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 속의 영화]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사유 속의 영화 - 영화 이론 선집 현대의 지성 136
이윤영 엮음.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유속의 영화’는 영화이론선집으로, 영화를 읽는 현대비평의 초석이 된 논문들을 만날 수 있는 책이다. 1920년대부터 90년대까지의 선별된 이 아티클들만으로 영화 비평의 흐름을 한눈에 보기란 어렵겠지만 영화로 사유하던 유럽철학의 정점에 있던 주옥같은 아티클을 한권의 번역서로 만나 볼 수 있을 기회란 앞으로도 많지 않을 것이라 여겨진다. 영화이론의 필독서들로 채워져있지만 우리는 이 아티클로 인해 영화 뿐 아니라 세상과 미디어를 읽는 비평의 여러 기준들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사회주의적 비판 등의 정치적 비평과 기호학적 비평에 대한 좋은 접근법을 찾는 데 영감을 줄 것이다.
단권만으로 영화비평이론을 섭렵하려 하기 보다는 여러 이론서 혹은 각 아티클의 주인공들인 학자들의 글이 많이 실린 다른 번역서들을 참고하면서 학자의 의견의 앞뒤 맥락과 번역의 오류 등을 짚어가면서 공부해나간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은 영화이론 공부가 될 것이다. 영화이론 공부가 막연했다면 이 한권에서 학자들의 여러 다른 아티클로 가지를 쳐 나가는 독서를 권유하고 싶다.
영화이론서들의 직독직해를 이해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가 그렇게 했듯 가독성보다는 의미의 오류를 견제하는 것이 조금 느리더라도 여러 학자들의 의견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저자 또한 가독성보다는 의미를 희생시키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지금까지 한국에서의 몇몇 번역서의 의역과 번역의 오류를 바로 잡고자 한 시도를 지키고자 했기 때문에 ‘사유 속의 영화’는 더욱 어려운 독서가 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다른 영화이론 번역서, 특히 이 책에 실린 아티클 중 번역된 몇몇의 논문의 기존 번역서들보다는 (앞뒤 문장이 바로 번역되어서인지) 더 현대적인 표현과 현재 철학용어로 표현되어 있어서 직역되어 있으면서도 시기성을 고려한 부분이 엿보인다.(기존의 번역서들이 쉬운 풀이문장으로 표현하려다 보니 의역이 상당히 많았다는 것을 벤야민의 논문에서 가장 잘 알게 되었다.)
영화이론서에서는 기본적인 영화의 용어들을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쇼트와 프레임, 미장센, 앵글, 정사-역사, 몽타주, 데쿠빠쥬 등의 용어들이 이미 독자들의 사전지식을 요구하고 있으므로 ‘사유 속의 영화’와 같은 영화이론서들을 처음 맞딱뜨리는 일반 독자에게는 용어의 정확한 이해때문에라도 더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거기에 더해지는 기호학 용어와 정신분석학 용어, 정치학 용어 들의 등장은 독서를 더디게 만든다. 이에 더해서 이처럼 초기 영화 연구 논문들은 당시의 영화들을 텍스트로 하고 있어서 현대영화를 많이 접하는 일반 독자에게는 전혀 사례로서의 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점도 한 몫 거든다.
그러나 이 독서를 필두로 영화사에 의미있는 초기영화들을 접할 기회를 가지고 그 매력을 당시를 치열하게 논쟁했던 학자들의 논의와 함께 한다면 불가능 한 일도 아니다. 게다가 영화를 읽는 과정은 당시의 영화를 다르게 보게 할 뿐만 아니라 지금 어느 영화를 보아도 지금의 사회상과 연결된 영화의 플롯들과 각 장면의 의미, 편집의 의도 등을 사유하게 하여 영화를 보는 또 다른 즐거움을 키워준다.
에이젠슈테인의 글은 영화이론에 문외한인 이에게도 영화의 제작과정이 이루어내는 사실이 아닌 시공간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쇼트와 또 다른 시공간의 쇼트 혹은 부분을 재현한 쇼트 등의 몽타주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우리가 가장 쉽게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 영화의 사실성과 환상성에 관한 것이므로 책의 첫장을 여는 에이젠슈테인의 글에서 이러한 쇼트가 만들어낸 영화의 환상성에 대해 질문을 던져보기를 바란다.
