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아이들
한요나 지음 / &(앤드)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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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로 등급이 나뉘는 사회. 겉모습으로 어느 구역 출신 사람인지를 구분하고 그에 따른 차별을 당연시 여기는 사회. 나와 같지 않거나 낮다고 생각하면 얼마든지 무시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사회. 숫자와 알파벳으로 경계를 구분하는 사회. 필요에 따라서는 아이든 어른이든 이용하려드는 사회. 그런 사회 속에 하루와 주하가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런 사회를 너무 잘 알아서 오히려 사회와 어울리지 않는 빌리와 레오니가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 신물이 나는 킹이 있었다.

우리 사회의 미래가 진정 이런 모습이라면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미래를 꿈꾸라고 이야기해야 할까, 깊은 숨을 들이쉬게 만들었다.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 모습에 대한 상상의 그림이 이렇다면, 벌써부터 숨이 막혀오는 느낌이었다. 돈이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과 그것이 먹혀들어가는 모습은, 이 사회를 더 강력한 계급사회로 만들고 철저히 사람을 줄세워 권력과 이익만으로 사회와 사람들을 움직이도록 학습시키틑 결과를 낳았다. 사회가 숫자로 구분되어 있듯 학교의 학급도 알파벳으로 구분하여 출신과 태생에 따라 이미 서열화된 사회 안에서 이를 당연히 여기도록 교육시키고 있는 꼴이었다. 어디에서도 평등이나 공평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니 하루나 주하가 감당해야 할 주변 아이들과 사회의 눈초리는 매서울 수밖에 없었다. 허락되지 않은 곳에 발을 디딘 다른 종족에 대한 경계와 무시, 오히려 이용하려드는 불법적인 거래는 너무도 명확한 폭력이었다. 그리고 이런 폭력을 부추기는 것은 오히려 학교와 사회였다. 가진 자들의 논리와 판단이 사회를 지배하는 무시무시한 사회였다. 아무리 SF소설이지만, 이런 SF는 읽으면서 마음이 무거워진다.
하지만 주하의 빨간 머리와 하루의 긍적적 마인드, 주변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거리낌없이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빌리와 레오니는 그 존재만으로도 빛났다. 가만히 보면, 이 아이들 중 어느 누구도 까만 머리카락으로 살고 있는 아이는 없었다.

머리칼이 콩처럼 까만 아이들은 모두 A반이었다. 콩보다 더 검은 머리칼들. 일명 대지의 아이들과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축복받은 학생이었다.(9쪽)

이 사회는 까만 머리여야 온전한 사람 대접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A반임에도 불구하고 까만 머리를 염색으로 가리고 다니는 아이들과 빨간 머리여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 공간을 채우고 있는 아이, 그리고 이런 모든 아이들에게 관심을 받고 있는 흙갈색의 아이까지. 이 아이들은 모두 다르지 않았다. 이게 이 소설을 다 읽고 난 후 든 가장 첫 번째 생각이었다. 염색이 가능하다면 누구나 까만, 콩보다 더 까만 머리카락으로 염색하려들 것 같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여기서 한 가지 희망을 읽었다. 어쩌면, 소설 속 사회에서 더 나아간 미래를 꿈꾸는 아이들은 어른과 반대 방향을 향해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결국 어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거야?"
"응?"
"어른들이 다 결정하잖아."
"우리가 아닌 누군가가 결정하는 거지. 우리를 대신한다고 하지만 전혀 대신하지 못할 사람들이 대표로 정하는 거야."(244쪽)

