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가슴속에 살아 있고 싶다 - 사랑하는 아내와 조국에 띄우는 영원한 청년 안창호의 러브레터
안창호 지음, 윤병욱 엮음 / 샘터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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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어제는 삼일운동이 일어난지 89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아직 100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일제 시대의 참혹한 기억이 가물가물 잊혀지고 있는 것을 반영하듯, 이명박 대통령은 어제 삼일절 담화에서 '일본의 과거사를 묻지 않겠다'는 말을 했단다. '역사의 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되지만'이라 단서를 달았지만, 그 단서는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 과거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말로 가볍게 부정되었다고 개탄하는 진중권 씨의 칼럼은 참 씁쓸했다.
그런 의미에서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선생님이 조국과 아내에게 띄운 편지 모음집인 <그대 가슴 속에 살아 있고 싶다> (안창호 지음, 2007, 샘터)는,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개인사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상황을 모두 조망하는 비망록이자 질타처럼 느껴졌다. 

안창호 선생님(1878 ~ 1938)은 37년간 12개국 120여 개 도시를 돌아다녔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여러 단체를 조직하고 해외 동포를 규합하는 등 많은 일을 해냈다. 그러다 결국 광복을 보지 못하고 형무소에서 사망한다.
1902년부터 1938년까지 그의 일상을 찍은 사진들로 책을 시작한 후, 독립운동을 하다가 옥에 갇힌 시기인 1932~1938년의 편지들을 제일 먼저 배치하였다. 그 뒤로 1902~1910년의 '미국으로, 다시 한국으로', 1910~1919년의 '망명의 길-중국, 러시아 미국', 1919~1924년의 '상해독립운동', 1924~1932년의 '마지막 미주 순행과 민족통일운동', 마지막으로 자녀에게 보내는 편지들로 그의 일생을 나누어 그 시기에 아내에게 보낸 편지들을 수록하였다.
필요한 경우에는 그 배경이 되는 상황 설명이 들어 있다. 그의 생활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조국의 상황과 연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편지의 수신인인 이혜련 여사(1884 ~ 1969)는 결혼생활 37년간 겨우 10여 년만 함께 했으나, 아이들을 키우고 생활을 하느라 고생이 많은 가운데에서도 남편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잃지 않았다.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사랑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국을 위한 사명감은 그의 편지의 전부이다. 어떤 감옥생활이 편할 수 있을까마는 가족들이 걱정할까봐 한사코 가볍게 이야기하는 깊은 마음이 잘 전달된다.
다양한 사진 자료와 편지를 통해 지금까지 알아온 교과서적이고 평면적인 인물에서 벗어나, 가족을 사랑하는 자상한 남자이자 독립운동가로 살아 숨쉬는 도산 안창호 선생님을 만나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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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 팔레스타인의 독립은 정당한가 고정관념 Q 13
오드 시뇰 지음, 정재곤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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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웅진지식하우스에서 펴내는 ‘고정관념 Q’ 시리즈는, 프랑스의 르 카발리에 블뢰 출판사에서 출간되고 있는 고정관념 시리즈 중에서 국내 독서계에 적합한 흥미로운 주제들을 엄선해 번역한 것이라고 한다. ‘인터넷으로는 찾을 수 없는 깊이 있는 지식 검색’, ‘당신의 상식을 뒤흔드는 깐깐하고 균형잡힌 지식 문답, 딱딱한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즐거운 지식을 만난다’ 라는 설명답게 주제에 대한 다양한 고정관념들을 질문으로 던지고, 그에 대해 깊이 있는 해답을 주고 있다.

나는 이번에 ‘유대인 – 유대인은 선택받은 민족인가’, ‘팔레스타인 – 팔레스타인의 독립은 정당한가’, ‘이슬람 – 이슬람은 전쟁과 불관용의 종교인가’이라는 세 권의 고정관념 Q 시리즈를 읽었다.
‘유대인’에서는 유대인의 역사, 유대인의 특성과 전통, 유대인의 사회와 경제, ‘팔레스타인’에서는 팔레스타인의 역사, 팔레스타인의 사회와 일상 생활, 정치생활과 평화협상, ‘이슬람’에서는 이슬람의 과거와 현재, 이슬람의 문화와 사회, 이슬람과 현대의 세계라는 항목으로 20가지 정도의 질문에 대한 답을 준다. 200페이지가 채 되지 않는 작은 책에서 다루기에는 꽤 방대한 질문들이며, 내용에 따라서는 수천년을 아우르는 깊이도 보인다.

