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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기행
후지와라 신야 지음, 김욱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지은이 '후지와라 신야'는 범상치 않은 이력을 가진 사람이다. 고교 졸업 후 도쿄로 와서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도쿄예술대학 회화과에 입학하지만 학교에서 배우는 예술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대학을 중도에 포기한 그는 스물다섯 살이 되던 1969년에 인도로 떠난다. 이후 서른아홉 살까지 인도, 티베트, 중근동, 유럽과 미국 등을 방랑하며 보낸다. 미지의 대륙을 떠돌며 그는 자신의 발길이 닿은 곳에 남긴 자취를 글과 사진으로 기록했다. '인도방랑'을 시작으로 그의 글은 당시 일본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진정한 여행의 가치를 표현한 작가'라는 찬사를 받으며 작가로서 사진작가로서 대단한 명성을 얻는다.
이 책은 1980년대가 저물어 가던 사십대 중반의 어느 해, 약 200일간 미국 대륙을 떠돈 기록이다. 그는 주거가 가능한 자동차인 '모터홈'을 운전하며 로스앤젤레스에서 샌프란시스코, 뉴욕, 플로리다로 갔다가 플로리다에서 다시 남부를 횡단해 로스앤젤레스까지 대략 2만 마일을 달린다. 모터홈 여행을 선택한 이유로 그는 '고속도로의 나라'라고 불리는 미국이란 나라를 자동차 안의 시점에서 바라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술가다운 독특한 시각이다.
"아메리카의 풍경은 그 대부분이 현대의 풍경이다. 광대한 대지는 있지만, 아무 것도 없다. 역사도 없다 …… 무섭게 깨끗한 신흥주택가의 풍경. 대로 맞은편에서 빛나는 대형 주유소의 황색 전등. 도시에 숨은 사람들의 군상. 미국의 거리와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고독 …… 나는 과연 여기서 살 수 있을까"
여행은 한 나라의 전반을 파악하기에는 짧은 시간이지만, 그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는 몇 가지 특성을 포착한다. 그는 여행 중에 마주친 미국인들이 현실에서 유리된 '시뮬레이션'과 '판타지'를 유난히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에 착안하여 코카콜라, 맥도널드, 미키마우스, 팝 아트 등과 같은 미국문화의 대표적인 아이콘도 가상현실이 바탕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나아가 그는 미국이란 나라 자체가 거대한 '모조품'일지도 모른다는 대담한 결론에까지 이른다. 그리고, 코카콜라가 그러했듯이 미국식 자본주의는 '언제나, 어디에서나, 누구나 대량으로 즐길 수 있는 기분 좋은 가상현실'이라는 상품으로 20세기 세계를 석권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가상현실'이라는 미국의 聖性이 청년시절 여행한 인도와 이슬람의 '현실' 또는 '자연'이라는 聖性과 완전히 대조적이라는 사실이 지은이의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다. 인류가 오랜 세월동안 복종해 온 聖性은 가상현실을 주축으로 하는 새로운 聖性에 밀려 나가고, 미국식 쾌감원칙이 동서양의 벽까지 허물어 버린 오늘의 세계를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다. 현대문명에 대한 묵직한 성찰의 힘이 느껴지는 책이다. 황량한 길 위에서 담아 낸 아메리카 대륙의 표층과 고적한 인간의 풍경을 바라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