누군가가 자신의 눈높이보다 약간 위쪽을 응시하는 쇼트 바로 다음에 비행기가 날아가고 있는 쇼트가 편집되었다면 관객은 그 누군가가 날아가는 비행기를 보고 있다고 인지할 것이다.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촬영되었다 하더라도 영화의 쇼트와 편집은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사진적 현실복제에서 나아가 실제보다 많은 생략 혹은 재구성으로 의미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아른하임의 글에서는 영화의 예술성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어 에르빈 파노프스키와 벤야민에 이르기까지 저급문화로 치부되었던 영화를 예술로 볼 것인가에 대해 영화와 현실의 재현적 차이에서 오는 예술성을 이야기한다. 영화의 심리학이라는 말로와 퐁티의 논문도 이 흐름의 연장선에서 읽는 것이 가능하다. 영화제작을 이루는 연기와 촬영에서 생겨난 영화 언어와 문법의 발생(클로즈업을 비롯한)을 살펴보면서 각 저자와 함께 영화가 예술로서의 독특한 양식창출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그리고 과연 그러한 문법은 분명 심리학적으로 관객에게 어떤 효과로 다가갈 것인지 영화의 시각적 효과(특히 무성영화)에 대해 집중적으로 생각해 볼 기회가 될 것이다.
앙드레 바쟁에 이르러서 우리는 이미지의 객관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자연 그대로를 복제하는, 인간의 개입이 없는 쇼트에서 자연재현이라는 기준을 들이댈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에 와서는 아무리 롱쇼트의 롱테이크인 장면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연출 혹은 후반작업이 없으리라는 신뢰를 할 수 없을테지만 이는 보도영상과 다큐멘터리, 그리고 연출된 장면에 대한 관객의 몰입을 생각할 때 영화의 사실성을 그 본질로 생각해야 할지, 그 본질을 인간의 창조적 개입이 있는 재구성의 예술로 여겨야 할지 고민하게 한다. 그 어느 쪽도 옳거나 그를 수 없다. 누군가의 이론들은 비판을 받고 새로운 이론이 등장하지만 그 어느것도 사장되는 영화이론이란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현대의 우리는 사진의 리얼리즘적 요소를 늘 의심하고 영화 또한 현실 그 자체를 옮기는 쇼트의 존재도 의심한다. 이런 지금에 영화의 사실성과 환상성을 운운하며 어떤 것이 옳은 재현인가를 논의하거나 어떤 것이 사실인지 구분해내는 것조차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논의는 자칫 의미없어 보일 수 있으나 아직까지 다큐멘터리와 재현, 영화적 재현에 있어서 새로운 영화언어와 작가들만의 문법 창출, 다양한 양식에 대한 논의의 여지는 남는다. 이러한 논의에서 이 책에 등장하는 오래 전 학자들의 영화이야기는 헛되지 않다. 모든 철학과 영화이론에 있어서는 누군가의 비판을 받았다고 해서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화가 언어라고 규정한다면 우리는 기존의 언어학과 기호학의 잣대를 영화에도 대어 볼 수 있을 것이다. 메츠의 영화기호학은 영화학도들에게는 교과서와도 같을텐데 66년의 이 논문에 이르면 앞의 여러 논문의 이론들을 아우르는 비평을 들을 수 있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영화편집에서 쇼트와 쇼트의 연결인 페이드와 디졸브의 시각적 효과에서도 생각할 수 있듯, 영화(영상작업)에서의 쇼트의 크기와 앵글과 조명 등의 모든 요소는 이미지의 언어가 된다. 쇼트는 메츠의 말대로 단어 하나가 아닌 ‘발화’이며 아직까지는 시각적 언어에 치중한 해석이지만 이를 읽는 우리는 사운드(대사, 음향, 음악 혹은 무성 등)의 영화언어적 모습에 대해서도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산업이 발달하고 자본주의의 양산물로 영화산업이 전락해가고 제작에서 배급까지 독점적인 영화생산이 이루어짐에 따라 영화의 이데올로기적 해석이 더 활발해진다. 영화의 주체인 관객이 영화의 정사-역사에 몰입함으로써 관객 자신을 부재시켜버리는 봉합이 이루어지는 영화에 문제를 제기하고 영화가 영화임을, 그리고 관객 자신의 위치를 자각시키는 영화제작사례를 읽는다. 이는 영화가 무의식적으로 강요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자각을 촉구하는 것이기도 하고 영화의 형식의 문제 또한 지적하는 지점이 된다. 영화의 이데올로기 논의는 언뜻 네러티브만을 연상하기 쉽지만 플롯이 나닌 영화생산 자체의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와 동일시한 인물에 대한 호명으로 인한 무의식적 학습 등 영화 내외 적 모든 요소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의미한다. 코몰리와 나르보니의 논문에서 제시하는 여러 영화의 범주들로 지금 우리가 보는 영화들을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여기에서 강조하는 영화비평의 역할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관객은 영화의 주체이어야 하며 이러한 기존의 담론을 현대의 영화들로 이해할 필요성 또한 느낄 것이다. 