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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리고 싶은 날 - 스케치북 프로젝트
munge(박상희) 지음 / 예담 / 2011년 9월
평점 :
품절



누구에게나 그림을 그리고픈 욕망이 있는 것일까. 나는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하지만 그림을 잘 그리고픈 욕심을 언제나 있었던 듯 하다. 내 머릿속에 있는 것, 그리고 내가 아끼는 것을 그림으로 그리고픈 욕망 말이다. 그러나 머릿속에만 맴돌 뿐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이 책을 보고 나니 연습도 없이 그림을 잘 그리고픈 욕망만 앞서가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이렇게 그림에 대한 욕심이 있었던 것은 말로 표현되지 않는, 혹은 말문이 막혔을 때의 기억들을 그림일기로 쓰고 싶어서였던 이유가 가장 크다. 그런데 마침 저자의 그림일기가 등장한다. 짤막한 문장 몇 개와 장난스러운 그림 하나하나가 일기가 되고 생생한 기억이 된다. 때로는 말보다 그림이 그때의 기억을, 감정을 잘 표현해주기도 하는 듯 하다. 그래서 그림으로 하는 말에 대한 욕심이 들었던 것일까. 유난히 그림에 자신감이 없어서이기도 했다는 것을 부정할 순 없겠다.

책을 읽는다고 해야 할까 본다고 해야 할까. 저자 ‘먼지’의 드로잉을 보는 재미가 있다. 수많은 병들, 다양한 사람들, 사람을 드로잉 하는 것이 항상 어렵다고만 생각했는데 저자의 선을 따라 따라 그려봐도 좋은 연습이 될 것이었다. 책을 뒤적뒤적 하다가도 문득 새로 산 수채 색연필을 꺼내 들고는 끄적 끄적 거려본다. 무에 커다란 도화지를 하나의 그림으로 채울 생각을 버린다면 저자의 드로잉 공부만으로도 많은 습작이 나올 듯 했다. 그래서 버스도 그리고 새도 그리고 내 책상의 모니터도 그려본다.

정물화, 인물화, 풍경화 등의 단어가 아니라 오브젝트 드로잉, 라이프 드로잉, 로케이션 드로잉이라는 용어라서 조금 더 친근했던 건 아닐까. 전문적인 기술을 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말을 지껄이듯 그림도 두려워하지 말고 일단 지껄여보라는 게 아니었을까. 연필이나 붓을 들고서 아무것도 그리지 못하는 자신을 북돋는 듯한 저자의 말이 힘이 된다. 아무도 보지 않을나만의 스케치북이라 생각하니 더욱 그렇다.

저자가 제시한 드로잉들을 보니 점들이 만들어낸 면과 다양한 색의 그 면만으로도 아름다운 드로잉이 된다. 이 부분을 책의 중간 부분에 있는데 스케치에 자신이 더욱 없다면 책의 순서 없이 면과 색부터 따라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하다. 형태를 온전하게 잡는 것보다 색과 기하학적인 나만의 면으로 무늬를 만들어내고 나만의 스케치북 표지를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

이 책은 수많은 미술도구를 소개하고 있기도 하고 직접 만들어보는 스케치북을 다양하게 만드는 법까지 제시하면서 매우 미술학습적인 면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나는 저자의 의도가 결코 미술학습에 그 목표를 두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림에 자신이 없는 일반인들에게 그 어떤 것도 그림그리기의 대상이 될 수 있고 자신만의 표현법을 찾는 영감을 주고자 했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드로잉의 방법은 꼭 저자의 순서가 아니더라도 자신에게 맞거나 흥미가 좀 더 가는 분야를 공략해서 나만의 표현법을 만든다면 더 멋진 드로잉이 되지 않을까. 얼마나 닮게 그렸냐는 것이 우리의 작은 그림들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은 되지 않을테니 말이다. 얼마나 나만의 표현을 하고 있는지, 그림으로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우리가 무엇을 느꼈는지, 우리가 어떻게 기억하는지가 더 중요한 문제일테고 저자도 그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최근 장미셀 오토니엘의 전시회에 다녀온 적이 있는데 그는 완벽한 공예품이 아니라서 버려지고 부러 파손되는 유리들을 모아 자신의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누군가에게는 완벽하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게는 표현의 방법이 되고 의미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으리라. 우리의 드로잉이, 그림언어가 다른 누군가에게 의미일 것을 먼저 생각하지 않고 나의 표현의 욕구를 표출하고 매끈하진 않아도 내가 직접 내 기억을 표현한다면 그것으로 가장 큰 의미가 아니겠는다. 저자 ‘먼지’는 드로잉을 위주로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표현해도 괜찮다며 다독이지만 사실 드로잉 뿐 아니라 어떻게든 표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메시지가 더욱 강렬하다. 참으로 위로가 되는 저자의 메시지이다.