아이들은 무서울 정도로 정확하고 잘 알고 있다. 아이들의 눈에 비춰진 세상이 사실 가장 정확한 모습일 거라는 생각을 할 때가 종종 있다. 이 경우도 그런 경우. '전혀 대신하지 못할 사람들'의 잘못된 판단이 이 사회를 이렇게 만들어 놓았을 거라는 것. 그런 어른들에게 이 사회를 맡길 수 없다는 것. 그러니 미래는 직접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것. 하루와 주하가 마음을 먹고 결심하게 되는 이 과정이 멋지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이 소설을 읽고 든 두 번째 생각. 소설 속에서 아이들은 대화 속에서 아직 어리다는 말을 자주 한다. 이건 어리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른다가 아니라, 어리기 때문에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읽혔다. 그만큼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주하가 COS라서, 능력이 있으니까 그렇다는 뜻이 아니라, 주하든 하루든, 어느 아이가 되었든간에 이 아이들이 알아챈 자신의 마음의 크기가 이 정도로 크다면 충분히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라는 거다. 이 대목에서 어른들은 반성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주하가 왜 빨간 머리일까. 그리고 5구역에서 발견된 빨간 머리, 노란 머리의 다양한 머리카락 색의 아이들은 또 어떤 의미일까를 생각해 보았고, 그래서 내린 답은 '무지개'. 우리는 무지개를 일곱 색깔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색깔과 색깔 사이의 경계는 불분명하다. 이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저 사람이 편의상 언어적으로 구분해놓은 표현일 뿐. 어찌보면 이 소설 속 경계는 무지개의 경계와 비슷하지 않을까. 사실은 명확히 구획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경계는 모호하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명확히 말할 수 없다. 그건, 색깔이 어느 한쪽 끝에서 반대쪽 다른 끝까지 이어져있다는 뜻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아이들이 만들어나갈 사회는 무지개와 같은 사회일 수 있지 않을까. 다양한 색이 공존하고 하나의 색에서 다른 색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가 섞일 수 있는 사회. 어디까지라는 부분의 차별 없이 누구나 어디에서라도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사회. 그런 사회에 대한 가능성을 이 아이들이 찾은 것은 아닐지.

빠져들어 있었다. 청소년 SF소설만은 아닌 듯싶다. 오히려 어른인 내가 느끼고 깨달은 바가 컸다. 상상 속의 이야기이지만 지금을 살고있는 나에게도 뜨끔하게 만드는 지점이 있었다. 공들여 읽으면 좋을 이야기였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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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여자, 작희 - 교유서가 소설
고은규 지음 / 교유서가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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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행복했습니다. 내 문장이 있어 좋았습니다. 그러니 나를 가엾게 여기지 말아요. 당신이 더 슬퍼질 거 같아 내 마음이 안 좋습니다. 나도......궁금합니다. 당신은 지금, 당신의 문장이 있나요? 그리고 행복한가요?"(294쪽)

행복. 우리가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인생의 주요한 화두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대답의 질문을 '왜 쓰는가'로 보지 않고 '왜 사는가'로 보아도 좋을 대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자신의 것을 빼앗긴 것에 대한 억울함만이라면 굳이 이런 대답이 나올 수가 없을 것이다. 소설이라는 결과물로만 받아들인다면 이 소설을 절반만 이해한 것일 거다. 이 소설은 '미쿠니 주택'이 '미쿠니 아파트'로 바뀐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쓰는 행위를 부정하는 사회와 외부에 대한 처절한 항거일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으며 결연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소설을 읽고 머물게 되는 단어가 있다. 바로 '쓴다'와 '여자'. 분명 여자의 이야기가 맞다. 우리가 익히 짐작할 수 있는 여자가 살아가는 이야기가 맞다. 여자여서 여자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이야기를 포함해서, 꼭 여자여서 여자인 데에서 이유를 찾아야할 필요는 없는 이야기까지 담겨 있었다. 그러다보니 읽으면서 화도 나고 속도 상하고 아프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다행이었고 속시원했고 또 애틋하기도 했다. 여전히 '여자'라는 단어를 통해 들여다봐야했던 과거와 현재가 있었으며, 그 안에서 극복해야 할 숙제들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단지 과거에 묶여있던 이야기가 잠시 현재에 흘러나온 것이 아닌, 여전히 과거에서 현재까지 이어져오는 흐름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야기의 실체가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실체에는 '쓴다'가 있었다. 여전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섬 앞에 작희가 모습을 나타냈던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해봤다. 그저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하고 한을 풀기 위한 목적은 결코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미 중숙과 작희 곁에 And가 있었고, 이 And와 중숙, 작희, 그리고 은섬은 이미 어떤 연결고리 안에서 함께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결국 모두 '쓰는' 존재들이며 이미 그 안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나가기 위해 부단히 외부와 현실에 맞선 싸움을 해나가는 존재들일 것이다. 목표한 바를 이루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한 싸움. 목적 의식에서 비롯된 삶이 아닌 온전히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을 위한 싸움. 그렇기에 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고, 그래서 머리보다 마음으로 그 존재를 먼저 알아챌 수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퇴마 시작일로부터 99일째이며, '작희가'를 제대로 쓰는 첫날이다.(297쪽)

물론, 이 소설 한 권에서 모든 것이 말끔히 해소되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어찌보면 이 모든 것을 인식하고 시작하는 '첫날'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이만큼의 세월이 지났어도 '쓰는 여자'에게 주어진 숙제는 여전하고, 혹은 더 큰 싸움을 준비해야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숙제하기 싫어서, 싸움에 질까봐 여기서 멈출 수는 없는 법이니까. 그래서 '첫날'이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미 '첫날'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오히려 반가워하면서.