현대영화의 비평을 곁들인 저자의 논의가 있었더라면 일반독자들에게 훨씬 이해가 쉬워졌겠지만 이는 또 하나의 재구성된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되니 오역의 가능성이 생긴다. 아마도 저자는 학자들의 글 자체가 문장 자체로 전달되기를 바라는 기획의도에서 모든 가능성을 배제시키기로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정신분석학과 시각의 메커니즘을 통해 이데올로기적 해석이 되기도 한다. 장-루이 보드리의 논의에서 나아가 ‘시각과 현대성’(주은우, 한나래) 등의 시각예술에 대한 책들이 참고가 될 것이다. 카메라의 눈의 권력을 생각해 볼 일이다. 이는 영화 안의 봉합의 의도(의도가 없었더라도 무의식적으로 재현하는)를 읽어내는 키워드가 된다.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 자체가 부조리한 세상의 이데올로기를 재현하는 도구가 된다. 그렇다면 영화가 저항의 역할을 해야하는가. 영화가 커뮤니케이션의 도구로서의 가능성이 있으려면 현실재현에서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장-프랑수아 리오타르를 비롯한 여러 학자가 말한다. 그저 보여줘버리는 것, 그 리얼리즘을 가장한 (우리가 아는 스펙터클은 이렇게 왜곡된 의도일 가능성이 높다. 키튼의 슬랩스틱과 마술과 같은 스펙터클에서 과장된 표현주의의 상징적 스펙터클로 그리고 비천함(자크 리베트)과 파괴의 완전히 드러난 스펙터클은 이미 리얼리즘에서 벗어나 있다) 카메라의 권력적 시선에서 곁눈질로 관객의 적극적인 개입을 이끌어내는 영화를 옹호하는 시선들까지 아직까지 이러한 논의는 다양성이라는 이름아래 지속되어 오고 있다. 물론 영화들의 다양한 생산과 시도만큼이나 독점적 배급을 벗어난 다양한 소비까지를 아직 기대할 수는 없지만 생산의 시도는 고무적이다.
영화평론가만이 영화비평과 제작의 인터랙션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소셜 네트워크시대에 문화소비의 대상이 대중인만큼 모든 관객이 비평의 주체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뿐 아니라 모든 재현된 이미지들에 대한 비판적 시선은 모든 관객에게 중요하다. 의미의 재생산이 아닌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고 비판적 시선으로 생산과 이미지까지의 모든 과정에서 드러나는 자본 혹은 권력의 이데올로기를 읽어내는 작업들이야 말로 저항의 텍스트를 생산하는 인터랙션을 이끌어낼 것이다.

도움이 될 만한 더하는 독서 :
영화서술학(앙드레 고드로, 프랑수아 조스트)
영화분석의 패러다임(자끄 오몽, 미셸 마리)
현대영화이론의 이해(로버트 랩슬리, 마이클 웨스틀레이크)
영화-존재의 이해를 위하여(김성태)
시각과 현대성(주은우)
공포의 권력(줄리아 크리스테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혜로 지은 집 한국 건축]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지혜로 지은 집, 한국 건축 - 우리 건축의 구조와 과학을 읽다
김도경 지음 / 현암사 / 201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의 여는 글이 겸손하다고 생각했다. 책을 덮은 지금은 이 책의 저자가 너무도 겸손했구나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한국건축양식에 대해 초석에서부터 창호까지 꼼꼼히 제시하고 다양한 사례를 보여준다. 우리는 한국건축양식 하면 한옥부터 떠올리기 쉽지만 한국의 석축과 목축 할 것 없이 석탑, 목탑, 정자, 성, 성문에 이르기까지 진정한 건축의 다양성을 보게 되었다. 한국건축의 역사라고까지는 할수 없겠지만 우리 건축의 토대를 이룬 사상과 지배계층과의 차별성 등의 다양한 건축양식의 발생을 설명하고자 선사시대의 건축양식을 짧게 설명하고 있기도 하고 우리 건축의 발전과 고대도형학 연구의 관계를 말하고 있기도 하다. 건축의 넓은 범위를 공부하면서 건축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을 하나하나 공부하는 계기도 되었다. 건축일을 하지 않는 이상 불필요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먼 미래라도 자신의 집 짓기를 꿈꾸는 이들에게는 반가운 책이 아닐 수 없다. 특히 한옥에 대한 경외감을 가지고 있는 독자에게는 더 흥미로운 책이 될 것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사례에서는 비교대조를 위해 외국(중국와 일본)의 사례가 등장하기도 하고 한국건축에 사용되지 않았더라도 다른 건축양식이 있다면 설명을 하고 있기도 하다. 이해를 도울 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건축양식에도 관심을 가질 기회를 주는 듯 하다. 베트남 어디에선가 들렀던 옛 부족들의 건축양식 박물관이 떠오른다. 다양한 민족의 옛 집과 생활도구들이 모인 공원식의 박물관에서 각 부족의 자연과 종교와 사상을 엿볼 수 있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우리의 건축을 보면서도 우리의 자연과 역사를 되돌아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순서가 집의 각각의 부분을 논하는 것 같지만 읽다보니 집을 보는 큰 그림에서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이다. 멀리에서 집을 내려다 보았다가 건물의 외부를 감상하고 창호문을 열고 집의 천장까지를 올려다본다.