말했듯 이 책은 저자의 일기를 엿볼 수 있기도 하고 그의 여행기를 볼 수 있기도 하다. 덕분에 책을 보는 재미가 더했던 듯 하다. 조그마한 그림 속에 숨어 있는 저자의 여행기와 일기라니 말이다. 일기 속의 저자의 캐릭터가 참 귀엽기도 하고 하나하나가 멋진 캘리그라피가 되는 텍스트들도 멋지다. 저자가 이끌어주는대로 잘라붙이기도 하고 선으로만, 면으로만 이것저것 끄적거리는 연습은 정말 우리의 드로잉 실력을 높여줄 것 같기도 하다.

당장 졸업앨범을 꺼낸다면, 수많은 맥주의 종류를 접한다면, 마트에 종류별로 한 골목 가득 쌓인 통조림의 종류를 본다면... 이걸 다 그려야 하나라는 부담이 생길 수도 있으니 하나의 스케치북이라도 여러 방법과 소재를 시도한 2011년 11월~12월의 스케치북을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 일기여도 좋고 스크랩이어도 좋고 과거를 기억하면서 앨범사진 중 하나여도 좋겠다. 일단 연필을 들어보는 거다.

나는 일년에 몇병 사지 않는 와인 맛을 구별하려고 병을 그리기도 했고 말로 하면 재미 없는 나의 황당한 경험을 친구에게 이야기 해주려고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물론 정말이지 형편없는 그림이었지만 나중에 그 그림들이 나를 웃게 하고 소중하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이 책의 제목처럼 ‘그림 그리고 싶은 날’은 누구에게나 있다. 이 책은 그림을 전문적으로 배우려는 이들을 위한 책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나를 위로하는 나의 또 다른 언어를 찾아가는 과정이자, 그림 그리고픈 욕망에 영감을 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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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공감]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공간 공감
김종진 지음 / 효형출판 / 2011년 9월
평점 :
절판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는 공간을 스스로 형성한다. 이 공간이란 시간과 접목하여 각 찰나가 개개의 ‘공간’의 개념이 되기도 함을 전제하고, 따라서 같은 공간이라 할지라도 모두가 다른 개인적 경험으로서의 공간으로 해석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저자의 공간개념 또한 경험하는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띄고 있으며 이는 건축을 통해 ‘공간지워짐’의 한계를 넘어서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저자가 제시하는 그림 안에서 사진 안에서 그리고 스스로 경험을 통해 공간의 표현에 대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직접 및 간접 체험해온 공간에 대한 감정의 유사성을 발견하고 스스로만의 공감대를 작가, 건축가와 소통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자 장점은 건축학자로서 공간을 건축에만 제한하지 않고 피아제가 공간에 대한 인식을 건축적 행위로 본 것에 동의하는 매우 폭넓은 공간에 대한 사유라는 점이다.  


이 공간은 실제로 존재하는 공간일수 있으며 체감하는 공간, 상상된 공간일 수도 있다. 나는 저자가 이 공간을 설명코자 하이데거를 끌어들인 이유가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존재에 대한 질문은 공간의 문제와 밀접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존재란 공간에 의해서만 증명되는 것이 아닌가. 나의 위치조차 상대적인 것이어서 공간과 다른 존재로서만이 나의 존재가 증명되는 것이니 공간 자체만으로는 그 의미를 말할 수 없으며 그 공간을 체험하는 인간의 감정 또한 같은 공간을 달리 해석할 가능성을 남긴다.  


