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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역사다 - 한국 영화로 탐험하는 근현대사
강성률 지음 / 살림터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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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역사다’는 한국영화사중에서도 일반인에게는 조금은 관심밖일 수 있는 초기 영화사를 모든 국민이 아는 굵직굵직한 한국의 근대사를 중심으로 풀어가고 있어서 매우 쉽게 이해하고 접근할 수 있게 하는 책이다. 한국의 초기 영화사에 조금 관심이 있는 독자와 한국영화사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가장 최근의 재정리된 초기 한국영화사(초창기 영화~일제강점기시대)에 대한 논의를 볼 수 있다는 점에 매력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일제시대의 중심에서 친일영화에 대한 정의와 예를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싶다면 국내의 친일영화의 독보적 연구가라고 할 수 있는 저자의 ‘영화는 역사다’가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저자는 친일영화를 중심으로 다룬 박사논문에서 더 나아가 한국전쟁과 군부독재를 다룬 역사영화, 그리고 2000년대의 시대상을 담은 영화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장르를 넘나들고 있는데 이는 한국영화에서 어떤 영화를 역사영화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

우리가 사극이라고 부르는 대부분의 역사영화는 왕정이후, 일제 이전의 조선까지의 역사적 사건(기록에 남아 우리가 알 수 있는 군주정부의 이야기들이 대부분이긴 하다)을 다룬 극들이 대부분이다. 저자의 구분대로 실제 역사의 사건을 토대로 시대상을 보여준다면 이는 역사영화로서의 기능을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영화에 대한 분석보다는 영화를 통해 한국근대사를 읽고, 한국영화에서 근현대사를 다룬 역사영화의 예를 제시함으로써 사극의 정의 범위를 확대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저자의 특기분야인 친일영화에 있어서는, 필름복원작업 등으로 친일영화에 대한 가부논의 또한 가장 최근 논의를 읽을 수 있어서 단언코 일제시대의 한국영화와 친일영화에 대해 공부하려는 이라면 충분히 교본이 될 것이다. ‘영화는 역사다’는 대중을 위해 매우 쉽게 풀어쓴 책이므로 일제시대의 영화에 대한 연구를 위해서는 이 책을 입문서로 접한 후 저자의 박사논문을 접해보길 권한다.

‘영화는 역사다’에서 저자는 단지 억압에 의해서 친일영화가 탄생되었으리라는 단순한 이유를 넘어서 일제정책에 동화되었으리라는 친일감독의 정의에 대한 기준을 생각해보게 한다. 여기에서 일제의 문화 식민주의 정책 뿐 아니라, 현재의 일본문화성에 대해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천황제 가족주의가 낳은 충성자발과 더 나아가 가미가제가 탄생하게 된 정책은 여러 일본문화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영감을 줄 것이다.

저자는 초기한국영화부터 현재까지의 영화에서 근대사를 발견하는 것을 한정짓지도, 멈추지도 않는다. 일제시대의 영화보다 덜 억압적이랄 것 없는 군부독재시대의 반공영화정책과 거기에서 탄생한 영화들, 반공영화 변종인 베트남전영화에서 조금씩 변화해서 직접 피해자로서의 상처를 드러내는 ‘우리는 제네바로 간다’, ‘하얀전쟁’, 가해자로서의 모습마저 파헤치는 ‘알포인트’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역사와 함께한 영화는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영화는 역사다’라며 미래에 과거가 되고, 시대상을 담은 역사영화로서의 기능을 할 최근으 영화를 언급한 점은 매우 흥미롭다. 임순례 봉준호 감독의 영화들이 언급된 것 또한 역사적 영화로서의 가치를 그들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고 독자로서 매우 공감한다. 그러나 저자가 대중에게 조금은 접근이 어려운 한국초기영화, 그 중에서도 친일영화와 한국근대사의 어두운 부분을 담고 있는 영화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해 매우 쉽게 풀어내고 있어서 일반 독자에게 일제시대의 영화를 알리는 데는 부족함이 없으나 초기한국영화사 전체를 아우르지는 못해서 한국영화사 교본으로서는 참고용으로 적합할 것이라 여겨지고 현재의 영화들에 대한 더욱 구체적인 저자의 생각이 궁금해지는 아쉬움이 남는다.


