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이호민님의 서재 (이호민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2286161</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 /><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Fri, 10 Apr 2026 23:41:36 +0900</lastBuildDate><image><title>이호민</title><url>http://image.aladdin.co.kr/img/blog2/manage/profileimg.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02286161</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이호민</description></image><item><author>이호민</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2286161/17202737</link><pubDate>Tue, 07 Apr 2026 20:2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2286161/1720273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3708381&TPaperId=1720273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1459/51/coveroff/s73203555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3708381&TPaperId=1720273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예감은 틀리지 않는다</a><br/>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03월<br/></td></tr></table><br/>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br/><br/>누군가 최근에 읽은 소설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고르고 싶다. 그 덕분에 참 많이 웃고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에 공명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여러 층위에서 의미를 갖는다. 토니 웹스터라는 한 청년의 성장기 소설이고, 우리가 사는 시간에 대한 이야기이며, 인생의 의미를 찾아가는 진중한 철학서이기도 하다. 서사의 전개는 토니의 기억을 좇는 방식을 취하고 있어 화자의 이야기를 바로 곁에서 듣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그의 은밀한 사생활이나, 불행한 연애사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아득한 시간의 향수마저 느끼게 된다.<br/><br/>반스는 우리의 인생을 관찰하며, '시간과 기억'이라는 렌즈를 사용한다. 토니의 기억으로 시작하는 도입부 역시 이를 보여준다.  <br/><br/>1.반들반들한 손목 안쪽.<br/><br/>2.뜨거운 프라이팬이 젖은 싱크대로 비웃듯이 던져지면서 솟아오르는 증기.<br/><br/>3.방울방울 떨어져 수챗구멍 속을 빙글빙글 돌다가, 층고 높은 집의 기다란 홈통 전체를 타고 흘러내려가는 정액.<br/><br/>4.터무니없게도 상류로 치닫는 강물, 그 물상과 너울을 좇는 여섯 개의 회중전등.<br/><br/>5.또 다른 강, 거센 바람이 수면에 물살을 일으켜 물길을 읽을 수 없는 드넓은 잿빛 강.<br/><br/>6.잠긴 문 뒤의, 오래전에 차갑게 식은 목욕물.<br/><br/><br/>무작위로 떠오른 토니의 기억은 그의 삶을 구성하는 파편이다. 이처럼 토니의 삶은 수많은 기억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리는 그 기억들의 총합을 '토니의 삶'으로 규정한다. 이를 시간에 대입하면, 토니의 기억이 점유하는 시간의 총합은 그가 살아온 시간과 같으므로, 이 역시 '토니의 삶'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br/><br/>다시 말해, 기억은 시간을 인식하는 하나의 방식이며, 인간은 그 기억의 축적을 통해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br/><br/>우리는, <br/>아니 <br/>적어도 나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br/><br/><br/>그러나 이 지점에서 소설은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과연 우리는 토니의 기억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그리고 '과연 기억의 총합을 한 인간의 삶으로 환원할 수 있을까?'<br/><br/><br/>반스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우리의 사유를 유도한다. <br/><br/><br/>"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다."(33쪽)<br/><br/><br/>이 말인즉슨, 기억이란 그 진실을 완전히 증명할 수 없는 상태에서 형성되는 일종의 확신에 가깝다는 뜻이다. 즉, 기억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는 저장소라기보다, 불완전한 정보 위에서 구성되는 해석의 산물일 가능성이 크다. 반스는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우리가 시간을 인식하는 방식'을 지적한다. <br/><br/>'기억에서의 시간'은 소위 주관적인 시간으로, 가령 도입부에서 언급된 여섯 가지의 경우처럼 토니가 사적으로 맺은 관계 속에서만 측정된다. 이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객관적인 시간(규칙적으로 흘러가는 시간)과 구분되며, '감정'이라는 요소가 첨가되어 있다. 이때의 시간은 토니의 감정 상태에 따라 긴 시간이 하나의 장면으로 압축되기도 하고, 찰나의 순간이 길게 늘어지기도 하는 형태를 띤다. 게다가 때로는 그 시간이 기억에서 통째로 사라지기도 한다. <br/><br/>요컨대, 인간이 살아온 삶은 실제로 흘러간 물리적 시간의 총량이 아니라, 기억 속에서 재구성된 주관적 시간에 가깝다는 말이다. 같은 의미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확신'은 실제 사건들이 품은 '진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들이 남긴 '인상(기억)'에 있다고 하겠다. <br/><br/>이러한 시간의 경험 방식은 젊음과 늙음의 차이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경험과 지식이 부족한 젊은이는 시간이 끝없이 열려 있다고 느낀다. 아직 경험하지 못한 가능성이 많고 미래가 충분히 길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인간은 자신이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삶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에 대해 비교적 강한 확신을 품는 경향이 있다. <br/><br/>반면, 중년 이후가 되면 경험과 지식은 늘어나지만 오히려 확신은 줄어든다. 삶이 단순한 인과관계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진리를 점차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삶이 늘 목적한대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 자신의 선택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그래서 늙음은 확신이 강해지는 시기가 아니라 오히려 다양한 가능성을 인정하게 되는 시기이며, 필연적으로 소심함에 가까운 신중함을 발휘하는 경향성을 드러낸다. <br/><br/>사실 이것은 인생이 지닌 본질적인 아이러니이자 '시간의 역설'이라고 할 수 있다. 지식과 경험이 부족한 청춘이 자기확신에 들어차 있는데 반해, 중년 이후의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수많은 경험과 지식을 겸비하고도 오히려 신중한 태도를 갖는다는 사실은 두 경우 모두 비효율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br/><br/><br/>반스는 이러한 역설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br/><br/>"시간이란...... 처음에는 멍석을 깔아줬다가 다음 순간 우리의 무릎을 꺾는다. 자신이 성숙했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그저 무탈했을 뿐이었다. 자신이 책임감 있다고 느꼈을 때 우리는 다만 비겁했을 뿐이었다. 우리가 현실주의라 칭한 것은 결국 삶에 맞서기보다는 회피하는 법에 지나지 않았다. 시간이란......우리에게 넉넉한 시간이 주어지면, 결국 최대한의 든든한 지원을 받았던 우리의 결정은 갈피를 못 잡게 되고, 확실했던 것들은 종잡을 수 없어지고 만다."(158쪽)<br/><br/><br/>결국 시간의 변덕 속에서 인간은 모두 예외없이 '젊지 않음'의 상태로 수렴하면서 일종의 평균값을 찾아가게 된다. 이것을 '성숙'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테고, 혹은 '체념'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좀 더 주체적인 표현으로 '세상의 이치를 터득했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이것은 또 다른 측면에서 삶의 우연성과 임의성을 인정하는 일이며, 수많은 가능성을 수용하는 것이고, 현재의 후회와 깨달음이 결코 과거를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br/><br/>토니 웹스터가 살아온 시간의 기록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낱낱히 증명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기억을 통해 과거를 정확히 기억하며, 이해한다고 믿어 왔다. 