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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이 진다 ㅣ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5
미야모토 테루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10년 1월
평점 :
절판
옛 노래 중에 '봄 날은 간다'라는 곡이 있다. 나른하게 읊조려도 좋고 처연하게 불러도 맛이 나는 노래이다. '연본홍 치마가 봄 바람에 휘날리더라'로 시작하는 가사는 흘러간 가요풍이지만 '사랑'을 '봄 날'에 비유한 정조가 절묘하다. '파랑이 진다'는 제목을 보았을 때 불현듯 이 노래가 생각이 났다. '파랑'은 '청춘'이고 그 파랑이 진다는 것은 청춘의 나날들이 흘러갔다는 의미로 상상했다.
이 소설은 '료헤이'라는 남자의 대학시절 사 년간의 궤적을 담아 내고 있다. 청춘에게 주어진 특권이 비록 대학생에게만 주어진 것은 아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청춘이라고 하면 대학시절을 연상한다. 자의든 타의든 간에 껍질을 깨고 세상에 나오긴 했지만 아직 성숙에는 이르지 않은 그 시절은 매사가 어설픈 법이다. 부질없는 고민으로 지샌 숱한 밤들이 있을 것이고, 충동적인 열정과 끝이 보이지 않는 무력감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시절이 애틋하게 추억되는 것은 '사랑' 때문이다. 대부분의 청춘은 사랑을 찾고 그것을 손에 쥐었다가 놓쳐 버리기도 한다.
료헤이의 사랑은 '나쓰코'이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는 사랑에 빠진다. '사랑'을 위해 나쓰코를 선택한 것인지 '나쓰코'이기 때문에 사랑에 빠진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료헤이의 감정선은 그녀에게로만 그어진다. 료헤이의 사랑만이 전부는 아니라 '가네코','안자이','구다니','요코','걸리버', 그리고 '나쓰코'의 사랑까지 이 소설에는 다양한 방식의 사랑들이 보인다. 결정적인 순간을 만들지 못하는 사랑, 다른 사람에게 향한 사랑의 뒷 모습을 바라보아야 하는 사랑, 감정을 고백하지 못한 채 가슴 속에 묻어만 두는 사랑, 충동적 열정에 사로잡힌 위험한 사랑, 이 사람 저 사람을 견주는 이기적인 사랑이 그려진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그려지는 사랑은 어느 것이나 사랑의 또 다른 일면인 끈적끈적한 감정의 배설이 보이지 않는다. 너무나 담담하게 그려진 사랑이기 때문에 나쓰코가 료헤이에게 고백한 "나, 다오카씨를 좋아해. 벌써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다오카씨에게 안겼어. 발가벗겨져서"라는 말이 더욱더 가슴 아렸다.
소설의 다른 한 축은 테니스부 활동이다. 입학 첫날 료헤이는 테니스부 창립에 열정을 가진 가네코의 페이스에 말려 얼떨결에 테니스부에 가입한다. 장차 료헤이의 대학생활을 좌우하게 될 테니스와의 만남도 나쓰코와 만남이 그러하듯 이렇게 '우연성'의 지배를 받는다. 인생이라는 것이 기실 하찮은 우연에서 비롯될 수도 있다는 점을 예리하게 보여 준다. 이것은 운동선수에서 가수로 인생의 행로가 바뀌는 '걸리버'나 학업을 중단하고 선배를 따라 사업에 뛰어든 '하야마'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청춘은 지나가 버린 후에야 비로소 그 의미나 가치, 소중함을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는 점이 잔혹하다. 누구도 흘러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기 때문에 청춘이 저물고 난 이후에 '그 시절의 내게 지금과 같은 분별력이나 경험이 있었다면'하는 바램은 부질 없는 회한으로만 남는 법이다. 우리는 그 시절을 우습고도 참담했고 즐겁고도 슬펐으며 불타오르면서도 나른했다고 추억한다. 이 소설에는 이러한 정서가 짙게 깔려 있다.
또 하나, 이 소설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은 몰 사회성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저 마다 다른 고민과 상처로 아파하지만 그것들의 근원은 모조리 개인의 내면에만 향해 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도통 알 수 없는 서툰 사랑을 향한 열정과 좌절, 그리고 현재 테니스에 쏟아 붓는 열정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교차하는 청춘의 내면 풍경이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지만 등장인물들의 내면이 어떻게 사회와 연관을 맺어 나가는지에 대한 진전은 보이지 않는다. 작가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소설 속에서 시대상의 묘사도 전혀 없다시피 하다. 단지, 이 작품이 처음 발표된 시기가 1970년대 말이니 그 무렵의 이야기일 것이라는 짐작은 들지만 이를 모른 채 지금 당대의 이야기라고 하여도 별로 위화감이 들지 않을 정도이다.
이러한 점이 이 소설이 일본에서 세대를 뛰어넘어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청춘소설의 고전이 된 하나의 원동력일 수도 있겠지만 깔끔함과 담백함이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도 든다. 사랑과 운동이라는 불타오를 수 있는 이야기 꺼리를 가지고 있지만, 이 소설에는 사랑을 이루어가는 우여곡절도, 기적처럼 이루어 낸 승리의 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 읽은 후 여운이 오래 남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