나는 저자의 언급 중 팩션영화에 대한 부분이 가장 주목해야 할 이슈라고 생각한다. 실제 사건과 영화적 상상이 결합한 팩션영화의 팩트의 재현에 대한 언급보다는 ‘이를 재현한 감독의 세계관을 짚어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저자의 언급은 의미가 있다. 역사영화의 해석에 있어 저자의 가치관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낸 부분이기도 하다. 이 부분은 이 책의 가장 앞에서 다뤄졌어야 했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책의 핵심주제라고 여겨진다. 역사영화 해석에서 가장 먼저 전제되어야 할 기준이기도 하고, 과도한 미디어를 소비하는, 그 중 팩션을 소비하는 대중에게 가장 어필되어야 하는 주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쉽게 접할 수 있는 드라마와, 특히 역사적 사실을 재구성한다는 사극 드라마의 경우 팩트와 영화적 상상력에 대한 비판 없이 수용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팩션에 대한, 혹은 미디어에 대한 비판적 수용력에 관심이 없는 소비의 경우이다. 저자의 말대로 여기에서 팩션극에 대한 이해와 팩션극 감상과 비평에 있어서 (다소)작가주의적인 해석이 다수 등장한다면 인식의 변화가 충분할 것이라 생각된다.

이 책에서 보여주는 여러 친일영화를 접하고 그 안의 시대상, 그리고 감독의 가치관(친일 혹은 반일, 혹은 극단적 친일 등)에 따라 달라지는 영화의 내용과 미장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봉준호의 ‘괴물’을 다시 읽으며 현재 우리의 모습은 어떻게 영화적으로 재현되었나를 생각하다보면 저자가 대중에게 개봉과 동시에 과거가 되는 한국영화들에 드러나거나 혹은 숨겨진 우리의 시대상을 보는 방법을 일러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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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보면 매혹적인 죽음의 역사
기류 미사오 지음, 김성기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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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최근 출간된 <사랑과 잔혹의 세계사>는 기류 마사오의 전작들에 비하면 대중성이 높은 책이라고는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기류 마사오의 전작 <알고보면 매혹적인 죽음의 역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줄곧 전작들의 부록을 읽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는 기류 마사오의 죽음에 대한 방대한 조사와 그와 관련해 인간의 시각에 대한 폭력적 욕망에 대한 깊은 사유를 짐작케는 한다. 하지만 줄곧 반복되는 에피소드들을 읽고 깊어지는 사유보다는 에피소드들의 나열을 후작으로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는 아쉬운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기류 마사오가 수년 아니 수십년동안 조사했을 그 자료들의 출처와 연구과정 또한 흥미로울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사랑과 잔혹의 세계사>에서도 그 실재했다는 역사 속의 이야기들의 출처는 밝혀지지 않고 있으니 더욱 궁금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이후에 그 연구과정을 보여주는 책이 또 한권 나올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해본다.

<사랑과 잔혹의 세계사>에는 ‘인간의 잔인한 욕망에 관한 에피소드 172’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이 부제는 이 책의 내용 전부를 설명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책의 구성은 마치 우화집과 같이 에피소드의 나열 그 자체이다. 제1장에서 4장에 이르는 카테고리가 있긴 방대한 양의 에피소드가 불규칙적으로 연달아 있으므로 그 구성은 무의미하다고 보여진다. 이쯤 되면 그 구분을 하고 있는 눈과 귀와 입의 삽화조차 무의미해진다. 순서 없이 이어지는 인간의 광기어린 폭력의 에피소드들을 들려주는 것 자체가 이 책의 목적인 것으로도 보인다.


만약 기류 마사오의 죽음과 인간의 욕망과의 관계에 대한 사유를 읽고 싶은 독자들이 있다면 <사랑과 잔혹의 세계사>를 먼저 읽고 <알고 보면 매혹적인 죽음의 역사>를 읽으면서 접근한다면 보다 더 좋은 독서법이 될 듯하다.

<알고 보면 매혹적인 죽음의 역사>는 죽음이라는 테마를 주로 하고 죽음과 에로스의 관계에 대한 이론적 배경까지 살피고 있다. 책 전반에 걸쳐 안정적인 구성이고 왜 역사 안에서 죽음의 다양한 모습과 그 죽음을 대하는 인간의 반응에 대해 왜 연구했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다분히 죽음에 매료된 사람마냥 죽음을 좇는 기류 마사오가 왜 죽음이 매력적이라고 말하는 것인지 이해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 두 권의 책에서 수많은 미술작품이 예 혹은 부가설명을 위한 자료로 첨부된다. 다양한 미술작품을 읽어내려가며 비교 대조하는 죽음을 다룬 미술에 대한 해석은 <알고보면 매혹적인 죽음의 역사>에서 볼 수 있고 <사랑과 잔혹의 세계사>에서는 주로 인물등을 설명하는 부가의 용도로 그림과 사진들이 사용된다.


인간의 시각적 욕망에서 잠재된 폭력, 그리고 이내는 죽음과 에로스의 관계로까지 이어지는 기류 마사오의 의견은 우리에게 동의를 구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 안에서 실존했다고 조사된 자료를 나열하고 그 안에서 인간의 폭력성을 죽음과 에로스의 관계에서 찾아내려 한 것이리라.