하지만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우리는 점차 그의 기억이 얼마나 불완전한지를 확인하게 된다. 특히 에이드리언의 죽음 이후 남겨진 편지와 기록들은 토니의 기억을 완전히 해체하고, 그가 오랫동안 확신해 왔던 삶의 이야기가 뒤집히는 순간을 드러낸다. 그것은 단순한 인식의 변화라기보다 삶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가 바뀌는 것에 가깝다. 이로써 우리는 기억이 과거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감정과 해석이 덧붙여진 하나의 이야기일 뿐이라는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토니의 삶은 하나의 허구적 이야기이며, 우리 역시 그러한 본능적 오류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존재인지도 모른다. <br/><br/>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한 개인의 삶이 시간과의 관계 속에서 기억을 축적해 나가는 과정을 조명한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인간이 삶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이자 존재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그렇다면 회고란 기억이 남긴 시간의 흔적을 돌아보는 일일 텐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회고할 대상이 지나온 세월 만큼 변한다는 사실이다. 더 정확히는 대상 자체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기억이 변화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겪는 수많은 경험은 있는 그대로 보존되지 않기 때문이다. 기억은 늘 시간이 흐르면서 지워지고 변형되며, 가감되거나 전혀 다른 의미로 재구성된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기억의 축적을 우리는 '나의 삶'이라고 부른다. 오늘도 우리의 기억은 마치 진화하는 유기체처럼 끊임없는 변화와 재생의 굴레 속에 존재한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에도 지나간 시간에 대한 의미와 기억은 새롭게 갱신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br/><br/>이처럼 고정된 실체가 없는 기억은 인간을 겸손하게 만든다. 누구도 자신의 삶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확신할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토니는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기억을 철썩같이 믿고 의심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반면, 그는 진실을 밝혀줄 증거를 통해 자신의 과거를 명징하게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br/><br/>.............<br/><br/>그렇다면, <br/>우리는 인생에 대해 과연 무엇을 확신할 수 있을까.<br/>확신이라 부르는 모든 것들이 결국 기억이 만들어낸 이야기일 뿐이라면 말이다.<br/><br/><br/><br/>#예감은틀리지않는다 #줄리언반스 #다산책방]]></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1459/51/cover150/s73203555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14595162</link></image></item><item><author>이호민</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2286161/17202736</link><pubDate>Tue, 07 Apr 2026 20:2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2286161/1720273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92933484&TPaperId=1720273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4625/43/coveroff/k29293348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92933484&TPaperId=1720273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a><br/>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09월<br/></td></tr></table><br/>줄리언 반스의 [우연은 비켜가지 않는다]<br/><br/>Q : 사디스트의 정의는?<br/>A : 마조히스트에게 상냥한 사람.<br/><br/>(142쪽)<br/><br/>우리는 세계를 이해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 믿음을 조금 더 냉정하게 들여다보면, 그것은 이해라기보다 오히려 하나의 해석에 가깝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줄리언 반스의 [우연은 비켜가지 않는다]는 바로 그 지점, 즉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탐구한다. 특히 기독교 역사와 엘리자베스 핀치라는 인물 사이에 형성된 평행 구도를 통해 인간이 어떻게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믿으며, 또 재구성하는지를 섬세하게 그려낸다. <br/><br/>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독자에게 흥미로운 서사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 인간 정신의 깊은 층위를 시간과 기억, 그리고 해석이라는 다층적인 렌즈로 들여다보는 일련의 탐구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탐색의 끝에서 우리는 결국 '끝내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 즉 '인간'을 마주하게 된다.  <br/><br/>우리는 너무 쉽게 타인을 이해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이해는 언제나 개인의 특정한 조건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누군가는 한 사람을 부모로, 누군가는 친구로, 누군가는 연인으로, 또 다른 누군가는 적으로 기억한다. 각자의 위치와 감정, 경험에 따라 동일한 인물을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재구성한다. 심지어 이 해석은 당사자가 알고 있는 자신의 모습과도 어긋나 있다. <br/><br/>그럼에도 우리는 이 해석의 파편들을 하나로 묶어 일관된 인물을 형상화하고자 한다. 그것이 우리가 믿는 '이해'의 방식이다. 이는 매우 본능적인 것으로 복잡하고 불확정적인 대상을 단순화하여 매끄럽게 정리하려는 욕구에서 기인하며, 인간에게 있어 그러한 '이해'는 좀 더 안정적이고 통제 가능한 세계처럼 인식되곤 한다.<br/><br/>그러나 기실 그 '안정(安定)'은 하나의 편의적인 수단일 뿐, 애초에 인간은 하나의 서사로 정리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타인을 이해한다고 믿는 것은 결국 드러난 것의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끝내 드러나지 않는 내면의 은밀한 영역까지 고려한다면, 인간은 결코 타인의 이해로 완전히 환원될 수 없는 존재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br/><br/>따라서 섣부른 해석은 위험하다. 물론 해석이 이해의 출발점이라는 측면에서 불가피하지만, 필연적으로 단순화를 동반한다는 데서 그 위험성을 지닌다. 우리는 복잡한 존재를 몇 개의 특징으로 요약하고 그것을 전체라고 믿으려는 경향이 있다. 엘리자베스 핀치가 “어떤 인물이 형용사 세 개로 줄어들어 깔끔하게 정리되는 게 보이면 그런 묘사는 늘 불신하세요."(23쪽)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해하려는 욕망은 결국 대상의 복잡성을 정리 가능한 형태로 축소시킨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이해하려는 과도한 욕구가 오히려 대상을 심각하게 왜곡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br/><br/>이러한 구조는 개인을 넘어 역사 속에서도 반복된다.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것은 객관적 사실의 집합이 아니라, 특정한 해석이 선택되고 확산되며 고착된 하나의 의견에 불과하다. 즉, 역사라는 집단기억 역시 누군가의 시선과 의도가 개입된 산물에 가깝다는 말이다. <br/><br/>문제는 이 해석이 널리 공유되는 순간 하나의 진실처럼 작동한다는 데 있다. 이때 하나의 해석은 절대적 기준이 되며, 다른 가능성들은 철저히 배제되고, 결국 이 배제는 폭력으로 이어진다. 실제 역사 속에서 반복되어 온 비극의 대부분이 바로 이 지점에서 비롯되었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해석은 단순한 인식의 도구를 넘어, 현실을 구성하고 규정하는 힘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br/><br/>다시 인간의 이해로 돌아가보자.<br/>인간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쓰디쓴 실패로 귀결되어 왔다. 인간은 외부로 드러나는 영역에서 살아가는 동시에 영원히 드러나지 않는 내면의 은밀함에도 포함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밖으로 향하는 인위적인 모습과 내면에 감춰진 은밀한 모습이 공존한다는 점에서 인간은 언제나 표현되지 않은 감정과 생각들을 품은 채 살아간다. 