이 책에서는 곳곳에 tip을 달아 기존의 철학을 설명하고 있기도 하다. 이는 저자의 의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뿐 아니라 다양하게 추가되는 공간이미지를 보거나 상상해 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괴테가 ‘건축은 얼어붙은 음악이다’라고 말했다는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이가 르코르뷔지에에 의해 건축으로 표현되었었다는 것도 이 부분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음악의 건축적 표현이란 어떤 것일까. 누가 표현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이 명제는 아마도 르코르뷔지에 말고도 많은 건축가들의 이상이었을 수 있으며 우리는 우연히 어디에선가 음악적 건축, 음악으로서의 건축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저자는 공간에 대한 체험을 오감체험의 장으로 전제함으로써 건축 또한 시각적인 것에서 청각적이고 촉각적인 여러 감각으로 다시 보게 한다.
하나의 벽은 누군가에게는 아이들의 자라는 키를 표시하는 시공간으로서 체험되는 공간이기도 할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커다란 나무처럼 내 등을 받쳐주던 여가의 시공간으로 남기도 할 것이다. 저자가 제시한 김영갑의 제주도 사진과 김아타의 사진작업처럼 순간, 혹은 몇분, 몇시간의 시공간을 읽을 수 있는 하나의 공간 또한 존재한다.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개개인의 그리고 매순간순간의 체험으로서의 공간에 대해 이렇듯 끊임없이 생각하게 된다.

저자가 융의 경험을 얘기할 때와 마찬가지로 공간에 대한 느낌을 적어낸 글들을 조금 더 가깝게 이해하려면 나만의 고유경험과의 유사성에서만 약간이나마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공감대란 아주 약간의 유사감정만으로도 형성된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보다 작가와 설치가의 의도에 가까워지려면 직접 체험해보는 공간 또한 나쁘지 않겠지만 그것이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보는 자의 감정상태, 기후, 건강 모든 변수가 순간순간 다른 것처럼 그 누구에게도 같은 감흥이란 것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빛과 어둠에 대한 사회적 언어가 있다면 영화적 언어 정도가 아닐까. 영화 속 영웅들의 시련-통과의례 장면은 보통 어두운 시공간으로의 입성으로 시작된다. 그러다가 모든 시련을 이겨낸 후 영화의 엔딩은 해가 뜨고 아름다운 빛을 발한다. 어쩌면 이러한 시공간 설정은 실제 시간적 배경을 그렇게 지정했다 하더라고 우리의 인식 속에 시련과 빛의 정도의 상관성에 대한 깊은 보편성에 의지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시간적 배경으로서라기 보다 캐릭터의 현재 상황과 심리상태를 미장센으로 표현한 것으로 읽어내야 하는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 스친다. 저자의 표현대로 하자면 심리적 시간 말이다.  


이 책은 저자의 공간에 대한 사적인 에세이인 동시에 건축이 형성하는 공간과 인간의 교감에 대한 깊은 질문을 하게 하는 건축학자의 화두던지기이도 하다. 저자가 끊임없이 등장시키는 공간의 빛에 대한 사유가 가장 그렇다. 나는 저자의 의도대로 따라가 보기로 한다. 또한 가장 공감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어둠을 배제해버린 현대 건축보다는 빛과 어둠이 존재하는 부아 도이에 성과(76p) 콜롬바 무제움(171p), 저자가 영국에서 우연히 발견한 성의 폐허(161p), 토로네 수도원(215p), 뒷 표지에도 제시된 저자의 ‘헛간’ 이 그것이다. 저자가 영감을 받아 결국은 만들어낸 공간 ‘헛간’은 그의 공간에 대한 사유, 건축에 대한 가치관을 단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어둠이 존재할 때만이 빛이 그 진가를 발휘한다. 어둠과 빛이 공존하는 공간은 그것이 만들어내는 빛의 산란을 감상하게 하는 고유한 공간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가지는 듯 하다. 또 저자가 영감을 받았을 수많은 저 사례들은 오래된 그림자의 냄새가 날 것 같은 그 공간들은 약간의 경외감과 숭고함 경건함을 가지고 있다. 이는 과장되게는 미세한 공포와 설렘 내지는 떨림으로 표현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두 같은 맥락 속에 있는 감정을 오가며 사람들에게 조금씩 레벨의 차이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빛만이 존재하는 건축양식에 너무도 익숙해져서 더욱 건축으로 형성되는 공간, 내부를 인식하기 보다는 외부와 형태를 중시하고 시각적인 감상에 치우쳤던 것은 아닐까.

이는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일 뿐 아니라 수많은 건축학도와 건축가들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할 것이다.  


