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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기억의 박물관 1 ㅣ 비룡소 걸작선 49
랄프 이자우 지음, 유혜자 옮김 / 비룡소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잃어버린 기억들이 가는 곳 크바시나. 아무도 더이상 그 물건을 기억하지 않을 때 물건들은 크바시나로 옮겨진다. 한창 이용되고 기억될 때의 기억을 가지고 스스로 존재하는 크바시나는 물건들의 세상이라고 할 정도로 흥미진진하다.
그 크바시나를 조종하는 것은 니므롯, 마르둑, 모로드 등 수많은 이름을 가진 크세사노였으니, 사람으로 태어나 우주의 힘을 우연히 얻고 자신의 영혼을 담은 황금상을 만듦으로써 불멸을 꿈꾼다.
고고학에 관련된 학자로서 크세사노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고, 박물관에서 야간 경비원으로 일하다가 사라진 아버지를 찾기 위해 쌍둥이 남매인 제시카와 올리버가 나서게 된다. 아버지는 잃어버린 기억의 나라인 크바시노로 갔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전혀 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아버지의 사진을 보면서도 누구인지 알지 못할 정도로 철저하게 기억이 사라져서, 아예 그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무언가 도움이 될 듯하여 일찍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유품을 찾아보다가 발견한 아버지의 일기에서 힌트를 얻고, 아이들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하여 모험을 떠난다.
제시카는 현실 세계에서 박물관의 학술부장인 미리암의 도움을 받아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고, 올리버는 크바시노에 들어가 유리새 니피, 말하는 코트 코퍼, 날으는 말 페가수스, 소크라테스의 제자 엘레우키데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장 레벤 니아가 등의 도움을 받아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제시카와 올리버의 이야기가 교대로 이어지면서 현실과 크바시나의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크세사노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져만 가는데...
잃어버린 기억들이 간다는 크바시나가 정말 있다면 갈수록 더 많은 물건들이 그 나라로 옮겨지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량생산 대량소비가 미덕이 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핸드폰 교체 시기가 1년밖에 안 되고, 금방 유행이 지나버리는 것들은 외면되기 마련이다. 구입할 당시에는 시간과 노력과 비용을 들일 만큼 필요가 있었으나 사랑과 아낌을 받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 금방 잊혀지는 존재는 얼마나 애처로운가.
수메르어와 창세기 신화, 바빌론과 바벨탑, 베를린의 장벽이 무너지는 것, 영국과 나치, 유태인과 여러 종교 등 다양하고 폭넓은 지식들이 몰려 나와 초반에는 약간 어렵게 느껴졌으나,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은 공통된 면이 있기에 넘어갈 수 있었다. 또한 고고학과 컴퓨터를 연결하는 제시카의 과학적 능력과, 마음을 잘 이용하는 올리버의 예술적 능력이 잘 어우러져 전무후무한 자신과의 싸움을 잘 수행했으니, 이들로 인해 잃어버린 기억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유태인 기념관인가에는 '용서하되 잊지 않는다'라는 말이 적혀 있다고 한다. 크세사노가 현실 세계에도 영향력을 넓히면서 생겨난 이변들 가운데 나치와 슈타지의 리스트가 사라지는 것만 보아도, 쉽게 잊히는 것의 무서움과 파괴력을 알 수 있었다. 그만큼 빠르고 많은 정보에 묻혀 소중한 것들이 사라지는 세태를 풍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미하엘 엔데가 후계자로 지목했다는 랄프 이자우. 미하엘 엔데가 시간과 기억, 꿈을 소중히 했다면 랄프 이자우는 이 책으로 기억을 소중히 함으로써 충분히 목적을 거두었다는 생각을 한다. 앞으로도 그의 책을 더 많이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