외부에서 볼 때, 이 은밀함은 결핍처럼 간주되기도 하지만 바로 이 결핍이야말로 인간을 좀 더 풍요롭고 인간답게 만드는 조건이 된다. <br/><br/>모든 것이 드러나고 완전히 이해되는 순간, 인간은 더 이상 변화할 수 없는 존재로 고정되는 반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남아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은 계속해서 해석되고 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전자는 생동하지 않는 상태, 곧 죽음에 가깝고, 후자는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상태, 즉 삶에 가깝다고 해석할 수 있겠다. <br/><br/>우리가 그토록 어려워 하는 '관계' 역시 이 은밀함 위에서 성립한다. 우리는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고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관계는 바로 그 불가능성 위에서 지속된다는 역설을 지닌다. 그것은 관계의 지속이 타인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아니라, 타인과의 일정한 거리, 서로의 은밀함을 침범하지 않는 경계, 그리고 완전히 해석되지 않은 상태를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비롯됨을 의미한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가 모든 것을 이해했다고 믿는 순간 오히려 관계는 무너져내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br/><br/>반스는 진실한 사랑이야말로 이러한 구조를 드러내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이며, 그렇기 때문에 가장 인위적인 감정이라고 역설한다. <br/><br/>"사랑은 늘 본능적인 것과 이론적인 것의 혼합이에요. 물론 우리는 이론적인 건 본능적인 것만큼 인식하지 못하죠. 그게 역사와 친족관계에 너무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하지만 그것 때문에 사랑은 본질적으로 인위적인 거예요.(....) 그리고 우리가 로맨틱한 사랑이라고 부르는 건 가장 인위적인 거예요. 그래서 가장 높은 형태고, 또 가장 파괴적인 형태죠." (270쪽)<br/><br/>이것은 사랑을 낮추기 위한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얼마나 높은 형태의 인간적 행위인지를 드러낸다. 사랑은 본능에서 시작되지만, 지속되는 순간부터 선택과 조율의 영역으로 이동한다. 우리는 상대를 이해하려 하고, 설득하려 하며, 때로는 물러서고, 다시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 노력한다. 이 모든 과정은 자연스럽다기보다 다분히 의도된 행위이며, 바로 그 인위성이 사랑을 지속하는 원동력이 된다. 반대로 만약 인간에게 이러한 인위적 조율 능력이 없다면, 본능은 관계를 유지하기보다 그것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더 크다.<br/><br/>문득 벼랑 끝에 섰던 과거의 개인적인 경험이 떠오른다. 무너져내릴 듯 흔들렸던 순간, 타인에게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를 스스로에게 되물었던 먹먹했던 시간. 그만큼 나는 내 사랑에 떳떳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 질문에 끝까지 매달릴 용기조차 없었다. 어떤 지점에서는 멈추고 싶었고, 더 이상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감정이 앞섰다. <br/>......<br/>그러나 그토록 끓어 넘쳤던 시간을 되돌아보니, 내가 가졌던 두려움이야말로 그 소중한 관계의 무게를 실감케 하는 필연적인 감정임을 깨닫게 되었다. 어쩌면 진실한 사랑의 지속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끝까지 해석하고 조목조목 짜맞추는 대신, 오히려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 상태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태도가 더 절실했던 것이다. 결국 관계의 핵심은 이해의 완성이 아니라, 해석을 멈추는 용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br/><br/>같은 맥락에서 반스가 작품 속에서 자주 제시했던 '대안의 역사'를 생각해 보는 것도 좋겠다. 우리는 지나간 선택을 돌아보며 ‘만약~했더라면’의 가정을 자주 떠올린다. 그것의 정체는 흔히 잘못된 선택에 대한 감정으로 오인되곤 하는 '후회'다. 하지만 그것은 과거에 선택되지 않은 가능성을 인식하는 하나의 방식이며, 우리가 실제로 살아온 삶에 다른 무게를 부여하는 감춰진 부분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선택 이면에 존재했던 수많은 가능성을 이 후회의 감정을 통해 비로소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후회는 실패를 증명하는 부정적 감정이 아니라 더 나은 삶을 위해 경로를 수정하고 조정할 때 필요한 핵심적인 지표에 가깝다. 엘리자베스 핀치 역시 "성공에 대한 자족과 마찬가지로 실패에 대한 자족도 있을 수 있다."(94쪽)고 말하지 않았던가.<br/><br/>결국 삶의 의미는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와 맺는 태도 속에서 형성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요컨대 삶은 단순히 의지대로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조건에서 제한된 선택을 통해 사후적 의미를 축적해 나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br/><br/>흥미로운 것은 줄리언 반스가 제시한 시간과 기억, 그리고 해석에 대한 이 모든 사유가 결국 하나의 질문, 즉 "과연 인간의 자유와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로 수렴되고 있다는 것이다. <br/><br/>이것은 [우연은 비켜가지 않는다]가 근간하고 있는 스토아철학의 핵심으로 우리가 인생에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일과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일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하며,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일은 정녕 어쩔 도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br/><br/>따라서 인간으로서 추구하는 주체성과 자율성 역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것에서 해방되는 것으로부터 비로소 유효하며, 이것이 곧 나의 자유와 행복을 얻는 유일한 방법임을 깨우쳐 준다. 다시 말해,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판단과 해석뿐이라는 통찰, 결국 인간의 자유와 행복은 외부를 바꾸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가르침을 주려는 것이다. <br/><br/>종합하면 삶은 어떤 의미를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해석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삶의 형식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형성된다. 하나의 절대적 기준에 따라 단일한 의미로 수렴되는 삶도, 다양한 가능성이 공존하는 열린 구조의 삶도 모두 스스로가 만든 해석의 결과다. 우리는 세계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그 세계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의미를 부여할 것인지는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br/><br/>그런 의미에서 인간이란 끊임없이 해석하는 존재이며, 그 불완전한 해석의 토대 위에서 조금씩 더 자유로워지고, 조금씩 더 인간다워지고 있다고 생각해 본다. <br/><br/><br/><br/>#줄리언반스 #우연은비켜가지않는다 #다산책방]]></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4625/43/cover150/k29293348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46254386</link></image></item><item><author>이호민</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실어증 환자_소통의 붕괴 - [실어증 환자]</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2286161/17135691</link><pubDate>Sat, 07 Mar 2026 14:2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2286161/1713569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82033161&TPaperId=1713569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7712/7/coveroff/k08203316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82033161&TPaperId=1713569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실어증 환자</a><br/>계영수 지음 / 미다스북스 / 2025년 11월<br/></td></tr></table><br/>계영수 작가의 [실어증 환자]<br/><br/>계영수 작가는 서문에서 [실어증 환자]가 1980년대 민주화 혁명이 남긴 미완의 과제를 이민 가족의 서사로 풀어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나는 소설 속 인물들의 모습을 비단 특정 시대의 산물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지 의문을 품게 되었다. 