단적으로 스미스 부부의 오래된 집과 전몽각의 ‘윤미네 집’ 사진처럼 사람이 일상을 살아내는 그 공간에 시간과 생활, 그리고 기억이 쌓이면서 공간에 대한 각각의 감성들이 발생한다. 공간 또한 체험으로서 의미가 발생하는 것이며 이러한 일상과 체험은 어떻게 생겼는지가 중요한 건축물, 사물로서의 공간의 개념으로는 설명이 불가하다. 한국 독립 애니메이션 ‘집’에서는 수많은 집신들이 등장한다. 도시의 재개발 지역 옥탑방에 정을 붙이지 못하는 주인공은 어렸을 적 떠나야 했던 집과 그 집을 추억한다. 잊고 있었던 집에 대한 기억들은 지금은 누군가에게 폐가로 보일 공간도 옛 시공간으로 되돌리는 힘을 가진다. 집신들은 그 집에 대한 오랜 기억과 추억이다. 집이 그 기능을 잃고 인간에 의해 포기되고 헐릴 때 집신 또한 소멸된다. 마치 사랑을 잃을 때처럼 기억과 시공간이 부정되는 순간이다. 이렇게 단적으로 우리의 ‘집’을 생각한다면 공간의 의미가 누구에게나 같지 않다는 것을 절감할 수 있으며 일상과 체험으로서의 공간, 훼손이 아닌 다른 표현으로서의 재건축과 인간과 자연 중심의 공간 표현이 그립고 절실하다는 생각이 더욱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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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기억속의 색]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우리 기억 속의 색 -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청소년권장도서
미셸 파스투로 지음, 최정수 옮김 / 안그라픽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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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이라는 단어는 굉장히 시각적인 것으로 느껴진다. 색이란 정상적인 시각으로만 판단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색이라는 것이 단지 시각적인 이미지만 가지고 있다면 우리가 눈을 감고도 느끼는 색감과 오감을 통해 다르게 느끼는 색감, 기억 속에서 달라지는 혹은 모노톤이 되어버리는, 이 모든 현상에서의 색을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기억 속의 색, 사실과는 거리가 있을 수 있는 색의 다양한 이미지를 글로 재현한다. 그 개인적인 경험과 이 노장의 연구가만이 할 수 있는 당시의 색에 대한 사회적인 시점을 짚어낸다. 오래전 저자의 어린시절 이야기들이 흥미롭기도 하지만 꽤 버라이어티 했던 세계사 안의 특히 저자가 거주했거나 여행했던 곳에서의 다양할 수 밖에 없었던 색의 의미, 즉 색의 역사 정도가 그의 에세이에 담긴다는 점에서 단연코 색 연구가의 글임도 잊지 않는다.
색의 의미는 시대마다, 지역마다 다르니 보편적인 색의 의미에 대한 글 따위는 애초에 가능하지도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저자가 색이라는 소재로 책을 쓸 때 개인사를 끌어들이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글쓰기 작업이었을 것이다.

또한 저자의 말대로 색에 관한 책에서 색을 가진 이미지가 단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 것도 저자의 색에 대한 생각을 그대로 드러낸 작업이었다. 저자가 생각했던 것처럼 색이란 개념은 굉장히 추상적이고 시대, 지역 뿐 아니라 각각의 개인 안에서 다르게 느껴지는 것들이다. 우리가 똑같이 본다고 절대 말할 수 없으며 그것은 우리의 기억 자체가 완전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역사책을 보는 듯도 하고 할아버지 옛 시절 얘기를 듣는 하여 흥미로웠는데 저자의 경험이라는 점에서 더 실감이 나고 흥미로운 부분들이 있었다. 특히 컬러영화의 등장에 대한 엄격한 자본가들의 경박하다는 평가들이 있었다는 게 흥미롭고 이해가 갔다. 관음증적 매체인 영화가 우리의 눈으로 보는 것과 같은 컬러를 가질 때 관음적 대상으로서는 더 노골적이 된 것일테니 말이다. 보수적인 이들에게는 이는 어떤 광경이건 간에 엿보고 있다는 죄책감을 가중시켰을 것이다. 이는 영화사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하게 했다. 무의식적인 도덕적 거부감과 이유없어 보이지만 상스럽게 여긴 이러한 시각매체의 성격을 색의 여부와 결부지어 생각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또 우리나라의 어휘가 굉장히 색을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고 그 오감으로 함께 표현되는 단어들에 대해 저자가 어떻게 생각할지 굉장히 궁금해졌다. 매우 흥미로워하지 않겠는가. 그가 설명하는 프랑스 혹은 유럽에서의 다양한 색에 관한 표현들(영어 보다는 훨씬 많은 듯해보였다)보다 더 풍부할 것이 분명한 한국어의 매력에 빠지게 될지도 모르겠다. 시각과 촉각, 후각과 미각, 청각... 우리 말은 시적이어서 공감각적 색 표현으로 의사표현이 가능하다. 색을 말로 전달할 때 형용사는 기본이고 여러 조사들을 붙여서 느낀 색을 전달할 수도 있다. 물론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색이란 보여줘도 각자가 느끼는 색감이 각각 다를 것이고 또 다르게 기억할 것이기 때문에 색의 정확한 시각적 제시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색상표 또한 그렇고 이는 컴퓨터로 이미지 작업 혹은 같은 색을 공유해야 하는 공동작업에서나 유효한 것이며 결코 같은 느낌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책을 덮고 나 또한 색에 대한 에세이를 써본다. 내 기억 속의 색과 당시의 사회적인 색은 어떤 차이와 접점이 있었을까. 내 기억 속의 색은 완전한 것인가. 빛바랜 사진과 같은 혹은 흑백사진이 되어 버린 장면들의 본래 색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 기억의 간극을 나는 색을 표현하는 단어들로 메꿔간다. 색인지 글자인지 모를 것들로 가득 채워진 하나의 에세이가 머리 속에 쓰여지는 듯 하다. 온도와 기후와 같이 있는 사람 혹은 주변의 사물, 나의 건강과 컨디션... 이 모든 것이 기억 속의 색을 자꾸 변화시킨다. 기억 안에서 색들은 매번 다른 색이 되고 어떤 색에 대한 선호도도 자꾸 뒤바뀐다.

