 생존 수단이지만, “국가를 지키기 위해 강제력을 동원할수록, 그 국가 내부의 사회적 합의와 자립적 경제 기반이 파괴되는 모순”을 만들고 있다. 강제 징집 체제의 폭력성은 우크라이나 자본주의 국가의 계급적 본질을 폭로하고 지배 체제와 인민 대중 간의 균열을 돌이킬 수 없이 심화시키고 있다. 이는 전후 자본주의적 통치 질서의 정당성을 근본적으로 타격하는 결정적 계급적 모순으로 작용한다.<br><br><br>&lt;'가혹 징집' 논란 기사, 2025. 08. 05.&gt;]]></description></item><item><author>서기원</author><category>입장·보고</category><title>대혁명 연설문</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496713</link><pubDate>Sat, 05 Sep 2026 22:4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496713</guid><description><![CDATA[<br>다가올 혁명에 맞추어,&nbsp;<br>프랑스에서는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습격 사건'을 기점으로, 1792년 9월 제1공화국이 성립되며 왕정이 폐지되었다. 이후 1793-1794년 공포 정치가 전개되었고, 1799년 11월 9일 나폴레옹 쿠데타가 공포 정치 이후의 혼란기를 종식하며 프랑스 대혁명은 막을 내렸다. 이 시민 혁명이 막을 내린 지 어느덧 200여 년이 흘렀다. 이 부르주아 혁명의 유산은, 서구 시민 혁명의 역사가 군주제라는 암흑기로 시작해 다시 군주제로 귀결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반동 세력의 집요한 도전에 맞서지 못하고 패배한 결과였다.&nbsp;<br>그러나 우리의 핏줄에는 두 차례에 걸친 러시아 혁명의 역사가 흐르고 있다. 2월 혁명과 10월 혁명이 바로 그것이다. 부르주아의 유산이 통령 정부라는 실권 아래 다시 권력을 장악하려 할 때도, 전 세계의 노동 계급은 그 유산을 뒤집어엎고 모든 권력을 본래의 주인인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돌려놓았다. 100여 년의 시간이 지났다. 부르주아 국가의 지배 계급은 혁명의 유산이 이제 종말을 고했으며, 1990년대 이후로 더 이상의 혁명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이다. 자본가 계급이 구축한 부르주아 독재는 수 세기 동안 방치된 채 인민 국가의 소박한 사회주의적 요구마저 무시해 왔으며, 자신들의 이익을 노동자의 당연한 희생으로 정당화해 왔다. 노동자들의 계급 투쟁 의식에 결코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남겼다. 산업 혁명 이후 점차 개인화된 희생 속에서도,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유산이 곧 부르주아와의 철저한 단절임을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nbsp;<br>1946년에는 중국 혁명의 기틀이 마련되었고, 1953년에는 쿠바 혁명의 포성이 울렸다.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부르주아 국가의 인민들은 혁명에 대한 정보조차 통제당한 채, 혁명의 시기가 도래하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차단된 정보 속에서 투쟁을 이어가야 했다. 이는 현대에도 여전히 자행되고 있는 일이다.<br>그들은 노동자 인민을 저버렸다. '부의 축적'을 위한 사유 재산권이야말로 모두가 누릴 자유라 기만하면서, 타국 무고한 인민들의 희생을 담보로 통령 권력의 주인을 자처하고 있다. 미래의 고도화된 기술을 둘러싸고 다양한 의견이 대립하고 있지만, 정작 이 혁명의 유산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망각하고 말았다. 이는 유럽 부르주아 계급이 지금까지 걸어온 결론이자, 보나파르트가 기승을 부리던 시절이나 부르주아 국가 간 전쟁이 인민 학살의 원천이 되던 시절에도 변함없는 결론이었다. 대혁명의 거대한 역사에 비하면 인간의 일생은 보잘것없이 짧다. 그러나 그 짧은 생애가 모여 방대한 투쟁의 역사를 이룬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br>전 세계에서 전쟁의 포성이 울리는 지금, 우리가 요구해야 할 것은 평화의 구호가 아닌 계급적 적대와 투쟁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엄연히 존재하는 계급 분열의 현실 앞에서, 이러한 혁명의 주체는 시민권을 독점한 자본가가 아닌 오직 노동자뿐임을 역사는 증명한다. 혁명은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진행 중이다. 수많은 혁명가들의 피와 노력이 이 길에 깃들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인민의 승리는 단순한 혁명의 순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반혁명에 맞선 장기간의 투쟁끝에 완성되는 법이다. 이들의 노고와 함께 우리는 계속 전진할 것이다. 착취의 사슬을 끊어내는 것은 우리의 관념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존재 자체이다.&nbsp;<br><br>В преддверии надвигающейся революции,  &nbsp;  Во Франции, начиная с «Взятия Бастилии» 14 июля 1789 года, через провозглашение Первой республики в сентябре 1792 года была упразднена монархия. Вслед за этим, в 1793–1794 годах, развернулся Великий террор, а 9 ноября 1799 года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переворот Наполеона положил конец периоду хаоса, последовавшему за террором, и тем самым Французская революция завершилась. С момента окончания этой буржуазной революции прошло уже более 200 лет. Наследие этой буржуазной революции показывает, что история западных гражданских революций началась с мрачной эпохи монархии и в конечном счете снова вернулась к монархии. Это стало результатом неспособности противостоять упорным вызовам реакционных сил и последующего поражения.  &nbsp;  Однако в нашей крови течет история двух русских революций: Февральской и Октябрьской. Когда буржуазное наследие пыталось вновь захватить власть под реальным прикрытием правительства Консулата, рабочий класс всего мира ниспроверг это наследие и вернул всю власть ее законному хозяину — пролетариату. Прошло уже более 100 лет. Правящий класс буржуазных государств утверждал, будто наследие революции подошло к концу и после 1990-х годов никаких революций больше не будет. Но это ложь. Диктатура буржуазии, выстроенная классами капиталистов, оставалась безнадзорной на протяжении веков, игнорируя даже скромные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е требования народного государства, и оправдывала собственные интересы закономерными жертвами рабочих. Это оставило неизгладимый след в сознании классовой борьбы трудящихся. Именно поэтому мы не должны забывать, что даже в условиях жертв, становившихся всё более индивидуализированными со времен промышленной революции, наследием пролетарской революции является полный и решительный разрыв с буржуазией.  &nbsp;  В 1946 году были заложены основы Китайской революции, а в 1953 году прозвучали выстрелы Кубинской революции. Даже во время свершения революций народы буржуазных государств подвергались информационной блокаде, не зная о приближении революционной эпохи и будучи вынужденными продолжать борьбу в условиях изоляции от информации. Это то, что продолжается и в современности.  &nbsp;  Они предали трудящийся народ. Обманывая всех тем, что право частной собственности ради «накопления богатства» якобы и есть свобода для каждого, они провозглашают себя хозяевами власти Консулата ценой жертв невиновных народов других стран. Вокруг будущих высокоразвитых технологий сталкиваются самые разные мнения, однако все забыли о том, что наследие этой революции всё еще живо. Это вывод, к которому до сих пор шел европейский класс буржуазии, и вывод, который оставался неизменным как во времена буйства Бонапарта, так и в эпохи, когда войны между буржуазными государствами становились источником геноцида народов. По сравнению с величественной историей Великой революции человеческая жизнь незначительна и коротка. Однако эта история доказывает, что именно слияние этих коротких жизней образует грандиозную историю борьбы.  &nbsp;  Сегодня, когда по всему миру гремят канонады войн, мы не должны забывать: то, чего мы должны требовать — это не лозунги о мире, а классовая вражда и борьба. Перед лицом реальности классового раскола история доказывает, что субъектом такой революции являются не капиталисты, монополизировавшие гражданские права, а исключительно рабочие. Революция не осталась в прошлом — она продолжается прямо в эту минуту. Нельзя забывать, что в этот путь вложены кровь и усилия бесчисленных революционеров. Победа народа не ограничивается лишь моментом революции; она достигается в ходе длительной борьбы против контрреволюции. Вместе с их трудом мы будем непрестанно двигаться вперед. Разрыв цепей эксплуатации — это не наша абстрактная идея, а само наше существование.  &nbsp;    &nbsp;在即将到来的革命面前，  &nbsp;  在法国，以1789年7月14日的“攻占巴士底狱”为起点，随着1792年9月法兰西第一共和国的成立，君主制被废除。随后在1793年至1794年间展开了恐怖统治，而1799年11月9日拿破仑的政变结束了恐怖统治后的混乱时期，法国大革命由此落下帷幕。自这场资产阶级革命落幕以来，不知不觉已过去了200多年。这场资产阶级革命的遗产表明，西方公民革命的历史始于君主制这一黑暗时期，最终又回归于君主制。这是未能抵御反动势力执着挑战而导致失败的结果。  &nbsp;  然而，我们的血管里淌着两次俄罗斯革命的历史，那便是二月革命和十月革命。当资产阶级的遗产试图在执政政府的实权掩护下再次夺取政权时，全世界的工人阶级推翻了那一遗产，将一切权力交还给了它的真正主人——无产阶级。100多年过去了。资产阶级国家的统治阶级断言，革命的遗产如今已告终结，1990年代以后将不再有革命。但那是谎言。资本家阶级构建的资产阶级专制数个世纪以来听之任之，甚至无视人民国家朴素的社会主义要求，将自身的利益正当化为工人理所应当的牺牲。这在工人们的阶级斗争意识中留下了永不磨灭的创伤。这正是在工业革命后逐渐个人化的牺牲中，我们绝不能忘记无产阶级革命的遗产就是与资产阶级彻底决裂的原因。  &nbsp;  1946年，中国革命奠定了基础；1953年，古巴革命打响了枪声。在革命进行期间，资产阶级国家的人民甚至连革命的信息都受到管制，在无法得知革命时代即将到来、被封锁的信息中继续斗争。这种情况在现代依然在发生。  &nbsp;  他们抛弃了劳动人民。他们将为了“积累财富”的私有财产权诓骗为所有人享有的自由，以他国无辜人民的牺牲为代价，自诩为执政权力的主人。围绕未来高度发达的技术，虽然存在着各种对立意见，但大家却都忘记了这场革命的遗产依然活着这一事实。这是欧洲资产阶级至今走来的结论，也是在波拿巴猖獗的时代，或是资产阶级国家之间的战争成为屠杀人民源泉的时代里，始终未变的结论。与大革命的宏伟历史相比，人的一生渺小而短暂。然而，历史证明正是这短暂的一生汇聚在一起，构成了庞大的斗争史。  &nbsp;  在全世界炮火连天、战火纷飞的当下，我们绝不能忘记，我们应该要求的不是和平的口号，而是阶级敌对与斗争。在严峻存在的阶级分裂现实面前，历史证明这场革命的主体绝不是垄断了公民权的资本家，而唯有工人。革命并没有停留在过去，此时此刻也正在进行中。切不可忘记，无数革命者的鲜血与努力凝结在这条道路上。人民的胜利绝不仅仅止于革命的瞬间，而是在同反革命进行长期斗争后方能完成。伴随着他们的辛劳，我们将继续前行。斩断剥削的锁链，靠的不是我们的观念，而是我们存在本身。  &nbsp;    &nbsp;Ante la revolución que se avecina,  &nbsp;  En Francia, comenzando con la «Toma de la Bastilla» el 14 de julio de 1789, la monarquía fue abolida con la proclamación de la Primera República en septiembre de 1792. Posteriormente, entre 1793 y 1794 se desató el Terror, y el 9 de noviembre de 1799, el golpe de Estado de Napoleón puso fin al período de caos posterior al Terror, concluyendo así la Revolución Francesa. Han pasado más de 200 años desde que concluyó esta revolución burguesa. El legado de esta revolución burguesa demuestra que la historia de las revoluciones ciudadanas occidentales comenzó con la oscura era de la monarquía y culminó, en última instancia, regresando a la monarquía. Este fue el resultado de no haber podido resistir los tenaces desafíos de las fuerzas reaccionarias y sufrir una derrota.  &nbsp;  Sin embargo, por nuestras venas corre la historia de dos revoluciones rusas: la Revolución de Febrero y la Revolución de Octubre. Incluso cuando el legado burgués intentó apoderarse nuevamente del poder bajo el dominio real del Gobierno del Consulado, la clase obrera de todo el mundo derrocó ese legado y devolvió todo el poder a su verdadero dueño: el proletariado. Han pasado más de 100 años. La clase dominante de los Estados burgueses afirmó que el legado de la revolución había llegado a su fin y que, después de la década de 1990, no habría más revoluciones. Pero eso es una mentira. La dictadura burguesa construida por la clase capitalista ha permanecido desatendida durante siglos, ignorando incluso las modestas demandas socialistas del Estado popular, y ha justificado sus propios intereses a costa del inevitable sacrificio de los trabajadores. Esto dejó una herida imborrable en la conciencia de la lucha de clases de los trabajadores. Esta es la razón por la que, incluso en medio de sacrificios cada vez más individualizados desde la Revolución Industrial, no debemos olvidar que el legado de la revolución proletaria es una ruptura radical e intransigente con la burguesía.  &nbsp;  En 1946 se sentaron las bases de la Revolución China, y en 1953 resonaron los disparos de la Revolución Cubana. Incluso mientras las revoluciones estaban en curso, los pueblos de los Estados burgueses vieron censurada la información sobre la revolución y se vieron obligados a continuar su lucha en medio del aislamiento, sin saber que la era de la revolución estaba llegando. Esto es algo que sigue ocurriendo hoy en día.  &nbsp;  Ellos traicionaron al pueblo trabajador. Engañando a todos con que el derecho a la propiedad privada para la «acumulación de riqueza» es la libertad que todos disfrutan, se proclaman dueños del poder del Consulado a costa del sacrificio de pueblos inocentes de otros países. Aunque existen opiniones encontradas sobre las futuras tecnologías avanzadas, todos han olvidado el hecho de que el legado de esta revolución sigue vivo. Esta es la conclusión a la que ha llegado la clase burguesa europea hasta el día de hoy, y una conclusión que permaneció inalterada tanto en la época en que Bonaparte hacía de las suyas como en las eras en que las guerras entre Estados burgueses se convertían en la fuente del genocidio de los pueblos. En comparación con la monumental historia de la Gran Revolución, la vida humana es insignificante y corta. Sin embargo, la historia demuestra que son precisamente esas vidas cortas las que se unen para formar una vasta historia de lucha.  &nbsp;  Hoy, cuando el estruendo de la guerra resuena en todo el mundo, no debemos olvidar que lo que debemos exigir no son proclamas de paz, sino la hostilidad de clase y la lucha. Ante la cruda realidad de la división de clases, la historia demuestra que el sujeto de tal revolución no es el capitalista que monopolizó los derechos civiles, sino únicamente el trabajador. La revolución no ha quedado en el pasado; continúa en este preciso momento. No debemos olvidar que la sangre y el esfuerzo de innumerables revolucionarios están impregnados en este camino. La victoria del pueblo no se limita al mero momento de la revolución; se alcanza tras una larga lucha contra la contrarrevolución. Junto con su abnegado trabajo, seguiremos avanzando. Romper las cadenas de la explotación no es una mera idea nuestra, sino nuestra propia existencia.  &nbsp;<br>In the face of the impending revolution,  &nbsp;  In France, starting with the 'Storming of the Bastille' on July 14, 1789, the monarchy was abolished as the First Republic was established in September 1792. Thereafter, the Reign of Terror unfolded between 1793 and 1794, and Napoleon's coup d'état on November 9, 1799, brought an end to the period of chaos following the Reign of Terror, drawing the French Revolution to a close. Over 200 years have passed since this bourgeois revolution came to an end. The legacy of this bourgeois revolution shows that the history of Western civil revolutions began with the dark era of monarchy and ultimately reverted back to monarchy. This was the result of failing to stand against the persistent challenges of reactionary forces and suffering defeat.  &nbsp;  However, the history of two Russian Revolutions flows through our veins: the February Revolution and the October Revolution. Even when the bourgeois legacy attempted to seize power once more under the actual authority of the Consulate government, the working class of the entire world overturned that legacy and restored all power to its rightful owner—the proletariat. Over 100 years have passed. The ruling class of bourgeois states asserted that the legacy of the revolution had come to an end and that there would be no more revolutions after the 1990s. But that is a lie. The bourgeois dictatorship constructed by the capitalist class has been left neglected for centuries, ignoring even the modest socialist demands of the people's state, and justifying its own interests through the inevitable sacrifice of the workers. This left an indelible wound on the class struggle consciousness of the workers. This is precisely why, even amidst sacrifices that have become increasingly individualized since the Industrial Revolution, we must never forget that the legacy of the proletarian revolution is a thorough and resolute break from the bourgeoisie.  &nbsp;  In 1946, the foundation of the Chinese Revolution was laid, and in 1953, the gunshots of the Cuban Revolution rang out. Even while the revolutions were underway, the people of bourgeois states were subject to information control, forced to carry on their struggle in isolation without even knowing that the era of revolution was arriving. This is something that continues even in modern times.  &nbsp;  They abandoned the working people. Deceiving everyone into believing that the right to private property for the 'accumulation of wealth' is the freedom enjoyed by all, they claim ownership of the Consulate power at the expense of the sacrifice of innocent people from other nations. While conflicting opinions surround future advanced technologies, everyone has forgotten the fact that the legacy of this revolution is still alive and breathing. This is the conclusion that the European bourgeois class has arrived at to this day, and a conclusion that remained unchanged both during the times when Bonaparte ran rampant and in the eras when wars between bourgeois states became the source of genocide against the people. Compared to the grand history of the Great Revolution, a human life is insignificantly short. However, history proves that it is precisely the gathering of these short lives that forms a vast history of struggle.  &nbsp;  Today, as the sound of gunfire resounds around the world, we must not forget that what we must demand is not slogans of peace, but class hostility and struggle. In the face of the stark reality of class division, history proves that the subject of such a revolution is not the capitalist who monopolized citizenship, but the worker alone. Revolution does not remain in the past; it is ongoing at this very moment. We must not forget that the blood and efforts of countless revolutionaries are embedded in this path. The victory of the people is not limited to the mere moment of revolution; it is accomplished through a long-term struggle against counter-revolution. Together with their toil, we will continue to forge ahead. Breaking the chains of exploitation is not our mere concept, but our very existence.  &nbsp;    &nbsp;À l'approche de la révolution à venir,  &nbsp;  En France, à partir de la « Prise de la Bastille » le 14 juillet 1789, la monarchie a été abolie avec la proclamation de la Première République en septembre 1792. Par la suite, la Terreur s'est développée en 1793-1794, et le coup d'État de Napoléon le 9 novembre 1799 a mis fin à la période de chaos consécutive à la Terreur, mettant ainsi un terme à la Révolution française. Plus de 200 ans se sont écoulés depuis la fin de cette révolution bourgeoise. L'héritage de cette révolution bourgeoise montre que l'histoire des révolutions citoyennes occidentales a commencé par l'ère sombre de la monarchie pour finalement revenir à la monarchie. Ce fut le résultat de l'incapacité à résister aux défis obstinés des forces réactionnaires et de la défaite qui en a découlé.  &nbsp;  Cependant, l'histoire des deux révolutions russes coule dans nos veines : la Révolution de Février et la Révolution d'Octobre. Même lorsque l'héritage bourgeois a tenté de s'emparer à nouveau du pouvoir sous l'autorité réelle du gouvernement du Consulat, la classe ouvrière du monde entier a renversé cet héritage et a restitué tout le pouvoir à son véritable propriétaire : le prolétariat. Plus de 100 ans ont passé. La classe dirigeante des États bourgeois affirmait que l'héritage de la révolution était désormais révolu et qu'il n'y aurait plus de révolution après les années 1990. Mais c'est un mensonge. La dictature bourgeoise construite par la classe capitaliste a été laissée à l'abandon pendant des siècles, ignorant jusqu'aux modestes revendications socialistes de l'État populaire, et justifiant ses propres intérêts par le sacrifice légitime des travailleurs. Cela a laissé une blessure indélébile dans la conscience de la lutte des classes des travailleurs. C'est précisément pourquoi, même au milieu des sacrifices de plus en plus individualisés depuis la révolution industrielle, nous ne devons pas oublier que l'héritage de la révolution prolétarienne est une rupture totale et irrévocable avec la bourgeoisie.  &nbsp;  En 1946, les bases de la Révolution chinoise ont été posées, et en 1953, les coups de feu de la Révolution cubaine ont retenti. Même pendant le déroulement des révolutions, les peuples des États bourgeois ont vu l'information sur la révolution contrôlée, contraints de poursuivre leur lutte dans l'isolement sans même savoir que l'ère de la révolution approchait. C'est une situation qui se perpétue encore aujourd'hui.  &nbsp;  Ils ont abandonné le peuple travailleur. Trompant tout le monde en prétendant que le droit de propriété privée destiné à « l'accumulation des richesses » est la liberté dont tous jouissent, ils se proclament maîtres du pouvoir du Consulat au prix du sacrifice de peuples innocents d'autres nations. Alors que divers avis s'affrontent autour des technologies avancées du futur, tous ont oublié le fait que l'héritage de cette révolution est toujours vivant. C'est la conclusion à laquelle la classe bourgeoise européenne est parvenue jusqu'à aujourd'hui, et une conclusion qui est restée inchangée aussi bien à l'époque où Bonaparte sévissait qu'aux ères où les guerres entre États bourgeois devenaient la source du génocide des peuples. En comparaison avec la grande histoire de la Grande Révolution, la vie humaine est insignifiante et courte. Cependant, l'histoire prouve que c'est précisément le rassemblement de ces vies courtes qui forme une vaste histoire de lutte.  &nbsp;  Aujourd'hui, alors que le bruit des canons de la guerre résonne dans le monde entier, nous ne devons pas oublier que ce que nous devons exiger, ce ne sont pas des slogans de paix, mais l'hostilité de classe et la lutte. Face à la réalité flagrante de la division des classes, l'histoire prouve que le sujet d'une telle révolution n'est pas le capitaliste qui monopolise la citoyenneté, mais uniquement le travailleur. La révolution n'est pas restée dans le passé ; elle se poursuit en ce moment même. Il ne faut pas oublier que le sang et les efforts de innombrables révolutionnaires sont imprégnés dans cette voie. La victoire du peuple ne se limite pas au simple moment de la révolution ; elle s'accomplit au terme d'une longue lutte contre la contre-révolution. Avec leur labeur, nous continuerons d'avancer. Briser les chaînes de l'exploitation n'est pas notre simple idée, c'est notre existence même.  &nbsp;  &nbsp;  Angesichts der bevorstehenden Revolution,  &nbsp;  In Frankreich wurde, beginnend mit dem „Sturm auf die Bastille“ am 14. Juli 1789, die Monarchie mit der Ausrufung der Ersten Republik im September 1792 abgeschafft. In der Folge entfaltete sich von 1793 bis 1794 die Schreckensherrschaft, und Napoleons Staatsstreich am 9. November 1799 beendete die Periode des Chaos nach der Schreckensherrschaft, womit die Französische Revolution ihren Abschluss fand. Seit dem Ende dieser bürgerlichen Revolution sind nun mehr als 200 Jahre vergehen. Das Erbe dieser bürgerlichen Revolution zeigt, dass die Geschichte der westlichen bürgerlichen Revolutionen mit dem dunklen Zeitalter der Monarchie begann und letztlich wieder in der Monarchie mündete. Dies war das Ergebnis des Unvermögens, den hartnäckigen Herausforderungen der reaktionären Kräfte zu trotzen, und der daraus folgenden Niederlage.  &nbsp;  In unseren Adern fließt jedoch die Geschichte zweier russischer Revolutionen: die der Februarrevolution und der Oktoberrevolution. Selbst als das bürgerliche Erbe versuchte, unter der realen Macht der Konsulatsregierung erneut die Macht zu ergreifen, stürzte die Arbeiterklasse der ganzen Welt dieses Erbe um und gab alle Macht an ihren rechtmäßigen Eigentümer zurück – das Proletariat. Mehr als 100 Jahre sind vergangen. Die herrschende Klasse der bürgerlichen Staaten behauptete, das Erbe der Revolution sei nun zu Ende und nach den 1990er Jahren werde es keine Revolutionen mehr geben. Doch das ist eine Lüge. Die von der Kapitalistenklasse errichtete bürgerliche Diktatur blieb jahrhundertelang sich selbst überlassen, ignorierte selbst die bescheidenen sozialistischen Forderungen des Volksstaates und rechtfertigte ihre eigenen Interessen durch das selbstverständliche Opfer der Arbeiter. Dies hinterließ eine unauslöschliche Wunde im Klassenkampfbewusstsein der Arbeiter. Genau das ist der Grund, warum wir selbst inmitten der seit der Industriellen Revolution zunehmend individualisierten Opfer nie vergessen dürfen, dass das Erbe der proletarischen Revolution der konsequente und entschlossene Bruch mit der Bourgeoisie ist.  &nbsp;  1946 wurde das Fundament der Chinesischen Revolution gelegt, und 1953 ertönten die Schüsse der Kubanischen Revolution. Selbst während die Revolutionen im Gange waren, wurde den Völkern der bürgerlichen Staaten selbst die Information über die Revolution vorenthalten, sodass sie ihren Kampf in der Isolation fortsetzen mussten, ohne zu wissen, dass das Zeitalter der Revolution anbrach. Dies geschieht auch in der Gegenwart noch immer.  &nbsp;  Sie haben das arbeitende Volk im Stich gelassen. Indem sie alle mit der Behauptung täuschten, das Recht auf Privateigentum zur „Akkumulation von Wohlstand“ sei die Freiheit, die alle genießen, erheben sie sich auf Kosten des Opfers unschuldiger Völker anderer Nationen zu Herren der Konsulatsmacht. Während über die hoch-entwickelten Technologien der Zukunft verschiedene Meinungen aufeinanderprallen, haben alle die Tatsache vergessen, dass das Erbe dieser Revolution noch immer lebendig ist. Dies ist der Schluss, zu dem die europäische Bourgeoisie bis heute gelangt ist, und ein Schluss, der sowohl in den Zeiten, als Bonaparte sein Unwesen trieb, als auch in den Epochen, in denen Kriege zwischen bürgerlichen Staaten zur Quelle des Völkermords wurden, unverändert blieb. Im Vergleich zur gewaltigen Geschichte der Großen Revolution ist ein Menschenleben unbedeutend und kurz. Doch die Geschichte beweist, dass erst das Zusammentreffen dieser kurzen Leben eine gewaltige Geschichte des Kampfes bildet.  &nbsp;  Heute, da der Donner der Kanonen weltweit ertönt, dürfen wir nicht vergessen: Was wir fordern müssen, sind nicht Parolen des Friedens, sondern klassenmäßige Feindschaft und Kampf. Angesichts der unerbittlichen Realität der Klassenspaltung beweist die Geschichte, dass das Subjekt einer solchen Revolution nicht der Kapitalist ist, der die Bürgerrechte monopolisiert hat, sondern einzig und allein der Arbeiter. Die Revolution ist nicht in der Vergangenheit stehen geblieben; sie geht in diesem momentanen Augenblick weiter. Wir dürfen nicht vergessen, dass das Blut und die Anstrengungen unzähliger Revolutionäre auf diesem Weg ruhen. Der Sieg des Volkes beschränkt sich nicht auf den bloßen Moment der Revolution; er wird im langwierigen Kampf gegen die Konterrevolution vollendet. Zusammen mit ihren Mühen werden wir weiter voranschreiten. Das Sprengen der Ketten der Ausbeutung ist nicht bloß unsere Vorstellung, sondern unsere bloße Existenz.<br>&nbsp;<br>&lt;혁명 연설문 음성&gt;&nbsp;]]></description></item><item><author>서기원</author><category>학습·배움터</category><title>혁명의 폭발</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494958</link><pubDate>Fri, 04 Sep 2026 23:0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494958</guid><description><![CDATA[<br>'현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은 가상 공간이 아닌 거리에서 먼저 폭발할 것이다.'<br>- 생산 수단의 몰수와 재산권의 완전한 해체&nbsp;<br>· 토지 및 부동산 몰수&nbsp;<br>·&nbsp;자본 및 금융 자산의 국유화&nbsp;<br>· 계급의 소멸<br>- 정치·사법적 결말<br>·&nbsp;지배 권력의 박탈&nbsp;<br>· 과거 행적에 대한 사법적 단죄&nbsp;<br>· 시민권 제한<br>- 물리적·사회적 결말&nbsp;<br>· 해외 망명 및 자본 유출 시도&nbsp;<br>· 혁명 반동 행위자에 대한 처벌&nbsp;<br>· 재교육과 노동자로의 재사회화&nbsp;<br>- 한국의 특수성&nbsp;<br>· 재벌 가문 집중 타격<br>· 지정학적 위기와 한반도 정세&nbsp;<br>· 디지털·금융화된 자산 파악&nbsp;<br>- 군사적 변혁&nbsp;<br>· 기존의 경찰과 군대 해산 및 노동자 적위대 재편 등<br>· 억압 기구 (군경)의 임계점 도달<br>]]></description></item><item><author>서기원</author><category>입장·보고</category><title>혁명과 반혁명 </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492695</link><pubDate>Thu, 03 Sep 2026 22:4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2839252/17492695</guid><description><![CDATA[<br>'차기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전일보를 위해 반혁명의 시대 (또는 반동의 시대)를 건너는 일.'&nbsp;<br>지금도 이 말에는 피 비린내가 진동하는 노동자 계급 투쟁의 무수한 역사가 담겨 있다.&nbsp;&nbsp;<br>그것은 필연적이다.]]></description></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