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 - The Gorgon's Look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0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0년 2월
평점 :
드디어, '노리즈키 린타로'의 대표작중 한 편을 읽었다. 그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한국과 일본의 추리작가협회가 교류의 일환으로 출간한 단편집을 통해서였다. '두 동강이 난 남과 여'란 제목으로 1999년에 출간된 책에는 일본 추리작가협회가 추천한 11편의 미스터리 단편이 실려 있었다. 당시에는 생소한 이름이었지만 지금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작가들인 '히가시노 게이고', '노나미 아사', '고이케 마리코', '나츠키 시즈코' 등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그 중에서도 그가 쓴 '두 동강이 난 남과 여'가 표제작이었다.
대강의 내용은 호텔 방에서 절단된 여자 상반신에, 남자의 하반신이 붙어 있는 엽기적인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문제의 핵심은 시체의 나머지 몸체는 어디에 있으며, 어떤 방법으로 현장을 벗어났느냐 정도인데 너무 기계적인 트릭이 사용된 탓에 현실성이 떨어진 작품의 수준에 몹시 실망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즈음 '아야츠지 유키히토'의 '관 시리즈'를 읽고 미스터리로서의 재미와 수준에 깜짝 놀라 이른바 '신본격파' 작가군에 대한 관심과 함께 일부 환상도 있었는데, 대표주자라는 작가의 단편이 다른 수록작 보다 떨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작품들은 좀처럼 국내에 소개되지 않아 그 때의 실망감에 말미암아 그는 '기계적인 트릭을 우겨 넣는 설익음'이란 인상으로 남았다.
하지만, 이 소설은 이러한 선입견을 깨끗이 날려 버리는 수준작이었다. 신본격파의 수작들이 그러하듯 정통 미스터리의 스타일을 한껏 살리면서 반전, 트릭, 의외성 등 미스터리의 장르적 공식에도 충실한 작품이다. 작가의 필명과 동명인 탐정이 등장하는 것도 고전적인 느낌을 주어 좋았다. '아야츠지 유키토'나 '아리스가와 아리스'도 마찬가지지만 신본격파 작가들은 어린 시절부터 정말 미스터리를 정말 좋아해온 사람들이라는 느낌이 작품 속에 베여 있어 자연스러운 친근감이 생긴다
살아 있는 몸에 직접 석고를 발라 본뜬 조각을 만드는 '라이프 캐스팅'이라는 기법으로 유명한 조각가가 오랜 공백을 깨고 친딸을 모델로 한 작품을 준비한다. 미술계의 화제가 되고 있는 와중에 조각가는 병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난다. 그런데, 그 조각상의 머리 부분만 잘려서 도난당하는 괴이한 일이 발생하고 조각상의 모델까지 실종되는 사건을 '린타로'가 해결한다는 것이 대략적인 줄거리이다.
이 소설이 뛰어난 이유는 '논리'와 '반전'에 있다. 차근차근 논리적인 소거법에 따라 범인이 좁혀지고 결말에서 '린타로'가 조각상의 머리가 잘린 이유와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부분은 '압권'이란 표현이 아깝지 않다. 정통적인 미스터리 스타일을 고수하기 때문에 '잔 재미'는 덜하지만 이야기 전반을 통해 공정한 논리게임을 극한으로 밀어붙이는 작가의 뚝심은 높이 살만하다. 요즈음 일본 미스터리의 러쉬 속에서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식으로 이 작품도 기대에 비해 다소 실망했다는 독자들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올해 나온 미스터리 중에서 손 꼽히는 추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