이 소설에는 여자가 있고 쓰는 여자가 있고 작희가 있고 글,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은섬이 있고, 은섬이 쓰는 중숙과 작희와 그들의 이야기가 있다.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쓰는 여자, 작희>가 되었다. 이 이야기는 온전히 작희의 이야기이면서 작희의 어머니와 글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은섬으로 이어지는 여자, 쓰는 여자의 이야기이다.

*출판사로부터 가제본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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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루프 창비교육 성장소설 11
박서련 지음 / 창비교육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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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다른 소설도 챙겨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이 소설가는 청소년들과 결이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청소년이 쓴 소설을 읽어서 그런 생각이 들었을 수도. 전체적으로 소설들에서 아이들의 마음이 느껴졌다. 가끔은 맞아! 우리 애들도 그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건 아이들이 읽었을 때 공감이 더 커질 수 있다는 뜻일 거다. 공감이 되지 않으면 쉽게 이야기에 빠져들지 못하는 우리 아이들에게 슬그머니 이 책을 추천해봐도 좋을 것 같다.
3부로 이루어져있는 각 부분마다 작가의 말이 각각 들어가있는 구조가 낯설었다. 마치 각 부의 이야기를 친절하게 추가 설명해주고 있는 선생님의 마음과 닮았다고나 할까. 좋았다. 2-3편씩 묶어놓은 이유를 말해주고 각 작품에 담긴 의미와 소설을 쓰면서의 생각이 담겨 있으니, 소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훨씬 수월했다. 아이들에게는 이런 게 좋다. 긴 호흡으로 책 한 권을 읽기엔 아직 좀이 쑤시는 우리 아이들에게는 중간에 한번 씩 정리해주면서 가는 게 좋다. 그런 면에서 딱, 아이들에게 최적화된 소설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가가 다루는 세계의 범위가 넓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만큼 좋아해>나 <고-백-루-프>는 좋아하는 마음,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관계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누군가의 마음을 통해 어떤 관계가 가능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순간들이 반복되고 또 반복되면서 그 안에서 신중한 선택과 행동이 필요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가시>나 <발톱>도 죽음에 대한 상실과 슬픔에서 다시 세상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관계를 소중하게 다루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보름지구>에 대한 말이 낯설면서도 씁쓸했다. 지구에서 보름달을 보듯 달에서 보름지구를 본다는 것이 어떤 느낌일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보름지구라는 말이 익숙해지는 세상이 오면 어쩌지, 달은 하늘의 달로 올려다보았을 때에야 소원을 빌 수 있는 법인데, 그런 달을 하늘에서 볼 수 없게 된다니. 하늘을 올려다보면 달이 아니라 지구가 보인다면 그 보름지구에 소원을 빌어야 할까. 어떤 소원을 빌면 이루어질 수 있을지, 난감한 마음이 들었다.
<안녕, 장수극장>은 따뜻했고, <솔직한 마음>은 차가웠다. 마을 사람들의 추억과 감정이 작품 전체에 흐르면서 살며시 미소가 지어지는 소설이 <안녕, 장수극장>이었다면, <솔직한 마음>은 내내 인상을 쓰며 읽게 되는 소설이었다. 아이는 온 마을이 함께 키운다는 말처럼, 마을에서 잘 크고 다 큰 것 같은 윤송과 다르게 걸 그룹의 막내는 아직 제대로 크려면 한참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아이를 어떻게 해야 잘 키울 수 있을까, 괜히 내가 고민하게 되기도 했다.