우리가 모호하게 과학적이라더라고 알고 있던 한국전통건축이 어떻게 과학적인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어려운 건축 비례는 차치하고서라도 하지와 동지의 남중고도의 각도를 고려해 겨울에는 해가 실내 끝까지 들게 하고 여름에는 차단하며, 수납공간이 되면서도 빗물의 들이침을 방지하는 처마에 감탄하게 될 것이고 사람의 앉았을 때 팔걸이를 할 만한 적합한 높이에 난간과 머름의 높이를 두는 것에서도 그 운치과 함께 무릎을 치게 될 것이다. 물론 지금의 집들도 모두 이렇게 과학적이고 인간중심적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한국건축, 특히 이런 한옥의 모습에서는 그 편리함보다는 마음의 높이와 크기가 더 중요시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방의 독립성을 위해 만들어진 아파트들의 좁은 복도는 나의 신체의 크기에는 딱 들어맞을지 모르겠지만 마음의 편안함을 주는 너비들은 아니다. 도시를 중심으로 인구가 집중되고 각자에게 주어지는 공간이 협소해지는 까닭에 현대 아파트의 인체공학적 설계란 딱 우리의 몸집과 키만큼인지라 그 마음의 여유까지 딱 그만큼으로 차단시키고 만다. 지금의 아파트에는 생활할 공간만 있고 사유할 공간은 없는 듯 하다. 사유란 것이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집이라는 공간에서 자연을 경외할 공간이 없다는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능력일 사유할 여지 마저 차단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우리가 한옥을 그리워하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책에 실린 한국 건축물 지도를 따라 여행길에 올라도 좋을 일이다. 10분이면 둘러보았을 사찰이 종일 들여다 보아도 새롭게 보일 듯 하다. 책을 보면서도 ‘아. 할머니 댁의 그 마루는 쪽마루고 그쪽은 툇마루였구나...토방이 이 ’기단‘이라는 건가보다......기단은 이래서 필요한거구나......아, 이거 기억나는데 이걸 들어열개하고 하는구나.....’하면서 기억 속의 한국 건축을 되짚어 보게 되니 말이다. 석탑 하나, 기둥 하나, 서까래 모양이며, 초반석과 초석의 모양까지 이곳저곳을 보게 될테니 대한민국 땅이 갑자기 넓게 느껴지기 까지 한다. 특히 들어열개(여러짝의 문을 포개서 위로 들어올려 고정할 수 있는 문)을 어렸을 적에도 신기하게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들어열개는 저자의 말대로 ‘공간이 쉽게 분할되고, 하나로 통합될 수 있는 가변성’을 갖게 한다는 점이 과학적이고도 열린 집이라는 느낌을 준다. 보호하는 집의 역할에서 차단하지 않는 공간을 연출한다는 점이 그냥 창문을 여는 개념과는 다른 열린 느낌을 주어서 매력적이다.