나는 이 두권의 책에서 권력이 탄생과 그 과정이 이 책의 카테고리와 그다지 다를 바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의 권력관계라는 말로 축소 혹은 확대한 대입도 가능하리라고 생각한다. 즉 시각을 통한 권력관계에 폭력성이 존재하고 그 폭력은 더할수록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더 촉매시킨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세계사만 생각해보면 기류 마사오의 시점대로 그것은 권력관계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권력의 쟁탈과 권력에 대한 저항, 그리고 그 결과로 인한 권력의 이동에 관한 연대사가 세.계.사. 가 아닌가. 여기에서의 권력이란 거시적으로는 정치적인 것에서부터 작게는 사랑의 쟁탈전까지 다양하다.

기류 마사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그 역사 안에서 인간이 만들어낸 광기어린 폭력성을 발견할 수 있다. 권력을 쥔 자부터 그들이 행사하는 폭력을 구경하는 인간의 욕망까지 그 잠재된 폭력성이란 가히 무시 못할 인간본성인 것이다. 인간의 스펙터클에 대한 욕망은 어디까지일까. 인간의 가학성을 인정하고 있는 기류 마사오의 시점은 다분히 개인적인 것이 절대 아니다. 자신의 광기에 대해 인정하지 않으려는 우리 모두의 욕망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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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백과
마르탱 모네스티에 지음, 한명희.이시진 옮김 / 새움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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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처음 이 책을 접했던 과거에 나는 마르탱 모네스티에의 자살에 대한 방대한 자료조사와 객관적인 자살이야기들에 푹 빠져 지냈던 것 같다. 다시 책을 펼쳐보니 색색깔의 플래그를 붙여가며 열심히 읽은 흔적들이 보인다. 2003년에는 제법 자살이라는 죽음의 형태를 공부하는 것이 재미있던 터라 즐기며 볼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나이 먹고 겁만 늘었나보다. 관객이 나 하나 뿐인 심야극장 상영에서 한 가운데 앉아 공포영화를 보기도 할 때이니 그때 내 간이 한 30kg정도 되지 않았었나 싶다. 죽음을 구체적으로 두려워하고 있는 내가 다시 자살이라는 단어와 마주하기가 껄끄러웠던 것일까. 게다가 인터넷을 끼고 사는 나같은 사람에게 모니터를 통해서 읽는 자살의 기술과 역사 속의 자살자들을 마주하고 있자니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영화 <링>에서 브라운관을 통해 나오는 그 머리긴 우물귀신이 두렵게 느껴졌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하루에 비디오 두어개는 기본으로 보던 나에게 영화 <링>의 브라운관에서 기어나오는 귀신은 꺼진 모니터에 비친 내 모습만 봐도 소스라치게 했다. 후덜덜~ 글 사이사이에 수집된 자살한 시체들의 전시도 만만하지 않았다. 목을 매달고 불에 그을리고 투신한 여러 시체들의 사진들을 연출된 장면이 아닌 실제시체사진을 보고 있다니... 왜 이전에 이 책에 그렇게 반했었는지, 어떻게 읽어냈던 것인지 내 자신이 의심스러워진다..


 

과거에 이 책을 읽으며 사유의 즐거움을 만끽하던 때를 생각하며 다시 책 속으로 고고씽~이 책에서는 과거에 존재했던 다양한 자살의 동기와 방법들을 만날 수 있다. 심정 복잡했을 죽은 자들의 자살동기를 일목요연하게 기술한 걸 보고 있자면 한 죽음의 형태로 인정되기도 하고 제법 자살이라는 행위를 객관적으로 보게 된다. 자살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이 책을 읽는다면 보다 죽음을 멀리 보게 되어서 구체적으로 자신을 해할 생각에서도 조금은 벗어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반대로 참고해서 시도할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도 들지만 티브이에서 보는 범죄극에서처럼 살인으로 위장한 자살과 같은 낯선 방법은 찾기 힘든 책이니 차라리 책보다 범죄드라마들이 자살에 부정적인 영향을 조금 더 줄것이라는 위안을 해본다. 오히려 쓴 저자가 죽음에 대한 욕구를 이렇게 객관화시키면서 풀어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아... 오늘 삼천포로 자주 간다.

각설하고 마르탱은 여러 가지 자살의 동기와 방법을 이래저래 묶으며 미미하나마 수적 통계도 시도하고 있지만 자살하는 자의 특성, 자살의 전형성에 대해서는 정리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이 책이 가진 매력은 그런 객관적 정리 말고도 그 사실들이 이끌어내는 브레인 스토밍에 있다고 생각한다.