시대와 국경을 넘어 욕망을 좇는 인간의 민낯은 역사 속에서 이미 익숙하게 반복되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가가 20세기 말에서 21세기 초라는 특정 기간을 소설의 배경으로 삼은 이유는, 그 시대가 보여준 극단적인 사회적 쏠림 현상이 인간의 욕망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급격한 정치적 변화와 경제적 성장, 그리고 그 과정에서 벌어진 권력과 부의 격차는 사람들 사이에서 삶의 방식과 가치의 차이를 크게 벌려 놓았다. 이러한 차이는 결국 서로의 세계를 이해하려는 최소한의 언어마저 붕괴시키며 인간 사이의 소통을 무너뜨렸다. <br/><br/>여기서 작품의 제목인 ‘실어증’은 단순한 의학적 해석을 넘어선다. 의학에서의 실어증이 표현 능력의 상실을 의미한다면, 소설에서의 실어증은 상대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지 못하는 하나의 사회적 상태를 가리킨다. 계영수 작가는 이렇게 허공을 떠도는 목소리들에 주목한다. 그리고 무엇이, 왜 그들의 목소리를 지워버렸는지를 탐구한다. <br/><br/>인간은 각자 고유한 삶의 자리에서 '나'라는 세계를 살아간다. 즉,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은 언제나 특정한 환경과 관계 속에서 형성되며, 그 경험은 개인의 사고와 행동, 그리고 언어의 영역에서 일정한 패턴을 갖는다. 그리고 이러한 패턴은 관계 속에서 한 사람의 입장이 되고, 입장은 개인의 일상으로 굳어진다. 저자는 이처럼 개인이 안정된 삶 속에서 마땅히 누려야 한다고 느끼는 이것을  '일상성'이라고 규정했는데, 문제는 이 일상성이 언제나 균형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많은 경우 그것은 오히려 특정한 쏠림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상태에 가깝다. <br/><br/>다시 말해,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온 방식과 가치를 보편적인 것이라고 믿고, 그것을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기본적인 조건으로 인식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그 질서가 침범받는 순간 그것은 단순한 의견 차이가 아니라 생존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된다. 이때, 타인의 생각은 더 이상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경계 대상으로 바뀌며, 소통은 단지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한 도구로 전락한다. <br/><br/>강장군(제너럴 캉)의 삶은 바로 이러한 일상성의 단면을 보여준다. 그에게 자신의 방식은 장시간 축적해 온 안정된 질서이지만, 그것은 가족 구성원의 삶을 끊임없이 침범하고 통제하며, 관계를 무너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에게는 합리적인 선택이 역설적으로 다른 이들에게 소통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었기 때문이다.<br/><br/>여기서 작품의 제목인 실어증은 하나의 은유로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사람들은 여전히 말을 하고 있지만 서로의 말을 듣지 않는다. 혹은 듣고는 있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br/><br/>'말하지만 듣지 않는 상태, 듣지만 이해하려 하지 않는 상태.'<br/><br/>소설 속에 등장하는 회사와 노조, 독재 정권과 민중, 가족 간에 이어지는 침묵의 관계는 모두 이러한 '실어증'의 상태에 놓여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근원적 명제와 정확히 배치된다. 즉, 우리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타인의 반응과 시선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이해한다. 그러나 소통이 끊어진 세계에서 타인은 더 이상 나를 비추는 존재가 되지 못하고, 개인은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상실한다. 같은 의미에서 강장군이 마지막까지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은 이 단절의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br/><br/>그러나 이 소설이 단지 단절의 세계만을 보여주려는 것은 아니다. 작품 속에는 여전히 끊어진 관계를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남아 있다. 그 중심에는 바로 강진희가 있다. 강장군이 자신의 생각을 절대적 기준으로 여기며 타인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인물이라면, 강진희는 관계를 잇는 존재로 등장한다. 그녀는 서로 다른 입장 사이를 오가며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단절된 관계를 다시 연결하려 노력한다. 이러한 모습은 강진희가 단순히 캐릭터를 넘어 소통의 가능성과 필요성을 부각시키는 상징적 인물임을 드러낸다. 다시 말해, 저자는 인간에게 소통이란 삶의 방식이자 행복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강진희의 삶을 통해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김상만이 평택 트리오를 만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되는 순간이나, 서진애가 고립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누군가에게 연락을 시도하는 장면 역시 인간이 타인을 통해 비로서 자신을 발견하는 역설적 존재임을 드러낸다. <br/><br/>인간은 홀로 세계를 완성할 수 없다. 우리는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고 각자의 입장을 마주하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이러한 상호작용은 단순한 관계의 생성을 넘어 하나의 집단적 사고를 형성한다. 즉,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집단을 만들고, 그 집단은 자신들만의 가치와 세계관을 공유한다. 우리가 흔히 집단지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러한 과정 속에서 생겨난다. 개인과 개인 사이의 소통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것은 단순한 의견 교환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사고 흐름을 만들어가는 출발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br/><br/>물론 서로 다른 입장은 언제나 충돌한다. 다양한 가치와 이해관계가 얽힌 사회는 본질적으로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충돌은 때로 예측할 수 없는 갈등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동시에 그 충돌은 새로운 사고가 탄생하는 토양이 되기도 한다. 서로 다른 생각들이 부딪히고 조정되는 과정 속에서 사회는 또 다른 균형점을 찾아가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역시 이러한 끊임없는 상호작용 속에서 유지되고 발전해 왔다. 다시 말해, 안정된 사회는 구성원의 입장이 충돌하는 순간 하나의 복잡한 흐름 속으로 빨려 들어가지만 종국에는 그 속에서 새로운 시대를 이끄는 또 하나의 집단지성이 탄생한다.<br/><br/>이러한 관점에서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갈등은 단순한 개인적 비극이 아니라 서로 다른 세계가 충돌하는 과정처럼 보인다. 강장군의 삶이 하나의 완결된 질서처럼 보였던 이유는 그가 오랫동안 자신의 입장 안에서 세계를 이해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질서는 다른 인물들에게 전혀 다른 의미로 경험된다. 결국 가족과 사회 속에서 이어지는 갈등은 서로 다른 질서가 충돌하는 순간 발생하는 균열이며, 그 균열 속에서 인물들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틈을 발견한다. 강진희가 보여주는 소통의 태도 역시 바로 그 지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그녀는 결핍을 소통으로 채워나가려 하며, 오히려 단절된 관계 속에서 행복의 열쇠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즉, 관계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언제든 소통을 통해 회복 가능한 것임을 그녀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br/><br/>계영수 작가의 [실어증 환자]는 두 이민자 가족의 서사를 통해 소통이 부재하는 사회가 드러내는 비극적 단면을 조명한다. 저자는 사람들이 각자의 일상성에 갇혀 서로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 상태를 ‘실어증'으로 은유한다. 이는 말은 존재하지만 그것이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언어는 오가지만 의미는 서로에게 닿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br/><br/>그러나 소통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타인의 말을 끝까지 경청하려는 자세, 서로 다른 입장을 이해하려는 노력, 그리고 그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려는 태도를 요구한다. 