최근 TV에서 한옥건축 전수교육을 받는 이의 인터뷰를 잠깐 본 기억이 있다. 화천한옥학교의 교육생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 데 교육자의 길을 걷다가 돌연 한옥건축가로 꿈을 가지게 된 경우였다. 그 교육생들의 삶이 왠지 수도승의 그것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나무를 만지고 사람을 위한 집을 짓는 일은 무언가 마음을 비운 이타심을 느끼게 한다. 이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노라니 더욱 그런 마음이 강해진다. 목재의 아귀를 맞추는 그들에게서 더욱 장인의 멋이 난다. 장인들의 교육이 가업 세습 위주에서 전문교육의 모습으로 변화되어가는 모습 또한 아름다운 한국전통건축교육이 희망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렸을 적 살았던, 작지만 한옥이었던 그 집이 생각난다
. 요사이 유명 고급 아파트 CF에서 집에 가는 것이 행복한 것은 사랑하는 가족이 있어서만이 아니라 그 아파트이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뉘앙스를 주는 것에 웃음이 난적이 있다. 내겐 그 한옥이 그렇다. 작은 툇마루의 오후 햇살이 늘 그립다. 그 툇마루에서 책 베고 다른 세계로 빠지고 싶은 건지 그 툇마루에 눕는 것이 내가 꿈꾸는 다른 세계인지나 생각하면서 글 읽고 땅 일구고픈 꿈을 꾸게 하는 집이다. 비오는 날이면 처마를 거쳐 토방 너머로 떨어지는 낙수를 세며 컴퓨터와 휴대폰에서 해방감을 만끽하고픈 꿈을 꾸게 하는 집이다.
전주 한옥마을에서의 하룻밤도 더 새록새록 떠오른다. 두껍지만 가볍고 차가운 옥양목의 감촉이 좋은 목화솜 이불을 덮은 채 아침 햇살 들어오는 창호문을 여는 기분을 다시 느끼고파 진다.

일반 독자의 한국건축에 대한 경험은 이런 나의 감성적 시선에서 멀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일반독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한국건축을 공부하는 건축학도 수준의 심도 있는 한국건축학에 가깝지만 한국가옥을 아끼는 일반 독자에게도 한국 전통 건축을 바라보는 다른 시선을 단련시켜줄 것이 분명하다. 그 아름다움을 다시금 느낄 뿐 아니라 소중한 자산이며 우리가 자연과 더불어 더 잘 살 수 있는 집이라는 생각이 들것이다. 우리는 상당시간을 콘크리트 건물의 유리창 안에 들어가 사는 삶을 꿈꾸지만 정말 인간을 위한 집을 우리가 버리고 상자 속으로 들어가고자 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저자가 들려주는 한국건축은 나무와 흙과 종이와 쇠에 관한 이야기다. 한국의 건축은 편리함보다는 편안함과 자연을 거스르지 않은 사상 아래 빚어지는 듯 하다. 아마 한옥장인들이 더욱 수도승같은 장인처럼 보이는 이유도 이런 느낌 때문인 듯 하다. 산의 모양에 거스르지 않는 자연의 일부가 되는 초가지붕의 형태처럼 우리가 사는 집도, 사람도 자연의 일부인 것을 잊지 않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본격 시사인 만화]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본격 시사인 만화 - 신세기 시사 전설 굽시니스트의 본격 시사인 만화 1
굽시니스트 지음 / 시사IN북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이제는 촌철살인의 풍자력을 가진 시사만화라는 건 추억쯤으로 느껴질 즈음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민주주의의 시간이 더해갈수록 더 많은 시사만화의 범람이 이루어질것이라는 우리의 예상이 빗나갔다는 것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겠다. 시사만화는 이제 정치뉴스를 전달하기 위한 만화뉴스이거나 저널의 정치적 성향을 명료화시켜 대중에게 쉽게 이데올로기를 전달하는 정치적 학습만화로 전락하지 않았나 싶었다.
그런 회의감에 있을 무렵 웹에서 시작된 굽시니스트의 만화가 출판과 메이저 저널을 통해 다시금 대한민국에서의 시사만화의 자리를 다지고 있었다. 굽시니스트의 시사만화가 특정저널에서뿐만 아니라 출판으로 더 많은 독자에게 다가간다는 것은 여러 의미로 희망적인 일이다.
일단 대중으로 하여금 논평과 정치경제권력에 대한 비평, 대중, 국민 의견의 신문고와도 같은 역할을 해야 할 시사만화의 역할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하고 스스로 가늠하고 있는 표현의 자유의 기준에 대해 돌아보게 할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표현의 자유는 어떤 수준인가. 현재 정치경제 비평으로서의 표현에 대한 기준치는 어떤 수준일까. 혹시 우리는 2011년 지금에도 유신체제하와 마찬가지의 두려움을 가지고 살고 있진 않은가. 본격적이고 진정 시사적이라 말할 수 있는 시사만화가 고프진 않았나.