몇 년 전에 색에 대한 책을 찾다가 독일에서 설문조사를 통해 연구한 색의 느낌, 색에 대한 감정과 이성에 대한 영향력, 그리고 당시의 그 사회의 선호되는 색에 대한 통계를 볼 수 있는 책을 보게 되었다. 우리가 색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바로 그 정도이다. 좋아하는 색, 긍정적인 색, 어떤 감정과 연관되어 있는 색이라고는 지정할 수 있지만 그 이유는 밝힐 수 없다. 무의식적으로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된 것일테니 말이다.

하지만 분명 이 개인적인 경험이란 또 결코 개인의 것만은 아니어서 보편적인 색의 선호 또한 가능해진다. 사회적으로 긍정적 혹은 부정적으로 강요되는 색이 분명 존재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우리를 호명하기 때문일 것이다. 정치적인 이데올로기 뿐 아니라 상업적인 상품과 광고 노출의 정도만으로도 이러한 색의 선호도는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저자의 에세이는 색채연구가로서의 색의 이데올로기성을 에세이라는 형식을 통한 것만으로 증명하는 작업이다. 바로 이 부분이 가장 매력적인 책이다. 아마도 색 이라는 분야에서 오랜 시간 연구한 거장만이 할 수 있었던 작업임에는 분명하다. 글의 흥미로움을 떠나서 색의 이데올로기성을 보여주는 것은 결코 시각적 이미지로는 불가능한 일일테니 말이다. 

이런 색에 대한 에세이 방식과는 다른 저자의 저서일, ‘악마의 무늬, 스트라이프’ 와 블루와 블랙에 대한 색의 역사라는 책이 무척 궁금해진다. 하지만 그 색의 역사에 관한 책보다는 이 ‘우리 기억 속의 색’이 한평생 색채 연구에 시간을 쓴 노장 연구가의 색에 대한 철학을 보여주는 책일 것이라는 데는 확신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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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화가들의 반란, 민화]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무명화가들의 반란, 민화 정병모 교수의 민화읽기 1
정병모 지음 / 다할미디어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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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이 TV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는 세종의 뒤로 책거리 병풍이 서 있다. 우리 민화의 특징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평면적인 책거리 병풍이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예전이라면 타 사극과 조금 다른 미술팀의 세팅정도로 생각했겠지만 이 책을 한창 읽던 중에 발견한 드라마 속의 책거리는 민심을 읽고자 하고 강연을 하고, 공부와 연구를 멈추지 않던 세종의 캐릭터를 드러내는 데 아주 적절한 설정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저자가 말한 바와 같이 정조가 책거리를 만들었고 어좌 뒤에 십장생도가 아닌 책거리 병풍을 두었다는 기록에 따라 세종 때에도 책거리 병풍이 어좌 뒤를 장식했을 가능성 또한 높다. 하지만 드라마 내에서 태종을 비롯한 다른 이의 배경에서 책거리를 발견할 수는 없었으니 이는 책거리 병풍을 통해 캐릭터를 표현하려던 것이 분명해진다.