이해와 배려, 존중과 경청의 자세가 부재할 때 언어는 쉽게 단절의 도구로 전락한다. 하지만 남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려는 성숙한 태도가 마음 속에 자리 잡는 순간 언어는 서로 다른 세계를 이어 주는 다리가 된다. 즉, 소통은 인간이 더 나은 삶을 모색하고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태도가 된다. <br/><br/>인류의 역사 또한 이러한 소통의 과정 속에서 조금씩 확장되어 왔다. 서로 다른 생각과 경험을 지닌 사람들이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 가며 새로운 질서와 가치를 만들어 왔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통은 단지 개인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기술이 아니라, 인간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힘이라고 할 수 있다.<br/><br/>결국 [실어증 환자]는 우리에게 묻는다. <br/><br/>"귀담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br/><br/><br/>#실어증환자 #계영수 #미다스북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7712/7/cover150/k08203316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77120735</link></image></item><item><author>이호민</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포식자들의 시간(feat. 호모 데우스) - [포식자들의 시간]</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2286161/17105550</link><pubDate>Sat, 21 Feb 2026 21:1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2286161/1710555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476012&TPaperId=1710555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79/47/coveroff/8932476012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476012&TPaperId=1710555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포식자들의 시간</a><br/>줄리아노 다 엠폴리 지음, 이세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6년 02월<br/></td></tr></table><br/>줄리아노 다 엠폴리의 [포식자들의 시간]<br/><br/><br/>"현재의 기술혁명은 정치 과정보다 빠르게 움직이면서 의원들과 유권자들의 통제를 벗어나고 있다."<br/><br/>(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 2017출간作, 512쪽)<br/><br/><br/>2017년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가 한국에 출간되었을 당시, 이 문장은 단지 미래에 대한 경고에 불과했다. 하지만 2026년 현재 그것은 하나의 '사실에 대한 진술'이며, 하나의 '시대 선언'이 되었다. <br/><br/>근대 이후 인간은 정치가 권력을 통제한다고 믿어왔다. 선거를 통해 대표를 선출하고 법을 통해 권력을 제한하며, 제도를 통해 사회를 운영한다는 믿음. 그것이 민주주의의 근본 전제였다. 그러나 하라리의 이 문장은 그 전제가 더 이상 자명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권력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것이 발생하고 작동하는 중심이 정치에서 기술로 이동하고 있기 때문이다.<br/><br/>줄리아노 다 엠폴리의 [포식자들의 시간]은 바로 이 이동의 순간을 포착한다. 그는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등장하고 있는 새로운 권력자들, 즉 ‘포식자’라 불리는 인간 유형을 통해 우리가 이미 하나의 새로운 권력 질서 속으로 진입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질서는 기존의 법과 정치가 충분히 이해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영역, 말하자면 하나의 ‘무법지대’ 위에서 형성되고 있다.<br/><br/>이 무법지대는 법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 아니라, 법이 아직 도달하지 못한 공간으로 포식자들의 주 활동무대가 된다. 그곳에서 알고리즘은 이념과 인종을 초월하며, 데이터는 국경을 넘어 흐르고, 의사결정은 인간 이해의 범주 밖에서 이루어진다. 자유민주주의 정치가 여전히 토론과 절차, 합의와 타협을 통해 움직이는 동안 알고리즘은 침묵 속에서 빠르게 작동한다. 이때 기계와 인간 사이에 발생하는 시간의 간극, 즉 기술과 정치 사이의 비대칭이 바로 새로운 권력이 탄생하는 토양이 된다.<br/><br/>엠폴리는 이 새로운 권력을 행사하는 자들을 ‘포식자’라고 지칭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기술을 발명한 주체가 아니라 기술이 창출한 '권력의 작동방식'을 누구보다 빠르게 이해한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일론 머스크, 마크 저커버그를 비롯한 기술 창시자들은 단순한 기업가가 아니라 새로운 권력 구조의 설계자들이다. 그들의 권력은 전통적인 의미의 군대나 영토에 기반하지 않는다. 그것은 데이터, 알고리즘, 그리고 예측 능력에 기반한다. 그들은 인간의 행동을 강제하는 대신 행동을 예측하고, 그 예측을 통해 행동 이전에 존재하는 선택의 구조를 구축한다. <br/><br/>한편 이러한 변화는 포식자들로 하여금 기존의 정치 질서에 도전하도록 만든다. 그들에게 정치의 느린 속도는 신중함이 아닌 무력함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작동구조는 본질적으로 느릴 수밖에 없다. 그것은 합의를 형성하고 권력을 견제하며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과정 위에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포식자들이 활동하는 세계에서 권력은 더 이상 속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알고리즘은 토론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으며, 기다리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계산하고 그 결과를 즉각 실행에 옮긴다. 다시 말해, 정치가 여전히 권력을 행사한다고 믿는 동안 권력은 이미 다른 장소에서 다른 차원의 방식과 속도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br/><br/>이 간극 속에서 또 다른 유형의 권력자가 등장한다. 도널드 트럼프, 나이브 부켈레, 자이르 보우소나르, 하비에르 밀레이와 같은 인물들이다. 엠폴리는 그들을 르네상스 시대의 권력자들에 빗대어 ‘보르자형 인간’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질서를 유지하는 데 관심이 없고, 오히려 질서를 파괴하며 그 과정 속에서 새로운 권력을 창출하는 데 집요한 관심을 보인다. 게다가 그들은 혼돈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혼돈은 언제나 구질서와 신질서가 만나는 교차점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br/><br/>이 '보르자형 인간'들은 AI 포식자들과 깊이 닮아 있다. 그들은 속도를 신뢰하고, 효과를 중시하며, 기존의 규범과 절차를 장애물로 간주한다. 그들은 진실이 아니라 영향력을 추구하고, 윤리적 정당성이 아니라 결과를 통해 자신을 정당화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기술 권력과 결합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이로써 기술은 그들에게 전례 없는 정밀성과 수단을 제공하고, 그들은 기술에게 정치적 방향성과 목적을 제공한다. 이 결합 속에서 그들은 혼돈을 조장하는 한편 그 혼돈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사로 인정받기를 희망한다. <br/><br/>이 지점에서 권력의 본질은 근본적으로 변화한다. 과거 권력은 힘에 기반했다. 군대와 경찰, 법과 제도는 권력을 물리적으로 행사하는 수단이었다. 그러나 알고리즘 권력은 물리적 강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것은 인간의 행동을 직접 통제하는 방식이 아니라 행동 이전에 선행되는 선택에 관여한다. 따라서 인간은 여전히 스스로 선택한다고 믿고 있지만, 그 선택은 이미 구조화된 가능성 중 하나일 뿐이라는 명백한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 이 순간 권력은 가시권에서 벗어나 자취를 감춘다. 알고리즘은 철저히 블랙박스 속에서만 작동하므로 극소수의 전문가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작동방식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br/><br/>이처럼 이해할 수 없는 권력은 비판할 수 없고, 비판할 수 없는 권력은 점점 더 신뢰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즉, 권력은 더 이상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믿어야 할 대상으로 승화한다. 