가볍게 읽혔으나 결코 가볍지는 않은 이야기들이었다. 작품들 내면에 우리가 더 생각하고 이야기해봐야하는 주제들이 숨어있었다. 결국 사람 사는 세상의 이야기는 그 안에 문제 의식을 품고 있을 수밖에 없고, 그 문제 의식을 어떤 관점으로 볼 것인가는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겠지. 그 독자의 몫을 우리 아이들에게 한번 돌려봐야겠다. 아이들은 어떤 생각으로 또 다른 이야기를 풀어내 보여줄 것인지, 궁금해졌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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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 캐릭터가 팡팡 북모티콘 만들기 - 독서교육과 디지털리터러시의 만남
최용훈 지음 / (주)학교도서관저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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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블릿에 '이비스 페인트 X'와 'Imgplay' 앱을 다운받았다. 그리고 제작 실습 부분을 꼼꼼하게 따라해보았다. 재밌었다. 그림에 소질이 없어 종이에 혹은 칠판에 그림을 그릴 때에도 성의없는 척 대충 그리고는 슬쩍 넘기곤 했다. 그만큼 표현하고 싶은 걸 다 나타내지 못하는 답답함이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쉽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사진이나 종이의 그림에 레이어를 추가해 덧그리는 건, 생각보다 쉽게 누구나 따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용해 보였고 바로 적용해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알았다. 나보다 아이들이 훨씬 더 잘 하겠다는 걸. 사실, 앱으로 그림을 그리는 아이들을 교실에서 가끔 보곤 했다(대다수의 아이들은 전자기기를 늘 휴대하고 학교생활을 하지 않으므로 종이에 더 많이 그리지만). 아이들이 사용하는 앱이 이거였구나, 손가락과 펜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멋진 작품을 완성해내던 아이들이 떠올랐고, 그 아이들의 솜씨 좋은 손놀림이 많은 시간 연습하고 그려본 결과였다는 것도 알게 됐다. 아이들은 역시 참 대단하구나 싶다.
쉽게 GIF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도 신기했다. 이런 건 전문가나 할 수 있는 거겠지 싶었는데, 이리도 간단히 움직이는 그림을 완성할 수 있다니! 이 책을 가만히 따라가면서 내가 재미있어졌다. 특히 중학교 아이들에게는 수준이 너무 높으면 수업이 어려워진다. 그런 면에서, 이 작업은 합격! 어렵지 않게 이리저리 눌러보고 그려보면서 더 놀랍고 멋진 것들을 아이들이 만들어낼 수 있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기기에 두려움을 갖고 있는 나도 흥미를 갖게 되었다면, 아이들에게 두말이 필요 없을 것 같다.

요새 자주 쓰게 되는 말이 리터러시다. 특히 국어 과목에서는 문해력이 중요하다. 물론 리터러시의 종류는 다양하다. 지금까지는 종이책을 통한 리터러시에 국한지어 생각했었다면, 이제는 미디어, 디지털 리터러시가 국어의 한 자리를 제대로 차지하게 되었다. 특히 매체가 한 영역으로 들어오게 되는 2022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더욱 미디어나 매체에 대해 아이들이 어떻게 접근하고 생산, 소비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리터러시 교육이 매우 중요해졌다. 하지만 문제는, 오히려 학생들의 수준을 교사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 아이들은 저만큼 기술적인 능력이 앞서가고 있는데 정작 교사는 그 절반 정도에라도 도달해 있기는 할지. 내가 정작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니 더욱 이런 책들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다.
물론, 책이 너무 어렵고 고차원적인 수준의 이해가 필요했다면 진작에 접고 포기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 오히려 저학년 아이들도 쉽게 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지점이 있었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었다. 국어에서는 어쩔 수 없이 책을 읽어야한다. 독서는 필수! 독서 후 어떤 활동으로 아이들의 생각을 확장시켜나갈 것인가를 신중히 선택해야 한다. 특히 책읽기를 싫어하는 아이들에게 독서 후 활동은 상대적으로 훨씬 흥미로워야 책에 대한 거부감을 조금이나마 줄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북모티콘'은 참 좋다! 이제 중1 아이들과 조만간 책읽기 수업을 해야 한다. 성장소설을 읽고 주인공의 삶과 자신의 삶을 연관지어 생각해봐야 하는데, 소설 속 주인공의 삶을 북모티콘으로 만들어보면 딱이겠다. 또 책만들기 수업을 진행 중인데, 지금 각자 소설을 써보자고 하고 있는 중이다. 자신이 쓴 소설의 주인공을 직접 북모티콘으로 만들어 북크리에이터로 책을 완성하면 더욱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 한 권으로 하고싶은 수업의 아이디어가 자꾸 떠오른다. 이 책, 참 좋은 책이다!

덧-
솔직히 이기적인 마음으로 서평단 신청을 했다. 수업에 바로 써먹고 싶다는 욕심.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기쁘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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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로, 새벽이 샘터어린이문고 78
허혜란 지음, 안혜란 그림 / 샘터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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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 책을 만났다. 읽으면서 자꾸만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림도 귀여웠고, 내용은 더 귀여웠다(이렇게 말하면 작가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려나~). 과연 새벽이가 어떻게 엄마 뱃속으로 다시 들어갔다는 걸까, 궁금했다. 아~! 읽으면서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마음을 쓸어내렸다. 새벽이도 새벽이가 만난 새벽이도, 참 다행이라고 안심했다. 괜히 내 마음도 몽글몽글해지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이건, 엄마의 마음이기도 하지 않을까 싶다. 나도 내 아이를 낳던 그 때가 문득 떠올랐다.