세계 곳곳에 흩어져 미국, 유럽, 일본 등의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민화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저 미술교육의 부재로 인한 자유로운 배치와 어린아이와 같은 표현일지도 모르겠다는 막연한 생각은 세계 미술사에서 다르게 표현을 꾀하고 그 새로움을 인정받았던 입체파등의 하나의 사조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한국미술사에 대해 잘 모르지만 이 책은 한 민화연구가에 의해 민화의 가치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된 단초가 된다. 한국미술사에서의 민화의 가치가 재평가되고 있음이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우리 그림에서 민화가 빠지지 않고 아름다움과 새로움, 민초의 저항의 이미지로 다양한 해석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아카데믹한 고급미술에서 벗어나 있는 파격적인 구성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우리는 서양미술사의 여러 사조들이 기존의 표현기법을 비판하고 벗어나려는 노력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한국미술사에서의 민화의 출현에 대해서는 저항과 새로운 사조의 등장으로서보다는 그리는 주체의 신분적 차이로만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왜 우리 민화는 하나의 저항적 사조로서 그 입지를 굳히지 못했을까. 물론 1차적으로는 그리는 주체의 신분의 차이로 인한 역사적 기록의 차이때문일 것이고 이에 파생되는 2차적 이유로 신분에 따라 폄하된 나머지 보존되지 않았다는 점, 그의 가치를 미리 알아본 일본과 열강의 수집 등에 의한 낮은 보유력에 그 3차적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저자가 가장 주목하고 있는 민화의 가치는 추상과 환상의 세계를 그린 우리 그림이라는 것인데 우리의 옛그림, 민화가 한국미술사에서 초현실주의적 특징을 가진 미술로 인정되고 알려지기를 바라는 저자의 애정이 느껴진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세계에 우리 민화를 알리는 작업을 해온 실천가이기도 하다.

민화를 들여다보면 볼수록 저자의 판단이 옳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히려 이에 더해 우리 민화가 굉장히 현대미술적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지금 재해석되고 알려지는 것이 굉장히 한국미술의 국제적 입지에도 고무적일 것으로 생각된다. 꽃들은 단순화되어 세련되게 디자인된 무늬를 보는 듯 하고, 책거리에 나열된 문방사우들은 잡지나 카다로그의 상품들처럼 각각의 의미를 가진 채 한 장의 종이(면) 위에 놓여진다.
이는 무엇보다 현재 우리 민화라는 옛그림이 현대의 미술과 디자인에 새로운 영감을 줄 수 있는 영역으로서의 가능성이 가장 큰 매력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문자도와 같이 민초들의 드러난 주술적 의미 뿐 아니라 토속신앙과 당대의 전통의식들을 엿볼 수 있는 상징적 소재들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역사 사료적 가치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문자도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만의 아들기원의 소재 ‘고추’가 등장하는 책거리에서부터 용과 호랑이의 가신역할 등은 민화가 양반문화와는 다르게 일반 가정에서 종교적 기능을 하고 있었다는 점도 토속신앙사의 일부가 될 것이다.
이 책은 그림의 소재별로 민화를 분류하여 소개하고 있고 내게는 세종이 아닌 뒤에 세워진 병풍에 눈을 돌리게 했던 책거리 부분이 가장 흥미로웠다. 책거리의 독특한 구성과 구도는 시각과 자연을 벗어난 형식적 자유 그 자체이다. 이는 미술사 내에서도 그 새로운 움직임의 가치를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또한 그 새로운 움직임 내에서 중국의 영향을 받은 민화작업 등이 있긴 했지만 한국미술사에서의 민화의 특성 등을 짚어내는 작업 또한 활발해져야 할 것이다. 민화연구에 대해 너무도 문외한인지라 저자의 이러한 연구가 내내 새롭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저자가 주로 해외에서 우리 민화를 소개하고 인정받은 작업을 꾸준히 해왔다는 점을 생각할 때 국내에서의 민화의 가치가 오히려 더 폄하되어 온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