굽시니스트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나라의 정치는 대권을 중심으로 찬성과 반대의 양편으로만 나뉘는 상황이라 여러 정당과 시민단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양립되는 목소리만 존재할 뿐이라는 점에 회의를 느낀다면 정작 우리의 목소리라 할 수 있는 시사만화들과 더불어 이 책 또한 크게 공감하며 즐길 수 있을 것이다.
ㅎ20, 아니 G20의 포스터 훼손사건으로 고소된 이들에게 10개월과 8개월의 구형이 떨어지고,각 문화예술인들의 탄원이 이어지고 있다. 이 책의 ‘ㅎ20’ 편과 ‘모세와 이명박’ 편이 절절히 떠오른다. 정치인은 유권자보다 크고 위에 있는 이가 아니라 반대로 유권자의 손바닥 위에서 봉사하는 공복이라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굽시니스트의 말에 속이 후련해진다.
그 사실과 함께 시사만평을 비롯한 모든 패러디와 풍자는 소수의 정치인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의견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소수의 정치권력은 잊으면 안될, 아니 (아직 모르는 것 같으니) 알아야 할 것이다.
굽시니스트의 만화를 보며 우리가 웃는 이유는 공감의 또 다른 표현일 것이다. 우리가 정치를 보는 눈을 대변하고 있음에 한번 웃고, 이 의견에 굽시니스트의 손을 통해 공론화되었음에 대한 통쾌함에 한번 더 웃는다. 이러한 시점들은 유명 만화나 영화등의 패러디로 진행되는데 그 씽크로율이 또 한번 우리를 웃게 만든다.
모든 굽시니스트의 정치적 의견에 공감하기는 힘들겠지만(특히 나는 북한정권에 대한 비판적 시선에 조금은 귀를 막고 있었던 것 같다. 이 점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게 한 계기가 된 점에 만족한다.) 저자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마음에 드는 점은 이렇게 우리의 눈을 대변하고 있고 그 의견을 직접 말하고 있다는 점 외에도 우리가 처한 현실에 대해 적절한 비유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쓰레기의 바벨탑을 쌓고 위로 오를수록 더러워짐을 피할 수 없으며,다른 만평과의 결합으로 이 쓰레기 산을 오르는 경쟁 또한 특정인들에게만 허용된 경쟁이라고 말하는 바에 크게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추락공포는 그 경쟁에 동참할 수 있었던 소수뿐만 아니라 동참에조차 제외된 우리도 느낀다. 젊은이들에게는 대기업취업이라는 이상향을 유일신으로 세우고 오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동시에 그 이상향 외에 존재하게 될 때 잔인한 박탈감을 선사한다. 소수를 소외계층으로 만드는 게 더 쉬울텐데 착한 시민은 참으로 너무 착한 나머지 스스로 소외계층으로 전락한다. 누가 정한 이상향인지도 모르면서 종교처럼 맹신한다. 모두 자본에 천착된 왜곡 민주주의를 살아온 결과가 아닐까. 아니 이것은 굽시니스트처럼 표현하고 말하지 못하고 있는 안이한 정치적 태도일지도 모른다. 주권을 가졌다고 말뿐인 국민의 태도일지도 모르겠다. 굽시니스트의 온라인에서의 만평이 공감과 의견제시의 장이 되었던 것처럼 나는 또 한번 시민의 의견이 폭발적으로 뛰쳐나오길 기대해본다. 작은 자극도 시간이 흐르면 흠집을 내고 움직이게 하는 힘이 된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01명의 화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101명의 화가 - 2page로 보는 畵家 이야기 디자인 그림책 3
하야사카 유코 지음, 염혜은 옮김 / 디자인하우스 / 201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참으로 깜찍한 책을 만났다. 아기자기한 카툰으로 꾸며진 101명의 서양미술가들의 삶과 작품세계가 두 페이지씩에 담겨 책을 이뤘다. 14세기의 조토에서부터 20세기의 워홀에 이르는 작가리스트다. 작고 아기자기한 그림책을 거의 백과사전 수준으로 정보를 배치하려는 저자의 욕심이 이리 예쁘고 좋은 책을 탄생시킨 듯 하다.