 

마르탱의 브리핑을 받고 있자면 내 머릿 속에서는 돌 굴러가는 소리가 난다. 문제제기를 하고 그것에 대한 양단 논란이 마치 천사와 악마처럼 토론한다. 여느 토론들처럼 말도 안되는 억지, 예를 들면 자살의 정당성, 자살할 권리에 대한 주장도 있다. 아마도 보통 이 책을 접하면 자살에 대한 양단의 입장에서 갈등하게 될 것이다. 자살이라는 선택을 존중할 것인가. 그렇다고 비난하고 하나의 생명경시나 죄악, 혹은 범죄나 위법으로 간주할 것인가. 어떤 자살은 소명에 의해서 의무에 의해서이기도 하다. 우리는 자살이라고 부르지 않지만 충성심이나 혹은 명예를 위해서 자살하는 경우를 칭송하기도 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이건 안타까워 해야할지 옳은 일이라 칭송해야할지 정말 난감해진다. 과연 어떤 자살하는 자들의 의식과 무의식에는 자살을 합리화, 합당화하면서 당위성에 치우친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다른 양단은 자살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치료가 가능한 것인가이다. 마르탱의 말처럼 자살자의 증상이 전형적인 것이 아니므로 주변에서 어떻게 미리 감지하고 도와야 하는 것인가. 책에서는 역사와 신화 그리고 스크린 속의 유명한 자살자들도 볼 수 있지만 자살에 대한 철학적, 도덕적 문제에 관해서도 세심히 언급하고 있다. 법으로의 자살 규제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로웠지만 자살에 대해 옹호하는 이들에 관한 구체적인 저서의 내용을 살짝 엿볼 수도 있고 안락사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어서 2003년 읽었던 <자살>이라는 제목보다는 지금의 <자살백.과>가 훨씬 어울리는 것 같다.

 

그리고 소설 속이나 영화나 드라마 속의 자살과 현실의 자살을 대조인식하는 데 꽤 도움이 된 듯하다. 소설 <향수>의 주인공 살인자도 의도한 타살, 결국 이것도 자살이고 생각해보니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의 주인공들의 자살목적은 환생이었다.(마르탱은 환생도 자살의 동기 중 하나도 소개한다) 과거엔 이들을 낭만적이거나 완전한 결론으로 보았다면 <자살백과>는 권총자살을 유행시켰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경우가 있다는 걸 상기시키게 하는 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족을 달자면 나는 여전히 '타나토노트'들의 소생을 전제한 자살시도에 대해서는 여전히 우러러보게 된다. 타나토노트들이 연구정신에 입각해서라기 보다는 베르베르님에 대한 애정이 짙게 깔려서 그런 듯하다ㅡㅡ;)

 

자살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을 접하고 있다보니 자살에 대한 욕구나 동기를 이해하는 것은 비난할수만은 없는 죽음도 있다는 걸 인정하게 된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삶에 대해 욕구를 가지게 할 것 같지만 자살이란 삶의 포기만으로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책으로 접하고 나니 더욱 와 닿는 사실이다. 사후세계에 대한 공포가 있으면 죽으려 하지 않을 것 같지만 때로 공포는 차라리 충동적인 죽음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생각과 맞물린다. 죽음, 작게는 자신에게 올지도 모를 상해에 대한 공포가 가중되면 오히려 공포심 때문에 무모한 자살시도를 하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삶에 대한 욕구는 자신과 소통하는 외부의 모든 것들을 대상으로 한 긍정적 경험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 경험 중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게 하는 것들이 삶과 죽음의 욕망에서 발란스를 맞춰주어야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삶에 대한 말보다 죽음에 대한 말을 더 자주 하지 않는가. 죽겠다. 죽고싶다. 가 살고싶다. 행복하다. 기쁘다. 보다 더 많이 되뇌어 지고 있는게 현실이다는 생각 때문에 암울해 할만한 일도 아니다. 죽음이라는 단어를 피하는 것보다 인정하고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살이라는 것이 어떤 사건과 동기에서 올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독서와 공부는 그것이 특정한 누군가가 아닌 나 자신에게 그리고 주변의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언젠가가 분명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ps : 지금 내눈에 띄인 책장 속의 책 중에 사회윤리의 제문제(제임스 레이첼스 엮음) 라는 제목이 보인다. 오래된 책인데 사회윤리에 관한 문제에 관한 여러 저자의 글을 엮은 책으로 기억된다. 자살과 안락사, 임신중절 등 지금도 여전히 문제시되는 여러 논란에 관한 저자들의 입장을 들을 수 있다.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 보다 깊게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되어준 책으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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