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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처에게 바치는 레퀴엠
아카가와 지로 지음, 오근영 옮김 / 살림 / 2010년 7월
평점 :
언제쯤이면 결혼생활이 권태기로 접어드는 것일까? 연애시절 불꽃같은 감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시나브로 사그라져 버리고, 연애관계는 생활관계로 접어들게 된다. 본시 생활이라는 것에는 갈등이 필요적으로 수반되는 법인데, 특히 그것이 고조되는 시기가 있다. 이 고비를 무난히 넘기면 부부로서 함께 해로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중도에 부부의 연이 끊어져 버린다. 그런데, 막상 배우자와 헤어진다는 것은 상당한 마음의 결단이 필요하고 어떤 경우에는 이 마저도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 그럴 때면 차라리 배우자가 이세상에서 조용히 사라져 주기를 바라기도 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네 명의 남자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러한 감정이 스멀스멀 들기 시작한다.
이들은 공동의 필명을 사용하는 작가이다. 전직은 회사원, 기자, 방송작가, 시인으로 다양하지만 공동작업을 통해 작품을 생산한다. 작품 아이디어가 정해지면 각자 배경 묘사를 위한 정보 수집이나 취재작업, 스토리 구성작업, 전체적인 집필작업, 그리고 마지막으로 문장을 다듬는 작업 등 자기의 장기분야를 하나씩 맡아 분업을 하는 식이다. 삼사십대 중반인 네 남자의 공동창작은 비교적 성공적인 궤도에 올라선 상태이지만, 다들 결혼생활에 다소간에 문제가 있다.
첫 번째 사내는 아내에게 꼼짝도 못하는 전형적인 공처가 스타일이다. 돈 관리를 비롯한 가정생활의 온갖 대소사가 모두 아내의 독단에 의해 정해질 만큼 아내의 기세에 눌려 살고 있는 처지이다. 물론 이혼도 아내의 거부로 절대 불가능한 상태이다. 두 번째 사내는 부부관계가 권태기에 접어들긴 했지만 이혼을 생각할 정도까지는 아닌데, 아내보다 훨씬 어린 애인이 생겨 버렸다. 세 번째 사내는 오랜 독신생활을 청산하고 어여쁜 여자를 아내로 맞아 신혼생활을 구가중이지만 나이 어린 아내의 육탄공세에 조금씩 질려가고 있다. 네 번째 사내는 살림에 열심인 참한 여자를 아내로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렇게 문제없는 가정생활이 자신의 시인으로서의 생명을 갉아먹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렇게 막연하게 나마 아내의 부재를 바라는 네 명은 '마누라 죽이기'를 소재로 신작을 구상하면서 이번에는 작업 스타일을 바꾸어 각자 한 편씩 이야기를 만드는 옴니버스 형태를 시도하기로 한다. 평범한 스토리텔링 형식, 인터뷰 형식의 구성, 시나리오 스타일 등 다양한 형식에 각자 자신이 지금 처해있는 처지를 투영한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하는데, 소설로 구상한 이야기와 비슷한 일들이 실제로 발생하기 시작한다.
1976년 등단이후 500편이나 되는 작품을 생산하여 일본에서도 다작 작가로 유명한 '아카가와 지로'가 1980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요즘 한국에서도 인기가 있는 '오쿠다 히데오'의 유머 소설과 비슷한 느낌이 난다. 별다른 묘사없이 스토리텔링이 쭉 이어지므로 책장을 넘기는 속도는 무척 빨랐다. 가독성은 좋지만 밋밋하다는 느낌이다. 유머 소설에 있으면 금상첨화인 페이소스 같은 것도 별로 찾아볼 수 없고, 스토리 전개도 충분히 예상 가능한 범위를 넘어서지는 않는다. 다만, 두 번째 사내의 애인이 이별을 선택하는 과정과 네 번째 사내의 아내가 손에 들어 온 행복을 놓치지 않으려는 모습 정도가 생각이 난다. 어떻게 보면 이 소설의 주인공은 네 사내의 아내들일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