우선 ‘유대인 - 유대인은 선택받은 민족인가’ 편을 보자. 유대인들은 구약에서 하나님에게 선택된 민족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나 예수를 죽게 한 민족이라는 오해(?)를 사게 되고 그런 고정관념 때문에 오랜 기간 박해를 받아 왔다. 선민의식은 그런 박해의 원인인 동시에 박해를 이겨내는 힘이 되기도 했다.
여러 차례의 박해에 의해 민족의 대이동이 일어나면서 세계 곳곳에 분산(디아스포라)되고, 아슈케나지, 세파르디, 사브라 유대인으로 나뉜다. 이들은 그들이 정착한 곳에 동화되기도, 그렇지 않기도 하지만, 동화되었든 그렇지 않든 유대인이라는 이름으로 박해를 받은 것도 사실이다.
이 책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오해들을 설명하면서 그들이 오랫동안 피해를 받아 왔음을 강조하고 있고, 이스라엘에 대한 이야기는 찾아보기 힘들다. 고정관념을 타파하고자 하는 책 내용에서 여전히 유대인의 선민의식을 느꼈다고 하면 나는 반유대주의자인 것일까..

'팔레스타인 - 팔레스타인의 독립은 정당한가' 편에서는 20세기 초중반 영국의 신탁통치를 거치고 이스라엘이 건국하는 과정에서 많은 팔레스타인 난민이 발생하고, 팔레스타인 영토로 할당된 국토가 이스라엘에 의해 잠식되는 과정, 이들이 이스라엘과 맞서는 과정이 주로 소개된다.
강대국 사이의 틈바구니에서 스스로의 생존마저 보장받지 못하는 이들의 모습은, 100년 전 일본의 식민지였던 우리나라의 모습과 어쩌면 그렇게 흡사한지 모르겠다. 이들의 생존에 대한 절박함보다는 이스라엘 및 서방세계에 대한 테러로 기억되는 팔레스타인의 모습이 참 안타깝다.

'이슬람 - 이슬람은 전쟁과 불관용의 종교인가'에서는 이슬람이 그런 테러의 정신적 배후라는 참으로 강대한 고정관념을 타파하고자 한다. 이슬람은 유일신을 믿는 종교로서,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갈라져나왔으니 이들은 형제와도 같다.
이슬람의 교주인 무함마드의 일생에서부터 시아파와 카와리지파, 순니파로 갈라지게 된 계기, 아랍계의 각 나라들이 성격을 달리 하게 된 계기 등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이슬람은 우리의 고정관념처럼 아랍에만 존재하는 종교가 아니라 세계 인구 중 15억이 믿고 있으며, 그 중 아랍인은 3억밖에 되지 않는다.
한 손에는 칼, 다른 한 손에는 꾸란을 든 무슬림 전사의 모습은 의도적으로 강조되었고, 여러 교파들 사이에서 가장 강성인 지하드(성전聖戰)로만 거론되기 일쑤이다. 어떤 모습을 강조하는가에 따라 수많은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는 이슬람은 우리에게 너무 전쟁과 불관용의 모습으로만 알려진 것이 아쉽다.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사이에는 이스라엘이라는 접점이 있다. 유대인들이 참으로 오랜 세월동안 박해를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의 박해는 기독교도들에 의한 것이었지, 무슬림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유대교의 성지가 예루살렘에 있다는 이유로 팔레스타인에 자리를 잡은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건국의 정당성을 이야기하고자 이슬람과의 대치라는 종교적 색채를 끌어들였다고 생각한다.
얼마전 어떤 책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었다. 구약의 하나님은 맹목적인 순종을 요구하고 그에 어긋났을 때 가차없는 처벌로 선민조차 쓸어버리는 무서운 하나님이었다. 노아의 가족만을 남기고 온 세상을 홍수로 쓸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그러다가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과 같이 사랑과 온유함을 갖추었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여전히 구약을 믿는다. 이들이 세운 이스라엘은 구약의 하나님처럼 맹목적인 순종과 가차없는 처벌로 팔레스타인을 대하고 있다. 아랍의 무슬림들이 총단결하여 이스라엘에 대항하지 않는 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투쟁은 종교전이 아니다. 이제는 세계 어느 곳에도 종교 전쟁은 찾아볼 수 없으며, 다만 힘의 우열에 따른 적자생존만이 있을 뿐이다.
이스라엘이 범법 행위로 팔레스타인인들을 학살하고 숨통을 조이는 것을 막을 힘이 우리에게는 없으나, 우리는 그런 불의를 묵인하지 말고 정의의 눈으로 주시하고 있어야 한다.
모르는 사실을 처음 배우는 것보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을 깨는 것이 더 어려움을 새삼 깨달았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이슬람에 대한 많은 고정관념을 깰 수 있는 좋은 책들이었음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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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 오늘의 일본문학 6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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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슈이치라는 이름은 꽤 들어보았는데, 그의 책은 이것이 처음이다. 그가 쓴 첫 작품은 아닐지라도 처음 읽게 되는 작품으로 그 작가에 대한 느낌을 규정한다고 하면, 이 책으로 요시다 슈이치를 알게 되는 것은 다행일까 불행일까...