이때 우리의 지식은 더이상 판단의 근거가 아니라 신념의 근거로 대체되며, 오로지 절대적 믿음만이 판단의 근거로 작용한다. <br/><br/>엠폴리는 이러한 변화가 궁극적으로 인간의 의사결정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암시한다. 어느 시점이 되면 인간이 AI의 판단과 다른 결정을 내릴 경우, 오히려 AI에게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해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고 경고한다. 즉, 인간의 직관과 경험이 더 이상 최종 판단의 기준이 되지 않는 세계가 도래할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그리고 어쩌면 그 세계는 인간의 지식을 권위가 아니라 오류 가능성으로 치부할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br/><br/>이러한 세계는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 [꿈을 빌려 드립니다]를 떠올리게 한다. 이 소설의 여주인공 프라우 프라다는 타인의 꿈을 대신 꾸어주고 해석하는 능력을 통해 점점 더 큰 권력을 갖게 된다. 처음에는 조언자로서 하루의 운세를 점치는 역할을 맡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해석은 단순한 조언이 아니라 선택의 절대적 기준이 된다. 그에 따라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의 생각을 신뢰하지 않고 그녀가 대신 꾸어준 꿈을 통해 자신의 삶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순간 그들의 삶은 조용히 프라우 프라다에게 종속되고 만다는 줄거리다. <br/><br/>이 소설에서 ‘꿈을 대신 꾸어 달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호기심 충족의 문제가 아니라 주권의 이전을 의미한다. 즉,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타인의 해석에 의존하는 순간, 인간의 삶은 주인 없는 빈집과 같아지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상실되는 것이 단순한 정보의 부재가 아니라, 자신의 가능성을 스스로 규정할 권리 그 자체라는 점이다. 이처럼 자신의 미래에 대한 해석 권한을 외부에 위임하는 행위는 오늘날 알고리즘이 인간의 결정을 대신하는 세계와 정확히 맞닿아 있다.<br/><br/>그렇다면, <br/><br/>"우리는 여전히 선택하는 존재일까?"<br/><br/>아니면,<br/><br/>"이미 제시된 선택지를 승인하는 존재에 불과한가?"<br/><br/>엠폴리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대신하는 것처럼 보인다.<br/><br/>"실리콘밸리의 엔지니어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하는 게 아니라 인간 행동을 프로그래밍하고 있다. 그러한 플랫폼을 우리가 현실과 맺는 관계를 의탁하는 전반적인 인터페이스로 삼는 순간부터 우리는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간다. 사회적인 온도를 높일수록 이득을 보게 마련인 스핀 닥터들, 여론 조작 요원들의 손아귀에 우리를 내맡기는 것이다." (118쪽)<br/> <br/><br/>만약 알고리즘이 인간 생활 전반을 장악하고 그 압도적인 우위가 인간의 선택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게 될 경우, 이것은 비단 '인간의 주권이 어디에 있는가' 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인간 존재 자체를 위협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다. 따라서 이것은 단순히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이며, 우리가 이 새로운 권력 구조 안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근본적인 이유가 된다.   <br/><br/>따라서 "개인과 사회는 삶의 어떤 영역을 인간 지능의 몫으로 한정하고 어떤 측면들을 AI에, 혹은 인간과 AI의 협업에 넘길 것인지 결정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인간 지능을 우선하기로 선택할 때마다, 그 영역이 인공 지능이 더 효율적인 결과를 낼 수 있는 분야라면 반드시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168쪽) 라는 점도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이다.  <br/><br/>결국 포식자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기술이라는 성(城)을 건설했지만, 인간을 완벽히 예측가능한 존재로 전락시킴으로써 권력을 대다수의 인간에게서 분리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같은 의미에서 AI는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그 이해는 곧 인간 종 자체를 필요없는 변수로 만드는 과정이 되고 말았다. 요컨데, 예측이 완벽해질수록 선택은 불필요해지고 선택이 불필요해질수록 선택하는 존재 역시 불필요해질 수 밖에 없다는 의미다. <br/><br/>권력이 인간에서 기계로 이관됨에 따라 바야흐로 알고리즘은 '권력의 구조' 자체가 되어가고 있다. 결국 주권은 불가피하게 인간에게서 분리될 것이며, 인간은 주권을 빼앗긴 채 포스트 휴먼의 관리 대상으로 전락하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br/><br/>그 때가 되면 암브로시아를 맛볼 인류가 남아있긴 한 걸까?<br/><br/>*암브로시아 :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이 먹는 불멸의 음식<br/><br/>&lt;덧붙이는 말&gt;<br/><br/>줄리아노 다 엠폴리의 [포식자들의 시간]은 AI변혁기에 출현하는 포퓰리스트와 AI기술자들이 新권력을 형성하는 과정을 조명하면서 정치구조와 AI시스템이 지닌 명백한 한계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인간의 본성과 무모한 권력이 결합하는 최악의 현상을 포착함으로써 다가올 포식자들의 시간을 예고한다. <br/><br/>특이한 것은 [포식자들의 시간]이 기존의 AI 서적들과는 다르게 기술발전을 하나의 선형적 진보로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엠폴리는 기술의 발전이 인간을 더 현명하게 만들 것이라는 가정을 거부한다. 그의 관점에서 기술은 인간의 지혜를 증폭시키는 동시에 인간의 어리석음 역시 함께 증폭시키는 앰프일 뿐이다. 즉, 기술은 인간 본성의 평형추를 건드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단지 인간이 자신의 의지를 더 큰 규모로 실행할 수 있도록 만드는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통찰은 기술이 단순히 더 나은 세계를 만들 것이라는 환상을 깨는 동시에, 실로 더 강력한 세계를 만든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강력한 세계는 언제나 더 큰 창조와 더 큰 파괴를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br/><br/>같은 맥락에서 유발 하라리가 자신의 저서 [호모 데우스]에서 밝힌 '미래에 대한 경고장'을 소개하며 이 글을 마치려 한다. <br/><br/>"20세기 거대한 정치적 비전들이 우리를 아우슈비츠, 히로시마, 대약진 운동으로 이끌었음을 생각하면,(...) 신 같은 기술과 과대망상증적 정치의 결합은 재앙의 레시피나 다름없다." <br/><br/><br/><br/>**본 리뷰는 출판사 을유문화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되었습니다. <br/><br/>#포식자들의시간 #줄리아노다엠폴리 #을유]]></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79/47/cover150/8932476012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5794784</link></image></item><item><author>이호민</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세계사를 바꾼 열두번의 대전환 - [세계사를 바꾼 열두 번의 대전환]</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2286161/17065241</link><pubDate>Sun, 01 Feb 2026 23:5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2286161/1706524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02135816&TPaperId=1706524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461/17/coveroff/k502135816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02135816&TPaperId=1706524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세계사를 바꾼 열두 번의 대전환</a><br/>김태수 지음 / 프런트페이지 / 2026년 01월<br/></td></tr></table><br/>김태수 작가의 [세계사를 바꾼 열두 번의 대전환]<br/><br/>"사상은 한 사상가의 머릿속에서 시작되지만, 세상에 나온 순간부터는 그 사상가의 전유물이 아니게 된다. 그렇게 세상에 퍼진 사상이 본래의 의도와는 다르게 해석되거나 급진화되는 현상은 역사 속에서 줄곧 반복되어 왔다." (138쪽)<br/><br/>김태수 작가가 역사의 작동방식을 함축한 이 멋진 문장에서 '사상'은 오늘날 현대의 질서를 선도하는 '기술'로 바꿔쓸 수 있을 것이다. <br/><br/><br/><br/>역사 속에서 '누군가의 선택이 훗날 어떻게 해석될 것인가’ 라는 질문은 인간사에서 '개인의 행동이 미래의 나 자신과 주변인에게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 라는 물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만큼 선택은 우리의 삶을 관통하는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이 질문의 방점은 선택 그 자체에 있다기보다 선택과 해석 사이에 놓인 결과에 있다. 