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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설백물어 - 항간에 떠도는 백 가지 기묘한 이야기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7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금정 옮김 / 비채 / 2009년 7월
평점 :
'巷說百物語'는 '항간에 떠돌아 다니는(巷說) 백 가지(百) 이야기(物語)'라고 풀이할 수 있다. '교고쿠 나쓰히코'는 에도시대 때 화가인 '다케하라 슈운센'의 괴담집인 '회본백물어(繪本百物語)'속에 등장하는 요괴설화에서 소재를 가져왔지만 자신의 개성을 덧칠하여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었다.
그의 데뷰작 '우부메의 여름'을 처음 읽었을 때, 과연 이것을 '미스터리'로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있었지만, 당시에 읽었던 고만고만한 일본 미스터리들과는 확연한 차이가 나는 독특함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교고쿠 나쓰히코는 누구에게라도 부담없이 읽기를 권할 수 있는 류의 작가는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미스터리 관점에서 그의 소설은 정통적인 미스터리의 공식을 파괴한다는 일부의 평가가 있을 정도로 파격적인 면이 있었고, 이야기 자체로는 그 저변에 일본의 전래 설화나 고유 풍속이 너무 짙게 깔려 있기 때문에 외국인으로는 체감하기 어려운 점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연작 단편집은 '교고쿠도' 시리즈에서 자주 보였던 미스터리와 관계 없는 부분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인물들의 장광설이 대폭 순화되어 훨씬 편하게 읽을 수 있다. 수록된 7편의 이야기가 독립적 구조로 완결되므로 구성이 단순하고 이야기 전개가 빠른 점도 가독성을 높이는 요인이다. 하지만, 미스터리와 호러가 뒤섞인 기묘한 분위기하며, 사건의 흐름이 작중 인물의 독백만으로 진행되는 특유의 기법을 적절히 구사하는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요괴'이야기라는 점에서 이 소설 역시 '교고쿠 표'임을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첫 번째 에피소드는 여행 중인 한 승려가 소나기를 피해 들어간 허름한 오두막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무료한 시간을 때우기 위해 비 내리는 밤에 어울릴 법한 괴담을 풀어 놓는 것으로 시작한다. 여기까지 읽고서는 설화에서 모티브를 얻은 요괴 이야기라는 기본 컨셉만을 유지한 채 '모모스께'라는 괴담을 수집하는 수수께끼 작가를 중심으로 매 편 각기 다른 인물들을 등장시키는 구성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두 번째 단편에서도 비상한 두뇌의 어행사(승려 차림으로 액막이 부적을 팔고 다니는 떠돌이) '마타이치', 미모의 인형사 '오긴', 수완있는 신탁자 '지헤이' 등 소악당 3총사가 등장하는 것을 보고, 비로소 작가가 이 시리즈를 어떻게 끌고 갈 것인지에 대한 윤곽이 잡혔다.
즉, "산사의 동승, 산골짝 개울에 앉아 팥을 씻고 있는데 동숙하는 중이 앙심을 품고 개울로 밀어 떨어뜨리자 바위에 부딪혀 죽었다. 그 때부터 그 동승의 영혼이 이따금씩 나와 팥을 씻으며 울고 웃는 일이 있게 되었다"는 불가사의한 괴담이 작가의 손을 거치게 되면서 교묘하게 파 놓은 심리적 함정에 빠져서 스스로 과거의 범죄를 밝히지 않을 수 없게 되는 심리 스릴러로 재창조 되는 식이다.
작품 속에 나오는 사건들은 마치 요괴의 짓으로 밖에 볼 수 없을 정도로 괴이하고도 끔찍하다. 그러나, '이 세상에 진정 이상한 일이란 없다'며 논리적으로 사건을 해결해가는 '마타이치'의 말처럼 모든 괴이한 사건의 중심에는 요괴보다도 더 무서운 사악한 인간의 마음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 작품집은 짜임새 있는 구성과 매력적인 캐릭터들의 조합도 좋았지만, 이야기 속에 녹아 있는 인간 본성에 대한 작가의 탐구도 만만치 않다. 곧 출간된다는 후속 시리즈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