후쿠오카 시와 사가 시를 잇는 총 길이 48킬로미터의 국도인 263번 도로는, 세후리 산지의 미쓰세 고개를 타넘으며 남북으로 뻗어 있다. 가까이에 고속 나가사키 자동차도로가 개통되면서 이 도로는 잊혀지게 되는데, 2002년 1월 6일, 나가사키 교외에 사는 젊은 토목공이 후쿠오카 시내에 살던 보험설계사 이시바시 요시노를 목 졸라 죽이고 시체를 유기한 용의자로 나가사키 현 경찰에 체포되면서 다시 한번 세상에 드러난다.

그녀는 누구를 만나고 싶어 했나, 그는 누구를 만나고 싶어 했나, 그녀는 누구를 만났는가, 그는 누구를 만났는가, 내가 만난 악인이라는 5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미쓰세 도로에서 있었던 살인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대해 차근차근 다가간다.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 죽지만, 이미 어떻게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지의 결말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 과정을 지켜본다는 것은 또 색다른 느낌이 든다. 곧 죽을 사람은 어떻게 해서 죽게 되었는지에 대해 신경쓰게 되고, 죽일 사람은 어떻게 해서 죽이게 되었는지에 대해 신경쓰게 되고, 각 사람의 주변인들은 사건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모두 주의깊게 살펴보게 된다.

만남 사이트를 통해, 또는 술집에서 부킹을 통해 이성을 만나는 이들의 부박함,. 사랑이 더이상 존재의 이유가 되지 않는 삶을 살던 여자와, 어려서부터 애정이 결핍되었으므로 사랑을 존재의 이유로 삼았고 번번이 상처받은 남자가 부딪쳐서 결국 서로 깨지고 말았던 것이다. 미쓰세 고개에서 죽은 것은 여자였으나 남자도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아니었을까.. 

표지에 쓰여진 악인이라는 한자는, 겉으로는 아름다웠으나 속이 그렇지 못했던 이들을 암시하는 것처럼 알록달록 예쁘다. 여자의 목을 졸라 살해한 토목공 뿐만 아니라 그들을 그렇게까지 몰고 간 수많은 사람들, 마음보다는 육체를 중시해서 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이 자신만 중요한 이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이들 모두가 악인이 아닐까. 사람을 죽였다는 무서운 일을 저지른 토목공에게 분노가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를 지렛대로 사용한 그 많은 악인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요시다 슈이치, 언젠가 그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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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웃음 어디 갔지? - 생각하는 그림책 1
캐서린 레이너 지음, 김서정 옮김 / 청림아이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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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이면 한 권을 다 읽을 수 있으나 곰곰이 생각하기에는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이 그림책이라고 생각한다. 아이가 좀 크면서 이처럼 그림 위주인 그림책을 졸업할 때가 되었는데, 오랜만에 읽은 '내 웃음 어디 갔지?'는 생각하는 그림책답게 <웃음>이라는 주제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

호랑이 아우구스투스는 아주 무표정한 자세로 등장한다. 웃음을 잃어버린 아우구스투스는 꽃밭으로, 물속으로 웃음을 찾으러 돌아다닌다. 우연히 만난 빗속에서 신나게 춤을 춘 다음 바닥에 고인 물웅덩이를 들여다 보다가 거기에 비친 자신의 턱 밑에서 바로 그 웃음을 만난다!!  

호랑이는 먹을 듬뿍 묻힌 큰 붓으로 거침없이 흘려 그린 것처럼, 굵고 가는 선들과 거친 테두리가 대비되어 생동감을 준다. 네모난 각진 얼굴은 지금껏 보아오던 둥근 호랑이의 모습과 달라서 더 엄격하고 준엄한 느낌이다.
걸어갈 때 뒤로 죽 뻗은 다리의 활력, 위로 활처럼 굽은 꼬리의 무늬, 물속을 헤엄치는 몸의 휘어짐 등을 보면서 표정을 알 수 없는 아우구스투스의 마음까지 대략 읽어낼 수 있으니, 과연 상을 받을 만한 그림이라고 생각한다.
수채화처럼 맑은 느낌을 주는 나뭇잎들과 새들, 물속의 물고기들은 주변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새삼 깨닫게 한다.
 