카툰 안에 간혹 등장하는 화자(저자)의 캐릭터와 함께 저자의 관련정보들을 여기저기 배치해서 꼼꼼하게 작가의 연표와 더 많은 작품을 다루려는 의지가 굉장하다. 그러다보니 산만하게 보다보면 놓치는 내용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아무리 홀랑 읽어버리고 싶어도 손가락으로 엄지만한 그림들과 그것보다 더 작은 글씨를 한 글자 한 글자 짚어 내려가게 된다. 왠지 더 감사하게 더 성의있게 꼼꼼하게 읽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카툰으로 등장하는 작가의 삶은 교과서적 설명보다는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에피소드들을 등장시켜서 재미를 더했다. 작가 혼자만의 삶이라기보다는 주변인 특히, 주변의 동시대 미술가들과의 에피소드들이 많이 등장하는 것이 재미나다. 작품세계와 이와 같은 미술계의 에피소드는 미술에 대한 당시의 인식과 문화를 들여다보게 한다. 그래서 책 '미술은 똑똑하다'와 더불어 미술이론의 논의와 흐름에 대한 공부의 연장선이 되고 많은 참고가 되었다.
 

엄지만한 그림들이어서 작품의 디테일을 살피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그림책이지만 서양미술사의 입문서로도 손색이 없다고 느끼는 데는 작가의 작품세계를 삶의 일대기 안에서 비교대조한 부분들과 일대기표, 그리고 부록들 덕분이다. 로댕의 경우처럼 대작을 한 작가의 경우 작품의 부분 이미지를 감상할 수 밖에 없어서 정작 작품의 스케일과 분위기가 가늠이 되지 않는다면 부록의 수록그림 소장처 설명 중 작품 사이즈 등을 참고할 수 있다. 말했듯 상상해보거나 참고를 할 수 밖에 없고 정작 작품들의 디테일을 보려면 다른 책과 이미지를 찾아 나서야 하겠지만 말이다.

이런 면에서, 카툰을 곁들인 작고 얇은 편에 속하는 책인지라 많은 내용을 기대하지 않았다면 저자의 방대한 정보수집과 명료한 정리에 깜짝 놀랄 것이다. 겨우 두 페이지에 작가의 인생과 수많은 작품이야기를 담는 것도 모자라 잘 정리된 부록의 작가연표와 소장처의 정보가 특히 그렇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여기에서 여행서로서의 면모를 상상하면서 씨익하고 웃음이 났는데 수록 작품의 소장처를 매우 충실하게 밝히고 있어서 세계 곳곳으로 미술여행을 꿈꾸는 독자라면 반가운 책이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책의 사이즈가 컴팩트하고 제본이 탄탄해서 아마 그 여행의 짐꾸러미 한 켠을 차지하게 될 안내자로 한 몫을 든든히 해내리라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해본다. 그 행복한 상상 속의 주인공이 ‘나’라면 더욱 기분좋고 말이다. 
 

이 작가연표는 한눈에 작가들의 시대를 볼 수 있어서 저자의 노고를 느낌과 동시에 감탄하는 부분이 될 것이다. 내용에 수록된 작가 뿐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을 동시대의 작가들이 언급되고 있으며 다시 한번 수록된 작가를 짤막하게 소개하고 있어서 사실 부록들만으로도 충분히 하나의 자료가 된다. 
 

물론 컴팩트 한 만큼 이렇게 예쁜 책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은 아쉬움이 들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이름을 우리말로 발음한 가나다 순으로 화가들이 등장하다보니, 작가들의 시대가 들쑥날쑥한 것도 아쉽다. 작가연표에서 친절하게 연표를 볼 수 있으니 혼돈은 막아주지만 작가의 소개순 또한 연대를 따랐더라면 서양미술사를 좀 더 쉽게 공부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욕심이 든다. 개인적으로 고야의 노년작, 르동의 판화작업, 일본작가 호쿠사이의 작품활동 등이 반가웠고 평소 알고 싶었던 여류화가들인 로랑생과 모리조의 이야기들도 기억에 남는다. 어린이가 보기에는 글자가 작고 많은 감이 있지만 누구에게라도 미술에 대한 관심을, 그것도 즐겁게 충족시켜줄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 깨진 청자를 품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나, 깨진 청자를 품다 - 자유와 욕망의 갈림길, 청자 가마터 기행
이기영 지음 / 효형출판 / 201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마이야기를 듣노라니 ‘독짓는 늙은이’며 영화 ‘취화선’이 떠올랐다. 화가 장승업이 실제로 가마에 몸을 던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영화에서 불 끓는 가마로 몸을 던지는 배우의 모습이 인상깊게 남았나보다. 물레를 돌리고 묵묵히 가마를 채워가는 도공들의 모습은 글과 미디어로 재현된 가마 혹은 도공들의 모습 때문인지 수도승의 모습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뭔지 희망을 가지고 하루하루 흙을 매만졌을 이름 없는 수많은 도공들의 삶에 깊은 연민을 드러낸다. 저자는 역사 속 이야기와 함께 사금파리 조각들에서 가마터의 분위기며 도공의 인상까지 상상해낸다. 아마도 저자는 인생의 전환기에서 도자기를 만나고 이제는 사라져버린 가마와 도공을 마음 속으로 만나며 느림의 자유에 대한 철학을 굳힌 듯 하다. 저자는 아마도 당시의 도공이 되어 마음 속으로 흙을 다지고, 물레를 돌리고, 가마에 불을 때지 않았을까.