역사적 사건의 결과가 반드시 선택의 의도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역사는 선택에 대한 윤리적 평가를 넘어 그로 인해 발생한 결과에 대해 사회적 책임까지 함께 요구한다. <br/><br/>바로 이 지점에서 인간의 역사는 하나의 거대한 '진화의 과정'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역사는 단순히 독립된 사건들의 나열이 아니라 선택과 결과가 반복적으로 맞물리며 특정한 의미를 형성해 온 과정이기 때문이다. 생물의 진화가 환경에 적응한 형질만을 남기듯 사건 역시 옳고 그름과 무관하게 살아남았기에 기록되었고 우리는 그러한 결과들을 기준 삼아 다음 단계를 설계한다. 문제는 그 선택이 언제나 윤리적으로 옳았기 때문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지속가능했기 때문에 유효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내리고 있는 결정 역시 언젠가는 하나의 결과로서 해석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김태수 작가는 바로 그 지점에서'세계사를 바꾼 열 두 번의 대전환'을 다룬다.<br/><br/>각 장에서 제시되는 역사적 사례들은 사건에 얽힌 인물의 업적과 시대상을 조명한다는 데서 일반 역사서와 다를 것이 없어 보이지만, 조금만 시선을 넓히면 시대적 맥락 속에서 '선택의 결과'가 어떻게 사회 속에 흡수되고 정당화되었는지를 밝히는 데 집중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것은 개인(집단)의 논리와 선택이 당대의 제도, 관행, 그리고 다수의 이해관계 속에서 원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즉, 선택의 의도는 점차 희미해지고 결과가 다시 다음 선택의 조건이 된다. 그러므로 선택의 완성은 결정을 내리는 순간이 아니라 그로 인해 발생한 결과를 어떻게 감당하고 해석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br/><br/>김태수 작가는 열 두 번의 사건을 통해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기 보다 그 시대의 인물들의 목소리와 선택이 어떻게 사회적 표준을 만들어 나갔는지를 집요하고 반복적으로 드러낸다. 이는 합법이라는 이름, 효율이라는 명분, 불가피했다는 설명 아래에서 어떤 선택들이 어떤 세계를 만들어 왔는지를 보여준다.  <br/><br/>특히 산업혁명이 우리 사회에 가져온 파장을 떠올려 보면 이것을 단순히 역사 속 이야기로만 치부할 수 없음을 자각하게 된다. 산업혁명은 인류에게 전례 없는 풍요를 가져오는 동시에 노동 착취, 환경 파괴, 구조적 불평등의 부작용을 낳았다. 그때의 선택들은 ‘진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었지만 그 결과는 지금도 우리가 감당해야할 숙제로 남아있다. 오늘날 AI를 둘러싼 논쟁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효율과 혁신을 위해 기술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서 누가 이익을 얻고 누가 위험을 떠안는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이는 결국 산업혁명 이후 기술과 시스템은 줄곧 빠르게 진화했지만 그 진화를 이끄는 선택의 책임은 여전히 인간의 몫으로 남아있음을 의미한다.<br/><br/>그렇다면,<br/>"과연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가!"<br/><br/>김태수 작가가 보여준 열두 번의 대전환은 특정 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이 반복해 온 '선택의 패턴'에 관한 기록이었다. 우리는 늘 제한된 정보 속에서, 욕망과 두려움 사이에서, 그리고 시대의 압박 속에서 선택해 왔다. 그 선택은 의도와 다르게 흘러갔고 결과는 또 다른 선택을 강제했으며 해석은 언제나 현재의 필요에 따라 달라졌다. <br/><br/>같은 맥락에서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과거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이 아니라 현재의 선택을 더 깊이 사유하는 일에 가깝다. 따라서 지금처럼 빠른 기술과 강력한 힘을 손에 쥔 시대일수록 우리는 더욱 천천히 생각해야 한다. 편리함이 책임을 대체할 수 없고, 효율이 윤리를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br/><br/>어쩌면 이 책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중요한 교훈은 무결한 선택이 아니라 책임 있는 선택을 하라는 요구일 것이다. 그리고 그 책임은 우리의 의도만이 아니라 그것이 파생시킨 결과까지 포함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br/><br/><br/>&lt;덧붙이는 말&gt;<br/><br/>만약 역사의 수많은 선택들이 반복적으로 특정 집단, 즉 기득권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귀결되어 왔다면 우리는 선택의 옳고 그름을 논하기에 앞서 먼저 스스로의 위치부터 점검해야 할 것이다. <br/><br/>'지금 나는 그 결과의 수혜자인가 아니면 감내하는 쪽인가.' <br/><br/>이것은 누군가를 비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선택의 의미'를 정확히 가늠하기 위해 선행해야 할 의무다. 같은 선택이라도 선택자가 서 있는 위치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br/><br/>가령 기득권의 선택은 종종 질서와 안정, 합리라는 언어로 포장되어 비기득권에게 침묵과 인내를 요구하곤 한다. 그렇기에 지금 내가 내리는 결정이 기존의 결과를 연장하는 선택인지 아니면 문제를 인식한 상태에서 내린 선택인지를 점검해야 한다. 나의 판단이 공정해 보이는 이유가 다수의 이익에 부합해서인지 아니면 내가 이미 안전한 위치에 있기 때문인지를 먼저 명확히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br/><br/>어쩌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역사가 주는 교훈을 옳바르게 해석하고 그것을 현재에 '잘' 적용해 나가는 첫 걸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br/><br/>#세계사를바꾼열두번의대전환 #프런트페이지 #김태수]]></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461/17/cover150/k502135816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4611702</link></image></item><item><author>이호민</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4의 재판 - [4의 재판]</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2286161/17026278</link><pubDate>Fri, 16 Jan 2026 23:1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2286161/1702627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12034443&TPaperId=1702627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331/38/coveroff/k61203444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12034443&TPaperId=1702627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4의 재판</a><br/>도진기 지음 / 황금가지 / 2026년 01월<br/></td></tr></table><br/>도진기 작가의 [4의 재판]<br/><br/>"사람들의 큰 착각. 왜 법이 정의를 찾아줄 거라고 기대하는가. 법은 정의를 위해 있지 않다. 이 사회의 유지에 더 관심이 많다. 주먹이 아니라 신호등에 가깝다고나 할까." (292쪽_서찬휴 변호사의 글 중에서)<br/><br/>법은 악을 뿌리뽑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br/>다만 악이 마음껏 날뛰지 못하도록 도덕적 경계를 나누고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폭력을 제도적 장치로 여과해 사회 질서와 국민의 안녕을 보장한다. 다시 말해, 법은 최소한의 규제로 사회 정의를 구현하고자 한다. <br/><br/>그럼에도 어떤 판결은 설명할 수 없는 불편함을 남긴다. 그 이유는 법의 안전망이 '선'을 위해서만 작동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악'이라는 사회 이면의 질서까지 포괄하고 있다. 가령 피의자의 신변보호, 묵비권 행사, 변호사 선임 권리, 무죄추정의 원칙, 공소시효 등이 그렇다. [4의 재판]에서는 배영길이 혐의에서 풀려나 자유의 몸이 되는 데 결정적인 기준이 되었던 '합리적 의심 없는 증명'이 대표적이다. <br/><br/>여기서 '합리적 의심 없는 증명' 이란 '이 사람이 무죄가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들면 유죄판결을 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의심이 들지 않는 수준까지 입증이 이루어져야 유죄로 할 수 있다는 원칙이다. 이는 사건의 진실을 가르는 과정에서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말자'는 취지인데, 문제는 그 따뜻한 배려의 대상이 '피해자'가 아니라 '피. 의. 자'라는 데 있다. 도진기 작가의 [4의 재판] 은 바로 그 불편한 현실을 허심탄회하게 고발한다.  <br/><br/>그렇다고 이 소설이 단순히 '법이 틀렸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주인공 한선재의 남자친구, 송지훈의 죽음과 관련하여 모든 법적 절차는 규칙에 따라 진행되었고 법리는 충실히 적용되었다. 문제는 그 결과가 '정의'가 아니라 '사회 질서'로 귀결되었다는 점이다. 악인 배영길은 처벌받지 않았고 사건은 종결되었으며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따라 이제 더 이상 누구도 이 사건을 입에 올릴 수 없게 되었다. <br/>...<br/>사건은 사회의 질서를 헤치지 않는 범위에서 깨끗이 종결되었다. <br/><br/><br/>"재판은 악인을 단죄하지 못했지만 모두의 입을 다물게 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271쪽)<br/><br/><br/>우리는 이 판결이 담고 있는 뒤틀린 현실에 알 수 없는 무기력함을 느낀다. 정의를 구현하지 못한 재판도 어이없지만 악을 향해 더이상 어떠한 문제제기도 할 수 없다는 모순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우리는 그것을 감히 '사회 질서의 정립'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br/><br/><br/>&lt;서찬휴&gt; 변호사는 이 질문의 한가운데 있다. 그는 법의 탄생 배경이 본래 왕권을 위한 질서유지에서 기인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사회적 인프라의 한 형태로 매끄러운 국가 운영에 초점을 맞춘다. 애초에 '정의 실현'이라는 이상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대중에게 '누구나 처벌받을 가능성'을 인식시키는 것이 법의 존재 이유였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뿌리가 같은 현행 사법 체계를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진범이 활개치는 사회를 상상하며 질서와 무질서의 경계에서 대상을 잃고 방황하는 피해자의 응보를 애석하게 바라본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시각은 법을 비판하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그 법을 활용하는 법률가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다. 규칙을 만들고 그 규칙 안에서 움직이는 자의 한계가 진범을 석방시키는 기이한 행태를 낳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역시 사회의 질서 유지를 위해 법의 필요성을 통감하는 법조인이라는 점이다. 그런 그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SNS에 글을 올리는 것 뿐이다.  <br/><br/>[4의 재판]은 그 '냉소(冷笑)' 터져 나오는 지점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법은 수없이 많은 정황증거에도 단 하나의 오류 가능성을 우선시한다. 혹시나 발생할 억울함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 충돌하는 기묘한 우연을 일상의 파편으로 취급한다. 판사의 방어적인 해석은 피의자를 보호하는 방식으로 사회 질서를 유지한다. 결국 살인죄의 무게는 고스란히 유가족이 짊어지게 되는 구조다. 피해자와 피의자가 정확히 뒤바뀐 구조. <br/><br/>여기서 '혹시나 발생할 오류 가능성'이란 신성한 판결에 흠이 될 잠재적 위험요소였을까? '무고할지도 모를' 피의자에게 자유를 선포하는 행위는 그 신성함을 잃지 않으려는 법원의 구태의연한 자구책은 아니었을까? 를 상상한다.<br/><br/>과연 누구를 위한 '보호'인가?!<br/><br/>이 질문은 한선재를 통해 더욱 날카로워진다.<br/>그녀는 희생자 송지훈의 여자친구다. 그녀는 송지훈을 죽인 살인자 배영길의 무죄판결을 목격한 목격자다. 동시에 사법 시스템의 구멍을 목격한 목격자이기도 하다. 상식을 파괴하는 판결은 그녀를 움직이게 했다. 사건기록물을 훔치고, (서찬휴) 변호사에게 자문을 구하고, 보험회사에 훔친 자료를 넘긴다. 법은 더이상 그녀에게 신뢰할 수 있는 안전장치가 아니라 알 수 없는 원칙과 절차로 작동하는 자동판매기다.<br/><br/>사실 그녀는 이 소설을 통틀어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법의 테두리 밖에서 절차를 무시하고, 관례를 깨며 상식대로 행동한다. 법의 출현 이전에 규범으로 삼았을 법한 인간의 도리와 상식으로 사건을 바라본다. 어쩌면 한선재는 서찬휴의 이상적인 생각을 실천에 옮긴 행동대장이며, 이 시대에 꺼져가는 불꽃을 살릴 정의라는 작은 불씨였을 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라면 현실의 사법체계가 갖고 있는 불합리에 경종을 울리는 알람 장치일수도 있겠다. <br/> <br/>반대로 배양길은 이 체계의 가장 어두운 그림자다.<br/>그는 살인자이지만 법의 테두리 안에서 활동한다. 오히려 그 누구보다 법을 잘 이해하고 있다. 경직된 체계의 허술한 틈, 인간 판단의 오류 가능성, 절차가 진실보다 우선시되는 순간을 정확히 알고 있다. 학창 시절부터 타인을 지배하고 조종해온 그는 법이라는 질서 안에서도 무소불위의 힘을 행사한다. 그의 세계에서 법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악을 실현하는 도구이다.<br/><br/>흥미로운 것은 배양길의 모습이 묘하게 법정의 절대자(판사)와 닮아 있다는 점이다. 자기 세계에 갇혀 있고, 자신의 오류 가능성을 의심하지 않으며 맥락보다 형식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사회에서 두 인물은 정확히 대척점에 위치하지만 소설을 읽는 내내 이 생각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br/><br/>법정에서 판사는 신성불가침 영역의 절대자다. 그러나 그(녀)의 권위는 대중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출현했던 원시적 집단에 뿌리를 둔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서 이러한 허구 집단은 초기에 일상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도구로 쓰이다가 어느 순간 조직이 커지고 관료화되자 원래의 목적보다는 관료체계의 관성과 관례들을 더 중요한 가치로 여기게 되었다고 밝힌다. 과정과 절차가 복잡해지면서 그들만의 언어를 사용하게 되고 대중이 접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자 법조인은 대중의 권리를 대신하는 절대적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판사의 신성한 권위도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며 더욱 높고 두터워졌음에 틀림없다. <br/><br/>그렇다고 법이 가진 권위 자체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 체계의 복잡한 절차와 과정이 대중의 상식과 단절되고 정보의 장막 뒤에서 대중의 눈과 귀를 가린다는 게 문제다. 특히 법을 실행하는 주체자-판사, 검사, 변호사-가 정보를 독점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행위를 성역화하기 때문에 대중은 법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인식하게 되고 결국 이것이 대중과 법조인 사이에서 깊은 갈등을 유발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br/><br/>같은 맥락에서 [4의 재판]이 말하는 법의 문제는 제도 그 자체라기보다 제도를 활용하는 '인간의 한계'에 더 가깝다. 법은 악을 뿌리뽑지는 않지만 효과적으로 통제함으로써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 통제 장치가 지나치게 형식화되고, 관료화되며, 신격화될수록 체제는 경직되고 악은 그 틈을 파고든다. 그곳에서 착함은 약함으로 오인되고 상식은 폭력에 침묵한다. <br/><br/>도진기 작가의 [4의 재판]은 인간의 불완전함 위에 세워진 신성한 법의 영역을 형식주의적 '질서 지향'이라는 측면에서 냉철하게 바라본다. 법은 정의 구현과 국민의 안녕을 위해 최소한의 안전망으로 억울한 사람 없이 분쟁을 해결하려 한다. 따라서 판결은 정황 보다는 직접적인 증거에 입각해서 내려진다. 직접적인 증거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심증이나 감정, 맥락을 배제한다. 그것은 단 1%, 아니 0.1%의 오류 가능성도 용납하지 않는다. 여기서 오류 가능성은 신성한 법정의 권위를 날려버릴 정도의 섬뜩한 가능성과 일치하므로 모든 정황이 범인을 지목하더라도 법의 권위 앞에서 상식은 무시된다. 그것이 법이 추구하는 정의 구현 방법이다. 그러나 법이 정의의 중심에서 판결의 무오류성을 입증하는 데만 집중하다보니 진실을 왜곡하게 되고 피해자와 유가족에게 범죄의 무게를 전가하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다.<br/><br/>결국 작가 도진기는 [4의 재판]을 통해 '과연 우리 사회는 법을 정의롭게 작동시키려는 준비가 되어 있는가'를 묻는다. 그리고 법의 형식과 절차가 무엇을 위해 수립되었는가를 돌아보게 한다. 더불어 치열한 법리다툼에 매몰된 진실을 상식의 시선에 맞추기를 희망한다. <br/><br/>법원은 국민을 위한 공공기관으로서 신성한 장벽을 깨고 과정의 투명성을 갖추어 국민으로부터의 신뢰를 회복하고 원래의 목적인 공익과 정의 실현을 위해 책임을 다해야 할 것이다. <br/><br/>언젠가 법조인과 대중이 동등한 관계 속에서 공통의 언어를 찾게 된다면, 지금의 반쪽짜리 정의에 나머지 반쪽을 이어 붙일 수 있지 않을까? <br/><br/>기득권의 생리를 고려한다면 어려울 것 같지만 그래도 한 번 기대해 보자.<br/><br/>#4의재판 #도진기 #황금가지]]></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331/38/cover150/k61203444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3313830</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