자기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만큼 소홀하게 대하는 것이 있을까? 더 많이 더 비싼 것을 더 빨리 가지고 싶어하는 마음에서 벗어나, 가지고 있지만 그 중요함을 모르던 내면의 가치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 긍정심리학과 행복학이 요즘 주목받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행복과 웃음은 멀리 있지 않다. 비가 온다고 숨지 않고 열심히 즐긴 다음 웃음을 찾아낸 아우구스투스처럼, 지금 이 순간을 신나게 즐기고 만족한다면 기분 좋은 노곤함과 함께 행복한 웃음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림책을 덮고 아이의 턱에서 웃음을 찾아보자. 엄마 아빠와 함께 책을 읽는 아이에게서는 온몸에서 행복한 웃음이 묻어나오고, 그 웃음에서 행복을 찾는 엄마 아빠의 얼굴에도 환한 웃음이 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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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의 사나이
김성종 지음 / 뿔(웅진)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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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욱한 안개 속에서는 모든 것이 형체를 잃고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안개가 짙게 끼면 당장 몇 미터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인데, 밤에 어두워서 주변이 잘 보이지 않을 때와는 다르게 하얀 물체에 갇힌 듯한 갑갑함을 느끼게 된다. 주변이 환한데 어느 것도 확실히 보이지 않고, 빛마저도 소용없는 상황은 생각보다 무서운 경험이다. 

안개가 짙게 낀 어느 새벽, '나'는 청부를 받고 떠오르는 정치인인 유달희를 칼로 찔러 살해한다. 그리고서 회장으로 있는 아시아자유평화연대의 행사로 원래 예정되어 있던 중국 난징대학살 추모집회에 참석하고자 한다. 그러나 짙은 안개로 비행기가 늦게 출항하는 바람에 예정 비행기편을 놓치고 따로 선양을 거쳐 난징에 도착하게 되는데, 회원들이 타고 오던 비행기가 안개로 야산에 추락하여 모든 이들이 사망하는 사고가 벌어진다.
유달희 피살 사건과 비행기 추락 사고는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지만, 그림자 반장이 이끄는 유달희 피살 사건 수사팀에 의해 용의자가 점점 좁혀지고 '나'를 향해 다가오는 발걸음은 점점 더 가까워진다.

'나'는 추리소설 작가로 활동하고 있으나 전직 KGB 요원으로서 KGB가 해체되면서 Q25라는 단체에서 살인청부를 받고 있다. 태어나자마자 화장실의 쓰레기통에 버려졌고 고아원에서 자라다가 해외로 입양되었다. 영국 에딘버러 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전공하고 미국 예일 대학 대학원에서 러시아 혁명사를 공부하다가 KGB의 그물에 걸려 모스크바 유학을 하게 되고, 2년 후 살인 기계가 되어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스파이 활동을 하였던 경력이 있다.
살인청부를 하지 않을 때의 '나'는 매우 조용하고 품위있다. '아주 평범하고 사람 좋은 면서기처럼 생긴 좀 촌스러운 얼굴'로 성형한 그는 사람을 정중하게 대하고 좋은 인상을 풍긴다. 내연의 여인인 오미주가 비행기 사고로 죽은 이후에도 몇 번이나 전화를 걸어서 확인할 정도로 마음이 약하고, 비를 맞아 떨고 있는 강아지에게 먹을 것을 주고 씻겨 주고 키우려고 데리고 들어올 정도로 다정다감하다. 태어나서부터 버려졌기 때문에 사랑에 굶주렸다는 것은 좀 식상한 설명일지도 모르겠으나, 그의 마음 속에는 살인 기계로서의 교육과 비례하여 사랑에 대한 갈구가 있었나 보다. 지금까지 세계를 돌며 아홉 차례의 청부살인에 성공했고 스위스의 계좌에 충분한 돈을 예치해둔 그가 국내에서 미적거리고 있었던 것은, 사랑하는 이가 세상을 떠난 것과 관련하여 삶에 대한 의지를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모든 것을 포기하고 놓아두고 싶은 것은 짙은 안개와 부슬거리며 내리는 비의 탓도 컸을 것이다. '문득 내 목에 밧줄이 걸린다면 나는 유서 하나 없이 담담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잠깐 동안의 자유가 주어진다면 나는 비바람 속에 벌거벗은 채 맨발로 어둠을 걸어보고 싶었다'는 그의 생각은 참으로 쓸쓸하면서도 모든 것을 놓아버린 듯 허허롭고 그런 덕분에 편하고 자유롭다.
책을 다 읽고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는, 추리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긴박감이 없이 뻔하게 흘러가는 것이 아쉬웠다. 범행이 벌어지는 날의 짙은 안개부터 체포되어 부산으로 호송되는 날의 태풍까지 지켜보는 나까지 축축해지는 느낌도 막막했다.
그러나 신산하게 살아온 한 남자의 삶이 너무나 허허로워서 마음 한 구석이 먹먹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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