얼마 전 유홍준의 책 ‘한국미술사 강의’에서 고구려 6세기 정도의 그림에서도 굉장히 해학적이고 단순화된 그림들을 볼 수 있었는데 마치 이 책에 소개된 까치호랑이만큼 친근하게 표현된 용의 모습등이 그것이다. 용의 형태 뿐 아니라 십장생도나 봉황 등의 환상 속의 모습은 현대 환타지의 근원이자 환타지 그 자체의 성격상 시기성이 없어서 지금의 상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까치 호랑이의 여러 민화의 형태들은 점점 단순화되고 개성 또한 다양해져서 마치 현대 여러 유명 만화가들의 각각의 까치 호랑이를 보는 듯 하다. 이러한 직접적인 환타지 표현이 아니더라도 무엇을 보고 관찰한 그림이 아니라 모두 상상해서 각각을 그려낸다는 점에서도 당시의 고급미술과 다른 점일 수 있을 것이다. 산수화, 정물화, 곤충과 동물들은 본 것에 기인한 작품이 전해내려오는 것이 많지만 시각에 의지하지 않은, 시각에서 벗어난 표현을 한다는 데 이 민화의 매력 포인트가 또 있다는 생각이 든다. 현실에 존재하는 것을 그리지만 현실의 세계가 아닌 (저자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상상의 세계, 관념의 세계가 맞다. 이는 또 다른 문자이며, 의미이며 이야기가 된다. 사람과 상황이 등장하지 않아도 무한한 스토리텔링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그 의미표현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해서 굉장히 자유로운 표현, 분출의 장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운좋게도 최근에 찾은 갤러리의 아트샵에서 민화를 모토로 한 현대작가의 작품이 디자인화된 예쁜 상품들을 만날 수 있었다. 민화가 분명 재해석되고 재탄생되는 움직임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적어도 한국미술 내에서는 고급미술에 비해 기억되지 못했던 민화의 아름다움이 이 책을 통해 새롭게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다. 내게도 하위문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민화는, 더 많은 민화의 역사와 민중의 삶 내에서의 민화를 더 알고 싶게 만든다. 하위문화의 힘과 동서양 모두의 미술사 내에서 새로운 하위문화의 역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이는 키치에 대한 선입견과 키치가 가진 힘에 대해 자각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내가 보았던 예쁜 디자인 용품처럼 국내에서의 민화의 재탄생과 그 역사에 대한 연구와 알리는 작업이 보다 확대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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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모더니즘 편 (반양장) - 미학의 눈으로 보는 아방가르드 시대의 예술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인류의 역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과는 사실 달랐을 수 있다. 과거가 되어버린 역사란 실제로 보고 들은 것이 아니어서 왜곡의 가능성이 매우 크다. 아니 설사 실제로 보고 들었다 할지라도 개인에 따라 다르게 느끼고 기억할 수 있기 때문에 역사의 신빙성에 대해서란 회의적이다. 만약 하나의 사실로 이루어진 하나의 역사만 있었더라면 역사를 연구하는 직업이란 필요성이 의심스러워진다. 사실의 축이 있는데 굳이 또 다른 고증 자료를 찾고 해석할 역사가의 역할은 축소되고 그 연구의 의미가 무색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과거를 재구성하고 고증하려는 노력은 당시대에 따라 재해석하는 사실 자체가 현재를 반영하는 역사가 되기도 하고 새롭게 조명되는 역사적 사실을 재조명하려는 노력에 의미를 두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서양미술사 또한 다름 아니다. 제목이 서양미술사가 아니라 진중권의 서양미술사라는 점에 주목하자. 지금까지의 서양미술사를 완전히 뒤집는 것은 아니지만 현 시점의 미학적 관점과 한 미학가의 시점이 얹혀 진중권의 서양미술사가 탄생했다. 시대에 따라 역사가 재조명되듯 미술사 또한 재조명되어야 한다는 저자의 의견에 동감한다. 저자의 아방가르드 시대의 예술에 대한 이야기는 앨프레드 바의 현대예술 다이어그램에 다르지 않은 현대의 예술비평에 대한 저항적 재해석이다. 미술사 중 단기간에 쏟아진 새로운 예술혁명이 많았던 20세기 초반은 가장 흥미로운 시도들이 많았던 때이기도 해서 저자의 서양미술사 모더니즘 편이 더욱 재미있게만 느껴진다.