"미안해, 아가야."
"용서해 주렴."
"너는 아무 잘못이 없단다."
"사랑해, 사랑해."
"살자, 아가야! 우리 같이 살자!"

뱃속에 아기를 품어보았던 사람은 안다. 그 아기에게 온 마음과 힘을 다해 '사랑'을 전하게 된다는 것을. 그리고 아기가 무사히 건강하게 세상으로 나올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는 것을. 나도 아기가 탈없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바라며 울기도 웃기도 했던 그 순간들이 있었다. 지금은 웃으며 떠올릴 수 있는 기억이지만, 당시에는 너무도 초조하고 불안해 제대로 눕지도 잠을 자지도 못했었다. 그런 시간들을 모두 잘 견디고 나온 아기는 쌔근쌔근 편안한 숨을 쉬고 품 안에서 편안히 먹고 자고 쌌다. 그리고 엄마 덩치보다 더 큰 아이로 성장했다. 열세 살의 새벽이처럼.

왕자님 말고, 왕자님의 친구 중 한 명이거나 왕자님의 신임받는 신하가 더 편하겠다. 주인공 말고 조연. 주목받는 것도 불편하고 드러나는 것도 싫다. 그냥 이대로, 여러 사람들 속에 묻혀서 그럭저럭 사는 게 편하다.(9쪽)

1번 자리보다는 2번 자리를 더 선호하고, 의견을 내기보다는 동조해주는 쪽을 택하고, 드러내기보다는 숨으려 노력하는 쪽에 가까웠다. 아마 새벽이처럼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아이들이 많겠지 싶다. 나도 그랬고 나의 아이들도 그렇고, 마주치는 아이들 중 대다수가 이런 마음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물론 이 마음이 잘못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다만 2번 자리에서도, 동조해주면서도, 숨어서도 자신에 대한 단단한 마음과 자존감을 잘 이어나갈 수 있으면 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때가 더 많은 것도 사실이다. 이럴 때, 어떻게하면 좋을까 고민이 되곤 한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어른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되는 지점이 있었다. 바로 모차르트 산부인과 의사 선생님.

"자, 우리 모두 엄마와 아기를 응원해 주자고. 허튼소리 하지 말고, 한숨도 쉬지 마. 생명력이 가득한 음악을 틀어 두고. 산모를 봐. 빠른 속도로 안정을 찾아가고 있잖아. 아기를 지키려는 강한 본능이라고. 다들 아침에 밝은 얼굴로 보자고! 알았어?"(71쪽)

응원해주는 것.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강한 긍정의 믿음으로 있는 힘껏 지켜봐주는 것.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격려하며 나아갈 수 있도록 안내해주는 것. 어쩌면 새벽이 '엄마와 아기에게 생명을 북돋워 주는 좋은 산부인과 의사 아저씨?'라고 꿈을 말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 있지 않을까 싶다.

정말 나는 왕자다. 수지도 정말 공주다. 공주처럼 예쁘고 똑똑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공주다. 다른 아이들도 그렇다. 우리는 모두가 정말로 왕자이고, 공주이다. 우리 엄마도, 이모도, 이모의 배 속에 들어 있는 작은 아기도. 나는 고개를 들어 높고 높은 천장을 보았다. 화려한 조명이 박혀 있었다. 수많은 왕자와 공주를 비춰 주는 불빛들이 일렁거렸다.(102쪽)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살려낸 경험이 있는 새벽이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변화일 것이다. 어두운 물길 속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스스로 주문을 외우고 안간힘을 써봤기 때문에 얼마나 그 과정에서의 자기 자신이 자랑스럽고 기특할까. 존재 자체로서 무척 소중한 한명 한명임을 몸소 깨달을 수 있던 경험이었을 것이다.
새벽이 새벽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고, 그 이유 덕분에 새벽은 당당하게 제 몸을 세우고 세상을 바로 볼 줄 아는 시선과 태도를 배워 갖출 수 있었다. 누군가 그저 대수롭지 않은 꿈이었던 게 아니냐고 딴지를 걸어도, 이미 새벽이 거쳐온 시간은 달라지지 않으므로, 새벽은 새벽으로서 단단해질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또한 대견하고 기특하기만 하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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