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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 태양의 요리사 - 박찬일의 이딸리아 맛보기
박찬일 지음 / 창비 / 2009년 9월
평점 :
이탈리아 요리를 배우기 위해 서른 넷,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유학을 감행한 전직 잡지사 기자는 요리학교 졸업 후 현장 실습의 일터로 남들이 가기를 꺼리는 '씨칠리아'하고도 시골 마을인 '모디까'에 있는 '파또리아 델레 또리'라는 레스토랑을 택한다. 여름 한 철 관광객들이 뿌리는 돈으로 한 해를 먹고 산다는 그 곳에 마침 지은이가 도착한 때가 바로 그 시즌이라 신출내기 요리사는 도착 첫 날부터 밀려드는 엄청난 주문에 시달린다.
대개 레스토랑 주방은 온전히 남자들만의 영역이다. 마치 냄비를 집어 삼키려는 기세로 붉은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있는 화기 위에서 지글지글 끓고 있는 기름보다도 더 뜨거운 남성 호르몬으로 충만한 곳이다. 엄격한 위계질서와 실력과 실력의 충돌, 권력을 향한 암투, 심지어 폭력까지도...
이 책은 1년간 '로베르또'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이탈리아 요리와 씨름했던 지은이가 경험한 요리학교에서의 추억, 씨칠리아에서 일하며 만난 사람들과 그 곳에서 겪은 일상사, 이탈리아와 이탈리아 요리에 대한 이야기 등을 엮었다.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하고 기자로 일했던 지은이의 이력에서 알 수 있듯이 지은이의 글은 프로페셔널하다. 책 전반에 녹아있는 재기발랄한 문체와 자연스러운 유머감각은 책읽기를 쉽게 만들고 집중력을 유지시킨다. 또한, 글은 재미 뿐 아니라 만만찮은 사유의 깊이와 통찰력을 느낄 수 있는 대목도 많다. 단지, 이국의 풍광과 문화에 대한 경험담을 소개하는데 그치지 않고, 소소한 일상에서 우리의 편견과 상식을 전복하거나 곰곰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꺼리들을 발견하여 이를 경쾌한 어법으로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또한 빠뜨리고 넘어가서는 안 되는 부분은 요리에 지은이의 철학이다. 요리사는 단순히 음식을 조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 세상을 올바르게 유지하고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이는 무엇인가 거창한 것을 해야한다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나는 나의 재료로, 가장 전통적인 조리법으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먹는 요리를 만들라"라는 말 속에는 그 진정한 의미가 담겨있다.
그가 요리와 삶의 스승으로 생각하는 씨칠리아의 주방장 '주제뻬 바로네'는 좋은 재료를 직접 자신이 구하지 않고, 그저 전화로 배달만 받는 '미슐랭'에 나오는 스타 요리사를 경멸하고, 멀리서 수입한 고급 재료를 자랑하는 요리사에게 호통을 쳤다. 공장화, 기계화로 생산되는 식재료의 역사를 안타까워하고, 돼지나 닭이 항생제와 호르몬의 늪에서 신음하는 걸 참지 못했다. 아이들이 먹는 음식이 사료가 되고 있는 현실을 분노했으며, 항상 지역 어린이들이 무엇을 먹고 마셔야 하는지 가르치고 연구하느라 머리를 싸맸다. 그건 영양학자나 교육자가 할 수 없는 일이고, 요리사는 아이들의 어머니처럼 먹이는 사람이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이 세상은 속도전과 산업화에 길들여져 이처럼 가장 기초적이고도 중요한 사실을 무시하거나 간과하고 있다. 지은이는 '시장'과 '들판'을 아는 '진짜' 요리사를 꿈꾸고, 이러한 관점에서 '슬로우 푸드', '로컬 푸드', '유기농' 등에 대한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풀어 놓는다.
오랜만에 읽은 유쾌하고도 여운이 남는 산문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