제들마이어의 현대예술의 뿌리인 순수, 근원, 광기, 기술적 구축의 충동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저자의 서양미술사는 원근법을 벗어나 오로지 형과 색의 순수함을 지향해서 그 정점까지 찍은 말레비치에서 다른 장르와의 공유점을 가져야 했던 기술적 구축의 의지에서 나온 구축주의와 데스테일, 바우하우스 등의 실용적 예술운동, 무의식의 자동기술에서 철저히 의식적으로 구축된 달리의 초현실주의 등, 정점에서 다시 모순으로 빠지는 끊임없이 솟아난 현대미술 예술선언과 작품을 제시하고 있다. 무의식을 의식적으로 재현한다는 점에서 달리의 초현실주의 모순점이 보이는 것과 같이 자본주의 사회에 저항하면서 부르주아의 소비와 동전의 양면처럼 접합되어 있는 미술운동이 사실 그 혁명이 성공적이라 할지라도 공공미술가로서 지배사회에 편입되어야 할 것이라는 웃지못할 모순에 대해서 언젠가 들었던 저자의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그렇다면 예술혁명은 키치를 지향해야 하는가. 파쇼와 자본주의 미술계에서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아방가르드 혁명은 진정 성공할 수 없는가. 이는 예술이 트리비얼화 되는 것, 예술가 스스로 트리비얼화 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고 사실 미술가들의 고급안목으로 스스로 키치 생산가가 되기란 더 어려운 일일 것이다.
저항과 파기를 반복하다보면 그 반복마저도 클리쉐가 된다. 자기 거부가 가져온 새로운 것에 대한 추구는 모더니즘 시대의 수많은 미술혁명선언을 가져왔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끊임없는 그들의 시도에 대해 예술가라는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어떤 지식인이든 교육의 목표뿐 아니라 시대에 바른 의견을 반영하고자 노력(실천)하는 자만이 지식인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지식인의 역할이란 바로 그 지점에 있다고 생각해볼 때 그들의 선언은 예술계의 변화를 추구한 실천의 일환이었다고 할 수 있다.
모더니즘 시대에 각각의 시점에서는 아방가르드 하지 않은 유파는 없었으며 당시는 늘 새로움을 추구해왔다. 순수한 미술을 꿈꾸거나 반예술을 꿈꾸어 실용과 결합하거나 미술의 고급성을 버리거나 의식적인 것을 버리거나 그들의 시도가 예술의 개념을 변화, 변형 시켜왔던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변형은 예술의 개념의 확장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이 대안예술로서의 키치의 의미에 매우 부합해보이지만 넓은 의미의 키치라면 그 또한 동의할 수 있다. 예술개념의 확장은 결과적으로 고급문화로서의 미술의 소비를 확대시키는 결과를 낳았을 것이며 이는 소장의 소비가 아니라 단지 이미지의 소비를 의미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예술과 대중과의 간격을 축소시킴으로써 예술 자체의 입지 또한 결과적으로는 넓혔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야수주의의 용어, 피카소와 브라크의 콜라주의 입체성등에 대한 새로운 이슈들이 기억에 남는다. 특히 칸딘스키의 형태의 의미에 대해 읽으려 애썼었는데 그가 지향한 색채의 성향에 듣고보니 좀더 풍부하게 그의 그림을 읽게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는 형태의 의미에 대해서도 여러 생각을 하게 되고 그래서 그의 초현실주의적 표현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모든 미술사조가 확연히 구분되기보다는 상당한 접점들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그래서일까. 네 현대예술의 충동으로 구분된 아방가르드 예술은 오히려 시대구분된 미술사보다 보다 명확하게 파악되는 희한한 경험이었다.
미래주의에서는 사진과 필름의 미래주의성이 자꾸 떠올랐으며(이는 저자가 이 부분을 재미있게 설명해줄 수 있다는 확신 때문에 부가설명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하지만 미술을 중심으로 한 책의 취지상 선을 넘지 않으려는 분명한 저자의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표현은 미래주의적이지만 기법은 전혀 미래주의적이지 못했던 그들의 한계에 대해서도 저자와 함께 거북해했다. 서양미술사을 일대기적으로 정리하기를 시도하고 있는 독자들이라면 그와 함께 비판적으로 미술사 안의 각각의 작품을 들여야볼 수 있는 시선을 키우기 위해서라도 진중권의 서양미술사와 함께 독서하기를 권하고 싶다.
예술은 예술가를 둘러싼 사건, 사회적, 역사적 배경과 함께 그 사조 출현, 작품생산 등의 동기가 다루어지는 것이 보통이나, 저자는 미학적 시점을 집중적으로 들이댐으로써 잘못 접근해왔던 작가의 작품까지를 생각하게 한다. 간혹 한 작가의 작품이라 할지라도 그 추구하는 바에 따라 각기 다른 사조의 경향을 보였거나 모순적 작품을 양상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어떤 서양미술사가 정답일리는 없다. 우리가 역사를 절대적으로 고증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순간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가 떠오른다. 저자의 시점이 또 정답이 아닌 것처럼 독자, 혹은 감상자 각각의 해석이 그들의 예술혁명성과의 접점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며 그들의 혁명성에서 예술이 장식용이 아닌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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