이 책에 소개된 가마터를 보자면 왠지 ‘깨진 청자’라는 말에 짝처럼 대구라도 이루듯 터만 남아 있다. 저자는 이미 생을 다한 가마터를 찾고 사금파리들을 만나고 사금파리들은 과거를 회상하며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금파리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역사 속 그림들이 이야기를 하는 냥 재미있기도 하고 풍요롭진 않아도 과거를 추억하는 그 내용이 현재를 좀 씁쓸하게 여겨지게 한다.
표지의 사진처럼 모든 사금파리들이 영롱한 빛을 그대로 가지고 있지는 않다. 갑발에 붙은 사금파리의 모습도 책을 어느 정도 읽고서야 ‘갑발이구나, 붙은 청자였구나’라고 여길 수 있을 정도로 책에 등장하는 청자들은 형태를 짐작하기 힘들다. 자기이름을 소리낼수도 없을만큼 훼손된 상태이고 우리가 상상할 수 있고 귀하고 비싸다는 청자의 빛을 볼 수 있는 사금파리는 몇 안된다. 그나마 온전한 빛은 표지사진의 그것이 최상이고, 온전한 형태는 진안의 가마터 할머니에게서 ‘빅딜’을 통해 받은 사발 정도이다. 온전하다 싶으면 박물관에 진열된 자기가 분명하다. 온전하지 않아서 아쉽다는 것이 아니다. 저자에게는 진열되고 박물된 자기보다는 이젠 빈 터만 남아 있는 가마터라도 찾고, 그 자리에 아직 남아있는 사금파리에게서 역사와 도공의 숨결을 느끼는 것이 소중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해볼 수 있다. 이런 저자에 대한 생각이 서서히 가마터 여행의 발걸음에 나를 동참시켰을 것이다.

이 책은 가마터 발굴과 역사 속의 청자를 알리는 두껍고 큰 사이즈의 도록들에서 벗어나 일반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는 데도 의미가 있다. 발굴된 정보 중심의 도록 같았으면 깨진 조각만 남아 형태도 상상하기 힘든 사금파리의 온전한 모습을 그림으로라도 제시했거나 그나마 좀더 온전한 형태가 남은 청자가 모델이 되었을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은 인생의 전환점에 있는 저자의 이야기로 시작해 가마터를 찾는 발길과 에피소드와 청자의 역사적 배경이 주를 이룬다. 자연스레 역사적 배경의 시간적 순서를 따르는 가마터 이야기에는 가마터의 현재의 모습과 사람들이 담겨있다. 정보와 학술적 용어로 가득한 도록들보다 실제로 무게도 가볍고 내용도 저자의 감수성에 무게가 실린다. 여행서의 형식을 따르고 있어서 우리나라 기행소개서처럼도 느껴지고 생활 밖에 있던 우리나라 청자의 역사를 자세히 들여다 볼 기회도 되었고 유럽과 아시아 자기의 역사를 맛볼 수도 있다.
또, 청자 가마와 발굴된 자기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으로 저자가 던지는 질문에 우리도 관심을 가져야 할 듯 하다. 발굴된 자기들은 잘 보존되고 관리되고 있는가. 적법한 조사과정이었는가. 수익사업으로서의 가마터 발굴과 조사 등이 연관되면서 유물 자체로서의 대우에 대해 궁금하고 염려되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개인의 자산이 아닌 역사 자체의 자산으로 여겨지길 기도해본다.
이러한 저자의 메시지도 이 책의 주요목적의 하나가 되었겠지만 책을 덮는 지금도 자기들보다 더 마음에 들어오는 생각이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 저자의 도공에 대한 연민과 더불어 글귀 전체에 드러난 현대인의 정서에 대해서다. 아마도 나는 지금을 사는 우리가 저자의 여행마냥 도공의 하루하루를 상상해보고 도공의 욕망이 자유로 바뀌는 순간을 경험해보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선물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일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